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스크랩] [설선대법회] 10대 선사들의 공부법

수선님 2019. 1. 27. 11:30

설선대법회 10대 선사들의 공부법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 편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순간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자기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고 있다니, 깨달은 사람이나 마음을 볼 수 있지 어떻게 중생들이 마음을 볼 수 있느냐고 보통사람들은 말한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알았다 해서 비로소 물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물속에서 살게 되고, 그것을 몰랐다 해서 물밖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물을 알았거나 몰랐거나 항상 물속에 있다.    <사진>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

그와 같이 우리가 지금 조용히 앉아 있어보면, 그것이 공부가 됐든 안됐든, 괴롭든 괴롭지 않든, 깨달았든 깨닫지 않았든 간에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다.

18살에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미륵암 마루에서 ‘심시불(心是佛)’이란 글귀를 보고 순간 깨달았다. 그 글을 읽기 전까지 그렇게도 멀게만 느껴졌던 3천년 전의 부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버리는 경험이었다. ‘마음 안 가진 이 없으니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환희심이 절로 났다.

간화선 수행은 이처럼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그 요체가 있다. 선은 내가 자신 속의 불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선은 본래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속의 불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 깨닫는 게 핵심
달 가리키는 손가락 잊어야 바로 봐
닦을 것 없는 자리에 갔을 때 '견성'


그러면서 마음의 정체를 확인해 일생생활 속에서도 마음이 ‘해도 한 바가 없이’ 물들지 않고 생활하게 된다. 임제 선사나 황벽 선사는 “닦을 필요가 없다,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내자마자 십만 팔천리나 틀려먹었다”고 했다. 자기가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이미 잘못됐다는 말이다. 달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십년 동안 손가락만 오매일여로 보고 있었다고 하면 달을 볼 수 있겠는가?

화두공안도 ‘이뭣고’ 하든지 ‘무(無)’ 하든지 처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하다보면, 진짜 화두는 화두가 없다. <선문촬요>에 보면 화두공안이 하나도 안 나온다. 화두공안을 손가락에 비유하면 손가락을 제쳐놓고 달을 바로 가리켜 줬다. 오히려 손가락을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 보는 사람이다.

실지 화두공안의 참뜻은 닦을 자리 없는 자리에 갔을 때에 깨닫는다. 선사들은 깨달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닦을 것이 없다 까지 간다. 그게 힌트다. 그런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닦을 것이 없다’고 하면 안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닦을 것이 없다는 그 말에 정말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의심이 안 날 수가 없다.

 
내 공부가 그랬다. 화두밖에 몰랐고 평생 화두공안을 들었다. 수행자에게 가장 큰 장애물인 수마도 이렇게 조복을 받았다. 정진이 끝나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산 하나를 걸어 왕복하고 어슴프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아 예불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인연 닿는 대로 오는 것을 취하되 한번도 어떤 것에 매이지 않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 편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

화두를 투과한 깨침의 세계는 눈앞의 중중무진한 모든 관문이 싹 없어지고 진리의 세계가 현전(現前)하게 된다. 화두참구는 이처럼 심성(心性)을 찾는 공부다. 즉 마음의 고향이란 곳에 모든 진리와 모든 덕과 복이 다 갖춰져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미 다 갖춰져 있는데 ‘참나’를 알지 못해 쓰지도 못하고 수용하지도 못하면 되겠는가?

마음의 고향, 심성의 본향에는 천 사람 만 사람이 동일하게 갖춰져 일체 차별이 없다. 바른 선지식, 바른 지도자를 만나서 바른 수행을 듣고 바르게 배워서 연마하면 다 된다. 아무리 서울이 멀다 해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달만 걸어가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심성을 보면 8만4천 가지 법을 알게 된다. 견성하면 일체가 차별이 없고, 천차만별이 다 한가지다. 밝은 대낮에 사물을 보면 열 사람이 다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밤중에 보면 다 제각각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백일하에 심성을 본다면 일체 시비장단이 없다.

