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행불자(四部大衆)를 위한 한글의역 초발심 자경문
장군죽비 譯解 講說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文)
해동사문 목우자 술(海東沙門 牧牛子 述)
<초발심 학인이 지켜야할 가르침>
초발심자경문은 보조(普照)스님의 계초심학인문과 원효(元효)스님의 발심수행장 그리고 야운(野雲)스님의 자경문을 합본한 책으로 불문에 처음 들어 온 학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수행규범, 발심교훈, 좌우명에 해당하는 글들로 엮어져 있다.
보조 스님의 계초심학입문을 맨 처음 둔 것은 그것이 출가인(공부인) 생활에 기본적인 규범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계초심학입문과 발심수행장과 자경문의 줄거리를 각각 본문인 한자문을 제하고 한글 의역으로 소개하고 그 뜻풀이와 해설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계초심학입문은 불일 보조국사께서 지은 글로 승려들(여기서는 사부대중 수행학인)의 수행청규를 규정한 일종의 계율이다.
국사는 나이 33세 적에 당시의 퇴폐한 교계를 바로 잡고 수행을 철저히 하기 위해 거조사에서 정혜결사 하고 42세에 조계산 수선사로 옮기시어 대중들의 수도 선풍(禪風)을 진작키 위해 이 글을 지어 공포하셨다.
특히 불교에 처음으로 마음을 두고 공부하는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해야하는가를 경계한 글이다.
초심(初心)이란 보리심·보살심을 처음 일으킨 것이라는 뜻이다.
보리심은 중생의 어두운 마음(無明)과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이루려는 마음을 가르치며 보살심이란 곧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겠습니다"
"모든 번뇌를 다 끊겠습니다"
"모든 불법을 다 배우겠습니다"
"모든 불도를 다 이루겠습니다" 라고 하는
대승보살의 네 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이러한 보살심과 보리심을 처음 갖는 초심학인에게 주의하고 경계하여야 할 마음 가짐, 생활 규칙 같은 것을 타이른 것이 이 글이다.
이 글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대문으로 구별된다.
첫째 수행인(승려)이 되려고 준비하는 때를 경계하는 글,
둘째 일반 대중 수행인(승려) 가운데 저지르는 잘못을 경계하고 대중의 화합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음 가짐을 경계하는 글,
마지막으로 참선 공부를 하는 선방의 수행인(수좌)이 지녀야 할 자세와 정진에 대한 간절한 경책의 글로 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태조 6년 조계종 본산 흥천사의 제 일세 주지였던 상총선사(尙聰禪師)가 왕의 뜻을 받아 전국의 사원 정규로 시행하게 됨으로서, 일단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면 그 첫 교재로 먼저 배워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 과목이 되었다 한다.
본 계문의 한문 판은 해인사에, 언해본 판은 송광사에 각각 보존되어 있으며 중국의 명장(明藏)과 일본의 신수대장경에도 수록되어 전하며 이 초심판의 처음 유통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해동사문 (海東沙門)
옛날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나라가 바다의 동쪽에 위치했다 하여 해동이라 별명하였다.
사문은 인도말 사라마나(Sramana)의 음역이며 그 뜻은 근식(勤息)이다.
즉 좋은 일은 부지런히 행하고 모든 악한 일은 쉰다는 뜻으로 근식의 대표적 인물이 불교 수행자라 하여 스님들을 지칭하여 쓰인다.
○ 저자 불일 보조국사 (佛日普照國師)
이 글을 지은 보조국사는 고려 중기의 스님으로 돌아가신 뒤 나라에서 그 분의 업적을 기려서 드린 시호(諡號)가 보조이며, 생존시의 법명은 지눌(知訥)이었다.
현대의 삶은 기민하고 민첩한 속도와 스스로의 PR이 요구되는 시대지만 옛 사람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결코 옳게 보지 않았다.
지눌이라는 뜻은 말을 더듬고 지혜가 뛰어나지 못한 것을 말한다.
한길로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걷는 방향 이외의 다른데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 겸손해하며 또 알고자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지눌의 뜻이 된다.
옛 중국의 철학자인 노자와 공자가 만나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이와 관련된 말이 있다.
장사를 하는데 있어 문 앞에 내놓고 자꾸 선전을 하는 물건은 실지는 그리 훌륭한 물건이 못되며 오히려 좋고 값진 물건일수록 창고 깊숙이 감추어 은밀히 하는데, 결국 이 뜻은 떠벌리는 사람은 그 말처럼 훌륭하지 못하며 겸손하고 자신의 장점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이며, 또 미덕이라는 옛 사람의 겸허의 자세와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진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보조국사에게는 스스로 부른 자호(子號)가 있으니 목우자(牧牛子)가 그것이다.
저 유명한 목우십도(牧牛十圖)의 교훈을 배운다는 뜻이다.
목우십도란 참선을 통해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마음을 깨달아 불성을 완전히 체득하는 과정을 열 가지로 나누어 놓고 그 과정을 소를 잃은 사람이 소를 찾는 것에다 비유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다.
이때 참선 공부를 하여 마음을 찾는 사람을 목우자라 한다.
보조국사의 생존 년대는 1158에서 1210년 까지로 당시의 고려 정계는 무신의 난과 외척인 인주 이씨의 세력이 들끓던 혼란의 시기였다.
보조국사는 53세로 일기를 마쳤지만 불교계에 큰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국민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셨다.
일찍이 출세의 길을 단념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주창하여 당시 수행기풍이 해이했던 불교계에 참신한 종풍을 일으켰다.
불교를 옳게 공부하려면 마음을 안정하여 참선하는 정과 지혜를 밝히는 수행 즉 정과 혜가 쌍으로 닦이는 정혜쌍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학(三學)이라는 공부 방법으로 계정혜(戒定慧)의 셋을 일컫는다.
계는 정과혜를 닦는데 기초가 되는 수단인 과정이고 결국 목적이 되는 것은 정과 혜이므로 흔히 계를 생략하고 정혜 쌍수(雙修 → 收)를 지향하였다.
보조국사는 정혜쌍수를 원칙으로 하면서 육조단경·화엄론·대혜어록의 도움으로 하여 불법을 공부하는 종지를 세우셨다.
이 닦는 정혜사라는 단체를 모으면서 그 취지를 밝힌 글이다.
우리의 참 마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진심즉설(眞心直說), 수심결(修心訣)과 함께 계초심학입문은 보조스님의 대표적 저서이며 그외에 법집별행록·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 등이 있다.
초발심자경문은 초심·발심·자경의 세부분으로 나뉘어 초심은 행위의 자세를, 발심과 자경은 정신적 자세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초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으려는 초심자에게 행위적으로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행위 일반에 대한 기본을 밝힌 글이다.
※ 번역, 풀이, 해설은 비단 출가승려만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부대중을 두루하여 의역했음을 양지하기 바란다. - (장군죽비) -
[본문번역(本文飜譯)]
무릇 보리심을 처음 일으킨 이는 모름지기 나쁜 벗은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친근하며
[뜻풀이]
무릇 부처님의 법을 믿고 배워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내었다면 모름지기 나쁜 친구와 가까이 어울리지 말며 착한 친구를 가려서 친해야 한다.
[해설(解說)]
그 첫째 조건으로서 나쁜 벗을 멀리 할 것과 어진 벗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니, 수행인에게 있어 동반자인 벗(도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사회에 있어서나 속세를 벗어난 출가인에 있어서나 그 인격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친구와 주위의 환경의 중요성을 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 특히 감성이 예민한 어린이의 경우 주위의 친구나 가정 환경 등의 문제가 성격 형성에 중요한 것처럼, 처음 마음을 일으켜 수도하는데 있어 초발심자에게 벗의 관계는 아주 중요함을 이 글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깊이 있게 통감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다.
인격이란 한 마디로 사람의 사람다운 품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도덕적으로는 도덕적 행위의 주체를 가리키며 자기 결정적이고 자율적 의지를 가진 인간의 개체라 하겠다.
인격의 특성은 성격적 행동을 결정하는 경향으로서 인격적 특성은 탄생 후 최초의 수년간의 학습으로부터 6·7세 이전에 인격의 기초가 형성된다고 하지만, 이후 사춘기에 또 그에 따른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게 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감정의 처리와 억제, 곧 자기의 힘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인격의 형성·단련은 소질적인 기질과 생육환경, 그리고 사회적 영향 등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더구나 특히 수행생활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하는 수행인에게 있어서는 모든 욕망이나 생활의 번뇌를 끊어야 하는 만큼 특히 발심이 돈독하고 수행을 모범적으로 하는 어진 벗을 친해야 하며, 계율도 제대로 잘 지키지 않고 경전을 성의껏 배울 줄도 모르는 나쁜 벗을 가까이 하여서는, 탐·진·치의 3독을 끊는 실천 수행을 제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五계·十계등을 받아서 바르게 지키고 범하고, 열고 막을 줄을 잘 알아야 한다.
[뜻풀이]
五계와 十계등의 계를 언제나 지켜야하고 경우에 따라 비록 목숨을 끊어야 할 경우에 이르더라도 꼭 지켜야 하며, 또 어떤 경우에 범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를 잘 알아야 한다.
특히 초학자는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五계와 十계를 지키는 것을 착실히 하여 수행생활의 기본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해설(解說)]
五계는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사음 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먹지 말라 이며
十계는 五계를 근본계로 하여
향유를 바르지 말라(허영)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라(아만)
음악을 들으러 다니지 말라(향락)
때아닌 때 먹지 말라(탐심)
금 은 등의 보화를 갖지 말라(탐욕)
하는 다섯 가지를 더한 것이다.
불살생 :
살아있는 생명을 五계, 十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불계이지만 평등·박애도 기본적으로 이 五계를 지키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갈망하는 평화 사상도 불교식 표현으로는 자비의 마음이요, 그 바탕이 살생하지 말라는 한마디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갖는 미움의 극단적 표현이 살생이라면 불살생은 그 반대인 자비를 말하고 자비는 곧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명분으로도 종교적 차원으로 살생이나 전쟁은 정당화,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살생은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 가는 목숨을 구제하는 것을 자비의 제일로 삼고 불살생계를 계 가운데 가장 무거운 계로 여긴다.
도둑질하지 말라 :
도둑질은 복덕의 종자를 끊게 되는 것이다. 우리마음 가운데 있는 복덕의 종자란 아낄 줄 아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은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일도 잘 되어 가지만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잘 해보려고 발버둥을 쳐도 매사가 일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도둑질하면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이러한 문제가 아니라 불교에서는 모든 물자를 내가 씀에는 아끼되 남에게는 아낌없이 베풀어 복을 쌓으라는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을 욕심을 내어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음 하지 말라 :
사음은 청정의 문제이다.
