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점수(頓悟漸修)와 초기불교의 수행
임승택/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 이 논문은 2010년도 경북대학교 학술연구비지원사업에 의해 작성되었음.
1) Ⅰ 시작하는 말.
Ⅱ 돈오점수의 의미.
Ⅲ 팔정도의 구조.
Ⅳ 돈오점수와 초기불교.
Ⅴ 마치는 말.
요약문
지눌의 돈오는 해오로서 이지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문자적 이해에서 그치지 않으며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한 돈오란 사실상 증오와 동일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성향과 습기가 남아있는 한에서 증오와 구분될 뿐이다. 지눌에게서 돈오와 점수는 논리적으로는 선후의 관계에 놓이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돈오 이후에 별개의 점수를 닦는 것이 아니라, 돈오 자체로써 곧바로 새로운 차원의 닦음이 시작되기 때문
이다.
본고의 논지는 바른 견해 혹은 바른 깨달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참된 닦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고는 이것의 전형을 지눌의 돈오점수에서 찾았고, 또한 초기불교의 팔정도와 사성제 등에도 이것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조명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불교와 초기불교 수행론 사이의 소통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며, 또한 각자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시작하는 말
한국불교에서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그는 원효(元曉, 617-686)와 더불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두 인물로 꼽힌다. 원효가 한국불교의 이론적․
교학적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면, 지눌은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영역의 회통적 체계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선(禪) 사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그가 내세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가르침은 여러 찬반의 입장을 불러일으켜, 20세기 후반 한국불교학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필자는 기존의 연구를 통해 위빠사나(vipassanā) 혹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지눌의 삼문(三門) 체계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다. 위빠사나와 지눌의 선사상은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의 실재를
수용하는 것을 통해 괴로움이 종식된 이상적 삶을 추구한다. 또한 지적(知的) 이해의 속박을 넘어설 때 참된 자유의 경지가 펼쳐질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한다. 더불어 교리적 가르침을 중요시하며
다양한 근기에 따른 여러 가지 실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필자는 이러한 기초적 유사점을 통해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수행과 위빠사나의 회통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지눌의 선사상은 대승불교에 이르면서 정착된 새로운 교리와 실천을 포함한다. 따라서 초기불교 전통의 위빠사나와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특히 그의 삼문 가운데 경절문(徑截門)
에 배속된 화두(話頭)의 방법은 동북아시아권에서 고안․유통된 것으로 화두일념(話頭一念)이라는 폐쇄적 과정을 포함한다. 이것은 수행의 과정과 결과를 따로 분리하지 않는 위빠사나의 점진적․개방적 특성과 비교할 때 매우 이질적이다. 그러나 화두수행이든 위빠사나든 개념적․인습적 사고의 족쇄를 끊는 데에 본래의 취지를 둔다. 그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화두수행과 위빠사나의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기존의 논문에서는 주로 삼문의 체계와 위빠사나의 관련성을 규명하는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하였다. 그러한 작업의 연장선에서 이번에는 돈오점수의 가르침으로 관심의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단박에 깨닫고(頓悟) 점차적으로 닦는다(漸修)”는 돈오점수는 팔정도(八正道)와 사성제(四聖諦) 등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필자는 이점에 대한 조명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불교 수행론의 고유한 측면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올바른 수행이란 올바른 지혜 혹은 깨달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주지하듯이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로부터 출발하여 점차적으로 그 내용을 심화해 나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것은 닦음에 선행하여 바른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그간 초기불교 수행론 분야를 연구해 왔지만, 바로 이것이 돈오점수에 상응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이 사성제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사성제에서 멸성제(滅聖諦)의 실현(作證, sacchikiriyā)은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도성제(道聖諦)의 닦음(bhāvanā)은 그 이후의 실천에 해당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성제의 순서가 돈오점수의 논리를 자체적으로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본고를 통해 필자는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수행이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충분히 접근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서로의 실천방식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제거하고 서로간의 원활한 소통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보편성을 지닌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돈오점수 역시 시대를 뛰어넘는 의의와 효용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가 한국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서 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데서도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돈오점수의 의미
상식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어떠어떠한 가르침이 어떠어떠하다는 것을 전해 듣곤 한다. 그리하여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숙고하게 되고 마침내 옳다는 판단이 서게 될 때 거기에 부합하는 행동에 나선다. 우리는 타당성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더욱 과감한 행동에 나설 수 있다. 그러나 확신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엉거주춤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강한 자신감은 성공을 부르는 동력이 되어 우리의 행위를 이끈다. 우리는 그러한 자신감의 원천을 바른 이해에서 찾을 수 있다. 의혹이 없는 자명한 이해는 그것 자체로서 행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이론과 실천의 상관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돈오점수(頓悟漸修)란 수행적 맥락에서 이러한 상관성의 문제를 조명한다고 할 수 있다.
돈오점수란 말 그대로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차례로 닦아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깨달음이란 ‘모르던 사실을 궁리 끝에 알게 되는 것’으로 거기에는 기존의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과정이 수반된
다. 깨달음에는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극적인 요소들이 개입되곤하며 새로운 차원으로의 인식적 도약이 수반된다. 예컨대 우리는 때가 무르익지 않으면 당연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모르고서 살아
간다. 그리하여 무릎을 치는 극적인 전환의 과정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기존에 품고 있던 완고한 생각들을 내려놓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행위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행위의 양상은 끊임없는 반성과 수정을 요구한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이해하는 돈오점수의 기본 의미이다.
