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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聖諦와 12緣起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Ⅱ)
權 五 民*
* 경상대 철학과 교수
目 次
Ⅰ. 들어가는 말
Ⅱ. 대승의 진리관을 통한 연기 이해
Ⅲ. 불타 자내증으로서의 4성제
Ⅳ. 4성제와 12연기
Ⅴ. 연기의 甚深難知의 의미
Ⅵ. 결어
한글 요약
본 논문은 「緣起法이 불타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Ⅰ)」의 속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구미나 남방불교권에서 출간된 불교개론서에서는 불타 자내증을 대체로 3明이나 이와 관련된 4聖諦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일본이나 이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결같이 緣起法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4성제의 ‘諦(satya)’는 ‘진리’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말일 뿐더러, 5部 4阿含에 언급된 불타 깨달음과 관련된 기사의 빈도나 文勢 상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연기법의 경우 보다 훨씬 많고, 또한 강렬하다.
일반적으로 불타 자내증이 연기법이라고 할 때, 연기법은 相依性으로 이해되며, 그렇기 때문에 無常이고 無我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空은 연기의 이론적 귀결(연기-무자성-공)이라는 중론의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거나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이다’고 하는 말은 초기불전 어디에도 없다. 무상과 무아는 다만 경험적 사실이지 추론을 통해 도출되는 이론적 귀결이 아니다.
諸經에 의하면, 불타의 성도는 3明(宿住智證明․死生智證明․漏盡智證明)을 깨달아 괴로움을 초래하는 일체의 원인(번뇌)을 斷盡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漏盡明은 4성제의 통찰을 통해 성취된다. 나아가 經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연기법에 대한 무지를 ‘無明’이라고 말하는 일이 없으며, 대개 과거․미래․현재의 三際나 4聖諦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8正道의 正見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성도직후의 順逆에 걸친 12연기의 內觀은 다만 集諦와 滅諦의 구체적인 내관으로 보아야 한다. 즉 초기경전에서 연기란 궁극적으로 과거․미래․현재생의 존재방식을 밝혀 이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12연기를 형용하는 ‘甚深難見(혹은 難知)’이라는 修辭 역시 대개의 경우 ‘전생에서 금생으로, 금생에서 후생으로 유전한다(從此世至彼世, 從彼世至此世)’는 말과 함께 설해진다. 그것은 理法으로서의 ‘연기’에 대한 말이 아니다. 또한 초기경전 상에서 無明(avidyā)의 還滅인 明(vidyā)의 용례는 오로지 3明이며, 3명은 과거․미래․현재의 三際에 대응한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불타 깨달음을 ‘연기법’이라고 하기보다는 ‘4성제’라고 하는 편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이는 초기 불교의 직접적인 해석체계라고 할 수 있는 아비달마불교의 전통적 이해였다.
불타 깨달음을 相依性의 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은 대승의 진리관(空觀)에 근거한 해석으로,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무시한 특정의 교파 혹은 특정지역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宗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주제어: 佛陀 自內證, 緣起法, 4聖諦, 3明, 甚深難知.
Ⅰ. 들어가는 말
필자는 「緣起法이 불타의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Ⅰ)」( 보조사상 제27집)라는 논문에서, 우리가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법임을 논증할 때 흔히 인용하는 두 경설-“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다른 이가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法界 常住하는 것으로,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等正覺을 성취하였다.”는 잡아함경 권12 제299경과, “만약 연기를 본다면 이는 바로 法을 보는 것이며, 만약 법을 본다면 이는 바로 연기를 보는 것이다”는 중아함경 권7 「象跡喩經」-과, 정각 후 12연기를 順逆으로 觀하였다는 율장 대품 이나 우다나(Udāna) 의 기사는 경증이 될 수 없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법이라고 하는 주장은 근대 이후 일본의 불교학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대개 초기불교의 연기를 상의상관성으로 이해하였기에 그것은 이미 대승의 스크린을 통한 해석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불타는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필자의 管見에 의하는 한, 광의로 말하자면 4聖諦이며, 협의로 말하자면 煩惱斷盡의 열반 즉 漏盡明이다. 그러나 누진명 역시 4제의 여실지견을 통해 성취된 것이니, 광협의 두 뜻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불교개론서에서는 12연기의 流轉門이 苦諦와 集諦이며, 還滅門이 滅諦와 道諦라고 하면서 “4성제는 연기적 관찰을 통한 괴로움의 극복을 제시하는 실천적 교설이다”1)
고 하거나 “4성제는 연기의 도리를 깨닫는 실천적 교리이다”고 말한다.2)
1) 대한불교조계종포교원 편, 불교의 이해와 신행 (조계종출판사, 2004), p.77.
2) 이중표, 근본불교 (민족사, 2002), p.257.
실천적 교리와 이론적 교리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불타의 모든 법문(이를 ‘교리’라 하자)은 그의 內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聽聞者의 ‘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인데, 어떻게 이
론과 실천의 분별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예컨대 5온․12처․18계나 無常 등은 이론적 교리인가, 실천적 교리인가?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초기경전에서는 그것만 듣고서도 歡喜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으며, 나아가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다(我生已盡)-’고 설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불교개론서에서는 “4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존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석존이 녹야원에서 4성제를 설하신 것을 初轉法輪이라 함은 4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3)고 하여 초전법륜의 신빙성마저 부정하고 있다. 전문연구서에서조차 “원시불교의 중요한 교리는 6근설, 5온설, (5支 내지 12지에 걸친) 연기계열설, 4제설이지만, 이론적 교리는 앞의 세 가지이고, 4제설은 승단의 생활법과 수행의 규칙이다.”고 말하고 있다.4)-咄!
이제 본고에서는 전편(「緣起法이 불타의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에 이어 4성제가 불타 자내증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에게 알려진 4성제와 12연기, 그리고 양자의 관계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드러내보고자 한다.
3) 교양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학개론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7), p.89.
4) 上野順瑛, 無我輪廻の論理的 構造(東京, 平樂寺書店, 1975), p.122. 上野順瑛는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4제의 고․집․멸 3제는 愛緣起(즉 5支緣起)의 生觀(순관)과 滅觀(역관)이며, 도제의 8정도는 승단에 의해 규정된 특정한 생활법 수행법이다. 8정도가 4제의 도제로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독립된 敎義라고 하는 것은, 8정도를 주제로 한 경전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6근․5온․연기계열의 세 교리는 윤회 해탈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규정하는 교리이지만, 8정도는 승단이 승단 (구성)원들로 하여금 준수하게 한 생활법 수행법으로, 앞의 세 교리와는 본질을 달리하는 교의이다.”(동, p.121)
Ⅱ. 대승의 진리관을 통한 연기 이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구미나 남방불교권에서 출판된 불교개론서에서는 불타 자내증을 대체로 3明이나 이와 관련된 4聖諦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5) 일본이나 이에 절대적으로 영향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한결같이
緣起法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보리수하 금강보좌에서 ‘진리’를 깨달아 如來 等正覺者가 되었다면, 이 때 진리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말은 4성제의 ‘諦(satya)’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성자들의 진리’이기 때문에 聖諦이다.6) 5部 4阿含에 언급된 불타 깨달음과 관련된 기사의 빈도 수나 文勢 또한 4성제가 연기보다 훨씬 많고 강렬하다. 몇 가지 인상적인 경문만 인용해 보자.
5) 예컨대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5reprinted, pp.64-68.; E Lamotte, HISTORY OF INDIAN BUDDHIM, PEETERS PRESS LOUVAIN-PARIS, 1976 2nd reprinted, p.16.; Erich Frauwallner,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2vols(박태섭 역, 원시불교 , 고려원, 1991, p.72; 113-115).; Nārada Mahāthera, The Buddha and his Teachings(석길암 역, 오직 그대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 경서원, 1994, pp.41-42). 이상의 문헌에서는 자이나교도인 삿차카에게 고행의 무의미함과 금강보좌에서의 세 단계에 걸친 깨달음(3明)에 대해 설하고 있는 중부경전 제36경 薩遮迦大經(Mahāsaccaka suttanta) 에 기초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경에 대해서는 주25) 참조.
김성철은 「초기 瑜伽行派의 無分別智 연구」(박사학위 청구논문, 동국대 대학원, 2004,pp.11-32)에서 초기경전에서의 解脫智의 성격에 대한 페터(Tilmann Vetter)와 슈미트하우젠(L. Schmithausen)의 이론을 요약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페터는 4정려와 3明(혹은 적어도 漏盡明)을 획득함으로써, 슈미트하우젠은 4제의 통찰을 통해 3漏(주 24참조)로부터 心解脫함으로써 해탈지를 성취하였다고 말한다. 다만 후자의 경우, 고제를 제외한 나머지 3제의 통찰과 漏의 소멸 사이에 심리적 개연성이 확보되지 않는다고 하여 이에 대해 해명한 것을 길게 부연하고 있다.
6) 중아함경 권7 「分別聖諦經」(주8 참조).; 구사론 권22( 大正藏29, p.114상; 졸역, 동국역경원, 2002, p.995), “是聖者諦. 故得‘聖’名.” 이에 대해 衆賢은 “이는 오로지 성자들만이 4제의 이치에 대해 능히 참답게 관찰[如實見]하여 거짓됨[虛妄]이 없지만, 성자가 아닌 이(즉 이생)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제’라고 이름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성자가 즐거움이라 하는 것을 성자가 아닌 자(즉 이생)는 괴로움이라 하며, 성자가 아닌 이가 괴로움이라 하는 것을 성자는 즐거움이라 한다”는 경설( 잡아함경권제13 제308경)을 인용하고 있다. 혹은 “성자들만이 4제의 이치를 聖行과 聖智로써 관찰하여 正決定(즉 見道)을 획득하고 다시는 물러나지 않지만, 이생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생에 있어 4제는 다만 世俗智일 뿐이다”고 말하고 있다.( 순정리론 권57, 大正藏29, p.661중하)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러한 4성제의 3轉 12行에 대한 眼․智․明․覺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스스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나에게 이미 4성제의 3전 12행에 대한 眼․智․明․覺이 생겨났기 때문에-스스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게 되었다."7)
7) 잡아함경 권15 「轉法輪經」( 大正藏2, p.104상). 4성제를 세 번 굴림으로써 無上正等覺을 증득하였다는 이 기사는 아함의 諸經 뿐만 아니라 受戒犍度편에서 佛傳을 전하는 사분율 ( 大正藏22, p.788중); 오분율 ( 大正藏22, p.104하); 율장 대품 Ⅰ.1.7(최봉수 역, 마하박가 1, 시공사, 1998, p.61이하)에서도 역시 초전법륜의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다. 주32) 참조.
"諸賢이여, 이러한 고성제는 과거에도 고성제이며, 미래․현재에도 고성제이니, 眞諦로서 허망하지 않다. 진실[如]을 떠나지 않으며, 역시 顚倒된 것도 아니며, 眞諦로서 진실로 이와 같은 진리와 부합하는 것임을 살
펴 알아야 하는 것으로, 이는 성자에게만 존재하며, 성자에게만 알려지며, 성자에게만 관찰되며, 성자에게만 요별되며, 성자에게만 증득되며, 성자에게만 等正覺되니, 그렇기 때문에 고성제라고 설한 것이다.-(집․멸․도 성제도 역시 그러하다.)" 8)
8) 중아함경 권7 「分別聖諦經」( 大正藏1, pp.468중-469하),
“諸賢, 過去時是苦聖諦, 未來現在時是苦聖諦. 眞諦不虛, 不離於如, 亦非顚倒. 眞諦審實合如是諦. 聖所有․聖所知․聖所見․聖所了․聖所得․聖所等正覺. 是故說苦聖諦.”
이 경문 전반부는 苦 등의 4성제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진리성임을 설한 것으로, 연기법의 법계상주를 설한 잡아함경 권제12 제296경( 大正藏2, p.84중)의 경문과 동일한 구조이다.
잡아함경 권 제16 제417경( 大正藏2, p.110하)에도 동일한 경문이 설해진다.
“世尊說苦聖諦, -如如․不離如․不異如․眞實審諦不顚倒. 是聖所諦, 是名苦聖諦.”
"만약 선남자로서 올바른 믿음으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이라면, 그들은 마땅히 4성제법을 알아야 한다.-(중략)-3結을 끊고 須陀洹果(예류과)를 획득하였다면, 그들은 마땅히 4성제를 알았기 때문이다.-(중략)-3결을 끊고 탐욕과 진에와 우치가 희박하게 되어 斯陀含果(일래과)을 획득하였다면, 그들은 모두 4성제를 참답게 알았기 때문이다.-(중략)-
5下分結을 끊어 生般涅槃하여 다시는 이 세간에 돌아오지 않는 阿那含果(불환과)를 획득하였다면, 그들은 모두 4성제를 알았기 때문이다.-(중략)-만약 일체 번뇌를 斷盡하고서 무루의 心解脫과 慧解脫의 見法을 획득하여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이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 이미 다하였다’고 自知作證하고 ‘더 이상 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이(즉 阿羅漢果)라면, 그들은 모두 4성제를 알았기 때문이다.-(중략)-만약 辟支佛의 도를 증득하였다면, 그들은 모두 4성제를 알았기 때문이다.-(중략)-
만약 無上等正覺을 증득하였다면, 그들은 모두 4성제를 알았기 때문이다.9)
9) 잡아함경 권15( 大正藏2, p.106상중).
