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은 참으로 중중존(衆中尊)이었습니다. 몇몇 종파가 형성되었지만 선지식은 조사로 추앙받을 뿐, 오늘날처럼 다투어 추종하는 무리를 짓거나 종정의 자리에 올라 권위를 내세우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승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깨달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주장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깨달아야 할 법에 대하여 사성제, 팔정도, 연기, 공, 무아 , 불성 등을 말한 것입니다.
원효는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뜻이 같을지라도 말이 다르면 범부는 헛갈려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원효는 믿음과 깨달음의 대상을 ‘일체 경계는 일심인 지혜’를 높이 세워야 모든 주장을 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붓을 들어 글을 썼습니다.
양산/정토원 원장
“만약 뜻(意)을 얻지 못하고 말을 따라서 글 뜻(義)을 취하면 유변(有邊)이거나 무변(無邊)이거나 모두 허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변이 아닌 문에 의지한다면 무변의 뜻(義)을 거짓으로 설할 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의혹을 해결하지 못하면 비록 저 국토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변두리 땅(邊地)에 있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지혜의 경계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능히 스스로 겸손하고,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지만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며 한결같이 엎드려 믿으면(仰惟如來 一向伏信), 이와 같은 등의 사람은 그 행과 품계에 따라 저 국토에 왕생하고 변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변지에 태어나는 사람은 특별한 한 부류로서 구품에 섭수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응당 망령되게 의혹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원효는 믿음에 대하여 앙신(仰信), 곧 ‘우러러 믿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며 한결같이 엎드려 믿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신념으로써 부처의 세계에 나아갈 수 있고 깨달음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 혹은 없다 헤아리지 말고 ‘일체 경계는 일심(一心)인 지혜’를 우러러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심은 믿음의 대상인 동시에 성취해야 할 법입니다. 여래의 본원력에 힘입는 칭명이나, 자력의 관행(觀行)이나, 혹은 정각이라 말하든지, 견성이라 말하든지 모두가 종교적 신념을 일으키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도록 인도하는 방편입니다.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야만 진정한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원효의 종교적 신념이요, 불교관입니다.
<관무량수경> 제8 상관(像觀)에서 ‘시심작불 시심시불(是心作佛 是心是佛)’이라 하셨습니다. 이 마음은 자성 청정심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번뇌의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부처님의 지혜를 믿는 신심입니다. 신심이 불성이요, 믿음이 부처입니다. 이와 같이 알고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으면 자연히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묻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일심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를 우러러 믿는 것이 깨달음보다 어렵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때때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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