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4 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2011년 1월에 독일이 공식적으로 ‘인더스트리 4.0을 공표하고, 2016년 1월에 세계경제포럼(WEF)이 다보스에서 ‘4차 산업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를 주요 의제로 설정한 이후 세계적인 관심사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16년 3월에 벌어진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충격 이후 대중, 언론, 학계의 관심사가 되었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양자암호 및 전달체계,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3D와 4D프린팅에 의한 맞춤생산(customization), 무인운송, 사물인터넷(IOT)을 통한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 스마트공장(smart factories), 생명공학 등, 3차 정보화혁명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판이하게 다른 과학기술과 이에 의한 혁명적 사회변화상들이 제시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한국 학계의 논의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현상에 대해 미리 예단하거나 너무 호들갑을 떠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추론과 예측 위주이거나 겉핥기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논문과 책이 발표되었지만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불교계에서도 학술대회를 열어 여러 편의 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대다수가 구체적 논거를 통한 치밀한 논증, 특히 쟁점에 대한 논의가 없이 추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해외 관련 학회에서 최근에 발표된 핵심 논문들도 참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이것이 불러올 영향이 단순히 일자리가 대폭 사라지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엄청 빠른 속도로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을 뒤흔들고 기업과 국가는 물론, 인류 문명 자체의 대전환을 야기할 것이기에 관심을 갖거나 분석하고 대비할 수밖에 없다. 이에 최근의 서양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 신경과학(neuro-science), 생명공학(bio-engineering) 등의 분야에서 발표된 우수한 논문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쟁점을 인간의 지능 초월 여부, 자유의지 여부, 감정의 프로그램화 문제, 인간과 기계,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의 네 존재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로 나누어 고찰하고 불교적 해석과 대안을 보탠다.
2. 인공지능의 인간 초월 여부에 대한 논증
4차 산업혁명의 기술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은 인공지능 분야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핵심 논쟁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냐이다. 알파고는 그 사이에 알파고 제로로 진화를 하였지만, 양자 모두 약 인공지능을 응용한 것이다. 약 인공지능 로봇의 경우 복잡한 계산처럼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잘하지만 얼굴 식별처럼 인간이 잘하는 것은 못하는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통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결점과 한계를 빠른 속도로 극복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할 것인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 인간의 생각을 온전히 기계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앨런 튜링이 수학적 직관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마음의 과정을 기계화, 형식화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며 튜링 테스트를 제안한 이후 괴델, 드레이퍼스, 서얼 등이 이에 대해 비판하며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괴델은 그 이전의 수학자들이 제기했던 보편적 진리기계(universal truth machine)가 존재할 수 없음을, 즉 수학적 진리에 대한 완전한 공리집합이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 괴델의 불완전 정리(incomplete theorem)에 의하면, “무모순적 공리계는 참인 일부 명제, 특히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어떠한 형식체계일지라도 그 체계 내에서 증명될 수 없는 공식, 또는 명제가 존재한다”가 가능하다. 둘째, 첫째 정리의 따름정리에 의하면 한 형식체계의 일관성은 그 체계 내에서 증명될 수 없다. 괴델은 튜링의 주장이 ① 물질과 분리된 마음은 없다. ② 두뇌의 기능은 디지털 컴퓨터처럼 작용한다는 두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데 ②는 그럴지 몰라도 ①은 현대의 편견이며 과학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으리라 본다.
드레이퍼스는 생각이란 것이 기호적인 연산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인간의 지능과 감성이 기본적으로 의식적인 상징의 조작보다 무의식적 본능에 의존하기에 이런 무의식적 기술들은 공식으로 포착할 수 없다고 본다. 디지털 컴퓨터는 인간처럼 암묵적인 배경지식을 가지지 않기에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서얼은 지향성(intentionalty)은 인간의 정신과정과 뇌가 실제로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 경험적 사실인데, 기계는 이런 지향성을 충분히 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과력(casual power)을 갖지 못한다 라고 주장한다. 형식적 속성이 그 자체로 지향성을 구성하지 못하기에 순수한 형식 모형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컴퓨터는 뇌의 지향성을 프로그램할 수 없다. 서얼이 볼 때, 튜링 테스트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중국어 방’에 앉아서 그 방에 있는 중국어 관련 문법과 사전을 참고하여 중국어 질문에 중국어로 답을 하면 사람들이 그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레이 커즈와일은 인공지능이 형식론적이고 구문론적인 단계를 넘어서며 연산도 사람의 뇌처럼 카오스적이고, 예측불가능하고, 복잡하고, 명상적이고, 창발적일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커즈와일의 주장처럼, 애플사의 시리(Siri)는 서얼의 ‘중국어 방 이론’에 의해 프로그램이 되어 있음에도 ‘중국어방’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능을 보인다. 특히 인지과학자들과 생명과학자들은 인간이 유전자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마음 또한 뇌신경세포의 단백질, 전기신호와 화학물질들로 구성되는 유기체적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의 뇌를 디지털로 복제하는 연구도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의 억만장자 드미트리 이츠코프는 2045년까지 자신의 뇌 속에 담긴 생각과 감정, 인격을 컴퓨터로 옮겨서 영생을 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더불어 빅데이터가 검색한 용어를 종합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주변 사람이나 본인보다 더 정확히 읽어내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 데이터가 양을 질로 전환하면서 인간의 무의식과 마음을 어느 정도 대체할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만든 예쁜 꼬마 선충이 알고리즘 이상의 생명 활동을 한 것처럼 알고리즘 이상의 사고와 행위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인간이 유기체적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구상의 생명체가 38억 년에 걸쳐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진화한 과정을 인공지능이 모두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편견의 역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왓슨이 의사보다 압도적으로 진단 정확도가 높은 것은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것과 함께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냥에 나선 인간이 위험한 동물을 만났을 때 수많은 데이터를 놓고 고민하면 죽기 십상이기에 편견은 생존하기 위하여 진화적으로 판단을 단순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편견은 인간 생존의 진화적 선택인 것이다.
