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

아티샤의 명상요결 - 앨런 월리스, 황학구 번역, 청년사

수선님 2024. 4. 7. 13:06

- 앨런 월리스, 황학구 번역, 청년사

티베트인들이 로종 lojong 이라 부르는 마음수련법.

로종은 우리의 마음이 불안, 걱정, 덧없는 쾌락, 좌절, 희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더러운 웅덩이가 아니라 깨끗한 기쁨의 저수지가 되도록 우리의 관점을 바꾸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은 그저 조용히 앉아서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실재와 일치시키는 새로운 태도를 계발하는 것이다. 관점들은 마치 휘어진 척추처럼 교정이 필요하다.

‘로’는 태도, 마음, 지성, 관점을 의미, ‘종’은 훈련, 정화, 치료를 의미. 따라서 ‘로종’은 ‘태도의 훈련’으로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 있고, 여기서는 ‘마음수련 mind-training 이라 한다.

인도불교의 스승들인 Maitriyogin 과 Dharmarakshita 와 Selingpa 의 계보를 통해서 아티샤(Atisha Dipankara 982~1054)에게 전해진 가르침을, 그가 티베트에 전해서 로종 가르침의 구전 전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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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요결 전문

아티샤의 구전 전통에 기초하여

체카와 예셰 도르제 Chekwa Yeshe Dorje가 기록하다

첫 번째 요결 : 예비적인 것들 - 마음을 전환시키는 네 가지 생각

먼저, 예비적인 것들을 수련하라.

두 번째 요결 : 절대적인 보리심과 상대적인 보리심을 계발하는 것

일단 그대가 안정성을 성취했다면, 신비를 드러내라.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라.

치유 방법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그 길의 본성은 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는 것이다.

명상의 중간에는 가상의 사람이 되라.

교대로 주고받는 수련을 하라.

당신의 호흡에 두 가지 모두를 태우라.

세 가지 대상, 세 가지 독, 세 가지 덕의 근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말을 사용해 수행하라.

세 번째 요결 : 역경을 영적인 각성을 위한 도움으로 변형시키는 것

전 세상이 악의 노예가 될 때, 역경을 영적인 각성을 위한 도움으로 변형시켜라.

하나의 범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라.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서 숙고하라.

명상의 현상들을 네 가지 몸으로 명상할 때, 텅 빔이 최고의 보호책이 된다.

최고의 전략은 네 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날 때마다 즉시 명상에 적용하라.

네 번째 요결 : 한 생을 위한 수행의 종합

실제적인 지침의 정수를 종합하고자 한다면, 다섯 가지 힘에 전념하라.

의식을 변화시키는 대승의 가르침은 바로 이 다섯 가지 힘이므로, 당신의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다섯 번째 요결 : 마음수련에 있어서 숙달의 기준

모든 다르마는 하나의 목표로 통합된다.

두 목격자 중 주요 목격자에 주의를 기울이라.

항상 즐거운 마음에 의지하라.

여섯 번째 요결 : 마음수련의 서약들

항상 세 가지 원칙을 지키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바꾸되, 있는 그대로 머물라.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말하지 말라.

보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라.

독이 든 음식을 피하라.

독선에 빠지지 말라.

악의로 비꼬지 말라.

매복하며 기다리지 말라.

조의 짐을 소에게 지우지 말라.

정상이 되려고 아첨하지 말라.

가식을 피하라.

신을 악마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라.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지 말라.

일곱 번째 요결 : 마음수련의 교훈들

모든 명상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라.

모든 낙담의 시기들을 한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라.

시작과 끝에 두 가지 임무가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일어나든 인내하라.

목숨을 걸고라도 두 가지는 지키라.

세 가지 어려운 것을 수행하라.

세 가지 중요한 원인을 획득하라.

세 가지가 약해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계발하라.

세 가지 덕행에서 분리되지 않게 하라.

항상 특수한 사람들을 명상하라.

다른 요소들에 의존하지 말라.

이제 중요한 것을 수행하라.

과오를 범하지 말라.

불규칙적으로 수행하지 말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라.

조사와 분석으로 당신 자신을 해방시키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 애쓰지 말라.

화에 사로잡히지 말라.

신경질 내지 말라.

감사를 바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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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의 목적은 다르마를 삶의 모든 면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요결 : 예비적인 것들 - 마음을 전환시키는 네 가지 생각

먼저, 예비적인 것들을 수련하라.

1. 희유하고 소중한 인간 삶의 여가와 기회

2. 죽음과 무상

3. 윤회계의 불만족스러운 본질

4. 카르마

다르마dharma 수련의 목표는 순수하고 명확한 의식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참된 행복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행복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감정적 상태들을 받쳐주고, 채우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포용하는 존재의 한 상태이다. 그것은 혼란 없이 삶과 교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다르마의 한 가지 의미는 단순히 진리, 특히 그것을 실현하면 즐거운 자극의 조건으로 하지 않는 참되고 영구적인 행복의 상태로 인도하는 그런 진리를 의미한다.

다르마를 식별하는 기준 1) 영적인 각성으로 인도하는가. 2) 이 삶에서나 이 삶을 넘어서 영적인 각성을 돕는가. 3)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방식으로 모든 사건들과 접촉하는가.

영적인 수행에서 ‘예비적인 것들’은 우리의 노력을 궁극적인 목적지로 향하게 해주는 나침반으로 작용한다. 다르마 수행의 초기와 그 이후에 정기적으로 ‘예비적인 것들’로 돌아가는 것은, 영적인 수련을 잘 조율시키며 쓸데없이 우회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

예비적인 것들은 워밍업이 아니고, 추론적인 명상discursive meditation이다. 명상은 단지 마음을 가라앉혀서 고요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개선시켜 개념적 사고에 형태와 의미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 진짜 다르마인지 유사 다르마인지 결정짓는 것은 결국 ‘예비적인 것들’을 수행하는 자질이다.

예비적인 것들은 “마음을 전환시키는 네 가지 생각”이라 불리는 전통적인 네 가지 추론적 명상이다.

1. 희유하고 소중한 인간 삶의 여가와 기회 - 8개의 세속적 관심사

2. 죽음과 무상 - 죽음 명상

3. 윤회계의 불만족스러운 본질 - 고통, 삼독

4. 카르마 - 저장고, 동일시와 집착, 십악업과 십선업, 환생, 네 가지 치유능력

네 가지 추론적 명상의 목적은 영적 수행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지고 결국 모든 순간을 수행을 위한 기회로 인식하도록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다.

1. 희유하고 소중한 인간 삶의 여가와 기회

이것은 자유로운 시간을 높이 평가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문화에서 여가 시간은 종종 밀린 업무를 처리하거나, 남보다 성공하거나, 다시 일을 하기 위한 배터리 충전으로 소모된다.

일을 하는 것이 점점 영적수련을 도와야지, 영적수련이 단지 일의 성과를 증진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공은 영적 수행의 목표가 아니다. 성공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들은 편견에 기초하고 있고, 우리가 참된 성공과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는 영속적인 악순환의 요소이기도 하다.

다르마의 이익들은 여가와 기호, 그리고 능력과 환경의 운 좋은 결합에서 생긴다. 인간의 삶에서 어느 때라도 이러한 요소들을 함께 가지기는 ‘희유’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소중하다.

“8개의 세속적 관심사”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기초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여덟 개의 입장이다. 이런 관심사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최상의 노력을 파괴하고, 거짓 성공이나 확실한 좌절로 인도한다.

네 쌍의 우선순위로 되어 있는데, 물질적 획득의 추구와 손실의 회피, 자극으로 야기되는 쾌락의 추구와 불쾌의 회피, 칭찬의 추구와 비난의 회피, 명성의 추구와 악평의 회피. 이 여덟 개의 관심사들은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동기를 요약해 준다. 다른 요인보다도 바로 이 동기가 영적인 수행의 결과를 결정짓는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칭찬받든 비난받든, 자극으로 즐겁든 지루하든, 명예롭든 악평을 듣든, 이 세속적인 관심사들의 그 무엇도 그 자체로 행복의 근원은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행복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행복의 수단으로 세속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출 때 삶은 하나의 도박이 된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요결의 목적은 시간의 절약이다. 여든 살이 되어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의 결점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지금 당신의 우선순위를 탐구하라. 그런 세속적 관심사들을 모두 거부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당신의 우선순위를 다른 어떤 것, 즉 참된 다르마로 바꾸는 것이다. 일단 우선순위가 바뀌면 세속적 관심사들은 다르마 수행의 후원자 역할을 한다.

‘소중함’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삶이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가 아님을 지적해 준다. 희유하고 소중한 인간 삶이 소중한 까닭은 고통을 제거하고 참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의 첫번 째 단계는 감정이입이다. 감정이입과 함께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은 자비심의 불을 위한 연료가 된다.

 

2. 죽음과 무상

죽음과 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목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보다 더 영속적으로 바라보는 인간 마음의 유해한 습관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조건지어진 것은 모두 무상하다고 가르치셨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당신의 무한한 잠재성을 갉아먹는 사소한 일에 대한 몰두에서 당신을 해방시킨다. ...바로 지금 당신이 가진 기회를 보게 하고, 그 기회들이 아주 제한된 시간 동안만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 기회들을 잘 활용하게 하려는 것이다.

* 죽음에 대한 명상

1) 죽음의 불가피성

2) 죽음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

3) 죽음의 면전에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하는 것.

모든 종교 전통에서 제기된 죽음에 관한 주요 질문은 죽는 자는 누구인가이다. 부처님이 “죽음 없는 것”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동일시나 집착이 없는 광대하고 생기 있고 주의 깊은, 순수한 의식이다. 내가 육체와 기억과 욕망과 느낌에 동일시되지 않는다면 누가 죽겠는가?

“죽음의 밝은 빛”은 의식이 최초의 상태로 녹아드는 상태, 더 이상 인간적인 것과 무관하고 뇌의 기능에 의존하지 않는 상태다. 이 최초의 상태는 완전히 초개인적이지만, 바로 우리 존재의 본질이다.

모든 장애가 사라지는 하나의 명상 시간은 죽음의 과정이다. 티베트 불교 전통은 죽음의 밝은 빛을 유지하고 환생의 조건들을 선택할 수 있는 명료함과 자유를 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티베트불교 전통에서 죽음은 명상을 위해서 삶이 제공하는 최상의 기회로 간주된다. 당신은 죽음이 제공하는 기회를 준비할 수도 있고, 놓아두고 가야 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며 미쳐 날뛸 수도 있다. 부처님은 죽음과 무상에 대한 인식이 모든 분별력 중에서 우리의 삶을 급진적으로 다르마의 길로 돌리는 가장 강력한 분별력이라고 말씀하셨다.

 

3. 윤회계의 불만족스러운 본질 - 고통, 삼고, 의식의 흐름과 삼사라, 삼독

“삼사라 속에 넘치는 고통과 불만에 대한 명상”

고통에 대한 추론적 명상의 목적은 우리가 가치를 두는 모든 세속적 추구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3-1. 다양한 형태의 고통 = 삼고(三苦)

1) 고통의 고통(苦苦) : 육체적, 정신적인 명백한 고통.

2) 변화의 고통(壞苦 괴고) : (네이버) 집착을 갖는 사물이 파괴·변화해 갈 때 느끼는 정신적 괴로움.

3) 조건화된 존재에 널리 퍼져 있는 고통(行苦) : ‘근본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의 고통’, 동일시와 집착.

2) 변화의 고통(壞苦) : (네이버) 집착을 갖는 사물이 파괴·변화해 갈 때 느끼는 정신적 괴로움.

쾌락, 행복, 만족과 같은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우리의 상태는 한편으로는 잘 성취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사건들에 의존하며, 그것은 고통의 상태로 간주된다. ...이 모든 사건들은 조건 지어져 있고 변화하기 쉽다. 불교도들은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근원에 관심이 아주 많고,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쾌락들을 참된 행복의 근원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쾌락들이 상대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지만, 행복의 참된 근원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한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 그리고 우리는 삼사라의 바다 속에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모두 불만족스럽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쾌락으로 경험하는 것은 단지 불만족이 상대적으로 감소되는 것일 뿐이다. 자극에 의존한 즐거움에서 오는 행복은 잘못은 아니지만, 이러한 행복의 상태는 단지 덧없는 고통의 감소일 뿐이다. 즐거운 자극이 제거될 때 마음은 다시 습관적인 상태인 고통의 상태로 돌아간다. 고통의 진정한 근원은 우리의 경험 속 더 깊숙한 곳에, 일시적인 고통의 감소 아래 놓여 있다.

자극이 제거된 감각 박탈의 상태에서는 정신적 고통의 미묘한 형태인 지루함이 생긴다. 즐거운 방식으로 마음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없을 때, 우리는 지루함을 넘어 외로움과 불안과 불행에 빠진다. 파스칼은 현대인에게 가장 큰 고통이 “자신의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환경이 고통의 원인은 아니다. 우리의 고통은 마음의 근본적인 고통 때문이다. ... 자극이 제거될 때 고통으로 보이는 것은 불교도들이 ‘변화의 고통’이라 부르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본성이다.

3) 조건화된 존재에 널리 퍼져 있는 고통(行苦) : ‘근본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의 고통’

(네이버)현상계[有爲法]가 모두 무상하기 때문에 윤회(輪廻)를 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괴로움.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의 본성 때문에 깊이 상처받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것이 사물의 본성이다. 고통은 실재의 일부이다.

‘상처받기 쉬움의 고통’에 대한 불교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개인적 정체성의 구성 요소와 동일시하거나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우리가 몸과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과 마음의 동일시를 피할 대안은 있는가? 불교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당신 자신의 마음과 정체성의 본질을 깨닫고, 몸의 본질을 이해하고, 통찰력의 검으로 고통의 뿌리를 자르라.

고통에 대한 열쇠라고 불교에서 생각하는 ‘상처받기 쉬움의 고통’은 서양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는 왜 상처 받기 쉬움의 고통을 가지는가? 우리는 우리의 몸,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자아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육체적 고통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아라한들은 육체적 고통을 생생하게 경험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완전히 깨달은 부처는 더 멀리 나아간다. 부처는 자신의 정신적 고통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며 생생하게 알고 있다. 부처는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고통과 쾌락의 이분법을 넘어선, 의식의 궁극적인 근본 상태와 변하지 않는 지복을 누린다. ...무조건적인 지복의 불성이 드러남과 함께, 나와 상대방 사이의 절대적인 경계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장벽은 사라졌다. 그런 이유로 부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희망과 두려움 같은 그 모든 상황을 생생하게 공감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의식의 순수와 지복에서 초연하지 않다.

 

3-2. 의식의 흐름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좋든 싫든 당신의 믿음 체계와는 무관하게 이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 중단되지 않은 의식의 흐름이 있다. .... 뇌는 의식을 산출하지 못하지만 의식의 조건이 된다. 의식의 흐름은 한 평생을 통한 인상, 기억, 습관을 저장하는 하나의 연속상태이다. ...개인의 의식은 수태에 앞서 존재하고, 이전의 단 하나의 연속체에서 생기며, 이번 생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환생은 우리의 습관적 집착에 의해서 추진된다.

우리가 습관적 방식으로 계속 행동한다면 탈출구는 없다. ...삼사라(윤회)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삼사라는 습관적 패턴의 연료를 공급받는 한 그 자체의 운동량으로 움직인다. ...삼사라는 오직 우리가 혁명적인 조치를 취해서 어리석음의 습관적 패턴을 깰 때에만 멈춘다.

3-3. 삼독(三毒) : 세 가지 근본적인 정신적 번뇌.

불교의 가설에 따르면, 매일 그리고 매순간 우리가 정신적 고통을 경험할 때, 그 원인은 세 가지 정신적 번뇌 중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1) 치(痴) : 망상, 어리석음 : 불교 용어의 ‘어리석음’은 철학용어인 ‘구상화(具象化, reification)’를 포함하며, 본래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구체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리석음은 결국 “나는 존재한다.나는 독립적이다. 나는 분리되어 있다. 나는 영원하다.”라는 생각으로 귀착된다. 우리의 자아가 본래 존재하고 있고 독립적인 실체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이 모든 정신적 번뇌의 원인이다.

2) 탐(貪) : 첫 번째 번뇌인 어리석음에서 두 번째 근본적 번뇌인 탐욕이 생겨난다. 탐욕은 단지 욕망일 뿐 아니라, 대상에 우리가 바라는 성질을 부여하고 또한 바라지 않는 성질을 없애는 것도 내포한다. 그 결과는 갈애(渴愛)다. 탐욕은 하나의 대상을 이상화하는 왜곡된 의식이다.

3) 화[진(瞋)] : 화, 증오나 반감. 화는 집착의 자연스러운 짝이다. 화는 우리가 싫어하는 성질을 어떤 대상에 부과해서 바라보고, 좋아하거나 중립적인 성질은 배제한다. 화로 인해서 자주 일어나는 결과는 공격성이다.

누군가에게 정말 화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에 갇혀 있고, 이 구상화는 망상을 바라보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판단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것을 바라볼 때 망상을 인식하고, 망상을 인식함으로써 그 토대를 허물고 궁극적인 보리심의 지혜가 생기게 하라.

3-4. 고통의 원인

고통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고통의 원인을 ‘저기 밖에 있는 것’, 즉 다른 사람들, 교통 상황, 환경, 정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부정확한 분석, 그릇된 견해다. 우리의 상황에 대한 불교의 혁명적인 분석에 따르면, 고통의 원인은 정신적 번뇌다. 정신적 번뇌가 어떤 방식으로 촉진될 때 우리는 고통을 받는다. 고통의 실제적 원인은 ‘저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상황과 다른 사람들은 단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인가에 방아쇠를 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할 뿐이다.

행복은 어떤가? ...불교의 가설은 행복이 당신의 생득권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행할 것은 오직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타고난 자연스러운 행복을 방해하는 행위를 멈출 때, 상처에 흙을 던지는 것을 멈출 때 행복은 자연스럽게 샘솟기 시작한다. 불교의 관점에 의하면, 우리가 행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행복을 질식시키는 무자비한 노력을 중지하는 것이다. 다르마의 참다운 정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참 행복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4. 카르마 - 저장고, 동일시와 집착, 십악업과 십선업, 환생, 네 가지 치유능력

4-1. 저장고, 동일시와 집착

카르마는 ‘행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단어다. ...카르마는 행위들의 본질과, 장기간에 걸친 그 결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종결되는가를 다룬다. ...불교에서 우주는 단조로운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도 실재는 하나의 도덕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카르마의 응보들은 깊다. 그것들은 이생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에 걸친 의식의 연속 상태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깨달은 의식의 관점에서 부처님의 주장은 환생에 일관성이 있으며, 어떤 형태의 행위는 어떤 형태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일관성을 ‘카르마’라 부른다.

정신적 행동을 포함한 모든 행동은, 경험의 ‘연속 상태’일 뿐 아니라 일종의 ‘저장고’인 하나의 연속체에 씨앗 혹은 인상을 남긴다. 이 연속체는 습관적 성향들로 가득 차고 경험으로 형성된다. ...정신적 연속체 역시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형성된다. 어떤 유형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은 하나의 경향, 습관, 틀을 강화시키고 발전시킨다. 그 행동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그 습관이 더 깊이 뿌리박힐수록 더 쉬워진다. 어떤 습관은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발전한다. ...외부의 사건으로 촉발된 일련의 행위로 강화된 하나의 습관이 카르마의 한 가지 유형이다.

다행스럽게도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 있다. 건전하지 못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에 집착해서 ‘난 이 생각이 좋아, 난 저 생각이 좋아.’하고 생각한다면, 카르마 미터기가 똑딱거리기 시작한다. 당신이 명상하고 있을 때 역겨운 이미지나 욕망이 일어나도 아무 문제 없다. 심술궂고 시기하고 이기적인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으로는 부정적 카르마를 축적하지 않는다. 당신이 집착하지 않는 한 부정적 생각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 해가 없다. 생각이 제 스스로 일어나고 저절로 사라질 때, 당신의 마음이 빈 허공처럼 머무른다면 거기 카르마의 축적은 없다. 문제는 부정적 생각에 달라붙는 고착된 의식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난 저 생각이 좋아, 아,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동일시와 집착이 문제다.

