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홍사성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불교방송 포교제작부장, 불교텔레비전 제작국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불교신문 주필로 있다.
1. 한국불교, 왜 하화중생에 소극적인가
부처님이 교화활동을 편 지 오래지 않아 제자가 60여 명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부처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인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이제 그대들은 전도를 떠나라. 모든 사람들의 안락과 이익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로 가지 말고 따로따로 가라. 사람들을 만나거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설법을 하라. 나도 우루벨라 병장촌으로 가리라.
잡아함 39권 1096경 《승삭경(繩索經)》에 기록된 이 말은 부처님의 전도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예로부터 ‘불교의 전도선언’으로 불려왔다. 부처님은 이 말씀에서 불교도의 종교적 책무가 바로 전법과 교화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설법하라’는 부처님의 결연한 모습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숙연한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전도명령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다. 전법의 일차적 책임이 있는 출가자들은 전도명령을 외면하고 교화에 소홀해온 지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출가자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산으로 산으로만 들어가려고 한다. 대중교화는 뒷전이다. 사람들이 법문을 듣고 싶어도 설법해줄 법사가 없어 돌아서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재가신자들이 하는 신앙생활이란 불공하고 복 비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한국불교가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한 교화활동을 등한시하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원인을 추궁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아마도 ‘깨달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불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선적(禪的) 깨달음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화두 타파를 불교의 목적, 출가의 목적으로 생각해왔다. 참선 수행이야말로 상구보리(上求菩提)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온 것이다. 상구보리의 짝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이 소홀해진 원인은 실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수행’을 위해 ‘교화’를 뒷전으로 밀어낸 것이다.
그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말을 만들어낸 대승불교는 상구보리를 위해 하화중생을 소홀하게 생각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선후(先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승불교 실천수행의 핵심이라 할 서원(誓願)과 회향(廻向)의 사상은 하화중생을 통해 상구보리를 성취하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아미타 48원, 약사여래 12대원, 보현보살 10대원은 모두 하화중생으로 상구보리를 이루겠다는 발상이다. 대승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불보살은 이웃에 대한 헌신과 봉사와 전법을 통해 수행을 완성해간다. 이러한 생각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보이는 ‘보현행으로써 보리를 이루겠다(以普賢行悟菩提)’는 선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세 모든 부처님의 三世一切諸如來
가장 훌륭한 깨달음을 위한 행과 원을 最勝菩提諸行願
내가 모두 공양하고 원만하게 닦으니 我皆供養圓滿修
보현행으로써만 보리를 깨닫게 되네 以普賢行悟菩提
여기서 보현행이란 바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 헌신과 봉사를 뜻하는 보살행을 말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온 ‘보리를 먼저 증득하고 나중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모든 불보살은 과거 인행시에 한량없는 자비행을 실천한 공덕으로 성위(聖位)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들에게 ‘수행’이란 다름 아닌 ‘자비보살행의 실천’이다.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을 제도하러 나서는 모습은 경전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중생을 제도하는 과정에서 그 공덕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은 여러 경전에 나타난다. 따라서 그 동안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정확한 표현을 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아니라 ‘좌구보리(左求菩提) 우화중생(右化衆生)’이라야 원래의 뜻에 합당하다.
