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구사론

[스크랩] 아비달마구사론 제 14 권

수선님 2018. 12. 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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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14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4. 분별업품 ②
  [업의 성(性)과 계(界)·지(地) 분별 등의] 방론(傍論)을 이미 다 마쳤으니, 이제 마땅히 다시 앞에서 언급한 표업·무표업의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표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율의와
  불율의와 이 두 가지가 아닌 것이 그것이다.
  無表三律儀 不律儀非二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무표에 대해 간략히 설하면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율의(律儀)이며, 둘째는 불율의(不律儀)이며, 셋째는 이 두 가지가 아닌 것으로, 이를테면 비율의비불율의(非律儀非不律儀)이다.
  악계(惡戒)의 상속을 능히 막고 능히 소멸하기 때문에 율의(samvara, 護 혹은 調伏으로 번역되기도 함)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같은 율의는 몇 가지로 차별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율의에는 별해탈(別解脫)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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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려(靜慮)와 도생(道生)이 있다.
  律儀別解脫 靜慮及道生
  
  논하여 말하겠다. 율의의 차별에는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이니, 말하자면 욕계의 계(戒)이다.1) 두 번째는 정려생율의(靜慮生律儀)이니, 말하자면 색계의 계이다.2)세 번째는 도생율의(道生律儀)이니, 말하자면 무루계이다.3)
  첫 번째 율의의 상(相)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첫 번째 율의에는 여덟 가지가 있지만
  실제적인 계체(戒體)는 오로지 네 가지이니,
  형색이 바뀌면 명칭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기 차별되는 것이지만 상위하는 것도 아니다.
  初律儀八種 實體唯有四
  形轉名異故 各別不相違
  
  논하여 말하겠다. 별해탈율의의 상(相)의 차별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필추율의(苾芻律儀)이며, 둘째는 필추니율의(苾芻尼律儀)이며, 셋째는 정학율의(正學律儀)이며, 넷째는 근책율의(勤策律儀)이며, 다섯째는 근책녀율의(勤策女律儀)이며, 여섯째는 근사율의(近事律儀)이며, 일곱째는 근사녀율의(近事女律儀)이며, 여덟째는 근주율의(近住律儀)인데,4) 이와 같이 여덟
  
1) 별해탈율의(pratimok a sa vara, 혹은 波羅提木叉로도 음사함)란 구족계를 받을 때 각각의 계법(戒法)에 대해 획득하는 무표로서, 각각의 계법에 따라 각기 별도의 해탈을 얻기 때문에 '별해탈'이라고 이름하였다. 예컨대 불살생계는 살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불투도계는 도둑질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2) 정려생율의(dhyana sa vara, 定共戒라고도 함)는 색계의 정려를 닦을 때, 혹은 정려에 의해 생겨나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을 말함.
3) 도생율의(anasrava sa vara, 道共戒 혹은 無漏律儀라고도 함)는 무루성도를 획득할 때 생겨나는 방비지악의 힘을 말함.
4) 필추율의(bhik u sa vara, 혹은 比丘戒)란 출가남성이 수계할 때 획득하는 무표를 말함. 필추니율의(bhik u -sa vara, 혹은 比丘尼戒)는 출가여성의 계. 정학율의(sik ama a-sa vara, 혹은 式叉摩那戒)는 비구니가 되기 위한 1년간의 시험기간 동안 배우는 불음(不)·부도(不盜)·불살생·불허광어·불음주·불비시식(不非時食)의 6계. 근책율의(srama era-sa vara, 혹은 沙彌戒)는 20세의 비구가 되기 전까지의 10계. 근책녀율의(srama erika-sa vara, 혹은 沙彌尼戒)는 비구니가 되기 전까지의 10계. 근사율의(upasaka-sa vara, 혹은 優婆塞戒)는 재가남성의 5계. 근사녀율의(upasika-sa vara, 혹은 優婆夷戒)는 재가여성의 5계. 근주율의(upavasa-sa vara, 혹은 波婆沙戒)는 근사·근사녀로서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수지하는 8계이다. 이 중의 앞의 다섯 가지 율의는 이악행(離惡行)과 이욕행(離欲行)을 닦는 보특가라의 율의이며, 근사와 근사녀율의는 이악행은 닦을 수 있지만 이욕행은 닦을 수 없는 보특가라의 율의이다. 즉 그들은 욕사행(欲邪行)은 떠났으나 비범행은 떠나지 않은 자들이다. 그리고 근주율의는 악행과 욕행을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자들의 율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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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로 차별되는 율의의 상을 총칭하여 첫 번째 별해탈율의라고 이름하였다.
  그런데 비록 그 명칭에는 여덟 가지가 있을지라도 실제적인 계체(戒體)는 오로지 네 가지일 뿐이니, 첫째가 필추율의이며, 둘째가 근책율의이며, 셋째가 근사율의이며, 넷째가 근주율의이다. 오로지 이 네 종류의 별해탈율의만이 모두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니, 그 상이 각기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필추율의를 떠나 별도의 필추니율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근책율의를 떠나 별도의 정학(正學)과 근책녀율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근사율의를 떠나 별도의 근사녀율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형색[形]이 바뀜에 따라 비록 계(戒) 자체는 버리거나 획득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그 명칭 상에는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형색이란 형상(形相)으로, 바로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을 말한다. 즉 이러한 두 근으로 말미암아 남·여 형색의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인데, 단지 형색이 바꾸어짐에 따라 온갖 율의의 명칭이 필추나 필추니 따위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근이 바뀐[轉根] 상태에서는 본래 필추율의였던 것을 필추니율의라고 이름하며, 혹은 필추니율의였던 것을 필추율의라고 이름한다. 본래 근책율의였던 것은 근책녀율의라고 이름하며, 혹은 근책녀나 정학율의였던 것은 근책율의라고 이름한다. 본래 근사율의였던 것은 근사녀율의라고 이름하며, 혹은 근사녀율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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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 것은 근사율의라고 이름한다. 이는 바로 근이 바뀐 상태에서는 먼저 획득하였던 율의을 버리거나, 일찍이 획득하지 않았던 [이성(異姓)의] 율의를 획득하게 되는 인연을 갖지 않기 때문으로, 네 가지 율의는 세 가지의 계 자체와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다.5)
  만약 근사율의에서 근책율의를 받거나 다시 근책율의에서 필추율의를 받을 경우, 이러한 세 가지 율의는 악행을 원리(遠離)하는 방편(즉 계)을 증가시켜 충족하였기 때문에 각기 다른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니, [그렇다면] 이는 한 푼의 금전이 두 푼이 되고, 나아가 다섯 푼이 열 푼, 스무 푼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율의 자체는 각기 다르지만 그것이 구족하여 단박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6)
  세 종류의 율의 자체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 그 상도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율의는] 그것들이 구족할 때 단박에 생겨난다. 이를테면 세 가지 종류의 율의 중에는 세 가지의 이살생계(離殺生戒) 내지 세 가지의 이음주계(離飮酒戒)를 구족하고 있으며, 그 밖의 계(戒)의 수가 많고 적은 경우에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야 한다.7)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그 세 가지를] 서로 비교해 보면 동류인데, 어떠한 차별이 있을 것인가?8)
  인(因)과 연(緣)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 다름이 있는 것이다.9)
  
  
5) 필추니·근책녀와 정학·근사녀의 율의는 필추·근책과 근사의 율의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이는 다만 그것을 수지하는 이의 형색(즉 여근)에 따라 그 이름만이 바뀐 것이다.
6) 이는 금전 한 푼에 한 푼을 더하면 두 푼이 되고, 다섯 푼에 다섯 푼을 더하면 열 푼이 되듯이 근사의 5계에 5계를 더하여 근책의 10계가 되고, 근책의 10계에 240계을 더하여 필추의 250계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불살생계라도 다른 율의의 그것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을 구족하여 근책이나 필추율의를 성취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7) 즉 필추·근책·근사의 율의는 각기 다른 5계를 구족하며, 그 밖의 비시식(非時食) 등의 경우 필추와 근책에는 존재하지만 근사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5계 이외의 그 밖의 것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분별하라는 뜻이다.
8) 이를테면 필추의 불살생율의의 무표와 근책·근주의 불살생율의의 무표는 다 같이 동류인데, 거기에 무슨 차별이 있는 것인가? 하는 난문.
9) 5계(근사계)·10계(근책계)·구족계(필추계) 등의 계를 받으려는 의요 즉 희망이 율의의 인(因)이라면, 수계의식에 따른 제반 절차가 율의의 외적인 연(緣)이다. 이를테면 5계의 근사는 한 명의 화상(和尙, upadhyana, 즉 授戒師)이 필요한 반면, 근책은 화상과 아사리(阿闍梨, acarya, 軌範師 또는 敎授師)가, 필추는 3사(師) 7증(證)의 10명을 필요로 한다. 즉 근사·근책·필추율의에 모두 이살생(離殺生)·이음주(離飮酒) 등의 율의가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이러저러한 율의를 받고자 하는 마음(즉 內因)과 율의를 주는 계사(戒師)의 수(즉 外緣) 등이 다르기 때문에 설사 동일한 계목(戒目)이라 하더라도 그 체(體)는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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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러저러한 다양한 종류의 학처(學處, 개별적인 계목을 말함)를 받기를 희구하고, 이러저러한 다수의 교만과 방일[憍逸]에서 떠날 때 비로소 여러 가지 다양한 살생 등의 연을 떠나 [이러한 이살생계를] 일으키게 된다. 즉 [그 같은 악행으로부터] 원리(遠離)하게 되는 것은 모두 인연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인과 연이 다르면 원리에도 다름이 있는 것이다.10)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세 가지 율의는 동류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필추율의를 버릴 경우, 그 때 마땅히 세 가지 율의를 모두 버리게 될 것이니, 앞의 두 가지(근사율의·근책율의)는 뒤의 한 가지(필추율의) 중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결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세 가지 율의는 각기 다르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율의는 상위(相違)하는 것도 아니니, 동일한 소의신 중에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뒤의 것(즉 필추율의)을 받음에 따라 앞의 율의를 버리는 것도 아니며, 필추계를 버렸다고 해서 근사 따위가 되지 못하는 일도 없는 것이다.11)
  근사·근주·근책·필추의 네 가지 종류의 율의는 어떻게 안치 건립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10) 『현종론』 (권제19,한글대장경200, p. 518)에 의하면 여기서 인(因)은 어떤 종류의 학처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고, 연(緣)은 이를테면 교만과 방일을 떠나는 것이다.
11) 즉 이전에 근사율의를 받고 그 뒤에 근책율의 내지 필추율의를 받더라도 앞의 근사 내지 근책을 버리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반대로 필추율의를 버렸다고 해서 반드시 근책·근사율의마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이 세 가지 율의는 각기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일한 소의신에 동시에 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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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가지·여덟 가지·열 가지의 떠남과
  마땅히 떠나야 할 일체의 떠남을 받는 것으로서
  근사와 근주와
  근책과, 그리고 필추를 건립하는 것이다.
  受離五八十 一切所應離
  立近事近住 勤策及苾芻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 중에서 언급한 숫자의 순서와 같은 네 가지의 원리(遠離)에 근거하여 네 가지 율의를 건립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마땅히 원리해 할 다섯 가지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받으면 그것으로 첫 번째인 근사율의를 건립한다.
  무엇을 일컬어 마땅히 원리해야 할 다섯 가지의 법이라고 한 것인가?
  첫째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殺生]이며, 둘째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不與取]이며, 셋째는 애욕의 삿된 행[欲邪行]이며, 넷째는 거짓말하는 것[虛誑語]이며, 다섯째는 온갖 술을 마시는 것[飮諸酒]이다.
  만약 마땅히 원리해야 할 여덟 가지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받으면, 그것으로 두 번째인 근주율의를 건립한다.
  무엇을 일컬어 마땅히 원리해야 할 여덟 가지의 법이라고 한 것인가?
  첫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며, 둘째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이며, 셋째는 청정하지 않은 행[非梵行]이며, 넷째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온갖 술을 마시는 것이며, 여섯째는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塗飾香鬘舞歌觀聽]이며, 일곱째는 높고도 넓으며 아름다운 평상이나 의자에 앉거나 눕는 것[座臥高廣嚴麗牀座]이며, 여덟째는 먹을 때가 아닌데 먹는 것[食非時食]이다.
  만약 마땅히 원리해야 할 열 가지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받으면, 그것으로 세 번째인 근책율의를 건립한다.
  무엇을 일컬어 마땅히 원리해야 할 열 가지의 법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앞(근주율의)의 여섯 번째를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는 것'과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으로 나누어 두 가지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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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금은 등의 보배를 받거나 축적하는 것[受畜金銀等寶]을 더하여 열 번째 법으로 삼았다.12)
  그리고 만약 마땅히 원리해야 할 일체의 신·어업으로부터 떠나는 것(즉 具足戒)을 받으면, 그것으로서 네 번째인 필추율의를 건립한다.13)
  별해탈율의에는 여러 가지의 명칭의 차별이 있는데, 이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들은 모두 시라(尸羅)·
  묘행(妙行)·업·율의라는 명칭을 획득하며
  오로지 초찰나의 표업·무표업만은
  별해탈·업도(業道)라고도 이름한다.
  俱得名尸羅 妙行業律儀
  唯初表無表 名別解業道
  