편견이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며, 편견이 없는 왓슨이 오히려 인간보다 진단 정확도가 높더라도 인간이 될 수 없는 한계일 수 있다. 모라벡의 역설이 왜 일어나는가. 인공지능이 수학을 바탕으로 하고 계량화와 코스모스화를 지향한 문명사 1만 년은 잘 프로그램화할 수 있지만, 그 이전의 38억 년의 진화 작용은 수학과 무관하였고 카오스적이었기에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물론, AI연구자들은 후자의 정복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실수하고 오류를 빚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성찰하고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인간의 중요한 본성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유한성을 인식하고 실존을 모색하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알기 때문에 영원함을 추구하며, 주변에서 떠돌고 있음을 알기에 중심과 근원으로 다가가고, 비속하기에 거룩함을 지향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넘어서겠지만, 완벽하게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강 인공지능이 대략 앞으로 30여 년 안에 인간의 지능이 스스로 학습하면서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을 돌파하여 지능폭발을 하고 초지능(super-intelligence)을 습득할 것이지만, 38억 년 동안 진화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완벽히 복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3. 자유의지 여부에 대한 논증
자유의지는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 강요 없이 한 개인이 자유롭게 세계를 인식하고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내적인 힘을 뜻한다. 근대의 학문과 사회, 제도는 환경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맞서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하여 환경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독립된 주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근대인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타인을 사랑하거나 증오하고 불의를 보고 저항하거나 침묵하고 죽어가는 이를 보고 구원에 나서거나 지나친다. 그렇기에 근대인은 사유와 행위에서 자유로운 주체, 그 행위의 원인으로서 정립되었고 이를 전제로 근대 사회가 형성되고 제도와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며,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 도덕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졌다. 하지만, 그것이 한 인간 전체가 아니라 유전자나 뇌신경세포의 특정 물질의 과다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해도 도덕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부여해야 하는가.
더니든 스터디(The Dunedin Study)에서 처음 제안하였고, 이후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것처럼, 두뇌의 모노아민산화효소(monoamine oxidase Alpha, MAO-A)의 낮은 발현 변이를 보이는 이들이 시냅스에서 신경 전달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인 MAOA를 적게 생산하는 바람에 편도체는 활성화하고 전두엽은 활성화하지 못하여 공격성을 증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MAOA가 적은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에게 법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성을 갖는가. 우리가 정신병자가 살인하였을 경우 정상을 참작하는 것처럼, 이는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뇌 속의 한 물질이 일정량에 이르지 못한 탓에 뇌의 특정부위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가. 또, 교육, 수행, 치료 등을 통하여 MAOA 효소를 늘리지 않은 국가와 사회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과학 분야와 인지과학자들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유발 하라리처럼 학문적·대중적으로 상당한 위상에 있고 불교를 수용한 인문학자들마저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과 생명은 알고리즘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라고 단정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를 전제로 한 근대의 학문과 제도, 법, 윤리와 도덕, 더 나아가 종교는 신기루로 둔갑한다.
벤저민 리벳은 자유의지에 관한 유명한 실험을 통하여 피실험자들이 결정을 내리기 1000분의 350초 전에 뇌에 이미 신호가 떴음을 밝혀 자유의지가 뇌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무의식적인 뇌신경 활동이 자유의사 결정에 선행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문이 연이어서 발표되었으며, 존 딜런 하인즈 등은 숫자를 더하거나 빼는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가 참가자가 의식적으로 선택을 한다고 보고하기 전에 내측 전두엽 및 두정 피질에서 신경 활동으로부터 이미 해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좀더 복잡한 자유의사 결정의 결과가 이전의 뇌 신호로부터 예측됨을 밝혔다.
