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파 불 교
1. 불멸 이후 불교 교단의 발전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의 불교교단은 중인도에 퍼져 있던 지방교단에 불과했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입멸지인 구시나가라는 중인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야는 중인도와 남부에 있으며, 처음으로 법을 설한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는 중인도의 서부에 있다. 이 네 곳은 '사대영장(四大靈場)'으로서, 불멸 후에는 부처님을 사모하는 신자들의 순례참배지로서 성황을 이루었다. 초기의 불교도들이 생각한 중국(中國)도 중인도를 중심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불멸 후에는 서방 및 서남방으로 전도가 진행되고 불교교단은 서서히 이 두 방면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중인도의 남방은 빈댜 산맥의 고원에 의해 가로막혀 있고 동방은 고열미개의 땅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먼저 서남쪽으로 전도가 진행되었다. 서방에 불교가 발전한 것은 그보다 조금 늦었다. 그것은 서방은 바라문교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쇼카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교단은 인도 각지에 진출, 정착해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웃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도의 불교교단은 튼튼한 지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부파분열이 일어난 후에도 상좌부계의 분별부가 강력하여 이 계통의 불교가 이 시대를 전후하여 멀리 세일론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이것이 남방상좌부라는 부파로 정착하여 현재의 남방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서인도의 방언을 기초로 하여 만든 성전어가 팔리어로서, 남방상좌부의 문헌은 팔리어로 전승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쇼카왕의 전후에 마투라에서 서북인도의 간다라, 카슈미르에 걸쳐서도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곳의 중심이 되었던 교단은 같은 상좌부 계통의 다른 부파인 설일체유부였으며, 그들은 후에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편찬하였다. 대승불교가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그들의 문헌은 주로 중국에 소개되었는데 이것을 통칭 '북전(北傳)'이라고 하며, 반대로 남방상좌부의 전승을 '남전(南傳)'이라고 한다.
2. 불교교단의 분열
부처님은 자신의 입멸 이후 교단이 의지해야 할 것으로 법을 내세웠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法)이라는 것은 45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행해졌고, 또 그 내용도 논리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 따라 달라져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나아가 당시의 가르침은 문자에 의한 체계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의 구전(口傳)에 의한 암송으로서 전달되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불멸이후 불교 교단은 곧 부처님의 교설을 일정한 형태로 보존하고자 공식적인 합의를 거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제 1 결집이 이루어졌다.
(1) 제 1 결집
제 1 결집은 왕사성결집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입멸한 해에 왕사성에서 500명의 비구들이 모여서 행한 것이다. 결집이란 교법의 합송(合誦)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비구들이 집회에서 편집된 성전을 함께 외움으로써 그것을 불설로 승인하는 것이었다. 1차 결집에서는 마하가섭이 회의를 소집하고 사회를 보았으며, 우팔리가 율(律)을, 아난다가 경(經)을 암송하였다. 당시 우팔리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율에, 그리고 아난다는 경에 가장 뛰어났었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모든 비구들은 전원일치로 우팔리와 아난다의 암송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고 승인하였다. 이렇게 하여 율과 경의 내용이 확정되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제 1 결집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할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 이 결집은 출가승단의 사람들, 특히 그 대표라 할 만한 상좌비구들이 개최한 것으로 재가신도들은 여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결집된 법과 율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훗날의 대승경전 출현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이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인 집회에서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처님은 생전에 교단을 통제할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며, 승가의 조직도 서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멸이후 교단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기신 가르침의 수집 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승가에 이러한 합의의 관습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째, 법과 율은 이때 합송(合誦)된 것이며 그후에도 오랫동안 입에 의해 전승되었다. 이것이 문자로 씌어지게 된것은 적어도 200년 뒤의 일이다.
