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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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불심의 고향, 사천 다솔사

김연호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경남 하동군 진교면 산골이다. 30여 호가 모여 살던 산골 동네인데, 부모님은 평생 다랑논과 밭을 일구며 사셨다. 먹고사는 것이 바쁜 터라 부모님은 절에 다닐 여유조차 없었다. 그 밑에서 자란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불교를 처음 만난 것은 10대 후반이다. 1970년, 나는 심한 위장병으로 수술을 받았다. 요양을 위하여 고향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다솔사로 들어갔다. 그 무렵 나는 얼굴은 유채꽃처럼 노랗고 몸매는 풀 대궁처럼 가냘픈 병약한 청춘이었다. 그렇지만 청춘의 맥박은 삶에 대한 열정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다솔사는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도량석 목탁과 은은한 범종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는 수월도량이었다. 그 종소리, 목탁 소리가 내 어린 영혼을 맑게 해주었다. 예불이 끝나면 도량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나무 홈을 통해 커다란 돌확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에는 심연의 먼 풍경이 펼쳐졌다. 그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5개월여의 다솔사 생활.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칠순이 넘은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이 나이에 아직도 아침이면 예불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어가는 청복의 삶은 그때 심어놓은 행운의 씨앗이 아니었는가 싶다.
다솔사에 머물던 시절, 나는 이후 불교적 삶에 큰 영향을 준 스승 세 분을 만났다. 그 귀한 인연의 앞머리에는 한국 불교계의 큰 나무였던 효당 최범술 스님이 있다.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차(茶) 문화의 선각자이셨던 효당 스님. 그분으로부터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은 인생은 그 귀함을 알고 한 치의 낭비가 없어야 한다는 생활 철학이다. 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효당 스님의 가르침대로 한 톨의 음식이라도 만들어 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공양물을 귀하고 깨끗하게 먹으면서, 무위도식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놓지 않으려고 애쓴다. 비단 불교적 삶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한 분은 효당 스님의 은사셨던 환경 노스님이다. 노스님은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먹과 붓으로 담아내는 한국 선서화의 도도한 전통을 이어온 분이다. 그리고 또 한 분은 나중에 불교사학자로 대성한 효당 스님의 속가 수제자 김상현 교수다. 김 교수로부터는 불교를 공부하는 진지한 태도와 직관적 통찰의 예지를 보았다.
최근 효당 스님의 은혜에 내가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23년 하동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차 엑스포’ 측에서 오랫동안 서예와 차 문화를 사랑해 온 나의 이력을 인정하여 차와 관련된 서예 전시 기획을 의뢰해 왔던 것이다. 나는 다솔사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차에 대한 효당 스님의 말씀을 내 나름대로 복기하여 작품화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이를 위해 ‘효당어록’을 작성하고 금석 연구가이자 서예가인 구본혁 선생에게 부탁하여 33점의 한글 작품을 제작했다. 한 달간의 전시를 통해서 효당 스님의 철학을 선양하는 한편, ‘알뜰한 차 살림’이라는 제목의 특강도 했다. 내 불심의 요람인 다솔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작은 보은을 희구하면서.

작은 촛불을 대불련의 보현행원으로
다솔사의 청정한 생활로 건강을 되찾은 나는 경상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새내기의 푸릇푸릇한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다솔사 시절의 사형 김상현 선배를 다시 만났다. 그는 이미 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경남지부장직을 맡아서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당시 대불련 경남지부는 3개 대학에서 입회한 회원이 250여 명이나 되었다. 대불련의 주요 모임은 매주 토요법회, 교양강좌, 간이수련회 등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김상현 선배는 젊은이들 가슴에 불교의 심오한 철학을 심어주고 참된 멋을 일깨워서 젊은 시절 인생의 바른 기틀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었다.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대불련에 가입시키고 주말에 열리는 진주 연화사 법회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대불련 활동에 푹 빠져서 여러 프로그램에 적극 참가했다. 덕분에 우리는 1972년 8월 13일부터 6박 7일간 무주 구천동에서 열린 제1회 화랑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행사에는 전국에서 150여 명의 대불련 회원들과 많은 지도교수, 법사님들이 함께했다. 나는 그곳에서 청년 불자들이 사회에 나가더라도 그때의 인연과 불심을 잃지 않는다면 한국불교의 튼튼한 반석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불심으로 가득한 청춘의 열정으로 전국에서 모인 대불련 법우들은 모두가 같은 대학생이면서도 학생 이상의 존재였다. 당시 대회를 이끌고 발언했던 법우들은 그 후에 사회에서도 모두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면서 살고 있다. 화랑대회는 그 싹수를 미리 보여준 모임이었다. 지도교수님들의 열정도 잊을 수 없다. 그분들은 미래의 사회 변화에 따른 불자들의 역할을 주제로 강의하면서 우리 청춘의 가슴에 신념의 불꽃을 일으켰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이기영 교수의 강연 〈청년불교의 방향〉은 아직도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1974년 대불련 전국지도자 수련회 때 직접 지어온 ‘새로운 예불문’을 선보였는데 나는 지금도 그 예불문을 법회 의식 때 활용하고 있다.
