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대론 / 문을식
- <밀린다팡하>에서 윤회설을 둘러싼 무아설과 그리스 영혼관을 중심으로-
불교평론[11호] 2002년 09월 10일 (화) 문을식 candra21@hanmail.net )
1. 서론
1) 《밀린다팡하》의 성립
《밀린다팡하》는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팔리어로 Milinda)와 비구승 나가세나(Nagasena)와의 대론(對論)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팔리어로 기록되어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에 전해오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와 한역되어 한국, 중국, 일본에 전해오는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의 두 가지가 있다.
《밀린다팡하》는 서문(1편)과 본문(6편)을 합해 7편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반해, 《나선비구경》은 《밀린다팡하》의 1편(서문)과 2, 3편으로 이루어졌으나, 서문 부분은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밀린다팡하》의 나머지 4, 5, 6, 7편은 후대에 부가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의 성립과 편집에 관한 원전 비판의 연구 및 번역은 1880년 트렌크너(V. Trenckner)의 비평적 교정본의 출판을 계기로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선비구경》의 A본(2권본)과 B본(3권본)에 기초한 팔리문과의 비교하여 연구한 결과,
《밀린다팡하》는 원형 부분과 후세에 증광되고 부가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판명되었다. 혹은 이것을 고층과 신층의 두 부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원형 부분은 트렌크너본의 서문과 문답을 포함해 89페이지 부분이다. 이것은 앞에서 기술한 《나선비구경》과 거의 일치한다. 팔리본과 한역은 각각 유통 과정을 달리하고, 내용적으로도 세부적으로 서로 다른 점이 발견된다.
특히 후세에 윤색되고 부가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는 서문의 모습은 양자의 책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한쪽의 전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일본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씨는 원형의 성립을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로 잡고, 증광된 과정과 그 연대를 논증하고 있다.4) 미즈노 고겐(水野弘元) 씨는 이 책이 팔리어로 정리된 연대를 기원후 1세기 전반 또는 그보다 이전이라 한다. 그리고 처음에 서북 인도에서 제작되어 인도 동부의 마가다 지방에서 팔리문으로 개변되고 증광되어 스리랑카에 전해졌다고 본다.5)
2) 구성
이 책의 구성은 트렌크너본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처음에 서문 부분(T. 1∼25)이 있다. 이 부분은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 두 사람의 전생 이야기(Ja?aka)에 해당한다. 밀린다 왕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 이야기와 나가세나 비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전생 이야기를 서술했다. 팔리본의 전생 이야기는 밀린다 왕이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책 이름이 《밀린다팡하》, 즉 《밀린다 왕의 물음》으로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한역 《나선비구경》은 나가세나(那先)의 전생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이 부분은 둘 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고층 부분(2, 3편)이 성립한 뒤에 부가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본론에 들어가서, 나가세나 비구와 밀린다 왕의 대론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제1회의 대론은 T. 25∼64에 해당하고, 제2회의 대론은 T. 65∼89에 해당한다. 이 제1, 2회의 대론 부분이 고층이고, 또 《나선비구경》과 대응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신층 부분으로 난문(難問) 부분(T. 90∼326)이 있다. 난문이란 모순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여기서는 양도논법(兩刀論法)의 질문을 말한다. 그 다음은 추리에 관한 물음 부분(T. 329∼362), 비유에 관한 물음(T. 363∼419), 그리고 마지막으로 맺는 말(T. 419∼420)로 이루어졌다. 