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세계

<문자법사(文字法師)⋅문자선(文字禪)>

수선님 2026. 3. 15. 13:24

<문자법사(文字法師)⋅문자선(文字禪)>

‘문자법사(文字法師)’는 경전연구에만 몰두할 뿐 수행하지 않는 자,

불교에 대한 말솜씨만 능란할 뿐 지혜와 덕을 갖추지 못한 자,

문자에만 구애돼 참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

또는 경을 많이 읽어 문자로는 도를 통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수행이 부족해 생사해탈을 얻지 못한 자, 이런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문자법사(文字法師)는 선종에서 ‘교학(경전·문자)을 깊이 익히지만 참선 수행이 없거나 문자에 얽매여 이치를 오해하는 사람을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선종이 교종을 비판할 때 “경전의 글자에 집착하고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폄하한다.

선종은 교종을 암증선(暗證禪)이라 하고, 교종은 선종을 오히려 문자법사(文字法師)라며 폄하하는 용어로 서로 사용해 왔다.

서산대사 관련 서술에서도 “문자에만 얽매여 수행하지 않는 문자법사(文字法師)는 되지 않으리라.”는 태도를 강조했다. ‘암증선’은 교리 이해 없이 깨달음을 얻으려는 선을 비판하는 말로, 문자법사와 함께 선종 내 분파 비판 맥락에서 언급됐다.

또 달리는, ‘문자법사’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그 반대 개념은 소문을 ‘확산시키지 않거나 사실을 ‘확인⋅검증해 사실관계를 ‘정확히’ 유지하는 사람’ 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담항설(街談港說)’은 거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 세상에 떠도는 뜬소문을 뜻한다. 따라서 ‘문자법사’는 이 맥락에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해석된다. 입만 가지고 설치니, 헛소문도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선을 삼종선으로 분류하면, 의리선(義理禪)⋅여래선(如來禪)⋅조사선(祖師禪)으로 분류한다. 의리선은 선(禪)을 언어나 문자 등으로 그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고, 여래선은 교에 의지하여 자성(自性)의 본래 청정한 바탕을 바르게 체득하는 것이며, 조사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禪旨)를 곧바로 체득하는 선이다.

다시 말하면, 조사선은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를 깨달아서 얻는 선의 경지이고, 여래선은 만법(萬法)을 통합해 일심(一心)을 다루고 일심의 실재함을 증오(證悟)하는 선경(禪境)이라고 했다. 달리는, 여래선(如來禪)이란 ‘여래의 말씀’ 즉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에 의거, 수행해서 깨닫는 선’이라는 뜻이다.

시기는 대개 석존으로부터 달마 대사 이전까지를 가리킨다. 이를 여래선이라고 하는 것은 석존으로 부터 직접 전수 받은 수행방법이 계속해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래선은 ‘여래의 가르침에 의한 선’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닫기는 했으나 아직 미흡한 경지에 있을 때를 여래선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다시 진귀조사(眞歸祖師)를 찾아가서 조사선을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여래선이 조사선보다 한수 아래라고, 여래선을 폄하하려는 이들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로 보인다.

여래선과 조사선을 간결하게 정의한 말이 있다.

“여래선은 팔만사천 법문(法門)이요. 조사선은 오직 일갈(一喝)이로구나!”

“여래선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 하나 조사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자에게만 오직 졸탁동시(啐啄同時) 하는구나!”

“달마가 동토(東土)로 온 후 언제 찾아다니며 장광설(長廣舌)을 했던가, 그게 바로 조사선의 진수가 아니던가!”

대개 인도 계통의 선이 여래선이고, 중국 선이 조사선이다. 여래선은 인도불교 즉 여래장사상을 선(禪)의 입장에서 소화해 자리매김한 용어로서, <금강경>에 「만일 여러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볼 때는 여래를 볼 것(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이라고 한 것과 같다.