간화선 수행은 바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길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선지식, 지도자를 찾아 바른 지도를 받아야 한다. 참구하는 법, 바로 참선을 지어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만 바로 받아 놓으면 어디든지 산이나 들이나 장사를 하나 기업을 하나 아무 관계가 없다. 마음으로 지어가는 이 참선수행법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오직 화두를 참구하겠다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다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럼 화두참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선을 할 때는 항시 2미터 앞 아래에다 화두를 두라. 이러면 상기도 피하고 바른 자세가 유지된다. 항시 아래에다 두라는 것은 화두가 달아나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용을 쓰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힘이 들어가면 상기(上氣)가 돼 머리가 무거워서 더 이상 화두참구를 하지 못하게 된다. 화두참구할 때 항시 생각을 아래에 두어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는 뜻에서 아래에 두라는 것이다.

2미터 앞에 화두 놓고 바른 자세를...
화두 달아나면 힘 들어가 상기 될 수도
호흡 신경 쓰지 말고 오매일여 참구를


그리고 2미터에 두라는 것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인데, 2미터 앞에 화두를 두면 바른 자세가 유지된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야 오래 앉아도 피로가 없고 위장에도 부담이 없다. 허리가 굽으면 피로하고 위장에도 탈이 생길 뿐만 아니라 혼침 망상에 끄달려 화두를 성성하게 들 수가 없다. 또 이렇게 2미터 앞에다 화두를 두면,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일을 하나 밥을 하나 목욕을 하나 늘 화두가 무르익어진다.

특히 간화선에서 화두가 핵심이 되니 호흡에는 신경을 쓰지 마라. 호흡 장단을 맞추려니 화두 일념이 잘 안 된다. 화두는 일념삼매가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화두일념이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어나나 쭉 흘러가야 된다.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일념으로 흘러가야 한다. 일념삼매가 지속이 안 되면, 화두타파가 안 된다. 일념삼매가 쭉 지속이 되는 과정이 오면, 그때는 진의(眞疑)가 발동이 돼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서 밤이 되는가 낮이 되는가 다 모르는 게 돼 일념삼매가 된다. 그렇게 지내다가 흐르고 흐르다가 며칠이고 계속되다 보면 찰나에 듣는 찰나에 화두가 깨지게 된다.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참구하는 동시에 의심이 병행된다. 제목과 함께 의심이 오매불망하면, 의심삼매ㆍ일념삼매의 경계에 이르게 되고, 그럴 때 전후지 일체분별이 사라지게 된다. 의심과 화두제목은 수레의 양쪽 바퀴마냥 항상 함께 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돼서 의심이 커지고 화두일념이 되면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 편 

 

 석종사 금봉선원장 혜국 스님.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말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내 감정에 속지 않고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얘기다. 여러분의 몸 안에서 몸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주인공, 법문을 들을 줄 알고 눈을 뜰 줄 알도록 하는 소소영영한 그 기운이 내 마음의 주인공일진대 주인을 내버려두고 감정이 하자는 대로, 도적놈이 주인노릇 하도록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