네째, 이러한 결집의 시도는 당시 불교승가 전체의 의향이 반영된 것은 아니며 단순히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한 일파, 혹은 마가다 일대에 한정된 지방적인 회합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2) 근본분열(根本分裂)
불멸 후 100년 경, 제 2 결집이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불교교단은 중인도의 테두리를 넘어 서방으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바이샬리의 비구들이 정법(淨法, 계율에 어긋나지 않음. 합법적인 일)이라 하여 시행하고 있는 10가지 문제에 대해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서인도 출신의 야샤스라는 비구가 마가다지방의 바이샬리로 갔을 때 그는 비구들이 쇠로 만든 발우에 물을 채우고 상가를 위한다고 하면서 금전, 은전을 집어넣는 것을 보고 경악하였다. 본래 무일물(無一物)을 표방하는 비구는 금전을 받는 것은 물론, 손을 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유행편력의 생활에서 승원생활로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서인도의 비구들에게 금전을 받는 것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관행이었다. 야샤스는 그것이 비법(非法)임을 지적하였으나 바이샬리의 비구들로부터 빈축을 사게되어, 서방의 비구들에게 응원을 청하였다.
야샤스는 이 비구들의 도움을 받아 금전을 받는 행위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 일에 대해 동, 서의 불교교단이 대화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양쪽에서 각각 4명씩 판정인을 내세워 심의를 하였는데, 결국 이 자리에 모인 700명의 장로들은 이 문제를 포함한 십사(十事)를 비법으로 단정하였다.여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10사는 각 율전에 따라 다른 점이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뿔로 만든 그릇에 소금(을 축적하는) 관행(角鹽淨)
2. (수행자는 정오가 지나면 식사해서는 안되는데, 정오를 지나 해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지난 시간까지 식사시간을 연장하는) 관행(二指淨)
3. 다른 부락(에 가서 음식을 취하는) 관행(他聚落淨)
4. (동일한 교구 안의 다른) 주처(에서 포살을 따로이 행하는) 관행(住處淨)
5. (일을 결정함에 우연히 비구가 전원 모이지 않아, 먼저 참석한 사람들로 결정을 하고 뒤에 늦게 온 사람들의) 동의(를 예상하여 정족수가 부족하여도 의결을 행하는) 관행(隨意行)
6. (석존과 아사리의 )습관(에 따르는) 관행(久住淨)
7. (식사 후에도) 응고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관행 (生和合淨)
8. (나무나 그 열매의 즙을 발효시켜 아직 알콜이 되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관행 (飮門樓伽酒淨)
9. 테두리에 장식이 없는 방석(의 크기에 관한) 관행 (無緣坐具淨)
10. 금,은(을 받는) 관행(金銀淨)
이상의 십사는 그 일이 크건 작건 실제적 필요성이 대두되어 당시의 교단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열번째의 금전을 받을 것인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한 테마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바이샬리의 논쟁을 기록한 여러 율을 검토하여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불교교단의 발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0사의 논쟁은 야사가 서방의 비구들에게 응원을 요청했기 때문에 동서비구의 싸움이 되었던 것 같지만, 동쪽의 비구들 중에도 10사에 반대한 비구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계율을 융통성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지법자,持法者)의 비구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격파(지율자,持律者) 비구들간의 대립이었다고 볼수 있다. 불타가 입멸한 지 100년 쯤 되면 상가의 확대와 함께 비구의 수도 늘어나고 사고방식의 차이도 생기기 때문에, 교단에 이러한 대립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회의에서는 엄격파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통과된 듯 한데, 이것은 장로비구들 중에서 엄격파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장로비구가 대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10사는 모두 '비사(非事)'로 판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이것이 교단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비구들이 모여 대중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로써 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했다고 한다. 이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대중부에는 사람의 수가 많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명칭에 관용파 비구들의 수가 많았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북방불교에 전해진 자료(이부종륜론)에 따르면 근본분열의 원인은 대천이라는 비구가 아라한의 경지에 관하여 밝힌 다섯 가지 견해에 대한 대립(大天의 五事)에 의한 것이라 한다. 다섯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여소유(余所有) ; 천마에게 유혹당할 때는 아라한일지라도 더러움이 새어나갈 때가 있다.
2. 무지(無知) ; 아라한에게도 무지는 있다.
3. 유예(猶豫) ; 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있다
4. 타령입(他令入) ; 자신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을 타인이 알려줌으로써 아는 경우가 있다.
5. 도인성고기(道因聲故起) ; 도는 소리에 의해 일어난다.