오늘날 사회가 혼탁한 것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남·녀의 문제이다.
부정·부조리라고 하는 사회 문제의 원천이 되는 것도 바로 남녀관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남녀관계가 청정해야 가정에도 질서가 서게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회의 질서도 청정해지는 것이다.
음욕은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지 말라 :
이 계는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수행인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살생·투도·음행·망어 등의 죄를 범하는 동기가 되므로 경계한 것이지 단지 사람을 엄격하게 구속하기 위한 계율이 아니며 지혜와 연결되는 계율이다.
거짓말하지 말라 :
이 계는 이간질 악담 아첨하는 말 등을 금하라는 것으로 부정한 마음으로 속이고자 하거나 진실을 숨기고 다른 말을 하여 모든 구업이 생기게 하는 것을 망어라 한다.
五계는 사람의 삶을 지혜 있고 청정하고 복덕을 쌓고 자비스럽고 총명하게 만들기 위해 부처님이 정하셨다.
꽃다발을 쓰거나 향유를 바르지 말라 :
출가 수행인들이 입다 버린 헌 베 조각을 주어다 이어서 만든 누더기 옷을 입었으므로 납자(衲子)라 하였다.
이것은 검소한 생활의 실천인 것이다.
몸이 노쇠하여 추위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니라면 수도인은 마땅히 검소한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더구나 향을 바르고 화장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과시하기 위해 단장하는 꾸밈이니 마음을 밝히고 몸을 닦고 법을 배우는 수행인 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계로서 금한 것이다.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라 :
평상을 만들되 손으로 여덟 손가락을 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계를 어기는 것으로 정한 것은 교만심과 편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풍류 잡히지 말고 들으러 다니지도 말라 :
노래나 춤·무용은 모두 오락으로 이와 같은데 마음을 팔리게 되면 일념으로 모아 정진 수도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므로 이를 금한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몸을 닦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며 바깥 경계를 탐착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때아닌 때 먹지 말라 :
하늘 사람들은 아침에 먹고 부처님은 낮에 잡수시고 짐승은 오후에 먹고 귀신은 밤에 먹는다.
경·율(經·律)에 의하면 때 아닌 때 먹지 않으면 다섯 가지 이익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 음욕이 적어져서 모든 탐욕을 여의게 되며
둘째, 잠이 줄어서 수마를 능히 물리칠 수 있고
셋째, 몸이 평안해서 정신의 기운이 맑고 상쾌해 지며
넷째, 병이 없게 되어 복과 수를 더하게 되며
다섯째, 마음이 한가해져 도를 쉽게 성취하느니라.
했음이 그것이다.
때 아닌 때 먹지 않도록 한 이 계율은 육식이나 술 마시는 등을 금한 것과 더불어 음식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탐·진·치 三독을 멀리하는 수도법인 것이다.
금 은 보화를 갖지 말라 :
금 은 보화등은 중생으로 하여금 물질에 대한 탐욕심을 일으키게 하며 우리의 순수한 본심을 현혹하는 마력에 끄달리게 하는 것이다.
특히 아직 수행의 힘이 미숙한 이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축적심과 탐욕심을 조장하게 하는 금은 보화의 탐착은 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이므로 청정 수도인은 이런 탐착심을 금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계율은 재가 불자에게까지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아니며 출가승에게 엄격히 적용되는 계율이다.
특히 이 十계는 출가는 했지만 아직 구족계(구족계= 남자 비구는 250계 여자 비구니는 348계)를 받기 이전의 예승 수행자에게 해당하는 계율이며, 五계는 재가 신도등 모든 불자에게 적용되는 계율이다.
지범개차(持犯開遮)의 지(持)는 계를 잘 지키는 것이고, 범(犯)은 잘 지키지 못하고 깨뜨리는 파계를 말하며, 개(開)란 방편(方便)을 연다는 뜻이고, 차(遮)는 막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일화를 통하여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한 나그네가 길을 걷다가 포수에 쫓겨 숨는 노루를 보았다.
뒤쫓던 포수가 그 나그네에게 도망가던 노루를 보지 못했느냐고 행방을 물었다.
이때 소승불교의 입장이라면 노루의 목숨은 상관치 않고 자기 일신이 짓는 망어죄(妄語罪)만 생각하고 노루가 숨은 곳을 일러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자신이 비록 망어죄를 짓더라도 노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루를 구할 것인가?
망어죄를 짓지 않을 것인가?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지킬 때와 범할 때의 경우를 잘 헤아려서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노루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이것을 연다고 한다.
五계·十계를 받았다고 해서 무작정 지키는 것에만 국집할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편을 잘 열어서 활용하라는 말이 된다.
결국 지범개차(持犯開遮)란 모두 대승심을 갖고 못 갖고의 차이다.
이 대승심을 가지면 그것이 설사 범하더라도 보다 큰 것을 위해 범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록 작은 문제라도 자기의 이익과 일신을 위해 범한다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범개차의 기준은 대승심의 발로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다만 부처님의 금구(金口)인 성스러운 말씀을 의지하여야 하며 용렬한 무리의 허망한 말에 순종하지 말며, 발심하여 거룩한 대중에 참여했으면 항상 유화하고 착하고 순종할 것을 생각할지언정 잘난 체 하는 마음으로 거만하지 말라.
[뜻풀이]
만세를 두고 변치 않는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의 말씀에 의지하고 범부중생의 부질없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며, 이미 수행하는 교단의 일원이 되었으면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하고 착하고 순하기에 힘쓰고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며 높이는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해설(解說)]
금구에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자비와 복덕을 많이 닦으면 몸이 자금색으로 된다 하는 것이니 부처님이 바로 오랫동안 수행하고 복덕이 수승하여 몸이 자금색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금구란 부처님의 입을 뜻하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은 참으로 귀중하다 하여 금구라 하는 두 가지 뜻이다.
특히 불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사고와 행동 그리고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진리를 모르고 탐욕과 잡된 데 물이 든 용렬한 무리들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삿된 말에 따르는 경우도 적지 않으므로 이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범부중생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에 대해 어두워서 근원적으로 바로 알고 있지 못하므로 설사 여러가지 지식을 가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참으로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바르고 명확하게 가르쳐 줄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어리석고 못나서 생존경쟁에만 급급하여 탐욕에 눈이 어둡다 보면 인생을 커다란 불구덩이에 몰아넣는 수도 허다할 뿐만 아니라, 잡되고 저속한 취미와 감정에 물들어 인생의 삶을 참답고 보람된 높은 이상으로부터 멀어져가게 만들기가 쉽다.
이에 반해 부처님은 인생의 근본 문제 우주의 실상을 남김없이 사무쳐 깨달으셨으므로 그 지혜와 능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누리의 영원한 광명의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특이나 세속의 속된 욕망을 멀리하고 인생의 참 면목을 밝히고 좀더 참되고 값있는 삶을 개척하기 위해 발심한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일체의 삿되고 속되고 잡된 것으로부터 떠나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거룩한 수행의 길을 전념해 나아가는데 잠시도 한눈을 팔지 말아야 비로소 마음의 눈을 뜨고 우주보다 더 크고 전 세계를 주어도 바꾸지 않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참 보배(眞寶)를 사무쳐 얻게 될 것이다.
출가란 말은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는 세속을 떠나 절에 들어가는 것으로 형식적인 몸만 하는 출가를 말하며,
둘째는 개념은 몸이 세속을 떠났음과 동시에 세속적인 집착의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아 마음까지 세속을 떠난 완전한 출가를 말한다.
셋째는 참된 출·세간의 출가(해탈)를 말한다.
三계란 윤회를 하는 세상으로 욕심을 가지고 욕심이 중심이 되어 사는 욕계와 욕심은 없지만 형상이 남아 있는 색계 그리고 형상마저 없는 무색계이다.
이 모두를 세계마저 초월해야 진정한 해탈이니 이것이 바로 삼계윤회로부터 벗어난 세계이다.
지금의 몸을 버리고 법력에 의해서 다른 몸을 받아 나는 것이 윤회의 본뜻이긴 하지만 우리의 일상이 바로 윤회의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침부터 저녁잠이 들 때까지 되풀이되는 윤회적 세속생활은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보살도와 성불의 큰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나 자신의 수행과 중생구제의 생활을 하루하루 쌓아나가는 길이야말로 참으로 삶의 윤회를 벗어나는 참다운 불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중(衆)은 무리라는 뜻이다.
불교의 교단을 범어로는 상가(Sangra)라하고 한자로 승가(僧家)로 옮겼으며 이것을 번역하여 화합중(和合衆 = 화합된 대중)이라 했고 이것을 다시 줄여서 중이라 하는 것이다.
불교 교단은 주로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의 승단(僧團)을 일컬으며 크게는 우바이, 우바새를 포함,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된다.
<상카>란 말의 본 뜻은 단체(무리)란 말이니 이렇게 보면 가정도 중이요 학교도 중이요 사회도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중 가운데 다른 중은 외적 생활에 치중하는 중으로서 몸에 옷을 걸치고 치장하는 외적 생활을 주로 하는 무리라 하겠다.
그러나 불교의 이것을 청정대중 이라 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이 되고 훌륭한 지혜를 성취하며 복덕을 구족하기 위해 거룩한 계를 지키는 대중의 무리이므로 청정대중 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만이란 자만에 빠져 은공도 저버리고 겸손할 줄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자기만이 최고 최상인 정신 상태를 말한다.
곧 부모 없이 이 몸이 세상에 생겨날 수 없는 것인데 부모의 은공을 모르고 제힘만으로 제 혼자 자란 것 같이 거만을 부리는 것도 일종의 아만이며 스승 없이 내가 지식을 얻고 훌륭한 교육의 혜택 없이 사회인으로서 성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은공을 저버리고 제가 잘나서 홀로 훌륭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대는 것이 역시 일종의 아만이다.
설사 반딧불 만한 지식이 있다해도 그것은 보살이나 부처님의 지혜에 비기면 감히 지식이라 할 것도 못되고 깨달음의 지혜라고는 더욱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이 있는 사람이나 수행하는 사람은 공부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만큼 자신이 부족함을 깨달아서 더욱 겸허하고 하심(下心 = 마음을 낮추는 것)할 줄을 알아야 한다.
마치 이삭이 영글면 고개를 숙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수행이 깊어지고 인격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상대를 존중할 줄 알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밝아진 만큼 상대방의 높은 인격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와 대화할 때 『부처는 모두를 부처로 보고 돼지는 모두를 돼지로밖에 볼 줄 모른다』고 한 말이 있다.