  논하여 말하겠다. [별해탈율의는] 험악한 업[險業]을 능히 평탄하게 하기 때문에 '시라(尸羅, la)'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그 말을 훈석(訓釋)하여
  
  
  
12) 그렇다면 근주율의의 8계에서는 왜 두 가지를 합하여 1계로 삼은 것인가? 『현종론』 권제19(한글대장경200, p. 520)에 의하면 많은 학처를 두려워하는 재가의 유정들을 이끌어 쉽게 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로서, 마치 불율씨자(佛栗氏子)를 위하여 학처에 다만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불율씨자(즉 跋耆子, Vrijiputra, Vajjiputta)는 250가지나 되는 많은 학처를 두려워하여 속퇴하고자 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그를 달래기 위해 증상의 계·정·혜의 세 가지 학처를 설하였다.(『대비바사론』 권제46,한글대장경119, p. 489 참조)
13) 부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비구의 별해탈율의는 바라이법(波羅夷法, 네 가지)·승잔법(僧殘法, 열세 가지)·부정법(不定法, 두 가지)·사타법(捨墮法, 서른 가지)·파일제법(波逸提法, 아흔 가지 정도)·회과법(悔過法, 네 가지)·중학법(衆學法, 백 가지 정도)·멸쟁법(滅諍法, 일곱 가지)의 여덟 가지 조항, 대략 250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승잔'이란 성적인 악습이나 승가를 분열시키려는 행위 따위를 말하며, '부정'이란 여성과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행위를, '사타'란 의복이나 그 밖의 물품의 소유에 대한 위법을, '파일제'는 여러 가지 소재(小罪)를, '회과법'은 식사에 관한 비위를, 중학법은 식사나 탁발, 설법 등 그 밖의 제반 예의에 관한 세칙을, 그리고 '멸쟁법'이란 승단 내의 싸움을 진정시키는 방법에 관한 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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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면, 청량(淸凉)하기 때문에 ['시라'라고 이름한 것으로],14) 가타(伽陀)에서 "계를 수지하는 것은 즐거움이니, 몸에 뜨거운 번뇌가 없다. 그래서 '시라'라고 이름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또한 [별해탈율의는] 지자(智者)가 칭탄하고 찬양하는 바이기 때문에 '묘행(妙行)'이라고도 이름하며, 소작(所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업'이라고도 이름한다.15)
  무표를 역시 '부작(不作)'이라고도 이름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여기서는 [무표를] 소작 그 자체라고 설하는 것인가?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慚恥]이 있는 자는 무표의 힘을 수지하여 온갖 악을 짓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 '부작'이라 이름하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표업과 사업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의미에서 '소작'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이는 바로 [업을] 짓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는 바로 [업이] 지은 결과이기 때문에 '작(作)'이라 이름해도 아무런 과실이 없다"고 하였다.16)
  나아가 [별해탈율의는] 신·어업을 방호(防護)하기 때문에 '율의'라고도 이름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명칭은 별해탈계가 성취되는 최초의 단계나 그 이후의 단계에 따라 차별됨이 없이 모두에 통용되는 명칭이지만, 오로지 최초찰나의 표업이나 무표업은 '별해탈'이나 '업도(業道)'라는 명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즉 계를 받을 때 최초 찰나의 표업과 무표업은 여러 가지의 악(惡)을 버리기 때문에, 최초의 찰나에는 각기 개별적으로 악을 버린다는 뜻에 근거하여 '별해탈'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때(즉
  
  
  
14) 이는 시라(s la, 戒)를 어원 s (시원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하여 s ta 즉 '청량'의 뜻으로 이해한 해석이다.
15) 무표업은 신·어표업에 의해, 표업은 사(思)심소에 의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소작(所作)이라고도 이름한다. 따라서 별해탈율의는 이러한 소작을 본질로 삼기 때문에 '업'이라고도 이름한다는 것이다.
16) 즉 무표업에는 방비지악의 공능이 있기 때문에 선업을 짓는 원인이 되며, 또한 이전의 지은 표업과 사업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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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찰나) 지어야 할 업이 구경(究竟)에 이르렀다면 업(즉 思業)이 창달되었다는 뜻에 근거하여 '업도(業道)'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17) 그래서 최초찰나의 그것을 '별해탈'이라 이름하고, 또한 '별해탈율의'라고도 이름할 수 있으며, 또한 역시 '근본업도'라고도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2찰나로부터 그것을 버리기 전까지는 '별해탈'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별해탈율의'라고 이름하며, '업도'라고 이름하지 않고 다만 '후기(後起)'라고만 이름할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떠한 율의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8중(衆)이 별해탈율의를 성취하며
  정려와 성법(聖法)을 획득한 자는
  정려율의와 도생율의를 성취하는데
  뒤의 두 가지는 수심전(隨心轉)이다.
  八成別解脫 得靜慮聖者
  成靜慮道生 後二隨心轉
  
  논하여 말하겠다. 8중(衆) 즉 여덟 무리는 모두 별해탈율의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필추로부터 근주에 이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면 외도는 계를 받는 일이 없는 것인가?
  비록 계를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별해탈계'라고는 할 수 없다. 즉 그들이 받는 계는 온갖 악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할 만한 공능을 갖지 못하였으니, 존재[有]에 의지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정려생율의(靜慮生律儀)란 이를테면 정려로부터, 혹은 정려에 근거하여 생겨난 율의를 말하는 것으로, 만약 정려를 획득한 자이면 결정코 이러한 율
  
  
  
17) 최초의 찰나에 닦아야 할 바가 완전히 닦아졌을 경우, 이전에 수계하기를 희구하였던 사(思)심소는 그러한 최초찰나의 표업·무표업을 연으로 하여 상속하기 때문에 최초 찰나의 별해탈율의를 '업도'라고 이름한 것이다. 즉 여기서 업도란 사심소[思業]가 노니는 길[所遊路, 즉 道]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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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를 성취한다. 그리고 온갖 정려의 가장자리[邊, 이를테면 近分定]도 역시 정려라고 이름하니, 촌읍 근처도 역시 촌읍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촌읍에도 벼논 따위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즉 근분정)도 역시 그와 같은 이치인 것이다.18)
  도생율의(道生律儀)는 성자만이 성취하는 율의로서,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학(學)과 무학이다.
  그런데 앞(본론 권제6)에서 구유인(俱有因)을 분별하면서, '두 가지 율의는 바로 수심전(隨心轉)이다'고 논설하였는데, 이 세 가지 율의 중에서 그러한 두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정려생과 도생의 두 가지 율의가 그러한 것으로, 별해탈은 수심전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별해탈율의는 행위할 때와는 다른 마음[異心]에 있거나 무심(無心)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역시 항상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려와 무루의 두 가지 율의를 역시 또한 단율의(斷律儀)라고도 이름하는데, 이러한 명칭은 어떠한 상태에 근거하여 건립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미지정(未至定)의 9무간도(無間道)와
  구생하는 두 가지 율의를 '단(斷)'이라 이름한다.
  未至九無間 俱生二名斷
  
  논하여 말하겠다. 미지정 중의 9무간도와 함께 생겨나는 정려와 무루(즉 도생)율의는 욕전(欲纏 : 욕계에 繫屬되는 번뇌)의 악계(惡戒)와 그것을 능히 일어나게 하는 번뇌[惑]를 능히 영원히 끊기 때문에 '단율의'라고 이름한다.
  
  
  
18) 서울의 외곽도 서울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곳(즉 서울)에 벼논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정려의 가장자리인 근분정도 정려라 할 수 있고, 거기서 생겨난 율의를 역시 또한 정려생율의라고 할 수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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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혹 정려율의이면서 단율의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제1구(정려율의이면서 단율의가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를 제외한 그 밖의 유루의 정려율의이다. 제2구(단율의이면서 정려율의가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에 근거한 무루율의이다. 제3구(정려율의이면서 단율의인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에 근거한 유루의 율의이다. 제4구(정려율의도 아니고 단율의도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를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무루율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혹 무루율의이면서 단율의가 아닌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은 앞의 4구에 준하여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1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신·어업 상에만 율의를 건립할 것 같으면,] 세존께서 설하신 다음과 같은 간략한 계(戒)의 송문(頌文)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즉
  