"내가 그대들과 더불어 생사의 멀고 먼 길을 거쳤던 것은 4성제를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으니, 크나큰 괴로움의 나날은 길고도 길었도다.
만약 4성제를 관찰하여 존재(有)라는 크나큰 바다의 흐름에서 벗어난다면 생사의 영원함을 이미 제거하였으니, 더 이상 후생을 받지 않으리."10)
10) 잡아함경 권16 제403경( 大正藏2, p.108상).
"만약 해와 달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일체의 뭇 별들도 또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며, 밤과 낮 하루 한달 4계절과 일년 등의 구분도 없어 세상은 항상 어두움의 기나긴 밤과 어두움의 괴로움만이 있을 것이듯이,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여 4성제를 설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떠한 빛도 없어 항상 어두움의 기나긴 밤만이 계속되었을 것이다."11)
11) 잡아함경 권15 제395경 축약( 大正藏2, p.106하).
나아가 밀림 속에서 코끼리 발자국이 제일이듯이 일체 선법 중의 제일인 것도 4성제라고 하였으며,12) 불타를 네 가지 덕을 갖춘 大醫王에 비유하게 된 것도 4성제를 참답게 알았기 때문이다.13) 불타 자내증을 4성제와 관련시켜 설한 경이나 4성제를 極上으로 찬탄하는 경은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 묘사되는 4성제를 도외시하고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한 몇몇의 경증만을 통해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고 하는 것이.
12) 중아함경 권7 「象跡喩經」( 大正藏1, p.464중). “諸賢, 猶如諸畜之跡, 像跡爲第一. 所以者何? 彼像跡者最廣大故. 如是諸賢, 無量善法彼一切法, 皆四聖諦所攝, 來入四聖諦中. 謂四聖諦於一切法, 最爲第一.”
13) 잡아함경 권15 제389경( 大正藏2, p.105상중).
金東華박사는 諸 經律 상에서 4성제에 의해 성도하였다고 설한 것에 의문을 나타내면서 이같이 변명하고 있다.
"4제설은 최초의 설법인 8정도설을 道諦하에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인연과 3법인 사상도 모두 이 4제 하에 포섭되기 때문에 早期에 설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말하자면 이상의 모든 교리를 총망
라한 것이 4성제로서, 이것을 석존의 조기의 설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善巧한 說敎案이기 때문이다. 불타 교설의 전부를 총망라하기 위해 [후기에] 구상된 정교한 敎網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중략)-
이처럼 만약 4제설을 후기에 구상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4제설 중에 이미 연기의 원리나 이 원리상에서 斷案된 3법인 사상 및 8정도 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으니, 4성제의 이치를 알면 그것이 곧 정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14)
14) 金東華, 原始佛敎思想(보련각, 1988), pp.131-132에서 取義.
諸經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설해지는 4성제를 후기에 구상된 것이라고 하면서까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는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며, 그것으로부터 무아 空과 中道인 8정도가 비롯되었다는 전제에서 행해진 발언으로, 이러한 전제는 근대이후 일본의 불교학계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극치가 초기불교의 연기설을 相依 相關性으로 해석하여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의 두 句는 공간적(혹은 논리적) 시간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비판적으로 검토한 논문이 발표되었을 뿐더러15) 본 논문의 주제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기에 차후 별도의 논문을 기약한다.
15) 박경준, 「초기불교의 緣起相依說 재검토」( 한국불교학 제14집, 1989). 참고로 衆賢은順正理論권 제25( 大正藏29, pp.482상-483하)에서 이 두 句에 대한 경량부의 한계통인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와 그의 門人들, 대덕 邏摩, 世親, 그리고 아비달마논사 등 여러 견해를 등장시켜 그들 사이의 주장과 논란을 비판적으로 전하고 있는데(이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졸고, 「經主 世親과 上座 슈리라타」, 한국불교학 제46집,pp.67-73 참조),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연기를 相依性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없다. 도리어 상의성으로 해석하는 이를 空花論者, 불타교법을 파괴하는 논(壞法論)으로 비난하고 있다.
한편 이들은, 대개 “제법은 개별적인 것이든 전체적인 것이든 相依 相關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연기된 것은 유위로서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無我․無常․苦와 연기설은 다같이 불타의 근본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12연기의 근본취의는 실로 불타의 근본사상(즉 무아․무상․苦)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말한다.16) 더욱이 宇井伯壽는 불타의 근본사상인 무아․무상․苦를 통틀어 부를 만한 호칭이 없기 때문에 연기설이라는 말로 대신하여도 무방하다는 말까지 보태고 있다.17)
그러나 이는, 空은 연기의 이론적 귀결(연기-무자성-공)이라는 중론 의 논리를 차용한 것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거나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이다”고 하는 말은 초기불전 어디에도 없다. 무상과 무아는
다만 경험적 사실이지 추론을 통해 도출되는 이론적 귀결이 아니다.18)
16) 宇井伯壽, 「十二因緣の解釋」 印度哲學硏究第2(東京: 岩波書店, 1965), pp.327-328.; Cf. 김동화, 앞의 책, pp.92-94, “현상계 제법은 어째서 시간적으로 무상하게 존재하고 또 공간적으로는 무실체 즉 無我로 존재하는 것인가?-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의 원리에 의해서이다.-현상계의 제법은 원래 무상한 有爲 因緣․연기의 원리에 의해 현상된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무상하게 존재하고 공간적으로는 無我한 채로 존재하는 것이
다.”; 불교교재편찬위원회 편, 불교사상의 이해 제3장 「근본불교」(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1979), p.77, “연기의 원리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났거나 또는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하면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성립시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거나 없어질 때 존재 또한 변하거나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그리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한 것도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
17) 宇井伯壽, 앞의 책, p.328.
18) 이에 김동화박사는 “만약 석존이 이 현실계에 대한 개인적인 단순한 체험이라든가, 어떠한 直感으로 그러한 (무상과 무아의)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면, 그것은 한낱 독단에 불과할 것이다.-진리는 公道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의 원리이다”고하였다. 즉 현상계의 제법이 無常이고 無我인 이유는 연기의 이치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의 잡아함경 권1 제12경을 인용하고 있다.(앞의 책, pp.92-93):
“색은 무상하다. 諸色을 낳는 因도 緣도 역시 무상하다. 무상한 因과 무상한 緣에 의해 낳아진 諸色을 어찌 有常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이 비구여, 색은 무상하고, 수․상․행․식도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바로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것은 나(我)가 아니다.”( 大正藏2, p.2중) 참고로 이에 상응하는 상응부경전 (Ⅲ. 23-24)에서는 계속하여 “-괴롭고 무아인 因과 緣에 의해 낳아진 諸色을 어찌 즐겁고 我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문은 박사가 말한 것처럼 “제법은 因緣所生法 因緣生起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는 의미가 아니다. 因도 무상하고 緣도 무상하며, 그것에 의해 생겨난 현실의 온갖 존재도 당연히 무상하다는 뜻이다. 설혹 경설대로 “무상한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한다면, ‘인과 연이 무상하다’는 판단은 직접적 경험에 의한 것인가, 그것 또한 추론에 의한 것인가? 나아가 괴로움을 어찌 추론에 의한 이론적 귀결이라 하겠는가? 常一主宰하는 것이라 여기는 자아(ātman)가 색 등의 5온으로 해체(분별)될 수 있다는 사실만 승인된다면, “색 등은 무상하며, 거기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나의 것이 아니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로서 여기에는 어떠한 논증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카라마종족에게 행한 불타의 법문( 증지부경전 Ⅰ. 「대품(Mahāvagga)」65; 중아함경 권3 「伽藍經」)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불타께서 케사풋타라고 하는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카라마종족들이 와서 물었다.: “수많은 사문과 바라문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각기 자신들의 주장이 진실이고, 다른 이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우기는데,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불타는 말하였다.: “소문이나 전통에 이끌려서도 안되고, 권위에 현혹되어서도 안되며, 다만 논리나 추리에 따라서도 안 된다. 이성적으로 탐구된 것이어서, 그럴 듯해 보이기 때문에 믿어서도 안 된다. 나아가 세간의 존경을 받는 스승의 주장이기 때문에 믿어서도 안 된다.”(取意) 나라다 마하테라(Nārada Mahāthera)는 단언하였다. “불교의 근본은 4성제이며, 그것은 경험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앞의 책, p.82)
나아가 이들은, 이러한 연기설은 苦樂 有無의 中道說과 결부되어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설은 당시 일반 사상계와는 전혀 다른 불타의 독자적인 근본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같이 애써 4성제를 무시하며, 불타 깨달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근본불교(초기불교가 아니라)의 시종일관하는 중심사상으로 연기법을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한 이유를 다음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근본불교 뿐만 아니라 후세 정통불교는 모두 이러한 연기설에 근거한 것으로, 반야경 과 龍樹佛敎의 一切皆空說은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天台 華嚴의 설에서도, 나아가 일본불교에서도 진실
의 實大乘은 이 설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19)
19) 宇井伯壽, 앞의 책, p.330.
이 같은 해석은, 사실상 불교학의 실증적 연구가 이루어짐으로써 ‘大乘 非佛說’이 본격적으로 제기됨에 따라 대승의 연원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을 부파불교 중의 진보적 성향의 부파, 나아가 초기불교에서 찾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혹은 종래 敎相判釋에서 小乘敎 혹은 阿含時로 일컬어지든 것이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로 나누어짐에 따라 초기불교 연구자는 그것의 발전된 형태인, 혹은 대승으로부터 타기의 대상이 되었던 부파불교(아비달마불교)와는 다른 그 자체만의 정체성을 추구하게 되었고,20) 그것을 특히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전통에 빛났든 대승불교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21)
20) 이 같은 생각을 더욱 밀고 나가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근본불교’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일본의 아네자키 마사하루(姉崎正治)는 그의 근본불교 에서 반야경 의 空觀은 원시불교에서의 수보리의 공관을 계승한 것이고, 법화경 의 諸法實相과 開示悟入의 사상은 근본불교의 法사상 또는 석존의 인격에 연유하였으며, 아미타불이나 미륵신앙은 석존의 인격과 법사상 또는 生天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朴京俊, 「大乘經典觀 定立을 위한 試論」, 한국불교학 제21집, p.169)
21) 이에 대해서는 졸고, 「소승불교 一考」( 철학논총 제31집, 2003, p.196).; 아비달마불교(민족사, 2003), pp.341-342를 참조할 것.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연기법을 불타 자내증으로, 相依 相關性으로 해석함에 따라 마침내 “초기(근본)불교는 대승불교와 그 근본에 있어 차이가 없다”거나, “대승불교는 원시불교의 이론적 귀결”이라고 말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무시한 특정의 교파 혹은 특정지역의 불교를 중심으로 한 宗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三枝充悳의 거두절미의 한마디는 폐부를 찌른다. “ 아함경 의 연기설에는 원래부터 相依의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고, 후대 龍樹( 중론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견고하게 구축되었다.”22)
22) 中村元 三枝充悳, 바웃드하 불교 , 혜원 역(김영사, 1991), p.144.
Ⅲ. 불타 자내증으로서의 4성제
앞서 언급하였듯이 4諦는 성자들의 진리이기 때문에 聖諦이다. 괴로움이 어째서 진리인가? 그것은 세계의 실상이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원인도 그것의 치유도 치유방법도 알지 못하듯이,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의 원인도, 그것의 소멸도, 소멸방법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자가 괴로움이라고 여기는 것을 세간에서는 즐거움이라고 여기며, 세간에서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을 성자는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23)
23) 잡아함경 권13 제308경( 大正藏2, p.88하).; 구사론 권22( 大正藏29, p.114상; 졸역,p.995).
불타의 성도는 진리(明,vidyā)를 깨달아 괴로움을 초래하는 일체의 원인(번뇌)을 멸하고 열반을 증득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날 진리의 광명이 비친 밤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아마도 그
날의 일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南傳 中部經典에 실려있는 마하삿차카경(Mahāsaccaka suttanta) 일 것인데, 이를 간략히 정리하여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극심한 고행 끝에 우유 죽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 그는 초선 2선 3선 4선을 성취하였다. 이제 그의 마음은 모든 사물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잘 닦인 거울과 같았다. 이와 같이 고요하고 밝게 정화되고, 온
갖 번뇌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전생을 알고자 하였다.
