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반수의경

[스크랩]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 / 박현 강의

수선님 2018. 3. 4. 13:44

 

안반수의를 살펴보는 방법

 

... 다음의 문제로 하기로 하고,

아무튼 열 두 번에 걸쳐서 안반수의경과 사람의 몸을 이야기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진행하기 위한 몇 가지 선결되는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안반수의와 사람의 몸을 연결시킨 것은

안반수의경에 담긴 이야기가 완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안반수의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반수의경을 설하실 때의 기본이 되고 있는 생각을 먼저 아는 것이

안반수의를 올바르게 보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안반수의를 썼을 때의 생각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의 체계가 다를 때,

안반수의라는 이미 정해진 글만 가지고 우리가 완연하게 안반수의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으로 안반수의와 사람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는 안반수의를

차근차근 살펴보고 그 결과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다시 이해해 보는 방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람의 몸에 대한 기본 전제부터 좀 살펴보고 거기에 따라서

안반수의를 이해하는 그런 방법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매우 심각하게 차이를 가집니다.

안반수의를 먼저보고 거기에 따라서 사람의 몸을 살펴본다는 것은

안반수의라는 것을 지렛대로 해서 사람의 몸을 살피는 오늘날의 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 우리의 생활과 관련한 창조의 뿌리가 인체론이 되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또 인체론을 먼저 살펴보고 그걸 가지고 안반수의를 살펴본다면,

안반수의가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는 뿌리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방법상, 또 제 생각에 따라서, 후자의 입장을 택하겠습니다.

즉 안반수의를 설할 때, 그 당시에는 사람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

하는 사람의 몸에 대한 당시의 견해를 살펴보고,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안반수의를 차근차근 살펴보는 그런 방법으로 이야기를 나눠볼 까 합니다.

 

실제로, 여러분께서 지금 갖고 계시는 글 같은 경우에도 몇 구절만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면은,

인체론이 있지 않으면은 이해를 하기 힘든 부분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을 하게 되고,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은 지극히 주관적인 실천을 낳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호한 결과를 낳게되는 그런 일이 곧잘 있었습니다.

 

복사본으로 보면 171페이지를 잠시 펴주셨으면 합니다.

171페이지의 하단에 보면, 하단의 중간쯤 보면 문단이 나눠져 있습니다.

그 문단 나눠진 것에서 앞 문단 쪽으로 일곱 째 줄의 밑에 관유삼사(觀有三事)라고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관이라고 하는 것에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일자는, 하나는 관신사색(觀身四色)이요, 몸에 있는 네 빛을 봄이요,

그리고 뒤에 조금 빼고요, 이른바 흑, 청, 적, 백을 본다 했고,

 

이자는, 관생사(觀生死)를 보며, 생사를 관함이요,

삼자는 관구도(觀九道)라, 아홉 개의 길을 본다 이리 돼있습니다.

 

이와같은 이야기도, 당시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는 수행세계의 인체관,

사람의 몸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필 수가 없고, 주관적인 결과를 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색이라 하면은 지수화풍의 4대의 색을 말함이요,

생사라 함은 죽고 삶을 말함이요,

구도라 함은 여러 가지 아홉 갈래의 세계를 말함이라는 황당한 견해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것은 엄연하게 수행에의 교재로써, 호흡에의 교재로써 과거에 성자께서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이 구체성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몸과 직접적인 함수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함수관계 속에서 살펴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만 오늘 시간의 마지막에 좀 보태서 하기로 하고,

안반수의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또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안반수의, 그리고 조금 전에 예를 들었던 세 가지를 보는 것, 그것을 오늘 주된 이야기로 하고,

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한 실마리로써

우리가 상식적으로 쓰고 있는 우리 몸에 대한 몇 가지 단어를 끄집어 내 볼까 합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우리의 몸을 살피거나 안반수의에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살피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복잡한 철학적 개념 도구를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몸과 몸으로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나눴으면 합니다.

 

우주와 천지

 

먼저 오늘 끌어와 보고 싶은, 첫 번째 단어는 우주라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말은 중국의 한자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만,

우주는 중국에서도 우는 공간으로, 주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그 뿌리를 찾아본다면 울과 줄이 됩니다.

 

그런데 이 우주를 흔히 일반적으로 우주라 하지 않고 천지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천지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이것으로써 우주라는 표현과 흔히 동일하게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야말로 쉬운 표현이면서 결코 쉬운 표현이 아닙니다.

또 우주를 나타내는 다른 말로써는 만상이라든가 만물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말 자체에 어쩌면은 가장 기본적인 우리의 몸과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는 빌미가 있을 수도 있고

중요한 수행과 실천상의 강령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천지를 우주라는 말로 쓰면서

우리 인간의 몸을 또는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은 소천지라는 표현이고 실제로 소우주라는 표현대신에 소천지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은 이때 천지라는 개념이 대체 무엇일까가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는데

그냥 천지는 하늘 땅으로만 이해해버리기가 쉽습니다.

 

만약에 천지를 하늘과 땅이라는 단순한 방식으로만 이해하게 되면은 소천지는 문제가 됩니다.

실제 천지라는 것과 만상이라는 것은 같은 개념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즉 천지는 만상의 근원인 것이죠.

 

모든 존재하는 이 삼라만상의 존재들은 다 천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주가 또한 곧

천지이기도 한 것이고 우주 속에 들어있는 사람도 천지가 되는 것이라고 과거 분들은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과 지의 성격을 다르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푸른 하늘이 천이 아니요,

밤하늘의 검은 하늘이 또한 천이 아니요,

또한 우리가 밟을 수 있는 누런 땅이 또한 땅이 아니고,

여기서 쓰는 천과 지라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구성하는 근본요소로써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이 무엇인가 지가 무엇인가에 앞서서 천은 내 속에 있으면서 내 속에 가두어지지 않는 무엇.

내 속에 있는 사람 또는 만물 속에 가두어져 있는 무한히 자유로운 무엇.

우주어디에도 꽉 차도록 있는 그 자유로운 무엇,

땅은 그것을 가두는 무엇,

그러므로

가둠과 한없이 자유로운 그 열림의 결합으로써 천지를 이해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으로만 한정을 지으면.

사람 속의 하늘은,

사람의 몸에 가두어지지 않는 한없이 넓은 무엇이고

사람 속에 있는 땅은 그 한없이 열려있는 자유로운 그 무엇인가에 하늘이라고 하는

그것을 가두는 틀이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는 열림과 가둠의 통일로써 말미암아 형체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개성이 그리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보편성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열림과 가둠,

이것으로써 또 하나의 개념을 바꾸어 쓰겠습니다.

 

천지라는 개념으로부터 시작했고 천지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매우 단순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식으로써는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식이었겠지만,

그리고 그것을 오늘 하나의 정의로써만 먼저 열림과 가둠으로써만 먼저 한 측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안과 반 그리고 수의

 

이것이 안반수의경으로 넘어가는 하나는 안이요, 하나는 반입니다.

 

물론 안은 아나라는 말의 줄임말이고 반은 바나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림은 가둠 속에 즉 그 가둠으로 말미암아서 그 틀을 유지하고 있는 주인이니,

어떤 만상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고, 또 하나는 그 만상의 껍질이 되는 것이죠.

뒤집어 말하면 주종의 관계가 됨의 동시에 안과 밖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 한번 안반수의에서 안과 반을 살펴보면

안은 자신의 주체적인 안이요 반은 자신의 주체를 가두고 있는 틀로서의 밖인 것입니다.

이것이 안반수의경에서 제일 처음에 안반을 여러 각도로 풀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늘 하나로, 묶여서 틀을 유지함으로써 모든 존재는 실존한다는 겁니다.

즉 이 아우름, 또는 이 아우름의 길, 아우름의 체계, 그 아우름을 따르는 것,

그것이 안반수의에서는 이른 바 수의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먼저 안반과 수의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안반수의는 이와 같은 간단한 방식이 한없이

복잡하고도 실천적인 강령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에 담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아우름,

이 아우름은 어쩌면 따라서 밖으로도 쏠리지 아니하며 안으로도 쏠리지 아니해서

안이 안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밖이 밖으로서 제 역할을 해서

안과 밖이 별개의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한 경계점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경에서 수의를 말하기를 그것은 길을 따르는 것, 즉 외줄타기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자기 존재의 유일한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살아가야 될 가장 알맞고 마땅한 길,

불교에서만 이와 같은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동양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에서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학으로 간다면 이 아우름은 바로 아우름이라는 그 자체,

어떠한 존재가 이처럼 수의를 해내는 일, 그것을 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인이라는 것은 내 외부에 있는 사물과 아우러져서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기 전에

내 속에서부터 하나됨을 이루어야만 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외부로부터 공존하는 것을 일러서 인이라 합니까, 인이라 합니까,

아무리 물어도 공자는 인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차마 말로써 표현하기 힘든 그 내부의 하나됨, 아우름에 그 수의를 일러서 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 아우름의 길인가 아닌가 하는 그 판단,

무엇이 아우름인가 아닌가 즉 아우름이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말에서는 알맞음입니다.

 

알맞음이 현실화되어 있는 모습이 아우름입니다.

이 알맞음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이 유학에서 말한다면 의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알맞은가 하는 알맞음의 체계를 스스로 가지는 것 그것을 일러서 앎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른바 아우름이니 옳음이니 앎이니 하는 것은 다 같은 개념의 뿌리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그것들이 한자로 가서는 인이 되었던,

의가 되었던,

지가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던 간에 그 근본에서는 이처럼 아우름,

이 아우름은 한편으로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이 아우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안과 밖. 이것이 아울러 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안을, 때로는 밖을 지키고 버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우름은 현실적으로 지킴과 버림의 합일체계인 것입니다.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버릴 것인가.

지킴과 버림의 하나됨의 과정으로서 아우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수의입니다.

 

그리고 안과 밖의 문제에 이르면은 이 안은 실제 나의 삶이요.

나를 살게 하는 그 무엇이요

이것은 나를 살게 하는 그 틀을 담고 있지만 나의 죽음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열림으로 말미암아 삶이 유지되고 가둠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올지니

모든 생멸 따라서 안은 삶이요 반은 죽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첫 번 째 안반수의경의 제일 첫 정의에서도 안은 몇 가지만 여기서 읽어보면은요

보실 것은 굳이 없구요.

 

안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안이라고 하는 것은 삶이요 반이라고 하는 것은 멸이니,

수의라고 하는 것을 길을 따름이요,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길을 따름을 말함이다.

 

수라고 하는 것은 그 길을 말함이요 안은 수요, 반은 따름이니, 이때 수라고 하는 개념이 또 나옵니다.

이 수라는 개념이 현대 안반수의의 체계에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안은 수요, 반은 거기에 따름이니, 이 수의 대해서 수를 수로만 인식하는 데에서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함께 음부경을 공부했던 분들은 수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 결코 수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수 속에 담긴 것은 존재의 실질적인 개념을 포함하는 것임을 생각했을 겁니다.

 

그 문제를 조금 구체적으로 풀어가는 기회가 물론 안반수의 속에서 있어야만 하고

그것을 풀지 않으면 안반수의를 제대로 못 보니까 반드시 겪을 과정이겠습니다만

안반수의에서 안을 수로 반을 그렇게 따름으로 보았던 것도 있습니다.

 

또 안이라는 것은 실존함이요 반이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음이니, 이렇게도 정의합니다.

 

껍질이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음이요 안이라는 것은 실존함이니

실제 이 아나와 바나라는 말의 아리아적 어원을 살피면

아나는 우리말로 안이요 바나는 우리말로 밖입니다.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나와 바나, 그리고 아나와 바나의 아우름으로써의 그 알맞음으로써의 수의,

그것에 대한 방법론과 그것에 대한 인식의 제 체계를 정리한 경전이 안반수의경입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경은 실제 불교의 대승적 수행에서 필수적인 교재이고 불교에서의

필수적인 교재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류가 발견한 가장 엄밀한 수행의 체계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가장 엄밀한 수행의 체계란 말은 뒤집어 말하면은

인류가 기술할 것 가운데에서 가장 엄밀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관신법(觀身法)

 

사람의 몸에 대해서

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앞서 있었던 부분을 가지고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인체론을 먼저 살펴야만 하는 이유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세가지를 본다.

 

그래서 첫 번째는 몸에 있는 네 가지의 빛깔을 본다,

빛을 본다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생사를 본다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판본에 따르면은 생멸이라고 되어 있는데 생멸이 한자로는 훨씬 옳은 번역이 됩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는 아홉 갈래의 길을 본다.

이것은 우리 인체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체의 머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 인체의 가슴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 인체의 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가지로 통일시키면 뭐겠습니까.

 

이것은 관신, 몸을 보는 관신의 체계입니다.

그래서 171페이지에서 분명히 그것을 관신이라고 했습니다.

몸을 보되 신관법, 관신법중에서 세 가지 분야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고 지수화풍 사대라 하고,

이것을 일러서 전체 생사라 하고,

이것을 일러서 여러 공간의 아홉 가지 갈래라고 말하면은

이것은 수행으로 연결되지 않는 하나의 주장에 그치고 맙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으로 조금 돌아가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아우름으로서 사람이 있고 삶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서 결국은 운행의 체계가 있을 테니까요 시스템이 있을 테니까.

 

신(身)이라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신은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체(體)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체라고 할 때 체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해부를 해서 찢어발겨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체의 운행시스템을 말하는 겁니다.

 

요 근래 논어 강의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거기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 기준에 따라서 내 몸을 돌이켜 본다.

그러면서 남을 위해서 일을 꾀함에 있어서 내 마음을 다 채우지 못하진 않았던가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함에 있어서

나와 그의 연결고리를 확실하게 잡고 있었던가 믿음을 갖고 있었던가

그리고 또한 내가 익히지 못한 전해진 것을 익히지 않고 버리지 않았던가

등 세 가지 기준에 따라서 신을 내 몸을 돌이켜 본다고 했습니다.

 

이 몸은 바로 체가 아닌 겁니다.

몸이라고 번역하면은 한편 맞기도 하지만 우리가 현대에서 쓰는 개념으로 치면 몸이 아닌 거죠.

현재에는 몸이라는 개념을 몸뚱이로 쓰고 있잖아요.

몸이라고 말하면서 실제 몸뚱이를 가리키잖아요.

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는 뮈욤이 되거든요.

뮈욤이라는 고어가 거쳐서 거쳐서 몸이 된 것이란 이야깁니다.

 

이 뮈욤이란 것은 그 동사형은 뮈다에요.

움직이다.

움직이되,

다른 것이 어떤 힘을 걸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타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자기발전력에 의해서 무언가 움직여 주고 있는 것을 뮈다라고 합니다.

 

꽃이 있으면 물을 줘서 꽃을 크게 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꽃은 그 꽃의 본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그 꽃의 본성적 실현을 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의 동명사형이 뮈욤입니다.

움직임.

즉 움직임이죠 그 자체가. movement의 시스템이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란 것은 예전에 자신의 처신을 돌이켜 본다든가 할 때 신을 씁니다.

따라서 이 신은 그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운행의 체계인 것이고 체는 그 덩어리가 됩니다.

그 질료가 됩니다.

이러한 신이 생기는데 이러한 신은 바로 이 두 가지의 하나됨에 의해서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운데 하늘은 앞서 말했듯이 무한히 자유로운,

그리고 나의 내부를 구성하는 그 무엇이고 땅은 그것을 가두는 그리고 내 밖의 어떤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편으로는 작은 천지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일러 말하기를 하늘이라고도 하는 겁니다.

사람이 곧 천지이면서 인내천지이면서 곧 인내천이 되는 까닭은 주체를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은 구체적으로 내 운행체계 속에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움직임의 system of movement가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 과정을 살피는 것이 안반수의경의 상편입니다.

 

실질적으로.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움직임으로써 이 아우름을 실현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서 가둠을 뚫고 열림으로 죽임을 깨고 삶으로 나아가는 길에 들어설 것인가 하는

실천방법론이 하편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 상편 자체의 내용이 인간론에 있기 때문에

그 인간론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들을 먼저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이야기를 쉽게 하나만 해보겠습니다.

실제 사람의 몸 속에서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 자세하게 왜 그런지는 차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사람의 머리 속에는 하늘 화 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작게 보면 넷이요 크게 보면 넷의 두 쌍입니다.

이 네 쌍, 아니 네 개의 두 쌍, 그 빛을 보는 것 신관의 첫째요.

 

이 아홉 길은

땅이 가둠을 위해서 사람의 신체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하늘을 가둠으로 말미암아서 가두는 틀,

가두게 된 체제,

가두어진 체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체제가 실제 아홉 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홉 길과 네 개의 빛은

서로 연결되고 말고 함으로써 몸이 움직이고 아니 움직이고가 결정됩니다.

 

생멸은 바로 가슴에서의 문제입니다.

가슴에서는 실제 이것들이 이어지고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이어지지 못하고 멸하면은

상하가 위와 아래가 교통하지 아니해서 그로 말미암은 인과를 받게 됩니다.

몸의 구체적인 인과를 받게 됩니다.

또 그것이 이어지게, 멸과 통합되지 않고 생으로만 치달았을 적에는 이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아홉 길이 지나치게 강화되어서 수행을 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더욱 더 견고한 가둠의 세계에 빠지거나, 기력을 축적한다거나 등의 일방통행 편향의 길을 걷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것을 지나치게 소비하는 결과를 갖고 오게 됩니다.

 

이른바 상이 성하고 하가 허하게 되거나 하가 지나치게 성하고 상이 소략하게 되는

그와 같은 결과들을 빚어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결과들이 빚어지지 않는 신관.

그러한 몸의 체제를 스스로 보는 것.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에 앞서서 171페이지에 그 이야기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인체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갈 때는 이것은 제가 너무 단순하게 드렸습니다.

이것이 얼마만큼 정밀한 인식체계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은 차츰차츰 확인해 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주제로써 던졌습니다.

 다만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이 몸이라는 것은 몸의 질료인 뚱이가 아닌 겁니다.

몸뚱이가 아닌 겁니다.

이 뚱이가 아닌 몸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스스로 그 몸을 보았을 때만 그 몸의 길과 그 몸으로 말미암은 열림과 가둠의 조화.

아우름 그 수의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체계를 일러서 말씀을 드린 것이고,

이제 인체론 일반부분으로 좀 들어가겠습니다.

 

첫날이어서 이야기가

이모저모 좀 반복되고 어렵게 진행되는 점이 있더라도 양해를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만큼 설익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안반수의경 자체의 내용이 소략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들이 아실테니까.

안반수의에서 수의를 결정짓는 이 외줄타기라고 하는 수의를 결정짓는

가장 마지막 개념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개념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안반수의에 있어서 수의의 가장 완전한 표현은 사랑입니다.

수의는 사랑입니다.

수의의 사랑은 일상적인 사랑과 다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사랑,

그것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

이런 것도 수의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수의에서 말하는 사랑은 부처님에 대한 사랑,

예수님에 대한 사랑,

스승과 부모에 대한 사랑 등의 개념과도 다릅니다.

이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정입니다.

참된 의미의 유일한 동정입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나의 뿌리가 어디고, 이 뿌리로부터 모든 것이 나뉘어져오고 있고, 그 뿌리 가운데 내가 생겨났고 그리고 끊임없이 또 생겨나고 있고 또 멸하고 있고 이것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우주. 이 우주의 한 중심.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한 중심. 빛마저 없는 한 중심, 하늘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한 중심. 한중심 하고 있는 그것을 그 한중심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교의 말로 하면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을 진정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 생명을 내려주고 있을 때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사랑이라는 개념 조차도 없이 그렇게 하고 있는 우주의 한 중심에 대하여 내가 그것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것이 안반수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은 뿌리가 곧 나의 진정한 뿌리라는 것을 보고 확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진정 이 뿌리로부터 왔으며 이 뿌리는 진정 비유컨대 나의 아버지라고 여겼을 때 그 아버지가 우주에 대하여 그만큼 고난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 그만큼 쉬지 않고 모든 것을 뱉어내고 있다는 것. 그 과정 그러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쓰다달다가 없다는 것 그러한 뿌리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고 내가 그 짐을 나누어지며 그것을 대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안반수의의 수의입니다.

따라서 수의의 본 의미의 사랑은 우주가 마침내 뿌리가 없이 그 전체가 뿌리로 되는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실현, 그 방법, 그 체계 그것을, 아주 엄밀한 이론적 체계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안반수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얼마만큼 여러분과 허심탄회하게 나눠갈 수 있을지 저는 제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다만 안반수의에서 말하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함께 나눠보고 싶은 그 자세로써 열 두 번을 끝까지 나누려고 할 따름입니다.

 

빛과 닷

 

이와 같은 뿌리를 고대 세계에서는, 그 고대세계를 동서로 나누지도 않겠습니다.

종족별로 나누지도 않겠습니다.

비유 하자면은 구약과 마주쳐서 비유를 하겠습니다.

 

바벨탑이 무너지기 이전까지는

모든 세계의 개념이 같고 언어가 같다는 그 비유를 진실인양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 개념에서 고대세계에서는 그 인간들의 인체관념에서는

이 뿌리를 오늘날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되겠지만, 무언가의 근원적 빛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한국인의 개념으로 돌리면은 그것을 하라라고 불렀습니다.

이 하라로부터 모든 것이 하나하나 풀려나오는 과정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풀려나오는 과정들을 담은 그 개념들이 이른바 수의입니다.

하라가 하나가 아니요 둘이 그림의 둘이 아니요 셋이 눈으로 확인하는 셋이 아니라

하나가 말하는 개념이 있고 둘이 말하는 개념들이 있었던 겁니다.

 

수에는 그러므로 이 수에는 오늘날의 수학에서 쓰는 약속으로서의 수 외에

어떠한 문화에서나 고대 세계에서는 수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아홉 개의 수의 체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개의 체계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나가는 이 체계는 아홉 개의 수의 체계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쓰고 있는 일이삼사도 아홉가지 수의 체계 가운데서 하나이고

그 각각의 아홉 개의 체계는 독특한 개념들로 설정된 약속들입니다.

물론 가장 원시적인 체계에서부터 가장 고도한 체계까지. 그러한 것은 차츰 뒤에서 나올테니까요 수에서.

 

어쨌든 그 뿌리를 하라라고 여겼습니다.

그 하라야 말로 나의 안이며 그리고 나의 진정한 우주적 자유를 증명해 주는 열림의 근거이며 또한

실질적으로 나의 뿌리로서 나의 아비이며 어미는 좀 개념이 다른데요

어찌 다른지 모르니까 같이 쓰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에서 먼저 하라를 설정하고 이 하라가 여하한 과정.

지금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수라는 과정의 변환을 거쳐서 무엇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땅이라고 하는 닷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앞서 말한대로 가둠이요 죽임이요 그리고 주인이 아니라 바깥의 손님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빛과 닷의 결합으로서 몸을 이야기를 해오는

고대의 사람들의 인체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이 개념에서 주의할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과 닷이라는 두 개의 개념을 두 개의 독립된 개념으로 이해하면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빛은 때로는 반닷으로 존재하고 닷은 때로는 반빛으로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안반이 수의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풀기 위한 하나의 숙제를 던져볼까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미움도 일어나고 슬픔도 일어나고 그리고 편안함도 고통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어떤 감각도 음심도 일어나고 심지어 모든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어떤 마음도 아주 차운 얼음물속에 몸을 담그면 모두 사그러듭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자신의 몸을

인신 소신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소신공양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잡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재입니다.

이것은 경험으로써 말씀드릴 수 있는 실재입니다.

그러나 얼음물속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닷과 반닷의 관계라는 면에서

다음시간에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만은 어쨌든 이런 숙제를 한번 던져놓고,

빛과 닷의 결합으로써

하나는 가두고 하나는 안에서 끊임없이 열려고 하는 끊임없이 열어서 자유로워 지려고 하는,

끊임없이 닫으려고 하는.

그 두 개의 결합으로써,

그 적당선에서 각 존재는 자기 나름의 알맞음으로 얻고 있는 겁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오셔서

그 어떤 모임의 진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세가지 적게 하는 운동을 이야기 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3적 운동이라고 그러길래 저는 적이 무슨 한자인지 알고 무슨 뜻입니까 했는데,

알고보니까 적게라고 그래요.

제가 지금 기억은 제대로 못하는데,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버리기 이런 걸겁니다.

적게 쓰고 적게 버리기 이거는 확실한데 적게 먹는 것은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적게 먹느냐는 거에요.

결국은 중요한 것은 적게도 많게도 아닌 알맞음이에요.

알맞음을 추구하다 보니까.

현재의 과제가 실천적으로 적게는 될 수 있습니다.

 

적게 적게.

그것은 본질은 아닙니다.

적음도 알맞음에 지나치지 않는 적음이면 크나큰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각 존재는 이 결합관계의 숫적인 의미 그 과학적인 의미

복잡하고도 앞으로 3시간 정도에 이야기 해야될 수에 대한 의미.

이 의미에 의해서 나름대로의 알맞음을 얻습니다.

즉 나름의 운행체계를 얻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안반수의는 철저하게 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왜.

사람의 수행을 위해서 만들어진.

그리고 사람의 수행을 위해서 서술된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반수의에서 나오는 알맞음,

그 몸에 대한 견해는 구체적으로는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안반수의의 체계를 먼저 살펴보면은요.

우리의 몸이 이처럼 결합되어서 알맞음을 추구해서 그 알맞음 가운데의 하나로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쓰는 사람이라는 말하고 인간이라는 말하고는 다르지요.

한자고 우리말인 것이 아니라 실제 인과 인간이 다르지요.

 

인이라는 것은 이 알맞음으로써 존재하는 그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둘의 사이에서 존재하고 있는 그것을 말합니다.

 

안과 밖의,

안과 반의,

열림과 가둠의,

생과 사의 사이에서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그 간극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 사이에서 간극의 정도에 따라서 그 간극을 유지하기 위한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가 됩니다.

생명의 긴장감이 유지가 됩니다.

그것이 각각의 동물들에게 주어진 운행의 체계와 운행의 한계를 결정짓습니다.

그것이 각각의 존재의 또한 지적인 능력을 결정짓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긴장도를 유지하는 지적인 능력을 간지(奸知)라고 그럽니다.

간지는 간사한 지혜일 뿐만 아니라 단순한 알음알이일뿐만 아니라

그것은 빛과 닷의 하라와 땅의 사이를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는 어떠한 힘을 말합니다.

이것이 극도로 멀어지면 멀어져서 그 알맞음이 상실되면 상실될수록

그 나름의 알맞음이 상실되면 상실될수록 열림과 가둠의 통일이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그 긴장감은 높아집니다.

마침내는 끊어지게 됩니다.

한쪽 편향성을 보이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그와 같은 편향성에서

그 긴장감이 최고조로 되어 있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는 끊어져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안반수의는 먼저 그 첫째 장에서

사람이 이와 같은 알맞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을 말하고 상편의 중간 부분에 이르면 책으로,

나누어드린 것으로 보면은 164페이지, 두 번 째 단, 중간에 문단이 끝납니다.

그리고 수식위 사위지가 되어 있는데 거기서부터는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몸을 굴리는가,

인간은 수행을 하던 말던 어떻게 자신의 몸을 굴려가는 존재인가.

인간의 운행체계는 기본적으로 어떠한가,

하는 조..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인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수식관(數息觀)

 

그러면서 그 인간 몸의 운행의 당위, 주체, 이 두 가지 면으로서 선택된 개념이,

단어가 의(意)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뜻이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뜻 의, 뜻 지. 전혀 상관없는 서로 다른 개념들입니다.

의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러 가지로 표현해도

그 어느 것도 정확하게 그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의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최소한의 시간단위. 인간의 개념인 이상.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시간단위. 그 시간단위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을 이름하여 찰나라고 해보겠습니다.

 

그 찰나는 시간단위로서 더 이상 인간이라는 운행의 체계에서는

분해할 수 없는 인간다운 무언가가 무언가의 아우름이 실려있는 단위입니다.

 

빛과 닷이 결합되어서 그 결합이 해체되지 않고 운행될 수 있는

인간 속에서의 최소시간단위를 일러서 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아우름의 주체를 일러서 또한 의라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 한국의 말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것을 일러서 홀이라고 합니다.

홀짝할 때의 홀입니다.

 

이것이 선분적인 개념으로 쌓여서 마침내

하나의 의지적인 의식적인 작용으로 되면은 그것을 일러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지라고 할 때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이 홀이라는 개념은 빛과 닷이 즉 천과 지가 결합이 해체되지 않는 선에서,

알맞음을 유지하는 선에서 어울림을 유지하는 선에서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의 시간단위.

동시에 또 다른 개념으로 실천 수행상으로 가게 되면은 인간의 몸에서 하나의 네 쌍의 빛이.

즉 여덟 빛이 한편으로는.

한편으로는 네 개의 빛이 네 쌍의 빛이 인간전체를 감싸면서 순환하는 순환의 시간단위.

 

예를 들어서 머리만 한정짓고. 그럴 수 없습니다만.

머리속에서 그 빛의 체계들이 끊이지 않고 순환하는 원의 체계를 그리고 있다면은

이 원이 그려지고 있는 최소의 단위가 또한 일치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는 것, 그것을 볼 수 있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보는 거죠.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을 수식관이라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안반수의에서 말하는 수식관입니다.

 

수식관 중에서 수식의 근거가 되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165페이지에 있었구요.

그 다음에 165페이지의 제일 하단의 마지막 끊어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문하등십육사(問何等爲十六事)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부터는

왜 홀이 들고 홀의 작용이 홀의 작용 여하에 따라서는 왜 이것이 수의가 외줄타기일 수밖에 없는가.

왜 수의는 유일한 한길일 수밖에 없는가.

모든 것이 그 진실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의 이미지로 말미암아 결정되는 그러한 시대에서 여전히 수의는 한길일 수밖에 없는 이유.

실상으로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이유와 그 이유가 성립되지 않았을 때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편입니다.

 

이제 그럼 하편에서는 해 봐야겠죠.

해봐야 되는데 무엇부터 할 것인가.

이 중간운행부터 할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안반수의의 하 편의 첫 부분은 어떻게 하면 내 몸속의 닷을 일굴것인가,

하는 닷의 개발 실천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 몸 속에 있는 열림과 가둠이 있다면 이 가둠 자체를 어떻게 내 임의대로 움직여 볼 건가 하는

닷에 대해서 진정 빛이 진정 하라가 땅에 대해서 하늘이 진정 주인으로 서기 위한 연습으로서

닷을 부리는 과정.

그 실천방법론이 하편의 처음에서 제시됩니다.

 

다음,

이제 이 닷의 두 번째 단계에서 169페이지의 중단 일곱째줄부터

안반수의유18뇌(安般守意有十八惱)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닷을 이 닷이라는 가둠을 이 밖을 어떻게 열림을 위해

쓸 수 있는 무기로 열림의 방편으로 전환시켜 볼 것 있는가 하는 문제가 실천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간단하게 말하면 이 닷을 어떻게 해서 나의 고치로 만들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어찌함으로 해서 이 닷을 나의 가둠의 굴레가 아닌 새로운 나를 위한

고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하는 고치로의 전환과 관련된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땅을 어떻게 하고 하는 방법들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이 닷을 가둠의 굴레가 아닌 새로운 탄생을 위한 가둠의 장치로써 전환하기 위해서

또는 전환하는 과정 속에서 마침내 나는 나의 실체를 봐야 되고 실체를 보는 방법과 갈래는 무엇이 있다

하는 것을 171페이지 중단 제일 끝에 유시자신관(有時自身觀)이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자신을 살피는 이것을 실천의 가장 중요한 아우름을 완전한 방법으로

실천하기 위한 자기재탄생의 이론적 체계이자 방편이 되는 부분입니다.

안반수의의 실질적인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경의 모든 부분이 모두 그렇듯이 마지막에 약간의 그침, 종결구가 있습니다.

그 종결구를 굳이 하나의 단락으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를 이야기해 가되 실제로는 171페이지,

중단의 유시자신관 불관타인신(不觀他人身)하는

그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앞의 부분과 연결을 지으면서 왔다갔다 할 겁니다.

그리고 본문에 있는 한자는 전혀 읽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개념적 도구를 쓰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개념도구를 막 빌려와서 하다보면은 쓰러져요.

그리고 제가 말을 하면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면서 말하면서 쓰는 약속이 있습니다.

 

저는 ..의..의..의 하는 연결방법을 쓰지 않겠습니다.

왜 . 개념도구를 쓰지 않겠다는 겁니다.

한국의 청년의 현재의 상태, 이렇게 안 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여기서 개념이 벌써 혼동이 와버려요.

그리고 하나 하나의 개념도구들이 동원이 되야만

마침내 설명하고자 하는 한 단어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 시간에는 체계를 잡지 않고 말씀을 드리기 때문에 조금 어려운 이야기,

어수선한 이야기도 드렸습니다만은.

다음 시간부터는 그냥 동네 미루나무 밑에서

자신의 몸을 놓고 이야기하듯이 차근차근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하나하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눈빛속으로

저랑 같이 느낌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하나의 판소리와도 같은 마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마당에서 제가 선소리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추임새를 받아가면서 계속 동네 이야기마당같이 해 나가겠습니다.

제 힘이 있는 한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처음이어서 이야기를 어떻게 드릴까 사실 저도 걱정이 많이 됐었습니다.

 

안반수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사실은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안반수의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많은 견해를 내놓으셨더라면은

저도 그 견해에 대충 등도 기대고 손도 붙잡고 칡넝쿨 붙잡듯 슬금 슬금 기대가면서 가면 될 것인데,

번역을 해 놓은 것이 있고 풀어놓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만은

제가 보건대는 그렇게는 참조할 말한 것이 못 됩니다.

그저 결례가 되는,

그것을 읽고 그것이 참 좋은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어서 결례의 말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처음으로 안반수의를 이야기하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조심스럽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될지 난감한 부분이 많았는데,

아무튼 다음시간에는 안과 반의 정의,

그리고 안과 반의 정의로부터 자신의 몸 속에서 안과 반을 느끼는 자기 자신과의 과정,

그런 것을 한번 나눠보도록 아무쪼록 애를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여러분들에게 안이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지고,

그 가둠이 고치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찾아졌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시작이 됐습니다만 좀 일찍 줄이고자 합니다.

일찍 줄여서 죄송합니다만은 많이 떠든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어쨌든 다음 시간부터는 이야기 하듯이

차근차근 예전에 제가 어릴 적에 선생님께 이야기 들었듯이

아침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 듣고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쌓이다 보니까, 어느새 내 몸이 보이는 그 과정을 짧은 시간,

말도 안되게 짧은 시간에서 나마 거듭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선생님에게서 아끼지 않고 들었던 것처럼 저도 또한 그렇게 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한편으로

제가 너무나도 게으르기 때문에 여러분과의 사이에서 드리는 약속일 수도 있습니다.

이 약속을 무겁게 여기고 중히 여기고 무겁게 여기고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인연이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1.3.8.목.서울)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2)

 

無相不相, 不相無相

 

불교 초기 경전에 나오는 글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이 이야기로서 오늘 이야기를 매듭짓겠습니다.

무상불상하고 불상무상하고, 이것이 바로 實相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 번역되어 있는 국역 대장경에 의하면은

 

"상이 없으니 상이 아니요, 상이 아니니 상이 없는 것. 이것이 실상이다."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경전에 나오는 이 부분을 수행으로 연결시켜보지 못한데서 나온 해석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한문 번역들이 흔히 저지르고 있는 일반적인 오역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아닐 불(不)이라는 것은 부정을 하되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사입니다.

그리고 동사가 아닌 어떤 정의라든가 체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비(非)가 쓰입니다.

 

도덕경에도 "道可道면 非常道"라는 말이 첫구절에 나오는데,

이 가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동사를 도와주는 조동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있는 것은 동사 또는 동사가 생략된 형태입니다.

그리고 비(非)라는 것이 왔기 때문에 불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항상적인 도가 되는 것입니다.

 

상(常)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늘 있는 것,

항(恒)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으로 늘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비항도가 아니라 비상도가 됩니다.

 

모든 번역은 한 번 뒤집어 봐야 됩니다.

 

"도는 도라고 할 수 있지만 늘 도라고 할 필요가 없다"

 

를 다시 한자로 하면, 도는 가도이지만 不必可道가 됩니다.

 

이렇게 다시 한문으로 작문된 것은 그렇게 푸는 것이 맞습니다.

 바로 그 잘못된 것이 국역 대장경에도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상이 없으니 상이 아닌 게 아닌 겁니다.

그리고 상이 아니니 상이 없다도 아니라는 겁니다.

 

"상이 없음에 상을 짓지 아니하고, 상을 짓지 아니하니 상이 없어지더라",

"애초 모든 것이 상이 없음에 그 모습에 따라서 내가 상을 짓지 아니할 것이요.

상을 짓지 아니하니 마침내 상이 없어지더라."

 

결국은 안반수의의 경전도 금강경도 모든 불교의 경전은 바로 무상을 실상으로 하고,

무상이 있음에 사람은 상을 짓지 말고 원래의 실상을 따를 것을 말하고 ,

실상에 따라서 삶을 사니 실상으로 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상이 없으니 상을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요.

상을 짓지 않으니 어쨌든 생겨났던 수많은 상이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상을 짓지 않음으로써 상이 없는데 이르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불교 경전의 모든 방법론이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못 번역 해 놓고 나면 철학의 모호한 영역으로 넘어가서 말장난으로 떨어지는 수가 많습니다. 실제로 그로말미암아서 말장난이 된 경우가 적지 않고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상을 짓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상이 없는 상태는 어떠한 상태인가?

상이 없는 것은 이러한 것이니라,

상을 짓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라라는 것을 수많은 말씀으로 남긴 것,

그것이 경전입니다.

경전은 쉽게 보면 간단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안반수의경은 그 가운데서 상을 짓지 아니함을,

바로 아니 불(不)자 뒤에 상이 오면 이것을 동사로 볼 것인지 아니면 동사가 생략된 것이든지,

부작상이든지.

이것이 짓다,

뭐뭐하다에 해당하기 때문에 영어로는 하다에 해당하는 행위가 되지요.

물론 여기에 대신 올 수 있는 동사로 행(行자)도 올 수 있을 것 같고,

위(爲자)도 올 수 있을 것 같지만은 다 부적당한 동사지요.

사실은 작자도 정확한 동사도 아니지요.

 

그래서 오히려 동사를 생략시켜줌으로써

동사가 아닌 명사로 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때에는 과감하게 동사를 생략합니다.

 

아무튼 안반수의는 어떻게 하면 상을 짓지 않을까 하는 방법을,

그리고 굳이 그것과 짝을 이룬다면 금강경이 될 텐데요.

금강경은 어느 것이 과연 상 없는 실상인가를 나누어서

각각 설하고 있는 말로된 문자와 언어와 소리로 되어 있는 일종의 진법 체계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은 그 자체로서 주술입니다.

우리의 세계가 또한 우리를 살고 있게 하는 무대이지만 동시에 주술입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처럼 다른 사물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신 또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물로부터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즉, 다른 사람은 나에 대하여 주술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실체요.

다른 사물도 다른 세계도 또한 자신에 대하여 주술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체계인 것입니다.

또 실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실체를 굳이 말한다면은

그것이 나름대로의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진법(陣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이라는 것은 굳이 한다면은 군대에서 쓰이는 용례입니다만 좀 넓게 확대해서 쓴다면

그 또한 진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금강경 서른 두품이 모두 진법입니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진법입니다.

안반수의 또한 마찬가집니다.

 

불교 이전의 불교

 

아무튼 안반수의는 거기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문제는 왜 우리가 안반수의를 하면서 우리의 인체론과 연결을 시켜야하는가?

시킬 수 있는 실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불교는 불교의 인체론을 가지고 이야기했을 것이고,

전통 선가의 수행방법은 전통 선가의 인체론을 바탕에 두고 수행 방법을 이야기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결합되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모습의 실상을 이해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이야기하고 있는 불교는 석가모니를 본불로 하고 있는 불교입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으뜸으로 해서 펼쳐놓은 인간 생활의 하나의 양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는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불교이전의 불교.

이 때 불교라는 것은 불이 깨친 이, 또는 깨친 곳, 이런 의미입니다.

깨치다라는 것은 한글로 번역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고 엄밀하게는 밝은이, 밝은 곳입니다.


깨치다라는 것은

밝음으로 나아가는 방편의 하나인 것이고 과정인 것이지 그 자체 부다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것을 불교로 한다면

불교 이전의 불교에 대해서 상당히 논의가 되다가 요즘에 불교 교조주의가 되면서

불교를 순수한 불교의 영역으로 되돌린다는 잘못된 입장으로 말미암아 그 이야기가 쑥들어갔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4층에서 용호비결을 한다고 하니까

어떤 출가하신 분께서는 아니 왜 절에서 용호비결같은 것을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용호비결을 4층에서 한다면 웃고 넘어갈 일이려니와

또 다른 분이 하시기 때문에 제가 짐짓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말한 스님을 한 번 모셔오라고, 절에 가서 산신각 때려 부수고,

절에서 마시는 차도 다 없애고, 조선식으로 있는 가사도 다 없애고.

순수 불교라는 명칭하에서 잘못 들어간 불교 교조주의로 말미암아

불교는 고립무원의 하나의 수행단체로 하나의 지파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보편의 종교이며 보편의 수행법이며 보편의 공부법입니다.

이 보편의 공부법이 교조주의를 만나게 되면 오히려 한 파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한 파로 보지 않고 보편의 공부법으로 본다면

이와같은 불교는 그 나름의 연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원을 바로 불교 이전의 불교로 이야기해 왔던 겁니다.

그래서 불교 이전의 불교가 인도에서는 브라만교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불교 이전의 불교의 모든 모습이 아닙니다.

전체 이 넓은 아시아 권역 전체를 통터는 형태의 불교 이전의 아시아적 제 생활 형태,

거기서 말미암은 인간 본연을 추구하는 제 양식,

그것을 일러서 총괄적으로 불교 이전의 불교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브라만이 그 가운데서 인도적인 불교 이전의 불교이전인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인도에 있었던 불교 이전의 불교가 타락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 타락을 막고 불교 본질을 세워서 불교를 혁신함으로써

보다 원칙적이고 올바른 인간의 근원적 생활양식으로 되돌리려고 한 대스승이 석가모니이신 겁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당연히 그 이전 불교가 있게 마련이죠.

 

그렇다면 다른 아시아적 형태는 없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아시아적 형태가 또한 브라만처럼 이 시기에 타락했을 것이냐하는 문제도 또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지역에서는 그와 같은 타락이 적었습니다.

 

티벳같은 경우만 친다면.

이 경우에는 브라만과 같은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불교 이전의 불교지만

거기에는 타락이 적었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 새롭게 혁신한 불교를 내놓자

이것을 타락한 입장이 아닌 자기 영역을 조금 더 넓히고 구체화시키며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서 새로운 티벳적인 불교가 생깁니다.

그것이 북방밀종입니다.

 

브라만을 거부하고 완전한 개혁 불교만을 중심으로 해서 그 방편에 따라서

공부의 엄밀한 체계를 유지한 것이 이른 바 남방 밀종입니다.

 

그렇다면 북으로 이쪽에는 뭐가 없었을 것이냐?

만주 지역이나 우리 지역이 거기에 해당하겠지요.

거기에는 타락했다는 얘기도 없고, 안 타락했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연구와 관찰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티벳에는 석가모니 사후 일이십년만에 이 개혁불교가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 온전한 모습이 전달되었지만 여기에는 사 오백년의 기간을 두고 전달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육 칠백년이 경과된 것으로 보고,

역사로 확인되기 이전 일이 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오백년 가까이 되어서나 이것이 전달되었던 것이죠.

어쩌면 잘못 전달되었을 수도 있고, 핵심이 아닌 것이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전달된 것이 아무튼 이 정체모를 이름이 붙여지지 아니한,

이름을 잃어 버린 이것과 공존하던 역사적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삼국시대와 우리의 고려시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티벳에서 북방 밀종으로 하나의 독자적인 그러면서도 인간 보편의 양식을 유지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듯이 그렇게 공존과 혼거를 끝내고 통합되어야 하는 하나의 당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성리학에 의해서 시쳇말로 깨박이 난 겁니다.

성리학의 거대한 철학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실로서는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나 과연 통합이 전혀 되지 않았겠는가?

통합의 단초와 빌미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더라는 겁니다.

 

어쨌든 그렇다면은 이 혁신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제3불교,

아니 불교 이후의 불교가 담고 있는 방법론도 근본적으로는 그 취지를 혁신하고 올바르게 밝혔을 뿐,

그 이전부터 있던 수많은 수행법을 전면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것까지 거부했던 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안반수의와 브라만의 수행법에는 근본적인 수행법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만 타락을 해서 그릇되이 사람의 힘만 축적하려고 하거나 사람을 타락의 길로 몰고 가려고 하는

그와 같은 부분을 과감하게 지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체 흐름 속에서 여기에는 남아 있지 않은,

우리는 잘 모르는 부분이 아닌,

여기에는 남아 있는 이 인간론과 이 인간론을 연결시킴으로써 오히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종지를 보다 실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일러서 고려시대 말에 어느 분은 제2불교라고 불렀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교를 제3불교라 보았습니다.

불교 이전의 불교를 또 다르게 둘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잡아함경에는 부처님 스스로 불교 이전의 불교에 대해서 설하고 계십니다.

의연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설하고 있지만 의연경이 번역의 대상조차 안 된 경전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튼 어떤 것이 연원을 서로 같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건만,

또 그리하여서 이 올바른 종지를 지키자면

세상의 바른 것은 다 받아들이되 그것이 어느 하나 삐뚜루 가지 않도록 수의하는 것.

그것이 불교의 대종지인데,

교 교조주의로 가고 있는 상황은 어쩌면 불교를 저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불교는

이와같은 종지 가운데서 타락한 부분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분을 덜어내고 실천할 수 있고,

타락하지 않는 부분을 깃대로 삼아서 제4불교를 창조해야될 시기에 우리는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어쩌면은 우리의 영혼의 생존과 관련지어서 결코 미뤄둘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고치는 일

 

그 이야기를 안반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안반수의에 따르면 그리고 이름 붙여지지 못한 제2불교의 한시기,

동북방 형태의 이야기에 따르면 안반수의를 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상을 짓지 않아야 되는데, 상을 짓지 않고 무상으로 가는 과정을 단 한가지 말이면 족하다 그럽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을 고치는 것입니다.

자신을 고치는 것.

 

제가 재작년에 낸 책에서는 다시 하다라는 말을 임의대로 조어를 한적이 있습니다만

우리말에서 다시는 부사이기 때문에 여기다 붙여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까짓거 개념이 있다면 하면 또 어떻겠습니까.

아무튼 엄밀하게 말하면 고치다입니다.

자신을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 고치는 일이 무엇인가?

 

자신을 고치는 과정에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고치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즉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 반드시 고치를 틀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스스로를 고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고치를 틀어야 합니다.

그것이 고치의 원뜻입니다.

사람은 어찌하여 고치를 틀 것인가?

사람의 고치는 어떻게 상을 갖고 있는가?

 

그 상에 대해서 먼저 실상은 무상이라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편을 지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결국은 여러분이 저한테 말씀하실 것이나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내놓으라는 것은 우왁스럽기 짝이 없는 잘못된 선문답입니다.

그거는 정말로 도를 구경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도에 대해서 깨박치는 이야기입니다.

방편을 내놔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고 싶으면 저 언덕을 내놔라 할 것이 아니라 배를 내놔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배를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가 나눌 이야기이기 때문에 방편을 지어서 실상없는 실상을 말한다면,

이 고치의 실상을 말한다면 여섯 겹의 고치를 이야기합니다.

 

여섯겹의 고치란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가?

이 여섯겹의 고치를 짓고,

여섯겹의 고치가 하나의 고치임을 밝혀가는 실천적 과정이 안반수의에 담겨 있습니다.

여섯 겹의 고치는 각각 양끝에 또 하나의 실체를 담고 있습니다.

 

속에 하나가 있습니다.

여섯겹의 고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이 있습니다.

그 밖은 상없는 한 없이 밝은 것이오.

그 안의 출발점은 한 점 빛조차 없는 완전한 암흑입니다.

그 암흑이 하나요. 완전한 밝음이 둘이요. 나머지 각각이 여섯겹의 고치를 이룹니다.

이 여섯겹의 고치를 통과해야만 완전한 밝음을 이룹니다.

 

이것은 별도의 장벽이 아니라 한꺼번에 이뤄지는 하나의 고치에 여섯겹입니다.

누에 고치가 여러 겹의 실로 되어 있는 것처럼 그것을 쪼개서 여러 개의 실로 쪼갤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여러 겹의 고치가 있으나 그 고치가 여섯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여섯겹의 실체가 무엇인가 안반수의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름 붙이지 아니한 불교 이전의 불교, 동북방 형태의 인체론이 이야기합니다.

 

원래 이 고치 여섯겹, 또는 밖과 안을 친다명 이 여덟은 무엇인가?

그것은 빛이다.

석정광(釋正光)이라고 불리는 것.

또는 석명광(釋明光)이라고 불리는 이것의 실체는 빛인데

이 빛은 그 어디에 들어 있어도 빛이라는 형태를 잃지 않는다.

 

그 빛은 어떤 물체에 들어있던

그가 만나고 있는 껍질에 의해 외형적 모습을 달리할 뿐 영원히 잃지 않는 뿌리가 되는 빛.

그것을 한자로 석정광 또는 석명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실체의 빛.

이것이 실제 나일 것입니다.

방편하여 나의 실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실상속에서도 이 빛은 있나니 이 빛으로 말미암아 나는 한편 구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으로 되었든 아니든 간에 어떠한 형태를 띄고 있을 것이고,

갑이면 갑이라는 형태를 각각 띄고 있을 것이고, 이 갑이라는 형태를 띄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의 원래의 빛, 석명광이 무엇과 만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의 굴레들을, 고치를 열고 나간다는 겁니다.

이 재료들에 의해서 나의 원빛은 나름대로 왜곡, 질곡, 변형되었을 것이고,

이 변형되어서 나를 이루고 있는 이 빛의 올가미를 과감하게 나에게 모아서 뚫고 나아가는 순간,

나는 또 다른 밝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석명광이 덜 왜곡된, 어쩌면 왜곡되지 아니했다고 설정한 그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고치를 틀어야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언급할 바가 아니요,

안반수의가 언급하시고 있는 문제가 아니요,

또한 실천적인 문제에서는 아직 뒷뉘의 문제입니다.

 

제가 오래간만에 홈페이지라는 들어가보니까요.

미래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뭐라고 하느냐는 질문이 하나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분께서 하제가 미래의 우리말이다라고 올렸는데, 우리말이 아닙니다.

미래를 하제라고 쓰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이야기꾼인 백기완 선생이 자주 쓰기도 했고,

또 소리하는 분들도 자주 써서 하제가 우리말인줄로 알고 있는데,

하는 우리말이고 제는 우리말이 아닙니다.

제는 한자어, 국제할 때 쓰이는 때 제자입니다.

 

실제 우리말 때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저기로 가면서 때로는 적이 됩니다.

우리말이 아닙니다.

하라는 것은 길게 소리하면 멀리 있는,

 짧게 소리하면 처음의 하는 뜻입니다.

 

하하면 처음이고 하~하면 멀리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말에는 시간만을 공간과 독립해서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용법이 없습니다.

지난 날을 이야기하든, 다가올 날을 이야기하든 시공간의 합체로서,

실체로서 하나로 보아서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우리말로 '뒷뉘'입니다.

 

그리고 과거는 따라서 '앞뉘'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하나의 무대라면 '뒷뉘'는 아직까지 펼쳐지지 않고 뒤에 있는 누리인 것입니다.

한자로 번역하면 우리말은 미래라는 것 없습니다.

후세가 있을 뿐입니다.

 

앞뉘, 이미 앞에 제껴 봤던 무대, 한 번 열어 봤던 무대.

이런 것들이 홈페이지에 와서 그냥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상을 이해하는 관점에서도

불교적 관점에서도 우리말 관점에서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분리가 없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분리는 만들어 낸 작위적, 철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시간이 있을 수가 없고, 시간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시공간의 합일체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다만 시공간이 합일체되어 있는 실체가 있을 따름입니다.

모든 것은 시간도 공간도 아니오, 시공간의 합일도 아닌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존재에 대한 규정이 얼마나 얼마나 엄밀했나 하는 것을

오늘날의 어부들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어부들에게 가서 근해와 원해를 묻습니다.

어디까지가 원해요, 어디까지가 근해요라고 물으면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답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것의 기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멀리 있는 바다를 난바다라고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바다를 든바다라고 했습니다.

난바다는 제가 문학책에서 용례를 봤지만 든바다는 본적이 없어요.

이게 달하고 상관이 있어요.

달이 끌어 당기잖아요. 물이

달이 끄는대로 주르륵 끌려 올거 아닙니까?

그러면 반대로 지구의 중력이 작용해서 물이 못오게 막겠죠?

물을 지구가 끌어당기는 현실적인 모습은 대기가 누르는 걸로 나타나죠.

그래서 어쨌든 바닷물이 오는데 한계가 있죠.

그래서 밀물이 되면 밀려오는 한계점, 썰물이 되면 밀려가는 한계점이 있는데 그것이 칠십리에요.

이 70리는 곱하기 4KM의 십리가 아니라 고척으로, 옛날 거리로 2KM를 10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14Km. 과거 분들은 이런 것을 기준으로 해서 14Km 안 쪽은 든바다, 그 밖은 난바다라고 했습니다.

 

뭐가 드느냐 뭐가 나느냐에 대한 기준이 분명히 있어요.

이 무엇이라는 건 실체에요.

실체를 갖고 이야기하지, 눈으로 보기에 뭐가 공간적으로 멀더라,

뭐가 공간적으로 가깝더라라는 시간으로부터 분리한 공간으로서 원해, 근해를 안 썼다는 겁니다.

 

모든 걸 실체로 표현한 것이 우리말의 특징입니다.

아니, 동북아시아적, 아시아적 제 표현의 특징들입니다.

모든 것은 주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주체에 대한 이야기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으니까요.

 

안반수의에 따르면 앞에 여러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안은 삶이요, 반은 죽임이며,

(죽음과 죽임은 다르죠, 표준말은 아닙니다만) 그리고 안은 듦이요, 반은 나가는 것이다.

등등 여러 규정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번역해 놓은 (정신세계에서 번역해 놓은 책이 있습니다. 붓다의 호흡과 명상이라는)

거기에서 만약 참고를 하시려면은 잘 보셔야 됩니다.

 

안은 안위 ~요, 반은 위~ 요라고 나오잖아요.

이것을 해석을 안은 A, 반은 B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러면 속는 겁니다.

요것은 안반을 합쳐놓고, 안반은 A함으로써 B한 것으로 해석을 해야만 해석이 맞아들어갑니다.

 

옛문헌에 나오는 많은 용법들이 그렇습니다.

참선이라 그러면 참은 뭐요, 선은 무엇이요 계속 그렇게 나가는 것은 참선은 뭐다,

참선은 이렇다라고 정의를 내려가야만 실제 과거 어른들이 묘사하려고 했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면 안반은 들고 남인데, 이 안이 석정광, 석명광 빛입니다.

 

반은 그 빛이 담긴 닷입니다.

우리말로 땅이 되죠.

땅이라는 것은 흙이 아니라 땅입니다.

땅이라는 것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재료인 것입니다.

단,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누리를 일러서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재료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 땅은 우리의 땅자체를 의미하는 이 누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누리를 편의상 땅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누리가 우리의 닷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누리도 그 자체로서 빛과 닷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실체인 거죠.

우리는 그 실체를 또 다른 닷으로 하면서 빛과 결합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누리를 땅이라고 부르 것이지, 땅이 우리가 생각하는 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흙은 흙이고, 땅은 땅인 겁니다.

 

그런데 이 형태를 쉽게 말하면은

한없이 밝은 빛을 가진 둥근 형상의 옥돌 하나가 진흙 속에 들어와서 푹 박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안반의 결합체인 아우름입니다.

그것이 수의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빛을 드러내느냐 하는 실천적인 문제와 연결될 뿐이죠.

빛이라는 것이 빛의 실체는 어디에 가도 빛을 영원히 잃지 않는 것.

여기에서 말하는 건 우리가 말하는 그 빛이 아니요.

그 어떤 사물로 들어가도 자신을 잃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본질로서의 빛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빛과 닷이 어떤 형태로 결합되느냐에 따라서 실제의 상이 만들어집니다.

이 인간이라는 상이 만들어지죠.

인간은 쉽게 말하면 땅이라는 것 속에 빛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땅 속에 빛이 싹 들어가서 뭔가 하나의 독특한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어떤 닷과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그 빛은 자기 나름의 복잡한 형태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똑같은 땅을 가지고 빛이 결합한다손 치더라도 이 빛 자체가 실질적으로는 다 똑같을 수 없겠지만,

이것마저도 이미 무언가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태초의 빛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똑같은 땅이라 치더라도 달라지죠.

