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승 논쟁의 비판적 성찰
조용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불교학 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교수. 저서로 《불교와 자연과학》 《원시근본불교철학의 현대적 이해》(역저), 논문으로 〈앎과 삶에 대한 불교의 실천윤리〉 〈근본경전으로서의 아함경의 분석적 고찰〉 등이 있다.
부처님의 근본사상은 뒷전으로 밀리고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이 난무하여 어지러웠던 시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현 시대에 그 뜻이 나투어져야 함은 사부대중을 포함한 이 시대의 모든 이들이 추구해야 할 사항이다. 부처님 사상의 근본이 아함(阿含, A?ama-su?ra)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전의 4아함과 남전 5니까야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참 생명 찾기 운동”의 상황, “참 생명 가치의 제고”, “생명구제의 참된 뜻”을 이해한다면, 이른바 소승불교니 대승불교니 하는 이분법적이고 이중적인 독단의 잣대가 횡행하는 우열 논쟁이나 선악, 혹은 흑백 논리가 난무하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논쟁은 중생 구제나 정토의 구현에는 조금도 유익하지 않은 파쟁일 따름이며, 후진들이나 다수의 청정 사부대중에게는 멀고 먼 전법의 기회를 상실케 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에 필자는 짧은 지면이나마 이 논쟁 아닌 논쟁을 불식시킬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는 고민 끝에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승경전의 불설(佛說)· 비불설(非佛說) 논쟁과 관련하여 대승경전의 정체성도 결국은 아함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대승경전의 정체성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결국은 불설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곧 불설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게 된다. 셋째는 대승불교 내의 비불교적 요소와 그 타파에 관한 문제이다. 불설의 본질을 규명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승경전 속에 포함된 비불교적 요소가 드러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신론적 경향이며 거기에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것이 맹신적인 기복신앙이다. 이러한 경향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수복(修福) 불교의 함양, 포살과 자자의 참회와 성찰의 수행이 장려되고 일반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 또한 초기 경전의 관점을 기준으로 삼아서 재고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1) 대승경전은 비불설인가
어떤 종교나 철학이든 그 최초의 주창자와 그의 깨달음, 그리고 그것에 입각한 합리적 체계가 정당화되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은 시대나 사회를 뛰어넘어 진리로서 존속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라이샤워(E. D. Reischauer)나 기타 논자들이 식민지 지배 체제의 음침한 논리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우월 의식 속에서 인류의 정신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불교의 역사적 사실과 사상을 자기들의 이중적 잣대로 마구 재단하여 허구의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1)1) E. D. Reishauer,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 金海光·高炳翊 共譯, 《東洋文化史》, p.263∼264.曺勇吉,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전통적 불교윤리의 사회적 수용과 변용에 관한 고찰〉,《한국불교학》 27집(2000. 12.).
불교는 역사적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어 삼보를 바로미터로 하는 전 중생의 구제를 향(向)한 제시이자 예시이며 가르침의 실천이다. 불교의 역사는 ①근본불교시대, ②원시불교시대, ③부파불교시대, ④대승불교시대, ⑤밀교시대로 편의상 나누어 볼 수 있다. 근본·원시·부파불교시대는 ①성문, ②연각, ③아라한의 배움과 수행과 깨달음의 해탈 과정인 바, 이를 성문승(聲聞乘)으로 하고 대승과 밀교시대는 ④보살, ⑤불의 성취의 실천, 해탈의 보살승(菩薩乘)으로 한다면, 이분법적이고 흑백 논리적인 대소승 논쟁은 막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누구의 주장이 얼마나 옳고 그른 것인가 논하는 것은 본질에서 천만 리 밖이나 떨어진 비경제적인 논란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중국의 양자강을 경계로 하는 선(禪)의 남돈북점(南頓北漸) 논쟁을 재연하는 것과 같아서 대소승 논쟁에 커다란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그다지 쓸모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의 증인인 부처님의 청정(淸淨)함은 분명히 불보(佛寶)이며, 부처님이 의지하신 깨달음인 밝음(明明白白한 진리)은 법보(法寶)이며, 이러한 부처님과 밝음의 진리를 받들고 화합 대중을 선도하는 사부대중은 분명히 승보(僧寶)로서 빛을 발할 수 있다. 원효 스님은 《금강삼매경론》2)에서 삼보는 청정과 밝음과 화합대중의 일심(一心)으로 귀일하는 것이며, 이 삼보는 일심에서 나와서 일심으로 귀일되기에 삼천대천세계 우주만유에 시공간을 초탈하여 존재하므로, 부처님은 영원한 중생의 청정한 모델이요 밝은 진리의 징표이며 중생을 화합시키는 삼위일체의 중심 가치로서 중생구제의 3가지 근원으로 보았으니, 초기불교의 삼보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다.2) 조용길 번역, 《원효의 금강삼매경론》(동국대학교 출판부, 2002.), p.4.