그는 지나간 수많은 생애를 기억하였다. 1생, 2생, 3생-50생, 백 생,천 생, 백 천 생, 나아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생성과 파괴를 거치면서 그 때의 이름과 족성과 종족, 먹었던 음식, 그 때 경험하였던 즐거움과 괴로움과 죽음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 이곳에 태어나 이와 같이 전생의 여러 모습을 자세하게 기억하였다. 이것이 그 날 초저녁 밤에 획득한 첫 번째 앎(즉 宿住隨念智證明, 혹은 宿住智證明)이니, 이로 인해 無明이 멸하고 明이 생겨났으며, 어두움이 멸하고 빛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그는 이와 같이 고요하고 밝게 정화되고,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유정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알고자 하였다. 그는 청정하고도 초월적인 天眼으로써 유정들의 생사를 관찰하여
천함과 고귀함,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이 모두 업에 의한 것임을알았다.
즉 身․口․意의 악행과 성자에 대한 비방과 邪見과 사견에 따른 업으로 인해 죽은 후 惡趣나 지옥에 태어나며, 신․구․의의 선행과 성자에 대해 비방하지 않음과 正見과 정견에 따른 업으로 인해 죽은 후 善趣나 천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그 날 밤 한밤중에 획득한 두 번째 앎(즉 死生智證明, 혹은 天眼智證明)이니, 이로 인해 無明이 멸하고 明이 생겨났으며, 어두움이 멸하고 빛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그는 이와 같이 고요하고 밝게 정화되고,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확고부동한 마음으로 번뇌가 다하였음을 알고자 하였다. 그는 “이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며, 괴로움의 소멸이며, 괴로움을 소
멸하는 길”임을 참답게 알았으며, “이것은 번뇌이며, 번뇌의 원인이며, 번뇌의 소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임을 참답게 알았다. 이와 같이 알고 관찰함에 그의 마음은 欲漏와 有漏와 無明漏로부터 해탈하였고,24) 이미 해탈하였기에 解脫智가 생겨났으며,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 이미 다하였으며,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그 날 밤 새벽에 획득한 세 번째 앎(즉 漏盡智證明)이니, 이로 인해 無明이 멸하고 明이 생겨났으며, 어두움이 멸하고 빛이 생겨나게 되었다."25)
24) 유부의 해석에 따르면, 欲漏와 有漏(무루에 대응하는 ‘유루’와 명칭은 동일하지만 뜻이 다르다)는 각기 무명을 제외한 욕계의 번뇌와 上2계의 번뇌, 無明漏는 3계의 무명으로, 온갖 번뇌 가운데 오로지 무명만을 하나의 ‘누’로 독립시킨 것은 그 자체만으로 능히 3有를 초래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졸저, 아비달마불교 , 민족사, 2003, pp.208-209; 구사론 권20, 大正藏29, p.107하; 졸역, pp.936-7)
25) M.N. I. 36(남전 중부경전1, pp.431-434; 전재성 역, 맛지마니까야 제2권, pp.131-134)발췌.
互照錄에 의하면 아함에는 상응하는 경이 없지만, 사분율 受戒犍度 편( 大正藏22, p.781) 상의 佛傳은 이와 정확하게 일치하며,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권5( 大正藏24, p.124상중)의 그것은 대체로 일치한다. 그리고 4禪과 3明에 한정시킬 경우, 증일아함경 「增上品」제1경( 大正藏1, p.666)과 「等見品」제5경( 大正藏2,
pp.696하-697상)의 경문도 거의 일치한다. 참고로 사분율 에서는 이 기사 후 7일간의 법락을 즐긴 후 두 명의 상인으로부터 밀초(蜜麨,꿀에 갠 보리죽)를 공양 받았다고 전하지만, 오분율 ( 大正藏22, p.102하)에서는 “청정한 마음으로 3명을 통찰하였으니, 瑞應本起經중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하고서, 그 후 자리를 우루빌라 마을로 옮겨 12연기를 順逆으로 관하였다는 기사를 전하는데, 남전 율장 대품 에서는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4諦를 如實知見함으로써 일체의 번뇌를 다하여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를 漏盡智(āsrava-kṣaya-jñāna)라고 하는데, 그것이 불타의 10力 중의 하나일 때는 漏盡智力으로 불리지만, 6通이나 3明 중의 하나로 열거될 때는 漏盡智證通(혹은 漏盡通), 漏盡智證明(혹은 漏盡明)으로 불리는데,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6통 중 宿住智證通․天眼(혹은 死生)智證通․漏盡智證通은 각기 과거․미래․현재의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것으로서 다른 신통에 비해 특히 뛰어나기 때문에 아라한의 그것을 3명(vidyā)이라 하였다.26)
그리고 이 중에서 누진명만이 진실로 無學(아라한)法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다만 무학의 所依身 상에 일어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有學의 성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愚癡가 남아있기 때문에 ‘明’이라 하지 않고 ‘通’이라고 말할 뿐이다.27)
26) 구사론 권27( 大正藏29, p.143중; 졸역, p.1253).; 졸저, 아비달마불교 , p.288 참조.
27) 구사론 권27( 大正藏29, p.143중하).
불타를 비롯한 네 果位의 성자는 각기 그에 상응하는 번뇌를 斷盡하여 열반을 성취한 이로서,28) 경전 상에서는 항상 번뇌(혹은 魔)의 단진과 더불어 언급된다. 예컨대 預流果는 有身見․戒禁取見․疑의 3結을 끊은 성자이고, 一來果는 이러한 3결을 끊고 탐욕과 진에와 우치가 엷어진 성자이며, 不還果는 5下分結(유신견․계금취․疑․욕탐․진에)을 끊은 성자이고, 아라한과는 일체의 번뇌를 끊은 성자(불타 역시 아라한 즉 應供임)로서, 항상 4성제 8정도와 결부되어 설해지고 있다.29) 혹 어떤 경우 5온을 無常․苦․空․無我라고 精勤 사유할 때, 예류과를 획득하고 나아가 아라한과를 획득한다고 하지만,30) 이 때 무상 등은 有部에 의하는한 苦諦(현실)의 구체적 行相이다.
28) Cf. 잡아함경 권18 제126경( 大正藏2, p.126중), “云何爲涅槃? 舍利弗答言, ‘涅槃者, 貪欲永盡․瞋恚永盡․愚癡永盡․一切諸煩惱永盡. 是名涅槃.’”
29) 주9) 참조.; 잡아함경 권18 제490경( 大正藏2, pp.126상-128상).
30) 이를테면 잡아함경 권10 제259경( 大正藏2, p.65).; 동경 권1 제1경-제10경( 大正藏2, pp.1-2)에서는 5온에 대한 正知見(즉 무상, 혹은 무아)을 통해 아라한과(심해탈 혹은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不受後有’에 대한 眞實智)를 얻는다고 설하고 있다.
아함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연기법을 관하여 번뇌를 끊거나 성자의 과위를 획득한다고 설하는 일이 없다.(우리는 이러한 이유에서도 초기불교 교학상에서 ‘연기법’의 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아비달마논사들은 4성제에 대한 즉각적인 통찰인 現觀(abhisamaya)의 과정을 수행도의 핵심으로 이해하여 통찰에 이르는 예비적 단계(資糧位)․준비단계(加行位)․見道位․修道位․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無學位라는 5位의 체계를 세우게 되었으며(이러한 체계는 이후 불교 수행론의 골격이 된다), 중기 아비달마인 法勝의 阿毘曇心論부터는 아예 논의의 골격 자체를 4성제의 형식으로 구성하였다.31)
31) 예컨대 유부 아비달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구사론 은 아비담심론 에 따라 제1 「界品」과 제2 「根品」에서 제법의 본질과 작용을 밝힌 다음, 제3 「世間品」과 제4 「業品」 제5 「隨眠品」에서 苦諦의 실상과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업과 번뇌(集諦)를 밝히고, 다시 제6 「賢聖品」과 제7 「智品」 제8 「定品」에서 苦滅諦의 열반과,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지혜와 선정(道諦)에 대해 논설하고 있는 것이다. 제9 「破我品」은 부록이다.
이러한 수행체계는 본질적으로 불타가 초전법륜에서 설한 4성제의 3轉 12行에 근거한 것으로, 제1轉을 견도위에, 제2전을 수도위에, 제3전을 무학위에 배당하였던 것이다. 이 또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는 苦聖諦이다’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해 눈(眼)을 떴고, 지혜(智)와 광명(明)이 일어났고, 앎(覺)이 생겨났고, ‘이는 苦集聖諦이다’ ‘이는 苦滅聖諦이다’ ‘이는 苦滅道聖諦이다’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해 눈을 떴고, 지혜와 광명이 일어났고, 앎이 생겨났다.
나는 ‘고성제에 대해 두루 알아야 한다’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해 눈을 떴고, 지혜와 광명이 일어났고, 앎이 생겨났으며, ‘고집성제는 마땅히 끊어야 하고, 고멸성제는 마땅히 증득해야 하며, 고멸도성제는 마
땅히 닦아야 한다’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해 눈을 떴고, 지혜와 광명이 일어났고, 앎이 생겨났다.
나는 ‘고성제에 대해 이미 두루 알았다’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해 눈을 떴고, 지혜와 광명이 일어났고, 앎이 생겨났으며, ‘고집성제를 이미 끊었고, 고멸성제를 이미 증득하였으며, 고멸도성제를 이미 닦았다’
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해 눈을 떴고, 지혜와 광명이 일어났고, 앎이 생겨났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러한 4성제를 세 번의 열두 가지 형태로 관찰하지 않아 눈을 뜨지 못하고, 지혜와 광명이 일어나지 않았고, 앎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끝내 법을 듣는 諸天 내지 사문 바라문의 무리 중에서 해탈하
지도 出離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며, 아뇩다라삼막삼보리도 증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미 4성제를 세 번의 열두 가지 형태로 관찰하였기때문에 스스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게 되었던 것이다."32)
32) 잡아함경 권15 제379경( 大正藏2, pp.103하-104상). 義淨역 佛說轉法輪經( 大正藏2, p.504); 증일아함경 권14 제5경( 大正藏2, p.618이하); 사분율 권32( 大正藏22 pp.787하-788중); 오분율 권15( 大正藏22, p.104중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권6( 大正藏24, pp.127상-128하); S.N. Ⅴ.421(남전 상응부경전 6, p.339); 율장 대품 I. 1.7(최봉수 역, 앞의 책, pp.59-64) 등에도 대체로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실려있다.
다만 율장에서는 범천의 勸請과 더불어 고행과 쾌락의 극단을 버리고 8정도라는 중도를 원만히 깨달아 眼․智․明․覺이 생겨났다는 이야기와 4성제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더하고 있으며, 또한 남전에서는 4제 각각을 세 단계로 관찰[3轉]하였다고 전하고 있는 반면, 북전에서는 4제를 전체적으로 세 단계로 관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후 설해지는 4諦 법문은 어떠한 경우라도 이 같은 형식에 준하여 설해진다. 즉 “4성제가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고성제․고집성제․고멸성제․고멸도성제가 바로 그것이다.”거나, “고성제를 마땅
히 알고[當知], 집성제를 마땅히 끊고[當斷], 멸성제를 마땅히 작증[當證]하고, 도성제를 마땅히 수습[當修]하라.” 혹은 “고성제를 이미 알았고[已知], 집성제를 이미 끊었고[已斷], 멸성제를 이미 작증[已證]하였고, 도성제를 이미 수습[已修]하였다면, 이러한 이를 아라한이라고 한다.”는 형식으로 설해지는데, 이러한 3轉은 각기 개별적으로 설해지기도 하고, 혹은 각기 두 가지씩 조합되어 설해지기도 한다.33)
33) 예컨대 잡아함경 권15 ( 大正藏2, p.104) 제380-1경에서는 제1轉만이 설해지고, 제382경에는 제1전과 제2전이, 제383-6경에서는 제1전과 제3전이 설해지고 있다.
漏盡智(혹은 盡智)란 바로 제3轉의 ‘고성제를 이미 알았고-도성제를 이미 수습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로, 불타께서 菩提樹下 金剛寶座에서 金剛喩定을 통해 깨달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으며, 이 때(四階 成道
說 중 제4 단계) 비로소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였다는 것이 근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였다.