이 五事는 상좌부 교단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성자인 아라한을 비방한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해 교단의 화합이 위협받자 당시의 왕이 중재를 위해 집회를 열어주었다. 이때 표결에 의해 다수를 차지한 대천의 무리는 스스로 큰 집단임을 의미하는 대중부라고 자파를 명명하였고, 반면 소수파인 보수적 장로들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기로 공포하고 스스로를 상좌부라 칭하였다고 한다.아무튼 근본분열에 의해 한번 갈라진 교단은 다시 그 내부에서 분열을 계속하여 20개의 부파로 분립하게 된다. 이를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하는데 당시의 분파를 남, 북 양전이 전하는 내용에 따라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 남전 도사 **
1. 대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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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윤부(鷄胤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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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문부(多聞部) | |
4. 설가부(說假部) | |||
2. 일설부(一說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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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다산부(制多山部) | ||
2. 상좌부 |
1. 화지부(化地部) |
7.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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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음광부(飮光部) |
10. 설전부(說轉部) | |||
11. 경부(經部, 經量部) | |||
8. 법장부(法藏部) | |||
2. 독자부(犢子部) |
3. 법상부(法上部) | ||
4. 현주부(賢胄部) | |||
5. 밀림산부(密林山部) | |||
6. 정량부(正量部) |
** 북전 이부종륜론 **
1. 대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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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설부(一說部) | |
2. 설출세부(說出世部) | |||
3. 계윤부(鷄胤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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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문부(多聞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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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설가부(說假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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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다산부(制多山部) | ||
7. 서산주부(西山住部) | |||
8. 북산주부(北山住部) | |||
2. 상좌부 |
1.설일체유부 |
3. 독자부(牘子部) |
4. 법상부(法上部) |
5. 현주부(賢胄部) | |||
6. 정량부(正量部) | |||
7. 밀림산주부 | |||
8. 화지부(化地部) |
9. 법장부(法藏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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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음광부(飮光部) | |||
11. 경량부(經量部) | |||
2.설산부(雪山部) |
이렇게 원시교단이 상좌, 대중의 두 부파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한다.
3. 부파불교의 성격
불교교단의 정계(正系)는 원시교단을 계승하는 부파교단이었다. 즉 부처님의 직제자인 대가섭이나 아난 등에 의해 수지된 불교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되어 부파교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부파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성문승(聲聞乘)이라 불렸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파불교 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고 있다.그리고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불교이다. 그들은 승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다. 따라서 가두의 불교는 아니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이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小乘)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부파의 출가교단은 국왕이나 왕비 또는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카스트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교는 타국의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던 상인들과 맞지 않았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걱정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할수 있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 즉, 아비달마 불교가 성립할수 있게된 것이다.
이상에서 본 부파불교의 특성은 그 단점과 한계로만 보여지기 십상이다. 사실상 아비달마불교는 종종 불교의 번쇄철학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구사론을 비롯한 아비달마논서를 읽을 때 우리는 지나치게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에 관한 논의를 접하게 된다. 그 무수한 술어의 나열을 접하게 되면, 그들의 사상적 노작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며 한가한 갈등으로 생각될 것이다. 번뇌를 끊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부처님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사실상 아비달마는 아가마 경전의 어구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으며, 전통적,보수적이거나 분석적, 형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사상의 청신함과 발랄함을 잃어버린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설법(對機說法, 방편설법)에 의해 단편적, 비체계적으로 설해진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기초적인 관념을 추출하고 이를 조직하여 장대한 사상적 건축물을 세운 것은 확실히 아비달마 논사의 공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업적이 없었다면 후의 중관학설, 유가유식설 등의 대승불교철학의 출현은 불가능하였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4. 삼장의 성립
