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구사론

[스크랩] 아비달마구사론 제 26 권

수선님 2018. 12. 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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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 26 권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7. 분별지품(分別智品)1)
  앞의 「현성품」 앞부분에서 온갖 인(忍)과 온갖 지(智)에 대해 논설하였으며, 뒷부분에서 다시 정견(正見)과 정지(正智)에 대해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인(忍)이면서 지(智)가 아닌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지'이면서 견(見)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2)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혜(聖慧)의 인(忍)은 '지'가 아니고,
  진지와 무생지는 '견'이 아니며,
  그 밖의 혜는 두 가지와 통하고, 유루혜는
  모두 '지'이나 여섯 가지는 '견'의 성질이다.
  聖慧忍非智 盡無生非見
  
  
1) 앞의 「현성품」이 수행의 과보로서 현자와 성자에 대해 밝힌 것이라면, 본 품과 다음의 「분별정품(分 別定品)」은 그와 같은 성과(聖果)를 획득하게 되는 인연을 밝히는 것으로, 본품의 전반부는 온갖 유형의 지( 智)에 대해, 후반부는 '지'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2) 인(忍, ksanti)과 지(智, jnana)와 견(見, drsti)은 모두 혜(慧)의 다른 작용으로, '인'은 4제의 진리 를 인가하면서도 아직 결단에 이르지 않은 것을 말하며, '지'는 그것을 확정하고 결단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 그리고 '견'은 추리 판단[推度]의 작용을 말한다. 이하 「분별지품」의 총설로서, 이 세 가지 사이의 법상 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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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餘二有漏慧 皆智六見性
  
  논하여 말하겠다. 혜(慧)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유루혜와 무루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오로지 무루혜에만 '성(聖)'이라는 명칭을 설정하는데, 이러한 성혜 중에서 8인(忍)은 지(智)의 성질이 아니니, 끊어야 할 스스로의 의심[疑]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3) 그러나 '견'의 성질에는 포섭될 수 있으니, 추리 판단[推度]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진지와 무생지의 두 가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니, 이미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종식되어 추리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성혜는 모두 '지'와 '견'의 두 가지 성질과 통하니, 이미 스스로의 의심을 끊었으며, 추리 판단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4)
  온갖 유루혜는 모두 '지'의 성질에 포섭되지만, 그 중에서 오로지 여섯 가지만은 역시 또한 '견'의 성질이기도 하니, 이를테면 다섯 가지의 염오견과 세속정견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5)
  그리고 이상에서 설한 성혜와 유루혜는 모두 다 택법(擇法)이기 때문에 아울러 '혜'의 성질에 포섭된다.
  
  지(智)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상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지는 열 가지이나 총괄하면 두 가지로
  
  
3) 8인은 그것에 의해 끊어지는 의(疑)와 구생하여 그것을 끊으려고 하는 단계로서, 아직 '의'의 득에 장 애되기 때문에 능히 결단(決斷)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인'은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4제의 이치를 지 금 비로소 관찰하는 것으로, 아직 되풀이하여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지(智)는 아니 지만, 이 역시 추리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見)'의 성질이다.
4) 앞서 언급한 8인과 진지·무생지를 제외한 그 밖의 유학의 8지(智)와 무학의 정견은 모두 추리 판단의 '견'이자 결단의 '지'이다.
5) 다섯 가지 염오견이란 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계금취로서, 이것이 '견'을 본질로 한다는 것에 대 해서는 본론 권제19 주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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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루와 무루의 차별이 바로 그것인데
  유루지는 세속지를 말하고
  무루지는 법지와 유지를 말한다.
  智十總有二 有漏無漏別
  有漏稱世俗 無漏名法類
  
  세속지는 두루 경계로 하며
  법지와 유지는
  순서대로 욕계와 상계의
  고제 등을 경계로 삼는다.
  世俗遍爲境 法智及類智
  如次欲上界 苦等諦爲境
  
  논하여 말하겠다. 지(智)에는 열 가지의 종류가 있어 일체의 지를 포섭하니, 첫째는 세속지(世俗智)이며, 둘째는 법지(法智)이며, 셋째는 유지(類智)이며, 넷째는 고지(苦智)이며, 다섯째는 집지(集智)이며, 여섯째는 멸지(滅智)이며, 일곱째는 도지(道智)이며, 여덟째는 타심지(他心智)이며, 아홉째는 진지(盡智)이며, 열째는 무생지(無生智)이다.
  이와 같은 10지는 전체적으로 말하면 오로지 두 가지 종류일 뿐이니, 유루성과 무루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6)
  이러한 두 가지 지는 다시 세 가지로 차별되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가 그것이다. 즉 앞의 유루지를 전체적으로 세속지라고 이름하니, 항아리
  
  
6) 참고로 유루지와 무루지의 차별은 다음과 같다. 무루지는 경계에 대한 행상이 명리(明利)하며, 유루지 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걸지라나무[地羅, khadira, 檐木, 아카시아나무의 일종]와 그 밖의 다른 나무의 숯은 화력이나 향내가 다르며, 시뻘건 쇠붙이[ 炎鐵]와 풀이 타는 것[草火]에도 뜨거운 세력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혹은 세속지는 뒤에 증상만(增上慢) 을 일으키지만, 무루지는 그렇지 않으며, 또한 세속지는 일체의 유위와 무위를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지만(이 를테면 계경에서 "제행은 비상(非常)이며, 일체법은 비아이며, 열반적정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 법지는 다만 욕계의 4제만을, 유지는 상 2계의 4제만을 소연으로 삼는 등의 광협의 차별이 있다.(『현종론』 권제35, 한글대장경201,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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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의 다수의 세속의 경계를 취하기 때문이며,7) 뒤의 무루지를 법지와 유지로 나누어 구별한 것이다.8)
  이러한 세 가지 지 중에서 세속지는 일체의 유위와 무위를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으며, 법지와 유지의 두 종류는 순서대로 욕계와 상 2계의 4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지(智)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지와 유지는 경계의 차별에 따라
  고지(苦智) 등의 네 가지 명칭으로 설정되니
  모두 진지와 무생지에 통하는 것으로
  최초의 그것은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이다.
  法類由境別 立苦等四名
  皆通盡無生 初唯苦集類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는 경계의 차별에 따라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지로 나뉜다.9)
  그리고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지(법지·유지와 4諦智)로서 만약 무학에 포섭되고 '견'의 성질이 아니라면, 이를 일컬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라고 한다. 이러한 진·무생의 두 가지 지로서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은 오로지 고류지와 집류지이니,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하는 여섯 종류의 행상으로써
  
  
7) 세속지란 변괴성(變壞性)인 '항아리', '옷' 등의 세속의 경계를 대상으로 한 지식을 말한다.(본론 권제 22 주51 참조).
8) 법지는 욕계의 4제를 소연으로 하는 무루지로서, 최초로 제법의 참된 이치(16행상)를 깨달아 알았기 때 문에 '법지'라 이름한 것이며, 유지는 상 2계의 4제를 소연의 경계로 하는 무루지로서, 소연과 행상이 앞의 법지와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라고 이름한 것이다.
9) 세속지의 경우도 고제(苦諦) 등의 행상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즐거움[樂] 등이라고 인정하기도 하며, 이와 같은 세속지를 획득하고 난 후 4제를 소연으로 하는 의심[疑]이 일어나기 때문에 고지 (苦智) 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현종론』 권제35, 한글대장경201,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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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有頂)의 온을 경계로 하여 관찰하기 때문이다.10)
  그렇다면 금강유정(金剛喩定)의 경계는 이것과 동일한 것인가?
  고제·집제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라면 이것과 동일하지만, 멸제·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에는 이것과 그 경계가 다르다.11)
  앞에서 설한 아홉 종류의 지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지·유지와 도지와 세속지는
  타심지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지만
  뛰어난 경지와 근기와 계위와
  과거·미래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法類道世俗 有成他心智
  於勝地根位 去來世不知
  
  법지·유지는 서로를 알지 못하며
  성문과 인각유와 부처님은
  순서대로 견도의 두 찰나와 세 찰나와
  일체의 찰나를 안다.
  法類不相知 聲聞麟喩佛
  如次知見道 二三念一切
  
  
10) 진지와 무생지는 4제에 대한 지(智)이기 때문에 그 자체는 다름 아닌 법지와 유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지와 무생지는 유정지의 4제를 관찰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처음에 고제하의 비상(非常)과 고(苦)의 행상, 집제하의 인(因)·집(集)·생(生)·연(緣)의 네 행상으로써 유정지의 5온을 관찰하고 나서 생겨나기 때문에 최초로 생겨나는 것은 오로지 고류지·집류지라고 한 것이다. 참고로 고제의 공·비아의 행상을 짓지 않는 것 은 출관(出觀) 후 '(나)는 이미 생을 다하였다'는 등의 세속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1) 금강유정은 고류지·집류지로서 유정지의 4온을 소연으로 하는 경우도 있으며, 멸·도법지와 멸·도류 지로서 9지의 멸·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진·무생지의 초찰나는 단지 고·집류지일 뿐이기 때 문에 그 경계가 전자와는 동일하지만, 후자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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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는 타심지(他心智)를 성취하는 일이 있지만, 그 밖의 지는 그렇지 않다.
  즉 이러한 타심지는 그 경계에 대해 결정적인 상을 갖으니, 이를테면 수승한 마음과 과거·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수승한 마음'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경지[地]와 근기[根]와 계위[位]가 뛰어난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뛰어난 경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하지의 타심지는 상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뛰어난 근기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신해(信解)와 시해탈 근기의 타심지는 견지(見至)와 불시해탈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12) 뛰어난 계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함은 불환과 성문의 응과(應果)와 독각과 대각 중에서 앞의 계위의 타심지는 뒤의 뛰어난 계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13) 또한 이러한 타심지는 과거와 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오로지 현재 다른 상속 중의 마음 따위만을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지와 유지의 품류에 포섭되는 타심지는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즉 법지에 포섭되는 모든 타심지는 유지의 품류를 알지 못하며, 유지에 포섭되는 모든 타심지는 법지의 품류를 알지 못하니, 법지와 유지는 욕계와 상계의 모든 대치(즉 견혹과 수혹의 대치)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14)
  그리고 이러한 타심지는 견도위 중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견도에서는 4제 이치에 대한 전체적 관찰[總觀]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15) 그렇지
  
12) 즉 둔근의 불환(신해)과 아라한(시해탈)의 타심지는 이근의 불환과 아라한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참고로 견도위에서는 타심지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수신행·수법행의 타심지라는 말은 없다.(후술)
13) 타심지는 오로지 자지와 하지, 자신과 동일하거나 아래의 근기나 계위의 마음 만을 알 뿐이다.
14) 법지는 욕계의 견·수혹의 대치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것에 포섭되는 타심지는 유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며, 유지는 색·무색계의 견·수혹의 대치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것에 포섭되는 타심지는 법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즉 그것들은 경계로 삼는 대상의 범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15) 견도의 관찰은 공상(共相)의 이치를 전체적으로 관찰[總觀]하는 것이지만 타심지는 한 유정의 1찰나의 마음을 개별적 소연[別緣]으로 삼는 것으로, 견도는 지극히 빠르게 일어나므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알 겨를이 없기 때문에 견도위에는 타심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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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견도의 마음은 모두 이러한 타심지의 소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유정이 장차 견도에 들고자 한다면 성문과 독각은 미리 가행을 닦아야 하는데, 하물며 그러한 유정의 견도위의 마음을 알고자 함에 있어서랴. 곧 그러한 온갖 유정이 견도위에 들었을 때, 만약 성문이 법지 부분[法分]의 가행을 원만히 하였다면 그 유정의 견도 첫 두 찰나의 마음(고법지인과 고법지)을 알며, 만약 다시 유지 부분[類分]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별도의 가행을 닦아 그 가행이 원만하게 되었다면, 그 유정은 이미 제16찰나의 마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비록 이러한 마음(제16심)을 알았을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견도를 안 것이 아니다.16)
  인각유(麟角喩) 독각이 만약 법지 부분의 가행을 원만히 하였다면 그 유정의 견도 첫 두 찰나의 마음을 알며, 만약 다시 유지 부분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별도의 가행을 닦아 그 가행이 원만하게 되었다면, 그 유정의 제8 찰나인 집류지의 마음을 아니, 이는 다만 하등의 가행에 의하였기 때문이다.17)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독각은 처음 두 찰나와 제15찰 나의 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존은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가행에 의하지 않고서도 그 같은 견도의 일체의 마음에 대해 능히 안다.18)
  
