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교육문제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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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연년생인 언니가 한 해 빨리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언니를 따라 너무나 학교에 가고 싶었던 여섯 살 어린 동생은 어머니를 졸라 초등학교 부설 병설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여섯 살 아이는 그때부터 난생처음으로 부모가 아닌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약 40년간 학교교육을 경험하고 있다. 그간의 받은 교육 덕분에 중등학교에서 교육을 이끌어가는 교육자가 되었다. 이제는 교육적인 것에 대한 이론과 해석을 내놓는 교육학자가 되어 밥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학교교육의 현실’이라는 연구 주제는 필자를 비롯한 교육 연구자들에게는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학교교육을 의무와 권리로서 경험했고, 누구나 그 자신이 경험한 학교교육의 현실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교육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교육에 대하여 일상 수준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좀 더 나은 해석과 방안을 사회에 들려주기를 바라는 부담스러운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학교교육의 현실’이라는 주제는 쉽게 접근할 수도 있지만 실제 학교교육은 매우 복잡하며 다양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누구도 한마디로 진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냥 진단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각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교육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이 과정에서 사용한 해석의 틀을 밝히거나 사회적으로 심각한 교육문제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명된 것들을 근거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런 방법들과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등학교의 교육 현실에 대하여 진단해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불교적 관점에서 오늘날 학교교육의 현실을 바라보고 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려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오늘날 학교교육의 상황에 약 2,500년 전의 붓다를 불러내고자 한다. 초기불교 대화편에 의하면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붓다에게 귀의하여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다. 이때 붓다는 구체적인 역할을 들며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들보다 앞서가는 자이며, 나는 그들을 돕는 자이며, 그들을 안내하는 자이다. 또한 그들은 나를 본보기로 삼는다.” 이런 붓다는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기대하는 이상적인 교사의 역할과 탁월한 성품을 발휘하는 선생과 같다. 현대 교사들의 귀감으로서 붓다를 학교교육 상황에 불러내 보자. 과연 붓다는 한국의 교육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까?
방황하는 교육주체들
난 1등 같은 것은 싫은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그런 학생은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난 인간인데. 난 친구를 좋아할 수도 있고, 헤어짐에 울 수도 있는 사람인데. 매일 경쟁! 공부! 밖에 모르는 엄마.……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내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떤다. 하지만 사랑하는 우리 엄마이기 때문에. 아, 차라리 미워지면 좋으련만, 난 악의 구렁텅이로 자꾸만 빠져들어 가는 엄마를 구해야만 한다. 내 동생들도 방황에서 꺼내줘야 한다.
이 글은 16세 여중생의 유서가 된 시의 일부이다. 이 시는 1986년 엄마가 원하는 삶과 가치관대로 살기 위해 공부 강박증에 시달리며 두려움과 공포에 떨다가 이를 견디지 못한 한 여중생이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그녀의 마음이다. 실제 이 사건을 모티브로 19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나왔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최근까지 TV 드라마는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거나 의대에 보내기 위한 학부모들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교육을 조명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 영상물은 극성스러운 학부모의 교육열이 문제적 요소이고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 유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볼 때 한국사회에서 자녀의 교육문제는 여전히 삶에서 중대한 관심사임은 분명하다. 교육이라는 주제는 관심만큼이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미와 흥미를 일으키거나 갈등을 고조시키는 사건으로 기능한다. 과연 이런 영화나 드라마들은 학교교육의 모습과 우리 교육의 실상을 얼마나 보여주는 것일까?
드라마에서 더욱 극대화한 극성스러운 교육열은 교육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사회현상에 불과했던 것이 학부모의 ‘극성스러움’으로 인해 ‘문제’가 된 것이다. 힘이 약한 여중생은 엄마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동생마저도 방황하게 만들고 있는 이 심각한 문제를 자신의 죽음으로써 방황을 멈추게 하려고 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교육열의 개념을 정교하게 정의해 온 이종각은 교육열을 부정적인 것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육열이란 자녀의 교육을 지원하려는 부모의 동기 체제이다. 교육열은 자녀가 사회적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더 나은 학력(學歷)을 갖게 하려는 행위로 나타난다.” 부모의 동기 체제는 자녀들의 마음에 맹목적으로 내면화된다. 맹목적으로 동기화된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내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하여 늦은 밤까지 교실에서 공부하느라 지금 당장의 행복을 유예한다. 학부모들이 자녀의 사회경제적 성공이라는 사적(私的) 동기를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이용할 때 학교교육은 무엇을 했을까?