  신율의(身律儀)가 선하도다.
  선하도다, 어율의(語律儀)가.
  의율의(意律儀)도 선하도다.
  참으로 선하도다, 모든 율의가.20)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근의 율의를] 마땅히 잘 수호해야 할 것이며, 안근의 율의에 마땅히 잘 안주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21) 그럴 때 이러한 의(意)율의와 근(根)율의는 무엇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19) 제1구(무루율의이면서 단율의가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를 제외한 그 밖의 무루율의이다. 제2구(단율의이면서 무루율의가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에 근거한 유루율의이다. 제3구(무루율의이면서 단율의인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에 근거한 무루율의이다. 제4구(무루율의도 아니고 단율의도 아닌 것)는 미지정의 9무간도를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유루율의이다.
20) 『증일아함경』 권제12(대정장2, p. 604중), "身行爲善哉, 口行亦復然, 意行爲善哉, 一切亦如是."
21) 『잡아함경』 권제11 제277경(대정장2, p. 75하); 동 권제43 제1170경(동, p.313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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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가지의 자성은 무표색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의 자성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지(正知)·정념(正念)과 화합한 것을
  의(意)와 근(根)의 율의라고 이름한다.22)
  正知正念合 名意根律儀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율의(의율의와 근율의)는 다 같이 정지(正知)와 정념(正念)을 본질로 삼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 그 같은 개념[名,즉 정지·정념]을 열거하고 나서 다시 '화합한 것'이라는 말을 설하였다. 즉 의율의는 혜(慧)와 념(念)을 본질로 하며, 이 두 가지 종류와 화합한 것을 근율의라고 한다. 따라서 '……을 떠나서 화합한다'는 말은 순서대로 그러한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23)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표업이나 무표업은 누가 어떠한 업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것은 얼마 동안인가?
  바야흐로 무표업의 율의와 불율의의 성취에 대해 먼저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별해탈에 머무는 자의 무표는
  
  
  
22) 의·근율의는 무표색을 자성으로 하는 예의 율의가 아니라 정지·정념을 본질로 하는 의식작용이다. 이는 즉 혜(慧)심소에 의해 의·근을 잘 억념하므로서 악을 방지하기 때문에 '율의'라고 하는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일 뿐이다.
23) 본송에서 정지와 정념이라는 각각의 개념을 열거하고 나서 다시 거듭하여 '화합한 것'이라는 말을 설한 것은, 이러한 두 가지 율의가 순서대로 각기 정지와 정념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의율의는 정념을 떠나 정지와 화합하고, 근율의는 정지를 떠나 정념과 화합한다는 말이 아니라 각기 두 가지 모두를 본질로 한다는 뜻이다. 즉 게송에서 '화합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의율의는 정지를, 근율의는 정념을 자성으로 한다는 주장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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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버리지 않았다면 항상 현재의 것이 성취되며
  제2찰나 이후에는 과거의 것도 성취되니
  불율의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住別解無表 未捨恒成現
  刹那後成過 不律儀亦然
  
  정려율의를 획득한 자는
  항상 과거·미래의 것을 성취하지만
  성도의 초찰나에는 과거의 것이 제외되며
  정(定)과 도(道)에 머물 때에는 중간(즉 현재)의 것을 성취한다.
  得靜慮律儀 恒成就過未
  聖初除過去 住定道成中
  
  논하여 말하겠다. 별해탈율의에 머무는 보특가라로서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는 동안은 항상 현세(現世)의 무표를 성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별해탈율의의 무표는 최초찰나 이후에는 과거의 그것도 역시 성취된다.24) 그리고 앞의 본송에서의 '아직 버리지 않았다면'이라는 말은 후찰나의 경우에도 두루 해당된다.25)
  그러나 산심(散心)에서의 무표(즉 별해탈율의)는 미래의 무표를 성취하는 일이 없으니, 수심전이 아닌 색은 그 세력이 미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이다.26)
  별해탈율의에 안주하는 이에 대해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율의에 머무는 자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아직 악계(惡
  
  
  
24) 별해탈율의에 머물면서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그러한 율의의 무표는 항상 법구득(法俱得)에 의해 현재의 것이 성취되며, 제2찰나 이후에는 법후득(法後得)에 의해 과거의 무표도 역시 성취되지만, 법전득(法前得)에 의해 미래의 무표가 성취되는 일은 없다.
25) 즉 후찰나에도 아직 별해탈율의를 버리지 않았다면 바로 그 때 후찰나의 무표를 성취한다.
26) 정려생이나 도생이 아닌 산심에서의 율의 즉 별해탈율의는 미래의 무표를 낳지 못한다. 즉 아직 마음의 소연이 되지 않는 불수심전의 색은 미약하여 법전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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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戒)를 버리지 않는 동안은 항상 현세의 무표를 성취하며, 최초찰나 이후에는 과거의 악계의 무표도 역시 성취한다.
  정려율의를 획득한 온갖 유정으로서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은 이는 대개 과거와 미래의 무표도 항상 성취하니,27) 다른 생(즉 전생)에서 상실한 과거의 정려율의를 현재의 최초찰나에 반드시 다시 획득하기 때문이다.28)
  무루율의에 머무는 일체의 성자도 과거·미래의 무표를 역시 항상 성취하지만, 다만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최초찰나(즉 고법지인)에는 반드시 미래의 무표는 성취할지라도 과거의 무표를 성취하지 않으니, 이러한 종류의 성도가 이전에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지금 현재 정려와 그러한 무루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순서대로 현재의 정려(즉 定俱戒)와 도생율의(즉 道俱戒)를 성취한다. 그러나 출관(出觀)할 때에는 현재의 무표를 성취하는 일은 없다.29)
  선·악의 율의에 안주하는 자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중(中,즉 비율의비불율의)에 머무는 자의 경우는 어떠한가?30)
  게송으로 말하겠다.
  
  중(中)에 머물면서 무표가 있을 경우
  
  
  
27) 정려율의는 수심전으로서 그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법전득(法前得)에 의해 미래의 무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28) 그러나 순결택분에 포섭되는 정려율의는 현재 최초찰나 중에 과거의 무표를 성취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다른 생에서 획득한 것은 목숨을 마칠 때 버리고 금생에 다시 그러한 법을 획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으로, 그러한 법과 구별하여 이해하기 위해 앞에서 '대개'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이다.(『현종론』, 앞의 책, p. 525)
29) 정려와 무루도의 무표는 수심전이기 때문에 산심(散心)이 현전할 때에는 필시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0) 율의와 불율의는, 일정기간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맹서함으로써 생겨난 힘으로서 악계의 상속을 막는 것을 율의라 하고 선계의 상속을 막는 것을 불율의라고 하는데 반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악을, 어떤 때에는 선을 행하는 이를 처중(處中)에 머무는 이라고 한다. 예컨대 비하라나 솔도파 승가라마를 조성하거나 제다(提多, 사당)에 예배하고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는 등은 처중의 무표를 낳는다.(『입아비달마론』 권상, 한글대장경176, p.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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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찰나에는 중간(현재)의 것을 성취하고
  후찰나에는 2세(과거·현재)의 것을 성취한다.
  住中有無表 初成中後二
  
  논하여 말하겠다. '중(中)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율의도 아니고 비율의도 아닌 것[非律儀非不律儀]에 머문다고 하는 말로서, 그것에 의해 일어나는 일체의 업이 반드시 모두 무표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무표를 갖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선계(善戒), 혹은 바로 악계(惡戒)의 종류에 포섭되는데, 그것의 최초의 찰나에는 단지 현재세의 무표만을 성취한다. 그런데 현재는 바로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처하기 때문에 [본송에서] '중간의 것을 성취한다'고 하는 말로써 현재의 그것을 성취한다고 설한 것이다.
  그리고 최초찰나 이후부터 그것을 아직 버리지 않을 때까지는 항상 과거·현재 2세의 무표를 성취한다.
  
  만약 어떤 이가 율의나 불율의에 안주할 때 악이나 선의 무표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만약 성취한다면 얼마의 시간을 지날 동안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율의나 불율의에 머물면서
  염(染)·정(淨)의 무표를 일으킬 경우
  초찰나에는 중간의 것을, 이후에는 2세의 것을 성취하니
  염·정의 세력이 다할 때까지이다.
  住律不律儀 起染淨無表
  初成中後二 至染淨勢終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율의에 머물지라도 수승한 번뇌에 의해 살박(殺縛) 등의 온갖 불선업을 지을 경우, 이에 따라 바로 불선의 무표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불율의에 머물지라도 맑고 깨끗한 믿음에 의해 예불(禮佛) 등의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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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갖 뛰어난 선업을 지을 경우, 이에 따라 역시 온갖 선의 무표를 일으키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두 가지 마음(선·불선심)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동안 그렇게 일어난 무표는 항상 상속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최초찰나에는 오로지 현재의 무표만을 성취하고, 그 이후로부터는 과거·현재의 무표를 모두 성취한다.
  
  무표업의 성취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표업의 성취관계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표업이 바로 지어질 때에는 중간의 것을 성취하고
  이후에는 과거의 것을 성취하고 미래의 것을 성취하지 않는데
  [표업의 성질이] 유부와 무부의 무기일 경우
  오로지 현재의 그것만을 성취한다.
  表正作成中 後成過非未
  有覆及無覆 唯成就現在
  
  논하여 말하겠다. 율의나 불율의에 안주하거나, 나아가 중(中, 비율의비불율의)에 머무는 모든 이들은 온갖 표업을 바로 지을 때로부터 항상 현재의 표업을 성취하며, 최초찰나 이후 그것을 아직 버리기 전까지는 항상 과거의 표업도 성취한다. 그리고 그들이 미래의 표업을 성취하는 일이 없는 것은 무표업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31)
  그리고 유부(有覆)와 무부(無覆)의 두 가지 무기의 표업은 결정코 과거·
  
  
  
31) 미래의 색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이른바 수심전(隨心轉)의 색이 아니어서 그 세력이 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이다. 즉 정려와 무루도에 들어가는 자는 정려와 도생율의의 현재의 무표를 성취하지만, 정려와 무루도의 무표는 수심전이기 때문에 출관(出觀)하여 산심(散心)이 현전할 때에는 성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심의 표업은 그 세력이 미약 저열하여 법전득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표업을 성취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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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그것을 능히 성취하는 일이 없다. 즉 이러한 법은 그 힘이 저열하기 때문에 [오로지 본법과 구행(俱行)하는 득(得,즉 法俱得)만을 능히 인기할 수 있을 뿐인데], 득의 힘도 역시 저열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슬러 획득[逆得]하거나 쫓아 획득[追得]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32)
  이러한 법의 힘이 저열하다면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마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유부무기의 마음 등도 과거·미래세의 그것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힐책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표업은 어둡고 둔중(鈍重)하기 때문이며, 다른 것(즉 思심소)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으로, 마음 등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만약 무기의 표업이 저열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면, 그 세력은 그것을 능히 일어나게 하는 마음보다 몇 배 더 저열해야 한다. 따라서 표업과 마음 사이에는 성취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33)
  앞에서 논설한 것처럼 불율의에 머무는 것에 차별이 있듯이 이 같은 불율의의 명칭상에도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행·악계(惡戒)라고도 하며
  업·업도·불율의라고도 한다.
  
