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UCLA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1953~ ) 교수는 어떤 선사의 법문보다도 매우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한다.
“절대적인 진여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이다. 이를 ‘본각(本覺, original enlightment)’이라 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현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수행을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무지한 중생들이다.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실현되고 얻어져야 하는 것으로 본다. 이를 성취된 깨달음, 속세의 깨달음, 조건 지어진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얻어진 깨달음, 즉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이라 한다.”
이와 같이 버스웰 교수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 있는 내용이다. 설명에서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 했다. 그래서 모두 부처라 한다. 단지 자신이 깨닫지 못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라 한다.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자신이 이미 깨달은 존재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간화선의 3요체 중의 하나인 대신심(大信心)을 요구한다.
그런데 정견(正見)에 대해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있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있는데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선불교에서는 본래불(本來佛)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고, 초기불교에서는 팔정도(八正道)의 하나로서 사성제(四聖諦)를 바로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이런 차이는 두 갈래 길을 연상하게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정견이 다르면 깨달음도 달라진다. 길이 다르니 목적지가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해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효 대사는 물, 바람, 파도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불각(不覺)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구경각(究竟覺)까지 이루었다 할지라도 결국 깨달음은 우리가 새롭게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늘 거기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깨달음의 실현은 우리가 본생적으로 깨달은 존재라는 진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대승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는 것이라 한다.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이다.
그래서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본래적으로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단계가 <대승기신론>에 설명돼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승기신론>에서 깨달음의 단계――――
1. 본각(本覺,original enlightment) ― 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 ― 모든 존재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만 하면 됨.
2.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 ― 속세의 깨달음, 얻어진 깨달음 ―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성취돼야 함을 의미함.
3. 불각(不覺, nonenlightment) ― 지금 여기 이 순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 ― 불각의 상태를 자각해야만 함.
4. 상사각(相似覺, pseudo-enlightment) ― 허위, 가짜의 깨달음 ― 도덕, 윤리를 수행의 출발점으로 하는데, ― 원효는 이를 소승불교의 깨달음이라 함.
5. 수분각(隨分覺, approximate enlightment) ― 대략 깨달은 단계 ― 깨달음이 이미 내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단계 ― 여전히 이분법적 아상에 집착하고 있는 단계임.
6. 구경각(究竟覺, final enlightment) ― 마지막 깨달음, 궁극적 깨달음 ― 이분법적 분별이 사라진 단계.
위에서 본각이 있음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깨달은 존재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서는 가장 먼저 우리가 본래 깨달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심(信心)을 먼저 내라고 한다. 이렇게 본래 부처임을 굳게 믿었을 때 초발심(初發心)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초발심 했을 때 대승불교에서는 이미 깨달은 것으로 본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만 하는 과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다. 또 10년, 20년, 30년이 될 수도 있다. 아니 평생 걸릴 수 있고, (많은 사람이) 이 생에서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 화두참구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성계>에 따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했다. 이 말은 ‘처음 깨달음의 마음을 내는 그 순간에 이미 깨달음이 성취돼있다’는 뜻이다. 다만 과정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초전법륜경(S56;11)>이라 하겠다. 이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두 번 깨달음이 있게 된다.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단냐 존자가 법안(法眼)이 생겨났을 때의 깨달음이다. 그때 꼰단냐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S56:11).”
경에 따르면 꼰단냐에게서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생겨났다’라는 말이다. 이는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 내재돼 있다’거나 ‘우리는 본래불’이라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이다. 발생된 것이다. 없던 것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이점에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난다.
그런 법안(法眼)은 다름 아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진리이다.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이 한 구절로 인해 꼰단냐 존자는 사성제(四聖諦)를 모두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이해했기 때문에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다. 수다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정견(正見)은 사성제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이다. 그 과정이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마침내 번뇌가 소멸됐을 때 깨달음이 완성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됐을 때 번뇌가 소멸되고 청정하게 된 것을 자신이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이 없고 윤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사성제의 가르침은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의 단계, 즉 깨달음의 이해에서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감각적 욕망’ 등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사다함과 아나함의 과정을 거치면서 소멸되고, 아라한이 됐을 때 ‘색계에 대한 집착’ 등 오상분결(五上分結)까지 모두 소멸된다. 그래서 완전한 열반에 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오상분결(五上分結)과 오하분결(五下分結)――――
1) 오하분결(五下分結)----오하분결은 거친 족쇄(번뇌)로 이에는 ①유신견(有身見), ②계금취견(戒禁取見), ③의(疑, 의심), ④욕탐(欲貪, 탐욕), ⑤진에(瞋恚, 성냄), 이렇게 다섯이다. 일반적으로 '결(結-번뇌)'이라는 낱말을 붙여서 유신견결(有身見結)⋅계금취견결(戒禁取見結)⋅의결(疑結)⋅욕탐결(欲貪結)⋅진에결(瞋恚結)이라고 부른다.