1973년 봄, 대불련 경남지부가 개최한 대강연회도 잊을 수 없다. 이날 법사로는 탄허 스님이 오셔서 ‘목족병행(目足竝行)’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주제에 대한 박학다식과 명쾌한 논리,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2백여 청중에게 감동이자 신비였다. 법문이 끝나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장교 후보생이 벌떡 일어나 “스님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지금 이 순간이지, 지금 말고 또 어디 있어! 응?” 하고 시원한 답변을 해주었다. 이때 옆에 자리했던 이미 공부가 깊었던 김상현, 백효흠 두 선배는 단번에 알아채고서 참 멋진 답변이라고 찬사를 아끼지를 않았다. 하지만 우둔했던 나는 그 당시는 ‘지금 이 순간’의 심오한 도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더욱 발심하여 5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맛을 공유하고자 수백 회의 대중법회를 주관하며 훌륭한 선지식들을 모셔 법문을 듣고 있다. 덕분에 이제야 조금은 깨닫는 바가 있다. 법회에 참석하는 순간순간이 불자로서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탄허 스님과의 첫 인연은 큰아이가 태어난 후첫돌 기념으로 탄허 스님의 《현토 화엄경 합론》 40권 강독으로 이어졌다. 초심불망! 나는 날마다 이 보전을 읽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습관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1973년 9월, 나는 백효흠 형의 뒤를 이어 제8대 대불련 경남지부장을 맡게 되었다. 곧바로 나의 이름으로 주관해야 하는 큰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상현(전 동국대 교수)과 백효흠(전 현대자동차 사장), 이 두 선배가 이미 준비해 둔 화랑정신 재현을 위한 서예, 탁본, 사진, 시화 등으로 꾸민 종합전시였다. 모두가 큰스님들과 유명 서예가들로부터 받아놓은 작품들이었다. 우리는 화랑 유적지를 탐방하고 사진과 탁본을 제작하여 밑천을 마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들이 해내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행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젊음의 패기로 일주일간의 행사를 무사히 치렀다. 통일신라의 대업을 이룩한 화랑정신의 패기와 화랑오계를 내린 원광법사에 대한 선구적 시대정신을 대불련 경남지부 법우들은 열심히 설명했고, 그 열정의 덕분으로 학계와 종단의 열렬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나는 이를 계기로 서화와 문화재에 대한 미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 같은 관심은 내가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고미술의 아름다움을 불법의 선양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간주했다. 그 부단한 노력의 결과, 지금까지 한국 고승 유묵전, 세계의 불상전, 달마도 특별전 등을 30여 차례나 기획하여 전시했다. 이런 관심은 외연을 계속 확장해서 내가 살고 있는 제천의 역사, 문화, 예술 등을 연구하고 향토문화재를 수집, 발굴,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자산을 바탕으로 나는 초대 제천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모두 대불련 활동의 공덕이 아닌가 싶다.
제천 청년불교 재건 사업
1974년 5월, 대불련 전국지부장회의가 2박 3일간 청주에서 열렸다. 충북 청주의 첫인상은 참 아늑했다. 이때 느꼈던 포근함이 인연의 씨앗이 되었던지 대학 졸업 후 바로 충북 제천 군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6개월만 살다 가리라던 애당초의 계획은 무슨 인연인지 나를 이곳에 정착하게 했다. 그리고 5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제천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럴 만한 인연이 있었다. 제천으로 오는 충북선 기차 안에서였다. 나의 옆좌석에 여대생이 앉아 있었는데, 청주의 한 대학에 다니는 대불련 회원이었다. 그녀는 지난 4월에 제천 한산사 포교당에 불교청년회가 창립되었는데 지금도 법회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솔깃했다. 1976년 8월 30일로 기억한다. 제천에 온 지 불과 3일 만에 나는 묻고 또 물어 한산사를 찾아갔다. 이 무렵 지도자가 없어서 거의 해산 위기에 있던 불교청년회 여자 회원 다섯 명이 마지막 법회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나는 이들과 청년회 재건 문제를 논의했다. 거기에는 3년 뒤 나의 배필이 된 권 보살도 있었다.
