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경어(參禪警語)

[스크랩] 제 4장 - 의정을 일으킨 납자에게 주는 글

수선님 2019. 1. 6. 12:11
 

 

 

 

제 4장 - 의정을 일으킨 납자에게 주는 글

 

 

1. 조그만 경지에 집착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法身道理와 만나서 온 누리가 밝고 밝아 조금만큼의 걸림도 없음을 보게 되는 이가 있다.

그들은 당장에  그것을 어떤 경지라고 받아들여서 놓아버리지 못하고 법신 주변에 눌러앉게 된다.

 

그리하여 미세한 번뇌가 끊기지 않은 채 법신 가운데 어떤 見地나 깨달음의 상태가 있는 듯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모두 종자 번뇌임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다.

 

옛사람은 이 법신을, '언어를 초월한 소식'이라고 불렀다.

미세한 번뇌가 끊기지 않았다면 이미 온몸 그대로의 병통이니, 이는 선이 아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거든 오직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가서 생사대사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깨달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라야 한다.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깎아지른 절벽에서 손을 뿌리치듯 더 나아가 깨달아보려 해야 하니,

죽은 자리에서 다시 깨어나야  자기를 속이지 않는 깨달음이니라"라고 하였다.

 

만일 번뇌가 다 끊기지 않았다면 이것은 생멸심일 뿐이며 또한 번뇌가 끊긴 뒤에도 몸을 돌려 숨을 토해낼 줄 모르면 이것을 '죽은 놈'이라 부르니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는 깨닫기가 어렵지 않은데,

이는 납자들이 선지식을 만나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선지식을 만나서 그에게서 아픈 곳을 찔리고 나면 그 자리에서 돌아갈 곳을 알게 될 것이며,

혹 그렇지 못하면 죽어 엎어진 시체가 만리에 뻗쳐 있게 될 것이다.

 

2. 경계에 빠져 나아갈 바를 모르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만나 세계를 뒤섞어서 파도물결이 뒤집히는 듯한 경지를 얻게 되면,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 경지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도,

뒤로 물러서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온몸으로 부딪쳐 참구해 들어가지 못하게 되니,

이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황금 산을 만나 떠날 줄을 모르는 꼴이다.

그것이 황금인 줄은 확실히 알지만 어찌 손 쓸 줄을 모르니,

옛사람은 이런 자를 '보물 지키는 바보'라고 불렀다.

 

이는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이 아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거든 오직 모름지기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아야

비로소 법과 상응하게 된다.

 

천동사 정각스님은 이런 노래를 지으셨다.   

    "온 법계를 뭉쳐 밥을 지었으니

    머리를 박고 먹어야만 진짜 배부른 식사일세."   

 

이 말씀과 같이 머리를 박고 먹지 않으면 밥바구니 옆에서 굶어 죽거나 큰 바다 속에서 목말라 죽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일이 되겠는가.

이것이 '깨닫고 난 다음에는 모름지기 선지식을 만나야 한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들께서도 깨닫고 난 다음 선지식을 만나 완성되었다.

 

만일 자기 스스로만 깨닫고 선지식을 만나서 못을 뽑고 빗장을 열 듯 의문과 번뇌를 뽑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을 모두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3. 경계를 헤아림에 빠지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온 누리가 꽉 막혀 실오라기만한 빈틈도 없게 된다.

 

이런 가운데 홀연히 헤아리는 마음이 생겨서 마치 눈앞에 무엇이 가려져 있는 듯하고 심신을 가로막는 듯하여,

끄집어내려 해도 나오지 않고 쳐부수려 해도 깨지지 않는다.

 

문제 삼았을 때는 무엇인가 있는 듯하다가 놓아버리려 하면 아무 것도 없는 듯하여, 입을 열어도 숨을 내뿜을 수 없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발을 뗄 수 없게 되는데,

이런 경계라 해도 역시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도 온몸 그대로 병통이지 선이 아니다.

