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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목적(目的)은 무엇인가>

수선님 2026. 6. 7. 12:38

<불교의 목적(目的)은 무엇인가>

불교가 종교로서의 목적(目的)은 한 마디로 말해서 원성불(願成佛)과 중생제도(衆生濟度)다.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 동기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이었다. 즉, 자비(慈悲)가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정신이었다.

싯다르타의 출가는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즉, 고통을 덜어주는 것, 편안하게 해 주는 것, 따라서 불교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학문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있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이야말로 불교가 추구하는 근본목적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涅槃, nibbāna)의 실현이 바로 궁극적 행복[至福]이라 하셨다. 초기불교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 열반으로 대표되는 궁극적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즉,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涅槃)의 실현과 인간고(人間苦)의 해결이다.

다시 말하면, 열반을 실현해 성불을 이루어 뭇 중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이것이 곧 원성불이요, 중생제도다.

그래서 「숫따니빠따」<큰 행복 경(Sn2:4)>에서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엄격한 삶을 살고, 청정범행을 닦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보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 —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로다(Sn. 267).”

그래서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① 금생의 행복 ② 내생의 행복 ③ 궁극적 행복(열반)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봉사를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조하셨다.

불교용어로 말하면 이 둘은 바로 보시(布施, dana)와 지계(持戒, sila)다.

이것이 시ㆍ계ㆍ생천(施⋅戒⋅生天)으로 한역됐다. 금생에 이웃에 봉사하고 승가에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는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보시와 지계는 대승 육바라밀의 첫째와 둘째 바라밀이기도 하다. 특히 재가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강조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깨달음’이라는 종교체험을 통해 심신의 인격이 변화돼, 몸과 말과 정신적인 행위 일체가 더 이상 번뇌에 사로잡힘이 없는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 이것이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의 근본목적이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본 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로운 삶을 위해 중생들로 하여금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는 ‘지혜로운 삶’의 근본성격과 일치가 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이상향을 저 밖에 설정해 놓고 무작정 그것을 추구만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오히려 괴로움을 여읠 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 발고여락(拔苦與樂), 즉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것이라 함축해서 표현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하는 종교다. 중생들이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누렸으면 하는 게 부처님이 중생에게 품는 연민이며 자비심의 발로였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涅槃, nirvna)을 성취함을 이상으로 하지만, 불교의 목표는 발고여락(拔苦與樂)에 있다. 발고여락은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고 낙을 주는 자비(慈悲)을 말한다. 발고는 비(悲)의 덕, 여락은 자(慈)의 덕이다. 중생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시는 부처님의 작용,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실천을 말한다. 따라서 발고여락은 불교의 목표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행복 추구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는 복을 받기 위해 복 받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강조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불자다. 그렇다면 불자로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보시와 지계를 실천해야 한다. 행복 추구의 방법은 보시와 지계이며, 보시와 지계가 작복(作福) 또는 수복(受福)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곧 ‘작복 =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웃과 나누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은 세속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불가결의 조건이다.

둘째는 지나친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루복(無漏福)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유루복(有漏福)은 어디까지나 윤회의 고리가 되는 것이므로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무루복을 닦으라는 것이다. 이 권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불자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불자 개개인의 실행목표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 있다.

그리고 불교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解脫)이 달성됨을 지향한다. 불교에서의 종교적 구원은 다만 생천(生天), 즉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해탈(解脫) 내지 열반(涅槃)이며, 이는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 즉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생천 역시 오로지 선업(善業)에 의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과 행복의 문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양대 축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진리(고성제)와 세 번째 진리인 소멸의 진리(멸성제)이다. 그러면 어떻게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가?

당연히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집착)로 대표되며, 이 원인을 없앨 때 괴로움은 극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의 소멸은 당연히 팔정도(八正道)로 집약되는 수행을 통해서 성취된다.

이렇게 해서 갈애는 두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집성제)가 되고, 수행은 네 번째인 도 닦음의 진리(도성제)가 된다. 이처럼 불교의 목적인 이고득락은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로써 멋지게 정리된다.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 말씀은 붓다사사나(Buddha-sasana)나 삿투사사나(satthu-sasana)라 불린다. 이것은 ‘부처님의 명령’과 ‘스승의 명령’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 행복의 실현이야말로 부처님의 명령이다. 궁극적 행복을 위해서는 사성제와 열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한다. 이것도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이다. 애매모호한 명령이란 없듯이 애매모호한 불교란 애초에 없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가 스승의 명령을 애매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 각묵 스님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목적을 개인적으로는 성불(成佛)이고 사회적으로는 불국토(佛國土)의 건설”이라고 한다. 같은 말이지만 좀 더 거창하게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를 자비의 정신으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한 불국토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비가 실현되는 곳이다.