16) 성문은 오로지 견도위의 처음 두 찰나(고법지인·고법지)의 마음만을 알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한다. 즉 제3·제4, 찰나는 유지의 부분(고류지인·고류지)이기 때문으로, 만약 유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 다시 새로이 가행을 일으킬 때, 상대방은 다시 관지(觀智)를 승진시켜 13찰나를 거칠 것이며, 제14찰나의 가행을 원만히 하여 상대방의 그것을 알고자 할 때에는 그는 이미 제16찰나의 수도에 들기 때문에 두 찰나 이상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송에서 '성문은 두 찰나의 마음을 안다'고 설한 것이다.
17) 독각은 성문과 마찬가지로 법분(法分)의 가행으로 앞의 두 찰나의 마음을 알며, 다시 유분(類分)을 알기 위해 새로이 가행을 일으킬 때, 독각은 5찰나에 가행을 원만히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제8심인 집류지와 구행(俱行)하는 마음을 안다. 왜냐 하면 독각은 성문보다 이근이기 때문에 하등의 가행(적은 가행)에 의해서도 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8) 세존께서는 3무수겁 동안 정근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량(資糧)을 수습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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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와 무생지의 두 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4성제에 대한 지(智)로서
  '나는 이미 알았다'는 등으로 아는 것과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등으로 아는 것이
  차례대로 진지와 무생지이다.
  智於四聖諦 知我已知等
  不應更知等 如次盡無生
  
  논하여 말하겠다. 본론(本論)에서 설한 바와 같다.19) "무엇을 일컬어 진지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무학위에서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다', '나는 이미 집(集)을 끊었다', '나는 이미 멸(滅)을 작증하였다', '나는 이미 도(道)를 닦았다'고 스스로 바로 알며, 이에 따라 소유하게 된 지(智)와 견(見)과 명(明)과 각(覺)과 해(解)와 혜(慧)와 광(光)과 관(觀)을 바로 진지라고 이름한다.20) 무엇을 일컬어 무생지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나는 이미 고를 알았으므로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는 이미 도를 닦았으므로 더 이상 닦아야 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 바로 알며, 이에 따라 소유하게 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따위를 바로 무생지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무루지가 이와 같이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가습미라(迦濕彌羅)의 모든 논사는 설하기를, "이러한 두 지로부터 출관한 뒤에 획득한 지[後得智]로써 이와 같이 알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리고 이후에 획득한 두 지의 차별에 따라 이전의 현관(現觀)
  
  
19) 『품류족론』 권제1(한글대장경117, p.24).
20) 여기서 '지'는 결단(決斷) 혹은 거듭하여 아는 것을 말하며, '견'은 추구(推求) 혹은 현조(現照)를, '명'은 명랑(明朗)을, '각'은 각오(覺悟)를, '해'는 달해(達解)를, '혜'는 간택(簡擇)을, '광'은 혜광(慧光)을, '관'은 관찰을 말하는 것으로, 이 여덟 가지는 모두 혜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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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의 두 지의 차별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21)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무루지로써도 역시 이와 같이 안다"고 하였다.22)
  그리고 [앞의 본론(本論)에서] '견(見)'이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말의 편의에 따랐기 때문에, 혹은 진리의 이치를 바로 비추어 일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본론(本論)에서는 역시 "바야흐로 온갖 지(智)를 역시 또한 견(見)이라고도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3)
  이와 같은 10지의 상호 포섭관계는 어떠한가?
  세속지는 한 가지의 전부와 한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법지와 유지는 각기 한 가지의 전부와 일곱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고·집·멸지는 각기 한 가지의 전부와 네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도지는 한 가지의 전부와 다섯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타심지는 한 가지의 전부와 네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하며, 진지와 무생지는 각기 한 가지의 전부와 여섯 가지의 일부분을 포섭한다.24)
  
21) 이는 무분별의 무루지가 어떻게 '나는 이미 알았고, 끊었고, 작증하였고, 닦았다'는 차별적 분별을 알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해명이다. 즉 그러한 앎의 자각은 무분별의 무루인 진지·무생지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출관(出觀)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두 가지 유루의 세속지는 바로 진지와 무생지의 사용과(士用果)이다. "무루관 중에서는 이와 같은 행상을 갖는 것이 아니며, 요컨대 두 가지 지 이후에 이러한 분별을 일으키게 된다."(『대비바사론』 권제102, 한글대장경122, p.46)
22) 보광에 의하면 서방(西方)의 사문과 경부(經部) 등의 설로서, 16행상 이외 별도의 행상을 짓는 무루지가 있어 이와 같이 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무생지의 네 행상은 각기 고·집·멸·도의 4행상으로 해석한다.(『대비바사론』 권제102, 앞의 책, p.45)
23) 『품류족론』 권제1(한글대장경117, p.24 ; 대정장26, p.694상). "……여기서 '소유하게 된 온갖 견(見)'이란, 바로 온갖 지(智)를 견(見)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諸所有見者, 且諸智亦名見)" 즉 앞에서 진지와 무생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품류족론』에서 그것을 어떻게 '견'으로 설명한 것인가 하면, 그것은 다만 진의가 아닌 편의상의 설명이라는 뜻이다.
24) 세속지는 세속지 전부와 타심지의 일부(즉 유루의 타심지)를 포섭한다. 법지와 유지는 각기 동류의 지(智) 전부와 고·집·멸·도지와 진·무생지와 타심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고·집·멸지는 각기 동류의 지 전부와 법·유지와 진·무생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도지는 도지 전부와 법·유지와 진·무생지와 타심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타심지는 타심지 전부와 법·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진지와 무생지는 각기 동류의 지 전부와 고·집·멸·도지와 법·유지의 일부를 포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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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한 근거에서 두 가지의 지(유루지와 무루지)를 10지로 건립하게 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성과 대치와
  행상과, 행상과 경계와
  가행과 이루어짐과 원인의 원만함에 따라
  열 가지 지로 건립하게 된 것이다.
  由自性對治 行相行相境
  加行辦因圓 故建立十智
  
  논하여 말하겠다. 일곱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의 지를 10지로 설정하게 되었다.
  첫째로는 자성(自性)으로 인해 세속지를 설정한 것이니, 그것은 승의지(勝義智)를 자성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25)
  둘째로는 대치(對治)로 인해 법지와 유지를 설정한 것이니, 그것은 전부 욕계와 상계의 혹을 능히 대치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행상(行相)으로 인해 고지와 집지를 설정한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 지의 경계 자체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26)
  넷째로는 행상과 경계로 인해 멸지와 도지를 설정한 것이니, 이러한 두 가지 지는 행상과 경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는 가행(加行)으로 인해 타심지를 설정하였다. 곧 이러한 타심지가 다른 이의 심소법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행을 닦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취되어 원만하게
  
  
25) 세속지(samvrti-jnana)는 본질적으로 승의제(paramartha-satya)를 아는 지가 아니라 세속(samvrti, 혹은 prajnapti, 개념적 대상)을 아는 지이기 때문에 '세속지'이다.
26) 고지와 집지는 경계가 동일하지만, 행상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별도로 설정하였다. 4제지의 l행상에 대해서는 후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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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었을 때에는 다른 이의 심소도 역시 알지만, 가행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타심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27)
  여섯째로는 일이 이루어짐[事辦]으로 인해 진지를 설정한 것이니, 일이 이루어진 소의신 중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28)
  일곱째로는 원인이 원만하게 됨으로 인해 무생지를 설정한 것이니, 일체의 성도를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이 법지와 유지는 전부 욕계와 상계의 법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지만, 일부 상계와 욕계의 법을 대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인가?29)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제·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법지는
  수도의 단계 중에서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도 대치하지만
  유지는 능히 욕계의 혹을 대치하지 못한다.
  緣滅道法智 於修道位中
  兼治上修斷 類無能治欲
  
  논하여 말하겠다. 수도에 포섭되는 멸·도법지는 [욕계의 수소단과] 아울러 상계의 수소단을 능히 대치하니, 욕계의 멸·도법지는 상계의 그것보다 수승하기 때문에 자계의 원적(怨賊)을 제거하고 나서 타계의 그것도 아울러 능히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30)
  
27) 이는 타심지가 다른 이의 마음[心]뿐만 아니라 마음의 작용[心所]도 아는 지인데, 어째서 타심소지(他心所智)라고 하지 않고 타심지(他心智)라고 하게 되었던가에 대한 해명으로, 가행의 동기에 근거하여 그 같은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28) '일이 이루어진 소의신'이란 지어야 할 일을 이미 다 성취한 무학의 소의신을 말한다.
29) 대체로 법지는 욕계의 혹을, 유지는 상 2계의 혹을 대치하는 지이지만, 수도에 속하는 일부의 법지 즉 멸·도법지의 경우 상계의 혹도 대치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하 이에 관해 논설한다.
30) 욕계의 멸·도와 상계의 그것은 다 같이 선이고 상(常)이며 출리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그러나 고·집의 경우는 적고 많음과 미세하고 거�과 상하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다), 멸·도법지가 비록 욕계의 지(智)일지라도 상계의 고·집법지보다는 뛰어나다. 그렇기 때문에 자계의 혹을 능히 대치할 뿐만 아니라 타계의 혹도 아울러 끊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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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따라 유지는 능히 욕계를 대치하는 일이 없다.31)
  이러한 10지 중에서 어떤 지가 어떠한 행상을 갖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는
  행상이 모두 열여섯 가지이고
  세속지는 이것과 그 밖의 것이며
  4제지는 각기 네 가지이다.
  法智及類智 行相俱十六
  世俗此及餘 四諦智各四
  
  타심지로서 무루의 경우는
  오로지 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네 가지이고
  유루의 경우는 자상을 소연으로 하는데
  다 같이 개별적 실체[一事]만을 소연으로 한다.
  他心智無漏 唯四謂緣道
  有漏自相緣 俱但緣一事
  
  그리고 진지와 무생지는 열네 가지이니
  이를테면 공(空)과 비아를 제외한 그것이다.
  盡無生十四 謂離空非我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와 유지는 각기 비상(非常)과 고(苦) 등의 열여섯
  
  
31) 즉 상계의 혹을 끊으려고 할 때에는 하계의 혹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어떠한 유지도 욕계의 혹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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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행상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16행상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널리 해석하리라.
  세속지에도 이러한 16행상이 있으며, 아울러 다시 그 밖의 행상이 있으니, 능히 일체의 법의 자상과 공상 등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32)
  고(苦) 등의 네 가지 지에는 각기 자제(自諦)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네 종류의 행상이 있다.
  타심지의 경우, 만약 무루의 타심지라면 오로지 도제(道諦)를 소연으로 하는 네 종류의 행상만을 갖으니, 이는 바로 도지(道智)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유루의 타심지라면 자신의 소연이 되는 심·심소법의 자상을 경계로 취하기 때문에 자상을 경계로 삼듯이 행상도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16행상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종류의 타심지는 일체 시(時)에 있어서 1찰나에 단지 하나의 실체[一事]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이를테면 마음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심소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며, 수(受) 등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상(想) 등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박가범께서는 "유탐심(有貪心) 등을 참답게 알라"고 설한 것인가?33)
  '탐' 등과 '마음'을 동시에 취하는 것이 아니니, 마치 '옷'과 '때'를 동시에 취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서 유탐심이란 두 가지 뜻이 있어 '유탐'이라 한 것이니, 첫째는 탐과 상응하는 것이며, 둘째는 탐에 의해 계박되는 것이다. 곧 탐과 상응하는 마음은 다 같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뜻에 따른 것이지만, 그 밖의 유루의 마음은 오로지 탐에 의해 계박된 것일 뿐이다.34)
  
32) 즉 세속지는 난(煖)·정(頂)·인(忍) 등의 단계에서는 16행상을 모두 짓기도 하고, 별상과 총상염주에서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소연으로 하는 행상을 짓기도 하며, 부정관이나 지식념, 자비관 등에서는 백골 등 성법이 아닌 행상을 개별적으로 짓기도 하는데, 사실상 세속지의 행상은 무한이다.
33) 『중아함경』 권제19 「가치나경(迦絺那經)」(대정장1, p.553중), "以他心智知他心如眞, 有欲心知有欲心如眞, 無欲心知無欲心如眞. 有恚無恚, 有癡無癡, 有穢無穢……不解脫心知不解脫心如眞, 解脫心知解脫心如眞." ; 동 권제24 「염처경(念處經)」(p.584상) 참조. 즉 1찰나에 1법의 심·심소법만을 소연으로 한다면, '탐'과 '심'을 동시에 소연으로 하는 유탐심을 어떻게 알았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뜻의 난문.
34) 즉 탐과 상응하는 마음이란 탐의 심소와 상응하면서 또한 그것에 의해 계박된 마음을 의미한다. 그 밖의 염오한 유루의 마음을 역시 유탐심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다만 탐에 의해 계박된 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탐심이라고 한 경우 그것은 1찰나의 마음이 아니다. 이하 유탐심 등 22심에 대한 방론(傍論)이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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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경에서 유탐심이라고 말한 것은 오로지 첫 번째인 '탐과 상응하는 마음'을 설한 것이고, 이탐심(離貪心, 즉 무욕심)이란 탐을 대치하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만약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만을 이탐심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혹(惑)과 상응하는 마음도 마땅히 이탐심이라는 명칭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3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탐을 대치하지 않는 마음으로서 불염오성일 경우, 이 같은 마음은 마땅히 유탐심이나 이탐심 따위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36) 그렇기 때문에 다른 논사가 설한 대로 탐에 의해 계박된 마음도 유탐심이라고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37)
  나아가 유치심(有癡心)과 이치심(離癡心)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계속하여]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취심(聚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소연상에서 어지럽게 내달리지 않기 때문이며, 산심(散心)이란 이를테면 염심(染心)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
  