  
  
32) 『보소(寶疏)』에 의하면 '거슬러 획득하는 것'은 미래의 무표를 획득하는 것이고, '쫓아 획득하는 것'은 과거의 무표를 획득하는 것. 즉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의 표업은 '자류(自類)의 상속을 인기한 후 그 같은 본법이 이미 멸하였을 때 그것을 쫓아 획득[追得]하여 성취한다고는 능히 말할 수 없으며, 또한 역시 아직 생기하지 않은 미래의 법[當法]을 거슬러 획득[逆得]하는 공능도 없다.'(『현종론』 권제19, 앞의 책, p. 527)
33) 생기한 것은 능히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마음보다 저열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의 마음 등이 과거·미래세의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 하면, 그것은 마치 무기의 마음은 능히 표업을 낳을 수 있어도 그것에 의해 낳아진 표업은 무표업을 낳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생기한 표업은 능히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마음보다 저열하며, 그래서 그러한 무기는 과거·미래의 무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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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惡行惡戒業 業道不律儀
  
  논하여 말하겠다. 이 같은 악행 등의 다섯 이명(異名)이 바로 불율의라는 명칭의 차별이다. 즉 이것은 지자(智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바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행'이라 이름하였다. 또한 청정한 시라(尸羅)를 장애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계'라고 이름하였으며, 신체와 말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업'이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근본(즉 思심소)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에 '업도'라고도 이름하며,34) 또한 신체와 말을 금(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율의'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업도'라는 명칭은 오로지 최초 찰나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며, 최초찰나와 그 이후에 모두에 통하는 것으로서 그 밖의 다른 네 가지 명칭을 설정하였다.
  
  혹 표업을 성취하더라도 무표업을 성취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등에 대해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내용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표업을 성취하더라도 무표업을 성취하지 않는 경우는
  중(中)에 머물면서 저열한 사(思)로 업을 지을 때이며
  표업을 버리고서 아직 낳지 않은 성자는
  무표업을 성취하더라도 표업을 성취하지 않는다.
  成表非無表 住中劣思作
  捨未生表聖 成無表非表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표업만을 성취하고 무표업을 성취하지 않는 경우(제1구)란, 이를테면 율의도 아니고 비율의도 아닌 것에 머물면서 미약하고
  
  
  
34) 즉 불율의 역시 사(思)심소에 의해 조작되고 능히 사업(思業)을 창달하여 업이 노니는 길[所遊路]이 되기 때문에 '업도'로서, 이 점에 있어 율의와 그 명칭이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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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열한 선·악의 사(思)로써 선업을 짓고, 악업을 지을 때이니, 이 때는 오로지 표업만을 낳을 뿐이다. 그러니 [이 같은 두 가지 업도] 무표업을 낳을 수 없거늘 하물며 온갖 무기의 사에 의해 낳아진 표업이 무표업을 낳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유의(有依)의 복이나 [10]업도를 성취하는 경우는 제외한다.35)
  오로지 무표만을 성취하고 표업을 성취하지 않는 경우(제2구)란, 이를테면 역생(易生)의 성자 보특가라가 현재의 표업을 아직 낳지 않았고, 이전에 생겨난 것은 이미 버린 때이다.36)
  나아가 모두를 성취하고 모두를 성취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37)
  율의와 불율의 등에 머무는 것과 표업과 무표업을 성취하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러한 모든 율의는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생율의는 선정의 상태에서 획득되고
  그러한 성자가 도생율의를 획득하며
  별해탈율의는
  
  
  
35) 유의의 7복(본론 권제13 주51 참조)은 아무리 저열한 의지[思]에 의해 일어났을지라도 무표가 있으며, 또한 아무리 저열한 의지라고 할지라도 유정의 목숨을 끊는 업도를 성취하면 무표을 성취한다.
36) 역생성자란 번뇌는 끊기 어렵고 성도는 익히기 어렵기 때문에 몇 번이고 생을 바꾸어 수행하는 경생(經生)의 성자를 말한다. 즉 그는 욕계·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도구계(道俱戒)·정구계(定俱戒)의 무표를 성취하며, 무색계에 태어날 때는 오로지 도구계의 무표만을 성취한다. 욕계에 태어나면서 모태에 처해 있을 때(표업을 아직 낳지 않았을 때)와, 의요의 종식으로 말미암아, 가행을 버렸기 때문에 기한[限勢]을 넘겨버렸다는 세 가지 인연에 의해 이전에 생겨난 표업이 사기(捨棄)된 때에는 오로지 과거·미래의 정구계와 도구계만을 성취할 뿐이다.
37) 이를테면 율의·불율의에 머물면서 선업·불선업을 지을 때에는 표업·무표업을 모두 성취하며(제3구), 태장(胎藏) 중에 머물 때는 두 가지 모두를 성취하지 않는다.(제4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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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의 가르침 따위에 의해 획득된다.
  定生得定地 彼聖得道生
  別解脫律儀 得由他敎等
  
  논하여 말하겠다. 정려율의는, 유루의 근본(초정려로부터 제4정려)과 근분(近分)의 정려지의 마음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그 때 바로 획득되니, 그러한 마음과 구기하기 때문이다.
  무루율의도 무루의 근본과 근분의 정려지의 마음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그 때 바로 획득되니, 역시 그러한 마음과 구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말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정려의 마음을 [획득하였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다시 '성자'라는 말을 설한 것은 무루를 헤아려 취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러한 정려의 마음을 획득한 성자는] 여섯 가지 정려지에서 무루의 마음을 지녔으니, 이를테면 미지정과 중간정과 네 가지 근본정이 바로 그것이다.38) 그리고 세 가지 근분정(제2 내지 제4 정려의 근분정)에서는 무루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뒤(본론 권제28)에서 응당 분별하는 바와 같다.
  별해탈율의는 다른 이의 가르침[他敎] 따위에 의해 획득되는데, 능히 다른 이를 가르치는 자를 일컬어 '다른 이'라고 하였다. 즉 이와 같이 다른 이가 가르치는 힘에 따라 계를 일으키기 때문에 [본송에서] '이러한 계는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해 획득된다'고 설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승가와 보특가라에 따라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승가(僧伽)에 따라 획득되는 것이란 이를테면 필추와 필추니, 그리고 정학의 계를 말하며, 보특가라에 따라 획득되는 것은 이를테면 그 밖의 다섯 가지 종류의 계를 말한다.39)
  그리고 모든 비나야(毘奈耶)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구족계를 획득
  
  
  
38) 미지·중간·4근본의 여섯 가지 정려지를 6무루지라고 하며, 성자는 반드시 이 중 어딘가에 들어 도공계(道共戒), 즉 도생율의를 획득한다.
39) 즉 비구·비구니·정학의 율의는 반드시 승가(sa gha) 즉 교단의 승인에 의해 획득되며, 그 밖의 사미·사미니·우바새·우바이·근주의 율의는 각기 개별적인 스승[阿闍梨]의 가르침에 의해 획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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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방법에 열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데,40) 이러한 사실을 포섭하기 위해서 [본송에서] 다시 '따위'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자연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부처님과 독각이 바로 그러하였다.41) 둘째는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다섯 필추가 그러하였다.42) 셋째는 부처님께서 '잘 왔도다, 필추여!'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야사(耶舍) 등이 그러하다.43) 넷째는 부처님을 신수(信受)하여 대사(大師)가 됨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대가섭(大迦葉)이 바로 그러하였다. 다섯째는 부처님께서 물으신 바에 대해 아주 교묘하게 대답함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소타이(蘇陀夷)가 바로 그러하였다.44) 여섯째는 여덟 가지 존중법(尊重法)을 공경하고 수지함으로 말미암아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대생주(大生主)가 바로 그러하였다.45) 일곱째는 사자를 보내어서 획득하게 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법수니(法授尼)가 바로 그러하였다.46) 여덟째는
  
  
40) 『십송률(十誦律)』 권제56(대정장23, p. 410상) 참조.
41) 즉 깨달은 자는 스승으로부터가 아니라 그 같은 지혜를 증득할 때 바로 구족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42) 즉 견도를 증득함에 따라 구족계를 획득하는 것으로, 불타와 함께 고행하였던 교진여(憍陳女, Kau inya)·마하남(摩訶南, Mahanaman)·발제(跋提, Bhadrika)·바사파(婆沙波, Va pa)·아설시(阿說示, Asvajit, 馬勝으로 번역됨) 등이 그러하였다.
43) 이 같은 방식은 초기교단에서의 전형적인 츌가양식으로, 자신의 본원력(本願力)과 부처님의 위덕과 가피력에 의해 구족계를 획득하는 것이다. 야사(Yasas,名聞·善稱으로 번역됨)는 불타성도 직후 친구 50명과 함께 출가하였으며, 그의 부모는 최초의 우바새, 우바리가 되었다. 이 기사는 『사분율』 권제32와 『오분율』 권제15에 나온다.
44) 소타이(Sodayin, 善施로 번역됨)는 총명하여 7살에 부처님의 질문에 답하여 20세가 되지 않고 구족계를 받았다. 즉 부처님께서 일찍이 그에게 '너의 집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자 '3계에 집이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구사론기』 권제14,대정장41, p. 221하)
45) 대생주, 즉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 Mahaprajapat )는 불타의 이모로서 최초의 비구니. 부처님은 아난다를 그녀에게 보내 8존중법(또는 敬戒)을 설하게 하였다. 첫째, 백세의 비구니라도 새로이 수계한 비구에게 예경할 것. 둘째, 비구를 흉보거나 꾸짖지 말 것. 셋째, 비구의 과실을 열거하여 설하지 말 것. 넷째, 비구중으로부터 계를 받을 것. 다섯째, 승잔죄(僧殘罪, 성적 악습 등)를 지었을 때는 반달 동안 대중에게 참회할 것. 여섯째, 반달마다 비구중에게 가르침을 청할 것. 일곱째, 비구중에 따라 안거할 것. 여덟째, 안거 후 비구중에게로 가서 자자(自恣)할 것.
46) 법수니(Dharmadinna)는 매우 아름다운 부인으로, 승가에 가 수계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난리가 일어나 이르지 못하자 승가에서 한 명의 비구니를 보내 수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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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율자(持律者)를 다섯 번째 사람으로 삼아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변방의 나라에서 그러하였다.47) 아홉째는 열 명의 대중에 의해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중앙의 나라[中國]에서 그러하였다. 열째는 불·법·승에 귀의한다고 세 번 설함에 따라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육십현부(六十賢部)가 다 같이 모여 구족계를 받을 때가 바로 그러하였다.48)
  이와 같이 하여 획득된 별해탈율의는 결정코 반드시 표업에 의거하여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와 같이 설한 별해탈율의는 얼마간의 시간을 기한으로 하여 받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별해탈율의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혹은 낮밤 동안이다.
  別解脫律儀 盡壽或晝夜
  