이 삼보의 정신이 뚜렷하고, 무아(無我)나 공관(空觀)의 해석의 차이 및 시대적·사회적 이해에 따라 질적·양적인 형태의 분류와 구별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전체를 대승·소승으로 나눈다는 것은 서구 유럽이 선·악 차별로 중세 암흑기를 연출하여 전쟁과 갈등으로 파괴되고 무너지는 계기가 마련된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대승경전을 한마디로 ‘원래의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불설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보의 본래 정신을 망각하고 신비주의나 형이상학적인 또는 다른 원리주의로 변질된다면 그런 요소는 분명히 불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경장(經藏)은 부처님 재세시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반열반하신 이후 제자들에 의하여 결집된 것으로3) 이때(기원전 544년 경)에 이루어진 《아함경》이 모든 경전의 근본이 되고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4)3) 김동화, 《원시불교사상》(보련각), p.17. 4) 칼루파하나, 조용길 편역, 《原始根本佛敎哲學의 現代的 이해》(불광출판사, 1993), p.256부터 참조.
앞서 설명한 대로 서구의 비불교적 의도가 내재된 이중의 잣대로 문헌학이니 역사학이니 하는 반론을 제기하면서, 불교 전체를 질타하는 데 대한 비판은 한마디도 못하는 가운데, 단순하게 그들을 추종하는 행태는 능히 참회함이 좋을 것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상 이렇게 저렇게 고찰하고 살펴봄은 학자적 태도이긴 하지만, 본말을 전도시킬 정도의 논쟁은 다수의 신심 있는 사부대중을 현혹시키고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필자는 부처님 사상의 본래적인 측면이 만일 변질되지 않으면서 단지 변용만 되고 있다면, 그러한 것은 모두 다 불설로 보아도 무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법인의 제행무상은 개인의 인생 및 세계 중생들의 속눈과 겉눈을 개안시키는 가르침이지 이것이 인생무상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 인생과 사물과 사건과 세계만유를 바라보고 부처님의 올바른 견해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대승적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우월적 편견과 아집에서 비롯된 너는 소승이고 나는 대승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잣대는 쓸만한 잣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소승 논쟁은 부처님 본래 사상에 대한 무지와 둔감, 그리고 몰이해적 해석에서 연유된 것에 다름 아니다.
2) 대승경전의 정체성은 아함에서 찾아야
대승경전의 근원은 ‘근본불교인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도의 근본· 원시· 부파불교시대에는 아함만이 절대적 권위이며 유일무이의 본체였음은 불문가지이다.5)5) 같은 책, pp.282∼283.