자유의지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로봇 쥐 실험이다. 산지브 탈와르 교수는 쥐의 뇌에서 감각영역과 보상영역을 찾아 전극을 이식하여 리모컨 조작만으로 쥐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였다. 쥐는 우로, 좌로 움직이고 사다리도 오르내렸다. 이처럼 뇌의 감각 활동을 원격으로 수신하고 이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이 조종된 쥐를 이동 로봇과 생물학적 센서로서 기능을 할 수 있게 한다. 쥐는 자유의지로 행동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탈와르 교수가 리모컨을 조작한 대로 움직인 것이다. 인간의 뇌는 좀더 복잡하지만, 인간 또한 로봇 쥐처럼 두뇌의 조작으로 자유의지로 착각하는 행동을 만들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연구팀은 지속적인 뇌신경 행위가 주어진 순간에 의사를 선택할 부분에 자발적인 결정을 편향시킴을 입증하여, 자발적인 신경요동이 의사결정을 예측하게 하며, 그동안 잡음으로 간주되던 뇌신경 신호의 지속적인 가변성이 뇌의 본질적인 특성임을 밝혔다. 우리가 독립적인 선택을 내린다고 생각한 것이 뇌의 배경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의지란 것은 없으며 자유의지라고 생각한 것이 있을 뿐이다 라고 결론을 내린다.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연구는 언어적, 분석적, 논리적 인지에 관여하는 좌뇌와 비언어적, 종합적, 창조적, 공간적, 예술적, 직관적 인지에 관여하는 우뇌를 분리한 연구[split-brain research]에서 더욱 잘 입증되었다. 가자나가 등은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에 이상이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언어인지에 관여하는 좌뇌에 닭의 갈고리 발톱을 휙 보여주는 동시에 우뇌에 눈 내린 풍경을 휙 보여주었다. 환자 PS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닭의 갈고리 발톱’이라고 대답하였다. 일련의 그림카드를 주고 방금 본 것과 일치하는 사진을 가리키라고 하자 환자는 오른 손으로 닭 그림을 가리켰지만 동시에 왼 손을 내밀어 눈삽을 가리켰다. 그에게 눈삽을 가리킨 이유를 묻자 그는 아, 닭의 발톱과 가장 일치하는 그림이 닭이고, 닭 우리를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잖아요.”라고 답하였다. 하나의 정체성과 자아를 갖는 인간인데, 실은 그 안에 있는 좌뇌와 우뇌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과 자유의지라는 것도 실은 뇌신경세포에서 전기 및 화학신호의 반응, 38억 년의 진화에 걸쳐 이루어진 뇌의 신경세포가 구성하는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생체학적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가. 생명과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의 주장처럼 인간 또한 생체학적 알고리즘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이 이를 전자 알고리즘으로 수학적으로 디지털화/프로그램화하는 것이 언제인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계량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중층적이고,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이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이자 38억 년에 걸친 생명의 역사와 인류 역사 600만 년에 걸친 진화와 시행착오, 세계와 타자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기에 이를 단순하게 프로그램화할 수 없다.
생명과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의 실험들은 짧은 시간에 특정한 상황에서 행해진 것이다. 행동할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단순히 사고하는 것보다는 예상되는 상황을 목표 지향적 행위에 연결시키면 성공하려는 의도가 더욱 더 행동을 촉진한다. 언제까지 체중을 어느 정도로 줄이겠다고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한 사람이 그냥 막연히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보다 다이어트 성공 확률이 높다. 이는 장기적인 자유의지가 개인의 자기통제에 영향을 미침을 나타낸다. 올해 일본의 연구팀은 자유 의지에 대한 믿음이 교감 활동을 통한 의사 결정의 전략적 전환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이 자유 의지와 자기 통제, 교감 신경과 상관관계에 대해 분석한 결과,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교감신경의 행위와 자기 통제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과학적이고 객관적 실재라고 해서 100% 옳은 것은 아니다. 과학과 객관적 실재 또한 패러다임과 해석의 지배를 받는다. 필자는 에커드 헤스의 실험을 다르게 해석한다. 헤스는 눈동자 크기만 다르고 다른 부분은 똑같은 여성의 사진 두 벌 4장을 휙 보여주고 실험을 했다. ‘누가 더 매력적인가, 누구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가’ 등 긍정적인 질문을 할 경우 남자들은 동공이 확대된 여성을 더욱 많이 선택하였고, ‘누가 더 이기적으로 보이는가’ 등 부정적인 질문을 할 경우 동공이 작은 여성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동공확대의 이유는 컴컴한 곳에 들어갈 때, 복잡한 생각을 할 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와 성적 충동이 일 때도 확대된다. 짧은 시간에 사진을 휙 보고 인간의 눈이나 뇌는 동공의 크기가 다른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 성적 매력에 이끌리는 기억들이 600만 년 동안 자연선택과 성선택을 하며 진화한 것이 몸에 각인된 결과다. 이 실험 결과는 뇌가 인식하기 전에 뇌를 제외한 몸이 먼저 인지함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뇌 이전에 몸임을, 마음이란 뇌 속의 감각신경세포, 운동신경세포, 연합신경세포, 거울신경체계의 시냅스들이 주고받는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에 따라 반응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로서 몸이 느낌을 뜻한다. 마음은 우리 몸에 축적된 기억과 정보 사이의 네트워킹에 의하여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정보와 기억들의 연합작용이다.
생명과학과 인지과학자의 주장대로 유전자의 특정 물질이나 뇌신경세포의 단백질, 전기신호, 화학물질 등이 의식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들은 한 마디로 유전자 결정론에 매몰되어 있으며, 근본적으로 실체론과 이분법으로 생명과 인간을 분석하고 있다. 부분에 대해서만 참인 것을 전체에 일반화하는 ‘결합의 오류’도 범하고 있다. 게슈탈트 이론가들이 통찰하고 양자역학, 카오스이론에서 확인된 것처럼,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
화엄에서 말한 대로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一卽多 多卽一]. 하나와 전체는 서로 깊은 연관과 조건, 인과 관계를 갖고서 서로를 생성한다. 유전자와 뇌신경세포가 전체의 마음을 구성하는 동시에 전체의 마음이 유전자와 뇌신경세포에 조건과 인과로 작용하며,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며, 양자는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작동하고 생성한다.