진주에서 대학을 갓 나온 총각이 불교청년회에 왔다는 입소문이 삽시간에 제천 바닥에 펴졌다. 매주 여자 회원이 늘어났다. 나는 신바람이 났다. 일주일에 두 번 법회를 보았다. 수요일은 염불 기도, 일요일은 다도 강좌를 했다. 제천에선 아직 생소한 다도 강의를 시작하자 한산사의 아담한 법당은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가씨들로 가득했다. 그 여세를 몰아 5개월 뒤 60여 명의 불교학생회를 창립하고 불교 기초강좌를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유명 법사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제천불교청년회 주관으로 제등행렬을 겸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도 열었다. 2천여 명 불자들이 손에 연등을 들고 염불하며 거리를 행진하자, 시민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당시 기독교인이던 군수도 불교가 시민의 화합에 기여하였음을 인정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잊을 수 없다.
몇 년 사이에 청년회와 학생회가 스스로 자립에 들어가자, 나는 한발 물러나서 40여 명의 회원으로 거사림회를 창립해 법회를 이어갔다. 이를 기점으로 제천에는 승려연합회를 비롯한 어머니회, 거사림회, 세 곳 사찰의 학생회, 세 개의 불교청년회, 기관차법우회, 운불련 등 불교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곳곳에서 연꽃 같은 불교의 향기가 퍼져나갔다.

‘우리는 선우’ 제천지회 창립
나는 동물병원을 24시간 풀가동하면서도 이 시대에 맞는 불교 운동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놓아 본 적이 없다. 구하면 얻어진다더니 정말 그랬다. 1991년 중반 어느 날, 〈동아일보〉 지면에 전국의 의식 있는 불자 2천여 명이 ‘재가불자 우리는 선우’를 창립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평소 존경하던 남지심, 박광서, 성태용 선생 등이 앞장선 이 모임은 우리 불교의 경화된 의식을 혁파하겠다는 다짐을 선언한 결사였다. 모임은 자비의 등 달기, 사찰의 재정 투명화 운동, 반불교적 사회정책에 대한 투쟁, 달라이 라마 한국 초청 등을 기치로 내걸었다. 공동대표를 맡은 물리학자인 박광서 교수의 한국불교의 현실을 향한 사자후는 참으로 경이적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양심적인 불자라면, 시간이 있는 분은 시간을 내어놓고, 돈이 있는 분은 돈을 내어놓고, 지식이 있는 분은 지식을 내어놓을 적에, 불국토는 이루어진다!”
형해화된 상투적인 법문에 지쳐 있던 불자들은 선생의 말에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남지심 공동대표는 문학가다운 비유와 호소로 불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좁쌀 한 알이 떨어져도 저울추가 움직인다고 하는데 1천만이 넘는 우리 불자들이 사회의식 부재로 양심의 행동을 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타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만도 못하다.”
나는 이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6개월 뒤 서울과 부산에 이어 제천에서도 ‘우리는 선우’를 창립하였다. 이렇게 창립된 ‘제천 우리는 선우’의 활동은 선우의 결사 정신을 지키며 3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제천 우리는 선우’의 응집력은 매년 4대 보살 백일기도의 입재와 회향을 기본으로 실천하는 재가 불자들의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인근 사원에 새 현판 달아주기 운동, 어려운 인근 법당을 위한 모금 운동, 탈북민 장학금 지원, 중앙공원 자비의 등 달기, 자비의 쌀 모금과 보시, 인도 한국관세음학교 돕기, 네팔 한국학교에 염소 사주기, 지역의 군법당 돕기 등을 해오고 있다. 무엇보다 ‘제천 우리는 선우’의 자랑은 국내외의 의식 있는 스님과 학자, 생명운동가들을 초청하여 수백 회의 열린 강좌를 실시하여 종교를 초월하여 제천 시민들의 의식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심으로 피워낸 문화예술의 향훈
청년 시절 다솔사 입산 생활은 나에게 진리를 향한 동경과 함께 문화재와 서화에 둘러싸인 문화적 삶을 살아가게 했다. 나는 동물병원 수의사로서 동물에 대한 사랑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본업보다는 오히려 불교 운동과 문화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을 실현하는 일에 더 바빴다. 고백하자면 나는 하루 수입에서 10퍼센트는 불법 홍포를 위해 원천징수했다. 한편으로 나머지 여유자금은 거의 문화재와 서화 등의 수집을 위해 사용했다. 나는 지역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인 수집가가 되었다. 좋은 문화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점점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김상현 교수는 ‘문화재 수집으로 자신의 공허를 채우려 하지 말고 스스로 문화재가 되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문화재 수집을 통하여 행복을 구하려 한다면 온전한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문화재는 개인 소장보다는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 그 가치를 가장 잘 활용하는 법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그동안 수집한 각종 문화재를 기증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90년과 2001년 2회에 걸쳐 국립청주박물관, 월정사 성보박물관, 2015년 제천역사박물관 등에 모두 700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를 기증했다. 25년간 집착에 가까운 수집을 했던 문화재를 불자답게 회향한 셈이다.
