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록(馬祖錄)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 이야기>

수선님 2024. 1. 14. 13:05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 이야기>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는 당나라시대 육조 혜능(慧能) 대사의 제자인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러니까 육조 혜능 대사의 손제자뻘인 것이다. 사천성(四川省) 한주(漢州) 출신으로 속성은 마(馬), 이름은 도일(道一). 원래는 마도일(馬道一)인데, 새로운 남종선의 조사가 됐기 때문에, 마조(馬祖)라는 성으로 친숙하다.

육조 혜능 대사가 남악 회양에게 말하기를,

“인도의 반야다라(달마의 스승, 제27대 조사)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밑에서 한 마리 말이 나와 천하의 사람들을 밟아 죽일 것이라고 했다.”라고 했다는데, 아마 마조 도일 선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붓다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도인이라 일컬어지는 마조 문하에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입실제자만도 139명인데, 그들 모두가 일방(一方)의 종장(宗匠)이 됐다. 그 중에서도 80여명이 특히 준수했다.

특히 백장 회해(百丈悔海), 남전 보원(南泉普願), 대주 혜해(大珠慧海), 서장 지장(西堂智藏), 대매 법상(大梅法常),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비롯한 80여명의 선지식이 배출됐다. 그리고 대개 한국선(禪)도 마조 선의 맥을 이어, 그 영향 아래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마조의 선법을 홍주종(洪州宗)이라 한다. 홍주종의 종명은 마조가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오래 주석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조 도일 선사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의 급소를 찌르는데 결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화두를 남겼다. 뿐만 아니라 조사선(祖師禪)을 완성시켜 중국 선종 황금기를 연 뛰어난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조어록(馬祖語錄)>에는 천금 같은 선문답의 일화가 전해온다. 그리고 <마조어록>을 비롯해서 제자인 백장(百丈) 및 그의 제자 황벽(黃壁), 그 제자 임제(臨濟)의 것과 함께 <마조사가록(馬祖四家錄)>이라고 한다.

어느 날 마조 선사는 숲속을 산책할 때, 산골짝이 평탄한 것을 보고 시자를 향해, “이 늙은 몸이 다음 달이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산책에서 돌아와 얼마 안 돼서 병이 났다. 원주(院主)가 문병을 와서 “기분은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마조 선사의 답이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었다.

<불명경(佛名經)>이라는 경에 따르면, 일면불은 수명이 1800세, 월면불은 수명이 일일일야(一日一夜 - 하루 낮과 밤)밖에 안 된다. 이 말은 병이 나아 1800년을 살아도 좋고, 병이 악화돼 ‘밤새 안녕!’ 해도 좋다는 뜻이다. ‘늙은이가 살만큼 살았으니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다.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이다. 간화선은 이때 왜 마조 선사가 그런 답을 했는가를 문제로 제시한다. 이것이 화두다.

이는 죽음을 초탈한 생사일여의 경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가꾸어온 노 선사의 자신감이 들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도 과연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을 만큼’ 자신 있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화두의 핵심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아무렇지 않게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하루밖에 못 사는 월면불이나 1800년을 사는 일면불이나 다 같다. 삶이나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초탈한 경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목욕을 하고 결가부좌한 채로 입멸했다. 당의 헌종(憲宗)은 대적선사(大寂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마조 선사는 위대한 교육자이고, 선(禪)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눈 밝은 선지식이었다. 그의 일언일구(一言一句)에 의해 기존의 가치는 무너지고 완고한 인식의 틀이 깨어져버렸다. 중국 선종에서는 반야다라 조사의 예언처럼 그를 천하 사람을 답살(踏殺)하는 망아지라고 평가했다.

그는 경전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되풀이 되는 이상적인 인격인 부처나 여래(如來)보다는 바로 눈앞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을 조사(祖師)라고 했고, 미완의 여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불성(佛性)이니 여래장(如來藏), 진여자성(眞如自性)이란 추상적 언어를 평상심(平常心)으로 바꾸어 선을 생활의 종교로 정착시켰다.

‘마음을 부처’라고 깨달음의 틀을 완성시킨 분이 마조 선사이다. 자심시불(自心是佛),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부처라고 했으며,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선언한 분도 마조 선사이다.

무엇을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하는가?

꾸밈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함과 버림이 없고, 한결같아서 끊임이 없는 마음이라고 했다. 도심(道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순수한 마음이 곧 도(道)라는 가르침이다.