바로 이를 대변하는 말이며 수행은 반드시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상대방을 존경하여 부드럽게 순종해야 하며 거만한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큰 사람은 형이 되고 작은 사람은 아우가 되나니,
혹 말다툼하는 이가 있으면 두 사람의 말을 화해시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대하게 할 것이며 사나운 말로 사람을 상하지 말라.
[뜻풀이]
나이 많은 사람은 형이 되고 젊은 사람은 아우가 되어 선후에 따라 아래위를 정하며 시비언쟁을 하여 부질없이 다투는 이가 있으면 싸우는 이들의 두 가지 주장을 잘 화해시켜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고 욕설이나 뼈아픈 말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
[해설(解說)]
나이가 많은 사람이 형이 되고 나이가 어린 사람은 동생이 된다는 말이니 혹 주장이 다르고 이해관계로 말다툼이라도 하는 일이 생기면 양쪽 말을 화해시켜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대할지언정 모진 말로 남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양설이란 글자 그대로 해설하면 <두말 곧 이렇게 저렇게 말했다>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그 실제의 뜻은 그렇지 않고 두가지 말 곧 거짓말 이간질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람이 악업을 짓는데 열 가지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흔히 十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곧 몸으로 짓는 살생·투도·음행의 세 가지 악업이 있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곧 거짓 말, 아첨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악담을 하는 악업이 있으며, 생각으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세 가지 악업이 있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만일 도반들을 속이고 업신여기면서 시비나 일으키는 이 같은 수행(출가)은 전혀 이익이 없느니라.
[뜻풀이]
발심하여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도반을 속이고 업신여겨 시비나 일삼고 한다면 수행에 전혀 이로울 것이 없으니 곧 수행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해설(解說)]
동반(同伴)이란 도반(道伴)을 일컫는다.
요즘은 "나"만을 중시하는 서양의 개인주의가 팽배되어 동반의식이 많이 결여되어 있지만 함께 의지하는 벗이나 이웃이 동반이다.
나아가서는 가정도 동반이요 국가도 동반이요 세계와 인류도 모두 동반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동반의식을 갖게 되면 국가간에 민족을 초월한 인류애를 느낄 수 있게 되고 가족과 이웃끼리도 더욱 친밀히 지낼 것이며, 예의와 법도가 엄격과 경건과 준엄한 질서와 애경(愛敬)을 바탕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속에서 말하는 동반자의 경우란 주로 인연 관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옷깃을 한번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부부로 맺어지는 인연은 전생에 만생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인연이란 이처럼 전생으로부터 나온 동반의식의 유대에 의한 것이므로 그 인연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반해 개인 의식에 젖어 있는 요즘의 젊은 세대는 그들의 결합에 대한 동반의식이 약하므로 이혼률이나 가정 파탄, 불신의 문제들이 속출되고 있으니 이런 것은 동반자적 인연 화합의 인식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발심수행(發心修行)을 한다 함은 마음의 근본 바탕에 덮인 때를 베끼는 것이며, 탐심으로 물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며, 미혹한 마음을 깨닫는 공부이다.
그런데 마음에 때가 묻었다 함은 번뇌와 탐욕이 마음을 가린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닦는다 하는 것은 그것은 거울바닥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는 것처럼 닦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본래 선악시비를 초월한 자리임을 사무쳐 깨닫는 공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과오를 참회할지언정 남의 잘못을 보고 선악 시비에 마음이 얽매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짓이나 착한 행위를 동일시 해서 좋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선악을 초월한다 함은 악행과 더불어 선행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악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행하되 선악에 대한 집착과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뜻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논설시비로 옳고 그름을 들추어 시비의 발단을 자주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선악시비의 초월을 배우는 수행의 자세도 아니고 나쁜 것을 끊고 선행을 받드는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익이 전혀 없다고 한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재물과 음란에 빠지는 화는 독사보다 더 심하니 자신을 살펴 그른 것을 알아 항상 멀리 여의도록 할지어다.
[뜻풀이]
재물·권력·명예·성욕·관능적 쾌락 등의 본능의 포로가 되어 그런데에 일단 깊이 빠지게 되면 그로부터 받게 되는 화액(禍厄)이 매우 심하여 마치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도 일신을 망치는 독이 더 심하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항상 조심하여 이 같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해설(解說)]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자가 맑은 복(공덕)을 짓는데 있으므로 재색(財色)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된다.
옛날의 영계 우적가의 예를 잠깐 일화로 들어 보기로 한다.
영계스님이 길을 가다 도적의 무리를 만났을 때 도적이 재물을 요구하자 스님은 두려운 빛을 보이지 않고 걸망태를 벗어 주자 당당한 스님의 얼굴 빛을 보고 놀라며 스님의 법명이 영계임을 알고 시 한 수를 청했다.
이 때 지어진 것이 우적가(遇賊歌)이다.
이에 보답으로 도적은 그들이 약탈한 재물 모두를 스님께 바치었다.
영계스님은
『당신들 보기에는 보물이지만 내 보기엔 모두 지옥감일세.
그대들은 그 것 때문에 도적질을 하게 되어 살아서는 감옥을 가고 죽어서는 지옥을 가게 될 것이니 그 해는 독사보다도 더 심하지 않겠는가?』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도둑들은 크게 감복해서 스님의 뒤를 따라 제자가 되었다 한다.
이와 같이 재물 때문에 못된 짓을 하는 이를 경계하는 것이지 먹지도 말고 입지도 말라는 뜻은 아니다.
색(色)을 경계하는 뜻은 자신의 반려자를 만나 자손을 번창시키는 일 자체까지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동반 가운데 가장 큰 동반이 부부이다.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동반인데 여기서 비롯되는 애정이란 모범적인 행각이다.
그러나 불의로 맺어진 애정은 도탄과 멸망을 불러들이므로 여기서 색은 이런 부당한 애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색지화라는 것은 재물과 색정때문에 죄를 짓는 것으로 정당한 애정을 맺고 재물에 탐욕을 내지 말아야지 하므로, 재욕에 의한 죄와 부당한 애정으로 인한 화가 독사보다 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자신을 반성하여 그릇됨을 알아 항상 멀리 여의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난 일에 대해 돌아볼 줄 아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하며 여기서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반성이 있으므로 인간에게는 향상과 발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참회인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일 없이 남의 방이나 요사채에 들어가지 말며, 마땅히 은밀히 가리운 남의 일을 억지로 알려하지 말라.
[뜻풀이]
수행하는 도량에서 남의 수행을 방해되게 번거롭게 드나드는 것은 나와 남에게 수행상의 도움이 없을 뿐 아니라 커다란 장애가 되므로 삼가야 한다.
또한 남의 비밀을 억지로 알아서 퍼뜨리고 잘못을 가리려고 하여 불편하게 하는 일도 대중의 화합을 위해 삼가 해야 하는 것이다.
[해설(解說)]
수행생활은 첫째 잡념 없이 마음을 닦아야 하는데 이런 일은 오로지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수도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만일 정신을 산만하게 하여 방심해서 이일 저일 분주하게 행동하고 간여해서는 자신의 마음공부를 그르칠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수행에도 커다란 방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꼭 긴요한 용무가 있거나 묻고 배울 일이 없는 한 이방 저방으로 무분별하게 드나들며 번잡스럽게 구는 것은 공부하는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허물이 된다.
마치 고요하고 맑고 잔잔한 물을 구정물로 만드는 한 마리의 미꾸라지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六일이 아니거든 속옷을 빨지 말고 손 씻고 양치질할 때에 높은 소리로 코풀고 침 뱉지 말라.
[뜻풀이]
한 달에 (세 번 六일, 十六일, 二六일의) 三일만 세탁을 해야 하고 이 날이 아닌 때에는 빨래하지 말며, 양치질하고 세수할 때 큰 소리를 내거나 코 풀고 침 뱉을 때에도 조용히 해야 한다.
[해설(解說)]
종교적으로 매달 六일·十六일·二六일은 모든 성인이 곤충을 제도하는 날이므로 그런 신앙적 관습에 따라 불가에서는 이 날을 특별히 세탁하도록 정한 것이다.
세탁을 하는데 따라 이나 미물 같은 것을 죽이게 되기 때문으로 자비의 발로인 것이다.
대중생활·단체생활에 있어서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특히 도량은 만인의 마음을 거룩하게 가꾸고 수행하는 곳이므로 그 주위를 더럽히지 말아야 하고 엄숙·청결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청에 따라 일정한 날에 한해서 세탁을 하도록 했던 것이다.
또 세수를 하는 경우에도 조심하고 하심(下心)하고 큰 소리로 침 뱉고 코푸는 등의 버릇없고 교양이 없는 행위를 일절 금한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이익을 베풀 때에는 당돌하게 차례를 어기지 말며, 경행할 적에 옷깃을 헤치고 팔을 흔들지 말며 말할 적에 큰 목소리로 희롱하거나 시시덕거리지 말라.
[뜻풀이]
음식·옷 등 무엇이든 공양거리를 나눌 때에는 정해진 규정에 따라 차례대로 할 것이며 당돌하게 순서를 어기어 먼저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쉬는 시간이나 일과로 거닐 때에도 옷을 풀어 헤치고 팔을 흔들며 흐느적거려서도 안 된다.
이야기를 할 적에도 될 수 있는 대로 품위를 잃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니 높은 소리로 잡담이나 농담 등으로 시시덕거리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해설(解說)]
일반사회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종교사회·수도 도량에 있어서는 질서와 존경과 신뢰를 첫째로 여긴다.
따라서 사중에서 행하는 의·식·주 생활의 모든 것은 곧 수도의 일환으로 간주되며, 그것은 바로 경건한 의식이 아닐 수 없다.
밥 먹고 옷 입고 잠자는 모든 것이 다름 아닌 수행의 실천이며, 이러한 일거일동을 계율로 엄격히 정하고 있다.
대중공양을 하는 경우 그것이 음식이든, 의약이든, 법복·내의·신이든 경책이든 무엇이든 대중에게 나눌 때에는 균등하게 하되 상하의 질서를 따라서 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질서를 지키지 않고 차례를 뛰어넘는 것은 수행을 크게 그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행(經行)이라 하는 것은 공부하다 잠시 쉬기 위해 거니는 것으로 경행 또는 포행이라고 한다.
또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경을 읽으며 돌아다니는 것도 경행이라고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움직이고, 피로를 풀며 졸음을 쫓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행해져 왔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런 경행을 할 때에도 마음을 풀어 헤쳐서 방일·나태한 태도로 임해서는 안되며 언제나 수행의 연장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항상 마음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옷깃을 풀어 헤치고 팔을 흔들며 흐느적거리는 자세는 수행인의 몸가짐이 아니므로 경계한 것이다.
