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 공안을 참구하는 납자를 위한 글
1. 물빛소 공안
(위산 스님이 말하셨다. "내가 죽은 뒤에 산밑에 가서 물빛소가 되어 왼쪽 겨드랑 밑에다 '위산의 중 아무개'라 쓰겠다. 이때 위산이라 하면 물빛소를 어찌하며 물빛소라 하면 위산은 무어라 해야 하겠느냐?")
허공까지 닿도록 물결을 일으켜도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기 알맞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라 붉은 심장 속에 따끔한 몽둥이질 가해서 입가에 흰 거품 생겨나게 한다면 불법과 티끌세상 함께 평탄하리라 바른 생각에는 바늘 끝도 칼날도 들어갈 틈 없고 철면피 낯가죽엔 인정이란 없다네 예가 아니면 경거망동을 하지 말며 가고 머뭄에 자재해야 하느니라 멀다 가깝다 부질없이 지견을 내지 말고 의단을 부딪쳐 깨고 묘하게 깨달을지니 의단을 깨지 못하였거든 맹세코 쉬지 말고 위산스님의 물빛소를 놓아주었다가 하루아침 달려가 코를 꿰어 돌아오면 저 멀리 하늘 가득 물빛소 한 마리일 뿐이리
2. 무자(無자) 공안
(조주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 하였다. "일체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는 어째서 없다고 하십니까?" 하니, "그에게 업식이 있기 때문이니라" 하였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하니 당장에 차별을 끊고 마치 천길 물결 속에 들어가서 오직 꼬리 붉은 잉어를 찾듯하라 뿔이 있는 것은 잉어와 관계없고 수염이 없는 것도 그것이 아니니 유무가 다 끊긴 곳에서야 용의 턱에서 여의주를 찾으리 또한 사방에 불길이 싸여 외가닥 앞길만 트여 있듯 물러서면 타 죽고 옆으로 피해도 목숨 잃는데 맹렬한 불길 쉬지 않으니 사고 싶거든 어물쩡거리지를 말아라 깊고 깊은 물속에 들어간 듯 만길 허공에 기대있는 듯 공부가 절실해야만 기어코 마음자리 밝혀내리라 다시 앞에 한 길이 나타나 물이 흘러오면 저절로 도량을 이루리라
3. 마른 똥막대기 공안
(운문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마른 똥막대기니라" 하였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니 마른 똥막대라 하네 대천세계가 한 덩어리 쇠뭉치인데 온몸이 쇠뭉치 속에 앉아 있으니 여기서 나가지 못할 때 누구보고 말할까 말씀 사뢰고 절을 올리니 절할 것 없다고 다시 말씀하시네 설사 여기서 나갈 수 있을 때라도 몽둥이 30대를 맞아야 하리라
4. 일구화두 공안
일구 화두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푸른 바다 다 마를 때까지 참구하여라 일구 화두는 어디로 갔는가 봄바람 불어와서 산 호수를 건드리네 간 곳을 찾지 말고 오직 일어난 곳을 찾아서 바위가 떨어지고 절벽이 무너져도 두 귀가 먹은 듯 하루 밤낮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칼날 위에 앉아 있듯 하다가 모름지기 곤두박질 한번 쳐서 떨어져 내리면 비로소 고요한 평원을 활보하리라 사나이 굳은 뜻 이 정도라면 누가 용을 때려잡고 범을 사로잡았다고 자랑하리오 오대산 가는 길이 어떠냐고 묻거든 멀리 앞마을 가리키며 막바로 가라고 하라1)
1)조주스님이 사는 오대산에 들어가는 길가에 한 노파가 있었는데, 납자들이 오다가 "오대산은 어디로 가오"하고 물으면 "곧장 가시오" 하고 그 납자가 몇 걸음 내디디면 "멀쩡한 스님이 또 저렇게 가는구나" 하였다.