마음을 왜곡시키는 화와 질투와 갈망의 생각들이 일어날 때, 당신은 그것들과 동일시하지 않고 주위에 하나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당신은 바로 정신적 과정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주의력을 연마함으로써, 집착과 카르마의 축적을 끊을 수 있다. 이것을 성공하면 강력한 방편으로 작용한다. 당신이 바로 그 생각의 시작에 주의할 수 있다면,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시작할 찰나에 그저 생각의 본성을 지켜봄으로써 카르마의 영향은 마치 칼로 베는 것처럼 단절된다.

누군가에게 정말 화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에 갇혀 있고, 이 구상화는 망상을 바라보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판단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것을 바라볼 때 망상을 인식하고, 망상을 인식함으로써 그 토대를 허물고 궁극적인 보리심의 지혜가 생기게 하라.

4-2. 십선업과 십악업

불교의 근본적인 도덕 혹은 카르마적인 체계는 십선업과 십악업이다. ...건전하지 않고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는 것은 이생과 다음 생에 그것이 마음의 흐름 속에서 성숙할 때 잠재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씨앗을 뿌린다.

몸에 세 가지(身業), 말에 네 가지(口業), 생각에 세 가지(意業)의 악업이 있다.

신업은 살생, 도둑질, 사음(邪淫)이다.

구업은 가혹한 욕설의 말(惡口, 빈정거림도 포함), 거짓말(綺語), 비방이나 이간질(兩舌), 한가한 잡담(妄語) 등이다. 한가한 잡담은 인생을 낭비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이것은 집착, 화, 질투, 자만심, 미망과 같은 정신적 번뇌로 야기된 말이다. 한가한 잡담의 결과는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그것은 정신적 번뇌를 강화하고 부정적 카르마를 축적한다.

의업은 진심(嗔心, 왈칵 성내는 마음), 탐심, 치심(癡心,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는 마음)이다. 치심은 십악업 중에서 가장 해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잘못된 견해는 실재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말한다.

불교의 십악업에 상대되는 것은 십선업의 목록이다.

모든 선업과 불선업은 이생이나 다음 생에 열매 맺을 카르마의 씨앗인 인상들을 마음의 흐름에 심는다.

4-3. 유사, 환생

카르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남을 도우는 성향을 누군가 계발한다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카르마의 결과는 이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자비심을 부여받을 것이다. 불교도들은 아이들의 차이점을 부분적으로 카르마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유전적이거나 환경적인 영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도가 아이의 마음을 백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생의 영향으로 인해, 유정물들은 심지어 수태 이전에도 강하게 조건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건강한 습관을 기르는 것이 다르마 수행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다.

우리는 인간적인 지성과 형태에 너무 많이 동일시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형태로 태어나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다른 영역과 공통점이 많다. ...‘동물적 욕구’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영위하고, 온갖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인간의 지성과 경험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모양만 인간일 뿐이며 동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많이 지배되는 삶은 동물의 환생으로, 욕망에 많이 지배되는 삶은 아귀의 환생으로, 악의와 잔인함에 많이 지배되는 삶은 지옥의 환생으로 인도된다는 것이 불교의 일반적 가르침이다.

* 카르마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의도한 바를, 사람들은 아주 불행히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단지 그들 자신만의 책임이라고 오해했다. 부처님은 병이나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의 고통을 아이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고통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은 의식의 연속체에 새겨진 하나의 행위는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그 행위는 이번 생이나 또는 아주 오래전 생에서 일어났을 수 있다. 이것은 오염된 음식을 먹은 결과로 고통받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로보는 사람에겐 오직 하나의 합당한 응답 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이다. 누군가의 카르마가 열매 맺어 고통을 일으킬 때, 그 응답이 “이것은 너의 카르마, 운명이다. 나는 도울 수 없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 받는 사람을 돕는 하나의 기회가 당신 자신의 카르마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4-4. 네 가지 치유 능력 = 참회, 신뢰, 결단, 정화

불교의 가르침은 의식의 흐름에 새겨진 부정적인 카르마의 씨앗들을 무효화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행위는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지만, 카르마 씨앗들의 영향이 무효화 되도록 마음의 흐름을 정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마음의 흐름을 정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네 가지 치유 능력’이다. ...카르마는 그 씨앗이 싹트지 않도록 정화의 불 속에 태울 수 있다. 그 씨앗은 없어지지 않지만 싹트지는 않을 것이다.

1) 참회.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는 것.

선업에 기뻐하는 것은 긍정적 카르마를 강화시킨다. 총카파는 선업의 마음을 강화시키는 가장 쉬운 길이 선업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다.

참회는 죄의식과 결부될 때 위험하다. 참회는 하나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건강하다. 죄의식은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다.’라는, 자아에 초점이 맞추어진 괴로운 마음의 상태다. 죄의식은 부정적 성향을 둘러싼 자아의 구체화이며, 또 다른 정신적 고통일 뿐이다. 반면 올바르게 행해진 참회는 건강하지 못한 성향을 벗어나는 일에 아주 유익할 수 있다.

2) 신뢰 :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을 계발하는 것, 영적으로 깨달은 존재들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

3) 결단 : 잘못된 행동에서 돌아서는 것.

4) 정화의 행동 : 부정적인 행동을 중화하고 무효화하는 무엇인가를 행하는 일. 살인에 대한 생명 보호. 불교 전통은 네 가지 치유 능력을 통해서 가장 악독한 행위의 힘조차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

고해의 순환 밖에 있는 정화의 강력한 원천인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주는 것)의 영향이 있다. 깨달은 존재들의 자비와 연민과 가피의 힘은 무한하다고 한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가피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 믿음이 없다면, 조심스럽게 십선업을 쌓고 십악업을 피해도 좋을 것이다.

*** 이론적인 이해는 요리책에 있는 조리법과 같고, 조리법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다. 영적인 수행에 대한 지속적인 영감은 오직 다르마 수행에서만 온다. 수행 그 자체가 당신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주고, 고통을 감소시켜준다. 다르마의 이익은 다르마 수행 그 자체로 판단된다.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의 다양한 악과 깊은 고통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두 번째 요결 : 절대적인 보리심과 상대적인 보리심을 계발하는 것

일단 그대가 안정성을 성취했다면, 신비를 드러내라.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라.

치유 방법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그 길의 본성은 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는 것이다.

명상의 중간에는 가상의 사람이 되라. --> 절대적인 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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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로 주고받는 수련을 하라.

당신의 호흡에 두 가지 모두를 태우라.

세 가지 대상, 세 가지 독, 세 가지 덕의 근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말을 사용해 수행하라. ----> 상대적인 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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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보리심을 가지고, 우리는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 실재의 본성을 탕구한다. 상대적인 보리심은 모든 유정의 존재들을 위해서 완벽한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한 이타적인 열망이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성취를 위한 갈고리다. 또한 계속적인 수행을 위한 기초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완벽한 깨달음의 열망은 시간이 지나도 수행의 연속성을 제공하고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깨달음을 향하여 당신을 자석처럼 끌어 당길 것이다.

두 번째 요결은 다르마를 활동적인 일상의 삶에 통합시키기 위한 매일의 명상수련으로 시작된다

2-1. 일단 그대가 안정성을 성취했다면, 신비를 드러내라.

* 안정성 1. 믿음

2. 명상적 안정성 - 동일시의 타파

정념과 정지

2-1. 마음 다잡기 - 호흡에 집중

2-2 . 마음을 풀어 놓기

* 신비 : 객관적 현상과 마음 그 자체의 궁극적 본질

# 안정성(stability)은 산스크리트어 samadhi 이다. -- equanimity

삼매는 마음과 실재의 궁극적 본질을 명상으로 탐구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명상적 안정성이고 정신적 평정이다. 마음이 안정되고 정제될 때, 그것은 탐구의 수단이 되고 지혜와 자비의 계발을 위한 토대가 된다. 이것은 신비를 드러내기 위한 본질적인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명상적 자세에서 사용되는 손짓, 즉 무드라는 두 번째 요결의 목적인 절대적인 보리심과 상대적인 보리심의 합일을 상징한다.

안정성의 성취는 두 번째 요결의 핵심이며,...1. 믿음 또는 신뢰, 2. 명상적 안정성 이다.

1. 믿음

2. 명상적 안정성 - 동일시의 타파

정념과 정지

2-1. 마음 다잡기 - 호흡에 집중

2-2 . 마음을 풀어 놓기

1. 믿음

우리가 정말 알고 싶어 한다면, 불가지론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심한다면,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내가 정말 불가지론자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발견을 누군가 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의식의 존재를 아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여러분들이 이 가르침이 올바르고 유용하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수행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다른 것을 계속 찾아보세요.”

* 세 가지 종류의 믿음 = 신앙의 믿음, 선각자와 그 가르침, 열망.

1-1. 신앙의 믿음

부처님의 일부 주장은 “임시방편적 진리”라 부르며, 영적 발전의 특정한 국면에 있는 특수한 개인이나 공동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상황에 맞게 주어진 것이다. ‘절대적 진리’들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참된 발견으로 제시된 것들이다. ...불교 전통은 식별지識別智를 연마하는 것이 영적인 성숙의 길에 중요한 요소라 한다.

1-2. 영적인 깨달음의 높은 상태를 성취한 사람들과 그 가르침에 대한 존경

1-3. 열망의 믿음

수행을 함으로써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시험하려는 열렬한 욕망.

수련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가? 정신적 번뇌들이 사라지고 참된 행복이 증가하는가? 영적인 깨달음의 길을 따르는 데는 끊임없는 경계와 평가와 재평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그 길’만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따르는 우리의 지성과 인내력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노력도 동시에 평가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안정성 혹은 믿음을 준다.

우리에게 통찰력과 더 깊은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믿음들은 종종 자기암시적인 예언으로 작용한다.

2. 명상적 고요 = 止 samatha

불교의 영적 수련에서 필수조건인 주의력(attention) 의 훈련이 사실 현대 서양에서 무시되고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지난 천 년동안은 잘 발달되고 조직화된 주의력의 훈련 방법이 결여되었다.

실재를 탐구하는 데 사용된 도구가 기계라면 그것은 최고의 작동 상태에 있을 필요가 있다. 마음 자체가 실재를 탐구하는 도구라면 마음은 최상의 작용 상태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안정성’의 의미다.

불교의 전통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일반적으로 엉망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균형적이고 뒤틀리는 마음의 성향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화 같은 정신적 번뇌들 때문이다. ...의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사용되는 유일한 도구는 마음 그 자체다. ...두 번째 요결은 안정성과 명확성(vividness)을 훈련함으로써 마음을 믿음직한 도구로 만든 다음, 마음을 사용해서 신비 즉, 객관적 현상과 마음 그 자체의 궁극적 본질을 드러내라고 말한다.

주의력을 훈련하는 것에는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 정념 mindfulness = 선택한 하나의 대상에 산란함이 없이 연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

* 정지 introspection, sampajanna, meta-cognition

=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주의력의 성질을 식별한다.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정지로 알아챌 때, 마음을 계속 되돌리라. ..그 기법은 마음이 활동 중일 때 그저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당신의 명상이 희미해지고 무기력이나 게으름이나 졸음으로 변하는 것을 알아챌 때, 일어나 밖으로 나가 잠시 쉬며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라.

정지의 기술을 계발하는 것, 즉 자신의 마음 상태를 검사하는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은 명상적 안정성을 위한 구체적 목표다.

윌리엄 제임스 “방황하는 주의력을 자발적으로 거듭 되돌리는 능력은 사려분별과 인격과 의지의 근본이다. 이러한 능력을 증진시키는 교육이 최상의 교육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매한 이상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지침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2-1. 마음 다잡기 control

주의력의 안정성을 계발하기 위해 호흡 같은 하나의 대상을 사용하는 것.

주의력의 안정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선택한 대상에 주의력이 유지되는지를 관찰하라.

주의력의 명확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명료한지 아닌지를 관찰하라.

2-2. 마음 풀어놓기 release = 족첸 전통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는 것

마음속에 있는 모든 독소는 특별한 해독제를 사용할 필요 없이, 단지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흐름을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정신적 독소들이 생겨날 때조차, 이런 식으로 마음이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 독소들은 아무 노력 없이 사라진다. 마음풀어놓기 접근법에는 주의를 집중할 어떤 대상도 없다.

* 호흡에 정념하는 수행

p 98 - 102

호흡 그 자체는 즐거운 대상도, 고결한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중립적이며 어떤 첨가제로도 채색되지 않은 깨끗한 물의 흐름과 같다. 하지만 호흡에 주의를 집중할 때, 마음은 욕망이나 혐오를 일으키는 개념적, 지각적 자극으로부터 벗어난 명료한 의식 상태에 머문다. ...즐거운 감각적, 지적 자극 없이 행복을 발견할 수 있고, 약물 없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인가?

호흡에 정념하는 수행은 욕망과 혐오를 일으키는 싫다 좋다 하는 개념적, 감각적 자극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킨다. 그렇게 할 때 마음은 이미 저절로 치유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수행은 여전히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므로, 고요를 계발하는 방법으로 수행하는 이 다잡기 유형의 방법에서 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 그래서 풀어놓기 방식이 또 필요하다)

* 풀어놓기 방식

자연스러운 상태’는 습관적인 마음의 상태가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마음의 상태에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주의력을 훈련시키는 풀어놓기 유형의 정수는 산란함 없이, 집착 없이 의식을 쉬게 하는 것이다. ‘산란함 없이’는 마음의 공간에 무엇이 떠다니든 휩쓸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집착 없이’는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나 감정에도 마음속으로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상들이 일어나서 스스로 진행되어 간섭 없이 사라지게 하라.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는’ 이 수련에서, 당신은 모든 종류의 집착들(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감정들뿐만 아니라 중립적인 느낌들)을 놓는다. 마음의 자가치유 능력은 더 깊어진다. 정신적이고 감각적 대상에 대한 모든 이원적 집착을 놓아버릴 때, 원초의 의식은 어둠의 베일을 뚫고 점점 더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수련 방법 : 눈을 뜨고 앉아 시선은 당신 앞의 공간에 두고 어떤 대상에도 집중하지 말고 마음에 주의하라. 외부의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당신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라. 형상과 색은 시각에서 생기고, 소리는 청각에서 생긴다. 또한 마음의 장에만 있는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과 심상과 느낌과 기억과 상상력이다. 당신의 의식을 다양한 감각들의 장으로 확장시키지 말고, 의식 자체의 영역인 마음의 장 안에서 쉬게 하라. 그런 정신적 현상들이 생기고 스스로 진행되고 사라지는 마음의 장 속으로, 당신의 의식을 가져올 수 있는지 보라. 몸은 마치 산처럼 정지해 있고, 의식은 허공처럼 열려 있고, 마찰이 없게 하라. 호흡은 자연스럽고 강제적이지 않도록 하라. 의식을 마음의 장으로 가져와 자세히 주의를 기울이라. 당신의 의식의 본래의 명료함과 광명이 나타나서 마음의 공간에 밝은 빛을 비추도록 하라. 당신의 의식이 과거의 상념과 미래의 추측에 빠져 들지 않고, 바로 현재에 머물게 하라. 우리가 아주 쉽게 동일시하는 감정을 포함해서 온갖 종류의 정신적 현상들이 일어날 때, 당신의 의식을 쉬고 개입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텅 빈 허공처럼 정적의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하라. 무엇이 일어나든 관찰하라. 감정과 심상과 기억과 생각의 지시물에 집착하지 말고 그 현상들 각각의 본질을 관찰하라. 그런 현상들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멈추는 데 어떤 노력도 하지 말고, 정신적 현상들의 본질 그 자체에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라.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스스로 진행되고 저절로 사라지게 하라. 당신이 정신적 현상들의 발단과 지속과 사라짐의 양태를 어떤 개념적 노력 없이도 인식할 수 있는지를 보라. 가장 중요한 것은 허공이 자신을 통해서 날아다니는 새와 곤충과 허공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처럼, 집착하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정신적 현상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음이 활동 중일 때조차 당시의 의식을 완전히 쉬게 하라.

다잡기 유형과 풀어놓기 유형은 모두 주의력을 계발한다. 마음다잡기 유형은 통제를 이용하지만, 풀어놓기 유형은 의식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풀어놓기 유형에서, 생각과 관념화와 심상과 기억들은 지배되거나 소멸되어야 할 골칫거리가 아니다. 넘쳐나는 생각의 샘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집착이다.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에 놓아두는 데는 단지 가벼운 접촉만이 필요하다. 마치 한 마리의 벌이 꿀을 마시는 동안 꽃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벌은 꽃을 지배하지 않는다. 풀어놓기 유형의 큰 이익은 환경을 거의 지배할 수 없는 바쁘고 활동적인 삶을 위한 수행에 이상적이라는 점이다.

‘산란함 없고 집착 없이’ 수행하는 기법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비유는, 한가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공원에서 다른 사람의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방심하지 않고 바라보면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이 수행의 핵심이다. 이런 의식의 자질에 적합한 최상의 단어는 ‘투명성’이다.

p144

“마음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여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사악한 힘들이 나타나 너를 괴롭힌다고 해도 너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불보살들이 와서 너를 감싼다고 해도 너에게 이득을 줄 수 없다. 어떤 목표가 없기 때문에 너는 그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 축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기야트룰 림포체

* 두 가지 유형의 無知 - [아티샤의 명상요결]

1. 실제적 본질, 우리 자신의 의식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2. 우리가 아닌 것들과 동일시하는 것. 우리는 그 속에 자아도 없는 ‘나’와 ‘나의 것’일 수 없는 것들을 ‘나’와 ‘나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두 가지 오류가 무지의 본질이며, 삼사라의 뿌리이고, 고통의 근원이다.

명상적 고요의 수련에서 이런 동일시는 간파되어 투명하고 주의 깊은 의식으로 대체된다.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는 습관적인 성향이 간파되는 것이다.

일단 고요가 성취되면, 사실 육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명료하게 마음의 심상을 창조해서 지속할 수 있다. 이런 경지에서, 주의력은 정신적 영역에 머물러 있고 육체적인 감각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 고요 수련의 가장 깊은 경지에서는, 마음이 계속 안정되어 주의력의 높은 상태에 있는 동안 감각은 활동하지 않는다.

고요의 성취(사마타)에는 마음의 예리함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을 통한 지복의 경험과 엄청난 밝음이 포함된다.

"마음이 모든 현상에 앞선다. 마음이 이해될 때 모든 현상은 이해된다. 마음을 제어함으로써 모든 것들이 제어된다." - <대보적경>

티베트 명상가들은 잘 조율된 마음이 직접 의식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깊이 탐구할수록, 당신은 이 의식의 현상이 단순히 물질의 부수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의식은 그 스스로의 중단 없는 연속체로 유지되는 실재의 근본적인 요소이다.

 

1년 안에 명상적 고요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불교명상가들은 특별히 자비 수련을 강조하면서 예비적인 명상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2-2.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

- 실재의 본질에 대한 명상적 통찰

족첸과 마하무드라 명상 전통의 가르침

이 수행을 할 때 우리는 명상적 고요(사마타)를 넘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명상적 통찰(비파사나)로 움직인다.

실재의 본질에 대한 명상적 통찰을 계발하는 불교 수행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실재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이 명상적 고요의 안정성과 명확성과 통합되면(사마타와 비파사나가 결합되면), 모든 정신적 번뇌와 그에 따른 고통으로부터 불퇴전의 자유인 니르바나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한다.

부처님도 니르바나의 성취는 고요와 통찰의 결합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다. 고요의 안정적 영향이 없다면, 모든 통찰은 금방 사라져버리고 그 통찰들의 변형과 해방의 힘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족첸과 마하무드라 명상 전통의 가르침을 끌어낼 것이다.