여래선, 조사선에 대한 구분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 때까지는 없었다. 혜능의 남종선에서 자파(自派, 조사선)가 월등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종래의 선을 여래선, 의리선(義理禪)이라고 격하하고 자파의 선(禪)인 조사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여래선과 의리선(義理禪)은 엄격히 다른데, 선종에서는 여래선을 의리선이라고도 한다. 의리선이란 학문적 교학적, 또는 언어적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 이해하는 선이란 뜻이다.

경전이나 언어문자, 뜻풀이 등에 의존해 이해하는 선이란 뜻인데, 후대에 성립한 조사선과 간화선 쪽에서 폄하하기 위한 의도로 정의한 것이다.

그것은 실참(實參)보다 교리에 의거해 이치로 이해하는 선이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문자나 뜻풀이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문자법사들이 행하는 선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조사선(祖師禪)은 ‘진공(眞空)’이라는 미세한 알음알이마저 거부한다. 드러난 현상 그 자체가 진리, 본마음의 실상일 뿐 별도의 진리는 없다는 입장이다. 성스럽고 존귀하다거나 토끼 뿔처럼 있지도 앉은 진리를 따로 세울 필요 없이 드러난 현상에서 바로 진리를 체득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마음을 알아차려 바로 진리를 실천하라고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여래선에 비해 진공(眞空)보다 묘유(妙有), 본체(本體)보다 작용(作用)을 강조하는 활용의 입장에 선다.

그리하여 조사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했다. 참다운 진리는 원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중생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문자를 빌린 것이지, 참다운 진리 자체는 말도 떠나고 문자도 떠나고 생각을 떠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참다운 도는 교 밖에서 전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니까 교를 하나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바로 마음 깨달으면 된다. 바로 본래 성품을 보고 성불하는 이른바 격외(格外)도리에 입각해 조사가 본래 전하는 선을 말한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선(如來禪)의 이름에 대해 조사선이란 명칭을 세웠고, “여래선은 교(敎) 안의 미처 덜 된 선이고, 조사선은 교(敎) 밖에 달리 전하는 지극한 선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즉, ‘조사선(祖師禪)’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오ㆍ육백년 이후에 나타난 대승불교가 훨씬 수준이 높은 불교다. 특히 대승불교에는 보살행을 하자고 하는 것을 불교로 본다. 그리고 부처보다 보살을 더 높이 본다. 중국 선불교에 와서는 그러한 현상을 빌려서 여래선 위에 조사선을 두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무엄한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인가 모르겠다.

어떻든 “여래선(如來禪)은 봤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라든가, “여래선은 알았어도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여래선은 봤지만 조사선은 못 봤다는 말은 결국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훨씬 높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도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위라고 해왔다.

의리선은 이치와 뜻에 있어서 유무 또는 현상과 실재의 관계는 판별하지만, 아직 유심(唯心)의 체험에 이르지 못한 구두선(口頭禪)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선불교에서는 실천은 외면한 채 문자에만 매달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문자선(文字禪)이니 의리선이니 해서 비하한다. 선불교에서는 문자처럼 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는 진실이 담기지 않는 것으로 본다. 오히려 문저비침(文底秘沈)이라 해서, 문자 상에 나타난 의미와 달리 문자 속에 감추어진 깊은 의미에 진실이 담겨있다고 보는 것이다.

흔히 행간(行間)을 잘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행간(行間)’이란 행과 행 사이를 말하는데,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아니하나 그 글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행간을 읽다”는 표현은 글의 직접적인 내용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뜻을 찾아내 읽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문저비침(文底秘沈)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대사는 맹목적인 수행만을 일삼는 선사를 암증선사(暗證禪師)라고 비판했고, 문자와 어구에만 집착하는 교학자를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꾸짖었다. 선(禪)이 없는 교(敎)는 문자법사이고, 교가 없는 선은 암증선사라 했다.

다음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선사께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일으키면서 밝힌 결사문의 일절이다.

“만약 말을 따라 견해를 내고, 글을 따라 알음알이를 지으며, 가르침만 좇고, 손가락과 달을 분간하지 못해, 명예와 이양(利養)의 마음을 잊지 못한 채,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을 제도하려는 자는, 마치 더러운 달팽이가 스스로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세간의 문자법사이니 어찌 선정과 지혜를 오롯하게 닦고 명예를 구하지 않는 이라 할 수 있겠는가. <화엄론>에 ‘마약 스스로 묶여 있으면서 남의 묶임을 풀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했다.”