앞머리부터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대한 의미를 따져본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용어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불교의 목적에 대한 오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은 상구보리라는 말 때문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해왔다. 한국불교에서는 그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선수행(禪修行)이다. 그러나 선수행이 불교적 깨달음에 이르는 진정한 방법인지, 아니 더 나아가 깨달음 자체가 불교 수행의 최종적 귀착지인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불교 수행의 목적은 놀랍게도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깨달음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가 수행의 목적을 잘못 정의하고 있다는 지적과 맥락이 같은 말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라는 뜻’이다.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비교적 부처님의 육성에 가까운 기록인 아함부의 경전들을 보면 불교의 목적, 또는 수행의 목적을 ‘깨달음’이라고 말한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수많은 경전은 모두가 ‘열반’을 목적으로 내세운다. 예를 들어 잡아함 16권 424경 《숙명경(宿命經)》에서 부처님은 전생 문제를 화제 삼는 제자들을 책망하면서 불교의 수행목적은 열반에 있음을 강조한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앞으로 전생에 관한 얘기를 화제로 삼지 말라. 왜냐하면 그런 얘기는 진리를 알게 하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행위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지혜나 바른 깨달음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열반으로 향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너희들이 마땅히 화제로 삼아야 할 것은 여래가 가르친 사성제(四聖諦) 즉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원인이 되는 진리,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 괴로움을 소멸하는 여덟 가지 방법에 관한 진리다. 왜냐하면 이런 화제는 진리를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되며, 깨끗한 행위와 참다운 지혜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애써 진리에 관한 얘기를 나눌지언정 열반으로 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를 화제로 삼지 말라.
열반이란 무엇인가. 불교사전은 ‘탐진치 삼독의 불길이 꺼진 상태’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왜 이 열반을 성취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참다운 행복을 얻기 위해서다. 우리의 삶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와 오음성고(五陰盛苦)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이런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열반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괴로운 것으로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열반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불교는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선행적으로 할 일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반성과 철저한 인식이다. 즉 인생은 사고팔고(四苦八苦)로 이루어진 고통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그 원인은 모든 존재의 무상성(無常性)을 알지 못하기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무상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는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탐진치(貪瞋痴) 삼독과 번뇌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삼독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닦아야 한다. 이러한 전 과정을 아는 것이 ‘불교에서 요구하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인생의 현실을 이렇게 깨닫게 될 때 거기에서 벗어나는 열반의 길이 보인다. 불교에서 열반으로 가는 길은 삼독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삼독을 제거할 것인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는 계율을 지켜서 도덕적으로 청정해지고(戒), 선정을 닦아서 평화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며(定), 깊은 사유와 문법(聞法)으로 지혜를 밝혀야(慧) 한다. 계정혜 삼학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조금 확대해서 세밀하게 제시한 것이 팔정도다. 이것이 불교에서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이유의 전부다. 종래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반을 얻기 위해 하는 수행’이란 점이다.
요약해서 설명하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해탈의 방법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다. 만약 아는 만큼 실천하지 않으면 알았다거나 깨달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 대목에서 불교적 수행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에서 강조해서 말해둘 것이 있다. 불교는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을 요구하는 종교라는 점이다. 따라서 깨닫고 나면 수행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돈오돈수적(頓悟頓修的) 발상은 크게 경계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해오(解悟)와 증오(證悟)의 문제로 보면서 깨달음이 철저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 논리가 갖는 큰 맹점은 ‘증오를 이룬 사람은 아무렇게 살아도 되느냐’ 하는 질문에 할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음의 삶을 살기 위해 더 철저한 수행, 더 엄격한 수행, 더 진지한 수행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어리석음의 길로 떨어진다. 중생이 되지 않으려면 잠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한번 깨달았다고 실천의 삶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랬다가는 언제 야수성이 드러나고 중생성이 발호할지 모른다.
부처님은 여러 경전에서 수행을 게을리 하는 수행자가 반드시 타락의 길로 간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반대로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완성해서 존경받으며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는 점을 보증해주고 있다. 수행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자기를 살피고, 열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것이 부처님과 그 제자의 삶이었다. 후대의 불교도가 본받아야 할 모델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열반에 이르는 방법과 과정을 바르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와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적 인식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는 깨달음을 열반의 다른 표현 내지는 동의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깨달음이란 열반의 선행조건이며,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깨달음) 없이는 바른 수행이나 열반의 성취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보리즉열반(菩提卽涅槃)’이라는 관념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데가 있다. 자칫하면 깨달음 지상주의 또는 환상이 생겨날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소 돌아가는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이른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열반의 성취’에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부처님의 생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 즉 깨달음을 얻고 나서 45년 동안 더욱 진지한 수행을 했다. 결코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삶을 살기 위해 계율도 지키고 좌선명상도 하고 설법도 했다. 이것이 부처님이 보여준 깨달음과 수행의 삶이다.