나아가 4성제를 세 단계에 걸쳐 관찰함으로써 일체의 번뇌가 끊어져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고 한다면, 일체의 번뇌는 결국 4성제에 대해 미혹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일체의 번뇌는 무엇이고, 어떠한 인연에서 일어나 생을 유전 상속시키며, 3전 12행의 각각의 단계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였기에 제 번뇌가 끊어진다는 것인가? 또한 제 번뇌가 끊어질 때, 어떠한 번뇌가 어떻게 끊어진다는 것인가? 불타입멸 이후의 불교에서는 이에 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이에 따라 說一切有部에서는 일체의 번뇌를 4성제에 대한 미혹과 연관시켜 정리한 대단히 정연한 조직의 번뇌론과, 見道․修道․無學道라는 방대한 수행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Ⅳ. 4성제와 12연기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고 주장할 경우, 4성제에 의해 무상등정각을 성취하였다고 하는 초전법륜경 의 기사는 대단히 성가신 문제일 수밖에 없다. 또한 연기법을 깨달았다면 왜 초전법륜에서 4성제를 설하였을 것인가? 불타의 팔만 사천 법문 중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만은, 그렇더라도 그의 첫 번째 법문인 초전법륜경 과 마지막 법문집인 대반열반경 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4) 이에 대해서는 네 가지 모색이 가능할 것이다.
34) 대반열반경 에는 5종의 異本이 있지만, 여기서도 연기를 설한 일은 없다. 그러나 4성제의 경우 바이샬리에서 암바팔리(Ambapāli)에게, 파바에서 푸꾸사(Pukksa, 弗迦娑 혹은 福貴 등으로 한역)에게 설하고 있으며, 菴婆羅村에서 “戒와 定을 닦아 慧를 얻고, 혜를 닦아 欲漏와 有漏와 無明漏를 다하여 마음의 해탈을 얻고 解脫智가 생겨 생사를 다하게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데( 장아함경 권3 「遊行經」, 大正藏1, p.17중), 이는 漏盡智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로서, 이 때 혜는 당연히 4제에 대한 통찰의 지혜이다. 또한 저 유명한 ‘법에 의지하라’는 최후의 遺敎에서의 ‘법’ 또한 어떠한 판본에서도 ‘연기법’이라고 설한 일이 없다. 南傳 대반열반경 (남전 장부경전16, p.95)과 同名의 法顯 역( 大正藏1, p.193상)에서는 4念處․4正勤․4神足․5根․5力․7覺支․8正道의 37菩提分法을 법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失譯의 般泥洹經( 大正藏1, p.181중하)에서는 여기에 4禪을 더하여 이 모두에 대해 다시 해설하고 있으며, 遊行經( 大正藏1, p.15중)에서는 37보리분법에 다시 貫經(즉 계경) 등의 12分敎를 설하고 있으며, 白法祖 역의 佛般泥洹經( 大正藏1, p.165하)에서는 법으로서 다만 經과
戒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보리분법이란 말 그대로 깨달음[菩提, 覺]에 수순하여 그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 혹은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법으로, 유부에 의하는 한 이때 ‘깨달음’ 역시 盡智와 無生智이다.( 구사론 권25, 大正藏29, p.132중; 졸역, p.1152) 諸經에서 설해진 善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왜 37가지인가? 毘婆沙師에 의하면, 그것들은 모두 4제에 대한 통찰의 공능이 강성하고 예리한 것이다.( 순정리론 권 71, 大正藏29, pp.728하-729하; 대비바사론 권96, 大正藏27, p.498중하)
첫째는 모색할 것도 없이 4성제의 3轉을 통해 무상등정각을 성취하였기 때문으로, 이는 아비달마불교시대의 전통적인 이해였다.
둘째는 4성제를 방편설로서 그 가치를 격하시키는 것이다. 즉 연기법은 너무나 심오하여 알기 어렵기(甚深難見) 때문에 방편으로 4성제를 설 하였다는 것으로, 이는 일반적인 오늘의 우리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35)
그렇다면 훗날 수없이 설해지는 연기법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더구나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근기가 대단히 성숙한 이들로서, 초전법륜에서 이미 모든 번뇌를 끊고 청정한 法眼을 얻은 이들이 아닌가?
셋째는 초전법륜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불타께서 4성제를 통찰하여 정각을 성취하였다면, ‘고성제에 대해 이미 알았고-도성제를 이미 닦았다’는 세 번째 단계의 네 行相만을 설했어야 하였을 뿐더러, 4성
제는 불타의 모든 사상을 포괄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 說示 교화하기 위해 후에 조직되었다는 것이다.36)
넷째는 연기와 4성제는 설한 형태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관점이다. 이를테면 “ 장아함경 권1 「大本經」(長部 제14경), 중아함경 권7 「象跡喩經」(中部 제28경)이나 「大拘絺羅經」(增支部 IX 제13경), 잡아함경 권12 제287경(일명 城邑經, 相應部 因緣相應 제65경) 등 몇몇 경에서 양자를 동일한 가치로 설하고 있으며; 4성제는 果因眞實(phalahetutattvam)로 불리지만 연기 역시 老死와 그 滅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이
므로 역시 果因眞實이라 말할 수 있으며; 고․집제는 12연기의 流轉門을 나타내고, 멸․도제는 還滅門을 나타낸다”는 것이다.37)
35) 水野弘元, 原始佛敎(東京: 平樂寺書店, 1976), pp.176-177.
36) 김동화, 원시불교사상 , p.160.; 주14)의 본문 참조.
37) 川田熊太郞, 「般若と佛敎の根本眞理」(宮本正尊 編, 佛敎の根本眞理, 東京: 三省堂,1957), pp.142-143. 그러나 ‘동일하다’고 하는 논리는 언제나 약자의 논리이다. 조선시대 儒佛이 본질로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은 언제나 불교 쪽이었다.(박제현, 「간화선을 위한 변명」, 불교평론 , 2004년 겨울호, p.57)
그렇다면 굳이 초전법륜에서 4성제를 설한 이유는 무엇인가? 12연기를 설하여 4성제를 나타낼 수도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川田熊太郞은 양자는 내용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존재양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般若と佛敎の根本眞理」라는 논문에서 다같이 불타 자내증으로 설해지고 있으면서도 4성제가 초전법륜이 된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회통시켜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는 4성제를 聲聞과 결부시켜 경멸하게 된 것은 대승의 흥기라는 역사적 사정에 근거하여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묘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연기와 4성제는 내용상으로는 동일하지만, 존재양상이 다르다. 즉 연기가 證得(adhigama)된 법이라면 4성제는 說敎(desanā)된 법이다. 그리고 증득된 법은 사람들에게 설교되지 않을 수 있는데, 獨覺이 바로 그러
한 명백한 경우이다. 그러나 증득된 법이 勸請 즉 자기 내의 사회성과 悲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되어질 때, 이러한 설교자가 正等覺者이다. 따라서 정등각자에게 있어서는 증득된 법이 先이며, 설교된 법은
後이지만, 그것을 듣는 자에게 있어서는 설교된 법이 先이고, 증득된 법은 後이다."38)
38) 川田熊太郞, 앞의 논문, p.145.
그런 까닭에 양자는 동시에 설해지기도 하는 것으로, 이 같은 형태로 가장 잘 정리되어 전해진 것이 율장 대품 제1 誦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다분히 대승의 二諦說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緣起를 대․소승을 가로질러 구체적으로 ‘中道-空性-因施設(즉 세속)-마음의 근본법칙으로서의 진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해한 4성제는 다만 世俗諦 즉 언어적 가설로서의 진리였다.39)
39) 졸고, 「緣起法이 불타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보조사상 제27집) 주50) 참조.
그렇다. 불타 깨달음이 4성제인가, 연기법인가?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불타의 제 교법에 대한 本末 先後의 문제이다. 초기불교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체계인 아비달마불교에서는 4성제가 근본이었고 우선하는 것이었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연기가 근본이었고 우선하는 것이었다.40)
(물론 이때 연기 또한 12인연의 業感緣起가 아니라 彼此의 能所 受用緣起였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소승불교라 일컬어진 아비달마불교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갖는 우리의 연기에 대한 이해방식은 항상 후자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단초를 제공한 이는 근대이후의 일본의 불교학자들이었다.41)
40) 中村元 三枝充悳, 앞의 책, p.145 참조.
41) 그러나 만약 초기불교에서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법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상의상대성이라면, 굳이 대승경전을 따로이 결집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승의 연기관은 대승경전에 근거한 것이며, 그것은 ‘불타’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초기불교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4성제의 苦․集諦는 12연기의 流轉門을 나타내고, 滅․道 諦는 還滅門을 나타낸다고 하여 양자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항상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는 전제 하에서였다.
그렇다면 그 逆도 가능하지 않은가? 이제 이에 대해 논의해 보자.
川田熊太郞이 언급하였듯이 다수의 경에서 4성제와 12연기를 병렬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양자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른바 城邑經으로 일컬어지는 잡아함경 권12 제287경이다. 이 경은 크게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부처님께서 숙세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을 때 老死가 존재하고 생겨나는 원인을 추구하여 그것이 궁극적으로 識에서 비롯된 것임을 참답게 알아 이른바 齊識緣起(10支)의 流轉을 설하고
있으며, 두 번째 단락에서는 어느 때 노사가 존재하지 않고 멸하는 원인을 추구하여 그것은 궁극적으로 無明이 존재하지 않고 멸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임을 참답게 알아 無明緣起(12支)의 還滅을 설하고 있다.42)
42) 그러나 남전 상응부경전 (S.N. Ⅱ.104)에서는 두 번째 단락에서도 10支 제식연기의 환멸에 대해 설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에서 어떤 사람이 거친 광야를 헤매다 옛 길을 찾아 마침내 청정하고 아름다운 옛 城邑을 찾아내어 왕에게 고한 것처럼, 불타 역시 옛 仙人이 갔던 길 즉 8정도를 쫓아 마침내 老病死 내지 行과 그것의 集과 滅과 滅道跡을 통찰하여 等正覺을 성취하였고, 그것을 비구 등의 4衆에게 설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43)
43) ( 大正藏2, pp.80중-81상). “我從彼道, 見老病死․老病死集․老病死滅․老病死道跡; 見生有取愛受觸六入處名色識行․行集․行滅․行滅道跡. 我於此法自知自覺, 成等正覺.”
즉 이 경에서는 무명을 제외한 行 등의 支分을 모두 고․집․멸․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양자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라기보다 4성제가 무량의 선법을 포함하기 때문이며, 12연기에 우선하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째서 제외된 것인가? 중아함경 권7 「大拘絺羅經」에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무명을 제외하고 있다. 즉 다른 11支에 대해서는 “각각의 支分(苦)과 그것의 集과 滅과 滅道에 대해 참답게 알면 그 비구는 正見을 획득하고 法에 대한 不壞淨을 획득한다”고 하면서, 그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하게 설하면서도 무명에 대해서는 설하고 있지 않다.44) 그 이유는 무엇인가?
44) ( 大正藏1, pp.462상-464중).
그것은 일차적으로 무명의 集(원인)을 설할 경우 무한소급에 빠져 끝없는 논의를 산출해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지만,45) 바로 그 같은 諸行(行 내지 老死)과 그것의 集과 滅과 滅道를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성제를 아는 것이 바로 明이기 때문에 무명의 고․집․멸․도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45) 불타는 12연기를 설하면서 무명의 원인과 노사의 결과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하였지만, 그러나 무명에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사에 시작이 있다고 해야하며, 노사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사에 끝이 있다고 해야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有部에서는 12연기를 惑(,kleśa, 무명․애․취)과 業(karma, 行․有), 그리고 事 (vastu) 즉 현실의 苦果(識 내지 受․생․노사)의 순환관계로 이해하여 三世兩重의 인과론으로 설하였던 것이지만, 경량부에서는 경설에 따라 非理作意를 무명의 원인으로 이해하였다.(이에 대해서는 구사론 권9, 大正藏29, p.49중하; 졸역, pp.436-440을 참조 할 것)
앞의 두 경에 의하면, 제식연기는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을 때에도 사유하였지만, 무명연기의 還滅을 正思惟하는 것은 일체의 무명을 끊고 등정각을 성취한 이후로서, 그 때는 이미 4성제에 대한 정견을 획득하고 法의 不壞淨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46)
46) 不壞淨(혹은 證淨)은 불․법․승 3보와 戒에 대한 무루의 청정한 믿음으로, 有部에 의하면 4제 각각을 관찰할 때 바야흐로 법의 불괴정을 증득한다.( 구사론 권25, 大正藏29, p.133; 졸역, p.1162)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는 노사가 있으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는 노사가 멸한다”고 할 때, 무명이란 무엇인가? “연기의 도리를 깊이 관찰한 고타마는 生死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진리에 대한 無知에서 발생한 것임을 발견하고-무명을 멸함으로써 無苦安穩의 열반을 증득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면,47);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아 如來等正覺者가 되었고, 이 때 진리란 연기법이다”고 한다면, 무명은 마땅히 이러한 연기법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경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연기법에 대한 무지를 무명이라고 말하는 일이 없다. 대개 과거․미래․현재의 三際나 4성제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苦에 대해 알지 못하고, 苦集에 대해 알지 못하며, 苦滅에 대해 알지 못하고, 苦滅道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48)
48) S.N.Ⅱ.2(전재성 역, 제2권, p.32).; 증일아함경 권46( 大正藏2, p.797중).