왜?

조금씩은 다 다르니까요.

 

그리고 어떠한 닷과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종자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빛과 닷은 결합 방정식이 존재합니다.

결합 방정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해 방정식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합할 수 있는 것은 분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해할 수 있는 것을 모두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중요한 수행의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

그 자세가 바로 무욕입니다.

 

서향의 철학에서도 분해는 발전되었습니다.

모든 사물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사물을 일단 근본적 성질을 갖는 것으로 끊임없이 분해해 보자고 주장했습니다.

제 끊임없이 분해해 왔습니다.

끊임없이 분해가 되어 분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와서 아무리 분해를 해도 이 실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러자 거기에 대한 반성이 제기 됩니다.

 

뭐 엘리야프로고친 같은 사람은 원시적인 주장을 했습니다만

어쨌든 쪼개지 말고 이제는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한 번 복원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합니다.

복원이 안 되는 거에요.

그들이 분해했던 방식 그대로 역으로 뒤집어서 결합을 해보니까 결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들은 분해를 했던 것이 아니라 갈랐던 거에요.

있는 그대로, 본래 결대로 석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분했던 겁니다.

그들은 쪼개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쪼개지는 대상, 쪼개지는 그 사이도 실체라는 건 생각을 안 한 겁니다.

 

갑이 있으면 그것을 A와 B로 쪼개는 그 쪼개지는 결조차 실체라고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이것은 그냥 비어있는 무엇으로 생각한 겁니다.

이것에 대한 고려가 없는 이상에는 쪼개도 알 수가 없고, 다시 붙일 수도 없습니다.

거기에 들어 있는 중요한 자세가 바로 욕망입니다.

빨리 어떻게든 끌어모으고 빨리 어떻게든 분해를 해서 해결하려는 욕망이 문제가 됩니다.

욕망이란 문제를 제거하지 않으면 이것을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단순한 명제나 자세가 아니라 실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을 넘볼 적에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천부경에 한자로 번역한 데 보면은 (천부경은 당연히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로 되어 있었겠죠)

1은 3으로 석한다 그랬지 3으로 분한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분이라는 것은 그냥 칼 갖고 탁 치는 것을 말합니다.

석은 가만히 둬도 갈라지는 것이 석입니다.

합쳐가지고 그냥 분석이라고 하죠.

따라서 분은 인간의 주관대로, 석은 인간의 주관과 상관없이 원래대로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일중수라고 하기보다는 이일석수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한자식 번역이 됩니다.

어쨌든 이와 같은 결합의 방정식이 있으면 분해의 방정식이 있고,

분해와 결합을 임의대로 할 수 있을 때 자신은 제 빛으로서의 주체를 세운 것입니다.

이 빛과 닷을 결합하여 자기 나름대로 결합하는 방정식에 따라서 실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른 바 염체를 만드느니 유체를 만드느니 하는 것이 별 것이 아닙니다.

화학 공식처럼 빛과 닷을 결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 이렇게 결합을 하자면 먼저 결합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결합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객이 떠나 있는 해체를 해봐야만 합니다.

영과 육의, 빛과 닷의 분해를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분해를 통해서

분해의 방정식을 적용받고 그 적용된 방정식으로 임의대로 자신을 다시 결합할 수도 있는 것.

그것은 매우 단순한 방정식이고 그 방정식의 원리입니다.

 

그와 같은 방정식에서 모든 사물은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도 알게 모르게 그와 같은 방정식에서 사물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 사물에서 단하나 있는 빛을 제거한다면 이것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는 종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어떤 빛도 닷을 가지지 않는다면 실상을 가질 수 없는 무엇으로 남게 됩니다.

 

안과 반이 어떤 것인가?

안과 반이 어떻게 결합되며 분해되는가 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설명해놨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공부로 이끌어 드리려는 하나의 권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몇 일전에 찾아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차를 마시는 제 방의 뒤에 반야심경이 쓰여 있는 병풍이 쳐있습니다.

호화롭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어느 연세 드신 분이 같이 있던 분들한테 말씀하셨습니다.

반야심경을 보자하니

오온이 개공임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해를 지났다한 것에 모든 이야기는 끝났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안반수의경도 간단하죠.

안반수의경이 필요한게 아니라 안반수의 하거라 하면 끝나 버릴텐데.

안반수의 하거라 해서 안 되니까 조금 더 쉽게,

그래도 안 되니까 조금 더 쉽게, 또 안 되니까 좀 더 쉽게,

반야심경은 그렇게 네 단계로 나눠져 있지 않는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단계인지 세 단계인지 몰라도 엄밀하게 그렇습니다.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설하신 모든 경전이 그처럼 이뤄져있습니다.

금강경도 마찬가집니다.

금강경도

 

"이 때가 밥 때라

세존께서 사위대 성에 들어가셔서 차레 차레 집을 돌며 밥을 빌으시고

다시 그 밥을 갖고 거처로 돌아오셔서 밥을 다 드시고

손발 닦으시고 다리를 틀고 앉으셨다"

 

그것이 전부 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안 되니까, 하는 수없이 장로 수보리의 질문을 기회로 삼아서 다음 단계, 좀 쉬운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쉽고 쉽고, 어렵고 쉽고를 반복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진법의 역할을 하도록 경전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것도 제가 힘이 닿는다면

그와 같은 세계 속으로 여러분을 최대한 모시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세계 속으로 여러분의 감각이 스며들 수 있을까를

간절히 바라는 그 범위 내에서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제2불교 시대의 인체론과 수행론을 담고 있는 글과 문헌과 그림과 기호와 상징들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오늘날까지 권위를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음부경이 있습니다.

 

음부경은 상응하는 지부경이 아니라 천지경에 상응하는 인부경입니다.

인간에 대한 경전이 음부경인데, 그 첫구절에 말하기를

 

"관천지도 집천지행 진의 천유오적 견지자창".

 

이것이 제2불교 시대 수행과 관련된 수행의 기본 정의입니다.

직역해서 문장을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이 때 하늘은 음부경은 인부경이니까 사람 하늘을 말합니다.

사람 속에 있는 하늘. 사람 속에 있는 그 하늘의 길을 관하고,

(관은 통째로 보는 겁니다. 독수리가 땅을 보듯이,

어항 속의 고기가 어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항 밖에서 보듯이 보는 것이 관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보는 것을 일러서 시라고 합니다.

공간을 초월해서 보는 것을 찰이라 합니다.

이것들을 다 통괄해서 볼 견자를 씁니다.)

 

그런데 어쨌든 사람의 하늘이 가는 길을 사람 밖에서 사람을 보듯이 보고,

그리고 사람 하늘의 그 운행을 잡을 수 있다면 잡아내는 것. 그러면 그것이 바로 닦음이다.

다할 진은, 다하다 하는 것은 새로 고쳐짐을 말합니다.

다하다는 것은 하나가 다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과 종은 그래서 다릅니다.

종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가 다해서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닦음이다.

닦음의 정의는 내 속의 하늘을 내 스스로 보고, 그 하늘 길의 운행을 잡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수행이다.

 

다음 구절, 그런데 내 하늘에는 다섯 도적이 있다. 나의 하늘을 굴레 지우는 다서 도적이 있다.

이 다섯 도적을 본다면 바로 통할 것이다.

찔러 창할 때 창이고, 창공할 때의 창입니다.

창공이 푸른 하늘이라 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의 번역입니다.

창공은 뚫려 있는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바깥으로 나와 있는 문도 창문이라고 하는데 그 창도 마찬가지로 뚫려 있는 것입니다.

번창하다는 것도 인생의 길이, 또는 사물의 길이 뚫려 있기 때문에 또한 번창하다고 쓰는 것입니다.

즉 대통하리라.

그러면 내 하늘 속에는 그 하늘을 좀 먹고,

가로막고 있는 다섯 도적놈이 있는데 그것을 안다면 바로 통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오적을 놓고 벼라별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오행입니다.

다섯 갈래의 운동하는 무언가의 실체, 그것을 다섯 개의 닷으로 보는 겁니다.

닷, 그것이 땅이라는 우리말이고, 따스하다 할 때의 우리말입니다.

 따스하다는 것은 열기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스한 정은 생기가 있는 정이지, 열기가 있는 정이 아니지요.

이 다섯 갈래의 닷, 그것을 본다면 통할 것이다.

즉,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굴레 다섯, 그 다섯 개의 시스템을 본다면 나는 통할 것이다.

어디로 통하는 것인가?

바로 내 하늘로 직통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 하늘이 원래의 하늘임을 보리라.

그것이 원천임을 보리라.

 

안반수의경이 말씀하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안반을 봐라,

안이 주인이다, 안이 곧 하늘이다, 안이 곧 빛이다, 안이 곧 진정한 생명이다,

이 안이 반에 의해서 가려져 있다.

이 반에 의해서 생명이 생기고 끌려가고 있다.

이 노예짓에서 벗어나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수의하라. 의를 지키라. 이 홀을 지키라.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봐라.

(이것의 의미는 굉장히 큽니다.)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하면은 통하리라.

내 하늘이 자유로워 질 것이니 마침내 원천과 닿으리라.

 

그럼 어찌할까요?

과정 과정에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가요?

내가 어떻게 점검할까요?

 제가 바르게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걱정마라. 그렇게 걱정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후편에 다 써놨느니라.

실제로 하편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수행 과학서이자 지침서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안이 그와 같다 치고, 이제 안에 대해서는 중요한 방정식,

1이 2를 낳고, 2가 4를 낳아서 합이 7이 아니고 8이 되는 방정식. 이 방정식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홀.

안이라는 것이 원 하늘이라면은 이 하늘이 내 속에 들어와 있다면은

이것이 닷과 결합해 있는 그 전제하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생산을 하게 됩니다.

 

이 몸은 끊임 없이 무언가를 생산하는 생산의 기계인 것입니다.

이 생산의 기계, 무엇을 생산하는가를 알면은 볼 수가 있죠.

무엇이 결합되어 있는가?

사물 속에서 사람이 생산하고 있는 최소 단위가 뭔지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생산의 최소단위는 못보고,

이 홀과 홀을 계속 결합해가지고 그러한 무언가의 이미 익은 보기 때문에 이걸 못본다는 겁니다.

 

기본 재료를 가지고 합성해 놓은 것을 보지 말고 기본 재료 자체를 보라는 겁니다.

요즘에는 더욱 더 이것을 존중하는 시대가 됐죠.

그리고 이것이 기본 재료가 되어 버렸죠.

이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적 방정식입니다.

오늘날의 철학이라고 하는 건 지적 방정식입니다.

지적 방정식과 진정한 의미의 밝음으로 가는 철학은 다른 겁니다.

나를 밝히지 않고서 있는 밝음이 어디에 있는 밝음이겠습니까?

내가 뭔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원천과, 빛과 닷이 결합해서 만들어 내는 이 특수한 나라는 인간이라는

공장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보되, 그 생산물 중에서 가장 1차적으로 생산하는 것을 보라는 겁니다.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생산물을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생산물을 가지고 다시 재결합하라는 겁니다.

 

나를 재결합하고 다시 고치라는 겁니다.

그것이 나의 고치틈이오, 나를 다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의 모든 것입니다.

실제 그처럼 뮈욤을 분해해서 염체와 유체를 날리려고 하면 적어도 몇 년 이상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영육 분리를 통해서 그와 같은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에 중요성을 부여해서 잘못나간 것이 바로 불교 이전의 인도 불교입니다.

제2불교의 인도적 형태가 그처럼 프라나를 축적하려고 하고,

기를 축적해서 끊임없이 닷을 중심으로 해서 주인 행세를 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것,

이 공장을 천 년, 만 년 끌고 가려고 하는 잘못된 욕심으로 흘러가는 그것을 두고 경계한 것이,

그리고 새로 이것을 재조직한 것이, 즉 인류 본래의 생활 양식을 고쳐 놓은 것이 불교입니다.

지금 다시 그것이 교조주의로 빠지고 있는 겁니다.

 

이 땅에 누가 과연 이것을 가지고 지금 다시 고치려고 하고 있는가 하는 말이에요.

아무것도, 누가 봐도 중요하지 않아요. 단, 자기 자신은 자기 자신을 다시 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장광설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방법, 이 다리, 이 배가 중요한 걸 알면 됩니다.

그리고 이 배에 타지 않고 가려고 하는 쓸데없는 생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버리면 됩니다.

예전에도 브라만을 벗어 놓고 그 자리로 가려면

결국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다 버렸어야만 됩니다.

 

그것이 뭡니까?

앞서 말한 욕심, 그것은 욕심에서 옵니다.

내가 뭔가 이루겠다는 것, 내가 뭔가 이루겠다는 것, 그것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현실적으로. 그 사랑이 뭐에요?

진실을 소유하려고 하고, 힘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소유가 되겠습니까?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진실에 대한 나의 믿음과 수행의 힘밖에 없습니다.

이 빛과 함께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그럼 이 빛이 왜 닷과 결합하냐는 거에요.

이 빛이 닷과 결합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이 닷은 이 빛과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닷이 상승하는 것입니다.

이 닷은 실체로서 그냥 우주간에 떠돌아 다니는 아무 물질이 아니라,

이 아무 물질은 또 끊임없이 빛에 노출되고, 빛과 만나면서 그 사랑을 통해서 상승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승시키는 것만큼 나의 원천도 상승하는 겁니다.

모두가 모두를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어디에서 뺏어서 뭘 보태고, 뭘 뺏어서 뭘 보탤 수가 없는 겁니다.

다만 고칠뿐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뿐입니다.

 

이 사랑이 대개는 소유로 가기 때문에 문젭니다.

엄밀하게 말하면은, 아무런 염치도 없이 저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저는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만 해드리고 싶은 사랑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다 내놓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목숨도 내 놓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그거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사는 방식이고 더불어 사는 방식이니까요.

빛과 닷의 결합은 한편으로는 나와 다른 존재의 결합이기도 한 겁니다.

이 빛 자체가 완전한 빛이 아니라 이미 닷과 결합되어 있는 빛이고,

이 닷이 또한 빛이 전혀 없는 닷이 아니라는 얘기죠.

 

무엇이 참으로 닷이던가?

무엇이 진정 나이며, 무ㅡ엇이 진정 너인가? 나가 어디있고, 너가 어디 있는가?

주객이 사라진 자리. 성불사의 종소리를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듣는 것이 아니라,

객마저 잠들어서 주객이 없이 혼자 울게 하는 그 상황으로 가는 겁니다.

 

안이 나의 주인이고, 반이 나의 껍질임을 생각하고 나는 그 아우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 아우름의 공장에서 나오는 최소 단위를 지키고, 보자.

이 최소 단위로 하여금 제 멋대로 닷에 걸려서 창조되지 않도록 하고,

이미 창조가 되지 않고 나에 의해서 진정한 새로운 재결합이 되도록 해보자.

 

자, 이제 홀을 잡자.

홀을 어떻게 잡으면 될 것인가?

홀을 잡자하니, 결국은 제시하는 것이 고요함입니다.

앞서 구슬로서 비유를 들었습니다만,

밝은 빛을 띄는 구슬이 강물이 일렁이는 곳에 떨어지면 그 구슬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고요하면 그 구슬은 찬란한 빛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이 일렁일렁해서 혼돈스럽지 않고, 한 갈래 한 갈래 모든 빛이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물을 고요하게 하는 것,

나의 닷을 고요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가장 큰 움직임이니 그 움직임은 바로 현실적으로는 의가 움직이는 것이오,

또 나의 빛이 움직이는 것.

닷이 심하게 요동치면은 빛은 고요하고,

빛이 힘을 쓰면 닷이 고요한데,

뒤집어 말하면 닷으로 하여금 수많은 일렁이는 상을 짓게 하지 말자. 부작상하자는 말이죠.

 

즉, 닷을 가장 고요한 상태로 두자.

그러함으로써 빛이 가장 원활하게 내 속에서 피어나게 하자.

방법?

그 방법은 오로지 숨길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아나가 한편 들숨으로도 해석되고, 바나는 날숨으로도 해석됩니다.

이것은 듦으로 해석되고, 이것은 자유로움으로 해석됩니다.

자유로움은 곧, 이 입과 식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나라고 하는 것은 빛이 나를 구성하고 잇는 이 닷 속에 빛이 뚝떨어지는 것입니다.

바깥 숨이라는 것은 그 빛이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숨길밖에 없다 정의하는데 그러면 숨길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숨길을 어떻게하면 되는가에 앞서서 숨길을 어떻게만 하면 된다라고 하면은 모든 것이 풀리는데,

문제는 첫구절에 그렇게 풀어 놓고 나니까 그것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아니, 못 알아든는게 당연하다는 거죠.

 

왜?

우리는 거기에서도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2불교 시대의 사람들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거꾸로 우리야말로 진정한 탕아니까요.

그래서 잘 모르고 있게 된 것이지만, 그래서 결구 보태는 것이 필요하죠.

 

첫째, 숨길은 가야할까?

숨길은 어떻게 가야할까를 놓고 나서는 아주 간단해요.

원래대로. 원래대로 했으니까 문제는 다음에 더 나와야겠지요.

 

두 번째는 누가?

아나 바나를 하고 홀을 지키자면은 숨길 밖에 없는데 이 숨길을 누가 하지, 숨길을 누가 하지 하는 것.

바로 이것은 브라만에 대한 처절한 철퇴였습니다.

인도적 형태의 제2불교인 브라만에서는

이것이 누구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질문을 기피했습니다.

 

그냥 빛과 결합되어 있는 현실의 나, 작은 나,

이 나가 주체가 되어가지고 끊임없이 우주로부터 아나를 끌어 당기고,

바나를 순환시켜서 그래서 수많은 프라나를 축적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겁니다.

그래서 정말 이게 숨쉬는 주체일까 라고 물은 것입니다.

 

숨쉬는 진정한 주체로 하여금 스스로 숨쉬게 하라.

가짜인 너는 멈추고, 진정한 주인으로 하여금 숨쉬게 하라. 가짜가 낼 수 있는 건 욕심밖에 없다.

진정한 주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숨쉬게 하라.

 

긋것이 제2불교의 이름없는 동북방 형태로 오면은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호흡하게 하라는 것과 이어집니다.

내 한 가운데, 나의 진정한 중으로 하여금 주체가 되어서 숨쉬게 하라.

 

이 중을 주인으로 삼으라.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먼저 중을 봐야만 하죠.

중을 다르게 불교식으로 바꾸면 견성이 됩니다.

유교식으로 바꾸도 성이 되고요.

그것이 견성이라는 말의 참뜻입니다.

 

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숨쉬는 주체,

수의를 할 주체를 세우려다 보니까 그 주인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먼저 봐야만 하죠.

보지도 않은 놈으로 하여금 숨쉬게 할 수는 없잖아요.

진정한 주인을 보는 것, 그것이 견성입니다.

 

견성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견성해서 오도송을 읊는 사람은 이제 출발한 겁니다.

아직 생사관도 가지 못한 겁니다.

이제 생사문을 감으로써 비로서 수행의 첫발을 딛게 됩니다.

생사관을 넘나드는 것은 수행의 종착점이 아니라 수행의 시작점입니다.

그 이전은 수행을 하자해서 꼬드기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

이제 견이 아니라 관해야 됩니다.

독수리처럼 내 밖에서 나를 봐야 되는 겁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나의 마음의 작용을 보고, 나의 몸의 운용을 보고, 나의 껍데기의 실제 구성을 내 밖에서 나를 보는 겁니다. 물체도 아닌 진정한 실체로 나 밖에서 나를 보는 겁니다.

그게 관입니다.

관하고 나서 이것 갖고 또 각이라고 합니다.

견성을 초각이라고 하고, 이걸 중각이니 대각이니 합니다.

대각의 대자는 고사하고 각도 못 간 겁니다.

이제 각으로 가기 위한 밑그림이 그려진 겁니다.

그리고 이 밑그림이 그려지면 그 다음부터는 순간입니다.

 

어쨌든 가려면은 관까지가 문제에요.

이루는 것의 과정은,

첫 번째, 봐야 되고, 관해야 되고.

그 다음 관한 다음에 이 관으로 하여금 자행하게 하고.

 

자행한다는 것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재하게 한다는 겁니다.

원래 의미가 사실 같은 의미인데, 행이라는 것이 자꾸 의도적인 행으로 쓰여서 그렇습니다.

행위라고 할 때, 행과 위는 다릅니다.

이러한 개념이 안 되니까 무위같은 거 번역할 때 이상하게 되요.

무행이 아니라 무위라고 했습니다.

 

위라는 것은 함은 함인데 목적의식적인 함을 위라고 합니다.

판단에 의해서 하는 행위를 위라고 합니다.

 

그냥 저절로 되어 버리는 것은 행이라고 합니다.

행이라고 하고 또 다른 말로는 발이라고 합니다.

행 중에서 본질이 피어나는 것, 행해서 적중하는 것을 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행은 어쨌든 목적의식에 상관없이 그냥 움직여 가고 있는 운행을 말합니다.

 

위라는 것은 무엇 무엇을 위하여 라고 할 때 쓰이기도 하고,

A를 B로 여기다, 판단하다라고 할 때의 동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위라는 것은 목적의식을 가진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행은 목적의식과 상관없는 걸 말하며,

그와 같이 목적의식과 상관 없이 했는데 원래의 중심에 맞아버리는 것을 발이라고 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발이죠. 갑자기 어디선가 변태가 일어나는 것은 발이 아닐 수도 있죠.

그러면 여기 자행도 원래 의미는 그냥 목적 의식없이 길 따라서 저절로 하는 거에요.

그러나 불교 용어에서는 그것을 자재라고 합니다.

진정한 나로 말미암아 내가 있게 하는 것.

그 자재하는 방법이 안반수의 하편에 또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아직도 깨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옵니다.

이제 한입니다.

자재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수행에서의 자재와 철학적인 자재는 다릅니다.

철학적인 자재는 자기 마음대로 우주를 노니는 꿈의 세계입니다.

수행자의 자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방 1m도 되지 않는 새까만 고치 속에 가두어진 그 고치속에서 오로지 자신만 있는 것이 자재입니다.

무릎 하나,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그 어둠 속에 자신만이 존재하고 다른 일체의 것이 존재하지 않는 자기 자신만으로 꽉 찬 상태. 다른 어떠한 불순함도 없는 상태. 유가에서는 그것을 충이라고 합니다.

 

충이라는 것은 진실하다,

완전한 그 무엇 밖에 없어서 다른 불순한 것이 일체 없는 것을 충이라 하며,

이것이야말로 진정 품계있는 빔이라고 합니다.

완저한 채움과 비움의 통일성을 얘기하는 공자의 개념이 충과 서입니다.

 

철학적인 자재는 우주를 임의대로 날아 다니는 우주의 주인으로서의 자기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유입니다. 자재가 아니고.

자유한 다음에 자재가 아니고,

수행자의 자재는 오로지 그 고치 속에 자기 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거꾸로 드러내고 내 속에서 실을 뽑아서 나 자신을 여섯 겹의 빛 고치로 만들고

그 고치 속에 내가 들어 앉아서 나 자신 밖에 없는 그 세계.

유아독존한 세계.

유아독존한 실천적 세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방편으로서의 유아독존의 세계를 깨고 고치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하면 되거니와,

사람들이 자유를 freedom이라고 번역하니까 이제는 할 수 없이 대자유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대자유를 얻은 자. 누가 앞서고, 누가 뒷서겠습니까?

모든 존재는 평등할 것이고, 언젠가 우주는 어떠한 중심점도 없이 모든 것,

그 자체가 중심점이 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주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거기까지. 그것이 안반수의가 목적하는 부처님의 의도입니다.

 

이제 그 방법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차근차근 살펴가되,

지난 주에 드렸던 말씀은 다음으로 바로 그렇게 드리겠습니다.

 

고요하라.

지난 주에 드린 숙제 기억 나시죠?

 

고요하라.

닷은 한자어로 생기가 되는데,

이 생기는 결국은 확장하는 기운과 축소하는 기운이겠죠.

이 기운 가운데 생기의 활발한 면을 정지시키고,

축소하는 면에 중심을 두면은 닷은 마침내 활발하지 않게 고요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빛이 들어갈 것이니,

그래서 사람이 실제 감정 다스림에서도 육체를 강하게 움직이는 제반 요소들을 차게,

또는 움츠리게 하면은 마음도 찻집니다.

 

마음이 차진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빛이 일어나기 직전의 어떤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춰 버리면 지옥 찌꺼기가 되어서 아무 쓸모 없는 수행자가 되어버립니다.

지옥 찌꺼기는 차츰 차츰 이야기를 드리도록 하구요.

 

오늘은 여기까지 해서 기본적인 전제를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안반수의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의 인체론과 연결시키는 것은 제2불교의 혁신이라는 면.

그러나 그 근본적인 인간론까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둘째,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실천적으로 안반은 자신의 주인과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뚱이의 결합이고,

그 뚱이를 벗어나서 자유로운 안을 보려면 방법으로 수의를 해야 될 것인데,

수의는 크게 보면은 넓은 의미에서 먼저 자신의 홀을 독립시켜서 그 홀로 하여금 숨쉬게 하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중을 보고, 그리고 그 중이 홀로 있게 하고, 그 중을 벗어나고. 마침내 그 중이 주인으로 거듭날 때 나는 고치 속에서 나옵니다. 그 고치를 트는 과정. 고치로 어떻게 틀어 갈 것인가, 그리고 고치 속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진정한 나와 작은 나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자가 점검법 등에 대해서 차근차근 다음 시간부터 말씀드리고 오늘 이야기는 줄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01.3.15, 조계사 교육원)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3)

 

원소와 요소존재

 

서양에서는 원소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원래 원소는 서양 고대사상에서 사물의 성질을 유지하면서 있는

가장 최소한의 단위를 일반적으로 원소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나중에 atom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원소라는 사상과,

철학적인 어떤 사상과 아랍의 연금술이 결합하면서

오늘날 근대 서양과학의 특히 화학의 기초를 놓는 원소 주기율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서양과학이 그와 같은 원소주기율표에 의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어떠한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의 각 원소들은 이 사물보다 작아야 됩니다.

이 사물이 설령 열 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면은

원칙적으로는 열 개 원소의 부피의 합이 이 사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상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둘째, 질량의 합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 열 개의 원소로 어떠한 사물이 이루어져 있다면

그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열 개의 원소의 질량의 합으로써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량의 합이 문제가 아니라, 질량의 합도 엄밀하게는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부피의 합이라는 서양과학의 상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떠한 원소는 어떠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위의 어떠한 사물보다 작다는 거죠.

그러므로 이와 같은 원소를 합하면은 결국 사물이 설명된다는 겁니다.

실제 그럴까 하는 문제를 떠나서 동양에 있어서는 그러면 원소의 개념이 어떠한가.

 

동양에서의 개념은 이와는 정 반대입니다.

아니, 이것이 갖고 있는 규칙성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전제가 안되다 보니까 제가 요소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아! 오해가 있고, 문제가 있었구나'하는 점을 지적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동양에 있어서는 이 사물의 이름을 甲이라고 한다면 이 사물을 구성하는,

그리고 원소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존재가 열(10)이라고 한다면은,

이 열을 고사하고 이것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 하나도 甲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열 개의 요소존재의 부피의 합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 원소의 부피만 하더라도 이것보다 백 배, 천 배, 만 배나 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것이라는 사물, 어떠한 사물이 구성될 때에는 그 열 개,

열 개가 모두 원 사물 덩어리 크다고 전제하더라도 사물이 모이는 순간 그 부피는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부피에 있어서의 제한성이라는 굴레가 해방돼 버린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를 뒤덮고도 남을만한 원소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와 같은 원소들이 열 개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열 개가 특이하게 모이는 순간에는 거꾸로 이 지정된 사물과 같아진다는 거지요.

부피의 합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동양에 있어서의 원소이론입니다.

물론 그것을 원소라 부르지 않고 어떠한 이름을 특별히 명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제가 약칭해서 그것을 요소존재라고 불렀었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 때문에 거대한 것이 작을 것으로 能小能大할 수 있는 동양의 철학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요소존재라는 것의 성격이 열 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물질성을 갖는다'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無中生有 ―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이 생기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열 개가 모여서 하나의 사물을 형성한다 하더라도

이 열 개는 이 사물이라는 굴레 속에 완전하게 갇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이 사물 속에 갇혀 있을 뿐 절반정도의 다리는 그밖에 내어놓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절반정도 밖에 내어놓고 있는 이 다리는 다른 어떤 사물과 공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요소존재를 반드시 하나의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배경으로 하고서 동기연계(同氣連繫)다, 감응이다 하는

氣의 이론들을 발전시켜 온 것이 동양철학입니다.

그러면 동양철학에 있어서의 원소의 이론은 이처럼

서양에 있어서의 부피의 합으로써 구성된다라고 하는 그와 같은 원소이론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서양에서의 원소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고대에서의 아톰(atom)이론이,

원소이론이 페르시아의 연금술과 결합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주기율표를 획득했지만

이 주기율표는 서양의 원소이론과 결합하는 순간 해체가 됐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페르시아의 주기율표는, 연금술의 주기율표는,

화학적 주기율표는 이와 같은 사물이 다음 사물로 전화하는 전화의 순서를 말합니다.

 

어떠한 사물은, 이 원소는 다음 원소로 언제든지 전화할 수 있으며,

2번의 원소는 3번으로 전화하게 되고, 3번은 4번으로 전화하게 된다는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12번이 있다는 거,

C(탄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라비아 연금술의 원소주기율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확립시킨 사람이 아랍의 대 철학자, 대 화학자, 의학자라고 하는 또는 시인이라고 하는

오마르 하이얌입니다.

 

그 오마르라는 이름은 워낙 유명해 가지고 배우들이 그 이름을 따 쓰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담배 이름에 따 쓰기도 했습니다.

물론, 한바퀴 굴러 가지고 오마샤리프가 돼서 왔지요.

오마가 아니라 원래 오마르인데요, 오마르 하이얌이라는 그와 같은 사람에 의해서 체계화가 됐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원소이론과 결합하는 순간부터 이것은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번은 1번이요, 2번은 2번이요, 3번은 3번이요, 다만 이것은 부피가 아닌 질량의 순서로서만 설정된 것죠. 탄소는 다른 어떤 수소로 결코 전환될 수 없는 겁니다.

헬륨으로도 전환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근데 아랍에서는 그게 아닌 겁니다.

언제든지 수소는 헬륨으로 전환될 수 있고, 그 역으로도 가능하고,

또한 탄소를 매개로 해서는 모든 것으로써의 전환이 가능한, 원래 연금술에 있는 화학의 이론입니다.

실제 이와 같은 것을 서양의 철학은, 서양의 과학은 현재 와서 받아들이기 한 셈입니다.

태양 속에서는 언제든지 수소가 헬륨으로 전환하고 있다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거지요.

그것은 아직 하나의 가상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원소론을 확정짓기 위해서 서양의 과학은

그것을 쪼개서 전자, 양성자, 중성자 등으로 각각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의 실증되지 않은 모델로서 쿼크이론까지 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쿼크 이론은 확정되지 않은 이론입니다.

적어도 현실세계와 또는 실험실적 조건하에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쿼크이론에 따르면 이 짤라놨던 이것이 무의미하게 돼버립니다.

쿼크이론의 바탕에는 알게 모르게 각 원소들은 전환될 수 있다라는,

쿼크라는 또 다른 요소존재적인 사물을 중심으로 해서 언제든지 전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열림이 있는 겁니다.

쿼크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원소이론의 파괴가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은 이제 동양적 화학과 비슷하게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랍의 연금술에 있는 화학의 주기율표는 아랍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 수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에 의해서 문헌으로 정리됐을 뿐이고,

동양에서도 즉 페르시아를 제외한 다른 동양에서도 그와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외단을 만든다 그래서 外丹을 만든다 하는 기법이 있습니다.

연금술중에, 외단을 만들어 가지고 먹는다는 외단 복용법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돌이 우리말로 하나는 곱돌입니다.

곱돌은 이른바 납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수은이 있죠.

이것들이 언제든지 납이나 수은이라는 성질을 버리고

다른 사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실행해 왔던 방법입니다.

단 잘못되면 하나도 성질이 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사람에게 복용되었을 경우에는 요절을 하겠지요.

그리고 인도의 요기들은 실제로 어떠한, 공중에서 사물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것 또한 이와 같은 원소가 영원히 독립된 단위는 아니라는 것을 실천해 온 그들의 문화입니다.

그것이 동양의 화학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부피의 합으로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제가 미리 전제로 하고 말씀을 안 드리다 보니까 요소존재라는 것을 설명할 때

 

'우주에는 수억 가지의 헤아릴 수 없는 요소존재들이 있다'

 

라고 했을 때

 

이 요소존재가 자기도 모르게 오늘날 화학적 요소존재인 원소처럼

이해가 됐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금 제가 스스로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 충분히 그렇게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오늘 말씀 드리면은 부피의 합으로서의 요소존재가 아니라

우주에는 우주를 몇 겹이나 더 덮을 수 있는 더 큰 요소존재들로 널려있고,

이 요소존재들을 어떠한 것과 결합하는 결합의 방정식에 의해서 부피가 결정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언제든지 부피는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질량까지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해서 조금 있다가 안반수의에 나오는 數를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수()의 대하소설 - 천부경

 

안반수의에 나오는 숫자에 대해서 두 가지는 이미, 아니 어쩌면은 세 가지는 말씀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의,

하나를 의미하는 사물은,

하나라는,

수의 체계에는 아홉가지의 수의 체계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각각의 체계는 모두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이 이 수를 하나, 둘, 셋, 넷을 쓰는 독립적인 덧셈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 보태면 둘이 되고, 둘에 또 하나를 더 보태면 셋이 되는

그와 같은 어떤 점층적인 사다리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단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동양에서 수의 개념이라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 있어서 수의 개념이라는 것은,

제 2 불교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시기의 수의 개념이라는 것은 1부터 9까지가 하나의 스토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스토리가 아홉 갈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홉 갈래의 스토리는 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룰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각각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면은

여든 한가지의 이야기가 모인 거대한 대하드라마가 바로 아홉가지의 수의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각각의 수의 시스템을 매우 상징적으로,

각각의 숫자의 스토리를 한 글자로 묘사한 것이 81자 천부경입니다.

천부경은 그러한 것입니다.

 

천부경은 그냥 한문의 문장을 따라 줄줄줄줄 해석할 수 있는 한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보지 못한,

아리랑 고개 너머에 있는 무지개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무지개를 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부경을 바로 여든 한가지의 테마로 구성된 대하소설이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에서 안반수의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한 가지의 이야기 테이블입니다.

1부터 9까지, 또는 1부터 9까지를 통해서 마침내 열까지 나아가는 이야기 테이블을 준비하고,

이 테이블에 따라서 그 이야기를 스스로가 실험하고 그 이야기대로 연극해 볼 것을 권하는 것,

그것이 동양의, 불교의, 우리 전통 선가의 수행입니다.

 

우리 전통선가의 수행은 따라서 잘 짜여진 수라고 표현된 이 드라마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를 재현하되 체계적으로 재현할 것이며,

그나마도 역으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래서 역으로 전환하는 것을 일러서,

거꾸로 전환하는 것을 일러서 한자로는 역(易)이라 하고 바르게 진행하는 것을 일러 (順)이라 합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이 스토리를 계속 실현해가고 있는 연극무대에 선 뛰어나 각각의 배우들입니다.

이 배우들을 이 시스템을 그대로,

대본도 없이 자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보화 된 대본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을 일러서 옛 사람들은 人道는 順하다 했습니다.

天道는 易이라 했습니다.

 

'하늘의 길은 거스르는 것이요, 사람의 길은 따라가는 것이다.'

했습니다.

 

따라간다 함은 이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가 둘을, 둘이 셋을, 셋이 너이를, 너이가 닷서를 이렇게... 따라가는 것이죠.

그 가운데서 하나는 우리말로 빛입니다.

이 빛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이야기를 드려야하겠습니다.

 

하나(하라) - 태초의 빛, 둘 - 닷

 

빛이라고 하니까 오늘날 화학에서 이야기하는 광선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 광선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화학에서 말하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현재의 빛은 특정 상황에서는 가두어 질 수도 있고,

특정 사물 안에 굴레 지워질 수도 있는 그와 같은 빛을 말합니다.

그와 같은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빛이, 서양 물리학 또는 화학에 따를 때 이 빛은 가두어 질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빛은 우주론에서 바로 블랙홀 속에 가두어 질 수 있습니다.

블랙홀을 이와 같이 빛까지 가두어 버리는 엄청난 힘을 가진 미세 검은 점인 것이죠.

서양이론에서는, 즉 빛까지 가두어 버리는 물질인 것이죠.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동양에서는.

빛은 그 어떤 것까지도 빨아들일 수 있는 그 공간에서조차도 영원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빛은 결코 어떤 공간에 의해서 가둬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두고 있는 그 공간을 구성하는 그 물질조차도 바로 빛에 의해서 만들어진,

빛과 닷의 결합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와 같은 기본 상식에서의 차이가 있습니다.

 

블랙홀 같은 경우를 예로 든다면 블랙홀을 빛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빛은 빨아들일지 몰라도,

원초적으로 블랙홀 자신도 빛과 닷의 결합으로 형성된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처럼 관점이 다른,

모든 사물에도 그 주인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유일한 힘으로서의 빛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동양에서 말하는 태초의 빛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빛은 반드시 어떠한 사물과 만나게 됩니다.

그 사물을 구성하는, 이 물질이라고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땅이라는 말이 왔다고 하지만,

따스하다라는 말이 왔다고 하지만, 그래서 이것이 생기를 뜻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엄밀하게 완전히 물질을 아닌 것입니다.

이것과 결합하는 순간 이제 하나의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빛과 닷의 결합으로 말미암아서 사물을 이제 형성됩니다.

이것이 분해되면은 사물은 해체됩니다.

다시 빛으로 닷으로 갈라집니다.

 

이것이 동양에 있어서 한편으로 인간에게 적용됐을 때 神의 이론으로,

한편으로는 氣의 이론으로,

이것이 氣냐 精이냐를 놓고 싸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은,

어쨌든 氣의 이론으로 또는 精의 이론으로,

이것이 神의 이론으로,

이것이 정기신의 삼 이론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뼈대였습니다.

 

아무튼 빛과 닷이 하나됨으로 말미암아서 사물은 형성됐습니다.

내 속에 있는 빛과 다른 사물을 합성함으로써 나는 나의 영체를 만들 수 있고,

나의 유체를 만들 수 있고, 그리고 나의 정신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서 여러분을 수많은 사물들을 지금도 여러분은 합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수많은 사물을 여러분 속에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편 쉽게 말하자면 신진대사의 모든 모습이요,

또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은 신진대사 이외에도 또 다른 사물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 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한 단어를 한꺼번에 붙여서 사(思)라고 합니다.

그래서 思와 대비시켜서 제가 念을 말씀드리기를 가끔 합니다.

념이라는 것은 내 자신이, 내자신의 정신, 정신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그만큼 애매모호한 표현이 없습니다만 정신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내 정신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다른 사물과 다른 생명체에게 미치는 제 현상을 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갖고 있는 힘을 염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력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사력은 내 밖에 있는 사물과 내 밖에 있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힘이 나의 정신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사라고 합니다.

즉 외부로부터 나에게,

객체로부터 주체에게.

안으로부터 밖으로,

주체에서부터 밖으로 나아가는 생각은 念,

그 반대는 思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이라는 것은 서양의 개념에는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근대 유물론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관련된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표를 세웠습니다.

바로 모사론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에 사물이 있으면 사람의 정신은 그것을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물을 내가 바라보는 순간에 내 안에 이 사물의 이미지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재생산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재생산이 아니라 비유하건대 재생산입니다.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 속에 들어가면 이 속에 들어간 그 자체로서의 이 상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이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력을 갖고있는 또 다른 하나의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이 상은,

따라서 내가 이것을 치운 다음에도 내 속에서 자기의 운동방향에 따라서 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아름다운 여성을 남성이 보면, 어떤 아름다운 남성을 여성이 보면

그 남성과 여성이 사라진 다음에도 그 남성과 여성은 그 속에 있는 그 이미지,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

그것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운동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생각의, 정신이라고 일단 이름하여 붙이자면,

그 정신이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의 관점에서 업이라든가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실제 한 번해서 그것이 기억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물을 풀어주거나 소멸시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

그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반성의 의미입니다.

 

 서양에서의 반성의 의미는 지나간 잘못을 돌이켜서

그것을 틀렸다라고 인정하고 그 기억을 어떡해든 고통스럽지 않게 처리하는 것을 반성이라 합니다.

동양에서는 실질적인 이 사물에 소멸을 소멸하는 것을 반성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인 개념이 다릅니다.

 

 아무튼 이 상,

그래서 무념,

내 속으로부터 일어나려는 실체에 해당되는 생각이라는

어떤 이 내 속에 있는 각각의 실체적인 생각이 없어야 된다, 그리고 실체적인 상이 없어야 된다.

그것이 무념무상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상까지도 바로 내가 빛과 닷의,

내 속에 있는 빛과 닷의 결합을 통해서 나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사물 생성의 제 행위들입니다.

신진대사는 말할 것도 없이 말입니다.

신진대사를 물질 그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라는 것을 무대로 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것의 움직임을 전제로 해서 나의 모든 움직임,

그 바탕,

그 뮈욤을 전제로 해서 말입니다.

 

그 나의 모든 운행을 전제로 해서, system of movement of body,

육체의 운행의 체계를 전제로 해서,

이걸 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음운변화가 되면 몸이 됩니다.

동사형을 물론 뮈다죠.

우리 사전 찾아보면 다 나오는 얘기구요.

개념이 그렇게 됐던 겁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지금 보고있는 겁니다.

 

 왜?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의 교육을 통해서,

12년 동안의 교육을 통해서 우리 나름, 그 교육에 의해서 주어진 관념을 충분히 습득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열등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할지라도 충분히 습득한 것입니다.

그 습득된 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얻는데 1년만을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성급하지 않겠습니까?

1년만에 이 모든 생각들이 바로잡히고 이것에서부터 한 걸음 나아가서 새로운 고치를 틀고

새로운 나비가 되는 나를 바란다면 너무나 성급한 것 아니겠습니까!

12년의 교육동안에 얻은 것이 얼마였겠습니까!

그 몇 푼이었겠습니까?

 

삼(섬) - 뮈욤

 

사대(지수화풍)

 

아무튼 이와 같은 뮈욤을, 운행을, 바로 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삼이라고 하는, 서다고 하는 숫자의 스토리입니다.

닷이라고 하는 것이 둘이라고 하는 이야기의 실체요 스토리입니다.

하라라고 하는 것, 빛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하나라고 하는 이야기, 테마의 스토리입니다.

 

이제 이 테마는, 하나가 둘과 만나서 세움을, 섬을 이룸으로써 세 번째 이야기,

기승전결이라고 그러면 마침내 일어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일어난 부분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이렇게 무언가 운행이 되자 이 운행의 특징을 보여주는 네 가지 요소가 생겼습니다.

운행의 특징,

모든 사물의 운행에서 그것이 개가 돼든, 돼지가 돼든, 우주인이 되었든, 여래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짐승이 되었든...또는 풀과 나무와 돌이 되었든 간에.

모든 사물의 운행에서 보여지는 네 가지 특징이 잡아졌습니다.

그것을 일러서 불교에서는 사대라고 불렀습니다.

 

사대는 이와 같은 여러 닷들의 갈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는 흐르고 하나는 오르고, 하나는 내리며, 하나는 풀리며,

물론 그 가운데, 사대 중에 중심은 풀림입니다.

이 중심이 되는 풀림을 말하자니 비유 할 길이 없어서 말하기를 土라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土라는 범어를 번역을 못하고 地라했습니다.

그리고 내림이라는, 이 움직임의 네 가지 특성가운데 내림이라는 것을 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름을 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흐름을 바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불교에서는 바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자로. 그리고 부도지에서는 그것을 氣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부도지에서는 氣, 火, 水, 土가 있고, 불교의 사대로서는 地, 水, 火, 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네 가지 물질이 아니라,

네 가지 존재가 아니라 네 가지 운동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그 모든 구체성을 사상하고,

이른바 서양에서 만들어진 용어로써 모든 구체성을 없다고 치고,

개라는 모습, 돼지라는 모습, 모든 모습은 제하고,

오로지 그것을 한 물건이라고 했을 때 적에 모든 물건에 공히 나타나는 네 가지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이 특징에 의해서 이제 다섯 가지가 만들어집니다.

 

이 네 가지의 특징이 바로 인간 속의 어떠한 닷들이,

어떠한 요소들이 들어올 수 있는,

집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이 우주를 뒤덮을 만한 이러한 요소존재들 조차도 어떠한 사물 속에 갇힐 수 있는

사물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것이 바로 사요,

이것이 바로 넣음입니다.

이것이 너이입니다.

너이는 그래서 '넣다'입니다.

이제 한 사물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물은 사람의 경유로 한정 지어서 이제 구체성을 띠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모든 사물의 흐름과 오름과 내림과 풀림이 사물마다 이제 다 있으면서도 각 사물마다

그 흐름오름내림풀림은 조금씩 구체적이고 다르기 때문에 사람의 경우만을 예를 들겠습니다.

 

다섯 가지의 길(궤도)

 

어쩌다 보니 오릅니다.

먼저 풀려야 되겠지만 오릅니다.

오르고, 흐르고, 내리고, 흐르고, 오르고, 다시 내리고, 오르고, 흐르고, 내리고, 오르고 올라갑니다.

이와 같은 흐름을 갖추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 이외에도 이와 같은 체계를 갖는 것은 많습니다.

이처럼 마음대로 흐르는 체계를 갖자 이 체계 가운데에서 마침내 궤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흐름, 오름, 내림, 풀림을 전제로 해서 마침내 사람의 경우에는

시계 방향 세 궤도와 시계 반대방향 두 궤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궤도를,

내려와서 풀리는 과정에서 한 궤도를,

다시 이 과정에서 하나의 궤도를,

다시 하나의 궤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궤도를 그리면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개의 궤도, 이 다섯 개의 궤도는 마침내 다섯 개의 길과 일치합니다.

이것을 일러서 줄이라고 합니다.

 

우주도 이와 같은 줄로서, 이와 같은 궤도로서 설명해 온 것이 동양의 우주론입니다.

동양의 우주라는 말은 바로 울과 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말 울과 줄과 일치합니다.

실제로 도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중국 도가에서도 宇는 공간이요, 宙는 시간이다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울과 줄을, 바로 공간과, 울을 울타리로서 우리말을 생각하면 쉽지요.

울타리라고 하는 오늘날이 개념으로 울타리를 이해하면 조금 문제가 있지만 아무튼 울타리라고 보고,

이건 줄로 보면 되는 거죠. 시공의 합일체라는 개념이죠.

 

근데 이처럼 우주도 그렇듯이 사람이라는 작은 우주도 이 줄이 생기는 겁니다.

이 줄은 마침내 이제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애초에 중국, 우리는 우주라고 부릅니다.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중국사람들을 우주라고 부른 적이 드뭅니다.

아주 시적이거나 그런 것을 무시하는 몇몇 사람들에 시적인 어구 속에서는

우주보다는 우주가 편하니까 그렇게 발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원칙적으로는 뒤집혀 있습니다.

 

줄이 울을 만들어 낸 것, 이제 공간이 만들어지자면 여기에, 이 길에 손님이 들기 시작합니다.

나귀를 타고 나그네가 이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존재들,

다섯 가지로 분류되는 이 수많은 요소존재들이 각각 자기에게 맞는 길을 선택하기 시작합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존재는 다섯 가지 특징으로 말씀 드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

각각의 요소존재는 수억이지만 이 수억을 분류하는 방식은 이 요소존재가 보여주는 특징,

근본적인 특징,

어떤 존재는 올라가려고 하고,

어떤 사물/요소 존재는 내려가려고 하고,

어떤 것은 상하로 동시에,

어떤 것은 풀리고, 어떤 것은 응축되는, 그것들이 각각에 맞춰서 그 궤도를 타게 됩니다.

 

이처럼,

이와 같은 우주적인 요소존재들이 이 풀려진,

이 네 가지 특징에서 만들어진 궤도를 타는 순간에

이 궤도에 끝점에 각각의 구체적인 물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부도지에서 말하는 8呂입니다.

이것이 모양을 갖춘, 불교에서 말하는 8道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형상으로 표현된 여덟 갈래를 가진 도르제입니다.

 

수미산 만한 것이 열 개가 모여도 사람 만하게 오므려 들 수 있다는 것,

또는 사람 만한 것 다섯 개가 모였는데 수미산 만해 질 수도 있다는 것.

요소존재와 사물의 구성관계는 결국 하나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 빛이 어떤 것인가,

그 빛이 우주 근원의 빛임에도 불구하고

그 빛 자체가 이미 많은 역사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현실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想은, 앞서 말씀드린 이 想은 내가 육체를 놓아 버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내 육체가 소멸된 이후에도

이것은 나라는 정신의 무대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기생충처럼 살아갑니다.

이것은 나의 정신 자체를 때로는 파괴하는 바이러스처럼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는 뱃속에서 창자를 뚫지 않고 살아가는 회충과도 같이 나의 정신과 공존합니다.

그것을 일러서 과거 분들은 이것이 실제로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 주인 된,

으뜸되는 빛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선택한다고 해서 業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에 있어서 어떠한 사물을 선택하는 기준이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참함을 넘어서서 실상 눈을 뜨고 보자 이 비참함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습니다.

강변하고 싶은 이상 우리는 영원히 애벌레의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진실 앞에서, 적어도 자신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진실 앞에서 일단 정직해야 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영원히 애벌레로 살다 애벌레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정당할 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인간으로 태어난 사물들 가운데에서 그 앞선 인구가 300억이 된다면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형상으로 살아온 이가 300억이 된다면 그 가운데 겨우 1억인들 바른길을 갔겠습니까. 나머지 2백 99억이라 한다면 그 99억들의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잘 드려다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내린 축복의 기억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적어도 자신이 태어난 순간, 어느 순간부터는 대개 다 기억을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삶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의 축복은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도 깝깝한 굴레지요.

 

다른 동물들이야 하루를 기억하면 그것이 제 인생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사람을 적어도 지가 태어나서 너덧살 되서부터 죽을 때까지는 기억합니다.

불완전하게, 그 정도만 해도 축복인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정말 애벌레로 살면 안되겠다라는 정도의 반성을 할 수 있는 무기는 되니까요.

자기자신을 고치 틀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성적인 앎의 무기로 삼을 수 있으니까요.

위대한 소산인 겁니다.

 

어쨌든 다섯 가지의 길,

다섯 가지의 궤도,

그리고 거기에 실리는 다섯 가지의 요소존재들 이와 같은 요소존재들이 바로 닫고,

내 물건 속에서 닫고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이것이 닫고 섬입니다.

오늘날 표준말로 다섯이 돼버렸지요.

왜 이렇게 됐는지는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이건 한글 학회에 물어봐야 됩니다.

누구든지 다 /닷서/라고 발음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다섯이라고 표준말로 해 놓은 건 이해할 수 없죠.

15년 전만 하더라고, 좀 넉넉잡아서 30년 전만 하더라도 /다섯/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몇 명 안되고

다 /닷서/라고 발음했습니다.

 

다 서이, 너이 했지 어는 사람이 셋, 넷 했다고. 얘들 불러다 놓고,

꼬맹이들 불러다 놓고는 병아리 삐약삐약 시키고 하나, 둘 하면 셋, 넷 시킨 다음부터는

갑자기 서이, 너이가 사라졌어요.

심지어 군대가서 서이, 너이 하면은 국민학교도 안 다녔다고 타박이나 주고 그렇게 됐지요.

어쨌든 우리말이 이렇게 이제 이상하게 됐습니다.

스토리를 잃어버린 결과지요.

 

여섯과 일굼

 

여섯은 이 물질들의 밖에, 이 궤도 밖에 마침내 각각의 터미널이 생기는 겁니다.

이 터미널은 물질이라 해도 무방하고 물질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한 이 터미널이 생깁니다.

그럼 이 터미널과 이 한 중앙에 있는 이 빛 사이에는 공간이 생깁니다.

이 공간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공간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이 공간을 일러 육합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평면적인 존재에서 입체적인 존재로 만드는 힘입니다.

이것을 일러 육합이라 하며 육합은 복잡합니다.

육합을 제대로 이해하고 육합에 대한 정의가 되어 있으면

육정육갑을 배울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그것이 여섯의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여섯 개의 마지막 선에 맺혀지는 이 터미널들의 궤도,

 궤도 아닌 고정자리,

터미널들의 위치를 잡아주는 이 자리가 바로 일굼입니다.

이 또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일굼,

이 일굼은 바로 기문둔갑의 기초가 되는 스토리입니다.

즉 외부적 사물을 이용해서 내적 영향을 미치는 과학의, 동양 과학의 전제가 되는 스토리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여섯과 일곱은 쉽지 않은 이야기이며,

한편으로는 복잡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약간은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이야기 이기도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의 과학자나 전문가가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덜과 아홉

 

여덜은 알아야 합니다.

여덜은 이렇게 만들어진 중요한 터미널이며 이 터미널로 말미암아 나는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터미널을 일러서 여덟 개의 집이라 하며,

이 여덟 개의 집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것을 일러서 아홉 개의 집이라 합니다.

아우름을 일러서.

이제 여덟 개의 집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육체를 향해서 열고 닫음을 할 수 있는,

주체적으로 신진대사를 할 수 있는, 공장이 된 겁니다.

물질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생각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장으로써의 기능, 열고 닫음이 가능해 진 겁니다.

이제 아우름의 체계가 아홉집, 이것들이 각각 하나 둘부터 해서 아홉까지 가는 스토리입니다.

 

하나는 하나로서 첫 번째 땅 하라요, 그것은 태양이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빛입니다.

두 번째로 두리, 두리는 곧 땅이요, 그 땅은 닷으로써 삶을 말합니다.

섬은 세움이니 그 자체로써 운행을 말합니다.

살아있음을 말합니다.

빛과 닷이 결합된 것은 모두 살아있음입니다.

동양에서는 그래서 살아있는 것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형체지은 모든 것이 살아있습니다.

인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사물이 그대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동양의 사상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물권(物勸)사상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건이 말하여 물권이라고 하는 것은 서양적인 철학의 관점에서 표현한 현대적인 용어입니다.

이 物을 다, 이 物이라는 말 자체가 살아있는 거예요.

돌도 나무도 풀도 다 살아있는 거예요.

사실은 생권, 삶은 누리고 있는 거지요.

아니, 유명권(有命勸)이예요.

누구든지 다 이 명을, 이 하라를, 이 빛을 갖고 있는 권리예요.

그것이 서이, 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려면은 그 속에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는, 넣을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넣음의 체계가 작동하는 순간 다섯 개의 길이 열리며, 닫고 설 수 있습니다.

독립할 수 있습니다.

닫고 설 수 있으며 이 닫고 설 수 있는 체계 속에 자신의 하나에,

자신의 빛에 알맞은 우주상의 요소존재들,

다섯 갈래의 요소존재들이 수없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집채보다 큰 것도,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작은 것도,

우주 만한 것도 모두 내 몸 속에 들어와서 가두어집니다.

절반을 내 밖에다가 다리를 걸치고. 양다리를 걸친 채 나가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하여서 다섯 개가 이루어지고,

그 공간 공간의 독특한 의미들,

무지개가 있다면 무지개의 경계부분이 길이라면 무지개의 색상 자체는 하나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사실은 이 여섯 개는 차선이고 이것이 차로인 샘입니다.

이 여섯 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일곱 번째 줄에서 이루어지는 일굼의 이야기,

이제 육체를 이뤄 가는 준비의 궤도인 것입니다.

 

이 궤도에 선 여덟 집들의 이야기,

이 여덟 집들은 각 각 거기에 맞는 이 하라로부터 불거져 나온,

그리고 이 닷으로부터 결합되면서 생긴 수많은 상들,

수많은 실체로서의 상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관하는 것,

여기에서 보관하는 모든 보관하는 것이 딱딱 디렉토리처럼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뒤져보니까 내가 돌이요 풀이였을 때의 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뒤집어 보니까 조금 다 다른 이 상들이 속에 설치고 악마구니처럼 들어있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적어도 육체로서 이만큼 진화해오자면 걸렸던 그 수많은 상들이 ,

아니 육체는 이렇게 진화해 왔고,

진화해 오는 사이에 다른 어떤 빛이 여기 들어왔다 손치면,

 빛에 담긴 그 무든 생각들까지 전부 담겨있는 겁니다.