말을 하거나 몸으로 어떤 동작을 하거나 마음으로 생각을 하는 등을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 三업이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행위는 곧 우리의 마음과 직결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말을 거칠게 하고 육체적 동작을 모질고 불미스럽게 하면 곧 그것은 정신에 반영이 되어 마음도 또한 그와 같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히어서 청정하고 위대하고 신령한 우리의 청정본성을 깨닫는 데는 요원한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언동을 계율로써 엄격히 금해 오고 있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긴요한 볼 일이 아니면 수도 도량밖에 나가 쏘다녀서는 안되며, 병든 사람이 있거든 모름지기 자비심으로 간호해야 하고, 손님이 왔을 때엔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며, 웃어른을 만났을 적에는 엄숙하고 공손하게 옆으로 비켜서야 하며, 도구를 다룰 때에는 모름지기 검소하고 절약함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뜻풀이]
불가피한 볼 일, 또는 수행하는 일과 관계없는 일로 함부로 수도하는 도량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것은 수행인으로서의 기본자세를 잃고 경계에 끄달려 마음을 흩뜨리는 행위이므로 금한다.
도량 안에 병든 환자가 있을 적에 한 가족 가운데 어른이나 손아래 동생이 병을 얻은 것처럼 또는 자신이 스스로 병을 얻은 것 같은 마음으로 적극 보살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또 밖으로부터 찾아 온 손님에겐 기꺼운 마음으로 반기어 맞이할 것이며 도량 안에서나 길에서 웃어른을 만났을 때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한 옆에 물러서서 앞길을 피해야 할 것이다.
사중의 일용도구는 곧 부처님께 공양한 시주의 정성이 담긴 삼보(三寶)의 정재(淨財)인 만큼 모름지기 검소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으로 사용하고 아껴야 할 것이다.
[해설(解說)]
수행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五욕의 번뇌에 끄달리어 정신과 육신을 분주하고 산만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특히 세상의 온갖 복잡하고 잡된 인연을 멀리하고 발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큰 도를 이루겠다고 하는 사람으로서는 일념으로 수도에 전념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서 특별한 볼일 없이 밖으로 나가서 이일 저일 참견하고 여기저기 정신을 팔게 되면 그것은 곧 번뇌를 조성하는 일이 될 따름이다.
수행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세속의 생활을 통해 물든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과 같고 오래된 거울에 먼지를 닦아 내는 것과 같으며 구정물이 일어나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을 가만히 가라앉히어 맑은 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 마음을 산란하게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은 곧 흙탕물이 가라앉기도 전에 구정물을 일으키는 것과 같고 번뇌망상의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므로 불문에서는 이런 행위를 계율로서 금해 왔던 것이다.
병든 환자를 잘 간호하라는 교훈은,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선행을 행하는 것은 곧 미래에 복을 받을 원인이 되며 미래세의 복을 짓는 선한 인행(원인 종자를 심는 행위) 가운데서도 병자를 간호하는 선행이 제일 복덕이 큰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커다란 복덕의 과보를 받을만한 선행을 함으로, 복전(福田)이니 경전(敬田)이니 비전(悲田)이니 하는 말로서 삼복전(三福田)·팔복전(八福田)이 있음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좋은 과보·행복하고 이상적인 환경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해야되고 그럴만한 공덕을 쌓아야 되며 또 이러한 복덕의 씨앗(因)을 심기 위해서는 밭에 해당하는 무엇이 있어야 과보로 받게되므로 여기에 전(田)자를 붙여서 삼복전(三福田)·오복전(五福田)·팔복전(八福田)이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또 밭이 있으면 종자가 있어야 하고 종자와 밭이 있어도 그것을 심는 사람이 있어야 그 곡식·과일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선행을 함으로 좋은 복덕의 과보(果)를 성취함에 있어서 선행을 하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이 때에 선행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주로 보시(布施)를 생각하게 되므로, 보시를 예를 들면 보시하는 이는 바로 경작자(농부)이고, 보시하는 것(물건)은 밭에 심을 농작물의 씨앗(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에 이 사람의 보시를 받는 피보시인을 복전(福田)이라 한다.
예컨대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법이나 보살, 아라한 선지식 등 승단(僧단)의 삼보(三寶)인 중생의 공양을 받을만한 법력이 있는 이에게 공양하면 복이 되므로 삼보가 곧 복전이 되는데, 이는 특히 공경의 대상이므로 경전(敬田)이라 한다.
이에 대해 가난한 사람 위급한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 물론 복덕이 되겠지만 그들은 공경의 대상이 아니라 불쌍하게 여길 자비심으로 보살펴야 할 대상이므로 비전(悲田)이라 한다.
또 나를 낳아 길러주고 교육시켜 주신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어른이므로 은전(恩田)이라 한다.
따라서 병든 환자를 간병하는 일은 불쌍한 이를 도와주는 일에 속하므로 비전(悲田)이 된다.
스승에 대해 지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가르쳤으니 스승이 지나가면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한 옆에 비켜서라고 했음이 그것이다.
불문에서는 옛부터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 하여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쌓아 두지 말라 했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호사스러운 옷이나 소지품 등을 지니고 다니는 것도 삼가야 된다.
또 먹는 음식이나 사중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일용도구 등도 시주한 물자로서 소중히 여겨야하며 비록 내가 벌어 매일 세 때를 먹고 입고 쓰는 것일지라도 오로지 수도·정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기 위한 것일 따름이니 마땅히 검소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본문번역(本文飜譯)]
공양할 때에 씹고 마시는 소리를 내지 말며, 그릇을 놓을 적에 조심해서 하고, 고개를 돌려 보지말고, 좋은 음식 나쁜 음식 가리지 말며, 모름지기 말을 하지말고 쓸데없는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다만 이 음식 받는 것은 모름지기 몸뚱이가 말라붙는 것을 다스리어 도 닦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모름지기 반야심경을 염하고 셋(三輪:시주, 시물, 시전)이 청정(空)함을 관하여 수도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또한 수행자는 모름지기 음식을 먹을 적에 잡담은 물론 말을 해서는 안되며 마음으로도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됨은 물론 내가 지금 이 공양을 받아먹음은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하기 위해서 이 육신의 건강을 유지할 뿐임을 거듭 다짐하면서 경건하고 원대한 도를 이룰 생각(화두)을 잃지 말아야 한다.
[뜻풀이]
밥을 먹을 때나 차담(茶啖·茶果)을 할 때에도 씹고 마시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릇이나 수저를 들고 놓을 적에도 소리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하고, 음식을 먹으면서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 두리번거려서는 안 된다.
특히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만 자꾸 먹고 맛없는 음식 덜 좋은 음식은 밀어놓고 피하지 말아야 한다.
시주한 사람이나 시주한 물건이나 시주를 받는 사람이나 이 셋이 다 공한 줄을 관하여 집착과 속박을 여의어야 한다.
[해설(解說)]
재계(齋戒)란 정성을 다하여 할 일은 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현대 생활은 매우 복잡하므로 재일을 택하여 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 사십구재니 백일재니 대상(大喪)이니 하는 등으로 부모님 돌아가신 날을 기준으로 하여 이 날을 정해 모든 일을 조심하고 삼가서 해야 한다.
그 다음 부처님 태어나신 날 지장재일·관음재일 등 성현이 탄생하신 기쁜 날 등을 재일로 정해 그 분을 존경하고 사모하며 좋지 않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게 나누어 하나는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기쁜 일 슬픈 일은 재일로 정하여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이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금할 일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불교 수행의 三대 지켜야할 덕목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묵언(默言)이다.
묵언의 첫째는 과제에 충실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 일에 충실하며 남의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이 묵언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이다.
옛말에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말로 웅변을 해봐야 사실의 백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한다.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낫다.
食不言이 좋은 이유는 과제에 충실한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입으로는 음식을 먹지만 마음으로 화두를 들어 의심하거나 염불을 외운다.
또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남을 간섭하지 않으며,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조절한다는 것은 외경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게 되면 오히려 환경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절에서 밥 먹을 때에 주의할 다섯 가지 덕목이 있다.
다섯 가지 밥 먹는 자세로서,
첫째는 공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즉 농부의 노력과 희생과, 장사꾼의 손과 시주한 이와 밥하는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감사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타종교에서는 감사할 줄은 알지만 그 감사는 의지처인 신에게로 돌아가는 간접 감사이지만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감사와 더불어 노고자에게 직접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이 음식을 먹을 때 나의 덕행(德行)이 공양을 받을 만 한가 생각한다.
셋째는, 마음을 막아서 허물을 멀리해야하는 것이니 음식을 대할 때 탐하는 마음을 멀리해서 음식에 대해 투정과 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는, 음식을 먹을 때 왜 먹느냐 하면 내가 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이 육신을 지탱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음식을 약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먹는다.
여기에는 동서양 철학의 중요한 문제의 차이점이 있다.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그러나 인생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먹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한다.
그러나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은 다르다.
먹는다는 것은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 사람은 삶의 가치를 찾는 것(근본)이 문제가 되고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은 먹는 문제가 목적이 된다.
불교의 입장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결코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도를 성취하기 위하여 이 음식을 받는다 하는 것은 도는 몸과 마음의 수도를 통한 대오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몸을 지탱해야만 마음을 닦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상을 들고 문을 열 때 상을 내리는 것이 귀찮아 발로 문을 미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러나 수행인이라면 상을 문 앞에 놓고 그 다음에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에도 찻잔을 반드시 한 손으로 바치고, 놓을 때도 두 손으로 가지런히 놓아야 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예불할 적에는 모름지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엄숙하게 행할 것이요, 게으름을 스스로 꾸짖을 것이며 대중이 의식을 행할 때에는 차례를 잘 알아서 잡되고 문란하지 않게 하라.
범패하고 축원할 때는 모름지기 글을 외우고 뜻을 관할 것이며 다만 음성만을 따라서는 안되며 또한 소리와 곡조를 고르지 않게 해서도 안 되느니라.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를 우러러 공경할 뿐 경계에 매달려서는 안 되느니라.
[뜻풀이]
향 사르고 예불할 때에는 모름지기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한번이라도 빠지지 말고 부지런히 행하여야 하며 조금이라도 게으른 생각을 두어서는 안 된다.
또 예불을 하고 기도 정진을 하고 독경 등을 행할 때에는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뒤에 하는지의 순서를 잘 알아서 질서정연하게 함으로서 엄숙하고 청정한 의식이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
게송을 외우고 경문을 외울 적에는 곡조와 박자·음정 등을 맞지 않게 함부로 조화를 깨뜨려서도 안되지만, 또한 음성 만을 따라 뜻도 모르고 입으로 만 읽을 뿐 그 뜻을 관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경문을 읽고 범패를 할 때에는 그 글귀의 뜻을 언제나 관하는 것이 중요하고 다음으로는 박자를 맞추는 일·곡조의 조화를 따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를 우러러 예경하고 기도할 때에 오직 불·보살님을 생각할 따름이요 그밖에 기이한 경계나 삿된 생각을 더하여 청정심을 잃어서는 안되며, 정법(正法)을 져버려서는 더더욱 안 된다.
