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스크리트 원문으로 본 반야심경 역해 >라는 책을 집어 들어 읽어보는데 반드시 정독해봐야 할 책이란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다소 난해하고 지루한 부분은 그냥 대충 읽기도 하였지만 거의 매일 독송하다시피하는 <반야심경>에 대한 속시원한 해석에 하루밤새 다 읽게 되었고 호국일취사 장병들에게 반야심경에 대한 법문도 시도하게 되었다. 붓다의 <8정도>가 붓다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지만 <계정혜>도 <8정도>의 다른 표현이며 < 반야 바라밀다>도 <계정혜>와 <8정도>를 의미하다는 해석에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계(戒)(가테가테,) 정(定)(파라가테), 혜(慧)(파라상가테), 해탈(보디), 해탈지견의 완성(스바하)>이라 한다. 그리고 그 해탈지견의 완성(스바하)은 <수행이자 행동>을 말한다.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는 불자라면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 도법.
<< 출판사 책소개 >>
대승 불교의 정수 《반야심경》,
초기 경전의 교학ㆍ수행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유독 《반야심경》 해설서가 많이 출간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우리가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이처럼 많은 해석이 필요한 것일까?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 김사철 박사와 불교연구가 황경환 선생은, 《반야심경》이 어려워진 이유를 한문 자체의 생소함과 한역의 부정확성, 그리고 붓다의 실증적인 가르침을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설명방식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 원문을 우리말로 알기 쉽게 풀어내며, 초기불교의 교학 이론과 수행법을 기반으로 하여 《반야심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한다.
대승 경전인 《반야심경》의 주제는 초기 경전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참신한 시각에서,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명상 수행법을 전하는 초기 경전의 다양한 경문을 통해 《반야심경》의 핵심을 상세히 설명한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정확히 알고 바르게 실천하면 누구나 반야바라밀다, 즉 ‘지혜의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그 길은 바른 생활, 바른 명상, 바른 통찰이라는 ‘고귀한 여덟 겹의 길’, 즉 팔정도임을 명확하게 밝힌다.
책 속으로
고타마 붓다의 종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고타마 붓다의 명상이 필수 불가결하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 즉 ‘불자佛子’라고 하는 말은 ‘고타마 붓다의 명상을 하는 사람’과 동의어이다. 아무리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을 믿고 또 어떠한 불사를 하고 신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명상 이론을 모르고 명상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적어도 고타마 붓다의 진실한 제자와는 거리가 멀다._p.97
바닷가의 벼랑 밑에서 일고 있는 파도를 보라. 그곳에 어디 안정되고 불변하는 ‘파도’가 있는가?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파도’는 없고 오로지 ‘파도침’만 있다. 정지된 개념으로서의 명사는 없고 계속 변해가는 동사만 있다. 그러므로 파도치는 현상은 ‘비어 있음’의 현상이다. 이 ‘비어 있음’의 세계에서는 ‘이것’ ‘저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변해 버리고 다만 이것의 ‘인식’만 있을 뿐이다._p.130
고통받는 민중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반야심경》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쓰여야 한다. 따라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식의 전달은 고타마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우리도 고통받는 배달 민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배달말로 고타마의 다르마를 전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_p.21
시공간이라는 세계에서 모든 개념은 이원성(duality)에 의존한다. 예컨대 ‘왼발’이라는 개념은 ‘오른발’이라는 개념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 이를 이원성이라고 한다. 나아가 ‘선善’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하는 개념들도 홀로 서는 개념이 아니라 ‘선-악’ ‘믿음-의심’ 등의 방식으로 이원성에 근거해 있다. 믿음이 이원성에 근거한 개념이라는 것을 모르고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의심 또한 동등하게 강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심을 없애려면 믿음을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믿음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쌍둥이인 의심도 같이 없어진다._p.180
지금 우리가 주로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은 중국의 현장 스님이 서기 649년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내용이 첨가되거나 앞뒤가 뒤바뀌거나 중요한 내용이 결락된 부분이 있어, 산스크리트 원전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고대로부터 이 경에 대한 많은 연구와 해석, 주석이 있었지만 듣는 이에게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키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었다. 한국불교 1600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지나치게 중국 불교를 답습해온 것이 아닌지, 그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스승 고타마 붓다의 정신과 가르침을 어긋나게 이해하고, 그래서 깨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지나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_p.5
무지의 의식 상태에서 다섯-스칸다(오온五蘊)는 ‘나’이고, 명지의 의식 상태에서 다섯-스칸다는 ‘나’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범부 중생과 깨달은 이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범부 중생은 다섯-스칸다가 있고 오취온(五取蘊)이 있지만, 깨달은 이에게는 다섯-스칸다는 있지만 오취온이 없다._p.82
공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비어 있음’이다. 그러나 공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있을 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없다는 말이다. 이 절묘한 언어의 마술이 한글 속에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그 위대한 한문을 가졌으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옹색한 표현을 한다. 그들은 ‘참다운 공은 진실한 있음이다[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말한다. 이것은 공을 허무로 파악하는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이겠지만,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적 논리에 젖어온 지식인들로서는 또다시 알쏭달쏭해질 수밖에 없다._p.97
‘과학’이란 ‘증명을 통해서 안다’라는 뜻이다. 고타마는 명상적 증명을 통해서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얻었다. 그는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언제든지, 똑같은 명상 방법을 사용하면 똑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고 했다.
고타마가 알아낸 첫 번째 지식은 ‘나’의 초월성을 증명한다. ‘나’는 시공간이 아니라 비시공간에 있다. 그러나 나의 삭까야는 시공간에 속해 있다. ‘나의 삭까야들’은 생멸하지만 ‘나’는 불변이다. 나는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다. 두 번째 지식은 초월적 존재인 ‘나’가 시공간의 삭까야와 관계 짓는 ‘카르마의 법칙’이다. 세 번째 지식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통찰하고 깨닫는 방법이다._p.199
불교는 내가 변하는 공부이다. 삼독三毒에 찌들어 있는 나로부터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라는 사무량심의 정자亭子를 건립해 나가는, ‘나’로 변해가는 공부다. 탐ㆍ진ㆍ치의 삼독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중독의 상태에 내가 처해 있는데, 부처님 말씀이라고, 또는 조사님의 말씀이라고 들은 천언만설千言萬說이 나를 이 중독으로부터 해독시키는 양약이 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_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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