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스크랩] 아함경 이야기 -차례-지은이의 말

수선님 2018. 5. 6. 13:06

아함경 이야기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 지음.
                                                                                          이원섭 옮김.
                                                                                            현암사 出.

 


☆ 지은이의 말 

 

1. 그 사람
      (1) 석가족
      (2) 정각(正覺)
      (3) 보리수 밑에서의 생각
      (4) 첫 설법
      (5) 네 가지 진리
      (6) 전도(傳道)
      (7) 인간성

2. 그 사상
     (1) 눈 있는 이는 보라
     (2)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것
     (3) 내재하는 방해물
     (4) 연기(緣起)
     (5) 이는 고(苦)이다
     (6) 이는 고(苦)의 멸(滅)이다
     (7) 나도 밭을 간다
     (8) 열반(涅槃)
     (9) 불방일(不放逸)
     (10) 문답식

3. 그 실천
     (1) 착한 벗
     (2) 정사(精舍)
     (3) 포살(布薩)
     (4) 법좌(法座)
     (5) 삼보(三寶)
     (6) 이타행(利他行)
     (7) 불해(不害)
     (8) 자비(慈悲) 깨달음의 의미

☆ 후기....

 

 

 

☆ 지은이의 말


  

 

 불교는 일본에 두 번 전래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의아한 표정을 지으실 분도 적지 않겠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다. 서기 538년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이래 끊임없이 수용의 노력이 계속되어, 1654년 명(明)나라의 중 은원(隱元)에 의해 황벽종(黃檗宗)이 들어옴으로써 그 첫 번째 매듭이 지어진다. 그것은 천 년이 훨씬 넘는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었거니와, 그 동안 일본에 전해진 것은 한국을 통해 들어온 것까지 포함하여 중국의 불교에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받아들인 것은 중국어로 번역된 경전이었고, 중국화된 종파였고, 중국 승려들이 쓴 주소(注疏)였으며, 일본의 선인들은 그 밖의 불교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가 되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1876년 난조 후미오(南條文雄)와 가사하라 겐주(笠原硏壽)라는 두 젊은 학승이 영국에 건너가서 산스크리트(梵語)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잇따라 다른 학자들에 의해 팔리 어(聖語) 공부도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일본에도 그런 언어를 통해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흘러 들어왔다. 특히 팔리 어로 기록되어 실론(스리랑카)에 전승되어 오던 이른바 '팔리 삼장(三藏)'은 중국 불교가 돌보지 않던 원시 불교의 모습을 정연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나는 이것을 두 번째의 불교 전래로 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 들어 온 이것들은 과거의 불교와는 전혀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 들어온 불교의 중심 부분을 흔히 '팔리 오부(Pancnaikaya)'라고 부른다.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편집되어 있는 까닭이다. 또 그것들을 일괄하여 '아가마(Agama)'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는 것'이라는 뜻으로서, 전승되어 오는 경전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의 역경승들은 그것을 음사하여 '아함경'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그들도 또한 대체로 '팔리 오부'에 해당하는 것을 번역해 냈다(제5부에 해당하는 부분이 빠짐). 397년부터 435년에 이르는 기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한결같이 이 경전들을 돌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아함경』은 중국의 불교사에서 한 번도 중요한 구실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불교를 연구하여 경전 비판을 새롭게 한 결과 이 『아함경』(한역의 네 아함경도 포함)만이 불교의 근본 성전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불교 연구를 하고자 할 때, 붓다의 가르침을 그 원래의 형태대로 전하는 경전으로서 학문적으로 음미할 만한 것은 이 경전들 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 일찍이 붓다는 무엇을 설했던가, 그리고 어떻게 말했던가, 그것을 있던 그대로 알고자 한다면 이 경전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경전을 돌보지 않아TEjs 중국과 일본의 불교인들은 원시 불교 즉 붓다의 사람됨과 그 사상의 진상을 전혀 몰랐던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 오랫동안 불교의 영향 밑에 있었으면서도,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교조 붓다의 본래의 면목을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이 『아함경』만이 불교의 근본 성전임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먼저 이 경전의 성립 역사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붓다가 돌아가신 직후의 일이었다. 그 죽음을 비구들이 다 함께 슬퍼하고 있는데, 한 늙은 비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폭언을 내뱉었다.

 

   " 벗들아, 근심하지 말고 탄식하지 말라. 우리는 이제야 저 대사문(大沙門 : 붓다를 가리침)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닌가!  저 대사문은 참으로 시끄러운 분이시었다.
' 이 일은 너희에게 알맞고 이 일은 알맞지 않다.' 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혀 왔거니와, 이제 그 대사문은 안 계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이 말을 모두 침묵한 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폭언은 그들에게 격렬한 충격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붓다가 돌아가신 지 석달이 지난 다음, 마가다 국의 서울 라자가하(王舍城)에 모여 몇 달에 걸쳐 스승이 남기신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結集)하기에 이르렀다. 이단 사설이 만연되기에 앞서, 바른 가르침을 확립해 두고자 한 것이겠다. 바로 그것이 현존하는 『아함경』의 원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경전 수효를 합치면 수천에 이르거니와, 그것들은 대개 매우 간결한 것이 특색이며 내용도 대체로 구체적이고 교훈적이다. 이렇게 짧은데다가 교훈적인 것이 되고 만 까닭은 붓다가 사람들과 문답한 말씀이 그대로 거기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읽어 가노라면 붓다의 모습을 눈으로 우러러보고, 말씀을 직접 귀로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약 이것을 기독교 문헌에 비교해서 말한다면, 신약의 복음서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이 경에 나타난 문답식 방법을 후세 사람들은 대기 설법(對機說法)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소질과 문제, 때로는 그 장소와 시기에 따라 거기에 적절하도록 자유로이 말씀해 간 까닭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말씀이 다기 다양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무작정 이 경을 읽어간다면, 아마 망양지탄(亡羊之嘆)을 금할 수 없게 되리라.
그러나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이 경을 대해 나가다 보면 그 잡다한 듯한 내용이 뜻밖에 정연하고 단순한 원리에 의해 일관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붓다가 저 보리수 밑에서 깨달으신 진리, 즉 정각(正覺)의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 내용을 나는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경에 나오는 붓다의 설법 방식이 학자와 비슷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생의 교사 같다는 점이다. 그는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어디까지나 사람에 따라, 문제에 다라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이 붓다의 설법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그 원리가 몸에 배어 그것을 생활 속에서 살려 낼 수 있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지혜(Panna)인 것이다. 또 그렇게 하여 파악된 원리가 인간 관계 속에서 실현될 때, 그것이 그대로 사랑(metta)일 것임이 명백하다. 이 경에 '지혜와 사랑의 말씀' 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붓다는 어떻게 이런 원리르 fRoekf을 수 있었던 것인가?
또 붓다를 따르던 사람들은 어떤 가르침을 받아 그 지혜를 체득할 수 있었던가?  나는 이제 이 아함경전 중에서 수십 개의 경을 취택하여, 경 자체의 가르침을 음미하고자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견을 덧붙여서 우리 현대인의 생활과 연결해 보고자 한다. 오늘의 현실에서 사람들을 참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지혜와 사랑 외에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지혜와 사랑의 해맑은 이론과 본보기를 가장 먼저 확립한 분은 이 사람 붓다 고타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마스터니 후미오(增谷文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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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함경 이야기 > - 마스타니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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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자모임광장
글쓴이 : 일 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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