해주스님의 선행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은 돈오점수를 햇빛과 거울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돈오란 마치 햇빛이 만물을 단번에 비추는 것과 같고, 점수란 거울 속의 먼지를 닦아 차츰 사물이 밝아지는 것과 같다. 징관은 돈오점수 이외에도, 점차적으로 닦고서 몰록 깨닫는 점수돈오(漸修頓悟), 몰록 깨달음을 얻고서 닦음까지를 함께 완성하는 돈오돈수(頓悟頓
修),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깨닫는 점수점오(漸修漸悟) 등의 여러 방식을 제시한다. 이들은 근기에 따라 깨달음과 닦음을 이루어가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깨달음과 닦음에 관한 논의는 징관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있어 왔다. 예컨대 이와 관련된 초기불교의 가르침으로 다음과 같은 점진적 깨달음의 논리(漸悟論)가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ññā)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
(MN. I. pp.479-480.)
징관의 분류에 따르자면 이러한 점진적 닦음과 점진적 깨달음은 앞서의 점수점오에 해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점수점오를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는 과정에 비유한다. 그리하여 발을 내딛는 위치가 높아지면 보이는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는 것과 같다고 해설한다.
한편 앞서의 점수돈오(漸修頓悟)란 거울을 빛나게 하는 작업은 점진적인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게 해서 드러난 거울의 밝음은 시간적인 절차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닦음 또한 동시에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거울의 밝은 속성은 본래적인 까닭에 그것을 알고 나면 굳이 닦거나 빛을 내
지 않아도 항상 스스로 밝음을 아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선오후수(先悟後修)의 돈오돈수,(주1) 닦음은 약을 먹는 것과 같고 깨달음은 병으로부터 낫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선수후오(先修後悟)의 돈오돈수, 닦음과 깨달음이 함께 이루어져 마치 맑은 거울이 무심히 만상을 몰록 비추는 것과 같은 수오일시(修悟一時)의 돈오돈수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깨달음과 닦음의 양상을 일괄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고 다른 나머지는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1) 선오후수(先悟後修)란 문자 그대로 먼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후에 닦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돈오돈수에 배속되는 이유는 일단 깨달음을 얻고나면 별도의 닦음이
없더라도 깨달음에 입각한 닦음이 저절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울의 밝은
속성이 본래적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고 나면(先悟, =頓悟), 굳이 그것을 닦거나
빛내기 위해 애쓰지 않더라도 그것의 밝은 속성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後修,
=頓修)에 비유된다. 여기에서 닦음이란 철저하게 돈오의 테두리 안에 소속된 닦음이
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지눌의 돈오점수는 이와 같은 선오후수의 돈오
돈수에 실제로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과 닦음의 관계는 어느 것을 먼저 이루느냐에 따라 깨달음 자체의 성격을 달라지게 한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징관에 따르면 먼저 깨닫고서 이후에 닦을 때의 깨달음은 이지적 깨달음으로서 해오(解悟)에 속하고, 먼저 닦고 나서 이후에 깨닫는 그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으로서 증오(證悟)로 분류된다.1) 이러한 해오와 증오라는 두 가지를 앞서의 돈점론(頓漸論)에 연계시켜 설명하자면, 돈오점수와 선오후수의 돈오돈수는 닦음에 선행하는 깨달음을 가리키는 까닭에 해오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점수점오와 점수돈오 및 나머지 돈오돈수의 깨달음은 닦음을 통한 그것이므로 증오로 분류할 수 있다.
1) 징관의 돈점론은 그의 제자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에 이르러 새롭게 계승된다.
종밀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닦는 것은 해오이며 닦음을 통해 깨닫는 것은 증오라고 본
점에서 징관과 동일한 입장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에서의 해오와 증오가 서로 다른 것
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데서 징관과 차이를 보인다. 그는 돈오돈수의 깨달음과 닦음을
한 타래의 실을 끓으면 만 가닥이 몰록 끊어지고, 한 타래의 실을 물들이면 만가닥이
일시에 물드는 것에 비유한다. 이것은 깨달음과 닦음의 상대적 독자성을 인정하였던
징관의 돈점론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규봉은 이러한 돈오돈수가 다생에 걸친
닦음의 과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므로 오로지 점진적이라고 강조하였다. 전해주(1992)
p.129 참조.
지눌은 이러한 선행 논의들을 섭렵한 후 자신의 기본 입장을 돈오점수로 정리한다. 그는 징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돈오점수를 해오(解悟)로 규정하고서, 우선 본래의 심성을 확실히 안 다음 점차 수행하여 그것에 계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돈오란 지혜의 빛으로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말하고, 점수란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습관적인 번뇌의 기운을 점차 제거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의 체험을 임금이 도장을 찍을 때 한번 눌러 전체의 문장이 일시에 완성되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하여 처음 발심할 때의 지혜와 구경의 지위에 올라갔을 때의 그것이 동일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지눌은 묵은 습기를 제거해 나가는 과정에는 점차적인 승진과 계급이 있다는 사실또한 인정한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는 점수가 뒤따라야만 하는 특징을 지닌 것으로 일단락 지을 수 있다.