  
35) 즉 유탐심만이 탐과 상응하는 마음이자 그것에 의해 계박된 마음이고, 그 밖의 유루법은 탐과 상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은 이탐심(離貪心)이기 때문에 진에 등과 상응하는 마음도 역시 이탐심이라고 해야한다는 힐난. 곧 경에서 말한 이탐심이란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탐을 대치하는 마음으로 해석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진에 등과 상응하는 유루의 마음은 이탐심으로 불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36) 여기서 '따위'란 이하 유진심(有瞋心)·이진심(離瞋心), 유치심(有癡心)·이치심(離癡心) 등의 열 가지 대응하는 법을 가리킨다.
37) 이탐심을 탐을 대치하는 마음이라고 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 그 성질이 무부무기여서 특별히 탐을 대치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무엇이라 이름할 것인가? 앞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물론 이탐심도 아니고, 탐과 상응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유탐심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마음을 유탐(有貪)과 이탐(離貪)으로 분류할 때에는 일체의 마음을 포섭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의 해석처럼 탐에 계박된 것이면 그것과 직접 상응하지 않는 것도 '유탐심'이라 해야 할 것이며, 탐과 상응하지 않는 것은 '이탐심'이라고 해야 한다. 이는 바로 여시설자(如是說者, 정통유부)의 설(『대비바사론』 권제190, 한글대장경125, p.331 ; 대정장27, p.950중, '如是說者好謂貪所繫故名有貪心. 貪對治故名離貪心.)에 근거한 논주 세친의 평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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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산란 동요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38)
  이에 대해 서방(西方)의 모든 논사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잠[眠]과 상응하는 마음을 일컬어 취심이라 하고, 그 밖의 염오심을 설하여 산심이라 이름한다."39)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온갖 염오심이 만약 잠과 상응하는 경우, 마땅히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40) 또한 마땅히 본론(本論)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취심을 참답게 아는 것에는 네 가지 지(智)가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테면 법지와 유지와 세속지와 도지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기 때문이다.41)
  [계속하여]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침심(沈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해태(懈怠)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 책심(策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이 같은 마음은 정근(正勤)과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심(小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청정함이 적은 이들이 즐겨 익히는 바이기 때문이며, 대심(大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청정함이 많은 이들이 즐겨 익히는 바이기 때문이다. 혹은 근(根)과 가치와 권속과 수전(隨轉)과 작용[力用]의 적고 많음에 따라 소심과 대심으로 일컬은 것이다. 즉 염심은 '근'이 적으니, 많아야 두 가지 근과 상응하기 때문이며,42) 선심은 '근'이
  
38) 『대비바사론』 제151권(한글대장경124, p.13 이하), 제190권(한글대장경125, p.333 이하).
39) 여기서 서방(西方)의 논사는 건타라국(健馱羅國)의 논사. "가습미라 이외의 논사는 말하기를, 약심(略心, 본론에서는 '취심')이란 잠과 상응하는 것이니, 마음이 집약[略]된 것을 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잠이란 꿈속에서 몸을 능히 유지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어두운 집약[昧略]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대비바사론』 권제190, 대정장27, p.950하, 한글대장경125, p.333 ; 동 권 제151, p.770상 참조)
40) 즉 염오심이 잠과 상응할 경우, 그 때의 마음은 잠자기 때문에 '모이는 것[聚]'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염오이기 때문에 '흩어지는 것[散]'이라고 해야 하므로 모순이라는 뜻.
41) 『발지론』 권제19(한글대장경176, p.473). 이는 즉 아비달마 본론에서 취심은 도지(道智)에 의해 알려진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도지에 의해 알려지는 것은 반드시 무루심인데, 어떻게 무루심이 수면(睡眠)과 상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의 교증이다.
42) 여기서 '근'은 선근 또는 불선근을 말한다. 즉 독두무명(獨頭無明)과 구기하는 마음은 다만 1근[癡]과 상응할 뿐이며, 탐(貪) 또는 진(瞋)과 구기하는 마음은 2근과 상응한다. 즉 탐이나 진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응무명(相應無明)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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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으니, 항상 세 가지 근(무탐·무진·무치)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염심은 가치가 적으니, 노력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선심은 가치가 크니, 크나큰 자량(資糧)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염심은 권속이 적으니, 미래에 닦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선심은 권속이 많으니, 미래에 닦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염심은 수전하는 법이 적으니, 오로지 3온뿐이기 때문이며, 선심은 수전하는 법이 많으니, 4온과 통하기 때문이다.43) 염심은 작용이 적으니, 끊어진 선근은 반드시 다시 상속할 것이기 때문이며, 선심은 작용이 많으니, 인(忍)은 반드시 온갖 수면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염심과 선심은 소심과 대심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도심(掉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도거와 상응하기 때문이며, 불도심(不掉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능히 그것(도거)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부정심(不靜心)과 정심(靜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정심(不定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산동(散動, 산란과 동요)과 상응하기 때문이며, 정심(定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능히 그것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불수심(不修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득수(得修, 즉 미래수)와 습수(習修, 현재수)를 다 같이 포섭하지 않기 때문이며, 수심(修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두 가지 수(修)를 갖기 때문이다.
  불해탈심(不解脫心)이란 이를테면 염심을 말하니, 자성(自性)과 상속(相續)이 해탈하지 않았기 때문이며,44) 해탈심(解脫心)이란 이를테면 선심을 말하니, 자성과 상속이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해석은 계경에 따르지 않은 것이며, 또한 역시 모든 명칭[句]
  
  
43) 불선심에 수전하여 상응 구기하는 법은 수(受)·상(想)·행(行)의 3온뿐이지만, 선심에 수전하는 법은, 그것이 산심일 경우 역시 3온뿐이지만 정심(定心)일 경우 정구계(定俱戒)의 무표색이 수전하기 때문에 4온이다.
44) 불해탈의 마음은 그 자체 불선이기 때문에 자성이 해탈하지 않은 것이며, 번뇌를 갖는 소의신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상속이 해탈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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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개별적인 뜻도 능히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45)
  이러한 해석이 어떻게 계경에 따르지 않은 것인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마음이 내적으로 모아지는 것[內聚]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를테면 마음이 만약 혼면(惛眠, 혼침과 수면)과 구행(俱行)하거나 혹은 내적으로 상응하여 지(止, sa-matha)만이 존재하고 관(觀, vipasyana)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밖으로 흩어지는 것[外散]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를테면 마음이 5묘욕(妙欲)의 경계로 나돌아다니며 그것에 따라 이리저리 산란되고 흘러가거나 혹은 내적으로 상응하여 '관'만이 존재하고, '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46)
  어찌 앞에서 설하지 않았던가? 염오심이 잠과 구유(俱有)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하나의 마음이 모이고[聚] 흩어지는 것[散]과 통하게 되는 허물이 있다고.47)
  비록 그 같이 설하였을지라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 잠과 구유하는 온갖 염오심이 바로 산심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48)
  또한 본론(本論)과 상위(相違)하는 것이라고 설하지 않았던가?
  본론과는 상위할지라도 경설(經說)에는 어긋남이 없다.
  어찌하여 모든 명칭의 개별적인 뜻에 대해서는 분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그 같은 해석에 근거하여서는 산심 등과 취심 등의 여덟 가지 각기 다른 상에 대해 능히 잘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49)
  
45) 이는 이상의 22심의 해석에 반대하는 논설로서, 법보는 논주 또한 서방사(西方師, 즉 간다라 논사)의 주장이라고 평석하였지만, 보광에 의하면 경부사(經部師)의 주장이다. 후술하듯이 이는 결국 탐·진 등의 심소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는 경량부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46) 『중아함경』 권제42 「분별관법경(分別灌法經)」(대정장1, p.994중), "比丘! 如是如是觀. 比丘! 心出外灑散, 心不住內, 不受恐怖. ……比丘! 心不出外不灑散, 心住內, 不受恐怖." 이하 참조.
47) 주40) 참조.
48) 잠과 구유하는 염오심이 바로 산심이라고 한다면, 해태와 상응하는 염오심도 바로 산심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49) 즉 22심 중 앞의 세 가지(유탐·유진·유치의 3對)를 제외한 8대(對) 각각을 선심과 염심으로 규정하는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에 따를 경우 산심 등은 염오심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침심·소심 등과 동일하게 되고, 취심 등은 선심이기 때문에 책심·대심 등과 동일하게 되어 마침내 뒤의 8대의 차별상을 분별할 근거가 상실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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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해석한 바에 의해 이러한 계경 중에서 설한 8구(句)의 개별적인 뜻에 대해 능히 잘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이를테면 비록 산심 등이 다 같이 염심이라고 하였을지라도 그 과실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울러 비록 취심 등이 다 같이 선심이라고 하였을지라도 그 공덕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덟 가지 뜻에 근거하여 여덟 가지 명칭을 별도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이미 경설과 어긋난 바를 능히 회통시키지 못하였으니, 분별한 명칭의 뜻도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만약 침심(沈心)이 바로 도심(掉心)이라고 한다면, 경에서 마땅히 "만약 그 때 마음이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것을 염려하여 경안(輕安)과 정(定)과 사(捨)의 세 가지 각지를 닦는 자를 '때 아닌 때 닦는 이[非時修]'라고 이름하며, 만약 그 때 마음이 들뜨면 들뜨는 것을 염려하여 택법(擇法)과 정진(精進)과 희(喜)의 세 가지 각지를 닦는 자를 '때 아닌 때 닦는 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50)
  어찌 각지를 닦는데 산위(散位)라는 별도의 이치가 있을 것인가?51)
  여기서는 작의를 일으켜 닦으려고 하는 것에 근거하여 '닦는다'고 말한 것이지 바로 지금 [산란된 마음에서] 닦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다.
  어찌 우리의 설도 역시 경설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비록 온갖 염심이 모두 침심(沈心)이나 도심(掉心)으로 일컬어질지라도 해태(懈怠)가 두드러진 것을 경에서는 '침심'이라고 설하고 있고, 도거가 두드러진 것을 경에서는 '도심'이라고 설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상응한다'는 사실에 근
  
  
50) 『대비바사론』 권제95(한글대장경121, p.458) 참조. 이는 침심이 바로 도심일 수 없다는 경증으로, 바사에서의 논설은 제 심소 구기설을 부정하는 비유자(譬喩者)의 경증으로 설해지고 있다.
51) 7각지는 선정 중에서 닦는 것이기 때문에 산란된 마음에서 닦는다고 하는 경설은 그 자체 별로 의미가 없다는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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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하여 그것의 본질[體]이 동일하다고 설한 것이다.52)
  자의(自意)에 따라 말하는 것을 누가 다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이 경의 뜻은 실로 그렇지가 않다. 앞에서 '일체의 탐에 의해 계박된 마음을 모두 유탐심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 그 때 탐의 계박이란 무슨 뜻인가? 만약 탐의 득(得)이 따르기 때문에 [탐의 계박이 있다]고 한다면 유학의 무루심도 마땅히 '유탐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탐의 득이 따르기 때문이다.53) 만약 탐이 소연이 되기 때문에 [탐의 계박이 있다]고 한다면 무학의 유루심도 마땅히 '유탐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다른 사람의] 탐이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 같은 무학의 유루심이 탐을 소연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의 마음이 유루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공상의 혹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유루심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유치심(有癡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치'의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심지는 탐의 득을 소연으로 삼지 않으며, 또한 역시 그같이 마음을 반연하는 탐[緣心貪]을 소연으로 삼는다고 설할 수도 없다. [그럴 경우 이미 소연을 획득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이 유탐심 등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탐의 계박을 유탐심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을 유탐심이라고 하는 것인가?
  여기서 경의 뜻을 살펴보건대 탐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탐심이라고 하는 것이며, 탐과 상응하지 않는 것을 이탐심 등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또 다른 계경에서 "이탐(離貪)·이진(離瞋)·이치(離癡)의 마음은 더 이상 3유(有)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54)
  
52) 즉 마음에 해태나 도거가 증성(增盛)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각기 개별적으로 침심 혹은 도심으로 일컬을 수 있지만(經說), 가라앉음이나 들뜸과 상응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전체적으로 염심으로 그 자체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毘婆沙師의 說)는 뜻.
53) 이 때는 탐을 끊기는 하였지만, 아직 두루 끊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54) 『잡아함경』 권제18 제499경(대정장2, p.131중), "比丘! 心法善修心, 離欲心, 離瞋恚心, 離愚癡心, 得無貪法無恚法無癡法, 不轉還欲有色有無色有." 즉 논주가 주장하듯이 이탐심을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해석할 경우 여기에는 유루의 선과 무부무기법도 모두 포섭되어야 하지만, 경에서 그 같은 마음에 의해서는 욕유 등 3유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유루의 선법 등은 무루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힐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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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의 '득'에서 떠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만약 탐과 상응하지 않는 마음만을 이탐심이라고 한다면,] 그 밖의 혹(惑)과 상응하는 마음도 마땅히 이탐심이라는 명칭을 획득해야 할 것이니, 그것도 역시 탐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여 앞에서 이미 이러한 설을 논파하지 않았던가?55)
  만약 이 같은 뜻에 근거할 경우, [그 밖의 혹과 상응하는 마음도 이탐심이라고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아무런 어긋남이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을 설하여 이탐심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유진심(有瞋心)이나 유치심(有癡心) 등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여기서 방론(傍論)을 마치고 마땅히 본종(本宗)에 대해 논술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밝힌 타심지는 다른 이의 마음의 소연도 역시 또한 능히 취하며, 아울러 다른 이의 마음의 능연이 되는 행상도 역시 또한 취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취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모두를 능히 취하지 않으니, 그의 마음을 알 때 그것의 소연과 능연(즉 마음)의 행상을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타심지는 단지 그같이 염오함이 있는 등의 마음(즉 22심)을 알 뿐, 그같이 마음을 더럽힌 색 등을 알지 못하며, 또한 역시 그 같은 능연의 행상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56)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타심지는 마땅히 색 등도 역시 소연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또한 역시 능히 스스로를 소연으로 삼게 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57)
  