이 마지막 부분에는 밀린다 왕이 아라한의 경지를 증득한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가운데 《밀린다팡하》의 원형으로 보여지는 고층 부분에서 대론은 80여 개를 헤아린다. 그들 안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 점은 불멸 후의 부파교단이 가장 관심사로 삼은 문제―윤회와 무아의 관계―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논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4부 ‘모순에 관한 문답’(이하 T본 90 이하)의 증광 부분에서는 앞의 문제가 전혀 논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의 고층과 신층의 두 부분은 본래 문제 의식이 같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불멸 후 불교교단이 붓다를 찬탄하고, 또한 붓다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고 여법한 수행을 강조한 것은 이 책에서 고층과 신층 모두를 통해서 일반적인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고층 부분의 각 대론이 제각기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그리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생동감 넘치는 대론을 전하고, 또한 사흘 동안에 이루어진 대론의 결과 왕이 나가세나를 스승으로 부르고, 자기 자신을 제자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고 맺고 있는 점에서 보면 신층 부분과는 크게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
또 대론을 시작할 때 양자 사이에 정해진 대등한 입장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기본적 태도는 고층의 대론에서 일관되게 보이고 있고, 인도와 그리스를 대표하는 두 사람에 의한 수준 높은 대론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것 또한 신층 부분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그렇게 자주 대두된 대론의 공통 주제는 단연 윤회업보설과 그것과 무아설과의 관계에 대한 논증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과 현실 경험을 중요시하고 존중하는 그리스인의 왕에게 매우 불가결했던 것은 인도사상 전체의 밑바탕에 흐르는 윤회의 사고와 불교인들의 무아설이라는 두 가지 점이고, 그리고 당시 부파불교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롭게 체계화하고 설명하고 있는지를 왕은 알고 싶어했다. 고층 부분에서 왕이 던진 솔직한 의문점과 나가세나의 해결 방법은 오늘에 있어서도 불교사상 연구의 귀중한 하나의 문헌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다.
다음에서 열거하는 21개의 대론 주제를 보면 윤회설을 둘러싼 자아(영혼)와 무아에 대한 대론의 경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6)
이름에 대한 문답(T. 25∼28)
아난타카야의 그리스적 영혼관(T. 29∼31)
무영혼설(T. 54∼57)
영혼은 인정되지 않는다(T. 71)
영혼과 정신작용과의 구별(T. 86∼87)
무아설은 윤회의 관념과 모순하지 않는가(T. 40∼41)
다음 세상에서 생을 맺는 이유(T. 32)
다음 세상에서 생을 맺지 않는 이유(T. 32)
생사의 연속으로서 윤회(T. 77)
시작이 없는 윤회의 생존(T. 51∼52)
윤회생존이 성립하는 근거(T. 52)
윤회에서 명칭과 형태(T. 59)
업은 실재하는가(T. 72)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의식의 연속(T. 73)
윤회의 주체(T. 46-48)
다시 윤회의 주체를 묻는다(T. 49)
윤회와 개인 존재의 형성력(T. 52∼54)
윤회의 주체는 전이하지 않는다(T. 71)
윤회하는 다른 주체의 유무(T. 72)
죽은 뒤 재생하기까지의 시간(T. 82∼83)
재생(윤회)하지 않는 사람(T. 41)
이 가운데 1번은, 이 대론은 왕과 장로가 처음 만나서 교류했던 것으로 인격적 개체(pudgala)의 부인 곧 무아설에 관한 대론이고, 2번 이하에서는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는 그리스 왕이 불교의 무아설을 그리스적 무영혼설로 이해해서 비난하고 있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윤회 생존을 초극해서 해탈의 획득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불교가 무아, 무영혼, 무실체라고 설한 것은 도리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왕의 기본적인 입장을 중심으로 왕이 추구하는 윤회의 관념과 윤회의 주체에 관한 질문과 그 해답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위의 문제에 기초하여 윤회설을 둘러싼 불교의 무아설과 그리스의 영혼설에 대한 대론의 내용과 취지를 파악해 볼 것이다.