2) 증오의 실재성 및 해오로서의 돈오와의 관계 등에 관해서는 다소 이견이 존재한다. 예컨대
김호성은 증오를 관념적 想定으로 보고서 그것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갖는다. 반면
에 박성배는 해오와 증오가 별개의 것이 아니더라도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드러나는 경지
가 다른 까닭에 서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깨달음에 대한 집착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김호성의 주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解碍의 제거를 통한 증오의
실현을 강조하는 박성배의 주장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그것이 해오와
증오를 굳이 구분했던 지눌의 본래 의도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김호성(1992) pp.223-
224; 박성배(1992) pp.330-338 참조.
그러나 지눌이 말한 해오로서의 돈오는 결코 문자적인 이해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길희성․박성배․김호성 등 여러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그것은 자신의 존재와 깊숙이 연관해서 터득하는 실존적 각성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16) 바로 이점은 다음의 문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돈오란 범부가 깨닫지 못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으로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이 참다운 법신이며, 자기의 영지(靈知)가 곧 참다운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쫓아다녔으나, 문득 선지식의 지시에 길을 얻어,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스스로의 본성(本性)을 보는 것이다. 이 성품은 본래 번뇌가 없고 무루의 지혜의 성품을 본래부터 스스로 구족하여 곧 여러 부처와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頓)이라고 한다.
3)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位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로서의 해오는 단순하게 관념적으로 알거나 이해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증오로서의 깨달음과 별개의 것이 아니며, 다만 중생으로서의 습기(習氣)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한에서 증오와 구분될 뿐이다. 즉 지눌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해오든 증오든 본래의 성품에 대한 자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차별적인 경지로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눌은 해오의 보편적 특성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궁극의 경지인 증오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수행 절차의 필요성 또한 간과하지 않았다.
지눌의 돈오점수에서 돈오와 점수는 서로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깨달음을 얻고 난 연후의 닦음이란 새로운 무엇을 얻고자 하는 닦음이 아니라 그러한 깨달음 자체를 드러내는 과정 혹은 절차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눌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면 참된 닦음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깨달음에 기반을 두지 않은 닦음이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으며,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 채 돌로 풀을 누르는 것과 같이 억압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돈오 이후의 점수는 이미 닦음이 아닌 닦음이다.
비록 [깨달음] 이후에 닦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단번에 깨달았기 때문에, 악을 끊음에 끊되 끊음이 없고, 선을 닦음에 닦되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참된 닦음이요 참된 끊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를 갖추어 닦더라도 오직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4) 雖有後修 已先頓悟妄念本空 心性本淨 於惡斷 斷而無斷 於善修 修而無修 此乃眞修眞斷矣
故云 “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지눌의 돈오는 닦음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깨달음이며, 점수 또한 그러한 깨달음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닦음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돈오 혹은 해오란 단순한 이론으로서의 깨달음에 국한되지 않으며, 점수 또한 실천 만으로서의 그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지눌의 돈오점수는 깨달음과 닦음이 서로 중첩되는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은 지눌의 돈오점수가 지닌 특징적 측면으로서, 앞서 징관이 분류했던 방식과 연계시키자면, 선오후수의 돈오돈수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눌은 직접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회통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눌의 돈오란 해오로서 이지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문자적인 이해가 아니며 본성에 대한 깨달음(見性) 자체이
다. 그것은 사실상 궁극의 경지인 증오와 동일한 내용이지만 개인적인 성향과 습기가 남아있는 한에서 증오와 구분될 뿐이다. 이러한 돈오와 점수는 논리적으로 선후의 관계에 놓이지만 시간적으
로는 동시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돈오 이후에 별개의 점수를 닦는 것이 아니라, 돈오 자체로써 이미 새로운 차원의 닦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오와 점수는 대등한 관계에 놓
이며 증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공동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돈오란 새로운 차원으로의 질적인 도약이며 점수는 그것의 수평적 확산으로서의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Ⅲ. 팔정도의 구조
팔정도(八正道, aṭṭhaṅgiko maggo)는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의 실제 내용을 구성하는 동시에,23) 사성제(四聖諦, cattāriariyasaccāni)의 마지막 항목인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hagāminīpaṭipadā ariyasaccan)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24) 우이하쿠주(宇井伯壽)에 따르면 팔정도는 초전법륜에서 설해진 것으로, 이후 등장한 다른 모든 교설들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 또한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팔정도는 붓다의 임종시 마지막 제자였던 Subhadda를 상대로 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따라서 팔정도는 붓다가 설한 최초의 가르침이자 최후의 가르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팔정도의 교설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내용은 그것의 목적일 것이다. 다나까꾜우쇼우(田中敎照)가 지적하듯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팔정도의 일반적 용도는 바른 삼매(正定)와
관련된다.
비구들이여, 거룩한 바른 삼매는 무엇을 선행조건으로 삼고 수단으로 삼는가. 바른 견해(正見)․바른 결심(正思惟)․바른 언어(正語)․바른 행위(正業)․바른 삶(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마음지킴(正
念)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요소로써 마음의 하나됨을 갖추나니, 비구들이여, 바로 이들을 바른 삼매의 선행조건으로 삼고 수단으로 삼는다.