어찌하여 사람의 전생에 사람의 인생밖에 없으리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야루(열)

 

그것들을 찾아 각각 여행하는 과정이 또한 안반수의의 과정입니다.

그것을 각각 들여다보고,

이 궤도를 보며, 이 궤도를 보며 이 궤도를 따라서 각각의 집을 들여다보며,

그 방 속을 각각 누가 들어있나를 보는 것,

이것을 일러서 안반수의의 관(觀)이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관은 따라서 저절로 시간을 초월해서 볼 수 있는 시(視)와

공간을 초월해서 볼 수 있는 찰(察)로 이어진다.

 

찰(察)은 공간을 초월해서 있었던 것,

시간을 초월해서 있었던 것,

이것들을 전부 들여다보는 것은 이 여덟 집을 봄이요,

이 다섯 궤도를 봄입니다.

 

다섯 궤도 사이에 있는 여섯 가지의 이야기, 여섯 가지의 빛의 공간을 보는 것입니다.

여섯가지의 빛의 공간은 이제 안반수의에서 나를 둘러싸는 여섯 겹의 고치를 트는 실로 작용합니다.

 

내 몸을 칭칭 동여매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그러나 자신의 정신은 분명,

이름하여 정신은 분명 감지하고 알 수 있는 색 리본으로,

빛의 리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 리본을 통과하고 이 리본을 아는 자,

그 이 리본의 방적식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대로 육정육갑, 육정육갑이란 원리는 그렇게 쉬운 것입니다.

배우자면은 10년도 더 걸릴 수 있고,

뭐 연구하자면은 무한만큼 연구해야 될런지도 모릅니다만 뭐 원리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전부 아우르는 아우름의 체계로서의 구, 이제 마침내 나가 완성됐습니다.

 

저절로 돌아갑니다.

그냥 자연 사물처럼, 이제 나는 스스로 자연입니다.

그 자연이 못났던 잘났던 간에 나는 스스로 자연입니다.

스스로 자연인 자신을 일러서 바로 야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도 마찬가지로 자연이라는 것,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렇지 있는 그대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버금바리

 

그런데 이제 안반수의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관을 하되 여덟 개를 관 해야 하고,

5와 4를 관 해야 하고, 나아가서 12도를 관 해야 한다.

 

열을 넘어가는 이야기가 나와있습니다.

열 넘어가는 열 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열고 닫으면서,

여덟 개의 집을 갖고 열고 닫으면서 육체를 만들어 내는 그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야말로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

사람이 애벌레라고 치고 이 애벌레는 언제부터 고치를 틀 수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까?

바로 버금바리라고 하는,

앞서 말한 제가 하나부터 아홉까지의 스토리를 일러서 하바리의 수라고 그런다.

우리말로 하바리라 그런다.

즉 으뜸 원수(元數)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첫 표절, 첫 이야기, 수의 스토리입니다.

 

두 번째 스토리를 일러서 버금바리라 하고,

어쨌든 이 버금바리, 하바리. 이 버금바리의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은, 사람이, 예만 한 번 들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에 있어서는

그 기본적인 버금바리로 나가기 위한 하바리에서의 자기의 선택이 있습니다.

그것을 調라고 합니다.

한자로 조(調)라고 합니다.

 

근데 아무튼 그냥 조기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생명調期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흔히 동양에서 말하는 여7남8이라고 말하는 조기들,

그 조기들에서 어쨌든 버금바리로서 두 번째로는 무엇을 뜻하는가,

애벌레로서의 성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음을 뜻합니다.

즉 나는 애벌레로서는 적어도 완성된 것을 뜻합니다.

 

14 여자는, 남자는 16세 좌우간이면 에벌레로서는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애벌레를 낳을 수 있습니다.

나와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애벌레와, 암수의 애벌레가 서로 결합해서 또 다른 애벌레를 낳을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애벌레가 만들어 지지면 물론 또 다른 빛이 필요하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 남자도 여자도 또 다른 애벌레를 만들기 위해서 내 놓는 것은 精입니다.

精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男精을 여자는 女精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난자와 정자가 아니라 남정과 여정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정과 여정이 하나, 어떠한 빛과 결합이 되면은 다시 또 이 애벌레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겁니다.

 

아무튼 그 가운데서 두 번째 이야기, 복잡하게는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버금바리는, 두 번째는 바로 애벌레로서의 완성이 이루어 진 것을 뜻합니다.

근데 애벌레가 튼튼하지 않으면은

고치를 틀어 놓으면은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나오기 전에 죽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충분히 애벌레를 제대로 먹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먹이는 것이 밥을 많이 먹이는 것이고, 그냥 운동 많이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벌레다운 애벌레의 밥,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일러서 애벌레다운 수행을 하는 것, 이것이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수행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수행이라면 이것을 의미합니다.

 

애벌레로서 애벌레답게 잘 살도록 해 주는 것,

건강하고 기력도 만만하고, 이렇게 꽉 차고 이렇게 살게 해 주는 것,

여기에 재미를 붙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당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뛰어난 애벌레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나 봤자 애벌레는 애벌레입니다.

그런데 이게 재미가 있거든요.

자기는 남의 것 볼 수 있고 자기는 못 보고, 자기는 때려도 남은 못 때리고, 얼마나 재밌겠습니까?

이것이 타락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반수의가 나오게 된 동기입니다.

 

브라만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나 부도지의 체계를 안고 있는 그 수련의 체계는 그렇게 타락했던 적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타락이 없었던 역사가 신라 초기까지 발견됩니다.

 神性 공동체의, 수행 공동체의 사회와 노력이, 물론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하나의 건국의 모델인 나라의 모델이 사실은 존재했던 겁니다.

역사학자들이 관심 갖지 않는 신라 건국기에. 아무튼 그 얘기는 제치고요,

오히려 역사 이야기가 더 황당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걸 언제까지 끝내야 되느냐,

원칙적으로는 버금바리로서 일곱이 될 때까지 끝내야 됩니다.

나난이 될 때까지, 버금바리로는 나난이라고 합니다.

북두칠성을 나난도리라고 그러지지요.

우리말로는. 일본말도 나난이고, 만주어로도 나난이죠.

나난이 될 때까지는 끝내야 됩니다.

버금바리로. 물론 남자들을 좀 더 여유가 있는데요,

자기 조기에 해당되는 숫자만큼, 여자는 7×7 49전에 애벌레로서 건강함을 찾아야 합니다.

남자는 64세 전까지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 또한 아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넘어갈 수 있는데, 다만 어렵지요.

시기를 놓치면 어렵지요.

오히려 시기를 놓쳐서 어려워서 마음이 절망에 가까운 사람이 오히려 빛을 보기도 합니다.

저는 제 공부하는, 제 문중에서 그와 같은 경우를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제 셋째 사형께서는 너무나도 많은 나이에 시작하셔서 너무나도 높은,

아름다운 고치를 틀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정신을 이루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수행하면 포기해버릴 나이에. 70이 가까운, 예순이 훨 넘은 나이에.

아무튼 애벌레로서의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원래 옛 모든 사회가 공장이 아니라 모든 사회가 학교의 확대판이던 시절에는

정말 신성한 공동체를 꿈꾸던,

부도의 공동체를 꿈꾸던 시절엔,

그와 같은 전통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만,

전 사회를 학교로 보려고 하는.

그 시절에 사람은 14세 내지 16세 까지 바로 애벌레를 제대로 키우는,

고치를 트는 연습단계의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충분히 익히고, 알고, 깨치고,

이제 이 나이가 넘어서는 제 길을 가서 고치를 트는 것 그것이 부도라는 공동체를 세운,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의 일이고 공부였습니다.

이걸 하기 위해서 먹고살아야 했고 그러자니 일해야 했던 겁니다.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것이 오늘날 공장화된 사회의 특징입니다.

공장화된 사회에서는 일하기 위해서 쉬어야 합니다.

공장의 노예로서,

 

그러나 신성공동체에서는 다릅니다.

부도라는 공동체에서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 그 뒤받침 하기 위해서 일하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먹고살고, 내 먹을 만큼만 벌기 위해서 원시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오,

이것을 이룰 수 있는 만큼 만 일합니다.

내게 이러한 정도의 시간이 있을 만큼만. 그것이 진정한 잉여의 이유입니다.

잉여 생산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는 것, 애벌레를 제대로 키우는 것도 수행에서 중요한 몫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중요한 몫인데, 이 시간은 이것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간은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제칩니다.

그러고자 하면 좋겠지만은 한꺼번에 할 수가 없어서,

이것은 따로 병행한다는 전제하에서 또는 병행하지 않는다면 요행에 맡긴다는 전제하에서,

이 고치 속에서 죽든 말든 저는, 여기에 달리 것이니까 그건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높은 단계에 이를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애써서,

무리해서 고행하지 말라 한 것은

그렇게 까지는 안 해도 고치를 틀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과 그것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고행을 해서 억지로 해야만 고치를 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기 몸이 그냥 건강하게만 돌아가면은 할 수 있다.

그러면 엔간해서는 고치 속에서 안 죽는다.

엔간해서는 그 정도면 고치를 충분히 뽑아낼 수 있다.

색의 리본을 충분히 뽑을 수 있다.

그 정도면. 그래서 병행하기를 권합니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어떻게 고치칠까.

 

빛 - 天易

 

빛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1번에 대한 스토리를 오늘 시작합니다.

1번에 대한 스토리는 사람에 대한 전제를 한계로 해서 시작하겠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1번의 스토리를 읽은 것을 동양에서는 天易이라고 그럽니다.

이것을 또한 복희가 체계화 시켜서 역으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복희의 易卦라고도 합니다.

복희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흔히 팔괘도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얘기하는,

地易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겠습니다만은 그건 이 시간에 중요한 몫은 아니고,

지역은 그냥 돌아간다, 열고 닫음이 됐다는 전제 하에서 드리는 얘기니까요.

 

이 천역이 이제 바로 나 자신의 하라, 나 자신의 빛의 실상이고, 그 색의 리본입니다.

그 리본을 가지고 이제 내 아래 모든 것을 감싸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안반수의의 시작입니다.

 

이제 천역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 이것은 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것이 단순한 원이 아니라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치 반 쪼개놓은 원처럼, 그리고 그것은 돌아가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은, 이것을 그냥 제가 표준적으로 그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마다 몰려 있을 수도 있고,

그가 어떠한 이 무대에,

이 무대에 어떠한 상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떠한 생명 실체를 담고 있냐에 따라서 엄청난 쏠림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1번이 이 만큼일 수도 있고, 나머지 짠짠짠, 이게 이 만큼일 수도 있고,

이렇게 몰려 있을 수 있는 쏠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쏠림은 스스로 봐야만 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이 쏠림에서 이 이름을 일러서 복희괘에서는 乾이라고 불렀습니다.

건이라고 불렀을 뿐 그 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색은 스스로 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시간에 제가 반칙을 하겠습니다.

색에 대해서까지도 말씀을 절반은 드리겠습니다.

 

그.. 이렇게 이야기 안하고, 괜히 이건 乾이구요, 이건 태(兌)구요, 이건 이( )구요, 네 번째는 진(辰)이구요, 색은 몰라요, 이렇게 해 놓으면은 나중에 컨닝을 잘 못 해 가지고 로댕이 덴뿌라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기 전에 어느 정도, 절반 정도는 제가 베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시고 나머지는 알아서 찾으셔야 합니다.

 

오 번을 이름을 손(巽)이라 하구요.

육을 일러 감(坎)이라 하고,

칠을 일러 간(艮)이라 하며,

8을 일러 곤(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여러분 머리 속에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미약해서 그 길을 찾기조차 힘들고,

이제는 이 무질서한 상들에 의해서 이 길들이 거의 희미하게 되어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이 길이 관념이요,

실상이 아니라면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관념을 통해서 이것을 얼마든지 자기 임의대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생각 또한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이 아닌 생각이 아니라,

생각이 바로 실상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은 생각도 중간에 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관념이 관념이라면은 끊어질 리가 없고 임의대로 스토리를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관념은 결코 우리가 써 놓은 단순한 스토리, 우리가 꾸며낼 수 있는 거짓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을 실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해 보시면은 자신이 얼마만큼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이걸 관념이라고 얘기하고 무시해도 좋습니다.

이 관념이 안 되는 거예요.

관념이면 다 되야 될 텐데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여러분의 대칭성에 있습니다.

몸의 대칭성에 있습니다.

 

일단 원리는 빼 놓고 실상부터 말씀 드리면 몸의 대칭에 있습니다.

한 가운데 있습니다.

한 가운데에서 이 빛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빛은 실제로 지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8字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안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여러분의 뇌의 한 복판에 마음속으로 점을 찍어 보십시오.

뇌의 한복판에 마음속으로 점을 찍고 이 제일 꼭지점을 정문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1번을. 정문으로 생각해 보세요.

한 복판으로, 머리를 만질 때 톡 튀어나온 한 복판으로, … 쏙 들어간 뼈구멍이 들어간 데가 있습니다.

이 뼈구멍은 눈과 코와 입이 만나는 경계를 이룹니다.

코는 좌우가 물론 다릅니다.

코는 좌우가 똑 같으면 하나만 생기지 두 개가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두 개가 생긴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냥 도깨비처럼 보이지 말라고 코가 두 개가 있는 게 아니고,

코 기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불교에서도,

불교에서 스님들이 하니까 불교수행이라고 그러는데

원래 불교수행은 아닌데 위빠사나 같은 걸 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어쨌든 이것이 코가 만나는 이 구멍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머리에 톡 튀어나온, 뒤에 베개를 바칠 때, 목침을 대면을 아픈 부분의 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원을 막구요, 머리의 한 복판을 그려주시기 바랍니다.

머리의 한 복판, 그냥 여기 태양의 혈이 있는 부분을 확 뚫고 지나갔을 때 가장 아픈 부분을,

연필로 확 뚫었을 때 복판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궤도를 한 번 그려보세요.

잘 그려지는지.

잘 그려지면 이건 관념이에요.

잘 안 그려지게 되어 있어요.

 

왜?

그렇게 안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머리카락을 저처럼 이쪽으로 넘긴 사람, 저쪽으로 넘긴 사람,

머리를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한 사람, 옷 마음대로 한 사람, 거기에 따라 가지고 이것이 또 삐뚤어 져요.

저처럼 이쪽으로 가면 이쪽으로 삐뚤어 져요. 이쪽으로 삐뚤어 져서 이리 가겠죠?

 

안돼요. 끊어지기를 반복하고 잘 이어지지를 않아요. 허나 이어야 됩니다.

잇는 방법이 물론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어야 되요.

그리고 이것이 함부로 커지면 위험합니다.

이것은 커지면 각각 걸어 메는 걸대가 있습니다.

즉 들어가 주는 곳이 있고, 나와주는 곳이야 하나라고 치더라도,

들어가 주는 곳을 잘 못 놓아서 함부로 꿰려고 시작하면은 온 몸이 산산이 박살나버립니다.

 

내 몸을 빨리 한번 고치 틀어 봐야지.

먼저 실 뽑는 연습도,

실타래를 돌리는 연습도 제대로 안하고 함부로 돌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책임 못 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돌아버릴 수도 있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몸이 180°까지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방법도 안반수의에 다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각각에 맞추어서 각각 걸대를 계속 늘려 가는 겁니다.

 

고치가 확인 될 때마다. 그 고치를 늘리는 겁니다.

홍두깨의 국수를 늘리는 것처럼 늘려 가는 겁니다.

늘리되 제 걸 고리에다가 바르게 집어넣어서 마침내 어디까지?

이 관원과, 관원이 아니라 엄밀하게는 우리말로 모로바라고 하는 부분과 범어로도 마찬가지,

알타이라고 하는 곳,

이른바 선관이라고 표현하는 부분,

선장관절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 양 걸대를 걸어서

그 부분까지 고치를 돌릴 때 완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밑거름틀에 자신은 들어갑니다.

 

이제 완전한 고치를 틀 수 있게 됩니다.

그 속은, 이렇게 까지 꿰었을 때는, 이렇게 까지 빛의 실을 꼬았을 때는,

마침내 알타이와 모로바에까지 걸었을 때는,

통로를 걸었을 때에는,

그리고 그것이 돌아가기 어느 정도가 되면 자신은 하나의 빛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

모든 빛을 뽑아서 고치로 썼기 때문에 자신의 그 고치 안은 완전한 암흑입니다.

이것을 뚫고 나가는 것이 화두를 깨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것이 화두를 깨는 것이요, 그것이 의단 동로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되지를 않는데,

어쩌다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되는 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안 믿는 분들이 있겠죠.

스님들 중에도 안 믿는 분들이 절반이 넘으니까!

전생을. 전생에 이런 공부를 했던 사람은 쪼매만 가르쳐 주면은 하다가 보면은 저절로 되는 수가 있어요.

했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100명이 시작해서, 참선을 시작해서, 고치를 못 틀고 99명이 병신이 돼서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연에 맡기라고 안반수의는 말하지 않습니다.

안반수의의 말씀은 그것을 하나하나,

 바른 사다리를 따라서,

바른 계단을 밟아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빛을 처음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8字를 돌릴 수는 있잖아요.

자신의 머리는 이렇게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코는 여기에 있구요, 귀는 여기에 있구요, 이렇게 해서 빛이 도는 겁니다.

그냥 처음에는 선만 생각하세요.

자신의 손가락 만한 굵기로만, 쪼금 더 줄여서 칼국수 만한 크기로만, 철사만큼 가늘어지지는 않도록,

이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데 어느 순간 환하게 느껴지는 때가 옵니다.

그때 그것을 일러서 바로 의를 지켰다 하는 것입니다.

수의를 지켰다 하는 것입니다.

즉 의관을 돌파한 것입니다.

의관을 돌파했다함은 이것이 실제 도는 것은 우리가 1초, 2초, 3초,...10초에도 할 수 있습니다.

1분에도 할 수가 있고, 호흡은 일단 제쳐놓고요. 호흡은 아직은 다음문젭니다.

할 수 있죠.

이것이 1초가 되는, 2초가 되든, 마침내 이 선을 찾게 되면은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할 때가 옵니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 만에 한 바퀴를 돌아가느냐, 바로 자기에게 맞는 한 홀로 돌아갑니다.

한 홀, 이것을 일러서 일단 찰나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찰나가 따라서 찰나가 아닙니다.

'찰나' 또는 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자신의 빛이 일주기 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이 일주기 하는 단위는 빛의 고리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분해 할 수 없는 생명의 단위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일주기 하는, 분해할 수 없는, 가장 짧은 시간을 일러 홀이라 하고,

한자로 일러 찰나라 합니다.

그 찰나는 1초의 10배일수도 있고 또한 1초의 만분의 만분의 만분의 1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그것이 최소의 단위입니다.

대게 그것은 1초보다 훨씬 짧습니다.

언젠가는, 자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의식은 1초를 중심으로 기껏해야 32개 이상의 영상을 만들지를 못합니다.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 낸 상상이라 하겠습니까?

자신의 관념은 1초에 32개 밖에 절대 만들지 못합니다.

여러분 만들어 보세요.

 1초 내에 32개의 상을 만들어 보세요.

만화가 1초에 16커트로 구성되는데, 그 만화만큼도 못 만듭니다.

만화가 그래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 때 만화는 전부 서 있습니다.

만화영화는. 만화 영화는 그냥 커트 커트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사람의 관념이겠습니까?

 

여러분이 그것이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는 훈련도 해야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심심파작으로 일단 오늘은 가시면서 차칸에서 한 번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잘 안 된다는 것을 아실꺼고, 조금이라도 이 궤도를 거치는 짧은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머리가 텅 빈 것을 느끼거나 머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때로는 그것이 몇 번 궤도를 바르게 지나가게 되면은

가슴이 메슥메슥하고 울렁거리고 진동이 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

차칸에서 진동까지야 느끼겠습니까.

어쨌든 열 번하면 그 중에 한번은 바른 길로 가니까,

누구든지 그 정도는 되니까요.

그 정도로 안됐다면 이 장소에서 만날 인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섭섭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이 찰나를 보는 것, 찰나를 지키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수의입니다.

 

그러니 이 수의야말로 어떻게 외줄타기가 아닐 것이며,

어떻게 내 안과 밖의 경계를 타는 아우름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제일 첫 시간에 수의에 대해서 외줄타기라 말씀 드린 것이 거기에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저도 이와 같이 하는 이야기가 언젠가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어서

무슨 황당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쳐다보는 그러한 무대에 있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만,

별로 그럴 소지는 적어보입니다.

 

아무튼 이 길이 갑니다.

이렇게 길은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길에 한 가운데 있는 이 출입구, 이 출입구를 일러서 바로 널심이라고 합니다.

 

널심은 양쪽에 있습니다만은 널심이 모일땐 하나로 모입니다.

원래 연지곤지를 찍을 때 찍는 곳인데, 요즘은 보기 좋으라고 여기에 찍죠. 원래는 여기에 찍습니다.

여러분 찾아보세요. 누르면 아픈 곳이 있어요.

이렇게 쪼금 눌러보면 굉장히 아픈 곳이 있어요. 양쪽에다, 그것은 한군데서 만납니다.

인체를 쪼개면은, 쪼개봤냐고 물으시겠죠. 물론 쪼개봤습니다.

동양학을 한다고 서양적으로 안 쪼개보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널심이라 합니다.

 

한자 혈 이름으로는 그것을 사백이라고 합니다.

또는 옥혈이라고도 합니다.

옥혈은 도가에서 쓰는 한자어요,

사백은 한의학에서 쓰는 한자어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사백과 옥혈은 침놓는 자리로서 표피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표피가 아닌 널심은 그 안을 말합니다.

그 안, 그 통로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요것은 중가마지요, 정문이니까 중가마지요.

가마라는 것은 이처럼 툭 튀어나와서 빛이 분출하고 있는 영역을 말합니다.

이 영역을 가마라고 그러고 가마에는 상가메, 중가메, 하가메가 있습니다.

수많은 가메구멍이 있습니다.

그리로 수많은 빛 구멍이 뿜어 나오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가운데서 중가메에 해당되는 중가마에 해당되는 정문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좀 앞이 될 수 있고 뒤가 될 수 있는데,

여러분의 머리를 만져보시면 잘 가다가 쑥 꺼진데가 있습니다.

이렇게 훑어가다 보면 꺼진 데가 있습니다.

꺼진 데가 중가메입니다.

 

볼록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데가 아랫가메입니다.

그리고 웃가마는 대게 어디로 생각하냐 그러면 가마 앞, 진짜 가마가 있는 앞,

사람이 바르게 섰을 때 한 가운데, 이 영역을 일러서 가마라고 그러는 것이고 이것은 가마점이죠.

가마터지요. 넓은 가마 영역이고,

이 뒤를 일러서 바로 이것을 바로 한자로 바로 옥침혈이라고 그러죠,

배개를 밸 때 데는 옥침혈, 옥침의 뒤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가만히 몸밖으로 해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걸로 해 보시면, 그림을 한 번 그려보세요.

잘 안 그려집니다.

어느 순간 그려지면은 제 이야기도 듣기 싫고 그것만 돌리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오늘 차칸에서 잠시라도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될 겁니다. 조금은.

 

그리고 그것을 하다가 괜히 가슴이 울먹울먹하다든가 메스껍다든가 머리가 텅 빈 것 같아서

바보가 된 것 같다든가 해서 후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만큼 이상의 대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여러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물론 가슴이 메스꺼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빛이 머물고 있는 부분과 땅이 머물고 있는

주된 영역 사이의 이 통로가 제대로 계발이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름하여 중단전은 사실은 단전이라고 할 수 없고,

위와 아래를 서로 공명시켜주고

위와 아래가 서로 같은 차원에서 만날 수 있도록 변환시켜주는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장과 간과 폐와 심포등은 바로 그와 같은 공명장치를 위한 육체적 기관입니다.

 

자 아무튼 이것은 대게 그와 같은 물질들을 끌어 당겨서 자신을 끊임없이 분해하고 합성하는,

빛과 합성하고 분해하는 기관이고

그것을 분해할 수 있도록 닷을 실어 나르는 육체적인 기관들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쭉 돼서 장이 있는 이 구간은 주로 우리가 먹어 가지고 닷을 섭취한다는 거죠.

보잘것없이 말입니다.

너무나도 보잘것없게도,

다른 것에서 가만히 이렇게 와 가지고 섭취해서,

닷을 섭취해서 고도한 물질을 못 만들고,

맨날 꾸역꾸역 먹어 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물건 찌꺼기와 빛하고 결합시켜 가지고

신진대사만 겨우 하면서 60평생, 70평생을 겨우 살다가 죽는 겁니다.

애벌레로서.

 

어쨌든 이 기관을 일러 아래라 하고, 이 기관을 위라 하면은 상과 하가 잘 교통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현대인들,

제대로 먹지도 않고, 먹는 거 마저 제대로 안 해주고 그저 입에 달짝찌근 한 것만 먹어주고,

그저 이 상이 먹어라 먹어라 하는 것만 먹어주고,

해 가지고 그것 마저 제대로 공부를 못 하는 와중에 잘 교통마저 제대로 안 되고,

그나마 위에서 쓰는 것은 엄청나게 써 재끼죠.

슈퍼컴퓨터보다도 더 복잡하게 쓰지요.

너무 많이 집행하고, 너무 부족하게 하고, 그나마도 통교가 안되고,

어찌 이 공명장치가 이 전달장치가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탈을 안 일으키겠습니까?

탈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그 탈을 일으키는 것이 심각한 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탈은 거꾸로 여기에 있는 육체를 자가치유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공부를 하면서 저절로 치유되는 것이지

이런 것 치유하려고 이거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다보면은 저절로 치유되는 겁니다.

 

치유의 처음은

울렁거림과 메스꺼움과 그리고 이것이 차례대로 잘 탑처럼 놓이기 못함으로써 말미암아서 생기는,

중심축의 불안으로 말미암은 진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전부다 일단 한 번 걸쳤다는 8字를 한번 걸쳤다라는 증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스스로 통제하는 겁니다.

더 이상 상들이 짓고 뛰고 하면서 지 임의대로 소잡아라 닭잡아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찌 내 마음이 한가한 것을 탓하겠습니까?

마음이 복잡해서 슁슁 돌아가는 것을 탓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하나를 가지고,

고치를 트는 하나를 가지고 나머지를 감싸는 나머지에 대한 하나에 이야기,

그 가운데서도 사람의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다음 번은 이 하나는 어떻게 감쌀 것인가,

무엇을 감쌀 것인가,

감싸는 그 대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그리고 이것이 빛이 돌 때,

쉽게 말하면 내 몸 전체로 보면은 여기에서 빛의 고치가 돈다고 하는 것은

무언가 내 속에 있던 빛과 닷의 합성물이 분해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분해된 빛이 올라와서 돌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닷은 이렇게 분해된 빛이 도는 이상, 닷은 상승적인 닷으로 바뀝니다.

전환합니다.

 

이 닷은 이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할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이것을 공부하는 역의 방법도 있습니다.

이것이 엄밀하게는,

이 역의 방법을 가지고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 사실은 제가 공부한 문중의 공부법입니다.

그것을 일러서, 하를 가지고 상을 다스리는 것을 일러 좌방이라고 합니다.

상을 가지고 하를 다스리는 것을 일러서 우방이라고 합니다.

좌도방문이 아닙니다.

 

연정원을 세우신 어떤 분이

그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당신이 어디서 들으신 것만 가지고 그래 말씀하셨는데,

원래 좌도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

이 닷을 가지고 빛을 다스리느냐,

빛을 가지고 닷을 다스리냐는 문제입니다.

방법론적으로는 이것이 빠르고, 이것이 튼튼합니다.

저는 제 공부를 배운 문중을 주장하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밝아질 수 있는 방법이라면은

저와 원수를 맺은 공부법이라 할지라도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절하여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왔습니다.

 

아무튼 안반수의를 시작한 이상, 이 방법보다는 이 방법(상으로 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치중을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왜?

이 방법은 안반수의 당시에서는 상식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도 이야기 하는데, 이 방법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닷이 분해된 닷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하여서 어떻게 상승하는가? 상향하는가?

정말 애벌레는 이 닷을 완전 물질로 완전 소화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전 소화되는가 하는 과정을 얘기 드리기 위해서 다음에는 이 구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두리'의 스토리입니다.

오늘 첫 번째 스토리 여기서 마치고 다음시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01. 3. 22. 조계사 교육원)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4)

 

설한 바 없는 법

 

지난번까지의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서 말한다면

사람은 애벌레로 태어나서 애벌레로 죽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애벌레로 태어나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존재인데 그러자면은

고치를 틀고 자신을 그 속에 가두고 깨어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말 사람이라는 것은 인격화된 밝은 태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인격을 갖추게 된 밝은 태양을 일러서 사람이라고 하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당연히 그 인격을 갖춘 밝은 태양답게 스스로 밝은 태양으로 나아가야만 됩니다.

 

팔만대장경에 담긴 모든 내용이 부처님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편의상 그 모든 것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하자면 부처님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몇 십 년 동안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도 설한 바가 없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을 두고 쉽게 생각하지 못한 소유의 의식에 젖어버린 우리는 거기에 철학적인 해석을 가합니다.

철학적인 해석을 가해서 우설설(?)을 말하고, 말아닌 말을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어려운 것을 만듭니다.

그러나 사실 소유라는 우리의 개념을 벗어나면 그건 아주 쉬운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내가 그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 어느 이야기 하나 내 소유인 것이 없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 많은 이야기를 한 부처님의 본뜻입니다.

수많은 이야기를 내가 했으나 이야기한 바 없다는 것은 그 모든 이야기가 나의 소유가 아니다.

나는 그냥 우주의 기계로서 우주에 있는 기계로서 그 역할을 다 했을 뿐

그 우주의 이야기를 그냥 바람처럼 구름처럼 뱉어났을 뿐 하나도 내 소유로써 지은 것이 없다.

논어로 말할 것 같으면은 술이부작(述而不作)입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바람처럼 구름처럼 토해났을 뿐

어느 것 하나 내가 내 이름 붙여서 나의 지적 소유로 지어낸 바가 없다.

그러니 그 어느 것이 나의 것이겠느냐.

내가 말하나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처럼 내 소유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면 그렇지가 않죠.

우리가 무얼 하나 쓰더라도 지적저작권이 있고 그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또한 아닙니다만, 저 또한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입에서 나오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 제 소유물은 없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도 마찬가지로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칼날을 세울 것도 없고 또 마음에 다른 경계를 세울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유가 아니요, 또한 저 자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냥 흘러가는 흘러 내뱉는 하나의 이야기이고

저는 그것을 토해내는 하나의 스피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와 같은 것이 제 마음인 것을 헤아려 주시고,

마음의 칼날이 있다면 주욱 눅이시고 그냥 바람 소리 듣듯이,

구름 소리 듣듯이 들어주신다면 더욱 더 고마울 뿐입니다.

 

 수행

 

지난번의 시간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고치를 틀어야 되는데 그 고치를 튼다는 것은 빛의 고치였습니다.

내 몸 속에 들어있는 빛을 뽑아내서 고치를 트니 그 빛은 분해 된 것이라. 무엇과 분해된 것인가?

빛은 바로 닷과 분해된 것이라.

 

빛이 내 고치를 틀면은 빛과 분리돼서 나간 나의 닷이 또한 어디론가 갈 법.

그 빛을 가지고 주인으로 삼아서 빛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그 닷의 가는 길을 볼 것이니,

내 밖에서 그 빛이 작용해서 볼 것인바,

내 육체의 눈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내 빛의 감각으로 그것을 보는 것을 일러 관(觀)이라 한다.

 

그리고 그 떨어져 나간 닷이,

금빛 닷이 이궁에서부터 중궁으로 똑똑 금물처럼 응어리지고 떨어져 나갈 때 그것을 관(觀)하고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며,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하는 그 시간의 경우를 넘어서서 살펴볼 것이니,

그것이 바로 시(視)가 됩니다.

 

볼 시(視)가 되고,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연고를 불러일으킬지 그것을 세밀히 파고들어서 살피고

그 한없는 영역을 살필 것이니,

그것이 또한 찰(察)이 됩니다.

 

그렇게 내 빛을 분해 시켜서 내 빛을 주인 삼아서

그것을 가지고 그 감각으로써 나의 분해되어 가는 닷을 볼 것이니,

 그 닷을 보고 그 닷이 실제 상으로써 실제 사물임을 알고

그 사물을 달래고 녹이고 해서 그것이 나의 주인으로 행세해 왔던 그 모든 인연을 넘어 설 것이니,

그것이 수행(修行)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두리 - 보는 일과 듣는 일

 

이번 시간에 수행에서는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이르기를

수식(數息)을 하다보면은 어려운 점이 무질서한 점을 일러서 난(亂)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천하가 '어지럽다'할 때 등등 쓰는 난이라는 개념,

어지럽다는 개념은

우리가 어지럽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서 간과하기 어렵다면은 한자어를 섞어서 말씀드린다면 무질서,

질서를 잃어버린 것을 난(亂)이라 이릅니다.

 

하나의 규칙적인 자기 완결적인 어떤 질서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을 난이라 한다면은

공부를 하는 수식(數息),

안반수의(安般守意)에서도 난(亂)이 있습니다.

그 난(亂)에 대해서 안반수의에서는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안이 지나친 것,

안이 너무 지나친 것

그리고 밖이 지나친 것,

반이 지나친 것.

 

내(內)가 과한 것,

외(外)가 과한 것

그리고 내(內)와 외(外)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

서로 불일치 하는 것,

 

이것이 수상행식(?)을 할 적에 수식의 기본적인 세 가지 무질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무질서를 이야기함으로써 두 번째 이야기의 소리인 부분을 이야기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첫 번째 이야기,

기본적인 으뜸바리가 되는 하바리가 되는 수의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가지고 밝혀 놓은 근본적인 방법으로서의

선치삼재후로일원상(先治三才后路一元相)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은 꽈배기 돌린 8자 돌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유의 사항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않드렸습니다.

오늘 그 유의사항을 들으시면서 해보시면 보다 수월하실 겁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감각에 끌려가지 않고 빛의 감각으로 나를 보려면

나를 육체적으로 기대온 감각으로부터 일정하게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 핵심적인 첫 점이 바로 '눈'입니다.

 

우리가 냄새 맡는다, 듣는다,

촉감을 가진다하는 모든 것도 사실은 보는 것에 특이한 감각의 하나일 뿐입니다.

 

모든 감각은 본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맛도 보고, 냄새도 보고, 소리도 보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 보는 감각이 특이한 신체적 형태로써 나타나서 총합으로써 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그 총합으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도 사실은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고, 또 하나의 다른 것이 있다면은 보는 일과 다른 하나가 있다면은

대응되는 일이 있다면은 그것은 듣는 일입니다.

 

듣는 일과 보는 일은 조금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보는 일과 듣는 일은 두 번째의 수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두리'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빛은 빛 자체로서 완전하지만 그것이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빛은 두 가지의 특징을 드러냅니다.

하나는 빛이 끊임없이 바르고자 하는 것이고, 하나는 빛이 굽어 있는 일입니다.

곡직전후상하(曲直前後上下)가 바로 여기와 같은 것인데,

그 빛 가운데서 곧은 것이 이른바 보는 것이요,

굽은 것이 듣는 것입니다.

 

음부경에서 말하기를 고자( 者)는 눈이 먼 사람은 잘 듣고, 귀가 먼 사람은 잘 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두 가지는 같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빛을 기(氣)라는 음식으로 구체화 시켜놓고 본다면은,

그 빛 또는 그 기가 곧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이것이 시력을 결정합니다,

육체적으로는 그리고 보는 모든 감각을 결정합니다.

 

직(直)이 너무 과해서 곡(曲)이 적으면은 들리지 않게 됩니다.

들리지 않는 사람은 옛날에 망보기로 세웠습니다.

옛날에 귀가 먼 사람들을 망보기로 세웠는데,

그것은 잘 들리지 않아서 습관적으로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의 기운이 한쪽으로 치우쳤기 따름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곡(曲)이 너무 과해서 직(直)이 부족하면은 잘 듣지만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소경이라 하면은

잘 듣는 것에 지나서 나중에는 신의 소리까지 듣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소경에게 하늘의 뜻을 묻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였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굽은 것이 있고 바른 것이 있는데,

바른 것을 일러서 우리말로 '아'라 하고,

굽은 것을 일러서 '어'라 하며

이것을 일러서 살림이라 하고,

이것을 일러 죽임이라 하며,

이것을 일러 풀림이라 하며,

곡(曲)을 일러 또한 거둠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한편으로는 양(陽)이 되고 이것이 한편으로 음(陰)이 됩니다.

음과 양이 각각 살림과 죽임,

살림의 측면과 죽음의 측면,

풀림의 측면과 거둠의 측면을 갖는 그 이유는 빛이 가지는 그 특징의 두 가지 성격,

하나는 곧게 가고 하나는 굽어서 가는 것,

이 두 가지가 어울리면은 바로 실제의 빛이 됩니다.

실제의 사물이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어울리지 아니하고서는 사물로서 존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가는 있을지라도,

어느 한쪽이 없이 어느 한쪽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결합이 되면은 그 존재는 이제 스스로 자립적인 생명으로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하나의 가상의 세계이고, 하나의 조합된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물질적 제 조건으로 조합된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조합된 세계 속에서는 그 조합된 물질을 가져야만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있어도 다른 모든 세계를 또한 여행할 순 있습니다.

 

죽음의 세계, 또는 other world라고 부를 수 있는

수많은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명단위로써는 자리 잡습니다.

이것을 일러서 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살림입니다,

이것이 삶입니다.

이것이 곧 생명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결합,

이 두 가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빛은 마침내 닷과 결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 닷의 본의미이며, 이것을 상징하는 여기에 담기는 요소존재를 또한 닷이라고도 합니다.

닷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빛이 구체적인 물질을 떼어놓고 직과 곡으로써 그냥 순수한 빛으로써

내 상부로 올라 가버렸을 때 하부에서는 이것과 해체된 물질로써의 닷이 똑똑 떨어집니다.

이것이 이른바 금단자조낙수중(金丹紫調落水中)이라는 것입니다.

자빛을 띈 금단이 끊임없이 중(中)을 향해서 낙숫물 떨어지듯이 하는 구절이 바로 이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을 향해서 똑똑 떨어지는 그것을 보고 그러고나면 이 금단자조중에서 금빛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은 색깔이 그 사이사이 빛을 따라 변화하면서 불경에 말하기를 견종종색하라.

 

종종의 여러 갈래의 색을 본다 했는데 그와 같은 색을 드러내면서 각각 있는 제 있을 장소로 이동해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 담겨서 언젠가는 다시 풀려나오고 또 들어가고 하는 그와 같은 여정을 반복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일이고 그 어떤 경우에도 우주간에서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는 면에서

하나의 보편성을 가지는 형태로 인간이라는 제한된 형태에서는 나름대로 보편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류로써의 종자입니다.

 

 

. 동일한 수행법

 

오늘 가끔 제가 드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을 하겠습니다.

흔히 명리학(命理學)이라는 이학에 대한 반복을 조금 더 할려 합니다.

명리학이라고 하면은 일단적으로 사주학을 말한다는 건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이름을 내걸면 동양철학관과 점집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리라는 것은 말 그대로 명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명리학이라 함은 그와 같은 명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명(命)이란 무엇인가?

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없이 명리학(命理學)은 명리학이라고만 전제하면

생물학이 살아있는 모든 물질의 이치를 연구하는 생물 이학임을 모르고 그냥 생물학으로써만 생각한다면 그냥 굳어진 하나의 주어진 학문이 되어 버리듯이

명리학도 지금 현재는 주어진 하나의 틀이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명리학에서 명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간의 신(神)됨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인간이 신(神)을 이루는 내용이 무엇인가?

즉 사람에게 주어진 최소 단위로써의 그 굽은 것과 바른 것이 있는 합체된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과거에는 이렇게 봤습니다.

 

우주에는 있는 원기(元氣)와 우주에 있는 원정(元精)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합의 방정식이 바로 그 종자를 결정하는 명(命)이다 그 종자의 명(命)이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즉 나는 나의 인신(人神)은 나의 신(神)이라는 것은 우주의 어떠한 기와 우주의 기 가운데

어떠한 갈래와 정 가운데 어떠한 갈래가 결합하고 있는가 하는 결합의 방정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결합의 방정식을 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림으로 그려보면은 이런 그래프로 되겠지요.

하나에는 원기(元氣)가 있고 하나의 원정(元精)이 있다면 이 두 개의 함수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점들이 형성될 것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점들이 형성될 겁니다.

그리고 그 점들은 각각 고유한 하나의 영역을 가질 것입니다.

이 영역을 일러서 종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종자도.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형성된 종자는

그 자체로써의 하나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며 그 종자 내부에서만 같은 원기,

같은 원정의 결합관계 안에서만 재생산을 거듭합니다.

 

인간은 동물과 관련해서 제 2세를 나을 수도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온 2세들끼리는 결코 또다른 2세를 낳지 못할 것입니다.

 

호랑이와 사자가 섞어서 뭐 이상한 것을 만들어내도

그 라이거들끼리는 또다른 라이거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원기와 원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종입니다.

 

이와 같은 영역들 속에서는 적어도 어느 정도 범위 안에서는 원기와 원정의 관계가 보편적이다.

인간이라는 범위 내에서는 이 범위의 limit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소치와 최대치로서의 limit가 한계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 한계점에 대한 설정이 하나의 인간이면 인간, 개면 개,

돼지면 돼지를 결정해 온 동양 나름의 종자 분류학인 겁니다.

그 종자 분류학도 동양에서는 물론 수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일러 10이라 하고 원숭이를 일러 5라 하기 때문에 원숭이와 사람은 결코 진화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라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동양학의 이론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것을 명이라 하는데 이 명이 인간에게는 적어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누구나 적용받을 수 있는 수행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내에서 이와 같은 limit가 존재하며

이 limit는 인간 자체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면은

그 얼굴 다르고 몸 다르고 생각 다른 모든 수십억의 인구들이 동일한 수행법을 채택할 수 없는 것이죠.

동일한 수행방법을 쫓아서 내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나의 보편성과 나의 limit를,

나의 한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약간의 특수성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특수성 또한 무시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그러나 안반수의도 이와 같은 보편성에 입각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용호비결이 또한 마찬가지이며,

주역 참동계가 마찬가지이며 그리고 다른 수행의 문헌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limit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을 때, 그 수행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limit를 가지고 내놨기 때문에 이 limit는 전부 수(數)로 표현됐기 때문에

그리하여서 수(數)를 따른다는 하는 것은 그 함수관계 방정식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수(數)라는 것을 생각해 주셨으면 하구요.

 

이것을 간단하게 보는 방법도 있겠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직(直) 즉 양(陽),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그냥 곡․직(曲․直)으로만 두 개로만 딱 나누고,

이것도 각각 곡․직(曲․直)으로만 두 개로만 딱 나누고,

그러하다면은 직(直)과 직(直), 이것이 중심 축이고 이것이 비중심축이라고 한다면은,

이것이 직(直)하고 이것이 직(直)하니 이것이 양(陽)하고 이것이 양(陽)하니 이 경우는 그냥 직(直)․

직(直) 즉 태양이라 하자.

 

이 경우에는 직(直)하고 곡(曲)하니 직(直)이 중심이 되고 곡(曲)한 성격이 있으니,

 그냥 반양(半陽) 또는 소양(小陽)쯤 한 걸로 보자.

 

이것은 기본적으로 곡(曲)한데 직(直)한 기운이 있으니, 이건 소음(小陰)쯤 보자.

이거는 곡(曲)․ 곡(曲)하니까 음(陰)․ 음(陰)하니까 태음(太陰)쯤 보자.

 

이것이 편의적으로 가장 간단하게 제출해놓은 인류역사상 가장 간단한 명리학(命理學)입니다.

이것이 사상의학입니다.

왜 그 무지몽매하던 시절에는 이 정도 단순하게 해나야만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명리학(命理學)의 기초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각각 하나의 현실적인 기술로만 이해해서

이와 같은 명리(命理)에서 나온 것임을 망각하고 기술로만 생각해서 이것을 더 발전시킬려고 한다면은

기술적인 차원에서만 발전시킬려고 한다면은 발전이 없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이 직(直)도 편의상 나눌 수 있는 어떤 기준을 얻어야만 하겠습니다만,

이 분류법도 존재합니다.

이 분류법도 물론 존재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분류법의 내용을 떠나서 그 분류법을 현실에서 이제는 12개로 나눠버리죠.

이것도 12개로 나눠버리면 벌써 144 명리학(命理學)이 나옵니다.

 

이토정은 그렇게 해가지고 144개의 장난스러운 궤를 빼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그에 이와 같은 논리에 따라서 만들어진 장난스럽지만 그 하나의 궤상,

바로 토정비결이 그것입니다.

 

토정비결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의 관점 속에서 이것을 장난스럽게 했다는 겁니다,

고의적으로. 이 분류법도 장난스럽게 적용시켰다는 겁니다.

 12개와 12개를 적용시켰으니 144개가 나올 수 밖예요.

그런데 현재에는 정말로 이제는 사람들의 인지가 깨인 마당에 100으로 이 기준만 분명하다면,

더 세분해서 100으로 100으로 한다면 만가지 사람의 종류를 찾아낼 수 있고,

거기에 따라서 사람의 혈과 경맥을 이용할 수 있다면 동양의학은 엄청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 바탕에도 명리학(命理學)이 있습니다.

 

이 명리학이 동양인간학의 기초이고,

이것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제반 뼈대가 붙은 학문이 동양의 또는 한국의, 아시아의 인간학입니다.

 

이 인간학으로부터 실용적인 제 과학이 나옵니다.

생물학이 나오고, 의학이 나오고, 수행학이 나오고 다 나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의학은 사람을 이와 같은 인간학의 바탕을 두고 치료하기 위한 실용과학으로써 낸 것이고,

수행학은 고치를 틀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써,

운동학도 나오는 것이고 그리고 또한 생활 방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 겁니다.

 

동양의 문화는

이와 같은 인간이해의 인간론의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제반생활양식을 총칭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학이 의학 자체로서 완성되고 자급자족적인 학문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병폐가 되고,

의학은 기술적인 영역에서 약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근본적인 원리적 발전을 도모하기는 어렵습니다.

 

九宮圖

 

이 명리학에서 인간의 명리학에서 수행학적인 차원에서 주어져 있는 인간의 보편성은 그럼 무엇인가?

인간의 보편성은 무엇인가?

 

그 인간의 보편성, 이제 숫자를 좀 건너뛰겠습니다,

둘에서. 그 인간의 보편성을 모울도뷔 등에서 여러분이 몇 번 지나치면서

또 저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셨을 겁니다만,

그것이 8개의 터미널과 8개의 터미널을 둘러싸고 있는

그 흐름의 체계를 다 바로 인간의 보편적 명리의 하나의 아날로그적인 형태인 겁니다.

 

수(數)를 아날로그로 전환시킨 것이 완전한 아날로그는 아니지만

시계정도의 아날로그로 전환시킨 것이 바로 구궁도(九宮圖)입니다.

구궁운행도(九宮運行圖)입니다.

 

구궁운행을 벗어나서는 인간의 어떤 신체적 설명도 할 수가 없습니다.

구궁과 구궁사이에 서로 오가는 각각의 길을 가지고 12개의 경맥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구궁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

중심으로부터 나오기에 이것을 일러서 주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내부, 구궁내의 보편적인 흐름에 그 통로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12주경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내부의 터미널을 거치지 않는 8개의 집으로부터

곧바로 인체와 연결된 것을 일러서 별도로 존재하는 기경의 8맥이라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은 이 체계는 어디에 보편성으로 담겨 있는가?

바로 배에 담겨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사람이 배만 갖추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라는 이야기죠.

 

가운데가 있고 또한 머리가 있기에 이것을 도르레처럼 엮어주는 기본적인 하나의 이음이 있다는 겁니다. 이 이음도 하나의 또한 경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인맥과 동맥을 별도로 둔다. 이것이 의학의 연결로 입니다.

 

그러나 수행학은 이 정도 가지고 안됩니다.

이 정도 가지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이야깁니다.

그러나 이제 이 이야기를 의학적인 것에 견주어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해하자는 현실적인 근거를 갖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엥겔스라고 하는 사회과학자가 과거에 썼던 <가족, 국가, 사유재산의 기원>인가요?

뭐 이런 책이 있죠. 어쨌든 외형적으로는 인류학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도 인류학적으로 조사를 안하고 대충 가설에 의해서 쓰거나 들은 이야기에서 썼는데,

그나마 위대한 업적입니다.

 

왜!

그와 같은 엥겔스가 만든 굉장한 인류학적인 모델 케이스,

인류의 재산은, 인류의 가족은, 인류가 만든 국가체제는 이러이러하다라는 인류학적인 결론,

그 모델 케이스가 있었기에 사회주의가 현실적인 실천적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상적인 그냥 주장만 있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회에서도

이와 같은 현실적인 모델 케이스가 없이 지금 현재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좋은 개벽세상을 만들자, 홍익인간의 세상을 만들자, 전부 공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지당하다손 치더라도, 왜 구체적인 모델 케이스를 안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델 케이스가 있어야만 이야기가 되듯이 마찬가지로 이러한 수행학도

수행학 자체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이 어디 오늘날에 흔적이라도 남기고 있습니까?

주역참동계가 있고, 옥추경이 있고, 음부경이 있고,

수많은 도장의 선가 서적이 있지만 그걸 누구 하나 제대로 믿어줄려고 합니까?

 

철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옮기려고 하기는 하지만,

지금 현재 유감스럽게도 부처님과 노자와 공자가 생산한 사람들은 몇몇 안되는 수행자들이고,

그 열 배, 백 배수에 이르는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그 논문에 의존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이 지적소유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제가 이야기한 것은 저의 소유라고 생각하면은 그것은 큰 오판입니다.

저는 그냥 말하고 지나갈 따름입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근거를 빌리려고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의학을 빌미삼는 겁니다.

의학을 빌미 삼아서 이러한 모델 케이스에 따라서 수행론이 삼아지면은

그때 언젠가는 저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수행을 이야기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수행을 정리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니여서 이와 같은 1부터 9까지의 이 모든 수를 의학을 빌려서 선가의 의학체계,

동양의 의학체계를 빌려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지난번 시간에 말씀을 드렸던 또 지난번 시간에 함께 말씀을 드렸던 8개의 집들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8개의 바른길 가진 도르제가 되었던 그 8집입니다.

이 8집 사이의 반개는 그대로 이 전,

이 가운데 어느 한집을 통해서 풍차처럼 그려진 차크라를 인도식으로 표현하는

차크라를 통해서 끊임없이 위와 이어지게 됩니다.

 

위에 있는 것은 실상이되 실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해체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감각일 따름입니다.

실제 우리 몸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빛과 닷은

이 속에 있는 나에게 주어진 이 원기(元氣)와 원정(元精)으로서의 2차적인 인간적인 빛,

인간이란 나에게 주어진 나 인간차원의 빛, 이 빛은 제한된 것입니다.

 

이 빛은 타고난 것입니다.

이 빛이 닷과 결합할 수 있는 정도로 남아 있을 때까지,

그리고 닷과 다시 해체할 수 있는 정도로 능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내 명(命)은 숨을 쉽니다.

이것이 다하면 육체가 아무리 오동통하고 건강해도 그 날로 죽습니다.

이것이 남아있지 않으면 죽고,

이것이 남아있으면 아무리 육체가 골골대고 모든 것이 마비돼도

이것이 다한 날까지 사는 것이 사람의 천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동적으로 이처럼 신진대사를 한 것을 수행은 가만히 지켜보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자신을 바꾸는 방편론으로 전환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과학입니다.

 

수행은 우리의 일상 육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 감각을 결코 놓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역전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그것을 뒤집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닷과 해체되는 순간,

이 닷은 몸속에 형성된 궤도를 따라서 돌다가,

돌다가 어디론가 처박힐 겁니다.

그리고 처박히지 못하는 것은 흩어져서 다 나갈 겁니다.

흩어져서 나아갈 때 예를 들어서 자기 몸에 있는 독기가 이 궤도에 얹히지 않고,

이 궤도에 얹히면 독도 재생산되지요.

영양분도 재생산되고, 다 재생산됩니다.

 

여기 얹히지 않고 이제 나갑니다.

이 나가는 구멍이 터질려고 하지요. 아프죠. 그리고 이 구멍도 아프죠.

이 구멍이 아프면 혈변을 보게 되고,

이 구멍이 아프면은 일종의 독한 기운을 몸 전체에서 허리를 통해서 내보내야만 합니다.

이 부분이 독기를 궤도에 얹지 못하는 닷,

독기가 있는 닷을 내보낼 때 허리에다가 한번,

만약에 건강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어떤 테스터가 있어 대 본다면 건강 마이너스로 나올 겁니다.

그런 그 기간을 지나서 이제 얹히지 않고 나아가면은 회복이 되겠지요.

그리고 굉장히 밝은 사람이 되겠지요.

어쨌든 이렇게 다시 분해돼서 이 궤도를 타는 방면, 빛은 분해되어서 이 상단전을 도는 것입니다.

 

선치삼재후로일원상법

 

빛은 어디로 소모되어 나가는가?

지난번에 선치후로 이론을 말씀드린 겁니다.

가마로 나가지요.

 

가마라는 영역으로 빛은 끊임없이 우주를 향해서 돌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역할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돌리고 있습니다.

가마는 끊임없이 신(神)을 내보내는 것이지 즉 빛을 나의 신(神), 나의 인신(人神),

빛을 내보내는 것이지 빛을 받아드리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으로 빛을 받아드린다고 생각했을 때는 나아가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빙의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이곳은 나의 빛이 나아가는 자리,

나아갈 때 얼른 그 틈을 타가지고 엉뚱한 것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들어오면은 또는 이 나아가는 것이 밑에가 너무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너무 엉망이 되어 있으면 나아가는 빛도 흔들림이 심합니다.

곡직(曲直)이 서로 함부로 섞여서 난(亂)이 되죠,

무질서가 돼버리죠.

무질서가 되면 여러분의 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의 핵심은 평소에도 나타나지만,

잠잘 때 가장 잘 나타납니다.

 

여러분 중에 속으로 한번 난 어떤가 판단해보십시오.

잘 때 머리를 여기저기 막 움직이고 자는 사람,

몸뚱이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안움직이면 잠이 안오는 사람,

요즘은 덜할지 모르겠습니다.

 

침대에 콕 처박혀 자니까 머리를 움직이려해도 잘 안되겠지요.

근데 방에 머리를 여기 두고 잤는데 갑자기 머리가 여기 가 있는 사람,

그리고 둘이 누워 자는데,

갑자기 머리가 여기 가서 이렇게 누워 가지고는 상대방보고 똑바로 누우라고 뭐라 하는 사람,

이렇게 머리가 움직여 간다는 것은

이 빛의 외출이 신통치 않게 무질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젊어서는 신경불안이요, 늙어서는 반드시 90%이상 치매에 이르게 됩니다.

억지로라도 머리를 붙잡아 매고 가만히 있으면 결코 그런 일은, 결코는 아니구요,

 

왜?

엉뚱한 것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경우를 제외하면은 90%이상 치매에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생각에서

나는 잘 때 머리를 많이 움직인다하는 분은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생활을 바꾸세요.

그런 것이 바로 기문둔갑의 과학으로부터 나오는 생활 양식입니다.

생활과학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빛은 끊임없이 가마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가는 빛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흘러간 물처럼 다시는 내 곁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생명은 이처럼 점점 줄어가는 것입니다.

빛이 다하면 다할수록 20의 청춘이 지금 이 자리에 50으로 40으로 앉아 계십니다.

50의 40의 이 왕성한 힘이 어느날 70의 80의 자리로써 병석을 지켜야 할겁니다.

그리고 그 병석마저도 버리고 또 다른 몸 갖추지 못한 존재가 되어서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어딘가를 헤매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떠나간 자는 들어오지 않는데 과연 그러면 어떻게 할까?

떠나보내지 않으면 된다,

일단은.

 

떠나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어거지가 아니라 이것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나갔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이것을 한바퀴만 바르게 돌려주자,

여기서 나아가지 않게 하자.

그것이 바로 8자의 돌림입니다.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돌려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돌려서 한번만 더 쓰자,

뭘 하는데 쓰느냐,

나를 고치로 틀게 하는데 쓰자.

내 몸을 고치로 틀게 함으로써 이 나아가는 빛이 나아가지 않고 고치를 틀게 하고 나아가게 하자.

그리하면은 이 빛은 나에 있어서 소중한 빛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서 나아가는 것을 막고, 끊임없이 돌리는 것,

 

그러다가 어느날 보면은 그래도 나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것을 한편 기술로 여겨서 공부에 잘못 매달리게 되면은 이른바 양신이라고 하는 잘못된 양신,

진정한 양신이 아니고 잘못된 양신.