5. 자취가 없어졌다 공안
자취가 없으니 몸을 숨기지 말고 등뼈를 곧게 세워 오직 수행할지어다 은산철벽도 한꺼번에 넘어질 것이니 몇 번을 기뻐하고 몇 번을 노여워했다 몸을 숨긴 곳 종적 없으니 허공에서 새 날아간 자취 찾지를 마라 태어날 때부터의 본래면목 놓아버리면 찔레 달인 물에서 황급즙을 짜내리라 보고 또 보고 많다고 하지 마라 무엇 때문에 중생이니 부처니 마이니를 관하리오 오직 한 입에 다 삼키도록 할지어다 낙수물이 뒤집혀 몇 길의 파도가 되니 걸어갈 때도 참구, 앉아서도 참구하여 가리키는 손가락 발로 차서 깨트리면 다 닳아빠져 쓸모 없는 것들이니 철마를 거꾸로 타고 수미산에 오르면 일생동안 남의 뒤나 따라붙지는 않으리
6. 만법귀일 공안
(조주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지만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니, "내가 청주에서 베장삼 하나를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 나가더라" 하였다.)
만법은 한 곳으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눈썹을 곧추세우고 활활 타는 불덩이같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으며 갈 때도 같이 가고 머물 때도 같이 머물다가 홀연히 의정이 생기거든 겁내지 마라 큰 싸움에 임한 듯 다른 것 돌아볼 틈 없이 맞는 경계 거슬리는 경계 만나거든 잘 조화시켜라 돌아갈 곳 모르겠거든 다른 일 해도 좋다마는 철위산을 때려부수고 나서 보물창고에 걸터앉아 눈 깜박거리고 눈썹 치켜 뜨는 것에 모든 기연 다 나타낼 수 있으면 청주의 베옷은 일곱 근이지마는 문 앞의 복숭아는 여전히 천 그루라네
7. 염불공안
(조주스님이 시중하였다. "공연히 세월 보내지 말고 염불을 하거나 염법을 하라" 그러자 어떤 스님이 대뜸 "어떤 것이 학인이 자신을 念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염하는 이가 누구인가?" 하니, "아무도 짝이 없습니다" 하자, "이 당나귀야!" 하고 꾸짖었다.)
'아미타불' 한 마디는 흐린 물에 던진 구슬 구슬을 던짐에 물 절로 맑아지듯 아미타 염불함에 망념이 그치니 물 절로 맑아지면 수염 비춰 티끌 씻고 어렴풋이 본래 면목 알아내니 눈썹이 어찌 생겼던고, 눈앞에 펼쳐진다. 망념이 그치면 세상이 맑게 개여 끝이 안 보이고 파란 유리에 산호가지 돋아나니 백발 노승 맑은 마음도 그저 이러하였던가 그저 이럴 뿐이니 염불도 바로 공이라 삼경 한밤중에 햇빛 붉게 비치고 보석연못 황금정토에 만파가 눈앞에 돌아온다 바로 눈앞에 염불조차 공하니 염공[能念들인 空]과 공념[所念인 空]이 한 덩이 되어서 수만리 정토길 당장에 훤해지면 근진음계가 그대로 마니전일세 마니전 교교한 빛 불법과 속세를 모두 비추는데 범부가 부처로 된다 하니 그 어떤 일인고 아! 살아서도 죽어서도 말못할 소식일세
8. 부모미생전 공안
(태원 부상좌가 고산스님에게 "부모에게서 나기 전에 콧구멍(본래면목)이 어디 있습니까?" 하니 고산이 "이제 태어난 뒤엔 어디 있습니까?" 하였다. 부상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그대가 내게 물으시오. 내가 대답하리다" 하였다. 고산이 "부모에게서 나기 전엔 콧구멍이 어디에 있었소?" 하니 부상좌는 그저 부채질만 할뿐이었다.)