다 아는 바와 같이 용수보살의 중관사상도 그 근간은 아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태사상도 화엄사상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아함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속칭 대승이라고 부르는 모든 경의 기초적 경전으로서 근본불교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아함을 소승으로 취급하려는 것은 부파불교시대의 소수 수행자나 연구자들의 교리 체계에서의 소승적 이해와 오류에 대한 지적이지, 《아함경》 그 자체가 소승적이라는 것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소위 대승경전이라고 표현되는 경의 내용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함의 틀을 기초로 한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5온(五蘊), 12처(處), 18계(界), 12연기(緣起), 사성제(四聖諦) 등의 용어는 오직 아함에서만 나타나고 설해지는 기본적 개념들이다. ‘오온이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했던 것도 실은 제행무상·일체개고·제법무아·열반적정이라고 하는 순전히 아함의 교리에서 전개된 것임을 살펴볼 때, 《반야경》의 기초가 《아함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삼승방편이니 제법실상이니 일승만이 참(眞)이니 하는 《법화경》의 화택(火宅) 비유 등은 《아함경》의 방편시설(方便施設, upa?aprajn?pti)에 대한 광의(廣義)의 해석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대승의 보살(菩薩, boddhisattva)사상도 실은 아함의 ‘부처님 되실 분으로 예정된 사람’으로서의 보살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이른바 대승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心)은 곧 공화사(工畵師)이니, 이는 제법(諸法)을 창조하는 주체이다. 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無差別)”고 한다. 그러므로 일체존재나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제법과 제행(諸行)은 심청정(心淸淨)이면 국토청정(國土淸淨)이고 심염(心染)이면 국토가 물드는 것(國土染)이 부처님의 진리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오온의 무명·무지 때문에 생사의 우비고뇌(憂悲苦惱)의 집착과 착각과 오해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오온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통해 해탈을 성취한다고 하는 아함의 사상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음을 잘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대승운동 내지 대승정신은 ‘부처님의 근본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기 아함에서의 ‘무아’의 강조는 제자들을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탈케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이 ‘자아(自我)의 부정’이라는 해석은 부파불교시대의 무아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아는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도 아(我)가 아니다’, ‘저것도 아(我)가 아니다’하는 것처럼 비아(非我)로서 평소에 경험하는 현상 하나 하나를 객관(客觀: 色)과 주관(主觀: 受·想·行·識)의 양편으로부터 아(我)라는 실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부정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면 현상을 초월한 곳에 참다운 진아(眞我)가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대승경전인 《승만경》 《대반열반경》 등에서 진아를 ‘여래’ 또는 ‘여래의 법신’이라고 이름붙인 바, “이상적인 상태(理想態)를 아(我)라고 부른다”고 설하여져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 본래의 의도가 거기에 있었다고 간파(看破)되며, 이렇게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울 것이 없게 된다. 이러한 본래의 입장을 잊고서 현상계의 무아를 모든 것에 확대하여 다시 해석한 것은 일부 부파의 아함에 대한 잘못된 해석일 뿐이다.
무상(無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라는 뜻이므로 현상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인 부처님의 경지는 무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대승경전에서는 이것을 분명하고도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일부 부파불교의 소승적 경전해석에서는 무상에만 국한해서 설하고 절대의 경지에 대해서는 일부러 명확하게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잡아함경》 1권에서 심해탈(心解脫)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三毒心)의 불안심(不安心)으로부터 벗어나 청정도량의 이문을 통과하여 혜해탈(慧解脫)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6)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해탈·열반에 대한 오해’를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오온이 무아임을 간파하여 열반의 완성 내지는 성취로 나아가는 길임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부파불교의 일부에서는 해탈·열반을 죽음으로 호도하거나 사후에나 찾아오는 사후구제와 같이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것을 유루(有漏)니 무루(無漏)니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논란을 거쳤으나,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같은 것은 초기 근본불교의 ‘무아’와 ‘구애(拘碍)받지 않은 공(空, sun??)’과 그 개념이 일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힌두교 등에서 말하는 해탈이 절대신에 대한 제사, 헌공, 찬미 등 단순한 제례적인 것이라면, 이에 반대한 사문(沙門, s�aman.a)과 육사외도(六師外道) 등의 해탈은 좀더 나아가 육체적 요소로부터의 정신적 해탈을 위한 고행과 명상과 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들을 중도적으로 해결하였는데, 존재의 실상에 대한 파악과, 고의 원인과 그 해결을 위한 해탈과 그로부터 완성, 성취는 해탈과 동시에 열반락(涅槃樂)에 중점을 둔 중생구제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업(業, karma)과 윤회(輪廻, sam.sa?a)로부터의 해탈이며 반야의 체득이다. 그렇다면 대승은 바로 이러한 ‘초기 아함의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고, 오히려 이렇게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대·소승 논쟁의 불필요한 쟁점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며 전법과 포교의 견인차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 설의 본질은 무량한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실천과 무아·공의 구애받지 않는 삶이라는 가치관 실현에 있다. 이를 실현해 가는 것이 대승적 불교의 삶이다. 이와 무관한 신비적· 형이상학적· 미신적· 우상적인 모든 형태는 소승적이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사마외도의 길일 수밖에 없다.