그동안 학교교육은 사회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편승해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간단하게 진단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사회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과거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한 자원과 수단으로 교육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정신은 오늘날 중등학교 교육의 공식적이고 당위적인 교육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실제로 학교교육의 전 과정은 대학입시제도의 내용과 형식에 맞추고 있다고 보고 학교교육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고하였다. 이 연구가 199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하여 이후 학교교육의 문제에 대한 개선 과정과 노력들이 없지 않았다(이후 다음 절에서 다룰 내용이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중등학교 교육은 대학입시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쨌든 학교교육은 자의든 타의든 학부모들의 사적인 욕망을 재생산하고 학생들에게 맹목적인 동기화가 이루어지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다.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데 학교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항변에는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혁규는 이런 입장이 학교교육을 수동적인 관점으로만 본 것이며, 교육은 수요자의 요구대로 모두 들어줘서는 안 되고 사회변혁을 일으키는 진지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교교육이 교육열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작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 재미있는 사고실험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교육열이 급격하게 식어서 경착륙된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학부모, 학생, 학교의 교육관계자들, 국가 모두가 아노미 상황에 빠진다고 예측해 볼 수 있다.
아노미 사태에 빠지게 되는 원인은 교육의 수단적 가치가 저하되거나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의 수단적 가치란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 학부모의 과도한 교육열을 이용한 사교육계의 생계 수단, 무엇보다 학력(學歷)을 통한 사회경제적 성공 기회의 선점 등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가장 심각한 방황과 고통을 직접적으로 겪는 교육 주체는 아마도 학생들일 것이다. 현재까지 우리의 교육열은 연착륙되지 않았지만, 고용 없는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육의 수단적 가치가 발휘되는 시스템에 이상기류가 생겼다. 높은 학력이 좋은 취업이나 사회적 성공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노선이 새롭게 변화된 현실에서 균열을 보이고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장 심각하게 방황하는 학생들은 고미숙이 학교교육의 실상에서 주목했던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학생 부류이다. 이들에게 무엇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가 하고 물으면 좋은 대학과 직장, 큰 아파트 등과 같은 물질적 행복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학생들은 언제부터 이것을 욕망하게 되었는지 행복이 무엇인지 이것들이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하는 태도를 보일 뿐이다. 그들은 권력이 깔아놓은 욕망의 레일 위를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아이들로 보인다. 교육의 수단적 가치가 사라지면 이 학생들은 부모에 의해 맹목적으로 내면화했던 공부에 대한 동인을 잃게 되어 배움의 길에서 이탈하여 방황할 것이다.
한편으로 학교교육 현실에는 방황하는 학생 분류가 이미 존재해 왔다. 1999년 즈음해서 학교붕괴, 교실붕괴론이 공론화되면서 드러난 학교교육 실상이다. 이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관심이 없고 심지어 이전 학생들에게 통했던 교사의 지도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모범생과 우등생과 같은 좋은 이미지에 스스로를 순응시켰던 학생들이 다수였던 학교교육 상황이 달라졌다. 순응하던 학생들의 탈주가 늘어난 것이다. 손우정은 이 탈주 현상에 대하여 학생들이 배우는 목적과 의미를 잃고 수업을 거부하는 현상으로 진단한다. 그는 이 현상이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이제는 초등학교 고학년 교실로 전염되어 확산하고 있음을 학교교육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목도한 바를 밝히고 있다.