[해설(解說]
아침저녁 예불할 때 향을 태우고 촛불 켜는 것을 분(焚)이라 하는데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없애듯 향을 피움은 부정을 없애는 자세로 곧 부처님 마음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다.
초는 캄캄한 밤에 켜면 어두움이 밝아지듯 어둠과 무지를 타파한다.
곧 부처님의 지혜광명으로 부처님과 내 마음이 일치되기 때문이다.
절에서 법문을 듣고 스님을 대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일단 가르침대로 하면 경쟁의 사회 속에서 도태되어 버려지게 되지나 않겠나 하고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또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 대어드는데 어찌 참는가 하고 생각할 때도 많을 것이다.
이럴 때 참는 인욕으로 자신을 꾸짖고 자책할 줄 알아야 향상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찬패(讚唄)는 찬송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배·예배당 등의 용어를 들으면 기독교를 떠올리고 불교에서 이 말을 사용하면 기독교에서 배워온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예배란 말은 재래부터 불교에서 써오던 말이다.
찬송이란 인도말로 가타(伽陀)라고 하는데 경을 열 두가지로 나누어 그것을 십이부경 이라고 한다.
그 중 게송으로 된 것을 가타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면 송(頌)이라 하는데 대체로 운문은 찬송으로 많이 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요즘도 찬송이니 게송이니 하는 송(頌)자를 많이 쓰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연법(因緣法)·인과법(因果法)을 중요시 가르치고 깨닫게 하고자 하는데 간혹 불자들이 운명과 혼동하는 일이 많은데 그러나 인연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이란 주체를 말하고 연이란 조건인 대상을 말한다.
대상이란 환경을 말하는데 그러므로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려면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을 주라 하고 연을 조라 하는데 즉 주체와 보조를 말한다.
가정의 부부(果)도 그런 측면에선 서로의 주(因)조(緣) 관계이다.
부인이 볼 때 부인이 주고 남편이 조이고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주가 되고 형제의 경우와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바로 인연관계이다.
가정·사회 모든 생활은 인연법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런 주(因)와 조(緣)가 있고 나면 반드시 결과(果)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을 인과법이라 한다.
그러면 이때 인연은 공간적이고 인과는 시작과 생기고 멸하는 때인 시간적인 것이다.
찬패(어산·범패)라 하는 것은 춤과 노래로 축원하는 의식인데 부처님을 찬송하는 방편의 하나이다.
예불할 때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이란 말이 나온다.
이 뜻은 내 생활에 오직 으뜸 되는 스승은 석가모니불 부처님이라 하는 뜻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의 행동을 따르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입으로는 시아본사불을 외우지만 행함에는 그 가르침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데 반드시 글을 외우면 그 글 속에 담긴 뜻을 굴려 읽고 알아서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께 예불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가 많이 있는데 부처님을 공경한다면 부처님의 덕상만을 생각하지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모름지기 자신의 죄업의 장애가 높은 산 깊은 바다와 같은 줄을 알고 마음으로 참회하고 몸으로 참회하여 소멸해야 할 것이니, (懺은 반성이요 悔는 다시 짓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예를 드리는 이(능)나, 받는 이(소)가 모두 참된 성품에 인연하여 일어난 것임을 깊이 관하고 그 감응이 헛되지 않아서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가 따라서 있음과 같음을 깊게 믿으라.
[뜻풀이]
중생들은 다겁(多劫)으로 생사윤회를 하면서 한없는 죄업을 지어 왔기 때문에 그 막히고 장애 되는 죄업의 두께가 산과 같고 깊이가 바다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 무거운 죄업을 참회하는데 두 가지 참회가 있으니, 이제까지 지은 업장을 몸으로 참회하는 참회와 어두운 마음의 근본을 깨닫는 참회를 쌍으로 하는 이 두 가지 참회를 진실하게 함으로서, 비로소 저 무거운 다생의 업장을 소멸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하는데는 예배의 대상인 부처님께 귀의해야 하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부처님이나 우리 중생이나 진여·본성은 동일한 것이어서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깊이 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계의 모든 것, 우리 중생살이의 모든 것이 다 이 진여·본성으로부터 나타남이고 인과응보의 드러남이어서 그 관계가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름과 같고 메아리가 울림에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해설(解說)]
자기 자신의 수없는 죄업과 장애가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음을 알아야 한다.
그 많은 죄를 없애자면 理참(진리를 깨달아 참회함)과 事참(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만큼의 속죄의 행동을 하는 것)이 있는데 사참은 내가 잘못한 만큼 반성하고 다시 짓지 않고자 노력하고 몸과 물질로 보상하는 것이고 이참은 진리를 깨달아 다음 부터는 그 잘못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이란 말을 잘 알고 있다.
불교에서 능(能)은 주체요 소(所)는 대상을 일컫는다.
내가 책을 보면 책을 읽는 나는 능이고 책은 소이다.
부처님한테 예배할 때 절을 하는 사람은 나인데 이것을
능례라고 하고 예배를 받을 분은 부처님이므로 이것을
소례라고 한다.
부처님도 마음을 깨달았으므로 부처님이 되시었고 내가 부처님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마음이 있어 하는 것이다.
마음(본성)으로 본다면 나나 부처님이나 마찬가지(妙空)이므로 이것을 참마음인 진성(眞性)이라 한다.
따라서 나도 부처님처럼 마음을 깨우치면 부처님이 된다하는 이것을 믿고 닦아야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대중 방에 머무를 때에는 서로 양보함으로써 다투지 말고 모름지기 서로 서로 붙들어 주고 돌보아 주며, 이기고 지는 것으로 다투는 논쟁을 하지 말며, 모여서 한가로이 잡담하지 말라. 또한 남의 신을 신지 말며 앉거나 눕거나 차례를 뛰어넘지 말고 손님을 대해 말할 적에도 절 안의 흠을 들어 내지 말고 다만 절 안의 불사를 찬탄할지언정 주방·창고나 사무실에 찾아가서 이일 저일 잡무를 보고 들어서 의혹을 일으키지 말라.
[뜻풀이]
여러 대중과 더불어 큰방에서 함께 생활을 할 때면 잠자리나 일용도구 등의 일거일동을 양보하고 늘 남보다 뒤에 하여, 다투지 말고 서로서로 도와주고 두호해 주며 늘 대중을 생각해야 한다.
쓸데없는 승부욕으로 말다툼을 일으키고 잘난 체 하는 일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늘어진 마음·해태한 마음으로 둘러앉아 일없이 잡담이나 하는 것은 수행인의 자세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대중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하려면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해야 하는데 특히 신 같은 것은 내 것·남의 것을 잘 가리어야 한다.
또한 앉고 눕고 할 때에도 언제든지 정해진 제자리를 잘 지킬 줄 알아야 하며, 선배나 존장(尊長)에 대해 조금이라도 결례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특히 외부 사람에게 자기 도량 안의 흠담을 늘어놓아서는 안되며, 사중(寺中)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사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데로 찬탄할지언정 사무 현장에 찾아가서 이 일 저 일을 들추어 의심하고 시비를 일으키고 하는 것은 수행인의 자세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삼가 해야 한다.
[해설(解說)]
양보의 문제는 옛부터 무척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양보하는 예가 많이 사라졌는데 서양에서는 여성에 대한 양보는 많지만 노인에 대한 양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 동양에서 양보의 제일 우선은 언제나 어른이시다.
길을 걸을 때에도 의례 어른에 뒤 처져 걷는 것은 단순한 양보심의 차원을 넘어서서 웃어른을 존경한다는 뜻의 양보이며 인생의 경험을 존중하는 뜻의 양보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양보한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상대를 존중함은 다른 이의 훌륭한 점을 배우는 것이니 결국 자신을 존중하는 일로 되돌아오는 것이 된다.
또 두호한다 보호한다는 말도 약자를 강자가 보호한다는 뜻으로만 생각할지 모르지만 두호한다 하는 것은 농부가 김을 맬 때 잡초는 뽑아 버리고 곡식은 기르듯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잘 보살펴서 기르고 그른 점은 고치도록 타이르는 것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요사이는 개인주의·이기주의·경쟁주의의 사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보기 때문에 남을 보호하고 두호하려 하지 않으며 입으로는 "자타일시 성불도"를 외면서 생각으로는 내가 더 많이 공부되었고 내가 먼저 성불하겠다는 아만이 탱천하고들 있는 실정이 되어 가고 있으며, 진실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행인의 도량에서는 적어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불자들이 모여서 법문을 듣는 자리에서 법우 끼리 서로 자리를 양보하고 따뜻한 곳, 여름이면 서늘한 곳으로 권하는 등의 두호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대승의 법, 진리의 길로 도반(道伴)을 이끌 줄 아는 것이 참다운 보호요 두호라 하겠다.
소견이 좁고 널리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자기 소견 자기 주장만 옳다하고 남의 의견 다른 이의 주장 가운데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기고 지고 내가 옳고 네가 그른 것을 가지고 시비를 벌리고 따지는 것으로, 따지기 위해 따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아무 뜻도 없고 소득도 없는 잡담·오락 등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로서 수행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행동이며 공부에 크게 장애가 되므로 이를 철저히 금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꼭 볼일도 없으면서 번잡한 곳에 나다니거나 들판을 헤매고 속된 사람들과 어울리어 다른 이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해서 수도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만약 긴요한 일로 세속에 나갈 때는 주지스님과 대중소임자에게 알려 가는 곳을 알게 하라.
세속에 있을 때에는 모름지기 바른 생각을 굳게 가지도록 간절하게 노력할 것이니, 보고 듣는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요, 삿된 생각으로 함부로 마음을 방탕하게 흘려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거니와 하물며 옷깃을 풀어헤치고 희롱하고 웃으면서 잡된 일이나 쓸데없이 지껄이고 때아닌 때에 술과 음식을 거리낌없이 먹으면서 막된 행동을 망령되이 함부로 행하여 부처님의 계율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한 어질고 훌륭한 이들에게 혐의를 받게 되니 이것을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랴.
[뜻풀이]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수도하는 도량을 마음대로 떠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므로 꼭 필요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책임자나 자신을 지도하는 스승의 허락을 받고 다녀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볼일이 있어 나다닐 경우에도 마음가짐 몸가짐을 수도 도량에 있을 때같이 조심하여야 한다.