부모에게서 나기 전에는 무엇이 본래 면목인고 철석심 놓아버리고 취모검을 빼어들면 속세의 티끌 인연 불 속의 하루살이라 많은 방편 중에 참선이 영험하니 오직 화두만을 들 뿐 옆길로 새지 않으면 천차만별하던 것이 일념에 녹아지리라 만 길 낭떠러지에 맑은 물 가득하고 푸른 하늘 일대에 조각구름 한가하니 이런 경계 마음 달은 호젓이라도 밝구나 감히 말하기를 신령한 마음 나타나 그 빛이 온갖 경계 머금었다 하나 온갖 경계는 그 빛 아니라 오히려 웃을 일이다 맑은 강물이 흰 비단 같다 하나 흰 비단 아니라 한 올의 실일 뿐 다시 삶아 정련하여 가는 금침 누비고 나면 소주의 베포되고 양주의 비단 되리라 참구할지어다
9. 천 일 결제하고 공안을 참구함
도 잘 닦는 납자는 천 일 동안 공을 들여 밤송이를 삼킨 듯 공부해 나아가니 맑디맑은 경계에 일념이라도 생기면 수미산이 가로막힌 듯 큰 일로 여기네 일구의 화두는 쇠몽둥이 같아서 불법과 번뇌를 모두 다 끊으니 혼침과 산란이 통째로 없어진다 절실 또 절실할지어다 천 일이 잠깐 사이라 오락가락하던 알음알이 끊어지면 두 다리 쭉 펴는 초연한 경계이니 얼음지옥 불지옥도 마음은 한가롭다 온몸으로 부딪쳐 無生國에 들어가 유무의 경계를 묘하게 벗어나고 꽉 막힌 허공에서 남 돌아볼 것 없으면 대지가 칠흑같음을 비로소 알리라 몸을 뒤집으며 주장자가 산 용이 되어 산 뚫고 바다 뚫어 고풍을 진작하니 일륜삼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 온 법계 털끝까지 응용이 무궁하네 여기에 다시 향상의 절대경지 있어서 아무리 현묘한 기미라도 모두 아니라 하면 여래께서 가던 길 따라가지 않더라도 사나이는 자기대로 하늘 뚫을 뜻 있으리
10. 화두가 절실하면 마에 떨어지지 않는가?
능엄경에 나오는 50 가지 마 경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집착이라는 한마디에 대한 내용일 뿐이다.
예컨대 색음이 명백한 데서 '모든 염을 다 떨쳐버린 경지'를 이렇게 보고 있다. 이런 경계에 도달한 사람은 겁탁(색음이 체가 되어 생기는 단명, 기아, 질병, 전쟁 등 세상의 재앙)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동기를 살펴보자면, 굳어진 망상이 근본이 되어 이것을 그 자리에서 녹여내지 못하고 그 망상 속에 들어앉아 열심히 정진하다가 희귀한 경계라도 나타나면 거기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어찌 집착이 아니겠는가?
만일 성과를 얻었노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른 경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그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5온 중에 나타나는 모든 마 경계를 '망상'이란 말로 종합해 보자.
최초의 집착을 바로 깨어버리지 못하면 이 망상이 마의 뿌리와 줄기가 된다. 그러니 그 근본을 뽑지 않고 줄기만을 눌러서 꺾어버리려 한들 되겠는가. 심지어는 허명(색음이 다스려져 텅비어 밝은 상태)함을 더욱 탐내어 그 정기를 먹게 됨이 다 망상에서 기인하니, 마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이러한 경계를 애써 보호하려 한다면 바로 설상가상이며 불 위에 기름일 뿐이다.
예컨대 수음 가운데서 말한 허명망상은 허명함이 바로 망상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마음에 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그것이 망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음 중 융통망상에 대해서는 그 첫번째 경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으로 밝고 뚜렷함을 사랑하여 지난번 망의 근원이 지금의 경계와 융통하여 곧 애착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이어서 10가지 마 경계를 설명함에 모두 '마음으로 어떤 경계를 사랑한다'는 식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천마가 원만한 경계로부터 나와 애착심에게 짝이 되면서 끝없는 마업을 짓는 것이니 어찌 구제할 수 있겠는가.
자못 참선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 한 생각을 끊어야 하니 마음이 없으면 사랑함도 없어지고, 사랑함이 없으면 집착이란 말이 있을 수가 없다. 그 중 아홉번째 '마음으로 고요함을 사랑하여 깊은 공을 타파하는 경계' 등은 모두 마업이다. 이 역시 애초에 망심을 깨지 못했기 때문으로서,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격이니 모래란 밥의 재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행음에서 유은망상 같은 것은 무릇 행음이 끊임없이 변하면서 성품이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생멸의 근원이 이로부터 나타나 상음이 다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행음의 근원을 철저하게 살펴본다면 생멸이 생각생각에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이 계속 끊임없이 흘러가는 생멸을 따라가지 않으면 부동하고 밝은 정심이 생긴다. 이때 외부의 마는 들어올 기회를 얻지 못하나 다만 뚜렷한 근원인 행음 경계 가운데에서 스스로 헤아리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시말과 유인, 무인 등을 따져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헤아리는 마음이 있으면 정변지는 없는 것인데, 그 '헤아림'이란 어두움(행음이 비밀스럽게 천류하여 알아차리기 힘들므로 어둡다 말한다)에서 나온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저 유청(미세하게 요동하는 세간의 성품)함을 보면 그 근원을 철저하게 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식음에서의 전도망상 같은 것은 동분생기(행음과 생의 근원을 같이한다는 뜻, 미세하고 끈질긴 세간의 성품)가 갑자기 무너져버리고, 6근이 텅 비고 고요하여 다시는 마구 치닫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텅 비고 고요함이 마구 치닫지 않게끔 하였고, 치닫지 않기 때문에 행음이 다하게 된 것이다.