근본불교의 가르침은, 첫째는 진리인 법에 입각한 인과의 법칙을 세우고, 둘째는 여실지견의 팔정도에 의한 입지를 세우고, 셋째는 치우치지 아니한 중도의 반야지를 실천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에게 ‘원시근본불교’의 교리로 인정되고 암암리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것 중에서도 부파불교가 된 후 처음으로 성립된 것이라고 볼 것이 많다. 여러 학자들(Louis de La Valle� Poussin, A. B. Keith)와 같은 이들이 이미 제출한 문제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첫째는 적어도 교단 설립 당시의 기사로부터 종합하여 본다면, 부처님께서 도달하신 경지와 제자들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구별이 있지 않았다. 둘째는 나중에 부파불교에서는 부처님은 단 한 분뿐이며, 제자들에게는 사향사과(四向四果)7)라는 8단계를 두어서 구별하여 아라한(阿羅漢, araha?)에 이르러도 부처님은 아니라고 하였다.8) 그러나 분명히 부처님은 다섯 비구를 깨우친 후 ‘여기에 여섯 아라한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리 크게 차별한 것은 아니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선후를 정리한 것일 따름이다. 셋째는 대승의 주장에 모든 제자는 부처님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앞 둘째번의 여섯 아라한이라 한 것과 같이 바로 모든 제자는 부처와 같다는 뜻으로 이를 더욱 심화시켜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부파의 사제 관계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대승의 수평적 관계로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곧 원래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기 운동의 모델로서 좋은 제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넷째는 출가 수행자는 물론이고 재가신도들, 즉 사부대중이 모두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원래의 부처님 사상으로 회귀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출가수행자의 교단인 부파불교의 상좌부(테라바다) 등에서는 수행의 엄정함을 강조하고 부처님을 전적으로 특수한 예외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팔리 성전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의 하나로 알려진 《숫타니파타(Suttanipa?a)》에는 부처님을 복수로 사용한 예(81, 85, 86, 386, 523송 등)가 있으며 거기에서는 수행승 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진다. 다섯째로 부파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의 상태를 보살이라고 한다. 여기서 보살은 ‘부처님이 되실 것으로 예정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및 미래의 부처님으로 예정되어 있는 미륵(彌勒)만을 보살이라 부르지만, 대승에서는 보살의 수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체로 불교에 뜻을 둔 사람은 누구나 다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원래의 근본불교로 회귀하려는 아라한의 수행계위는 당연한 것이다. 보살사상의 구현은 대승적 불교의 발자취이며 지향점으로 사상적으로 근본불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보살과 관련하여 그 수행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라미타(pa?amita?), 즉 반야의 실천적 완성 내지는 성취이다. 보통 육바라밀(sad-pa?amita?)이 있는데 특히 반야바라밀(智慧, prajn??pa?amita?)을 강조한다. 이것에 대하여 《반야경》이라는 방대한 문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지혜 즉 반야라고 하는 것은 만물을 바로 관찰하여 진상을 아는 것을 말하며, ‘구애받지 않는 공’이라는 것의 인식에 의하여 성립하는데, 이것은 만사에 대한 정확한 직관력과 통찰력을 요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승경전의 특색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은 《아함경》 〈도품(道品)〉에 설해져 있는 것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9) 대승 단독의 반야가 따로 있다고 강조함은 선후의 체계적인 공부가 미흡한 경우라고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 한편 부파불교에서는 무아의 사상10)이 강조되어지는데, 이것은 이른바 근본불교사상의 하나라고 믿어져 왔다. 부처님께서 어떤 경우에 무아를 가르치시고 제자들을 집착(執着)으로부터 해방시킨 일은 사실일 것이다.9) 조용길 편저, 《아함성전(A?ama su?ra)》(해조음 출판, 2002. 5.), p.729, 732 등 10) 조용길, 《근본불교철학의 현대적 이해》, 별편, p.276 상.