불교성전은 율과 경, 그리고 논(論)이라는 삼장(三藏)으로 구분된다. 삼장 중에서
경과 율은 이미 오래 전에 성립하였고 논은 비교적 후세에 성립한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의 각 부파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 한다. 그것은 '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이다. 이러한 연구는 물론 초기불교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지만, 부파의 성립으로 더욱 특색있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결집하여 간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헌을 아비달마 문헌, 또는 논(論)이라고 부른다.모든 (유력한) 부파는 독자적인 아비달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래의 경과 율에 논을 하나 더하여 삼장의 문헌을 갖추기에 이른다. 이런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시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오늘날 부파불교시대의 부파의 삼장은 거의 산일되어버리고 현재 그 삼장이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실론 상좌부 계통의 삼장과, 범어에서부터 한역되어 보존되고 있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삼장이다. 그러므로 아비달마교학의 내용을 아는 데는 이 팔리삼장과 한역삼장이 주요 자료가 된다.아비달마는 부파 중에서 가장 강대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유부에는 7론이 전해진다. 즉,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20권, 법온족론(法蘊足論) 12권, 시설론(施設論) 7권, 식신족론(識身足論) 16권, 계신족론(界身足論) 3권, 품류족론(品類足論) 18권,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 20권, 그 이역(異譯)인 아비담팔건도론 30권이 있다. 앞의 여섯을 육족론(六足論), 뒤의 발지론을 신론(身論)이라고도 한다. 스리랑카에 대한 불교전도는 아쇼카왕 치세시에 마힌다에 의해 행해졌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왕 데바남피야 팃사는 마힌다에 귀의하여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대사(大寺)를 세웠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의 기원이다. 그후 2백여년이 지난 후 대승의 교학까지도 겸하여 배우는 무외산사(無畏山寺)가 건립되어 양파가 서로 논쟁을 했으나, 결국은 대사파의 전등(傳燈)이 유지되었다. 오늘날 버마, 타이, 캄보디아, 라오스 등에 전하고 있는 남방불교는 대사부 계통에 속한다.스리랑카의 상좌부에서도 7론이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집론(法集論), 분별론(分別論), 논사(論事), 인시설론(人施設論), 계론(界論), 쌍론(雙論), 발취론(發趣論)이다. 위의 두 부파 이외의 논장으로서는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 법장부) 30권,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정량부) 3권, 성실론(成實論, 경량부) 16권이 있다. 유부에 있어서는 육족론이나 발지론 이후 이들 논서에 대한 주석적 연구가 성행하였다. 이들 200년에 걸친 주석가(毘婆沙師)의 아비달마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00권이다. 이 논서의 성립으로 유부의 교학은 거의 확정되었지만 본론이 너무 방대하기에 그 교의를 적요한 강요서가 저술되었고, 이들 논서를 기초로 하여 유명한 세친(世親)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이 성립되었다. 스리랑카에서도 1-2세기 경 많은 논사가 배출되어 주석서를 지었는 바, 붓다고사(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이 가장 유명하다.
5. 부파불교의 교학체계
아비달마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3단계가 상정되고 있다. 그 첫 단계는 아가마 경전 자체 안에 이미 교설을 정리, 조직하거나 해설, 주석하는 소위 '아비달마적 경향'이 나타나 있는 단계이다. 둘째는 이 경향이 발전하여 경전 외에 아비달마로 불리는 별개의 문헌이 독립, 발전되어 갔던 시기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 결과 아비달마는 단순히 아가마의 내용을 해석,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기초로 하여 장대한 교의체계를 수립했던 시기이다. 아비달마 교학은 아가마 교학을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그 체계를 이루어 갔다. 분석적 방법이란 아가마의 가르침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하나 하나 그 의미를 상세히 주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종합적 방법이란 아가마에 수록되어 있는 갖가지 교설을 정리, 안배하는 것을 말한다. 아가마를 종합하는 수속으로는 수와 관계된 교설을 그 수에 따라 一法, 二法, 三法과 같은 순서로 병렬시키는 방법(소위 '法數'에 의한 정리)이며, 또 하나는 가르침의 내용의 주제에 따라 유별하여 배열하는 방법(소위 '相應'에 의한 정리)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독립한 아비달마는 강력하게 발전하여 새로운 문헌들을 성립시켰다. 부파불교에 있어서의 논장의 체계가 공고히 된 것은 4세기경이 되어서이다. 이들 부파불교들은 대승불교가 출현하여 그 세력을 확산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존재하면서 자신의 교학체계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4세기를 지나면서 부파불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완성에 도달하여 그 이후에도 인도에서 무려 800여년은 더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큰 진전은 없었다.실론에서 상좌부가 충실히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방면, 인도본토에서는 상좌부의 맥이 끊어지고 상좌부의 일분파로서 서북부의 간다라와 카쉬미르지방에서 성행하던 설일체유부가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4세기 경 바수반두는 설일체유부의 교의체계를 간결하게 요약한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명실상부 부파불교의 교학을 대표하는 명저로서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한국에서도 부파교학의 입문서로 연구되었다. 그 내용은 계(界), 근(根), 세간(世間), 업(業), 수면(睡眠), 현성(賢聖), 지(智), 정(定), 파아(破我)의 9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발지론의 입장을 답습하면서 아비담심론에 따라 수정을 가했다. 