“云何名爲無明? 所謂不知苦, 不知習, 不知滅, 不知道. 此名爲無明.”
이에 상응하는 잡아함경 권제12 제298경에서는 보다 廣說하여, “前際(과거)와 後際(미래)와 前後際(현재)를 알지 못하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과 내외적인 것을 알지 못하며, 業과 報와 業報를 알지 못하며, 佛․法․僧을 알지 못하며, 苦․集․滅․道를 알지 못하며, 원인과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며, 선과 불선, 有罪와 無罪를 알지 못하며,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 染汚한 것과 淸淨한 것의 分別과 緣起도 모두 알지 못하며, 6觸․入處에 대해서도 참답게 알지 못하는 것 등을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지만,49) 여기서 ‘연기’란 저열한 것(염오)과 수승한 것(청정)의 인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고․집의 유루와 멸․도의 무루를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49) ( 大正藏2, p.85상). “彼云何無明? 若不知前際, 不知後際, 不知前後際. 不知於內, 不知於外, 不知內外. 不知業, 不知報, 不知業報. 不知佛, 不知法, 不知僧. 不知苦, 不知集, 不知滅, 不知道. 不知因, 不知因所起法. 不知善不善, 有罪無罪, 習不習. 若劣若勝, 染汚淸淨, 分別緣起, 皆悉不知. 於六觸入處不如實覺知. 於彼彼不知不見. 無無間等, 癡闇無明大冥. 是名無明.” 법온족론 권9( 大正藏26, pp.494-495상)에서는 이를 더욱 廣說
하고 있는데, ‘연기’를 ‘緣生法’이라 설하고 있다.
초기경전에서의 연기란 궁극적으로 과거․현재․미래생의 존재방식을 밝혀 이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50) “연기법은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法界 常住하며-”라고 설한 문제의 잡아함경 권12 제296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50) 구사론 권9( 大正藏29, p.49상; 졸역, pp.433-4).
"多聞의 聖제자는 이러한 因緣法(즉 연기법)과 緣生法(즉 연이생법)을 바로 알고 바로 관찰하여 前際를 추구하여 ‘나는 과거세에 존재하였던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나는 과거세에 어떠한 종류였던가? 나는 과거세에 어떠하였던가?’라고 말하지 않으며, 後際를 추구하여 ‘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어떠한 종류일 것이며, 어떠할 것인가?’라고 말하지 않으며, ‘지금의 나(중생)는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지금 존재하게 된 것이며,-나는 어디서 왔으며, 죽은 후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의심하지도 않는다.”51)
51) ( 大正藏2, p.84중하).; 전재성 역, 쌍윳따 니까야 제2권, pp.111-2. 붓다고싸에 의하면, ‘존재하였던가, 존재하지 않았던가?’라고 한 것은 常住나 無因의 상태에 의존해서 과거에 내(자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의심하는 것이고, ‘어떠한 종류였던가?’라고 한 것은 신분과 종성에 의지하여 바라문 내지 수드라, 재가자나 출가자, 인간이나 신 중 어떤 자였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며, ‘어떠하였던가?’라고 한 것은 외모의 형태에 의존해서 컸는지 백인이었는지 흑인이었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다.(전재성 역, 앞의 책, 주97)
이에 따르면, 불타는 ‘과거․미래세에 나는 존재하였던가?(혹은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던가? 존재하였다면 어떠한 존재이고,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였던가?’에 대한 유정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12연기를 설하였다. 유정의 삶은 과거 생으로부터 현재 생으로, 현재 생에서 다시 미래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것은 영속적이고도 단일한 자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재신이나 혹은 無因無緣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번뇌와 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12연기설은 고․집성제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으로, 有部에 의하면 고성제가 결과적 상태로서의 緣已生法이라면 집성제는 원인적 상태로서의 緣起法이다.52) 즉 ‘緣無明行 乃至 純大苦聚(혹은 蘊)集(무명을
연하여 행이 일어나며, 내지 純大苦聚가 集起한다)’는 말은 아함의 상투적인 표현일뿐더러 증지부경전 제3의 61경(Titthaṃ)에는 구체적으로 12연기가 집성제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52) 졸고, 「緣起法이 불타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 보조사상 제27집), ‘유위연기와 무위연기’ 참조.
"“비구들이여, 고집성제란 무엇인가?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생을 연하여 노사․憂悲苦愁가 생겨나니,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純苦蘊의 集을 고집성제라고 한다.”53)
53) (남전17, p.268).
또한 구사론 에서는 고제와 집제의 體相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있다.
"4제 중에서 결과적 존재[果性]로서의 5취온을 일컬어 고제라고 하며, 원인적 존재[因性]로서의 5취온을 일컬어 집제라고 하니, [결과는] 이것이 능히 집기(集起)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제와 집제는 원인과
결과로서의 존재로, 비록 그 명칭은 다를지라도 존재 자체[物]에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54)
54) 구사론 권22( 大正藏29, p.114상; 졸역, p.995). “此[四諦]中, 果性取蘊, 名爲苦蘊. 因性取蘊, 名爲集諦, 是能集苦. 由此苦集因果性分, 名雖有殊, 非物有異.”
그러나 한편 ‘無明滅故行滅 내지 純大苦聚滅(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하며, 내지 순대고취가 멸한다)’이라는 환멸문이 멸성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를 ‘연기’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연기의 染汚分이 아니라 菩提(열반)의 淸淨分이기 때문으로, 마치 생사 괴로움의 멸은 괴로움이 아니라 열반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55)
55) 저 유명한 無常偈 즉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유부에 의하면, 멸제와 도제는 다같이 무루이지만, 멸제는 무위이고, 도제는 유위이기 때문에 체성이 다르다.( 구사론 , 앞의 책, “滅道二諦 物亦有殊.”)
4성제를 如實知見하지 못한 것이 바로 무명이라는 사실은 8정도 중의 正見에 대한 법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친구들이여, 무엇이 정견인가?
苦를 알고, 苦集을 알고, 苦滅을 알고, 苦滅道를 아는 것,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56)
56) 중부경전 제141경(Saccavibhaṅga suttanta)(남전11하, p.353). 이에 상응하는 중아함경 권7 「分別聖諦經」에서는 “聖제자가 苦를 고라고 생각(念)할 때나, 集을 집이라 생각하고, 滅을 멸이라 생각하고, 道를 도라고 생각할 때, 혹은 일찍이 지은 바를 관찰하거나, 혹은 諸行을 배우고 생각하거나, 혹은 제행의 災患을 관찰하거나, 혹은 열반 止息을 관찰하거나, 혹은 어떠한 집착도 없이 心解脫을 생각하여 관찰할 때, 이에 대해 簡擇하고, 두루 간택하고, 擇法을 決擇하고, 살피고[視] 두루 살펴 명확한 관찰에 이르는 것,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聖弟子, 念苦是苦時․習是習․滅是滅․念道是道時, 或觀本所作, 或學念諸行, 或見諸行災患, 或見涅槃止息, 或無着念觀善心解脫時, 於中擇․遍擇․決擇擇法, 視․遍視, 觀察明達, 是名正見.)”라고 하였지만, 결국은 4제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廣說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김동화 박사는 이에 대해서도 역시 “이 경에서 정견의 내용으로 4제를 설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으로는 물론 잘못이 아니지만, 석존 초기설법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서는 맞지 않는 일이다”고 말하고 있다.(앞의 책, pp.149-150)
이 같은 무명과 정견에 관한 경설로 보건대, 4성제를 다만 연기법에서 비롯된 ‘설교된 법’이라고 말하기 어려울뿐더러 방편설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도리어 4성제가 證得된 법이고, 연기법은 고․집제의 구체적 양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치가 이와 같음에도 어찌 연기법이 本이고 先이며, 4성제가 末이고 後라고 하겠는가?
Ⅴ. 연기의 甚深難知의 의미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연기법을 형용하는 ‘甚深難見’이나 ‘甚深難知’라는 修辭에 미련이 남아있다. “연기법은 심오하여 참으로 알기 어려운 법이다.” 이제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연기가 집제 즉 생사윤회의 원인과 과정을 밝힌 것이라면, 이 같은 생사윤회가 어떻게 일어났었고(前際), 어떻게 일어날 것이며(後際),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中際)를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의 주재자인 이슈바라(Īśvara)나 상주불변의 자아를 설정한다면 모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주재자의 뜻을 누가 알 것인가?
증일아함경 권46에서는, 세존께서 연기법의 法說과 義說을 설한 뒤 아난이 여기에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지 않다고 하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로써 因緣法의 심오함(甚深)을 설하고 있다.
"12인연은 너무나도 깊고도 깊어 일상의 인간들로서는 능히 깨달아 알수 없다. 인연법이 깊지 않다고 한 것은 비단 오늘의 너만이 아니었다. 옛날 須焰이라는 아수라의 왕이 있었는데, 저 바다 밖으로 나아가 해와 달을 붙잡고자 하여 몸을 변화시켜 바다로 들어가니 물이 허리에 찼다.
그것을 본 그의 아들 拘那羅도 바닷물에 들어가 함께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왕은 말하였다. “바다에 들어오려 하지 마라. 바닷물은 너무나 깊고도 깊어 너는 결코 목욕할 수 없다. 바다에 목욕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나뿐이다.” 그렇다. 그 때의 왕은 바로 나였고, 아들은 너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12인연의 깊고도 깊은 법을 그렇지 않다고 하는구나.
중생들이 12인연법을 알지 못하는 한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미혹하여 行의 근본을 알지 못하기에 전생에서 금생으로, 금생에서 후생으로 유전하며 다섯 번뇌 중에 영원히 머무니, 거기서 벗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도 처음 불도를 성취하였을 때 12인연을 사유하여 악마와 그 권속들의 항복을 받았으니, 무명을 제거하고 慧明을 획득함으로써 온갖 어두움이 영원히 사라지고 번뇌도 없어지게 된것이다. 또한 아난아, 나는 이러한 인연의 근본[緣本]을 세 번에 걸쳐 열두 번 설하였을 때 깨달음의 도를 성취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12인연법은 너무나 깊고도 깊어 보통사람으로서는 능히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57)
57) ( 大正藏2, pp.797하-798상).
“-其有衆生不解十二緣法, 流轉生死, 無有出期. 皆悉迷惑不識行本, 於今世至後世, 從後世至今世, 永在五惱之中, 求出甚難. 我初成佛道, 思惟十二因緣, 降伏魔官屬, 以除無明而得慧明, 諸闇永除, 無塵垢. 又我阿難, 三轉十二說此緣本時, 卽成覺道. 以此方便, 知十二因緣法極爲甚深, 非常人所能宣暢.”
여기서 인연법은 ‘行의 근본’ 즉 온갖 인연이 상속 유전함으로써 괴로움의 현실[苦果]을 드러내는 集諦임이 분명하다. 세 번에 걸쳐 12가지 타입(3轉 12行)으로 설한 것은 4성제이지 12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甚深’의 법은 理法으로서의 ‘연기’가 아니라 無始以來 이어져온 ‘번뇌와 업과 生의 순환’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아함경 권10 「大緣方便經」에서도 역시 阿難을 상대로 하여 12인연법의 甚深難解함에 대해 설하고 있는데,58) 불타는 이를 의심하는 아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누군가 老死의 緣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生이라고 답해야 하며, 내지 行의 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癡(무명)라고 답해야 할 것이니, 내가 설한 바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뻔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59) 병고와 늙음과 죽음과 그에 수반되는 근심 슬픔 고통 등이 生에서 비롯되었으며, 생은 업(有)에서, 업은 집착(取)에서, 나아가 무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현실너머 자아(ātman)나 자재신(Īśvara)과 같은 영원 불변하는 지복의 존재로써 구원을 추구하는 이나 無因論者(혹은 우연론자)에게는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58) ( 大正藏1, pp.60중-61중).
59) 甚深難知의 ‘심심’은 gambhīra의 譯語로, 투명한 호수나 강의 깊이를 말한다. 아마도 물이 너무나 맑아 투명한 호수는 그 밑바닥이 떠올라 얕게 보이는 것처럼 대저 심오한 진리의 이치도 그러하다는 뜻일 것이다.
불타는 말하고 있다.