5) MN. Ⅲ. p.71. Katamo ca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saparikkhāro,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Yā kho bhikkhave, imehi sattaha'ṅgehi cittassa ekaggatā
parikkhatā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itipi, saparikkhāro itipi.
확인할 수 있듯이 바른 견해라든가 바른 결심 따위의 일곱 항목은 맨 마지막의 바른 삼매를 얻기 위한 선행조건(upanisā) 혹은 수단(parikkhāra)이 된다. 따라서 팔정도에서 중심이 되는 항목은 일단 바른 삼매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일반적 경향이 이지적인 능력(intellectual capacity)보다는 심리적 안정(mentalstability)을 우선시 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른 삼매라는 심리적 안정 상태를 얻기 위해 바른 견해에서부터 바른 마음지킴까지의 일련의 항목들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실천에서 삼매란 결코 그 자체로서 최종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삼매를 통해 얻어지는 심리적․정서적 안정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이러한 팔정도는 깨달음을 얻어 열반을 실현한 이들이 걸었던 길로 소개되곤 한다. 또한 팔정도는 무명(avijjā)에 쌓인 자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지혜(paññā)의 길로서 바른 견해(正見)를 필두로 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사십경에서는 다음의 내용을전한다.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바른 견해는 [모든 항목들에] 선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바른 견해가 [모든 항목들에]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지닌 자에게 바른 결심이 생겨나고, … 바른 마음지킴을 지닌 자에게 바른 삼매가 생겨난다. [또한] 바른 삼매를 지닌 자에게 바른 지혜(正智, ammāñāṇa)가 생겨나고, 바른 지혜를 지닌 이에게 바른 해탈(正解脫, sammāvimutti)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요소를 갖춘 배움을 지닌 이(有學, sekho)의 길이 있고,
열 가지 요소를 갖춘 아라한의 [길이] 있다.
6) MN. Ⅲ. pp.75-76. Tatr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Kathañ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sammādiṭṭhissa bhikkhave, sammāsaṅkappo pahoti …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Sammāñāṇassa sammāvimutti pahoti. Iti kho bhikkhave, aṭṭhaṅgasamannāgato sekho
dasaṅgasamannāgato arahā hoti.
인용문에 따르면 팔정도는 바른 견해로부터 시작되며 바른 삼매로 일단락된다. 또한 팔정도는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지혜(正智)와 바른 혜탈(正解脫)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
다. 바로 이점은 바른 견해로부터 시작된 최초의 과정이 바른 지혜의 발현과 함께 새로운 차원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바른 삼매는 그 이전의 일곱 항목들을 추스르는 동시에 바른 지혜로의 질적인 도약을 준비하는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인용문에서는 이러한 최초의 팔정도에 아직 머물러 있는 상태를 아라한의 경지와 차별적으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팔정도는 흔히 삼학(三學, tisso sikkhāyo)의 체계 안에 포섭된다. 구체적으로 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삶은 계학(戒學, sīlasikkhā)에, 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는 정학(定學, samādhisikkhā)에, 바른 견해․바른 결심은 혜학(慧學,paññāsikkhā)에 배속된다. 그런데 이 삼학의 체계에 따르면 바른 견해와 바른 결심은 맨 마지막에 놓이며 수행의 출발이 아닌 귀결에 해당한다. 이러한 불일치와 관련하여, Bhikkhu Bodhi는 예비적인 바른 견해와 완성된 단계에서 발현되는 바른 견해를 구분한다. 그리하여 수행의 전체 여정에 대한 조망을 위해 삼학의 체계 앞에 별도로 예비적인 바른 견해를 내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팔정도는 예비적인 바른 견해로부터 출발하여 계학과 정학의 단계들로 나아가는 과정을 걸치며, 그렇게 해서 다시 본격적인 바른 견해와 바른 결심이라는 혜학의 단계로 넘어가는 순환적인 방식을 취한다.
실제로 『대사십경』에서는 바른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바른 견해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노라. 비구들이여, 공덕은 있지만 번뇌를 지니며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바른 견해가 있다. [또한] 비구들이여,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 견해가 있다. … ‘보시에 [공덕이] 있고, 제사에 [공덕이] 있고, …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완전히 깨달아 실현하고서 드러내는 이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공덕은 있지만 번뇌를 지니며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바른 견해이다. … [그러나] 거룩한 바른 도를 닦는 자에게는 반야(慧), 반야의 근(慧根), 반야의 힘(慧力), 법에 대한 분별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바른 견해라는 [완성된 팔정도의] 요소가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에 해당하는 바른 견해라고 한다.