화두 드는 수행자는 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는지 조사관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화두 조사관을 타파하고 도를 깨닫는 걸 목적으로 해야지, 하는 도중에 뭔가 나타나거나 뭔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안 된다. 오늘부터는 화두를 등불로 삼고 스승으로 삼고 화두에 의지해서 망상번뇌에 속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자기 감정에 속지 않아야 진짜 주인"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 ‘참나’인가. 누가 ‘참나’인가.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지만 ‘나’라고 하는 것은 눈을 뜨라면 떠서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입으로 말하지만, 우리들 몸에서 영혼이 딱 나가면 눈이 떠지는가. 그럼 영혼이 나인가. 아님 이 몸뚱이가 나인가. 화두참구법은 참나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참선 공부는 깨어있는 방법이다.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우는 공부법이다.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워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시기질투, 번뇌망상을 화두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화두는 부처요, 망상은 중생이니 ‘중생’을 ‘부처’로 바꿔야 한다. 내가 내 마음 안으로 돌아가서 내 마음의 눈만 ‘딱’ 떴을 때, 내가 부처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나와 네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뭣고’ 하는 ‘이’ 하는 놈이 누구냐? 나는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하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번뇌망상을 부처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것을 ‘마음 농사’라 한다. 매일 ‘이뭣고’ 하며 내 마음 농사를 얼마나 지었는가, ‘이뭣고’를 스승 삼아 ‘이뭣고’를 할 줄 아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 편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부처님께서 깨친 법은 곧 연기이자 공이기에 무아인 것이다. 보편적 진리이고, 사실이고 현실이다. 이에 위배되는 것은 허구이고, 허상이다. 이를 철저히 깨는 것이 선종이다.

선종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중도연기를 가장 정확히 계승한 종파다. 선은 다만 체험을 강조할 뿐, ‘본래 성불’임을 철저히 계승한 종파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나니 내안에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내 안에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래서 선어록에도 ‘깨달을 것이 없는 것을 깨닫는 게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깨칠 것이 있고 얻을 게 있다는 공부는 그래서 잘못된 선 공부다. ‘본래 성불‘임을 알고 공부 하는 게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공부다.

착각을 없애면 될 뿐 다른 수행이 필요 없다. 뭔가 있어서 닦는 게 아니라 유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수행이다. ‘깨칠 게 있다’ ‘얻을 게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쳐서 얻을 게 있다'는 착각 벗어나야

‘닦을 것이 없음을 닦는’ 무수지수(無修之修)의 단박깨침(頓悟)을 강조하는 정통 조사선은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한 생각 일어 난 그 자리를 돌이켜 비춰 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공부다.

향곡 스님이 계셨던 묘관음사에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닌 이것이 뭣고?’하는 화두를 받고 정진을 시작했다.

동암에서 혼자 공부할 때<육조단경> “정혜불이품”에 ‘정혜가 하나가 되더라도 비도(非道)다. 하나가 되어 통류해야 한다’라는 대목을 보다가 이해도 아니고 체험도 아닌 어떤 느낌이 왔는데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말이 이해되면서 안목이 열렸다.


범어사 금어선원 유나 인각 스님 편

 

 범어사 유나 인각 스님.

차라리 생명을 내 놓을지언정 화두를 잃지 않겠다는 각오로 공부하라. 이 공부법은 화두공안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참구하는 간화선으로 귀결돼 있다.

처음에는 간화선 수행을 한 것은 아니다. 출가하기 전, 주력수행을 하는 노인을 통해 주력 공부를 시작했다. 10여 년 주력공부로 여러 가지 주력적인 수행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후 도인을 찾아 전국을 다니다 범어사로 출가해 공부를 이어가던 중, 어느 스님의 ‘의법불인(依法不人)’이라는 법문에 크게 느낀 바 있어 강원 졸업 후 범룡 스님의 토굴을 찾아 <화엄경>을 수학했다.

그 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경을 읽으며 한철을 배웠는데, 범룡 스님은 “경 공부가 끝나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행 정진해야 부처되지, 말짱 소용없다”고 말씀을 하셨다.

해제 될 때 쯤 ‘아, 선방에 가야 겠구나’ 그렇게 결심을 하게 됐다.

"생명 내 놓을지언정 화두 잃지 말라"

선방에 가기 전 21일 동안 불보살님전에 서원을 세워 참선 수행에 대한 확신을 얻고 참선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엔 10년 동안 재미를 붙여온 주력 공부가 장애가 됐다. 그러나 죽어라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날 아침에 홀연히 화두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할 정도로 화두에 힘을 얻게 됐다.