2. 대론의 배경과 원칙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비구와 대론할 때 현자론에 근거하는 입장을 취했다. 거기에는 불교가 그리스인에게도 개방된 종교였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도는 계급 제도가 엄격한 나라이므로 외국인은 모두 오랑캐로 취급되고, 아우트 캐스트(Out-caste, 4성 계급 밖의 천민)에 속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외국인인 그리스인은 종교나 종교관이 다르다 해서 인도인으로부터 하천(下賤)계급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오랑캐로 취급받는 그리스인이 인도의 사회와 문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바라문교 이외의 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불교는 교조 고타마 붓다 이래로 계급 제도를 배제할 것을 말해 왔다. 사성계급을 타파하고, 모든 사람이 혈통이나 출신에 의해 존엄함이나 비천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이 평등하며, 각자의 행위가 기준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이 그리스인에게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환영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그 뒤, 적어도 이슬람 침입 이전까지는 인도에 침입한 여러 민족은 대부분 불교를 보호하고 또는 불교 신자가 된 예가 많았다. 따라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가 대론하는 근거를 고찰할 때도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조류를 고려해야 한다.
밀린다 왕은 제왕의 덕과 위엄을 가지고 통치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스스로 정의를 수호하는 왕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따르면, 그는 정의의 통치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대단히 두터웠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유골을 여러 곳에서 나누어가고 또 그를 기념하는 탑을 세웠다고 한다. 밀린다 왕이 제왕의 위엄을 가지고 통치에 임했다는 것은 《밀린다팡하》 첫 편에 그것을 입증하는 문답이 있다.
밀린다 왕이 말하였다. “존자여, 나와 대론(對論)하겠습니까?”
나가세나는 왕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대왕이여, 현자(賢者)로서 대론을 원한다면 나도 응하겠습니다. 하지만 제왕의 권위로 대론을 원한다면 나는 응할 뜻이 없습니다.”
“존자여, 현자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설령 현자의 대론에서는 문제가 해명되고 해설되고 서로 비판되고 수정되고 반박당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현자는 결코 성내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제왕으로서 대론한다 함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제왕은 대론에서 대개 한 가지 것을 주장하고 한 가지 것만을 밀고 나가며 그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왕의 권위로 벌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알았습니다. 저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현자로서 스님과 대론하겠습니다. 스님은 비구나 사미나 신도들과 대론하듯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대론하십시오.”
“대왕이여, 좋습니다.”라고 하며 흔쾌히 동의했다.7)
여기서 나가세나 비구는 진정한 대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쪽의 일반적인 강압에 못 이겨 이루어지는 제왕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론 자유와 진리 탐구의 기치를 들어 양자가 대등하게 대론하는 현자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현자론이 대론의 기반이고, 이것이 전제되어 원만한 대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의 의견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대론할 것임을 동의하고 긴장감 넘치는 대론을 시작한다.
3. 불교의 무아설과 밀린다 왕의 영혼관
1) 실체로서 영혼의 부정
먼저 약간의 대화 안에서 간단한 것으로는 “영혼이 인정되는가?”라는 밀린다 왕의 질문에 대해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승의에서는 영혼은 인정되지 않습니다.”(T. 71)라고 대답한다.
다음의 유명한 문답에서는 이것을 구체적인 실례에 따라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이름에 관한 질문’을 시작한다.(T. 25 이하)
“존자는 어떻게 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대왕이여, 저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동료 수행자들은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는 나에게 나가세나(龍軍), 또는 수라세나(勇軍), 또는 비라세나(雄軍), 또는 싱하세나(獅子軍)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왕이여,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명칭, 호칭, 가명(假名),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인격적 개체(人格的 個體, 즉 육체 속에 있는 영원불변한 어떤 것, pudgala)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밀린다 왕은 5백 명의 그리스인과 8만 명의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름 속에 내포된 인격적 개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한다.
“존자여, 만일 인격적 개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에게 의복과 음식과 좌구와 약품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또 그것을 받아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5역죄(五無間業)를 짓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일 인격적 개체가 없다고 한다면, 공도 죄도 없으며, 선행 악행의 과보(果報)도 없을 것입니다. …… 그대는 나에게 말하기를 ‘승단의 수행 비구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존자여, 머리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대왕이여,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몸에 붙은 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살갗, 살, 힘줄, 뼈, 뼛골 …… 콧물, 관절액, 오줌, 뇌들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도, 그것들 전부도 모두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존자여, 물질적인 형태(色)나 감수작용(受)이나 표상작용(想)이나 형성작용(行)이나 식별작용(識)의 5온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들 색, 수, 상, 행, 식을 모두 합친 것(五蘊)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5온 밖에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여전히 ‘아니다’고 또 대답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가세나란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자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나가세나는 없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했습니다.”