이런 이들은 옛 스님들의 바른 공부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옛사람들은 마음씀이 한결같아서 의심이 일어나서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닌 경지에 와서도 그것을 헤아리는 마음이나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꼿꼿하게 헤쳐나갔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느 아침 의심 덩어리가 깨어지고 나면 온몸 그대로가 눈동자가 된다.

그리하여 산을 보니 여전히 옛산이요 물을 보니 여전히 옛물이어서 "산하대지가 어디서 왔는가!"하고 외치게 된다.

이때 실오라기만큼이라도 깨달았다는 자취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거든 꼭 선지식을 만나보아야 한다.

만약 옳은 스승을 만날 수 없으면 고목나무 큰 바위 앞 갈림길에 또 하나의 갈림길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않고,

고목나무 뿌리에 걸려 자빠지는 꼴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참선이 그와 동참의 의를 맺겠다.

 

4. 쉼에 빠져 의정을 놓아버리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문득 가라앉고 고요한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쉬어라, 쉬어라" 하며 만년 부동의 일념을 갖고서 의정은 법신도리 속에 모셔두고 꺼내 쓰지 않아서 오직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고 아무 것도 개의치 않으며 아무런 기척도 없이 썩은 물속에 빠져들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그것이 최상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온통  병들어 있는 것이지 선은 아니다.

 

석상스님의 문하에 이런 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극히 많았으니,

그들이 비록 앉아서 죽고 선 채로 입적한다 해도 제대로 공부한 것은 아니다.

만약 따끔한 침을 맞고서 아프고 가려운 곳을 알아 몸을 놀리고 숨을 토해낼 수 있게 되면 올바른 납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픈 줄도 가려운 줄도 모르면 비록 법신이라는 말을 이해하고,

또 제자리에서 시방의 일을 훤히 안다 하더라도 무슨 수용이 있겠는가?

정각스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였다.

 

"앉아서 시방 일을 다 알아도 오히려 낙방이라더니 남몰래 한 발자국 옮겨놓자 비룡을 보았노라."

 

옛사람들은 경책하는 법어로 크게 납자들을 가르치는 바 있었고,

이론을 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바가 있었다.

문제는 스스로가 철두철미하게 참구하려 들지 않는 데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선지식에게 도를 배워 북적대는 세상에서 천가지 백가지로 자유롭고자 하나 어렵지 않겠는가.

 

5. 고요한 경지에서 주재(主宰) 세우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된 어떤 이들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마음에 아무런 장애도 겉치레도 없고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게 된다.

 

이들은 여기서 다 놓아버리고 지금의 경지를 바꾸어 깨달음의 기회를 잡을 줄 모른다.

오히려 그 속에서 억지로 주재를 세워 법신 쪽에 꼭 막혀 있으니,

이는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동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높은 묏부리 빼어나게 솟았으니

    날으는 학은 멈출 곳을 모르고

    신령한 고목 먼 곳에 우뚝하니

    봉황새도 기댈 곳 없구나!

 

여기서 '높은 묏부리 신령한 고목'은 엄청 깊숙한 경지로 무미건조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머물 곳도 기댈 곳도 없다'함은 너무나 생생하여 죽은 갈단 같은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참구하여 깊숙한 곳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치를 깨닫는 심오한 경지를 모르고,

만일 활발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機緣을 굴리는 妙理를 알지 못하게 된다.

도인의 마음씀은 아무 마음 쓸 만한 곳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쓰는 것이니 그래야만 제대로 선지식을 만나 철통같은 의심의 응어리를 쑥 뽑아버리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러니 어찌 그루터기를 지켜 토기를 잡으려는 바보처럼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장에 갇힌 학이나 털 빠진 봉황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겠는가.

 

6. 알음알이로 나타난 경계를 형상화하는 장애

 

참선할 때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된 어떤 이들은 마치 눈앞에 어른어른하게 무엇인가가 있는 듯한 것을 보게 된다.

리하여 이 어릿어릿한 것에다가 계속 의심을 붙여가면서 이제는 눈앞에 마주 선 말뚝처럼 확연하게 형상화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법신 도리를 터득했고 법신의 성품을 보았노라"하며,

이러한 형상들이 괜히 자기 눈을 눌러서 나타난 헛것임을 모르고 있다.