그러나 불교의 세계관 전체의 근본이 자아의 부정이라는 것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할 의심스런 부분이다. 무아라고 하여도 “아(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오히려 “이것도 아(我)가 아니다”, “저것도 아(我)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평소에 경험하는 현상 하나 하나를 객관(色)과 주관(受想行識)의 양편으로부터 그것들이 고정된 아(我)라고 하는 것을 부정해 간다. 그렇게 하면 현상을 초월한 곳에 참다운 진아(眞我)가 발견되어진다.
무상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제행무상이라는 것은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라는 뜻이므로 현상계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 즉 부처님의 경지는 무상하지 않은 것이다. 대승경전에서는 이것을 분명하고도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음은 ‘부처님 원래의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음’ 이지만 부파에서는 무상에만 국한하여 설하고 절대의 경지에 대하여서는 명확히 말하는 것을 피하고 소극적인 수행과 계율만을 강조하고 있음도 이미 지적한 바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올바른 무아관을 정립하고 정신적· 내면적 무아를 깨우쳐준 것이 오온개공이라면 물질적 고정적 무자성을 깨우쳐준 것이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6대(大) 사상이 아닌가 반문해 본다.
무아·공· 반야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으로 연기적 중도관이며 여기에는 소승도 대승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성문승의 배움과 수행의 단계와 이를 성숙시킨 보살승의 실천적 무량심(無量心)의 성취의 길을 상하가 아닌 선후의 일로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원리주의11)를 타파하고 존재의 무아, 공의 여실지견으로 해탈의 자유와 평등의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불설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판단되어진다. 11) 앞의 책, pp.219∼230.
1) 유신적 경향의 타파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본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지만, 그 사회· 지역의 여건에 따라 변용에서 변질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도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인도의 힌두교의 발흥에 대응하는 불교의 변화라든지 서역, 중국의 토착화 과정에서 야기된 다불다보살 등 비불교적 요소 또한 만만치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존한 석가모니불보다는 법신불이나 보신불에 기울어져 있는 듯한 상황은 꼭 불교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다분히 있다. 또 대승불교의 모든 보살들의 위상이 거의 신적인 위치로 가 있는 듯한 현상은 부인하기 어렵다. 부처님 본래의 사상은 ‘참생명 찾기 운동’12)이자 ‘참생명의 존재가치 세우기 운동’이며 이것을 통해 모든 존재가 공존공생하는 ‘중생구제의 무량자비 실현’에 있는데도, 이를 망각한 단순하고 맹목적인 보살에의 귀의는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이것은 그토록 부처님이 경계했던 형이상학적· 범신론적 유신교로 타락되고 마는 듯한 양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2) 조용길, 〈佛敎의 生命倫理觀〉, 《한국불교학》 제28집.
이러한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 혹은 신행적으로 볼 때 문제의 소지가 있으며, 본래의 불교에서 동떨어진 형태로 양각되고 있음이다. 다불다보살 사상이 중생구제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복리복락만을 추구하는 상하, 주종개념으로 비춰지고 있음은 재고해봄직 하다. 이들 대승을 표방한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 등 서구인들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다고 우기는 창조주가 아니다. 유일 절대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13)13) 마스다니 후미오, 이원섭 역, 《불교 개론》, p.21.
여기에 필자도 적극 동감한다. 우리가 부처님을 아침, 저녁 예경하고 받들고 있음은 참진리, 참생명, 참가치의 구현자이신 부처님을 존중하고, 청정일심인 불보(佛寶)와 밝은 진리인 법보(法寶)와 화합대중인 승보(僧寶)가 다같이 청정정토(淸淨淨土)로 나아가자는 원력(願力)의 실현을 일심으로 회향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예경은 막연히 비는 행위가 아니라 원력의 힘을 모으는 예경이며, 숭모이며, 예찬이며, 일념의 기도일 것이다. 물론 불교의 신관과 힌두교 내지 기독교의 신관은 확연히 다른 것이지만, 외형적· 내면적 대승이나 부파의 부처님에 대한 귀의가 그들의 신관과 동일하게 비추어질 때, 이는 말로만 다르다고 주장하여도 소용이 없는 비불교적인 요소임에는 부인하기 힘들게 된다.