마조 선사가 말한 평상심이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고 있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쓰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도심(道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의 청정한 마음이 곧 도(道)요, 깨달음이라는 가르침이다.

세상 사람은 도(道)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도란 바로 범부가 일상생활을 하는 그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란 바로 범부가 일상생활 하는 그 때 묻은 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평상심이 진리다.”라고 하는 이 말은 중국인 특유의 현실 긍정적 사고, 모든 철학이나 사상을 현실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중국인들은 인도 사람들처럼 철학적 사유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이나 사물을 떠난 이해를 싫어했다. 유학의 교과서 중,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을 바탕으로 앎을 지극히 하는 것)가 바로 중국인의 사유행태를 대표하는 말이다.

도 따로 있고, 평상심이 따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수행이 따로 있고 평상시의 생활이 따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참으로 수행이 잘 된 사람은 평상시의 생활에 수행의 공덕이 나타나는 법이어야 한다. 수행할 때는 열심인 사람이 생활할 땐 게으름을 피우면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삶이다.

마조 선사의 선(禪)에서 불심(佛心), 즉 깨달은 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 평상심(平常心)이다. 평상심이라 하면 무언가 특별한 마음이 아니라 평상의 마음, 즉 일상적으로 매순간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평상심이 바로 도(道)라고 하면 일상의 매 순간순간의 마음 그대로가 모두 도(道)라는 것으로 이른바 일체개진(一切皆眞)이라는 뜻과 같다.

그래서 마조 선사는 다시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누움에 있어서 때에 응해 사물을 접하는 것이 모두 도(道)이다.”라고 하고, 또 “도(道)는 곧 법계(法界)인데 무궁한 작용이 모두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처럼 평상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모두 도(道)라고 하면서도 또 평상심의 특징으로서 “무조작(無造作), 무시비(無是非), 무취사(無取捨), 무단상(無斷常), 무범성(無凡聖)”을 말했는데, 이 점에서 마조 선사가 말한 평상심은 범부의 때 묻은 일상적 마음은 아님이 분명하다.

즉, 깨달음을 통해 일원적 근원(一元的根源)에로의 반본회귀(返本回歸-본래의 순일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를 거치지 않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아닌, 범부들의 일상적 마음이 그대로 평상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통속적인 평상심이란 갈등과 번민이 섞여 있는 마음, 온갖 욕망과 번뇌가 어우러진 마음이며, 탐욕과 성냄이 함께 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물론 사랑하고 자비로운 마음도 평상심의 한 단면이다. 이와 같이 통속적인 평상심이란 선과 악이 공존하며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섞인 마음이다. 곧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뒤엉킨 마음이 통속적인 평상심이다.

마조 선사가 말한 평상심은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작(造作)하고 시비(是非)하고 취사(取捨)하고 분별(分別)하는 것이야말로 중생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마조 선사가 말하는 평상심은 이와 같은 조작, 시비, 취사, 분별이 없는 마음을 말한다.

즉, 분별하는 이원적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진일원(眞一元)의 부처님 마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상심이란 옷 입고, 밥 먹고, 차 마시는 일상생활의 중생들이 발휘하는 분별심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불ㆍ보살의 마음,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한다.

그래서 마조 선사의 수증관(修證觀-닦아서 깨닫는 방법)은,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道不用修],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고 했다.

마조 선사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동기가 있다. 마조 선사와 그의 스승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와에 얽힌 ‘마전성경(磨磚成鏡)’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남악 회양 선사는 바로 6조 혜능 대사의 직제자이다. 혜능 대사야말로 자재로운 좌선을 강조하며, 선(禪)을 동적인 세계로 이끈 분이다.

마전성경(磨磚成鏡)을 마전작경(磨磚作鏡)이라고도 하는데,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는 말이다.

남악 회양 선사 밑에서 수행하던 시절, 마조는 항상 좌선하는 것만을 고집해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이에 회양 선사가 하루는 좌선 중인 마조에게 말을 건넸다.

“수좌는 좌선해 무엇을 하려는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고 한참 후 회양 선사는 암자 앞에서 벽돌을 하나 집어 와서 마조 옆에서 묵묵히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한참 정진을 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여쭈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될 수 있다면 참선해서 부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조롱 섞인 가르침이다. 회양은 동안거(冬安居) 하안거(夏安居)라든지 부처가 되려는 염을 세우고 선방에 들어앉아 치열하게 정진하는 이런 노력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좌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앉아 있어야 한다는 그 자리에 속박되는 좌선을 비판한 것이다. 남악은 혜능 대사에게 직접 배웠기에 수행은 자재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남악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선(禪)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네.”

