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관련

[스크랩] 공안과 화두는 다르다!

수선님 2018. 11. 25. 11:44
 


공안과 화두는 다르다!


이제까지 화두에 대한 나의 정리는 이러하였다. 화두의 역할은 끝임 없이 일어나고 변화하는 생각을 하나의 생각에 묶으려는 것이다. 즉 일념을 만드는 작업이 수행이요 기도라 본다. 화두의 선택은 큰스님에게 받거나, 어록을 읽다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의문을 참구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러 가지 어록을 통해서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화두는 찾지 못했었다.


다른 스님들이 큰스님께 받은 화두 역시 어록의 내용과 같은지라 별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래서 수식관을 했으나 열정이 사라지면서 그 의미 또한 희미해졌다. 그 후 ‘왜 화두는 1700이어야 하나? 하나면 되지’라는 비꼬는 의문을 가져 왔다. 다르게 '왜 17만은 안되는가?' 이다. 최근에는 170만도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왜 일까?


우연히 인경스님의 동대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인경스님은 나의 생각보다 본질적이었고 살아있었다.


인경스님의 주장은

공안은 역대 스님들이 스승으로부터 그 자신의 삶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질문을 받아 참구했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이 화두를 선택하고 공부했다’는 하나의 先例이다. 선례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화두는 수행자 자신의 삶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의문을 찾아내어 그에 적확히 상응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즉 화두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이 차이를 발견한 인경스님의 눈이 날카롭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의 제방에서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역대스님들이 참구했던 공안을 가지고 화두라고 끌어안고 참구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기 때문에 성글어지기 마련이라고 본다. 즉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 죽은 화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은 화두를 던져놓고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제자를 질책한다면 화두의 기본원리를 모르는 스승이라 하겠다.


물론 실참자가 옛 공안에서 진실로 의심이 일어났다면 다행이다.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 것으로 본다.


비유한다면 지금 아프리카에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 보다가 자신의 손톱 밑의 가시가 더 큰 고통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남의 의문은 내 의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스승은 제자의 풀리지 않는 본질적인 의문을 어떻게 찾아 던질 것인가가 난제가 될 것이다. 의미 없는 질문을 던져 얼마 가지 않아서 풀려버리거나 실참자가 별로 마음에 끌리지 않는 의문을 던진다면 스승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옛 공안에서 찾아 던진다면 죽은 스승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론을 카피해서 자기이론이라 우기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수행을 하려는 자 역시 인생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만유에 대해서 본질적인 의문이 내재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일상적인 의문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소한 일에 관심에 더 이상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는, 즉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의문이다. 이 의문에 직접적으로 상응하는 질문이 던져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유를 한다면 수행자의 내면의 본질적 의문은 잘 마른 섭이요. 스승의 질문은 불꽃에 비유 될 수 있다.


손가락도 못보고 사람의 모양에 집착하는 한국의 간화선


한국불교에서 끊임없이 주장하는 신심이다. 즉 대분심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심이나 분심은 열정의 다른 단어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 출가하면서 열정이 타오르는 불과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불과 같은 열정은 직접적인 자신의 문제와 만났을 때 오래 지속되고 놓아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문제(공안)에 대해서 분심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대분심을 주장하는 것은 화두를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소위 큰스님들이 제자에게 자신의 무능을 전가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즉 화두를 제대로 던지면 신심이나 분심 따위는 주장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계율을 주장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자신의 문제에 완전히 몰입을 하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은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먹는 것과 자는 것 또한 자신의 문제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송(誦)화두이다. 화두를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의 무능을 제자에게 떠넘기기 위해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무능함을 법으로 비추어지기를 바람이 있어서 일까? 무능하면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승납이 충분히 된 스님이다. “선방에 앉아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할 것이 없어지면 (몇 년이 소요될지 모르지만) 그때 가서 화두가 잡힌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화두라는 것을 볼일 다 보고 해야 하는것? 숨이 넘어가기 전에 잠깐하면 되지 않을까?