그때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대왕이여, 그대는 귀족 출신으로 호화롭게 자랐습니다. 만일 그대가 한낮 더위에 뜨거운 땅이나 모랫벌을 밟고 또 울퉁불퉁한 자갈 위를 걸어 왔다면 발을 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피로하고 마음은 산란하여 온몸에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도대체 그대는 걸어서 왔습니까? 아니면 탈 것으로 왔습니까?”
“존자여, 나는 걸어서 오지 않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주십시오. 수레채(轅)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굴대(軸)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퀴(輪)나 차체(車體)나 차틀(車棒)이나 멍에나 밧줄이나 바큇살(輻)이나 채찍(鞭)이 수레입니까?”
왕은 이들 모두를 계속 ‘아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합한 전체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왕은 여전히 ‘아니다’고 대답했다.
“대왕이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수레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수레란 단지 빈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타고 왔다는 수레는 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대는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전 인도에서 제일 가는 왕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거짓을 말씀했습니까?”
이렇게 물은 다음 나가세나는 5백 명의 그리스인과 8만 명의 비구들에게 말했다.
“밀린다 왕은 여기까지 수레로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했을 때 어느 것이 수레라고 단정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왕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5백 명 그리스인은 환성을 올리며 왕에게 말한다.
“대왕이여,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에게 다시 말한다.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 즉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반연(緣)하여 ‘수레’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모든 것, 즉 인체의 33가지 물질과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반연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의(勝義)에 있어서는 영혼 또는 인격적 개체(pudgala)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몇 개의 요소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됨으로써 개체 존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개체는 여러 가지 구성요소에 의존하기 때문에 각 구성 요소를 떠나 특수한 실체로서의 인격적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 곧 밀린다 왕이 제기한 이름이라는 것이 실체적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2) 밀린다 왕의 영혼관
그런데 이와 같은 영혼관은 그리스에는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인은 이와 다른 영혼관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이루어진 대론에서 나가세나가 밀린다 왕에 ‘나가세나라는 개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 그 다음날에 밀린다 왕과 대론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의 신하인 아난타카야가 나가세나에게 가까이 와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존자여, 제가 나가세나라고 할 때 그 나가세나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때 나가세나는 아난타카야에게 “그대는 나가세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되묻는다. 아난타카야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나가세나라고 생각합니다.”(T. 30)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리스인은 옛날부터 인간의 생명으로서의 숨(asu)을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영혼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라는 말은 원래 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진실된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리스인 아난타카야는 곧바로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같은 견해는 채용하지 않는다. 나가세나는 곧바로 “그렇다면 만약 나간 숨이 돌아오지 않거나 들어온 숨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난타카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그러면 피리 부는 사람들이 피리를 불 때 그가 내 쉰 숨이 다시 그에게 돌아오는지”를 묻는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나가세나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죽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그때 아난타카야는 “저는 그대와 같은 논자(論者)와는 논쟁할 수 없습니다. 존자여, 그 뜻이 어떠한가를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승복하게 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불교의 입장에서 “호흡에는 영혼이 없다. 들이 쉬는 숨과 내 쉬는 숨은 신체의 계속적인 활동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현실에서 작용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동인(動因)으로서 잠세력(潛勢力, 形成力, sankhara)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 말은 또 현실로 형성된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혼과 같은 실체적인 원리를 부인하고 이와 같은 원동력을 상정하는 쪽이 적어도 영혼을 호흡으로 간주하는 그리스인의 통속적인 관념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불교의 영혼관, 곧 무아관(無我觀)은 어떠한가. 다음 대론은 그것에 관해 이루어진다. 다만 여기서 나가세나의 무아관은 밀린다 왕의 영혼관에 대립되는 의미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3) 불교의 무영혼설과 밀린다 왕의 영혼관
아비달마 불교9)는 무영혼설을 주장한다. 곧 실체로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린다 왕이 “존자여, 영혼(vedagu?이라는 게 있습니까?”(T. 54)라고 질문하였다. 그때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영혼이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다. 그랬더니 왕은 “안에 있는 생명 원리(個我)는 눈에 의해 형상(色)을 보고, 귀에 의해 소리를 듣고, 코에 의해 냄새를 맡고, 혀에 의해 맛을 보고, 몸에 의해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에 의해 존재요소(法)를 식별합니다.