마조는 여기에서 크게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좌선을 고집하던 생각을 버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가운데서 일여(一如)하게 화두를 참구해 순일(純一)을 이루어서 마침내 크게 깨쳤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예화 속에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는 것을 수혹(修惑)이라 한다. 벽돌을 갈면 언젠가는 거울이 될 것이라는, 그런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것을 추구하는 망상, 집착, 착각이 수혹이다. 무조건 닦으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도 수혹이다.

위 예화에서 마조가 닦기만 하면 부처가 될 것이라는 착각 - 수혹에 빠진 것을 남악 선사가 벽돌을 가는 시늉을 하며 깨닫게 한 것이다. 마조의 이야기를 담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이다. 남종 선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마조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조 선사는 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生死)의 마음이 있어 조작하고 취향에 따르게 되니 이것이 오염이다. 만약 곧바로 도에 합하고자 한다면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임을 알라고 했다.

마조 선사는 「도불용수 단막오염(道不用修 但莫汚染)」이라 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더럽히지만 말라’는 초기 조사선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를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는 좌선을 열심히 하고 앉아 있는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에게 벽돌을 가는 비유와 소가 끄는 수레의 비유를 통해 설했다.

“이 공부는 마음공부지 몸의 공부가 아니다. 마음공부는 애써 좌선만을 고집할 것도 없고, 염불이나 진언이나, 특정한 수행법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마음으로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방법이나, 앉는 방식, 수행법,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니 특정한 모습을 오래 취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참된 이치를 모르고 오로지 앉아서 좌선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회양의 가르침 덕분에 깨달음을 얻고, 10년 동안 회양 선사를 모시면서 마조의 깨달음은 더욱 깊어 갔다. 이후 마조는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더럽히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더럽힌다는 것은 곧 분별심으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조작과 추구가 끝나지 않는 이상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그 모든 추구와 조작이 완전히 쉬어질 때 문득 그것은 드러난다.

도는 거창하고 위대하고 신비로운 어떤 곳에 있지 않다. 평상심이 그대로 도다. 조작하지 않는 지금 이대로의 마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무분별의 상태, 취하고 버리지 않는 할 일 없는 무위의 상태다. 그 자리는 항상 하거나 끊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범부와 성인이 따로 나뉘지도 않는 참된 불이법의 자리다. 범부와 성인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참된 보살이 아니다.

이것과 저것 중에 어느 하나 속에 마음,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모든 것이 똑같은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곧 만물의 근원이다. 진리 아닌 곳은 어디에도 없다. 진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곳에는 단 한 시도 발을 내디딜 수조차 없다. 서 있는 바로 이 자리가 곧 바른 진리요 자신의 본바탕이다. 모든 것이 전부 똑같이 불이법으로서 둘이 아닌 불법이고 해탈이다. 이 자리에서는 어느 하나 소외되고 차별되는 것이 없다. 일체법이 그대로 불법이다.

그리고 어느 날 마조 선사는 대중을 향해 “여러분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이 부처(自心是佛)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달마 대사가 남전축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상승일심(上乘一心)의 법을 전하니 이는 그대들로 하여금 개오(開悟)케 함이니라.”라고 했다.

또한 <능가경(楞伽經)>의 “불어심(佛語心)으로 마루[宗]를 삼고 무문(無門)으로 법문(法門)을 삼는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여러분들은 도를 구함에 있어 마음 밖에서 구하면 안 된다. 마음 밖에 부처는 없으며, 부처 밖에 또한 마음도 없다. 나의 마음 밖에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으며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

삼계(三界)는 오직 이 일심(一心)뿐이다. 나의 마음 밖에 하나의 사물, 하나의 티끌조차 있지 않다. 이 마음 밖의 모든 존재는 다 일심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면 움직이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을 입거나 음식을 먹거나 매사에 성태(聖胎-타고난 본성, 불성)를 잘 함양해 심신이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했다.

그리하여 마조 선사는 항상 즉심시불(卽心是佛)을 설했다.