서양 문화의 공통적 관점은 실재reality란 바로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라는 것이다. ...외관은 지각된 현상이 우리의 지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한다. 우리들 모두는 태만하게 이런 철학적 입장으로 산다. 외관은 우리에게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고한다.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는 권고는 우리에게 사물이 실재하는 것처럼, 그들 편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사물을 보지 않도록 권유한다. 우리는 단지 실재가 겉으로 보이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마음수련법은 더 깊은 무엇인가를 지적한다. ....어떤 것의 본질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 현상은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20세기에, 물리학자들은 물리적 실재의 근본적인 구성요소가 ‘질문의 형태’와 ‘측정의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아인슈타인은 청년 하이젠베르크에게 말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정보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개념적 구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경험되는 하나의 현상이 그것의 지각과 완전히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할까? 예리하게 분석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은 하나의 주관적 요소가 있어서 현상은 그것 없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안정된 마음을 사용해서 현상의 본질을 탐구해보면 모든 것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상이 보이는 방식은 결코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다.

꿈을 탐험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꿈을 꾸는 동안 꿈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몽을 유도하는 최적의 마음 상태는 명료하고 완전한 의식적인 자각을 유지하면서, 잠드는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다.

임종관 : 삶은 밤의 어둠 속에 번득이는 하나의 번갯불이다. 삶은 엄청난 가능성을 가진 짧은 시간이다.

“당신의 배우자는 곧 죽을 것이고, 당신도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잘 대하라.” - 아티샤

2-3.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라.

- 관찰자를 관찰하는 수행

호흡과 마음과 몸을 잃어버린 후에 남는 것은 불교도들이 ‘태어나지 않는 의식’ 또는 ‘죽음의 밝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원초적 상태의 의식이고, 경험이나 인간의 뇌와 신경계로 조직화되지 않는 의식이다. 원초적 의식의 본질은 주관 대 객관의 느낌으로 조건 지워져 있지 않다. 또한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으로, 심지어 인간적인 것으로도 조건 지워져 있지 않다.

죽음은 접시 위에 원초의 의식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그 의식을 발견할 기회를 잡아 자비와 힘과 지혜의 원천을 열 준비가 되어 있을까? 태어나지 않는 의식이 죽을 때 발견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 그것을 발견했는가에 달려 있다. 사는 동안 태어나지 않는 의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수행하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라”는 경구는 주의력을 주의 자체로 되돌려 관찰자를 관찰하는 명상적 수행이다. 마음 다잡기 유형(주의력의 안정성을 계발하기 위해 호흡 같은 하나의 대상을 사용하는 것)과 풀어놓기 유형(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는 것)과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관찰자를 관찰하는 것), 이 세 가지 명상 방법을 날마다 차례로 수행할 때, 다르마를 매일의 삶 속에 통합하는 효과적인 수행의 초석이 이루어진다.

실용적인 견지에서 이 수행은 다양한 정신적 번뇌에 대한 효과적인 해독제다. 당신이 화나고 불안하거나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을 때, 시샘하거나 우쭐한 느낌이 들 때, 관찰자를 관찰하는 수행을 하라. 이 하나의 수행은 그 번뇌의 심장부에 못질을 해서 안개처럼 증발시킨다.

명상법 p133

준비단계를 거쳐, 이제 통찰력 수련으로 들어가서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라. 이 수행은 <테르마>중에서 <자연스러운 해탈 : 여섯 바르도에 대한 파드마삼바바의 가르침>의 내용이다. 8세기 인도 탄트라 스승인 파드마삼바바의 것으로 추정한다.

“꾸준히 응시를 유지하는 동안, 명상할 어떤 대상도 없이 의식을 허공의 영역에 두되, 그 의식을 흔들리지 말고, 꾸준하고, 명확하고, 숨김없이 고정시키라. 안정성이 깊어질 때 안정된 그 의식을 탐구하라. 그 다음 휴식하고 이완하라. 다시 의식을 꾸준히 허공의 영역에 두고, 굳건히 그 순간의 의식을 탐구하라. 그 마음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 마음이 굳건히 그 마음 자체를 관찰하게 하라. 그것은 명확하고 안정된 그 무엇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텅 빔인가? 거기 인식할 무엇이 있는가? 다시 바라보고 나에게 그대의 경험을 말해달라!”

“마음을 꾸준히 당신 앞의 허공에 두고 거기에 현존하게 하라. 잘 탐구해보라. ‘당신이 오늘 여기에 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 마음을 두는 자와 놓이는 마음은 하나인지 둘인지 알아보라. 하나 이상이 없다면 그 하나는 마음인가?’ 관찰하라. 소위 마음의 실재는 무엇인가? 숙고하고 있는 그 마음을 관찰하라. 그 마음은 무엇과 같은가? 바로 그 의식을 관찰하고 그것을 탐구하라. 꾸준히 명상하는 자의 의식을 관찰하고 그것을 탐구하라. 관찰하라. 소위 이 마음은 실재로 존재하는 무엇인가?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텅 빔인지 아닌지 관찰하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텅 밈이 명상하는 법을 알 수 있었겠는가? 당신이 그것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해보아야 무슨 소용인가? 어쨌든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미움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누군가 있지 않은가? 꾸준히 바로 그것을 탐구하라.”

 

여기에는 깊은 점진적인 변형이 있다. 호흡을 의식하며 주의력을 훈련시키고(명상적 안정성의 계발),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고, 의식의 본성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마음수련법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동안,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해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는 수련 다음에, 가능한 가장 깊은 실재를 겨냥한 통찰 수련으로 나아가서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는 수련이 뒤따른다. 명상의 열매가 안정되고 더 이상 상실하지 않는 의식의 변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티베트불교 전통에서 반복되는 단호한 사실은 명상적 고요라는 승강장 없이는 통찰 수련을 철저히 이해하기는 불가는하다는 것이다. 명상적 고요를 성취하는 것은 정신적 동요와 산란함과 태만과 방종을 극복하고, 힘들이지 않고 적어도 네 시간 동안 안정성을 가지고 정확하고 명확하게 의식을 집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족첸 스승인 뒤좀 링파Dudjom Lingpa는 마음과 태어나지 않는 의식과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구조에 갇혀 있고, 개념적인 틀로 조건화되고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주체와 객체,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 상승과 하강, 부처와 중생, 삼사라와 니르바나 등의 차별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은 개념적인 틀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마음과 그 대상이 그들 자체의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들을 구상화시킨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이 있다고 믿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우리와 분리된 그 사람의 절대적인 정체성을 믿는다. 마음은 개념적인 구조 속에서 작용하고 그 결과를 구상화한다.

개념적인 구조로 형성된 마음은 태어나지 않는 의식과 대조된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경험은 아무 방해나 의도 없이 대상 없는 광대한 공간 속으로 용해되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자아를 포함한 모든 현상에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본성이 없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이다.

이원론적인 마음과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아주 다르다. 이원론적인 마음은 미혹된 의식이다. 마음의 본성을 통찰한다는 것은 마음이 태어나지 않는 의식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티베트의 비유를 들면,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물과 같고 마음은 얼음과 같지만, 얼음은 다른 형태를 취한 물에 다름 아니다.

마음 수련법은 “탐구하라”고 말하지, 추측하거나 논쟁하거나 학문적으로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명상을 수련해야 한다.

마음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계속되는 그 흐름 속에 태어나지 않는 의식이 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은 죽지 않는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발견해서 거기에 머무는 것은 죽음 없는 상태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행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이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정신적 현상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항상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근본적 바탕이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의식 그 자체의 본성과 모든 현상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은 절대적인 보리심이다.

2-4. 치유 방법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 모든 현상의 실체가 원래 없음

원초의 지혜

나에의 집착과 동일시

금강승 수행

“치유 방법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이 핵심적인 구절은 모든 현상의 실체가 원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이고 치유 방법은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는 망상, 즉 실재와 접촉하는 그릇된 방식이다. 근본적인 망상은 구상화인데, 그것은 우리의 자아와 현상들이 원래부터 실재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구상화하고, 주체와 대상을 구상화한다. 구상화는 자아와 타자를 깊이 분리시키고, 현상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이것이 망상의 결과다. 불교심리학에 의하면 자아와 타자, 자아와 대상의 절대적인 이분법이 갈애의 기초다.

탐욕과 화 같은 감정적 부조화는 동일한 원인에서 생긴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다른 현상들이 원래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구상화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도 ‘무지’라고 부르는, 구상화라는 근본적 망상에서 탐욕과 화가 생긴다. 불교심리학에 따르면, 탐진치라는 세 가지 근본 번뇌로 인해 다른 모든 정신적 번뇌들이 생긴다.

7세기 인도의 논리학자인 Dharmakirti는 자아에 집착함으로써 구상화가 시작되고, 그 후 타자에 집착하고, 그 결과로 정신적 번뇌가 생긴다고 말했다. 자아에 집착하는 것이 망상의 첫 단계이고 무지의 핵심이다.

구상화라는 망상의 치유 방법은 ‘지혜’다. 지혜는 통찰력에서 생긴다. 통찰력은 수련에서 생기며, 근본 문제인 자아의 구상화에 초점을 맞추는 수련 방법은 관찰자를 관찰하는 것이다.

* 수련 방법

명상의 이 단계는 끈기 있게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처럼, 명상의 지배 유형을 수련해서 먼저 고요를 훈련해야 도달한다. 그 다음 동일시를 내려놓고 의식을 의식 그 자체의 본성에 자리 잡게 하는 ‘풀어놓기’유형을 수행하라. 그 다음, 안으로 들어가 관찰자를 관찰하라. 주의력을 훈련한 다음 동일시를 내려놓는, 다잡기 접근과 풀어놓기 접근을 번갈아 하는 것은 의식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강력한 방법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 간의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지리정치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망상의 결과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치유 방법은 지혜다. 지혜는 자비심과 인내심처럼 계발될 수 있다.

지혜는 1) 지성 2) 원초적 지혜 의 두 가지 유형이다.

1) 지성 intelligence

: 불교의 수행은 이론과 경험을 가지고 다르마를 조사함으로써 지성의 계발을 추구한다.

2) 원초의 지혜

: 만들어지지 않는 일종의 本有的 지혜다. 이는 오염시키거나 정화시킬 수 없고, 얻거나 잃을 수도 없다.

원초의 지혜는 계발되지 않는다. 그것은 啓示된다.

* 지성을 계발하는 목적은 의식 그 자체의 본성인 원초의 지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치유 방법인 지혜조차 도’그것의 본성이 드러날 때 원초의 지혜 그 자체임이 드러난다. 즉,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 망상의 궁극적인 치유 방법인 원초의 지혜는 결코 습득된 적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 마음을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수행의 한계 :

당신은 생각과 현상들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지만, 해방되지 않는 것은 ‘나’이다. 생각도 해방되고 심지어 감정조차도 해방되지만, ‘나’는 해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개념적인 상태, 즉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습관적인 망상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근본적으로 마음을 해방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해방을 위해서는 통찰력의 계발이 필요하다. 필요한 것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바로 의식 그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탐구를 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실재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계발되고 강화된 지성이다.

 

“치유방법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라는 말은 탐구하는 지성 그 자체도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은

1) 관찰하고 명상하고 있는 마음조차도 그 자체의 고유한 본성이 없다는 것.

: 명상을 하는 관찰자인 ‘나’조차도 구상화된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망상을 통찰하는 치유방법인 ‘나’조차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고유한 존재가 없다. ....모든 현상은 상호의존의 상태로 존재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여기에는 의식도 포함된다. ....“치유 방법 그 자체도 고유한 본성이 없다.”

2) 이것은 단순히 치유 방법에 고유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자유롭다’라는 단어는 지성의 본질을 통해 항상 순수하고 항상 자유로운 원초의 지혜를 통찰함으로써 당신은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치유 방법이 자유롭다는 의미는 계발된 지혜가 항상 자유롭고 순수한 원초의 지혜를 통찰한다는 것이다. ????

“치유방법 그 자체도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원초의 지혜를 꿰뚫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두 가지 의미는

1) 고통을 주는 정신적 현상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구상화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적 현상들을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한다는 것. 이 오류의 결과는 고통이다.

2) 우리가 ‘자아’가 아닌 것에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참된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

** 금강승 수행

당신이 번뇌와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에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식의 원초적 본성이 단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잘못된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풀리는 시점에서, 금강승 불교 수행자들은 심상화와 상상력을 이용해서 원초의 지혜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체, 즉 부처님의 실체를 상상한다. ....금강승 수행에서 생기는 우월감의 느낌은 망상이 심화되고 있고, 수행이 잘못되고 있다는 표식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명상하는 자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결과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그 텅 빔 속에서, 일반적인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개인적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광대함이 있다. 그 광대함 속에 무한한 무엇인가 존재할 공간이 있다. ...원초의 지혜는 이미 거기 존재한다.

달라이 라마는 금강승 수행자들에게 먼저 그들 자신의 텅 빔에 대해 명상하라고 충고한다. ....자신이 한 사람의 부처임을 상상하는 동안 자신이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근본적인 망상이다.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의 일반적 에고 의식을 완전히 용해시켜라. 그 결과로 생기는 광대함 속에서, 항상 존재해 온 것의 실체를 추측해보라. 부처님의 올바르고 완벽한 실체를 상상하는 데 신경 쓰지 말라. 그 상상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상상할 수 없다. ....

금강승 수행의 큰 이익은 당신 자신을 부처님의 한 구현으로 상상함으로써, 당신 자신의 의식에서 부처님의 특성들을 끌어올 수 있고 그 특성들이 점점 더 생생하게 경험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자비의 특성을 점점 더 상상할수록 당신 안에 있는 자비의 저수지를 연다. 상상은 무한한 근원에서 특성들을 끌어오는 하나의 초대다. 당신이 원초의 지혜인 부처님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한 사람의 부처임을 결코 믿지 않는다면 금강승 수행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금강승 수행은 직관적으로 깨달음의 상태를 긍정하고, 깨달음의 상태 그 자체를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생각하는 데 기초를 둔다 그 길의 진리와 타당성은 깨달음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당신은 명상 속에서 직관적으로 부처님의 마음이 현존함을 긍정함으로써 한 부처님의 실체를 상상할 수 있다. 마치 기름이 종이에 배어드는 것처럼, 부처님의 마음은 당신 자신의 마음에 배어든다. 자아를 견고하게 하는 ‘나’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지, 본래부터 당신의 모든 마음 상태에 퍼져 있는 깨달음의 의식과 관계된 문을 열 것인지 선택하라.

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라.

“거지로서 그의 신분을 버리지도 않고, 즉시 그는 거지의 방식으로 살기를 멈추었다.”

이 말은 부처님의 한 실체를 취할 때, 당신은 현재의 당신이기를 멈춘다는 의미다. 이 말은 사실 새로운 실체를 취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항상 자신이라고 믿어왔던 정체성을 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5. 그 길의 본성은 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는 것이다.

분리감을 돌파

정지를 멈추고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을 내려 놓는다.

(족첸) great emptiness

마음

如如

* 고요 수행의 한계

이는 통찰력 수행의 예비적 수행이다. ....명상의 달인들은 고요 수련이 대개 지복과 명확성과 비개념화로 인도하지만, 고요의 특성만으로는 불안정한 평정으로 인도한다고 보고한다. ....고요의 성취만으로는 마음의 깊이를 통찰하거나 망상의 뿌리를 자를 수 없다. 개념적 구조와 구상화로 갇혀 있는 뿌리 깊은 습관들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 ....망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요와 지복과 명확성의 상태를 성취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망상은 제거되거나 극복된 것이 아니라 잠목해 있을 뿐이다.

심적 현상들이 어디에서 일어나서 어떻게 사라지는지 그 기원을 강렬하게 탐구한 다음, 관찰자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 돌파

탐구를 통해 수련이 진전되면서 의식 그 자체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고 집착이 멈춘다. 모든 개념적 구조와 구상화를 꿰뚫어봄으로써 의식의 원초적 본성을 통찰하는 단계를 ‘돌파(breakthrough)’라고 한다. 돌파의 지점에서, 당신은 “그 길의 본성은 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는 것이다”라는 경구에 암호화된 수련을 할 준비가 된다.

마이트리파는 우주적 근원 속으로 돌파하는 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모든 것을 포함한 실재는 원초의 것이고 그 본성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추구하지 않고, 마음을 현상의 상상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간에 놓아둔다면 그것이 명상이다. 추구하면서 명상하는 것은 미혹된 마음의 상태를 일으킨다. ”

....당신이 탐구하고 있는 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는 나’의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은 주체와 객체, 이것과 저것, 나와 너라는 개념적 구조물의 이원성을 유지시킨다. 돌파의 단계에서는 추구 그 자체의 개념적 구조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통찰력 수련과 함께, 당신은 주체와 객체, 명상자와 명상의 대상 사이의 분리감을 통찰할 수 있다. 일단 통찰력을 통해서 이 장벽이 깨지는 순간, 마이트리파는 탐구를 중지하라고 가르친다. 비개념적이고 비이원적인 의식을 돌파한 후, 단지 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게 된다는 것이다.

* 명상의 전환점

고요 명상의 수행에서, 고요를 성취하기 시작할 때, 마음은 더 이상 흥분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고요하고 생생하고 명료하게 안정된다. 마음은 레이저 광선처럼 한쪽으로 흐른다. 명상 속에 있는 동안, 마음이 산만으로 빠질 위험은 없다. 의식은 노력 없이도 집중되고 통제된다. 이 지점에서 정지는 자신의 임무를 마친 것이고, 명상은 전환점에 놓인다.

마음은 잘 기능하고 있고, 평온하고, 흥분하거나 산란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내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하며 조사하는 정지正知의 개입은 걸림돌이 된다. 고요가 성취될 때, 정지 그 자체가 해방되도록 정지를 내려놓고 아주 깊은 집착을 놓으라. 이 지점까지는 노력으로만 연속된 주의력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일단 고요가 성취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놓는다. 당신은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을 내려놓는다.

고요 수행이 충분히 뒷받침된 통찰 명상만이 철저하고 돌이킬 수 없는 변형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 큰 텅 빔

족첸(위대한 완성의 수행)에서는 작은 텅 빔과 큰 텅 빔을 구별한다. 이것은 중요한 구분이다.

족첸 수행에서 당신은 관찰자를 관찰하기 위해서 의식의 본성 그 자체를 탐구한다. 발견되는 것은 하나의 부재이고 그 부재 속에서 광명과 투명성과 명확성은 있지만, 어떤 행위자도,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관찰자의 부재를 관찰하고, 관찰되는 대상을 관찰하는 고유하고 자족적인 관찰자가 없음을 관찰한다. 고유하고 독립적인 관찰자의 부재는 ‘작은 텅 빔’이라 불린다. ‘작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거기 여전히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관찰자의 부재, 즉 개념적 구조에 의존하는 관찰자의 부재이다. 명상가는 개념을 구상화하고 있지 않지만, 그 ‘부재’는 오직 개념적 구조의 틀 속에서만 파악된다.

‘텅 빔’또는 ‘부재’라는 개념조차도 해방될 때, 그 길의 본성은 우주적 근원 속에서 휴식한다. 그 길의 본성은 텅 빔과 텅 빔 아님, 존재와 비존재, 과거와 현재와 미래, 주체와 객체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우주적 근원’은 산스크리트어 alaya 와 티베트어 kun zhi 에 대한 나의 번역이다. kun은 모든 것을 의미하고, zhi 는 기초, 근원을 의미한다.

“고요를 성취할 때, 당신은 정념을 버리고 현상이 없고 어떤 주체와 객체의 느낌도 없는 의식의 상태에 단지 현존해야 한다.”- 아상가(無着)

문제는 고요 그 자체는 변형력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고요을 성취하면, 화와 탐욕과 질투 같은 당신의 모든 성향에서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고요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어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절대적으로 조건지워진다.(==> ? ) 고요는 한 생애에서 다른 생애로 이어지는 과거의 습관적 경향성에 의해 잠재의식에 저장된다. 이 연속적인 의식은 삼사라의 근본이라 불리며, 생로병사로 윤회되는 토대다. 이것이 모든 현상을 결합시키는 삼사라적 의식의 흐름의 토대다. 하지만 이 의식은 마음수련법이 ‘우주적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의 모사품일 뿐이다.

‘우주적 근원’은 ....삼사라와 니르바나의 모두의 근본인 큰 텅 빔이다. ...그 속에서 당신은 이전에 구상화했던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적 구조의 오류를 통찰한다.