마치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동, 서, 남, 북 어느 창문(감각기관)으로든 내다보고 싶은 창문으로 내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내다보고 싶은 어느 문으로든지 내다 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다섯 개의 문에 관해서 말하겠습니다. 잘 주의해 들어주십시오. 만일 안에 있는 생명 원리가 대왕이 말씀하신 것처럼, 창문을 마음대로 고르듯이 눈에 의하여 형상을 볼 수 있다면, 눈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하나 하나에 의해서도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존재요소를 식별하는 것에서도 다른 다섯 개의 감각기관의 어느 것에 의해서나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즉 한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경우를 다 지적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공세를 취하자 밀린다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눈은 현상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맛보고, 몸은 감촉해야 할 것을 감촉하고, 마음은 그 밖의 모든 대상을 식별한다고 말한다. 곧 여섯 개의 감각기관과 여섯 개의 대상과는 각각 대응 관계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만약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이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무시되어야 한다. 이런 입장에 선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창문과 감각기관을 비교하는 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창문을 모두 열어제치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큰 허공을 본다면 모든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의 문이 제거될 때에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모든 대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사상을 식별하는 것 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문들이 제거될 때 역시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밀린다 왕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나가세나는 계속해서 비유를 통해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그대가 말한 것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여기 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고 합시다. 대왕은 ‘딘나가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말하자, 밀린다 왕은 ‘그렇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고 할 때 대왕은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하니, 대왕은 이번에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다시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어떤 맛을 지닌 것이 혀 위에 놓여졌을 때, 식별하는 개아는 그것이 시다, 짜다, 쓰다, 맵다, 떫다, 달다든지 하는 사실을 알겠느냐?”라고 하니, 대왕이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그러면 맛을 지닌 것이 위 속으로 들어갔을 때도 개아는 맛을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대왕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나가세나는 ‘대왕의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점점 더 강하게 몰아친다.
“대왕이여, 가령 어떤 사람이 백 개의 꿀 접시를 꿀통에 쏟은 다음에 어떤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꿀이 가득 들어 있는 그 통 속에 던졌다면 통속에 던져진 사람은 단맛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대왕은 ‘그 사람의 입 속으로 꿀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꿀맛을 느낄 수 없다’고 나가세나의 말에 수긍한다.
그러나 나가세나는 이에 멈추지 않고 대왕의 말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하며 공격의 고삐를 더 움켜쥐었다. 그때 대왕은 그대와 같은 뛰어난 논자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 왜 그런지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아비달마론으로부터 도출된 이론으로 밀린다 왕에게 ‘눈과 형상에 의해 눈의 식별작용이 생기고 그밖에 접촉(觸)과 감수(感受)와 표상(表象)과 의사(思)와 통일작용(作意)과 생명력과 주의 등이 함께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들의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므로 거기서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해 준다.