눈을 떠서 사물을 보는 경우에도 함부로 보고 아무소리에나 귀를 기울여서 마음과 몸을 속된데 풀어헤치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의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먹는 것 행동하는 하나하나를 계율에 맞추어 거룩하고 모범을 보이고 그렇게 인욕행으로 습관을 길러야 하는데 만행이라 하여 아무것에도 걸림 없이 막행 막식을 하면서 만행이라 하여 아무것에도 걸림 없이 막행 막식으로 행동하고 부처님의 계율을 거침없이 깨뜨리며 이것을 만행이라고 합리화하여 파계를 해서는 수행에 크게 장애가 되는 것이며, 열심히 수행하는 도반과, 스승들로부터 지탄을 받는다면 수행인의 지혜로운 행위가 아닌 것이다.
[해설(解說)]
반야심경이라 하면 불자든 불자가 아니든 그 경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니 색즉시공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하는 등의 내용을 들어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五온(蘊)이 다 공하다 하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이 그 근본 바탕이 모두 다 비어 공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물질이 현상적으로는 항상한 것이 아니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을 본질적으로 관해 보면 공한 것이요 분석을 해 봐도 화학적 물리적 작용에 의해서 마침내 부서지고 무너져서 무상하여 공으로 되기 때문에 어떤 물질이든 그 실체는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세계의 경우에도 그 본질을 자세히 관해 보면 결국은 공무(空無)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또 사람의 정신활동·생각·취미·정서 등은 시시각각으로 덧없이 변하여 마침내는 고정된 그 무엇을 정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인격이 완성되기 이전에 있어서는 환경에 의한 영향이 지대한 것이 되는 것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도 있거니와 보고 듣는데 따라서 물들고 좌우되기 마련이니 좋은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고 비단옷 입은 것을 보면 자신도 입어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여인과 만나서 대화라도 나누게 되면 떨어지기 싫고 남녀의 사랑을 나누며 영원히 살고 싶은 충동을 본능적으로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라면 언제나 도량을 떠나지 않으려는 굳은 절조(節操)가 있어야 하며, 수행하는 진실한 도반(道伴)들과 항상 같이 하기를 즐겨하고 선지식 떨어지기를 생명 잃는 것보다 더 싫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시중에 가서 속된 사귐이나 즐기고 잡되게 놀기를 탐한다면, 그래서 점차 속된 세속에 물들게 되면 마침내 세속의 오염된 사람으로 마음이 변하고 말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마침내는 수행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되어 설사 수행인으로 아무리 자처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저속한 세속 사람과 더불어 중생의 무리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일로 수도 도량밖에 나가게 될 적에는 반드시 스승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며 세속에 들어가서는 마음과 몸가짐을 바르고 단정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고 뛰어난 체 높은 체하는 언행으로 거만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겸양하고 공손한 마음, 겸양의 미덕을 갖출 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역시 수도하는 자로서의 위신과 품위를 떨어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참선 방에 있을 때 세속 사람들과의 속된 일로 자주 왕래하지 말며, 남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눈여겨보지 말며, 문자나 이론만 탐구하지 말며, 지나치게 잠을 자지말고 바깥의 인연에 끄달려 산란에 떨어지지 말지어다.
[뜻풀이]
참선하는 대중방, 선도량에서 정진할 때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불필요한 이일 저일 들을 의논하며 번잡하게 하면 옆 사람의 수행에도 방해가 된다.
따라서 남이 잘하고 잘못하는 언행에 대해서도 마음을 써서는 안될 것이며, 또 너무 자지 않아도 문제일 수 있지만 일단 참선 공부하는 사람은 수면을 이겨내야 하므로 지나치게 많이 자도 안 된다.
또한 정신을 이곳저곳 산란하게 써도 번뇌만 더할 뿐 선정을 이룰 수 없으므로 어지러운 반연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해설(解說)]
사람들과의 일로 또는 인사 차린다는 핑계로 왔다 갔다하는 것을 삼간다 함은 참선하는 사람은 오로지 세속의 인연은 물론이지만 잡다한 사판상(事判上: 수행정진이 아닌 행정, 사업, 정치 등)의 일들을 가지고 연연하여 정신을 흐트러뜨리면 정신을 통일함으로 성취되는 선정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과의 이일 저 일로 분주하게 오고 가고 하는 일을 금한 것이며 남의 시비장단을 두고 이런 저런 망상의 근원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이다.
문자를 탐구하는데 급급하지 말라 하는 것은 깨달음은 삼매(三昧)를 이루고 사량과 분별, 감정과 정서의 희노애락을 여의고 선정(禪定)에 들어야 하는데, 문자에 이끌리고 글귀에 매달려 그 선지는 도외시하고 문자에 굴림을 당하여 이리저리 생각생각을 이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니다보면 선정·삼매와는 거리가 멀게 되므로 참선납자(參禪衲子)는 문자를 탐구하지 말고 문자를 굴려야 한다고 한 것이다.
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면 정신이 흐려지고 희미해져서 이른바 흐리멍텅한 혼미(昏迷)·혼침(昏沈)·혼암(昏暗)에 떨어지므로 선정에 들 수 없고 삼매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을 과도하게 자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잠을 지나치게 적게 자더라도 그것은 옳지 않다.
잠을 너무 적게 자면 피로가 쌓이고 피로가 풀리지 않으면 역시 정신이 맑지 않으므로 문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근기(根機)가 약하고 몸이 허약한 사람이 만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면 병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은 적당하게 자야한다.
따라서 장좌불와는 자지 않고 앉아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정진하기를 누워서 잠자는 것까지도 아낀다는 수행방편인 수단인 것이지 목적이 아닌 것이다.
절에서는 三경(一경은 2시간)이상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곧 밤 9시부터 아침 3시까지의 여섯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번뇌에 가득 찬 탐욕의 생활을 버리고 금욕청정의 수행에 전념하는 이는 번뇌가 적고 정신건강의 도가 양호하므로 짧은 시간에도 깊은 숙면(熟眠)을 할 수 있다.
수행의 정도가 더욱 깊은 이는 더욱 짧은 수면을 하고서도 능히 심신(心身)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 세 번째의 교훈인 야운(野雲)스님의 자경문(自警文) 十조 가운데는 三경(更) 외에 잠자는 것을 경계하면서 광겁(曠劫)을 두고 도를 장애 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는 말씀을 다섯 번째로 중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其五는 除三更外에 不許睡眠이어다』
(三경 밖에는 수면을 허락하지 말지어다)라는 제하(題下)에 하루 열 두 시간(옛날에는 지금의 二시간을 한 시간으로 했으므로 하루가 十二시간) 가운데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의심을 일으키어 매혹(昧惑)하지 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잠은 깨어 있는 정신을 잠재운 시간이므로 필요 이상의 수면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될 수 있는 한 수면을 적게 하면서 삼매를 향해 정진하는 시간이 길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릇 선정·삼매를 이루는데 두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 첫째는 산란이고 둘째는 혼침이다.
정신이 너무 혼잡해도 안되고 흐리멍덩해도 안되기 때문이다.
수면을 과도하게 하는 것은 흐리멍덩한 정신을 더하게 되고, 이런 일 저런 사건에 두서 없이 관여하고 주위의 사물에 정신을 팔거나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산란을 더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반연에 끄달리어 산란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만일 종사가 법상에 올라 설법하는 법문을 들을 때에 그 법에 대해 어렵다는 생각으로 벼랑에 부딪힌 것 같이 생각하지 말며 또는 늘 듣던 법문이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지 말라.
모름지기 마음을 아주 비우고 들으면 깨달을 때가 있을 것이니 말만 배우는 사람을 따라 입으로만 판단하는 짓을 하지 말라.
마치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지만, 이른바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만드는 것처럼 슬기롭게 배우면 깨달음을 이루고 어리석게 말만 좇아 들으면 생사를 이룬다 함이 그것이니라.
[뜻풀이]
선지식(善知識)이 설법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게 되면, 높은 조사의 법문은 나같이 우둔한 근기로서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도 없고, 그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이룬다거나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열등감·퇴굴심(退屈心)을 내어서는 안되며, 또한 종사(宗師)들의 법문이라 해봐야 매양 듣던 이야기이니 별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면서 대단할 것 없다는 생각,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종사의 법문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더욱 잘못이다.
오로지 자신의 소견이나 아는 것은 하찮은 것이요 법을 모르는데서 오는 것임을 깊이 뉘우쳐 알고 오직 마음을 비워서 겸허한 마음으로 저 법문은 나에게 해주는 법문이라고 생각하고, 성심성의를 다해 일념으로 들으면 어느 때인가 깨달을 기연(機緣)이 오기 마련이란 뜻이며 특히 말이나 배우고 글자나 옮기는 이를테면 겉으로 드날리는 사람(유명한 이)이나 따르고 이론으로 판단하는 것만을 가지고 능사를 삼다 보면 크게 잘못 된다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법문을 듣고도 깨달음의 보리를 얻지 못하고 그릇된 길로만 나아가는 것은 독사가 물을 마시고 독을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는 것이다.
[해설(解說)]
선(禪)에 대해서 높은 지견(知見)이 열린 이, 오랜 세월을 두고 참선에 전념하여 선정의 힘 곧 정력(定力)을 성취한 선지식에 대해서는 특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부처님에게나 다름없이 그 가르침을 받들어야 하고 그런 분들의 설법이 있을 때면 다시없이 좋은 귀중한 시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선문(禪門)의 스승인 선사(禪師)의 설법하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 다니면서 마음의 감로(甘露) 생명의 감로를 받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로 생각해야 한다.
그 법문이 지나치게 어렵다고 하여 『나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고 저 경지에 이를 수 없으며, 성불할 수 없다』고 열등감을 일으켜 물러서서는 안될 것이다.
선지식이 깨달은 경지를 이야기하고 알 수 없는 화두(話頭)나 방·할 등의 초이론·초언어의 형식으로 어려운 표현을 하는 경우에도, 나도 깨달음의 불성(佛性)을 지닌 부처임에 틀림없으므로 일념으로 열심히 하면 반드시 저 어른의 경지와 동일하게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저 명안종사의 가르쳐 주심이 곧 나로 하여금 저 경지에 바로 들어가게 하는 인도(引導)의 가르침(法門)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며, 나도 또한 그와 같은 종사가 될 수 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 반대로 선사들의 법문은 한결같이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잘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의미가 뚜렷하지도 않은 애매한 유의 법문, 틀에 박힌 법문인데, 자꾸 들어봐야 별 이익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짓도 안 되는 것이다.