현상의 본성은 산스크리트어로 dharmata 로 불린다. 그것은 법성(法性, dharma-ness)을 의미하고, 존재의 상태 또는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 실재 그 자체는 탐구하는 대상의 본성 속에 있고, 이것은 물리학자들이 놀랄만큼 깊이 도달한 곳이다. ...물리학자 앤턴 질링거 박사는 사물의 본질을 깊이 탐구했을 때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설명했다. 모든 양자 현상들은 측정 방법의 틀 속에서 나타났다. ....

불교도들도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불교도들은 경험적으로 마음을 탐구하며, 마음의 본성을 탐구해서 관찰자의 본성을 발견한다. 그 결과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관찰자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명상가들은 마음( 산스크리트어 chitta)을 넘어서 마음 그 자체( chittata) 또는 마음의 본성이나 의식의 상태 그 자체를 통찰한다.

‘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는 것’은 dharmata(현상의 본성)와 chittata (마음의 본성)가 더 이상 서로 별개로 인식되지 않는 의식의 상태다. 이제 당신은 객관적 현상의 참본성이 주관적 의식의 참본성과 결코 분리된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우주적 진리이며, 간단히 ‘tathata (如如)’라고 불린다. 그것은 결국 모든 표현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놀라운 발견에 대해 불교는 광자의 본성이 광자의 본성을 추구하고 있는 물리학자의 마음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외부의 현상을 더 깊이 탐구할수록, 우리는 더 선명하게 우리 마음의 반영물들을 보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지각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생각과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주체와 객체는 함께 생겨나고, 그 무엇도 개념적 구조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주의 : 개인적인 진리, 문화적인 진리, 종에 의존하는 진리, 과학의 진리

상대적이지 않은 의식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파드마삼바바는 우주적 근원, 의식의 근본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그것을 직접적으로 지적하자면, 과거의 의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미래의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체로 현존하고 꾸밈없는 존재 방식의 새로움 속에, 현재의 일상적인 의식이 있다. 이 의식이 스스로를 응시할 때, 이 관찰과 함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명확성이 있다. 이 의식은 직접적이고, 벌거벗고, 생생하고, 어떤 기반도 없고, 텅 비어 있고, 투명한 광명이고, 유일하고, 비이원론적인 맑음과 텅 빔이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어떤 기반도 없다. 그것은 공허하지 않고, 빛나고 명확하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고, 다양하게 의식되고 투명하다. 그것은 다양하지 않고 나뉘지 않는 하나의 맛이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식(self-awareness)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존재의 원초적 본성에 대한 참된 소개다.”

존재의 원초적 본성, 의식 그 자체의 본성은 형상도 없고 활동적이지도 않고 정지되어 있지도 않다. 파드마삼바바는 우리를 자극하며 이러한 발견을 거듭 되풀이한다.

“ 마음 그 자체는 진실로 텅 비어 있고 어떤 기반도 없다. 당신의 마음은 텅 빈 허공처럼 만질 수 없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라!

텅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고, 스스로 생겨난 원초의 지혜는 본래의 맑은 의식이다.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비추는 그것은 태양의 본질과 같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라!

의식의 원초의 지혜는 진실로 멈추지 않는다. 끝이 없는 의식은 강의 흐름과 같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라!

흩어지는 산만한 생각들은 진실로 붙잡히지 않는다. 이 만질 수 없는 흩어짐은 안개 낀 하늘과 같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라!

모든 현상들이 스스로 일어남을 알아차리라. 스스로 일어나는 현상들은 거울에 비친 상(像)과 같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라!

모든 흔적들은 진실로 그 자체의 상태에서 사라진다.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사라지는 그것은 하늘의 구름과 같다. 그런가, 그렇지 않는가? 당신의 마음을 관찰하라!”

깨달은 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외견상의 구별은 더 깊은 무엇인가의 표현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단지 자아와 타자의 모든 구별을 초월하는 의식의 원초적 상태가 망상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라는 명목상의 진리는 있지만, 그 명칭과 무관하게 초월적인 참된 ‘나’가 존재한다. 하나의 지시 대상을 생기게 하고, 실체의 명백히 구분된 성질들을 창조하는 것은 ‘나’라는 개념적인 명명(命名)이다. ...먼저 우리는 ‘나’라는 느낌으로 자아를 명명하고, 그러면 자아는 구상화된다.

2-6. 명상의 중간에는 가상의 사람이 되라.

불순한 가상의 몸

순수한 가상의 몸 ( 자각몽)

상상력

꿈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

일단 탐구하는 순간, 현상은 환영처럼 영속성이나 고정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인식될 때, 마음수련법은 명상과 나머지 삶 사이의 틈 없는 연결을 유지할 수 있는 계속되는 명상 수행의 목표에 역점을 둔다.

나날의 삶에서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정신적 번뇌에 에워싸이면, “명상해야 한다”라는 경고들이 번쩍인다. 명상은 우리를 다시 중심 잡고 상승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는 다시 나가서 진흙탕 속에 뛰어들 수 있다. ....하루에 단지 한두 시간 명상할 때는 공식적인 수행과 일상의 삶을 통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수련법은 ‘명상 중간’의 문제, 즉 공식적인 수행과 삶의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통합시키는가를 다룬다. 뛰어난 요기들처럼 공식적인 명상과 삻에 차이가 없도록 수행과 삶을 통합시키는 것이 명상의 목표다.

고요보다 더 깊은 실재가 있다. 의식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환경과 분리된 어떤 주체도 없고, 더욱이 의식은 개념적인 어떤 기반도 없는 원초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지속적인 기간 동안 불성에 머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를 방황하게 하는 너무나도 많은 습관적 패턴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근본적인 문제는 현상과 우리 자신이 본래 실재한다고 우기는 구상화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면, 이 탐구와 관계된 것처럼 보이는 실제의 ‘나’는 사라지고 하나의 텅 빔으로 남는다. 남는 것은 단지 텅 빈 현상일 뿐이다. 이제 공식적인 명상에서 나와서 활동적인 삶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것인가? 당신은 마치 가상의 환경에 살며 가상의 존재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관계한다.

* 감각의 대상과 지각

우리가 주위에서 지각하는 모든 환경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존하여 나타난다.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은 진실로 ‘저기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것은 시각기관에 의존하고,....우리는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하지 않는다. 경험의 발생과 지각은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의 세계 사이에서 함께 일어난다. 하지만 세계가 정말로 지금,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전부터 ‘저기 바깥에’ 존재한다는 깊은 믿음은 계속된다.

지각되는 것은 그것을 지각하는 것에 의존해서 나타난다. 사물에는 독립적이고 고유한 존재가 없다. ‘저기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그 자체로 객관적인 존재성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의미는 개념적이고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 ?)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존재하거나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불교의 가설이다.

샨티데바는....그 우려는 어떤 것의 가상의 본질을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샨티데바의 응답은 이러하다. 단순히 텅 빔의 일별을 한 번 가진다고 해도, 현상의 가상적 본질을 순간적으로 경험한다 해도 정신적 번뇌가 제거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의 습관적 반응의 강력한 힘 때문이다.

그는 또다시 통찰의 계발을 위한 기초로 고요를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것이 환상임을 확실히 알고 있을 때조차 구상화의 경향성은 습관의 강력한 관성에 의해 계속된다. 매력적인 무엇인가를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반사적으로 집착한다.

샨티데바는 텅 빔을 한 번이나 두 번 깨닫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번뇌를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텅 빔을 깨닫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오직 텅 비어 있는 의식에 흠뻑 젖는 것만이 점차 집착과 혐오의 근본적 습관들을 제거할 것이다.

* 불순한 가상의 몸 수련

파드마삼바바, <자연스러운 해탈>

당신 자신의 몸과 다른 사람의 몸을 단지 현상의 나열에 불과할 뿐 아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

거울 수련 : 화나고 상처받는 ‘나’라는 구상화된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수련. 거울명상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유도한 다음 그것을 생각하는 자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생각하는 자는 사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처럼 실체가 없음을 인식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실체적인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이 단지 종속적으로 연관된 사건들의 나열일 뿐이며, 망상적인 현상과 따로 독립해서 실제의 몸과 실제의 마음과 실제의 사람은 없다고 지적한다.....명상가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보다 더 실제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의식하며 산다.

“명성의 중간에는 가상의 사람이 되라”는 이 수행은 하루 종일 몸을 가상의 허깨비처럼 상상하라고 말한다. ....마치 가상의 존재인 것처럼 사는 수행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례한 말을 하더라도 아무 과녁이 없도록 하루 종일 그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말은 메아리와 같다. 모든 정신적 현상들은 상응하는 객관적 실체가 없는 신기루와 같다. ....정신적 사건들을 단지 가상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수련을 하라. 그렇게 하면 정신적 번뇌가 일어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파드마삼바바는 ‘다르마 수행’이라는 갑옷에 대한 가장 강력한 파괴력은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의 구상화라고 역설함으로써, 가상의 존재처럼 사는 수행을 요약한다. ....성숙한 다르마 수행자의 표시는 이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들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다.

* ‘순수한 가상의 몸’ 수련은

지성만으로 성취할 수 없다. 이 수행의 핵심에는 모든 물질 현상을 깨달음의 의식의 구현으로 보는 비젼의 연마가 필요하다. 우리의 모든 마음과 말과 몸이 부처의 마음과 말과 몸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경험된다.

순수한 가상의 몸 수련은 원초의 지혜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표면적인 현상보다 더 깊은 지리, 감각적인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 진리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직관적인 증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원초의 의식이다.

순수한 가상의 몸 수련은 모든 것에서 부처의 현존을 본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실재가 된다고 했다. ....우리가 세속적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것들은 우리의 실재가 된다. ....순수한 가상의 몸 수련의 관점은 모든 부처님들이 매 순간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사실 이 순간이 최선이다. ....

* 순수한 가상의 몸 수련 = 순수한 지각 ( 상상력)

현상과 개념들을 탐구해서, 그것들을 인식하고 착각에서 벗어나라. 구속되고 고통받고 미혹된 한 사람과 그 실체가 원래 없음을 인식하라. 본래 에고가 없다는 인식하에, ‘나는 지금 여기서 완전히 깨달았다’하고 상상하라. 순수한 가상의 몸 수련은 또한 ‘순수한 지각’으로 불리며 상상력으로 성취된다.

순수한 지각 수련은 자주 수행하면 효과적이다. 순수한 지각 속에서, 표면을 넘어서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이 불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상상하라.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실재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황과 사물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불성에 주의한다면, 우리가 관계하는 것은 부처이고 부처의 실재는 우리의 실재가 된다.

불교적 문맥에서 ‘환영’은 존재론적 설명이며, 개인과 관계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않는다. ‘환영’이라는 말은 당신과 다른 사람의 관계가 독립적이고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실재의 작은 물방울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환영’이라는 말은 실체란 현상일 뿐이고, 현상 뒤에는 구체적인 실재가 없음을 의미한다.

내가 나의 눈에서 티끌을 제거한다면 매일의 사건들을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볼 것이다. 매일, 매 순간의 삶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현상은 엄청나게 장엄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상상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불교의 근거는 모든 것이 개념적 명명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과 관계하고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무엇에 주의하고 어떻게 주의하는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실재의 성질을 결정한다.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마음을 정화시킨 사람들이 주위를 볼 때, 부처님들의 마음의 창조물에서 다름 아닌 정토를 본다고 한다. 어느 종파는 부처님의 상상력의 산물인 정토에 태어나서 계속 다르마를 수행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의심한다면 정토에 대한 믿음은 아주 매력적인 안전책을 제공한다. 하지만 당신이 이 삶에서 순수한 지각의 수련을 완성한다면, 지금이든 죽은 후이든 그곳이 바로 정토다.

* 당신 안에 내재하는 원초의 지혜를 확인할 수 없다면, 선업을 계속 쌓는 수련을 하라. ...선업을 쌓고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원초의 지혜는 점점 의식의 밝은 빛으로 드러날 것이다.

* 꿈요가 수련에서 꿈의 내용물을 변형시키는 법을 넘어선 단계는 꿈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비록 자각몽을 꾸는 당신이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 꿈을 그대로 두고, 꿈이기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이 없음을 잘 알면서 코브라가 어금니로 물게 하라. 코브라도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 당신이 혼란스럽거나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상황들 속에서, 항상 당신이 주의하는 대상들을 당신과 분리하여 생각했음을 관찰하라. 이런 상황들 속에서 당신의 주관적 입력은 간과되고 있고, 화나게 하는 상황과 행위와 사람이 당신 자신과 분리되어 존재한다.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망상이다. 이것이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실재가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다.

족첸 수련의 반복되는 주제는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견되는 본질은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명상의 중간에는 가상의 사람이 되라”는 말의 의미다.

* 여기까지는 통찰력의 계발, 즉 절대적인 보리심에 대해서 말했다.

지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의 영적 수련에 단지 지금까지 논의된 종류의 수련들만 포함한다면, 한가하고 멍한 무관심의 상태와 고립된 내적 평화로 탈선할 수 있다고 달라이 라마는 경고했다.

마음수련법의 나머지 요결들은 절대적인 보리심의 지혜에 상대적인 보리심의 자비를 보완하고, 그 둘을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2-7. 교대로 주고받는 수련을 하라.

훌륭한 방편 - 사무량심

자애심: 자애심을 기르는 세속의 길 <--> 집착; 자애심의 명상적 계발

자비심의 계발, 분노

자비심과 지혜

통렌 수행

* 상대적인 보리심과 절대적인 보리심의 관계에 대한 불교의 논점은 이렇다.

“훌륭한 방편 없는 지혜는 속박이다. 지혜 없는 훌륭한 방편은 속박이다.”

훌륭한 방편의 중요한 요소는 자비심이다.

균형은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의 중요한 주제다. 깨달음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는데, 지혜와 자비심이다.

자비(慈悲)희사(喜捨)의 사무량심을 계발하는 것은 상대적인 보리심을 계발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직접적인 토대다.

1. 자애심 loving-kindness----------------------------------------------

‘교대로 주고받는 수련을 하라’는 마음수련법에서 ‘주는 수련’은 자애심의 계발이다.

“나의 종교는 좋은 가슴을 가꾸는 것이다.” - 달라이 라마

자애심과 집착에는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서로 대립된다. ...혼란이 생기는 이유는 서양에서 사랑은 종종 불교의 세 가지 근본 번뇌 중 하나인 집착을 말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덕행인 자애심의 사랑과, 번뇌이자 온 세상에 있는 고통과 갈등의 뿌리인 집착적 사랑을 구분한다.

자애심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열망에 근거하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진심 어린 열망이다. 자애심은 느낌을 가진 주체, 자신처럼 상처받고 기뻐할 수 있는 주체, 행복을 찾고 고통에서 자유롭고 싶은 주체에 대한 관심이다.

자애심은 오직 유정물을 위한 것이다. ...유정물들은 그것들을 주체이게 하는 경험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유정물들은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주체로서 우리들 모두는 행복을 찾고 싶어 한다.

집착은 사물을 위한 것이다. 집착은 대상의 표면, 즉 초콜릿의 표면과 차의 표면과 한 남자와 여자의 표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은 그 대상의 주관적 차원에 신경 쓰지 않는다.

집착에 투사가 더해진 것이 사랑으로 오인되는 많은 것의 근원이다. 매혹은 하나의 대상에 우리가 원하는 성질을 투사할 때 생기고, 결국 아상에 대한 투사가 된다. 우리의 행복이 외부에 있는 집착의 대상에 투사되기 때문에, 이 과정은 자아에게서 힘을 빼앗는다. ...

우리의 행복은 결코 그 대상의 안이나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다.

<-->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상화하고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중립적인 것을 부풀리고 부정적인 것을 무시할 때, 불행히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불린다.

집착은 하나의 대상 속에서 자기만족을 찾으려는 동기로 움직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혹의 대상은 변한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불쾌해진다. 혐오감이 생기고 당신은 이전에 사랑하던 대상을 참을 수 없다. 집착과 마찬가지로 혐오감은 망상이다. ...집착은 자애심의 가면이다.

우리 관계의 대부분은 사랑과 집착의 혼합이다. 관계에 근심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집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랑과 집착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나쁜 쪽으로 변했다고 보일 때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사랑이 진짜라면 사랑의 느낌은 더 강해진다. 사랑이 단지 집착이었다면 그 느낌은 물러난다.

* 자애심을 계발하는 세속의 길 - 타라 림포체

세속의 방법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애정으로 시작해서, 금을 제련하듯이 그 애정을 제련하는 것이다.

불교의 목표는 그런 관계들 속에서 참된 자애심을 기르고, 집착의 고통을 점점 줄이고, 근심과 고통과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그 관계를 정화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무조건적으로 될수록 그 사랑을 아이들의 친구와 부모에게 뻗치고, 마침내는 이 자애심을 모든 존재들에게 뻗치라.

다시 한 번 더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실재가 된다.”는 원리를 상기하라. 우리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선택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실수에 주의하고 싶은가? 그런 면에 주의함으로써,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은 덜 매력적으로 된다. 반대로 상대방의 인간성과 주관성,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존중과 애정이 커질 것이다.

자애심을 계발하는 세속적 접근은 우리의 집착을 가는 체로 걸러내서 자애심을 정제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과정은 덜 친밀한 다른 관계들에게로 확장할 수 있다. ...사랑과 집착의 혼합물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정화시킨 다음, 물이 평야 위로 평등하게 흐르듯이 그것을 모든 방향으로 확장시키라.

“제가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는 의지처가 되고, 여행자에게는 안내자가 되고, 바다를 건너고 싶은 사람에게는 배가 되고 뗏목과 다리가 되게 하소서.” - 샨티데바

* 자애심의 명상적 계발

1) 자애심의 반대인 화와 증오를 깊이 생각하기.

“증오는 결코 증오를 통해서 멈추지 않는다. 증오는 사랑을 통해서 멈춘다. 이것이 영원한 법이다.”

- 부처

화는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대개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2) 열망을 일으키기.

“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저는 분노와 미움과 온갖 공격성과 적개심에서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제가 모든 정신적 번뇌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제가 번뇌의 덫에 빠지지 않고, 지성적이고 효과적으로 근심 없이 상황에 대처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열망이 지금 당장 성취되었다고 상상하라. 과거에 화를 일으켰던 상황들을 만나 화내지 않고 반응하는 모습을 상상하라. ....불안과 근심을 주는 집착에서 자유롭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불안과 근심에서 자유롭다고 상상하라. 두려움을 일으키는 집착에서 지금 바로 자유롭다고 상상하라.

3) 자애심을 계발하는 과정

3-1) 참된 행복을 찾고 싶은 소망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라. 외부적 상황에 관계없이 정말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상상하라. 지금 바로 당신의 가장 깊은 열망들이 성취되었다고 상상하라.

3-2)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저와 마찬가지로 그대도 화와 분노와 미움에서 자유롭고, 평온 속에서 거하고, 정신적 번뇌의 소란이 없기를 바랍니다.”하는 열망을 일으키고, 지금 그렇게 되었다고 상상하라.

3-3)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켜서, “저와 마찬가지로 그대들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하고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고 상상하라.

3-4)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은 공통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유정물에게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하고 생각하라.

3-5) 당신이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적용하라. ...불교에서 ‘적’은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 반대자라고 느끼는 사람이고, 당신이 해를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 사람(적)의 좋은 모습을 떠올림으로써 적의 과장된 모습을 없애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경멸할 때 그 사람의 고통과 악행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그 사람에게 자세히 주의를 기울이라. 그 이상의 무엇인가 있다.

자애심은 먼저 자신을 향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자애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참된 자애심을 경험할 기회는 희박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 부처.

* 분노와 자애심

우리의 화와 분노는 다른 누군가에게 입은 상처보다 더 큰 고통을 일으킨다. 우리의 반응이 미움일 때, 우리의 적은 홈런을 날린다. 반대로 우리는 그 게임을 중지하고 “너는 나에게 증오라는 선물을 주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

적과의 만남 후에, 계속되는 상처는 그가 입힌 피해 때문이 아니다. ...적과 만난 후에 계속되는 고통의 원인이 진짜 적이다. 그것은 화다.

“탐욕과 미움 같은 적들은 팔다리도 없고 용감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나를 노예로 만들었는가?”