  논하여 말하겠다. 7중(衆)에 의해 수지되는 별해탈계는 마땅히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수지되어야 하며, 근주에 의해 수지되는 별해탈계는 오직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여 수지되니, 이러한 시간은 결정적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47) 수계시 승가의 대중은 원칙적으로 10인 이상이 되어야 하나 변방의 나라에는 비구의 수가 적기 때문에 5인으로도 가능하다. 여기서 지율자(vinaya dhara)란 율의 봉지자로서, 수계시 계율의 작법을 담당하는 이를 말하는데, 5명 중에는 반드시 한 명의 지율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율자를 다섯 번째 사람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이다.
48) '60(『석론』에서는 16)의 현부'는 미상. 혹설에 의하면 야사의 친구 60인, 혹은 화지부(化地部)의 대중. 『구사논기』에서는 '현화중부(賢和衆部)가 모여있는 곳에 부처님이 아라한을 보내 삼귀의를 설하게 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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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가 지속하는 시간의 변제(邊際, 즉 존속기한)에는 단지 두 가지의 종류만이 있을 뿐이니, 첫째는 수명의 변제이며, 둘째는 낮밤의 변제로서, 낮밤을 거듭 설하여 반달 등이 되는 것이다.49)
  여기서 시간[時]이란 어떠한 법을 일컫는 말인가?
  이를테면 제행(諸行)의 증어(增語)로서,50) 4대주 중에서는 햇볕이 비치는 상태[光位]와 어둠의 상태[暗位]를 그 순서대로 낮과 밤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 같은 두 가지 변제 중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능히 그럴 수 있다. 즉 목숨을 마친 후에는 비록 받기를 서원할지라도 별해탈계를 능히 낳을 수 없으니, 소의신이 다르기 때문이며, 다른 소의신 중에는 가행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을 수지하였었다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루 낮밤을 수지한 후 5일 동안의 낮밤 중에, 혹은 10일 동안의 낮밤 중에 근주계를 수지한들 어떠한 법이 장애하여 그 같은 여러 날의 근주율의를 일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인가?51)
  반드시 능히 장애하는 어떤 법이 있을 것으로, 박가범(薄伽梵)께서 계경 중에서 "근주율의는 오로지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유부의 답)
  이와 같은 뜻에 대해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하루 낮밤을 지낸 후에는 이치상 근주율의를 일으킬 만한 근기가 없음을 바
  
  
  
49) 반달 동안 근주계를 수지한다고 해도 매일 아침 8계를 거듭 받아야 하는 것으로, 매일의 낮밤이 거듭되어 반달이 된다는 뜻.
50) 증어(adhivacana)란 '명(名)' 즉 개념의 다른 명칭(본론 권제10 주29 참조). 즉 시간이란 그 자체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위제법의 변이상, 곧 제행(諸行)을 말한다.(본론 권제12 주20 참조)
51) 『광기』나 『보소』에 따르면 이는 경부의 난문이다. 즉 비구 등 7중(衆)의 율의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수지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근주율의가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수지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유부에 의하면 이 같은 시간은 계경에 설해진 것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량부에 따르면 시간이란 결정된 것이 아니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틀 혹은 열흘 낮밤을 수지한다 할지라도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는다. 즉 경량부에서는 교화하기 어려운 자는 율의를 하루 이상 수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에서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후술) 이는 경설을 세간상식에 위배되지 않게 해석하려는 경량부 특유의 논의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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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관찰하셨기 때문에 경 중에서 하루 낮밤만을 설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교화될 이의 근기가 조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관찰하시고 바야흐로 하루 낮밤만의 계를 수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경부의 반문)
  어떠한 이증과 교증에 의해 이와 같이 말한 것인가?(유부의 물음)
  이 같은 하루 낮밤을 지내고서도 계가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경부의 답)
  비바사자(毘婆沙者)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일찍이 계경에서 낮밤을 넘겨 별도로 근주율의를 수득(受得)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한 일이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종의(유부종)에서는 그러한 뜻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의 시간을 기한[邊際]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계에는 하루 낮밤의 기한이 없으니
  선계를 수지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惡戒無晝夜 以非如善受
  
  논하여 말하겠다. 목숨을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온갖 악업을 지을 때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으로, 근주계처럼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선계(善戒)를 수지할 때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근주계처럼 반드시 기한을 정하여 스승에 대해 '나는 하루 낮밤 동안 결정코 불율의를 수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불율의를 수지하는 일은 결코 없으니, 이것은 바로 지혜자가 꾸짖고 싫어하는 업이기 때문이다.5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한을 정하여 스승에 대해 '나는 목숨을 다할 때까
  
  
  
52) 즉 불율의는 지자(智者)가 혐오하는 바이기 때문에 하루 낮밤 동안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는 맹서를 받을 스승은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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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결정코 악계를 받겠습니다'라고 하는 일도 역시 없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형색과 목숨을 다할 때까지 불율의를 획득하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스승에 대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온갖 악업을 짓겠다고 서원[要期]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필경 선을 허물려고 하는 의요(意樂, asaya, 목적의식)를 일으키므로 말미암아 불율의를 획득한다. 즉 그것은 잠시 악을 지으려고 하는 의요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로 하여금 불율의를 획득하게 하는 스승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는 불율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근주계는 바로 지금 스승에 대해 서원하여 받는 힘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畢竟] 악을 허물려고 하는 의요는 없다 할지라도 [하루 낮밤에 걸친 근주의] 율의는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스승에 대해 서원하여 잠시 불율의를 받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역시 응당 마땅히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여]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찍이 그러한 자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율의는 하루 낮밤을 기한으로 하여 획득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경부사(經部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한 율의에 무표라고 이름할 만한 개별적 실체성[實物]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은 불율의도 역시 마땅히 실체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악과 불선을 짓고자 하는 의요(意樂)가 상속하여 사기(捨棄)되지 않음을 불율의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그 후 비록 선심이 일어날지라도 불율의를 성취한 자라고 이름하니, 이러한 아세야(阿世耶, a aya, 즉 의요)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53)
  하루 낮밤의 근주율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이를 수지하려고 할 때 마땅히 어떠한 방식에 따라 수지해야 하
  
  
  
53) 즉 율의무표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의 경우(본론 권제13 참조) 불율의 역시 개별적인 실체로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지어야겠다고 하는 의지작용(思심소)이 색심상에 종자적 형태로 훈습되어 부단히 상속하는 것을 가설(假說)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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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주율의는 이른 아침에
  아랫자리에서 스승으로부터 받으며
  가르침에 따라 설하고, 8지(支)를 함께 받으며
  치장하지 않고, 낮과 밤동안 수지한다.
  近住於晨旦 下座從師受
  隨敎說具支 離嚴飾晝夜
  
  논하여 말하겠다. 근주율의는 이른 아침에 받는다. 즉 이 계는 반드시 해가 뜰 때 받아야 하는 것이니, 요컨대 이 계는 하루 낮밤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를 받는 모든 이는 먼저 '나는 항상 달마다 8일 등에는 결정코 이 같은 근주율의를 마땅히 수지하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서원[要期, samadana, 『석론』에서는 受意]을 지어야 한다.54) 그러나 만약 아침에 수지할 수 없는 사연이 있다면, 아침식사[齋]를 마친 후에도 역시 수지할 수 있다.
  '아랫자리'라고 하는 말은 스승 앞의 낮고 못한[卑劣] 자리에서 두 다리를 모으고 앉든지 혹은 꿇어앉아서 몸을 굽혀 합장하는 것으로, 다만 병이 있는 자는 예외로 한다. 만약 이같이 공경하지 않는다면 율의를 낳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스스로 수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즉 그렇게 함으로서 만약 이후 온갖 범계(犯戒)의 인연을 만날 경우 계를 준 스승[戒師]에 대해 부끄러워함으로서 능히 계를 어기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근주계를 받는 자는 마땅히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 뒤에
  
  
  
54) 여기서 8일 등이란, 백월(白月)과 흑월(黑月)의 8일·14일·15일, 즉 6재일로서, 흑월의 그것은 23일·29일·30일에 해당한다.(『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권제7, 대정장1, p. 402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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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문을] 설해야 하지, 먼저 설해서도 안 되고 함께 설해서도 안 된다.55) 이와 같이 하여야 비로소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수지하게 되니,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주고받는 두 가지 일 모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근주율의의 여덟 가지 지(支)를 함께 받아야 비로소 근주를 성취하며,56) 그 중의 한 가지라도 결여할 경우 근주는 성취되지 않는다.57)
  또한 이러한 계를 수지하면 반드시 몸을 장엄하거나 치장[嚴飾]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은 바로 교만과 방일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몸을 장식하고 있던 것은 반드시 버릴 필요까지는 없으니, 새것과는 달리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서는 그 같이 심한 교만과 방일은 능히 낳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율의를 수지하면 반드시 하루 낮밤 동안 지녀야 하니, 말하자면 다음 날 아침해가 뜰 때까지 지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수지하지 않을 경우 비록 묘행(妙行)을 낳을 수는 있을지라도 율의는 획득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이와 같이 낮과 밤이 다하도록 [근주계를] 수지할 경우 도살하고 사냥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는 유정을 다 같이 제압하게 될 것이며, 근주율의는 그 유용함을 깊이 성취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율의를 지니는 이를] 근주(近住)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율의는 아라한에 가까이 머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그를 따라 배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이는 목숨이 다하도록 계(戒)에 가까이 머물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혹은 이와 같은 율의를 '근주(近住)'이라고
  
  
  
55) 즉 계사가 먼저 계문(戒文)을 설하면, 수계자는 비록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반드시 그 이후에 외워야 한다.
56) 8지의 근주계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것,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비범행(非梵行), 거짓말하는 것, 음주,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塗飾香鬘舞歌觀聽], 높고 넓으며 아름다운 평상이나 의자에 앉거나 눕는 것[座臥高廣嚴麗牀座], 먹을 때가 아닌데 먹는 것[食非時食]에서 떠나는 것이다.(전술)
57) 왜냐 하면 모든 원리지(遠離支)는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繫屬)되기 때문으로, 이 같은 8지 구족(具足)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게송에서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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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선근이 희박한 유정을 장양하여 그의 선근을 점차 증대시키기 때문이다.58) 즉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자신과 다른 이의
  착하고 청정한 마음을 능히 장양하니
  그렇기 때문에 박가범께서는
  이것을 설하여 '장양'이라 이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 같은 근주율의를 수지할 때는 반드시 여덟 가지의 지(支)를 모두 갖추어 받아야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것은 계(戒)·불방일·금지[禁]의 갈래로서
  순서대로 네 가지·한 가지·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니
  온갖 성죄(性罪)와 실념(失念)과, 아울러
  교만·방일[憍逸]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戒不逸禁支 四一三如次
  爲防諸性罪 失念及憍逸
  
  논하여 말하겠다. 8계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바로 시라(尸羅)의 갈래[支]이다. 이는 즉 살생 내지 허광어(거짓말)를 떠나는 것으로, 이러한 네 가지 종류에 의해 성죄(性罪, 그 자체가 죄인 것)를 떠나기 때문이다.
  다음의 한 가지 종류는 바로 불방일(不放逸)의 갈래이다. 이는 즉 온갖 술을 마시는 것에서 떠나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방일을 낳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시라를 수지하였을지라도 온갖 술을 마시게 되면 바로 마음이 방
  
  
  