2001년 있었던 청주박물관 2차 기증식에 앞서 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기증의 동기를 묻는 〈조선일보〉 기자에게 나는 서슴없이 ‘준 것은 남고 가진 것은 없어진다.’라고 답했다. 기자는 그 말의 출처가 어디냐고 했다. 나는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했다. 뒷날 여러 중앙 일간지와 충청 일간지엔 이 문구가 큰 활자로 박히면서 한 불자의 문화재 기증 소식이 알려졌다. ‘준 것은 남고 가진 것은 없어진다.’ 선사들의 해맑은 오도송은 못 되지만 내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통해 실증한 이 한마디에 내 불자로서의 깨달음이 녹아 있다고 자부한다.
돌아보면 불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이 내게 가져다준 행복은 회향하는 삶의 보람뿐이 아니었다. 늘 연구하고 공부하는 평생학습의 자세, 문화적 교양의 축적을 통해 시민의식을 성장하고자 하는 노력의 배양 등이 함께 따라왔다. 그리하여 나는 불교에 갇히지 않고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재와 서화 수집과 함께 향토문화의 발굴, 연구, 전시기획에 투신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나는 예총 제천지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기간에 ‘옥소종합예술제’를 창설하고 제천 향토문화 선양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제천 재가불교 리더였던 내가 제천 향토문화의 리더가 된 것이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나는 여러 사람의 지지를 얻어 2019년에 출범한 제천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50년 불교활동의 작은 결산
1972년 대불련에 몸을 담은 이후 나의 재가불교 운동은 2022년에 이르러 꼭 50주년을 맞았다. 이 50주년을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출가하여 학승의 길을 걸으며 불학 연찬에 여념이 없는 둘째 아들 여철당과 상의했다. 아들은 목청관에 소장하고 있는 운허 스님의 미공개 한산시 원고를 세상에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운허 스님은 우리 승단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55년 3월 13일, 통도사 강원의 학승 10명과 동행, 진주 연화사에서 강원을 연 적이 있다. 이때 시작한 한산시 역주 원고 94편이 미공개로 남아 있었는데, 고서 수집에 빠져 있던 나의 수중에 이 원고가 들어왔다. 이 원고는 운허 스님이 진주 연화사에서 월운, 지관, 묘엄, 명성 등 근대 우리 불가의 최고 강백분들과 공부 모임을 하면서 역주한 것이었다. 지금 읽어도 이 번역은 한시의 한글 번역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와 함께 나는 근현대 한국 고승들의 모임인 ‘여석회(餘石會)-남은 돌 모둠’에 관한 사진 자료들을 함께 정리하여 엮었다. ‘여석회’는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그 실체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모임이다. 나는 운허 큰스님이 좌장 격으로 17년간 이끌었던 모임의 실체를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공개하였다.
다음으로는 ‘제천 우리는 선우’ 30주년 기념으로, 지도법사를 맡아주신 자은사 석구 스님의 50년 수행기를 엮는 것이었다. 어디 이름난 큰스님만 큰스님일까. 석구 스님은 비록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분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면서 보니 참으로 훌륭한 스님이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조석예불을 모시면서 생활 속에서 수행하시는 분이었다. 나는 어떤 큰스님보다도 석구 스님의 진실된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책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스님의 거절은 완고했으나 몇 번을 뵙고서 거듭 말씀을 드리자 나의 진심이 통했던지 구술 문답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기도밖에는 모릅니다》가 제천 선우들의 자발적인 보시금 출연으로 출간되었다. 이 일은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그야말로 선우가 할 일을 했다는 찬사와 함께 무려 3판까지 인쇄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업은 승보에 대한 공경만이 한국불교를 살리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확신을 나에게 선물로 안겨주었다.