7) MN. Ⅲ. p.72. sammādiṭṭhimpahaṃ bhikkhave, dvayaṃ vadāmi: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ā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 atthi dinnaṃ, atthi yiṭṭhaṃ, … 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ṃ ca lokaṃ paraṃ 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Ayaṃ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 ariyamaggaṃ bhāvayato
paññā paññindriyaṃ paññābalaṃ dhammavicayasambojjhaṅgo sammādiṭṭhi maggaṅg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
따라서 팔정도의 체계는 중층적․순환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팔정도의 최초 과정은 예비적 단계의 바른 견해로 부터 시작되어 바른 삼매로 일단락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높은 차원의 바른 견해가 생겨나고, 바로 그것에 상응하는 일련의 과정을 걸쳐 고양된 단계의 바른 삼매라는 반복적인 절차가 뒤따른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인 바른 지혜와 바른 해탈에 이르러 궁극에 이른다. 나까무라하지메(中村元)는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팔정도를 ‘세속의 팔정도’와 ‘출세간의 팔정도’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팔정도의 중층적․순환적 구조에 입각할 때, 맨 앞의 바른 견해는 다른 어떤 항목들보다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은 최초의 바른 견해가 어떠한 차원에 속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일곱 지분들의 성격 전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대사십경』에서는 바른 견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바른 견해는 [모든 항목들에] 선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바른 견해가 [모든 항목들에]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삿된 견해가 소멸하고, 또한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무수한 사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소멸한다. … 비구들이여, 바른 해탈을 조건으로 삿된 해탈이 소멸하고, 또한 삿된 해탈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무수한 사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소멸한다.
8) MN. Ⅲ. pp.76-77. Tatr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Kathañ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pubbaṅgamā hoti. Sammādiṭṭhissa bhikkhave, micchādiṭṭhi nijjiṇṇā hoti. Ye ca
micchādiṭṭhipaccayā aneka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 Sammāvimuttassa
bhikkhave, micchāvimutti nijjiṇṇā hoti. Ye ca micchāvimuttipaccay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인용문에 따르면 바른 견해는 바른 수행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이후의 실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바른 견해가 철저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일련의 항목들에 대한 참된 닦음 역시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세속의 팔정도가 되느냐 혹은 출세간의 팔정도가 되느냐의 문제는 최초의 바른 견해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번뇌를 지니지 않은 출세간의 바른 견해만이 출세간으로서의 팔정도 전체를 이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Magga-Saṃyutta의 다음 구절 또한 새겨둘 필요가 있다.
비구들이여, 무명(avijjā)이 선행하면 불건전한 상태에 도달하여 부끄러움도 없고 창피함도 없게 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빠진 무지한 자(aviddasuno)에게는 삿된 견해(邪見)가 생겨난다. 삿된 견해를 지닌 자에게는 삿된 결심(邪思惟)이 생겨난다. … 삿된 마음지킴(邪念)을 지닌 자에게 삿된 삼매(邪三昧)가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밝음(vijjā)이 선행하면 건전한 상태에 도달하여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게 된다.] 비구들이여, 밝음을 지닌 자에게 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바른 견해를 지닌 자에게 바른 결심이 생겨난다. … 바른 마음지킴을 지닌 자에게 바른 삼매가 생겨난다.
9) SN. Ⅴ. pp.1-2. avijjā bhikkhave pubbaṅgamā akusalānaṃ dhammānaṃ samāpattiyā
anvadeva1 ahirikaṃ anottappaṃ avijjāgatassa bhikkhave aviddasuno micchādiṭṭhi pahoti.
Micchādiṭṭhissa micchāsaṅkappo pahoti. … Micchāsatissa micchāsamādhi pahoti. Vijjā ca
kho bhikkhave pubbaṅgamā kusalānaṃ dhammānaṃ samāpattiyā anvadeva hirottappaṃ.
Vijjāgatassa bhikkhave viddasuno sammādiṭṭhi pahoti. Sammādiṭṭhissa sammāsaṅkappo
pahoti....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īti.
인용문에 따르면 무지한 사람(aviddasuno)은 바른 팔정도를 실천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를 무명(avijjā)이라고 한다. 이러한 무명과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사성제에 대해 어두운 것을 무명으로 해설한다.10) 따라서 사성제에 어두운 까닭에 삿된 견해 따위의 팔사도(八邪道)에 빠진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팔정도의 세부 내용을 해설하는 경전들에서도 바른 견해를 사성제에 대한 지혜(ñāṇa)로 풀이한다.11) 이것은 무명에 빠지는 것과 삿된 견해를 가지는 것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이 곧 밝음(vijjā)이며 또한 바른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무명의 제거 혹은 밝음은 그 자체로서 바른 견해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10) SN. Ⅱ. p.4. 비구들이여, 무엇이 무명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Katamā ca
bhikkhave avijjā? Yaṃ kho bhikkhave dukkhe aññāṇaṃ, dukkhasamudaye aññāṇaṃ,
dukkhanirodhe añ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ñ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avijjā.
11) DN. Ⅱ. pp.311-312.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
알고,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해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
는 길에 대해 아는 것, 바로 이것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yaṃ kho bhikkhave dukkhe ñāṇaṃ dukkhasamudaye ñāṇaṃ dukkhanirodhe 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
사성제에 대한 밝음 혹은 바른 견해는 출세간의 팔정도로 나아가기 위한 질적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후속하는 계학과 정학에 속한 나머지 일곱 항목들은 그것의 수평적 확산으로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전제되지 않은 팔정도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팔정도의 이러한 측면이야말로 지눌의 돈오점수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오를 밝음(vijjā) 혹은 바른 견해에 배대할 수 있다면 점수는 나머지 팔정도의 단계들에 배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돈오로서의 밝음과 점수로서의 팔정도의 항목들은 논리적으로 선후의 관계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들은 시간적으로 동시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밝음 혹은 바른 견해는 그 자체로 새로운 차원의 바른 팔정도의 지평을 열기 때문이다.