58) 장양(長養)의 원어는 upavasatha(혹은 uposatha, 팔리어로는 posatha, 布薩·布沙陀 등으로 음사). 즉 이것의 변화어인 po adha는 po a(기르다)와 dha(사역의 의미)가 합성되어 '장양'의 뜻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근주(upavasa)의 뜻이라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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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해져 시라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세 가지 종류는 바로 금지하고 단속[禁約]하는 갈래이다. 이는 즉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는 것 내지 먹을 때가 아닌데 먹는 것에서 떠나는 것으로, 능히 염리(厭離)하는 마음에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세 가지 갈래를 모두 갖추어 수지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이러한 세 가지 갈래를 함께 수지하지 않는다면 바로 성죄(性罪)와 실념(失念)과 교만·방일의 과실에서 능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먼저 살생 내지 허광어를 떠나는 것은 능히 성죄를 방지하니, 탐·진·치에 의해 일어나는 살생 등의 온갖 악업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술 마시는 것에서 떠나는 것은 능히 실념를 방지하니, 술을 마실 때에는 마땅히 해야 하고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할 온갖 사업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세 가지에서 떠나는 것은 능히 교만과 방일을 방지하니, 만약 여러 가지 향이나 꽃다발과 높고 넓은 평상이나 의자를 수용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익히고 가까이하게 되면 마음이 교만하고 들떠 이내 곧 계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을 멀리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바로 교만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이가 능히 일정한 시간에 따라 식사[依時食]한다면 항시식(恒時食)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근주율의를 수지할 것을 기억하고, 세간에 대한 깊은 염리(厭離)의 마음을 능히 낳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만약 때가 아님에도 식사하게 되면 이러한 두 가지를 모두 갖추지 않게 될 것이니, 자주 먹게 되면 마음이 방종 방일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비시식(非時食) 즉 때 아닌 때 먹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일컬어 재계(齋戒)의 본질[體]이라 하며, 그 밖의 여덟 가지 계를 일컬어 재계의 갈래[支]라고 하니, '향을 바르고 꽃다발로 몸을 장식하거나 춤추고 노래하며 그것을 보고 듣는 것[塗飾香鬘舞歌觀聽]'을 나누어 두 가지 계로 삼았기 때문에 [여덟 가지 계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59)
  
  
59) 이비시식계(離非時食戒)를 근주 8재계(齋戒)의 본질이라고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포살과 감식(減食)을 밀접하게 관련시킨 바라문의 풍습이 고려되었든지, 아니면 서방(카슈미르의 서쪽)의 풍습에서 단식을 재계라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구사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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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와 같이 주장할 경우 바로 계경에 위배될 것이니, 경에서는 비시식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설하고 나서 바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8지(즉 離非時食)를 나는 지금 성자이신 아라한을 따라 배울 것이고, 따라 행할 것이고, 따라 지을 것이다."6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별도의 재계의 본질이 있어 이러한 여덟 가지의 계를 설하여 재계의 갈래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비시식(離非時食)만이 재계의 본질이 아니라 8지(支)] 전체를 '재(齋)'라 하고 개별적인 것을 설하여 갈래 즉 '지(支)'라고 한다. 즉 개별적인 것[別]이 전체[總]를 이룸으로써 '갈래'라고 하는 명칭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치 수레[車]의 여러 부품과 4지(支)의 군대와 5지(支)의 가루약[散]처럼 재계의 8지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61)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때 아닌 때 먹는 것에서 떠나는 것[離非時食]은 바로 재(齋)이면서 역시 재지(齋支) 즉 재의 갈래이지만, 그 밖의 다른 7지는 바로 재지이지 재가 아니니, 이는 마치 정견(正見)이 바로 도(道)이면서 역시 도지(道支)이지만 그 밖의 다른 7지는 바로 도지로서 도가 아닌 것과 같으며, 택법각(擇法覺)은 바로 각(覺)이면서 각지(覺支)이지만 나머지 여섯 각지는 다만 각지일 뿐 각이 아닌 것과 같으며, 삼마지는 바로 정려이면서 정려지이지만 그 밖의 다른 지(支)는 다만 정려지일 뿐 정려가 아닌 것과 같다.62)
  
  
60) 『중아함경』 『지재경(持齋經)』(대정장1, p. 770중); 『불설재경(佛說齋經)』(동, p. 910) 참조. 즉 경에서 이를 제8지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을 독립시켜 다른 8지의 본질이라 할 수 없다는 뜻.
61) 보광에 의하면 이는 경부(經部)의 답이다. 즉 마치 수레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갖가지 부품을 배제하고 별도의 전체자로서의 수레가 존재하지 않으며, 상(象)·마(馬)·차(車)·보군(步軍)을 떠나 4지군(支軍)이 없으며, 다섯 가지 가루를 배제하고서 5지산(支散)이라고 하는 약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각의 지(支)를 배제하고 8재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62) 즉 정견(正見)이 8정도의 도체(道體)이자(즉 도의 본질은 혜이고, 정견은 바로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도지(道支)이듯이, 7각지의 택법각지가 각체(覺體)이자 각지(覺支)이듯이, 4정려지(支)의 하나인 삼마지(혹은 等持)가 정려의 본질이자 정려지 중의 하나이듯이(이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8, p.1282 주48 참조), 이비시식(離非時食) 역시 재계(齋戒)의 본질이자 한 갈래[支]라는 뜻.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이 율의의 공능에 대해 '항시식을 막음으로써 근주율의를 스스로 지닐 것을 억념하고 세간에 대한 염리심을 낳아 마음을 방종 방일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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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정리(正理)에 맞지 않다. 즉 [8정도의 본질인] 정견 등이 바로 정견 등의 '지(支)'일 수 없으니, 만약 전찰나에 생겨난 정견 등을 후찰나에 생겨난 정견 등의 '지'라고 한다면 최초찰나의 성도(즉 고법지인) 등에 마땅히 8지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근사(즉 우바새)만이 근주율의를 수지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이들도 역시 근주율의를 수지하는 일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주는 다른 이들도 역시 수지하는 일이 있지만
  삼귀위(三歸依)를 받지 않고 수지하는 일은 없다.
  近住餘亦有 不受三歸無
  
  논하여 말하겠다. 아직 근사율의를 받지 않은 온갖 유정들이라 할지라도 하루 낮밤 동안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삼보를 설하고 나서 근주계를 받으면 그들도 역시 근주율의를 수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수지할 수 없지만, 알지 못하는 자는 제외한다.63)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대명(大名, Mahanama,摩訶男)에게 고하기를, 집에 머무는 백의(白衣)의 남자이면서 남근을 성취한 온갖 유정이 불(佛)·법(法)·승(僧)에 귀의하고, 간절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된 말로 '나는 바로 오파색가(波索迦)입니다. 원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護念)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
  
  
  
63) 삼보에 귀의하고 나서 율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스승이 삼귀의를 설하는 것을 잊고 율의를 줄 경우에도 근주율의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 경우 스승이 죄를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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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면, 이들을 모두 오파색가라고 이름한다."64)
  그렇다면 삼귀의를 수지하는 것만으로 바로 근사가 되는 것인가?
  외국(外國)의 여러 논사들은 설하기를, "오로지 이것만으로 [근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들은 말하기를, "근사율의를 떠날 경우 근사가 아니다"고 하였다.6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경의 내용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가?
  이 경의 내용과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이미 계를 낳았기 때문이다.66)
  만약 그렇다면 언제 계를 낳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근사라고 일컬을 때 계를 낳게 되니
  말하자면 필추 등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稱近事發戒 說如苾芻等
  
  논하여 말하겠다. 간절하고 청정한 마음을 일으켜 진실된 말로 '나는 바로 오파색가입니다. 원하건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 때 바로 근사율의를 낳게 되니, '근사' 등의 말을 일컬을 때 바로 율의를 낳기 때문이다.
  또한 경에서는 다시 "나는 지금부터…… 내지는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살]생을 버릴 것[捨生]이다"고 하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67) 이 경의 뜻은
  
  
64) 『잡아함경』 권제33 제927경(대정장2, p. 236중). 이는 바로 삼귀의를 통해 오파색가(upasaka, 즉 근사, 優婆塞)가 된다는 것을 논증하는 경증이다.
65) 즉 외국사(『광기』에 의하면 간다라논사)는 삼귀의를 외우는 찰나에 근사가 된다고 주장한 반면 카슈미르의 논사들은 삼귀의를 근거로하여 근사계 즉 5계를 수지하여야 비로소 근사를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66) 즉 앞에서 인용한 대명(大名)에 대한 설법에서 삼귀의에 의해 우바새가 된다고 함은, 삼귀의와 동시에 5계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뜻.
67) 『중아함경』 권제3 『화파경(破經)』(대정장1, p. 435상), "세존이시여, 나는 이제 세 번째로 불·법·비구중께 스스로 귀의하옵나니, 원컨대 세존이시여, 저를 받아 우바새가 되어 오늘부터 몸이 다하도록 스스로 귀의하고 목숨이 다하게 하소서(世尊, 我今三自歸佛法及比丘衆, 唯願世尊, 受我爲優婆塞, 從今日始終身自歸命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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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생 등을 버리겠다'는 것으로서, '살(殺)'자를 생략하여 다만 '생을 버릴 것이다'고 설한 것이다.68) 따라서 이전에 이미 5계를 획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가 비록 근사율의를 이미 획득하였을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학처(學處)를 알게 하기 위하여 다시 '살생을 떠나는 것[離殺生]' 등의 다섯 가지 종류의 계상(戒相)을 설하여 견고하게 지니는 법을 알도록 한 것이니, 이는 마치 필추가 구족계를 획득하고 나면 다시 학처를 설하여 견고하게 지니는 법을 알게 하는 것과 같다.69) 근책도 역시 그러하니, 이것(즉 근사)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근사는 반드시 율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70)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약 율의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면
  어째서 일부분 등을 말씀한 것인가' 하면
  능히 지니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한 것이다.
  若皆具律儀 何言一分等 謂約能持說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모든 근사는 율의를 모두 갖추어야 하는 것이라면 세존께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근사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능히 일부분[一分, 한 가지의 계]만을 배우는 자이며, 둘째는 능히 적은 부분[少分,두 가지의 계]만을 배우는 자이며, 셋째는 능히 많은 부분[多分, 서너 가지의 계]을 배우는 자이며, 넷째는 능히 모든 부분[滿分, 5계]을 배우는 자이다"고 말씀하였겠는가?(경부의 난문)71)
  
  
68) 그러나 앞의 계경의 의미로 본다면 '사생(捨生)'은 이 같은 '사(捨)살생'의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을 마친다' '몸을 버린다'는 뜻으로, 이는 바로 경량부의 해석으로 논설된다.(후술) 참고로 『대비바사론』 (권제124,한글대장경122, p. 561)나 『현종론』 (권제20, 앞의 책, p. 539)에서는 '호생(護生)'으로 전하고 있으며, '사생(捨生)'은 이설이다.
69) 즉 구족계를 받은 비구는 학처를 배우지 않더라도 비구율의를 성취하지만 그것을 견고하게 수지하도록 하기 위해 학처를 설하는 것처럼, 근사의 경우도 삼귀의를 수지하고 '나는 근사이다'고 말할 때 근사율의가 생겨나지만 그것을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해 다시 5계를 설한다는 것이다.
70) 다시 말해 삼귀의를 수지하는 것으로 바로 근사가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71) 『증일아함경』 권제20(대정장2, p. 649하)."夫淸信士之法, 限戒有五, 其中能持一戒二戒三戒四戒乃至五戒, 皆當持之……". 구역에서는 '배우는 자[學]'를 '지니는 자[持]'로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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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능히 지는 것[能持]'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다.72) 그리고 일찍이 받은 것을 능히 지니기 때문에 '능히 배우는 자'라는 말로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일부분 등을 받은 이'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치상 실로 '받는 것[受]'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면 [근사는 모두] 율의를 동등하게 갖추어야 할 것이니,73) 율의를 갖추었기 때문에 근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유부의 답)
  이와 같은 주장은 계경에 위배되는 것이다.(경부의 힐난)
  경에 어떻게 위배되는 것인가?(유부의 물음)
  이를테면 경에서는 "'나는 바로 근사이다'는 등의 말을 스스로 일컬으면 바로 5계를 낳게 된다"고 설한 일이 없으며, 또한 이 경에서 '나는 지금부터…… 내지는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살]생을 버릴 것[捨生]이다'는 말을 설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경부의 해명)
  그렇다면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유부의 재문)
  이를테면 『대명경(大名經)』과 같은 경이 그러하니, 이 경 중에서는 오로지 근사의 상(相)에 대해서만 설하고 있을 뿐이고, 그 밖의 다른 경에서도 그렇게 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설하기를, "나는 지금부터 목숨이 다하고 생을 버릴[捨生] 때까지 청정에 귀의하리라"고 하였다.74) 이는 바로 삼보에 귀의하여 진실된 믿음[誠信]의 말을 발한 것으로, 이미 진리[諦]를 본 자가 증정(證淨)을 획득함에 따라,75) 요컨대 스스로 목숨을 걸고 정법에 대해 깊은 애호(愛護)와 존중을 나
  