※이양(利養, 산스크리트어 lābha)---남은 생각지 않고 제 몸만 좋게 기르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

그러니 언어문자 풀이나 해석으로 선(禪)을 이해하는 것, 즉 이치나 논리,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선을 문자선(文字禪)이라 해서, 의리선(義理禪)과 비슷한 말로 봤다.

문자반야(文字般若)라는 말이 있다. 반야는 문자에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그 본성은 공적임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문자나 말로 만들어낸 경ㆍ율ㆍ논 모든 내용들이 문자반야에 해당한다. 법문, 법문 CD, 팔만대장경 같은 것들도 이에 포함된다.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經典)을 의미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한다.

문자로 말미암아 반야의 뜻을 전할 수 있으므로 문자반야라고 한다. 이러한 문자반야 즉, 경전이 없다면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많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불법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나침반과 같고, 뗏목과 같은 수단이다. 즉, 문자반야는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사다리이다. 세계에 대한 지도와 같은 것이 문자반야이다.

우리는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가듯이 문자라는 지도를 통해 세계의 실상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실상반야와 관조반야를 위해 문자반야가 있다. 즉, 반야에 이르는 중요한 방편이 되므로 문자반야를 방편반야(方便般若)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생각하셔서 열반에 드는 일은 뒤로 미루시고 깨달은 바를 전해주고자 하심에서 문자반야가 성립된 것이다. 중생을 위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유효한 수단이 언어문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문자는 반야를 나타내는 방편이 될지언정 결코 깨달음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한다. 문자는 반야 자체는 될 수는 없고, 단지 달 즉 실상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 송나라시대에 문자선 폐해가 심했다. 당나라 말엽부터 송대에 걸쳐 고승들의 각종 어록(語錄)이 대량으로 출현하자, 점차 선 수행이 주석학(註釋學) 쪽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경향은 대혜(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스승인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 어록인 <벽암록(碧岩錄)>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선수행이 문자선 방향으로 흐르게 되고, 심지어 사대부 문인들의 언어적 유희로 전락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대혜 선사가 바로 스승인 원오 선사의 <벽암록>을 모두 불살라 유포를 금지시켰을까. 이는 바로 문자선 폐해를 없애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이었고, 그러한 폐해를 고치고자 묵조선과 간화선이 등장했다.

묵조선(默照禪)은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간화선이 화두(話頭)를 참구해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법임에 비해 묵조선은 화두나 공안을 활용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는 좌선(坐禪)을 통해 본래의 불성을 스스로 깨닫는 수행법이다.

중국 송나라시대에 문자선 폐해가 심해 그 대안으로 등장한 선법이다. 간화선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정립된 묵조선은 중국 송나라 시대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 선사에 의해 체계화돼 조동종(曹洞宗)의 수행체계가 됐다.

묵조선은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自性)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공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어느 선법이든 문자를 기피하려는 선법임에는 다름이 없다.

문저비침(文底秘沈)이라, 문자 상에 나타난 의미와 달리 문자 속에 감추어진 깊은 의미를 캐려는 것이다. 즉, 경전 문장 속에 숨겨진 부처님의 오묘한 가르침, 거기에 참 부처님이 밝히신 비밀이 숨겨져 있어 이를 읽음으로 해서 해탈의 길에 빨리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 법에는 말로나 글로 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결국 깨달아 아는 수 밖에 없다. 스스로 깊이 음미해 봐서, “과연 이것이로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자기만이 안다.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는 것이란 말은 너희들은 모른다고 우리들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무정한 분이 아니다. 부처님이 돼야만 아는 것이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 너희들은 고생을 해라, 노력을 해라,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수행을 쌓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 가까이 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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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법사(文字法師)⋅문자선(文字禪)>

<문자법사(文字法師)⋅문자선(文字禪)> ‘문자법사(文字法師)’는 경전연구에만 몰두할 뿐 수행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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