또 유부 교의를 체계화함에 있어서 비바사사(주석가)의 설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부파 특히 경량부설까지도 참조하여 비판적 태도로 저술한 점에 특색이 있다. '구사론'이 불교학의 기초이론으로써 오랫동안 평가되어온 것은 그 교의가 정연한 체계로 논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학설은 제법(諸法) 즉, 모든 존재를 5위(位) 75법(法)으로 포괄하려는 논리이다. 75법이란 존재를 분석하여 얻은 요소들의 전체를 가리키며, 이 존재는 색(色), 심(心), 심소(心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무위(無爲)의 다섯 가지 범주에 포괄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구사론은 전 존재를 법에 의해서 분류하였는데 그 법을 존재요소로서 실체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푸른 병은 깨어지면 없어진다. 그러나 그 청색이라고 하는 것은 병이 깨어져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을 자성(自性)을 갖는 것이라고 하며 법(法)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유부교학에서는 실재론적 경향을 중시하게 되어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 ; 법의 실체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항상 실재한다)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러한 법의 실체화는 후에 대승불교의 용수에 와서 크게 비판받게 되었다. 부파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강력했고, 또한 대승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유부의 교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부의 유(有)의 철학의 이해 없이는 그 안티테제로서의 반야(般若)의 공(空)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6. 설일체유부의 교학
부파의 여러 학파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은 아비다르마 논서를 낳고 그리고 학문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파로 성장한 것이 서북인도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사르바아스티바아디인 파이다. 이 학파의 이름은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를 의미하고 보통 한역명으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혹은 줄여서 유부라고 알려지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상좌부의 계통에 속한다. 비교적 일찍 상좌부에서 지말분열해서 독립했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가지 발전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라고 하는 이 학파의 독특한 기본적 입장은 학파 분립의 당초부터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1)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장 기본적인 교설이다.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무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무상하다고 보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에 대해 당치않은 욕망을 품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집착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 교의이며 올바른 지혜이다. 그런데 평상적인 인간은 무지로 말미암아 무상한 것에 상주성을 기대한다. 이 기대가 어긋날 때, 실망과 노여움을 느낀다. 무아인 것에 대해 '나'를 의식하고 '나의 것'을 의식한다.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요구, 갈망이 생기고 고뇌한다. 기대해서는 안될 것을 기대하고 의식해서는 안될 것을 의식하는 곳에 번뇌에 의한 업이 있다. 그 결과는 고이다. 무지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 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된다.
이렇게 보면 현실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루(無漏)의 깨달음의 영역으로 진행하는 불교의 실천체계는 이 간명한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남김없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이를 엄밀히 설명하는 것이 아비달마의 임무라고 아비달마논사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 이를 가지고 무상과 무아를 논증하려한 것이다.
무엇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가.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을 연하여 결과로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자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나타나게 하는 원인 여하에 따라 존재한다는 점에서 상주불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인과의 관계 위에서 생겨난다'는 견해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원인, 혹은 원인없이 우연히 생겨난다는 견해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다.
이처럼 무릇 현실에 있어서 인간 생존에 관계하는 일체의 사실은 연기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한 유위(有爲)라고도 한다. 유위라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연기하고 있으며, 유위이며, 무상인 이세상의 모든 것을 무상하다고 확실히 앎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소멸할 때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인과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바로 무위(無爲)이다.
(2)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무상한 것을 무상이라고 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일으키고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번뇌하는 현실의 세계를 유루(有漏)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을 무상으로 알아 욕망과 집착을 끊음으로써 전개되는 고요하고 편안한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無漏)라고 한다. 여기서 유루라는 것은 '번뇌를 가진', '번뇌에 더럽혀진'이라고 하는 의미이며 무루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불교의 목적은 고뇌하는 현실세계, 미혹한 세계를 떠나 열반,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유위 유루의 세계로 부터 무위 무루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유위 유루의 세계는 사제에서 볼때 고제와 집제이며 무위 무루의 열반은 즉 멸제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부터 그 소멸로 나아가는 방법 즉 도제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유위이지만 이미 번뇌를 떠나있는 도정에 있기 때문에 무루이다.