55) 주35) 참조.
56) 타심지는 오로지 다른 이의 마음만을 알 뿐, 다른 이의 그 같은 마음의 소연과 능연(能緣)의 행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57) 만약 타심지가 다른 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소연의 경계도 안다고 한다면 그러한 소연에는 색 등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타심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능연(能緣)의 행상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능연의 마음을 소연으로 삼는 것으로, 그 때 자신의 마음은 바로 다른 이의 마음을 능히 소연의 행상으로 삼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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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타심지에는 결정적인 상이 있다. 이를테면 오로지 욕계와 색계의 계박과 아울러 계박되지 않는 것(즉 무루)과, 타상속 중의 현재 동류의 심·심소법과 한 가지와 실재와 자상만을 능히 취하여 소연의 경계로 삼을 뿐이며, 공(空)·무상(無相)과는 상응하지 않으며, 진지와 무생지에는 포섭되지 않으며, 견도와 무간도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58) 그러나 그 밖의 사실은 부정되지 않으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인정될 수 있다.
  진지와 무생지에는 각기 모두 공(空)과 비아(非我)를 제외한 나머지 열 네 가지 행상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러한 두 가지 지는 비록 승의지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세속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과 비아를 제외한 것이다.59) 즉 두 가지 지의 힘에 의해 출관(出觀)할 때 '나는 생을 이미 다하였고, 범행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하여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루는 이러한 16행상을 뛰어넘어 다시 그 밖의 다른 행상을 포섭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58) 이상 타심지의 한계를 언급한 것으로, (1) 계계(界繫)의 경우, 3계 중 욕·색계와 무루[非所繫]만을 알 뿐 무색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2) 다른 이의 심·심소법만을 알 뿐, 자신의 심·심소법이나 색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3) 단지 동류의 마음만을 알 뿐이다. 즉 법지 품류의 타심지는 다른 이의 법지 품류만을 알며, 내지 유루의 타심지는 다른 이의 유루심만을 안다. (4) 오로지 개별적인 실체[一實]의 자상(dravya-svalaksana)만을 알 뿐 가유의 공상(samvrtisat-samanyalaksana)은 알지 못한다. 즉 마음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심소를 소연으로 하지 않으며, 수(受) 등을 소연으로 할 때에는 상(想) 등을 소연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5) 3해탈문의 경우 무원삼매와는 상응하지만 공·무상삼매와는 상응하지 않으니, 타심지는 도지(道智)를 그것의 한 요소로 삼기 때문이다. 즉 도제를 관찰함에 있어 도(道)·여(如)·행(行) ·출(出)의 무원삼매와 상응하지만, 고지의 공·비아의 공삼매, 멸지의 멸·정·묘·리의 무상삼매와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6) 타심지는 견(見)의 성질이기 때문에 진·무생지에 포섭되지 않는다. (7) 견도 중에는 타심지가 없으니, 그것은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8) 무간도는 번뇌를 끊기 때문에 그것에도 역시 타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59) 즉 진지와 무생지는 출관(出觀)하여 '나는 생을 이미 다하였다……'고 하여 세속(世俗, samvrti)의 명상(名想)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공·비아의 행상과 서로 모순되며, 그래서 여기에는 두 가지 행상이 없는 것이다. 주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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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즉 무루)의 행상은 열여섯 가지를 넘는 일이 없으나
  유여사는 있다고 설하니, 논(論)에서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淨無越十六 餘說有論故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논사는 말하기를, "무루의 행상은 이러한 열여섯 가지를 넘지 않는다"고 하였다.60)
  그러나 외국(外國)의 논사는 설하기를, "열여섯 가지를 뛰어넘어 그 밖의 다른 무루의 행상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본론(本論)에 의거하였기 때문으로,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불계(不繫)의 마음(즉 무루심)으로서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법을 능히 요별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능히 요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계는] 비상(非常)이기 때문에, 고(苦)이기 때문에, 공(空)이기 때문에, 비아(非我)이기 때문에, 인(因)이 되기 때문에, 집(集)이 되기 때문에, 생(生)이 되기 때문에, 연(緣)이 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처(處)가 있고 이러한 사(事)가 있으니, 이것이 여리작의(如理作意)에 의해 인기되어 요별된다."61)
  그러나 만약 이 같은 글이, 불계의 마음이 욕계에 계속되는 법을 요별할 때 여덟 행상을 제외한 그 밖에 '이러한 처가 있다', '이러한 사가 있다'고 하는 행상이 따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여덟 행상을 짓는 그 같은 '이러한 처가 있다'와 '이러한 사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
  
  
60) 『대비바사론』 권제29(한글대장경119, p.90).즉 진·무생지의 '나는 이미 생을 다하였다', '나는 이미 고를 알아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지식은 세속지로서 무루지의 행상이 아니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35. 앞의 책, p.475)
61) 『식신족론』 권제6(한글대장경116, p.156). 여기서 '처(sthana)'란 상(相, laksana)의 뜻이고, '사(vastu)'란 인(因, hetu)의 뜻이다. 그러나 보광에 의하면 '처'란 도리에 맞게 서로 수용한다는 뜻(稱合道理相容受義)이고, '사'란 사용(事用), 즉 작용의 뜻이다. 즉 외국사(즉 西方의 健馱羅 논사)는 아비달마 본론 중에서 불계심, 즉 3계의 계박을 떠난 무루의 마음은 8행상 이외에 이러한 '처'와 이러한 '사'라는 두 행상 더 요별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16행상 이외에도 무루의 행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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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해석(외국사의 해석)은 옳지 않으니,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만약 그 논(論)이 그 같은 뜻에 근거하여 설해졌다고 한다면, 마땅히 다른 곳에서도 역시 이러한 말을 설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논의 다른 글에서는 다만 이같이 설하고 있을 뿐이다. "견소단(見所斷)의 마음으로서 능히 욕계에 계속되는 법을 요별하는 경우가 있는가? 능히 요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계는] 아(我)이기 때문에, 아소(我所)이기 때문에, 단(斷)이기 때문에, 상(常)이기 때문에, 무인(無因)이기 때문에,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감손(減損)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위의 것[上]이기 때문에, 제일의 것이기 때문에, 능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해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출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惑)이기 때문에, 의(疑)이기 때문에, 유예(猶豫)이기 때문에, 탐이기 때문에, 진(瞋)이기 때문에, 만(慢)이기 때문에, 치(癡)이기 때문이니, 이것은 바로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작의(즉 비리작의)에 인기되어 요별된다."62) 즉 여기에서도 역시 마땅히 '이러한 처가 있다'는 등의 말을 설하였어야 할 것이지만, 이 같은 말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의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16행상의 실체[實事]는 몇 가지인가? 무엇을 행상이라고 하는가? 능히 행하는 주체[能行]인가, 행해지는 대상[所行]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행상의 실체는 열여섯 가지로서
  이것의 본질은 오로지 혜(慧)인데
  능행(能行)은 소연을 갖는 것이고
  소행(所行)은 존재하는 모든 법이다.
  
  
62) 『식신족론』 권제10(앞의 책, p.232). 여기서 '아와 아소이기 때문에'란 유신견에 의한 요별을 말하며, 단·상은 변집견에 의한 요별을, 무인·무작·손멸은 사견에 의한 요별을, 존귀한 것·뛰어난 것·위의 것·제일인 것은 견취에 의한 요별을, 청정·해탈·출리는 계금취견에 의한 요별을, 혹·의·유예는 의(疑)에 의한 요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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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相實十六 此體唯是慧
  能行有所緣 所行諸有法
  
  논하여 말하겠다.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16행상의 명칭은 비록 열여섯 가지일지라도 그것의 실체는 오로지 일곱 가지이니, 이를테면 고제를 소연으로 삼는 것은 그 명칭도 실체도 다 같이 네 가지이며, 그 밖의 3제를 소연으로 삼는 것은 명칭은 네 가지이지만 실체는 한 가지이다"고 하였다.63)
  그러나 여시설자(如是說者)는 '실체도 역시 열여섯 가지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고성제에 네 가지 행상이 있으니, 첫째는 비상(非常)이며, 둘째는 고(苦)이며, 셋째는 공(空)이며, 넷째는 비아(非我)이다. 즉 [5취온 등의 현행의 고과(苦果)는] 인연에 근거[待]한 것이기 때문에 '비상'이며, 핍박의 성질이기 때문에 '고'이며, 아소견(我所見)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공'이며, 아견(我見)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아'이다.
  집성제에 네 가지의 행상이 있으니, 첫째는 인(因)이며, 둘째는 집(集)이며, 셋째는 생(生)이며, 넷째는 연(緣)이다. 즉 [5취온 등의 현행의 원인은] 종자의 이치와 같기 때문에 '인'이며, 동등하게 현기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집'이며, 상속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생'이며, 성취하여 이루어지는[成辦] 이치이기 때문에 '연'이다. 비유하자면 진흙덩이와 물레와 밧줄과 물 등의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항아리를 성취하여 이루는 것과 같다.
  멸성제에 네 가지의 행상이 있으니, 첫째는 멸(滅)이며, 둘째는 정(靜)이며, 셋째는 묘(妙)이며, 넷째는 리(離)이다. 즉 [5취온 등의 현행의 소멸은] 제온(諸蘊)이 다하였기 때문에 '멸'이며, 삼재(三災, 탐·진·치)가 종식되었기 때문에 '정'이며, 온갖 환란이 없기 때문에 '묘'이며, 모든 재앙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리'이다.
  도성제에 네 가지의 상이 있으니, 첫째는 도(道)이며, 둘째는 여(如)이며,
  
  
63) 즉 고제하의 네 행상은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명칭상으로나 실체상으로 다 같이 네 가지이지만, 그 밖의 각기 집·멸·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네 행상은 명칭만 다를 뿐 그 본질이 집·멸·도로 단일하기 때문에 4제의 실제적인 행상은 모두 일곱 가지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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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는 행(行)이며, 넷째는 출(出)이다. 즉 [5취온 등의 소멸을 획득하는 번뇌 대치의 성도는] 통행(通行)의 뜻이기 때문에 '도'이며, 정리(正理)와 계합하기 때문에 '여'이며, [열반으로] 바로 나아가는 것[趣向]이기 때문에 '행'이며, 능히 영원히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이다.
  또한 [5취온 등의 현행의 고과는] 구경(究竟)이 아니기 때문에 '비상'이며, 무거운 짐을 진 것과 같기 때문에 '고'이며, 내적 사부(士夫, purusa, 즉 자아)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공'이며, 자재(自在)하지 않기 때문에 '비아'이다. [현행의 원인은] 견인(牽引)의 뜻이기 때문에 '인'이며, 출현의 뜻이기 때문에 '집'이며, 산출[孶産, 增生을 말함]의 뜻이기 때문에 '생'이며, 근거[依]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연'이다. [현행의 소멸은] 상속하지 않고 상속이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멸'이며, 세 가지 유위상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정'이며, 승의(勝義)의 선(즉 열반)이기 때문에 '묘'이며, 지극한 안온(安穩)이기 때문에 '리'이다. [현행을 소멸하는 성도는] 사도(邪道)를 대치하기 때문에 '도'이며, 진리가 아닌 것[不如]을 대치하기 때문에 '여'이며, 열반의 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행'이며, 일체의 유(有)를 버리기 때문에 '출'이다.
  이와 같이 옛날 사람의 해석은 한 가지 갈래가 아니기 때문에 선호하는 바에 따라 다시 별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5취온의 고과는] 생멸하기 때문에 '비상'이며, 성심(聖心)과 어긋나기 때문에 '고'이며, 여기에 아(我)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며, 그 자체 내(즉 나의 것)가 아니기 때문에 '비아'이다. 인(因)·집(集)·생(生)·연(緣)에 대해서는 계경에서 해석하고 있는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5취온은 탐욕(chanda)을 뿌리[根]로 삼고, 탐욕을 집(集)으로 삼고, 탐욕을 종류[類]로 삼고, 탐욕을 '생'으로 삼는다"고 하였다.64) 다만 여기서는 '생'이란 말을 뒤에 설하고 있으니, 이것이 논(論)과 다른 점이다.
  이러한 네 가지 탐욕은 본질상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상태[位]의 차별에 따라 네 가지 탐욕에도 차이가 있다. 즉 첫 번째는 현
  