Sacca-Saṃyutta에 따르면 붓다는 “사성제에 관한 지혜와 견해(ñāṇadassana)가 청정해진 연후에 비로소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anuttaraṃ sammāsambodhi)을 선언했다.”고 한다.(주2) 초기불교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란 또 다른 상위의 목적을 상정할 수 없는 지고의 경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팔정도의 바른 견해 또한 위없는 최고의 깨달음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바른 견해는 더욱 각별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그러한 이유에서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만이 후속하는 일곱 항목들을 ‘거룩하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의 도의 요소들’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앞 장에서 기술한 지눌의 표현으로서 “돈오 이후의 점수는 이미 닦음이 아닌 닦음이다.”라는 대목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2) ) SN. Ⅴ. pp.422-423. 비구들이여, 나는 이러한 사성제에 관련하여 3회에 걸친
12가지 양상으로 있는 그대에 대한 지혜와 견해가 청정하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그러한 연후에 비로소 나는 신들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의 인간 세계, 신과 인간의 세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하였다(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paccaññāsiṃ.
Ⅳ. 돈오점수와 초기불교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그러한 돈오가 궁극의 깨달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깨달음이 투철하다면 그것만으로 더 이상의 닦음이 필요 없다는 확신이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만이 이후의 닦음까지를 보장하는 궁극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 설 때 돈오점수는 닦음의 과정을 별도로 남기는 까닭에 불완전한 것이며, 단지 지적 알음알이 차원에 머물 뿐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오해는 초기불교를 연구자들에게까지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만일 본자청정, 본래부처, 본무번뇌를 믿거나 이해하는 정도로 돈오를 삼는다면 그것은 해오(解悟)일 뿐이라고 정통 선문에서는 주장한다. 이것은 무사선의 아류일 뿐이기도 하다. 성철 스님이 보조 스님의 돈오점수를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일득영득(一得永得)의 거룩한 돈오를 단지 번뇌가 본래 없음을 이해하는 해오로 치부하여 다시 점수를 하거나 보임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견해를 척파하기 위해서이다.12)
12) 각묵스님(2004) pp.140-141
Ⅱ장에서 논의했듯이 지눌의 돈오는 이지적 깨달음으로서 해오(解悟)에 속하며,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지적 깨달음으로서 해오’와 ‘지적 이해로서의 지혜(知解)’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김호성이 지적하듯이 지눌의 해오는 “해(解)라는 문자를 부득이 쓰고 있으나 단순한 알음알이나 사량계교가 아닌 체험적 각성 내지는 몸과 마음의 동시적 차원의 깨침”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강건기가 언급하듯이, 지눌은 문자에만 집착할 뿐 마음 닦기를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러 ‘미친 지혜(狂慧)’ 혹은 ‘마른 지혜(乾慧)’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극구 배척
한 사실이 있다.
지눌이 말한 돈오점수의 돈오 혹은 해오는 이성적 차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전인적 전회(轉回)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생애를 통해 이러한 과정을 세 차례에 걸쳐 경험하였다. 첫 번
째 전회는 젊은 시절 홀로 『육조단경』을 읽다 이루어졌다. 진여자성(眞如自性) 혹은 불성(佛性)에 대해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일상적 활동을 떠나 따로 구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건이 그것이다. 길희성은 이러한 최초의 체험에 대해 비록 글을 읽다가 얻은 깨침이지만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알게 된 참 자아의 신비에 관한 ‘갑작스러운 눈 뜸’ 즉 돈오(頓悟)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문자를 떠난 영원한 진리 자체와의 충격적인 첫 대면으로 그 의의를 평가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지눌은『화엄경』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일대 전환을 맞는다.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안에 모두 갖추어져 있으나 단지 우둔한 자들이 알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라
는 구절을 접하고서 교학과 수행의 괴리에 관해 품어왔던 의문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경권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리는 환희를 맛보았다고 한다. 한편 지눌의 마지막 깨침은 간화선(看話禪)을 정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어록이 계기가 되었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한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니, … 일상사에 응하는 곳, 생
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홀연히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음을 알게 되리라.”는 대목에 이르러 그간 가슴에 맺혀 있던 원수가 사라지는 듯한 안락함을 얻게 되
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지눌의 체험은 아직 고려에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이후에 만연된 간화선의 기법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 그의 체험을 단순히 문자적․지적 이해의 차원으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지눌은 그 스스로 깨달음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 이해에 의한 병통(知解病)’에서 벗어날 것을 거듭 강조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 땅에서 최초로 간화선을 권장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제자 혜심(慧諶, 1178-1234)을 통해 한국에서 간화선을 뿌리내리게 만든 장본인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지눌의 체험에는 진여자성이라든가 불성과 같은 대승불교 고유의 용어들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은 체험적 깨달음이었으며, 일시적인 기분이라든가
지적인 유희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다. 지눌의 돈오 혹은 해오는 일득영득의 영속적인 깨달음으로서 다만 작용의 측면에서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를 남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관련
하여 지눌은 얼음과 물이라는 다음의 비유를 즐겨 인용하곤 한다.