사토마나부는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형 학교교육에서 이러한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 발생하는 까닭을 서구 근대 학교교육 모델을 모방하며 압축적인 근대화를 지향하던 학교교육의 가치가 끝났기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배움에 도주하여 방황하는 학생들은 학교에 와서 프롬(E. Fromm)이 진단하는 사회 심리학적 현상인 무력감에 더욱 빠져든다. 자신이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나의 의지로 외부세계나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인식한다. 학교는 이런 학생들을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고, 학생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공기와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무기력과 허무감을 느끼며 학교교육을 그저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교사들이 경험하는 학교교육의 현실은 어떨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전통적으로 인정받았던 권위는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에 공교육 기관으로서 학교라는 제도에서 전문적인 교사를 양성하고 일정한 자격을 부여하는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충원된 교사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획득되는 합리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교과 지식과 그것을 학생들의 학습과 이해 과정으로 실현시키는 실천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통해 인정받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발휘되는 교사의 권위가 있다. 마찬가지로 두 가지 권위 역시 학생, 학부모, 학교 관리자와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정된다.
사회가 경제성장, 자유와 개인주의, 경쟁 등을 중요시하며 변화하기 시작하자, 사회적 관계망도 이들의 원리로 구동된다. 학교교육의 사회적 관계는 이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제도적으로 부여된 교사의 합리적 권위를 전적으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교사의 전문성에서 발휘되는 권위조차 자신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가의 여부 즉, 이해관계에 따라 문제 삼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학생들은 자신의 배움 과정까지 흥정하기 시작했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이 받는 교육내용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를 물어본다. 또한 대학입시에 유리한 학교 생활기록부 작성을 위해 학교교육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망조차 효율성의 원리로 구동되고 있다. 학교가 마치 거대한 소비시장이 된 것 같다.
학교 교사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학교교육 현장을 관찰하듯 이야기하는 엄기호는 교사들이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앞서 균열되기 시작한 학교교육 생태계는 그의 관찰에서 이상 증후들이 발견된다. 학교교육의 현실은 이제 지식 습득의 장, 계몽의 장, 신분 상승의 도구,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나아가 다양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폭넓은 경험으로써 성장을 위한 삶의 공간 기능도 상실하고 있다. 지금 학교는 군대보다 더 동질성으로 뭉친 배타적 공간이 되어 타자성과 단절하거나 적대하는 곳이다.
이런 학교에서 교사들은 수업이 잘 안되는 것을 넘어서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학생들과 교사의 관계는 무관한 관계, 공모 관계, 적대적 관계 사이를 넘나드는 중이다. 교사들은 자신이 겪는 현장의 혼돈과 곤경을 동료들과 서로 공유하고 경험하면 이를 해결할 방안이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같은 학교의 동료 교사들이 있는 공간은 냉소와 침묵만 흐른다. 소통과 나눔이 점점 어려워지는 개인주의적이고 고립적인 교직문화가 심화되고 있다. 교육적 만남이 학교교육 현장에서 기피되고 대신에 자기 단속의 문화가 자리 잡았다. 즉 교사,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와 되도록 부딪치지 않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며 형식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변화하는 학교교육
교육부는 방황하고 있는 학교교육 주체들이 겪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학교교육 정상화로 행복한 학교 구현”이라는 슬로건이 걸렸다. 2013년 4월 30일 공교육정상화촉진특별법안 발의를 시작으로 학교교육 정상화는 이제 교육정책의 핵심과제가 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제시하는 정상화라는 단어의 의미는 정상적인 상태가 됨을 뜻한다. 정부가 상정하고 있는 정상적인 상태의 학교교육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꿈과 끼를 키울 수 있도록 하며, 이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인성교육, 수업 개선 및 진로교육을 강화하고, 학급당 학생 수 감축 등 교육여건과 문화를 개선하고 제도 정비를 추진하였다. 인성교육 강화, 수업 개선, 학급당 학생 수 감축 등은 오래된 교육개혁의 미래였다.