  
64) 『잡아함경』 권제2 제58경(대정장2, p.14중), "佛告比丘, 此五受陰欲爲根, 欲集, 欲生, 欲觸." 여기서 뿌리는 능히 식물을 생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인(因)'이며, '집'은 집기(集起)의 뜻이며, 종류는 중연(衆緣)의 뜻이며, '생'은 능히 결과를 낳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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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의 [5취온을] 보편적 자아[總我]라고 집착하여 보편적인 그 자체의 본질[總自體]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당래의 [5취온을] 보편적 자아라고 집착하여 어떤 보편적인 후유(後有)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당래의 [5취온을] 개별적인 자아[別我]라고 집착하여 개별적인 후유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며, 네 번째는 상속하여 생기[續生]하는 자아에 집착하여 상속 생기하는 때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며, 혹은 업을 짓는 자아에 집착하여 업을 짓는 때에 대해 탐욕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계경의 해석에서] 첫 번째는 [5취온은] 고과(苦果)에 대해 제1 원인[初因]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인'이라고 일컬었으니, 씨앗이 과실에 대해 제1 원인이 되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고과를 동등하게 불러일으키는 것[招集]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집'이라고 일컬었으니, 싹 등이 과실을 초래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고과에 대해 개별적인 조건[別緣]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연'이라 일컬었으니, 마치 밭 등이 과실에 대해 개별적인 조건이 되는 것과 같다. 즉 밭이나 물·거름 등의 힘으로 말미암아 과실의 맛과 세력(싹이 발아하게 되는 힘)과 익는 것이 개별적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고과를 능히 직접적으로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생'이라고 일컬었으니, 마치 꽃술이 과실을 직접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과 같다.
  혹은 계경에서 설한 것처럼 두 가지의 다섯 애행(愛行)과 두 가지의 네 애행이 있어 네 가지 종류의 탐욕이 된 것이다.65) 즉 현재의 보편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 다섯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내가 현재 결정코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내가 현재 이와 같이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
  
65) 『잡아함경』 권제35 제984경(대정장2, p.265상중), "謂有我故, 有我·欲我·爾我·有我·無我·異我·當我·不當我·欲我·當爾時·當異異我·或欲我·或爾我·或異·或然·或欲然·或爾然·或異, 如是十八愛行從內起. 比丘言, 我欲·我爾 乃至 十八愛行從外起, 或於未來起, 或於現在起, 或於過去起. 如是總說白八愛行." 본론에서의 두 가지의 다섯 애행이란 현재와 미래의 보편적 자아[總我]에 대한 각기 다섯 가지 애행을 말하며, 두 가지의 네 애행이란 미래의 개별적 자아[別我]와 상속 생기하는 자아[續生我]에 대한 각기 네 가지 애행을 말한다. 즉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탐욕은 바로 이 같은 네 가지 애행의 차별에 따른 것이라는 경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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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 셋째는 나는 현재 변이하며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현재 [그냥]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미래의 보편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도 다섯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나는 미래에 결정코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는 미래에 이와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미래에 변이하며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미래에 [그냥]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미래의 개별적인 자아에 집착하는 것에 네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나는 미래에 개별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는 미래에 결정코 개별적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미래에 이와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미래에 변이하면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상속하여 생기하는 자아 등에 집착하는 것에도 네 종류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결정코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셋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이와 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며, 넷째는 나는 역시 미래에 변이하면서 존재할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5취온의 소멸은] 유전(流轉)이 끊어졌기 때문에 '멸'이며, 온갖 괴로움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정'이니, [계경에서] "필추여! 제행은 모두 고(苦)이니, 오로지 열반만이 최고의 적정(寂靜)이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높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묘'이며, 물러남이 없는 것[不退轉]이기 때문에 '리'이다. 나아가 [소멸의 성도는] 바른 길과 같기 때문에 '도'이며, 참답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이며, 능히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행'이니, [계경에서] "이러한 도는 능히 청정에 이르니, 그 밖의 견(見)은 필시 청정에 이르는 일이 없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리고 영원히 존재[有]를 떠났기 때문에 '출'이다.
  또한 상견(常見)과 낙견(樂見)과 아소견(我所見)과 아견(我見)을 대치하기 위해 비상·고·공·비아의 행상을 닦으며, 무인론(無因論)과 일인론(一因論)과 변인론(變因論)이나 지선인론(知先因論)의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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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집·생·연의 행상을 닦는다.66) 해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멸'의 행상을 닦으며, 해탈은 괴로운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정'의 행상을 닦으며, 정려와 등지(等至)의 즐거움은 바로 미묘한 것이라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묘'의 행상을 닦으며, 해탈은 자주 물러나 영원하지 않다는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리'의 행상을 닦는다.67) 그리고 도가 없다[無道]는 견해와 사도(邪道)와 그 밖의 도[餘道]와 물러남이 있는 도[退道]의 견해를 대치하기 위해 도·여·행·출의 행상을 닦는 것이다.68)
  이와 같은 행상은 모두 혜(慧)를 본질로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혜는 마땅히 행상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니, 혜와 혜는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온갖 심·심소가 경계 대상을 취하는 양태의 차별[類別]을 모두 행상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69)
  
66) 무인론이란 만물은 모두 우연적으로 생겨난다는 유물론의 견해이며, 일인론은 유일의 자재천에 의해 비롯된다는 브라만교의 견해이며, 변인 즉 전변인론이란 프라크리티(prakrti)라는 제일원인이 전변하여 만물이 된다는 상캬학파의 견해이며, 선행하는 지(知)에 의해 만물이 낳아진다는 이론은 제일원인이 미리 지적으로 계획한 결과로서 만유가 생겨났다는 견해이다.
67) 이를테면 외도는 무상정과 같은 것을 참된 해탈로 여기지만 그 후 이로부터 자주 물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해탈은 영원한 출리(出離)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68) 무도(無道)의 견해란 '해탈도가 없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사도(邪道)의 견해란 고행이 바로 진실된 도라고 여기거나 진실된 도를 바로 삿된 도라고 비방하는 견해를 말하며, 그 밖의 도의 견해란 도를 닦지 않아도 생사는 저절로 청정해지며, 또한 세간의 이염이 바로 진실된 도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퇴도(退道)의 견해란 일찍이 영원히 염오를 떠나지 않는 도를 만나 거기에 현혹되어 진실의 성도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현종론』 권제35, 앞의 책, p.480 참조)
69) 여기서 행상(行相, akara)이란 마치 거울이 사물을 비출 때 거울 위에 여러 가지 차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심·심소상에 나타난 대상의 형상을 지각[領納]·표상[取像]하여 마침내 확인 판단[簡擇]하는 것[行解相貌]으로, 따라서 그것은 혜(慧)를 본질로 한다. 즉 유부 비바사사에 의하면 혜와 상응하는 심·심소는 그 자체 대상(여기서는 16행상)을 확인 판단할 수 없고, 다만 대상을 취하거나(能行) 혹은 타(他)의 대상이 될 뿐[所行]이기 때문에 행상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판단 즉 간택의 작용인 혜를 따로이 설정하여 행상의 본질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혜가 행상의 본질이라면, 그 같은 행상의 본질은 또 다른 행상을 가질 수 없으며, 그럴 경우 심·심소의 5의평등(義平等) 중 행상평등에 위배된다. 다시 말해 혜가 심대지법의 심소인 이상 행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여타의 다른 제 심·심소와 평등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행상이란 다만 심·심소가 그에 부과된 각각의 형상, 즉 소행(所行)을 차별하여 인식하는 것, 즉 의식에 부과된 대상의 차별상에 대한 시간적 변이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대비바사론』 권제79, 한글대장경121, p.90, '행상이란 일체의 심·심소법을 말한다.') 보광이나 법보 공히 이를 논주 세친의 평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심·심소의 상응구기가 아니라 마음의 전변과 차별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경량부의 설로도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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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혜와 그 밖의 온갖 심·심소법은 소연을 갖기 때문에 모두 다 능행(能行)이며, 존재하는 일체의 법은 모두 소행(所行)이다.70) 따라서 이 같은 사실에서 볼 때 3문(門, 행상·능행·소행)의 본질에는 광협이 있으니, 혜는 행상·능행·소행과 통하는 것이라면, 그 밖의 심·심소법은 오로지 능행과 소행이 될 뿐이며, 그 밖의 존재하는 온갖 법은 오로지 소행이 될 뿐이다.
  10지(智)의 행상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성(性)과의 포섭 관계와 그것의 소의지(所依地)와 소의신(所依身)에 대해서도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성(性)의 경우 세속지는 3성이고, 9지는 선이며
  소의지의 경우 세속지는 일체 지(地)에
  타심지는 오로지 네 지에, 법지는 여섯 지에
  그 밖의 7지(智)는 아홉 지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性俗三九善 依地俗一切
  他心智唯四 法六餘七九
  
  현기의 근거가 되는 신(身)의 경우
  타심지는 욕계와 색계의 몸에 의지하고
  법지는 다만 욕계의 몸에 의지하며
  
  
70) 능행이란 심·심소법이 능히 대상 경계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말하며, 유위와 무위의 일체의 법은 인식 작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소행'이다. 따라서 능행은 혜를 비롯한 일체의 심·심소이고, 소행은 유위와 무위의 일체의 법이다.(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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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8지는 3계의 몸과 모두 통한다.
  現起所依身 他心依欲色
  法智但依欲 餘八通三界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10지(智)와 3성(性, 선·불선·무기)의 포섭관계는 이러하다. 즉 세속지는 3성 모두와 통하고, 나머지 아홉 지는 오로지 선일 뿐이다.
  소의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즉 세속지는 욕계 내지 유정지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나며, 타심지는 오로지 4근본정려에 의지하며,71) 법지는 이러한 4근본정려와 아울러 미지정과 중간정에 의지하며,72) 그 밖의 지(세속·타심·법지를 제외한 7지)는 이러한 여섯 지와 아래 3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난다.73)
  소의신의 차별은 이러하다. 즉 타심지는 욕계와 색계의 몸에 의지하여서도 모두 현전할 수 있다. 법지는 다만 욕계의 몸에 의지하여 현기(現起)할 뿐이며, 그 밖의 여덟 지는 모두 3계의 몸에 의지하여 현기한다.
  
  [10지의] 성(性)과 소의지·소의신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염주(念住)와의 포섭 관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지(智)와 염주의 포섭 관계에서
  멸지는 오로지 최후(법)의 염주이고
  타심지는 뒤의 세 염주이며
  
  
71) 타심지의 소연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근분정이나 중간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즉 그러한 정려지의 도력(道力)은 저열하여 타상속 중의 현재 미세한 심·심소법을 능히 요달(了達)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무색정에도 의지하지 않으니, 거기에는 이것의 가행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4정려를 제외한 그 밖의 경지는 모두 지관(止觀)이 균등하지 않기 때문이다.(『현종론』 권제35, 앞의 책, p.484 참조)
72) 근분정은 오로지 유루이기 때문에, 법지는 욕계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근분정과 무색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 않는다.
73) 이것은 일반론이고, 고·집·멸·도지와 진·무생지로서 만약 법지에 포섭되는 것일 경우 6지를 소의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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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의 8지는 네 염주 모두와 통한다.
  諸智念住攝 滅智唯最後
  他心智後三 餘八智通四
  
  논하여 말하겠다. 멸지는 법념주 중에 포섭된다.
  타심지는 뒤의 세 염주에 포섭되며, 그 밖의 여덟 지는 4념주 모두와 통한다.74)
  이와 같은 10지를 서로 견주어 보면, 각각의 지는 마땅히 몇 가지의 지를 경계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75)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지는 서로가 서로의 연이 되니
  법지·유지와 도지는 각기 아홉 가지 지를
  고지와 집지는 각기 두 가지 지를
  4지는 모두 10지를 경계로 하지만, 멸지는 그렇지 않다.
  諸智互相緣 法類道各九
  苦集智各二 四皆十滅非
  
  논하여 말하겠다. 법지는 유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유지는 법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도지는 세속지를 제외한 아홉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세속지는 도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지와 집지의 두 가지는 각기 두 가지 지를 능히 소연의 경계로 삼으니,
  
  
74) 멸지에는 신(身)·수(受)·심(心)의 세 경계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법념주에만 포섭되며, 온갖 타심지는 색을 소연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밖의 8지는 색·심·심소 등과 통하기 때문에, 각기 수·심·법의 세 염주와 4념주에 포섭되는 것이다.
75) 이하 10지 상호간의 인식 관계에 대해 논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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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테면 세속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세속지와 타심지와 진지와 무생지는 10지를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러나 멸지는 온갖 지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으니, 오로지 택멸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10지의 소연에는 모두 몇 가지의 법이 있으며, 각각의 지는 몇 가지의 법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소연에는 모두 열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3계계(繫)와 무루와
  무위의 각기 두 가지가 바로 그것으로
  세속지는 열 가지를, 법지는 다섯 가지를 소연으로 삼는다.
  所緣總有十 謂三界無漏
  無爲各有二 俗緣十法五
  
  유지는 일곱 가지를, 고지·집지는 여섯 가지를
  멸지는 한 가지를, 도지는 두 가지를
  타심지는 세 가지를 소연으로 삼으며
  진지·무생지는 각기 아홉 가지를 소연으로 삼는다.
  類七苦集六 滅緣一道二
  他心智緣三 盡無生各九
  