머리위에 뭘 띄운다.

머리위에는 무엇을 띄워서 또다른 나의 작은 형상 갖지 않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참 양신이 아니요,

참 양신은 내 고치속에서 참나가 빛을 발하면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양신이 만들어지면은 어찌할 겁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기술로써 분명 전수되고 있고,

굉장한 기대를 사람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지가 된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정당한 수행법속에도 이와 같은 잘못된 양신의 기능들이 있습니다.

 

오로지 빛이 바르게 돌아가는 머리에서 어두운 그늘을 지나갈 적에 환하게 빛이 둥글게 후광을 비칠 뿐,

그 후광 뒤에 이상한 존재가 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옛 눈 밝은 사람들이 그린 옛 성자들의 후광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처럼 떠나가는 빛이 아니라

고치를 틀고 가는 가운데서 빛이 자연히 생긴 것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눈을 이 빛의 돌아감과 함께 결탁을 시키면 안됩니다.

빛이 이것이 올라갈 적에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눈을 쓱~ 치뜨고,

내려간다 생각해서 눈을 내리고 다시 올라갈 때 눈을 또 치뜨고,

눈 감은 상태에서도 자동으로 그렇게 됩니다.

왜?

 

내 지금까지의 모든 보는 일은 육체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감각이 어찌 하루만에 이틀만에 사라지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눈을 감고 한번 8자를 돌려 보세요.

뒷꼭지로 올라가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눈이 자꾸 위로 올라 가버립니다.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거꾸로,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어서 그 용호비결은 한편으로는 약간 이용하라 하고,

한편으로는 이용하지 말라고 하는 두 가지 주문을 한꺼번에 합니다.

 

눈을 지휘봉으로 삼아서 오르락내리락하라고 얘기를 하는가 하면은,

다른 한편으로는 발을 내리고 밑에만 보라고 합니다.

두 가지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데,

두 가지 모순되는 것이 다 방법으로 채택될 수는 있으나

원칙적으로는 육체적인 감각을 쫓지 않아야만 합니다.

 

눈은 가만히 내리깔고, 나는 죽었다, 나의 눈은 없다,

그냥 빛이 오르든 빛이 내리든 오르든 내리든 상관없이 내 눈은 그냥 죽었다.

가만히 눈에는 모든 힘을 빼버리고 눈의 모든 감각을 거두어버리는 것,

그것을 일러서 현관비결타좌식에서는 수시(收視)라고 합니다.

 

모든 시각을 거두어버려라 철시(撤視)한다,

수시(收屍)한다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을 철수 시켜라,

이 시야를 철수 시켜라

그런데 철수 안시키기고 하는 방법은 좀 억지를 부리는 방법은 억지가 안되기 위해서는 복잡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함부로 할 일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것은 점점 나름대로 그 하나씩 하나씩 여기까지만 고치를 틀다가,

빛을 가지고 이것이 바깥이요 이것이 안입니다.

이것이 '아나'요, 이것이 '바나'입니다.

이 두 가지 안, 반을 함께 하는 것이 이것이 외식이요, 이것이 내식입니다.

 

안에 치우치는 것도 병이요, 밖에 치우지는 것도 병이니 이것이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있어서 수식(數息)을 어지럽게 하는 요인입니다.

 

안과 밖이 고루고루 된 것.

안에서는 전혀 어떠한 생명의 요동과 그 빛이 형성되지 않는데,

밖에서 어지러이 상을 보게 되는 것도 수식의 어지러움이요,

밖에서 아무런 상이 이뤄지지 않고 안에서만 찜통같이 빛이 들끓는 것도 또한 수식의 무질서함입니다.

 

이 무질서함을 바로 잡는 것,

뿐만 아니라 안에서 돌 때는

갑자기 유행가가 돌다가 밖에서 돌 때는 성스러운 모습이 보인다면 내외가 불일치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결코 이룰 수 없는 수식의 어지러움입니다.

 

그것이 안반수의에서 말씀을 하고 계시는 부처님의 세 가지 지적,

수식을 할 때 세 가지 어지러운 것이 있나니,

내(內)가 과하여 바깥이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이요,

바깥이 너무 과하여 안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그 다음이요,

안과 밖이 서로 달리 가는 궤도를 타는 것이 하나다.

따라서 안반수의는 안과 밖의 조화라는데 있어서

그리고 내외일치라는데 있어서 정말로 외줄타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제 이렇게 고리를 척 거는 것,

이것이 선치삼재후로일원상(先治三才后路一元相)이라 불리는 선가의 수련법으로 나오며,

이것이 제 일의 수(數)와 제 이의 수(數)를 세는 수식에서 먼저 안을 세고,

일은 내 밖으로 나오는 진정한 빛이요,

안에 있는 것은 아직까지 닷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오는 즉시 닷은 머물게 하고,

빛만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 사이에 닷과 만나고,

그리하여 이것은 밖이니 이것은 이른바 하나요,

이것은 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 한 셋이요,

이 1, 3, 5, 7, 9 특히 3, 5, 7, 9를 밖이라 하고,

2, 4, 6, 8을 안이라고 하는 수식의 방법은 거기에서 나오는데,

그 수를 수로만 알아서 숨 쉴 때 늘 1하고 내뱉고,

2하고 들이마시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위파사나요, 잘못된 수식입니다.

그것은 형식만 남은 그러한 수식이 됩니다.

 

진정으로 석가를 닮은 석가가 다시 있을 수 없고, 혜능을 닮은 혜능이 다시 있을 수 없습니다.

석가를 닮은 석가는 가짜 석가요, 혜능을 닮은 혜능은 가짜 혜능입니다.

그 시대의 모든 것이 다르게 결정합니다.

 

그러듯이 방법 또한 옛것을 베끼면은 옛것에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변조됐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걸었습니다.

 

그 거는 축 하나가 바로 널심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옥침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거는데가 바로 여기가 되겠죠.

그래서 하나는 모로바가 되고,

이른바 관원과 비슷하지만 다르고,

하나는 알타이 꼬리뼈 밑에 선장관절과 비슷하나 약간 다른 그 알타이를

이것을 오래한 습속이 재이면은(?) 알타이에 반점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으로써 종족의 특징을 잡으니 그것이 알타이족입니다.

 

알타이족의 후예라고 해서 알타이의 반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와 같은 것을 기본적인 생활에서

완전히 제거할 때 우리의 손자 대에서는 알타이 반점이 분명 없어질 겁니다.

유전적인 특징으로만 생각한다면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책상다리 하나 못하는 그 아들의 아들이 그 딸의 딸이 어떻게 알타이 반점을 갖고 나겠습니까.

지금 벌써 알타이 반점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고 그러네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함부로 걸려고 하면은 큰일난다는 겁니다.

무리를 부리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이 중간 중간의 과정은 모두 생략합니다.

 

왜?

이것까지 할 때 일어나는 것은 여기서 분리된 닷이 '똑'하고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 뿐,

거기에 따라서 제한테 맞는 궤도를 타는 것일 뿐, 그 나머지는 아직 얘기 드리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관(觀)까지.

일관까지,

이것을 초관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가는 것을 볼 때는 여기 다른 것을 더 걸어야 됩니다.

고치는 점점 커집니다.

여기까지 걸고나면 빛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사방이 모두 내가 뽑아낸 빛으로 가득 차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빛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의단이 동로하기 이전에 완전한 암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사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내 속에는 수많은 것들, 인간의 보편성을 지닌 무언가에 고임이 있습니다.

그 고임을 쫓아서 그 고임을 모두 풀어내는 것, 그것이 화두를 푸는 일입니다.

이것이 저절로 인간이면 누구나 보이는 인간보편의 보임새, 그것이 생화두입니다.

생화두는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누가 생각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 몸에 갖고 나있는 사람으로서의 보편성입니다.

 

그것을 보기 위하여 과정상으로서의 중간화두를 쓰기도 합니다.

조사선이요, 묵조선이요, 화두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그 중간으로,

진정한 인류 보편의 고임을 보기 위하여 방법론 적으로 들이댄 것입니다.

 

왜?

이것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고임으로 직접 가는 것이 과연 위험할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른바 '지중신주'라고 했을 적에 신주는 그와 같은 생화두를 말합니다.

이 과정을 총합해서 8단계로 설정합니다.

이 8단계를 다 돌파를 해야만

이 각 궁에 담긴 모든 정보를 알고 자신이 그 정보를 진정으로 참회할 수가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참회하고,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서 참회할 수 있습니다.

것이 이른바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세 참회입니다.

 

실질적으로 삼세 참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재의 내가 참회하면 과거의 내가 바뀌게 되고,

과거의 내가 참회하는 순간 현재의 나는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고 있습니다.

미래의 내가 살인을 저지르고 있을 때

나는 내 속에서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살기가.

그 모든 것을 현재의 내 안에서 다 풀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말씀의 삼세 참회입니다.

 

이 8개의 집은 이 도르제는 꿈속에서도 떠나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보물로 여겨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소유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누구의 소유도 될 수도 없고, 누구의 주장도 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것은 각각의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보물을 누군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에 날을 세우고 뭔가를 생각한다면은

자신 속에 있는 보물을 찾는데 스스로가 길을 나서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무것도 바라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제가 그런 과정을 겪어왔듯이 또 형제가 되고 누이가 되고

그런 분들이 다 자기 속에 있는 자신의 우주적 보호를 찾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혼과 백

 

여기에서 중요한 이야기는 지난 시간에 '하나'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이제 닷이었습니다.

이 닷은 실질적으로는 빛의 곧음과 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도지의 소희요, 부도지의 궁희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것이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분리될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셋이 만들어집니다.

 

셋은 그 자체로서의 종적, 종적인 빛입니다.

그 인간이라면 인간적인 빛입니다.

인간적인 실체입니다.

개면은 개로서의 종자로서의 빛입니다.

즉 인간에 제한시킬 경우 인간을 보편적인 존재로 놀 경우 인신(人神)을 말합니다.

이것을 일러서 이른바 인신(人神)이라 하고 또는 인신과 동의어로써 혼(魂)이라는 말을 씁니다.

 

혼은 죽으면 나가서 올라가고 백(魄)은 죽으면은 땅으로 떨어진다.

이 백은 곧 닷이요, 이 혼은 곧 빛입니다.

이 빛은 인간다운 인간의 빛일 뿐입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초적인 빛이 인간적인 형태로, 인간적인 명으로 자리잡은 그 빛입니다.

우주 원초적인 빛을 향해서 인간의 명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그 쳇바퀴를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이제 마지막 한 겹이 남겨 있습니다.

마지막 한 겹이라는 것을 안고 있는 축복 받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결코 인간이 인간 스스로 계발한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계발한 것도 아니요, 예수가 계발한 것도 아니요, 공자가 계발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인간으로서 인간을 실현하는 인간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가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먼저 그것을 본인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봄에 꽃이 피어나오듯 피어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계적인 우주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인간 본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나를 미워하든 나를 싫어하든 나를 이뻐하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으로써의 고임입니다.

 

그래서 백(魄)이라는 것은 흔히 여러분이 경험해보시면 알텐데요,

실제 무려 초혼해서 혼을 부른다고 그러는데, 혼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혼은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과 동시에 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삶을 향해서 왔던 것을 거슬러서 다시 먼 여행을 합니다.

이것을 불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멀리 가고 있는 그 존재를 불러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그것이 떨어뜨려 놓고 간 그 잔여물을 불러오는 사실은 백을 불러올 따름입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초혼입니다.

말만 초혼이지 실상 초혼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러다 놓고 보면은 요상망측한 소리를 합니다.

평소에 살았을 때 인격적으로 굉장히 성숙했던 사람이

초혼을 해놓고 보니까 이거 아주 짐승같은 소리만 골라서 합니다.

욕심이 가득 찬 얘기를 합니다.

'이건 내꺼야 내놔!' 평소에는 '가져가' 이런 사람이 초혼을 해놓으면 '내꺼야 내놔' 그럽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걸 선물로 '너 가져라' 줘 놓고 나서 죽은 다음에 이걸 쓰고 있다가

갑자기 날벼락 없이 이것에 의해서 저주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내놨다가. 하물며 주지도 않은 것을 썼을 때 그 인과야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그러한 인과를 한두번 본게 아닙니다.

지금도 늘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신(人神)이고, 혼(魂)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성격으로서의 슬입니다,

우리말로.

 

이 슬의 틀이 슬기, 그릇할 때 쓰는 어근입니다.

'슬그'하면 될텐데 그릇자체가 원래 옛날에는 '기릇'이라고 그랬죠.

이 '기'입니다,

틀.

슬의 틀이 슬기입니다.

 

이 슬기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특징입니다.

누가 붙였는지 호모사피엔스는 너무나도 잘 붙인 이름인데

사피엔스가 과연 이것을 의미하느냐는 이것은 좀 다르죠.

물론 번역을 한 분이 슬기인간이라고 해서 더 번역을 잘했는데 근데 어쨌든 이게 슬기입니다.

 

이게 한자로 번역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지혜라는 말의 진실한 뜻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슬기가 잘 틀을 잡고 잘 돌아가는 슬기로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슬은 바로 어디에선가 배덩어리 그리고 가슴덩어리,

머리덩어리 그 모든 곳에서 슬은 자기 나름대로 다 자기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머리에 담고 있는 그릇을 일러 앞서 말한대로 '슬기'라 합니다.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을 일러서 '슬애'라고 합니다.

애라는 것은 인간화된 또는 인격화된 물질화된 생명을 말합니다.

슬이 애를 갖춘 겁니다.

그것이 슬애가 되고 슬개가 되고 지금 쓸개가 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보는 과거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점을 지금 바꿔야 될 이유는 우리의 현재 과학의 범위내에서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그 관점을 바꿔왔으며 지금 바꾼 관점속에서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실제 그 이유를 찾을 길이 없이 우리는 바꿔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속시원히 내놓을 수 있다면 차라리 우리는 우리의 과학에 대해서 한 점의 위로를 얻겠습니다.

 

뱃속에도 물론 슬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체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밝혀놓은 것이 이른바 인체론입니다.

그 인체론에는 앞서 말한대로 8개의 집들 사이에 연결로인 내부를 걸치는 12주경,

내부를 거치기에 주경,

8개의 집으로 말미암은 기경팔맥,

그 상중하를 연결시키는 도르레로써의 임맥 등,

그것들이 각각 만나는 모든 곳마다 만들어져 있는 주요한 터미널로써의 삼천혈,

그 삼천혈을 구성하는 것이 인체학입니다.

 

그 가운데 실용과학인 한의학에서는 삼백혈만 있으면 넉넉히 하는데 뭐 때문에 600개,

뭐 때문에 3000개를 쓰겠습니까.

의학은 실용과학일 뿐입니다.

의학은 의학자체로서는 자기 개발의 뿌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의학을 구성했던 그 인간학, 인체학에서 뿌리를 되찾아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수행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학에 남아있는 옥추경을 가지고 음부경을 가지도 참동계를 가지고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안반수의를 갖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던 원래의 인간학을 되찾고 인체학을 되찾고 그것을 가지고 지금 다시 그 참고서들을 하나의 빛을 삼아서 본보기를 삼아서 우리는 우리의 생활양식으로 다시 재창조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을 함께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보물을 하늘이 내린 보물을 찾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중정을 잡아라

 

이 삼천혈만 알아도 수행은 쉬울 것입니다만,

수행론을 조금 더 과학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쉽지

삼천혈을 가지고 그 체계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12번 만나서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삼천혈을 가지고 우리의 인간론을 재구성하는 것은 전문적으로 그것만 가지고 매달려보겠다라고

작정하시는 분이 예를 들어서 제가 그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은

그것을 가지고 한 3년은 최소한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니 12번 사이에서는 그거는 제쳐놓겠습니다.

필요할 때 약간씩 꺼내겠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안반수의의 체계에 따라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아갈 길을 조금씩 살펴보는 시간을 가질려고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주로 수식을 할 때 나타나는 무질서,

여기서는 특히 선치삼재후로일원상(先治三才后路一元相)을 할 때 나타나는 내와 외의 불일치,

내외의 각각의 쏠림 이것이 얼마만큼 위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경우 결코 사람이 현대인에게 주로 많이 쏠리는 것은 '기지직자'입니다.

 

'기'가운데 직한 것, 기지직자(氣之直者)가 직과 곡하면 '기지직자'가 '가(과?)곡자'하면 '선시'하나 …

 

기지직자를 넘어서면은

거꾸로 잘 드러나 잘 보지 못한다고 했듯이 현대인들은 이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소유가 넘치면 넘칠수록 그 모든 힘은 풀림을 중심으로 해서 가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넘칠대로 넘쳐서

 세상의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조차 소유의 것으로 인정되는 세계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눈의 움직임을 쫓지말라,

눈의 움직임을 쫓아서 이 흐름이 눈의 움직임에 의해서 조정되게 하지 말라,

과거의 사람들은 그것을 방편으로 썼습니다만 용호비결에서만 하더라도 지금 그것을 방편으로 쓰면

큰 일 날것이니 쓰지 말라,

일단.

 

일단.

쓰지 않고 내외로 이건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본다면은 정중앙을 놓치지 말라 중정을 놓치지 말라.

중정을 놓치면은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 중정의 어느 한 가운데 바르게 눈을 하시(下視)를 덜 했을 경우에는 완전 하시를 하면은 자빛,

불서에 말하기를 금강경에 말하기를 '견종종색' 하나니 할 때 완전하게 하시를 하면은 자빛,

완전하게 하시가 되지 아니하고 어정쩡하게 하시가 되면은 녹빛,

풀빛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야만 나머지 6겹의 고치 선들이

자신을 휘감는 고치의 줄이 되어서 바르게 널심을 향해 옥침을 향해 걸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것이고 여러분은 이것을 절대적으로 어기지만 않는다면 누구든지 10분이면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 달라짐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신진대사를 하고 있는 것에 확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진대사를 확인하는 것이 뭐 대단하겠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야 수행이 참 재밌다,

신기하다 하면은 이것은 이미 브라만의 잘못된 길로 접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 잘못을 지적하여 새로운 계정을 해 놓은 부처님의 길을 이미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안반수의가 다시 브라만의 교재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대개 자빛을 보지 못하고 녹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이 쏠렸을 경우에 이것이 왼편으로 쏠렸을 경우에 흰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른편으로 쏠렸을 경우에는 붉거나 그렇지 않으면 검붉은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인간의 종종색임은 틀림없으나 그러나 이것이 쏠렸음을 뜻합니다.

중정을 잃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쏠림이 있을 때에는 곧 모든 것을 거두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와 둘의, 안과 밖의 조화를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이제 이 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8집 사이의 서로 흐름의 길에는 4가지의 거대한 요소에 의하여 이름하여 직과 직이 즉

양과 양이 결합이 되면은 이것을 일러서 한없는 풀림으로 나아갈 것이니 이를 일러서 토(土)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이를 일러서 지(地)라고 잘못 한자로 번역해 놨습니다.

 

그 다음에 직과 기본적으로 원기(元氣)에 해당되는 것이 직(直)이요,

원정(元精)에 해당되는 것이 곡(曲)이 되었을 경우에 원기가 양(陽)이요,

원정이 음(陰)이 되었을 경우에,

경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제가 일괄적으로 말씀을 안드리겠지만 이것을 일러서

수(水)라고 하고 이것을 일러서 화(火)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이 음과 음으로서 주된 축을 이루었을 때,

두 개가 네 개를 낳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것을 일러서 전통선가에서는 표현할 길이 마땅치 않아서 기(氣)라 합니다만,

이것은 정기신(精氣神)할 때의 기(氣)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번역한 불서에서 번역한 풍이 더 어우릴런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풀어서 흘려 내보내는 빛과 닷을 끊임없이 분해시켜서 흘려 내버리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흐름이요, 오름이요, 내림이요 그리고 확장입니다.

 

이것이 직과 곡이 양과 음이, 어와 아가, 알과 얼이 만들어내는 4가지 4대 요소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4가지 운동의 성격,

아니 사물을 구성하는 4가지 운동의 성격이지

그것을 구성하는 4가지 물질적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에 의해서 인간은 인간 나름의 독특한 오름과 흐름과 내림 등의 길을 걷습니다.

 

이 과정속에서 올라가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궤도요,

다시 만들어지는 하나의 궤도요,

또하나의 궤도요,

시계 역방향의 또하나의 궤도가 있고

또 시계 역방향의 궤도가 하나 더 있어서 이렇게 다섯 겹의 궤도가 만들어지고,

이 다섯 겹의 궤도는 인간을 구성하는 보편적인 닷의 방정식입니다.

이 다섯 개의 각각 다섯 개의 부류의 물질 아닌 요소존재적인 근본 물질들이 실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오행물질들입니다.

 

이 오행물질들은 이름하여 오행일 뿐

실상이 물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또한 흙도 아니며 쇠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시고 짐작하시는 대로 이 오행은

수억 수조의 우주에 있는 수많은 요소존재들을 분류하는 분류의 방정식으로써 운동의 특징상 내림이요,

올림이요 그리고 오르내림이요, 풀림이요, 응축일 뿐입니다.

 

그와 같은 각각의 요소존재들이

숨길을 통하여 들어와서 이 궤도를 타며 의식을 통해서 들어와서 이 궤도를 타며,

또한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서 여기에 들어와서 궤도를 탐으로써

내 근본적인 인신(人神)인 원기(元氣) 원정(元精)과 더불어서 결합을 합니다.

 

즉 인간적인 한계를 가진 나의 빛과 결합을 해서 이 닷들이 마침내 물질궤를 형성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형성인 바로 이 안의 내안의 도르제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이 덩어리들에 의해서 12개가 각각 신체 모든 곳을 향해서 용이 나래를 펴듯이 전부 흘러갑니다.

그것이 12주경맥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 집들은 그대로 종소리가 '댕'나면은 종소리의 파장이 실려가는 길이 있듯이

그 길처럼 각각 흘러가는 길들이 있으니 그것이 기경8맥을 이룹니다.

 

이 다섯 개의 궤도 또한 중요한데 금단자조낙수중(金丹紫調落水中) 즉

빛과 닷이 분해되서 빛의 차원에서 이 빛의 차원에서 닷을 관찰하면 이 다섯 겹의 궤도가 다 보입니다.

다섯 겹의 궤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차선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비유컨데 차선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로가 보입니다.

이 여섯 겹의 공간이 보입니다.

 

그 여섯 겹의 공간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감각적으로 빛을 빛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눈 앞에서 발을 내려뜨리고 수렴하시(垂簾下視)할 때 6종의 빛은 모두 그 띠를 뜻합니다.

이 띠로부터 우리는 한없이 우리 자신을 얽어맬 수 있는 빛의 고치를 찾을 수 있고 뽑아낼 수 있습니다.

 

이 고치로

자신의 몸을 댕댕 감아서 모든 완전한 암흑으로부터 다시 되깨어날 때까지 고치를 틀어가는 과정,

그것이 안반수의(安般守意)의 대의라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고,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고

다음시간에는 이것에서부터 어떻게 이 자신을 애벌레 덩어리 자신을 바르게 굴릴 것인가?

애벌레가 바르게 크지 않으면 고치를 틀어봤자 고치속에서 죽나니,

애벌레를 어떻게 바르게 틀 것인가?

 

애벌레를 바르게 트는 공부라면 부도의 사회에서는 벌써 14세 16세 이전에 마무리가 되었어야 합니다.

애벌레는 14세 16세면 이미 완전 성숙하기 때문에,

나의 배는 이미 그게 다 넘었기 때문에 병행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러나 이것도 아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과정과 이 원칙,

그것을 안반수의가 어떻게 묘사를 하고 있나를 중심으로 해서

다음시간 숫자 3이후 과정을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2001년 3월 29일. 조계사 교육원)

 

구궁과 관련된 이야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구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야기의 빌미로 삼기 위해서 제 어릴 적 이야기를 잠시 좀 할까 합니다.

어제 대구 가서 한 얘기기도한대,

저도 한때 공부하기가 무척 싫어 가지고 선생님을 등지고 도망을 쳤던 적이 있습니다.

한 일년 반정도 도망을 쳐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은 돌아갔습니다만 그때 있었던 이야기 중 한 부분입니다. 
 

도망을 치고 싶어 친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는 여러분들 해 보신 분도 많이 있지만,

백학타사나 패철 돌리기나 태내세 같은 것을 밥먹듯이가 아니라 숨쉬듯이 해야만 했습니다.

백학타사 하루에 천 번, 패철 돌리기 천 번, 백학타사는 양쪽으로 천 번,

거기다가 태내세는 하고 나서 그냥 태내세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 천자문을 배울 때는,

천자문 끝낸 다음이죠, 명심보감을 배우고 있을 때는 태내세 하고

천자문 강, 논어 배우고 있을 때는 태내세 하고 명심보감 강, 명심보감 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숨 고르면서. 맹자 배우고 있을 때는 태내세 하고 논어 다 외우고,

너무 지겹고 힘들고 해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을 쳤다가 나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두 가지 계기입니다. 
 

한가지 계기를 먼저 말씀 드리기 전에 그 뒷 계기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에, 첫 번째 일, 조금 있다 말씀 드릴 첫 번째 일이 있고 나서,

두 번째 어느 날 제가 이 땅에 몸을 갖고 오기 전부터의 일들이 죽 이렇게 떠오르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른 일곱 생을 거듭했던 그 과거를 보면서 제가 바로 그 서른 일곱 생 동안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어떤 갈래의 공부를 했던 간에

늘 지금 그 당시에 제가 도망쳤던 그 자리에서 늘 끝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단 한번도 이번 생에서 도망쳤던 그 이상의 공부를 밟아가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짐 싸말라 가지고 다시 공부하러 갔었습니다. 
 

근데 그 이전에,

그날 일이 있기 전에 마지막 세 번째 정을 맞은 얘긴데,

흔히 정을 맞았다고 표현하는데,

정을 맞았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은 혼이 밖으로 나가버린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요즘 서울 하늘에는 없습니다만 제트기가 지나가면 구름이 말갛게 일었습니다.

그래서 그 구름 쳐다보고 제트기 간다고 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많이 하던 그런 것들 중에 하난 데요,

그때도 제트기가 지나가고 있어서 하늘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트기를 가리키면서 한 아이는 여남은 걸음 밖에서 저를 보고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걸어오고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오고 있었는데,

그 순간 정을 맞아 버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갑자기 제 밖에 있는 겁니다.

제 밖에 있는데 방법은 이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르게 내 몸을 앉히고 바르게 내 몸을 세우고,

앉혀서 허리를 세우고,

바르게 입과 눈과 머리 등을 다 제자리에 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 제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힘을 힘을 쓰면서

한 시간이 만약에 감각으로 일기를 쓴다면 일년이상의 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일년 이상 동안 애를 쓰면서 제 몸을 제 몸 밖에서 저를 앉히고,

허리를 펴게 하고 그리고 눈과 코와 입을 바르게 하고 나서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천신만고라고 하는 것이 그럴 때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들어가서 눈을 뜨자 제 앞에 달려오던 아이는 아직 두어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었습니다.

그게 사람의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갇혀있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감각일 뿐인 것이지

시간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실제 상황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모든 것들을, 만약에 내가, 그때 도망칠 때,

또 그걸 배우지 않았으면 정을 맞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많지만,

만약에 그 때의 제가 제 몸 속에서 혼이 드나드는 길을 익히지 못했더라면,

그 제트기 쳐다보다가 심장마비로, 모든 것은, 의문사의 죽음은 다 심장마비가 됩니다.

 

심장마비는 결코 사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단 심장마비라는 것은 이유가 모르게 죽었을 때 나타난 현상 중에 대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장마비로 죽는데 문제는 왜 심장마비냐 하는 거지요.

심장이 왜 멈췄느냐 하는 거지요.

어쨌든 바로 그처럼 심장마비로 선 채로 그냥 죽고, 픽 쓰러지고, 젊은,

겨우 열 살 좀 넘긴 인생이 끝나버렸을 겁니다.   
 

어쨌든 그 길로 돌아가서 저는 정말 식은땀이 등에 흐르는 그런 기분을 가라앉히면서

서른 일곱 생 동안은 넘어가지 못했던 고개를 넘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더욱 소중하고 또 나름대로는 값어치있게 여긴 것이

바로 내 몸 속에 있는 아홉 갈래 집,

그 가운데에서도 통제의 궁에 해당되는 집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물론 그 구궁도

선치삼재후로일원상법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서 만들어진 방법입니다.

정말로 헤아릴 수 없는 선대의 공부하시는 선배들께서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시면서 얻어낸 방법이

선치삼재후로일원상이요 그리고 구궁을 잡아내는 공부법이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정확하게 짚어 볼 순 없어도 그 과정 속에서

직접 간접으로 자신의 몸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 그 인생을 한번씩 던져 버렸던 분이

그냥 쭉 한평생 산 사람을 다 한사람으로 본다면 적어도 수백은 헤아릴 겁니다. 
 

그 가운데에서 근대에는 200년 이후부터 부작용이 나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완전하다고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 200년 근간에는, 즉 쉽게 말하면, 제 위의 사증조때부터는 부작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체의. 어떤 체질과 어떤 몸을 갖고 있던 간에 나오진 않았고, 사증조 이전에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부작용이 어떻게 나왔는가에 대한 그와 같은 변증의 제 체계도 물론 남아있습니다.

그 핵심에 구궁 공부법이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 오늘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은, 예전에 공부했던 것이, 제가 다시 보기에도 참 미련스러운 공부라고 생각이 듭니다.

결코 그렇게 미련하게 할 필요가 없었는데, 미련하게 해야만 했던 것들.

예를 들어서 과거에는 그냥 패철 돌리기를 하면은 한없이 그냥 패철을 돌리기만 하면은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패철을 돌리되 패철을 돌리는 그 팔에서 龍을 읽지 못한다면은 천 번을 돌리면 무엇할 것이며,

만 번을 돌리면 무엇할 것인가.

패철을 돌리는 그 한 마디의 내 팔이 바로 양 호가 되어서 용인 것이오,

그리고 내가 백학타사를 하는 내 한 발이 모두가 법장인 것이오,

내 태내세가 모두 또한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다뤄지는 것이라면은,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릴 적에 설명을 듣진 않고 천번 만번, 수천 수만번을 하고 나서야 겨우 설명을 들은 것이 그런겁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실제로 그런 설명은 듣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패철을 돌릴 때 올라가는 내 팔은 이미 팔이 아니라 용인 것입니다.

용의 머리이고 용입니다.

이 용이 올라가서 엉켰다가 그 엉킨 것이 서로 강하게 풀어지면서 위로,

풀어지면서 위로 천상으로 치솟듯이 가다가 그 머리를 바로 직하해서 내려와서

그 기운으로 다시 갈무리하는 것이 패철 돌리기입니다.
 

그와 같은 감각이 없을 때 하나의 손동작이고,

손동작도 오래하면 물론 용이 된다는 것을 귀납으로는 보여줄 수 있지만

이제 수련에서 한없는 귀납을 통할 시대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당한 귀납은  필요합니다만,

어느 정도는 그런 것이라는 하는 것을 느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백학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가 끼는 팔짱이나 꼿는 것은 자신의 평정심을 말합니다.

평정심을 말하는 것이요, 평정심이 있는 전제하에서 들어올리는 자신의 다리는 바로 법장이 됩니다.

밑에서 솟아오르는 그 뱀은 나의 마가 됩니다.

그 끊임없이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그 마를 법장 하나로 걷어 내듯이, 탁 탁 찍어내듯이,

나와 관련되어 있는 수많은 萬魔를 걷어내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백학타사입니다.

좌마든 우마든 즉 이미 돋아나 있는 마이든 아직 잠재되어 있는 마이든 간에 그 마를 하나 하나씩 걷어내는, 스스로가 금시조가 되는 공부가 바로 백학타사입니다.

그리고 태내세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수학적으로,

나라는 것이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필요한가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등장하는 수가 일(1)과 무량항아수입니다.

나는 하나입니다.

나는 어쨌든 하나이고 이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량항하사가 등장해야만 합니다.

 

내가 나오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나의 母와 나의 父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의 부가 나오기 위해서는 또 나의 조모와 조부가 필요합니다.

또 모 쪽으로도 마찬가지로 모와 부가 필요합니다.

계속 올라갈 것입니다.

내가 백 번만 인생으로서 나왔다면은, 인생으로서 내가 백대만 흘러 왔다면,

사람의, 인류의 역사가 어찌 백대에 그치겠습니까만,

대략 3000년을 잡아서 백대만 잡는다 하더라도 바로,

101대만 잡으면은 이것은 계산하는 경우는 간단하죠, 2ⁿ ¹아닙니다.

 

이 (n-1)이 곧 100 만 된다면 이건 이미 인간의 개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입니다.

이것의 2의 20승만 되도 100만 단위를 넘어갑니다.

제가 알기에 그렇습니다.

2의 100승은, 헤아릴 수 없는 그것들이 모여서 나가 됩니다.

실제 컴퓨터가 나와서 나라는 존재의 유전자 배합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멘델의 법칙을 가장 간단하게 적용해서

어떤 부와 어떤 모가 어떤 아이를 낳을 적에 그 아이가 나올 가능성을 네 가지로만 잡더라도,

네 가지 종류의 아이가 나올꺼라고만 치더라도, 그럴 수가 없지요.

 

유전자 쌍이 몇 개인데. 유전자로만 보더라도, (¼)ⁿ ¹이 나옵니다.

그만큼, 내가 태어난, 현재의 나라는 고유한 존재가 태어날 가능성은 무량항하사 분의, 제곱분의 1입니다. 더 많지요.

제곱분이 아닌데 사실은. 4의 제곱으로 가는 것이니까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어쩌면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의 숭엄성은 거기에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동양의 숭엄성은 그 이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숭엄성을 찾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실제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은 근래에 이제 삼국시대,

신라의 건국 과정을 직접적으로 다 밟아 가는 어떤 그런 답사를 하고 있는데,

그 답사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논문들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논문을 보는데 한 논문을 보다 보니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신라 사회는 아마 비 부계적인 양상을 띄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연구를 함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조건을 고려해야 된다 라고 얘기를 하면서

이제 갈문왕 연구를 하고 있어요.

 

신라에는 갈문왕이라는게 있습니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갈문왕인데 이 갈문왕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많은 연구자들이 몰릴 법 한데, 게을러서 그런지 많은 연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이 갈문왕 연구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갈문왕을 계속 부계로만 추적 해 가는 거예요.

이 누구는 아버지는 뭐고, 이 아버지는 또 뭐고 이렇게 부계만 추적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 안나오지요.

그러면 백대를 가도 1의 100승도 1이죠.

이건 연구가 안 되는 겁니다.

끊임없이 모가 있는 것이거든요.           

비 부계적인 양상이라고 해 놓고 나서는 모를 다 빼버려요.

 

인류 역사에는 반드시 아버지 없이 나온 자식이 없고 어머니 없이 나은 자식이 없습니다.

그럼 다 넣어야만 실상이 보이는데

이 실상이 우리가 조상을 고려 초기로만 잡아 가지고 대충 한 30대, 40대만 잡아보겠습니다.

40대만 잡아도 2의 40승입니다.

30승만 하겠습니다.

30승이라고 하면은 1억 가량이라고 그러는데, 내 조상이 1억이냐,

내 조상이 진짜 1억이냐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1억이 아닌, 따지고 보면, 내 조상을 따지고 보면,

모계 부계까지 다 따져 올라가도 묘하게도,

묘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건데도 이 반의 반도 안 되는 겁니다.

1억이 아니라 천도, 천만도 안되는 겁니다.

내 조상을 따져 올라가면.

 

인간의 기본 출발점 - 구(九)
 

그러듯이 결국은 무언가의 기본 수가 있습니다.

기본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 기본 출발점,

그것을 인간 내부에도 적용시킨다면은 반드시 적용될 것인데,

그 출발점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무엇일까.

천하없어도 그것이 아홉이라는 숫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궁입니다.

인간인 이상 그 어떤 인간도 이 구(九)라는 숫자의 장난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것의 합성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그런데 이 구궁이 모두 별도로 있는 건 아닙니다.

   

이 구궁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이 있습니다.

으뜸이 되는 궁은 당연히 중궁입니다.

가운데, 한 가운데 있는 궁입니다.

 

아홉개의 궁은 각각 순서를 평면으로 잡아서 본다면은 이 중궁이 가장 중심이 되지만

나는 중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중궁이 아닌 이 전체의 체계를 가지고 이 일차적인 이 체계들을 가지고,

여덟 개의 이 궁들을 가지고 중궁과 만날 뿐입니다.

1: 8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전제할 때,

그 질서를 가지고 살펴볼 때 여덟 개의 궁이 한꺼번에 중궁과 만나지 않는다면은 만나는 궁은 무엇인가!

그것이 가(假)중심이 될 겁니다.

가중, 임시중,

실질적인 나의 주인이 될 겁니다.

그것이 바로 9번 궁인 이궁입니다. 
 

이 이궁( 宮)을 통해서 중궁과 만나게 되므로

9번 궁은 실제 중궁과의 관계에서 제 1차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즉 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들 9번 궁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중궁과 만날 수 없습니다.

 

중궁이 어떠한 경우로, 앞서 제가 말씀드린 경험에 따라서 정을 맞아버렸을 경우에,

나가는 것은 9번 궁이 아니라 중궁이 나가버리는 겁니다.

물론 9번 궁을 경유해서 나가버립니다.

9번 궁을 경유해서 나가버리는 이 중궁을 다시 내 속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도

9번 궁을 움직여서 그 차례를 지켜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나는 돌아올 수 없고,

나는 더 이상 이 땅위에서 그림자를 가지지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림자를 가지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 9번 궁을 갖고 순서대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조금 전에 어떤 분이 그러셨는데 귀신도 그림자가 없고 그리고 영도..

더 높은 법계도 그림자가 없다 그랬는데,

법도 그림자가 없고 그리고 귀신도 그림자가 없다고 그랬는데 귀신은 그 귀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햇빛을 가리울 수 있는 굵은 닷,

굵고 조악하고 한 것이 나쁘다 좋다의 의미를 떠나서

그런 굵은 닷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계가 그림자가 없다는 건 다릅니다.

바로 이 귀신을 비교하자면 9번과 비슷할 겁니다.

법계를 비교하자면 중궁과 비슷할 겁니다.

법계에는 왜 그림자가 없는가!

법계에는 그림자를 받아 줄 땅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습니다.

법계에는 그림자를 비춰줄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습니다.

어떠한 그림도 허공 속에 그릴 수는 없는 법이고,

허공 속에 그림을 그릴수가 없다면 결국은 화폭 위에 그려야 되는데 그 화폭이 없는 것이 법계입니다.

 

화폭이 없으니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이라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무대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 내가 살고 있는 가족, 내가 살고 있는 사회, 내가 살고 있는 몸,

그 모든 것이 화폭이고 그림자가 비칠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 대상이 없다는 것이 바로 법이고 따라서 그 대상이 분별심을 지어내는 것이니

법계는 분별심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이 안반수의에서 바로 법계를 설명하는 법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있을 뿐 실존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제 밤에 어떤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새벽인가요?

부도지를 읽다보니까 마고가 두여자를, 두 희를 낳았는데, 두 명의 희(姬)를 낳았는데,

이 二姬가 또한 선천을 男으로 하고 후천을 女로 해서 천인 천녀를 낳았다 그런데 二姬도 여자다.

그러면 이 여자는 무엇이고 이 여자는 무엇이냐.

 

二姬가 여자라는 것은 무엇이며 선천을 남자로 하고 후천을 여자로 할 때 여자라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그렇게 되니까 읽지를 못하고 걸린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일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이와 같은 데 나타나는 이것은 전부 분별성 있는 세계의 이름을 갔다 붙였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

부도지 자체도 나름대로는 법서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분별성을 버려야 볼 수 있듯이 하물며 안반수의에 대해서이겠습니까.

 

數息과 中宮自運
 

안반수의에 나오는 모든 數다, 이름이다, 본다는 거나 냄새맡는다거나 하는

모든 것은 결국은 이름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안반수의에 나오는 수식이라는 것은 이름하여 수식이요 실제 수식이 아닙니다.

이 수식이라는 것은 바로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숨쉬게 하는, 중궁이 저절로 운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은 중궁을 운행시킬 것인가 하는 질서와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서와 그 길과 그 거쳐야 할 경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수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수식은 방법, 방편을 말하는 것이고

이 방편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도달지를 말하는 것은 中宮自運이 될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중궁이 진정한 나의 주인이며 9번이 그 중궁과 연결되어 있는 가장 첫머리가 된다면,

이 첫 머리는, 이 첫머리를 이용해서 방법을 밟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면 수식이 될 것이요.

그리하여서 마침내 중 자체가 저절로 운행의 체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중궁자운일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을 말할 때 수로써 표현할 것인가 이처럼 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양 다른 것은 똑같은 것을 일러 여자라 하고 다른 것도 일러 여자라고 하는

그와 같은 똑같은 단어를 쓰는 방편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은 수로써 이야기하든 그림으로써 이야기하든 그것은 같은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數를 넘어가다 보니, 말하기를,

이 數를 지나가다 보니  그 數 속에서 그 수를 경유할 때  마다 종종의 색을 보게 됩니다.

 

견종종색.

종종의 경색을 보게 되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수를 따라가다 보면은 색을 보게 된다 하는 것은 실제의 상황을 보게 된다는 것이고,

실제 이 수에 들어있는 모든 집들은,

9번을 매개로 하는 모든 집들은 중궁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을 머물러 놓고 가는 하나의,

각각의 순서를 맞춰져 있는 디렉토리입니다.

컴퓨터의 디렉토리는 이렇게 이루어져 있겠지만, 그림 하건대,

이 디렉토리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일직선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마치 수지도(樹脂圖)처럼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지,

그래서 이 宮마다 각각의 모습이 다른 것일 뿐 실제로는 정리된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중이 움직이기 시작하거나 구가 중을 움직일 정도로,

구번궁이 중을 움직일 정도로 통제력을 갖게 되면은 각 궁들에 있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나의, 1/2ⁿ에 관한 1/4ⁿ에 관한 또는 나의 이 'n'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n이 30만 되도 억이라 그랬습니다.

무량항하사의 n이 있는 것이고, 무량항하사의 n은 이것을 더욱더 헤아릴 수 없는 숫자로 만들 것입니다.

그 더 이상 바깥을 그릴 수 없는,

우리가 관찰하는 그 천문의 영역보다도 훨씬 깊은, 더 많은 그것들이 모두 이 수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하여서 태어난 나의 유일한 독자성의 이야기가 또한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어찌 나의 몇몇 전생을 볼 것이며, 어찌 내가 풀이요 나무요 돌이었을 때만 보겠습니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 다만 그 길들을 지나가는 순서에 따라서 그 공부의,

이 공부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 그것을 보는 것은 달라질 것입니다.

표면에 있는 것만 볼 것이냐 더 깊은 것을 볼 것이냐

이 모든 것들이 다 자유롭게 제자리를 찾아가서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이 진정

그림자를 갖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는 법계라고 하는 세계와 나와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과 지옥재
 

오늘 드릴 이야기는 바로 9번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9번을 내 호흡법에 있어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식은 기본적으로 열(十)로서 끝납니다.

하나에서 시작해서 열로서 끝나지만

그 수는 실제로 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을 행해 가는 과정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수식에서 열은, 저절로 그러하다는 의미의 열(十)은,

다가가고자 하는 목적지일 뿐이지 실제 다가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열로 다가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마지막이 아홉입니다.

이 아홉까지가 실제 수식입니다.

이 아홉까지 가려는 과정 사이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관법입니다. 
 

좀 생소한 이야기를 하나 해 보겠습니다.

사람의 뱃속에는 무한한 존재들이 들어있다고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무한한 것들은 대개 언제 나타나느냐,

사람들이 호흡을 할 때 흔히 배를 가급적이면은 비우고 하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공복 중에 해야만 명상이든 호흡이든 잘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왜그럴까요?

배가 부르면 왜 안될까요.

배가 불러서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배를 빵빵하게 해서 저팔계 일보 직전까지 하고 해도 호흡은 잘 됩니다.

그러나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9번 궁을 통해서 바로 다가가야 되는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에 육번과 칠번이 있기 때문입니다.

 

6번과 7번 궁에는,

6번 궁은 나의 수억에 걸친 그 과거의 몸의 경력이 있다면,

몸의 세월이 있다면,

것이 인간의 몸이라면,

그 인간의 몸에 담긴 모든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6번 궁을 들여다보면은, 자신의 수많은 모습을 들여다  보고 때로는 치를 떨기도 합니다.

살인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음행을 하고, 그 모든 것들을 겁없이 한없이 자행했던 자신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운 모습에, 그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이라 여기고,

그 또한 허상이라 여기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마음을 거기에서 편안히 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일러서 지옥재라고 합니다.

 

다 그런 거지, 다 허상인 것이야,

내 6번 궁에서 만나는 것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감당할 수 없어지고,

참회할 용기마저도 나지 않는 수많은 나의 생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이 오히려 싸늘한 재처럼 식어지면서 세상은,

삶은 다 그런 것이야, 모든 것이 공한 것, 다 그렇게 허무한 것이고 허망한 것이고,

가라앉은 것이다라고 여길 때 그것이 지옥재요 이른바 지옥찌거입니다. 
 

아무튼 6번 궁에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고비들이 있습니다.

수련의 어려움은 실제 몸을 바로 두고 하는 기초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면

또 다른 6번에서  만나는 고통이 다가옵니다.

 

또한 7번도 고통스럽습니다.

6번뿐만이 아니라 내가 몸을 갖고 있지 못한 나의 신, 혼백의 상태들,

나의 영적인 상태들이 다 담겨있습니다.

내가 몸을 버리고 살았던 모든 세월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를 어쩌겠습니까!

이것 또한 나를 지옥재로 빠뜨리는 좋은 빌미가 됩니다.

이와 같은 공부를 해 보신 분들을 그것에 대해서도 어떤 것이다라고 짐작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에서 주어지는 미끼입니다.

이 미끼는 쓰고도 씁니다. 쓰고도 씁니다.

이 미끼를 물면은 쓴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고통의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그 강 너머에는, 여러분이 낚시를 하시든 안 하시든 낚시할 때는 미끼를 쓴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가 되었든 가짜가 되었든

미끼를 가지고 무언가를 할 때는 그 뒤에 있는 것은 반드시 미끼보다 크게 마련입니다.

미끼보다 작은 것을 하려고 미끼를 던지지는 않습니다.

모든 미끼는 더 큰 것이 뒤에 있다는 전제하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들을 하나하나 넘어가면은 그 고통들은 모두 각각의 미끼가 됩니다.

그 미끼 뒤에는 더 넓은, 미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평원들이 있습니다.

대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대고통, 헤아릴 수 없는 난고,

이 고해의 바다의 앞에는 또한 달짝지근한 미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달짝지근한 미끼들은 물었다 싶으면

그 뒤에는 반드시 그것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굴레요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여기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사시니까 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다 그 미끼를 물고 삽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물어버린 미끼는 많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결코 뭐 제가 출가하라고 권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은 미끼를 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은 남녀가 사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고 굴레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달짝지근한 미끼가 있거든, 그 미끼 없으면 절대 안 물죠.

한 번 물면은 뒤에는 반드시 정해진 것이고,

이것이 괴로우니깐 벗어버릴 만 한데 또 그 중간에 미끼가 하나 또 있거든.

모든 고통의 바다로 넘어가는데는

반드시 달짝지근한 미끼가 사다리처럼 기가 막히게 포진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미끼를 물고 물고 가다가 마침내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고해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삶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에서는 거슬러 올라오는,

남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들처럼 고생을 해도 거슬러 올수 없는 한계가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그 미끼에 취해서 더 이상 거슬러 올 수 없는 폭포를 뛰어 내렸는지도 모를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폭포를 거슬러 오르기는 어렵지요.
 

수행은 반대로 그 뒤에 더 넓은 나름의 낙원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낙원이지 사실은 방편문이요, 그 또한 쓴 것에다가 사탕발림 해 놓은 겁니다.

쓴 약 먹기 싫으니까 약 먹은 다음에 사탕하나 주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쓴 미끼 물고 나면 뒤에 큰 것이 있느니라고 하는 '있느니라' 자체가 사탕발림이긴 합니다.

그러나 분명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탕발림의 말로써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와 같은 대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에 이르면 또다시 쓴 미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쓴 미끼들을 모두 밟아 가는 제 여행길이 수식이기도 합니다.

수식이라 함은 또한 그것을 뜻합니다.

이 수식은 얼핏 생각하면 2ⁿ을 밟아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2ⁿ을 밟아간다면은 이것은 못할 짓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2ⁿ을 밟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이 n 자체를 밟아 가는 겁니다.

2의 99승을 밟아야 하는 내 수가 아니라,

100이라면은, 2의 99승이 내가 밟아야 할 길이 아니라 99자체가 내가 밟아야 할 길입니다.

그리고 이 또한 그렇게 복잡하거나 긴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아홉으로 전제를 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안반수의의 위대함입니다. 
 

안반수의는 사람이라는 것이, 내가 과거로부터 존재, 거듭 말씀드린다면,

현재의 나가 있다면 이 나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끊임없이 올라가는,

백대만 올라가면 2의 99승 아닙니까.

2의 99승을 다 훑어 갈 수 없는 거지죠.

그러나 원칙적으로, 방법론 없이 가자면은 이걸 다 해야 되는 겁니다.

이거는 2ⁿ만큼 태어나도 될까 말까 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n이라는 숫자로 줄인 것만 해도 대단한데,

이 n이라는 숫자로 줄인 것이 이른바 제 2불교의 하나인 브라만입니다. 
 

브라만의 수행법은 이 n이라는 길,

내가 아메바부터 지금까지 내 몸을 가진 것이 1억 번이다 그러면은

1억 번을 밟아가는 것을 방법론으로 채택한 것이 브라만입니다.

그래서 이 브라만은 결국은 중도에서 포기되고,

방편이 너무 길기 때문에 거꾸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길의 궁극적인 것을 지옥재로 여기고

오히려 중간에서 능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언제든지 외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도를 막는 한편 방법론 적으로도 매우 간단하게 만들어서

이 n이라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도 9라는 것에서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그것이 제 삼 불교인 현 불교의 수행법이고,

그것의 내용을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안반수의,

그리고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추상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니, 금강경은 그것을, 이 길을, 아홉 개의 길을, 초기에,

n이라고 하는 엄청 많은 길에서 아홉의 길로 몰아가기 중간단계의 부처님께서 밝히신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마침내 구라는 것에서 완성된, 구체적으로 완성된 경전이 안반수의입니다.

그러므로 안반수의는 매우 간단하고 매우 단순하며 누구라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경전이었건만

2500 여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너무나도 어려운 경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왜?

상식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질서 속에 1,2,3,4..등이 있다는 이 질서에 대한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묘하게 변질되고 왜곡되어서 그냥 역리를 따지는 사람들의 전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점을 치는 사람들, 또는 태양 태음력으로 날씨를 예측하는 사람들의 괘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괘는, 원래 의미는, 이 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수식마다, 터미널마다 거치게 되는 이 현상들을 수식관이라고 합니다.

수식에 나오는 수식관이라고 합니다.

 

九宮 돌파(여행)
 

그 觀 가운데, 이 관의 특징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먼저 1번에서는

어떠한 관도 만날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 정제되지 아니한 닷을 보기 때문에 이 닷에 비친 색을,

말 그대로 빛깔을 볼뿐입니다.

또는 빛을 볼뿐입니다.

 

여기에서 보는 빛은

푸른 풀빛으로부터 비롯해서 흰빛과 그리고 검은빛과 붉은 빛과 누른빛을 볼 따름입니다.

또는 그 빛들이 각기 섞여있는 것을 볼 따름입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그림자를 가진 상을 볼 수는 없고,

그림자를 만드는 재료들의 빛깔을 볼 따름입니다.
 

그리고 2번에 이르게 되면은 그 가운데 움직일 수 없는 빛깔,

가장 원초적인 생명으로서 존재했던 모든 나의 2ⁿ중에서,

실제로 이거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많이 몰려 있다가 절대로 같을 수 없는데 그래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궁이 포화할 수 있는 포화상태의 크기는 1번과 9번을 제외하고는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1번, 5번-중궁, 9번을 제외하고 나면은 포화상태라 할 수 있는 양적인 크기는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각각의 하늘입니다.

이 하늘 속에 또 하늘이 있습니다.

이 하늘 속에 각각의 하늘이 있지만 그것은 금강경을 넘어선 다음에나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 2번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정도의 미세한 생명체인 돌,

돌은 현재는 생명체는 아니라고 그러죠, 등 그와 같은 낮은..

이라고 말해야만 되겠지만 그것이 관연 낮은지는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낮은'이라고 표현을 하겠습니다.

 

낮은 생명으로서,

생명인 듯 아닌 듯한 그 생명으로 있었을 때의 수많은 기억들이 나를 덮고 지나갑니다.

여기에서는 그다지 괴로움이 없습니다.

왜?

괴로움을 느끼는 감각조차도 여기에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3번, 4번 무렵에 가기 시작하면은 수많은 가시덤불이 되어서 사람을 휘감고

또는 수많은 풀뿌리가 되어서 다른 벌레들에게 먹히고 또는 먹는 그 이야기들을 보게 됩니다.

낮은 짐승들이 되어서 개, 돼지로서 머물고 있던 수많은 세월들 보게 됩니다.
 

그리고 4번에서 그것을 따라서 5번을 피해서 6번으로 여행하는 그 사이에서는 번갯불을 만나게 됩니다.

천강에서 비치는 강한 삼색 번개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삼색 번개가 어쩌면 나의 실체인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그것은 제하고 그 번갯불을 겪고 나면 어느 사이에 6번을 보고 있습니다.

 

이 6번 속에서는 인간으로서 또는 인간적인 제 형태로서의 나의 모든 기록들을 관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보면 현재의 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나를 볼 수 있고, 또한 미래의 나가 움직이고 있는 그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또한 7번을 바로 거치게 되면서 6번과 7번은 경계가 모호합니다.

내가 몸을 가지지 않고 있는 상태로서의 기억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8번에 이르러서는 말할 수 없는 관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관은 마치 한 장의 종이 구름처럼 나를 태우고 9번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제 여행은 거꾸로 시작합니다. 방법은 이걸 잡지 않으면은 안 되기 때문에,

1번부터 순리적으로 해 가는 것, 그것만 가지고 간다면 이 수식관을 뚫고 나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 수식관을 이렇게 1번부터 차근히 뚫고 나가는 것을 일러서 이른바 우방이라고 합니다.   

좌방은 9번을 가지고 역으로 뚫어갑니다.

9번으로부터 문을 튼튼히 해 놓고 나올 출구를 튼튼히 해 놓고 속에 불을 지핍니다.

 

즉 속에서 성을 쌓고 길을 찾고 해서 성밖으로 내 스스로가 길을 찾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꾸로 이것으로 하여금 스스로 길을 찾아 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해놓고는 요기만 튼튼하게 해 놓고는 다 싸발라 버리고는 불을 지펴버리면은

이것은 저절로 9번과 연결이 되어서 열어 젖힌 남문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남문이 아니면 나오지 못할 것이요,

남문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1번으로부터 가나 9번으로부터 시작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성은 있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떡해든 중에 도달해서,

중이 내 자신이 되어 가지고 여행을 해서 9로 찾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9를 키움으로서 이 중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은 빠르고 어찌 보면은 늦고 하는 것이 있으나 안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박에 이를 수 있는,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頓悟頓修라 할 때 그 뒤의 돈도, 갑작스럽다는 돈오돈,

우리의 시간을 놓고 頓悟漸修라 토의를 했던 불교의 풍토는

너무나도 불교 자신에 대해서 무지한 것입니다.
 

돈오다 점수다 했을 때 돈이니, 차츰 하는 점이니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시간으로써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넘어선 개념의 시간입니다.

 

앞서 제가 정을 맞았을 때의 상황을 말씀 드렸습니다.

정을 맞아서 제 자신의 몸 밖에서

저를 몸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과정이 무려  일년 넘게 걸렸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시간에서는 그 아이가 한 두 걸음도 내딛기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1초 안 되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돈오돈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누가 돈오점수라 하겠습니까. 
 

허나 그 속에 갇힌 1년 반을 이야기한다면 누가 돈오점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놓고 바깥 시간으로 비유하여 등을 치고 안의 시간으로 비유하여서 배를 치는 것,

그것이 선승들의 가르침일 뿐입니다.

또는 그것을 가지고 장난질 치고 놀았던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근/현대에 있는 명승들이 어쩌면 그럴런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그럼 문제는 구번으로 갑니다.