불교가 왕조시대에 성립,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이념은 프랑스혁명에서 내세운 자유ㆍ평등ㆍ박애인데,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과도 통한다. 그래서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지냈던 암베드카르는 자신의 정치사상은 자유ㆍ평등ㆍ박애이며, 이는 프랑스혁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이 설파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사실 부처님은 인간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돼 대자유인이 되는 해탈의 경지를 가르쳤으며 4성 평등(만민평등)과 만물평등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부처님의 자유평등 이념은 당시에는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승가 운영을 통해 이러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우애가 실현되는 사회의 모범을 보여줬다.

부처님은 공화정치를 선호했지만 당시의 왕조시대에는 국왕과 대신 등을 교화해 좋은 정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감화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정치와의 갈등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나 종교적 영향력으로 정치를 직접 지배한 마호메트와 달리 부처님은 현실정치에 초연하면서 종교적 감화력으로 정치를 교화했다.」 ― 정천구

고대인도 브라만교에서는 카스트(Caste)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윤회(輪廻)사상을 전파했다. 따라서 윤회는 당시 인도사회에 보편화된 상식이었다. 천민인 경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이 생에 천민으로 태어났으니, 이 생에서 불행을 참고 열심히 살면 내생에 귀하게 태어난다는 식으로 억눌렀다.

그러나 부처님은 브라만교식 타생(他生)으로 태어나는 윤회전생사상을 거부했다.

부처님은 고정된 틀과 운명론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전생의 바라문이 현생의 바라문이라는 정형화된 윤회론을 부정하셨다. 즉, 불평등 계급주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계급타파와 남녀평등을 주장한 선동적인 혁명가이거나 사회질서를 흔들어 새롭게 판을 짜자는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불교를 전파하고 승가(출가자)를 유지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신 분이다. 오직 승가 안에서는 계급이 없이 모두 다 평등했다. 그래서 사회신분에 관계없이 출가를 허용했다. 단 그것도 부모님의 허락 하에 가능했다.」― 실론섬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출가의 조건이나 출가 후 생활에 있어서 계급과 재능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비구는 같은 복장에 같은 규율을 지키며 생활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승가 안에서 위계와 질서의 기준, 즉 좌석 배치의 차례를 정하는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구족계를 받은 순서였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나의 법은 바다와 같다. 바다는 수많은 강물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며, 바다의 물맛은 언제나 하나다. 우리 승가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며, 평등한 그들에게는 올바른 법(法)과 율(律)이라는 한맛이 있을 뿐이다. 명심하라. 계(戒)를 받은 순서에 따라 예를 다할 뿐, 신분과 귀천의 차별은 여기에 없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러한 사회의 실현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교는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불교는 현실적 삶에 관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과거의 일이나 닥쳐올 미래보다 ‘지금 여기’, 현재를 강조한다. 현금(現今, 빠알리어 diṭṭha-dhamma)은 ‘지금 여기’란 말이다.

그래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중국에서는 이현법중(以現法中), 또는 현금(現今), 즉시현금(卽時現今)으로 옮겼고, 직역하면 ‘보인 현상(법)’인데, ‘지금 여기'로 의역했다.

우리는 매순간 지금 여기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과거로 미래로 관심을 가져가고 있다. 그러나 불교수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은 바로 ‘지금 여기’라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어법 속에는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이 다 포함돼 있다.

“지나간 것에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얻은 것으로만 삶을 영위하나니, 그들의 안색은 그래서 맑도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는 자,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슬퍼하는 자, 어리석은 그들은 푸른 갈대가 잘려서 시들어가듯 한다.” ― <상윳따 니까야>

이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매순간 지금 여기를 관찰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현상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다음은 부처님 제자 마하가전연(迦旃延, kātyāyana) 존자가 읊은 게송이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버린 것은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것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라, 흔들림 없이, 동요하는 일 없이, 잘 살펴서 실천하라.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라.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실로 죽음의 대군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와 같이 잘 알아서 마음을 다해 밤낮으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실천하는 자 이를 일야현자(一夜賢者)라고 한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제131경 <일야현선경(一夜賢善經, Bhaddekaratta-sutta)>

그리하여 안으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참된 지혜와 자비를 실천해 열반의 경지를 이루어 부처님 삶을 본받아 스스로 완성된 삶을 이루고, 밖으로는 이웃에도 일께워 보편타당한 평화로운 사회 건설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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