학교교육의 현실을 표면적으로 달라지도록 이른 시간 내에 바꾼 것은 중학교의 ‘자유학기제(년)’와 고등학교의 ‘고교학점제’이다. 이것은 명목상으로 존재하던 진로교육을 새로운 교육정책과 제도로써 현실을 개선하는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자유학기제(년)는 2013년부터 연구시범학교를 시작으로 2016년부터 전국의 중학교에서 2015 개정 교육과정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자유학기제는 시험 없이 학생 참여형 수업과 다양한 진로 탐색 프로그램으로 1학기를 운영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현장의 공감대와 실효성을 얻었다. 이를 내실화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교육부는 2018년부터 희망하는 중학교를 대상으로 기간을 확대하여 중학교 1학년들은 자유학년제를 실시하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교육부가 강도 높은 교육개혁을 위한 로드맵을 제시한 이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교육제도이다. 고교학점제는 2018년부터 연구시범학교를 시작으로 2022년 전국의 고등학교에 시행하려고 했으나 그 시기를 2025년으로 연기하였다. 고교학점제란 진로에 따라 다양한 과목을 선택 이수하고, 누적 학점이 기준에 도달할 경우 졸업을 인정받는 교육과정 이수 운영제도이다. 학점제의 도입 목적은 입시와 수능에 종속되어 획일적 교육과정 운영과 서열화하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고교교육의 근본적인 혁신을 일으키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대입제도 개혁과의 연결고리이자 고등학교 학교교육의 실제적인 교육과정 운영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방황하고 있는 교육 주체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교육부는 새로운 교육정책을 내놓고 자유학기제와 고교학점제와 같은 교육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실행하였다. 이를 통해 도달하려는 목표는 학교교육의 정상화와 교육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교육은 이들 교육제도의 영향력으로 겉으로 보이는 양상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우리의 방황과 두려움을 멈추고 배움과 가르침이 행복한 학교교육을 구현해줄 수 있을까? 학교교육이 정상화되어 교육 본연의 기능을 회복한 미래의 학교교육의 현실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현실화되려면 사회문화적으로 더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학력과 무관하게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풍토가 마련되어야 하고 동시에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가 해소되고 출세 지향의 일원적인 가치관을 다원화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제도 개혁만으로 불가능하다. 궁극적으로 제도와 풍토를 만들어내는 우리 내면과 존재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타자와 세상을 대하는 우리 마음과 우리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학교교육의 상황에 붓다를 불러낸다면 붓다는 우리에게 어떤 진단과 처방을 내릴까?
불교에서 배우는 학교교육의 지혜
교육열 과잉을 보이는 학부모와 이를 비판하며 저항하는 교사이든 아니면 이에 순응하는 학교와 교사들 모두 공통적으로 내 아이가 또는 나의 학생이 ‘잘 살기’를 바라며 교육을 시킨다. 어쨌든 교육은 그들이 ‘잘 사는 삶’의 길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잘 사는 삶은 정말 어떻게 사는 것일까? 도대체 학생들은 어떤 진로로 나아가야만 잘 사는 삶에 이를 수 있을까?
겉으로 모두 동의하는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 속에는 심지어 나부터 혼자만 입신양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있다. 붓다는 우리의 각자 마음을 구동하고 있는 끝없는 욕망의 갈애(渴愛)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부모 세대가 품었던 이 마음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면서 이렇게 상속한 마음이 정말로 자녀들의 삶을 잘 살게 하는 것인지 붓다는 학부모들에게 반문할 것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할 것이다. ‘당신은 대물림하고 상속하는 그 마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욕망하며 상속하려고 하는가?’ 붓다는 먼저 이런 질문으로 지나친 교육열로 사회문제를 대대로 양산하는 학부모들과 그 욕망의 레일 위를 맹목적으로 질주하고 있는 학생들을 멈추어 세울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38번째 《거대한 갈애의 소멸에 관한 가르침》에 담긴 붓다의 대화편을 살펴보자. 어부의 아들 수행승 사띠는 붓다의 핵심 가르침에 해당하는 무아(anattan)와 연기법(paṭcca samu-ppanna dhamma)에 대한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다. 다른 수행승들에 의해 확인받고 다시 질문을 받고 근거를 추궁받지만 그는 자신의 견해에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또한 사띠는 잘못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떠벌리고 다녔다. 다른 수행승들로부터 이 상황에 대해 듣게 된 붓다는 사띠를 불러 직접 그의 견해를 확인한다. 그 후 다음과 같은 대화로써 가르침을 펼친다.