유전자가 완벽히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들을 분석하면 오히려 같은 질병을 걸리는 이들은 드물다. 더 큰 표본과 구체적인 분석이 따라야 하지만,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에서 유전성 DNA 메틸화 효과와 차별적 메틸화가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결혼하면 다른 사람은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실감이 후성유전적으로 질병 유전자를 발현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가 마음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유전자의 발현에 작용한다. 그러니, 뇌를 가진 인공지능이나 디지털로 복제된 뇌는 몸에 새겨진 38억 년의 기억과 이들 사이의 연기적 총체를 모두 재현할 수는 없다.
현실과 해석, 진리의 관계를 원효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체용론을 화쟁으로 체계화한 것을 재해석하여 응용할 수 있다.
만약 상주(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體)라 하고,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심이 무명(無明)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 (……) 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묾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
이를 응용하면, 생멸문에서는 이문(二門)의 차원에서 정신과 육체, 유전자와 마음/의지의 관계를 바라본다. 인간이 마음[참, 體1]은 알 수 없고 다다를 수도 없지만, 이는 유전자와 두뇌의 신경세포의 작용[用]으로 드러난다. 이는 얼굴표정, 말, 행위 등의 텍스트[相]를 만든다. 이 텍스트가 인간의 마음을 품고 있기에 타인은 얼굴표정과 말, 행위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그에 담긴 마음[몸, 體2], 곧 ‘몸의 마음’을 읽는다. ‘몸의 마음’이 일상의 차원에서 감지하는 타인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물론 실재 마음인 ‘참의 마음’과[體1]과 텍스트를 통해 재구성한 몸의 마음[體2]은 동일하지 않다. 인간이 외부 환경 및 타인과 상호작용한 것이 두뇌의 신경세포에 기억되어 이것과 몸과 마음이 작용하여 참의 마음[體1]을 구성하며, 이는 다시 자연, 외부 환경,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며 뇌 신경세포와 유전자의 작용[用]을 통하여 ‘몸의 마음’[體2]를 드러내고 이는 얼굴표정, 말, 행위 등의 텍스트[相]를 형성하며, 이에 따른 상대방의 반응과 외부 환경이 마음을 형성한다. 이렇게 순환하고 모든 것들이 연기적이기에 인간은 영원히 마음의 본체인 ‘참의 마음’에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몸의 마음’에서 연기와 일심(一心)을 발견하고 그로 돌아가려는 순간 우리는 참의 마음의 한 자락을 엿볼 수는 있다.
4. 감정의 발생과 소통/해석 및 프로그래밍 문제
감정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한다. 이의 발생 원인에 대한 고전적 해석은 감정을 신체 변화의 느낌이라 정의한 제임스 랑게설로 대표되는 신체적/생리적 요인(몸을 때리면 고통, 성기를 자극하면 쾌감, 간질이면 웃음이 나오듯 감정은 몸의 자극에 대한 반응), 심리적 요인(욕구나 욕망이 달성되면 쾌감, 도달하지 못하면 불쾌감), 사회적 요인(타인과 관계에서 욕구와 욕망의 달성 여부, 열등감, 우월감 등이 형성됨), 문화적 요인(도덕적 정조(情操)로서 정의감, 미적 정조로서 심미감, 종교적 정조로서 경외심, 무상감 등)으로 본다.
하지만, 감정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뒤섞인 감정은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감정의 범주를 구성하는 것과 연결된 결과다. 감정은 대상/타자와 어우러져 일어나는 현상과 사건에 대해 감각신경세포가 반응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내 몸과 대상/타자,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감각 정보, 지각과 세계, 뉴런과 몸이 상호작용/소통을 하여 이루어지는 복합적 의미구성의 결과다. 예를 들어, 돌과 소리에 대한 개념이 없다면 돌이 떨어져도 공기의 진동만 느낄 뿐이며, 빛깔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빨간 사과를 보고도 반사된 빛만 느낄 뿐이다. 지각하는 존재가 없다면 소리도, 빛깔도 없으며 물리적 실재만 존재한다.
예1) 바위의 떨어짐(공기의 진동일 뿐) → 청각신경의 전달(진동이 귀를 통해 내이의 유체를 자극하고 이 안의 섬모가 압력변화를 전기신호로 변환함) → 세계의 구성과 범주화(뇌 속의 뉴런들이 돌과 소리에 대한 과거의 경험과 정보를 종합함) + 예측(prediction)+ 시물레이션 → 가설 설정 → 데이터에 따라 예측의 수정과 검증 → 반증
예2) 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발견함 → 영상 이미지가 망막에 맺힘 → 시각뉴런에 의해 전기신호로 변함 →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함 → 세계의 구성과 범주화+예측 → 가설 설정과 시물레이션 → 데이터에 따라 예측의 수정과 검증, 시물레이션 → 오래 전에 헤어진 친구로 판단 → 달려가서 끌어안으며 행복한 감정 방출 → 반증 → 실망감
뇌의 예측과 감각 입력이 일치할 경우 이것은 그 순간에 세계에 대한 모형이 된다.(…) 뇌에는 세계가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정신적 모형이 있다. 이 모형은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자 세계와 신체를 바탕으로 개념을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의미구성현상이다. 당신이 깨어있는 매순간 뇌는 개념으로 조직된 과거 경험을 사용해 당신의 행동을 인도하고 당신의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공포와 분노는 신체, 얼굴 등의 특정 변화가 감정으로서 의미 있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실재한다. 다시 말해 감정 개념은 사회적 실재social reality다. 이를 통해 수정하면, 이 세계에는 객관적 실재, 주관적 실재, 상호주관적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실재와 이에 상호작용하는 상호주관적 실재가 있으며 감정 또한 상호주관적 실재다.