- 샨티데바

모든 정신적 고통 중에서 화보다 더 유독하고 치명적인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 정말 화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에 갇혀 있고, 이 구상화는 망상을 바라보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판단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것을 바라볼 때 망상을 인식하고, 망상을 인식함으로써 그 토대를 허물고 궁극적인 보리심의 지혜가 생기게 하라.

* 자애심과 구상화

자애심을 계발할 때 적에 대한 화 같은 장애물이 나타난다면, 그 원인은 구상화다.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이 창조된 것이다. 여기서 통찰력과 지혜가 자애심의 수련과 통합된다. 통찰력은 자애심을 계발하는 데 근본적인 장애인 구상화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다. 더 세밀히 탐구하라. 화의 대상이 누구의 몸인가 아니면 마음인가? 당신이 싫어하는 구상화된 대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탐구하고 인식하라. 통찰 수련이 첫 걸음에 당신에게 이런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부다고사는 적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당신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능숙한 책략으로, 적을 구상화하는 습관을 깨라.

부다고사는 ‘가까운’ 적과 ‘먼’적에 대해 설명했다. 자애심의 가까운 적은 집착이다. ...자애심의 ‘먼’적은 그것의 정반대인 적의다.

 

자애심의 계발은 나날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2. 자비심(悲心 = compassion) -----------------------------------------

자애심의 계발을 보완하는 수행은 자비심의 계발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자유롭기를 바라는 진심어린 소망이다.

1) 자비심을 계발하는 첫 번째 단계 : 자비심의 효과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

당신이 자비심을 느꼈을 때 그 영향은 어땠는가? 동정심이 있는 사람들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반대로 당신이 무관심과 그보다 더 나쁜 적개심을 경험했을 때, 그 영향은 어땠는가? 개인과 공동체와 정부와 국가들이 무관심이나 복수심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때, 그 영향은 어땠는가?

2) 자비심을 계발하는 둘째 단계 : 고통받고 있는 한 개인이나 한 집단, 또는 고통을 주고 있는 한 개인이나 집단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

그 고통과 공감하며 자연스럽게 “그대도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하는 소망을 내라.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상상하라.

명상적 고요에 대한 질문에 대한 요기 텐진 장포의 대답은 “깊은 명상 수행을 위해서는, 고요를 성취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자비심을 계발하라.”

정신적 균형은 항상 파괴된다. ...마음의 균형은 화 앞에서 무너진다.

화도 자비심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나쁜 사람은 벌주고 착한 사람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해결책이다. 가해자들도 역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느낀다. 피해자만이 ‘좋은’사람으로 생각될 때 화는 자비심으로 오해될 수 있고, 게다가 우리는 ‘나쁜’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정당하다고 느낀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누군가에 대한 집착과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은 단지 번뇌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자비심은 어렵다. 자비심은 희생자와 가해자 모두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이 점은 중요하다. 우리가 정의의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때, 분노와 화는 자비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착이 사랑이 아니듯, 화는 자비심이 아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들의 짐에 더해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떠맡아야 하는가? 샨티데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보살펴야 한다. 내가 유정의 존재이듯이 그들도 유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3. 자비심과 지혜 ---------------------------------------------------

너무 많은 고통이 있다. 해탈의 길에 자비심의 계발이 필요하고 자비심이 점점 더 많은 유정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라면, 그 자비심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이 길은 기쁨의 길인가? 나는 게쉐 다르계예 스님에게 영적인 깨달음의 지복과 세상의 모든 고통에 공감하는 의식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물었다. 그분은 내가 아주 작은 경험의 우물에서 추측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질문에 대답하셨다.

“자네는 자네의 좁은 소견으로 아무리 추측해도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네. 자네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지혜를 고려하지 않았네.”

지혜가 없다면 자비심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고통에 압도되지 않고 고통을 포용할 수 있게 하는 통찰력은 기쁨의 문을 연다. 지혜 없는 자비심은 속박이다. 자비심 없는 지혜는 속박이다. 지혜와 자비심은 깨달음의 양날개다.

통찰력의 근본적인 깨달음은 텅 빔이다.....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대상에 본래 ‘나’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티베트 불교 전통은 마음이 준비되기 전에 무아의 본성을 통찰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마음이 적절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이 텅 비어있다는 심오한 실재를 어렴풋이 통찰할 때 소중한 보물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자비심의 마음이 먼저 개발되었다면, 개인적 정체성이 텅 비어 있다는 깨달음을 볼 때 이 통찰은 가장 소중한 보물을 발견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자비심 없이 개인적 정체성의 텅 빔을 통찰하는 것은 자아의 상실로 인식되고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

* 연기, 상호의존

우리에게 고유한 실체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중관학파는 우리가 의존적으로 연관된 사건들(events)로 존재한다고 한다. 나는 일련의 사건들의 나열이다. ... 텅 빔의 결과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그 두 가지는 사실 같은 것이지만, 단지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지혜의 깨달음은 모든 현상들이 의존적으로 연관된 사건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근본적으로 상호의존한다는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그런 모든 관계들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몸에 팔이나 다리 등 많은 부분이 있지만, 몸은 하나의 전체로써 보호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있는 다른 존재들도 나처럼 행복을 열망하므로 모두 평등하다.” - 샨티데바

모든 유정의 존재들이 한 사람의 몸과 같다는 생각은 상호의존의 뛰어난 비유다. 당신의 코가 가려울 때, 자비로운 손가락은 나서서 부드럽게 긁어준다. ....자비심의 계발은 모든 현상들이 깊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촉진한다. ...우리는 관계들이다. 이런 이유로 지혜의 계발은 자비심의 계발과 협력해야 한다.

* 불교의 자비심에 대한 개념은 개별적인 사건에 우연히 반응하는 것보다 더 깊다. 자비심을 계발하는 첫 번째 국면은 자비심의 이익과 자비심이 없을 때의 불이익에 대해서 숙고하는 것이다.

자비심을 계발하는 주요 수행 중

1) 첫 번째 단계 : 고통받는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당신이 그 사람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대도 자유롭기를 바랍니다.”하는 소망을 일으킨다.

2) 둘째 단계 : 다른 사람에게 슬픔을 주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를 위해서도 “그대도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원한다. 이 단계가 없으면 명상 전체가 피상적으로 끝난다. . . . 악한 사람들에게 경멸과 혐오와 증오로 반응하는 것은 다르마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우리들 대부분은 악과 위선과 정직하지 않음에 즉각적으로 반발하는 뿌리 깊은 습관에 굴복하지 않기는 정말 힘들다. 사악한 사람에 대해서 자비심을 계발하는 이 수련의 국면은 다르마의 척도 중 하나다.

1) 먼저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2) 다음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3) 다음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에게,

4) 다음은 무관심한 사람에게,

5)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해를 주기를 원하는 ‘적’이라는 특별한 범주에 초점을 맞추고,

이 사람에게도 역시 자비심을 계발하라.

장벽이 사라지고 자비심이 평등하게 흐를 때까지, 다른 범주의 사람들, 즉 악인과 사랑하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과 적개심에 불타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비심을 계발하라. 하나의 강이 단지 장애물이 없는 길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흐르듯이, 자비심이 거리낌 없이 모든 방향으로 흐를 때까지 수행하라.

* 슬픔도 쉽게 자비심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에, 자비심의 가까운 적이다. ...자애심이 증오라는 먼 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비심도 역시 잔인함이라는 먼 적을 가지고 있다.

* 대자비심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무량한 자비심조차 넘어선 무엇인가 있는데, 그것을 대자비심이라 한다. 대자비심은 “그대가 고통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를 넘어서 “제가 그렇게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로 상승한다. 대자비심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해방시키는 책임을 떠맡는다.

....지혜 없는 자비는 속박이라는 것을 항상 깊이 되새기라. ....어떻게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는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하나의 유한한 개인으로서 나는 확실히 그런 능력이 없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내 주위의 모든 것들과의 상호관계 중 하나다. 게다가 나라는 존재는 또한 모든 곳에 현존하는 불성과 상호관계가 있다. 이 깨달음의 의식이 세상의 고통을 돕는 무진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대자비심이 의미하는 것이다. 대자비심을 계발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성을 깊이 통찰할 필요가 있다.

* 자비심의 단계

1) 일시적인 자비심 :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2) 더 깊은 자비심 : 당신 주위의 모든 것에서 무상과 변화와 덧없는 본성을 깨닫는 통찰력과 결합해서 생기는 자비심.....자비심의 가장 깊은 모습인, 한량없고 비이원적인 대자비심은 공성의 깨달음과 결합하여 생기고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자애심과 자비심의 계발은 앉아서 공식적인 명상을 하지 않는 깨어 있는 시간에 하는 아주 중요한 수행이다. 자애심과 자비심을 계발하는 데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때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다. 어떤 특별한 조건도 필요하지 않다.

4. 통렌의 수행 --------------------------------------------

주고받는 수행인 통렌은 상상력을 이용하여 직접적인 경험 너머의 실재들과 관계한다. 자애심의 실행은 주고받는 수행에서 ‘주는’부분이고, 자비심의 실행은 ‘받는’부분이다.

4-1. 우리가 깊이 염려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랑하는 한 사람이나 공동체의 사람들을 마음속에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4-1-1. 받는 수행

고통의 원인은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적일 수 있다. 잠시 동안 그 한 사람이나 집단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공감한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역경을 경험한다고 상상한다. 이제 당신의 심안(心眼)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 다음의 소망을 일으킨다. “그대들이 이 짐에서 해방되고 이 역경이 저에게 오기를 바랍니다.”

정신적, 육체적 불행, 고통, 절망과 번뇌를 당신이 받는다고 상상한다. 그 고통이 먹구름의 형태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제거되어 당신의 가슴속으로 끌어당겨진다고 상상한다. 그 고통이 당신의 가슴속으로 향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점점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상상한다.

그 먹구름이 당신의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것은 어둠의 구(球)로 시각화된 당신의 자기중심주의와 만나서, 즉시 고통의 먹구름과 당신의 자기중심주의가 서로를 소멸시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4-1-2. 주는 수행

당신의 모든 공덕과 성공과 행복,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삶의 축복들이 빛나는 흰 빛의 강력한 원천으로 당신의 가슴에서 반대 방향으로 흘러 나간다고 상상한다. 이 강력한 빛의 광선들이 흘러서 이런 기도로 그 사람을 적신다고 상상한다. “제 삶에서 좋은 모든 것,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저의 소유물과 행복과 건강과 덕행을 그대에게 드립니다. 그대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가장 큰 열망과 가장 깊은 소망들이 충족되기를 바랍니다.”

그 덕행과 행복의 빛이 당신이 마음에 떠올린 사람들을 적시기 시작한다고 상상한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욕망과 소망들이 충족되기를 상상한다. 하지만 당신의 가슴속에서 나오는 이 빛이 방해받지 않고 흐를 때, 그것은 다함없는 근원에서 고갈되지 않는다.

4-2. 미혹되어 있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 초점을 맞춘다.

4-2-1. 그 짐을 당신이 짊어지는 수행을 하라. 분노와 원망과 갈망과 같은 망상이나 다른 정신적 번뇌를 상상하고, “그대들이 망상과 번뇌와 무서운 짐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열망을 일으키라. 정신적 번뇌들이 먹구름의 형태로 그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나와 당신의 가슴속으로 들어가서, 한 번 더 당신의 자기중심주의와 만나 소멸된다고 상상한다.

4-2-2. 당신의 모든 덕과 자비심과 지혜와 관용을 빛나고 깨끗한 흰 빛의 형태로 보내어서,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대에게 드립니다.”하는 소망으로 이 개인이나 단체를 적신다고 상상하라. 눈에 선하듯이 그렇게 되었다고 상상하라.

4-3. 통렌 수행을 확장해서, 모든 대상들의 모든 고통과 정신적 번뇌들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모든 덕과 선행을 내보내라. 당신의 마음이 주변의 환경과 세상을 돌아다니며, 차례로 한 개인과 한 공동체와 한 나라를 만나게 하라. 매번 받아들일 때마다 고통과 고통의 근원의 짐을 받는다고 상상하라. 매번 내보낼 때마다, 당신 가슴에서 흐르는 흰빛의 광선들과 치유와 은총과 축복의 빛이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는 곳 어디에든 비친다고 상상하라.

4-4. 당신 자신의 몸으로 의식을 돌려서,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덕과 기쁨의 빛나는 흰빛이 몸을 적신다고 상상한다. 광선들이 당신 몸의 모든 모공에서 모든 방향으로 발산되고 그 빛을 담을 수 없을 만큼 당신의 몸이 빛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상상하라.

4-5. 공덕을 회향(回向)하며 통렌 수행을 마무리한다.

“이 수행의 공덕으로, 모든 유정의 존재들이 고통과 고통의 근원에서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가장 깊은 열망이 충족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통렌 수행은 끝난다.

* 전통적인 불교 수행에서 통렌은 당신의 어머니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당신이 아득한 옛날부터 추구해온 행복을 찾기 위해 영적인 수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여유와 기회가 있는 이런 삶의 기반을 제공해주신 분은 부모님이다. ....어떤 경우든, 애인이든 친구든, 편안한 사람과 통렌 수행을 시작하라. 거기에서 당신의 부모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아가라. ....여기서 목표는 우리의 가슴을 무조건적으로 여는 것인데, 특히 우리의 부모님에게 여는 것이다.

당신에게 전혀 이상적이지 못한 부모님이 있다면, 그분들의 모든 결점을 마음에 떠올린다. 그분들의 고통을 당신의 가슴 속에 받아들여 “부모님이 자유롭기를 바랍니다.”하는 기원으로 가슴속에 그 고통을 용해시키라.

* 통렌 수행은 실제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지만, 이 명상에서 성공의 참된 기준은 우리의 자기중심주의가 줄어들고 우리 가슴속의 사랑과 자비가 늘어나는 것이다.

2-8. 당신의 호흡에 두 가지 모두를 태우라.

통렌 수행의 주고받는 두 가지 모두를 당신의 호흡에 싣는 것이다.

들숨에 고통을 받아들이고 날숨에 당신의 모든 기쁨을 보낸다고 상상하라.

당신의 마음이 실제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을 발견하면, 그 고통에 집착하거나 동일시하지 말고 단지 그 고통과 함께 있으라. 어렵지만 움츠러들지 말고,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악한 사람들이 끔찍한 번뇌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라고 딜고 크옌체 림포체는 덧붙였다. 이것이 정확히 통렌 수행에서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그 한 사람의 고통으로 인해 사라진다면,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그 고통을 일으켜야 한다.”

게쉐 나그와 다르게예는 내가 호흡에 의식하는 수행에 아주 끌린 것을 알고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흡은 정말 좋은 수행이지만, 모든 호흡이 통렌과 결합한다면 단순히 호흡의 촉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보다 헤아릴 수 없이 큰 장점이 있다.”

모든 호흡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기쁨을 나눠준다고 상상할 때, 모든 호흡은 의미심장해진다.

2-9.·세 가지 대상, 세 가지 독, 세 가지 덕의 근원.

 

세 가지 대상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지 않는 사람
무관심하게 느끼는 사람
세 가지 독
자기 중심적인 집착
혐오감
냉담함
세 가지 덕의 근원
자애심
자비심
따뜻한 평등심

 

세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할 때, 세 가지 독이 우리 속에서 일어난다.

덕의 세 가지 근원은 우리가 세 가지 독과 반대로 행동할 때 일어난다. 이것은 마음의 습관을 집착과 혐오와 무관심의 망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덕행이 생기도록 변화시킴으로써, 모든 유형의 사람들과 관계하는 수행이다.

예 : 당신이 비난할 만한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즉각적인 혐오감을 느낄 때, 판단하는 대신 즉시 통렌 수행을 하라. “호흡에 두 가지를 실으라.”즉, 들숨에 “그 번뇌가 나에게로 와서 그대가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하는 소망을 보내고, 날숨에 “그대가 나의 삶에서 좋은 모든 것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하는 소망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세 가지 덕의 근원은 덕행을 성장시키는 일종의 감정의 연금술이다. 이것은 집착을 자애심으로, 혐오는 자비심으로, 무관심은 따뜻한 평등심으로 변형시킨다.

2-10.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에서 말을 사용해 수행하라.

“모든 유정물들의 고통과 고통의 근원이 저에게로 오기를 바랍니다. 저의 행복의 원인들이 모든 유정물들에게로 가기를 바랍니다.” 라는 소망을 표현함으로써 이 수행을 시작한다.

* 우리는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 참된 다르마인지 확인해야 한다.

1) 구상화된 ‘나’라는 느낌에 집착하는 강력하고 뿌리 깊은 경향이 줄어들고 있고, 누군가가 폭언을 해도 과녁에 그렇게 쉽게 맞지 않고,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면, 그 수행은 효력이 있다.

2) 수행이‘자기중심주의’ 즉,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이 첫 번째 우선순위라는 느낌을 감소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수행을 찾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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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요결 : 예비적인 것들 - 마음을 전환시키는 네 가지 생각

두 번째 요결 : 절대적인 보리심과 상대적인 보리심을 계발하는 것

*** 절대적인 보리심의 계발은 텅 빔의 깨달음, 즉 당신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상에 고유한 존재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자아의 집착을 없애도록 고안되어 있다. / 상대적인 보리심의 계발은 자기중심주의를 없애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 두 가지는 깨달음을 아주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 족첸, 마하무드라, 금강승을 포함한 모든 불교의 수행은 단지 이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보리심과 상대적인 보리심이다. 수행의 효과는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기중심주의의 감소로 측정된다.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의 처음 두 가지 요결은 불교 이론과 수행의 핵심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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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다섯 개의 요결들은 나날의 삶을 위한 수행이다. ....영적인 수행이 매일의 삶에서 소모되거나 저하되거나 삶과 분리된 것으로 유지되지 않도록, 다섯 개의 요결의 목적은 그 둘이 서로 협력하도록 영적인 수행을 활동적인 삶과 완전히 통합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요결 : 역경을 영적인 각성을 위한 도움으로 변형시키는 것

전 세상이 악의 노예가 될 때, 역경을 영적인 각성을 위한 도움으로 변형시켜라.

하나의 범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라.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서 숙고하라.

명상의 현상들을 네 가지 몸으로 명상할 때, 텅 빔이 최고의 보호책이 된다.

최고의 전략은 네 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날 때마다 즉시 명상에 적용하라.

* 화

공덕을 불태워 없애는 마음의 충동은 화다. 화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것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창고인 공덕을 없애버린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싶고 실제적으로 진보하고 싶다면, 우리가 삼사라의 바퀴를 핥아먹는 쥐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화를 다루는 법을 알 필요가 있다.

족첸 스승인 Jigme Tenpey Nyima는 이런 본질적인 충고를 한다.

“모든 불리한 상황과 역경이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기분이 좋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내면적인 장애와 외부적인 장애 모두 (적, 귀신, 악의에 찬 농담, 병 등)를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들을 좋은 식으로 보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해로운 상황들을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일에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 상황들을 좋거나 나쁘게 만드는 것은 상황을 이해하는 우리 마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을 훈련함으로써, 당신은 온화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낙천적이고 용감해질 것이다. 당신의 영적 수행에 장애는 없을 것이다. 모든 불리한 상황들은 경이롭고 상서롭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계속 평온한 기쁨으로 만족할 것이다. 타락한 시대에 하나의 영적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이런 갑옷이 반드시 필요하다.”

역경을 수행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세 번째 요결의 주제다.

* 다르마에 대한 열망

이번 생애 우리의 상황엣 깨달음을 얻는 것이 가능할까?

깨달음은 단 한순간의 번득임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전부냐 전무냐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이 부처로 깨닫기 전에, 그에 앞서 많은 성취의 단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깨달음이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이고 가장 큰 정열이라면, 깨달음은 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영적인 수행으로 전환시키고 매 순간을 불태우는, 다르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이다.

다르마는 그저 다리를 꼬고 앉아서, 호흡을 의식하거나 마음을 지켜보거나 심상화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마는 또한 우리의 일반적인 휴식시간도 풍요로운 이해가 계발될 수 있는 순간들로 사용하는 것이다. 다르마에는 또한 어떤 장애의 와중에서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독창성도 포함된다. 우리가 더 정열적일수록, 삶의 모든 것을 다르마로 변형시킬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승려가 될 필요는 없다. 은둔하며 삶을 보낼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좋은 나쁘든, 삶의 모든 것을 다르마로 변형시키는 지칠 줄 모르는 열망이다.