“세존이여! 그렇습니다. 저는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1. 그것은 이 식(viññāṇa)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띠여! 저 식을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여! 2. 이것은 바로 말하는 그것이고, 느끼는 그것이니, 그것이 여기저기서 좋고 나쁜 행위의 결과를 경험합니다.”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로다. 도대체 누구로부터 나에 의해서 그와 같은 가르침이 설해졌다고 알고 있는가? 어리석은 자여! 나에 의해서 수많은 방편을 통해서 3. 조건에 의지하면서 일어나는 것이 식이며, 조건이 없이는 식의 발생도 없다고 말해지지 않았던가.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잘못된 견해를 지닌 자신으로 인해, 우리(우리의 가르침)를 잘못 전달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많은 부덕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참으로 그대에게 오랫동안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존재할 것이다.”(이후 인용에서 강조, 밑줄, 번호는 필자)
위 인용문의 1과 2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사띠는 상주론(常住論)에 빠졌다. 상주론은 자기동일성을 지닌 주체로서의 식(혹은 마음)이 영원히 변화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생겨난 것이며 생겨난 것은 3과 같이 조건에 의지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조건에 의존하여 함께 생겨난 것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연기의 이치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무아이다. 무아와 연기의 이치는 붓다에 의해 반복적으로 많은 방편을 통해서 가르쳐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띠는 평소에 붓다가 가르친 내용을 자신의 잘못된 집착 때문에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잘못된 견해를 지닌 사띠는 자신으로 인해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모두 해롭게 하고 괴롭게 만든다. 이를 계기로 붓다는 《38경》에서 무아와 연기법의 가르침을 다시 펼치게 된다.
사띠의 모습은 과도한 교육열을 지닌 오늘날의 학부모와 유사하다.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좋은 삶’에 대한 집착된 견해가 있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를 경험한 부모 세대는 그 경험을 통해 강화된 좋은 삶에 대한 어떤 고정된 상(想)을 만들었다. 고정된 상으로서 좋은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사회적 명예와 지위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 세대에도 통했으니 자식이 살아갈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라 여기며 이 견해에 집착한다. 집착된 견해는 학부모의 본래 마음과 다르게 오염된 마음이 되어 오히려 자녀를 자살로써 해치고 괴롭게 만든다. 부모 역시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낀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부모들은 교육에 과도하게 투자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잘 살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는 맹목적인 생존력을 길러주고자 애쓴다. 이 믿음에 집착하여 균열이 생길 때 그들은 다시 괴로움에 빠진다.
우리에게 잘못된 견해와 이에 대한 집착과 이것으로 인한 괴로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모든 것은 조건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연기의 이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견해뿐만 아니라 욕심, 불안함, 괴로움과 같은 심리적인 부분까지 포함하여 일상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산다. 이런 당연하다는 사유 방식은 ‘왜’라는 물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성찰의 길을 막는 가장 큰 장애이다. 이 장애는 성찰함이 없는 중생의 삶을 반복하게 하는 동력이자 원인이다. 이 악순환은 앞서 제시한 사띠의 어리석음이 미칠 영향에 대하여 거듭 강조한 붓다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는 당연한 사고방식과 세상에 대한 욕심, 불안함 그리고 괴로움의 윤회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이때 특별한 방법이 등장한다. 그 방법은 붓다 자신이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를 성찰하며 자신의 내러티브(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다음 맛지마 니까야 4번째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을 살펴보자.
“바라문이여, 내가 아직 깨닫기 전에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새김을 확립하고 이와 같이 ‘한적한 숲의 숲속 외딴 처소는 견디기 어렵고 멀리 여읨을 실천하기 어렵고 멀리 여읨을 즐기기 어렵다. 생각하건대 숲은 집중하지 않으면 수행승의 마음을 빼앗아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지낼 때 맹수가 접근하고 공작새가 나뭇조각을 떨어뜨리고 바람이 낙엽더미를 흩날려 보냈습니다. 그때 나는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라문이여, 마침 나에게 A. ‘왜 내가 반드시 두려움을 기대해야 하는가? B. 여실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세로 그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온다면, 여실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세로 그 두려움과 공포를 제거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바라문이여, 내가 걷고 있을 때(이후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동주좌와를 반복) 두려움과 공포가 다가온다면, 나는 걸으면서 그 두려움과 공포를 제거할 때까지 서거나 앉거나 눕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붓다 자신도 두려움에 속박되어 있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A와 같이 ‘왜 내가 반드시 두려움을 기대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품는 것에서부터 불교의 철학 함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게 여겼던 두려움에 대하여 B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우리는 두려움이나 견해의 발생 과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어야만 하는 철학 함의 자세는 ‘여실하게 있는 그대로’이다. 이것은 주로 한역 경전에서 ‘여법(如法)하게’로 번역된다. 이때의 법이 앞서 살펴본 사띠가 잘못 이해한 연기법이다.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의 이치를 철학 함의 원리로 삼아 위의 붓다처럼 열정적으로 수행할 때 두려움과 견해의 발생과정이 밝혀진다. 이 수행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과 견해에 대한 잘못된 집착의 근거를 없앨 수 있다. 집착이 사라지면 모든 견해와 두려움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져 편안한 행복감이 찾아든다.
