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13강-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이상의 교설은 근본교설에서 말하고 있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설명입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설명한 두 교설이 나타내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교설은 현상계를 괴로움으로 규정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며[유전문(流轉門)], 그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알아 소멸[환멸문(還滅門)]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이연기를 설한 연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교설을 살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즉 이상에서 설한 사성제와 십이연기라는 것은 현상계에 대한 교설로서, ‘현상의 세계가 있다’ 라고 하는 전제 아래 설해진 교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남[타인]이 있으며, 객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이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다시말해 내(오온, 육근)가 있고, 내 밖에 세계(육경)가 있으며, 내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 속에 놓여 있다는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착각을 그대로 인정하는 전제 아래에서 설해진 교설입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았더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로써 괴로움을 여읜 존재였습니다. 다만 스스로 그 사실을 잊고 올바로 알지 못하며 그 사실에 몽매하기에 괴롭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 해야 할 일은 인간들이 느끼고 있는 괴로움이 실체가 있는 실존적인 괴로움이 아니라, 다만 착각 속에서 그렇게 느낄 뿐이며, 마음 속의 판단과 분별이 우리를 괴로움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괴로움이 사실은 괴로움이 아니지만 인간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부처님도 우리 인간의 눈높이로 내려 와서 인간들의 기준에서 설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이 괴롭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 눈에는 전혀 괴로울 것 없는 것에 스스로 얽매여 괴롭다고 하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걸 가지고 뭔 괴로움이라고 하느냐. 그건 괴로움이 아니야’라고 우리를 야단치지 않으시고 어머니가 아이를 어루만지고 다독거리듯이 우리의 근기에 맞춰 설법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 많이 괴롭겠구나.(고성제) 그 괴로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니?(집성제) 노병사라는 괴로움의 원인은 생이고, 생의 원인은 유이며, 유의 원인은 취이고...(십이연기) 이처럼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과 집착에 있단다. 무명과 집착에 있으니 그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을 여읜 열반의 즐거움이 있겠지.(멸성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면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 열반락을 얻을 수 있을까.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팔정도요 중도란다.(도성제)’ 이렇게 설법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진리의 본질에서 본다면 나도 없고(오온개공, 무안이비설신의), 세계도 없으며(무색성향미촉법), 나고 죽는다는 것도 없으며, 늘고 줄거나,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없고(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그렇게 나도 세계도 다 공하니 따라서 내가 느끼는 괴롭다는 것 또한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도 내가 느끼는 괴로움도 모두 공하여 없는 것이니, 괴로움이 없다면 괴로움의 원인이나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이나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에 이르는 길 또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의 원인을 탐색하는 작업인 십이연기 또한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조금 중요한 부분이니 다시 설명하면, 나도 있고, 세계도 있으며, 내가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이러한 전제하에서 ‘괴로움’을 설할 수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을 설할 수 있고, ‘괴로움에서 소멸된 상태’를 설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설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이상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범부 중생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이 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성제에서 인정한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가? 공의 입장에서는 현상계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던 바와 같습니다. 즉, 현상계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고 정의한 뒤 오온이 개공이라는 것, 그리고, 이어 십이처와 십팔계가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반야심경에서는 현상계에 대한 단순한 겉모습을 살펴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현상계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습, 즉, 공상(空相)에 대해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이 공상에 의거해 본다면, 역시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사실도 인정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에 있어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현상의 일체 세계가 철저히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 공하고, 현상의 세계가 모두 공하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괴로움이 없는 마당에 괴로움의 원인과 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앞에서 오온개공이라 하였고,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체의 현상계를 부정한 공의 바탕 아래에서는 사성제나 십이연기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공이라고 하는 연유인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 수행인 육바라밀 중에서, 지혜, 즉, ‘반야바라밀’은 바로 이 점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즉, 현실을 괴로움으로 인정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근본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사성제, 십이연기라는 교설의 주요 목표라면, 대승불교의 공 사상에서는 본래 ‘나’가 없고, ‘현상계’가 없다는 것[空]을 올바로 철견(哲見)하여, 괴로움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無自性], 인연의 가합상[緣起]임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無執着]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괴로움[苦]이 본래 없다는 것을 올바로 알기에, 괴로움의 원인[集], 소멸[滅],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도 집착하여 끄달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올바로 철견했을(照見) 때 진정으로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 두 극단을 분별(無分別)하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한쪽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 중관(中觀)’의 실천적인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반야바라밀을 통한 대자유의 깨달음에의 길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와 같은 이치로 인해 『반야경』의 핵심을 공(空)이라 하는 것이며, 공의 모습이 바로 연기(緣起)이고, 공이며 연기이기에 스스로의 자성이 없어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할 바가 없다는 무집착(無執着)을 올바로 알아, 생사와 열반 어느 한 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대자유의 중도(中道)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가르침이 대승의 반야 공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공의 본질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므로, 단편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성(空性) =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무분별(無分別) = 무집착(無執着) = 중도(中道)라는 공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교리들이 서로 다른 교리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본질은 다르지 않은 교리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공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일체의 물질, 정신적인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공의 입장에서 삶을 조명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일체의 집착에 끄달리지 않고, 놓고 가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놓고 가는 삶, 비우는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방하착(放下着)! 방하착(放下着)!’ 하는 것입니다.
방하착이란 공의 실천이며 연기법의 실천이고 중도와 무집착, 무소득, 무자성의 온전한 실천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방하착 해야 한다는 이유는, 일체 애욕과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이유는 우리가 잡고 있는 일체가 다 공이며 연기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신 수많은 교리들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교설들을 오롯이 바로 세우고자 하는 부정입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위한 부정의 논리인 것입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방편의 대기설법으로 수많은 교리들을 설하셨다면 반야심경에서는 수많은 방편의 교설들을 근본으로, 본질로 회귀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방편법을 거두어 근본법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배웠던 모든 것을 다 부정해야 합니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뗏목을 방편으로 강을 건넜다면 뗏목을 버리고 가야 하듯이, 근본불교의 교리를 방편으로 괴로움을 여의었다면 불교교리까지도 놓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에서는 방편까지도 놓아버려야 본질적인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끊임없는 부정은 바로 이러한 본질을 향한 파사현정의 부정입니다.
그럼 본문으로 가서,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은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행도 없고 행이 다함도 없고, 식도 없고 식이 다함도 없으며... 내지 노사의 괴로움도 없고, 노사의 괴로움이 다함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에 이르는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고집멸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성제에 대한 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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