"阿難아, 이러한 12인연은 참으로 관찰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온갖 天․마구니․범천․사문․바라문으로서 아직 [인]연에 대해 관찰하지 못한 자가 만약 그 뜻을 헤아리고 관찰 분별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모두 황당하고 미혹[荒迷]하여 능히 관찰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60)
60) 장아함경 권10 「大緣方便經」( 大正藏1, p.60중). 최봉수는 ‘온갖 天․마구니․범천․사문․바라문으로서 아직 [인]연에 대해 관찰하지 못한 자가’라는 문구를 도외시 하고서, “이 대목은 연기법의 不可思議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原始佛敎의 緣起思想 硏究, 경서원, 1991, p.73), 이것이 만약 不思議法
이라면, 이때 부사의는 당연히 4不思議 중 유정(중생)不思議라고 해야 한다. 참고로 부사의법에 의해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次註참조)
이러한 생사유전의 甚深과 관계하여 대비바사론 에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즉 婆沙에서는, 어떤 經에서 설하고 있는 “마가다국의 8만 4천의 신하들이 한꺼번에 죽었을 때, 그들의 권속이 찾아와 부처님께 그들이 장차 태어날 곳을 記別해주기를 청하자 방에 들어가 고요히 사유하였다”는 경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전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이같이 해석하였다.
"업과 그 과보(5趣의 삶)의 양상은 참으로 심오하고[甚深] 참으로 미세하여 관찰하기도 어렵고 깨달아 알기도 어렵다[難見難覺]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같이 말한 까닭은, 여래가 설한 일체의 경전 중에서 업과 그 과보의 차별상을 밝힌 業經(즉 율장)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12轉(즉 연기) 가운데 業(즉 ‘行’과 ‘有’)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부처의 10力 가운데 業力(즉 業異熟智力)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발지론 의 8蘊(품) 가운데 「業蘊」(즉 業品)만큼 심오한 것이 없으며, 4不思議 가운데 業不思議만큼 심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61)
61) 대비바사론 권113( 大正藏27, p.586중하).; 동 권41(동, pp.212중-213상).
4不思議란 증일아함경 권21( 大正藏2, p.657상)에 의하면 世界부사의․衆生부사의․龍부사의․佛土境界부사의로서, 婆沙에 설한 業부사의는 중생은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헤아리기 어렵다는 衆生부사의를 말한다. 그리고 증일아함경 에 따르면, 4부사의에 의해서는 번뇌멸진의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12인연이 (유정)부사의법이라고
한다면(前註참조), 그것을 觀하여서는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참고로 앞의 증일아함경 에서는 이러한 4부사의는 부처만이 아는 경계일 뿐, 비구들은 마땅히 4성제를 닦아 열반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물론 바사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신하들의 업의 인과와 상속 등을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 혹은 阿難으로 하여금 법을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혹은 어리석은 이들의 교만심을 끊게 하기 위해서라는 등의 여러 해석을 전하고 있지만, 12인연에 의한 生死의 輪轉은 그만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所與의 세계에 집착하여 거기에 종속된 이생 범부로서는 알 수 없으며, 오로지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62) 초기경전에서의 甚深難知(혹은 難見)라고 하는 말은 아마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12연기를 설하면서 ‘심심난지’라는 말을 사용할 때면 어김없이 ‘전생에서 금생으로, 금생에서 후생으로 유전한다(從此世至彼世, 從彼世至此世)’는 내용도 함께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3)
62) 前註 참조.
63) 중아함경 권24 「大因經」( 大正藏1, p.578중).
“阿難, 於此緣起, 不知如眞, 不見如實, 不覺不達故, 令彼衆生 如織機相鎖, 如蘊草多有稠亂 忽忽喧鬧, 從此世至彼世, 從彼世至此世, 往來不能出過生死. 阿難, 是故知此緣起極甚深明亦甚深.”;
또한 장아함경 권1 「大本經」( 大正藏1, pp.7중-8중)에서는 “보살(정각 이전의 호칭)이 ‘중생은 참으로 불쌍하다. 항상 어둠에 처해 있으면서 여기서 죽어 저기서 태어나며, 저기서 죽어 여기에 태어난다(死此生彼 從彼生此)’고 생각하고서 12인연을 순역으로 如實正知見하여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성취하였다”고 설한 후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十二緣甚深 難見難識知 唯佛能善覺 因是有是無.” 또한 “불타가 세간에 출현하던 출현하지 않던 이러한 연기법은 법계상주하는 것으로-”라고 설한 문제의 잡아함경 권12 제296경에서도 역시 생사의 輪轉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주51), 앞서 인용한 증일아함경 권46(주57)도 그러하였다.
따라서 연기법을 일체의 行業이 종식되고 모든 번뇌가 끊어진 열반에 비할 수는 없다. 12연기를 이같이 생의 순환과정이라 본다면, 그것이 비록 甚深難知의 법이라 할지라도 유위 세간법이지만, 열반은 무위의 출세간법이기 때문이다. 열반이란 바야흐로 연기의 세간에서 벗어난 것이다.64) 불타께서는 정각을 성취한 후 설법하기를 주저하였던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64) 대비바사론 권23( 大正藏27, 118상). “得涅槃方捨緣起.”
"내가 획득한 법은 甚深微妙하여 寂寞 無爲의 智者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것이지 어리석은 이에게 미칠 바가 아니다. 중생은 3계의 窟宅에 즐거이 집착하여 이러한 온갖 업들을 일으켰으니[集] 어찌 능히 12인연의 심심미묘한 難見의 법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일체의 行을 止息하여 온갖 [생의] 흐름을 끊고, 恩愛의 근원을 멸진한 무여열반은 더더욱 심오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니 만약 내가 법을 설한다면 헛되이 피곤하기만 할 뿐이고 괴로움만을 초래할 뿐이다.65)
65) 오분율 권15( 大正藏22, p.103하).
앞서 인용한 古邑經의 비유를 빌리자면, 생사의 유전은 거친 광야를 헤매는 것에 비유된다. 거친 광야를 헤매며 오로지 애타게 오아시스만을 찾는 저 가련한 중생에게 있어 자신이 어떻게 광야를 헤매게 되었는지, 조만간 어떠한 광야를 헤매게 될 것인지 하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 아니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눈앞의 것만을 탐할 뿐이다. 아함에서 12연기를 甚深難知라고 한 것은 이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잡아함경 권12 제293경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즉 불타가 어떤 비구에게 공(즉 무아)과 상응하는 12연기를 순역으로 설하자 그 비구에게 일찍이 생각하지 못하였던 생각으로 인해 오히려 疑惑과 猶豫가 존재하였을 뿐더러 마음에 근심과 장애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불타는 일체의 집착[取]에서 벗어나고 갈애가 다하였으며 욕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寂滅의 열반은 이른바 연기에 비해 몇 갑절이나 더 깊고 깊어서 관찰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유위와 무위가 바로 그것이다. 유위란 生․住․異․滅하는 것이지만, 무위는 不生․不住․不異․不滅하는 것으로, 비구여, 이것을 諸行의 괴로움이 적멸한 열반이라 한다.
즉 원인이 集起하였기 때문에 괴로움이 집기한 것으로, 원인이 멸하였기 때문에 괴로움이 멸한 것이다. 모든 逕路를 끊고 상속을 멸하며, 상속의 멸마저 멸하면 이것을 괴로움의 끝[苦邊]이라고 한다.66)
66) ( 大正藏2, p.83하).
“-所以者何? 此甚深處, 所謂緣起倍復甚深難見. 所謂一切取離, 愛盡無欲, 寂滅涅槃.
如此二法, 爲有爲無爲. 有爲者若生若住若異若滅. 無爲者不生不住不異不滅. 是名比丘諸行苦寂滅涅槃.
因集故苦集, 因滅故苦滅. 斷諸逕路, 滅於相續, 相續滅滅, 是名苦邊.” 이에 상응하는 남전은 없다.
行에 의해 造作된 것으로서, 생겨나고 멸하는 것은 유위이다. 大衆部의 경우처럼 유위인 12支分의 연기법을 드러내는 ‘緣起支性’이라는 존재를 별도로 설정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한 유위의 연기가 불타의 깨달음일 수 없다. 불타가 깨달은 것은 번뇌 斷盡의 열반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연기의 滅相마저 소멸한 것이다. 적어도 초기불교나 아비달마불교에 의하는 한, 열반은 최고의 가치이다. 그것은 진리인 동시에 실재이다.67)
67) 平川彰, 印度佛敎史상, 이호근 역(민족사, 1989), p.67.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다. 열반은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증득되는 것이라고. 도대체 어떤 진리를 어떻게 깨달아야 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인가? 연기를 깨달으면 어떤 번뇌가 어떻게 끊어진다는 것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中觀의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古邑經에서 비유한 4성제의 논리로 말하자면, 삼세에 걸쳐 거친 광야를 헤매는 것은 거친 광야를 헤맨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왜 헤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열반의 성을 모르기 때문에, 열반성으로 가는 지름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광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우리로 하여금 헤매게 하는 動因 즉 번뇌를 끊어야 하며, 열반의 성을 목적지로 삼아야 하며, 지름길을 통해 거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이미 알았고, 이미 끊었고, 이미 도달하였고, 이미 나아갔을 때, 그것에 미혹하여 생겨난 일체의 번뇌가 끊어지며, 이
와 아울러 일체의 번뇌가 다였음을 알 때, 다시 말해 “나는 생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이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 이미 다하였으며, 더 이상 후생을 받지 않는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受後有)”고 알 때, 완전한 열반이 구현되는 것이다.
4성제는 다만 ‘교설된 법’이 아니며, 방편설도 아니다. 이는 中觀의 논리일 뿐이다. 또한 연기와 동일한 법도 아니다. 4성제의 ‘聖’은 그저 붙여진 명칭이 아니다. 성도직후의 順逆에 걸친 12연기의 內觀은 다만 集 諦와 滅諦의 구체적인 내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68)
68) E. Lamotte, ibid., pp.16-17, During the Watches of the night, he won the threefold knowledge: the recollection of previous existences, the knowledge of the death and birth of beings-a knowledge which is also called the “divine eye”-and, finally, the certainty of having destroyed in himself the desires which are the basis of successive rebirths in the world of becoming. This conviction included the discovery of the mechanism of dependent origination(pratītyasamutpāda): Śākyamuni mentally examined in direct and reverse order the twelve causes(nidāna) which condition that origination, and he thus acquired the certainty of living his last existence.
연기의 순관인 집제의 내관을 통해 지나간 수 억겁의 생들을 다시 기억하였고(宿住智證明) 유정들의 미래생을 다시 알았으며(死生智證明), 역관인 멸제의 내관을 통해 번뇌 斷盡의 열반(漏盡智證明)을 확신하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 것인가? 3明은 前際와 後際와 中際에 대응하기 때문이며(주26), 초기경전 상에서 無明(avidyā)에 대응하는 明(vidyā)의 용례는 오로지 3明뿐이기 때문이며, 경에서 “이로 인해 無明이 멸하고 明이 생겨났으며, 어두움이 멸하고 빛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69) 나아가 저기서 죽어 여기에 태어나고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는 인연의 本末을 모두 알아 “나는 과거세에 존재하였던가, 존재하지 않았던가?-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등에 대해 안 것을 바로 宿住明과 死生明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70)
69) 주25).; 증일아함경 권23( 大正藏2, p.666중하). “梵志當知! 我初夜時, 而得初明, 除其無明, 無復闇冥-.”
70) 증일아함경 권23( 大正藏2, p.666중하); 같은 경 권26( 大正藏2, pp.696하-697상)에서는 앞서 주51)에서 물었던 三際 중 과거세와 미래세의 온갖 양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각기 初夜와 中夜에 宿住智證明과 死生智證明을 얻었다고 설하고 있다.
Ⅵ. 결 어
언제부터인가 “불교의 모든 이론은 오로지 ‘마음’ 두 글자에 담겨있다”느니, “불교의 핵심은 연기법이다”는 말이 횡행하고 있다. 나아가 “마음이 바로 연기법(法界 혹은 法性)이다”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발전하고 전개한, 기신론 을 토대로 한 性宗에서라면 충분히 그같이 말할 수 있으로되 그것을 2500년 전 불교에 관통시켜 말할 경우, 이는 폭력이며 파괴를 수반한다.
다른 한편 불타 자내증은 연기법이며, 12연기는 삼세에 걸친 윤회의 과정(원인과 결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논리적 조건과 귀결(상의 상관관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무아(공)의 이론적 근거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71) 이 역시 폭력이며 파괴를 수반한다. 눈 빠른 독자께서는 이미 간파하였겠지만, 필자는 앞에서 12연기를 윤회의 과정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상좌부나 유부 아비달마의 전통적 입장이었지만, 오늘날 이러한 삼세 양중의 인과설(특히 結生識說)은 지혜가 저열한 이에게 어려운 연기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로서 설한 것이라고 이해한다.72)
71) 宇井伯壽, 「十二因緣の解釋」 印度哲學硏究第2, pp.297-298 참조. 上野順瑛에 의하면, 이러한 입장은 본질적으로 人無我와 法無我(즉 一切皆空)를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앞의 책, p.111)
72) 水野弘元, 앞의 책, p.172.
