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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杜甫) 한시(漢詩) 모음 1-106

수선님 2023. 7. 23. 13:17

두보(杜甫) 한시(漢詩) 모음1

두보(杜甫)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712~770]. 자는 자미(子美), 별호는 소릉(少陵)ㆍ두릉(杜陵). 

이백(李白)이 시선(詩仙)이라고 불리는데 대해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며 이백과 더불어 〘이두(李杜)〙라 병칭되는 중국 최고의 시인.

 

두목(杜牧)이라는 시인과 구별하기 위해 두목을 소두(小杜), 그를 노두(老杜)라고도 부른다.

 

하 남성 공현(鞏縣)에서 초당(初唐)의 시인인 두한(杜閑)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 두심언(杜審言)도 유명한 시인이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낙양(洛陽)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7세 때부터 시를 지어 낙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술을 좋아했고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으며 연장자들과 교류를 즐겼다. 20세를 전후하여 8, 9년간 각 지방을 유람했는데, 처음에 강소 성(江蘇省)과 절강 성(浙江省)을 여행하고 24세에 일단 낙양으로 돌아왔으나 진사 시험에 낙제하고는 다시 여행길에 나서 산동성(山東省)과 하북 성(河北省)을 유랑했다.

 

이때 명산대천을 보고 많은 시를 썼다고 하나 이 시기의 시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29세(740) 때 당시 산동성 연주(兗州)에서 관리로 있던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지은 시가, 남아있는 두보 시 중 가장 초기의 것이다.

 

다음해 산동성에서 돌아와 평생의 반려자였던 부인 양(楊)씨를 맞아들였다.

 

이즈음 그는 벌써 30세나 되었는데도 전도가 열리지 않은 탓인지, 억압당하고 있던 정신이 때로는 대상을 찾아 날카로운 어조의 시로 표현되었다.

 

그는 전대의 시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빈약하고 엉성한 내용을 수식어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참모습을 충실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744년, 낙양에서, 때마침 장안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산동성으로 향하던 이백과 만났다. 이백의 천재적인 풍격을 사모하던 두보는 이백과 함께 양송(梁宋: 지금의 하남성)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

 

여기서 이백 외에 시인 고적(高適)ㆍ잠삼(岑參) 등과도 알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그해 겨울 이백과 헤어진 두보는 강남으로 향했고 그 뒤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746년 두보는 수도인 장안으로 갔으나 그 후 약 10년 동안 관직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계속했다. 두보는 천자가 옛날의 (堯ㆍ舜) 같은 훌륭한 임금이 되어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해 백성을 구원하기를 바라며 정치에 참여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의치 못해 정치가로서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할 수 없는 것을 항상 부끄럽게 여기고 또 초조해 했으며 “즐겨 천하의 대사를 논했지만 이상이 높고 실제적이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장안에서의 두보의 생활은 불우하고 궁핍한 것이었다. 천보(天寶) 13년에는 장마가 심하게 계속되어 기근으로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한때 처자를 봉선현(奉先縣)의 친척집 농가에 맡겼다.

 

다음해 처음으로 금위군(禁衛軍)의 무기고 관리라는 가장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일단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서둘러 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안을 출발해서 도중에 여산(驪山) 기슭에 다다르니 그곳 온천에는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조정의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락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보가 봉선현에 겨우 당도해보니 처자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어린 자식은 굶어죽어 있었다. 이때 두보는 비분강개의 울분과 서글픔을 못 이겨 “부자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그때 지은 장편의 시 〈자경부봉선현영회(自京赴奉先縣詠懷) 오백자〉는 이러한 심정을 강렬하게 읊은 작품이다.

 

755 년 11월 9일 [안사(安史)의 난(755~763)]이 일어나자 두보는 어려운 피난길을 계속했는데 지극히 궁핍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도 늘 부인과 함께 다녔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게 되면 항상 처자의 신상을 염려하는 애정이 넘치는 시를 짓곤 했다.

그러다가 홍수를 만나 가족을 부주 교외의 강촌(羌村)에 남겨두고,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 휘하로 가던 도중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도로 끌려갔다.

 

수 도는 황폐해졌고 반란군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두보는 장안에서 겨우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나날을 보내면서 망국의 비애를 애도하고 가족의 안부를 염려했다. 이 무렵에 지은 시가 유명한 〈춘망(春望)〉ㆍ〈월야(月夜)〉ㆍ〈애왕손(哀王孫)〉ㆍ〈애강두(哀江頭)〉 등이다.

 

757 년 반란군 사이의 내분으로 안녹산이 살해되자 영무(靈武)에 있던 숙종은 장안에서 가까운 봉상(鳳翔)으로 행재소를 옮겼다. 두보가 변장하고 장안을 탈출해서 봉상으로 달려가자. 황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두보를 5월에 좌습유(左拾遺 - 정치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둔 간관(諫官))에 임명했다.

 

이무렵 휴가를 얻어 부주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려행길에서 두보는 많은 걸작시를 남겼다.