이를 다시 방법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깨달음을 진리에 대한 인식전환이라 할 때 그것은 경전을 읽거나 설법을 듣고도 가능하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많은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들이 깨달은 진리란 다른 것이 아니라 연기법(緣起法)과 사성제(四聖諦)에 관한 바른 이해였다. 그 이상의 다른 깨달음은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은 진리를 깨닫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깨달아진 진리가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자면 팔정도(八正道)와 사정신(四淨信)과 사념처(四念處)와 같은 수행의 덕목을 에누리없이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불자의 길이고 보살의 육도만행이다. 이렇게 해서 중생은 드디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을 통해 열반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깨달음은 열반을 향하는 출발점이자 수단이고, 열반이라는 목적은 수행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것을 실천하며 살았고, 성제자(聖弟子)들도 그렇게 살았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불교의 진리를 믿는 순간 깨달은 사람이 된다. 깨달음이란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면 불교의 진리를 믿는 사람을 모두 부처라고 해도 좋다. 이는 결코 불경(不敬)스러운 것도 외람된 것도 아니다. 부처님은 이미 당신과 동일하게 진리를 인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주저 없이 성자(聖者)라고 선언한다.
예컨대 《사분율》 31권 〈수계건도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부처님이 녹야원으로 가서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한 뒤 그들이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자 ‘이제 이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한다. 또 야사를 비롯한 60명을 교화한 뒤에는 ‘61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한다. 100명이 되면 101명, 200명이 되면 201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말한다. 6명은 다섯 수행자와 부처님, 61명은 60명과 부처님, 101명이나 201명은 100명 또는 200명의 제자와 부처님을 포함한 숫자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阿羅漢)을 소승성문(小乘聲聞)이라 해서 보살의 아래 단계로 낮춰 부르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다. 아라한은 ‘무학(無學)의 성자’, 즉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성자이자 ‘응공(應供)의 성자’, 즉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부처님과 동급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예로 든 《승삭경》에서 부처님이 ‘나는 인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인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말한 것도 같은 문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가 깨달음의 문제를 말할 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부처님이 생존했을 당시에는 깨달음의 문제가 결코 특별한 사람만이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부처 또는 성자라는 말도 석가모니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통명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이란 연기법을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모든 존재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 까닭이다.
사실 이러한 내용이라면 웬만큼 우둔하지만 않다면, 그리고 조금만 억지를 꺾어버린다면 우리라고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니 깨닫고 못 깨닫고 할 문제도 아니다. 인생의 현실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고정불변하는 무엇이 있다고 고집함으로써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를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무명은 어리석은 생각의 다른 표현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해 우리에게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현실을 바르게 보라고 가르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고집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다. 이것만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렇게 오랜 시간 좌선명상을 해야 깨닫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야말로 ‘한 생각’ 돌리면 그만인 그런 깨달음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아라한이라는 극존칭으로 불린 것은 이것을 알고 인정했다는 의미다. 대승불교의 보살이 대자대비심으로 서원과 회향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다른 것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는 말은 이런 경우 너무나 적절할 표현이다.