이미 행음이 다하였다면 봄과 들음이 한데 어울려 통하고 서로 막힘 없이 청정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본문에서는 행음이 공함을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식의 근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라 운운하며 나아가서는 정묘함이 원만해지지 못하고 문득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게 된다고 하였다.
이 10가지 마 경계는 모두 식심 때문에 깨달았다는 생각이 생기게 된 것이니 이미 그렇게 되고 나면 깨달음을 어기고 온갖 마가 생긴다.
선문에서 옳게 마음을 쓰는 사람은 이 모든 잘못에 빠지지 않는다. 남악 사대 스님은 "시방제불이 내 한 입 속에 다 들어갔는데 어느 곳에 다시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마인가."라고 하셨다.
이는 불조의 경지에서 그곳에 머물러 두려 해도 머물지 않는 분이니 삿된 마나 외도들이 그를 어찌 한단 말인가.
삿된 마의 침입을 받지 않으려거든 오직 온몸으로 진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뿐, 억지로 쫓아내거나 보호하려 하지 말아야 하니, 망상이 다하면 마 경계는 스스로 다하게 된다. 옛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엉킨 뿌리에 한 도끼 내려찍어 마디 밖에 또 새 가지 돋아나지 못하게 함이 좋겠다."
11. 수증에 집착하지 않음
우리 선문에서는 근기가 영리하거나 둔하거나 잘나고 못나고를 막론하고 '믿음' 하나로 입문한다. 우선 맹렬하게 발심했다면 마치 은산철벽 속에 앉아있는 듯 오직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면 온갖 망상심이 전혀 들어올 수 없다.
이러한 경계에서라면 지혜로 대상을 관조하는 수행이 어느 자리에 설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과연 한 생각 탁 트이게 되면 마치 구름 걷힌 하늘을 보듯, 또는 잃어버렸던 물건을 찾은 듯하리니, 여기에서 관조하는 노력이 더 이상 무엇에 필요하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참구하는 마음이 몹시 절실할 것 같으면 그 참구 역시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수행'이라는 이름만 세우지 않았을 뿐이다. 또한 세상 인연을 관찰해 내고 지극한 도를 절실히 참구한다면 이 역시 관조가 되는 것이다. 다만 '관조'라는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다.
[원각경]에서는 이렇게 설하였다. "오직 돈각한 사람과 법을 수순하지 않는 사람은 이 범주에서 제외된다."
만일 관조하는 것을 공부로 여긴다면 능히 관조하는 주관심이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관조되는 객관 대상도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이 대립된다면 상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홀로 큰 경지를 밟으니 마음 밖에 따로 경계가 없어서 시방 세계와 부모가 준 심신을 하나로 녹여 그 자리에서 생사를 끝장내야 비로소 방편 하나 얻었다 하리라. 여기에서 향상일로의 화두를 다시 붙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도깨비굴에서 살 꾀를 내는 꼴이다."
어찌 이 말씀을 점수점증하는 공부와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 얼굴만 번듯해가지고 실제로 이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며 '불쌍한 자'라고 불러 마땅하니, 거론할 가치조차 없는 이들이다.
남악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닦아 증득함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물들어도 없다."
여기서 물들지 않는 수행을 원만한 수행이라 하는데, 도리어 이 '수행'이라는 말에 집착해서야 되겠는가.
또한 이 물들지 않은 '깨침'을 뚜렷한 깨달음이라 하는데, 도리어 이 '깨침'이라는 말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렇게 닦아간다면 종일토록 수행하고서도 닦았다 할 것이 없다. 한편 청소하고 향 피우는 일까지도 모두 무량한 불사인데 그대로 수행과 증득을 없다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일 뿐이다. 9지보살조차도 무공용행(애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공부)을 하는데 하물며 10지에 있어서랴.
마침내 쏟아지는 비처럼 유창하게 설법하는 등각 위에 이르렀어도 오히려 남전스님은 "도와는 영판 어긋났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니 하물며 10지에서 닦는 관조행과 우리 선문과의 우열을 비교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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