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삶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
야단법석 ‘시즌 2’ 개막…도법스님-현응스님 즉문즉답
사부대중이 함께 모여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야단법석 시즌2’가 문을 열었다.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스님)는 오늘(9월19일) 오후 7시 서울 조계사 도심포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생명평화 야단법석 시즌2’를 개최했다.
첫 번째 순서의 화두는 깨달음. 불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깨달음의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결사추진본부장 도법스님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교육원장 현응스님과 즉문즉답을 나눴다.
한국불교의 일반적 수행풍토 안에서 ‘신비화’ ‘고원화(高遠化)’되어 있는 깨달음의 뜻을 좀 더 쉽고 현실적으로 풀어보자는 취지였다. 교육원장 현응스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깨달음이란 삶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규정했다.
스님은 “깨달음이란 부처님이 설한 지혜를 표현하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라고 운을 뗐다. “중국 선종이 마치 깨달음이라는 지고의 경지가 있는 것처럼 설정하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불교에게 깨달음이란 어쩌면 무거운 질곡”이라는 지적이다.
이어 “초기경전에 보면 깨달음(悟)이란 개념을 표현하는 구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며 “단지 지혜란 올바른 이해에 도달한다는 의미고 그것이 보리이자 정견”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불행이란 삶과 세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빚어진 습관과 행위, 제도에서 나타난다”며 “해탈이란 것도 고정관념과 잘못된 세계관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인지력이 확충되다 보면 올바른 이해에 가까워진다”며 단박에 깨닫는다는 돈오(頓悟)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사실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치열한 수행으로 알아지는 것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또한 원시불교에서의 참선이란 무념무상의 수행이 아니라 문자가 없던 시대 부처님의 육성법문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음미하는 일이었을 것“이라며 깨달음에 관해 실제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경전 역시 “확고부동한 성스러운 말씀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며 ”당대의 지식수준과 사회환경을 고려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삶과 세상이란 존재의 속성은 변화와 관계이며, 이를 연기와 무아, 공으로 정확하게 설명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혜”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학적이라기보다 합리적”이라며 “특히 자비와 윤리라는 실천적인 영역에서 불교사상은 도덕과 입법의 기초로서 다양하게 활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야단법석을 주관한 도법스님은 “불교가 꼭 신비로워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게 불교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깨달음이란 멀리 있거나 먼 훗날 이뤄지는 게 아니라, 치밀하고 성숙된 사유로 얻을 수 있는 지혜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지혜를 현실에서 응용하고 실천할 때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요지다.
한편 야단법석 시즌 2는 오는 11월28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조계사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다. [출처: 불교신문 | 2012.09.19]
소 타고 소 찾는 이에게 요긴한 건
옆사람에게 ‘내 소 어딨냐?’고 묻는 것
이학종 기자 | 미디어붓다
‘야단법석 시즌2’의 첫 번째 순서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9월 19일 오후 7시부터 조계사 도심포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다.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 스님)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도법 스님과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즉문즉답 형식으로 이어졌다. 도법 스님이 ‘깨달음’을 주제로 질문하고 현응 스님이 자신의 견해를 답하는 형식으로 이어졌다. 마치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할 때 수보리 존자와 문답을 나눈 것처럼.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난장처럼 구겨진 한국불교의 심장 조계사에서, 퍼포먼스적 행사가 아닌 깨달음에 대한 문답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선감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질문자로 나선 도법 스님은 자신의 20여년에 이르는 참선 수행체험과 부처님의 전법명령을 근거로 해 도발적인 질문을 해나갔고, 현응 스님은 자신의 불교관에 입각해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견해를 주저 없이 밝혀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스님의 나눈 문답을 소개한다. <편집자>
*도법 스님: 금오, 성철, 서옹 스님 등 깨달은 도인들의 삶을 보며 나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깨달은 분들의 삶이 저 정도라면 그렇게 죽기를 무릅쓰고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원장 스님의 생각은 어떤가?
*현응 스님: 금오, 서옹 스님은 인연이 없었고, 해인사에 살다보니 성철 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았다. 그분들이 도인이라는 생각보다는 너무나 높고 어려운 스님들이라는 생각으로 범접하지 못하고 살았다. 어려운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뿐 도인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
*도법 스님: 귀 있는 자는 와서 들어라,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 나의 가르침은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철 스님 등 큰스님들의 말씀은 그렇지가 않다. 깨달음을 난행으로 보고 있으며, 먼 훗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깨달음은 즉각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인가? 깨달음은 그 내용을 지금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적용해서 쓸 수 없다면 깨달음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현응 스님: 이 질문은 깨달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질문이 안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깨달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깨달음이라는 표현은 마치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오해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그 영향을 한국불교는 그대로 이어왔다.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에서 어떤 함정이랄까, 아니면 늪이랄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어쩌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깨달음을 어렵게 표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은 ‘내 삶과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단박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박, 이런 것은 중국 선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말이다. 경전에는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표현하고 있지 무엇인가를 딱 깨닫고 어쩌고 같은 내용은 없다.
*도법 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해되고 실증되고, 나아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자. 부처님은 전법명령에서 나와 그대들은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던 신과 인간의 굴레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응 스님: 경전도 구전을 기록한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경전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당시 브라만이 지배하던 인도사회를, 인간의 굴레는 카스트 제도 등 불합리한 사회제도가 아닐까.
*도법 스님: 한국불교인들은 깨달음에 대해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깨달음을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뭇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떠나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거리가 있다.