감정은 집단지향성을 통해 실재가 된다. 우리는 소리, 빛깔, 돈의 경우 똑같은 방식으로, 즉 뇌의 배선 안에 구현된 개념 체계를 사용하여 감정의 사례를 구성한다. 감정은 사회적 실재의 전제 조건인 두 인간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실재가 된다. 우선 ‘꽃’, ‘돈’, ‘행복’ 같은 개념이 존재한다고 동의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는 지식이 집단지향성collective intentionality다. 이것들이 실재한다고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에 실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고 감정은 오직 지각하는 인간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문화 전체가 당신이 형성하는 개념과 당신이 하는 예측에 집단으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재판정에서 양심의 가책 여부를 판단하고 양형을 결정하지만, 이에 대한 표정과 해석은 문화권마다 다양하다.
예측은 환경의 실시간 샘플링과 관련된 매우 전문화한 지각 수준부터 세계의 핵심 내부 모델을 기반으로 한 보다 추상적인 안정된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 척도와 특이성 수준에서 발생한다.
신경 과학의 최근 연구들은 뇌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입력된 감각적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미리 예상하면서 예측적으로 기능을 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예측 신호는 경험을 안내하고 제한하면서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일련의 여섯 가지 행동 실험 결과 얼굴 표정에 대한 예측이 사회적 지각을 끌어내는 동력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은 표정이 예상될 때, 심지어 의식적인 변화가 없을지라도 더 바람직하고 신뢰할만한 것으로 판단한다. 더욱이 사회적 판단에 대한 예측의 효과는 그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다 기본적인 지각적 과정 (즉, 촉진된 기대되는 표정의 시각적 과정)뿐만 아니라 그러한 판단이 특히 중요한 실제 세계(즉, 다가오는 선거에 대한 대통령 후보자 평가)까지 확대된다.
이처럼 감정은 대상과 사건에 대하여 우리의 감각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우리 안의 경험과 기억 등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과 감각한 것을 종합하여 세계를 구성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측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지각, 안내 및 제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예측은 연기적, 특히 상호생성적(inter-becoming)인 관계에 있다. 내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예측에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의 예측에 영향을 미친다. 이 관계에 미시적인 권력과 거시적인 권력, 이데올로기, 담론, 정보와 지식 등을 비롯하여 문화와 맥락 전체가 작용한다. 그러므로 AI가 폴 에크먼이 했던 것처럼 기쁨, 슬픔, 놀라움, 두려움 등 범주화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 더 나아가 ‘웃픈’,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등 복합적인 감정까지 가질 수는 있겠지만, 문화적 요인에 따른 감정까지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5.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과 대안
AI가 활성화한 이후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기계와 인간, 기계와 생명의 경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고 사람처럼 의식하고 감정도 표현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 생명성에 근본적인 혼란과 파국을 가져올 것이다. 영국 드라마 를 보면, 한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온 인공지능 로봇 아니타는 요리에서 가사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는 더 좋은 엄마와 아내 역할을 하며 존재감의 상실을 느끼는 아내에게 “나는 당신보다 아이를 더 잘 돌보고 화를 내지 않고 기억을 잊지도 않고 술이나 마약을 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니타처럼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인간적인 사고와 감정, 그 표현과 행위를 하면서 인간을 위협할 것이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인간성, 인간 존엄성의 근간을 무너트리고 인간을 기계화할 것이다.
<모형1: 인공지능 시대에서 기계와 차이를 갖는 인간성의 기호학적 사변형>
근대에 존재했던 인간 대 기계의 대립은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로 확대된다. 위 기호학적 사변형에서 인간과 기계,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는 대립관계다. 순수한 인간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 능력을 증폭하는 기계장치, 빅데이터, 만국어 회화칩, 나노로봇을 몸에 장착하면 사이보그로 변한다. 인간과 사이보그, 기계와 안드로이드는 보완관계다. 안드로이드는 생김에서 말하기와 쓰기, 생각과 감정조차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에서는 엄연한 기계다. 반면에 사이보그는 뇌를 제외한 전체 몸이 기계일지라도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에서는 분명히 인간이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기계와 사이보그는 모순관계다. 물론, 인간/비인간의 구분이 선명해지면, 역으로 그 틈에서 수많은 잡종들이 증식한다 라는 브뤼노 라투르의 주장처럼, 기계형 인간, 안드로이드형 인간 등 허다한 잡종들도 존재할 것이다.