* 마음은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의 목적은 다르마를 삶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단지 좋은 면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다르마의 목적은 역경 속에서도 마음이 좋은 친구가 되고, 평온과 역경의 모든 시기에 기쁨과 행복이 일어나도록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변하기 쉽다는 것을 안다. 어떤 때 마음은 참을 수 없지만, 어떤 때는 좋은 친구다. 때로 기쁨과 덕행이 쉽게 생기지만, 어떤 때는 자신의 생각에서 도망가고 싶어진다. 마음의 유동성은 마음이 조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음은 균형 잡을 수 있다.

* 마음의 기능 - 불교의 관점

불교는 마음의 기능을 개념적 conceptual 기능과 지각적 perceptual 기능으로 분류한다.

1) 마음의 개념적 기능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 때, 마음은 개념적 양태로 기능한다. 마음의 개념적 양태에서, 우리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건들에 근심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개념적 양태에서, 마음은 현재의 실재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해석을 다루고 있다. 계획하고 조정하는 지성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시간에, 이런 개념적 양태는 적합하다.

마음의 지각적 양태는 보통 우리의 개념들로 완전히 지배당한다. 스트레스로 지친 개념적 마음이 피곤할 때, 우리는 지각적 양태로 주의를 돌려 호흡을 바라봄으로써 개념적 마음에 약간의 휴식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개념적 마음에게 휴식하라고 할 때, 그 마음은 생각에 미쳐 있는 습관을 깨기가 힘들다. 개념적 마음은 우리가 명상할 때 지껄인다. 우리에게는 생각하고, 계획하고, 조정하고, 기억할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자동적으로 아침에 작동해서 16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고, 오직 잠자는 8시간만 휴식하는 개념적 마음은 건강하지 못하다.

2) 마음의 지각적 양태

끊임없는 비평 없이 조용히 주의를 기울이는 지각적인 의식의 양태를 탐구하고 계발해야 건강하다. 지각적 양태를 탐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개념적 마음을 속여야 한다. 예를 들어, 걸을 때 우리는 호흡에 의식하거나 몸에 주의하거나 주변 환경을 의식함으로써 지각적 양태로 빠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개념적이고 지각적인 마음의 두 가지 기능의 균형을 잡아서, 점차 마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3-1. 전 세상이 악의 노예가 될 때, 역경을 영적인 각성을 위한 도움으로 변형시켜라.

역경 : 카르마

역경의 본질

자기중심주의가 진짜 적

세 번째 요결로, 마음수련법은 처음 두 가지 요결에서 계발된 상대적인 보리심과 절대적인 보리심을, 기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활동적인 삶의 재료와 통합하기 시작한다.

고통에 대처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고통을 없애거나 피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마음수련법에서는 고통을 피하거나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고통을 이용하라고 충고한다. 역경을 영적인 각성의 길로 변형시켜라. 역경을 보리심으로 변형시켜라. 고통을 우회하여 가지 않는 길이 지름길이다. 그보다도 고통을 수용하고 영적이 길 자체로 변형시켜라.

“세상이 악의 노예가 될 때” : 우리의 삶이 역경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 우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집착, 화, 질투심, 자만심, 오만, 경쟁심, 경솔함과 같은 정신적 번뇌들로 괴로워하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마음속의 번뇌들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세상의 안팎 모든 곳에서 더 많이 그것들을 볼 수 있다. 세상이 온통 괴로워하거나, ‘악의 노예가 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당신이 장애처럼 보이는 것들을 영적인 수련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면, 깨달음을 성취하는 도중에 있다.

* 역경 - 카르마

불교에서는 장애가 있다면, 카르마와 관련된다고 이해한다. 우리가 역경으로 경험하는 것은 과거에 행한 행위의 반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신이 행위와 그 결과의 윤리적 통일성과,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가는 의식의 연속성을 믿는다면 ...역경을 과거 행위의 열매로 다룬다. ....과거의 언젠가 지금 열매를 맺는 행위의 씨앗들이 뿌려졌다. 이런 관점의 큰 이점은 자기 연민을 막는다는 것이다.

 

* 역경의 본질

처음 얼핏 볼 때, 역경은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무엇처럼 보인다.

A. 우리의 근본적인 동기가, 우리의 주요한 욕망이,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런 삶이 일어나도록 우리의 환경을 구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 환경을, 역경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즐거운 경험으로 바꾸는 것은 대개 끊임없는 좌절로 끝날 것이다.

B. 반면 우리의 최고 우선순위가 마음이 행복의 근원이 되도록 마음을 변형시키는 영적인 수련이라면,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런 동기가 있다면, 역경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변적으로 보인다. 최고 우선순위가 각성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역경은 수행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게쉐 나그왕 다르게예는 “쉽고 안락한 삶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깨달음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좋든 싫든 삶의 모든 것을 변형시킴으로써 성취된다. 불굴의 의지와 인내와 절제와 평등심을 계발하지 않고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다.

* 진짜 적은 자기중심주의

이 전쟁의 첫 번째 어려움은 진짜 적인 ‘자기중심주의’와, 진짜 동료인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구별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주의는 ‘내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자기중심주의는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과거의 생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지배했다. ...자기중심주의의 태도를 가지고 행복을 찾는 것은 사실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자기중심주의는 사실 자기 자신처럼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과 나를 싸우게 한다.

역경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본다면, 어떤 고유한 실체가 없음이 드러난다. 역경은 자기중심주의 때문에 역경으로 보인다. 자기중심주의는 나의 문제를 확대하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하찮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3-2. 하나의 범인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라.

범인 = 자기중심주의

자기 수용 (현대심리학)

마음의 문 앞에서 망보기

다르마를 삶에 통합시키기 = 수행의 연속성 확립

 

* 하나의 범인은 자기중심주의

역경이 닥칠 때, 그 원인인 하나의 범인을 추적하라. ...마음은 다른 사람의 행동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좌절과 불행이 생기는 이유는, 자기중심주의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중심주의를 발견하기는 쉽지만, 그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나의 자기중심주의를 발견하는 것만이 내 자신의 영적 성장을 불러온다.

* 자기 수용은 자기중심주의와 다른가

A. 현대적인 행복의 길 : “너 자신의 모든 면을 받아들이라. 너 자신의 어떤 면도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말라. 너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이라.”

B. 마음을 검사해서, 거기서 일어나는 충동들의 일부는 독이며 완전히 제거될 필요가 있다. (샨티데바)

A와 B 중에서 어느 관점이 옳은가?

독감에 걸렸을 때 “이 독감은 나의 일부야. 나는 독감을 환영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정신적 번뇌들은 당신 마음의 본래적 구성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습관적인 것이지, 타고난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마치 몸에 침입하는 바이러스처럼, 마음의 침입자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이것을 깊이 숙고하며 당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라. 정신적 번뇌들, 개인사, 덕행, 습득한 재능, 몸과 마음(이것들은 당신이 아니다)를 제외하면, 어떤 ‘당신’이 남는가? 따라서, 당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진심으로 수용하기 전에, ‘당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해악과 두려움과 고통이 자아에 집착하는 것 때문에 일어난다면, 그 거대한 악마가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샨티데바)

우리는 자기중심주의에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자기중심주의는 마음을 소유하는 하나의 번뇌이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악마다.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바보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현자의 차이점을 유념하라.”(샨티데바) 오직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함으로써, 우리는 참되고 영속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

 

* 마음의 문 앞에서 망보기

“나는 화나고 공격적이고 불쾌하고 분개한다”는 것에 동일시함으로써, 마음의 성벽들을 정복당하고 마음은 번뇌에 굴복한다. ...승리의 계책은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망보는 것이다.”번뇌가 공격할 때 역습하라. 여기서 작전은 정신적 번뇌가 마음의 입구에 도착할 때마다 다르마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번뇌가 퇴각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건전한 생각과 감정이 쉽게 생길 때, 안심하고 편히 쉬라.

* 다르마를 삶에 통합시키기 = 수행의 연속성 확립

이번 생에서 명상적 고요를 성취하는 것, 불성을 깨닫는 것 등의 성취가 불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다. 그런 성취와 관계없이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다음 생에까지 전해지는 하나의 연속성과 추진력이 존재하도록 다르마를 삶에 통합시켜, 우리 자신을 그 길에 확립하는 것이다.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계속되는 연속성의 길을 확립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다르마에 대한 열정이다.

‘나의 몸’과 ‘나의 느낌’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고통은 그대를 파괴할 수 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의 뿌리가 통찰력에 의해 단절될 때에는, 역경이 닥친다 해도 자아의 집착이 당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 과녁이 없기 때문이다. ...실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이 더 깊어질수록 다르마에 대한 열정은 더 강해진다.

 

3-3.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서 숙고하라.

* 여기서의 친절함은 상대방의 의도에 상관없는 우리의 이로움을 말한다.

*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떻게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결정한다. ...여기서 목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행한 친절의 수혜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게쉐 랍텐은 몇 주 동안 매일 다른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서 명상한 후, 자신이 인류라는 요람 안에서 하나의 갓난 아이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그의 모든 경험은 다른 사람들의 친절함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친절함, 우리를 돕는 모든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단지 유익한 태도 이상이며, 보살의 이상을 향한 한걸음이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본래 서로 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들의 친절함을 명사하는 수행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두 부류로 나눌 때 더 명확해진다.

무례하고 공격적이며 자기 멋대로 하며 강압적인 사람은 이러한 번뇌로 제일 괴로워할 것이다. 불쾌한 자질로 불성이 가려져 있는, 싫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통렌 수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당신이 그 불쾌한 사람과 관계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이 번뇌에서 자유롭고 본래의 덕성이 빛난다고 상상하라)

불쾌한 사람들은 친절하다. 왜냐하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들은 인내심과 자비심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비심을 계발하는 가장 큰 기회는 불쾌한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데,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고 가슴을 열고 모든 유정물을 껴안게 한다.

* 모든 유정물들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 수행은 우리의 폭넓은 경험에서 이로움을 끌어 올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단지 불쾌한 경험을 피하며 하나의 즐거움에서 다른 즐거움으로 교묘하게 움직이는 삶을 살기 쉽다. ....모든 사람들의 친절함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적인 보리심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의식적으로 이 수련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은 매일의 삶을 변형시키는 열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우리가 삶에서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만 드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이 해로운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하는지가 수행의 척도다. ....명백한 적들은 우리의 수행에 박차를 가하고 수행이 진보되었는지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우리의 영적 동료일 수 있다. ...밀라레파는 삼촌의 ‘친절함’이 없었더라면 그의 성취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중국공산당의 ‘친절함’대해 말했다.

3-4. 명상의 현상들을 네 가지 몸으로 명상할 때, 텅 빔이 최고의 보호책이 된다.

지혜를 계발하기 위해서 모든 상황들과 관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살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지만,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보살의 삶의 길에서, 정신적 고통의 보호막으로 작용하는 것은 상대적 보리심의 계발이다.

여기엔 여전히 육체적 고통이 있다. 육체적 고통에 대한 최고의 보호책은 절대적 보리심인 텅 빔의 깨달음이다. 여기서의 목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을 포함해서 모든 현상들이 단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망상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어떤 현상도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가 없다....텅 빔의 깨달음은 주체와 객체의 구상화를 없애고, 심지어 해를 가하는 객체들의 구상화도 없앤다. 고통을 일으키는 것과 고통당하는 ‘나’, 그 두 가지 모두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현상은 허공에서 나타나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명상적 고요가 약해진다면, 마음은 텅 빔의 깨달음이 깊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질 만큼 충분히 안정되지 않는다. ....통찰력은 더 깊이 들어간다. 텅 빔의 깨달음과 함께, 고통에서 의식을 철수할 필요가 없다. 고통은 경험하지만, 텅 빔에 대한 통찰력으로 당신은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 딜고 크옌체 림포체의 주석서

1) dharmakaya, 실재의 몸 : 번뇌를 포함해서 모든 주체와 객체, 모든 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2) sambhogakaya, 완전한 기쁨의 몸 : 현상의 어떤 것도 진실로 그것들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사실 “태어나지 않는 의식”이다. 그것은 결코 중단되지 않으며, 중단 없는 순수한 의식의 본성이 삼보가카야이다.

3) nirmanakaya, 유출의 몸 : 텅 빔은 진공이 아니고, 경험한 모든 현상들이 마음속에 비친 모습들처럼 나타나고, 그 반영과 같은 본성은 니르마나카야이다.

4) svabhavakaya, 자연스러운 몸 : 태어나지 않고, 중단되지 않고, 모든 것으로 현현하는 의식의 본성의 불가분성.

정신적 번뇌를 포함한 모든 현상들을 이 네 가지 몸으로 봄으로써, 우리는 사실 정화할 아무것도 거부할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3-5. 최고의 전략은 네 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다.

네 가지 수행 : 공덕 쌓기, 악덕 정화, 정령에게 공물 바치기, 다르마의 수호자들에게 공물 바치기

3-5-1. 공덕을 쌓는 것

마음과 몸과 말로 어떤 공덕을 행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귀결이다. ...반대로 남을 해치거나 정신적 번뇌가 일면 공덕은 사라진다. 가장 나쁜 정신적 번뇌는 화다.

화의 표면적 이유는 역경이다. ...증오심을 가지고 역경에 대응하지 말라. 잘못된 행동을 만날 때, “이 사람이 자유롭기를 바랍니다.”하는 소망으로 대응하라. 자비심은 무관심이나 묵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정말 화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에 갇혀 있고, 이 구상화는 망상을 바라보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판단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라. 그것을 바라볼 때 망상을 인식하고, 망상을 인식함으로써 그 토대를 허물고 궁극적인 보리심의 지혜가 생기게 하라.

3-5-2. 악덕을 정화하기

= 네 가지 치유 능력으로 악덕을 정화한다. (참회, 신뢰, 결단, 정화)

우리는 불가피하게 실수를 저지르지만, 네 가지 치유능력은 악행의 카르마적 영향을 없앨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한다.

3-5-3. 정령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

3-5-4. 다르마의 수호자들 dharmapalas 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

가장 강력한 다르마 수행의 최상의 수호자는 보리심이다. 상대적 보리심의 동기는 역경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을 영적인 각성의 길로 변형시킨다. 절대적 보리심은 텅 빔이라는 궁극적인 본성에 대한 통찰로 그 장애 자체를 잘라낸다.

3-6.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날 때마다 즉시 명상에 적용하라.

이 경구는 공식적인 명상을 하지 않는 시간들을 위한 명상 후의 요가다.

삶에서 당신의 가장 깊은 열망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다르마 수행은 그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가장 깊은 열망이 영적인 성숙을 위한 것이라면, 삶에서 가능한 모든 역경들은 더 깊은 통찰력과 더 깊은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구는 사성제 중 고제苦諦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 의식의 본성은 순수하지만, 습관화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미혹되어 있다. 유정의 존재들이 정신적 번뇌로 괴로워한다는 것을 앎으로써, 어려움이 닥쳐서 우리에게 뜻 깊은 방식으로 반응할 기회를 제공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의 근본적인 주제는 세속적인 희망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점진적인 의식의 변화를 말한다.

네 번째 요결 : 한 생을 위한 수행의 종합

다음의 두 구절은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 전부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모든 수행들을 삶 전체를 위한 하나의 수행으로 종합한다.

실제적인 지침의 정수를 종합하고자 한다면, 다섯 가지 힘에 전념하라.

의식을 변화시키는 대승의 가르침은 바로 이 다섯 가지 힘이므로, 당신의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4-1. 실제적인 지침의 정수를 종합하고자 한다면, 다섯 가지 힘에 전념하라.

다섯 가지 힘 = 결단의 힘, 익숙함의 힘, 긍정적인 씨앗의 힘, 혐오의 힘, 기도의 힘.

티베트의 오래된 경구들

4-1-1. 결단의 힘

두 가지 보리심에서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것.= 지혜와 자비심에서 분리되지 않는 것.

미래에 깨우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 두 가지 보리심을 견지하는 것.

자기중심주의가 고통의 원인으로 간주하며, 뿌리 깊은 구상화의 습관(현상들이 독립된 실체처럼 보이도록 현상을 환경에서 분리시켜 바라보는 습관)을 자른다.

4-1-2. 익숙함의 힘

하나의 전략. “익숙하면 모든 것이 더 쉬워진다”(샨티데바)

건강이 좋고 재앙이 아직 닥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수행할 기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소중한 인간 삶’의 두 가지 결정적인 특징, 즉 수행할 수 있는 ‘여가와 기회’가 있다. ...익숙함의 힘은 삶의 모든 것을 수행에 적용하는 것이다.

==> 집의 주소를 기억하기 (틱낫한)

4-1-3. 긍정적인 씨앗의 힘

당신의 현재 상황을, 언젠가 깨달음의 나무로 자라날 하나의 씨앗으로 상상하라. 역경이나 행복이나 어떤 상황이든, 영적인 수행을 위한 기회로 환영함으로써 이 씨앗을 보살피라.

4-1-4. 혐오의 힘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혐오. 혐오의 힘은 고통을 일으키는 정신적 습관을 피하게 해준다.

“돼지의 코를 때려라. 램프는 따뜻할 때 닦으라.”

마음의 고통스러운 습관들을 발견하는 순간, 그 습관들이 당신의 마음의 문에 코를 들이대는 순간, 그 코를 때리라. 그리고 아직 따뜻할 때 고통스러운 당신 마음의 램프를 청소하라.

4-1-5. 기도의 힘

결코 두 가지 보리심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

참된 스승과 도반, 다르마와 영적인 길을 따르는 데 도움이 되는 환경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기를 기도하라. 기도의 힘은 열망이고, 욕망의 집중이다. ...우리는 하나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제가 영적 각성으로 가는 길의 핵심인 두 가지 보리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티베트의 오래된 경구들은 활동적인 삶과 수행을 하나로 통합할 때 불필요한 많은 문제를 줄일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 다르마에 의지하라

말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에 의지하라

임시방편적 의미가 아니라, 궁극적인 의미에 의지하라.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지혜에 의지하라.

말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에 의지하라 : 다르마는 말이 가리키는 실재이다. 자애, 지혜, 고요, 관용, 덕은 다르마이다.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지혜에 의지하라. : 형식적인 의식은 육체적인 감각과 추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마음의 영역을 넘어서, 획득되지도 않고 외부적 자극에 조건화되지도 않는 지관적인 지혜의 무한한 원천이 있다.

4-2. 의식을 변화시키는 대승의 가르침은 바로 이 다섯 가지 힘이므로, 당신의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앞의 다섯 가지 힘을 특히 죽음의 과정에 적용한 것

4-2-1. 긍정적인 씨앗의 힘

두려움은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큰 장애물이므로, 두려움 없이 죽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다르마 수행자에게 죽음은 감각과 육체의 산란으로 방해받지 않는, 명상을 위한 완벽한 기회를 제공한다.

두려움 없이 죽음에 직면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유물이나 몸을 떠나기가 두렵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라. 당신은 집착하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내세와 관련된 두려움 없이, 물질적인 소유물과 모든 명예를 버려라. 의지할 대상이 있다면 마음에 떠올리고 그 모든 것을 버려라. 당신의 몸조차 버려라. 30만 킬로미터를 달린 차 한 대를 수리하는 것이 교체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 수 있는 것처럼,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받을 준비를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남김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라. 이것이 죽음에 적용되는 긍정적인 씨앗의 힘이 의미하는 것이다.

4-2-2. 죽음에 적용되는 기도의 힘 = 후회

기도의 힘은 모든 악행을 드러내고 안식처를 구하는 것이다. 당신의 심안으로, 두 가지 보리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도드리고 축복을 구하라. 죽음 이후의 중간 상태인 바르도와 내생에 영적인 성장을 계속할 수 있게 인도하는 길로, 당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영적 스승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4-2-3. 혐오의 힘 = 자아에 대한 집착을 고통의 근원으로 인식하는 것.