(3) 다르마(dharma, 法)의 이론
설일체유부라는 명칭은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설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파는 독특한 다르마의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하여 연기 - 유위 - 무상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다르마라는 말은 극히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어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의논을 거듭해 왔으나 그것을 종합하면 (1) 법칙, 법, 기준 (2) 도덕, 종교 (3) 속성, 성격 (4) 가르침 (5) 진리, 최고의 실재, (6) 경험적 사물 (7)존재의 형태 (8) 존재의 요소 등의 의미로 다르마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다. 한역 불전에서는 이 모든 의미가 법이라는 하나의 역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는 다르마라는 어휘를 위의 (6),(7),(8) 중의 어느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존재, 현상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서로 얽힌 무수한 법(法)의 이합집산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이같은 법의 이론의 기본적 입장이다.
완성된 설일체유부의 이론에 의하면 존재의 요소로서 법을 75가지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다섯 가지 그룹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이른바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고 한다. 오위라는 것은 색법(물질의 요소, 11), 심법(마음, 1), 심소법(마음의 작용, 46), 심불상응행법(물질도 마음도 아닌 관계, 능력, 상태 등을 나타내는 요소, 14) 및 무위법(3)을 말한다. 이러한 75가지의 법은 상호 다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같은 인과관계 위에서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세계이다. 그렇다고 할때 그러한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기본요소인 법(法, dharma)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있다. 즉 존재한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물은 무상하다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유위의 다르마 전체에 공통된 성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순간성(刹那滅)이며, 다른 하나는 삼세실유성(三世實有性)이다. 이 두 성질은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사실 다른 학파로부터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나 실은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는 이 둘에 의해 제행무상을 변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 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을 '법의 이론'에서 본다면 실은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유위제'법'(有爲諸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 제'법'의 하나하나는 시간적 지속성을 전혀 갖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모두 소멸해버리는 찰나멸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순간에도 그대로 컵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선행한 제법을 상속하여 그것과 동류의 법이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계속 생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번째 순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비지속적, 순간생멸적인 제법의 연속적, 비단절적인 생기 위에서 컵의 존재라고 하는 시간적 지속 현상이 우리의 경험적 세계의 사실로서 있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법이 생기한다고 해도 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소멸한다고 해도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기라는 것은 '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현현하는 것이며,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나타난 이전의 법은 미래의 영역에 존재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사라진 이후의 법은 과거의 영역에 존재한다. 미래의 영역으로부터 나타나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동안의 한 순간의 법은 현재에 존재한다. 미래에도 존재하며 현재에도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한다. 법은 삼세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변함없는 특성(自性)을 갖고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삼세에 실유한다.
이와 같은 유부의 순간적 존재론에 대한 멋진 비유가 있다.
필림의 흐름은 리일에서 리일로 움직여 그침이 없으나 필림에 현상된 한 토막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리일 속에 있을 때도 램프에 조명될 때도 다음 리일에 감겨진 뒤에도 움직이거나 병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에 차례차례로 투사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면서, 그것이 무수하게 부단히 연속함으로써 변화하며 활동하고 시간적 경과를 가진 한편의 줄거리를 엮어간다. 첫 리일은 다르마의 경과라는 삼세 중의 미래의 영역에 해당하고, 램프에 의하여 조명되는 순간은 현재에 해당하고, 나중의 리일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한다. 필림의 한 토막 한 토막이 곧 다르마, 엄밀히 말하면 같이 생하는 무수한 다르마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의 활동변화에 의하여 엮어지는 이야기는 정녕 현실의 경험적 세계 즉 제행무상의 세계에 해당한다. 리일에서 리일로 필림이 흐르듯이 다르마의 시간은 횡으로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있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야기의 경과와 같이 경험적 시간은 그것을 종으로 관철한다. 그 두가지 시간의 교차점을 절대의 현재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들 경험적 세계에 사는 자는 언제나 거기에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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