※유신견(有身見)---유신견은 내 몸이 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 오온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즉, 유신견은 오온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중생이 고정 불변하는 자아(혹은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이고,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이다. 부정견(不正見)의 하나로서 잘못된 견해이다.
※계금취견(戒禁取見)----그릇된 계율에 얽매여[戒取], 그릇된 계율이나 금지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해 거기에 집착하는 견해를 말한다. 앞 뒤 사정없이 ‘…무조건’하고 선ㆍ불선도 구분하지 않고, 윤리ㆍ도덕과 전통ㆍ권위에 묶여서 중도를 통찰하지 못하는 것, 바로 계율과 의례에 대한 취착을 말한다.
2) 오상분결(五上分結)----오상분결은 범부를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놓는 다섯 가지 미세한 얽매임, 즉, 유정을 색계⋅무색계에 결박(結縛)시키는 5가지 번뇌를 말한다. 이에는 ① 만(慢-자만, 오만), ② 도거(掉擧-들뜸), ③ 무명(無明), ④ 색탐(色貪), ⑤ 무색탐(無色貪)이라는 다섯이 있다.
※색탐(色貪)---색탐은 색계(색계)에 대한 탐욕을 말한다. 여기서 색(色)이란 성욕과 관련해서 이성(異性)에 대한 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색욕(色慾)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감각적 욕망을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 삼계(三界) 가운데의 색계를 말한다. 욕계를 벗어나서 탐욕을 여읜 순수 물질의 세계에 들려는 집착(色界欲)을 말한다.
‘색온(色蘊)’ 할 때의 색(色)과 ‘색계(色界)’ 할 때의 색을 혼돈하면 안 된다. 색온은 물질계를 말하지만, 색계는 물질적 욕망을 떨쳐낸 세계를 말한다.
※무색탐(無色貪)---무색탐은 “무색계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의미한다. 무색계는 색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순수 정신세계나 그런 산냐(인식)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무색계는 신이나 부처님, 천인(天人) 등의 경계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를 욕계라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이다. 그리고 색계는 욕망이 배제된 세계를 말한다. 육체(색)는 있으나 욕심은 없는 세계다. 욕계보다는 색계가, 색계보다는 무색계가 보다 뛰어난 세계이다. 따라서 욕계가 가장 아래에 위치한 우리들의 세계고, 색계ㆍ무색계는 이 우주 밖에 위치한 이상의 세계이다. 욕망의 세계에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중생들은 보다 나은 이상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을 색탐, 무색탐이라 한다.
――――선불교와 초기불교는 정견(正見)이 다름으로 인해 목적지도 달라진다――――
대승불교에서의 정견은 우리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해서 믿기만 하면 깨달음은 이미 성취된 것과 같다고 한다.
다만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과정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번뇌의 소멸과 같은 구체적인 말은 보이지 않는다. 또 나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했을 때 이분법적 분별이 사라진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본래불(本來佛)과 내가 다름없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라 한다. ―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해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했을 때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 아라한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정신적으로는 이상세계인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 천인(天人)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정견이 다르면 깨달음의 내용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정견과 깨달음이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철저하게 (초기불교의 정견과 깨달음이) 부정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반야심경>에서 그렇다.
<반야심경>으로 표현된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나와 삼라만상 일체를 공으로 본다. 없는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한마디로 말하면, ‘나는 없다’이다. 삼라만상이 없음을 미리 생각할 것은 아니다. 내가 없으면 바깥 경계는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텅 비어 없는 것으로 보면 세상사의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자연히 풀린다고 하는 것이다.
몸도 공이고, 마음도 공이다. 공이 몸이요, 공이 마음이다. 공에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는 육근(六根)도 없고, 그것들의 대상인 육경(六境)도 없다. 모든 것을 이렇게 보는 것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볼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깨달은 이의 견해인 것이다. 곧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이룬 경계인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초기불교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UCLA 로버트 버스웰...
blog.naver.com
'지혜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허스님의 오도송을 해석해 봅니다. "콧구멍이 없는 소"가 무엇인가? (0) | 2026.05.10 |
|---|---|
| 천상천하무여불 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 十方世界亦無比 (0) | 2026.05.10 |
| 사찰(절)에 관한 시모음 (1) | 2026.03.01 |
| 나옹화상 서왕가(懶翁和尙西往歌) (0) | 2026.02.15 |
| 무생법음 無生法音 오도가 悟道歌 깨달음의 노래 경허선사 鏡虛禪師 (0) | 2025.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