앞의 사람이 미급(未及)한데 머무는 사람이고 뒤의 사람은 지나친 사람이니 과·불급(過不及)은 모두가 한군데 치우치는 것이므로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현애(懸崖)는 험한 낭떠러지로 사람이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 또는 열길·백길 되는 절벽이므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기어올라갈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일에 견주어 어떤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현애상(懸崖想)이라 했으니, 이것은 용기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사람은 누구나 불성이 있으며 열심히 수도하고, 정진하면 견성성불 할 수 있는 바탕을 사람마다 가지고 있다'는 근본원리를 뚜렷이 확신하지 못한데서 오는 무지(無知)의 소치이며 용맹심과 용기를 잃은 데서 오는 무기력(無氣力)의 소치인 것이다.
관문(慣聞)은 형식에 얽매어 남이 하는 것을 따라 멍하니 무의미한 습관적인 법을 듣는(聞法)태도를 나무라는 말이다.
이런 관문상(慣聞想)도 결과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현애상과 다를 바 없는 경계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사의 법문을 들어봐도 뜻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른바 선법문(禪法門)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가 그 뼈대가 비슷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이니,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 : 말의 길이 끊어져서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 길이 끊어져서 사고의 영역을 초월한 경지란 뜻)이니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그 말이 그 말인데 들어 봤자 그렇다는 식의 생각인 것이므로, 이것은 결국 자신은 그 말뜻을 알고 있으며 들어도 그 말이 그 말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아상인 것이므로 현애상과 관문상의 차이는 근원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법문을 들을 때면 언제나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고 자신의 좁은 소견을 집착하여 조금 열린 소견에 기준하여 종사의 차원 높은 법문을 거기에 맞추려고만 고집하더라도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릇에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것도 실은 빈곳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집을 짓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주택의 경우에도 공간을 만듦으로 해서 사람이 주거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것이지, 만일 아무 공간이 없다면 그것은 들어갈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자신이 들어서 아는 소견, 이런 지식 저런 지식을 짜고 묶어서 분별해서 아는 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지식, 그것도 지극히 짧고 얕으며 아주 부족한 이즈러진 소견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으로써 높은 법문, 부처님의 깊은 진리를 계량하고 측량하려는 생각을 가지고는 깨달음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아예 비우고 무심의 경지가 되어 법문을 들을 줄 알 때, 비로소 깨달음의 계기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말로만 배우고 입으로만 떠드는 그것을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따라 다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문자 하나하나의 낱말에 의지하기보다는 그 전체의 문장을 통해서 들어내고자 하는 근본 뜻을 계합해서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다른 이의 설법을 듣더라도 그 말에만 따라 갈 것이 아니라 말속에 들어 있는 진의를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하며, 문자나 말끝에 쫓아 경을 보고 법문을 듣게되면 수박 겉 핥기라하는 것으로 이것을 선가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해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르고 의심이 가는 것은 언제라도 물어 알아야 할 것이며 이 물음을 기피하거나 답해 밝혀주지 못하는 이라면 곧 명안종사가 아니므로 법상에 오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설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지옥문전에 서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잘못은 대개가 마음에 집착을 끊지 못한 아상 때문이고 일체의 마음을 쉬지(放下着) 못한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말, 같은 법문을 듣더라도 듣고 배우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비어 있느냐? 하는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서 그 이해의 내용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마치 같은 학교 같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도 그 학생에 따라 사상이나 지식의 내용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심지어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똑 같은 물이지만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마시면 사람이 먹고 기운을 얻는 좋은 영양제인 우유를 만든다」고 했으며, 그와 똑같은 이유로 슬기롭게 불법을 배우는 이는 깨달음의 보리를 이루고 어리석게 배우는 것은 생사의 번뇌를 기른다고 했던 것이다.
이 말씀은 곧 아무리 불경을 배우고 참선을 익히며 용맹정진을 하더라도 경의 뜻을 마음을 비우고 바르게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니,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또 법사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그렇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도에 장애가 생겨서 수행이 나아가지 못할 것이니 간절하게 삼갈 일이다.
논에「마치 어떤 사람이 캄캄한 밤길을 가는데 죄인이 횃불을 비추어 준다고 하여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 하여 그 광명을 받지 않는다면 구렁에 떨어지리라」하셨으니, 법문을 들을 적에는 얇은 얼음을 밟고 지나가는 것(사람)처럼 반드시 귀와 눈을 집중하여 그윽한 깊은 소리를 들으려 할 것이며, 마음을 엄숙히 하여 깊은 뜻을 음미하다가 법문이 끝나고 나면 고요히 앉아서 관할 것이니 그러다가 의심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곧 먼저 깨달은 이에게 널리 묻고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묻고 배워서 털끝만큼이라도 아무렇게나 지나치지 말지어다.
이렇게 하여야 가히 바른 믿음을 일으켜서 도닦는 것으로 자기 본분을 삼는 이라 할 것이다.
[뜻풀이]
설법을 하는 법사에 대해 제가 별 수 있으랴 하는 업신여기는 생각을 내지 말라.
이런 사람의 마음가짐은 깨달음에 접근하는 수행을 장애하고 가로막는 요인이 될 뿐이니, 부디 법사에 대해 경솔한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법사가 자신보다 훌륭한 이거나 동등한 이인 경우엔 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법사가 자신보다 아는 것이 부족하고 수행이 모자라는 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가 법사로서 설법을 할 때에는 그가 애써 말하는 것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라도 법사에 대해 소홀한 태도나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스승이라고 존경할만한 분의 법문만을 중히 여긴다는 태도는 마치 어두운 그믐밤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나쁜 사람들이 비추어 주는 불빛이라 하여 그것을 외면하고 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문을 들을 적에 그 뜻을 하나라도 놓치거나 잘못 알아들을까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을 밟고 강을 건너는 사람처럼 긴장하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며, 법문 듣기를 마친 뒤에는 가만히 앉아서 그 뜻을 되새기고 거듭 익혀야 할 것인데, 이때에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점이 있으면 법사나 그 먼저 공부해 터득한 바가 있는 선각자(先覺者)에게 물어서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게으름이 없이 하여야 비로소 바른 신심을 얻을 수 있고 도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해설(解說)]
세상살이를 하는 생존경쟁의 세계에서도 상대방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야 하는 일은 나의 사업, 나의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 성심성의를 다하는 일과 더불어 중요한 제일의 요체가 된다.
그래서 수도를 하는 것도 싸움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번뇌, 생사라고 하는 무서운 적과의 싸움이다.
번뇌의 정체를 완전히 사무쳐서 깨트려 조복을 받아야 깨달음의 보리를 성취하는 것이다.
설사 본질적으로는 번뇌가 곧 보리고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실상(實相)을 알지 못한 채 번뇌에 시달려 번뇌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는 보리의 지혜는 열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는 곧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적과의 일대전투라고 할 수 있다.
법사의 설법은 모두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모두 번뇌를 조복하는 수도의 방법이고 승전(勝戰)의 법인만큼 어떤 법사의 설법이든 그 법문의 내용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아는 슬기와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설사 법사의 설법내용이 서투르고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바른 마음으로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깨어있는 경지에 들어가서 들을 때는 그 법문의 정사(正, 邪)를 가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성심성의로 법문을 들으라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하시기 전 아득한 저 옛날 설산에서 고행 수도하실 적에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 모든 것은 덧없는 것, 모든 것은 생하면 멸하는 것이니, 나고 없어짐이 다하면 적멸의 고요함이 참낙이니라』하는 네 글귀의 게송 하나를 듣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진 본생담(本生談)이 있는데, 이 때에 그 글귀를 외운 이는 나찰귀(那刹鬼)라는 악귀였다.
이 교훈은 설법을 하는 당사자가 아무리 모자라는 법사라 하더라도 더 나아가 악마라 하더라도 그 법을 듣는 이가 구도자(求道者)의 자세가 확고히 되어 있다면 진실한 진리의 법문(法門 : 진리를 깨달아 들어가는 문)인가를 가릴 수 있음을 교시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하여 법사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옳다고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일념으로 법문을 듣는 자세가 중요하고 다음에는 그 법문의 내용을 바르게 들을 줄 아는 자세, 틀린 곳, 의심나는 곳을 선각자에게 묻고 바른 해답을 구하는 자세가 아울러 뒤따라야 하는 것은 앞에서 경계한 바와 같다.
병이 든 사람은 의사를 만나 약을 먹고 치료하는 것이 일단 중요하고 목마른 사람은 기갈을 면하기 위해서는 물을 마셔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마치 물 떠 주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또는 우물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물을 마시지 않거나 간호사가 못생겼다 하여 의사로부터 받아야 할 치료를 거부한다면 이는 아주 어리석은 행위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은 번뇌의 장애를 떨어버리고 시비, 장단, 선악 등의 분별 심을 멀리 여의어야만 수도의 진전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문을 들을 적에 귀와 눈을 비롯한 마음을 조촐히 하고 의식을 집중하여 법문의 깊은 뜻에 계합(契合)하려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지성으로 일심 가운데 법문을 듣고 나서는 그것을 가만히 회상하여 미처 이해가 불충분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그대로 지나쳐 넘기지 말고 선지식에게 그 뜻을 물어서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묻고 배우는 동안에 점차 배움은 깊어지고 일심은 날로 익어서 선정, 삼매에 들게 되므로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무릇 초등학교 어린이로부터 대학의 석사, 박사학위과정에 이르기까지 학습을 익히는 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번 강의를 들은 것을 나중에 다시 복습하고 거듭 정리하는 일이다.
강의를 들을 그때에는 누구나 아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알았던 내용이 점차 흐려져 가고 마침내는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복습을 스스로 생각하면서 연구하는 자세가 뒤따르지 않는 공부는 실재에 있어 80% 이상이 내 것이 되지 못한다는 통계를 조사 보고한 학자들이 많다.
물론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선정을 닦는 공부가 반드시 세속에서 지식위주의 교육을 학습하는 것과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학문이든 운동이든 기술이든 종교이든 무엇을 막론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만이 구경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은 공통된 점이라 하겠다.
끊임없는 정진, 중도이폐(中道而廢 = 중간에 폐지하는 것)하지 않는 의지와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비롯함 없는 옛적부터 익혀 온 애욕과 성내고 어리석음 등이 마음을 얽고 묶어서 잠시 수그러진 듯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고 하는 것이 마치 하루 걸이 병인 학질과 같으니라.
모름지기 한결같이 곧 바로 수행을 더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길러서 통정하게 막고 보호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한가롭고 게으르게 근거 없는 잡담이나 하고 노닐면서 세월을 헛 보내면서 마음 깨닫는 종지가 뛰어나기를 바랄 수 있으랴?
[뜻풀이]
시작함이 없는 아득한 저 옛날부터 탐욕과 어리석음 성내는 마음으로 얽히고 뒤섞여서 밝은 깨달음의 바탕을 잃어버린 채 중생놀음을 끝없이 해오는 동안, 저 무서운 탐·진·치의 무명의 얽힘이 잠깐 쉬었다가 다시 머리를 들고일어났다 하는 모양이 마치 하루 걸이 병을 앓는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느 때 어디서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방심해서는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없다.