손을 들면 산도 밀려갈 것 같고 발을 뻗으면 저 땅도 꺼질 것 같은 힘이 생겼다. 그렇게 되니까 잠도 안 오고 아픈 것도 없었다.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팠다. 영리한 사람은 대체로 뭔가 금방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좇지만, 결국은 망식(亡息)을 벗고 참된 자아를 스스로 깨닫는 데 선의 큰 뜻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근기가 달라 각자의 수행법을 따르되 신명을 받쳐서 해야 한다. 신심(信心)과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 자기마음을 확실히 알아차릴 것 같으면, 청정진여(淸淨眞如)의 진불(眞佛)을 알게 된다.

선은 남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듯이 공부도 자기가 열심히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실참을 해야 한다.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 편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

하늘의 해가 떠올랐다 지고, 또 계속 떴다지고 하면서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 사람은 금방 죽음 문에 당도한다. 세월이 무상할 뿐만 아니라 이 삶이란 것도 역시 고달파서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법이다. 누가 알겠는가. 석자(三尺)도 못 되는 땅에 내 몸이 묻힐 것을. 금생에는 이 몸뚱이가 나(我)라고 생각했지만 한 줌 재가 되어버릴 것 같으면 과연 어떤 것이 나인가.

사람으로 태어나 바른 삶이라는 것은 가장 가깝게 있는 나를 바로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잘 사는 방법이다. 나를 모를 것 같으면 바르게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참 행복은 얻어질 수가 없다. 오직 이 순간에 가장 가깝게 있는 내 면목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선(禪)이라고 한다.

참선을 하려면 첫째, 마음을 비워야 한다. 수많은 생각이 얽히고 설켜 한 찰나간에 중생념을 다 지우고 비워야 된다. 그걸 다 비울 것 같으면 본래 물질이라는 것이 없고 마음이라는 것도 없어서, 물질과 마음이 없을 때 온전한 참 법계가 드러나고 내 마음자리가 드러나게 된다.

모든 중생 구제하겠다는 큰 원 세워라

‘이뭣고’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공부하는 것이 선이다. 선공부는 오로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화두를 들었을 적에 그것이 공부에 바로 들어가는 법이다. 그래서 나를 깨닫는 가장 빠른 길이요 가장 바른 길이 참선법이요, 부처님께서 역대 조사에게 전해준 법도 바로 이 법이다. 화두 하나 잘 들어서 나 하나 바로 깨달을 것 같으면 더할 나위 없는 무한공덕, 무한지혜가 드러나서 현실의 삶 속에서 신심이 저절로 실해지고, 현실을 바로 보니 욕망과 그 증애(憎愛)에서 저절로 벗어나게 되고, 지혜심성이라, 마음 편안해지고 깨끗해지고 고요해지게 된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다. 그러면 마음을 닦는 사람이 항상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항상 큰 서원을 가지고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마음가짐, 넓고 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모든 중생을 다 내가 건져주겠다는 그런 원을 가지면서 공부를 하면 공부가 훨씬 빠르다.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 편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

화두를 잘 든다는 말은 성성(惺惺, 지혜의 측면) 적적(寂寂, 선정의 측면)한 가운데 화두의심이 간절하게 뭉쳐 있어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치 화두 의심은 큰불덩어리 같아서 큰불덩어리에 나비나 벌(망상)이 접근 할 수 없는 것처럼 간절히 의심하는 가운데 망상은 저절로 쉬어지게 되어 있는 가장 힘 있는 수행법이 간화선이다.


그럼 간화선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의 ‘참마음’, 즉 본래부터 부처님과 내가 한점의 오차없이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신심, 큰 발심(분심), 큰 의심(화두의심)을 위해서는 일상의 삶이 무아, 공, 연기의 이치를 잘 알아 자기(에고)를 비우고 자비심과 소욕지족으로 용심(用心)을 잘하는 그런 삶이 돼야 한다. 망상만 놓아버리면 본래부처다.