이치로는 단박에 깨닫지만, 깨달음에 따라 아울러 [번뇌가] 소멸하니, 현상은 단박에 제거되지 않고 점차로 사라진다. … 얼어붙은 연못이 모두 물인 줄 알았지만 따뜻한 기운을 받아야 녹으며, 범부가 부처인 줄 깨쳤지만 법력으로써 익히고 닦아야 한다.13)
13) 理卽頓悟 乘悟倂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 識永池而全水 借陽氣以鎔消 悟凡夫而卽佛 資法力以勳修.
인용문은 돈오 이후에도 점수를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대목으로, 지눌이 생각했던 돈오와 점수의 의미를 더욱 사실감 있게 드러낸다. 얼음과 물의 본성을 알고 나면 그것으로 그 둘을 차별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자연히 해소된다. 이러한 자명한 앎은 점차적으로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것도 아니며 추가적인 경험에 의해 달라지거나 변화되지도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용도와 관련하여 얼음과 물을 구분하여 다루는 방안들은 지속적으로 강구할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의 팔정도와 관련하여 지눌의 돈오점수가 지니는 의의는 깨달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올바른 수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팔정도의 중층적․순환적 구조에 따르면 최초의 바른 견해가 어떠한 차원에 속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일곱 지분들은 그 성격이 달라진다. 팔정도의 실천은 무명을 타파하고 바른 견해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삿된 견해와 삿된 결심 따위의 팔사도(八邪道)가 이어질 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지눌은 선악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서 몸과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는 것을 크나큰 미혹으로 보았으며, 또한 그것을 도적질로까지 묘사하기도 하였다. 지눌에 따르면 그와 같은 억지스러운 닦음은 번뇌(有爲)의 유념수(有念修) 혹은 오염수(汚染修) 등으로 달리 표현해야 한다.
수행이 깨치기 이전이면, 비록 공부하기를 잊지 않아 생각 생각에 익히고 닦으나, 곳곳에서 의심을 생겨 걸림이 없을 수 없으니,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 속에 걸린 것과 같아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 [그것은] 비록 가뿐하더라도 의심의 뿌리를 끊지 못한 것이 돌로 풀을 누른 것과 같아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이전의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깨친 사람의 경지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은 있으나, 생각 생각에 의심이 없어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14) 修在悟前 則雖用功不忘 念念熏修 着着生疑 未能無礙 如有一物 礙在胸中不安之相 常現在前 …
雖復經安 疑根未斷 如石壓草 猶如生死界 不得自在 故云 修在悟前非眞修也 悟人分上 雖有對治方便
念念無疑 不落汚染.
따라서 돈오 혹은 해오의 경험은 거짓 수도와 진정한 수도를 갈라놓은 분수령이 된다고 할 수 있다.52) 그리고 이것은 팔정도를 포섭하는 사성제의 교설에서 확인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Ⅲ장에서
언급했듯이 출세간적인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견해로 설명된다. 즉 고성제와 관련하여 ‘완전히 이해해야 하고(pariññeyya)’, 집성제와 관련하여 ‘버려야 하며(pahātabba)’, 멸성제와 관
련하여 ‘실현해야 하고(sacchikātabba)’, 도성제와 관련하여 ‘닦아야 한다(bhāvetabba)’는 견해와 지혜(ñāṇadassana)가 우선 확립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도성제의 실제 내용은 팔정도이며,
또한 그것은 멸성제의 실현(作證, sacchikiriyā)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걸친 연후의 것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깨닫고 나면 그것으로 더 이상 닦을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점
진적인 팔정도의 체계에 들어서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성제의 네 항목 각각을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두 가지로 대별하면, 고성제와 멸성제는 깨달음에 배속시킬 수 있고, 집성제와 도성제는 닦음의 과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괴로움의 완전한
이해(遍智, pariññā)는 실존 상황에 대한 눈뜸이며,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버림(捨斷, pahāna)은 그러한 깨달음에 근거한 닦음의 과정이다. 또한 괴로움의 소멸의 실현(作證, sacchikiriyā)은 이상적 경지에 대한 체험적 자각이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닦음(修習, bhāvanā)은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닦음의 절차이다.
이렇듯 사성제를 닦아나가는 각각의 국면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깨달음에 해당하는 무엇인가가 선행된다. 또한 Sacca-Saṃyutta에서는 이와 같은 사성제의 순서를 다음의 비유로써 언급한다.
네 층의 계단이 있는 전당(殿堂)에 오르는 것과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첫 계단을 오르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올라 전당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반드시 첫 계단을 지난 뒤에야 차례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단을 따라 전당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고성제에 대해 아직 밝게 알지 못하면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밝게 알고자 한다면 그렇게 될 수 없다.
15) SN. Ⅴ. p.452 이하;『잡아함경』, 권16, 436경.