칠성과 신중에 관한 것도 초기 불교 전개시의 토착화 과정에서 연유된 것으로, 일면 포용적 의미는 있는 것이지만, 부처님 본래의 사상적 의미에서 본다면 반드시 불교적 요소인가는 반문해볼 수 있다. 그렇다고 당장 칠성, 신중을 부정하고 없애라는 것 또한 무리이다. 다만 국토의 정화나 화합대중사회의 실현은 신앙하는 행위가 신행의 차원을 달리한 계행과 실천에 있음으로 해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반면에 대승의 차원 높은 경지의 이미지가 다불다보살 사상의 지나친 변용에 의해 다소 변질되어지는 듯한 성향은 개선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본래의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본 취지에 맞추어 그 중심이 되는 《아함경》 및 아함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대승의 본질을 조화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본래의 부처님 정신에서 벗어난 미신이나 우상이나 숙명적, 운명적 사유에서 맴도는 방황의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의 칠성신앙에 대한 언급은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14)14)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 《증보 한용운 전집》(신구문화사, 1980), pp.72∼
2) 맹신적 기복에서 수복(修福)의 불교로 거듭나야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 복을 빌고 바라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현대 동서 각 종교에서 보이는 무의미하고 몰가치적인 기복화의 경향은 윤리도덕성의 회복에 커다란 장애적 요소로 자리잡고 있음은 가히 인류의 미래를 생각할 때 중대한 사안이다. 《삼국유사》 〈신라 사원〉편에 사원(寺院)을 정의한 것이 있다. “불법을 믿어서 복을 닦고 죄를 없애는 곳(佛法崇信修福滅罪之處)”이 사찰이라는 내용이다.15)15) 《三國遺事》, 大正藏 49, p.987中.
이는 부처님 진리를 잘 받들고 믿음으로써, 수복하여 죄업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절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수복(修福)과 불법이라는 두 단어이다. 즉 부처님 진리란 무엇이며 과연 수복이란 기복(祈福)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삼국유사》의 내용은 불교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이고 수복을 통한 한국 불교의 가치관과 지향할 바가 무엇인가를 가늠해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먼저 수복(修福)이란 말을 ‘복을 닦는다’고만 하면, 단순히 복(福)만을 빌게 되는 기복(祈福)의 의미로 전락되고 만다.16)16) 조용길,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전통적 불교윤리의 사회적 수용과 변용에 관한 고찰〉, 《한국불교학》 제29집(2002).
그러나 이를 위해서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수신(修身)은 단순히 몸만 닦으면 가정과 나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수신이란 말의 의미 속에 수심신(修心身)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마음과 몸을 잘 닦아야 가정이 화목하고, 가정이 화목하여야 나라가 안정되고, 나라가 안정되어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곧 《삼국유사》의 ‘수복’은 ‘수심신복(修心身福)’이니 맹목적으로 복만을 닦으라는 내용이 아니라 ‘심신을 잘 닦고 갈고 덕을 갖춤’이 곧 복이라는 본래 아함상의 ‘신·구·의 삼업청정’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보면 복은 복전사상으로 작복의 의미이지 그저 빌기만 하는 기복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17)17) 조용길 편저, 《아함성전》, p.153. (南傳, 상응부경전 12.41 五罪畏) 참조.
그러나 이것을 망각하고 다불다보살에게 맹목적인 기복의 이기적인 행위를 정당화시킨다면 이는 발전이 아닌 퇴보이며 대승은 부파불교 중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수복’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기복이라 한다거나, 또 점오점수(漸悟漸修)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니 하며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불필요한 논쟁에 빠져 파행적 분파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불전에 깊이 참회해야 할 사항이다. 마음 밭에 복덕의 씨앗을 심음은 삼업청정과 도덕성 윤리성 회복이라는 중생구제의 일임에도 이를 망각하고 있음은 참다운 아라한과 참다운 보살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이때에 매우 절실한 측면이 아닐 수 없다.