자신의 육체에 집착하는 힘이 생로병사의 순환을 영속화한다. 혐오의 힘에 따라 당신의 몸과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모든 집착을 놓는다면, 죽음을 해방으로 경험할 것이다. ....다른 몸을 간구함으로써, 우리는 고통과 자신의 망상을 영속화한다. 혐오의 힘은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생각을 형상에 집착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 다음 집착을 완전히 놓고 의식을 그저 텅 빈 공간에 있게 하는 것이다.

4-2-4. 죽음에 적용된 결단의 힘 = 바르도에서 두 가지 보리심을 훈련하는 것.

당신의 심장과 호흡이 멈추었고 꿈과 유사한 의식을 경험하고 있다고 상상하라. 꿈과 비슷한 바르도 의식에서 몸과 환경은 불안정하다. 환경은 단지 한 생각으로 바뀐다. ....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죽음은 혼란을 준다. 육체적인 죽음 이후 며칠 동안,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죽은 후 꿈의 상태와 비슷한 정신적 형상을 취하고, “난 여기 있다!”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알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서 당황한다. 마침내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이 서서히 생기며,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나는 몸이 필요해!”하는 갈망이 일어난다.

죽음에 적용된 결단의 힘은 꿈과 같은 바르도의 상태에서 자비심과 통찰력을 계발하는 것이다. 혼란과 화와 갈망 대신에, 두 가지 보리심을 수련하라. 실재 그 자체의 본질을 통찰하고, 바르도에서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고, 자비심을 계발하라. 죽어가는 동안, “곧 나는 바르도에 있을 것이고, 두 가지 보리심을 계발할 것이다.”라고 결심하라.

4-2-5. 죽어가는 동안의 익숙함의 힘

익숙함은 삶과 죽음을 통해 두 가지 보리심 수행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

불교에서는 가능하다면 죽을 때 사자 자세를 취하라고 충고한다.

죽을 때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두려움 없이 미래에 직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신이 죽어갈 때 애통해하는 친구들은 도움이 되지 않고, 그들이 통곡은 마음을 아주 산란하게 할 수 있다. 정중히 그들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하라. 당신이 죽는 동안 놀라지 않을 믿을 만한 동료나 법우나 영적 스승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 죽음의 총연습을 수행할 때, 당신의 마지막 에너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그동안 명료한 의식을 유지하고, 친숙한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고, 돌아보지 말고 모든 것을 해방시킨다고 상상하라. 지금 여기 무엇이 있는가? 두 가지 보리심이다. 죽을 때 자비심을 계발하라. 아직 호흡이 남아 있는 동안 통렌을 수행한다고 상상하라. 들숨에 세상의 고통을 수용하고 날숨에 당신의 모든 행복을 준다고 상상하라. 궁극적 보리심의 수행으로 움직이라. 모든 것을 해방시키면서, 곧바로 의식의 본성으로 움직이라. 의식이 희미해진다면, 통렌으로 돌아가라. 상대적인 보리심과 절대적인 보리심 사이를 오가며 수행하라. 죽는 동안 두 가지 보리심을 수행하는 것이 완전하게 죽는 것이다.

누가 죽는가? 몸은 늙고,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기능은 중지하고, 부패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죽는 ‘나’는 누구인가? 살면서 생긴 ‘나’라는 느낌은 이 몸과 뇌와 개인사에 기초한 허구가 아닌가?

태어나지 않는 의식은 물리적 육체의 죽음과 개인적 에고의 소멸을 넘어서 계속된다. 그 의식은 결코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죽지도 않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태어나지 않았고, 삶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는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스스로 창조한 허구들이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음의 과정에서 해방된다면, 죽음 없는 상태를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나’라는 허구가 해방되고 태어나지 않는 상태를 깨달을 때, 아무도 죽지 않는다. 죽어가고 있을 때 ‘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영적인 깨달음은 아주 가깝다. 살아 있는 동안에 태어나지 않는 본성을 알아낸다면, 육체의 죽음 이전에 지금 여기에서 죽음 없는 상태를 성취한다.

 

* 아티샤는 삶과 죽음을 위한 수행의 정수를 두 줄로 종합한다. 다섯 가지 힘을 이용해서 두 가지 보리심을 계발하라. 이것은 삶과 죽음을 위한 본질적인 수행이다. 꿈의 요가를 훈련하는 것이 죽음을 위한 최선의 준비다. 꿈꾸는 동안 꿈의 상태를 이해하는 능력을 계발함으로써 바르도에 진입하는 죽음 이후의 상태를 준비할 수 있다. 바르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단지 자신의 업력에 휘말리기보다는 지혜를 가지고 다음 생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마치 꿈과 같은 바르도는 준비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다. 꿈을 이해하는 훈련 없이 우리는 모든 것을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습관적 반응은 우리를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내몬다. 죽음을 이생에서 명상을 위한 마지막 기회로 보는 티베트불교의 견해는, 의식을 뇌의 부산물로 보는 대부분의 현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견해와 대립한다. 뇌가 죽을 때 의식이 사라진다는 유물론적 견해와, 의식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연속된다는 불교의 견해는 서로 배타적이다.

* 불교에 의하면,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개인사와 능력과 지성은 의식의 더 깊은 층으로 물러난다.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양쪽의 문을 가진 복도를 통과하는 것과 유사하다. 죽어가는 사람은 깊은 무의식과 같은 암전(暗轉)상태를 통과한 후, 개인적 정체성의 느낌이 없이 빛나는 상태인 죽음의 밝은 빛 속으로 나타난다. 개인적 정체성이 없다면 누가 바르도에 나타나는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의 뇌는 부패하지만, 당신의 특성과 기억들은 죽음에 뒤따라 의식의 깊은 층에서 나온다. 그건 마치 당신이 밤의 꿈에서 깨어나서 아침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기억하는 것과 같다. 당신의 흔적, 습관적인 경향, 지식, 개념화, 감정, 에고의 모든 요소들은 마음의 흐름에 저장되어 바르도에 나타날 것이다.

인지과학자들과 달리 불교도들은 뇌를 최우선으로 보지 않는다. 의식이 최우선이며, 그것은 뇌의 지지나 영향 없이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죽음의 과정은 아주 중요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변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요결 : 마음수련에 있어서 숙달의 기준

모든 다르마는 하나의 목표로 통합된다.

두 목격자 중 주요 목격자에 주의를 기울이라.

항상 즐거운 마음에 의지하라.

영적인 수행에서 얼마나 진보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타라 림포체는 깊음 명상 속에서 모든 생각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건강한 생각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셨다. 마음에 여전히 흥분과 불안과 갈망이 쉽게 일어난다면, 비록 명상적 고요를 계발하는 데 약간의 진보를 한다고 해도 그 고요는 이런 해로운 생각의 습관들이 다시 나타나는 순간 파괴될 것이다. 건강한 생각이 최상의 발판을 마련해준다면, 명상적 고요는 더 깊어진다. 고요 속의 평정은 외부의 상황에 점점 덜 의존하게 된다. 덕행이 명상적 고요의 발판인 것처럼 일단 마음이 수련을 통해서 안정되면 고요 그 자체가 의식의 본성을 통찰하고, 궁극적으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통찰력의 단계들을 위한 발판이 된다.

5-1. 모든 다르마는 하나의 목표로 통합된다.

마음수련법에서 숙달을 얻었다는 기준은 하나의 목표로 요약된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도전이다. ...당신이 얼마나 수행을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표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의 습관이 감소하고 있는 정도다.

- 네가 아주 배가 고파 음식을 얻으러 다른 사람의 문을 두드린다고 상상해보라. 주인은 기꺼이 너를 맞이해서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주고, 너는 맛있게 먹는다. 이 상황에서 나는 자만심이나 우월감을 느끼겠는가?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족감을 느끼지 자만심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 너는 영적인 가르침과 지혜를 갈구하며 여기에 왔다. 여기 교사들은 너에게 균형 잡힌 영적 가르침의 식사를 제공해서 너는 마음껏 배불리 먹었다. 네가 그 과정에서 만족스럽다면 기뻐하라. 하지만 자만심을 느낄 이유는 없다.

- 나는 불교 승려로 다르마를 배우고 승려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 사람의 인간이자 불교 수행자로서 나의 모든 이해력과 지성을 가지고, 만약 내가 파리처럼 행동하며 나만을 위해 좋은 것들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수치다. 너에게 더 많은 이해와 지성이 생길수록 더 큰 책임이 생긴다.

5-2. 두 목격자 중 주요 목격자에 주의를 기울이라.

마음수련법은 우리의 영적인 진보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목격자 중 주요 목격자’라고 말한다. 이 둘은 누구인가? 한 목격자는 외부에서 우리를 관찰하는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두 번째 목격자는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만이 우리의 동기와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의 성질을 관찰할 수 있다. 당신 자신과 다름 사람들, 두 목격자 중에서 주요 목격자는 당신 자신이다. 정직하게 당신 수행의 자질과 진보를 감시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에게 의지하라.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관심의 두 가지 유형 사이의 차이점은 동기에 달려 있다. 당신이 덕행에 초점을 맞추고 최선을 다하고 실수를 고치며 나아간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다.(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들 중 하나인 평판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다)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당신을 나쁘게 생각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다. 당신은 결코 모든 사람들의 비판을 초월할 만큼 그렇게 완벽하고 자애롭고 현명하고 고결할 수 없다. 부처님의 사촌은 부처님을 비방하고 죽이려고 했고, 예수님은 적들의 손에 죽었다. ....우리의 주요 판관이자 목격자는 우리 자신이다. 주요 목격자는 비판이 타당한지 아닌지 주의 깊게 평가할 수 있다. 비판이 타당하다면 생각해보라. 그렇지 않다면 그 비판을 잊어버리라.

5-3. 항상 즐거운 마음에 의지하라.

항상 즐거운 마음을 상상하라.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부족하지 않은 가전제품으로 항상 가득한 쾌적한 환경보다 더 가치있는 마음의 성향을 상상하라. ....즐거운 마음이 단지 행복하고 쾌적한 환경에서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항상 방해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즐거운 마음에 의지하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바꾸기로 결심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유물이나 칭찬이나 평판이나 건강보다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비로운 가슴과 지혜로운 마음을 원한다면, 우리의 가장 우선순위가 두 가지 보리심의 계발이라면, 바로 이 선택이 삶의 온갖 부침 속에서 항상 즐거운 마음을 계발하고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열쇠다.

보리심이 최고의 우선순위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통찰력과 자비심의 기회가 된다. ....가슴이 부드러워질 때 가혹한 비판은 사라진다. 슬픔이 자비심의 가까운 적이며, 참된 자비심에 이르는 과도기의 상태이며 전조라는 것을 상기하라. 슬픔이 일어날 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항상 즐거운 마음에 의지하라.

세속적인 관심사들은 거대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작은 문제들이다. 마음은 하나의 풍선처럼 때로는 오그라들고 때로는 팽창하며, 관점의 크기에 따라 좌우된다. 마음을 넓고 균형 있게 유지하라.

물론 거대한 문제들이 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참한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비의 가까운 적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무익함과 무관심에 굴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라. 호흡과 더불어 주고받는 통렌 수행을 하라.

“만약 해결책이 있다면 좌절할 이유가 있는가? 또한 해결책이 없다면 좌절해봐야 어쩌겠는가?” - 샨티데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하라.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면 괴로워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태도는 영적인 수행에 대한 전사적 사고방식을 계발한다. 링 위의 복서처럼 역경과 혼란과 불쾌한 사람에 맞서서 모든 역경을 즐거운 마음으로 정복할 준비를 하라.

여섯 번째 요결 : 마음수련의 서약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결심.

행복과 불행을 통해서 내면의 행복을 계발하고 싶다면, 고통을 야기하는 어떤 습관적 행위를 중단함으로써 아까운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향해 치닫고, 행복을 원하지만 미혹에 빠져 자신의 행복을 적처럼 파괴하네.” (샨티데바)

여섯 번째 요결은 의지의 행위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행동의 목록을 열거한다. 의지만 가지고는 하룻밤 사이에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의지의 행위로 하룻밤 사이에 절대적 보리심을 성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정원처럼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고 보살핀다면 보리심이 자라날 것이다.

이 서약들은 영적 수행을 통해서 힘들게 쌓아 올리려 하는 것을 습관적 삶이 파괴하지 않도록 당신이 피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다. ...이 서약들은 도덕을 위한 도덕이 아니다. 이 모든 서약들은 영적인 각성의 길에 놓여 있는 함정인 특정한 행동의 습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항상 세 가지 원칙을 지키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바꾸되, 있는 그대로 머물라.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보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라.

독이 든 음식을 피하라.

독선에 빠지지 말라.

악의로 비꼬지 말라.

매복하며 기다리지 말라.

조의 짐을 소에게 지우지 말라.

정상이 되려고 아첨하지 말라.

가식을 피하라.

신을 악마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라.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지 말라.

 

 

6-1. 항상 세 가지 원칙을 지키라.

세 가지 원칙은 이렇다.

6-1-1. 마음을 닦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위반하지 말라.

6-1-2. 마음수련에서 허세를 부리지 말라.

6-1-3. 편협한 마음수련을 하지 말라.

6-1-1. 마음을 닦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위반하지 말라.

1) 서약을 무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들이 명상에서 진보를 느끼기 시작할 때, 그들은 자신의 영적 깨달음이 도덕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파드마삼바바는 그 점에 관해서, 비록 자신의 시야가 허공처럼 광활했지만 행동은 보릿가루의 낟알처럼 섬세해졌다고 언급했다. 윤리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진보하는 법은 없다.

2) 다른 가르침들을 거부하지 않는 것.

다른 전통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근본주의자의 믿음을 금한다. 당신은 시간을 무엇에 쓰는가? (영적 깨달음을 빨리 얻으려는 욕심은 ‘시간의 결핍’과 관련되는데,) ‘네 가지 추론적 명상’의 목적은 영적 수행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지고 결국 모든 순간을 수행을 위한 기회로 인식하도록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것이다. 영적인 성숙으로 향하는 빠른 길은 전적인 몰입과 지성적인 수행과 인내를 통한 길이다. 이런 요소들을 우회하는 어떤 지름길도 엉터리다.

6-1-2. 마음수련에서 허세를 부리지 말라.

마음수련법을 시험하려고 위험한 상황을 찾아다니지 말라. 힘든 상황은 때가 되면 찾아올 것이다.

6-1-3. 편협한 마음수련을 하지 말라.

상황이 좋을 때만 수행하거나, 어떤 어려움에서만 수행하고 다른 어려움에서는 수행하지 않거나, 어떤 사람과는 수행을 적용하지만 다른 사람과는 그렇지 않으면 ‘편협한’ 마음수련이다. 평등하게 모든 상황 속에서 수행하라.

6-2. 당신의 우선순위를 바꾸되, 있는 그대로 머물라.

우리의 마음은 바꾸어야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종교적’으로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외견상 우리의 행동을 급격하게 바꾸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깨끗하게 빨래한 옷을 자랑하고 싶듯이, 내면에서 일어난 좋은 변화를 밖으로 표출하고 싶어한다. 마음수련법의 서약은 영적인 진보를 표시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깊은 수행을 계속해서 마음에 큰 변화를 일으키되, 당신의 행동은 그대로 유지하라.

우리가 자신의 성취를 뽐낼 때, 그것은 “나는 특별하다”라고 말하는, 존경을 원하는 외침이다. 새로운 덕행의 외부적 과시는 다르마 수행이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에 봉사하고 있다는 표시다.

한 서양인이 달라이 라마에게 그의 깨달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티베트인은 그런 질문을 꿈도 꾸지 못한다. 달라이라마는 “그건 제 문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스스로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수행을 고무시킬 동기로 자신의 내적 경험을 말한다.

6-3.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런 행위는 아무 이로움이 없고, 보리심의 계발을 파괴하고, 결국 우리 자신을 해친다.

6-4.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는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보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들이 실제로 ‘바깥’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결함을 투영한 것인가? 결국 우리엑 보이는 모든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현상일 뿐이다. ...어떤 사람도 본래 악하지는 않다. 더구나 모든 악의 뿌리인 정신적 번뇌 그 자체도 자신의 고유한 실체가 없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가 되므로,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주의한다면 불쾌한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결점을 계속 생각하는 것도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적 상태와 행동을 명확하고 정확히 의식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다.

* 과학의 ‘블랙박스’

블랙박스는 오직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오는 것만을 탐지할 수 있을 뿐, 무엇이 안에 있는지는 탐지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블랙박스의 가장 깊은 문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마음에만 직접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고에 기초한 추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 블랙박스의 상황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는 ‘미결정 underdetermination’이라 불린다. 하나의 블랙박스에서 아무리 많은 객관적 데이터를 끌어내도 그 정보는 항상 복합적이고 상호모순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의 범위는 단지 상상력의 문제일 뿐이고, 객관적 데이터 그 자체는 결코 당신의 선택을 단 하나의 가능한 해석만으로 좁힐 수 없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아주 신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의력과 실재와 순수한 지각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순수한 지각을 계발할 때, 우리가 한 사람의 표면적 결점을 넘어서 본다면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론을 피할 수 있다. 순수한 지각을 계발할 때, 우리는 습관적인 선입견과 해석을 넘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불성과 관계한다. 사람들에게는 개인적 특성 이상이 있고 그들의 깊은 실체는 불성이나 원초적 지혜라는 것을 우리가 직관적으로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불성과의 대화를 선택할 수도 있고, 단지 그들의 진부한 성격에만 관계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제한할 수 있다. 이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며, 우리는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6-5. 보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라.

1) 초보자들에게 이 경구는 우리에게 지위와 존경과 명성과 마술적 힘과 이 삶에서 다른 세속적 보상을 얻으려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가장 높은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가 결국 깨달음의 희망조차도 버려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여전히 우리가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갈구하는 미혹된 유정물로 우리 자신을 보는 이원적 사고방식에 붙잡혀 있다면, 깨달음에 대한 희망과 깨닫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바로 그 사고방식이 이미 현존하는 우리 자신의 불성을 실현하지 못하게 막는다.

2) 이 구절의 중심적인 문맥은, 영적 수행의 초기에 중요했던 희망과 열망들이, 수행이 진보할수록 추상적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수행이 뿌리를 내려 내면에서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고 현재의 성취와 행복을 주기 시작할 때, 수행은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 당신의 수행은 언제 궤도에 오르는가? 당신이 수행을 즐기기 시작할 때다. 수행 그 자체에서 만족감과 기쁨이 생기는 것을 발견할 때, 이제 보상과 성취에 대한 희망을 놓아야 할 때다. 다르마 수행이 진전될 때, 보상에 대한 희망은 불필요하고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 이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희망과 불안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6-6. 독이 든 음식을 피하라.

‘내가 특별하다’라는 느낌이 이 경구에서 언급된 독이 든 음식이다. 달라이라마가 언급했듯이, 다르마 수행자는 상처 입은 사슴이 고독을 찾는 것처럼 은둔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사회에서 물러나는 외부적 고독이 있는 반면,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에서 물러나는 내면적 고독이 있다. 외부적 고독은 항상 적절하지만은 않지만, 내면적 고독은 항상 적절하다.

영적인 수행의 목적은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이 사실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이라면, 어떤 다르마 수행 없이도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6-7. 독선에 빠지지 말라.

다른 사람의 악행이 생겨난 상황과, 대단하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의 덕행을 일으킨 영향에 대해서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라는 충고.

누군가의 잘못된 행위를 목격할 때, 분노를 참고 그 사람의 상황과 개인사를 고려하라. 그 다음 당신의 개인사, 특히 다르마에 관련된 개인사를 고려하고, 당신이 계발한 그 모든 덕행이 다른 사람의 친절함과 인도와 격려로 계발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라. 감사의 느낌은 당신만이 정당하다는 생각을 꺾는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대신, 어떤 상황이 그런 나쁜 행동을 일으켰는지 생각하고 그 사람을 돕기 위한 유익한 태도를 계발하라.

이 서약들을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열망과 우리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검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르마의 목적은 순간적인 황홀감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원초적 지혜를 얻음으로써 실현되는 지속적인 행복감의 상태다. 우리의 행위를 명상의 순간적인 효과를 넘어선 이런 깊은 변화에 연결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열망이다. ....우리가 다르마라 불리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수행하고 있다는 이원적인 느낌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삶과 영적 수행이 합쳐질 때 우리의 마음은 진실로 다르마가 된다.