불교는 모든 생겨난 것들의 무상함을 말한다. 현대교육은 개인의 견고한 자아정체성을 찾아주어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역량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견고한 자아조차 조건에 의해 연기된 것에 불과하다는 무아론을 제안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교가 허무주의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 붓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것들에 대한 생각 자체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것의 조건과 결과인 연기적 관계에 집중하라는 것뿐이다. 이로써 우리는 생각의 내용에 맹목적으로 속지 않게 되고 속지 않음으로 매이지 않고 매이지 않으므로 자유로워진다.
붓다의 시절에도 오늘날 학부모와 같이 부와 명성을 누리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견해를 가진 부모가 있었다. 붓다의 출가를 만류하던 숫도다나왕도 그러했지만 맛지마 니까야 82번째 《랏타빨라의 경》에 등장하는 랏타빨라의 부모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랏타빨라는 초기불교가 펼쳐진 그 당시 꾸루국의 한 시에서 부유한 대신의 아들로 태어나 아주 유복하게 자라 청년이 되었다. 때마침 붓다가 이 도시를 방문하여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가르침에 대하여 설법을 하였다. 이 가르침을 듣고 흥미를 느낀 랏타빨라는 청정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출가를 결심하여 붓다에게 찾아온다. 하지만, 붓다는 부모에게 출가에 대한 허락을 받고 오라고 돌려보낸다.
이 대화편의 대부분은 부모와 친구들에 의해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나아가려는 랏타빨라의 출가를 만류하는 내용이 차지하고 있다. 부모와 친구들은 모두 사랑스러운 존재인 랏타빨라가 안락하게 살고 어떠한 괴로움도 모른 채 살기를 바란다. 부모는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면서 한편으로 공덕을 쌓는 삶을 살기를 바라며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부모와 사회의 다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한 상은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랏타빨라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부모와 의견 대립을 벌인다. 랏타빨라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부모의 편에서 그를 회유하다가 다시 이를 중재한다. 이때 친구들은 죽을 각오를 한 랏타빨라의 강경한 출가 의지를 파악하고는 랏타빨라의 부모에게 출가하더라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와 함께 만약 랏타빨라가 출가한 것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그는 반드시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며 부모를 설득한다. 이에 부모는 랏타빨라에게 출가 이후에 반드시 부모를 방문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출가를 허락한다. 출가 후 깨달음을 성취한 존자가 된 랏타빨라는 약속대로 부모를 보러 집으로 온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부모는 많은 금화와 재산을 쌓아두고 아름답게 치장한 그의 부인들을 내세워 랏타빨라를 다음과 같이 유인한다. “배움을 버리고 환속하여 재산을 향유하고 또한 공덕을 쌓아라.” 그러나 존자 랏타빨라는 아버지에게 금화를 갠지스강에 버리라고 말하며, ‘그것을 조건으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고 조언한다.
존자 랏타빨라는 붓다에게 귀의 출가하여 무엇을 보고 듣고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 그가 목숨을 걸고 선택한 삶은 어떤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긴 좋은 삶의 흐름과는 반대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나아간 그는 붓다로부터 어떤 배움을 얻었는가?