그렇다면 앞서 인용한 수많은 경설은 무엇이고, 진리의 광명이 비친 그 날 밤 초저녁과 한 밤중에 일어난 宿住智證明과 死生智證明은 무엇이며, 나아가 4성제를 如實知見하여 증득하였다는 漏盡明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이 모두는 현대 문헌비판 내지 근대 합리성의 철학을 빙자하여73) 초기불교에서 설해진 온갖 상이하고 잡다한 교설들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오로지 그 근본정신만을 추출하여 대승의 기원으로 삼고자하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74) ‘근본’이라는 말은 ‘순수함’이라는 뉘앙스를 갖지만, 또 다른 절대로서 이념화될 때 파괴를 낳는다. ‘근본’이라는 이름으로써 기왕의 역사를 不純한 것으로 부정하기 때문으로, 근본 이슬람이 그렇고 근본 기독교가 그러하다.
73) “연기를 원인과 조건의 귀결이라고 하는 설은 인식을 주관의 구성이라고 하는 근대의 철학적 입장에 선 것이다.-(중략)-현대의 원시불교 해석에 있어서, 무기설을 형이상학적 존재의 인식의 부정이라고 하는 설, 윤회는 (불교)교리가 아니라고 하는 설, 윤회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설, 해탈의 본질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설, 원시불교의 본질은 도덕이라고 하는 설은 무릇 이러한 철학적 입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上野順瑛, 앞의 책, pp.111-112)
74) 졸고, 「緣起法이 불타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 보조사상 제27집), 주65) 참조. 제 경설을 자의에 따라 방편설이니 후대 부가된 것이니 하여 폐기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宇井伯壽(앞의 책, p.318)에 의하면 ‘근본정신(趣意)’이라는 것인데, 그 근본정신이라는 것은 耳懸鈴 鼻懸鈴이 될 수밖에 없다. 般若空觀의 기원은 초기 불교에 있으며, 一乘의 법화도, 정토의 미타신앙도(주20참조), 기신론 의 自性淸淨心도, 나아가 밀교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면(법보신문 879호 ‘진각종, 초기불교서 밀교 전통 찾다’ 참조), 초기불교의 근본정신은 공관인가, 일승인가, 미타본원인가, 진여일심인가? 다시 그 모두는 결국 ‘같은 것(一)’이라고 할 것인가?
오늘날 가히 ‘연기’ 지상주의라 할 수 있다. 연기는 ‘응용불교학’이라는 이름의 영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賢首法藏이 말한 대로 아함의 業感緣起와 화엄의 法界緣起는 ‘연기’라는 말은 동일할지라도 지시하는 내용이 다르다. 天台 智顗가 지적한 대로 因緣生起라는 소승의 析空과 相依相待에 따른 대승의 體空은 ‘공’이라는 말은 동일할지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는 다르다.(만약 초기불교의 연기가 상의성이라면 법장과 지의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모두 일련에 사상사 속에 등장하는 개념이다. 일련의 사상사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개념을 절대시하는 경우 그것은 종파로 등장하게 되지만, 종파적 차별마저 무시한 연기(혹은 마음)에 대한 무차별적인 이해는, 불교는 만병을 통치할 수 있다는 절대적 이념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구호’가 되어 마침내 다양한 經說에 대한 해석도, 논증도 거부한다. 그 것은 불교학의 쇠퇴를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聞․思․修의 修證論마저 파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불타 자내증이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 역시 인용한 經證에 대한 내용 검토 없이, 역사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불교에 아귀가 맞는 몇몇 경구만으로 논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75) 물론 이러한 불타 자내증의 문제를 다루는 경우, 일차적으로 그것을 전하는 다양한 경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원형을 추적하는 방법이 최선이겠지만, 이는 그다지 쉬운 문제가 아닐뿐더러 애당초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阿毘達磨化될 수밖에 없다.
75) 졸고, 上揭論文 참조.
필자 사견에 의하는 한, 불교는 물론 불타의 등정각으로부터 비롯되었겠지만,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그의 손을 떠난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전한 이들의 의도가 개입되었고, 해석이 부가되었으며, 그러면서 발전 변모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항상 새로운 것이었고 진실된 것이라고 주장되어왔다. 그것이 역사이다. 역사학자가 역사를 부정하고서 존재할 수 없듯이, 불교학자 역시 佛敎(불타의 교법)를 부정하고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설혹 후대 부가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후대 부가한 이의 몫으로 남겨져야 하며, 부가하게 된 필연적 곡절을 밝혀야 한다. 역사학자의 임무가 역사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라면, 불교학자의 임무는 그러한 불교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를. 그것의 大小 勝劣이나 權實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본고와 전편 「緣起法이 불타 自內證이라는 經證 검토」는 다만 문제제기였을 뿐이다. 본고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필자가 보기에 너무나 상식적이고 진부한 것이어서 사실상 이렇게 까지 시간과 지면을 낭비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획일적인 사유(구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말의 실마리라도 된다면 필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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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聖諦と十二緣起
佛陀の悟りは緣起法であるか(Ⅱ)
權 五 民* 76)
* 慶尙大 哲學科 敎授本稿は「緣起法が佛陀の自內證であるという經證への檢討--佛陀の悟りは緣起法であるか(Ⅰ)」の續編である。
實におかしいのは、歐米や南方の佛敎圈で出刊された佛敎の槪論書においては大体に佛陀の自內證を三明あるいはこれと關聯した四聖諦として理解しているが、日本やそれにより絶對的な影響を受けたわが國ではひとえに緣起法であると言っていることである。しかし、四聖諦の諦(satya) は眞理に直接對應する言葉であるばかりでなく、五部四阿含において言及される佛陀の悟りに關聯した記事の頻度や文勢からみてもこちらの方が緣起法の場合より遙かに多く、また强烈である。
一般的に佛陀の自內證が緣起法であるとする場合、緣起法は相依性として理解されており、そのゆえに無常であり無我であると說かれる。しかしこれは、空は緣起の理論的歸結(緣起-無自性-空)であるという『中論』の論理を借用したものであって、緣起するゆえに無常であるとか緣起するゆえに無我であるといった言葉は初期佛典のどこにも見當たらない。無常や無我とはただ經驗的な事實であって、推論を通じて導かれる理論的歸結ではない。
諸經によれば、佛陀の成道は三明(宿住智證明․死生智證明․漏盡智證明)を悟り、苦をもたらす一切の原因(煩惱)を斷ち切って涅槃を證得する一 連の過程の中で成し遂げられている。そして漏盡明とは四聖諦の洞察を通じて成就される。そのうえ、經においてはどんな場合にも緣起法に對する無知を無明ということはなく、槪ね過去․未來․現在の三際あるいは四聖諦について知らないことであると言っている。八正道の正見もまたそうである。
從って、成道直後の順逆に跨る十二緣起への內觀はただ集諦と滅諦の具體的な內觀として受け取るべきである。すなわち、初期經典における緣起とは結局のところ、過去․未來․現在における生の在り方を明かしてこれに對する無知を取り除くためのものであり、十二緣起を形容する甚深難見(或いは難知) という修辭もまたほとんどの場合前生より今生へ、今生より後生へ流轉する(從此世至彼世、從彼世至此世) といった言葉とともに說かれる。それは理法としての緣起を意味することばでない。そして初期經典上において無明(avidyā)の還滅である明(vidyā)の用例は專ら三明であり、三明は過去․未來․現在の三際に對應する。こうした點から見れば、佛陀の悟りは緣起法というよりはむしろ四聖諦といった方がより說得力をもつ。そしてこれは阿毘達磨佛敎の傳統的な理解でもあった。
佛陀の悟りを相依性の緣起法というのは大乘の眞理觀(空觀)に基づく解釋であって、これは時間と空間の中でできあがった歷史を無視した、特定の敎派あるいは特定地域の佛敎を中心とした宗學にすぎないと言うしかない。
主題語: 佛陀の自內證、緣起法、四聖諦、三明、甚深難知
[Abstract]
Arya satya and Pratītya samutpāda:
relate to Buddha awakening(Ⅱ)
Kwon, Oh-min
Mainly in Korea and Japan, it is said to that Buddha obtained anuttarā samyaksaṃbodhi by awakening pratītya samutpāda, and they understand pratītya samutpāda as interdependence. But this is the interpretation through the view of truth of Mahāyāna(śūnyavāda). Because not only satya in arya satya is directly corresponded to the ‘truth’, but also the frequency and the intense of the articles related to Buddha awakening refered in Nikāya and Āgama are much more than pratītya samutpāda.
In this study, it research about 4arya satya, 12pratītya samutpāda,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based on the facts that 4arya satya is Buddha awakening.
Key words: Buddha awakening, prat tya samutp da, 4arya satya, 3vidy , very difficult to know(甚深難知)
진각종, 초기불교서 밀교 전통 찾다
회당학회, 스리랑카서 국제학술대회 개최
“초기불교가 밀교 배척했다는 주장은 오해”
진각종이 초기불교에서의 전통 밀교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통해 한국 밀교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이론 정립에 착수했다.
진각종 회당학회(회장 혜정)는 11월 28일 스리랑카 콜롬보 켈라니아 팔리 불교대학원에서 '남인도의 대승불교와 밀교'라는 주제로 상좌부 불교에서의 밀교와 한국 밀교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상호 비교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 동안 '초기불교에서는 의식과 의례를 강조하는 밀교를 배척했다'는 기존 학계의 시각과는 달리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초기불교에서도 밀교의 전통이 있었다는 점을 밝혀 관심을 끌었다.
팔리불교대학원 찬드라 위크라마가마제 명예교수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스리랑카에서 밀교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발굴된 유적 또는 각종 문헌을 통해 그 사실이 입증된다"며 "특히 중국문헌을 검토하면 9세기경 세나(Sena) 1세가 통치할 당시 스리랑카에는 좌도 밀교가 소개됐을 뿐 아니라 밀교 사원, 교육기관 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팔리대 불교학과 올리버 아베냐카 교수는 「초기불교와 밀교의 상호관계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초기불교에서도 이미 밀교에서 볼 수 있는 의식과 의례가 행해졌다"며 "이는 사리, 탑묘(Cetiyapuja), 보리수(Bodhipuja)에 대한 경배와 봉헌이 초기불교에서도 대중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을 적은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문화적인 차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초기불교가 의식과 의례에 대해 격렬하게 공공연히 비난했었다면 그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 상좌부의 전통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상좌부, 대승, 밀교는 각각 서로 추구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내적으로는 종교라는 최소한의 요건인 의식과 의례에 대한 공통된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고 올리버 교수는 강조했다.
진각대 허일범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밀교 진언의 모체는 남방 불전의 파릿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진언의 형성과정에서 파릿타의 역할」이라는 논문을 통해 "파릿타는 불타의 교설을 전파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안위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후 대승의 다라니가 파릿타의 호주적(護呪的) 성격을 계승함으로써 대승적 차원으로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이어 "초기불전으로부터 대승을 거쳐 밀교에 이르는 동안 주문이나 다라니, 그리고 진언의 형식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점 보완되면서 세간적인 공덕성취는 물론 출세간적인 공덕성취를 목표로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초기불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스리랑카에서 밀교의 전통을 학술적으로 검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회당학회장 혜정 정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초기불교에서의 밀교의 전통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학술적 논의를 심도 있게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며 "향후 스리랑카와 정기적인 학술 교류를 지속해 밀교에 대한 학술적 자료를 축적함과 동시에 한국 밀교의 정통성을 찾아가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콜롬보=권오영 기자 / 2006.11.30
권오민 교수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그리고 대승불교’ 발제 전문
2010.05.05 00:22
(1)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오늘의 한국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인가? 그것도 2천년 가까이 ‘소승(Hīnayāna)’이라는 말로 폄하되었던 초기불교를 통해. 필자는 교학자인 까닭에 굳이 진단하라 한다면, 조금은 사치스러운 한담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신행의 토대가 되는 불교교학의 ‘사상적 혼돈’에서 문제를 찾고자 한다. 삼국시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신라의 불교는 ‘난국(蘭菊)의 미(美)를 다툰 호화찬란의 불교’였지만, 국가의 안태를 제불 보살에게 기원하는 것으로 능사로 삼은 고려불교는 5백년에 걸친 억불(抑佛)의 시대를 초래하였다.(김동화 박사)
억불의 첫 신호는 종파의 통폐합이었고(태종 7년 11종→7종, 세종 6년 →2종, 연산군 때 양종의 도회소 폐사), 승과제 폐지 이후 은둔의 불교, 기복의 민간신앙으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갑오경장과 함께 승려의 도성출입이 해제되었지만 격변기의 시대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고, 해방과 더불어 비구 대처의 분규, 그것이 마무리되는 1970년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의 정체성’에 눈뜨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지대한 공헌자는 ‘불교교양대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교의 종파적 전통이 사라졌기에 ‘불교’라는 이름의 온갖 사상이 백화점식으로 나열되어 한켠에서는 ‘자성을 찾아라’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하며, 조석으로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을 외우면서도 불교는 인과법임을 강조한다.
