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즉착(開口卽錯)>

‘개구즉착(開口卽錯)’은 입을 여는 순간 어긋나버린다(틀린다), 말한 즉 곧 틀린다, 입을 벙긋하는 순간 어긋난다, 그런 뜻이다.
비록 점잖지 못한 표현이긴 하지만 대체로 진리의 세계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그런 뜻의 말이다.
따라서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하면, 그 순간 진리의 참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빗나가버린다는 말이다. 진리 ‘그 건’ 언어 문자가 아니니까.
어떤 생각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어의 한계, 표현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말로써 선(禪)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면 십만 팔천 리나 멀어진다는 뜻인데, 한술 더 떠서 동념즉괴(動念卽乖)라, 생각만 움직여도 곧 어긋난다는 말이다. 말은커녕 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 어긋나버린다는 말이다.
이러하므로 언어와 문자로는 어떤 형상, 어떤 경험도 온전히 전하기는 힘듦을 말한다. 예컨대, 지금 손톱 밑에 가시가 들어가 몹시 쓰리다고 가정할 경우, 그 쓰라림을 아무리 교묘하게 무량한 언설로 잘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말을 하는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그 고통을 완전히 느끼고 알 수는 없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현상도 말로써 온전히 전하기 힘든데, 하물며 진리는 언어라는 수단으로는 닿지 못하는 곳, 문자를 세워 전할 수 없는 곳에 있으니, 어떻게 언설로써 완벽하게 전할 수 있으랴.
언어는 한편으로는 이해를 돕는 좋은 가교(架橋)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해를 낳는 나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해의 근원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주제 및 상황에 임해서는 아예 거룩한 침묵[무기(無記)=양구(良久)]을 보이셨다.
불교의 시각에 의하면, 언어는 우리가 세상의 진실을 바로 보는데 오히려 장애 요소라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 자체가 불교적으로 정화된 말이 아니라 세속의 온갖 가치들, 잡된 생각들, 다양한 욕심들에 오염된 말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말은 진실을 전달하는 기능으로는 부족하고, 부정확하다는 말이다. 대승불교, 혹은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관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자라면서 배우는 말들이 진실을 왜곡한, 자아관념(自我觀念)에 찌든 것을 배우게 된다. 어릴 때만 아니라, 우리는 자라면서 계속 이와 같은 자아관념 밑에서 교육을 받는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다 그렇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자아관념에 지배되고 있다. 이번 생에서 우리가 교육받아 온 것만 해도 이러한 자아관념이 우리의 뇌리에 뿌리박혀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무의미한 말은 없다. 말에는 의미가 있다. 무엇을 지향하고 지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내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 있기에 거기엔 ‘나’라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에고(ego)가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인간의 사유작용에서 나온다. 생각이 말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각은 대상을 헤아리고 나눈다.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를 분별한다. 그래서 그것은 내 주관적인 선입견, 자아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표현을 하려니 올바른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는 틀을 만들어 우리의 생각을 그 틀에 가둔다. 언어화(言語化)가 통찰력을 요구하는 문제의 해결능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한글이 모든 소리와 모양, 우주만물을 글자로 나타낼 수 있다고 했지만 사람이 어떤 이미지를 본 후 그 형상을 언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 이미지에 대한 기억력이 흐려진다. 뇌에 각인된 모습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보면 이미지가 흐려진다. 그래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언어능력의 한계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로는 감정의 전달도 제대로 안 된다. 그러니 고요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는 결코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다. 말로는 음식 맛 하나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예컨대 된장찌개 맛을 말로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된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외국 사람에게 된장 맛을 설명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더구나 진리의 세계를 말로 표현하기는 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心行處滅)」이란 <대지도론(大智度論)>,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등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짐작할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말이고, 절대의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쓰이는 말이다. 언설이나 글자로도 표현할 길이 없고 마음으로도 어찌 할 수 없다는 뜻, 한마디로 언어의 효용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모든 언어의 표현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으로 행할 바가 모두 사라진 곳[心行處滅]에 이르러야만 마침내 진리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적으로 원숙한 인격체가 되라는 말보다는,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하고, 옷을 어떤 것을 입어라거나, 그런 집 아이와는 사귀지 말라거나, 학원에 늦지 말라거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S대학생이 되라거나, … 등 자아의식, 자아관념을 강화하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고 자라니 오온(五蘊)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취착하지 않는 순수한 오온을 이해하기 힘들어,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번뇌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 바탕은 마음이라고 할 이름조차 세울 수 없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인 무상(無相)의 체(體)이다. 교리적인 용어로 말하면,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므로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심(本來心), 당처(當處)라고 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에 집착을 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므로 이를 망념(妄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에 수반해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분별심과 취사심(取捨心)이 일어나므로 이를 취착(取着)이라고 한다.