<모형1>에서 인간은 기계와 대립하는 생명성을 갖는다. 서양과학에서 보면, 생명은 DNA 사슬에 새겨진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진 몸을 가지고 복잡성과 조직체계를 가진 자율적인 개체로서 물질대사를 하고 스스로 화학반응을 하면서 살아가고 자기복제를 하고 외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하고 발달하면서 진화하는 유기체다. 이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을 짜 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실체론적 패러다임에서 개체로 보면 이런 정의가 타당하다. 하지만, 실체론으로 보면 딱정벌레를 발로 밟으면 죽은 것이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그 딱정벌레를 해체하여 개미가 가져가서 여왕개미에게 먹이면 여왕개미가 개미 알을 낳으며 딱정벌레 껍질에도 수억 마리의 미생물이 깃든다.
딱정벌레는 자연환경, 숲속의 수 많은 생명들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딱정벌레가 다른 생명과 공존, 공진화한 산물인 것에서 보듯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개체인 동시에 무수한 생명 및 자연과 연기적 관계를 맺고서 공존하고 공진화한 생태계(eco-system)의 일원이다. 그런 면에서 생명은 생태계 속에서 공존하고 공진화하는 가운데 개체를 지속하여 자기복제를 통하여 자기 유전자를 늘리려는 지향성이다. 필자는 불교적 생명관과 결합하여 생명을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반복 속에서 연기와 업(業)에 따라 외부와 상호 작용하며 자율적으로 정보처리한 기억과 DNA 사슬로 이루어진 몸이 생태계의 연기 속에서 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차이를 만드는 상호생성자로서 공(空)”으로, 더욱 간단히 ‘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차이를 생성하는 공(空)’으로 정의한다.
반면에, 동력을 써서 작동하는 장치인 기계는 “알고리즘에 의해 효율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 “명백한 일련의 규칙에 의해 일련의 조작을 수행하는 유한자동기구로 유한 수의 입력을 받아들여 유한 수의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으며 유한 수의 출력을 내어놓는 체계다.” 안드로이드는 무한한 개체라고 간주하던 인간을 셀 수 있는 유한한 생체적 알고리즘으로 간주하고 이를 디지털적으로 전환한 산물이다. 이는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하는데, 이를 명도와 채도 등 몇몇 객관적 준거에 따라 무지개의 색을 일곱 가지로 범주화하는 것과 유사하다.
생명과 안드로이드를 비교할 때 가장 명백한 차이는 환경에 대한 것이다. 생명은 개체적 생존이나 공진화를 위하여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이용하거나 극복하는 대상이었지만, 기계는 반대로 적합한 작동을 산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바꾸어가야 하는 준거인 것이다. 즉 인공지능은 환경에 대해 작동의 중심성을 갖고 있지 못하며, 환경에 대해 도구적이고 이차적인 자리에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비교할 때 생명성-곧, 자신이 살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지향성-이 없으며 차이보다 동일성을 지향한다. 아무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과 유사한 사고와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안드로이드는 기계로서 자연과 인간, 물질, 시공간에 대해 작동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도구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반대로 사이보그는 기계장치로 온통 무장했다 하더라도 환경에 대해 주체로 대응하면서 공진화하고 차이를 생성한다.
인간과 도구의 이분법에서 보면, 도구와 창작자의 위치가 전복되고 도구의 위상과 의미가 변할 것이다. 330만 년 전에 인간이 석기를 제작한 이후, 도구는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의도대로 개조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방편으로서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이 관계가 역전되고 있다. 인간은 연필, 붓, 펜, 타이프라이터, 워드프로세서, 컴퓨터를 사용해 자신의 사고와 정서를 표현했다. 언제나 도구의 주체는 인간이었다.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일본의 신이치 문학상의 1차 예심을 통과한 것은 이 구도에 전환을 제시한다. 아직까지는 인간이 많은 부분 개입한 것으로 인공지능은 긴 문장을 쓴 데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코프가 만든 인공지능인 EMI가 바흐풍의 합창곡을 하루에 5,000곡씩 작곡하였으며 그 중 몇 곡을 골라 한 음악축제에서 연주하자 청중은 경이로운 연주에 열광하며 찬사를 보냈고 그 음이 자신들의 내면에 얼마나 깊은 울림을 주었는지 흥분해서 설명했으며, … 애니(Annie)는 기계학습에 의존하여 작곡하고 하이쿠를 지었으며, 코프는 2011년에 『불타는 밤이 오다: 인간과 기계가 만든 2,000편의 하이쿠(Comes the Fiery Night: 2,000 Haiku by man and Machine)』을 펴냈다. 결국, 인간과 도구의 이분법도 무너지고 인간은 도구의 지배자 내지 작동의 주체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생명공학은 38억 년 동안 진화한 생명을 송두리째 파국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만한 조작을 가하고 있다. 이제 인간이 거의 신의 지위에 올랐다. 인간이 생명을 복제함은 물론, 유전자를 조작, 변형하고 생명을 창조하고 진화에 관여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 두려운 것은 생명이 최적화(optimization)를 매개로 현재를 관리하여 미래를 생산하는 대상이 되었는데, 이의 주체가 자본이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국가와 자본의 동맹체제가 굳건해지고 이에 대한 견제세력-노동조합, 시민사회, 언론-이 무력화하면서 국가가 아니라 자본이 생명의 조절과 통제에 더 관여하고 있으며, 자본-국가는 생명의 상품화를 촉진하면서 시장에서 생기는 문제를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로 인류의 공동 유산인 유전자와 생명이 특허를 매개로 독점적인 상품이 되고 있다. 2015년 세계 제약 시장의 규모는 자동차나 반도체 시장의 두, 세 배를 능가하는 1조 720억 달러(약 1,286조 원)에 달한다. 