망상을 따로 버리려고 하지 말고 화두만 챙기면 된다.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없으면 하루 1시간씩이라도 간절하게 하면, 점점 시간을 늘려가며 간절히 하다보면 나중에는 빨래하면서 밥 먹으면서도 다 된다. 그러면 화두를 착 드는 순간에 망상이 없어진다. 그래서 참 마음의, 진리 생명의 힘으로 사니까 나날이 좋은 날이 된다.

"간절하게 의심하면 망상 저절로 사라져"

가야산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하고 지내던 젊은 시절, 성철 스님은 “수행자는 첫째로 명리심을 버려야 한다”고 수좌들에게 강조했다. 그간 수행을 하면서 늘 그 말씀을 늘 새겼다.

그리고 스님에게 ‘마음도 물건도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란 화두를 받았다. 마침

<원각경>의 ‘문수장(文殊章)’에 본 ‘세상은 무명(無明)에 덮여 있다’는 구절은 마음과 세계의 본질이라고 여긴 것이 실상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에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후 ‘무명이 아닌 그것’을 계속 참구했다.

화두의 생명은 바른 의심이다. 간절하게 의심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면, 성성적적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내가 그랬다. 오로지 의심만 남아 초롱초롱하게 깨어있는 절대고요다. ‘백지’나 ‘어둠’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미지 조작이 완전히 소멸된 경지를 보게 됐다.


축서사 선원장 무여 스님 편 

 

 축서사 선원장 무여 스님.

첫째는 대의정(大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이다. 화두는 외우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크게 일으키면 크게 깨치고 적게 일으키면 적게 깨치는 것이다.

둘째는 간절하게 해야 한다. 옛 조사들은 화두를 들 때 ‘간절 절(切)’자 하나면 된다고 했다. 즉 며칠 굶은 사람이 밥 생각 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너무도 절실해 눈물이 날 정도가 돼야 비로소 화두를 제대로 들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화두는 꾸준하게 쉼 없이 들어야 한다. 새벽 잠에서 깨어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쉼 없이 꾸준하게 들어야 한다. 옛 조사 스님들은 오뉴월에 닭들이 알을 품듯이 하라고 비유했다.

"대의정 일으켜 쉼없이 화두 들어야"

나의 간화선 수행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은사인 희섭 스님의 죽비 아래서 선풍(禪風)을 쏘이면서 시작했다. 수행자로서 청정하게 사는 법을 은사 스님에게 배운 뒤 화두를 일념으로 들었다.

간화선 공부는 언어가 끊어지고 마음작용이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를 깨치는 것이다. 그래서 참선자는 선지식에 의해 공부길이 열리고 지혜의 눈을 얻어 공부의 힘을 얻는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종의 조사들이 정한 법문인 화두를 통해 조사들이 보여 온 언어나 종사가 심지를 밝게 깨달음 기연 등을 공부규범으로 삼았다.

실참을 하면서 “왜 ‘무’라고 했을까”하고 끊임없이 의정을 일으켰다. 이유는 간단했다. 깨치기 위해서였다. 화두에 의심을 일으켜 그 의심이 간절하게 하고 점점 순숙하게 해 마음속에 가득해 나와 화두와 세계가 온통 의심덩어리가 됐다. 궁극에는 그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게 되니 마음과 기운이 평온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 화두가 간절해진 순간, 화두에 힘을 얻었다. 분명하게 힘차게 들리고 몸이 가벼워졌다.

화두가 몽중일여의 경계가 지나면서 신통하고 불가사의한 안목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해인총림 수좌 원융 스님 편 

 

 해인총림 수좌 원융 스님.

직지인심, 견성성불. 이것이 참선법을 단적으로 가장 간명하게 설명한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의미다. 돌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의 자리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하는 셈이다. 구경묘각을 이루는 것, 불성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종지다.