그런데 대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영혼과 신체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하는 것이었다. 나가세나는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대왕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왕의 궁중 안에 있는 망고 열매는 신맛이 납니까 아니면 단맛이 납니까?”라고 물었다. 왕은 “궁중 안에는 원래 그 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과실이 단맛이 나는지 신맛이 나는지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왕의 말을 받아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혼이 신체와 같은 것인지 같지 않는 것인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여기서 나가세나는 분명히 무영혼설의 입장에 서 있다. 원시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혼의 문제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넘어선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관해서 판단을 유보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들어서면 아비달마 불교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영혼에 대한 입장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영혼이란 그와 유사한 관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따져 물었다. “존자 나가세나여, 혹은 식별(識, vin???.a)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지혜(慧, pan???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생명체의 개아(命, bhu?asmin-j沖va, 정신적 자아, 곧 영혼)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본질과 글자가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본질은 같고 글자만 다릅니까?”(T. 86)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대왕이여, 식별은 구별해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분명히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지만, 생명체의 개아(영혼) 같은 것은없습니다.”
그러나 왕은 다시 질문한다. “만일 생명체의 개아와 같은 것이 없다면, 무엇이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으로 사물(法)을 식별합니까?”(T. 55)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만일 생명체의 개아와 같은 것이 있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식별한다면, 눈의 문(감각기관)이 제거될 때 개아는 머리를 밖으로 내놓고 더 큰 공간을 통해 전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귀나 코나 혀나 피부가 제거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 전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감촉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나가세나가 주장하는 ‘신체 안에 영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에 동의를 나타낸 것이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식별이라든지 지혜라든지 하는 정신작용을 현상 형태로만 인정할 뿐, 그 배후에서 그것들을 움직이는 능동적인 실체, 곧 영혼을 상정하지 않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4. 윤회와 윤회의 주체 문제
1) 무아설과 윤회의 관념과의 관계
인도에서는 동일한 영혼 또는 인간의 주체가 이 세상에서 죽은 뒤에 다음 세상에 태어나고, 거기서 얼마 동안 생존하다가 또 죽어서 다시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 같은 무한한 생사를 반복한다는 윤회(sam.)의 관념이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신봉되고 있다. 불교도 또한 윤회사상을 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달마 불교에서 무아설의 입장에서 말하면 윤회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윤회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도의 일반 철학자들은 불교의 이런 어려운 점을 비판해 왔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윤회의 관념은 반드시 인도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고 그리스인들 사이에도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71∼500) 학파와 플라톤도 또한 윤회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인 일반을 지배하는 관념은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 그리스적 사유에서는 오히려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사적 사정을 고려한다면 무아설에 의한 윤회라는 것은 많은 인도인보다도 그리스인에게 당연히 한층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인간이 죽은 뒤든 생전에든 관계없이 다만 현세의 현상만을 염두에 두고 인격적 개체가 동일한 것으로 존속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다. 둘째는 아(我), 인격적 개체(pudgala), 또는 영혼(vedagu? j沖va)이 죽은 뒤에도 동일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현재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밀린다팡하》에서는 이 두 문제는 한 곳에서 동시에 논하지 않고 따로 논해지고 있다. 먼저 첫째 문제에 대해서 밀린다 왕은 질문한다.
“존자 나가세나여, 재생하는 것은 다른 시기에서도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T. 40)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전통적 보수적 아비달마 불교의 무아설에 입각해서 “그것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인에게는 매우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밀린다 왕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가세나는 실례를 들어 대답한다. “대왕이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찍이 갓난애였고, 유약하였고, 꼬마였고, 등에 업혀 있었던 당신과 지금 어른이 된 당신과는 같습니까?” 그러자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와는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가세나는 이 대답 속에 모순이 내포해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고늘어진다. “대왕이여, 만일 당신이 그 어린애가 아니라면, 당신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선생도 없게 될 것이다. 또 학문이나 계율(戒律)이나 지혜도 배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왕이여, 잉태 후 첫 7일 동안의 어머니와, 셋째 7일 동안의 어머니와, 넷째 7일 동안의 어머니가 각각 다릅니까? 어릴 때의 어머니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어머니가 다릅니까? ……”
왕은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질문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나가세나는 “내 자신은 등에 업힌 연약한 갓난아이 적의 나와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 같습니다. 진실로 이 신체에 의존해서 이들 모든 상태는 하나에 포괄되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그러나 왕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비유로서 설명해 보라고 한다.