내가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보건대 어리석어 재산을 얻어도 보시하지 않으니 탐욕스러워 재물을 쌓아두고 점점 더 감각적 쾌락을 열망합니다. 왕은 폭력으로 땅을 정복하고 바다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를 다스리며, 바다의 이쪽에 만족하지 않고 바다의 저쪽마저도 갖기를 원합니다. 왕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갈애를 떨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 불완전한 채로 몸을 버리니, 세상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 재산은 버려지고, 한 벌 수의만 입혀지고 불꼬챙이에 찔리며 불태워지니 죽어 가는 자에게는 친족도 벗들도 친구들도 피난처가 되지 않습니다. 상속자가 그 재산을 가지고 가고 사람은 그 행위를 따라서 저세상으로 가니 죽은 자에게 재산이 따라다니지 않으니 처자도 재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과 만나고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재산보다 탁월하고 지혜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묶임에서 위험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했습니다.
랏타빨라가 위와 같은 긴 경구의 시를 읊으면서 이 대화편은 끝난다. 이 시에는 랏타빨라의 마음이 지향하고 구체적인 행위로 옮긴 꿈, 배움, 인생관, 가치관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부모를 비롯하여 세상의 주류는 부와 명예와 같은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며 고통을 모르고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위의 밑줄 친 문장과 같이 그 쾌락에 강력하게 묶이는 욕망과 그 위험을 ‘여실하게 있는 그대로’ 보았다. 이제 학교교육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기 위한 삶이 쾌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묶이는 위험이 있다는 점을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성공을 얻는 결과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공에 이르기 위해서 겪게 되는 많은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과 괴로움들도 함께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욕망과 괴로움이 어떻게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지 자신의 심리구조를 파악하여 이를 적절히 지혜롭게 다룰 수 있는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랏타빨라 대화편은 오늘날 학교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에서 탈주와 질주를 일삼고 있는 모든 학생에게 필요한 공부와 배움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랏타빨라의 배움의 자세를 다시 한번 주목해보자. 이것은 먼저 자신의 관심과 재미를 관찰하고 이것이 어떤 대상(사람, 가르침, 물질)과 만났을 때 일어나는 조건 발생의 연기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자세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붓다와 같은 선생이 이끄는 바른 가르침에 대한 확신과 강한 의지로 추동된 행위의 실천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탁월하게 만들었다. 이루진 못한 자신의 삶을 시로 담았던 16세 여중생도 자신의 관심과 재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한 랏타빨라처럼 탁월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면서 살고 싶지 않았을까. 《랏타빨라 경》은 오늘날 학교교육 상황에서 비극이나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삶의 길을 보여준다.
나가며
이 글은 오늘날 학교교육의 현실을 진단하는 작업으로 출발했다. 교육의 주체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학교교육의 실제 상황은 맹목적인 욕망이 삶을 추동하거나 반대로 해태나 혼침이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성적이나 입시 위주의 경쟁을 통해서 사회의 경쟁력을 키우는 학교교육에서 우리 모두는 방황하고 있다. 이 방황 속의 혼란과 괴로움을 끝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면서 과거에 했던 방식을 집착하여 헛된 희망을 구하고 또 방황과 혼란의 삶을 반복하며 산다.
붓다는 이런 학교교육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우리 삶에서 진정성과 관계성을 회복하라고 진단한다. 붓다가 제안하는 학교교육이 정상화된 상태와 본래 기능을 회복한 상황은 누구나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지혜롭고 행복한 존재로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과 관련된 진정성과 관계성의 회복은 자유학기제와 고교학점제와 같은 제도 개혁만으로 변화 불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타자와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진 존재인가에 따라 그 변화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민주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공공성이 점점 더 결여된 채 살아가는 오늘날 개인들은 이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자신의 심리적 동기와 행위 그리고 그 변화를 스스로 마주하여 그 지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복잡한 정신적, 감성적 구조물을 갖게 되었는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유형에 대하여 탐구하고 성찰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우리와 나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우리와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관찰하고 성찰하는 공부와 배움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초기불교 대화편에서 붓다가 다양한 방편을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쳐준 연기적 통찰이다. 이 앎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가’와 같은 자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배움과 가르침이 오가는 학교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
신희정 fusco@naver.com
경상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중등학교 도덕교사로 살고 있다.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에서 〈초기불교 수행법의 도덕교육적 의의〉로 석사학위를, 〈초기경전에 나타난 ‘붓다 대화법’의 도덕교육적 함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 도덕교육론을 연구하고 이를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데 관심을 가진 교육실천가이다. 창원중앙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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