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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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님 2018. 11. 4. 11:45

 

중도(中道)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있음[有]과 없음[無], 생함[生]과 멸함[滅] 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道)를 이루고 난 뒤에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합니다.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불교의 근본교리가 들어 있으며, 중도설도 그 중의 하나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도설은 극단적인 두 변에 집착하지 말라는 기본적이고도 간단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는 그 두 변은 이론적인 사항이 아니라 수행의 면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인 사항입니다. 이와 같이 최초의 중도설은 수행자의 실천에 관계하여 제시된 것입니다. 그 법문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먼저 팔리어(pāli)로 씌어진 남전장경(南傳藏經)의 번역문을 인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에 해당하는 북전(北傳)의 한역(漢譯) 경문을 일부 발췌하여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世尊)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 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如來)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南傳大, 律部 3, p. 18]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상대적인 견해를 말하는 두 변[兩邊] 가운데는 선악(善惡), 유무(有無)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기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들었습니다. 인용한 경문에 있는 두 변 중 첫 번째는 욕망에 탐착하는 욕락(欲樂), 즉 낙(樂)을 말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고행에 집착하는 괴로움, 즉 고(苦)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은 부처님 당시의 실정에 따라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고행을 위주로 하는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였으며, 부처님을 따라서 최초로 출가한 다섯 비구도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고행을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였으므로 부처님이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입니다. 많은 출가자들이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苦)와 낙(樂)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깨달은 것, 정등각(正等覺)한 내용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苦)와 낙(樂)을 버린다는 것이 어찌 그다지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고(苦)와 낙(樂)을 버리라고 한 것은, 평범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철학적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중생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바로 깨쳐서 해탈을 얻기 전에는 무엇을 대하든지 그것은 고(苦)가 아니면 낙(樂)이고 낙(樂)이 아니면 고(苦)라서 항상 양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설사 열반(涅槃)을 성취하였다 하여도 열반의 낙에 머물면 그것도 병으로서 중도가 아닙니다. 고(苦)와 낙(樂)을 떠난다는 것은 세간의 고(苦), 낙(樂)이라든지 출세간의 낙(樂)이라든지 모든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말하며, 그 고(苦)와 낙(樂) 등 일체의 양변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합니다.


이렇게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이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륜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고하여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두 변이 있으니 응당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첫째는 애욕을 탐하여 욕망은 허물이 없다고 말함이요, 둘째는 사견으로 형체를 괴롭혀 도의 자취가 없음이다. 이 두 변을 버리고 곧 중도를 얻느니라.”

佛復告曰호대 世有二邊하니 不應親近이라. 一者는 貪著愛欲하여 說欲無過요 二者는 邪見苦形하여 無有道迹이라 捨此二邊 便得中道니라. [大正藏 22, p. 104中, 五分律]


“비구여, 출가자는 두 변을 가까이하지 말 것이니, 즐겨 애욕을 익히거나 혹은 스스로 고행하는 것이다. 현성의 법이 아니며 심신을 피로하게 하여 능히 행할 바가 아니다. 비구여, 이 두 변을 제외하고 나서 다시 중도가 있느니라.

比丘出家者는 不得親近二邊이니 樂習愛欲이나 或自苦行이라 非賢聖法이요 勞疲形神하여 不能有所辦이라 比丘 除此二邊已하고 更有中道니라. [大正藏 22, p. 788上 四分律]


이 중도선언은 이와 같이 한역(漢譯)의 오분율(五分律), 사분율(四分律)에도 나오나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장경의 기록과 같이 명백하고 정확하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깨치신 것이 중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남전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숫타니파타(Suttanipāta)라는 경(經)이 있는데, 그 가운데 피안도품(彼岸道品)에서 중도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두 극단인 두 변에도 집착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의 행동입니다. 많은 불교학자들은 율장(律藏)에 있는 초전법륜의 중도대선언을 불교의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데, 혹 또 논란하기를 그보다 더 앞선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도 중도의 내용이 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기에 여기 「피안도품」을 인용한 것입니다.