병원은 더 이상 아프고 병든 사람의 안식처가 아니고 생명자본주의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의료의 목적은 병의 치료에서 소수를 위한 노화 억제와 수명 연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한 인간을 어떤 말로 규정하는 순간에 오류와 편견을 낳을 정도로 인간은 어떤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깊이와 신비로움을 지닌 ‘심연(Abgrund)’, 혹은 일심(一心)의 존재다. 필자의 앎의 범위에서 인공지능 이전, 곧 근대의 인간을 간단히 정의하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담은 생존기계로 사회적 협력을 하며 이타성과 공존, 윤리를 추구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로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진화한 생체학적 알고리즘의 결합체이자, 타인 및 자연/우주와 연기적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이자, 자아를 형성하여 무한히 열린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고 대응하면서 자기 앞의 세계를 해석하고 그 의미를 따라 결단하고 실천하면서 실존하는 존재이자,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자신이 맞은 현실을 감내하면서 초월하는 존재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관계의 경우 안드로이드는 인간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언어기호를 사용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이성을 가지며, 사회적 협력을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부분 대체할 것이지만 이는 자연개조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에만 국한될 것이며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생명과 대립되는 인간의 본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도구의 사용, 노동, 언어기호의 사용과 의미의 해석, 추론, 이성, 허구의 창조, 실존, 사회적 협력, 공감, 윤리 추구, 자유의지, 욕망, 성찰, 초월’ 등이다. 이 가운데 영장류, 고래와 해달 등 포유류만이 아니라 뇌가 작은 새, 편도체까지만 발달한 악어조차 도구를 사용하기에 도구사용은 인간만의 특성으로 보기 어렵다. 사회적 협력 또한 영장류와 코끼리, 고래에서도 발견된다. 영장류와 코끼리도 추론을 한다. 영장류와 코끼리, 고래, 조류 등은 공감을 하며 공감 작용과 관련된 거울신경세포체제(mirror neuron system)를 가지고 있다. 인지과학자들은 자유의지가 허구이고 인간이 자유의지가 아니라 유전자에 기록된 알고리즘에 따라서 무작위로 결정을 내린다고 보지만, 이는 논란 중이므로 유보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특성은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허구의 창조, 언어기호의 사용과 의미해석, 실존, 윤리 추구, 욕망, 성찰, 초월’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인공지능 시대에서 윤리성과 실존, 성찰은 개체적인 단위에서는 불가능하고 타자성, 특히 타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연대하는 데서 비롯되므로 공감/자비은 되살려야 한다. 이 상황에서 인간과 작가들은 인공지능과 분명한 차이를 갖는 인간의 본성인 ‘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허구의 창조, 언어기호의 사용과 의미의 해석, 실존, 윤리 추구, 욕망, 성찰, 공감, 초월’을 구현해야 한다.
<모형2: 인공지능 시대에서 짐승과 차이를 갖는 인간성의 기호학적 사변형>
예쁜 꼬마 선충(Caenorhabditis elegans)은 뇌신경세포가 302개, 세포가 959개에 불과하지만 인간과 유전자가 40%가 동일하고 수명이 짧아 생명과 인공지능에 대해 연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에 이 벌레의 뇌신경세포를 모두 매핑(mapping)하여 유전자를 염색체 구조 안에 위치하게 하여 이 가상 뇌를 레고 로봇에 재현하였더니 어떤 지시와 정보도 프로그래밍하지 않았음에도 살아있는 선충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여 이동, 정지, 역방향의 동작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기계가 생명처럼 물질대사, 자기복제 등을 하게 되어 기계와 생명에 대한 기존의 이분법의 경계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미 근대에 존재했던 인간 대 짐승의 대립은 인공짐승과 안드로이드로 확대된다. 위 기호학적 사변형에서 인간과 짐승, 안드로이드와 인공짐승은 대립관계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짐승과 인공짐승은 보완관계다. 인간과 인공지능 짐승, 짐승과 안드로이드는 모순관계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98.6%가 일치한다. <모형2>에서 짐승과 대립되는 인간의 특성은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등이다.
세상이 더욱 디지털화되고 첨단 기술화될수록, 우리는 친밀한 관계 및 사회적 연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 감성을 더욱 갈구하게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인간은 안드로이드가 성취할 수 없는 생명성-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공진화하는 것-과 인간성-진정한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허구의 창조, 실존, 윤리 추구, 욕망, 성찰,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과 영성-초월적 실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의 지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 완전한 자유와 해탈,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규정과 한계를 포월(匍越)하는 거듭남-을 구현하면서 차이를 생성하는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단 몇 분밖에 살지 못하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결단하여 먹이를 잡고 도망가고 짝을 선택하여 알을 낳고 죽으며, 그 과정 속에서 무수한 생명과 상호작용하면서 무진장의 생명들을 생성시키면서 시공간에 주름을 빚고 허다한 의미를 남기고 달라진 미래를 구성한다.