*현응 스님: 나는 경전을 대할 때 일단 한 수 접고 본다. 절대화를 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해탈)은 실재론(리얼리티)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이다. 잘못된 세계관, 견해, 이해, 또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잘못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도법 스님: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중도를 깨달았다고 되어 있고, 중도는 팔정도라고 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 중도이고 팔정도라면 굳이 수십 년 간 참선을 하고, 어려운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잘 대화하고 이해하고, 거기에 기반한 삶을 살아간다면 되는 것이 아닌가. 대화만 잘해도 깨달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데 교육원장 스님의 생각은 어떤가.
야단법석 시즌2. 첫번째 '깨달음'에 대한 문답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현응 스님: 나는 팔정도가 깨달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삶과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면, 존재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삶과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상,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성과 관계성으로 잘 파악하는 것이고,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팔정도는 실천도라는 생각이다. 삶의 속성을 잘 관찰하고 음미하고 성찰한다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팔정도와 깨달음은 심하게 말하자면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변화성, 즉 무상과 관계성, 즉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 정견이다.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팔정도가 되었든, 사섭법이 되었든 육바라밀이 되었든, 그런 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도법 스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 이것을 깨달으면, 신의 굴레, 인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고 ‘본래부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응 스님: 그것이 대단한 깨달음 같지는 않고 상식적 깨달음 같다.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이 아닌가. 세상의 본질이 8정도일 수는 없다. 무상, 무아, 연기, 공성으로 표현되는 언어들은 매우 소박한 언어이어서 21세기 세상(의 문제들)을 그것으로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 용어들은 우주를 탐험하고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 ‘남섬부주’를 운운하던 시대의 용어들이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현대물리학이나 신경과학 등의 발전으로 존재론에 대한 그 심오한 부분까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치열한 참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사고가 매우 중요한 시대이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두 축으로 하고 있는데, 지혜는 존재론에 대한 이해의 부분이고, 자비는 팔정도 등 판단과 선택의 부분이다. 8정도는 주로 실천의 영역이고, 깨달음의 영역, 즉 존재의 영역은 연기 무아, 무상, 공의 부분이다.
*객석: 교육원장 스님이 경전은 소박한 것이고, 오히려 현대 과학이나 의학 등이 더 깊고 넓다는 말씀에 혼란스럽다.
*현응 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재(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언제 어디서든지(시공을 초월해) 유효하고 중요한 가르침이다. 불교는 특성상 신이나 섭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즉 합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합리적 영역, 윤리적 영역, 실천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무상, 무아, 연기 등에 대해 초기부파불교에서 실재론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었고, 대승에서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 부분은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예컨대, 콩을 심어 콩을 수확할 때 어느 부분부터가 콩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꽃 필 무렵? 열매 맺을 무렵? 어느 순간도 콩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생의 개념이 나오고, ‘무생법인’을 깨달았다는 말이 나온다. 멸도 마찬가지이다. 불생불멸의 용어가 나오는 것이 불교의 법성과 깊게 연관된 것들이다.
존재를 설명하는 데 있어 현대학문으로도 미진한 부분이 있다. 계속 이 부분은 발전해나가겠지만, 이 점에서 볼 때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불교의 연기, 무아, 무상, 공성 등의 통찰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진화해온 종교이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집단지성이라고 할까?
내가 말한 소박하다는 표현은 예컨대, 정견, 정어 등과 같은 표현들이 현대인들에게 현실감이 떨어지게 들린다는 뜻이지 (그 깊은 의미까지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도법 스님: 5비구, 야사 등 50명의 출가자, 육조 혜능, 원효 등은 깨달음을 대화를 통해서 이루고 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삶의 이치를 이해하게 되고 공감하게 되니까 실천하는 것이라고 본다. 불교에서 말하는 삶의 이치는 이해의 영역인가? 깨달음의 영역인가?
*현응 스님: 불교의 가르침은 ‘존재란 무엇인가’를 따지는 영역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따지는 실천의 영역이 있다. 앉아서 궁구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없다. ‘어떻게 살아라’에 부처님 가르침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존재의 속성을 파악하는 것은 현대과학에 맡기는 편이 좋겠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하기를 ‘종교적 믿음은 참 해롭다’고 했다. 종교적 신념은 물론 기독교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무 근거도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러셀이 아마도 불교의 합리성을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문답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에 동감한다. 깨달음은 관찰과 성찰과 지식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도법 스님: 평화를 원하면 평화의 씨앗을 심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깨달음은 모여서 잘 대화하고 토론하고 성찰하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흔히 선가에서 깨달음을 설명할 때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 표현을 쓴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사람이 소를 쉽게 빨리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화하면 된다. 대화하는 사람에게 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면 그는 네가 타고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런 것이다.
*현응 스님: 끝으로 여러분들, 특히 재가자들에게 교육원장으로서 불교공부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다. 불교를 공부할 때 ‘불교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접근보다는 현실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이 생겨날 때마다 ‘불교에서는 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어떤 해결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의 관점으로 공부하기 바란다. 그러면 불교가 여러분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닌 직접 관계되는 살아 있는 가르침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것이 바른 불교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님의 숫자가 1만 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민의 수는 남북을 합쳐서 7천만에 이른다고 한다. 스님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0.01%에도 미치지 못한다. 0.01%의 불교를 따라하려고 하지 말고 99.99%에 이르는 불교를 하시기 바란다.
이날 토론에서 일부 청중은 ‘깨달음이 너무 쉽게 이야기 되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휠체어를 탄 한 불자는 ‘휠체어를 타고 길을 갈 때, 오르막이나 막힌 길을 만날 때 제 휠체어를 밀어주는 사람들이 제겐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이라며 ‘그분이 스님이든 재가불자든, 십자가를 든 기독교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분들 중에 불자들이 제발 많았으면 좋겠다. 불자들은 스님들의 말씀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던데, 스님들께서 불자들을 잘 가르쳐주시기 바란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야단법석 시즌 2는 오는 11월28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조계사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