중도적 삶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좋다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에 상관없이 가지려 하고, 불리하거나 싫은 일이라면 조금도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중생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취사선택의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중생들은 평소에 이런 마음을 잘 조절하지 못합니다. 조절하지 못하면 대립하고 갈등하게 되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상의 삶 속에서의 마음 씀씀이를 거문고 줄을 맞추듯이 하고, 일을 할 때에도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문고 줄을 너무 헐겁게 하면 소리가 늘어지고, 반대로 너무 팽팽하게 조이면 둔탁한 소리가 나서 아름다운 소리를 얻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거문고 줄에 비유하여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중도(中道)적 행위를 강조하신 것이죠.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실 당시 인도사회는 주로 번뇌와 욕심의 근원인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苦行)주의와 감각적인 쾌락(快樂)주의의 가르침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극단적인 사상과 가르침으로는 중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올바른 진리의 실천 방법으로써 중도를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도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도리, 양 극단을 떠난 올바른 실천을 모두 중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경전에서는 ‘중(中)에 의해 법(法)을 설(說)한다’라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연기(緣起)법과 중도설로 설명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교설이 연기와 중도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의 이론적 토대는 연기법, 실천적 방법은 중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중도는 실천적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중도를 중간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중(中)은 정(正)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와 너, 옳고 그름의 대립된 생각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관계의 형성, 인과(因果)의 법칙 안에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괴로움을 치유하며 대안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중도의 실천으로 제시된 것이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고, 대승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천으로 보살의 수행이 제시되면서 완성된 수행방법이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불교의 진리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눈 밝은 스승들께서는 스스로 지혜의 눈을 갖추어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알 수 있어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금강산을 완벽하게 알 수 없듯이, 진리의 세계는 설명이나 표현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안내할 수는 있는 것처럼,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노력하면 진리의 가르침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깨달으신 경지를 실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또 모든 사람에게 그 길에 이를 수 있음을 실제로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중도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목적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 그것을 중도라 하고, 가장 바른 길의 모습이기 때문에 정도(正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

불교 공부를 하는데 어려움 중의 하나가 불교 용어의 어려움이지요. 중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초보불자님들로서는 당연한 일 중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불교학자인 장휘옥 박사님의 말을 빌리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중'은 두 가지 극단적 입장을 합쳐서 둘로 나눈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와 낙, 혹은 유와 무, 단(斷, 단멸)과 상(常, 상주) 등의 두 개의 극단적인 양면을 떠나 자유롭게 되는 사고방식, 생활방식을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중도 사상은 불교 전반에 걸쳐 일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장휘옥 저, 불교학 개론 강의실2)


불교의 중도를 말하는 것 가운데는 저 유명한 용수보살의  팔불중도(八不中道)가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不生亦不滅), 항상도 아니며 단절도 아니고(不常亦不斷),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고(不一亦不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눈다(不來亦不出)는 것입니다.  또한 용수는 '연기하는 것을 즉 '공' 이라 설한다. 이것은 가명(假名)이며, 중도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중도=공=연기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을 보아도 중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감이 잡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알 것 같기도 한데 막상 말하려고 하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중도를 이렇게 이해하지 말고 '사물을 전일적, 전체적으로 사고하는 가르침'라고 이해하면 의외로 쉽습니다. 즉, 중도는 말 그래도 '가운데 있는 길'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있는 그대로 '통째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선악을 말할 때 선이 있고 악이 있는데 그 가운데, 또는 선악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악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성속도 거룩하고 속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성속이 없는 것입니다. 팔불중도를 보면, 생멸이 본래 없고 상단이 본래 없으며 일이, 내출이 본래 없는, 모두가 하나인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분법적 사고'를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게 있고 속된 것이 있다고 보아 성은 갈망하고 속은 버리려 하는데, 그래서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종교인, 스님을 성직자라 부르는 이상한(?) 분도 있는데,  이 세상은 본래 성속이 없다는 것이 중도입니다. 


선악도 마찬가지이며, 그 외 세상의 모든 대립적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생사가 있고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바로 열반의 다른 모습이며, 번뇌가 따로 있고 깨달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바로 깨달음의 다른 표현이라고 바로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 아름답고 추한 것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니 중도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중도를 알기 위해 극단적인 생각을 '떠난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그 '양 극단을 떠난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따라서 선악, 생멸을 만들어 놓고 이미 만들어진 그 중간, 또는 양 극단을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악, 생멸, 미추, 호불호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출처 : 명상스쿨
글쓴이 : 선 암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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