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삶
(1)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에겐 적당히 게으르고 싶다.그러나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1)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依食) 이 부족하고,
2) 사업을 사람은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3)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출가한 보람이 없으며,
4) 모든 좋은 일은 정진 하는 사람에겐 정진도 이름뿐이며,
5)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가정이 빈궁할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하면 다음과 같은 복덕이 생긴다.
1) 집에있으면서 부지런히 살면 의식이 풍복하고,
2) 사업을 하는 사람이 부지런하면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3) 출가한 이가 부지런히 정진하면 출가한 보람을 얻게되고,
4) 좋은일을 하는 사람이면 부지런함으로서 좋은일에 더욱 빛나게되고,
5) 집에있으면서 모두가 정진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부해질것이다.
《보살본행경》*** 경전의 말씀을 분류한것임.
불교를 믿는 첫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발심한 그 마음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일이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해야 하는가?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근본을 믿음이니,
진여(眞如)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동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삼보(三寶)라 한다.
삼보는 불교와 같은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 하는데
모든 불교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항상 삼귀의례를 올린다.
부처님께 귀의한다 함은 법신(法身)에 귀의함이니,
온갖 지혜를 다 갖추고 더 배울 것이 없으며
여러 공덕으로 이루어진 몸을 뜻한다.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나와 남이 다한 곳에 귀의함이니,
즉 애욕을 끊고 애욕이 없어져서
적멸인 열반에 이르는 진리에 귀의함을 뜻한다.
스님들께 귀의한다 함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에게 귀의함이니,
즉 좋은 벗과 복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올마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불교인으로 바른 신행을 해야한다.
원효 스님은 첫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신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삶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는가.
《발심수행장》
(2) 자신을 낮추고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이다.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더 더욱 그렇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그 어느 누가 나를 보고 멸시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심 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절에 다니는 횟수가 깊어질수록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하며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겸손한 마음을 잃고 스스로 아상(我相)을 높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최고라 우쭐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이이며,
특히 불자에게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서 교만심을 버려야 할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스님들이
탁발하여 생활을 하는 것도 다른 이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위해 정진하고자 함이었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3) 생활을 반성하며
우리가 불교를 믿고 행하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 판단을
그르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명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수희)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기신론》
참회(懺悔)는 수행의 길에 중요한 것이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ㆍ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요, '회(悔)'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신는 짓지 앟겠다는 결심이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허물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허물에 대해 살필 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연이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허물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다면
곧 뉘우쳐야 하는 것이다. 즉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부끄러워하여,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반드시 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리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졸았다.
부처님께서 법회가 끝난 뒤 아나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뚠눈으로
계속 정지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나로
심각해져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증일아함경 역품(力品)》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잇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반성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 속에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스스로의 허물을 발견하면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말하고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삼배ㆍ백팔배ㆍ천팔십배 ㆍ
삼천배를 하여 참회하는 것이 좋다.
지붕을 성글게 이어 놓으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이 새듯이
마음을 조심해 간직하지 않으면
탐욕은 곧 이것을 뚫고 만다.
《법구경》
(4) 끊임없이 정진하라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 없이 정진해 가는 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결심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변하기 쉽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깨닫지도 못할 것, 차라리 다른 일이 낫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마음에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잡아함경》
소오나 비구의 생각처럼 우리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없이 정진해 나가야 한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만 굳게 행하면
우리의 발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야 한다. 한편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결심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하찮게 보지말고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때,
낙수가 떨어져 돌을 뚫는 것과 같이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한량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장아함경 유행경》
(1)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에겐 적당히 게으르고 싶다.그러나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1)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依食) 이 부족하고,
2) 사업을 사람은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3)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출가한 보람이 없으며,
4) 모든 좋은 일은 정진 하는 사람에겐 정진도 이름뿐이며,
5)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가정이 빈궁할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하면 다음과 같은 복덕이 생긴다.
1) 집에있으면서 부지런히 살면 의식이 풍복하고,
2) 사업을 하는 사람이 부지런하면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3) 출가한 이가 부지런히 정진하면 출가한 보람을 얻게되고,
4) 좋은일을 하는 사람이면 부지런함으로서 좋은일에 더욱 빛나게되고,
5) 집에있으면서 모두가 정진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부해질것이다.
《보살본행경》*** 경전의 말씀을 분류한것임.
불교를 믿는 첫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발심한 그 마음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일이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해야 하는가?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근본을 믿음이니,
진여(眞如)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동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삼보(三寶)라 한다.
삼보는 불교와 같은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 하는데
모든 불교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항상 삼귀의례를 올린다.
부처님께 귀의한다 함은 법신(法身)에 귀의함이니,
온갖 지혜를 다 갖추고 더 배울 것이 없으며
여러 공덕으로 이루어진 몸을 뜻한다.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나와 남이 다한 곳에 귀의함이니,
즉 애욕을 끊고 애욕이 없어져서
적멸인 열반에 이르는 진리에 귀의함을 뜻한다.
스님들께 귀의한다 함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에게 귀의함이니,
즉 좋은 벗과 복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올마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불교인으로 바른 신행을 해야한다.
원효 스님은 첫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신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삶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는가.
《발심수행장》
(2) 자신을 낮추고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이다.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더 더욱 그렇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그 어느 누가 나를 보고 멸시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심 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절에 다니는 횟수가 깊어질수록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하며 처음 발심했을 때의
겸손한 마음을 잃고 스스로 아상(我相)을 높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최고라 우쭐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이이며,
특히 불자에게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서 교만심을 버려야 할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스님들이
탁발하여 생활을 하는 것도 다른 이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위해 정진하고자 함이었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3) 생활을 반성하며
우리가 불교를 믿고 행하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 판단을
그르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명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수희)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기신론》
참회(懺悔)는 수행의 길에 중요한 것이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ㆍ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요, '회(悔)'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신는 짓지 앟겠다는 결심이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허물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허물에 대해 살필 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연이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허물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다면
곧 뉘우쳐야 하는 것이다. 즉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부끄러워하여,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반드시 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리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졸았다.
부처님께서 법회가 끝난 뒤 아나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큰 허물을 뉘우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뚠눈으로
계속 정지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나로
심각해져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증일아함경 역품(力品)》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잇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반성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 속에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스스로의 허물을 발견하면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말하고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삼배ㆍ백팔배ㆍ천팔십배 ㆍ
삼천배를 하여 참회하는 것이 좋다.
지붕을 성글게 이어 놓으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이 새듯이
마음을 조심해 간직하지 않으면
탐욕은 곧 이것을 뚫고 만다.
《법구경》
(4) 끊임없이 정진하라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 없이 정진해 가는 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결심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변하기 쉽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깨닫지도 못할 것, 차라리 다른 일이 낫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마음에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잡아함경》
소오나 비구의 생각처럼 우리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없이 정진해 나가야 한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만 굳게 행하면
우리의 발원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야 한다. 한편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결심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하찮게 보지말고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때,
낙수가 떨어져 돌을 뚫는 것과 같이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한량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장아함경 유행경》
출처 : 대불법회
글쓴이 : 장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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