깨달음과 열반의 문제를 조금 더 과감하게 진전시키면 이런 구조가 된다. ‘깨달음이란 열반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온 방식과는 판이한 데가 있다. 우리는 그 동안 깨달음이 곧 열반이라고 생각해왔다. ‘보리즉열반’이라는 발상의 근저에는 ‘보리를 통해 열반을 성취’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깨달음 자체를 불교의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하면서 온갖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깨달음에 대한 지독한 환상, 깨닫기만 하면 축지법도 쓰고 은산철벽도 뚫고 나갈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오해다. 그것은 마치 몇 년 전 종말론을 믿는 광신적 기독교인이 지구종말의 날에 공중들림(携擧)이 일어날 것이라며 난리를 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의 수행자는 이러한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해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면 깨달음에 대한 이런 오해는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시작됐을까. 대체로 중국에서 간화선(看話禪)이 발흥하던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의 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정밀한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간화선이 대두된 이후 현저하게 수행단계나 계위를 무시하고 시험문제 풀 듯 화두에 매달려온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시대부터 동북아불교계는 마치 화두만 풀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화두라는 시험문제를 타파하면 부처가 된다는 식의 수행법은 간화선 발흥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렇다면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 타파가 부처를 뽑는 선불(選佛)의 관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벽암록》 제3칙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은 마조의 문병을 계기로 생긴 선화(禪話)다. 원주가 마조 대사의 건강을 묻자 화상은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라고 대답한다. 간화선은 이때 왜 마조가 그런 답을 했는가를 문제로 제시한다. 이것이 화두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불명경(佛名經)》이라는 경에 따르면 일면불은 그 수명이 8천1백세, 월면불은 그 수명이 하루 낮과 밤밖에 안 된다.
이런 부처의 이름으로 답변한 마조의 뜻은 ‘늙은이가 살만큼 살았으니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다.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가꾸어온 노선사의 자신감이 들어 있다. 우리가 이 선화에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우리가 과연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을 만큼’ 자신 있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화두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의미를 깨닫기 위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좌선수행을 해야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조주무자(趙州無字)를 포함한 모든 화두가 거의가 다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설두중현(雪竇重顯)의 《벽암록》, 무문혜개(無門慧開)의 《무문관》에 이런 선화를 모아놓은 것은 시험문제를 출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선화를 통해 선승의 수행을 격발하려는 뜻이 강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동시대의 속어(俗語)나 선화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지자 모든 선화는 이상한 동문서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선승들은 이런 동문서답에 무슨 묘리(妙理)가 있다는 듯이 화두 참구에 매달린 것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의 선승이 법담을 하면서 요즘 유행어인 ‘당근이지(물론이지)’ ‘짱이야(최고야)’ ‘졸라(엄청나게) 열받았다’라는 말을 주고받았다는 기록을 보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갸우뚱하는 것과 흡사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간화선의 화두 참구 방식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 무엇보다 불교 전통의 수행방법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드러난다. 요즘 우리 나라 선학계에 던져진 ‘간화선만이 최고의 수행법인가’라는 화두도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간화선만이 최고의 수행법이냐 아니냐를 따지다보면 문제의 핵심을 놓칠 우려가 있다.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선사들이 ‘화두’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는 엄정한 삶의 문제에 얼마나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인 줄 깨달았다면 나는 정말로 부처로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두 타파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대답이어야 한다. 이것이 수행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의 화두 수행법을 무 자르듯이 한마디로 단언해서 ‘무가치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간화선은 그것이 발흥한 역사적 배경이 있고, 또 아직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특히 화두를 좌선 명상의 방법으로 삼아 오매일여(寤寐一如)나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삼매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오매일여나 동정일여를 수행의 정점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런 정신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가 의문이다. 또 화두 타파가 곧 깨달음이고, 깨달음만 얻으면 생사를 해탈하고 열반이 성취된다는 발상도 지나친 비약이다.
그 논리에는 교리(敎理)가 없다. 아무리 선(禪)이 교(敎)를 뛰어넘는 것이라지만 깨달음과 열반의 합리적 상관관계조차 설명하지 않는 것은 억지다. 더욱이 불교 수행의 모범이 부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깨달음 이후의 수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말 큰 오류다.
수행자가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불교가 어떤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이며 어떤 수행 방법을 제시한 종교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의 목적인 열반이란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탐욕(貪)과 증오(瞋)와 망상(痴)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진리를 깨닫는 순간 바로 증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더 많은 수련을 거쳐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아라한이 되었음에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도 이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를 최근 한국불교의 논쟁점인 돈점론(頓漸論)과 결부시켜 말하면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문제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 동안 안개에 가려졌던 것처럼 흐릿했던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가 어느 정도 명료해질 것으로 본다.