간화선이 전통적인 공부 길로서 자리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조사공안인 화두가 활구(活句)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학문과 철학은 언어문자를 통한 논리와 사상이 적용함으로써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선문의 활구인 화두는 모든 말과 생각이 함께 끊어져서 부여잡을 만한 아무 근거도 없고, 아무 맛과 취향이 없는 데에 그 생명이 있다.

 

아무리 심오한 불교교리라 하더라도 이는 모조리 사구(死句)로 규정하며, 아직 생사를 벗지 못한 것이다. 활구( 아래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 아래서 깨치면 자기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지식 확고히 믿고 대의심 내야"

그럼 활구인 조사공안을 어떤 방법으로 참구해야 하는가? 가장 대표적인 화두가 조주의 ‘무(無)’자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고 했는데,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하고 항상 끊임없이 간절히 의심하고 참구하는 방법이다. 동시에 누구에게나 널리 적용시킬 수 있는 보편적인 공부 길이다. 이 무자 아래서 자성을 활연히 깨치면 무량겁래의 생사를 벗고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니 우리는 각자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써 결판내어 당인의 본래면목을 되찾아야 한다.

또 선지식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화두를 간하며 일으키는 대의심, 바로 이것이 간화선 수행의 핵심이다. 30년 넘게 해인사 선방에서 참선수행을 해오면서 ‘무엇이 불교의 본령인가’ 궁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선과 교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 말할 수는 없고, 만약 지나치게 교에 치우치다 보면 불교의 핵심종지가 흐려질 수도 있기에 선, 교 모두 언제나 동일하다는 인식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불자라면 누구나 자성을 깨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선문이 가장 수승한 법문임을 확인해야 한다.


봉암사 태고선원장 정광 스님 편 

 봉암사 태고선원장 정광 스님.

초발심이다. 초발심은 일체의 공덕이 다 갖춰져 내가 이미 부처라는 절대확신을 갖는 단초가 된다. 또 수행의 결과에 현격한 차이가 벌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초발심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까지 이 마음을 쉬지 않겠다는 약속이고, 선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된다.

참선을 하다보면, 일체의 차별이 벗어나 타성일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말과 글, 행위가 선에 일치하게 된다.


화두는 주관과 객관, 능(能)과 소(所)를 뛰어넘어 본래의 뜻을 잘 드러내는 관법이다. 관하는 사람도 관하는 법도 뛰어넘어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도록 한다.

화두를 드는 데에는 출·재가의 구별이 없다. 화두 들려고 따로 시간을 낼 필요도 없다.

‘이뭣고’를 드는 순간, 전후가 재단돼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는 ‘나’라는 중심점마저 끊어버려 태허공(太虛空)처럼 텅 비워져 일체가 끊어진다.

'이뭣고' 드는 순간 전후 끊기고 空

선을 선택한 이유는 이처럼 직접 체험하고 싶어서였다. 교설(敎說)로도 체험이 가능하지만, 둘러 가는 것보다 간명하고 곧바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길이 바로 선이었기 때문이다.

출가 이후, 선에 뜻을 두고 전국 선방을 두루 다녔다. 그러다 20여 년전 봉암사와 인연을 맺고 가부좌를 틀었다. 오래있었다고 주위에서 날 ‘봉암사 터줏대감’이라고 부르던데, 나로서는 수행을 더 잘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간화선 수행의 특징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을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세계가 청정하기에 모든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허공 같이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것이 다 이뤄지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 정신집중을 한다고 용맹정진 하는 게 아니다. 수행자는 일심으로, 변치 않은 마음으로, 불교에 대한 근본이치에 마음을 두고,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 어려움이 바로 코앞에 닥쳤을 때일수록 ‘쉬고 또 쉬면서’ 수행하는 것. ‘딱’ 쉬게 되면 천만인을 상대해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되는 그런 경지를 간화선 수행을 통해 얻게 된다.

 

 

[출처 : 붓다뉴스]

 

출처 : 海印의 뜨락
글쓴이 : 혜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