“대왕이여, 여기에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타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이여,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한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한밤중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과 새벽의 불꽃은 각각 다르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서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대왕이여, 모든 사물의 연속은 마치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존재는 같지도 않고 서로 다르지도 않으면서 최후의 의식에 포섭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또한 거기에 지속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우리 존재의 주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서, 결코 같은 상태를 갖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그리스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35∼475)는 “우리들은 같은 강물에서 두 번 목욕할 수 없다, 우리는 있으면서 있는 것이 아니다.”13)라고 하였다.우리는 보통 같은 강물에서 목욕한다고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목욕하는 사이에도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또 강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우리 자신도 있으면서 없다는 모순된 표현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피타고라스 학파인 에피카르모스(Epikharmos)는 감각되어지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격적 주체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이 점에서 불교와 이들 그리스의 철학자와는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는 영혼의 관념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15) 그런데 불교는 이 영혼의 관념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도 피타고라스 학파 등은 그들의 종교적 실천에 포함되어 있는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혼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6) 하지만 불교의 영혼관은 다른 학파들과 유사한 사상을 품고 있는 것도 있지만 무아의 윤회라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독특하다.
2) 윤회의 주체 문제
여기서는 앞에서 든 윤회의 문제 가운데 두 번째의 아(我), 인격적 개체, 또는 영혼이 죽은 뒤에도 동일성을 가지면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현재의 인격적 존재와 같은 실체로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에 관해 두 사람 사이의 대론을 살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 시기와 후 시기에서 같지 않으면서 같기도 하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와 같이 몇 생애에 걸쳐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의 주체는 옮아가는지 어떤지에 대한 대론을 살펴보자.
먼저 밀린다 왕은 도대체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T. 46) 하고 윤회의 주체에 관해 묻는다. 나가세나는 그것은 명칭(名, nama)과 형태(rupa)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명칭과 형태란 우파니샤드에서 현상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정리하여 표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왔다. 그것이 불교에서도 그대로 채용되어 다섯 가지 구성요소, 곧 5온의 체계로 정립되었다. 5온 가운데 명칭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으로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식별작용(識)의 넷을 의미하고, 이에 대해 형태란 인간의 물질적인 면, 특히 신체(色)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명칭과 형태의 근저에는 아트만(a?man)이라는 실체를 상정했지만 불교에서는 항상하고 불변하는 영혼이나 상주하는 주체를 부정하고 이와 같은 ‘명칭과 형태’만을 인정한다.
그런데 밀린다 왕은 이와 같은 윤회의 주체로서 ‘명칭과 형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서 바꿔 태어납니까?”라고 질문한다.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명칭과 형태에 의하여 선이나 악의 행위를 하고, 그 행위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새로운 명칭과 형태가 다음 세상에서 바꿔 태어납니다.”라고 대답한다.
다시 나가세나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등불을 들고 자기 집 꼭대기 방으로 가서 식사를 하다가 잘못하여 등불이 지붕을 태우고 이어서 마을을 태웠다고 합시다.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붙잡아 ‘당신은 어찌하여 마을을 태웠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니오. 나는 마을을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식사를 하기 위해 밝힌 불과 마을을 태운 불은 다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입씨름을 하다가 왕에게 가서 그렇게 말한다면 왕은 어느 쪽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존자여, 마을 사람들의 말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대왕이여, 어째서 그렇습니까?”
“존자여,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마을을 태운 불은 그 사람이 식사하기 위해 사용한 불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음과 함께 끝나는 현재의 명칭 형태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명칭과 형태가 다르기는 하지만, 두번째의 것은 첫번째로부터 나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악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밀린다 왕은 그렇다면 악업을 받은 윤회생존의 주체는 옮아가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존자여, 사람이 죽은 경우에 윤회의 주체가 다음 세상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납니까?”(T. 71)
나가세나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왕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러면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나가세나는 등불과 시(詩)를 비유로 들어 왕에게 반문한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하나의 등에서 다른 등에 불을 붙인다고 합시다. 이럴 경우 하나의 등이 다른 등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그것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왕은 아직도 이것의 뜻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라고 한다.