이와 같아서 ‘개구즉착’이란 입을 열자마자 바로 입을 열기 전의 공(空)인 체성을 그르치는 것이고, ‘동념즉괴(動念卽乖)’ 또한 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이미 본성의 체인 무자성(無自性)인 공성(空性)과 어그러진다는 의미이니, 이는 본성의 체성이 본래 한 티끌도 세울 수 없는 청정(淸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노자(老子) 철학에 보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말이 있다. 도(道)를 도(道)라고 말하면, ― 도(道)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이미 그러한 도(道)는 도(道)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말로써는 도(道)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도(道) 아님이 없다고 했는데, 그럼 우리가 하는 말은 다 정확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래서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는 모든 오류(誤謬)는 언어로부터 온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필시 말에는 분별이 따른다. 어리석은 인간의 분별지(分別智)는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사물을 변별(辨別)한다. 즉, ‘있다’가 아니면 ‘없다’이며, ‘옳다’가 아니면 ‘그르다’가 존재할 뿐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은 존재 할 수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변견(邊見)이라는 것이 바로 이분법적 논리이다. 예를 들면, 내 것, 네 것이라든가 네 편, 너 편이라든가 이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은 보통 한쪽에 치우쳐서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 결과 연기적 지혜나 자비행이 아니라 비연기적 무지와 남을 해치는 난폭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비불교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中道)사상이다. 중도란 양끝의 중간이거나 어중간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란 어떤 원인을 제공했을 때, 양변을 제거하고 여러 조건들에 의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연기적 행위가 이루어져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쌍생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될 때 이를 중도행(中道行)이라고 한다.
「언무전사(言無展事), 어불투기(語不投機), 승언자상(承言者喪), 체구자미(滯句者迷) ― 말로는 이 일을 밝힐 수 없고, 또 말로써 투기할 수 없다. 말로 이어가려 하면 잃을 것이고, 글귀에 매달리는 자는 미혹한 자다.」라고 했다.
즉, 말하는 자는 진리를 잃고 언어에 집착한 자는 실상(實相)에 미(迷)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달마 대사가 주장한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見性)의 의미를 명증하게 드러내 보이는 말이다. ― 동산 수초(洞山守初, 910-990) 선사의 말이다. 수초 선사는 당~오대~송나라 시대를 살면서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제시한 운문종(雲門宗)의 시조이다.
우리 범부 중생이 쓰는 모든 말은 그 어미(語尾)가 궁극적으로 ‘이다’ 혹은 ‘아니다’로 끝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선택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언어습관 속에 젖어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런 이분법적 선택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범부가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본래 스스로 원만하건만 말은 그 자체가 이미 치우쳐 있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말로는 그 온전한 진리 전체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로는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 ― 단어란 그 통용되는 것 자체로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고 통제하는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예컨대 ‘인민’이란 말을 보자, 인민(人民)의 일반적인 의미는 선량한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덧씌워 ‘인민민주주의니’, ‘인민군’이니 해서 일반적 의미의 ‘인민’과는 사뭇 다른 뜻으로 쓴다. ‘동무’란 친한 친구란 말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쓰는 ‘동무’란 말은 친한 친구란 말이 아니다. ‘이념이 같은 동지’란 뜻으로 쓴다.
언어 ― 단어란 그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파편들이다. 우리가 올바른 단어마저도 함부로 구사하지 못할 정도의 사회라면 그 사회는 왜곡이 심각한 상태라는 반증인 것이다. 언어가 도용되고 오염되면, 그 사회는 바로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의 진리는 언어의 한계 밖이다. 그래서 언전불급(言詮不及)이란 말도 나온 것이고, 법을 전함에 이심전심(以心傳心)란 말이 생겼으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것도 그에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고, 체험을 통해 체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가(禪家)에서는 아예 “곧바로 마음을 살펴 성불하라(直指人心 見性成佛)”라고도 하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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