 

구궁기로좌(1좌∼9좌)
 

9번은,

9번궁이 갖고 있는 기능이나 이런 것을 먼저 알려고 하지 않고,

9번궁은, 이 수식을 하는데 있어서 9라는 수는,

즉 1번부터 9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9를 먼저 단련하는 방법을 채택합니다.
 

9를 먼저 단련하는 방법이 제가 공부해온 문중의 방법으로는

구궁기로좌라고하는 또는 구궁기로식이라고 하는 호흡법은 1부터 8까지가 있고,

9는 있기는 있으나 없는 것입니다.

방편도 없고 방법도 없고 아무런 힌트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8까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1과 2에 이르기까지,

그 앞에 하는 지중식까지 다 비롯해서 구궁기로 2좌까지는 이 9를 단련시키는데 있습니다. 
 

특히 1은,

구궁기로 1좌는 이 구의 문이 튼실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구로 하여금, 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호흡하게 하지 못하니까 중의 가짜중,

중이 아닌 중의 역할을 맡고 있는 9번을 가지고 중 행세를 하게끔 하는 수행법이 구궁기로 1좌가 됩니다. 
 

구궁기로 2좌는 마침내 1과 2가 만나서 그 만남의 소리를 듣는 수행법입니다.

구궁기로 2좌를 완성했을 때는 나의 9번궁과 나의 중궁이 만나는 그 감을 가져야만 2좌가 끝난 것입니다.
  

3,4,5좌를 하게 되면은 마침내 이 중궁을 다 여행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2ㆍ3ㆍ4를 여행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3좌요,

6ㆍ7ㆍ8에 중점을 둔 것이 4좌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 놓은 것이 5좌가 됩니다.

 

그리고 이 5좌의 핵심에 선치삼제후로일원상법이라는 아주 위험 천만했던 수행법이 있습니다.

수백명 수행자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리하여서 나름대로 200년 내에는 부작용이 없었던 수행법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를 끝낸 분을 일러서 수식을 끝낸 분이고,

이 수식을 끝낸 분들을 일러서 과거에 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이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을 또한 수인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끝내고 6좌를 들어가게 되고 하면은,

또는 6좌를 밟고 있는 사람은 아니고 6좌는 끝내야만 이것을 일러서 수자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8좌를 끝내야 대수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저는 누구든지 밥 먹는 법을 알고 숟가락 젓가락질을 하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도 대단한 것이요,

숟가락질하는 것도 대단한 혁명입니다.

원숭이에게 비교해 보십시오.

 

원숭이에게 사람의 밥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젓가락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숟가락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질 않고,

밥을 먹으라고 한다면 원숭이가 수 천 만년이 걸려도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못합니다.

 

인간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어려운데 그걸 다 배웠거든요.

그걸 배웠듯이 이것도 이제는 숟가락질 젓가락질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활화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반수의는 그래서 지금 다시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까지는, 여기까지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생활 속에 당연한 것,

밥먹는 것, 숟가락질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세월이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향하여 인간은 나아가게 될 것이고, 분명 나아갈 것입니다.

거기까지, 그 나머지야 인연에 따른다고 하더라도요.

 

이궁의 위치와 찾는 방법
 

이 가중은 바로 그런 가운데에서 위치, 실제 위치, 이것은 그림자를 받는 내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받는 내 몸에 지나지 않지만 내 몸 속에서 느끼지 않으면은 느낄 방법이 없는 걸요,

내 몸이라는, 그림자를 받는 이것은 이미 2ⁿ이 이루어 놓은 복합체인걸요. 어쩔수가 없는 걸요.

여기서 마이너스 일(-1)을 하나 하기도 어려운걸요. -2는 더욱더 불가능한걸요,

그러니 이 위치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몸은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1차, 배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배 가운데서 어디에 있을까?

배 가운데에서 여러분이 그것을 아는 것은 간단합니다.

 

앞서 패철 돌리기를 이야기 했습니다.

패철을 돌려서, 쳐서, 내려서, 다시 모았을 때에 배에 기운이 모이는 곳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손을 합장을 한 상태에서 그것을 밀었을 때,

슬그머니  밑으로 밀며 내렸을 때,

탁!

하고 기운이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있습니다.
 

단 그것은 서서 해야만 정확하지만 앉아서 해도 느껴지는데,

앉아서 하면은 조금더 위에서 2.6, 평균적으로 2.6㎝ 위에서 걸리게 됩니다.

앉아서 하면은,

 

서서하면 2.6㎝ 밑에서 걸립니다.

앉아서 하는 것과 서서 하는 것이 바로 하나는 상단의,

그 기운이 원래 상단의 경계요,

하나는 하단의 경계이니 이궁의 육체적인 크기는 지름이 2.6㎝, 일인치(1 )가량입니다.

큽니다.

오백원 짜리 동전보다도 크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실제 이궁의 전체는 아니고

이궁의 기운을 받아주는 육체적인 영역의 크기를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잡아내는 것인데, 그곳은 어디인가,

배로 보면은. 사람의 배는 그 기운덩어리로서, 그

림자를 받지 않는 영역의 사람의 배는 자전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전축의 한 쪽에 배꼽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 알타이가 있습니다.

선장 관절이 있습니다.

선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향해서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돌고 있고,

돌고 있는 이 한복판에 이른바 지구로 말하면은 적도에 해당되는 선이 있습니다.

이 적도의 끝에 이른바 명문과 연결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끝에 이른바 관원과 통하는,

그러나 관원이 아닌,

관원과 비슷한, 모로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지구의 자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밤과 낮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북극도 아니오, 남극도 아니라 적도이듯이

실제 사람 몸을 흐르는 기운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도 이곳이 됩니다.

그래서 흔히 방편론 적으로는 명문으로 기운이 들어와서 관헌으로 연결된다고, 느끼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이것은 방편 중에서도 편의한 방편이고, 그와 같이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편향증험을,

조각조각의 경험을 빨리 느끼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을 뿐,

그것은 원칙이 아니고 이 자전축을 느끼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자전축과 적도 사이에는 움직일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텅 비어 있으면서 너무나도 크고,

더 이상 바깥이 없을 정도로 크고 더 이상 속이 없을 정도로 작은,

그와 같은 운동을 나의 생명의 단위인 한 홀마다, 한 홀마다 거듭하고 있는,

최소에서 최대로 팽창을 한 홀마다 거듭하고 있는 나의 중궁이 있습니다. 
 

이 중궁을 이어가는 이 줄을 이어서, 이 자전의 줄을 이어서 命줄이라 합니다.

이것을 명줄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 줄은 나름대로 늘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하기도 하고, 이것이 가장 짧은 직선 코스는 아닙니다.

이것이 평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줄이 있습니다.

이 줄 가운데서 줄이 상향으로 가장 높이 올라올 수 있는 이 지점의 육체에 이궁이 있습니다.

이것이 앞면입니다.

앞면인데 배꼽보다 조금 높게 되죠.

그러나 반드시 배꼽보다 높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배꼽과 거의 일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 명줄의 진폭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꼽보다 낮은 경우는 없고 이 진폭이 배꼽보다 낮아지면은

드디어 명줄은 멈추고 사람은 육체를 떠나서 훨훨 여행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림자가 없는 세계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배꼽을 반드시, 그 이상, 어딘가에 이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배꼽 밑으로 명줄이 쳐지면은 사람은 허리가, 사람은 허리가,

활처럼 휘었던 허리가 그대로 직선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누워서 있을 때 허리에 손을 들이밀면 손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또는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흔히 기력이 떨어지면은 허리에 있는 공간에 손이 잘 안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에는 단 1㎜도 공간이 없게 딱 붙어버립니다.

바로 배꼽이 기준이고, 배꼽 또는 배꼽에서 그 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이궁이 있습니다.
  

그 위치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위치를 찾는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장틀에서 찾아입니다.

찾아,

잡아 그리고 막아에서 이궁은 완전히 자기 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다른 자세의 한 중심에, 모든 자세의 중심에  이궁을 찾는 수행이 곁들여져 있습니다.

 

패철을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백학타사를 하면 할수록 더욱더 이궁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지고

이궁이 마치 내 몸의 실질적인 중심인 양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뚜렷하게 느껴질 때 팔자돌림이 이어진다면

이 팔자돌림은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하거나 메스껍게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이궁을 잡는 것,

이궁을 잡는 것은 일단 행공으로, 몸으로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남기셨다는 몸공부가 있는 까닭도 바로 그런 것이요,

수 많은 그 이전의, 브라만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요가의 그와 비슷한 동작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

그리고 요가와 관련이 없는 이 동방의 선가 수련법에도 그와 같은 공부법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궁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실제로는 우방은 없는 셈입니다.

왜?

우방처럼 해서는 만명이 시작하면 한 명이 될까 말까,

좌방처럼 시작하면은,

10명이 시작하면은 10명이 됩니다.

단 누구나 그만큼 한다는 전제하에서만 됩니다. 
 

어쨌든 이제 이궁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 드렸습니다.

이 이궁을 잡아야만 되는 이유 중에 또 하나, 이궁의 위치를 이야기했습니다만,

이궁의 위치는 따라서 실제 이것이 피부이면은 피부보다 상당히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궁의 위치가 다릅니다.

요즘은 그나마 또 다를텐데요,

사람이 살이 쪄 가지고 또 달라지는데 이궁있는데 까지는 살이 찌진 않습니다.

묘하게도. 거기에는 살이 많이 찌지 않습니다.

 

이궁 위에 살이 많이 찌거나, 그러면 윗배가 불렀다고 그러죠.

이궁 아래가 살이 많이 찌거나, 그러면 아랫배가 많이 불렀다고 그러죠.

이궁 부위에는 살이 잘 안 붙습니다.

그래도 현대인들은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여기도 배가 불러 나오는 것을 실제로 많이 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일단 무시하고 있다면, 배 표면이 평균적이라면은,

평균으로부터 자신의 이궁을 찾을 수 있는 길이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입니다.
 

자신의 엄지손가락의 길이와 자기 뱃속에 있는 이궁의,

옆면으로 봤을 때,

이것이 배의 표면이라 한다면 여기서 엄지손가락을 딱 대면됩니다.

거기에서 안으로 정 중앙에 그리고 기운이 느껴지는 배꼽의 약간 위에,

어떤 사람들은 배꼽위의 상당히 위에,

그래도 결국은 안으로 들어가는 건 똑같습니다만 거기에

이궁의 역할을 하는 육체적인 기운을 받아주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이궁을 찾으면, 이궁을 찾으면,

먼저 이궁속을 흐르고 있는 고약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안반수의에서 좀 벗어나겠습니다.

안반수의와 관련되지 않는 이야기를 드려야겠습니다. 
 

안반수의는 깨끗한 사람들을 전제로 합니다.

독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현대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수히 많은 독을 갖고 있고, 이 독이 나의 생각까지 지배합니다.

몸에 독이 있으니 어찌 마음에 독이 없겠습니까?

현대인은 독인입니다.

그 독을 이궁을 가지고, 잡아 논 이궁 가지고 독을 모두 축적시키고,

축적시켜서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이것을 마침내 독을 풀어버리는 이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 과정이 또한 괴로운 미끼중의 하나입니다.
 

이 과정을 하다 보면은 상당히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평소에 움직였을 때 자기의 기운보다가도 적어도 4할 이상,

절반정도 기운이 줄어 든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기력해짐에 가까울 정도의 기운이 줄어들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자신의 원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회복되면은 이제 이것가지고 거꾸로,

이것은 자신의 최하점입니다.

이 최하점을 확인하지 않고 원래의 자신의 깨끗한 몸을 확인하지 않고서

여기서 수행을 해 간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고,

이것은 뒤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은 적어도 그렇습니다.

과거인도 아마 일정하게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하게 수행이 도달해야 하는 중궁자운에 이르지 못하게 했던 이유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독이 아닌 나 고유의 기운으로 되돌아가서

거기에서 반등을 해 가야지만 중궁자운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반수의에 없는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것은

우리 현대인은 너무나도 심각하게 이런 문제에 걸려있기 때문이고,

제가 보건대 지금까지 선배 제인들의 수행이 늦어져 오고,

그 수행의 결과가 바른 데로 가지 못하고 지옥재가 되어 버리거나 엉뚱한 힘을 키우는데,

신기함을 키우는데 흘러가 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중궁을 가지고 각각의 수식을 어떻게 해 갈 것인가?

무엇 무엇을 해 갈 것인가,

그리고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 다음 시간부터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줄이겠습니다.        
(01.4.12.조계사 교육원)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6)  
  

우리는 너무 한 곳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 한 곳으로 말미암아

현실세계에서는 약속도 어긋나고 뭐도 어긋나고 그렇게 됩니다.

 

그와 같은 것을 딱 정해 놓은 것이 육하원칙입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왜, 어떻게 등 그와 같은 것을 수행에서도 반드시 적용을 시켜야 되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육하원칙을 조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관(觀)'하면 누가, 즉 주체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을. 왜는 수행의 의미에서 일일이 따져봤으니까 잠시 두기로 하구요.

어떻게. 언제는 뭐 굳이 또 여기선 얘기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관을 이야기 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될 것입니다만

이 '어떻게'에 대한 이해는 앞에

누가, 무엇을 하는 관의 주체와 관의 대상을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그리고 누가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늘 말씀을 드립니다만,

우리가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 이거다 저거다 하고 서로 따지고 있고 이야기하는 바,

여기선 가족을 가지고 자식이 있는 분도 계실텐데 자식에게도 이것이 참 좋은 일이다,

이것이 좋은 일이다 하고 얘기하다가 나중에 안 되면은 화를 버럭 냅니다.

화를 버럭 내고 그리고 정 안 되면 몽둥이 짓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뒤집어 말하면 정말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애정을 빌미로 삼아서 내 속에 있던 그 싸움덩어리의 마음이 솟아 나는 겁니다. 
 

지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상(相)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 객체인 것이지

이름하여 그냥 약속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상들은 상이라고 굳이 이름을 붙이고 이 상을 없앨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상 자체의 성격 때문입니다.

 

사람이 몸을 지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 몸 속에 몸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이 상(相)이 생산되지 않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상의 성격이 지극히 적대적이고 편협하고 치우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의 성격이 불교에서는 탐심, 진심, 치심이라 해서

탐진치(貪瞋痴)를 이야기하는데 바로 그처럼 온갖 투쟁심을 자아냅니다.

 

이 투쟁심은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려는 그와 같은 정의의 마음이 아니라 실제 뭔가를 미워하는 마음,

나만을 세우고 싶어하는 집착의 마음, 그런 이익의 마음이 생겨나죠.

 

이와 같은 상의 잘못되고 그릇된 성격, 약간은 배타적인 성격을 없애라는 것이죠.

뒤집어 말하면 이 상을 싸움꾼의 성격에서 내 마음밭을 갈아치우는 농사꾼으로 바꾸라는 것이죠.

그것이 무상의 또는 무잡상의 또는 무념의 원래 의미가 됩니다.

이 상들이 하는 작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잘되라고 한 것도 한참 가다보면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빌미가 되어 있을 뿐이고

실제로는 이 상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와서 어느 사이엔가 싸움질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진리를 얻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저것이 진리입니다 하고 고요히 이야기하다가 한참 하다 보면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고 얼굴이 벌개지면서 또 약간 식었다 올라갔다를 반복하고 때로는 예의를 지키고

때로는 예의를 상실하면서 진실을 논하는데,

실제 진실은 빌미가 되어있고 이 상이 솟아 오른 겁니다. 
 

이와 같은 상을 항복을 받는 것이 금강경에 나오는 항복기심(降伏其心)입니다.

 

"어찌하면 그 상을 항복 받을 수 있겠습니까. 깨친 자여"

 

하니까 이 상은 이처럼 항복 받으며,

이 상을 여의고 항복 받기 위해서는 이처럼 내 자신을 머물게 한다.

 

- 거기서부터 금강경은 시작합니다. 
금강경 제 2품이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 이때의 장로 수보리가 일어나서 등등등. 절차를 거쳐서 묻습니다.

여래께서는 여러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잘 부축한다 하였습니다.

잘 호찰한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선남자 선녀인이 정말 지혜의 마음을 내고자 한다면 어찌하여야만 내 마음을 항복받고,

항복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내 자신이 살아야겠습니까."

 

하니까 말씀하시길,

그들의 말이 옳다 그들의 말처럼 그처럼 자신의 마음을 항복받고 또한 밝은 지혜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이처럼 거주하고 이처럼 상을 항복받아라.

바로 이제 이 이야기를 나누자.

좋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수행자와 수행자의 약속이 질문과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첫 구절도 마찬가지로 이 상을 어떻게 항복받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항복받을 대상, 볼 대상도 바로 상(相)입니다.

내 속에 머물고 있는 나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생각의 실상인 상을 보는 것,

내 생각을 꾸미고 있는 그 상을 바로 들여다보는 것

 

- 문제는 누가 하는 것이 걸리게 되죠.

이것이 사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느냐 쉽습니다.

대번 답은 쉽습니다.

누가?

나의 참마음이라고 이야기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참마음을 가지고는 어디에도 참마음을 가지고 상을 볼 수 있는 방편은 없습니다.

이것은 환상이요 거짓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이루어졌을 때 되는 이야기인 것이지 처음부터 참마음을 가지고 이 상을 볼 수 있다면

이미 공부는 할 필요가 없는 정도의 단계에 이르러 있습니다.

참으로 참마음을 어떻게,

참마음이 무언지도 모르고 내가 잡고 있고 주체로 여기는 내 생각이 참나인지도 알 수 없는데

어찌 참마음을 가지고 이 상을 본다 하겠습니까.  
 

여기에 의념법이 있습니다.

이 상들 가운데는 무념무상으로 이끌어갈지라도 모두 무념무상일수 없고

이 무념무상으로 이끌어 가는 것도 또한 상입니다.

무념무상을 해야지 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상이요,

그 이야기를 가지고 무념무상을 해 보려고 노력하는 나의 마음도 상입니다. 
 

단, 그 상 가운데는 싸움이 아닌

정말로 평화롭고 이미 모든 싸움의 성질이 조용히 잠들어버린 상이 내 속에 있습니다.

그 상이 얼마만큼 나 자신을 움직이고 있으며

나의 마음 나의 생각 속에서 그 상이 얼마만큼 많은가 하는 것이 사실은 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 그 가운데서 진정한 상, 고요한 상 일정상(一定想)이라고 합니다 -

정해져서 더 이상 움직임이 없는 그와 같은 상이 있습니다.

똑같은 표현이니까요.

상이 있습니다.

이 상이 방편으로써 임시로써 가짜로써 주위의 노릇을 대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굳이 어떤 방편으로써 이야기한다면

나의 진심으로써 나의 그 상들을 항복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상제상(以想制相)하는 것입니다.

상으로써 상을 항복받는 것이 방편입니다.

원리로선 나의 참마음을 가지고 나의 여러 상들을 제어한다고 할지 몰라도

그것은 방편을 넘어서는 허황한 이야기입니다.

참마음을 이미 세워서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이것을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이유 없지요. 
 

이 상을 갖고 있는 것,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나의 삶에서 온 것입니다.

나의 오늘날의 삶에서 어제의 삶에서 그리고 내 몸이 있기 이전부터의 나의 삶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것이 있기에 사실은 수련을 해보겠다는 마음도 한 편에서 일어나고

또한 수행을 통해서 참나를 이루겠다는 마음도 또한 꿈틀거리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해갈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에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돈독해가는 것이 일상적인 현상이라고 한다면 가히 노력을 통해서

자기속에는 이 일정상이 눈꼽만큼 밖에 없는데 그것을 가지고도 큰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겠지만

아무튼 누구나 눈꼽만큼 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분심이라는 대목입니다.

 

큰 분발심을 일으키지 않으면은 이 조그마한 상 가지고는 가(假)주체로 삼아서 상을 잠재우고 고요히 해서 그 내 생각 속에 있는 싸움꾼들이 더 이상 싸움꾼이 아닌 내 참마음을 가꾸어주는 그러한 그 농사꾼으로

돌리질 못하는 거지요.

분발심을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이 참된 상이,

밝고 정리돼 있는 상이 참으로 보잘것없다고 여기고

그것을 가지고 나는 이 전체 모든 상을 평정해야 된다고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된다는 거지요.

어쨌든 수행이라는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이 인연도

자기 속에 있는 옳게 자리를 잡고 있는 그 상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상이 없다면은 아무리 논리가 길고 지식이 밝고 해도 배타하면 그만인 걸요.

싸움의 상이 덜커덕 나와가지고 "흥 웃기지마라"하면 끝나는 것이거든요.

그러한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자신의 힘이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을 가능케 합니다. 
 

수행자를 일러 마음을 열어라 하는 것은 이 상을 항복받으라 하는 또 다른 계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

이것들은 어디서 생겼을까 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가주체가 될 수 있는 참마음을 대행하는 것,

참마음으로 가는 나의 길잡이요 등불인 이 임시 참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그러나 이것을 따지고 보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너무나 힘들게 얻은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나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또 아비로부터 아비와 어미가,

어미로부터 아비가 이렇게 오면은

내가 어떠한 사람의 100대 손만 된다고 치면 내 조상은 2의 99승에 해당되는 조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오는 사이에 한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 보는 것입니다.

무량항하사분의 1에서 내가 만난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공부해 나가는 옛 어른들의 그 법,

그것은 백천만겁에 얻기가, 만나기가 어려워라 라고 하는...

아무튼 그러한 것이 지금 서로가 수행으로 가려는 모든 마음 길에서

그 마음 길을 이루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

이 동기가 또한 주체가 되어서 동기를 이뤘던 이 마음을

주체로 삼지 않고 다른 일체의 상을 주체로 삼으면 이제 수행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나 자신을 수행으로 끌고 왔던 이 상,

이 상이 주체가 되면은 이 상만이 다른 이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을 어찌 볼 것인가 그 상을 보는 것을 일러서 관(觀)이라 하는 것입니다.

 

즉 이 잡상이 아닌, 싸움하는 제상(諸相)이 아닌

- 若見諸相非相이라 했는데 -

모든 상을,

하나의 어떤 그 제상이라 표현하는 이 제상을 제상이 아닌 영역 속에 있는, 다른 상이 보는 것입니다.

즉 이것이 현재 나라 여기고 이것은 현재 내가 부여받은 전생으로부터 그 이 전생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라 여기고 이 선물을 주체로 세워서 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는 여러 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가 아니라 견이 아니라 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관법이라 하는 것이고 관법, 관심이라고 했을 때

이 심은 실제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이 무엇에 해당되는 상을 보라 하는 겁니다.

  

그 상을 보되 그 상이, 모든 상이 실상이 아님을 보라 했습니다.

그러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위한 방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은 간단한 얘기는 아닙니다.

더 복잡하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수월하겠습니다만은 그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고요,

이 상이 상이 아님을 아는 경지까지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 4품이 거기에서 끝납니다.

5품부터는 이제 제 상들을 넘어선 수많은 스토리들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저 강을 건너감에 있어서,

저 고해의 바다를 건너감에 있어서 때로는 모진 물을 만날 것이고 때로는 바람을 만날 것이고,

때로는 소용돌이를 만날 것이고 때로는 잔잔한 물을 만날 것이고

때로는 급격하게 도는 급류를 만날 것입니다.

 

그때 그때마다 내 자신이 대처해야 되는 모습들을 마치 남의 얘기하듯이

잔잔한 물이 흐르니까 이렇게 건너더라 급류가 흐르니까 이렇게 건너더라 삿대질은 이렇게 하드라

그리고 소용돌이가 있으니까 삿대질은 저렇게 하더라 하는 식으로 남의 얘기하듯이

그 강을 건너는 다양한 모습을 열거해놓은 것이 금강경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A일 때는 B의 모습이 드러나더라 따라서 이것을 뒤집으면 방편이 나오는 것입니다.

32가지의 방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잖아요.

어렵고 그렇게 말하니까 어렵습니다.

 

그 어려움을 경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을 논할 때 거기에 참가한 비구가 천 이백 오십입니다.

천 이백 오십 인 속에는 실제 당시에 모였던 대중이 천 이백 오십 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적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경에서 봤을 때 가장 적은 인원입니다.

가장 적은 인원이 듣고 즐거워서 이것만 가지면 저는 이 바다를 건너갈 수 있겠습니다하고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게 한 깊고 깊은 경전이고

따라서 여기에 참여했던 인원수는 아무리 확대 해석해도 이 이상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서 내려온 부처공부의 직계가 이른바 북방밀종이 됩니다.

금강경을 수행의 소이경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우니까

부처님께서 말씀을 어떻게 하셨나 하면은 좀 더 쉬운 대중적인 수행방법을 내놨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 말씀드린 대로 그게 안반경입니다.

그게 안반수의경이고 안반수의경에는 따라서 이 열배수의 사람이 들은 걸로 되어있습니다.

더 많은 열배의 대중이 소화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 안반경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안반경은 금강경이 그 모습을 가지고 넌지니 가르쳐 주었다면 안반경은

 

"그래 강을 건너려면 배는 이렇게 지어야해 뚝딱뚝딱...

노는 이렇게 저여야 돼 쓱쓱...

삿대는 이렇게 가야돼"

 

하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친절하게 말씀하신 것이 안반경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 밥먹을 힘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밥먹는 힘가지고는 안되는 조금 어려운 정도.

현대인의 근기요, 현대인이 이 일정상만 존중해서 진정 자신으로 여긴다면 그 과거의 어떤 세대,

어떤 인류보다도 훨씬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지만 단,

이것에 대한 자기아낌,

자기 사랑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일정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싸움꾼이 아닌 진정한 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힘이 부족하지요. 현대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오히려 잘 싸우는 힘이 먹고 사는 데는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못 싸우면은, 출가하지 않으면은 먹고 사는 길이 없을 정도로 힘드는 게 사실은 많습니다. 
 

당장 이 일정상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자식보고 뭐라 말하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두 마디 하고 한 대 패버리면 딱 통하는데 천 마디 만 마디를 해야 돼요.

그리고 또 하루면 효과가 나타나는데 100일 200일을 기다려야 해요.

자식을 부처님 모시듯 해야 되고 예수님 모시듯 해야 됩니다.

아무튼 이 일정상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현대인들은 이것을

거의 누구나 천이백오십명에 들었던 공부를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한 자기 자긍심만큼 또 하나 없애야 되는 것이 이것을 방해하고 있는 수많은 싸움의 생각들,

이게 아닐거야, 이걸거야 등등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 그것들 때문에 어려워져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기회가 많으면 그만큼 어려움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미끼가 달면 달수록 고통도 더 크고,

또 미끼가 쓰면 쓸수록 고통도 더 달듯이요.

아무튼 이 안반수의경의 관법 이제 단독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마음을 씻고 참마음에 의해서 항복이 되어 있는 나의 일정한 올바른 바른 상들,

이름하여 상이요,
실상 상이 아닌 진정한 나의 진심이 반영된 그 생각,

그 생각을 주인으로 삼아서 그 주인을 어디에다 실을 것인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이궁에 싣습니다.

 

이궁이 아니면 이 생각을 실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데는 실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짐은 지게에 지고 큰 짐은 지게에 마수걸이(?)를 올려서 그 위에 지고,

또 더 큰짐은 말 위에 싣고 더 큰짐은 수레에 태우고 각각 정해진 것이 있습니다.

물은 항아리에 싣고,

흙은 또 일반 마수걸이에 싣고,

싣는 도구들이 다 다릅니다. 
 

이와 같은 참마음이 실려있는,

이 참마음이 길을 갈 수 있도록

고삐가 매어져 있고 길이 장만되어 있는 장소는 유일하게 사람의 몸에서 이궁밖에 없습니다.

이 이궁에 실린 것을 가지고 중궁을 움직여가는 것입니다.

이궁을 중심으로 해야만 됩니다.

이궁을 봐야만 다른 상을 볼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가장 먼저 보되 무엇을 볼 것인가? 
내 마음이 실려 있는, 참마음이 비친 이 상을 볼 것이요, 즉

①주인이 되는 상(主相)을 볼 것이요. 이것을 일러서 또 다른 표현으로 독심이라 합니다.
   그 다음 뭘 볼 것이냐 내 신세를 볼 것이요, 즉

②나의 몸이 내고 있는 각종의 색(身色)을 볼 것이요, 다음으로

③그 색에 담겨있는 모든 상의 모습,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볼 것이요, 그리고 나서 아무 것도 남지 않는,

④아무 것도 남지 않는 그 자리를 보라 했습니다. 이 네 가지를 봐야 이것이 관법입니다. 
 

그 가운데 이궁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처음에는 참마음이 아니라 중궁이 아니라 이궁이라고 했습니다.

중궁을 볼 수 없으니까 이궁을 어찌하여 볼 것인가? 
 

이궁은 참마음이 아니라 생각이 담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른바 한자로 하면 의념이 담기는 곳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이궁을 공부할 때 필요한 것은,

나의 올바르고 수행을 하겠다라는 그 마음이 담긴,

그 마음을 간절하게 염원하고 심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생각과 간절한 생각과 이궁에 대한 몸의 느낌이 일치할 때 내 몸에서 비로소 이궁의 모습,

이궁의 색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궁의 색을 일러서, 그 이궁의 색을 일러서 이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과거에 수행자들은. 지난번에 이미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금단자조(金丹紫調)라 불렀습니다.

 

이 금단자조는 얼마만큼 금단자조를 뚜렷하게 보는가 하는데 있어서는 당연히 내 마음이,

의념이 얼마만큼 간절했는가와 관련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이 一定想을,

바른 사람이 되겠다, 밝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그 생각만으로 봤는지 기를 축적하겠다는 생각을 담았는지 생각의 갈래에 있어서도 금단자조의 뚜렷하고 뚜렷하지 않음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단 한치도 수행의 과정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금단자조의 의념법을 하게 되면은 굉장히 뚜렷하게 금단자조를 보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늦게 늦게 시간이 걸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늦게 늦게 걸리는 분들은

이 금단자조를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할지 몰라도 엉뚱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겁니다.

또는 그 소망은 올바를지 몰라도 되면 되고, 말면 말고 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일어나야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갈래를 얻는 것 이것은 자신의 바른 의심, 진정한 바른 의심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이 간절함은 자신의 분발심과

또한 이것까지 보려는 진정한 자기자신은 할 수 있다는 자기믿음이 있어야지만 볼 수 있습니다. 
 

금단자조가 어떻게 되는 걸 보게 되느냐,

중을 향해서 하나하나 이 바른 생각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 이름하여서야 낙수라고 하지만 --

물방울이 떨어지듯 어딜 향해서 중을 향해서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했지만 결국 우리 몸의 위치가 중궁이 이궁보다 아래에 있어서 그런 것이고 실상은 중궁을 향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여 반본(反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다시 내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부도지에 나오는 복본입니다.

복본과 반본는 다르지요.

반본는 방편일 뿐입니다.

반본는 현재의 나에서 뿌리의 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를 저버리고 뿌리의 나로 돌아가서 그 뿌리의 나를 다시 중심으로 세워서

현재의 나까지 다 회복하는 것이 복본입니다.

수행은 반본을 방편으로 하는 복본의 논리입니다. 
 

아무튼 금단자조낙수중(金丹紫調落水中)이 되는 것을 보자면

그와 같은 분발심, 자기확신, 그리고 올바른 생각, 사량심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별의별 재주 있는 생각을 다 부리면 그 재주 있는 사람일수록 어려운걸 제가 많이 봐왔습니다.

저도 상대적으로 비교적 이 사회에서 가방끈이 길지는 못하고 중간쯤 되는 축에 속합니다만은,

가방끈이 길면 길수록 사실은 고통을 많이 겪는 것을 제가 많이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것만도 아니더군요.

가방끈이 아주 길다보니까 아주 쉬워지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문제는 이 진정한 진리에 대한 그 철학이라는 것이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정말 진리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얼마만큼 있는가 하는 그 정도에 비례한다 하겠습니다.

현대 지식인들은 결코 그런 진리에 대한 사랑이 깊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 과도하게 말씀드린다면 열 명의 교수 가운데 여덟 명은 아마 월급 안 주면은 안할 거예요.

조금 저는 늘 조금 덜 과격하게 얘기하니까 아홉명 정도 될지도 모릅니다. 현실이.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많이 줘도 나쁜 건 아니지만은 많이 받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은 안 받고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요. 
 

아무튼 금단자조낙수중은 하는 사람의 어떤 학력과도 상관없으며 신체적 조건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있다면 참사랑에 대한 사랑에 깊이와만 상관이 있습니다.

이 금단자조낙수중이 이궁단련을 통한 방법이고, 
 

이 금단자조낙중과 병행해야 되는 그 간절함을 싣고

이 의념이 이궁에 바르게 실리도록 도와주는 공부법이 바로 선치후로였습니다. 

선치삼재후로일원상, 즐여서 선치후로였습니다. 
 

선치후로가 되면 될수록, 선치후로가 원만하게 되면 될수록 금단자조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즉 금빛에 보라빛을

- 보라빛 그냥 일반 보라빛을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금덩어리 같은 기운 그런 것이 내 이궁에 뭉쳐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한점, 한점 금빛 자빛이 섞인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떨어질 때마다

내 중궁이 촉촉하게 젖는가 싶더니 그런 감각을 가지고 계속 적시어가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두 번째로는 갑자기 중궁이 요동을 치면서

배가 움직이면서 갑자기 파이프가 하나 생기는듯한 느낌이 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밖에도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들은 이궁에서부터 중궁사이에 그 파이프가 뚫린 듯이 텅 비어있다

뭔가 이상한  통로가 하나 있는 것 같다하고 느끼게 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다르게 거기가 연못처럼 물받이처럼 이렇게 자꾸 받아준다,

그 꽃잎 같은 느낌을 주는 물받이가 있어서 자꾸 물을 받아준다는 느낌이 있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뻥 뚫어져 있는 분들도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이요,

그 물받이에 물이 고이고 있는 분들도 바르게 가는 것이니,

뻥 뚫어져 있는 분은 그 뻥 뚫어져 있는 길 사이에서 또 나름의 감각이 있을 것인데

그런 분들은 적으니까 빼고 일상적으로는 그냥 물받침대에 물이 촉촉하게 고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안개가 피는 듯 하더니, 이궁에서 연꽃과 같은 것이 마음속으로 그 뭐라 표현해야될까요?

그냥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생각이라 할까요. 피어나서 그것이 몸을 지탱하고 세우고 있는 기둥이 되고 있는걸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이 연꽃이 피어나는 느닷없이 연꽃이

- 그림에 현혹되지는 마십시오 -

연꽃이 피어나고 있으면

이 연꽃주위로 그것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라고 그럴까, 보호막이라 그럴까 그런 것이 생겨납니다.

그런 기둥, 보호막이 한편으로는 녹푸르게 즉 풀색과 청색이 섞인 것은 나의 몸으로 봤을 때

바른손편에서 그리고 왼손편에서는 검붉은 기둥이 세워집니다.

그 기둥 밑에 뿌리를 알 수 없는 한없는 구름이 깔려 있습니다.

내 몸 속에 집이 하나 지어진 것일까. 
 

그 집이 지어졌는가 싶으면 이제 요동치는 집이 바르게 세워지면 각각의 창고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2번창고, 3번창고, 4번창고, 6번창고, 8번창고가 차례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열리는 것은 대개 4번창고와 6번창고입니다.

대칭으로 있는 두 개의 창고가 열립니다.

 

4번창고에서는 - 아까 설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 이야기로도 옮길 수 있는 스토리가 있는데,

이 스토리는 내가 짐승과 다름없을 때 또는 짐승이었을 때 스토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6번에서는 내가 사람이었을 때, 또는 사람다운 존재로서의 스토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을 적어낼 수도 있고 그것이 한편 나의 수만년 수천년의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수억년의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이 현상계의 역사이외에 내속에 나의 몸의 또다른 수천 수만 수억의 역사가 있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진정한 나의 역사일겁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내가 굴러간 환경, 환경일 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역사들을 보는 것까지, 그것까지가 안반수의에 있어서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안반수의는 이제 금강경으로 유도합니다.

안반수의를 이처럼 해서,

 

이 상들을 보고 상들 속에 있는 것에 대해서

때로는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참회하고 때로는 자신이 참 자랑스러워지고 하는

수많은 감정과 그 감정을 통해서 이 모든 일어나는 싸움박질하려는 생각이 참 불행한 것이며

나를 망치고있는 것임을 알고 그 성질들을 항복 받을 수 있을 때 이때를 일러서 사생관을 돌파했다 합니다. 이것이 제 1관 돌파입니다.

 

사생관 돌파는 수행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수행의 출발점입니다.

이때부터 나는 정말로 내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중궁의 주인이 되어서 내 역사를 내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창조자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역사는 내가 창조한다는 것이 진정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자신들의 이 상에 의해서 수많은 諸相들에 의해서 나의 역사가 이루어질 따름입니다.

내 자신이 이루는 역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자신이 이룬 것이 하나 없다는 것,

자유의지,

자유의지라는 것이 정말 빈말뿐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생사관을 돌파하면 진정 수행자다운 수행의 길을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금강경의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밀종에 속하는 것이고 매우 어려운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오늘날의 수행의 경전으로 삼지 않고 신앙의 경전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으로 머물고 있다면은 물론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편의 이야기이자 수행방편을 가지고 있기 이전에

다른 한편으로 수행자를 그 수행의 길로 이끌고 있는 자체의 길이요 진법(陣法)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진법이며

그 진법자체의 규정성도 또한 무시못할 아름다운 성분을 키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자 이제 누가, 나의 참마음을 대신하는 나의 나자신을 바르게,

나자신을 참주인으로 세워야겠다고 하는 밝은 생각이 그리고 싸움없는 생각이 그것이 이궁에 실려서

금단자조낙수중이라는 수행법을 통해서 그리고 마침내 내 몸 속에서 연꽃아닌 연꽃을 피워내는 것,

어쩌면 굉장히 빨리 이루어질 수 있는 공부요, 또 디디디디 끌면 오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9개월정도의 공부를 하게 되면

누구나 시도해볼수 있는 정도의 공부입니다. 
 

그것을 시도하는 기초 기간, 9개월을 우리 선인들은 그것을 일러서 따꿍(大功)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대충 '꿍'의 음가는 어정쩡한 중간, 꿍과 껑의 중간 음입니다.

이것을 놓고 이 따는 가장 큼이라는 의미가 되는 동시에 기초라는 의미도 됩니다.

큰 공부입니다.

또는 기초가 되는 공부입니다.

한자로 가면 이것을 흔히 음차로 해서 이렇게(大功)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자의 진짜 대공(大功)이라는 이런 뜻으로 쓰이는 것 이외에 고유명사로서 이렇게 대공이라고  쓴 것이 있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한자어가 아니쟎아요. 뭐 다듬는 아버지도 아니고 다듬는 남자도 아니고요. 쿵후라고 하는게, 꽁푸라고 하는게 이것이 원래 우리말의 음차어거든요. 이것은 우리말일뿐만 아니라 티벳, 그리고 몽고, 만주 심지어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까지 불리워졌던 이름입니다. 수행의 이름입니다.
  이 기초공부를 또다른 표현으로는 탁견, 택견이라고 표현해왔습니다. 택견이 무슨 태권도라고 알고 있으면 이것은 최형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이루어진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입니다. 택견은 따꿍이라는 우리말을 그 당시 고려식으로 표현한 음차어입니다. 택견, 따꿍, 따껑의 음차어입니다.
  이 따꿍의 공부는 인디언에서도 9개월이라고 하고 우리도 9개월이라 합니다. 대공공부를. 이 대공에 해당되는 공부를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왜, 이 공부는 왜 거쳐야 되는가? 몸이 다칠까봐, 이 공부를 시작하는 과정속에서 몸이 다칠까봐 몸을 안전하게 해놓고 가자는 배경입니다. 왜, 이것도 몸공부 안 하고 바로 가본 적이 있겠지요. 수많은 수행자들이 바로 갔다가 자기 몸 다친 그와 같은 희생을 치뤘을 겁니다. 그 희생의 결과 속에서 이정도는 하고 가야겠다 라는 경험론적인 그 방법이 열렸을 겁니다.
  반면 오늘날의 택견은 그 따꿍 가운데에서 이제 따꿍에 해당되는 공부를 마쳤으면은 그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몸푸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몸푸는 기초적인 것들을 다하고 이제 제가 따꿍은 이 정도 했는데요 하고 심사볼 때 하는 기본적인 동작들입니다. 그걸 갔다가 무예라고 그러고 싸움이라고 그러고 더 나아가서 이상한 '태'자에다가 이상한 '권'자 붙여가지고 국제적인 무술로 만든 것은, 남한에서도 행패를 저지르고 이북에 가서도 행패를 저지른 한 장성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한국이 먹고 사는데 도움이 많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만은, 그러나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한국이 인간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한 따꿍일 겁니다. 이 따꿍공부를 합니다만은, 따꿍공부는 사실은 그렇게 요란스럽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몸에 이상 없을 정도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단순하게 해놓고, 정리해 놓은 것도 따꿍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행공이고, 일반적인 행공이고, 가장 기초적인 호흡이고, 또한 가장 기초적인 생활습성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어떻게'라고 하는 금단자조낙수중을 했습니다만은 그 방법은 차츰 말씀드리구요, 이 금단자조낙수중에 해당되는 것은 아무래도 비상시적인, 늘 할 수 없는 공부가 될 것입니다. 늘 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상시에는 그럼, 늘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상시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몸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애초에 이와 같은 잡생각들이 나게 된 것은 내 몸 자체 속에 있는 질서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언젠가부터 잘못되어버린 질서, 이 질서라는 것은 밖에 있는 무언가를 섭취해서 그것을 가지고 먹고 살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해서 소화하고 그것을 내보내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도지로 말하자면은 땅젖인 지유을 먹지 아니하고, 밖으로부터 여러 음식을 섭취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 음식을 섭취함으로부터 어떻게, 우리는 이 속에 간이 있음을 알고 폐가 있음을 알고 신장이 있음을 알고 위가 있음을 알고 장이 있음을 알고 등등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어느 정도 모릅니다. 서로 도와주기도 하지만, 도와주는 것은 틀을 유지시켜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최소한의 상생입니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상극하고 있습니다. 상극을 유지하기 위한 범위내에서만 상생을 하는 것입니다. 오행이라는 요소도 인간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상극을 합니다. 서로 이 틀 자체를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극을 하려다 보니까 상생이 그 반대측면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옛 수행자들이 오행을 일러서 오적이라고 합니다. 다섯가지 도적놈이라고 합니다. 다섯가지 친구라 그러지 않고. 이것들은 밖으로부터 음식이, 아주 천박하게 비유를 하겠습니다. 밖으로부터 음식이 들어오면 줄을 섭니다. 서로 아가리를 벌리고, 서로 지가 가지려고. 음식으로부터 나오는 수많은 영양가들을 - 기라고 하지 않고 영양가라 하겠습니다. - 그것을 서로 섭취하려고 난리법석을 피웁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그러다 보면 대충 어느 약한 놈이 더 적게 가지게 되고, 강한 놈이 많이 가지게 되고, 많이 가진 놈 많이 가져서 탈나고 적게 가진 놈은 적게 가진 대로 탈나서 결국 이 몸 자체가 상해버리죠.
  그러한 원리에 기초한 것이 한의학입니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단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절차, 누구는 누구와 왜 싸우고, 왜 싸우고 싸우는 과정 속에서는 요것과 요것은 뭘 놓고 싸우고 요것과 요것은 뭘 놓고 싸우고 이야기하면은 조금 복잡해집니다. 그 정도 되면은 기초 정도의 한의학은 됩니다.
  아무튼 이 속에 있는 것들이 싸우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찰나 찰나마다 만들어내는 생각들, 이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속에서 일어나는 이 생산물들, 그 생산물들이 그 바로 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은 생겨난 이상 모든 것은 환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체입니다. 컴퓨터게임 속에서 나오는 어떤 재료와 뭐 먹는 약같은 것은 우리가 볼 때는 임의로 약속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 약속한 것도 분명 한 비트(bit), 두 비트의 프로그램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이 상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상으로서 존재하는 어떠한 단순한 생각, 마인드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쩌면 이 실상들이 요 싸우는 것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도 내가 일정상을 갖고 있다는 것, 하나의 바른 상을 갖고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이 얼마나 만나기 어려운 소중한 기회이겠습니까. 그걸 붙잡고 이와 같은 인연들을 우리는 찾아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조건걸지 않고 이 이와 같은 원리를 죽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부도지입니다. 부도지는 이렇게 해서 요것들은 싸우게 되고 싸우게 되고 등등 하게 됐다. 그리고 싸우는 속에서 나름대로 룰이 만들어지요. 몸 속에서 룰이 만들어지죠. 이 룰도 또한 상입니다.
  이것이 일정상(一定想)은 아닙니다. 일정상은 이 룰도 아니요, 이 싸우는 상도 아니요, 어딘가 모르게 담겨 있는 상입니다. 뒤집어 말하겠습니다. 그 상(一定想)은 오로지 이궁에만 담겨있습니다.
  이궁에 그 상을 실으라 하는 것은 사실상 방편이요, 인간 속에 있는 싸우는 가운데 헛상으로 만들어진 공존의 룰, 그것에 해당되는 상, 그런것들이 전부 몸에 담겨있고 그 나머지 정말로 이런것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고 있는 나의 바른 한 상은 오로지 이궁에만 담겨있기 때문에 이궁에 담으라는 것입니다. 이궁에 담으라해서 담는 것이 아니요, 원래 이궁에 있던 것을 일깨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이궁에 담는다 하는 이야기는 이궁의 육신의 감각을 그만큼 예민하게 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궁이 바로 잡히고 나서야 천하에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무슨 아픔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놓고 옛 선인들이 무슨 병도 없다 하니까 그걸 갖다 악용을 해 가지고 전부터 모든 병은 무슨 잘못된 생각에서 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상이 그렇습니다.

자, '누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에 대해서 금단자조낙수중과 그리고 이 원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이 속에 들어오는 외물을 밖으로부터 속으로 들어오는 외물을 최소화시키는 것, 이 외물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시키면 이들 사이의 싸움도 상대적으로 가라앉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을 지향하는 계(戒)의 원리입니다.
  왜 모든 계율은 자꾸 인욕하라 하는가, 자꾸 적게 가지라 하는가 그 까닭은 주관적인 성인들의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한편 수행학적인 면들의 파악으로, 적게 들어가면 그 속에 있는 상들이 적게 싸움질을 하니까 많이 들어가면 상들이 많이 싸움질을 하니까 - 돈없는 집구석에서 자식들이 싸움하는 경우 드물고 돈많은 집구석에서 자식들이 안 싸움하는 경우 드뭅니다. 꼭 그런건 결코 아닙니다. 일정상(一定想)을 가진 자식들이 다 있기 때문에 결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전반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습니다.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문중에서는 아비가 아들 죽이는 것도 우습게 여깁니다.
  하물며 내 몸 속이다 해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많이 들어가면 많이 싸우고 적게 들어가면 적게 싸우니 최소화시키고 나중에는 아예 끊어버리고 자급자족하겠다. 자급자족하는데 저거들끼리 싸울 일이 없죠. 그것을 일러서 과거 선인들이 벽곡( 穀)이라 했는데 벽곡한다고 과연 다 끊었느냐 천만에 만만에입니다. 물은 안먹을 것이며 숨은 안쉴 겁니까. 다만 적절한 정도로 평소보다는 내가 줄이자. 실제 욕심뿐만 아니라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급적 줄이자. 줄였을 때 병이 덜 난 것도 이 놈들의 싸움박질이 덜하기 때문에 병이 줄어든 것입니다. 많이 먹는 사람이 병 많이 나고 적게 먹는 사람이 병이 적게 납니다. 물론 가끔 다른 시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만 말할 수 없는 시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계율은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억지로 지켜 가는 모든 것들을 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계를 지키고 비상시에 이와 같은 방법을 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이런 기회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 계를 지키다 보면 운이 좋으면 어느 날엔가는 이 싸움이 고요해질 날이 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잘 질서가 잡혀서 안 싸우고 이 다섯 덩어리라 치면 다섯 덩어리가 한몸인 양 잘 살아가는 때가 옵니다. 그렇게 해서 흐름이 온 그 흐름을 일러서 율(律)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율입니다. 율이라는 것은 내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도지에 말하기를 自在律, 저절로 이미 안에 있는 율입니다.
  그 반대가 스스로가 목적의식적으로, 한자발음이 비슷한데요, 자제한 계, 계와 율을 같은 의미로 쓴다면, 그 어떤 문장에선 그러니까요, 스스로 자제한 계를 만들어야 됐고 자제한 율 대신에, 이때부터는 사실 인간의 몸이 타락한 것이지요. 부도지는 요 순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설명합니다.
  왜 자재율(自在律)이 자제계(自制戒)로 가야만 사람이 살 수 있는 시기가 돼 버렸고, 왜 그런 몸이 되었는가. 아무튼 이와 같은 계를 지키는 까닭은 스스로 자재율(自在律)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재율을 얻어야 비로소 참인간으로 서고, 자신을 밝히며, 나아가 참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 이전까지 그때까지 참수행에 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과정만 얻더라도, 나머지는 참수행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을 얻고 나면은, 참나를 얻고 나면은 세상에 선생에 어디 있고 세상에 높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세상에 낮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저 똑같습니다.
  상시수행에서는 늘 모든 것을 줄이는 것 조금 더 편하고 싶으면 조금 덜 편할 정도로 약간만. 한푼만 늘 한푼만 한시간을 자고 싶으면 50분만. 그러나 자꾸 줄여가져 가면은 죽습니다. 적당한 한도 내에서. 그 적당한 한도를 스스로 판단하고 "이 이상은 안돼, 더 이상 줄이면 안돼" 까지를 스스로 판단하는 몸이 되는 것까지 대공(大功)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실은 대공이 필요합니다. 대공 정도의 몸 단련을 해 놓아야 "어 더 이상 줄이면 안 되겠다, 안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몸들이 다 죽어버리겠다" 그런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몸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것도 또한 상시적으로 할 수 있어야만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금단자조낙수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만 앞서 얘기한 선치후로삼재일원상과 맞출 수 있을 것인가. 서두를 필요는 굳이 없겠지요. 다음 시간으로 미루어서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나리의 작은 소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여기가 지금 조계사 교육원입니다. 불교단체에 소속되어있는 건물입니다. 저는 불교를 이렇게 봅니다. 간단하게. 너무나도 잘난 스승에 너무나도 못난 제자 집단들. 저는 반대의 바나리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공부를 나누는데 있어서 너무나도 못난 시작자. 그러나 아름다운, 끝이 아름다운 바나리. 그게 제가 바라는 소망입니다. 못난 사람으로부터 비롯돼서 잘난 사람들이 수없이 나오는 것, 못난 사람에 대한 욕이 덕지덕지 붙을 수 있는 그 꿈. 그것이 바나리의 작은 꿈입니다. 그것이 어쩌면은 옛어른들께서 원하시던 꿈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히 그런 것이 인간들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얘기 짧게 마치고 다음 시간에 금단자조낙수중으로부터 비롯하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몸으로 짚어 가는 시간으로 가지겠습니다. 몸으로 집고 나서 그 원리를 조금 살펴보고 안반수의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오늘 공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2001.4.19 조계사교육원)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7) 

 

스핑크스 이야기 - 사람이 사람임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그렇지 못할 지 어제 밤까지는 상당히 궁금했었습니다. 방안에 있으면서 답답하고, 힘에 부치고, 밤새 내내 눈물만 흘리다가 그게 다 사람이 마음이 한결같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생각하고 오늘 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스핑크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스핑크스라는 지금은 돌로 되어서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는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런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 스핑크스는 늘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신화에 얘기하는, 질문을 합니다. 늘 똑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그리고 점심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맞나요? 대충 맞을 거에요. 그렇게 걷는 것이 무엇이냐. 또는 가는 것이 무엇이냐. 늘 똑같은 질문을 해서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한 사람들을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지나갔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사람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자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서 돌이 됐습니다. 스핑크스는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 아침에는 네 발로 가고 점심에는 두 발로 가고 저녁에는 세 발로 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그 수수께끼는 초등학생도 다 알 수 있는 쉬운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다 잡아먹힙니다.
  스핑크스가 요구했던 것은, 인간에게 요구했던 것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할 것에 대한 요구였습니다. 인간으로써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그 때 스핑크스는 동물의 대상을 한 그 스핑크스는 무너져버린 거죠.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했다는 그 것을 그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어쩌면 스핑크스 자신이 현실의 인간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는 사람의 기능으로, 다른 모든 것은 짐승의 형상으로. 사람이 스스로 사람임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그렇게 참 어려울까, 싶어서, 어제 내내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아무튼 수행이란 것도 가장 간단한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답을 할 수 있는 그 자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이로자나 - 대광명
  지난 번 시간에 구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구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은 그것이 어떻게 보다 구체적으로 운행되는가 그리고 그 간단한 수,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텐데요. 수 중에서 일곱을 말씀드렸던 것이 있습니다. 일곱의 수는 구체적인 형상으로서는 제일 아래 있는 내부가 없는 가운데인 중궁, 그리고 그 첫 번 째의 궤도가 하나 있고 이 궤도는 다섯 개의 궤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끝에 마침내, 그러므로 이 궤도의 사이사이를 다 말한다면 일곱이라고 그랬습니다. 일곱의 겹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이 일곱의 이야기를 말씀을 드렸는데, 일곱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먼저 이것을 하나 생각을 해두고, 이 사이사이를, 이 첫 번 째 일 궤도와 중궁의 사이를 불교에서는 바이로자나라고 합니다. 비로자나라고 합니다. 바이 또는 비로. 우리는 현재  쓸 때 한자로 이렇게 쓰다보니까 그냥 비라고 읽습니다만 이 엄밀한 발음은 뷔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이것을 달리 읽을 때는 바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바이로자나. 그리고 그 비로자나는 한자로 쓰지만 이 발음은 뷔, 바이에 가까워서 산스크리트어가 또한 그렇듯이 우리말과 관련지어도 큰 차이가 없는데 중심이 되는, 이끄는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 로를 쓰면은 이 로는 음가로는 로가 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연용사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자라고 쓰는, 이 자는 이렇게 쓰이는 소리, 싸 하고. 이것은 밝음이라는 뜻입니다. 나 라고 하는 것은 땅입니다. 곳, 우리말로 하면 곳. 가운데 있는 밝은 곳이고 번역하여서 다른 말로 하면 대광명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대광명이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대광명입니다.
  그 대광명이 이 음양도 없는 중궁으로부터 1궤도에 이르는 이 사이를 한없이 밝은 빛으로 더 없는 빛으로 채우고 있는 그 어떤 궤도. 이 중간을 바이로자나. 대광명이라고 하고 이 대광명의 폭발이 배에서 부터 일어나서 가슴을 통해서 머리로 갔을 적에 일어나는 것이 음양입니다. 지금 우리가 선치삼재후로일원상법을 공부해 왔을 때 그 원상은, 이 원상은 결국은 모두 이 대광명이 음양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사람이 일곱 궤도가 있고 그 한가운데 대광명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대 광명은 또 하나의 나루터이기도 합니다. 어떤 나루인가 하면은 불교로 견주어서 이야기하면 우리의 속에는 참으로 착한 상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아니라 보살상의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중궁에 또는 중궁에 가까운 바이로자나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선재동자(이궁)가 강을 건넌다! 
  그러나 모든 보살이 전부 이 강을 건너가는 주체는 아니어서 그 가운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궁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짜 주인, 임시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여기에 머물고 있는 밝은 생각. 상없는 생각은 이 두 군데 머물고 있는데 이 두 군데 머물고 있는 중에 이궁에 있는 것이 불교로 비유하면 바로 선재동자가 됩니다.
  이 선재동자가 비로소 광명을 향해서 건너가는 이 모습이야말로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것으로써 비유를 하면 적당치 않고 강을 건너는 것으로써 비유를 해야 가장 적당한, 실제로 사람이, 이궁이 중심이 되어서 그 광명으로 길을 건너가다 보면은 강을 건너는 상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강을 건넌다 하는 것은 진실이려니와 이것을 놓고 산을 넘는다 하면 이미 깨치지 아니하고 보지 아니한 사람의 선문답입니다. 자고로 그런 선문답이 우리 현대의 선문화를 잘못 유도해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하나의 나루가 될 것입니다. 선재동자가 머물고 있는 나루, 출발의 나루가 된다면 마침내 이 여래궁에, 불교식으로 한다면 이 중궁은 여래궁이 될 것입니다. 이 여래궁에 도달하기 위한 나루가 바로 대광명, 이른바 불교식으로 이것을 끄집어내서 신앙화시키면 비로자나불이 되지요. 이것을 여래라 하고. 그래서 이렇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 생각을 해 두고.