“대왕이여, 당신이 어렸을 때 어떤 시인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기억할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당신에게 옮아온 것입니까?”
“존자여,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몸으로부터 다른 몸으로 윤회의 주체가 옮김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구성요소인 5온이 옮김 없이 그 사람은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윤회전생의 계기를 만드는 요인을 이루는 것은 업이고, 윤회생존인 우리의 개체는 업이 상속(相續)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업은 일반적으로 선인락과(善因樂果)라든지 악인고과(惡因苦果)의 응보를 한결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불교만 아니고, 인도의 다른 종교도 윤회설을 업의 응보 관념과 결합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런 응보설이 불교의 무아설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행위의 주체 내지 행위를 책임지는 항상하는 주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무아’라면 행위의 주체 내지 행위의 책임 소재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밀린다 왕은 무아설에 뒤따르는 난점을 몇 번이고 찔렀고, 이와 관련해 윤리적인 면에서 윤회전생의 이론에 관해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가세나는 ‘명칭과 형태’가 다만 타는 불처럼 주체의 연속으로서 계속 윤회한다는 것을 밝혀서 왕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항상 불변의 주체라든지 실체로서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나가세나는 전생의 주체가 상주하는 것이고, 따라서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신체 안에서 어떠한 윤회의 주체가 전이한다는 생각을 배척했다.
5. 맺는 말
우리는 오늘날 이런 말을 곧잘 한다. ‘불교는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쩐지 마음에 끌려 불교를 알고 싶어하고 불교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교단을 보면 여러 점에서 우리들의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나라 불교도는 거의 1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과연 그 많은 신도들 가운데 불교교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아니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를 물으면 그 대답이 어떻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런가.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일반 신행자가 모르는 불교교리를 스님이나 알만한 불교인들에게 물어봐도 제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고, 또 일반 신행자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요즈음 우리 나라 불교는 양적·질적으로 제2의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아주 번창하고 있다. 일주일이면 멀다 하고 학회도 열린다. 하지만 학회에서 발표되는 연구 성과물들이 불교를 종교로서 신행하는 일반 신도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나라의 문제만은 아니고, 불교 발생국 인도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특히 불멸 후 여러 부파로 쪼개지면서 다양한 이론을 내놓는 아비달마 불교 시대에서는 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의 모습을 내보인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인도에 들어와 인도 변경 지방을 통치하던 밀린다 왕도 그랬던 것 같다. 《밀린다팡하》는 바로 그런 시대적 사정을 반영한 책이다. 그 시대는 인도뿐만 아니고 그 서쪽 너머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거기서 밀린다 왕이 던진 질문들은 2천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역시 던지고 싶은 질문들이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들이다.
《밀린다팡하》를 읽노라면, 질문의 하나 하나가 조금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니 지금 내 자신이 밀린다 왕처럼 나가세나와 같은 해박한 선지식에게 질문해서 의문을 풀고 싶다고 생각이 드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바로 그리스인 왕에 의해 던져지고, 나가세나 비구에 의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해답이 주어지고 있다. 그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은 인도 일반의 특색이기는 하지만, 아비달마 교학처럼 학승들도 알기 어려운 불교교리를 굳이 빙빙 돌리지 않고, 아주 쉽게 해명하려고 하는 태도에 호감이 간다.
다만 2천여 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바뀌어 나가세나의 대답 가운데는 우리들의 지성으로 수긍할 수 없는 설명도 물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대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뿐, 불교의 진수를 아는 데 아무런 불편 없는 훌륭한 대론서이고 대론 내용이다. ■
문을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논저서로 <기우다빠다의 불살생과 용수의 중도설><마야설의 불이일원론적 이해><인도의 사상과 문화><역서로 힌두교 입문><인도철학의 자아사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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