  논하여 말하겠다. 10지의 소연에는 모두 열 가지 법이 있다. 즉 유위법은 여덟 종류로 나뉘니, 3계에 계속(繫屬)되는 법과 무루의 유위에 각기 상응법과 불상응법이 있기 때문이며, 무위는 두 종류로 나뉘니, 선과 무기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76)
  
76) 3계에 계속되는 법이란 3계의 고·집제 각각에 포섭되는 법, 무루의 유위법이란 도제에 포섭되는 법으 로서, 상응법은 심·심소법을, 불상응법은 색과 불상응행법을 말한다. 그리고 선의 무위는 택멸을, 무기의 무 위는 비택멸과 허공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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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속지는 열 가지의 법을 모두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법지는 다섯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욕계의 두 가지와 무루도의 두 가지(상응과 불상응)와, 아울러 선의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유지는 일곱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색계와 무색계와 무루도의 여섯 가지와, 아울러 선의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고지와 집지는 각기 3계에 계속되는 법 여섯 가지를 소연으로 삼는다.
  멸지는 한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선의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도지는 두 가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무루도의 두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타심지는 욕계와 색계와 무루의 세 가지 상응법을 소연으로 한다.
  진지와 무생지는 유위의 여덟 가지 법과 아울러 선의 무위를 소연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혹 1찰나의 지(智)가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는 없는 것인가?
  그러한 경우는 없다.
  어찌 비아관(非我觀)의 지(智)는 [1찰나에] 일체의 법을 모두 '비아'로 아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역시 일체의 법을 능히 소연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법을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이며, 그 같은 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속지는 자신의 품류를 제외한
  일체의 법을 모두 소연으로 삼으니
  비아의 행상이 그러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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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오로지 문·사소성혜일 뿐이다.
  俗智除自品 總緣一切法
  爲非我行相 唯聞思所成
  
  논하여 말하겠다. 세속지로서 일체의 법을 '비아'라고 관찰할 때에도 오로지 자신의 품류[自品]는 제외하는데, 여기서 '자신의 품류'란 그 자체와 상응하는 법과 구유하는 법을 말한다. 즉 대상[境]과 대상을 갖는 법[有境, 즉 세속지]의 차별이 없어지기 때문에, 소연이 동일하기 때문에, 지극히 서로 가까이 근접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이러한 세속지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77)
  그리고 이러한 [비아의 세속]지는 오로지 욕계와 색계에 포섭되는 지이자 문(聞)·사소성(思所成)으로 수소성(修所成)이 아니니, 수소성의 혜는 지(地)를 개별적으로 소연으로 삼기 때문으로,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단박에 염오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78)
  
77) 즉 칼이 자신을 자를 수 없듯이 세속지가 세속지 그 자체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할 경우, 주객의 차별 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자체를 소연으로 삼는 일이 없으며, 상응법은 그 소연이 동일하기 때문에, 구유법은 마치 눈이 눈에 넣은 안약을 보지 못하듯이 지극히 근접해 있기 때문에 능히 소연으로 삼을 수 없다. 이에 반 해 대중부(大衆部)에서는 등불이 스스로를 비추듯이 심·심소법은 능히 자신의 존재를 안다고 하였으며, 법밀 부(法密部)에서는 혜는 그것과 상응하는 '수(受)' 등을 알듯이 능히 상응법을 안다고 하였다. 또한 화지부(化 地部)에서는 구유법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며, 독자부(犢子部)는 보특가라는 제법을 능히 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유부의 종의는 '모든 심·심소법은 그 자신과 상응법과 구유법을 알지 못하며, 보특가라 또한 인식 될 수 없다'는 것이다.(『대비바사론』 권제9, 한글대장경118, p.197-198)
78) 논주 세친에 의하면 세속의 수소성혜는 유루의 6행관(行觀)처럼 3계 9지를 각각 별도의 소연으로 삼지 만(하지는 麤·苦·障으로, 상지는 靜·妙·離로 관함), 예컨대 일체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제법무아'와 같 은 세속지를 수소성혜라고 할 경우, 수소성에는 이염(離染)의 힘이 있어 그러한 무아관(無我觀)을 닦을 때 바 로 일체의 염오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수소성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바사(婆沙)에 의하는 한 '제법무 아'의 세속지는 자신의 품류를 제외한 일체의 법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역시 수소성혜이다.(『대비바사론』 권제10, 한글대장경118, p.215) 즉 정려지에 포섭되는 수소성혜(유루 6행관)는 일체를 소연으로 삼는 것이 인 정되며, 이 때 '혜'는 다만 기뻐하는[欣] 행상의 혜일 뿐이기 때문에 이염의 공능이 없다는 것이다.(『순정리 론』 권제74, 한글대장경181, p.349) 이에 따라 중현은 본단의 본송 제4구를 "그것은 문 (聞)·사(思)·수소 성혜(修所成慧)이다"고 고쳐 짓고 있다.(『현종론』 권제35, 앞의 책, p.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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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지의] 소연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다시 마땅히 사택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몇 가지의 지(智)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생과, 성자의 견도위에 있어
  초찰나에는 결정코 한 가지를 성취하며
  제2찰나에는 결정코 세 가지 지를 성취하며
  뒤의 네 찰나에는 하나씩 증가한다.
  異生聖見道 初念定成一
  二定成三智 後四一一增
  
  수도위에서는 결정코 일곱 가지 지를 성취하지만
  이욕자의 경우라면 타심지가 증가하며
  무학위로서 둔근과 이근은
  결정코 아홉 가지를 성취하고 열 가지를 성취한다.
  修道定成七 離欲增他心
  無學鈍利根 定成九成十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이생위와 아울러 성자로서 견도의 제1찰나에는 결정코 한 가지 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세속지가 바로 그것이다. 견도의 제2찰나(고법지)에는 결정코 세 가지 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여기에 법지와 고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제4찰나와 제6찰나와 제10찰나와 제14찰나에는 순서대로 유지와 집지와 멸지와 도지를 점차 더해 나가니,79)
  
79) 견도 제4찰나 고류지에는 앞의 세 가지 지에 다시 유지가 더해지고, 제6찰나 집법지에는 다시 집지가, 제10찰나 멸법지에는 다시 멸지가, 제14찰나 도법지에는 다시 도지가 더해져 일곱 가지 지를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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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 지가 더해지지 않은 온갖 단계(즉 忍位)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는 앞의 찰나와 같기 때문이다.80) 그리고 수도위 중에서도 역시 결정코 일곱 가지의 지를 성취한다.
  이와 같은 온갖 단계 중에서, 만약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각기 한 가지 지가 증가되니, 이를테면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이생으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제외된다.81)
  나아가 온갖 시해탈(둔근의 무학)은 결정코 아홉 가지의 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앞의 여덟 가지에] 진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불시해탈(이근의 무학)은 결정코 10지를 성취하니, 이를테면 [앞의 아홉 가지에] 무생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떠한 계위 중에서 몇 가지 지를 단박에 닦는 것인가?82)
  바야흐로 견도위의 15찰나의 마음 중에서 닦는 지(智)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도의 인(忍)·지(智)를 일으킬 때에는
  바로 그것을 미래에도 닦으며
  세 가지 유지를 일으킬 때에는
  
  
80) 즉 제3찰나 고류지인에서 성취되는 지(智)의 수는 제2 고법지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와 같으며, 제5 집 법지인과 제7 집류지인·제8 집류지·제9 멸법지인에서 성취되는 지의 수는 제4 고류지와 제6 집법지에서 성 취되는 지의 수와 같다.
81) 이생으로서 유류 6행관에 의해 이욕한 자와, 이욕자로서 견도에 든 자와, 수도위에 있으면서 불환과에 이른 자는 앞의 7지 이외 타심지를 성취한다. 즉 이러한 타심지는 욕계의 혹을 끊음으로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생의 타심지는 유루성으로, 무색계에 태어날 때 그것을 버리기 때문에 성취하지 않는다. 그 러나 무루성의 타심지는 무색계에 태어나더라도 버리지 않는다.
82) 이하 7송에 걸쳐 견도·수도·무학위에서의 10지의 행수(行修, 즉 習修)와 득수(得修)에 대해 논설하 고 있다. 여기서 '행수'란 현재 실제로 수습하는 것[現在修]을 말하며, '득수'란 그러한 현재 수행력에 의해 획득하게 되는 미래세의 수행[未來修]을 말한다. 그리고 '수(修)'라고 함은 유위의 선법을 익혀 원만 자재하 게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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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울러 현관변의 세속지도 함께 닦는다.
  見道忍智起 卽彼未來修
  三類智兼修 現觀邊俗智
  
  이는 불생법으로, [득수는] 자지와 하지이며
  고지·집지의 그것은 4념주이고, 멸지는 최후 염주로서
  [득수는] 자제(自諦)의 행상을 경계로 하는데
  오로지 가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不生自下地 苦集四滅後
  自諦行相境 唯加行所得
  
  논하여 말하겠다. 견도위 중에서 인(忍)·지(智) 중의 하나를 일으킬 때에는 모두 그러한 종류를 미래에도 닦는다. 그렇지만 자제(自諦)의 온갖 행상과 염주(念住)를 닦게 된다.
  어떠한 이유에서 견도위의 경우에는 오로지 동류만을 닦는 것인가?
  이전에 일찍이 이러한 종성을 획득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대치와 소연이 다 같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83)
  오로지 고·집·멸의 세 가지 유지를 일으킬 때에는 능히 미래에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도 함께 닦으니, 각각의 제(諦)를 현관하는 후변(後邊)에서 비로소 능히 함께 닦기 때문에 그 같은 말(현관변)로 일컫게 된 것이다.84)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 밖의 단계에서는 아직 능히 [세속지를] 함께 닦을
  
83) 여기서 '종성을 획득한다'고 함은 동류인을 획득한다는 뜻이다. 즉 이러한 종성류의 선업은 무시 이래 아직 획득되지 않다가 견도위에서 비로소 획득되기 때문에 동류만을 득수(得修)하는 것으로, 예컨대 현재 고 법지를 일으킬 때에는 고류지나 집법지 등의 이류(異類)를 득수하는 힘이 없다. 또한 견도는 먼저 욕계의 고 제를 소연으로 하고, 다음으로 상계의 그것을 소연으로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대치와 소연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류(異類)를 능히 득수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84) 견도의 득수(得修)는 원칙적으로 동류이지만 이류(異類)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고·집·멸류지를 닦을 때에는 각 제를 현관하는 후변(즉 유지의 단계)에서 세속지도 득수하는데, 고(苦)를 알고 집(集)을 끊고 멸(滅)을 작증하는 것이 세속지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1208 / 1397] 쪽
  수 없다.85)
  도류지를 일으킬 때에는 어찌하여 이것(현관변의 세속지)을 닦지 않는 것인가?
  세속지는 일찍이 도제에 대해 사현관(事現觀)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필시 도제에 대해 두루 사현관하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집·멸제에 대해서는 두루 알고 끊고 작증할 수 있을지라도 도제에 대해서는 능히 두루 닦을 수 없으며, 또한 비록 집·멸제의 후변에서는 아직 두루 끊고 작증하지 않았을지라도 미래에 이르러서는 끊고 작증할 것이지만, 도제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 종성이 다양하기 때문이다.86)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러한 세속지는 오로지 견도의 권속일 뿐으로, 그것(도류지)은 수도에 포섭되기 때문에 능히 닦을 수 없다"고 하였다.87) 그러나 이는 이치가 극히 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논증도 되지 않는 것이다.88)
  이러한 세속지(즉 세 가지 유지의 현관변의 세속지)는 바로 불생법이니,89) 어떠한 때라도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함께] '닦는다'고 말한 것인가?(경부의 난문)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것을 지금 바야흐로 획득하기 때문이다.(유부의 답)
  
  
85) 즉 법지의 경우 욕계를 소연으로 하기 때문에 자제(自諦)에 대한 3계의 현관이 아직 원만하게 성취되 지 않았기 때문이다.
86) 즉 집·멸의 경우 아직 두루 끊고 작증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후 무학위에 이르러 두루 끊고 작증하 기 때문에 세속지를 함께 닦을 수 있지만, 도제의 경우는 불타·독각·성문의 도가 각기 다르며, 성문 중에서 도 상·중·하품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87) 이는 유부의 정설이다.(『현종론』 권제36, 앞의 책, p.491)
88) 이는 논주 세친의 비평으로, 제 부파에서는 대체로 제16찰나의 도류지가 견도에 포섭된다고 설하는 경 우가 있으니, 도류지가 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상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논거가 되지 않 는 것이다.(『구사론기』 권제26, 대정장41, p.396하)
89) 고·집·멸류지의 현관변에서 세속지를 득수(得修, 현재 行修에 의한 미래의 닦음)한다고 하였지만, 그러한 세속지는 현기하는 것이 아니다. 즉 견도는 무루지이고, 세속지는 유루지이기 때문에 세 가지 유지의 후변에 득수하는 세속지는 비택멸을 획득하여 필경불생법이 되는 것이다.
[1209 / 1397] 쪽
  이미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으면서 '획득한다'는 뜻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다만 득(得)에 근거하여 '획득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득'에 근거하여 획득한다고 하는 말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따라서 앞서 분별한 '닦는다'고 하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옛 논사[古師]처럼 설할 경우 '닦는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어떻게 설하였던 것인가?
  "성도의 힘에 의해 세속지를 닦으면 출관(出觀) 후 뛰어난 진리[諦]를 소연으로 하는 세속지가 현전하는 일이 있다. 곧 이러한 세속지가 일어나는 소의(所依)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이것(세속지)을 획득한다고 일컫게 된 것으로, 금광을 얻은 것을 일컬어 금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90)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 같은 뜻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어떠한 지(地)에 의지하여 견도가 현전하더라도 미래에 능히 자지와 하지의 법을 닦을 수 있다. 이를테면 미지정에 의지하여 견도가 현전할 때는 미래에 능히 한 지(미지정)의 견도와 두 지(미지정과 욕계)의 세속지를 닦으며, 내지는 제4정려에 의지하여 견도가 현전할 때는 미래에 능히 여섯 지의 견도와 일곱 지의 세속지를 닦는다.91)
  또한 고지와 집지의 후변에 닦는 세속지는 4념주에 포섭되며, 멸지의 후변에 닦는 세속지는 오로지 법념주에 포섭될 뿐이다.92)
  또한 어떠한 제(諦)의 현관변을 닦더라도 바로 이러한 행상으로써 이러한 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93)
  