대매 법상(大梅法常, 741-808)은 명주(明州) 출신으로 휘호는 법상(法常)이며 형주 옥천사에서 출가했다. 계를 받은 후 수많은 경전을 공부했으며, 이윽고 크고 작은 경론을 강의했다. 그러다가 보니 지식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그의 강의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났다. 그러나 스스로 위화감에 깊이 번민하다가 드디어 도를 찾아 널리 유행에 나섰다. 마침 마조 선사가 수행승을 지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매는 곧 그에게 갔다.

대매가 하루는 마조 선사께 묻기를,

"어떤 것이 불(佛)입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답하기를,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했다.

“그것을 어떻게 체득합니까?”

“빈틈없이 지켜나가야 한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또한 그것이다.”

“달마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달마에게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는 말입니까?”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을 간파하라!”

마조 선사의 이 말에 대매는 비로소 심오한 뜻을 깨달았다. 그는 곧 석장을 짚어가며 구름이 걸려 있는 대매산(大梅山)에 올랐다.

대매 법상은 아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스님이었는데, 마조 선사에게서 ‘즉심시불’이라는 법문을 들은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알아 봤더니, 대매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마조 선가가 시자를 보내서, 그 사람(대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 시자가 가보니까 거기서 혼자 살고 있는데, 그 심부름 간, 시자가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고 하니까,

“아 나는 전에 마조 선사에게 ‘즉심시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뭐 그걸로 내 공부는 다 됐다 생각하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시자가 있다가 아! 그건 이제 유행이 지나갔고, 요즘 마조 선사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을 말하고 계신다고 했다. 즉, 즉심시불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법문을 하신다고 했다.

그랬더니 대매 스님 말이,

“저 노장이 사람을 호리기를 그칠 날이 없구나. 노장이야 뭐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하든, 즉심시불이라고 하든, 나는 오직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하겠네.”

이렇게 말하니, 시자가 돌아와서 마조 선사께 그 얘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아! 참 매실이 잘 익었구나!”라고 해서 인가를 하며, 제자들에게 일렀다.

“매실이 잘 익었으니 여러분은 이제 그리로 가서 마음대로 따먹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이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대매산에 큰 회중이 생겨나더니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는 그런 이야기가 전한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또는 卽心卽佛]”에 나오는 마음은 최소한의 알아차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깨어있는 마음, 있는 그대로 현존하는 마음이다.

대매 스님은 마조 선사께서 ‘마음이 부처’라고 했을 때, 갇혀있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걸어 나와 ‘순수한 깨어있음’을 경험했다. 전에는 생각과의 동일시 그리고 감정의 혼란 속에 살아왔었는데, 마조 선사가 말하는 순간 순수한 내면 공간의 등장을 경험했다. 그것을 선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한다.

대매 스님은 이것을 완전하게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마조 선사는 “빈틈없이 지켜나가라.”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순수한 깨어있음의 상태, 있는 그대로의 현존을 빈틈없이 유지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깨어 있으려 해도, 있는 그대로 현존하려고 해도, 에고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머리를 내밀 것이다. 또한 과거 생으로부터 익혀 온 업력이 대상을 만나면 머리를 들고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그때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강력하게 현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과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면 에고와 업력이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에너지를 키워 그대를 삼켜버린다.

그러므로 생각과의 동일시, 감정과의 동일시가 일어나려고 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대신 직접 그것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현존할 수 있다. 생각과 감정에 의식의 빛을 비춤으로써 에고와 업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순수한 깨어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깨어있음을 유지하면 에고와 업력은 점점 힘을 잃어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녹아서 사라진다.

왜 그런가?

에고와 업력은 생각과 감정의 동일시를 먹고 사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어떤 감정이 일어나든,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거리를 두고 연료를 보충해 주지 않고, 먹이를 주지 않으면 에고와 업력은 결국 에너지가 고갈돼 완전히 소멸한다.

대매는 30년 동안 깨어있음을 유지해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했다. 그것은 머리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완벽하게 체득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매실이 완전히 익은 것이다.」 - 무념

그리고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가 마조 선사를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일로 왔는가.”

“불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 집 보배[자가보장(自家寶藏)]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집을 떠나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이곳에는 일물도 없으니 무슨 불법을 구하겠는가.”

“어떤 것이 이 혜해(慧海)의 자가보장(自家寶藏)입니까?”

“나에게 묻는 자가 너의 보장이노라.”