내외일치의 기준 - 빛
  그 다음에 여기서 배, 가슴, 그리고 머리 이 세 군데를 놓고 가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병이 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아니다. 크게 보면은 간단하다. 이 아래와 위가 서로 잘 안 맞을 때 아래와 위가 잘 통하지 않을 때, 상과 하가 잘 오가지 않을 때 탈이 난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상이 너무 성해서 밑에 있는 배가 감당을 못할 때, 즉 상이 성하고 하가 허할 때 병이 난다 했습니다. 현대인들의 병의 특징은 이 두 가지가 참 많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무 위에서 이 인간의 머리를 갖춘 이 작용은 너무 많은 데, 집행과 연산은 너무 많은데 그것을 감당해 주는 이 아래의 원천은 허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다 보니 또한 생기는 유전적인 형상까지 포함했을 때 중요한 현상이 아래가 위가 서로 잘 교통하지 않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병의 두 번째의, 두 가지의 중요한 현상인데 잘 자세히 말씀 안 드린 것 중에 이것이 안이라고 한다면 바깥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안과 밖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 이것도 병이라 했는데 이 일치가 뭘까. 이것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이것이 바로잡아지기 위해서 상하불교를 고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생활을 거기에 맞춰서 해야 되지만 이것의 기준이 뭘까. 밥을 이렇게 먹어서 내외를 일치시켜라 할 때, 왜 그렇게 먹어야만 되는가. 어떤 상태가 내외의 일치인가. 내외불일치라 했을 때는 일치라는 기준이 있을 테니까요. 
  그 일치의 기준에도 또한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을 이해하면 빛의 정체를, 제가 모든 사물은 빛과 닷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때의 빛의 정체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감을 잡으실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빛에 의해서 내외일치의 기준을 삼습니다.

1초 - 사람이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도는 것
  사람이 마음에서부터 어떤 생각을 하든 육체가 어떤 생각을 하든, 사람은 늘 자신의  빛을 토해냅니다. 물론 이 빛은 자신만의 빛이 아니라 다른 우주와 다른 사물로부터 받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자기 속에 머물고 있는 빛을 늘 토하고 받아들입니다. 우주로부터 빛을 받아들이고 늘 토합니다. 토하는 현상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빛을 토하되, 얼마만큼 빨리 이 빛이, 빛이란 형상이 없는 빛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것을 파동이라 해도 할 말은 없겠습니다.
  파동이나 어떤 흐름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겠는데, 이 파동, 흐름으로 감을 잡을 수 있는 이 빛이 사람의 어떠한 생각, 몸 동작 등으로부터 나와서 전체 지구를 한바퀴 휘감는데, 불과 1/7초가 걸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곱 바퀴를 도는 것을 일러서 1초라고 합니다. 이것에 기준을 두고 역법은 만들어집니다.
  더 큰 것에서부터 태양력으로 만들어 올 수도 있겠습니다만, 수행학에서의 역법은 바로 사람이 토해내는 그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회전하는 것. 그것을 일러서 1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가 지구를 휘감을 만큼은 되야 최소한 인간이고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만큼 자기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학에서는 과거에 기본 상식이었지만, 이것이 현대 과학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이 되고 현대 과학자들이 1/7초라고 말하는 것은 불과 10 여 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뿜어내는 파장이 지구를 한번 휘감는 데는 1/7초, 그리고 일곱 바퀴를 도는 것이 1회라고 수행학은 생각해왔습니다. 끊임없이 지구를 휘감되, 계속 같은 방향으로 휘감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전체로 다 휘감게 되겠죠.
  사람마다 폭이 다르고 높이가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지구를  미처 한 바퀴 다 돌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를 다 돌게 됐을 때 인간과 인간 아닌 몸의 차이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만 누구든지 대개는 다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1초라면은, 마찬가지로 자기 몸 속에 있는 이 일곱 가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 궤도까지도 다 한번에 도는 것이 또한 1초에 이루어집니다. 한 바퀴 돌고 다 돌고 크게 까지 돌아서 얼핏보면 이렇게 도는 것처럼 다 돌아서 일곱 바퀴를 도는 것이 1초입니다. 이 길이와 이 길이는 길이가 다르죠.
  따라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의 인식으로서는 이 지구를 도는 1/ 7초마다 도는 이 감각을 감지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처음에는 더욱 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조금 더 쉬운 것은 이 내부의 일곱 바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여하에 따라서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몸으로서 수행을 하지, 몸밖으로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그 존재다워지는 것
  즉 스핑크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은 내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있는 것이다 라는 이야깁니다. 그러니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사실입니다만, 현대과학자도 사실이라 하니까 더욱 더 사실이겠지요. 사실이라면,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 때로는 그 파장이 자미원에까지 미칠 수도 있고, 자미원의 파장이 나에게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어찌 자미원에 혜성이 지나가는 것이 아무런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어찌 하늘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지성은 감천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내게 결정시키는 것이 있는가 하면 내가 역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인사 대천명을 아무리 해도 지성을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지성이면 무엇하겠습니까. 자신이 지성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지 않으면 지성이 아닙니다. 그 지성을 베풀 수 있는 자신, 주체가 돼 있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런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는 운동합니다. 모든 것은, 있는 것은 다 움직입니다. 이 움직임을 자꾸 해 가지고 나를 이루려고 하면 다 허상입니다. 세상을 바로잡아야지, 뭘 해야지, 뭘 해야지, 다 허상입니다.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온 과정이고, 우리 인간은 역사 속에서 사실 그것을 배우게 됩니다. 자신 자신을 스스로 그 존재답게 만들면 됩니다. 모든 존재는 움직이는 것, 제 속에 독이 가득 찬 존재는 움직일 때마다 독을 뿜을 것이요,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는 움직일 때마다 사랑을 뿜을 것이니, 그 존재는 존재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 밖에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둡니다. 빨리 환경운동을 해야지, 뭘 해야지, 뭘 해야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 가는 만큼 이루어집니다. 내가 어떠한 만큼 존재가 되어 가는 정도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해원(解寃) - 삼세참회(相을 없애는 것)
  물론, 수행 방법으로서 역으로 규정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것을 함으로써 나를 그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그런 것을 하기도 하지만 주, 부를 명백히 해야 합니다.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 내 존재 자체를 발전시키는 데 있는가, 아니면 그 행동을 토하는 데 있는가. 주부는 분명히 해야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 존재 자체가 그와 같은 주체로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상인데 이 존재의 궁극이 해원(解寃)입니다. 원을 푸는 것입니다. 원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원이 있고 나서는 어떤 것도 지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원을 푼다 하는 것은, 원을 풀어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원을 어떤 사람이 갖고 있어서, 전생의 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원을 풀려고 그 사람에게 나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기꺼이 내어줬습니다. 그럼 원을 풀었을까요. 그 원을 풀었더니, 느닷없이 부모가 이 놈의 자슥이 빨리 죽어버렸더라고 원을 갖게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서 그 부모였던 사람에게 다시 자식으로 태어나서 평생을 잘 모셨더니 다른 원이 또 생깁니다. 원은 결코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예수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똑같은 중의가 숨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순 없습니다. 원수를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맺지 말라, 결국은 해원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비슷한 표현인데요. 해원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너 하고 나라는 구별성이 있고 나서는 절대 원이 풀릴 수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이 어떠한 상이,  분별의 상이 있어서는 절대 원을 풀 수 없습니다. 결국 원을 푸는 문제도 자기 존재 자체에 있습니다. 이 원, 이 경계를 없애지 않는 이상에는 풀면 생기고 생기면 풀리는 게 원입니다. 어찌 원이 안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해원하려는 어떠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석존에게 어떤 수행자가 묻습니다. 그러자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三世를 참회하라.' 삼세참회란, 전생, 현생, 내생을 모두 참회하라. 그러니까 알았습니다 하고 가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에 와서 삼세참회 하라 하면 빙긋이 웃고 알았습니다 하고 가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어떻게 삼세를 참회한다는 얘깁니까. 삼세 참회의 유일한 방법은 상을 없애는 겁니다. 왜. 이번 생 참회해 봤자 다음 생에 생길 거고 다음 생 참회해 봤자 또 생길 거고, 처음 원래 여기서 한번 지어진 원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테니까요. 아무튼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자기 자신답게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제일 서두에 말씀드렸던 스핑크스의 물음에 대답하는 방법입니다.

선재동자 제5상-보살상의 도움을 받아서 강을 건넌다!
  사람은 그런데, 쉽게 그것을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설화에는 스핑크스가 그 대답을 듣자 바로 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바로 돌이 되지를 않습니다. 바로라는 것을 바로로 알면 안 됩니다. 식사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습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습이라는 것은 낡은 것이 있고, 뭔가 새로 생겨난 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인문학적인 개념으로는 어려운, 새로운 무언가의 습이 생긴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우리 밥 먹는 것을 한번 볼까요. 어떤 사람은 여러 명이 모여서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혼자서 라는 것의 범위를 한 두 명 정도로 잡으면은 얘기가 좀 구분이 잘 될 겁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두 명이 앉아서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명이 둘러앉아서 왁자지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여러 명이 왁자지껄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 그 속에서 식탐을 내는 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또는 둘이서 천천히 먹는 것을 즐기는데 전혀 식탐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습은 무엇일까요. 혼자서 식탐을 내는 것이 금수의 습입니다. 짐승의 습입니다.
  우리 인간이 바로 스핑크스의 몸을 하고 있는데, 머리를 구성하는 이 새로운 것과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것과 짐승의 몸은 낡은 것. 이 두 가지가 똑같이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짐승의 습 가운데서 혼자서 먹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서 남아 있으면서, 대신 짐승이 아닌 사람의 습이라 할 수 있는 식탐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습이라 할 수 있는 여럿이 먹는 것을, 너나없이 같이 어울려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 그 속에서 식탐을 냅니다. 거기에는 이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즉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스핑크스의 모습은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의 스핑크스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너 다르고 나 다른 이 스핑크스를 어찌하여서 나는 인간이다라는 답을 하고서 죽일 수 있는가, 돌처럼 굳혀버릴 수가 있는가. 이 스핑크스를 탈출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이처럼 인간적인 것과 짐승적인 것이 섞여 있는 나의 스핑크스를 돌로 만들고 그 돌을 깨고 나 자신이 '나는 사람이다'를 외치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치면서 나올 수 있는 자각을 말합니다.
  그 자각을 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앉을 때 누울 때 설 때 사람의 습과 짐승의 습이 다르게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르게 있습니다. 사물을 볼 때가 다르고 무엇 할 때가 다르고 다 다릅니다. 그 모든 습 중에서 새로운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낡은 것을 깨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새로운 것의 근거가 무엇이며 낡은 것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 스핑크스의 모습이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일단 사람이라는 종자로 껍질을 입고 태어났으면 이 낡은 것의 모습가운데 사람으로서는 보편적인, 일반적인 것이 있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몸뚱이입니다. 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무엇이냐. 스핑크스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새로운 것. 즉 기준을 삼아서 낡은 것을 깨버릴 이 선재동자는 무엇이냐. 이것이야말로 이 새로운 것이야말로 스스로가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으로 설 수 있는 나의 선재동자인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여섯 물결을 넘어서 여섯 파도를 넘어서 마침내 대광명 바이로자나에 이르는 것입니다. 무엇의 도움을 받아서. 각각의 창고마다 각각의 세상마다 있는 수많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너머의 제 5상, 보살상의 도움을 받아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보살은 주체가 아니라, 선재동자가 주체인 것입니다.
  수행은 한 마디로 간단합니다. 선재동자를 내 배 속에서 탄생시킬 것이요, 그의 잠을 깨워서 그로 하여금 고고성을 내게 할 것이요, 그가 무럭무럭 자라서 기게 할 것이요, 걷게 할 것이며 서게 해서 마침내 스스로 배를 저어서 저 파도를 건너서 대광명에 이르도록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만들어 놓은 것이 法입니다. 그러므로 법이란, 공자가 말하는 법이란, 석존께서, 예수님께서 말하는 법이란, 내 밖에 있는 법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법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은 원래 안에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냈으니 그 법은 법이 아니다. 이 법은, 밖으로 끄집어낸 법은 아무래도 이 흔적을 이 습을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습을 통제하고자 하나, 이 습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 법이겠지만 일단 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 안의 새로운 모습이 감소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밖으로 끄집어 낸 모든 법은 스핑크스의 모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법, 그 법에 의존해서, 오로지 법에 의존해서만 닦아 나갈 것이다. 그것이 내일 모레면은 석탄일에 오는, 그 석탄일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이야기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그 법을 중시하지 마라. 법은 법이니 이것은 뗏목이다. 내 법을 비유컨대 뗏목이니, 이 뗏목을 지고 가지 마라. 오로지 중요한 것은 뗏목을 지고 가지 말라 하니까 마음이 자유로우면 된다. 뗏목을 지고 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또한 뒤집어야 하는 뜻이 있는 겁니다. 법을 중시하지 마라, 이는 뗏목일지니. 이 이야기는 선재동자가 주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선재동자가 저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 법이 있는 것이니  법은 이 선재동자의 생명줄이거니와 동시에 생명줄은 강 건널 때까지. 왜. 주체를 잘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주체를 달리 표현한다면, 어느 불교 어느 신화를 보더라도 이것은 마찬가지로 이궁에만 있습니다. 이궁에 있는 선한 한 생각이 선하다 악하다를 떠나서 한 생각이 선재동자입니다. 이 선재동자를 불러 일으켰을 때 이 스핑크스는 죽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 선재동자가 뿜어내는 빛이 선재동자를 통해서 왜 선재동자가 9번인가, 이 바이로자나는, 나의 대광명은 오로지 선재동자를 통해서만 상단부에 이르고 중단을 거치고 상단부에 이르러서 음양으로 갈라지고 음양으로 갈라져서 연산을 하며 그리고 또한 오로지 이궁을 통해서만 이 대광명의 빛이, 나의 빛이 지구를 1/7초만에 한 바퀴 휘감는 것입니다. 안으로 일곱 바퀴 휘감는 동안 밖으로 일곱 바퀴 휘감는 것. 이것이 내외일치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잘못 놓고, 어떤 수행문헌에서는 사람의 빛이 이 대지를 일곱 번 도는 것은 북두칠성과 상응하는 것이다 하는 데 그것은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복잡하고 돌아가는 이야기는 옳을지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외는 일치합니다. 이렇게 한 바퀴 도는 것이 이 속도가 모두 균등합니다.
  그러므로 대광명은 매우 천천히 도는 셈입니다. 이 대광명은 매우 천천히 돌기 때문에 대광명에 이르면, 중궁에 이르면 움직임이 없습니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공자가 말하는 耳順에 이르게 됩니다. 그냥 들려오는. 아무 것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로 중궁입니다. 모든 것의 나의 여래이면서 나의 주인이면서도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여래가 없으면 모든 나의 일곱이니 여섯이니 하는 모든 것과 나의 스핑크스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0+1이 1인 것처럼, 0-1이 역시 그냥 -1인 것처럼. 여래는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 붙일길 없어라 모양붙일 길 없어라 하고 제불조사들이 노래를 한 것입니다.

선재동자가 강을 건너는 방법 - 원상법
  이제 그러면 어찌하면 이 선재동자는 이궁이라는 나루터를 떠날 수 있는가? 그리고 어찌하면 이 하나 하나의 물결을 넘어서 대광명에 이를 것인가. 각각은 하나의 파도를 이를 때마다 각각의 파도는 전부 연결이 되어 있죠. 이렇게 다 연결이 돼 있습니다. 연결이 되어 있는데 이 연결이 되어 있는 곳마다 모두 가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멸합니다. 없앱니다. 멸하고 멸하는 과정 속에는 이 속에 있던 보살의 도움을 받습니다. 각 집마다 각 우주마다 각 세계마다 있는 거기에서 내가 선행으로 말미암아 쌓았던 나의 과거의 선한 업. 선한 생각 선한 상. 상은 생각이 아니라 실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상의 도움을 받아서 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아, 인, 중생, 수자의 여러 모습들을 멸할지니 실제 멸한다 할지라도 멸하는 중생은 없다. 멸하고자 하는 중생이 내 밖에 있는 중생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중생이며 내 안에 있는 중생 또한 멸하는 것이 아니라 상을 버리고 모두 밝은 빛의 영향권, 바이로자나의 영향권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자들의 불교수행자들의 물음이었습니다.
  어찌하면 나의 상을 항복 받을 것이며 그 상을 항복 받자면 나는 어디에 주해야 하겠습니까. 어디에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나는 있어야 하겠습니다. 應云何住云何降伏其心? 이는 모든 근본적인 것을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보살상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 모든 상들을 멸한다 했는데 문제는 그것은 요지이고 방법은 없잖아요. 방법은 별도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별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부분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안반수의경입니다.
  안반수의의 수식이라는 것은 이 모든 세계를 내가 어떠 어떠한 각각의 스핑크스가 되어 오는 모든 세월의 그것들을 전부 다 담고 있는 그 세계가 수의입니다. 그 세계를 모두 쉬게 하라. 모두 쉬게 하라. 이것을 놓고 또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방법으로써의 반본(反本). 원래 이것을 전부 천역의 괘로 나타냈습니다. 일은 乾이요, 이는 兌요, 삼은  요, 사는 震이요, 오는 巽이요, 육은 坎이요, 칠은 艮이요, 8은 坤이 됩니다. 이것들은 이렇게 움직입니다. 이것이 이 흐름을 잡아서 이어지지 않는 것을 이어주는 것. 끊임없이 한번 내 대광명이 나와서 나의 바이로자나가 나와서 마침내 해체되어서 지구를 향해서 우주를 향해서 떠나보내는 이 여행길을 순환의 흐름으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수행방법으로 채택되었을 때 원상이었습니다.
  음과 양이 서로 힘으로써 나오게 하고 또한 들어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모만 하는 나의 삶을 멈추어서 이것을 끊임없이 돌려주는 것이 그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람의 몸을 갖춘 나의 스핑크스 상태에서는 건과 곤이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건은 완전한 빛에 가까운 대 광명이요. 대 광명이 완전한 빛은 아니지만은 거의 완전한 빛에 가까운 거죠. 완전한 빛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가 아니요. 이것은 스핑크스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이 곤은 완전히 분해된 것과 완전히 분해된 닷과 비슷해서 이 완전한 어둠은 대 암흑은 그래서 사람의 몸은 나의 스핑크스를 설명하는 데에는 적당한 일차적으로 이것이 주인이라면, 빛이라면 이 빛이 2차 적용된 상황. 그리고 아직까지 완전한 대암흑으로 들기 전에의 상황. 이것의 결합으로써 이 중간단계의 결합으로써 존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라는 스핑크스입니다.

건곤은 천지만물의 문호요 감리는 이용
  그래서 말하기를 乾坤은 천지만물의 門戶요, 坎 는, 이감이라 해야겠지만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감건곤이니까 이감해야 맞지만 우리는 습성처럼 부르는 어떤 것들이 있죠. 그래서 그런 것인데, 감리라고 많이 부릅니다. 감리는, 뭐라고 표현하느냐, 문호가 아니라 二用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주역 참동계에 나오는 1장과 2장입니다.
  건곤이 문호다 하는 것은 건은 대 광명으로써 완전 빛에 가까운 것이니 아직 물질과 결합될 준비를 못 갖춘 것이어서 설명은 어렵고 원초적이고, 이 곤은 완전 분해된 닷이라 또한 설명이 어려워서 사람은 이것으로써 주인을 삼아 나의 몸, 나의 스핑크스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스핑크스는 리와 감으로써 빛과 닷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그러므로 이것은 주역참동계 일반적인 해석에 뭐라 되어 있느냐 두가지 쓰임새가 아니라, 두 번째의 쓰임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전부 두가지의 쓰임이라고 해놓고 있는 번역본을 열심히 보시는 수행하고 싶은 분들이 얼마나 혼동이 오겠습니까.
  주역참동계는 시중에 있는 것이 있어서 제가 번역을 죽 봤더니, 80% 최소한 이상이 오역입니다. 그러니 남은 20%에 의거해서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이며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20%가 이 80%안에 안 들어간다고 뭔 보장을 하겠습니까. 이 80%를 가지고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가다가 어떤 구렁텅이에 빠지겠습니까.

천역괘, 지역괘, 인역괘(수행의 괘)
  그런데 아무튼 사람은 감과 리는 두 번째 쓰임새로서 자신의 스핑크스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인간에 적용시켜서 그려놓은 것. 이와 같은 원래의 모습, 원래의 모습을 天易이라고 부릅니다. 천역이라고 부르고 천역을 괘로 나타냈을 때에는 이것이 위이고 이것이 아래입니다. 이렇게도 표현하죠. 이것은 어쨌든 그려놓고 나서는 무슨 팔괘니 이렇게 표현하는데 이것은 천역괘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건곤이 문호라는 것을 나타내는 괘입니다.
  그러면 감리이용을 나타내는 괘가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이른바 구궁입니다. 이와 감을 중심으로 해서 이렇게 구성되는 것, 이 흐름이 이제 地易卦가 됩니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서 사람은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서는 건이 빛이 아니요 곤이 닷이 아닙니다. 이것을 다시 이 모양으로 돌리는 것, 이것이 返本입니다. 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따라서 주역 참동계 얘기를 잠시만 한 구절만 더 할게요. 거기에 뭐라고 했냐면은 차츰차츰해서 이렇게 미루어서 뭘 어떻게 하느냐 점점 이렇게 미루어서 推消息하면은 坎 는 모두 없어진다(忘). 감리는 다시 그 기능을 잃고 즉 감리로 구성됐던 나의 스핑크스는 죽으리라. 나의 스핑크스는 돌로 굳으며 나는 다시 천역으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돌아가는 방편을 그려놓은 것을 일러 인역이라 합니다. 인역이 수행의 괘입니다. 어쨌든 인역이 수행의 괘로써 좀 복잡하지만, 공부를 안 할 수는 없고, 사실 어렵다 어렵다하지만 사람되는 공부치고 이만큼 쉬운 것도 없습니다.
  글쎄,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제가 그런 비유를 들었지 않습니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고. 천 일만, 천 년인가, 천 년 기다려 가지고 살생 안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은 인간이 되잖아요. 가장 비약적 발전을 이룬 존재가 어쩌면 전설의 고향에 나온 구미호일지도 모르는데, 요즘은 그 생각도 별로 안 들어요. 구미호보다 사람이 별로 나은 것 같지가 않아요. 구미호가 퇴보한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스핑크스가 구미호보다 나은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러나 구미호는 여전히 행복한 겁니다. 왜. 구미호의 몸으로써는 감리이용을 갖추지 못한 구미호로써는 반본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터닝포인트 인간
  인간은 반본을 하기 위한 터닝 포인트의 존재입니다. 순환점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터미널적 존재가 인간입니다. 스핑크스는 그래서 스핑크스입니다. 과거대로 가면은 saipinkusai, 여전히 선비들 나라를 지키는 선비입니다. 반본의 나라, 밝은 나라를 지키는 수문장이기도 합니다. 그 스핑크스라는 말 자체가 원래는 그렇습니다. 스핑크스, 이집트 말하니까 뭐 특이한 것 같지만 인간의 말, 따지고 들어가면 다 같습니다. 인간은 똑같은 스핑크스이기 때문에 태초의 말이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스핑크스는 아 해 가지고 도둑놈이라고 그러고 어느 스핑크슨 아 해 가지고 손님이라고 했을 수가 없는 것이 스핑크스라는 우리 인간의 공통성입니다. 그래서 좇아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것(ku)은 우리말로 하면 나라쯤 되겠죠, 이것(saipin)은 명사형인데요, 그냥 우리말 선비에다가 빈 명사형 붙었다고 생각하면 되요. 선비라는 말이 우리가 갖고 있는 선비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데, 밝은 하늘 사람 나라를 지키는 사람(sai)이에요. 그게 스핑크스입니다. 스핑크스는 스핑크스일 수 밖에 없는 전환점에 있습니다.
  인간은 수많은 터닝 중에서 하나의 포인트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 우주적 도에 서부터 되돌아가는 여기에 있다고 그러지는 마십시오. 각각의 지점마다 모두 터닝포인트가 있습니다. 터닝포인트는 이처럼 있습니다. 즉 쉽게 말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 가운데 인간은 첫 번 째 터닝 포인트가 아니라 마지막 터닝 포인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터닝하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앞에서 말하는 사람의 부질없는 협박이 아닙니다. 죽어보지 않으면 저승 맛 모른다는 것이 정말 참혹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협박이요 인간적인 정리를 떠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으로써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눈물겨운 진정한 마지막 호소입니다.
  몇 번의 터닝 포인트를 계속 어쨌든 보내고 천역으로부터 지역으로 감리이용의 단계로 와 있습니다. 이제 감리를 중심으로 합니다.

선재동자(離)가 감(坎)을 재료로 삼아 바이로자나에 이른다!
  감을 나의 재료로 삼고, 선재동자의 밥으로 삼고 리가 선재 동자가 되어서 선재동자는 끊임없이 감으로부터 자신의 영향력, 힘과 밥을 충당하면서 끊임없이 노를 젓고 배를 짓고 삿대를 걸고 돛을 달아서 험한 파도를 여섯 겹이나 넘어가서 마침내 대광명에 이릅니다. 바이로자나에 이르게 됩니다. 바이로자나라는 빛 속에 들자 바로 여래궁입니다. 어떻게 노를 저을 까 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물어보자 대답하신 것이 안반수의경입니다. 안반수의는 간단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호기심으로, 요즘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서 사실 눈물이 흐릅니다.
  호기심으로 묻는 질문에 대답하신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목숨 걸고 가다가 마지막 어쩌다가 부딪쳐 가지고 미리 가봤던 석가모니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어찌하면 건너갈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막혔습니다. 하니까 방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방법이 아니면 그는 필요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방법을 말하지 않는 석가모니, 어떤 스님, 운문선사의 말대로 그냥 때려 두드려 잡아다가 돼지 그릇에 던져줘도, 돼지 줘도 부족한 겁니다. 방법이 문제입니다. 그 방법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의입니다.
  경전은 오로지 그와 같은 방법, 법으로써 존재할 뿐입니다. 법을 떠나서 거기에 어떤 권위도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자. 도적입니다. 가사를 입고 도적질을 하는 겁니다.
  오늘 조계사 안에 들어가 보니까 차량을 없앤다 해서 참 좋은 엄숙 도량을 만드는 구나 해 가지고 어떻게 엄숙하게 해놨나, 들어가 봤더니 사하촌에 있어야 될 음식점들을 다 끌어다 놨습니다. 그런 개망나니들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이 영원히 스핑크스로 살며 영원히 터닝하지 않고 여기서 꼬물락 꼬물락 거리면서 다람쥐 쳇바퀴를 돌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렇게 살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사이비고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이비는 나아가는 것이요, 진실은 여기에서 머무는 것. 그렇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이야말로 이 터닝 포인트에서 반본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사이비야말로 여기에서 영화와 유혹과 모든 것으로써, 호기심과 지적 유희와 그 모든 것으로써 사람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 그와 같은 일이 어제 직접 좀 있어서 뭐 원래 저는 마음이 제대로 닦인 사람도 아니고 해서 밤새도록 눈물이 흘렀습니다.
  가끔씩, 가끔씩 준비되지 않은 그러한 호기심으로 말미암아서 다가오는 것들. 우리는 거기에서 공허한 이야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공허한 이야기로부터 우리에게는 생명줄이 되는 이야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방법을 떠나서 무엇이 존재하겠습니까. 무슨 법이 존재하겠습니까.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 자리에서 대장경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제가 말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방법 - 坎路(通一路)
  그러한 생각으로써 방법을 조금 뜸을 들여서 말씀드립니다만 다시 한번 돌아가겠습니다. 선재동자는 나의 이궁이다. 나의 이궁에서 나의 감궁과 연결을 시킨다. 감궁을 연결을 시키되 연결시키는 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일러  坎路라고 합니다.
  또는 인간에게만 주어져 있는, 유가선현들은 표현합니다.  인간은, 하늘과 천상과 혹 한길로 통해있다. 그러나 금수는 전색불통(全塞不通), 전부 막히어서 통하지 아니한다. 금수는 전부 막히어서 불통한다. 인간감리이용으로써 스핑크스를 삼고 있는 인간은 축복스럽게도 혹 통하는 한 길이 있다. 惑通一路가 있다. 혹 한길로 통한다. 바로 이 일로입니다.
  그리고 서양 철학자들이 말했던 수행의 경험이 살아있었던 시절에 말했던 송과선입니다. 이것이 어떤 신경선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신경선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이 이감로를 말합니다. 이감로는 있기에, 이와 감은 통하리라는 것입니다. 길이 없는 것을 뚫어 가는 것이 법이 아닙니다. 있는 길을 거쳐가는 것이 법입니다. 이감로를 좇아가는데 이감로를 어찌 눈으로 볼 것이며 어찌 말로 표현하기가 쉽겠습니까. 이감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들어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말 너머의 또 다른 방법을 채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옛 분들이 모두 그러하셨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감로는, 이감로 자신으로써 이름하여 이감로인것이지 이것이 무슨 이름이여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내가 이와 감이 서로 통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면 바른 증상이 있다면 나는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요, 그 증상이 아니라면 아니 걷고 있는 것이니 증상으로써 이야기합니다. 그 증상, 증상을 증상으로써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의 주문으로써, 명령문으로써 던집니다. 이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게 하는, 또는 이와 같은 증상을 하나의 명령으로, 수행의 주문으로 던집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金丹紫調落水中입니다.

선재동자가 크는 증상 - 金丹紫調落水中
  그것이 자빛을 띈 금단이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여래궁을 향해서 낙수물이 들 듯, 이것이 이감로가 열리기 시작했음을 말하는 初潮가 됩니다. 첫 경험이 됩니다. 첫 징조가 됩니다. 초조라고 하는 것은 뭐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만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으로 쓸 때는 이렇고, 다른 편으로 징조라고 쓸 때는 이렇습니다만 그것이 첫 징조 첫 물결입니다.
  금단자조 낙수중은 이 낙수중이 되어서 선재동자는 크게 됩니다.  선재동자는 마침내 생명선을 갖고 주체로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 움직이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 黑池於沿에서 生蓮花라 합니다.
  바로 연화가 피듯, 제껴 버리고 이 것이 철학적, 인문학적 얘기로서 더러운 연못에서 연화가 피듯이 아니고, 실상이 선재동자가 처음 금단자조 낙수가 이루어져서 낙수중이 이루어져서 선재동자가 기지개를 펼 때의 모양이 실상 자신 속에서 앞으로 하는 호흡과 관련지어서 그 호흡 속에서 그 관법으로 보면은 실제 다른 모양으로 형상화하면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스핑크스에 있어서. 실제 연화라고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보상연화상이 아니면 표현이 안되는 그런 꽃이 피어오릅니다. 그냥 나아가기 좋아서 비유로서 연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눈에 보이는, 눈 아닌 눈에 보이는 것이 인간이면 누구나 다 연화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이른바 도르제요 보상입니다. 선재동자가 크는 증상입니다. 그리고 선재동자를 키우기 위한 이감로를 여는 길은 금단자조 낙수중. 어찌해봐야 될까요.
  다음 시간은 아예 책상 제쳐버리고 같이 조금이라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요. 괜찮으시다면, 동의하시면은, 요즘 들어 하는 말로 안 하시는 분만 두 손 들어보십시오. 그럼 다음 시간은 의자를 피지 않고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 봐서 처음부터 이 초조가 민물처럼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스핑크스로 살면서 스핑크스의 비늘이 굳을 대로 굳고, 그 스핑크스의 습에 젖을대로 젖어 있는 그 몸에서 한점 다른 간구한 느낌을 얻는 다면, 그것을 시작의, 나의 초조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그 방법을 금단자조낙수중이라는 전래 선가의 방법을 가지고 공부한다는 정도의 실험으로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래서는 그 실험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실험에서는 반드시 그것이 내 속에 있는 여래를 만나는 길이요 여래를 만나는 방법이다 생각하시고 다음 시간 같이 보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소에 한복을 입고 오니까 조계사에 오면은 스님네들이 가끔 합장을 하시더니 오늘은 이러고 오니까 타종교에서 왔는 줄 알았는지 아무도 인사를 안 하시네요.
  오늘은 이렇게 하고 여러분에게 스핑크스라는 이야기를 하나의 잔상처럼 남기고 오늘 이야기는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이렇게들 마음 내서 달려오신 분들 언젠가는 길고 짧음을 떠나서 대광명에 이르시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오늘 이야기 줄이겠습니다. (2001.4.26.목.조계사)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8)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대로 오늘은 몸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서 짧게, 몇가지 짧은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거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올렸으면 합니다. 우리말의 말이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말이라는 것도 아무튼 도구입니다. 그 도구가 말이라는게 뜻이 있으면 됐지 뭘 중요하겠느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농사짓는 사람이, 예를들어서, 농사짓는게 중요하지 농사짓는 그 도구가 중요한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도구가 없으면, 또 그 도구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일텐데 말이라는 것은, 아마 모울도뷔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울도뷔를 잘못생각하면, 화백을 잘못 생각하면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다 모여가지고 자기 소신을 이야기하는 것. 그게 화백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화백이라는 것은 그만큼 상호간의 믿음과 사랑이 깔려있을 때 그 믿음과 사랑을 전제로 해서 어떠한 이야기 정도에서는 그 사람이 다치지 않을 때, 그것이 모울도뷔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모든 말로서 비판도 하고 서로 의견제시도 하는 것이 모울도뷔가 아니고, 진짜 모울도뷔라는 것은 서로가 다치지 않을 만큼의 믿음과 신뢰가 있을 때 가능한 거지요. 그렇게 했을 때 사람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할 때에는 반드시 말에도 기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떠 어떠한 일이 있으면은,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자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말을 할 때에는 이런 것은 참 좋다, 그런데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그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야 됩니다. 그것이 모울도뷔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러 이러하게 하는데 이러이러한 것이 참 중요하다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모울도뷔가 아닙니다. 이건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하는 거지요. 사람 마음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자기가 닫히게 됩니다. 자기가 이 생각, 구조 속에 갇히게 되어서 결코 개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현대 사람들이 모든 생각을 개방적으로 모든 생각을 열어 놓고, 이 생각 저 생각을 다 받아들여야 된다고 말하면서 실제 말이라고 하는 걸 쓰는 걸 보면은 그렇게 안 써요. 늘 요렇게 하는 건 참 아름답고 좋은데, 이것은 문제가 될 때 어떻게 풀 것이냐,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둬야 될 것 같습니다.
그걸 생각하면서 불교 금강경에 나오는 제1품을 한 번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거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 듣기로, 한 때 석가모니께서 어디 어디에 계셨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이 때 바로 밥 때가 되어서 세존께서는 바루를 드시고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셔서, 그 성중에서 차례차례 도시면서 밥을 빌으신 후, 그 다음에 본처로 돌아와서,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다 하시고, 바루를 거두시고, 손발을(손은 없지만), 발을 닦으시고 가부좌를 하고 앉으셨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 했는데, '빌어먹을 걸'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더 중요하게 오늘날의 사회에서 봐야 하는 것은 '어기성중'이라는 것일 겁니다. 아무도 없는 무인지경으로 빌어먹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그 성중에서 차례대로 비셨다는 것입니다.
그 성중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생각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성의 모습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에 있는 집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고, 거리의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머리가 단편화되어 있다는 걸 뜻합니다. 그 성중에서는 늘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고, 그 가운데에는 악한 일, 선한 일이 있을 수밖에 없고, 권력자와 그들 권력자를 위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가 있고 불의가 있고, 선, 불선이 있고, 그리고 있고 없음이 있고, 또한 가지고 못가짐이 있습니다. 그 성중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 성중에서 차례 차례로 빌었다는 겁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고, 서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서로 싸움과 서로 다툼이 그칠 날이 없는 그 성중에서 차례차례 빌었다는 겁니다. 그 차례차례 비는 그 마음에서 어쩌면 우리가 말의 참된 쓰임새를 배울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여 놓고 나서도 부족할 때, 자기가 보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을 얘기하기보다는 그 분에게 좀 더 넘는 것에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또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나가야만 되는데, 그렇지 않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참 순진한 것이고 당신이 세상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이야기 해 버리면 마음이 닫히게 됩니다. 이것은 모울도뷔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울도뷔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 틀을 허물어뜨리는 성곽을 허물어뜨리는 일입니다. 이 성 속에는 서로 다투는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다툼없는 세계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거기에 차례차례 빌러 다녔던 것이 석가모니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빌러 가기 전에 당신은 사시가 되기 전까지 숱한 기도를 했을 겁니다. 그 기도를 한 후에 가서도 기도의 대가를 달라한 것이 아니라 빌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말을 나눠가야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얼핏 떠올랐습니다.
바로 그처럼 서로가 서로를 다치지 않고 서로를 키워가는 것이 말이라면 그런 말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배움일 것입니다. 요 근래에 어느 고등학교에서 같이 논어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그런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논어의 첫구절이 '학'과 '습'입니다. 이것은 논어 전체를 꿰뚫고 있는 대 강령입니다. 흔히 논어를 생각하면은 그냥 공자님 말씀, 제자들 말씀 주루룩 그냥 무순으로 엮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순으로 엮었다면 당시에 엮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닐진대, 공자 이야기는 공자 이야기대로 좌악 모으고, 또는 시기별로 장소별로. 다음 제자들은 제자 말대로 좌악 모아보면 되었을텐데 그렇게 안 모았다는데서 이미 그냥 단순한 어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거는 논리성을 갖고 꿰어 맞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이 바로 '학'과 '습'인데, '학습'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배우고 익힌다. 때에 맞추든, 때때로이든 간에.
엄밀하게 '습'이라는 것과 '학'이라고 했을 적에 우리가 '학'에 대해서 너무 잘못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배움에 대해서. 기술, 지식, 기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이 '학'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 인간화되어 있는, 모든 것을 동양에서 천지인으로 본다면, 하늘의 첫 빛이 첫 하나이고, 땅의 빛이 둘이며, 사람에게도 또한 빛이 있을 때, 이것들은 각각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를 어기고 나서, 사람이 바로 하늘의 빛을 볼 수 없는 거거든요. 사람이 가장 처음에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빛이 바로 배움입니다. 배움이라는 것의 정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 배움이라는 것은 예수교에서 성령을 받아들이듯이, 인간 사회에 전해오는 인간화되어 있는 빛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배움입니다. 그 빛을 받아들여서 나의 것으로 합성시키는 것이 익힘이 되겠죠. 그것이 학습의 진정한 의미가 되겠죠. 이와 같은 것이, 배움이야말로 인간화된 빛이요, 그것이 달리 말하면 진정한 의미의 법이요, 그것이 달리 말하면 도가 될겁니다. 물론 천도가 아니라 인도가 될테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이와 같은 방법을 배우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익혀서 그 기능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자신이 그 빛을 받아들여서 그 빛을 이루는 실체가 되기 위해서 하는 어떤 노력일텐데요. 그 노력을 가장 먼저 논어에서는 다루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서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나 순서를 지켜야 되고, 그 순서야 말로 어쩌면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지켜야 되는 법이자, 인간에게 던져져있는 선대 스승으로부터의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화된 빛,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놓고, 서로가 마음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직접적인 공간이 아닌 닫혀 있는 공간이라면 특히 그런 것이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얘기를 오늘 드리면서 그 방법이고, 방법 중에서도 저는 어떠한 것을 고집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법에 의존해 가야 하지만, 이 법이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적에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절대적으로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요즘 들어서 우리 것이라면 다 좋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 마디는 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우리 거니까 배워 보고, 저것도 우리 거니까 배워 보고, 이것도 배워보고. 이 배우는 것이 정말로 중요할 수도 있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에디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에디슨은 어릴 적에 과학을 좋아해서 여러 가지 약품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 약품들의 이름에다 다 '독약1',  '독약2', '독약3', '독약4'라고 써 놨다고 합니다. 모르니까요. 그것은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는 것이고, 그의 과학 인생 전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 '독약1', '독약2' 써 놨다가 확인을 하나 하나 하면서 정체를 붙여 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것이라 해서, 내게 소중해 보이는 것이라 해서, 그것을 만날 때 자세가 가벼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독약처럼 여기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확인해 가는 것. 저는 이런 과정 속에서 제가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면, 확인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확인되는 것은 다 받아들여서 하나로 꿰려고 했습니다. 하나로 꿰지 않으면 대신 말씀을 안 드리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하나로 꿸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꿰어보려고 애를 썼고, 그렇게 해서 제 나름대로 꿴 것을 몸공부니 마음공부니 라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체계는 아무리 꿰어봐도 살이 조금 붙을뿐 바뀌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대컹 대컹 좋은 것이다 해서 무조건 하다가 생기는 부작용처럼, 그 부작용이 배움이라는 것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단순한 기능이라고 생각하면 모르겠거니와 그 단순한 기능이라고 하는 것도 순간순간 사람을 바꿔간다는 겁니다.
 금강경을 얘기했으니 다시 한 번 금강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처음 금강경을 녹음으로 들어보신 경험이 있는 분들, 또는 영어 테이프를 들어보신 경험이 있는 분들. 영어 테이프를 처음 들어보면 뭐가 뭔지 들려야 말이죠. 들리는 건 헬로우, 굳모닝 밖엔 아무 것도 안 들리고, 나머지는 뭔가 쉘쉘 거리기는 하는데 갑갑하기 짝이 없지요. 금강경도 처음에 들으면은 여시아문만 들리고 나서 그 다음에는 뭐 부처도 가끔 들리는 것 같고, 뭐 반야도 들리는 것 같고 이런데 하나도 안 들리지요. 갑갑하지요. 그런데 자꾸 듣다보면은, 책도 놓고 보다면은 나중에 다 들려요. 다 들리는데 이것은 노력하면 됩니다. 특히 자기가 노력하는걸 즐기면 다 들리게 되 있어요. 그런데 이거를 잊어버리기가 힘듭니다. 금강경의 내용을 다 읽어서 그것을 단어로써 이해하기는 쉽습니다. 이제 금강경을 다시 테이프를 틀어 놓고 나서 그 소리만을 들을 뿐, 그 속에 있는 뜻은 하나도 듣지 않고, 말을 들으면 다 들려오죠. 들려와도 그것이 뜻으로 들리지 않고, 오로지 소리로 들리게 되기가 더 어렵습니다. 영어를 다 들을 수 있는 영어를 놓고, 그것을 하나도 영어로 듣지 않고 그냥 느낌으로만 그것을 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렇게 잊어버리지 못하면 얼치기 기능인이 되 버립니다. 공부라는 것이 한 번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 속에 들어 왔을 때보다 내 보낼 때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더욱 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할 것이 공붑니다.
공부라는 것을 하나의 방법으로까지 이야기해서 나눌 때에는 목숨걸고 나누는 겁니다. 제가 제 공부를 함께 나누고 싶을 때에는 제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겪어 왔던 제 목숨의 한 알들을 담보해서 아, 이것은 나누어서 그렇게 다시 없애느라고 고생할 정도가 아니라 그 길을 가면 저절로 녹아지는 것이겠거니라는, 확신없이는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와 같은 공부 중에서 지난 번에 선치삼재후로일원상의 요지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요지를 조금 방법으로 한, 金丹紫調落水中을 어떻게 하면 쉽게 감지할 수 있을까, 그 하나의 작은 한 조각 맛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그 맛을 보는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워낙 많아 가지고 하고 나면은 이 방 전체가 독기로 가득찰 것 같습니다만. 또한 어쩌겠습니까? 하는 수 없을 것이고요. 아무튼 조금씩 몸에 무리가 안 오는 정도에서만 해 보되, 그것을 할 때, 반드시 생각을 뚜렷하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몸공부 중에 백학타사라는 것도 있는데, 그런 걸 할 적에 그 백학타사 하는 발로 내 속에서 일어나는 그 번뇌를 집어찬다는 생각없이 하면, 그것이 무슨 무술에 도움이 될 것이며, 무슨 몸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일어나는 번뇌를 한없이 한없이 걷어차서 그 번뇌를 내게서 떨치는 동작이어야만 하듯이. 그리고 또, 龍虎爭勇翔于玄勢라는게 있습니만, 그런 것을 해 놓으면 이제 금단자조낙수중에 도움이 되는데. 그것을 할 때, 내 낡은 마음을 받쳐 비워내고 다시 새로운 빛을 받아들인다는 마음없이는 그것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거 있겠습니까?
아무튼 오늘 같이 한 번 공부를 해 보는데, 저는 하도 잊어버린게 많고 해서, 서해진 선생님 불러내가지고 저는 옆에서 보고, 가끔 잔소리만 하는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서해진 선생님 앞으로 나오심............................
서해진 선생님은 그래도 떨어질 금물이 있어서 금물이 떨어지지만, 저는 떨어질 금물도 다 떨어져 버리고 없어서 서해진 선생님이 하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서해진 선생님:
금단자조낙수중은 실제 짝이 되는게 있습니다. 짝이 되는 건 앞에 배우셨던 선치후로, 그것과 짝이 되어야 하는데요. 그 선치후로를 하는 과정 속에서 금단자조는 더욱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일단 선치후로를 잠시 한 번 해 보고 난 다음에 금단자조낙수중에 들어가겠습니다.
현재 앉으신 상태에서, 선치후로는 다 아시리라고 생각을 하고요. 아시죠?

선생님: 다시 한 번 하시죠, 뭐.

서해진 선생님:
음.. 일단 제 머리를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편의상 간뇌라고 했던 머리 한 가운데 점을 일단 생각을 하시고요. 그 한 점은 귓볼에서 앞볼, 이 부분을 위로 갔을 때, 그리고 상단점을 횡으로 긋고, 이것을 종으로 그었을 때 만나는 점. 그 정도를 기준점으로 삼아서, 그리고 앞에는 정수리라고 하는 정문이 있었고, 뒤쪽으로는 가마가 있었습니다. 이 기준으로 해서 위로 나갈 때는 반드시 나가게 되 있고, 앞에서 밑으로 내려갔을 때는 반드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지키셔서요. 가운데 점에서 위로 나가고, 그리고 널심이라고 했던, 널심은 코의 딱딱한 뼈와 물렁뼈가 만나는 그 경계 부분. 우리 눈동자 밑으로 해서 두 개의 구멍이 있지만 이 구멍이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점에서 만난다고 했는데, 그 하나의 점은 이 딱딱한 뼈와 물렁뼈, 그 점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간 부분이니까요. 그래서 나가서 들어가고, 다시 나가고 들어가서 안으로 들어와서 가운데 간뇌부분을 거친 다음에 위로 올라가고요. 위로 올라가서 다시 뒤로 간 다음에, 옥침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베개 벨 때 주로 닿는 부분이 있죠? 그쪽으로 해서 다시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8자 돌림을 그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치후로는 누워있을 때만 빼고, 그러니까 자기 몸의 중심보다, 배보다 아래 있을 때만 빼고, 나머지 동작에서는 다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印法도 여러 가지 형태로 쓸 수 있는데, 잘 안 될 때 합장을 하고 엄지가 명치를 향하게 하시고서 하시면 조금 도움이 될 겁니다. 특히 주의하실 것은 없고요. 가운데 정중앙선 따라서 나가고 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물론 지금은 그렇게 아래로까지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 다만 금단자조낙수중할 때 주의하셔야 할 부분은, 그러니까 염두에 두셔야될 부분이 이 앞쪽입니다. 앞에서 정문 쪽으로 나갔다가, 민경이라고 했던 머리털 경계 부분인데, 이 부분에서 상단전까지 지날 때, 그 지날 때 이궁에서, 그러니까 금단자조낙수중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이궁에서 중궁으로 가는 길을 연마하는 건데요. 이궁에서의 느낌과 이궁에서 감궁으로 가는 그 길에서 어떤 느낌이 있는지 이 앞쪽으로 내려 올 때 그것과 상관성이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잠깐 연습삼아서 해 보고, 금단자조낙수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반가부좌든, 편안하게 책상다리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고, 합장한 상태에서 엄지만 세워서 자기 몸 쪽, 명치 쪽으로 두십시오. 대신 손이 밑에까지 다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수월하지는 않는데요. 좀 아래쪽으로 내려와야 되거든요. 대신 눈동자는 반드시 아래를 향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게 아래를 향해서 고정해 주시고, 나가고 들어가는 길목에 대해서 주의를 해 주십시오.

.................................(해 보는 시간)................

바로 하시고요. 실제 다른 호흡을 할 때도 선치후로는 같이 병행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금단자조낙수중인데요. 금단자조낙수중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금단자조하고, 낙수중으로 방법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금단자조를 먼저 이뤄야 되고, 금단자조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 낙수중, 낙수어중이죠, 중으로. 그러니까 이궁에서 중궁으로 떨어지는. 그 단계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금단자조할 때의 달굼은 주로 이궁 단련이라고 합니다. 이궁을 주로 단련하는데, 이 이궁을 단련할 때, 일반 행공, 아까 백학타사를 말씀하시고, 나머지 여러 가지 행공들이 있는데, 그건 대부분이 이궁을 중심으로 이궁을 단련하는 공부법들입니다. 그리고 호흡법도 마찬가집니다. 일체의 호흡은 다 이궁을 거쳐서 아래로 들어가고, 다시 나갈 때도 이궁을 거쳐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호흡을 통해서도 이궁을 단련하는데 그 때도 마찬가지로 숨과 의념을 같이 병행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숨과 의념을 병행할 때는, 금단자조낙수중의 인법을 쓰지 않습니다. 금단자조낙수중할 때 인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오늘은, 숨은 하지 않고 의념만 하는 인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몸을 풀어주는 점들이 있는데요. 금단자조낙수중을 할 때는 몸에서 기본적으로 열려져 있어야 되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배꼽입니다. 물론 그 전제가 이미 배꼽을 열 수 있는, 이궁을 단련하는게 곧 배꼽을 여는 길인데, 그만큼 앞의 공부가 전제되어 있어야 되는데, 그 전제 없이 하고 있다는 것도 감안하셔야 됩니다. 배꼽이 열려 있어야 되고, 영대가, 영대와 선소 사이라고 했던, 등에서 척추 6번째, 7번째 사이가 열려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승장혈도 열려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상단전도 마찬가지로 열려 있어야 되고, 가운데 가마, 정문도 마찬가지로 열려 있어야 됩니다. 이 네 개의 점이 열려 있고, 네 개의 점에서 감각이 동시에 확인이 되야 됩니다. 이 네 개의 점을 여는 방법이, 배꼽은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삼각형으로 해서 배꼽을 사이에 두고서 삼각형을 만듭니다. 시계 방향으로 열 바퀴 정도 돌려 준 다음에 반대로 열 바퀴 정도 돌려줍니다.

..............(사람들 해 봄)................

아랫 부분을 하시는 것은 왼손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배 부위는. 돌려주시고요. 그 다음에 또 배꼽을 단련하는게, 노궁이라고 말하는 왼손 장심을 배꼽에 닿게 하고, 오른손 장심이 왼손의 외장심에 서로 연해서 붙어 있게 하고요. 이 상태에서 어떻게 단련하냐면요. 원래 숨을 마시면 당연히 배가 앞으로 나오고, 숨을 토하면 배가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배꼽을 자극합니다. 그 처음에는 숨을 마실 때 손이 밖으로 나오고, 첫호흡만. 그다음에 토할 때 쑥 들어 가고요.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두 번째 호흡부터는 반대로 합니다. 숨을 마실 때 오히려 손을 눌러주고, 토할 때 힘을 빼줍니다. 그런 식으로 다시 한 번 배꼽을 자극합니다. 몇 차례 반복하십시오.

..............(잠깐 해 보는 시간).............

네, 됐습니다. 열 번까지 다 하실 건 없고요. 열 번 정도 하는게 기본인데, 10번까지 다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그리고 승장은 검지를 서로 맞대서 직각으로 세웁니다. 각을 이루는데 이렇게 한 상태에서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위치하게 하고, 다시 반대편으로 위치하게 하고. 그렇게 검지 끝을 자극해서 천천히 돌려주십시오. 그러면은 상단전, 이 부위에서도 기운이 맞물려서 같이 움직일 겁니다. 물론 혀 끝은 입천장에, 어금니 가볍게 머금으시고요. 혀 끝은 입천장에 붙여둔 상태에서 하시면 좋습니다.
네, 그리고 나머지 상단, 이 부분을 풀어줄 때는 중지 끝으로 툭툭 살짝 쳐주는 방식으로 하시면 되고요. 그 다음에 영대 부분도 있는데, 영대 부분은 오늘 그냥 넘어가고, 정문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꼽에서는 왼손을 축으로 했는데, 오른손을, 정문을 찾아야 되는데요. 정문 위치를 정확하게 찾으셔야 되거든요. 위에 뒤쪽에서부터 장심이 자기 머리 한 가운데를 지나게 뒤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와 보십시오. 어디선가 장심이 움직이고 동시에 머리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데가 있습니다. 애들이 숨을 쉴 때 움직이는 부위가 있습니다. 그 부위가 정문인데, 거기와 장심이 서로 맞대게 둡니다. 맞대게 두고 거기에 왼손을 포개둡니다. 마찬가지로 마시면서 처음에는 나가고, 토하면서 눌러준 다음에 그 다음부터 다시 반대로. 반대로 숨을 마시면서 눌러주고, 토하면서 풀어주고, 그렇게 반복하십시오.
원래 금단자조낙수중을 하려면은 몸풀기보다 더 중요한게 이궁 부위에 있는 기름기를 빼내는게 더 중요합니다. 이 부위는 기름기를 배지 않으면은 금단자조가 형성이 안 되고, 정말로 중궁으로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듯이 하는 그런 감각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르게 말하면은, 독기를 빼지 않으면 어렵다는건데, 아까 말씀드린대로 원래 금단자조낙수중이 숨과 의념이 결합되야 되는데 숨이 아닌 의념만으로하는 그 단계를 해 보겠습니다.
왼손 장심이 배꼽을 향하게 둡니다. 닿지 않게, 일단 떨어지게 두고. 그 다음에 오른손 장심이 정문을 향하게 하되 한 2cm정도 떨어지게 둡니다. 그 상태에서 의념을 이궁에 두고요. 이궁에 먼저 금단자조를, 그 빛을 연상합니다. 금구슬이 자빛을 머금은 빛을 띄고 있는, 아니면 자빛의 바닷속에 금단의 구슬이 가라앉아 있는 그런 모습을 연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연상이 좀 더 선명해지고, 좀 더 구체화되면서 커지면, 그 무게에 의해서 저절로, 새벽에 풀잎에 붙어 있는 이슬 한 방울 두 방울이 떨어지듯이, 아니면 처마 끝에서 낙숫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그런 모습을 먼저 연상하십시오. 들고 있는 오른손이 힘드시면은 가만히 무릎 위에 오른손만 올려놔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금단자조가 미약하면, 그 의념이 미약하면 다시 오른손을 올려서 정문 위에 두고서 의념을 계속 하셔야 합니다. 그 금단자조의 금단이 오는 곳이 정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의 중요한 문을 거의 닫고 있다시피 하기 때문에 지금은 숨과 결합해서 할 수가 없습니다.

...................(직접 해 보는 시간)....................