소승은 아라한이 목표이고 대승은 보살이 목표라는 이분법적인 양극화 현상은 하루빨리 타파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이다. 아라한과 보살이 둘이 아니고 성문· 연각· 아라한· 보살· 불이 각기 고정된 틀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은 중생의 어두운 측면이다. 마음과 몸을 잘 다스림이 바로 복이라는 말은 수복을 의미하는 것이지 막연한 기복의 의미는 아닌 것이다.
《삼국유사》의 수복은 바로 아함에서 숱하게 나타나는 부처님의 복전사상의 한국적 전개가 아닌가! 맹목적· 우상적· 주술적· 비밀적· 무속적인 기복신앙의 현상은 동서의 모든 종교가 보이는 타락적 양상이다. 만약 대승을 표방한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이 이러한 지경이라고 진단된다면, 불교 본래의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방편불교가 결국은 변질된 불교라면 이미 불교의 ‘참생명 찾기 운동’ ‘참생명의 존재가치 세우기 운동’과 ‘참생명 구제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3) 포살(布薩, posadha)과 자자(自恣)의 참회
불교사상이 일반화되고 보다 대중화되려면 포살과 자자의 참회(懺悔)와 성찰(省察)의 수행(修行)이 일반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부대중이 포살과 자자에 흔쾌히 동참하여 참여의 불교를 생활화하는 운동이다. 참회하며 기도 정진하는 가풍이 영속되는 한 불교의 장래는 밝다. 그러나 형태적인 의례에만 치중하는 한 불교의 발전이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승단 내의 안거를 통한 자자의 시행을 여법히 한다면, 승단의 기풍이 서고 사부대중을 이끄는 참 스승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승단에서 이러한 포살과 자자가 여법히 시행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열의 있는 가풍의 승계는 항시적으로 요망되어진다. 이것은 불교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것이고 한국불교의 위상 정립에도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논란을 하려면 왜 포살과 자자가 필요한가, 포살과 자자가 왜 잘 시행되고 있지 아니한가, 포살과 자자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포살과 자자가 윤리성 회복에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등의 수행과 그 실천에 관한 논의가 더 급선무가 아닐까 한다.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승 발전되어 온 것은 그래도 이러한 포살과 자자라는 가풍이 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적인 수행에 동참하지 않는 이론적인 논란은 무의미하고 정체성을 살리기에도 너무나 미흡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승을 표방한 한국불교는 하루 속히 이러한 비불교적 요소를 타파해야만 한다.
이제는 대승불교 찬술자들의 관점을 초기경전의 입장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대승경전 자체가 지니고 있는 부정적 요소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에는 비록 스승도 제자도 무차별이라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선후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고 하는 점이다. 다만 깨달음의 질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좀 난감한 일이 아닐까 한다.
초기경전의 여섯 아라한18)과 ‘깨달은 자와 깨달은 자의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란 붓다누붓다(buddha?ubuddha)19)의 묘사를 통해 보더라도, 너도나도 똑같은 깨달은 자라고 생각하는 자만심과 오만심 같은 교만의 흔적은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깨달음을 이룬 후에도 한결같이 스승으로 존숭하는 가풍의 진작이 요망되어진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예경이 잘 갖춰진다는 것은 곧 겸양지덕을 갖춤이다. 18) G. P. Malalasekera, Encyclopaedia of Buddhism(The government of ceylon, 1966), Vol. II, p.41. 19) Theraga?h, ed. H. oldenberg(London: PTS, 1883), p.111.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되는 길이며, 참생명의 가치를 드러내는 길이며, 모두가 다 공감대를 갖추는 길이며, 공존의 길이다. 그런데 후기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모든 경전들을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인 양 찬술자들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았고, 이 대승경전만이 부처님의 진설이고 그 외 아함 등 부파의 전승은 소승이라고 폄하하였다. 어쩌면 이러한 찬술자들의 이중적 잣대가 오늘날 불설· 비불설의 화근을 낳고 비생산적 논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반문해 본다.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자신들의 대승경전을 논서로 명기해서 남겼다면, 후대의 불설· 비불설의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초기 불교를 중심으로 발전된 대승경전의 위대성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새로운 경전의 생산이 아니라 있는 경전에서 그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대승 운동이며 불교를 참다운 삼보의 언덕으로 인도하는 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경(僞經) 시비도 사라지게 될 것인데, 이럴 경우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과 같이 많은 논· 소와 주석서가 저술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됨이 옳다고 본다. 그러나 후대에 새로운 대승경전이 마구 만들어진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삼보의 기본적인 틀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혼란만을 자초할 것이다. 깨달았다고 모두가 다 경전을 만들면 그 누가 불설· 비불설을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용수의 소승 비판은 불설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부파불교 전체를 소승화시키는 것이 아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효 스님의 회통의 일심사상도 ‘본래의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기 운동’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대승 찬술자들의 위대한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지만 잘못 사유된 경향과 이분법적· 소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분노와 아쉬움과 씁쓸한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부처님께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에 중생구제의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해하고 강의하고 있다. 이 일은 부처님 당시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계속되어지는 여실지견(yatha?hu?a)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의 말과 같이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20)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and Bodford: The Gordon Fraser, 1959), p.17.