이런 사람은 온몸 그대로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만약 진실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계의 넓이가 한 장이면 고경도 한 장이듯 몸을 가로눕히면 온 우주를 덮어야 한다.

그 속에선 티끌 세계를 찾아볼래야 정말로 찾을 수 없다.

 

이런 데에서 무엇을 가지고 '자신'이다, '상대'다 하며,

또 무엇을 가지고 '어떤 것'이니 '어른어른'하다느니 하겠는가?

 

운문스님께서도 역시 이러한 병통을 지적하셨으니,

아직까지 많은 글이 남아 있다.

만약 이 한 가지 병만 밝혀낼 수 있으면,

다음 세 가지 병도 모두 얼음 녹듯 녹아버릴 것이다.

 

나는 전에도 이렇게 납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법신 가운데 병이 가장 많이 생겨나니 반드시 큰 병을 한바탕 앓고 나야 비로소 병의 원인을 알게 된다.

가령 온 누리 사람이 다 참선을 한다 해도 이 병을 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아직 없었다.

오직 눈먼 사람, 귀머거리, 벙어리만이 예외일 것이다."

 

7. 얻은 경계를 경론에 맞춰 이해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어떤 일들은 "온  누리가 사문의 한 쪽 눈이며 온 누리가 자기의 신령스런 마음이라 모두가 다 이 안에 있다"고 한 장사스님의 말씀을 보게 되거나

 

또는 "티끌 하나 속에 끝없는 법계의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경전의 말씀을 끌어다가 대충 맞춰보고 만다.

그리고는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도 않고 살지도 죽지도 못하면서 이런 식의 이해를 깨닫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설사 도리와 상응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전적으로 도리 자체가 장애일 뿐이며,

법신 쪽에만 치우쳐 있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엉켜 있는 마음의 속박을 풀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깊은 진리 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마치 눌러도 죽지 않는 원숭이와 같으니 이미 죽지 않는다 했을진대,

또 어떻게 기절했다가 소생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처음 의정이 생기거든 곧 도리와 상응하도록 할 것이며,

이미 그렇게 되었거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만길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을 쳐 떨어진 뒤 팔을 저어 장강을 벗어나야만 비로소 도인의 공부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헛다리짚는 놈이니 종문을 떠맡을 납자가 아니다.

 

8. 담담한 경계를 궁극적인 깨달음이라 여기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된 어떤 이는 行住坐臥에 마치 햇빛이나 등불 그림자 속에 있는 듯 아무 맛도 없는 담담한 경계에 빠진다.

혹은 다시 모두 놓아버리고 맑은 물 영롱한 구슬이나 맑은 바람 밝은 달과 같은 경계에 앉게 된다.

 

이렇게 되고 나면 자기 자신과 바깥 세상을 몽땅 뭉쳐서 한 조각으로 만들고,

그 청정하고 날카로운 상태를 궁극적인 경지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몸을 돌려 숨을 쉬지도 않고,

더이상 망념을 떨쳐버리려 하지도 않으며,

선지식에게 인가를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깨끗한 경계 속에서 또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깨닫는 방편이라고 여기니,

이런 사람은 온몸 그대로가 다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천동사 정각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맑은 빛이 눈에 비추어도 마치 길 잃은 사람 같고, 분명하게 몸을 돌렸지만 오히려 지위에 떨어졌다."

 

자못 밝은 빛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것을 어찌 맑은 물이나 영롱한 구슬,

맑은 바람이나 밝은 달 같은 경지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한 분명히 '몸을 돌렸다'함은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길을 잃었다'함과 '지위에 떨어졌다'는 그 말을 도장찍듯 확실히 소화해 내면 된다.

 

납자들이 이 경지에 도달하면 다시 어떻게 닦아가야 하는가.

반드시 크게 탈바꿈하여 석존처럼 꽃 한 송이 집어든 장육금신의 부처가 되어 씀씀이에 분수 밖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는 말뚝에 매어둔 채 노만 흔들리며 어부는 집안에 들어앉은 격이 된다.