  
72) 즉 비록 5지의 율의를 모두 받았을지라도 그 후에 어떤 인연에 의해 그것을 허물거나 결여하여 혹 어떤 경우 그 일부분만을 지니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 5계 모두를 지니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설하였다는 것이다.
73) 즉 '지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에 근거할 경우, 근사는 모두 5계를 받기 때문에 앞에서와 같은 네 종류의 차별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74) 『잡아함경』 권제1 제30경(대정장2, p. 6하), "我今已度. 我從今日歸依佛歸依法歸依僧爲優婆塞, 我從今日已盡壽命淸淨歸依三寶."
75) 4증정이란 무루지를 일으켜 4제의 이치를 증득한 성자가 불·법·승의 삼보를 믿고 성계(聖戒)를 엄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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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낸 것일 뿐이다. 혹은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방편[緣]이 될지라도 끝내 여래의 정법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곧 그 경에서는 근사의 상을 설하고자 하여 이와 같은 '[살]생을 버린다[捨生]'는 등의 말을 설한 것이 아니다. 설혹 그렇게 설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역시 또한 분명하지 않은 이치의 가르침이니, 누가 능히 이같이 명료하지 않은 문장에 근거하여 [근사계를 받기] 전에 이미 5계를 낳았다는 사실을 믿을 것인가?
  또한 계를 지니거나 범하는 것에 근거하여 '일부분 등을 배우는 이'라고 설한다면, 응당 마땅히 [부처님께 5계에 대해] 묻지도 않을 것인데 하물며 그것에 대해 대답하였을 것인가?76) 또한 근사율의는 반드시 5지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배워야 할 학처(學處)에 대해 한 가지만 수지하고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수지하지 않는 이를 '일부분만을 배우는 자' 등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나아가 모두를 수지하는 이를 '모든 부분을 배우는 자'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능히 알지 못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즉 그(수계자)는 얼마정도의 근사율의를 받는지 그 수량의 적고 많음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응당 마땅히 '무릇 몇 종류의 오파색가가 있어 능히 학처를 배우는 것입니까'라고 청하여 물은 것이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네 가지 오파색가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부분만을 능히 배우는 자 등이 그들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능히 잘 알지 못하여 '무엇을 일컬어 능히 일부분만을 배우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다시 물은 것이다.(이상 경부의 해명과 비판)
  만약 율의를 결여하였더라도 역시 근사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필추와 근책의 율의를 결여하여도 역시 마땅히 [필추와 근책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그들은 이미 [필추와 근책을] 성취하지 못하니, 이것(근
  
  
  
76) 만약 5계를 모두 받았더라도 그것을 능히 지니고 지니지 않음에 따라 근사에 다섯 종류가 있다고 한다면, 5계의 뜻을 이미 아는 이는 부처님께 그 종류를 묻지도 않았을 것이며, 부처님 역시 그에 대해 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 즉 유부에서는 앞의 경설을 '능히 지니거나 배운다고 함은 이전에 받은 바를 지니고 배우는 것'이므로 최초의 수계시에는 5계를 모두 받지만[五戒定具說] 다만 수지 수학하는 단계에서 어떤 연에 의해 일부분의 율의만을 지니고 그 밖의 다른 율의는 지니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경설에 따라 오계분수설(五戒分受說)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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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유부의 힐난)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근사 내지 필추가 수지하는 율의의 수량(5계 혹은 250계)이 결정코 그러한 것인가?(경부의 반문)
  부처님의 교법의 힘[敎力]에 따라 시설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유부의 답)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부처님의 교법의 힘에 따라 시설된 이 같은 사실, 즉 '비록 율의를 결여하였을지라도 근사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필추 등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경부의 반증)
  그러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율의를 결여하여도 근사를 성취한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歸宗)
  
  이러한 근사 등의 일체의 율의는 무엇에 의해 하·중·상 품을 획득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하·중·상 품은 마음에 따른 것이다.
  下中上隨心
  
  논하여 말하겠다. 8중(衆)이 수지하는 별해탈율의에는 모두 그것을 받는 마음에 따라 하·중·상 품이 있으니, 이와 같은 이치에 의해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혹 어떤 경우 하품의 율의를 성취하기도 하며, 이생이라 하더라도 혹 어떤 경우 상품의 율의를 성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단지 근사율의만을 받고 삼귀의(三歸依)는 수지하지 않을 경우, 근사를 성취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근사를 성취하지 못한다. 다만 이를 알지 못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77)
  온갖 유정으로서 불(佛)·법(法)·승(僧)에 귀의한다고 함은 무엇에 귀의
  
  
  
77) 그러나 이 경우 죄는 율의를 주는 스승이 획득한다. 주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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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과 승가를 성취하게 하는
  무학(無學)과 두 가지 법과
  아울러 열반택멸에 귀의하면
  이를 설하여 삼귀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歸依成佛僧 無學二種法
  及涅槃擇滅 是說具三歸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다만 능히 부처를 성취하게 하는 무학법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러한 법은 수승하기 때문에 그 소의신은 부처님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법을 획득함에 따라 부처님은 능히 일체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부처의 무학법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진지(盡智) 등과 아울러 그것의 수행(隨行)을 말한다.78) 그러나 색신은 무학법이 아니니,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동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부처님[一佛]께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체의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마땅히 일체의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성도(즉 무루도)의 상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승가(僧伽)에 귀의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능히 승가를 성취하게 하는 학·무학의 법에 모두 귀의하는 것을 말하니, 그것을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승가는 여덟 가지 종류의 보특가라를 성취하는 것이며,79) [그러한 승가야말로] 파
  
  
78) 즉 부처를 성취하는 무학법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 그리고 그것과 상응구기하는 무루의 오온이다. 진·무생지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6(p.1178)에서 논설함.
79) 즉 학법·무학법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4향(向) 4과(果), 즉 예류향·예류과, 일래향·일래과, 불환향·불환과, 아라한향·아라한과가 성취되기 때문에 귀의승의 본질은 학·무학법이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승가에는 무치승(無僧)·아양승(羊僧)·붕당승(朋黨僧)·세속승(世俗僧)·승의승(勝義僧)의 다섯 가지가 있다. 여기서 무치승이란 금계(禁戒)를 훼손하면서 법복을 입은 자이며, 아양승이란 삼장에 대해 이해하거나 달통함이 없는 자로서, 벙어리 양처럼 변설(辯說)이 공용이 없는 자, 붕당승이란 이를테면 흩어져 놀거나[遊散] 업무를 경영하고 투쟁함에 있어 뛰어난 방편으로 붕당을 결성하는 자를 말하는데, 이 세 가지 승은 다분히 비법(非法)의 업을 짓는 자들이다. 그리고 세속승이란 선한 이생으로서, 작법(作法)과 비작법의 업에 능통한 이들이다. 승의승이란 바로 학·무학의 법과 아울러 그 소의로서의 그릇이 될 만한 자를 말하는데, 이들은 결정코 비법의 업을 짓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가지 승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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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부처, 한 승가에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체의 부처, 일체의 승가에 귀의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마땅히 일체의 부처, 일체의 승가에 귀의해야 할 것이니, 모든 승가의 도에는 그 상에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경에서 "당래(當來,미래)에 승가가 존재할 것이니, 그대는 마땅히 귀의해야 할 것이다"고 설한 것은,80) 그 경에서는 단지 당래에 현견될 승보(僧寶)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열반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같은 열반이라는 말은 오로지 택멸(擇滅)만을 나타내니, 자타(自他) 상속의 번뇌와 괴로움의 적멸(寂滅)은 동일한 상이기 때문에 두루 귀의하는 것이다.81)
  만약 오로지 무학의 법만이 바로 부처라고 한다면, 부처의 소의신[佛所]에 악심으로 피를 내게 하였을 경우 그것은 다만 생신(生身)이 손상된 것일 뿐인데, 어떻게 무간죄(無間罪)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비바사자(毘婆沙者)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러한 [무학법의] 소의신을 파괴할 때 그 법도 따라서 파괴되기 때문이다."82)
  
  
80) 『불설태자서응본기경(佛說太子瑞應本起經)』 권하(대정장3, p. 479중). 부처님께서는 성도 후 최초로 제위(提謂, Trapusa)와 파리(波利, Bhallika)등 5백 명의 상인에게 삼귀계를 주었지만 당시는 아직 승가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81) 자신의 수많은 번뇌와 고과(苦果), 그리고 타인의 수많은 번뇌와 고과가 적정 소멸하여 동일상이 되는 경지가 바로 열반이다. 따라서 열반에는 수많은 열반이 있지만 그 상은 적멸로서 동일하다.
82) 참고로 『대비바사론』 (권제116,한글대장경122, p. 363)상에서 유부는 '출불신혈(出佛身血)'과 '파화합승(破和合僧)'의 죄의 경중을 비교하여, 전자는 다만 불타의 색신을 파괴하는 것일 뿐이지만 후자는 법신을 파괴하는 것이어서 그 죄가 더 무겁다고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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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본론(本論, 아비달마론)을 살펴보면 '오로지 무학법만을 일컬어 부처라고 한다'고 말한 것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무학법은 능히 부처를 성취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부처 자체(즉 무학법)를 부정하지 않으니 소의신도 [여기에] 포섭되며, 따라서 앞에서의 힐난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83)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부처와 승가가 세속심(즉 유루심)에 머물 때 마땅히 부처도 아니고 승가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고, 또한 마땅히 오로지 필추를 성취하게 하는 [구족]계만이 바로 필추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추에게 공양하려고 하는 자는 오로지 필추를 성취하는 시라(尸羅)에 공양해야 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 귀의하려고 하는 자도 역시 다만 부처를 성취하는 무학법에 귀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함은 여래의 18불공법(不共法)에 모두 귀의하는 것이다"고 하였다.84)
  이같이 '능히 귀의한다'고 함은 어떤 법을 본질로 삼는 것인가?
  어표업을 본질로 삼는다.
  이와 같은 귀의는 무엇을 목적[義]으로 삼는 것인가?
  구제(救濟)를 목적으로 삼는다. 즉 그것(즉 삼보)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핍박되면
  대개는 온갖 산에 귀의하고
  들판과 숲[叢林]에 귀의하며
  [신]목과 제다(提多,사당)에 귀의한다.
  