늘 수행을 돕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더하여 스스로 막고 두호하여 다시는 저 탐·진·치의 三독의 뿌리가 더 깊이 내리지 못하도록 스스로 간절히 막고 지켜야 한다.
한가하게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면서 허송세월을 하고 이렇게 가치 없는 생활 저속한 생활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마음을 깨닫는 선종의 참선 법을 통해 깨달음의 보리를 얻기를 바랄 수 있으며 생사의 길을 뛰어넘어 해탈 열반의 경지를 구할 수 있으랴?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대문은 요컨대 무시 이래로 익혀온 중생의 무명심(어리석음)을 떼어 없앤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언제나 바른 마음 정진하는 마음을 놓지 말라는 것이다.
[해설(解說)]
생명의 시작, 중생의 시작, 우주의 기원, 이런 것들은 사실 과학으로 밝히기 어려운 문제이며, 이론이나 지식으로 구명(究明)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생과 우주의 비밀이니, 불가사의니, 초이론, 초절대의 경지니 하는 등의 단어로 표현한다.
따라서 이것을 불교에서는 시간이면서 그것은 공간과의 상대관계를 초월하여 파악돼야 하는 것이면서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이므로 무시무종(無始無終) 곧 비롯함이 없고 끝이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중생들의 본래의 마음자리는 깨달음의 성품 곧 불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탐욕과 성내는 감정,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뒤덮여 생사윤회를 하는 범부로 전락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한마디로 무명(無明)즉 밝지 못한 어리석음 곧 번뇌망상으로 가려 깨닫지 못하게 되므로 중생이라 하는 것이다.
본래의 마음자리는 상대세계를 초월한 것이어서 시비, 선악을 초월했고 싫은 것, 미운 것, 좋은 것 등을 여읜 절대의 경계여서 탐욕이 없고 성낼 것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는 것인데, 그러나 중생들은 무명에 의해 옛부터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좋은 것은 소유하고 싶어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는 탐애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므로서 무한한 시간을 두고 살고 싶어하고 백살, 천살이 되더라도 결코 죽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 좋은 물건은 갖고 싶어하고 감관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구하려 한다.
이것을 일러 탐심이라 하고 이 탐심은 중생의 무명심의 뿌리가 되고 중생을 중생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중생의 이 무명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탐욕하고 구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자신의 욕구행위를 저해하는 대상이나 주위환경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저주하게 되며, 도전하여 파괴하려 하는 마음이 일어나니 이것을 일러 진심(嗔心)이라 한다.
치심이라는 것은 슬기롭지 못한 어두운 마음, 곧 무지의 근원이란 뜻인 것이 된다.
밝고 밝은 근원을 덮는 무명심이 생사의 원인이 되고 일체고의 씨가 되는 줄을 모르고 탐·진·치의 三독심을 일으켜 생사·윤회의 길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생사윤회의 번뇌인 탐·진·치의 三독의 작용이 때로는 잠시 쉬기도 하고 인간의 이성과 양심적 의지(意志)에 의해 꺾이는 듯 하다가도 어느 계기에 불끈 솟아오르면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리고 한번 쉬었다가 한번 일어나는 이 무명의 마음작용이 마치 하루걸러 앓는 말라리아와 같으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마음을 닦는 실천·수행을 조금도 늦추거나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발심을 하고 수행, 정진의 길에 들어선 불자의 제일의 목표는 오로지 생사, 번뇌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우리의 마음의 본 성품인 광명의 큰 깨달음을 이루는 일이다.
그런데 이 커다란 목표를 잊고 한가하게 실없는 잡담, 농담으로 세월을 허송한다거나, 내지는 속된 욕망이나 취미를 굳게 막지 않고서 어떻게 깨달음의 심종(心宗)에 나아가는 뜻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옛부터 중생의 무명심을 금광(金鑛)에서 캐낸 광석(鑛石)에 비유해 말한다.
광석에 섞여 있는 금만을 골라내기 위해 여러 가지 제련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범부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 수도하는 것과 또 제련을 완전히 마쳐서 순금만을 얻어 낸 것을 비유한 것이다.
또 본문에서 『모름지기 수행을 더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써서』라고 한 것은 광석에 공을 들여 순금만 빼내는 제련작업을 뜻하는 말에 해당한다.
곧 수행의 공을 쌓음으로 해서 번뇌의 적을 조복하고 깨끗한 진여(眞如)의 순금을 성취함을 말하는 것이다.
가행(加行)이란 수행의 공용을 더한다는 뜻으로 방편(方便)이라고도 한다.
곧 수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리키는 말로서, 정행위(正行位)에 들어가기 전에 용맹심을 내어 수행하는 법을 말한다.
곧 견도(見道) 또는 견성(見性)으로 가는 수단인 수행이란 뜻으로 가행(加行)이란 이름을 세운 것이다.
심종(心宗)은 불심종(佛心宗)의 생략으로 마음을 깨닫는 것을 제일의제(第一義諦)로 삼는 선종(禪宗)을 뜻한다.
이 대문에서 타일러주는 대상이 모두 참선하는 대중이므로 견성하고 불심을 깨닫는데 대한 경책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일체의 잡념을 끊고 열심히 참선을 하는데 전념하여 용맹 정진할 것을 당부한 말씀인 것이다.
[본문번역(本文飜譯)]
오직 의지를 굳게 하고 절개를 튼튼히 하여 자신을 꾸짖고 게으름을 삼가며, 그릇된 것을 알면 곧 바름으로 옮겨야 하며 뉘우쳐 고치고 마음을 부드럽게 조복해야 한다.
부지런히 닦으면 관하는 힘이 점점 깊어지고 갈고 단련하면 수행하는 문이 한층 깨끗하리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수도하는 공부의 업이 항상 새로워지고 항상 다행하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면 마침내 물러나지 않으리라.
이렇게 오래오래 닦으면 저절로 정과 혜가 함께 원만하게 밝아서 스스로 마음의 성품을 보고 환술과 같은 자비와 지혜로써 중생을 모두 제도하면 사람과 하늘의 큰 복전(福田)을 지을 것이니, 모름지기 간절하게 힘쓸지어다.
[뜻풀이]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선천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그 모두를 반성하고 참회하여 개과천선하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마음을 부드럽고 바르고 맑게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참선 수행을 꾸준히 하여 관(觀)하고 부지런히 행하면 선정의 힘(禪定力 : 定力)이 점점 깊어져서 모난 곳은 갈려지고<나다> 하는 아상(我相)은 없어지게 되는 수행의 문이 더욱 거룩하게 되리라.
또한 중생으로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 생각을 끊임없이 하며, 세속에서 생존 경쟁하는 업을 길이 등지고 보리, 열반의 해탈을 성취하는 불법을 닦게 된 것을 다시없이 다행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늘 감사할 줄 알면 마침내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래 닦고 닦으면 자연히 선정과 지혜가 함께 원융하고 밝아져서 불성을 깨달아 보게 될 것이며, 환술과 같은 자유자재한 자비와 지혜를 가지고 중생을 두루 제도하여 보리, 열반의 길로 이끌 줄 알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곧 사람에게는 물론 하늘 세계에서도 스승이 될 것이며 큰 복전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불자는 모름지기 자나깨나 이렇게 힘쓰고 힘쓰라는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다.
[해설(解說)]
불교를 닦고 수행하여 불법을 체달해서 확철대오하려면 비, 지, 원, 행( 悲, 智, 願, 行)의 네 가지와 신, 해, 행, 증( 信, 解, 行, 證) 네 가지에 의해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비, 지, 원, 행이란 자(悲)는 자비한 마음가짐, 곧 일체중생을 자기 자식처럼 애처롭게 보고 가엾어하는 마음가짐으로 다른 이와 다투고 시비하지 않는 마음이며,
지(智)는 지혜로움 즉 중생이 무명의 어두운 마음으로 시비, 선악을 알지 못하고 사리(事理)의 분별에 어두운 마음인 번뇌를 이겨내는 슬기로움,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인생의 바른 길을 볼 줄 아는 반야를 말한다.
원(願)은 죄악과 무명의 중생살이를 뒤엎어 지혜광명인 불보살의 세계를 염원하는 것으로서, 일체 중생을 정락( 樂)인 열반의 저 언덕으로 제도하고자하는 자리이타의 대승적 염원을 말한다.
행(行)은 진리 그대로 여법(如法)하게 나(我)에 대한 이기적인 집착, 육신적, 물질적인 자아관(自我觀), 인생관을 초월한 실천 행을 뜻한다.
신, 해, 행, 증은 부처님 말씀을 믿(信)고 교리를 알아서 이해하고 (解 : 慧) 그대로 실천하여 (行 : 戒, 正) 구경의 깨달음을 이루게 (證悟 : 始覺) 된다는 뜻이다.
중생이 사람, 축생, 천상, 아귀 지옥등 五도세계에 무한한 윤회를 하면서 끝없는 생노병사등의 온갖 고통과 죄악 속의 삶을 계속하는 가운데, 이 같은 생사윤회의 중생 고를 벗어날 수 있는 불법을 만나는 일이 힘든 것을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 표현하는데 맹구우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글자대로 풀면『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간단한 네 글자가 함축하고 있는 뜻은 그렇게 간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요컨대 있기가 쉽지 않은 요행, 아주 희귀한 일을 뜻하는 말로서 이 숙어의 우화적(寓話的) 유래는 다음과 같다.
큰바다에 한 눈 먼 거북이가 살고 있는데 그 눈먼 거북이의 수명은 한량없을 정도로 길다.
그러나 그의 수명은 천년마다 한번씩 구멍 뚫린 나무 널빤지를 만날 수 있어야만 계속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천년마다 한번씩 목을 물밖에 내밀고 길게 숨을 쉬고 다시 바다물 깊이 들어가야만 하는데, 눈 먼 거북이가 천년만에 한번 그의 목을 물 밖으로 내 밀 적에 요행히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나야만 목을 걸고 숨을 길게 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넓고 넓은 바다 한 가운데 그 큰 거북이의 몸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널빤지가 떠다니기도 어렵지만 더구나 눈먼 거북이의 목이 걸리기에 알맞을 만한 구멍이 뚫려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설사 그런 널빤지가 태평양 한 가운데 이리저리 떠 다닌다 하더라도 저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거북이가 아무데서나 그것도 천년만에 한번 목을 물 밖으로 내밀 때 그 목이 저 널빤지 구멍에 걸리는 요행히 있기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맹구우목이란 말은 불법인 정법 만나기가 그토록 어려움을 표현한 말인 것이다.
계초심학입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