자가보장(自家寶藏)이란 자기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 둔 보물이라는 뜻이다.

곧 자신의 성품⋅자성⋅본래면목⋅불성을 말한다.

이 세상 모든 보물 중에서 자기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이러한 성품이 곧 불성이기 때문에 가장 큰 보물이며, 자기 마음속에 감추어 둔 그 보물(자가보장)을 찾는 것이 수행인에게는 가장 중대하고 시급한 일이다.

자기 집에 있는 보물창고, 곧 누구나 지니고 있는 그 불성, 따라서 집에 있는 그 보물을 버려두고 딴 곳에 와서 보물을 찾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방안의 등불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는 방안의 대상을 비추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객체를 비추는 것은 대상인식(對象認識)이요, 주체를 비추는 것은 자체인식(自體認識)이다. 이 둘 중 중요한 것은 자체인식이다. 등불이 그 빛에 의해 객체로서의 대상을 비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객체를 비추는 자체를 자체가 비춘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이것은 자체에 비춤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용일여(體用一如)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즉체즉용(卽體卽用)이다.

체용(體用)의 개념은 한 개체의 이중성ㆍ다양성을 나타내는 논리적 개념이다.

체(體)는 주격으로 곳, 장소, 본질 등을 나타내며, 용(用)은 능할 능(能), 가능ㆍ능력ㆍ활용ㆍ작용 등을 나타낸다.

그래서 체용일여(體用一如)나 체용일원(體用一源)은 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같다는 이야기가 된다. 왼손을 마음의 본성(佛)으로 보고, 오른 손을 후천적인 행 혹은 용으로 볼 때 체용일여라 한다.

깊은 숲속의 고요를 체(體-장소-고요(靜)로 보고, 그 속에서 우는 새 소리를 용(用-能-動-작용)으로 보면, 그것이 체용일여의 장면이라 하겠다. 따라서 등불이 방을 비추는 것과 자신을 비추는 것이 곧 체용일여라는 것이고, 그것이 곧 즉체즉용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선가에서는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란 말이 꽤 유명한 화두였다.

“초조 달마(菩提達磨, ?~528) 대사가 서쪽 땅 인도에서 동쪽 땅 중국으로 건너 온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이는 불교 근본이 무엇이냐, 불법의 참 뜻이 무엇이냐 라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즉,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가져온 진리의 근본은 무엇인가 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는 당나라 중기, 마조 선사에겐 손제자 뻘 되는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대답이 널리 알려져 있다.

어떤 학인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이에 대한 조주 선사의 답이, 곧 “뜰 앞의 잣나무니라(庭前栢樹子).”였다.

그런데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라는 화두는 그 이전부터 널리 회자됐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조 선사도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아서 그에 대한 선문답(禪問答)의 일화가 오늘에 전한다. 헌데 그 때마다 매번 답이 달랐다.

늑담 법회(泐潭法會)라는 선승이 마조 선사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마조 선사의 답이 엉뚱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가까이 오라!”

법회가 곧 가까이 오자, 마조 선사가 그를 한 대 쥐어박고는 말했다.

“엿듣는 사람이 있어서 안 되겠다. 내일 오너라!”

다음날 법회가 와서 법당에 들어가 말했다.

“스님, 말씀해주십시오.”

이에 마조 선사가 말했다.

“우선 갔다가, 내가 상당(上堂) 할 때 오느라, 그대에게 증명해주겠다.”

법회가 이에 깨닫고 말했다.

“대중이 증명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법회는 법당을 한 바퀴 돌고는 가버렸다.

또 홍주 수로(洪州水老) 화상이 마조 선사를 찾아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이에 마조 선사가 답했다.

“절하라.”

수로가 막 엎드려 절을 하는데, 마조 선사가 곧 바로 한 번 밟아버렸다. 이에 수로가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수로가 일어나 박수를 치며 "하! 하!" 하고 크게 웃고는 말했다.

“참으로 신기하다. 참으로 신기해! 온갖 삼매와 헤아릴 수 없는 묘한 뜻을 이 모두가 다만 한 털 끝에서 있어, 곧 근원까지 알아버렸구나(無量玅義 只向一毛頭上 便識得根源去).“

곧 절을 하고 물러갔다. 뒷날 대중에게 말했다.

“마조 스님에게 한 번 밟힌 이래로 지금까지 웃음이 그치지 않는구나.”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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