90) 이는 경부 고사(古師)의 설로서, 여기서 '소의'란 바로 종자(種子, b ja)를 말하는 것이나 비바사사( 毘婆沙師)가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종자와 서로 밀접하게 관계하는 '소의'라는 말로 설하였다.(『구사론 기』)
91) 여섯 지(地)의 견도란 미지·중간·근본4정려지를 말하며, 일곱 지의 세속지란 여기에 욕계를 더한 것 이다.
92) 고·집제는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고·집지의 후변 즉 고·집류 지의 단계에서 득수하는 세속지는 4념주와 통한다. 그러나 멸제에는 신·수·심의 세 가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멸류지의 단계에서 득수하는 세속지는 법념주일 뿐이다.
93) 이는 세 가지 유지의 후변에서 득수하는 세속지의 행상에 관한 논설로서, 이를테면 고제 현관의 후변( 즉 고류지)의 단계에서 득수하는 세속지는 고제하의 4행상으로써 고제를 관찰하는데, 만약 그것이 욕계계의 세속지라면 욕계의 고제를 소연으로 삼으며, 색계계의 세속지라면 상계의 고제를 소연으로 삼는다. 집제 현관 의 후변(집류지)에서 닦는 세속지는 집제의 4행상을 소연으로 삼는데, 만약 그것이 욕계계의 세속지라면 욕계 의 집제를 소연으로 삼으며, 색계계의 세속지라면 상계의 집제를 소연으로 삼는다. 멸제 현관의 후변에서 닦 는 세속지는 멸제의 4행상을 소연으로 삼는데, 만약 그것이 욕계계의 세속지라면 욕계의 멸제를 소연으로 삼 으며, 색계계의 세속지라면 상계의 멸제를 소연으로 삼는다.
[1210 / 1397] 쪽
  그리고 [이러한 세속지는] 바로 견도의 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오로지 가행득일 뿐이다.94)
  나아가 [이러한 세속지는 견도 중에서] 지(智)가 증가하기 때문에 '지'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만약 권속과 함께하는 경우라면, 욕계의 네 가지 온과 색계의 5온을 그것의 자성으로 한다.95)
  다음으로 수도의 이염위(離染位) 중에서 닦는 지(智)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도위의 첫 찰나에는
  여섯 혹은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며,
  [아래] 8지를 끊는 무간도와
  유욕(有欲)의 그 밖의 도와
  修道初刹那 修六或七智
  斷八地無間 及有欲餘道
  
  유정지를 끊는 8해탈도에서는
  각기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며,
  그 이상의 무간도와 그 밖의 도에서는
  
  
94) 즉 현관변(現觀邊)의 세속지는 태어나면서부터 획득되는 생득(生得)이나 이염에 의해 획득되는 이염득 (離染得)이 아니다.
95) 욕계의 색온은 고·집·멸류지를 일으킬 때 득수하는 세속지의 권속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색계의 경우 도구계(道俱戒)·정구계(定俱戒)를 수전색을 동반하기 때문에 현관변의 세속지는 4온과 5온을 자성으로 하는 것이다.
 
[1211 / 1397] 쪽
  차례대로 여섯 가지와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有頂八解脫 各修於七智
  上無間餘道 如次修六八
  
  논하여 말하겠다. 수도의 첫 찰나란 제16 도류지가 일어나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 이 때에는 두 가지의 지를 바로[現] 닦는다.96) 그리고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미래에 여섯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법지와 유지와 고·집·멸·도지가 바로 그것이며, 욕계를 떠난 자라면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앞의 것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그 때에는 세속지를 닦지 않으니, 유정지(有頂地)를 대치하기 때문이다.97)
  욕계 수소단을 끊는 9무간도와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98) 위의 일곱 지(4정려와 아래 3무색정)를 끊는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의 유지와 세속지와 멸·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욕계를 끊는 가행도와 유욕(有欲)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그리고 이상의 도가 일어날 때에는 미래에 모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99)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고·집·멸·도지가 바로 그것이다.
  유정지를 끊는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멸·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이러한 때에는 미래에도 역시 오로지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앞서 언급한 미래의 득수에
  
  
96) 즉 도류지가 일어날 순간 도지와 유지를 닦는다. 그러나 명칭상으로는 두 종류이지만 그 본질은 동일 하다.
97) 도류지는 유정지의 혹을 대치하는 것이지만, 세속지에는 유정지를 대치하는 힘이 없다.
98) 즉 욕계 수혹을 떠날지라도 세속도에 의하는 경우와 무루도에 의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그것에는 각기 무루도를 가행으로 하는 자와 세속도를 가행으로 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상응하는 바에 따라'라고 말한 것이다.
99) 여기서 '이상의 도'란 앞에서 언급한 욕계 수소단을 끊는 9무간과 앞의 8해탈도, 욕계를 끊는 가행과 유욕의 승진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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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세속지를 제외하고 타심지를 더한 것이다.
  유정지를 끊는 9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법지와 유지와 고·집·멸·도지의 여섯 가지의 지를 닦는다.
  욕계 수소단을 끊는 제9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의 여섯 가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위의 7지(地)의 수소단을 끊는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세속지와 멸·도의 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욕계 수소단을 끊는 제9 승진도와 위의 8지의 수소단을 끊는 온갖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또한 위의 7지와 유정지의 8품의 수소단을 끊는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타심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다. 그리고 이상의 도가 일어날 때에는 미래에 모두 여덟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세속지와 법지와 유지와 4제지와 타심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이염득(離染得)의 무학위 중에서 닦는 지(智)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의 첫 찰나에서는
  아홉 혹은 열 가지의 지를 닦으니
  둔근과 이근이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
  승진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無學初刹那 修九或修十
  鈍利根別故 勝進道亦然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의 첫 찰나란 유정(有頂)의 염오를 끊는 제9 해탈도가 일어나는 때를 말하는 것으로, 그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유지와 진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니, 유정지를 소연으로 하기 때문이다.100)
  
100) 즉 여기서 네 가지 지는 유정지의 5온을 소연으로 하는 고류진지(苦類盡智)와 집류진지(集類盡智)를 10지로 분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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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아홉 가지와 열 가지의 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홉 가지의 지를 닦고, 열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둔근자는 오로지 무생지를 제외한 지를 닦고, 이근자는 무생지도 역시 닦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위에서 닦는 지(智)의 많고 적음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연근(練根)의 무간도에서
  유학은 여섯 가지를, 무학은 일곱 가지를 닦으며
  그 밖의 도에서 유학은 여섯·일곱·여덟 가지를
  응공은 여덟·아홉 가지와 일체의 지를 닦는다.
  練根無間道 學六無學七
  餘學六七八 應八九一切
  
  잡수(雜修)와 신통[通]의 무간도에서
  유학은 일곱 가지를, 응공은 여덟·아홉 가지를 닦으며
  그 밖의 도에서 유학은 여덟 가지를 닦으며
  응공은 아홉 가지 혹은 일체의 지를 닦는다.
  雜修通無間 學七應八九
  餘道學修八 應九或一切
  
  성자가 그 밖의 도를 일으킬 때와
  이생이 온갖 상태에서
  닦는 지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는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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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起餘功德 及異生諸位
  所修智多少 皆如理應思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위의 경우, 연근(練根)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여섯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이 때는 견도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속지를 닦지 않는 것이며, 능히 장애를 끊기 때문에 타심지를 닦지 않는 것이다. 연근의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도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미래에 여섯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가 바로 그것이며,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앞의 것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해탈도의 단계에서도 역시 세속지를 닦는다"고 하였다.
  [유학위에서 연근의] 온갖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미래에도 일곱 가지의 지를 닦지만, 이미 욕계를 떠난 자는 여덟 가지의 지를 닦으니, 이를테면 거기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로서, 만약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일곱 가지의 지를 닦지만,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세속지와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타심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무학위의 경우, 연근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멸·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진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이 때는 세속지를 닦지 않으니, 유정지를 대치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퇴법 등의 앞의] 다섯 종성이 앞의 여덟 가지 해탈도를 닦을 때에는 4제지와 유지와 두 가지 법지(멸·도법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여덟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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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의 지를 닦으니,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타심지와 진지가 바로 그것이다. [앞의] 네 종성이 제9 해탈도를 닦을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유지와 진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아홉 가지의 지를 닦는다. 가장 마지막 종성이 해탈도를 닦을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유지와 진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101) 미래에 10지를 닦는다. 온갖 가행도를 닦을 때 바로 닦는 것은 유학의 경우와 같으며, 미래에 아홉 가지의 지를 닦는다. 온갖 승진도를 닦을 때,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의 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아홉 가지의 지를 닦지만, 이근자라면 10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역시 10지를 닦는다.
  유학위의 경우, 잡수(雜修)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4제지와 법지와 유지와 세속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일곱 가지의 지를 닦는다. 잡수의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여기에 세속지를 더한 것을,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다시 타심지를 더한 것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도 모두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무학위의 경우, 잡수의 온갖 무간도가 일어날 때 바로 닦는 지는 유학에서의 경우와 같으며, 미래에 닦아야 하는 지는 둔근자라면 여덟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아홉 가지이다. 잡수의 온갖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오로지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여기에 세속지를 더하여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미래에 닦아야 하는 지는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열 가지이다. 그리고 잡수의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연근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와 동일하다.
  유학으로서 신통을 닦을 경우, 다섯 신통의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102) 미래에 일곱 가지의 지를 닦는다. 숙주(宿住)와 신경
  
  
101) 여기서 '가장 마지막 종성이 해탈도를 닦을 때'란 5종성의 아라한 중의 최후, 즉 감달법 아라한이 근 기를 단련하여 제9 해탈도를 닦는 때를 말한다.
102) 여기서 다섯 신통이란,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천안지증통(天眼智證通)·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 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숙주수념지증통(宿住隨念智證通)·누진지증통(漏盡智證通)의 6통 중의 앞의 다섯 가 지. 6통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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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境)의 두 신통의 해탈도와 다섯 신통의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 타심통의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법지와 유지와 도지와 세속지와 타심지를, 일체 모든 신통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고지와 집지와 멸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울러 바로 닦으며, 이상의 도가 일어날 때 미래에 모두 여덟 가지의 지를 닦는다.
  무학으로서 신통을 닦을 경우, 다섯 신통을 닦는 무간도가 일어날 때 바로 닦는 지는 유학에서와 같으며, 미래에 닦는 것은 둔근자라면 여덟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아홉 가지이다. 해탈도와 가행도가 일어날 때에 바로 닦는 지도 유학의 경우와 같으며, 미래에 닦는 것은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열 가지이다. 온갖 승진도가 일어날 때의 경우는 연근의 승진도가 일어날 때와 동일하다. 그리고 천안(天眼)과 천이(天耳)의 두 가지 신통을 닦는 해탈도는, 이러한 두 신통이 무기성이기 때문에 '닦는다'고 말하지 않는다.103)
  성자가 그 밖의 4무량(無量) 등의 수소성에 포섭되는 유루의 공덕을 일으킬 때에는 현재에 모두 한 가지의 지를 닦으니,104) 세속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유학이 미래에 닦는 지는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라면 일곱 가지이지만,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여덟 가지이며, 무학이 미래에 닦는 지는 둔근자라면 아홉 가지이지만, 이근자라면 열 가지이다. 여기에 미미심(微微心)은 제외되니, 이것은 미래에 오로지 세속지만을 닦기 때문이다.105) 만약 성자가 그 밖의 무루의 공덕으로서 정려에 포섭되는 것을 일으킬 때에는 4제지와 법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무색정에 포섭되는 것을 일으킬 때에는 오로지 4제지와 유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는
  