  
  
  
83) 즉 경에서 부처의 색신을 부처 자체(법신)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특별히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색신을 역시 부처라 이름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
84) 여래의 18불공법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p.1223 이하)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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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귀의는 수승하지 않고
  이러한 귀의는 존귀하지도 않으며
  이러한 귀의에 의해서는
  온갖 괴로움으로부터 능히 해탈하지 못한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고
  아울러 법과 승가에 귀의하면
  4성제(聖諦)에 대해
  항상 지혜로써 관찰할 것이니,
  
  고(苦)를 알고 고의 집(集)을 알며
  온갖 고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을 알고
  8지(支)의 성도(聖道)를 알아
  안온한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귀의야말로 가장 수승하고
  이러한 귀의야말로 가장 존귀하며
  반드시 이러한 귀의에 의해
  모든 괴로움에서 능히 해탈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귀의는 일체의 대중(즉 8衆)이 율의를 수지하는 데 널리 방편문(方便門)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세존께서는 다른 율의처에서는 '비범행(非梵行)에서 떠나는 것'을 설정하여 그것을 학처(學處)로 삼았으면서, 오로지 근사율의 한 가지에서 만은 그것을 고쳐 단지 욕사행(欲邪行)을 떠나도록 한 것인가?85)
  게송으로 말하겠다.
  
  
  
85) 여기서 비범행(구역은 欲)이란 일체의 음행으로 출가자의 금계이며, 욕사행(구역은 邪)이란 다른 이의 처를 범하는 등의 불의의 음행으로 재가자의 금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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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사행(欲邪行)은 [세간에서] 가장 꾸짖는 것이기 때문에
  떠나기가 쉽고, [성자도] 그 부작(不作)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邪行最可訶 易離得不作
  
  논하여 말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꾸짖고 힐책하는 바는 오로지 욕사행뿐이니, 능히 다른 이의 처(妻) 등을 침해하여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악취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범행은 그렇지가 않다.
  또한 욕사행에서 멀리 떠나는 것은 쉽지만, 모든 재가자는 음욕에 탐착하기 때문에 비범행에서 떠나는 계를 수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즉 [세존께서는] 그들(재가자들)이 능히 장 시간 동안 닦고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비범행에서 떠나야 하는 계는 제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모든 성자는 일체의 욕사행에 대해서는 결정코 부작율의(不作律儀, 즉 욕사행을 짓지 않는 율의)를 획득하였고, 경생(經生)의 성자도 역시 그것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비범행을 떠나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근사가 받는 율의에는 단지 욕사행을 떠나는 것만을 제정하고 설정한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경생의 성자도 근사의 율의를 범해야 하지 않겠는가?86) 그리고 여기서 부작(不作)의 율의란 이를테면 결정코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일찍이 근사율의를 받은 후에 처첩(妻妾)을 취하였을 경우 그러한 처첩에 대해서는 앞서 계를 받을 때 율의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치상으로는 실로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이나, 다만 일부분에 대해서는 별해탈율의를 획득한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87)
  
  
86) 경생의 성자란 몇 번의 생을 거쳐 깨달음을 획득하는 성자의 뜻으로, 예류나 일래를 말한다. 즉 그들은 욕사행은 떠났지만 취처(娶妻)하여 비범행을 행하기 때문에, 만약 근사율의에 '이(離)비범행'을 설정하게 되면 그러한 성자 또한 근사율의를 범하게 된다.
87) 즉 이전에 처첩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근사율의를 받았다가 그 후 처첩을 취하였을 경우에 욕사행의 계를 범하는 것이 아니지만 욕사행을 떠나겠다는 율의에 미래의 처첩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욕사행을 행하지 않겠다는 맹세는 일부분(미래 처첩을 제외한)에만 적용된 것에 불과하다는 뜻. 율의를 받는 자는 반드시 율의를 특정의 유정·갈래[支]·처소[處]·시간[時]·조건[緣]에 한정시키지 않아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다.(본론 권제1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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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후 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맹서한 대로 율의를 획득하는 것으로
  모든 상속에 대해 맹서한 것은 아니다.
  得律儀如誓 非總於相續
  
  논하여 말하겠다. 본래의 맹서대로 율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맹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사행에서 떠나겠다는 것으로, 일체의 유정의 상속에 대해 '나는 마땅히 비범행에서 모두 떠날 것이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유정의 상속상에 오로지 욕사행을 떠나는 계를 획득하는 것일 뿐 비범행을 떠나는 율의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율의를 받은] 이후에 처첩을 취하더라도 앞서 받은 계를 훼손하거나 범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단지 거짓말하는 것[虛誑語]에서 떠나는 것만을 근사의 율의로 제정하고 그 밖의 이간어(離間語) 등에서 떠나는 것은 근사율의로 삼지 않은 것인가?88)
  역시 앞에서 설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니, 이를테면 거짓말은 가장 꾸짖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며, 온갖 재가자들도 멀리 떠나기가 용이한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성자는 그것의 부작(不作)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시 별도의 이유가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거짓말하는 것을 허락할 경우
  바로 온갖 학처를 어기기 때문이다.
  
  
  
88) 네 가지 어업도 즉 이간어(離間語, 즉 兩舌)·허광어(虛誑語, 즉 妄語)·추악어(麤惡語, 즉 惡口)·잡예어(雜穢語, 즉 綺語) 가운데 허광어를 떠나는 계만을 근사율의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 4업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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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以開虛誑語 便越諸學處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거짓말하는 것을 허락할 경우] 온갖 학처를 어겼는지에 대해 검문당할 때 바로 '나는 그것(즉 파계)을 행하지 않았습니다'고 말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계를 어기게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것(계)을 견고히 지니도록 하기 위해 일체의 율의에서 모두 허광어에서 떠나는 계를 제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들(근사)로 하여금 계를 범하였을 경우 바로 스스로 발로(發露)하여 뒤에 또 다시 범하는 것을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차죄(遮罪)에서 멀리 떠나는 계를 근사율의로 건립하지 않은 것인가?89)
  누가 이러한 근사율의 중에서는 차죄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인가?
  [그렇다면 근사율의 중에서는] 어떠한 차죄를 떠나는 것인가?
  이를테면 음주(飮酒)를 떠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러한 온갖 차죄 중에서 그 밖의 다른 것은 떠나야 할 계로서 제정하지 않았으면서 오로지 음주만을 막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차죄 중에서 음주만 떠나게 한 것은
  그 밖의 다른 율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遮中唯離酒 爲護餘律儀
  
  논하여 말하겠다. 술 마시는 모든 이의 마음은 대개 방종하여 그 밖의 다른 온갖 율의를 능히 수호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율의를 수호하기 위
  
  
  
89) 5계 중 불음주를 제외한 살생 등의 네 가지는 그 자체로서 죄악이기 때문에 성죄(性罪)라 하며, 음주는 그 자체로서는 죄가 아니지만 실념하여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망각하게 하는 죄이기 때문에 차죄(遮罪)라고 한다. 본 단에서는 차죄에는 음주나 도식향만(塗飾香鬘), 좌와고광엄려상좌(坐臥高廣嚴麗床座) 등이 있지만, 음주만을 근사율의로 설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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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음주에서 떠나게 한 것이다.
  음주가 차죄에 포섭된다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인가?
  여기에는 성죄의 상(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모든 성죄는 오로지 염오심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즉 병을 치료하기 위해 비록 온갖 술을 마실지라도 취하거나 어지러워하지 않으니, 능히 염오심이 없는 것이다.
  술은 능히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한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술을 마시려고 하는 것을 어찌 염오심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염오심이 아니다. 즉 자신의 주량을 알아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양을 정해놓고 마시기 때문에 취하게 하거나 어지럽게 하지 않으며, 그래서 이것은 염오심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지율자(持律者)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음주는 바로 성죄이다. 즉 존자 오파리(波離, Upal )가 '저는 응당 무엇을 병자들에게 공급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세존께서 고하여 말씀하기를, '오로지 성죄와 관련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공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질병에 걸린 석가종족이 술을 요구한 일이 있었지만 세존께서는 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로서 나를 스승이라 칭하는 이는 모두 마땅히 술을 마셔서는 안 될 것이며, 나아가 풀 끝에 묻은 한 방울의 술이라 할지라도 역시 마셔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음주는 바로 성죄에 포섭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모든 성자들은 비록 많은 생을 바꿀지라도 역시 살생 등과 마찬가지로 [불음주계를] 범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경에서 '이는 바로 신악행(身惡行)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對法, 아비달마)의 모든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음주는] 성죄가 아니다. 그래서 병자를 위해서는 차계(遮戒)도 모두 허락한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다른 어떤 때 음주를 막은 것은 이것으로 인해 성죄를 범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취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그 양에는 한정이 없기 때문에 나아가 풀 끝에 묻은 만큼의 양을 마시는 것도 막았던 것이다. 또한 일체의 성자가 모두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모든 성자는 부끄러움을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술을 마시게 되면 능히 정념(正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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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조금이라도 마시지 않는 것은 독약처럼 그 양에 한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에서 '이는 바로 신악행이다'고 설한 것은 술이 바로 일체의 방일(放逸)에 근거[處]가 되기 때문이다. 곧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유독 [음주에만] '방일의 근거'라는 명칭을 설정하고, 그 밖의 다른 것에는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하지 않으니, 그것들은 모두 성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서] '자주 익혀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한 것은, 술을 자주 마실 경우 소의신 중의 온갖 불선법이 능히 상속하여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또한 능히 악취를 인기할 만한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혹은 능히 그것(악취를 인기할 만한 업)으로 하여금 더욱 증성하여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경에서 "솔라(窣羅, sura)·미려야(迷麗耶, maireya)·말타(末陀, madya)는 방일의 근거[處, sthana]이다"고 하였는데, 무슨 뜻에 근거하여 이같이 설한 것인가?
  밥을 빚어 만든 술을 일컬어 '솔라'라고 하며, 그 밖의 것을 빚어 만든 술을 '미려야'라고 이름한다.90) 즉 앞의 두 술로서 이미 삭았으나 아직 익지 않아 능히 취하게 하지 않는 것은 '말타'라고 이름하지 않지만, 만약 취하게 하는 때이면 그것을 '말타주'라고 이름하니, [취하는] 작용이 없는 상태와 차별지어 거듭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빈낭(檳榔, 나무이름)이나 패자(稗子, 피, 구역에서는 俱陀婆穀) 등[으로 만든 술]도 역시 능히 취하게 하므로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바야흐로 '솔라주'나 '미려야주'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이러한 술을 마시는 것은 그것이 비록 차죄일지라도 방일하게 하며, 온갖 악을 널리 짓게 하므로 이를 엄중 차단하게 하기 위해 '방일의 근거'라는 말을 설한 것이니, 술은 방일의 소의처이기 때문이다.
  
90) 솔라주는 곡주(穀酒) 혹은 미주(米酒)라고도 하며, 미려야주는 목주(木酒)라고도 한다. (『십송율』 권제17,대정장23, p. 121중)
 
출처 : 通達無我法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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