이와 같은 사성제의 순서는 “먼저 깨닫고 이후에 닦는다.”는 돈오점수의 논리를 자체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제에 대한 자각에 뒤이어 집성제의 버림이 등장하고, 멸성제에 대한 체험적 앎에 후속하여 도성제의 닦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인 맥락에서 멸성제의 실현 혹은 깨달음은 수행의 결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도성제의 닦음이란 그것의 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멸성제와 도성제의 순서는 뒤바
뀌게 된다. 다시 말해서 도성제가 선행하고 멸성제가 뒤따르는 것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수행의 순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경전에서는 고성제→집성제→멸성제→도성제라는 순서만
을 고집하지 않는다. 예컨대 Mahāsālayatanikasutta에서와 같이 닦음(bhāvanā)과 깨달음(sacchikiriyā)의 순서를 바꾸어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실현에 앞서 예비적인 닦음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16) MN. Ⅲ. p.289. 뛰어난 앎으로써 완전히 이해해야 할 법들을 뛰어난 앎으로써 완전히
이해하고(parijānāti), 뛰어난 앎으로써 버려야 할 법들을 뛰어난 앎으로써 버리고
(pajahati), 뛰어난 앎으로써 닦아야 할 법들을 뛰어난 앎으로써 닦고(bhāveti), 뛰어난
앎으로써 실현해야 할 법들을 뛰어난 앎으로써 실현한다(sacchikaroti)(So ye dhammā
abhiññā pariññeyyā, te dhamme abhiññā parijānāti. Ye dhammā abhiññā pahātabbā.
Te dhammā abhiññā pajahati. Ye dhammā abhiññā bhāvetabbā, te dhamme abhiññā
bhāveti. Ye dhammā abhiññā sacchikātabbā, te dhamme abhiññā sacchikaroti.
그러나 사성제에 관한 초기불교의 교설은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순서가 정설이며, 또한 압도적인 비율로 많이 나타난다. 바로 이점은 초기불교 당시부터 돈오점수적 실천방식이 더욱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괴로움의 완전한 이해(pariññā)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깨우침이다. 또한 괴로움의 소멸의 실현(sacchikiriyā)은 그러한 현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이다. 이러한 두 가지는 자명한 진리로서 드러나야 하며, 추가적인 경험에 의해 달라지거나 변화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명한 앎은 지속적인 버림(pahāna)과 닦음(bhāvanā)의 절차가 뒤따라야만 ‘위없는 바른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菩提, anuttaraṃ sammāsaṁ-bodhi)’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팔정도와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기초적인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 가르침에 ‘깨닫고 난 후 닦는다(先悟後修)’는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껏 그다지 주목되지 못했던 듯하다. 필자는 지눌의 돈오점수를 통해 이점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닦음에 앞선 깨달음 혹은 바른 견해는 초기불교에서부터 지눌에 이르기까지의 수행론을 특징짓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불교 수행론의 고유한 측면을 본다.
이점에서 지눌의 돈오점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에서도 그 유용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Ⅴ. 마치는 말
본 논문의 논지는 간단하다. 바른 견해 혹은 바른 깨달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참된 닦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의 전형을 지눌의 돈오점수에서 찾았고, 또한 초기불교의 팔정도와 사성제 등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통해 지눌을 축으로 하는 한국불교 전통과 초기불교 수행 사이의 소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이 지닌 유사한 측면들이야말로 불교 수행론의 고유한 특징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Ⅱ장에서는 지눌의 돈오점수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초점을 모았다. 필자가 파악한 지눌의 돈오는 해오로서 이지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문자적 이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체이다. 그것은 궁극의 경지인 증오와 사실상 동일한 내용이지만 개인적인 성향과 습기가 남아있는 한에서 증오와 구분될 뿐이다. 돈오와 점수는 논리적으로는 선후의 관계에 놓이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돈오 이후에 별개의 점수를 닦는 것이 아니라, 돈오 자체로써 새로운 차원의 닦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돈오와 점수는 증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공동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Ⅲ장에서는 돈오점수가 초기불교의 팔정도와는 어떤 연관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필자는 우선 바른 견해만이 후속하는 나머지 일곱 항목들을 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또한 바른 견해가 세속적인 바른 견해와 출세간의 바른 견해로 나뉘며, 나머지 일곱 항목들 역시 바른 견해의 여부에 따라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두 가지로 나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결과적으로 무명의 제거 혹은 바른 견해가 전제되지 않은 팔정도의 닦음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팔정도의 구조는 Ⅱ장에서 살펴본 지눌의 돈오점수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Ⅳ장에서는 지눌의 돈오점수가 단순한 지해(知解)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지눌의 돈오 혹은 해오는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은 체험적 깨달음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필자
는 바로 이것이 팔정도뿐만 아니라 사성제의 가르침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조명하였다. 사성제의 세부 내용을 깨달음과 닦음으로 대별하면 고성제와 멸성제는 전자에 속하고 집성제와 도성제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앞의 둘은 실존적 조건 혹은 이상적 경지에 대한 자각이며, 뒤의 둘은 그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한 실천의 과정이다. 이러한 사상제의 순서는 고정적 패턴으로 나타나며, 돈오점수의 방식을 자체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정도와 사성제는 초기불교의 기초적인 가르침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 가르침에 이러한 방식으로 “깨닫고 난 후 닦는다.”는 논리가 포함된다는 사실은 이제껏 주목되지 않았다. 필자는 지눌의
돈오점수를 통해 이점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닦음에 앞선 깨달음 혹은 바른 견해는 초기불교에서부터 지눌에 이르기까지 불교 수행론의 고유한 측면을 구성한다
는 입장을 갖게 되었다. 본고를 통해 필자는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시각으로 초기불교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러한 연구는 한국불교와 초기불교 사이의 원활한 소통에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각자의 교리를 반추하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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