나의 가족 이야기
쑥스럽지만 내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별수 없는 범부일지라도 나는 내 식구들이 속세로부터 서로를 지켜주며 함께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는 진리의 벗들이었으면 하는 서원을 늘 품고 살아왔다. 그런 희망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가족들은 동물병원의 수익과 여가 시간 대부분을 불교 활동에 치중하는 나를 이해해 주며 기꺼이 동참해 주었다. 이것은 나의 불자로서 삶에 큰 힘이 되었다.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불교청년회 활동을 통해 인연을 맺은 아내 권 보살은 부부의 연을 맺기 이전부터 나의 불자로서의 활동에 큰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아내는 내가 주도하는 온갖 불교 행사 기획에 간사 역할을 기꺼이 맡아주었다. 내가 그리는 큰 그림의 세목을 실질적으로 채워 나간 것이 아내이고 보면, 그 결실의 절반 이상은 아내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여 년 전부터 차곡히 모아 온 온갖 행사 관련 자료와 서류에는 지금도 권 보살의 글씨가 빼곡하게 남아 있다. 볼 때마다 함께해 온 긴 세월의 자취가 참 아득하게 느껴진다. 서로 척척 손발이 맞는 사이는 아님에도, 지금까지 화목한 가정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불자로서 진리의 세계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동지 의식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지금은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첫째 아들은 세 살 때 천자문을 다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다.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사서삼경을 모두 떼게 하여서 인성 함양에 힘썼다. 다행히도 서울 소재의 의대에 입학하여, 전공으로 정신과를 택한 것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인문학적인 가정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아들은 ‘서울 우리는 선우 학생회’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재가연대에 매달 후원금을 보시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둘째 아들은 지금 독일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첫째 아들보다는 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많이 받아서 불교와 예술 전반에 걸쳐 공통의 관심 분야를 가지고 늘 좋은 말벗이 되어준다. 일찌감치 학교 공부에는 별로 취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유독 동양철학과 예술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대학 진학 시 철학과 예술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철학을 선택하여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진학했다. 학문적인 탐구만으로는 별로 성에 차지 않는다고 했고 결국 통도사로 출가하여 15년 동안 승려로 생활했다. 승려로서 수행과 포교에 두루 투신하여 오다가 3년 전 문득 독일 유학을 결심하였다. 현대불교의 뿌리는 근대적인 학문불교이고 그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의 불교학을 투철하게 익혀 보고 싶다는 포부 때문이었다. 인문 예술 전반에 대한 넓은 관심과 승려로서의 깊은 수행 체험까지 겸비하고, 이제는 현대 동양학의 메카에서 학문 연찬에 여념이 없다.
잊을 수 없는 신앙 체험
나의 불자로서의 삶에 대한 총체적 서술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나의 기질상 주로 외적으로 치닫던 불교 활동에 내면의 깊이를 더해 준,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신앙 체험을 고백하고자 한다.
첫째는 모친의 극락왕생을 염원한 십만 배 기도이다. 제천에서 수의사 업과 함께 불교와 문화예술 활동에 바쁘게 사느라 고향의 부모님은 잊고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원망하지 않고 풍병과 싸우다가 1999년 섣달, 72년의 생애를 마쳤다. 죽음은 삶의 주변에 흔히 널려 있지만 직접 내 살갗으로 파고들면 달라진다. 불효의 한이 너무도 사무친 나는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면서 하루 2천 배씩 50일간 10만 배의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 이 사실이 차츰 이웃에 소문이 나고 불교계 신문에 기사화까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나와 같은 이별의 한을 안고 있던 아픈 영혼들의 가슴에 10만 배 기도 동참의 불씨가 당겨졌다. 당시 제천에서도 21명이 10만 배 기도를 성취했다. 나를 포함한 선우들에게 종교는 체험과 신앙심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고 자부한다.