이런 이를 '혈기 없는 사람'이라고 하니 아무리 많이 때려죽인다 해도 무슨 죄가 되겠는가?

 

9. 신기한 경계에 현혹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어떤 이들은 무엇이나 된 듯 여긴다.

빛이나 꽃이 보이고 여러 가지 신기한 모습이 나타나면 자기가 聖人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런 신기한 모습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면서 스스로는 확실히 깨달았노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전부 병통이지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경계로 나타나는 신기한 모양은 자기 망심이 맺혀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

혹은 마가 틈을 타고 들어와서 그런 경계를 짓는 수도 있고,

혹은 제석천신이 변화해서 수행인을 시험해 보느라 나타나는 수도 있다.

 

망심이 맺혀 그런 경계가 나타나는 경우는 정토수행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상을 관함에 오직 그것만을 염두에 둔다.

그러다가 홀연히 부처나 보살 등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6관경]에 설해진 내용은 모두 정토교의 이론과는 맞으나  참선의 요문은 아니다. 마가 틈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는 [능엄경]에 나오는 예를 들 수 있다.

오온이 빈 가운데 수행하는 사람 마음에 집착이 생기면 마가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제석천신이 변화한다는 경계는 보살이 수행할 때 제석이 머리 없는 귀신이나 내장이 없는 귀신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경우이다.

이때 보살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시 미녀의 몸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거기에도 보살이 애착심이  없으면 다시 제석으로 변하여  절을 하고는 말한다.

"태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말릴 수는 있어도 저 수행자의 마음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수스님께서는,

"저같은 야인이야 기량이 다할 때가 있어도 스님의 어떠한 경계도 보고 듣지 않으심은 끝이 없으십니다" 하셨다.

 

진정한 납자라면 백 개의 칼날이 눈앞에서 부딪친다 해도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물며 정을 닦는 고요한 가운데 경계로 나타난 헛된 모습에 있어서랴.

이미 법신도리와 상응하였다면 마음 바깥의 경계는 없다.

그러니 인식 주관인 마음이나 인식 대상인  경계가 어디에 설 수 있단 말인가?

 

10. 輕安에 집착하는 장애

 

참선하다가 의정을 일으켜 법신도리와 상응하게 되면 심신이 거뜬해짐[輕安]을 느끼고 일거일동에 모두 막히거나 걸림이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바른 도와 삿된 도가 번갈아 오는것이니 사대로 된몸이 몹시 쾌적해져서 잠시 그러할 뿐이지 궁극적인 경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의정을 놓아버리고 참구하려 들지 않으면서 스스로는 방편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번뇌가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모르고 있다.

설사 이들이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그것은  알음알이일 뿐이니,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것은 온몸 그대로가 병통이지 선은 아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깨달음이 깊지 않은 데다 너무 조급하게 범부에서 성인으로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가 깊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쓸 수가  없다.

그러니 활구를 얻고서 물가나 숲속에 들어가 공부한 것을 잘 간직하는 것은 좋다 하겠으나 조급하게 앞으로 나아가 남을 위한답시고 부질없이 잘난 체 해서는 안된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처음 공부할 때 의정이 일어나 한 덩어리로 뭉쳐지게 되면 오직 그것이 저절로 열리기를 기다려야만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무슨 이치를 보았다  해서 곧 의정을 놓아버리고 그 속에 눌러앉아 죽어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끝내 깨닫지 못하면 일생을 헛공부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는 참선하는 납자라 해도 실제로 참선한 내용은 없다.

비록 번뇌를 떨쳐버렸다 해도 다시 선지식을 만나보는 일은 나쁠 것이 없다.

선지식이란 분들은 훌륭한 의사와 같아서 중병을 거뜬히 고쳐내고,

또 큰 공덕주여서 능히 마음 먹은 대로 베풀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만하면 되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선지식을 만나보려 하지 않아서는 절대 안된다.

선지식을 만나보려 하지 않고 자기 견해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선 가운데  이보다 더한 병통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通達無我法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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