결국 금단자조할 때 그 금단자조가 오는 경로가 몇 군데가 있습니다. 물론 숨하고 의념이라는게 결국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가 거의 일치하는데요. 특히 이렇게 정문으로부터, 하늘빛이라고 할 때는 정문으로 오고, 또 다른 빛이라고 할 때는 배꼽과 영대, 선소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양의 자세를 할 때도 앞에 있는 축이 이 앞쪽으로 해서 배꼽을 거쳐서 이궁을 붙잡고, 뒤에서는 영대, 선소로 해서 이궁을 붙잡고. 그 두 갈래 길이 있게 됩니다. 좌우로 하는 연습을 많이 하셨는데, 동시에 전후로도 길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고요.
그 다음에 금단자조낙수중에 도움을 주는 또 하나의 훈련이 있습니다. 결국 지금 하셨던 선치후로라든가, 아니면은 의념만을 이용하는 이 금단자조의 의념법. 그거하고 또 별개의 방법들이 많이 있긴 있는데, 결국 얼마만큼 그렇게 일정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 몸 안에 독기가 있고, 풀리지 않은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전제를 두고서 이 공부를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한 어떤 배치에서 이미 선생님 스스로 몸을 가지고 실험해 본 결과이고요. 왜 그러냐면은, 실제 산에서 했을 때 조건과 도시에서 했을 때 조건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산에서 했던 방식대로 도시에서 했을 때 또 다른 형태의 결과가 도출되는 것을 확인하시고, 몇 번 실험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서울에서 금단자조낙수중을 하기 위한 또 하나의 훈련이 화생우목이라는 인법을 갖고 하는 겁니다.
괘라는게 왼손과 오른손으로 괘를 잡는 건데, 괘를 잡는 것도 나중에 시간이 되면 따로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요. 화생우목의 괘는, 왼손은 감괘고요, 감중연이고요. 오른손은 간괘입니다, 간상연. 엄지하고 새끼 손가락은 빼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상중하 괘를 설정하고. 감괘는 감중연이니까, 간괘는 간상연이니까 이렇게 쥐되 서로 맞물리게 합니다. 맞물리게 하되 서로 고리를 이룬다는 거고요. 그리고 서로 향할 때는 끝 부분이 서로 마주하게, 끝이 살짝 자극될 수 있게 대고, 고리를 지어서 맞물리게 하고, 나머지 손끝은 서로 맞대줍니다. 왼손에 고리지은 부분이 반대편 손의 장심을 향하게 하고, 마찬가지로 오른손은 고리를 지운 부분이 왼손의 장심을 향하게 두고요. 그렇게 둔 상태에서 막아 동작을 하듯이 위에서 아래로 쭉 내려와서 자기 몸에서 걸리는 부분 정도에 둡니다. 이 각도를 세워도 되고, 약간 눕혀도 좋습니다. 비스듬하게 세워 두는게 무리하지 않으면 그대로 세워두시고, 이게 힘들어서 눕혀지면은 그냥 그렇게 하셔도 관계는 없습니다.
괘가 익숙하지 않으시죠? 너무 복잡할 수도 있는데, 일단 한 번 하고 몸의 감각을 확인하겠습니다. 잘 느끼시지 못하시겠지만, 조금 전의 호흡 가지고 벌써 이 방안에 꽉 찼어요, 냄새가. 벌써 냄새가 달라지고 있는데요. 이렇게 하고 두시고, 대신 이 때 의념은 이스라엘의 별을 의념합니다. 그 별은 어디 어디냐 하면은, 이 삼각형이 있었죠? 웃슬과 양 견정으로 봤던 삼각형하고, 주로 시각과 관련된 거였고. 청각과 관련된 삼각형은 역삼각형입니다. 귀와 천돌로 해서 이렇게 역삼각형을 그립니다. 이스라엘 별처럼 육각형을 그리는 의념을 두시고, 손은 이 인법을 하고, 호흡은 편안하게 하셔도 좋습니다. 잘 모르시겠으면 인법만 쥐고 계셔도 좋습니다. 삼각형을 하면 그만큼 몸이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자기 몸을 일단 가둘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용..............다들 해 보는 중임......................

그 상태에서 선치후로를 하셔도 좋습니다.

.............................계속 하고 있음.............................................

선생님:
실내에 냄새가 독하지요?
형제가 있습니다. 또는 자매가 있습니다. 흔히 사회에서 2촌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그 2촌에게 적용되야 되는 서로 간의 덕목으로 우애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왜 우애로워야 될까요? 우애 안스러우면 뭐 탈 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 우애의 근거에는 한몸으로 잡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 어머니가 나하고도 1촌이고, 나하고 2촌인 사람하고도 1촌이어서 2촌이 되는 거지요. 아버지, 어머니가 없다면 형제간의 우애의 근거가 없어지는 셈이죠? 그러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 근거가 있습니다. 벗이라는게 있는데 벗이라는 것은, 옛 유학의 말로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 논어에 그런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까? 나하고 불여한 사람을 벗하지 말라. 이 벗을 정의하기를 유학에서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同道者. 요즘 말로 하게 되면은 도반도 되고, 동지도 될 것 같습니다. 뜻이 같은 사람. 따라서 이것은 나보다 못한 것이 아니지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벗삼지 말라 하면 누가 벗이 되겠습니까? 벗할라고 쫓아가는 사람은 도망 갈 것이고, 자기하고 벗하자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기 싫을 것이고, 안 되지요. 이거는 엄밀하게 나하고 뜻이 다른 사람, 가는 길이 다른 사람과 벗삼지 말라는 겁니다. 즉, 나하고 길이 같은 사람과 벗삼으라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벗과 벗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같은 길이고, 같은 법입니다.
그런 것을 이루려고 인간에게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큰 은혜가 가족입니다. 원래 가족이라는 것은 그처럼 같은 길을 가는 최소한의 인간단위입니다. 먼저 어려서 힘이 없을 적에 연세 드신 분들이 일을 해서 그렇게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북돋아 주고, 도반이 되어주고. 이제 그 분들이 늙으면은 젊은 사람이 된, 그 돌봤던 사람이 다시 돌봐서, 같은 길을 마무리짓고 갈 수 있도록 돌봐주는 최소한의 도반 단위가 가족입니다. 오늘날 그런 의미로 가족이 과연 존재하는지, 또 기능하는지는 따로 살펴봐야 하는 문제겠습니다만은, 그러한 것이 원래 가족이고, 그러한 가족이 모여사는 그 가족처럼, 인위적으로 가족을 이루는 그 가족이 부도입니다. 우리 과거의 부도라는 것은. 부도라해서 별도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족이 아닌, 천연의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모여있는 곳입니다.
제 집을 말씀드리면은, 제 어릴적에 제일 마지막에 살던 집은, 가 보신 분도 몇 분 계시니까 아시겠습니다만. 거기에서 읍의 중심까지 나오려면은 한참 걸어야 합니다. 10리는 족히 걸어야 하는데요. 그 근처에서 조금 내려오는 곳에. 10리가 채 읍으로부터 안 되는 곳에 제 부모들께서 경작하시던 밭이 있었습니다. 그 비탈 밭의 전체 둘레를 전부 호박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밭들을 갈라놓은, 그 밭들이 시골 밭 해 봤자 4000평이면 아무 것도 안 나오는데요, 거기를 이렇게 둘레며 갈라놓은 곳이며, 그 전부에 호박을 심으셨으니 호박이 보통 많은게 아닙니다. 거름도 못주는 호박이지요. 그러다보니 읍에 계신 분들이 그 호박을 좋아했나봐요. 그래서 매일 제 어머니께서 그 호박을 두 방태기로 나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방탱이를 탁 갖다 놓으면은,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갖다 놓으면, 저절로 넣고 가고, 넣고 가고 해서 한 5분만에 호박이 절단이 나는데. 그 호박 두 방탱이를 다 처리하시면, 한 한 방탱이에 30개씩 있으니까 60에서 80개를 다 처리하시면, 갖고 오시는 것이 제가 쓸 공책 두 권입니다. 그 두 권 외에 남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가만 문방구만 갖고 생각해 보면 무척 싸진 것 같아요. 요즘은 호박 그렇게 한 60개 팔면, 호박 한 개 갖고 공책 1개는 살 것 같은데 그렇게 비쌌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걸 이제 어린 저는 보지요. 그 호박을 가지고 장만해 오신 그 공책을 붙잡고 밤새 필사를 하는 겁니다. 같은 글을 필사하고, 또 외우고, 필사하고, 외우고. 하루에 그렇게 공책 반 권 정도가 이렇게, 좀 두터운 공책인데요. 그러니까 호박 30개죠. 밤새 필사하고, 밤새 또 외우고. 그렇게 눈물 흘리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분이 저에게 한편 도반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때 그렇게 베끼고 다시 외우고 베끼고 외우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많이 베꼈던 것 같은 것이, 이 판본 저 판본 다 베껴가면서 공부해 본 것이 아마 음부경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역 참동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현재는 그런 의미의, 서로가 그냥 먹고살기 위한 편의로서의 가족은 있는 것 같아도, 부도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뭐 선거를 해도 남편이 뭘 찍든, 자식이 누굴 찍든 물어 보면 이건 죄악이 되지요. 이건 민주주의를 위배하는 거지요.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러다 보니 정권을 맡아서 끌고 가는 사람들은 교묘한 핑계를 댈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하자 그러니까 핑계를 싹 대고 도망가는 방법이, 한국적 민주주의. 그런 것을 제대로 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멀리 했기 때문에 생겨난 핑계였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진정 제 뿌리에서 시작했으면은 어찌 간악한 지도자들이 한국적이라는 명분을 이끌고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 피해갈 수 있는 너무나도 당당한 명분을 줬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서로가 서로 애쓰면서 우리의 최소의 부도를 깨버렸습니다. 아마 옛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고려장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라고 생각을 못하니까요. 더 이상 생산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제가 밥 해다 드리겠습니다. 제가 물 떠다 드리겠습니다. 소대변 다 받아드리겠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서 움하나 파 드릴테니 거기서 나오시지 말고 저 빛을 볼 때까지 공부하고 가십시오 라고 해서 파 둔 것이 고려장 터죠. 그런데 그걸 악용하는 일부 무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자 마침내 성리학자들이 이런 패륜의 짓거리가. 일제가 그러니까 어이구 잘 됐다, 핑계 거리 하나 잘 찾았죠.
지금 진정으로 내가 마음놓고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나를 돌봐주는 도반 하나 있는지. 이번 3년 동안은 당신이 좀 일 하소, 내 공부 좀 할테니. 다음 3년은 내가 일해가지고 당신 공부하게 해드리리다. 하는 것이 있어야 사실은 부돕니다. 내꺼 내가 벌어가지고 열심히 공부할래.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열 사람이 보태면 한 사람 공부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가면은 10년만 돌면 되잖아요. 그것이 사실은 서양의 문물로 보면은 비웃음이 일기 시작하고, 비참하고 거짓스러운 것 같은 우리들의 원래의 식객 문화입니다.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부시켜야만했던 것이 돈의 목표점이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것을 악용해서 자기 많은 사람 데리고 있다는 거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도 있었겠습니다만, 원래의 의미는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도반 문화에서 있었던 겁니다.
그러한 도반 문화의 흔적들이 아직도 수없이 남아 있는 이 복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천하 길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 길지에 살면서 그 복된 흔적과 유적들을 다 버리고 나니 가난해진 거지요. 마음도, 몸도, 그리고 입에 들어가는 풀칠도 다 가난해진 겁니다. 세계 사람들이 그걸 배우려고 할텐데 알아야 가르치죠. 우리 자신이 먼저 몸으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멀리하고. 아무튼 오늘 잠시 해 보신거, 이 자리에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이 지금 대충 60분이 넘는데, 이 자리에서 한 열 명 앉으면 제대로 되겠습니다만은. 집에 돌아가셔서 적당한 자리를 고르고, 적당한 자리가 골라지지 않으면 누구 한 사람 붙잡고 나 하는 사이에 좀 안 시끄럽게, 누구 출입 안 하게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것만도 도반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도반이 있을 때 치열하게 하고, 치열하게 해서 또 갚을 수 있는 도반이 있으면 행복한 겁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계속 공부하는 그런 인연들이 맺어지기를 바라고요.
앞으로 이제 몇 주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안반수의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조금 정리를 해 가야되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 체계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장광설화를 풀어왔다고 생각하시면은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몇 주 동안 그렇게 해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제가 참 제 몸을 생각해서 몰랐던 것이 많이 있었음을 근래에 느낍니다. 예전에는 늘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을 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에서 기력이 빠지기 시작하니까 아 이것도 몸에서 뒷받침이 되야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 다 제낄 무렵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몸으로부터 자신을 다스려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가까이 있는 분들에게 요즘 들어서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 자기 몸 쓰러지지 않을 만큼은 유지해야 되겠다라는 생각 말씀드리고.
어쨌든 남은 몇 주 동안 정리를 차근차근 할 수 있는 시간을 또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인법 하나 익힌 것으로 생각하고요. 원래 우리 수련법에서 인법은 72종의 인법이 있습니다. 손으로 가는 수인법이 72종이 있고,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인법들이 있습니다. 그 인법들 가운데서 한 가지다라고 생각하시고. 해 보시면은 또 별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내지도 말고, 빨리 가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다 가게 됩니다, 천천히 가도. 다만 그 가는 순간 순간에 진실할 뿐입니다. 서둘러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도 빨리 나갔다고 해서 빨리 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 하나 익힐 수 있는 품들은 분명히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자기 집에서부터 먼저 부도를 회복하도록 애를 쓰는 그런 인연. 또 만난 인연들끼리 저버리지 않는 인연. 그런 인연으로 서로가 서로를 키워 가는 인연으로 되었으면 하는 바람 말씀드리고 오늘 이야기는 줄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더불어 지난 시간에 기운 높였던 거에 대해서 사죄의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지난 시간 얘기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1초에 지구를 7바퀴 감는다 했습니다. 이거는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인구만 하더라도 60억이고,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고, 생명이 다 마찬가집니다. 60억만 하더라도 1초를 단위로 했을 때 420억 바퀴의 빛줄로 처져 있는 것이 우리의 지구입니다. 인간만 있겠습니까? 인간은 그 가운데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지구의 빛의 현주소입니다. 그런 빛을, 아까 금강경을 다 들으면서도 듣지 않고도 들을 수 있는 눈과 그 감각으로 본다면, 어쩌면 그 빛은 정말 금빛, 은빛, 동빛, 철빛으로 빛이 약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엘리베이팅이 되서 쭉쭉 올라가주면 빛이 점점 회복되주면 좋겠건만, 복본이 되면 좋겠건만, 불행히 그러지 못하고 그 빛이 유지될까 말까 하는 그런 것을 그냥 꿈에서 봤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괜히 지 혼자 울다가 튀어 나와서 소리 높였던 점, 사죄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여기 계신 분들이 괜히 또 저 때문에 우울하셨다면은 그 또한 사죄드리지 않을 수 없는 거고요. 자신의 빛이 밝게 지구를 감싸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밝은 빛이 저 자미원까지 밝게 한다는 염원으로. 실제 어떠한 몇 사람의 기운이 그렇다면 그 몇 사람만으로 지구는 빛이라는 면에서는 진보할 겁니다. 그 진보는 오늘날 사람의 마음을 밝게 바꿀 겁니다. 왜 밝게 바뀌었는지도 얼핏 우리의 과학으로는 아직 밝혀지지 않겠지만, 밝게 바꿀 겁니다. 그것이 마음길을 닦아가는 사람들이 자미원을 대신해서 스스로 빛으로서의 역할을 해야되는, 헤라클레스처럼 지구를, 하늘을 받쳐들어야 되는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튼 지난주의 일은 사죄를 드리고, 밝은 만남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다음 번 언젠가에는 우리가 꿈으로 이 지구의 빛을 봤을 때 동빛으로 은빛으로 금빛으로 가는 그런 세월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마지막 인사말로 대신하겠습니다.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2001.5.3.목.조계사)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9) 

 

오늘 이야기는 '相'입니다.
  상이라고 했을 적에 불교에서는 흔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넘어서야만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실상 한가지로 모아집니다.
   벽암록 같은 글에서 보면 공부하는 분들이 삼매에 들어 돼지코를 잡고 비틀다가 깨어보니 느닷없이 자기 코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구절도 있고, 삼매에서 어느 상주가 와서 뭐라고 치근대서 도끼로 찍어버렸는데 바로 자기 발을 찍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상이라는 문제와 관련지어 공부를 진행하다 보면 누구나 반드시 현실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입니다.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닌데 왜 그러냐하면 '상'이라는 것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지만 실제로 '상'은 '아상'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상들은 아상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아상이 없으면 중생상, 수자상, 인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상이라는 것을 하나의 화폭으로 삼아 거기에 다른 것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에 이 상들의 뿌리는 아상입니다. 다른 상들은 어찌 어찌해서 물리칠 것 같아도 금방 금방 생겨나는 것은 아상이라는 무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상이라는 것이 불교식으로 표현하여 '魔'라는 것입니다. 이 아상을 이긴다는 것은 법이 강하여 마를 이긴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이것이 실제 나의 마입니다. 이 마가 어떤 모습으로 나에게 있는가를 따져보면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는데 자기 생각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참 좋을 수가 있습니다. 이 공부를 누구에게 권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안 될까?', '아이구 답답하다..', '왜 사람들이 저렇게 다른지 신경질난다', 또는 '저렇게 못하는 것을 보니 불쌍하다'라고 하는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도 아상입니다.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오면 그 성긴 대숲은 소리를 내지만
  바람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그 대숲이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연못에 기러기 떼 지나가면 그 못에 그림자가 비치지만
  기러기 떼 지난 다음에는 그 못에 그림자가 남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상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 상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마치 그와 같은 마음을 낸다면 전부 상일 수밖에 없고 그 상은 아상입니다.
  노래를 잘 부른다면 청중을 상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있는 나무와 풀, 그리고 흘러가는 바람과 물, 그들을 향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를 듣고 바람이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화낼 일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듣고 그 노래를 제대로 감상해주지 않는다고 그 나무, 풀 등을 가엾게 여길 일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은 자신이 갖추어진 모습대로 할 뿐 다른 것과의 관계에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 비로소 아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상이라는 것은 일체의 관계 속에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다 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아상을 중심으로해서 수많은 상들이 매여있고 그 상과 상들이 모두 팔짱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 속에 내 몸을 빠뜨리고 내가 그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세계이고 따라서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늘 고마워하고 늘 짜증내고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밝은 것은 모르겠거니와 어두운 것이 있어 자신의 몸을 끌고 갑니다.
  그런데 수행하지 않는 분들은 이런 아상이 있어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늘 이 마구니의 상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까요. 이 마구니와 더불어 살아 이것으로 말미암은 불편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가 보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법과 마 사이에 전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법과 마가 서로 싸움을 벌이는 양상이기 때문에 수행을 하다보면 자기의 몸이 한편으로는 법, 한편으로는 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밝게 살아야지. 한편으로는 마에 끌려 사는 것이 몸에 의해 이루어지고, 어느 순간 문제가 터집니다. 그래서 어느 것으로 갈 것인가에 따라 상이 먼저 요구를 합니다. 목숨을 내놓을 거냐, 네가 나를 죽일 거냐, 내가 너를 죽일까, 네가 나를 죽일까를 두고 사람으로서 마지막 결판을 합니다.
  이 마지막 결판이자 첫 결판이기도 한 이 상을 극복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안반수의경이고, 안반수의의 요지를 담은 것이 금강경입니다.

  ≪금강경 ≫ 제 일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일찍이 듣자하니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비구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때 마침 밥 때가 되어서 세존께서는 바루를 들고 사위대성에서 밥을 비셨습니다. 그 성 가운데 차례로 밥을 비시어 원래 있던 곳으로 오셔서 빌어오신 밥을 다 드신 다음 옷과 바루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 마침내 부좌를 하고 앉으셨다."

  거기에서 상을 극복하는 세 가지의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흔히 우리가 계라는 것은 깨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이와 같은 상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실제 그와 같은 상을 이기고 나서 그러한 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경우에는 80평생을 사시면서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서는 여든을 넘게 사시면서 당신이 세운 계를 당신이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물며 다른 수행자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세간에는 잠시 계를 지키는 듯 하더니 어느새 자유분방한 모습을 하면서 깨친이연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흔들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을 더욱 부채질해놓고 있습니다. 깨친이는 깨친이답게 계를 지킬 일이요, 깨쳐가려는 이는 깨쳐가려는 이답게 계를 지킬 일입니다. 깨치려는 이는 목적의식적으로 계를 지킬 것이고 깨친이는 저절로 계를 지킬 것입니다.
  그것을 앞을 일러 계라하고 뒤를 일러 율이라 하니 이 율을 여섯으로 이야기하여 그것이 육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육율은 계가 자연히 지켜진 위력입니다. 즉 아상을 대신해서 생겨난 내 몸의 현상입니다. 이 육율이 이른바 육신통입니다. 다른 것이 신통이 아니라 이 율이 신통입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생기는 율을 초전율, 제 일율이라고 하는 천안통입니다.    천안통이 무엇일까하면 간단히 까마귀, 참새, 까치 등의 소리를 들어 그것을 이해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들어서 까마귀의 입장, 까치의 입장, 참새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상황이 훤히 보이는 것, 이것은 까마귀의 소리를 듣는 것이겠습니까? 보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보는 것이 초전율입니다. 그것이 천안통의 시작입니다.
  아무튼 부처님께서는 끝까지 율을 지키셨는데 그 율을 지킨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금강경 바로 제 1품입니다.
  첫째 밥을 빌으셨다. 이 계를 지키신 것을 보면 아상을 이긴 방법인데 이 방법을 통해 아상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밥을 빌으셨다 라는 것은 낮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상은 쉽게 말해 늘 높임입니다. 그리고 밥을 빌으신 것이 그 성 중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 가운데에서 서가모니를 이교도다, 사이비다 라고 몰아세우는 수많은 브라만들이 살고 있고 그리고 늘 온갖 속임수와 위선이 판치고 있으며 살인과 살생과 강간 등의 모든 도적 행위가 판치고 있는 그 성 가운데에서 빌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두루하셨습니다. 마음에 드는 집, 안 드는 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순서대로 하셨습니다.
  딱 세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빌으셨고, 그 성 중에서 두루하셨고, 또한 순서를 지켰습니다. 이것이 '어기성중 차제걸이'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 분의 현실적인 삶의 계이기도 하지만 그 분에 있어서 사위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몸 속에서 스스로 낮추었으며 자기의 몸 속에서 호흡이 가는 길이라면 그 호흡을 두루 하셨으며 또한 호흡이 가는 그 순서를 지켰습니다.
  흔히 아상을 보면 그렇죠. 일이 있으면 쉬운 것을 먼저 하고 어려운 것은 뒤로 팽개쳐두거나, 어려운 것부터 먼저 하여 매도 미리 맞는 게 낫다고 하면서 쉬운 것을 뒤로 미루거나 하는 등, 사람에 따라서 순서를 고르는 것, 그 또한 상이죠.
  그리고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자꾸 편을 가르게 되죠. 그 편을 가르는 것도 상입니다.
  그리고 낮추는 척 하면서 높이는 것, 그 또한 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곡에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을 잡아가는 장면에서 "활등 같이 굽은 길을 살대 같이 몰아가니 높은 데는 낮아지고 낮은 데는 높아진다." 이것이 어쩌면 삶과 죽음의 정곡일지도 모릅니다. 높은 데는 반드시 낮아지고 높은 데는 반드시 낮아지게 마련입니다.
  아상에서 우리가 몸의 세계를 높이고 나면 그 몸 너머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낮아질 것이고 몸의 세계에서 낮추면 그 다음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물은 늘 낮은 데로 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늘 낮은 데로 모여서 그 씀씀이가 늘 넉넉할 것입니다.
  아무튼 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정리를 해서 풀어나가는 것인데 이러한 상을 풀자면 어떻게 할 것인가? 특히 순서가 문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상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실제 삶과 죽음의 문제로 와 닿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겪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목숨을 내놓든, 상을 내놓든 두 가지 중에 하나는 내놓아야합니다. 그 상 앞에서 더욱 면역력이 약해지는 거죠.

  어제 대구에서 마음을 나누는 모임이 있어 내려갔다가 왔는데 내려가서 보니 시간이 남아 팔공산을 올라갔었습니다.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어서 게으른 사람들이 늘상 그렇듯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었습니다. 팔공산이 팔공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렇다고 합니다.
  요즘 사극 '왕건'에 나오는 견훤과 왕건의 부대가 팔공산 근처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그 때 세가 불리한 왕건의 군대가 도망을 가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여덟 장수가 왕건을 대신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요즘 사극에 나오는 능산이라고 하는 신숭겸, 나주 지키는 데 나오는 김나, 전이갑 등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여덟 공신들을 기린다고 팔공산이라고 전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옛 적의 팔공산의 이름은 空산이었습니다. 모든 산의 이름들이 바뀐 것을 보면 그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보면 원래 산 이름을 짐작하기 쉽습니다. 팔공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비로봉입니다. 흔히 우리 나라의 산 이름 중에는 비로봉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비로자나불과 관계된 이름이라고 생각하기도 쉽지만 그게 아닙니다. 정말로 비로자나불과 관계된 산 이름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원래 우리말인 비로가 한자로 표기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비로라는 말 자체가 당시에 비루와 같아, 바로와 바루가 같듯이 비로봉이라면 그 자체로 공산입니다. 팔공산의 옛 이름도 그러한데 아무튼 가보니 그 봉우리가 비로봉이었습니다. 팔공산은 저와 나름대로 오랜 세월 전에 인연이 있습니다만 그 꼭지까지 찾아가본 적은 없는데요, 지금은 비로봉 서쪽에 레이다 기지가 있고 하여 올라갈 일이 더욱 없습니다만. 이곳에서 저에게 7대조이신 분이 공부를 하셨습니다. 흔히 팔공산에 계셨다고 해서 산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셨습니다. 그 자리를 보면서 느꼈던 게 옛 적에 공산이라 했더라도 까짓것 '팔' 자 하나 더 붙여도 좋겠다, '공' 자는 고려 때 이름 말고 원래 이름대로 한다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니 '모든 것의 상을 두루두루 비울 때 결국 비울 곳은 여덟 곳이니까, 여덟 곳을 두루 비우면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잠깐 우리말 얘기가 나왔으니 조금 돌아가겠습니다. 어디에 나오든 수행에 대한 우리말들은 아름다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결코 자신을 담아두고 내뱉지 않고 뒤로 웅얼거리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혀를 말아 꼬부려서 살살거리는 서양 소리같은 말들도 없고 중국에서 자주 쓰는 권설음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말에 중국어, 영어의 영향으로 이런 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하늘의 '구름'도 원래는 하늘 신의 이름인 '구무'입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ㄹ' 발음이 들어가 느닷없이 '구르무', '구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우리말들은 너무나도 찾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만주어에서도 그냥 '구무'예요. 천사, 하늘 신들의 모양입니다. '무' 라는 것은 늘 있는 모양새를 나타내는데요. 구무가 일본말로 구름의 뜻이고 만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할 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두루두루 비우는 자세, 몸공부를 일러 우리는 '쉬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도 모양새 '쉬'는 흔히 음가가 '쇠'와 같고 지역에 따라서는 중간음 정도의 '쉬', '쇠'가 되는데 이 '쉬무'도 어느날 갑자기 권설음 -한 천년은 된 것 같습니다만-이 붙어 '쉬르무'가 되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죠. '씨름'이죠. 만주어에서는 이 씨르무가, 스무가 그냥 여전히 쇠무예요. 세무인데, 일본에서는 쉬모, 스모가 됐죠. 일본사람의 씨름이 오히려 원칙에 가까워요. 우리의 씨름은 이러한 말만 들어온 데다 그것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의미- 자신의 여덟 곳에 가득 차 있던 아상들을 깨끗하게 비워 이 공이라고 이름 붙인 법으로써 공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 공이나 법이어야 하는 곳을 그냥 놀이로 바꿔버린 겁니다. 이것을 놓고 우리 민속 고유의 것이라고 하지만 고유의 것이긴 한데 변질된 것이죠. 일본의 '스모'는 약간 덜 변질되었습니다. 경기는 한 10초, 30초에 끝나버리죠. 앞서 무릎을 들었다 놨다 하고 동작이 굉장히 깁니다. 그게 일본의 스모이고 나머지는 스모를 한 경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의 씨름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일본의 스모가 우리의 씨름과 같고 그 앞에는 괜히 귀찮은 게 붙은 것으로 아는데 원래 앞에 붙은 것이 쉬모이고 그러한 쉬모로써 스모를 한는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씨름하기 전에 샅바싸움만 신나게 하다가 우당탕 힘만 쓰고 가는데 전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틀을 서는 옛 모습들, 또 이와 같은 것들의 옛 공부에 해당하는 오로무지니 바라무지니 하는 모든 것들이 넓게 보면 다 쉬무거든요. 이러한 쉬무를 널리 알리려고 하다가 보니 그 방편이 놀이였을 것인데 본말이 전도된 것이죠. 이제는 본말이 전도된 것을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근거를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어야 말이죠.
  바로 이처럼 법으로 가득차게 하는 이 법을 방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방편을 불교에서는 뗏목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아상을 건너, 아상을 버리고 참된 나로 가는 방편을 법이라고 말하면서 뗏목에 비유하지만 실제로는 뗏목이 아닙니다. 이 법이라는 방편은 비유하여 방편이지 흔히 잘못 생각하여 방편으로써 저 언덕에 도착하면 배를 짊어지고 갈 일은 없다고 하는데 말하여 그런 것입니다. 실재 저 언덕에 도착하여보면 버릴 배가 없고 버릴 뗏목이 없습니다. 버릴 배가 있고 버릴 뗏목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고 아상이었습니다.
  금강경의 제일 마지막 품에서 사구게에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꿈처럼, 마치 물거품처럼, 마치 아침 이슬처럼, 마치 번쩍이는 우레 전기처럼 저 강을 건너고 나면 진짜 방편은 이미 저절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슬처럼, 꿈처럼, 물거품처럼, 전기처럼 그 순간 사라지고 없는데 무언가 지고 가야할 뗏목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뗏목을 지고 있는 그 공부를 하고 있는 경우에 대해서 그것의 방편이 실제 법이 아니고 아상임을 깨치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아상은 어떤 것인가. 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상을 버리면 되지, 왜 내 속에 있을까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아상은 무엇에 빌미를 두고 있는가 하면 나의 필요성이라는 것 때문에 있습니다. 내가 뭔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아상이 존립합니다. 내가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권력과 관련된 상이 있고, 내가 재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재물과 관련된 상이 있고 내가 가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가족과 관련된 상이 있고, 내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다 상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필요성 너머에서 정말 나에게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야만 하는데 이 현실적 필요성은 전부 이해관계에서 옵니다. 이 이해관계의 뿌리에는 살아나서 짐승답게 뽐내고 경쟁하려는 나의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을 따라서 사람은 살게 되죠. 이 몸을 따라 살게 되면서 아상은 점점 굳건해지죠. 아상이 하나 둘 스크럼을 짜게 되고 아상이 아니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도대체 다른 것을 향해 마음을 열 수가 없습니다. 개방한다고 하나 열리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상이 주인이 되고 이제는 몸이 그 심부름꾼이 되고 이제는 몸이 마음의 주인이 되고 아상은 더 커지고 이렇게 되니까 몸이 이상한 걸 만들어냅니다. 아상의 닮은꼴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됩니다. 내가 좋은 물 마시고 좋은 음식을 먹고 똥을 누고 오줌을 누면 -이것이 아상이 하는 짓이므로-이 몸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좋은 재료이던 것이 온갖 쓰레기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 과학의 발전이 못미쳐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것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되어도 쓰레기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쓰레기 될 것을 아예 먹지 않는 이상은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몸인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먼저 챙기지 순환을 먼저 챙기지 않기 때문이죠. 앞으로 줄줄이 나가는 몸으로 되어 있으니 이 아상의 몸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내어도 앞으로만 가는 것을 만들어냅니다. 모든 것을 아상의 모습으로 계속 만들어냅니다. 아상은 인간의 몸을 통하여 수많은 자신의 몸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내고 그것이 세상을 포위하게 되고 이리하여 이 몸들을 더 이상 붙잡을 겨를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고해입니다.
   이러한 몸의 작용을 말씀하신 것이 이른바 불교에서 고통의 바다입니다. 허나 이 몸 없이 또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몸이 또한 동시에 은혜입니다. 이 몸 속에 들어가 두루두루 내 마음을 낮추고 내 마음이 낮추어져 몸을 두루두루하며, 몸 속에서 모든 순서를 가져와 몸의 가짐도 마음의 가짐도 음식도 모두 이 몸을 향해 두루두루 하는 것이 우리의 식문화이고 생활문화인 것입니다. 무엇하나 가리는 것 없고 가리지 않아도 분명한 자기됨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모두 필요성에 의해서 생기다보니 너무나도 쉬운 수행방법들을 거꾸로 필요성에 의해 보지 않게 되었는데, 예를 들자면 김유신 묘에 가면 둘레에 12지신 석상이 있습니다. 이 12지신 석상들은 보통 재미있는 모습들이 아닙니다. 쥐나 원숭이가 건장하게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성은 거기에서 무얼 보게 만드는가? 유미주의적 아름다움을 보게 만듭니다. 민족을 찾고 전통을 찾는 것은 우리의 아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필요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름다운 유물이나 예술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필요성이 아닌, 아상이 아닌 아상을 잠시 대신한 임시 아상인 법상-물거품처럼 구름처럼 사라질 그 법상-에 의해서는 다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아! 이것은 전부 12가지의 공부법이구나, 이 아상을 비워내고 법을 강화시켜서 마를 항복받는 방법들이 있구나를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보여드릴 수가 있겠습니다만 통도사의 금강계단에 있는 그 모든 것들도 유미주의적인 감각에서 보면 세계적인 미술품이죠. 그러나 13세기에 보수를 하면서 손을 못대었습니다. 나머지가 전부 마모가 되었는데도 손을 대지 못하고 빈 상태로 두었습니다. 채울 수가 없어서요. 그것들도 미술품이라는 아상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법상에서 보면 전부 나의 32신상의 공부법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남아있는 게 없다, 요즘 불교에서는 새로운 제3의 수행법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하는 것에 어느 기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맨날 제3수행법 찾는다고 해놓고 쑥 들어가더니 이번에도 역시 또 그럴 것이다 라고 했다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을 앞세워 찾게 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수행법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찾아낸 것이 진실이다 라는 것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냥 자신은 자신이 해왔으니까 물 앞에 하듯 바람 앞에 하고 지나가면 그것이 필요한 사람은 거들 것이요, 필요하지 않으면 버리겠죠.
  아무튼 법상의 입장에서 보면 이 우리의 땅은 길지 중에서 길지 입니다. 세상 천지에 아상이 아닌 법상으로 살아간다면 이 땅 만한 길지가 없습니다. 모든 방법이 단 하나도 끊어지지 않고 다 남아 있는 곳입니다. 내 몸의 모든 수행방법이 다  남아 있는 곳인데, 흔히 자신의 몸을 일러 길지 라고 합니다. 우주에 길지가 어디 있나? 내 몸이 길지 이죠. 그러나 굳이 내 몸밖에서 길지를 찾는다면 조선 만한 땅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상에 의해 그것도 굉장히 이상한 아상에 의해 살다보니 그 필요성에 의해서는 다 저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아상이 골라 놓은 세계 속에서 찾으니 무슨 답이 나오겠습니까? 버려놓은 세계 속에서 찾으면 그렇게 많은 것을. 새삼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기와 조각에서조차도 그와 같은 많은 것들이 담겨 있으니까요. 그 기와를 이긴 방법조차도 그와 같은 방법과 무관하지 않았을 거니까요.
  아상과 법상을 굳이 다르게 또 비교한다면 법상은 물이라고 해도 거의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제 얘기를 해서 죄송스럽습니다만 어느 곳에서건 와달라고 하면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왜 다 가는가 라고 하시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관계치수를 해두면 물 안 가는 곳이 없듯이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이 돌지 않습니다. 자리 장만해 놓고 오라하면 다 가는 게 사람 사는 길입니다. 어디는 아니니 안 가고 저기는 가고 하는 것이 어려워요. 아상은 남이 만든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고 싶어야 가는 것입니다. 하기 싫으면 못합니다. 이때 자아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입니다. 법은 있을 자리에 저절로 그냥 있는 것입니다.
  흔히 비유를 하였지만 어쨌든 아상을 버리고 가려고 작정했을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떤 순서로 갈 것인가? 순서 이전에 세 가지 원칙은 금강경을 빌어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을 낮춘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있겠습니다만 낮추고 두루하고 차례대로 한다.
  그러면 차례대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차례가 무엇인지가 적혀있는 문헌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가 안반경이고, 그 하나가 대념처경이고 다른 하나가 부도지입니다.
  안반경은 두루 말씀하셨으나 상세하게 말씀 안 하셨고, 대념처경은 원칙을 나열하셨으나 순서를 엄밀하게 안 하셨고, 부도지는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원리를 말하지 않았으나 순서를 엄밀하게 하였습니다.
  그 순서를 어찌할 것인가? 그 순서가 안반경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안반경에 따르면 가장 먼저 알아라고 합니다. 흔히 잘못 생각하면 말이나 글보다는 몸으로 수행을 많이 해야겠다고 하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알지 않고 하면은 몸으로 하는 것만큼 아상에 잘 끌려갑니다. 아상에 잘 끌려가는 방편도 몸으로만 합니다. 현재 내 몸이 뭐라는 건가 하는 겁니다. 현재의 내 몸을 알아야 하니까. 현재 내 몸이 마구니고 사탄이라는 겁니다. 곧 독이라는 것을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라고 하여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는 금강경 26 품에서, 몸으로만 하는 공부에 대하여 혼내는 한 마디의 사구게입니다. 이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므로 먼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안반경의 전제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이제부터 지계에 들어갑니다. 지계 후에 행안반하고 안반하려면 이 앞까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서가모니와 그 제자들이 공부한 것을 돌이켜보면 서가모니는 그 제자들의 목숨을 전부 거두었습니다. 열심히 떠들다보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서가모니는 그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전부 자신을 내놓아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목숨을 받고 대신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계입니다. 즉 계가 바로 법입니다. 법의 실상은 오로지 계입니다. 계로써 목숨과 바꾸는 것입니다. 그 계를 목숨과 같이 해나가면 언젠가 이 법이 뜬구름처럼 물거품처럼 아침이슬처럼 사라지고 텅 비어 나는 내 자신이 물인양 바람인양 돌인양 되어있는 것을 볼 때 어느새 저 언덕으로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담보로 하여 안 죽으니 해봐라. 대신 죽든 안 죽든 목숨을 내놓고 계를 가져라. 이 계를 맡긴다는 것은 꼭 어딘가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에 맡길 수 있는 것이고 아니면 자기가 책 한 권에 맡길 수 있는 것이고 또는 자신의 어떤 신앙에 맡길 수도 있는 겁니다. 대신 어떤 것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것으로 자신을 뚫어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창칼로 만든다면. 전쟁에 나가는 군인은 자기의 목숨을 군번과 바꾸는 것입니다. 총과 바꾸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과 비교하면 안 되겠지요. 그건 다 피해자가 되는 것이라서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아무튼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아서 내가 승리를 필요로 한다면 나에게 목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상과 진아와의 전쟁에서는 나의 목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아를 이루고 아상을 밀어낼 무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기와 맞바꾸는 겁니다. 그 다음 하는 것이 안반경입니다. 이것이 안반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예라는 것이 모든 것이기도 합니다. 그 계를 받음으로써 안반을 행한다고 했는데 안반은 결국 계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안반은 곧 계행입니다. 단 계를 실천하는 것은 안반의 전제이니까 안반은 계행을 실천하는 조금 높은 제 이차의 계행인 셈입니다. 이제 안반을 함으로써 총칼을 배웠으니까, 총칼로 총검술도 배우고 사격법도 배우고...하는 등의 제 이차적인 다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나누냐 하면 제일 먼저 낮추는 보시로써, 베품으로써, 나를 버리는 겁니다. 나를 지키지 않고 달라고 하면 주고, 목숨 달라고 하면 목숨 주고, 밥 달라고 하면 밥 주고, 돈 달라고 하면 돈 주고, 욕 얻어먹어 달라고 하면 욕먹어 주고.. 주는 것도 원칙이 있습니다만 주는 것 다음에는 몸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안반수의의 수식을 하라는 것이 본격적인 안반의 순서입니다.

  안반에서 본격적으로 수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식을 해야되는데 지난번에 성환도인법 같은 것을 해야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제 우리가 자신을 알고 계를 행한다고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행을 하기 전에 자신이 많은 독으로 차 있다는 겁니다. 너무 독으로 차있어서 자신이 독인지 아닌지 잊어버리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독인이 되어 있냐고 한다면 우리의 독인의 성격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게 되어 있습니다. 짐승이라고 하기엔 사람의 기능을 너무 많이 갖고 있어서 독인이고 사람이라고 하기엔 짐승이 갖고 있는 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계행들을 보십시오. 짐승 같지 않은 얘기가 없습니다. 남자들이 짐승같이 사니까 해방논리에서 여자들도 짐승같이 살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짐승도 아니고 사람에도 포함되지 않는 이상하고 어정쩡한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우리를 반드시 멸합니다. 하늘은 절대 정해진 종자 이외에는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자가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정해진 환경에 따를 때만 가능합니다. 결코 정해진 환경에서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금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우리의 지식인들. 어디 자연 상황에 갖다 놓으면 쓸모 없는 지식이고 짐승 노릇도 못하고 또 사람 노릇 하라고 하면 뒤돌아 금수같은 짓만 하고. 이와 같은 존재들이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까를 떠나서 아무튼 우리 자신들이 전부 그 영역에 있다고 봤을 때 우리에게는 선택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니 몇 가지가 있는데 선택다운 선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현 상태로 계속 살다가 멸해도 됩니다. 그것도 선택은 선택이니까요.
  아무튼 여기서 선택은 무엇인가 하면 벗어나는 일밖엔 없지요. 그러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독으로부터 해방되는 일밖엔 없습니다. 온갖 지식도 음식도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나야 합니다. 그와 같은 것을 하기 위해서 옛 어른들이 특별히 갖추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이전 사회가 아무리 독하였다고 해도 지금처럼 반인반수의 사회이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반인반수의 사회는 인류가 처한 처음이자 마지막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 속에서 제독을 하기 위한 옛 어른들이 남긴 방법은 없지만 방법을 뒤지다 보니까 아까 말한 길지, 은혜로운 땅이 있듯이 남아있더라는 얘기입니다. 과거에 병들었을 때 어쩌다 갑자기 독에 노출이 되었을 때 그것을 제독하던 방법을 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독하는 방법들이 좀 이루어져야될 것 같습니다.
  제독하는 방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제독이 되면 그 때 수식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 때 수식에 들어가지 않게 되면 이 여덟 집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여덟 도르제에 비유하여 기름때가 독때가 잔뜩 묻어서 뭐 하나 파고 들어갈 틈이 없고 이 기름을 푸느라 볼일을 다 봅니다. 어느 정도 바로잡아주는 수행을 한 다음 안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면 이 독을 구경할 뿐입니다. 독을 확인하고 다시 독인이 되고 독을 확인하고 다시 독인이 되고... 엄밀하게 말하면, 지금 교육문제를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교육에는 한 가지 지침밖엔 없다고 봅니다. 현재의 이 상황 속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완전히 산 속에 가두고 사는 길밖엔 없습니다. 그리고 자력이 길러졌을 때 내려오면 다 잘 살아갑니다. 현재 바른 길을 이만큼 가르치면 반대로 돌아가 이만큼 물들어갑니다. 예전에도 그랬는지 모릅니다만, 어른들은 오히려 쉬워요. 출가해버리면 되니까. 어른들은 어느 정도 그럴 수 있지만 애들이 문제예요.
  아무튼 제독하는 수행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볼 때 안반수의에서는 첫째가 제독, 두 번째는 수식을 해나가는 데 있어 문을 여는 방법, 즉 금단자조낙수중으로 문을 여는 방법, 문을 연 다음 각 궁에 이르렀을 때 놀라지 않을 것, 저 금수의 동물원으로 들어갈 때 동물원을 들어가는 연습을 상당히 많이 합니다. 예로 헤엄치는 방법을 다 연습시켜서 집어넣어도 역시 황당해지거든요. 똑 같습니다. 먼저 수식을 하기 전 수영을 육지에서 배우 듯 먼저 배워야 합니다. 대충 이런 것들이 있으니 놀라지 마라는 그 주의 사항이 공부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주의 사항은 안반수의에는 없습니다. 사실 제독도 없고 수식의 주의사항도 없습니다. 안반수의는 단독 경전으로는 수행을 하는데 완전하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안반수의는 안반수의에 관련된 하나의 얘기만을 하므로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찾을 수 있는 주의사항은 화엄경에도 일부가 있는데, 화엄경으로 도저히 이해 못할 것 같으면 ≪사자의 서≫가 있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는 수행경전으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주의사항들을 잘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주의사항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절차의 책으로만 보고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 거기에는 소중한 수행상의 주의사항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사자의 서를 보면 비유해서 말씀드린 적도 있고 부도지와 연관시켜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만, 순서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 제독을 하고 주의사항을 넘어선 다음에는 안반수의의 하반부 단 한 권을 들고 실제 시행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시행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시간에는 실제 제독을 하는 시간으로 하겠는데 주의사항은 꿈을 꿀 때도 나타납니다. 꿈을 꿀 때도 이 주의사항을 잘 인식하고 꿈에 들어가면 참으로 쓸만한 경험의 세계가 됩니다. 그리고 꿈이 점점 정리가 되면서 누구나 인식 가능한 영역이 됩니다. 누구나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티벳 사자의 서를 잘 응용해서 쓰면 그렇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일상 생활에 다른 어떤 것을 하는 것보다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꿈이 정리된다는 것은 생사에 있어 사의 절반이 정리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는 안반수의를 전체 꿰뚫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드리고 언젠가 그와 같은 안반수의를 붙들고 공부를 하게되었을 때 해야하는 절차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와 같은 절차는 실제 실행으로 옮길 때는 두어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방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수행을 하면서 아상이 가끔 일어났던 경험이 있던 분들은 아상을 없애기 위해 마음을 내시되 그 마음을 내어도 아상이 잘 극복이 안 되고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을 것 같고 손으로 자기 코를 비틀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상황에 부딪혔거나, 마음에 고뇌가 일어날 때 고뇌를 따라 그냥 고민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너무나도 아픈 상황까지 이르는 분들은 장틀을 열심히 하면 몸이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길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장틀 속에도 그와 같은 길이 있고 다른 것 속에도 그와 같은 길이 있겠거니와 이 장틀을 서가모니가 안 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생신이 사월 초파일인데 원래 부처님 생신이 사월 초파일은 아니죠. 부처님 생신은 양력으로 오월 십오일이죠. 예수님은 십이월 이십오일이 아니라 일월 육일이죠. 그런데 불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왔을 적에 이 땅에는 수행학교로서 한웅전이 있었습니다. 한웅전을 빌어서 법당이 다 대웅전이었습니다. 그만큼 불교는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낮출 줄 알았습니다. 낮추어도 원칙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낮추었죠. 그리고 서가모니의 생일마저도 한웅의 생일에 맞출 수 있는 아량이 있었습니다. 그 한웅의 생일, 혹간 세간에서는 해모수의 생일이라고도 합니다만, 이 사월 초파일인데 부처님의 생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그것까지 다 받아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웅전에서 목숨을 걸고 공부하던 곳이 흑의, 조의-조의 선인이라고 할 때의-였습니다. 조의를 중의 옷으로 받아들일 만큼 여유가 있었습니다. 황의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시커먼 흑의를 받아들일 정도의 아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부법마저도 받아들여 하나 모순없는 길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원효, 밀본, 자장, 의상과 같은 고승들이 순식간에 한 시대를 채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만한 고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낮추지 않는 데서 그리고 이건 내것이라고 가리는 아상에서 그리고 아상은 다 극복한 척 하면서 중생상, 수자상이 문제라고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인데 그 아상을 버리고 아상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프다면 그 때마다 몸에 채찍을 가하되 순서를 가려서 채찍을 가하십시오. 몸은 고통의 바다로 가는 원인이자 또한 은혜의 바다로 가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모든 고행을 하시고 나서도 그 고행뿐만 아니라 몸을 잘 갈무리할 것을 당부 하셨습니다. 몸을 바르게 굴리면 마음을 바르게 굴리고, 몸을 바르게 굴리면 그 몸은 반드시 건강해지게 되어있습니다. 불확정성 이론에 따르면 L.A에서 나비가 날면 북경에 태풍이 인다고 하지만 여러분이 하는 아상의 마음 하나 하나가 이 세상에 무슨 태풍이 불어오게 할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낮추고 낮추어서 서로가 채근담의 한 구절을 나누면서 오늘 이야기를 줄이겠습니다.
 "바람이 성긴 대나무 숲에 불어오면 대나무 그 소리를 내겠지만
  바람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 소리가 머무르지 않는다.
  연못에 기러기 떼 지나가면 맑은 못 기러기 떼 비추지만
  기러기 떼 지난 다음에는 그 그림자가 머물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마음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2001. 5.10. 조계사교육원 )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10) 
  
지난주에 불교 TV 녹화를 하고 오늘 낮에 자막을 쓰는 데에 잠시 가봤습니다. 제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썩 오래 전은 아니지만 예전 한 일년쯤 전 그때 여든 넘으신 어른들과 그 또래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분들이 저를 보고 환갑은 넘은 지는 오래 되었을 것 같고 한 칠십은 되어 보인다 고요. 근데 오늘 화면을 보니 정말 육십은 넘어 보이더라구요. 어떻게 빛이 잘 못 반사되어 오른쪽 머리는 전부 흰색으로 보이던데요. 아! 몸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하고 실감을 했었습니다.