그해도 저물어 장안은 관군에 의해 탈환되고 숙종과 상황인 현종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두보도 장안의 궁정에서 좌습유의 관료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반란군은 아직도 중원의 각지를 황폐시키고 있었고 시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758년 5월까지 그는 2년 동안 장안의 조정에 있었으나 그의 의견은 하나도 중시되지 않았고 6월에 화주(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이라는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758 년의 가을에서 겨울 무렵에 낙양으로 가는 길도 뚫렸으므로 오랫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반란군 사사명(史思明)이 안녹산의 아들 안경서(顔慶緖)를 도와 대적하는 바람에, 관군은 크게 패하고 낙양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어 그도 다시 화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10명 가까이 되는 식솔들을 거느린 채 국경에 있는 진주(秦州: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으로 옮겨 4개월 간 머물렀지만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10월에 살기 좋다는 동곡(同谷: 감숙성 성현(成縣))으로 향했다.

그 렇지만 생활은 더욱더 궁해져서 12월 초에 사천 지방의 성도(成都)로 가서 친분이 있던 승려와 친척 두제(杜濟), 그리고 두보에게 누구보다도 큰 후원자가 되어 준 옛 친구인 성도윤(成都尹) 겸 검남(劍南) 서천절도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성도 교외 완화계(浣花溪) 부근에 초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천성[四川省 = 쓰촨 성] 성도[成都 = 청두]에 있는 관광지 두보 초당 

 

여기에서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실로 그의 생애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두보를 간혹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때 엄무로부터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직함을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락한 기간은 2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762년에 엄무가 서울로 소환되고 성도 부근에서 서지도(徐知道)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난을 피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9년에 걸친 안사(安史)의 난은 763년 1월에 끝났으나 이어지는 위구르족과 토번(吐番)의 침입으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소원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원자인 엄무가 죽자 두보는 처자를 이끌고 또다시 표류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추석이 지난 후 운안(雲安: 지금의 운양(雲陽))으로 내려왔다.

 

폐병과 중풍 때문에 요양생활을 했으나 내우외환으로 시국이 점점 더 험악해지자 766년 다시 강을 따라 내려가서 기주(夔州: 사천성(四川省) 봉절현(奉節縣))로 가서 약 2년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두 보는 기주에 온 이래로 2년 동안 430여 수에 이르는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는 전체 시의 7분의 2에 해당한다. 그 시는 점점 율격이 엄격해지고 자구(字句)도 단련되어 정연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에서는 더 이상 이전의 시에 보이던 혹독한 사회비판이라든가 격렬한 분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비장함은 밑바닥에 가라앉고 다만 무거운 우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절실하게 배어 있었다. 장년시절에 이백ㆍ고척 등과 하남성 지방에 놀러갔던 때의 추억, 장안에서의 생활, 안사의 난, 그리고 결국 사천 지방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추억을 시로 읊었다.

767년 3월에는 양서(瀼西)의 초당으로 옮겼다. 기주의 도독(都督) 백무림(柏茂林)의 도움으로 생활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나 두보의 건강은 쇠약해져서 각종 병에 걸렸다. 그럼에도 시작(詩作)은 점점 많아졌다.

그는 산골짜기에 있는 고장의 열악한 기후와 친구도 없는 적막함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768년 정월 중순경 또다시 배를 타고 삼협(三峽)을 내려가 강릉(江陵)으로 갔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이 없었다.

769년 1월에는 악주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에 들어갔다가 다시 담주(潭州)로 가서 약초를 캐서 시장에서 팔아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 즈음의 시는 신세진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들이 많아서 그의 궁핍한 정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770년 겨울 담주에서 악양(岳陽)으로 가는 도중 상수(湘水)의 배 위에서 두보는 조용히 그 고생스럽던 일생을 끝마쳤다. 이때 나이 59세였다.

오 늘날 전해지는 두보의 시는 대략 1,470여 수이다. 그 시를 보면 고난으로 가득 찼던 유랑의 시기에 따라 각각 시풍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다른 시인에게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드문 일이라고 한다. 두보 시는 그의 엄격한 정신을 표현한 격조 높은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실을 묘사하는 수법과 엄격한 성률에 의해 세상일이나 사람의 감정을 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백의 자유분방한 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두보 시의 긴밀하고 엄격한 구성, 특히 율시(律詩)에서는 초당(初唐)에 완성된 금체(今體 =근체近體)) 형식이 두보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보의 고시(古詩)와 악부(樂府)에는 당시 눈앞에 보이던 사회적 부합리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백성들의 고난을 호소한 것이 많다. 이것이야말로 《시경(詩經)》 이래의 풍유(諷諭) 정신을 계승한 것이고 이른바 중국 시의 올바른 전통이다.

백거이(白 居易)와 원진(元稹)이 두보의 시를 존중한 것도 그 풍유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었다. 이백의 시는 육조(六朝)에서 안사의 난 전까지의 낭만정신이 최고로 발휘된 것이고, 두보는 안사의 난 이후의 현실주의적 시풍을 열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의 시는 다음 시대인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 등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민중을 위한 시인으로 널리 존중되고 있다.

사천성[四川省 =  쓰촨 성 ] 성도[成都 = 청두]에 있는 관광지 두보 초당

 

 

 

 

 

 

 

두보(杜甫) 한시(漢詩) 모음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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