진정하게 자신의 화두를 만나보지 못한 스님들, 즉 공안을 자신의 화두로 인식한 스님들은 나중에는 자신의 틀(자신의 사상이나 계율)이 깨어질까 두려움에 휘말려 버리게 된다는 것을 보아왔다. 자신의 고정관념의 틀에 끊임없이 자신을 속박하는 것이다. 그 틀을 자신의 안식처로, 속박은 자신을 괴롭히는 도구로 이용된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자신이 수행자라는 것을 외부로 알리는 수단으로 쓰인다. 그들이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현실과의 타협방식이다. 인간은 현실과 완전히 결별된 상태로 살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과의 타협에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계율이라는 밥그릇이 깨어질까 두려운가?


나의 경우, 불교를 알기 전에


“인간의 생각은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 걸까? 우주만유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고 수학적으로 그것을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수년에 걸쳐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 있다면 인간의 인식작용과 사고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나름대로 증명을 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내제한 사고를 나는 여전히 할 수밖에 없다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우연히 절에 들어 단층을 보면서 불교에 뭔가 잘짜여진 있는 이론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내면의 문제점을 가진 상태에서 범어사 내원의 처사로 있으면서도 ‘과연 여기서 나의 사고를 뒤집어 놓을 만한 혁명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우연히 ‘부처님 말은 뗏목과 같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확신을 얻고 삭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현상에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날 때 행동은 거침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중노릇을 해왔지만 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정확히 상응하는 질문(화두)을 던져주는 자는 누구도 없었다. 지금은 스스로 찾으려 하지 않고 제3자가 혁명을 일으켜주길 바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1700공안과 큰스님에 대해서 마조히스트 적으로 반응을 하게 된 것은 유가가 팽창하던 시기와 같을 것이라는 추축을 해본다. 누군가가 시간적인 측면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본다. 남송의 주희시대를 기준으로 화두가 만들어지는 시기의 끝과 만들어진 공안이 화두처럼 이용되는 시간의 경계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지금 한국에는 공안이 곧 화두라는 그릇된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간화선이 최상승법이라는 믿음만으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누구의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가?’가 지금 승려들의 관심사이다.

손가락도 달도 의미가 없고 다만 ‘손가락의 주인이 누구냐?’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나치의 방식에 머물고 있는 종교들의 선전방식


생사가 고통이다. 즉 변화하는 그 자체를 고통으로 보도록 유도한다. 사람의 모든 생각은 찰나찰나 변화한다. 그런 까닭에 생각자체가 고통이다. 그리고 변화가 없는,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안락을 찾으라고 선전한다. 여기에는 동양인의 치명적인 思考(사고)적 오류가 숨어 있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생각 또한 그러한데 이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즉 변화를 싫어하는 동양인의 사고를 이용한 것이다. 영어는 동사위주의 언어이고 중국어는 명사위주의 언어인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권위라는 것, 이것은 종교의 본래의미를 극단적으로 회손 또는 왜곡시킨다. 더구나 중국과 한국은 유가사상에 젖어 그 병패는 심각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한국기독교는 권위주의에 빠져 있다.” 미국에서 30년간 살아온 한 장로의 말이다. 같은 원리로 큰 스님에 대해, 역대스님의 공안에 대해 어떤 비판도 없이 수용하려는 자세에서 볼 수 있다. 즉 윗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불문에 붙이는 피학성음란증적 반응과 ‘최고의 진리’, ‘유일’이라는 의미를 곁들여 덮어씌운다.


그에 의해서 파생되는 속인과 수행자라는 분리, 정법과 사법이라는 분리, 대승과 소승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만 보도록 세뇌 한다. ‘생사를 넘어서야 한다.’ 와 같은 현실(세상)을 부정적으로, 하찮게 보도록 유도하고 출세간을 가장 위대하게 보게 하는 세뇌, 그리고 더더구나 유치하게도 천당 지옥이라는 방식이다.


어느 사회학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이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 나의 질문의 관점은 ‘어릴 때부터 유일이라는 관점만 세뇌 되었을 때 사회학이라는 다양성을 어떻게 수용 하는가?’하는 것이다.

그 교수가 하는 말은 “대부분 1, 2학년 때 자퇴합니다.”였다. 인간은 어떻게 세뇌되었느냐에 따라 세상을 세뇌된 눈만 뜨고 살아간다. 바로 코끼리 증후군에 걸린다.


히틀러가 전 독일 국민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불안, 즉 볼셰비즘의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한 방향에서는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히틀러가 원하는 방향으로 물꼬를 튼 것 이었다. 바로 질서와 전체주의라는 나치주의이다.