여기서 한 가지 되짚어볼 일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깨달음을 열반에 이르는 수단’으로 파악하고 ‘열반을 위해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왔다. 이를 인정할 때 우려되는 것은 수행의 중요성 문제다. 혹시 깨달음의 중요도가 반감됐으니 수행의 중요도도 반감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수행의 중요성은 전혀 반감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던 수행을, 열반의 성취를 위해 하는 것으로 대상만 바꾸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의 필요성은 더 높아진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이상한 환상을 불러오는 반면, 열반을 위한 수행은 인격적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사실 지금까지 말해온 논의구조에서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라는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행 방법이기보다는 자주 설법을 듣고 가치관 또는 인식의 전환만으로 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설법을 열심히 듣고 책도 많이 읽고 생각을 바꾸었으니 그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를 수행이라고 말할 것은 없다. 굳이 말한다면 수행의 예비단계, 또는 종교적 회심(回心)의 단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나 그 밖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설법만 듣고도 불교의 진리를 이해했다. 그들은 수행을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진지한 설법과 토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도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 또는 가치관의 전환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처님이 가르친 여러 가지 수행법, 즉 삼학이나 사념처, 팔정도 같은 구체적 덕목의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수행은 결과적으로 인격을 바꾸어주며 삼독심을 제거해서 열반으로 이끌어 준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진리를 바르게 알면 알수록 더욱 진지하게 열심히 수행했던 것이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열반을 위한 수행은 이렇게 목적과 방법, 결과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오해했다. 열반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 몰두함으로써 그 치열하고 진지한 내공(內功)을 무위로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정리하고 넘어갈 일은 우리가 불교를 하는 이유 또는 목적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축적 또는 철학적 탐구를 위해 불교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불교 수행을 하는 것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또한 중생적(衆生的)인 인격을 불타적(佛陀的) 인격으로 상승시키고자 불교를 한다. 따라서 불교 수행을 오래 하면 할수록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 한다.
이는 불교가 철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점에서 더욱 명백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 수행을 소홀히 하는 데서 생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깨달음에 대한 환상이 도덕적이고 구체적인 수행덕목을 소홀하게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선수행을 한 사람이 많은 불교종단에서 비도덕이고 목불인견의 사건이 자주 생기는 것은 수행자들이 무엇을 위해 어떤 수행을 했느냐를 말해주는 증거라고 해도 좋다.
불교적 수행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팔정도의 실천이다. 그것만 실천하면 인격의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당시의 얘기를 기록한 경전을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할 실증적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부처님은 한 경(잡아함 4권 1136경 《月喩經》)에서 수행자의 변화된 인격이 어떻게 얼굴에 나타나야 하는가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자의 집에 가고자 하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마하카사파는 달처럼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처음 출가한 신참자처럼 수줍고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얼굴로 재가를 찾아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얼굴을 가질 수 있는가. 팔정도를 하나하나 닦아나가다 보면 수행자의 인격은 자연스럽게 성자의 얼굴을 닮아가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이 팔정도의 수행은 열반을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잡아함 18권 490경 《염부차경(閻浮車經)》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이 장로제자 사리풋타(舍利弗)와 함께 마가다국의 나알라라는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사리풋타의 옛친구 잠부카다카(閻浮車)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잠부카다카는 외도를 따르는 수행자였는데 부처님의 명성을 듣고 그의 제자로 있는 사리풋타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가 사리풋타를 찾아온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보고자 해서였다. 그는 무려 40여 가지의 중요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친구여,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네. 당신의 스승은 자주 열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열반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가.”
“친구여, 열반이란 것은 탐욕이 영원히 다하고, 분노가 영원히 다하고, 어리석음이 영원히 다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네(貪慾永盡 瞋쨌永盡 愚癡永盡 是名涅槃).”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겠네. 우리가 그 열반에 이르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열반을 얻게 되는가.”