둘째는 달라이 라마 존자님과의 만남이다. 2001년 7월,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한국 초청이 끝내 무산되자, 이에 대한 사과를 위해 한국대표단 30명이 선발되었다. 나는 여기에 포함되어 다람살라에 있는 존자님의 관저를 방문했다. 한국에서 인도의 다람살라로 향하는 기나긴 여로에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고 세계적인 불교 스승과의 대면에 대한 기대로 몸과 마음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하지만 존자님을 뵙는 순간, 우리의 가슴은 봄날 햇살에 얼음이 녹듯이 사르르 풀어지는 것이었다. 존자님의 모습은 우리 어린 시절 논두렁의 물꼬를 손보는 할아버지의 소박한 자태, 그것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존자님과의 80분 대화. 그것은 불교의 핵심과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불교적 정견의 진수를 보여주며 한국 방문단의 심장을 강타했다. 존자님의 말씀은 열정적이었으나 흑백에 치우친 논리는 어느 한 곳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실 사회의 아픔을 차근히 보살펴 가는 처방의 방편을 위해 불자의 양심을 어떻게 다할 것인가에 주안점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어찌 석가세존의 방편의 가르침과 어긋남이 있겠는가?
당시 나는 모친의 극락왕생 십만 배 기도로 땀과 눈물을 하염없이 흘린 공덕으로 가슴엔 무언가의 신념으로 가득하고 눈빛에는 치열함이 있었다. 나는 존자님께 물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불자로서 가장 좋은 수행법은 무엇입니까?” 나는 존자께서 권유한다면 어떤 고행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존자님의 말씀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남을 최선을 다해 도우라. 또한 남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하라. 그리고 친절하고 온화하라. 이것이 가장 훌륭한 수행법이다.’
참으로 석존의 정법에 부합하면서도 속세를 살아가는 범부들의 가슴에 절절히 다가오는 법문이었다. 이후 나는 불자의 양심을 일깨우는 존자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늘 간직한다. 나는 존자님을 친견하기까지의 여정과 존자님과 나눈 대화를 정리하여 《기다림의 지혜가 있는 땅》이라는 책을 엮었다. 여러 가지 내용과 형식에서 충분치 못하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선 존자님과의 대담을 기록한 첫 번째 책이 아닐까 싶다.
불자로서 더 하고 싶은 일
청년불교 운동의 활성화, 이것은 한국불교의 지상 과업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이 화두를 놓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7년 전 ‘제천 우리는 선우, 청춘 불자회’를 창립했다. 그러나 아직 가시화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청년들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통해 삶의 행복을 추구하게 할 것인가. 궁리 끝에 선택한 방안은 청년들의 해외 성지순례와 봉사활동을 지원해 주는 방안이다. 그 시작으로 두 명의 청년 선우들에게 중국 보현보살 성지순례를 지원했다. 그리고 내년 초에는 5명의 청년 선우들을 보드가야로 보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미래의 청춘 불자 인재 양성을 위한 나의 염원이 다 이루어지기 전에 약간의 장애가 생겼다. 나이가 들다 보니 여기저기 건강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조금씩 쉬었다 가라는 부처님의 뜻인가 싶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병원에서 하자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다. 다시 회복되면 그동안 연기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얼마 전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면서 ‘제천 우리는 선우’의 두 지도법사님께 기도를 부탁드렸다. 곧 안위를 비는 선우들의 하나같은 간절한 글줄들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그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새벽 병실 동창으로 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차량의 불빛들, 그 흐름은 역동적입니다. 오늘 오후, 위장 수술을 받기 위하여 이틀째 곡기를 끊고서 대기 중입니다. 지금, 저의 몸과 마음은 태풍의 전야와 같이 그저 평온할 따름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좀 더 머무르고 싶습니다. 아직은 여러 선우님과 더불어 더 많은 행복한 법회를 봉행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불교 운동이 제천 불교 미래에 한 점의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
김연호 제천 진주동물병원 원장
김연호 j-youma@hanmail.net
1952년 경남 하동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수의대 졸업. 진주동물병원 설립 운영. ‘제천 우리는 선우’ 창립. 한국예술문화단체 제천지부장, 제천문화재단 초대 이사장, 제천 옥소종합예술제 창립 · 추진위원장 등 역임. 저서로 수필집 《뭐하고 살았나》 달라이 라마 대담집 《기다림의 지혜가 있는 땅》 사진집 《합장 인생》 등 다수가 있다. 국민훈장 석류장, 제천시문화상, 불이상, 대원상, 충북도민대상, 대불련동문대상, 자산문화예술인상 등 수상. 현재 제천 진주동물병원 원장, 제천 우리는선우 회장.
준 것은 남고 가진 것은 없어지더라 / 김연호 - 불교평론
내 불심의 고향, 사천 다솔사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경남 하동군 진교면 산골이다. 30여 호가 모여 살던 산골 동네인데, 부모님은 평생 다랑논과 밭을 일구며 사셨다. 먹고사는 것이 바쁜 터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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