주지하듯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다. ‘불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혹은 해탈)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지혜)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런데 문제는, 관견(管見)을 통하는 한 그것이 불교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불타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2천 5백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는 이러한 온갖 교학체계(혹은 그것을 전하는 여러 경전)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통해 우열을 평가함으로써 다양한 종파로서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를테면 소승교-대승시교(始敎)-대승종교(終敎)-대승돈교(頓敎)-대승원교(圓敎)로 정리된 화엄교판(敎判)이나 화엄-아함-방등-반야-법화․열반으로 정리된 천태의 5시교판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통적으로 초기불교나 부파불교(小乘三藏敎, 혹은 四諦敎)를 불교의 초보적 단계로 이해하거나 소승․열승(劣乘)․패종(敗種, 성불의 싹도 띄울 수 없는 종성), 혹은 악당․마구니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를 전 근대적인 왕조시대의 산물로 여기고서 근대불교학에서 제시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라는 시대적 구분을 상식으로 여겨왔으며, 1980년 중반 이후 남방의 위파사나(전통적으로는 소승선)가 도입되고, 세계화 내지 여행자유화와 더불어 (혹은 전통불교에 대한 반동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초기불교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모색되었다.: “초기경전(4아함과 5니카야)은 불타의 친설이며, 초기불교는 불교의 원초적 형태이다.” 그리고 ‘근대불교학’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대승경전은 후대 찬술된 것으로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불설로 가탁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힌두교에 의해 윤색된 가짜불교이다”는 반동적 평가도 모색되었으며, 급기야 “초기불교로 되돌아가자”는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근본주의’적인 경향까지 나타나게 되었다.(이러한 ‘구호’는 군국주의 시대 일본 불교학계에서 생산된 것이다: 권오민, 「선전과 구호의 불교학을 비판한다」참조)
‘실증’을 무기로 한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성철 스님조차 “대승은 역사적으로는 비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진정한 불설”이라고 하였으며, 혹자는 초기불교에서의 연기(緣起)를 시대를 뛰어넘어 대승 공관(空觀)에 기초하여 해석하거나, 혹은 대승은 불타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패한 부파(아비달마)불교를 비판하면서 생겨났다고 말하고서, 급기야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와 그 근본에 있어 어떠한 차이도 없다”(일부 초기불교 전공자)거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이론적 귀결이다”(일부 대승불교 전공자)고 하여 엉거주춤한 절충을 꾀하기도 하였다.
대다수의 불자들은 이에 침묵할 뿐이지만(교학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없으므로), 일말의 식견을 갖는 이들은 이러한 논의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 ‘본지풍광’을 종지로 삼는 조계선종의 출가자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를 오늘의 한국불교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우리는 근대불교학에서 제시한 초기불교부파(아비달마)불교대승불교라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초기불교가 일어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며, 그 후 기존의 전통(성문)불교와는 별도의 계통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났다고 여긴다. 혹 어떤 경우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는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는 끝난 것이라고 도식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혹은 초기불교는 경장(經藏) 불교, 부파불교는 각각의 부파에 의해 산출된 논장(論藏: 아비달마) 불교로 엄격히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부파불교는 단순 명료한 초기불교를 제멋대로 현학적으로 해석하여 불타의 근본 취지를 상실한 불교, 부파불교 이후에 일어난 대승불교의 경전은 비불설 운운하며 이를 ‘당연한 상식’처럼 여긴다. 그러나 칼로 무 자르는 듯 한 이 같은 도식적 이해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현존하는 초기경전(4아함과 5니카야)과 율장(여섯 부파의 廣律)은 각각의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 편찬 결집) 전승된 것으로, ‘아함(āgama)’과 ‘니카야(nīkāya)’라는 말 자체가 ‘전승되어 온 것’, ‘부파 혹은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전’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성전 결집의 기준은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이른바 ‘4대교법(mahā apadesa)’이었다.: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① 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② 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③ 경과 율과 논모(論母, 주석)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④ 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vinaya, 調伏)을 드러내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
이에 따르는 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과 율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하고,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조차 비불설로 배척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자(說者)가 아니라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본(異本)의 『대반열반경』에서는 4대교법에 ‘법성(法性, 진실)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라는 말을 보태고 있으며, “사람(人)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에, 밖으로 드러난 말(語)에 의지하지 말고 그 말에 담긴 뜻(義)에, 언어를 매개로 한 상대적 인식(識)에 의지하지 말고 통찰의 직관지(智)에,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는 4의(依)의 체계도 성립한다.
이러한 4의설과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는 불설의 정의는 당시 거의 모든 부파에서 암묵적으로 승인되었고, 이에 따라 불설의 취사(取捨) 개폐(開閉)가 가능하였으며, 자신들이 전승한 기존의 불설에 근거하여 새로운 경전도 찬술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 의해 결집된 성전을 ‘성교(聖敎, buddha śāsana)’나 ‘아함(āgama, 혹은 니카야)’ 혹은 ‘불법’으로 호칭하여 ‘불설(buddha vacana)’과는 구분하였다. 팔리율(상좌부 전승)을 비롯한 모든 율장에서 “불설이란 불타가 설한 것과 성문(혹은 제자)․선인․천인․변화인이 설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사정이 반영된 것이며, 현존 『잡아함경』의 경우 실제로 그러하다.
그리고 불타법문의 취지나 요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경설을 널리 분별 해석(廣釋)하기도 하고 종합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논모(論母, mātṛka) 혹은 논의(論議, upadeśa)라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경장(經藏) 안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을 경전 안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이라는 별도의 성전으로 독립되었다. 따라서 초기의 아비달마는 경장 안에 포함되어 있고(예컨대 중아함의 「근본분별품」의 10경, 小部經典의 Niddesa), 후기의 것 역시 경으로 불리기도 한다.(예컨대 『發智經』) 분별이나 해석 역시 불타가 한 것도 있고 사리불 등 성문이 한 것도 있지만, 상좌부나 유부에서는 다같이 근본 아비달마(7論)를 요의(了義)의 불설로 간주하기 때문에 경과 논(혹은 초기불교와 아비달불교)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 상좌부에서는 제5 니카야인 소부(Khuddhaka)의 제경을 경장에 포함시킬 것인가, 논장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오랜 논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나아가 대승경전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찬술될 수 있었을 것인데, 오늘 날 대승불교 흥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학자들은 대개 그 기원을 전통 부파교단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다. 대승경전 역시 이전의 경전을 수용하여 해석하고 새롭게 읽는 과정을 통해 종류와 분량이 확대되어 간 것이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증광 또한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경전해석의 패턴을 의식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자유로이 무제한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화엄경(大方廣vaipulya佛華嚴經)』이나 『유마경(Vimalakīrti nirdeśa sūtra)』 등의 경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불법(불교사상)의 다양성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있으며 진실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다. ‘승가의 분열(破僧)’은 주의 주장을 달리함으로써 비롯되었다(이를 破法輪僧이라 한다)고 하겠지만, 현존의 율장에서는 수계작법이나 포살과 같은 갈마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를 破羯磨僧이라 한다)으로 규정한다. 제바달다는 5법을 주장하여 파승자가 아니라 갈마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승자이다. 불설의 기준을 ‘법성’에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다양성은 처음부터 용인되었다는 말이다. ‘불법(불교사상)=불설=친설’이라는 도식은 우리의 강고한 선입견 중의 하나로,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라는 불교학자는 이는 기독교의 연구양상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근대불교학의 태생적 한계라고 말한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날조된 후대 창작이라는 것은 ‘불법=불설’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생각이며, ‘아비달마불교는 초기불교의 왜곡’이라거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말 또한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불교의 시대적 구분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함과 중아함은 유부의 전승이고, 5니카야는 상좌부의 전승으로, 초기경전 자체가 이미 아비달마화한, 출가 승려를 위해 편찬된 교과서(E. 라모트; 櫻部建)였기 때문이며, 각각의 부파가 불타의 취지(dharma)를 밝히려고 하였듯이 대승불교 역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의 모본ur-text이 된 원초적 형태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확인은 사실상 불가능할뿐더러 비바사사(毘婆沙師)를 비롯한 다수의 대․소승의 논사들은 제1결집은 멸실되었으며, 그 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하였다고 전한다.)
(3) 초기(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의 관심사
기존의 시각을 통해 본다면 전통의 성문승과 대승의 보살승 사이에는 분명 단절의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는 통상 법유(法有)와 법공(法空),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혹은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이라는 모순개념을 통해 양자 사이의 간격을 확인한다.
우리가 아는 초기불교의 교학은 거의 대개 설일체유부와 상좌부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양 부파는 계통이 동일하다. 따라서 기본적 사유체계 역시 동일하다. 그들의 불교사상을 단시간에 간략히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필자 사견에 따르는 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유부에 의하면 세계(一切)는 알려진 것, 인식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식의 조건이 되는 12처설(處說)을 불타의 최승(最勝) 미묘(微妙)의 법문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식(識)이 일어나며(18界), 이를 토대로 수(受)․상(想)․사(思) 등의 지식현상과, 탐․진․치 등의 온갖 번뇌와 업(5온)이 발생한다. 곧 세계란 번뇌와 업의 산물로서 본질적으로 무상(無常)하며, 자아란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로서 무아(無我)이다. 초기불교에서 무지(癡: 무명)란 우리에게 경험된 세계가 영원하며, 단일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이러한 무지로 말미암아 탐욕과 증오가 일어나며, 그것은 우주도 파괴할만한 실제적인 힘(공능)을 갖는다.
이에 따라 전통의 성문불교에서는 무상과 무아에 관한 통찰력(慧)을 점차 고양시켜 마침내 금강석 같은 무루의 통찰력으로 탐욕 등을 끊으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끊는다’는 말은 ‘멸한다’는 말과 그 의미가 다르다. 우리는 담배를 끊을 수는 있어도 멸할 수는 없다. ‘담배를 끊는다’는 말은 담배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실유(實有)이다. 또한 괴로움도, 탐욕을 끊고 열반(=滅: ‘끊음’의 확증, 解脫知見)을 증득하는 일도 나의 몫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도 대신 죽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자리(自利)이다. 업과 과보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이른바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같은 상좌부 계통이지만 정량부나 독자부에서는 12처 뿐만 아니라 자아에 비견될만한 보특가라(補特伽羅)라는 실체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반대로 대중부 계통(이를테면 설가부)이나 경량부에서는 12처의 실재성을 부정하였다. 경량부에 의하는 한 안(眼) 등의 5근과 색(色) 등의 5경(境)은 대종극미의 화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에 근거하여 일어난 인식 또한 진실이 아니다. 혹은 그들은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은 자성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고, 불타를 초월적 존재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승한 경전(아함과 니카야)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의 경전이 존재하였다면 대승경전의 출현을 보다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초기불교의 법계(제18界)와 『기신론』의 법계(진여)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지만, ‘계’를 제법의 종자(즉 隨界)로 이해하고 그러한 종종계(種種界)가 일심(일 찰나의 마음) 중에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경량부(상좌 슈리라타)의 해석을 빌리면 바로 연결될 수도 있다.(권오민, 「알라야식의 연원에 관한 일고」 참조)
대승 반야사상에 의하는 한 12처도, 인식도, 번뇌도, 업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번뇌는 끊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자성(혹은 無相)으로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 꿈은 꿈을 깨기 전까지 엄연한 현실이지만, 깨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꿈속의 호랑이는 깨어나기 전까지 가공의 힘을 갖지만 깨어나는 순간 사라지듯이, 강력한 탐욕 또한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사라진다. 탐욕 등의 번뇌는 초기(아비달마)불교에서처럼 ‘무상’ 등에 대한 무루의 통찰력으로 실제적으로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 예지(반야바라밀다)로 무자성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업과 과보 또한 역시 그러하다. 남의 번뇌(혹은 업)를 대신 끊어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자성임은 일깨워줄 수는 있다. 꿈속의 호랑이를 대신 물리쳐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잠에서는 깨워줄 수 있다. 그래서 이타(利他)이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금강경』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보다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의 칠보 등을 보시하는 것보다 이러한 진실(반야바라밀다)의 법문을 다른 이에게 일러주는 복덕이 더욱 크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타’는 반야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승에 있어 지혜(반야)와 자비는 결코 다른 말이 아니다. 티베트의 현자 밀라레빠도 말하였다고 한다. “자비심은 공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대승의 반야 공사상을 조석으로 염불하듯 외운다.: “百劫積集罪 一念頓蕩盡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천수경』)
그렇지만 초기불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假令經百劫 所作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근본유부 비나야』)
인간의 사상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변용되며, 불교사상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해석과 변용을 허락하는 불교의 유연성(調柔)은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결코 단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여래 정법의 7선(善) 중의 하나이다. 불교 제파 사이의 단절의 간격은 해석과 변용을 고려하지 않은(혹은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 폐쇄적 불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실상 도그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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