“열반으로 가는 길을 물었는가. 그 길은 여덟 가지가 있네. 이를 팔정도라 하네. 팔정도란 바른 소견(正見), 바른 사색(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명상(正定)이네. 어떤 사람이든 이 여덟 가지 길을 걷게 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네.”
사리풋타의 간명한 대답을 들은 잠부카다카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이 경에서 주목할 점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깨달음과 열반의 논리구조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열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말한다. 그리고 수행이란 거기에 이르기 위한 팔정도의 실천을 말한다.
깨달음과 열반의 문제를 이렇게 이해하는 방식은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옛날 논서인 《구사론》에 나오는 삼도론(三道論)은 이를 항목화하여 매우 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사론》에서 제시하는 삼도란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 성위(聖位)에 이르는 차제와 방법이다. 여기서 견도란 쉽게 말하면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를 바르게 아는 것이 견도이고 깨달음이다. 이에 비해 수도란 알고 깨달은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알고 있는 진리는 수도를 통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마침내 최고의 경지인 무학도에 이르게 된다. 무학도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 열반과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삼도를 현실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담배와 술, 마약으로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했는데 중독이 되어 술과 담배, 마약이 없으면 잠시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과다한 흡연과 과음, 마약투여로 몸을 망쳐가고 있었다. 이때 어떤 현명한 의사가 각고의 노력과 임상실험 끝에 마약과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자비심으로 환자들에게 왜 그들이 건강을 망치고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지, 그 원인을 밝혀주고 건강을 회복할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강연도 하고, 책도 쓰고, 설득도 해서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병고의 원인을 깨닫고 치료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견도(見道)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된 습관 때문에 쉽게 술과 담배와 마약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일 죽더라도 이 좋은 것을 왜 멀리해야 하느냐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조차 있었다. 이들을 위해 의사는 다시 금연과 금주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실천하도록 했다. 그 프로그램 이름이 바로 삼학이요, 사정신이요, 사념처요, 팔정도요, 육바라밀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두 번 실천으로 쉽게 성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오랜 습관을 중단하는 데서 오는 금단현상도 있고, 그래서 실패할 확률도 높다. 그러므로 환자는 다시는 그런 습관이 재발하지 않을 때까지 지속해야 한다. 이것이 수도(修道)다.
이러한 노력 끝에 드디어 술과 담배와 마약으로 찌든 사람이 완벽하게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알콜중독자, 마약중독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재활프로그램이 필요 없다. 그러나 사실은 그도 조심할 필요는 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술이나 마약은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조건에 의해 다시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도 항상 운동도 하고 식사도 제때하고 건강을 챙기며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무학도(無學道)에 들어간 성자일수록 더욱 언행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성위에 올랐으면서도 막행막식을 하거나 비도덕적으로 살지 않고 더욱 청정하고 바르게 살아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불교에서 인생의 바른 길은 이미 부처님에 의해 소상하게 제시돼 있다. 또한 모든 진리는 부처님에 의해 남김없이 깨달아졌다. 따라서 더 이상 바른 길을 알려고 하거나 진리를 깨달으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부처님이 가르친 길, 걸어갔던 길을 따라서 걷기만 하면 된다. 부처님을 ‘도사(導師)’ 즉 길 안내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미련하게도 이 훌륭한 안내자가 말한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길이 있을 것으로 알고 그것을 찾고자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고집하고 있는 수행이다. 이것이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모든 오해의 핵심이다. 한국불교의 모든 문제도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암시를 받을 만한 경전은 중아함 제35권 144경 《산수목건련경(算數目ㅦ連經)》이다. 부처님과 수학자 목갈라나와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 이 경은 우리가 어떤 오해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묻겠다. 누가 그대에게 왕사성 가는 길을 물었다 하자. 그대는 그 길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가 가리켜준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길을 가리켜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라문이여, 그와 같다. 