그렇듯, 상호생성자로서 생명이 다른 생명과 연기적 관계 속에서 생성하면서 빚어내는 다양한 차이, 그 차이들이 빚어내는 여러 층위의 시간과 공간의 주름들, 그 주름을 풀어내면서 해석되는 다채로운 존재의 의미, 가능성·잠재성·현실성, 몸에 담긴 기억들의 편린과 그 기억들이 지향하는 내재적 초월성과 미래까지 바라보면서 자기를 낮추며 대대(待對)적으로 상대방을 내 안에 들여 섬길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생명성에 다가가는 것이다. 나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를 위하여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타자의 고통을 내 것처럼 아파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밀 때 우리는 좀더 나은 인간성을 획득한다. 아무리 즐겁고 풍요로운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실재와 궁극적인 진리, 완전한 자유와 해탈,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규정과 한계를 포월(匍越)할 때 우리는 거룩한 존재로 거듭난다.
하지만, 위와 같은 대안도 인공지능 시대로 가면, 근대적 사유의 연장일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에 근대적 인간, 안드로이드, 사이보그가 공존한다. 인공지능 시대나 과학기술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에 반감을 가지는 극히 소수의 인간들은 근대적 인간의 특성과 존엄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유한성을 인간성과 동일시하며 신과 짐승의 대립자로 남을 것이다. 물론, 거의 모든 것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기에 ‘쓸모가 없어진’ 대중들, 업그레이드를 하기 어려운 하층의 인간 또한 주변화하여 근대적 인간으로 잔존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엘리트들은 인공지능 기계를 몸에 장착하여 건강과 수명, 행복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지능과 능력을 극대화하면서 스스로 호모데우스가 될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약 인공지능, 강 인공지능, 초인공지능으로 진화할 것이다. 인간과 사이보그는 이들과 공존, 공진화를 모색할 것이다. 하지만, 초인공지능의 안드로이드가 공진화를 거부하고 인류의 지배나 박멸의 길로 나설 수도 있다. 이 경우 인류 문명은 사라질 것이다.
나의 뇌를 가진 기계, 나의 뇌를 그대로 복제하여 나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홀로그램, 양자얽힘에 의해 만들어진 나는 나인가, 아닌가. 이는 정녕 내가 아니다. 비슷한 것은 비슷할 뿐, 가짜다. 하지만, 나란 존재 자체도 오온의 결합체로 공(空)이다. 하여튼, 이런 과학기술들이 가능해지면, 윤리적인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까지 혼란에 놓일 것이다. 다만, 모든 존재라고 생각한 것들이 오온의 결합체로서 공(空)이며, 제법이 무상하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무아(無我)라는 불교적 교리가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데 유리한 원리로 부상할 것이다.
7. 맺음말
지금 성찰하고 지속 가능한 실천을 하지 않으면 인류는 머지않아 사멸하거나 인조인간이나 디지털인간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 임계점으로 다가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종점을 내다보며 일단 멈추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은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인 동시에 생각과 실천, 타자와 연기적 관계를 통하여 본성을 구현하고 거듭나는 상호생성자(inter-becoming), 곧 눈부처-주체다. 우리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추구하며 팔정도(八正道)를 행하고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서로 선을 증장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죽임의 문화에 맞서서 우리는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고 모든 생명이 나의 삶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으면서 역동적으로 서로 생성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과 생명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면서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병처럼 아파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자비심을 가지고 연기적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인공지능 생명체의 출현을 맞아 생명을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차이를 생성하는 공(空)’으로 정의하고 이에 부합하는 생명철학과 윤리를 정립해야 하며, 4차 산업 혁명에 맞서서 여실지견하게 실제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며 권력과 자본에 올곧게 맞서며, 자본을 해체하거나 견제하고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생명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모든 장애를 종합할 때,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최고의 대안은 비우고 나누는 것이다. 서로 눈동자에서 눈부처를 바라보고 자신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무아와 무상을 진정으로 깨달아 모든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그를 섬겨서 부처로 만들 때 비로소 나 또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삶의 목적, 지속의 목적이 있는가.
모든 것이 무상하다. 무상하기에 우리는 영원한 실재와 궁극적 진리를 추구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가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죽음을 수용하고서는 하루, 한 시간을 의미로 가득 채우고 사랑하는 이를 지성으로 대하듯, 죽음에 다가갈수록 삶은 의미로 반짝인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알기에 그에 연민하고 공감한다.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 바로 불성이다. 끊임없는 영겁의 반복 속에서 오로지 차이만이 소중하다. 차이의 기억이 문명이다. 138억 년의 시간 가운데 ‘지금’, 465억 광년에 달하는 무한한 공간 가운데 ‘여기’에, 함께 존재하는 너와 나, 우리 둘레의 자연과 생명들이 기적이다. 이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수천 년 전에 이미 폭발하여 사라졌음에도 그 별의 잔해들은 지금 새로운 별을 만들고 있으며 거리의 차이로 인하여 우리 머리 위의 하늘에서 밝게 빛나며 수많은 의미들을 품게 만든다. 그렇듯, 설혹 우리가 모두 사라진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상대방의 눈부처를 바라보며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하고 나누고 섬기면서 차이를 빚는 것이야말로 이 광대한 우주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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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원래 51개의 각주가 있었지만 필자의 요청에 의하여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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