회자정리 이자필반(會者定離 離者必反)
오늘 정리하는 내용은 '회자정리 이자필반(會者定離 離者必反)',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구절입니다. 불교하고 상관 없이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잘 나오는 문장입니다. 만난 자는 반드시 흩어지게 마련이고 또 헤어진 자는 반드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공부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안반수의(安般守意) 제일 첫 시간에 드린 말씀이 사람의 몸과 관련하여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하나의 움직임을 갖자면, 그 움직임을 갖기  위해 어떤 체제가 이루어지자면 거기에는 반드시 '빛'이라는 것과 '닷'이라는 것이 결합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빛과 닷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물질도 마찬가지로 만났으니 반드시 헤어질 것이요, 헤어졌으니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수행에 적용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어김없이 빛과 닷은 늘 만났으니, 만난 것으로서 또 헤어질 것이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게 되겠고. 다시 만났던 자와 다시 만나는 자는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남을 간 제비는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제비는 다시 강남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어김없는 사실이건만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시각으로서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자꾸 눈을 감고 생각만 하다보니, 설마 돌아오는 일이 있을까, 한번 헤어지면 끝이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디서 무엇과 만나고 헤어질 것인가  - 헤어짐과 만남, 그리고 하나됨
안반수의에서는 매 시간마다 말씀드렸듯이 숨을 쉬는데 있어서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수식(數息)'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수식을 통해서 늘 사물을 내 밖에서 나를 보듯이 본다고 해서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합니다. 수식 또는 수식관에 있어서도 실제 중요한 것은 어디서 만날 것이요, 어디서 헤어질 것인가. 헤어진 자는 다시 헤어져 돌고 돌아서 다시 어디서 만날 것인가. 그리고 만나는 것은 무엇이며, 헤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 와서 빛과 닷의 결합으로 되어서 흩어져서 빛이 되어서 가고 닷은 닷대로 간다면, 조선의 사고방식대로 해서 혼은 혼으로 가고 백은 백으로 간다면 혼과 백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만 그  만난 혼과 백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대개는 같다는 것을 알 필요도 있습니다. 거의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오늘날의 삶을 떠나서 그 먼 생의 삶을 생각한다면, 그때 나를 구성했던 닷이 다시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실제 숨을 쉴 때, 수식관을 위해서는 수식관은 결국 아나(安)와 바나(般)로 이어지는 데요, 삶과 죽음. 안과 밖, 그리고 들고 남. 이렇게 이어지고 이것은 결국 끊임없는 숨으로서 실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쉬운 한자로 해서 '호흡(呼吸)'이 될 수밖에 없는데요. 호흡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도대체 호흡을 함에 있어서 만나는 것은 무엇이며 흩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만난 것이 헤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몸으로 들어가서 헤어지지 않고 나온다면 그냥 한바퀴 돌아온 것뿐입니다. 마음속에 어지러운 생각이 있어서 그 생각을 놓자고 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는데, 그 돌담길을 걷고 와서도 그대로 그 생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돌담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호흡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갈 때 그 생각이 그치지 않고, 헤어지지 않고 다시 나오려고 한다면 결국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수행과 관련된 호흡에서는 반드시 '헤어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헤어짐, 갈라섬이 있었다면 -갈라섬의 의미는 다르겠지만-, 다시 만남이 있을 것이고 또 만남으로 인한 '하나됨'이 있을 것입니다.
'헤어짐'과 '갈라섬'은 좀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한자로 '분석(分析)'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분(分)과 석(析)이 뜻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석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로만 보면 나무에 도끼를 들이대는 것인데요, 후대에 들어와서 석이라는 말은 원래 있는 결을 따라서 갈라지는 것, 열 개 짜리가 모여서 하나를 이루었다면 원래 열 개로 돌아가는 것을 석이라고 합니다. 분이라는 것은 쪼개지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쪼개는 것을 분이라고 합니다. 분석이라는 말은 애매 모호할 때 쓰는 말입니다. 되든 안되든 일단 쪼개 놓고 나서 거기에 따라서 보자는 말이지요. 분석이라는 말을 그냥 합쳐서 쓰는 것은 사실은 무책임한 말일 수 있습니다.
우린 가끔 역사학자들에게 놀아납니다. 역사학자의 책임성과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문화에서의 책임성이 다른데, 우린 역사학자들한테 자주 놀아나거든요. 예를 들어 '부도지'의 얘길 해보면, 제가 역사학자의 입장에 선다면 저는 부도지를 거부할 겁니다. 부도지의 내용과는 아무 상관없이 부도지는 위서입니다. 형식적으로 위서가 아니라고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사료로서 선택되어지지 않고 거기에 실린 사실들도 대부분 버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학자는 그럴지라도 사회문화를 다루는 입장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분명 버려야 하지만, 사회 문화에서는 버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거지요. 역사학자는 버릴 수가 없어도 사회 문화의 면에서는 버려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역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 이러한 것이 사료가 맞고 유적과 유물, 문헌이 뒷받침하니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지만, 사회 문화의 측면에서는 부정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꾸로는 오늘날의 시대가 합리주의 시대이다 보니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놀아나지 문화인들에게 놀아나지는 않습니다. 일단 엄격한 합리성이 없으면 버려지는데, 바로 그러한 합리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말이 분석입니다. 굉장히 무책임한 말일 수 있습니다. 되든 안되든 쪼개보는 것. 그러나 엄밀히 이처럼 헤어지는 것은 한자로 하면 석(析)에 해당될 것이고, 갈라서는 것은 분(分)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이라는 말과 '하나됨'이라는 말은 결국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남이라는 것은 그냥 가다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됨이라는 것은 상처를 꿰매야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억지로 갈라선 것에 반대가 되기 때문에 만남과 하나됨에 경계는 같은 것이지만 만남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자연스러운 물결 같은 흐름이, 하나됨이라는 것은 반드시 상처를 무릅쓰고 만나야 하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말이 분명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만남과 하나됨은 같지만, 헤어짐과 갈라섬은 다릅니다. 헤어짐은 헤어짐 자체가 원래 있는 그대로 헤어지기 때문에 자유자재한 것이지요. 원래 자연의 질서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국 한자에서는 '의(義)'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義)와 예(禮)
'의(義)'라는 것은 자연에 있는 하늘의 질서를 말합니다. 이 질서에 따라서 이 질서를 현실적인 양식으로 전환시킨 것을 '예(禮)'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하고는 개념이 많이 다르지요. 그리고 이와 같은 예와 의가 자기 속에서 실현된 것, 문화로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서 통해버린 것, 그로 말미암아 주체자의 성격으로 와 닿았을 때. 이것(禮)이 현상의 면이고 기준의 면이라면, 자기 내면에서 내면화된 것을 한자에서는 '인(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 있고, 사실 어찌 보면 더 쉬운 것을 철학적으로 더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이죠.
바로 이처럼 의에 따라서 갈라지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이 헤어짐과 만남이라면, 의가 아닌 것, 의와 관련된 상대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질서인 것과 질서가 아닌 것이죠. 의에 해당되는 것이 난(亂)이 아니거든요, 이것은 무질서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좀 다른 것이죠. 그래서 질서의 기준은 하늘이죠. 동양에서는 철저히 '하늘'입니다.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것,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 그 질서를 현실적 삶의 양식으로 생활양식으로 전환시킨 것, 그리고 그와 같은 전환을 시키는 사람의 입장 및 그 사람의 생명됨, 인격 또는 내면의 원동력을 인(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생활양식은 끊임없이 바꿔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근본적인 예는 인이죠. 인이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영원한 인간의 근본적인 본질이지만, 예라는 것은 질서에 따라서 바뀔 수밖에 없죠. 이것이 바뀌었는지 여부에 따라서 끊임없이 바꿀 수 있는 사람 내면의 기준을 '지(知)'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기 내면에서 예를 바꿀 수 있는 자기 인간됨의 자격을 말합니다. 기능을 말합니다. 아무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금은 쉬워집니다.
헤어짐이 있으니 당연히 만나는 것이니, 이것은 의에 따르는 것이고. 의에 따르지 않으면 억지로 갈라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죠. 옛날에 어른들이 남녀가 사귀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헤어지라고 하죠. 말을 안 들으면 갈라놓죠. 헤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순리와 순리가 아닌 것이지만, 이곳에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섬은 논할 바가 없구요. 헤어짐과 만남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갈라섬과 하나됨은 모순이죠. 그래서 옛 부도의 법칙에는 늘 하나됨을 따르고 갈라섬을 배격하죠. 그래서 모울도뷔에서는 '갈라섬에 맞서서 하나됨'을 이야기하지, '헤어짐에 맞서서 만남'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순리이기 때문에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것이 의라면, 사람 몸에도 이것이 의라면. 모든 의라는 것은 무엇이 언제는 만날 때는 만나야 되고 헤어질 때는 헤어져야 되는데, 각각 그 때는 어떠한 때인가. 지금은 그 만날 때인지 헤어질 때인지를 스스로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기도 전에 습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서라는 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올 때 오고, 갈 때 가고, 살 때 살고, 죽을 때 죽고, 힘들 때는 산을 넘어주고, 물이 있으면 건너 주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질서이고, 그것이 의입니다. 어색한 것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덮어서 싸워 눌러주고, 맞서서 목숨도 내어주고. 그런데 이것이 예로 전환되어야만 실제 사람은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수행도 크게 한자의 개념으로 보면 예학(禮學)입니다. 수행학도 넓게 보면 인간의 생활양식의 한 갈래입니다. 그리고 전체 인간의 생활양식을 감싸고 있는 토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학이라고 할 때는 인간은 어떻게 살까하는 인간의 생활양식을 연구하고 그 양식을 고치고 또는 세우고 하는 그것이 예학입니다.
그리고 이 예학은 의에 기준을 두고 현상화 시킨 것이기 때문에, 수행에도 마찬가지로 이 예학이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형식으로 수행할 것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인이라는 것을 습득해야한다는 개념 때문에. 한자에서 유학과 상관을 시키죠. 유학은 이와 같은 개념들을 잘 꿰맞춘 것입니다. 유학 이전에 이런 개념은 다 있었던 거죠. 없는 개념을 갑자기 공자가 끌어대면 그 공자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어려워서 어떻게 들었겠어요. 꿰어 맞춘 것만 해도 굉장히 어려워 고개를 갸우뚱하고 한 십 년 같이 다니고 나서 이제 겨우 시를 논할 수 있다고 그러는데 말입니다.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수행이라는 것이 이 인(仁)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가고, 수행은 예학의 바탕이 됩니다. 그런 개념에서 불교의 안반수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안반수의는 바로 이와 같은 예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헤어지고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내 몸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궁 - 만난 것이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서 돌아오는 자리
지금까지 계속 '이궁( 宮)'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이궁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궁은 빛과 닷이 결합되어서 들어간 것이 헤어지는 자리요, 헤어진 자가 다시 만나서 돌아오는 자리입니다. 빛과 닷의 결합으로서 이루어진 모든 사물, 그것이 음식이었든 물이 되었든, 공기가 되었든. 음식이 된 것은 어떠한 장기를 거쳐서 장기 내에서 다시 분해가 되어서 일정한 부분은 물로 가고 물이 아닌 일정한 부분은 바로 동양적인 개념에서는 하나의 기(氣)를 돋을 수 있는 기의 재료가 되어서 운기(運氣)의 재료가 되어서 바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되는 것은 다시 또 어떤 기관을 거쳐서 기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기는 간단한 하나의 기관을 거쳐서 바로 이렇게 전환됩니다. 이렇게 전환되는 것이 총괄적으로 관리되는 곳, 그곳이 이궁입니다.
이궁이라는 것은, -사물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들이 있다면 사물은 그 구성요소들이 한번 들어와서 만난 것이지요. 만났으니까 사물의 구성요소가 된 것입니다. 공기, 물, 풀, 독 등 그 가운데 어느 것은 먹으라 하고 어느 것은 가급적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들어가서 잘 분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궁으로부터. 그렇게 되었을 때 이 모든 것들은 이궁을 거치면 다 분해되게 되어있습니다. 다른 데에서는 분해가 되지만, 그것은 '헤어짐'이 아니라 까딱하면 '갈라섬'이 됩니다. 즉, '예(禮)'가 아닌 것입니다. 갈라섬이 되지 않고 헤어짐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학이기 때문에 수행에서도 그처럼 예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행한다 하는 표현, 행례(行禮)는 굉장히 다양하게 쓰입니다. 예를 행한다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귀신을 불러온다 하는 것도 예를 행한다고 하죠. 그런데 그것도 이 예를 행하지 않고 만남과 헤어짐의 원칙에 입각하지 않고 억지로 하면 부작용이 일어나고 효과가 없어지죠. 과거 사람들의 모든 행례는 현실적인 효과를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문화에서 밥을 이렇게 먹는다, 몸을 이렇게 움직인다, 숨을 쉴 때는 이렇게 한다 하는 것 등의 모든 것들이 바로 효과로 인과관계로 와 닿는 것입니다. 그 인과관계 속에서 인위적이고 강제적이며 비자연적인 즉, 의가 아닌 것이 없게 하는 방법론적인 학문, 그것을 예학이라고 하는거죠.. 
그렇다면 이 예학의 입장에서 수행에서는 이궁을 빼놓고서는 예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이궁을 빼고 예를 논한다면 멍석을 깔아놓지 않고 국궁(鞠躬) 재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물을 넣지 않고 찌개를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물론 어거지로 할 수 있는 몇 가지 편법들은 언제든지 존재합니다. 갈라짐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인간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워 놓았던 수많은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헤어짐과 만남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어거지 갈라섬을 거부하겠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람 세상에 적용을 시키든 내 내면에 적용을 시키든.
어쨌든 이제 '호흡'으로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만난 것은 들어가서 '이궁'을 거치면 저절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헤어진 것은 이궁을 거치면 제대로 다시 합성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의 핵심, 이 이궁을 보면 결국은 모든 것을 보는 것이 되고, 이궁을 보면 나타나는 증상, 이궁을 통해서 제대로 합체 또는 해체가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견종종색을 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에는 생각으로 억지로라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라는 것이 자연의 의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지만, 예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어거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정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훈련이 되어야만 합니다. 훈련이 되지 않고도 이 의를 따를 수 있다면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입장이 유학에 나타나는 성선설이고, 성선설에서 교육의 의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중·고등학교 때 들었던 얘기는 바로 이런 개념입니다.
여기 이궁의 견종종색은 여러분이 보고있는 입장에서 여러분의 배를 그려놓고 본다고 했을 적에 배의 오른쪽은 전반적으로 녹푸른색입니다. 녹색과 풀색이 섞여진 색입니다.
그리고 배의 왼쪽은 검붉은 색입니다. 그리고 이 아래쪽은 색은 있지만 상당히 미분화된 색입니다. 뚜렷이 갈래지어지지 않는 색입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한 복판은 완전히 흰빛입니다. 나머지 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것과 가운데를 뺀 나머지 여섯 군데가 이른바 육합의 빛입니다. 흔히 육합(六合)하는 것이 전후좌우상하를 말한다 하지만, 육합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못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 때문인데, 사람의 인식에서 도형이 차지하는 한계성 때문인데요. 육합을 비유한다하면 흔히 이렇게(정육면체) 비유를 합니다. 이것은 육면체일 뿐입니다. 육합은 공(구)입니다. 육합을 육면체로 비유하면 육합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이것은 각각 여섯 쪽을 구성합니다. 이 여섯 쪽을 구성하는 내부 관계는 복잡하지만 이 안의 내부 관계를 아는 것은 너무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니까 제쳐놓고요. 이것들이 각각 우리 몸 속에 있는 헤어짐과 육체도 아니면서 육체가 아닌 것도 아닌, 그러면서 통제에 해당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하나의 루트가 되기도 하는. 이리(이궁)로 들어가면 헤어지고, 이리로 들어가면 만나는 이것과 같은 통과의 문이기도 한, 누구라도 이 문을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죽을 때도 태어날 때도 이 문을 드나듭니다. 이 문을 통해서 삶은 꽃을 피우고, 사람은 이 문을 통해서 죽어서 혼백이 분리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잡고 있다가 이것을 억지로 분해를 하면 죽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잡고 끝까지 버티면 오래 산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은 천박한 기술에 속합니다.
저기 남한 땅에서 이미 봄이 왔는데 제비가 저기 대만 쪽에서 놀고 있다면, 그 제비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사람이 적당히 있다가 적당히 때가 되면 가야지요. 빨리 가도 안되고 늦게 가도 안 되는 것이지만. 이 여섯 가지 빛깔을 차례대로 보는 것, 그것이 또 다르게 말씀드리면 수식관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보는가. 이것이 의에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예의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이 첫걸음에 따라서 예를 실행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이와 같은 것은 바로 의의 영역, 의를 밝히는 의학(義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에 해당되는 것을 가지고 예의 첫걸음으로 삼는다, 이제 이궁을 잡겠다, 이궁에서 나는 헤어지고 나는 이궁에서 만나겠다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낮출 것인가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을 유학과 비교해서 한가지만 말씀드리고 들어가겠습니다. 유학에서는 소학(小學)의 모든 내용들이 다 예학입니다. 소학의 내용이 습성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낮추어서 청소하고, 효(孝)하고 제(第)하는 것이 다 낮춤입니다. 효라는 것은 자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 제라고 하는 것은 자기 공동체 밖에서 낮추는 것. 이 공동체 개념이 이제는 확 줄어들어서 가정이 되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거기에서 가부장적인 사회적인 습성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제는 어른에게 특히 나이든 남자에게 낮추는 것이 효가 되고, 그와 비슷한 자기 밖의 가부장들에게 낮추는 것이 제가 되었습니다.
어째든 유학에서는 이것의 구체적인 생활습성을 적어놓은 것이 소학입니다. 소학을 아이를 훈련시키는 것, 이렇게 사회경제사관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저도 사회경제사관을 가지고 공부를 해 보았습니다만, 이 측면에서 보면 소학은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교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명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보는 눈에 따라서 모든 것을 그렇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렇게 보이게 되어 보이니까 그것이 하나의  '-이즘'으로서 '-주의'로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소학이 그리 간단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되었을 때에 대학(大學)하라는 것도 다릅니다. 물론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고 있는 교재로서의 소학을 진정한 소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소학이 단순히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으로 알았다면, 한훤당 김굉필이라는 대유학자가, 이른바 정암 조광조라고 하는 대유학자가, 율곡 이이라고 하는 대유학자가 오로지 소학만 꿰뚫고 삼십 년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즐겨 부르던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소학 하나만을 가지고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고 했던 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진정한 낮춤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학이 이렇다면 노장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뜻을 물었습니다. 왜 상급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는가 라고. 이것은 낮춤을 말합니다. 진정한 선(善)이라는 것은 낮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 문장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에 처한다.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라고 하니까 요즘의 개념으로 한다면 여러 사람들이 나쁘다고 여기는 바를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바로 낮춤의 생활을 해오지 않으면 당연히 자기의 주관이 되어서 자기 몸의 감각에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란 바로 '낮춤'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목숨도 겁니다. 인간들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낮춤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에 처한다는 것은 낮춤을 말하고, 물(水)의 속성이 바로 낮춤입니다. 낮은 데로 가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은 낮은 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낮추어 가는 부분들이 결국은 동양의 모든 수행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면 이제 불교에 와서 낮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지 않고 금강경(金剛經)을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이제 이궁이라는 것이 예학의 제일이 되었다면, 이궁이라는 차원에서는 이궁을 어떻게 낮출 것인가. 이궁을 낮추는 문제,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입니다. 이궁은 어울림이요, 어울림은 곳 '불'입니다. 천역괘에서는 불이고, 지역괘에서는 어울림입니다. 인역괘에서는 약간 의미가 달라집니다만. 이것을 낮추라고 하였는데, 수승화강이라는 명제를 분명히 던졌는데, 어떻게 이룰까. 이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쉽습니다. 왜 수승화강이 되어야만 할까. 다시 말해 왜 사람은 수승화강이 안되고 자꾸 불기운이 올라가고 물기운이 내려와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높였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높였기 때문일까.
사람의 몸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슬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여기 관련된 분이 없으니 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살이 안된 아이가 아파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아이가 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는 점점 방치 상태가 되고, 그 부모가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자연적인 방치가 되는 것입니다. 관심을 아무리 가져도 적절히 해주지 못하면 방치가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저하고 인연이 닿아서 만나보니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양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애는 뇌가 네 개였습니다. 서양적인 관점에서는 뇌가 네 개인지, 혹은 두개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대뇌가 두개 소뇌가 두개였습니다. 가끔 소뇌가 두개인 아이는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뇌가 두개인 아이는 서양의학에서는 없습니다. 죽죠, 그런데 이 애는 뇌파가 네 가닥으로 왔습니다. 좌뇌, 우뇌의 뇌파가 조금씩 다르나 그것은 만나고 헤어지기 위한 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그 뇌파가 조금씩 다른 것에 의해서 하나의 뇌파라는 안정된 뇌파를 얻는 것인데. 그런데 이 친구는 그것이 두 쌍이었습니다. 그것도 좌우로 나누어서 두 쌍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 아이는 이미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고 갸우뚱할 대상인데, 눈이 보통 초롱초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계신 어떤 분에 비해서도 머리가 더 커요. 그 눈을 바라보면서 '얘는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사람 자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원래 사람의 완전한 모습은 그 아이의 뇌 구조가 더 완전한 모습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단 몸으로 뒷받침이 안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몸으로 뒷받침 안된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묘하게도 이른바 지역에 해당되는 알이 있으면 이 알을 중심으로 상하로 뻗어나가서 팽창된 치우침이 없는 팽창을 한 동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죠. 인간은 당연히 배에 중심이 있다는 것을 동양도 서양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배에 힘이 있고, 이것이 이렇게 팽창이 된 것입니다. 이 순서는 먼저 잡든 나중 잡든 간에 상관없이 즉 이른바 중단전부 상단전부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인가에 상관없이. 대개 동양에서는 근본적으로 상단전을 순서에서 먼저 봅니다만. 단전부라는 단위에서는 하단전이 만들어지면 상단전, 그리고 중단전을 이어주기 위해 팽창한 것으로 봅니다만, 이것이 이렇게 순서가 치우쳤다는 것입니다. 이 치우침의 과정 속에서 결국은 뒤집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이것이 인간의 몸에서 하단의 역할을 하는 배가 되는 등 이렇게( ) 팽창이 되었다면 인간의 괘, 지역괘는 이렇게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형성된 동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우주 안에는 모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랬다면 인간의 가능성은 이렇게(구궁도)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은 분명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바뀔 정도의 기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의해서 이렇게(상하로 팽창) 뒷받침되지 못하고 이렇게(아래에서 위쪽으로 치우친 팽창) 뒷받침되었을 경우에 인간들 속에는 특이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독특한 정서적, 지능적, 침체적 재능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몸에 결국은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동양에서는 이른 바 이런 구조( ) 속에서 자기의 흐름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동양에서는 병이 아닌 증상으로서, 이른바 절맥입니다. 절맥에는 삼음절맥과 오음절맥이 있는데 그 어떠한 절맥이던 간에 이것은 병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체와 그 기운의 흐름이 서로 잘 어울리지 않을 뿐, 나쁘게 보면 에어리언이 인간 몸에 들어온 것이고, 좋게 보면 ET가 인간 몸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째든 걸맞지 않게 되었을 때 그런 현상이 생기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축복이고 한편으로는 고통인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이처럼 고르게 상하로 팽창하는 흐름으로 이 전체의 지역괘에 해당하는 단전부가 폭발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쏠려 버렸습니다. 이 쏠림으로 인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높이고, 끊임없이 전진하며, 끊임없이 버리지 않고 얻으려고 하며, 끊임없이 탐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 몸에서부터 말미암은 제 심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입니다. 이와 같은 구조가 없다면, 또는 이와 같은 구조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탐진치는 떠날 길이 없습니다. 진정 탐진치를 아무리 떠나 보내려고 하면 뭐하겠습니까. 잠시도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고민하지 말고 편히 있으라고 하면 편안히 있어야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간은 고민을 합니다. 고민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도록 몸이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을 통해서 해결해야지, 몸을 통하지 않고 그냥 심리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소학에서는 환(患)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걱정이라고 표현하는 이 환이라는 것은 쏠림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무엇인가의 작용에 의해서 한쪽으로 쏠린 것을 일러서 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걱정이라고 하지만, 이 걱정의 의미가 지금 현재는 어떻게 쓰일까요? 서양에서는 걱정에 해당하는 개념이 worry이죠. 이것은 심리적인 불안정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불안감을 말합니다. 불안감만 해소하면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 서양의 심리학입니다. 뭐 어떤 복잡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불안감만 해결된다면. 그러나 동양의 관점에서는 그 불안감의 기능에 촛점을 맞춥니다. 모든 쏠림이 결국 몸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운행이죠. 그냥 body가 아니라 system of movement of body이죠. 몸의 운행의 체계이죠. 이 몸의 체계를 보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여기에 따라서 이궁의 예학이 나오게 됩니다. 이궁을 어떻게 쏠리지 않게 해줄 것인가.

몸에서의 예법 - 바른 숨길과 체상
앞서 말한 대로 간단히 '수승화강'인데 , 수승화강을 하기 위해서 먼전 숨길에 대해서 정의를 내립니다. 인간의 몸 속에 들어가는 숨길은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네 가지 길 가운데서 합문(合門) 또는 개문(開門)이 있습니다. 두개의 합문 또는 개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호흡하는 길은 여기에 속합니다. 두번째는 폐(閉)라는 용어는 잘 쓰지 않지만, 그냥 쇄문(鎖門)이라고 표현을 하는데요. 이 쇄문이 일상적으로 어쩌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에 의해서 숨이 쉬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 특이공능에 이르게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 쇄문을 이용해서 자기가 그렇게 되었으니까 이것이야말로 정법수행이고 이것이야말로 빠른 것이고 이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숨길 가운데 안반수의에서 이용하는 숨길은 합문, 개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로(氣路)를 폐쇄하지 않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숨쉬는 길, 공기가 들어가는 기도를 폐쇄하지 않고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로를 폐쇄하고 우연히 쉬다보면 사람의 신체부위에서 숨이 이렇게(그림 -점선) 돌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래되면, 차츰 이런 식으로 숨길이 옮겨가게 됩니다. 처음에 중심이 배가비 정도의 높이에 있는데, 차츰 이것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애를 씀에 따라서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단전호흡입니다. 이것은 안반수의나 불경, 또는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를 했던 축기를 하는 호흡법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나타나는 것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여기(관원, 명문)다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안반수의의 호흡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안반수의의 호흡은 철저하게 그 기로(그림-실선)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잣대뼈)을 설명하자면, 이 부분은 12개 -지금은 통상 9개 밖에 남아있지 않고 8개 남아있거나 10개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요. 9개 밖에 남아있지 않아도 그 밑에 곁가지로 남아있는 것을 다 합치면 모두 12개이긴 한데, 그것마저 11개인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원칙적으로 12개의 잣대뼈(가슴뼈)에 바로 붙어서 숨이 들어갑니다. 기도를 막아 버리면 자연히 기운이 이리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병증을 치료할 때 가끔 쓰는 법입니다. 이것에 따라서 공부하는 것을 선가에서는 무식(武息)이라고 합니다. 무식이라는 것은 바로 쇄문을 이용해서 쉬는 숨을 말합니다. 이처럼 기도를 이용해서 쉬는 숨을 문식(文息)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문무화후, 문무양근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문식이 기본이 되고 무식은 어쩌다가 쓰는 권도(權道)가 되는 것입니다. 임시방편으로 어떤 불가피한 경우에 쓸 수 있는 비일상적인 경우입니다. 
문식이 아닌 무식, 즉 비 안반수의 체계의 호흡은 잣대뼈를 타고 들어갑니다. 피부에서 굉장히 곳에서 들어가다가 여기서 막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뚫으면 이른바 '소주천'했다고 이릅니다. 이것은 쇄문의 소주천이고요. 이것을 뚫고 기운이 들어간 자는 빛과 닷의 합체에 의해서 들어간 것이 그대로 빛과 닷의 합체 그대로 남아서 그것이 조금 더 정교한 상태로 진화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상태로서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축기, 기의 축적입니다. 이것은 안반수의의 수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분해가 되어야 합니다. 들어가는 길은 그대로 기도를 통해 정상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만 나가는 것이 달라질 뿐입니다. 나가는 길을 익히는 것을 일종의 '오로무지'라고 합니다만. 이 들어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반드시 이궁에서 걸려서 그곳에서부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공기로서의 상쾌함을 놓치고 그 공기가 해체되어 기운으로서 들어갔을 때만이 다시 새롭게 여기서 합성되어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계속 생사가 거듭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한 호흡이 한 생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삶과 죽음이 바로 한 호흡에 달렸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문식(文息)에 달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식(武息)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식은 예법에 따라서 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무식은 유리한 면이 있습니다. 우연히 누워서 잔꾀부리고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도 우연히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혀를 예법에 따라서 이렇게 붙이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살짝 붙여보았습니다. 그러고서 숨을 들이미니 자연히 쇄문으로 숨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앞가슴으로 활 몰려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뚫으면 시원할 것 같아서 자꾸 하다보면 어느 날 뚫려 버려요. 뚫고 나니까 상쾌한 것 같고, 힘도 더 나고... 재미를 냈으니 점점 그리로 갈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는 남들은 보니 꼬질꼬질해지고, 그게 위대한 수행법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수행법은 예법에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혀로서 병풍을 치라고 하는 것도 일차 예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기도로 들어갑니다. 그 차이를 여러분은 여름과 겨울에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겨울에 이렇게 했을 때는 추위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집니다. 마치 변온동물이 된 것처럼 여름에도 그렇게 하면 덥지 않아요. 여러분이 아주 더울 때 이러고서 십분만 있어보세요. 몸에 소름이 확 끼쳐요. 안 더워요. 왜? 저절로 쇄문이 열리기 때문에. 조금씩 열리기 때문에.

대신 몸이 아파서 치료단계에 있는 분들은 가끔씩 너무 무리하지 않게 무식을 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슴에 꽉 막힌 것이 조금씩 내려가요. 그러다 어느 날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뚫립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아요. 열심히 하면 한달 만에 뚫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지고 인간 본래의 수행법이라고 해서 그것을 예법으로 꾸밀 정도로 그렇게 요란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일단 기로를 여는 데에 있어서의 예법이고, 이른바 평소에 숨을 쉬듯이 멈추지도 말고 특별히 욕심을 부리지도 말며 억지로 길게 하려고 하지도 말라는 불교 원래 수행법의 예법도 이와 같습니다. 이것을 뚫다보면, 즉 자꾸 무식을 하려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됩니다. 참으면 뚫리니까요. 다 뚫릴 때까지만 참으면 되는데, 그 다음엔 힘이 차근차근 쌓여 가는 것이 느껴지니까 자꾸 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치료에서 어쩌다 쓰는 것이지,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개의 합문을 이용하는 것이 일차 '회자정리 이자필반'의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수행은 이처럼 이미 만난 것은 헤어지게 하고 헤어진 것은 다시 만나게 하는 그것으로서 법을 삼아야 하고. 그것이 유학으로 말하면 의요, 선가로 말하면 이궁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이궁( 宮)이라는 것을 이렇게(離宮) 또는 이렇게(和宮) 쓰기도 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헤어지고 어울리고 하는 궁이 바로 이궁입니다. 그리고 그 성격상 천역괘를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에 불이 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입의 모양이 평소에도 이렇게 되어 있느냐 또는 반대로 되어 있거나 축쳐져 있거나 오무려져 있거나 하는 것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무려져 있어도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하는 지향성이 있습니다. 자신은 평소에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는가. '소학'을 실행하는 자는 반드시 입이 이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소학에 있는 제반 행위를 실제 실행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학십도'에 있는 제반 행위를 실행해도 이렇게 됩니다. 입에 병풍을 치게 되어있습니다. 병풍을 꺽어 치는 것이 아니라 병풍을 바로 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병풍을 쳤다가 추우면 잠시 이렇게 할 뿐입니다. 예전에 추울 때 입 모양을 이렇게 했었습니다. 추위 때문에 떨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버릇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를 많이 하므로 지켜야할 것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기도는 사람의 몸에서 상향적으로 팽창이 되어왔습니다. 이제 여기에 따라서 하나의 예법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숨은 들어갈 때 이 팽창은 굉장히 직선적으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중심 축은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할 때 등은 편안히 하고 허리는 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이렇게 해야하겠지만, 여기에 따르지 않고, 이것은 사람의 몸에는 참 힘든 거예요. 왜. 사람의 몸에 있어서 순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은 이렇게( ( ) 되거나 이렇게( ) )되거나, 이렇게(│) 꼿꼿이 서려고 합니다. 허리를 바로 하고 등을 편안히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은 데도 어렵습니다. (S자모양)이렇게 해 놓으면 어느새 위의 세 가지 모양으로 다시 가고는 맙니다. 대개는 ' ( ' 게 가게 되어있는데, 이것은 높임으로 가는 것입니다. ' ) '는 낮춤으로 가는 것인데요, 몸은 이미 상향 팽창을 하였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떨어지려고 합니다. 높은 것은 낮아지고, 낮은 것은 높아지게 하는 것이 회심곡에도 있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이 자세를 철저하게 유지하여야만, 이미 올려놓은 것에 의해서 이 몸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과 이 몸을 낮춰야 한다는 것, 이 몸의 상향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동시에 하향시켜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양면 결합( )의 예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올리고 한편으로는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미 밑으로부터 만나서 헤어졌던 것이 다시 이궁을 통해서 만나서 올라가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하고, 반대로 여기서 올라가는 것은 끊임없이 유지를 하는 것이 일차 숨법에서 또 하나의 외형적인 예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제대로 지키게되면 사람의 체상이 감괘상으로 됩니다. 사람의 체상은 8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소학적인, 이와 같은 예학을 지키면 그것은 반드시 사람의 서는 자세는 이렇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길을 무시하고 살게 되면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배를 중단으로 하고 가슴을 위로하고 다리를 아래로 했을 적에, 가슴이 앞으로 툭 튀어나오게 되는데, 이 모습은 수승화강을 철저히 무시했을 때 이런 모습이 되게 됩니다. 이러면 바로 심장에 무리가 오게 됩니다. 허리는 뒤로 빠지고 가슴은 앞으로 나오고 또 다리는 앞으로 막 나오게 되어 막 이렇게 걷거든요. 보셨을 거예요. 심장병 앓으시는 분들. 이 체상을 고치게 되면 심장병도 저절로 낫습니다. 물론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요, 병은 병대로 고치고 자세는 자세대로 고쳐야지요. 어째든 이와 같이 감괘의 체상을 지키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감괘상으로 걷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앉으면 뼈가 이렇게 되고, 숨을 쉬면 이렇게 쉬어집니다.
이것이 일단 몸으로 가는 안반수의를 실현하기 위한 몸에서의 예법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바로 우리 고유 수행법의 몸의 자세이고 몸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현대로서는 이 입천장에 혀를 붙이는 것만 하더라도 논리적으로 인간의 몸에서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하자면 혈이름을 이∼삼백 개는 들어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할 필요없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단 문식을 기본으로 하는데, 문식은 기도(氣道)를 중심으로 하는데 즉 합로(合路)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입에 병풍을 치는 것이 일차 예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기가 헤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막고 반드시 헤어지는 길로 집어넣고, 이것은 생사문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사생문을 통해서 올라오게 하는 것. 이것 때문에 우리 옛 수행법들은 반드시 이궁에서 숨을 멈추고 다시 이궁으로 하여금 숨을 집어넣게 하고, 집어넣은 숨을 다시 이궁에서 멈추어서 새롭게 들어오는 것과 교체시켜서 내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궁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전통의 호흡법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에 입각해서 숨은 기본적으로 들어오면 이궁에서 잠시 멈추고, 멈추어서 다시 집어넣었다가 이때는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때는 숨이 아닌 다른 것이 들어갑니다. 숨이라고 느껴도 좋습니다만, 다시 와서 머물면 여기서 새로운 것이 들어와서 합체가 되어서 교체해줄 것은 교체해주고 다시 나갈 것은 나가게 됩니다. 반드시 모든 것은 생사문을 통한다. 반드시 이궁을 통한다. 이궁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말고, 행하지를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이궁을 중심으로 해서 갈 때 외형적인 몸의 예에 대해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못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특별히 예외인 분들이 있습니다. 예외인 분들은 약간 있지만, 그런 분들이 오히려 수행에 더욱 마음을 내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맥에 해당되는 분들, 삼음절맥, 여성의 경우에 이십세가 안된 분들은 오음절맥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오음절맥이 없습니다. 남자의 몸으로는 오음절맥이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몸은 오음절맥이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여자의 몸이 조금 더 합리적이고 조금 더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째든 절맥에 해당되는 분들은 이처럼(S자 모양)해서는 안됩니다. 그분들은 꼿꼿이 세워야 합니다. 꼿꼿이 세워서 그 절맥을 바로 잡을 때까지, 다시 말해 몸의 일상 기운이 편해질 때까지 이렇게 하고 그 다음에 별도로 다시 이렇게 하면 됩니다. 대게 이( ( )처럼 하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더 어렵고, 오히려 이렇게(S자 모양)하는 것이 더 쉬워요. 그리고 절맥인 분들은 저절로 숙여져요.
지금까지는 몸의 두 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다음 시간에는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생각으로 숨을 이끌어들인다는 것. '의념'이라고 했는데, 생각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생각으로 숨을 이끌어 들이는 것이 무엇이며, 생각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이끌어 들이는 것인가. 이 생각의 실체가 무엇인가. 이 상(相)이라고 하는데, 상이 실제 생명체와 같다고 했는데, 이 상은 어떻게 생로병사를 거듭하는가. 이것의 생로병사의 결합체가 '나'이니까요. 이것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고, 또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에 이야기 나누는 것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준비를 해야 다음 기회를 장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주 목요일에 바로 상(相)의 실체를 가지고 안반수의를 매듭지어 가겠습니다. 다음시간까지 하는 것을 가지고 안반수의 공부하는 전체의 서문으로 삼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1. 5.17. 조계사교육원)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11) 

 

오늘, 안반수의경 강의를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귀결은 나름대로 자기 속에서 편가르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상과 관련시켜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상(相)이란 무엇인가. 상의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얘기를 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이 실제 무엇이며 상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가. 그리고 상과 실제 그것을 처리해 가는 법상(法相)의 관계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하는 점을 오늘 마지막시간으로 가지겠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모든 상을 단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아상(我相)이 될 것입니다. 아상이라고 하는 그룹 속에 이른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하는 갈래의 상들이 있었습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은 실제 아상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다고 했으므로, 실제 그것들은 모두 아상의 내부 갈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상이라는 것을 없애려고 아무리 해도 아상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왜, 아상은 참으로 실재하는 상이 아니라 비추어진 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있는 상이 아니라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처럼, 내 몸을 통해서 비추어진 그림자처럼 그림자로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이 그림자를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림자를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그 그림자를 비춰주는 본상(本相)을 없애지 않는 이상에는 아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본상이 없어지면, 거울밖에 비춰지는 내가 없어지면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이고, 마치 뜬구름처럼, 물거품처럼, 전기살처럼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햇빛이 쨍쨍 내리쬐어도 내 몸이 없으면 그림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비춰진 상이 아닌 실제 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상을 없애지 않고는 비춰진 이 아상, 그 갈래 속에 있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없앨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것의 실제 상은 무엇인가. 그것을 불경에서는 이름하여 신상(身相)이라고 합니다. 아상의 분류를 아, 인, 중생, 수자의 네 갈래로 나누었다면 신상은 32갈래로 나눕니다, 32의 신상으로. 32의 신상이 아상의 실제이기 때문에 이 신상을 풀지 못하는 이상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없애는 것이 더 우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신상은 어떻게 아상을 만들어 내는가. 신상이라는 것을 이야기 할 때 특징은 바로 닫힘입니다. 신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닫힘이고, 그 속성으로 말미암아 편견과 집착이 나옵니다. 왜 닫힘이냐. 어떤 닫힘인가. 우리가 밥 먹는 걸 가지고 비유를 해 보면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것만 생각하고 밥이 들어가서 나오는 것까지 전체 몸에서 겪는 행정은 잊어버립니다. 전체 과정 가운데서 한곳에만 집착을 하게 되고 그 한 곳을 가지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갇혀버립니다. 갇혀버림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증상이 어둠입니다. 갇힘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닫히는 것이고 닫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어두움, 즉 무명이 있다고 불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나 자신에만 또 닫혀버리니까 그 옆의 것이 없어집니다. 또 이 전체 과정에 의해서 또 닫혀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끊임없는 닫힘에 의해서 상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닫힘에 의해서 신상이 유지될 때, 무명이 유지될 때, 그 특징은 나름대로 몸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신상은 무엇을 기반으로 해서 사는가. 첫째, 믿음을 기반으로 해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인가. 우리가 몸에 대해서 안 믿고 있는 것 같지만, 앞서 밥을 갖고 이야기를 했으니까 다시 밥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밥을 먹을 적에 들어가는 과정을 한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어디 여행을 갔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무얼 먹을까, 어디서 먹을 까 고민을 하다보면 30분도 잘 갑니다. 그러다가 밥 때를 놓쳐버리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밥을 먹으면서 이 밥이 들어가서 어떻게 나올까에 대한 과정은 잊어버립니다. 일단 먹으면 그만입니다. 왜, 일단 먹으면 몸이 알아서 할거라고 자기도 모르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먹으면서 배출을 생각 안 하는 것도 몸에 대한 투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몸이 아플 때 약을 먹는 것은 약만 먹으면 몸이 알아서 나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몸에 대한 믿음, 그것이 신상의 첫 번 째 모습입니다. 나의 몸에 대한 믿음이 신상의 제일 첫 번째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그 다음에 무엇을 만드는가. 그것을 32상으로 나눴지만 32상에 대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길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믿음에 기반해서, 이제는 잃지 않고 이것을 유지하려는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욕망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욕망이라고 할 때 욕(欲)이라고 하는 것과 망(望)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도 앞에 펼쳐지는 것이 망입니다. 앞에 그냥 나타나는 것, 보이는 것이 망인데 비해서, 비춰진 것에 대해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욕이라고 합니다. 갖고 싶다, 없애고 싶다, 그대로 두게 하고 싶다 등. 마음이 일어나는 것, 앞에 보인 것에 대해서 그냥 본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일러서 욕심이라고 합니다. 이 욕심이 바로 무언가를 움직이려고 하는 자기의 의지적인 작용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신상의 두 번째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욕심에 의해서 사람이 바로 가두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가둠이 신상의 또 다른 뿌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두어지면 정말로 자기 눈앞에 자기의 욕망에 의해서 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집니다. 욕망이 머무르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열려있건만 자신은 끊임없이 열려있지 않고 닫혀있다 보니까 그 닫혀있는 범위 내에서 알음알이를 하게 됩니다. 알음알이를 해 가지고는 결국 자기 나름대로의 앎이 생깁니다. 그것을 일러서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있지도 않고 돌아가는 수많은 순환을 겪지 못하고, 순환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 과정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과정, 이른바 생로병사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상입니다.

이와 같은 신상을 가지고 지금까지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상을 가지고도 수많은 정신적인 철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흔히 불교에서 법상은 상이 아니지만 나의 신상으로 말미암은 그림자인 아상을 없애고 법상으로 간다 했을 적에, 자기 자신을 이른다고 할 때 여래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대개 한자화 되면서 공(空), 무(無), 허(虛)라고 표시가 됩니다. 이것은 불교가 얼마나 중국의 문화권에 있어서는 혁명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고유의 선가와 연결시킬 때에는 일맥상통해서 어긋남이 없지만, 중국의 기존 사상, 특히 중국의 원시 도가인 노자·장자의 사상과 대비하면 혁명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결코, 불교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닙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 장자 이런 것은 얼핏 생각하면 분위기가 불교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선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이단입니다. 왜, 불교에 의해서, 선가에 의해서 자기스스로 변형이 되어버린 후기 도가가 아닌 원래의 도가인 노자·장자의 도가는 이와 같은 것을 통해서 번역에 사용했던 내 마음속에 있는 주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사물은 전부 신상을 구성하는 물(物)로 구성되어 있고 이 물이라는 것은 또 물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서 이런 것에 기반해 있는 것, 이것을 체계화시킨 것이 이른바 오행(五行)이었습니다. 전통 선가나 불교는 오행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행을 사상의 중심에 놓지 않습니다. 왜, 오행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행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 서로 상극하다가 상생하다가 하는 이것이 바로 그 물건, 그 사람, 또는 그 생명의 본질이라고 보는 관점이 노자, 또는 장자입니다. 그러므로 오행에 해당되는 물질들이 모이면 존재하는 것이요 흩어지면 없는 것입니다. 실제 주인이 없다는 관점이 바로 노자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달관에 해당되는 노자사상입니다. 노자도 생명의 집착을 떠나서 달관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 달관에는 이와 같은 것이 해체되어서 여기에 매달리지 않고 나면 진정 아무 것도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전통선가와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행들끼리 모여서 무엇인가 생명을 이루고 그 생명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끌어 모으는 주체가 분명 존재한다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큰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체를 이야기하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적에 이것은 분명 텅 비어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행이 다 사라지고 나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 무엇을 번역을 하는데 번역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택된 것이 오행이 없어지면 아무 것도 없다라고 썼던 노자·장자 적인 개념에서 따온 것입니다. 불교에 등장하는 이 개념들은 따라서 진정한 불교의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게 번역이 되자 초기불교에 대해서 중국 사람들은 혼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도가 속에서의 공(空)이라는 개념, 무(無)라는 개념, 비어있다는 허(虛)라는 개념의 차원에서 불교를 이해했던 겁니다. 그런데 공(空)하다 하지만 실제 공(空)한 것이 아니요, 없다 하지만 실제 없는 것이 아니며, 비어있다 하지만 실제 꽉 차 있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다 보니까 이것 갖고는 용어가 부족하다 싶어서 한때 등장했던 불교의 용어가 중(中)입니다. 중론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나니까 중이라는 개념은 유가에서 워낙 요상하게 썼었습니다. 그래서 또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유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해를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엄밀하게 불교와 도교는 굉장히 거리가 멉니다. 뒤집어 말하면 원시도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신상, 이와 같은 몸들이 만들어내는 작용, 그리고 이와 같은 작용을 만들어내는 재료, 그것이 곧 사물이요, 사람이요, 생명이라고 여기는 사상입니다. 철저한 유물론적인 사상입니다. 다만 그 물질에 매이지 않고 진정 공으로 돌아갈 것, 그리하여서 모든 만물이 쉬게 될 것을 주장할 뿐입니다. 도가의 달관은 불가의 해탈과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현재 불교에서도 노자 장자의 그 본원이 유물론에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신상에 의해서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있었다면 불교, 선가는 이것을 다르게 이해합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신상으로 말미암은 아, 인, 중생, 수자라고 하는 아상을 버릴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한 전통선가에서는 그것을 다 버릴 것을 동시에 또한 비슷하게 요구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진(盡)입니다. 관, 하늘의 도(觀天之道), 내 속의 이 하늘이 가는 길을 보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 하늘 길을 잡아보려고 하는가(執天之行), 그렇다면 곧 이렇게 하라.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다하라(盡矣). 다 해 보라. 그대의 몸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라. 다 털어내 보라. 그러면 그대의 하늘을 보리라(見之者昌). 결코 텅 비어있지 않으며 결코 없지 않으며 결코 공하지 아니한. 이름하여 공이요, 이름하여 허요, 이름하여 무 일뿐. 결코 무도, 허도, 공도 아닌 진정 나의 하늘을 볼 것이니 라고 하는 관점에서 다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다해야만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이니 그 새로운 것을 세우리니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방법으로 이렇게 다하는 것. 즉 불교의 방하착심((放下着心), 집착되어 있는 마음을 놓으라고 하는 것 즉 버리라고 하는 것과 다하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의 우리말로 하면 버림이 될 것입니다. 놔버려라, 방편으로 놔버려라. 다 털어 내 봐라. 그래도 남아있는 건 분명히 있다. 다 털어 내 보지 못하고 나서 없다고 이야기할지는 모르나 정말 다 털어 낸 자가 어디 없다고 말할 것인가. 있다.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 목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빛날 창(昌)이라는 말을 씁니다. 해가 두 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환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창이라는 음가가 더 중요합니다. 창이라는 음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창문 할 때의 창. 그것은 안과 밖의 건물을 뚫게, 열리게, 通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사물을 찌르는 창, 그것은 막힌 것을 뚫는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창공 했을 적에는 서양개념으로 자꾸 blue sky를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blue sky가 아니라 동양에서는 하늘을 색으로 본 적이 있지 않고 하늘이 막혔다, 하늘이 뚫렸다 하는 개념입니다. 하늘이 맑다는 것은 저 먼 하늘이 나와 뚫려 있다. 뻥 뚫려 있는 하늘, 그것이 창공입니다. 개념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할 때 쓰는 모든 용어들. 그 뿐만 아니라 자전에서 창(昌)자를 찾으면 창(昌)자는 거의 통하다라는 기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웁니다. 무엇과 무엇이 통할 것인가. 내 속에는 다섯 가지의 도적놈이 있다(天有五賊). 내가 이것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도적놈인 건 도적놈인 겁니다. 내가 여기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고 해서 내가 이걸 도적놈이 아니라고 그러면은 다음에는 결코 이번 생을 마감 짓고 다음 생에 다시 올 때는 결코 수행자의 인연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번 생에는 이렇게 오행을 상생시켜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나한테는 궁극적으로 도적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도적놈 밥 먹고 살아간다. 이번 생은. 그러나 도적놈 밥이라는 것은 내가 분명히 알고 간다라고 했을 때는 사람의 인생은 끊임없이 다시 하는 길로 순환해 갈 겁니다. 아무튼 오행이라는 다섯 도적놈이 있는데, 이 도적놈이 하는 소행을 알게 된다면 통하리라. 그래서 이 다섯 도적놈이 있는데 이 다섯 도적놈을 알아야 된다. 알고, 버리고 결국은 방법과 목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양립하는 방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통해서 알아가고 끊임없이 넓게 갇히지 않고 무명을, 이 어두움을 헤치고 나가보라. 끊임없이 어두움을 헤치고 나가는 앎과 앎이라기보다는 결국은 헤아림, 살핌이 될 것입니다. 지(知)의 원래 움직임이 그런 것이지만. 그리고 또한 하나의 버림입니다. 실제로는 버림의 방법으로는 낮춤이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버림과 살핌 낮춤과 살핌, 이것을 함께 양립시켜 감으로써 결국은 진정한 중 또는 진정한 나, 진정한 사람하늘, 우리말로 하면 공, 무, 허 하는 것은 약간 괴리가 있지만 다 알과 얼에서 대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이를 수 있다. 아라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다함으로써 버리는 버림(盡)과, 끊임없이 밝음을 지키고 키워 가는 그 지킴(昌)의 조화로써 공부는 있다고 선가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불가도 또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를 고루고루 해 나가는 것. 그것이 공부겠지만, 문제는 믿음이니, 욕심이니, 가둠이니 무명이니 생로병사니 하는 신상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아주 재미있는 하나의 특징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32신상의 하나같은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참 이렇게 삼매에 든다고 할 정도로 고요하기가 쉽습니다. 언제,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때. 어떨 때,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때. 그나마도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열중하고 있을 적에, 열중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만 살펴보면 무언가에 빠져있을 적에는 마음이 고요합니다. 집에서 온갖 고민을 하다가 에이, 안되겠다 설거지나 하자해서 설거지를 열심히 하다보면 마음이 고요해져 있습니다. 설거지에 빠진 것입니다. 설거지삼매에 빠진 것입니다. 가능한 얘기고 다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또는 모든 고민이 일어나니까, 아이구 어떡하나, 그냥 걷기나 하자 걷는 건 좀 힘이 듭니다, 잘못하면 요즘 같은 때는 바로 어디에 깔리니까. 그래서 뭐든지 이렇게 일상생활에 열중해서 집착하다 보면 아무런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빚 생각도 없고, 뭐 명예걱정도 없고, 내일 쫓겨날까봐 걱정도 없고, 못 먹는 걱정도 없고 다 잊어버립니다, 그 순간만은. 그래서 일체 그 생각 외에는 그 순간에는 자기 아버지 생각도 없고 자기 애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정말로 삼매, 또는 준삼마디에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상의 특징이 바로 움직일 때만 철저하게 집착하게, 빠지게 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설거지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거의 삼매에 빠지던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움직이지 않고 좌정을 하고 앉으면 더 고요해져야 할 텐데 마음에 없던 엉뚱한 것이 다 생각나는 겁니다. 앉아보셨을 때 명상을 비슷하게 해보셨을 때 다 아실 것입니다. 심지어 나중에 왜 이럴까 하다보면 왜 이럴까가 노래가 되어 내가 왜 이럴까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고요할 때에는 집착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신상의 하나같은 특징입니다. 그러면 움직일 때(動)는 잘 이렇게 집착해서 이건 집착이라고 하고. 불교에서 이렇게 움직이면서 삼매에 드는 준 삼매적인 현상을 착(着)이라고 합니다. 고요한 가운데(靜) 드는 삼매 또는 준 삼매적인 것을 일러서 정(定)이라고 합니다. 개념이 다릅니다. 이렇게 착하면 삼매적인 상황에 잘 들어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오행상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는 나를 어떻게 하면 오행상을 버려갈 수 있을 것인가. 낮춘다, 차례대로, 차별없이 라고 했는데, 그것의 한 가지 특징은 버림입니다. 버리기 위해서 낮추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은 정치적인 사기입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 이것은 정말로 버리면서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추기는 하나 버리지 않는 것은 음흉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버려야 되는데, 움직이면서 버리는 무언가의 방법을 내놓지 않으면 수행이 안 되는 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수행한다 했을 때에 스스로 통하기 위해서, 버리기 위해서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이 과제를 단 한칼에 해결해 버린 것이 바로 전통선가와 불교가 지금까지 쓰고 있었던 절입니다. 오행 상을 가지고 그것을 세계관으로 여겨왔던 도교나 이런 데는 없는 것입니다. 도교에는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 살펴보면 없습니다. 있는 데 모양이 다릅니다. 후대에 와서 도교가 변질되면서 추가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원래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절입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에서 착이 아니라 정이 되는 유일한 동작이 절입니다. 그러므로 절을 하되 진정 버리지 않으며 또한 진정 살피지 않는다면 즉 이 두 가지를 병행하지 않는다면 절을 절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절은 흔히 낮추는 거라고만 생각하기 쉬우나 결코 낮춤에 그치지 않습니다. 절은 한편으론 낮추고 한편으론 헤아리는 방편입니다. 헤아리지 않고 낮추어서는 안될 것이고 또한 헤아리기만 할 뿐 낮추지 않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헤아리기만 할 뿐 낮추지 않는 것, 끊임없이 낮추기만 할 뿐 반대로 헤아리지 않는 것은 절이 아닙니다. 낮추는 걸로만 이야기해보면 내 몸을 낮추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도 될 수 있겠습니다. 머리를 낮추는 것으로 하자면 물구나무서면 하나 낮추는 것일 겁니다. 두 번째는 뒤로 화딱 누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엎어지는 겁니다. 근데 절은 엎어지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고 우리 신체에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의심을 안 하고 있지만 수행의 의미에서는 엎어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워서야 무엇을 헤아리겠습니까. 절의 의미는 나 자신을 엎어 끊임없어 낮추어 버리면서, 동시에 그 버리는 대상을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땅으로부터 받은, 땅과 내가 한 몸으로 되어 있는 그 오행의 모습들을 살피는 것을 한꺼번에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구니를 버리고 살피고, 한편으론 살피고 살핀 것은 버려지고. 살핀 것은 버려집니다. 버림의 대상이 결국 오행에서 오는 신상이고 그 특징이 욕망이라면 또 다른 특징은 분명 무지입니다. 무지, 무명. 몰라서 그렇습니다. 알고 나서 집착하고 욕망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권력이 저러한 것인데 라고 알고 나서 거기에 매달리고 욕망을 내는 사람은 권력에 대한 맛만 알았을 뿐 권력을 참으로 안 것이 아니며, 제물을 욕심내는 사람은 제물의 맛은 무엇인지 알았을 지라도 제물이 갖고 있는 그 인과가 진정 무엇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고 나면 다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알고 나서도 못 버리는 것은 몇 가지 안됩니다. 대개는 제대로 몰라서 못 버리는 겁니다. 왜 제대로 모르는가. 이것은 자신의 앎이, 자신의 헤아림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체 과정 속에서 여기만 보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이 음식이 들어가서 이런 결과를 맺는다, 이렇게 들어간 것은 이렇게 나오고 이렇게 왕래해간 것은 이렇게 왕래해온다 하는 것을 다 알면 아는 것입니다. 절대 욕망이 안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끊겨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유학에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이 어떻게 거쳐가는지를 살피며 그것이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를 헤아린다면 무엇을 숨길 것인가. 무엇이 어두움일 것인가, 무엇을 모를 것인가. 이 전체를 다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삶이 있으면 삶을 보려고 하고, 달콤한 것이 있으면 달콤한 것을 보려고 하고, 내 처지가 있으면 내 처지를 보려고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운 것만 보려고 하고 세상이 달콤하면 또 달콤한 것만 보려고 하고. 무언가 하나에 매여있을 때 이 매여있는 것으로부터 가둠을 넘어가는 앎의 방편으로서, 살핌의 방편으로서 있는 것이 바로 뒤집음입니다. 일단 전체를 알려고 하나 모르겠으니까 어떻게 하는가. 이것의 반대 면을 보라는 겁니다. 반대 면을 보게 되면 이것에 서로 부딪치고 어긋나고 하는 틈바구니에서 매듭이 지어집니다. 이것이 한 곳에 갇히지 않고 가둠을 벗어나서 무지를 벗어나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서 욕심을 버리는 길입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욕심을 가지는 겁니다. 진정 안다면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이 잘못되면 또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버림이라든가 어거지 낮춤이라든가 하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헤아림과 서로 걸맞지 않는, 그래서 가정도 버려야 되나요, 뭐도 버려야 되나요, 당장 오늘부터 밥도 먹지 말아야 되나요 하는 생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먹지 말아야 될 수도 있고 먹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거지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수행력이 잘 되어 있어도 어거지가 되면 안 됩니다. 금강경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한번 금강경으로 돌아가면 그렇습니다. 제일 먼저 장로 수보리가 일어나서 질문을 합니다. 스승이시여, 선남자 선여인들이 정정으로 말미암은 정정지(靜定智)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먁三菩提)의 마음을 냈다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이면 응운하주(應云何住)며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이라고 묻습니다. 선남자 선여인은 핑계를 대고 물은 겁니다. 선남자 선여인이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실은 자기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스승이시여 제가 지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먁三菩提)를 이루고 싶어서 마음이 지금 안달이 났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조금 점잖게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먁三菩提)의 마음을 일으키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가고 물은 겁니다. 그만큼 그의 수양이 이루어져 있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물으니까 딴 소리만 하시는 겁니다. 세상에는 상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이 크게 보면 아상인데 아상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다 아상인데, 이 아상은 신상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상은 다 기본적으로는 욕망이다. 욕망은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해서 주욱 설명을 해줍니다. 13편까지. 설명을 주욱 하니까, 13편까지 설명을 듣고 나서 질문을 했던 장로 수보리는 깨달아버렸습니다. 아. 내가 욕심을 내었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발심도 욕망이었구나. 신상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진정 지혜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충분히 버림과 헤아림을 통일해가면서 다만 살아갈 뿐 욕망을 내지 않고 해나가는 그 길이 아니요, 나는 안달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 안달심이 내가 이만큼 수행이 되어서 장로가 되었는데도 아직 헤쳐나가지 못한 나의 병이었구나를 알아버립니다. 14편에 이르러서 장로 수보리가 눈물을 흘리고 콧물도 흘리면서 스승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이 인생유전해서 여기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이처럼 깊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의 의문을 풀어버립니다. 장로 수보리는 드디어 아라한을 넘어가 버린 겁니다. 진정 정정지(靜定智)의 직전 단계에 안개처럼 한 토막이 갇혀있던 것을 뚫고 가버린 겁니다. 장로 수보리는 엄청나게 금강경에 해당되는 내용을 부처님으로 하여금 설하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간절한 이야기를 설하게 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설하게 할 정도로 그 사람의 수행의 단계는 지금 막바지에 가 있었을 겁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에 가 있었을 겁니다. 스승이시여 저는 꼭 가야 되겠습니다. 죽이시든가 살리시든가 이것이 기로입니다. 저는 알아야겠습니다. 하니, 그것을 한마디로 설파한 것이 금강경입니다. 그처럼 수행을 한다 하면서 어거지 수행심을 내서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그것이 또한 버리는 욕망입니다. 착심도 욕망이요 착심을 버리는 것도 욕망입니다. 앞서 말하기를 욕과 망이라 하면서 저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망할 뿐인데 욕한
아무튼 안반수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그 서문 격에 해당되는 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상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몸에서 오는 것, 진정 상이라는 것은 몸을 떠나면 없는 것, 몸을 떠나서도 있는 상이 있다면 이름하여 법상이니 그 법상은 이미 상이 아니라 상들을 무찌르는 힘일 뿐이다. 그 힘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 힘을 나의 하늘이 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을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나임을 믿을 것에 대한 믿음과 이것에서부터 온 힘을 키워가는 것만이 나의 소유임을 확연히 하고 그 모든 것은 방편으로 삼는 것, 그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을 드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안반수의의 이야기를 부족한대로 정리를 올렸으면 합니다. 정리를 올리면서 저도 마음이 한편 개운치 않음을 느낍니다. 처음에 열두번 하면서 같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부분이 다 얘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돌아 생각하면은 다 얘기되기도 어려웠던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그래서 그 요지, 마음에 대해서만 얘기를 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기는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처럼 하고 나서 올해 이 여름을 계기로 하고 나서 한 일년 반정도 바나리의 이 강회모임은 없습니다. 늘 그래왔습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으면 인연을 함께 나누는 인연이 싹트는 기간이 필요할 뿐 자꾸 자꾸 알려가서 엉뚱한 얘길 하면 언젠가는 거래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내 하늘로부터 내 과거로부터 더 먼 과거 내가 받았던 인연으로부터 온 이것들이 어떻게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이제 이와 같은 강회는 정리를 하고 한 일년 또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때까지는 이렇게 인연 지어진 분들끼리 싹을 붙이고 키우고 하는 지금까지는 앞에와 통해서 이렇게 봤다면 이제부터는 옆에 있는 분들끼리 서로 한 세상에 있다는 것을 또한 나눌 때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익히는 세월이 지나가고 다시 언젠가 싹이 한번 나올 수 있을 때 그 때를 기다리면서 강회는 전체적으로는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작년 부도지, 올해 안반수의까지 관여했고 오셨던 분들에 한해서만 앞으로 일년이든 일년육개월이든 같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러한 공부의 기회는 마찬가지로 조금 쉬고 나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그리고 우리가 지식의 면에서 나눌 수 있는 것도 함께 우리의 무지를 깨고 우리가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의 상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그 강회는 이제 형식을 바꾸고 싶습니다. 한 서너 분들에게 다음 강회가 있을 때는 늘 서너 분들에게 아무거라도 좋으니까 평소에 또는 깊이깊이 생각을 하다보니까 마음에 걸려있는 의문들을 준비해서 그것이 지식인 것도 상관없고 또한 마음에 해당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준비해서 그 질문을 받고 그 질문을 가지고 한 두 시간 같이 나누는 그런 방식으로 강회를 해봤으면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해가는 것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질문으로 오더라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제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서 대답을 하겠습니다. 다만 그 때 그 때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공부과정 속에서 진정 소중하고 간절한 것들을 끄집어 내 주셨으면 할 따름입니다. 그 간절한 것들은 아마 다른 분들에게도 같이 간절한 것일 테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제목을 걸고 함께 만났던 강회의 시간은 오늘로써 매듭을 짓겠습니다. 그 동안 어설픈 횡설수설을 마다 않고 들어주신 고마운 분들에게 이렇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도지 (1강 - 7강)


인체철학 (1강 - 8강)


안반수의경과 인체철학
(1강 - 11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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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자의 변 ;

이 블로그의 주인으로서 이 블로그는 순전히 수행을 위한 길잡이들을 모으려고 한 것입니다. 

안반수의경은 철학서가 아닙니다.

안반수의는 수행지침서의 근본이고 여기에 그 어떠한 철학적 견해를 짜깁기 하는 것은 번쇄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고타마 싣달타가 제세시 그랬듯이 수행은 간단하고 쉬워서 범부중생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오랜 세월 시대적 사상의 근본을 이루어 나갑니다.

 

이 글을 읽어보면 마치 함석헌의 바가바드 기타 해설과

그의 제자 류영모가 해석한  성경을 읽는 기분입니다.

옛 것을 상고하되 그 시대에 부응한 적합한 글들이 민생의 사랑을 받습니다.

 

위의 글을 퍼 와서 다시금 정리하면서 이 글의 잡다함을(물론 제 본인의 견해지만) 인식했고

이것은 본래의 취지와 몹시 어긋남을 느껴 삭제하고픈 심정이 자주 들었지만 사람마다 근기가 다름으로

혹 어떤이에게는 수행의 기본에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 올려 둡니다.

부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길 ~ 

2014년 1월 23일

출처 : nirvana
글쓴이 : 무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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