정녕 열반이라는 목적지가 있고, 가는 길도 있으며, 길을 가리켜주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바로 그 안내자다. 내 제자가 내 말을 믿고 그 길을 걷는다면 그 사람은 구극의 목표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나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경에 의하면 이미 해탈의 길은 제시돼 있다. 따라서 그 길로만 가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고 전혀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다. 오늘의 불교가 대중교화를 등한시하는 이유도 이 지적의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무엇인가 깨달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의 삶을 실천하기보다는 깨달음의 성취라는 허구적 환상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동안 경전을 읽고 설법을 듣고도 불교가 어떤 것을 가르치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그 정도로 미련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불교가 무엇을 가르치는 종교인지를 잊고 있는 데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진정성(眞正性)의 부족도 한 이유일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바르게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몇 가지 단계가 있다. 부처님 시대에는 이를 사향사과(四向四果)라 했다. 수다원(預流), 사다함(一來), 아나함(不還), 아라한(無學)이 그것이다. 수다원은 쉽게 말하면 성스러운 삶을 시작한 단계다. 그러기를 결심한 것이 수다원향이고 결심을 결행해서 실천한 것이 수다원과다.
사다함은 한 번 실수는 하지만 다시는 안 하는 경지, 아나함은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경지, 아라한은 완전한 성자의 경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초보수행자가 경륜이 쌓여 성자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승불교 시대에도 나타난다. 《화엄경》은 보살의 수행계위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로 나누고, 다시 그 위에 등각(等覺), 묘각(妙覺), 불(佛)을 두어 모두 53위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수행이 하루아침에 고드름 따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성을 거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불교적 인격의 성숙도는 수행의 정도에 따라 차이와 순도(純度)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매 순간을 순도가 높은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이 보다 높은 계위에 있는 사람이다. 절에서 덕 높은 스승에게 받치는 큰스님, 선지식, 방장, 조실이라는 명칭은 지적인 수준이나 인격적 성숙도에서 거의 부처님 수준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이 글의 결론은 이렇다. 중생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 부처님이 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달은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바르게 살면 된다. 불교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른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 수행은 팔정도와 사념처를 닦는 것을 말한다. 또한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와 같은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자리가 부처의 자리고, 그것을 배반하는 자리가 중생의 자리다. 좀더 분명하게 정리하면 깨닫고자 수행을 한다면 아직도 중생이지만, 깨달음의 삶을 사는 순간부터는 부처로서 사는 것이 된다.
우리가 갈 길은 부처로서 깨달음의 삶을 사는 것이지, 깨닫기 위해 중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더 과격하게 말하면 더 이상 무엇을 깨닫겠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길이 아니다. 반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수행의 삶이다. 하루 24시간을 얼마만큼 부처로 살 것인지, 반대로 중생으로 살 것인지는 순전히 매 순간 선택에 달려 있다.
불교의 수행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계정혜 삼학과 사념처와 팔정도를 닦는 것이다. 이것을 대승적으로 표현한 것이 육바라밀이다. 이것은 깨닫기 위해 하는 수행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처로 살기 위한 수행이다.
여기쯤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믿어온 ‘깨달음을 위한 수행’이라는 관념을 폐기하는 것이 좋다. 불교의 수행은 깨달은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이고, 부처로서 살기 위한 수행이고, 열반을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행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 즉 열반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깨달음이라는 환상’에 빠진 수행은 결코 불교의 수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한국불교는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에 대한 교리적 점검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자존심이나 고집, 허위의식보다는 솔직하고 양심적으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토론해봐야 한다. 감추지 말고 자기가 고민하고 생각한 바를 툭 털어놓고 진지한 토론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부처님 뜻에 맞는 방법인지를 정리해야 한다. 그 지평 위에서 포교를 하든 수행을 하든 해야 법륜(法輪)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이 글은 그 출발선상으로 불교를 끌어내고자 하는 하나의 화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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