이차대전 때 나치에 의한 희생자는 약5천만이었다고 한다. 두려움이 이용되면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다.


인간에게 있어서 두려움이란정신적인에너지는 두려움으로 발산할 곳을 찾는다.


종교가 히틀러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싫어하는 것’과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방식’에 계속 의존한다면 종교의 맥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감을 상실한 ‘군중에 의해서’, ‘하나의 통치자’에 의해서 쉽게 도취되는 어중이떠중이만 모여들 것이다. 즉 세상살이가 힘들어서,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실도피주의와 같은 사람들만이 넘쳐날 것이다.


나의 경우 내가 싫어하는 것과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방법과 고통을 증폭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전생의 업장, 전생의 선근과 9대가 선을 쌓아야 어쩌고 하는 것 같은 방식에는 역겨웠다. 내가 어렸을 때 힘들게 자라온 것에도 불구하고...


특히 福이라는 단어는 공짜심리가 내제된 단어임을 알아야 한다. 노력 없이 은근히 바라는 마음, 저절로 생기기를 바라는 거지근성이 들이 있는 단어이다. 최근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믿고 복 받으세요”한다. 못된 것은 빨리 배운다는 속담이 있다.


역설적이겠지만 자신의 결점을 덮기 위해서는 아닌 것을 끊임없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가장 큰 함정이다. 그것이 그들의 최후의 밥그릇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hyokyung--


심리학에서든 화두에서든 어떤 질문을 어떻게 던질 것인가가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같은 원리로 좀 더 표면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사건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논리적 생각차원으로서 화두와는 거리가 멀다. 일상적인 삶(고통을 비롯한 모든 사건들)이란 우리의 생각을 넓게 하고 정교하게 할 수 있는 수단들이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깊이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본질적인 의문이 일어날 수 있고 또한 누군가(구루 또는 자연의 모든 것)가 그에 상응하는 의문을 던져 졌을 때 마음이 그 의문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다고 본다. 즉 수행자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삶의 깊이가 얕은 의식의 표면에 머무르고 있는 한 근원적인 질문이나 말들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종교인이라면 남의 말(부처의 말)을 다시 외는 카세트나 MP3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를 한 것처럼 스스로를 도취시킨다. 이 도취는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불안들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에 불과하다. 편하게 살려고, 명이 짧다와 같은 불안을 피해서 절로 들어왔다면 현실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삶이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한 인프라인 것이다.


‘인생이란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구조는 자신의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내버려 두지 않게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서 ‘현생에 있어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자신의 문제 속에 인생의 답이 있다는 것이다.


수행자라면 그 본질의 깊이가 다르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개개인의 한생에 있어서 자신의 문제를 통하여 삶을 어떻게 형성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갈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내의 문제만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에서 인생의 가치의 깊이를 더 할 수 있도록…….


karma를 다양하게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탁월한 karma의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의 일이다. 신자 한 사람이 사주를 보고 왔는데 ‘딱 들어맞았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꼬인 일과 망친 일을 모두 예측을 했으니 사주를 봐주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의 일은 망치지 않을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나에게 “스님도 사주를 공부해보시죠”한다.



이 일을 비유한다면

학생이 자신의 숙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숙제를 한 까닭에 선생님으로부터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나 처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운다는 신분으로 볼 때 그렇게 학교를 계속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가 졸업을 할 때 무엇을 얻게 될까?’ 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 않았을 때 처벌의 두려움을 배울 뿐, 했을 때의 성취감은 배우지 못한다.

두려움을 피해서 어쩔 수 없이 삶을 사는 인간으로 전락할 것이다. 또는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류계층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두려움을 피해서 종교로, 점집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진리에 대한 정의에서 내가 좋아하는 세스의 말이다.

진리란 제3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다수가결로 결정될 일도 아니고 단지 스스로가 찾아가는 것이다.


이글을 제대로 인식 할 줄 안다면 남의 말을 카피해서 자신의 것인 냥 착각하는 일

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마이너스가 되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또는 자

신의 문제를 사주로, 종교로 풀 수 있다고 본다면 뼈가 저려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본다. 


[인경스님의 연구down]


출처 : 명상스쿨
글쓴이 : 선 암 ♬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