  
103) 신통을 닦는 해탈도란 6신통 중 숙주·신경·타심통을 닦는 것만을 가리킨다. 즉 천안통과 천이통은 통과(通果)무기이기 때문에 이를 '닦는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기에는 해탈도가 없다.
104) 여기서 유루의 공덕이란 4무량을 비롯한 8해탈·8승처·8변처·부정관·지식념·세속의 염주·4무애 해·무쟁(無諍)·원지(願智)·3삼마지·멸진정을 말한다.
105) '미미심'이란 멸진정에 드는 마음을 말한다. 즉 멸진정에 들려고 할 때에는 마음이 미열(微劣)하기 때문에 현재에만 세속지를 닦을 뿐 아니라 미래에도 역시 그러하므로, 4무량 따위처럼 미래에 무루지를 능히 득수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제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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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106) 그리고 미래에 닦는 지는 앞에서 언급한 유루의 공덕을 일으킬 때와 동일하다.
  이생이 염오를 떠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는데, 욕계와 [앞의] 세 정려를 끊는 제9 해탈도와, 그리고 근본 4정려에 의해 승진도와 이염의 가행도를 일으킬 때에는 미래에 두 가지 지를 닦으니, 말하자면 세속지에 타심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도(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일체의 가행·무간·해탈·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미래에 오로지 세속지를 닦는다. 또한 [누진통을 제외한] 다섯 신통을 닦을 때의 가행도와 두 가지 신통(숙주·신경통)을 닦을 때의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 한 가지 신통(타심통)을 닦는 해탈도가 일어날 때에는 세속지와 타심지를 바로 닦으며, 온갖 신통(앞의 다섯 신통)을 닦는 승진도가 일어날 때에는 두 가지 지(타심지와 세속지)를 상응하는 바에 따라 바로 닦으며, 이상의 일체의 도가 일어날 때에도 모두 미래에 두 가지 종류의 지를 닦는다. 그리고 다섯 신통을 닦는 무간도가 일어날 때에는 현재와 미래에 오로지 세속지만을 닦는다.
  나아가 근본정려에 의해 그 밖의 공덕을 닦을 때에는 모두 세속지를 바로 닦으며, 미래에는 두 가지의 지(세속지와 타심지)를 닦는다. 그러나 오로지 순결택분이 일어날 때만은 필시 타심지를 닦지 않으니, 이는 바로 견도에 가까운 권속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지(地)의 정려에 의해 그 밖의 공덕을 닦을 때에는 모두 세속지를 현재와 미래에 닦는다.
  
  미래에 닦는 모든 도는 몇 가지 지(地)를 닦는다고 해야 할 것이며, 일어나 획득[得]된 모든 도는 모두 지금 바로 '닦는 것[修]'인가?107)
  게송으로 말하겠다.
  
  
  
  
106) 정려에 포섭되는 무루의 공덕이란 무루정려·염주·4무애해(無礙解)와 같은 것을 말하고, 무색정에 포섭되는 무루의 공덕이란 3무색정과 아래의 3무색해탈과 같은 것을 말한다.
107) 본 단에서는 득수(得修, 즉 미래수)와 소의지의 관계 및 도의 획득[得]과 닦음[修]의 관계에 대해 논 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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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도가 이러한 지에 의지하거나 획득할 때
  이러한 지의 유루를 닦으며
  이러한 지를 떠나고 획득하고 일으킬 때에는
  이러한 지와 하지의 무루를 닦는다.
  諸道依得此 修此地有漏
  爲離得起此 修此下無漏
  
  오로지 최초의 진지만이 두루
  아홉 지의 유루의 공덕을 닦을 뿐으로
  상지에 태어나면 하지를 닦지 않는데
  일찍이 획득한 것은 '닦는 것'이 아니다.
  唯初盡遍修 九地有漏德
  生上不修下 曾所得非修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도가 이러한 지(地)에 의지하고, 아울러 이러한 지를 획득할 때에는 미래에 능히 이러한 지의 유루를 닦게 된다.108)
  성자가 이러한 지를 떠나려고 할 때와, 이러한 지를 획득할 때, 아울러 이러한 지 중에서 온갖 도를 현기할 때에는 모두 능히 이러한 지와 하지의 무루를 닦게 된다.109) 여기서 '이러한 지를 떠나려고 할 때'라는 말은 두 종류의
  
  
108) 즉 유루와 무루의 온갖 도가 유루법을 닦기 위해 어떤 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났을 때와 그러한 지의 법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미래에 오로지 그 지의 유루법만을 득수한다. 이를테면 이러한 지에 의지하여 세속도 나 성도가 현재전할 때에는 미래에 오로지 이러한 지의 유루법만을 닦으니, 유루법의 계지(繫地)는 견고하여 그 밖의 다른 지의 도를 닦기가 어렵기 때문이다.('모든 도가 이러한 지에 의지할 때, 미래에 이러한 지의 유 루를 닦는다.') 따라서 어떠한 지에 의지하여 하지의 염오를 떠나는 제9 해탈도가 현전할 때에도 역시 미래에 획득되는 상지의 근본정과 근분정의 유루공덕을 닦으니, 하지의 계박을 떠날 때에는 반드시 상지를 획득하기 때문이다.('모든 도가 이러한 지를 획득할 때, 미래에 이러한 지의 유루를 닦는다.')
109) 성자 즉 무루지를 득수하는 이는 어떠한 지에서 도를 일으켰을지라도, 예컨대 제3정려의 염오를 떠나 려고 할 때에는 미래에 제3정려의 무루와 하지의 무루를 득수하며, 초정려의 염오를 떠나 제2정려의 근본정을 획득할 때에는 제2정려의 무루와 하지의 무루를 득수하며, 제2정려에 포섭되는 견도를 일으킬 때에는 제2정려 의 무루와 미지·중간·초정려의 무루를 득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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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가지 도 모두와 통한다.110)
  나아가 오로지 처음으로 진지가 현재전할 때, 그것의 힘은 9지(地)의 유루공덕인 부정관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뛰어난 공덕을 능히 두루 닦으니,111) 능히 계박하는 온갖 번뇌가 끊어져 남음이 없기 때문으로, 마치 사람을 능히 속박하는 밧줄을 끊으면 억눌린 기(氣)가 통하는 것과 같다. 또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이 지금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일체의 선법은 '득'을 일으켜 내조(來朝)하니,112) 비유하자면 대왕이 왕위에 올라 관정의 의식을 치루게 되면 일체의 나라에서 모두와 조공을 바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이것(진지)은, 상지에 태어나면 필시 하지를 닦지 않는다.113) 그리고 [본송에서] '최초의 진지'라고 하는 말은 유정지를 떠날 때와 다섯 종성의 아라한이 근기를 연마[練根]하는 단계의 제9 해탈도를 나타낸다.114)
  앞에서 언급한 모든 '닦음[修]'이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하지 못하는 것을 지금 일으키고, 지금 획득하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능히 닦는 것[能修]'이고, '닦아지는 것[所修]'이다. 이를테면 만약 일찍이 획득되지 않은 것을 지금 획득함에 있어 공을 들여 획득하는 것을 바야흐로 바로 '소수법(所修法)'이라
  
  
  
110) 즉 유루·무루의 가행·무간·해탈·승진도의 모든 경우에도 미래에 떠나려고 하는 지와 하지의 법을 닦게 된다.
111) 번뇌가 이미 끊어지고 지은 바가 이미 다한 대자각을 낳을 때에는 3계의 폐색(閉塞)이 일시에 열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 힘은 능히 9지의 유루의 무량공덕을 닦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떠한 지에 따라 진지가 현전하더라도 미래에 자지와 상지와 하지를 모두 닦게 되는 것이다.
112) 마음이 일체의 번뇌를 멸진하는 진지를 획득하는 것을 왕위에 오른다고 말한 것이다.
113) 진지가 일어나는 첫 찰나에 3계 9지의 일체의 선법을 득수한다고 함은, 소의신이 욕계에 있으면서 최 초로 진지를 일으킬 때를 말하는 것으로, 소의신이 상계에 태어날 때에는 하지의 법을 득수하는 일이 없다. 이를테면 몸이 욕계에 있으면서 아라한을 획득하였을 경우에는 3계 9지의 선근을 모두 닦지만, 유정지에 태어 나 아라한을 획득하였을 경우에는 오로지 한 지(즉 자지)의 선근만을 닦을 뿐이며, 초정려에 태어나 아라한을 획득한 이는 욕계의 온갖 유루선을 닦지 않으니, 그것은 저열하기 때문이다.
114) 즉 이 때에는 모두 선행된 도를 버리고 비로소 과(果)를 획득하기 때문에 '최초'라고 한 것이다.(『 현종론』 권제36, 앞의 책, p.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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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그러나 일찍이 획득하였다가 버린 법을 지금 비록 다시 획득하였을지라도 그것을 '소수'라고는 하지 않으니, 애써 노력하여 증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것이 공력을 들여 현전한 것이라면 능히 미래에도 닦을 수 있으니, 그 세력이 수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이 획득되었던 것이 일어난 것이라면 미래에는 그것을 닦지 않으니, 많은 공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며,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115)
  [미래에는] 오로지 '획득[得]'에 근거하여서만 닦게 되는 것[修]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을 '닦음'이라고 하는가?
  닦음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득수(得修)이며, 둘째는 습수(習修)이며, 셋째는 대치수(對治修)이며, 넷째는 제견수(除遣修)이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닦음은 어떠한 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득수와 습수는
  선한 유위법에 의해 설정된 것이며
  온갖 유루법에 의해
  제견수와 대치수를 설정하였다.
  立得修習修 依善有爲法
  依諸有漏法 立治修遣修
  
  논하여 말하겠다. 득수와 습수의 두 가지는 유위 선법에 근거한 것으로, 미래에는 오로지 득수만이 있을 뿐이며, 현재에는 두 가지 수를 모두 갖추고
  
  
  
115) 만약 일찍이 획득하였던 것을 지금 일으켰을지라도 미래에 득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박가범(薄伽梵) 이 진지를 획득하였을 때에도 마땅히 아직 일체의 공덕을 모두 닦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공덕을 모두 증득하기 위하여 마땅히 미래 다시 증진하여 닦아야 할 것이기 때문으로, 그럴 경우 원만하지 않은 이승 (二乘)의 공덕과 동일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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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116) 그리고 대치수와 제견수의 두 가지는 다만 유루법에 근거한 것이다.117) 따라서 유루의 선법은 네 가지 닦음[修]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무루의 유위와 그 밖의 유루법은 차례대로 각기 전후의 두 가지 닦음을 갖추고 있다.118)
  그런데 외국(外國)의 모든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닦음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앞의 네 가지에다 방수(防修)와 관수(觀修)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으로,119) 온갖 근(根)을 방호하고, 몸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무엇을 일러 근을 닦는 것[修根]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6근을 능히 잘 막고 능히 잘 지키는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고 설하고 있으며,120) 또한 계경에서 '무엇을 일컬어 몸을 닦는 것[修身]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자신의 몸에서 머리카락이나 터럭 손톱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121)
  
116) 일찍이 획득되지 않았던 온갖 공덕이 현전하고, 이와 아울러 미래에 그 밖의 공덕을 획득하는 경우, 획득된 것을 잡수(雜修)하기 때문에 '득수(pratilambhana-bhavana)'라고 이름한다. 또한 일찍이 획득하였거나 획득하지 못한 공덕이 현기하는 경우, 현재에 수습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두를 '습수(nisevana-bhavana)'라고 이름한다.
117) 신(身) 등의 유루법에 대해 능치(能治)를 획득하는 경우 소치(所治)의 신 등을 '대치수'라고 이름하 며, '신' 등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번뇌가 끊어지는 경우 '신' 등의 법을 '제견수'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 신' 등에 대해 대치를 획득하거나 '신' 등을 연으로 하는 번뇌가 끊어질 때에도 역시 '신 등을 닦는 것'이라 고 설하는 것이다.
118) 무루의 유위법에 의해 득수와 습수가, 염오와 무기의 유루법에 의해 대치수와 제견수가 설정되었다는 뜻.
119) 『대비바사론』 권제105(한글대장경122, p.115)에 의하면 서방사(西方師). 여기서는 방수를 방호수( 防護修), 관수를 분별수(分別修)로 번역하였다. 참고로 구역에서는 수수(守修)와 택수(擇修)이다.
120) 『잡아함경』 권제11 제279경(대정장2, p.276중), "云何六根善調伏, 善關閉, 善守護, 善執持, 善修習 , 於未來世必受樂報? 多聞聖弟子, 眼見色, 不取色相, 不取隨形好, 任其眼根之所, 趣向常住律儀, 世間貪愛惡不 善法不漏其心, 能生律儀善護眼根. 耳鼻舌身意根亦復如是."
121) 『중아함경』 권제20 「염신경(念身經)」(대정장1, p.556상), "다시 비구는 염신관(念身觀)을 수습해 야 하니, 비구는 이 몸이 머무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 머리에서 발 끝까지 여러 가지 더러운 것, 이 를테면 이 몸 안에는 머리털·터럭·손톱·이빨·거칠고 부드러운 엷은 피부·살점·힘줄·뼈·심장·콩팥· 간장·폐·대장·소장·지라·위장·똥·뇌·뇌수·눈물·땀·콧물·가래·고름·피·지방질·골수·가래·오 줌으로 가득 차 있다고 관찰해야 한다."
[1222 / 1397] 쪽
  그러나 가습미라(迦濕彌羅)의 모든 논사들은 말하기를, "방수와 관수의 두 가지는 바로 대치수와 견제수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CD굽던노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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