6-8. 악의로 비꼬지 말라.

티벳에서는 비꼬는 것은 양털로 덮인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악의로 비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재치 있고 익살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의도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악의로 비꼬지 않으려면 많은 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고, 특히 말을 잘하고 영리한 사람은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할 때 그 말은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괴로울 때, 그 말은 단 시간에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

악의로 비꼬는 것이 정당하거나 사실이라고 여겨질 때,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불교의 입장은 옳다고 해도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들이 있고, 더구나 경멸감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9. 매복하며 기다리지 말라.

6-10. 조의 짐을 소에게 지우지 말라.

조 dzo는 야크와 소의 잡종이며, 소보다 훨씬 강하다. 여기서의 의미는 그 짐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어깨에 어떤 임무와 책임의 짐을 떠넘기지 말라는 것이다.

6-11. 정상이 되려고 아첨하지 말라.

아첨은 속임수다. 아첨의 의도는 감사라는 미명 아래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다.

6-12. 가식을 피하라.

가식은 외적 행위와 일치하지 않는 내면의 동기에서 일어난다. 진지하게 영적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대중들보다 우위에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기야트룰 림포체는 가식의 성향을 모래로 똥을 덮는 고양이에 비유한다.

 

6-13. 신을 악마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라.

마음수련법을 실행하는 동안, 우리는 ‘나는 특별하다’거나 ‘나는 성스럽다’, ‘나의 다르마는 순수하다’거나 ‘나의 길이 올바른 유일한 길이다’라거나, ‘나는 순수한 수행자다’라는 우쭐한 기분이 들 수 있다. 그런 생각은 다르마의 신(여기서는 부처나 보살들을 비유)을 자기중심주의의 악마적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마음수련법의 수행들은 모두 우리 마음의 번뇌에 대한 해독제로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마음수련법의 전부다.

6-14.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어떤 즐거움의 기회를 보았을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그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참된 행복은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행복을 추구할 때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일곱 번째 요결 : 마음수련의 교훈들

모든 명상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라.

모든 낙담의 시기들을 한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라.

시작과 끝에 두 가지 임무가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일어나든 인내하라.

목숨을 걸고라도 두 가지는 지키라.

세 가지 어려운 것을 수행하라.

세 가지 중요한 원인을 획득하라.

세 가지가 약해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계발하라.

세 가지 덕행에서 분리되지 않게 하라.

항상 특수한 사람들을 명상하라.

다른 요소들에 의존하지 말라.

이제 중요한 것을 수행하라.

과오를 범하지 말라.

불규칙적으로 수행하지 말라.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라.

조사와 분석으로 당신 자신을 해방시키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 애쓰지 말라.

화에 사로잡히지 말라.

신경질 내지 말라.

감사를 바라지 말라.

모든 명상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라.

여기서 ‘하나’는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수련법을 사용해서 당신의 경험을 수행의 핵심인 두 가지 보리심으로 변형시켜라.

‘신을 악마의 차원으로 추락시킴으로써’ 영적인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수행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장보기, 일, 휴식, 아이를 돌보는 것을 영적 수행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차에 탄 사람들에게“모두 신속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교통 체증에 안달하기 보다는 다른 운전자들에게“잘 빠지는 길로 가세요.”라고 기원함으로써, 상상력을 이용해 세속적인 것을 다르마로 바꾸라. 그것은 가능하다.

 

모든 낙담의 시기들을 한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라.

당신은 명상을 시작하기 전보다 명상을 하니 마음이 훨씬 더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진보의 첫 번째 징후”라고 부른다. 실망이나 ‘낙담’은 우리의 상황에 더 주의를 집중할수록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많은 생을 통하여 이런 정신적 번뇌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번뇌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인식하기도 힘들다.

당신이 다르마에 대해서 낙담한다면, 적어도 그 절망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르마를 수행하고, 통렌을 수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당신의 행복을 줌으로써 낙담을 없애라.

시작과 끝에 두 가지 임무가 있다.

시작의 임무는 동기를 세우는 것이다. 왜 당신은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가? 동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동기를 보리심으로 바꿈으로써, 모든 세속적 활동들이 의미 있고 유익한 것으로 바뀐다.

이 교훈을 따를 때,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아침에 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은 그날 하루의 동기를 확립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날을 의미 있게 하는가?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 저의 행동이 저를 영적인 각성의 상태로 이끌게 해주십시오.” 이 동기로 하루를 시작하라.

‘끝’에는 두 번째 임무인 공덕의 회향이 있다. 하나의 임무나 하루가 끝났을 때, 돌이켜 보고 좋은 행동이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런 다음 모든 유정물들의 이익을 위해 그 공덕을 회향하라. 당신의 영적 성숙과 모든 유정물들의 행복을 위한 다르마의 영역으로 공덕을 회향하는 것이 최선이다. 세속적 관심사를 향하지 말라.

둘 중 어느 것이 일어나든 인내하라.

‘둘’은 역경과 행복이다. 좋을 때든 나쁠 때든, 그 모두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계속 다르마를 수행하라.

어떤 경우든 마음은 위축되기 쉽다. 상황이 아주 순조로울 때 우리는 성공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상황이 내리막길일 땐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둘 중 어느 것이 일어나든 마음을 넓게 가지고, 상황이 어떻든 평정심을 유지하라. 이것이 영적 성숙의 확실한 지표다.

목숨을 걸고라도 두 가지는 지키라.

‘두 가지’는 상대적인 보리심과 절대적인 보리심이다. 여기서의 요점은 두 가지 보리심이 목숨 자체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여유와 기회를 가진 인간의 삶은 소원을 들어주는 여의주보다 더 가치 있다. 두 가지 보리심은 삶에 가치를 준다. 그러니 목숨을 걸고라도 이 두 가지는 지키라.기억하는 것, 피하는 것, 흐름을 차단하는 것

세 가지 어려운 것을 수행하라.

기억하는 것, 피하는 것, 흐름을 차단하는 것

1. 기억하는 것

정신적 번뇌가 일어날 때 그 치유책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 전쟁에 뛰어드는 병사는 무기고를 철저히 숙지해서 무기를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당신의 마음이 번뇌에 포위될 때 번뇌에 대한 특수하고 일반적인 대응책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이 마음수련법의 경구들을 기억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다.

==> 의지할 수 있는‘집’의 주소를 잘 기억하고 있기(틱낫한)

2. 피하는 것

정신적 번뇌가 당신을 삼켜버릴 태세를 갖추고 정의의 분노와 경멸감이 마음에 밀어닥칠 때가 반드시 있다. 수해을 할 때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볼 것이다. 거기 휩쓸려 가지 말라. 피하라! 마음의 왜곡된 모습들이 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것에 주의를 돌리며 이렇게 생각하라. ‘너희 화와 질투심과 집착이 내게 오고 있지만, 너희들은 나를 붙잡지 못할 것이다!’ 그 번뇌를 알아차리고, 특수한 해독제를 떠올리고, 번뇌의 길에서 빠져나오라.

3. 흐름을 차단하는 것

정신적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그 흐름을 차단하는 것. 여기에는 예리한 주의력이 필요하다. 수영에 관한 책을 읽어도 물에 빠지는 것처럼, 불교 지식이 많아도 수행이 없다면 정신적 번뇌의 흐름을 차단할 수 없을 것이다. 정신적 번뇌의 흐름을 차단하는 두 개의 전략이 있다.

(1)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인식한 다음,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고, 그것에 동일시하지 않고 번뇌를 지켜보는 것. 이 전략은 아주 엄청난 주의력일 필요하지만, 정신적 번뇌는 기생충과 같아서 동일시하지 않고 지켜보면 음식이 없어서 죽는다.

(2) 상대적인 보리심과 절대적인 보리심의 계발과 같은 특수한 해독제를 사용하는 것.

우리가 마음의 균형을 상실하는 것은 원인이 바깥에 없다. ‘바깥’에 있는 것은 정신적 번뇌의 촉매 작용을 하는 것 뿐이며, 화와 집착과 같은 마음의 습관들인 번뇌가 실제로 균형을 잃게 한다. 우리 마음의 요새 안에 있는 중요한 배신자는 자아에 대한 집착과 자기중심주의이며, 마음이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외부의 상황에 제압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모욕을 당했을 때, 모욕이 직접 당신의 불행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모욕은 자존심을 건드렸고, 당신은 자존심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 동일시가 마음의 평정을 파괴했다. 정신적 번뇌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경향이 외부의 상황으로 유발된 다음, 우리가 고통을 주는 우리의 반응들에 집착하고 동일시함으로써 문제는 증폭된다.

모든 번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마음이 개념적 양태 conceptual mode에 있을 때에만 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애나 통렌의 명사적 계발 같은 어떤 개념화들은 정신적 번뇌를 오히려 없앤다. 개년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집착이다.) 명상적 고요의 계발에서 연마되는 비개념적 양태는 정신적 번뇌를 부추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적 번뇌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하나의 기법은 의식의 개념적 양태에서 비개념적 양태로 스위치를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치료가 아니라 짧은 휴식에 가깝다. 그 동안 우리는 번뇌에 대한 건강한 복수심을 계발할 수 있다.

세 가지 중요한 원인을 획득하라.

1. 자격 있는 영적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

2. 당신이 받은 지도에 따라 모든 단계의 수행에 전념하는 것,

3.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서 외적, 내적 조건들을 결합하는 것

1. 지식과 경험이 많고 자비심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자격 있는 영적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

의사와 영적 스승, 치료와 영적인 성장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래 한 번도 왜곡되거나 고통받은 적 없는 원초의 의식은 자비심과 지혜와 힘의 원천이다. 원초의 의식은 당신의 생득권이고 이미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은 부처가 되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이미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되고, ‘그것이 정말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당신이 치료받기 위해서 불교의 스승을 찾아갈 때, 그는 당신의 불성을 지적하고 그것을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일상적 삶의 혼란에서 휴식하는 것으로, 명상을 해서 마음이 조금 고요할 수 있도록, 표면적으로 다르마를 추구할 수 있다. 이것은 코가 막힌 사람이 빨리 코를 치료하려고 의사를 찾아가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의사는 “코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암에 결렸습니다. 암도 치료하고 싶습니까?”라고 되물을 수 있다. 우리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것으로 진단된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는 다르마에서 약간의 마음의 휴식 같은 사소한 무엇인가를 기대하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를 알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문제는 너무도 많다. 정신적 스승에게 가는 것은 사실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된 치료법이 있는 복잡하고 깊은 문제를 가지고 의사에게 가는 것과 같다.

의사나 영적 스승이 우리를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의사를 조사하고 있다.

당신이 한 스승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수행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덕행이 아주 쉽게 일어나고 정신적 번뇌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참된 도움을 받고 있다는 표시다.

영적 스승의 세심한 질문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대답을 한다거나, 영적 스승이 맹목적인 신앙을 일방적을 요구할 때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 일어난다. ...영적 스승과 관계를 맺을 때, 건전한 상호 의사소통은 아주 중요하다.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대화는 더 중요하다. 정직한 대화의 불교 전통은 대화를 통해서 가르친 부처님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

당신의 영적 스승과 대화할 때 정직하고 존경심을 가지라. 당신의 의심을 솔직하되 무례하지 않게 표현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 대답에 귀를 기울이라.

 

2. 당신이 받은 지도에 따라 모든 단계의 수행에 전념하는 것

 

3.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서 외적, 내적 조건들을 결합하는 것

세 가지 중요한 내적인 조건들은 신뢰, 지성, 열심의 계발이며, 세 가지 중요한 외적인 조건들은 적당한 음식과 옷과 좋은 도반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수행의 절반은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다.”

세 가지가 약해지지 않도록 그것들을 계발하라.

계발해야 할 세 가지는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 마음을 수련하려는 열의, 서약과 교훈들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세 가지 덕행에서 분리되지 않게 하라.

분리되지 않아야 할 세 가지는 몸과 말과 마음의 덕행이다.

몸의 덕행은 스승과 도반과 주위의 공동체에 봉사하는 육체적 활동이다. 말의 덕행은 다르마의 구절을 암송하거나 다른 유익한 말을 하는 것. 마음의 덕행은 주로 두 개의 보리심을 계발하는 것.

항상 특수한 사람들을 명상하라.

‘특수한 사람들’은 옆구리의 가시처럼 당신의 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하나의 시험을 제공한다. 정말 수행의 힘을 시험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 없이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만날 때다. 특수한 사람들은 우리가 아직 더 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다.

다른 요소들에 의존하지 말라.

어떤 수행은 외부적인 조건들이 중요하다. 명상을 위해서 조용하고 사람들이 모르는 한적한 장소를 찾든지, 은거를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수련법에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당신은 어디에서든 살 수 있고, 건강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다. 죽어가고 있어도 괜찮다. 마음수련법은 우리 삶에서 어느 때든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을 수행하라.

중요한 것을 수행하라는 말은 영적 수행에서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하라는 의미다.

 

* Sechil Buwa 세칠부와의 주석.

1. 세속적인 추구보다 영적 수행을 하라

: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보다 영적인 수행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라.

2. 다르마에 대해 말하기보다 다르마를 수행하라.

: 티베트인들은 “다르마가 당신 입이 아니라 가슴속에 있게 하라”고 말한다.

3. 여러 가지 수행보다 보리심을 계발하라.

: 여러 수행의 매력에 관계없이 모든 가르침의 정수인 보리심에 주로 집중하라는 충고.

4. 경전의 가르침이나 논리보다 스승의 개인적 지도에 의지하라.

: 일반적인 가르침들보다 스승의 지식과 경험에 의지하라.

5. 사는 장소를 바꾸기보다 내적인 수행이 중요하다.

: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 자리에서 수행하라. 결국 전 세계에서 다르마를 듣는 사람도 드물다. 그 중 다르마 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 중 진실하게 다르마를 수행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 중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도 드물다. 영적 성장과 깨달음이 드문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과오를 범하지 말라.

* 수행의 과정에서 쉽게 범할 수 있는 여섯 가지 과오 - Sechil Buwa

1. 그릇된 인내

: 세속적인 관심사들의 고난은 참지만, 다르마의 고난은 참지 않는 것.

사업을 하거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지만, 무릎을 다치면 명상하지 않는 다. 충분히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르마의 길에서 거의 인내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인내다.

2. 그릇된 욕망

: 영적인 성숙을 바라지 않고 세속적인 목표를 바라는 것.

3. 그릇된 경험

: 다르마를 듣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명상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다양한

세속의 즐거움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최대한의 삶을 살아라”는 말은 자극적인 끝없는 세속적 경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행,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다양한 스포츠와 취미을 즐겨도 이런 경험들 자체는 우리의 정신적 번뇌를 없애주지 못한다.

4. 그릇된 동정심

: 고난을 겪는 다르마 수행자들은 불쌍히 여기지만, 고통과 고통의 원인 속에 사는 자들에 대해서는 동정심

을 느끼지 않는 것.

밀라레파의 겉모습을 보고 비참하다고 말한 젊은 여인.

“아가씨들이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가씨들이 비록 원하고 기도한다 해도 저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연민을 느끼는 것은 가상하지만, 연민과 자만심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5. 그릇된 우선순위

: 영적인 수행보다 세속적인 일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

6. 그릇된 만족

: 유정물들과 부처님들의 덕행에서 만족을 찾지 않고, 자신의 적과 자신이 경멸하는 사람들의 불행에

기뻐하는 것.

불규칙적으로 수행하지 말라.

이 교훈은 드문드문 수행하는 습관에 반대한다. 우리는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고 느낄 때에만 수행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를 불규칙적인 수행으로 이끈다.

지속적이고 일관된 노력을 하면 뇌가 생리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한다. 오래되고 뿌리 깊은 습관조차도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고, 더 건강한 새로운 습관이 생겨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서 일어난다.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라.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은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의 오류를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은 가능하고, 엄청난 세속적 성공을 얻어도 행복하거나 만족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검토해서 주의깊게 결론을 내리라. 이것이 ‘절대적인 신념’으로 향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다.

다르마는 부, 좋은 직업, 건강, 명성을 약속하지 않는다. 다르마의 목적은 행복할 수 있는 당신의 타고난 능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덟 가지 세속적 관심사의 유혹을 꿰뚫어 보고, 다르마에만 진정한 행복의 참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절대적인 확신이 생긴다.

조사와 분석으로 당신 자신을 해방시키라.

조사를 통해서 어떤 번뇌가 마음의 흐름에서 가장 강력한지 알고 그것을 없앨 수 있다. 다섯 가지 독은 망상, 화, 집착, 질투심, 자존심이다. 우리가 주의깊게 관찰하면, 이 중 한 가지 독이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기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유독한 것을 없앰으로써 최고의 이익이 생긴다.

...이런 자유는 불행의 원인이 외부적 요인이라는 것을 믿기보다는 참으로 하나의 번뇌를 ‘진짜 적’으로 인식하려는 결심에서 생긴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 애쓰지 말라.

아티샤의 수제자인 드롬된파는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두지 말고, 신성한 존재에게 기도하라.”고 충고했다. ‘신성한 존재’는 모든 부처님들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모습과 같은 성상聖像들 속에서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상징하는 지혜와 자비심과 힘이고, 이 모든 성상들의 근원은 결국 우리 자신의 본래 의식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원초적 의시게 가장 깊은 희망을 두라. 당신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영적인 각성이 되게 하라.

 

화에 사로잡히지 말라.

마음수련법은 우리가 모욕당하거나 비방당할 때 말로 보복하거나 분노를 품지 말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 고통의 진짜 원인인 자기중심주의를 없애라고 권유한다.

처음부터 화가 일어나는 것을 통제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화를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가장 직접적인 길은 화에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분노와 경멸심과 자기중심주의을 키운다면 마음수련법의 모든 것을 망쳐 버리게 된다.

신경질 내지 말라.

조금의 어려움에도 불끈 성내는 것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우리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도 피해를 준다. 때로 우리가 지쳐 있을 때는 다르마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화의 고삐를 잡기가 힘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명상적 고요를 계발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긴장하지 않고 주의 깊은 마음의 미묘한 균형을 찾을 수 있다면, 신경계도 가라앉고 새로워질 수 있다.

감사를 바라지 말라.

당신이 좋은 일을 한 것에 감사를 바란다면 요점을 놓친 것이다. 통렌 수행에서, 우리는 마음속에 떠올린 사람에게 감사를 바라지 않는다. 대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통렌 수행의 변형의 힘이다. 통렌을 수행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과 마음과 불성을 연다. 바로 거기에 행복이 있다. 감사는 필요하지 않다. 수행 그 자체가 보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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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맺는 말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은 인도불교 문명의 개화기 동안 수백 년에 걸쳐 계발된 가르침과 수행의 종합이며, 활동적인 삶의 길에서 두 가지 보리심을 계발하는 데 있어서 놀랄 만큼 효과적이다. 힘들고 괴롭고 기쁜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은 영적이 수행에 많은 장애가 있을 때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딜고 크옌체 림포체께서 서양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가르침은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이었다. 그분은 마하무드라와 족첸의 심오한 가르침의 스승이셨지만, 그분이 아셨던 모든 가르침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남기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마음수련법이었다.

일곱 가지 마음수련법은 세 가지 일반적인 수행의 유형, 즉 비개념적, 헌신적, 추론적 수행의 종합이고, 영적인 각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삶의 전부를 매일 매순간 수행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것이다.

1) 고요의 비개념적 계발은 주의력을 훈련하고, 마음을 섬세한 도구로 연마하는 것이다.

2) 기도의 길, 직관, 다른 사람들에게 가슴을 여는 것과 같은 헌신적 수행도 자비심과 통렌을 계발하는 수행에서 보면 마음수련법의 필수 요소다.

3) 마음수련법의 어떤 구절도 추론적 명상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아티샤의 명상요결

- 앨런 월리스, 황학구 번역, 청년사 티베트인들이 로종 lojong 이라 부르는 마음수련법. 로종은 우리의 마음이 불안, 걱정, 덧없는 쾌락, 좌절, 희망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더러운 웅덩이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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