필자는 오히려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라는 지적이 무리가 없음에 동감한다. 이 같은 지적들은 언급한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 희론이나 절대적 신관이나 비밀스런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던 부처님 당초의 《아함경》 사상에 회귀하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대승경전 찬술의 여력이 있다면,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대승 찬술자들의 지나친 독선을 시대적 적응이라고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불교사상에 적지 않은 오해와 곡해의 상황을 끼친 것이므로 더 이상 같은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우리는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쫓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만한 것을 볼 수 없다”라는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지적을 귀담아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대승에 뜻을 둔 자가 이점을 망각하고 있다면 사도(邪道)로 나아가는 것과 같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말로는 대승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삼보의 뜻과 반대되는 듯한 불신과 부정적인 냉소주의는 소아적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다. 아함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으로서 ‘와서 능히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반드시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누누히 설해지고 있지 않은가!
《아함경》의 가치는 불교학의 기초로서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반야경》 등에 앞서서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아함경전은 예부터 소승경전이라고 경시되었으나 그 비중은 가히 측량키 어려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체계적인 경전의 독송과 이해의 폭과 깊이에 있어서도 또는 일상생활의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도 아함의 틀에서부터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인도의 부파불교시대에는 아함만이 절대적 권위였으며, 유일무이의 본체였음은 불문가지이다.
잘 아는 것처럼 용수보살도 그 사상의 근간은 역시 다른 무엇보다 아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태사상도, 화엄사상의 심오함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맨 먼저 아함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아함경》이 속칭 대승이라 부르는 모든 경의 기초경전으로서 갖는 위치는 확고부동한 것으로 사료된다. 《아함경》을 소승으로 취급하려는 것은 부파불교시대의 승려들이나 연구자들이 이해한 옹졸한 소승적 교리체계에 관한 오류의 지적이지 《아함경》 그 자체의 소승적 경향 때문은 아닌 것임을 파악하여야만 한다.
동서고금에 보수성향과 진보성향은 역사의 두 수레바퀴로서 상존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적 전개에서는 그 좋은 사상과 사유가 덜 익혀지고 어설프게 잘못 인식되어 보수가 보수 아니고 진보가 진보 아닌 질곡의 길을 걷고 있음은 심히 자탄을 금하기 어렵다. 정법의 세계를 직시하고 체계적인 공부와 그 근본적인 뜻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라면 원래부터 보수도 진보도 우열의 고저장단과 우비고뇌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적시할 것이다.
‘대승사상은 부처님 근본불교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는 것은, 불설비불설의 우열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과연 우리들이 생을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에 대한 제시이기도 하다. 어느 특정한 편가름은 부처님 본래의 사상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소득 없는 것이다. 때문에 대승경전의 정체성을 아함의 틀에서 찾자는 것은 불설의 본질 규명을 위해서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신비적· 운명적 사유와 인생관과 세계관이 난무하는 세계에 등불을 비추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무아·공관과 반야와 해탈· 열반· 윤회· 업에 대한 불교 내외의 오해와 기복적인 인식을 무슨 잣대로 막아 나아갈 것인가? 이들 용어의 개념과 사상적 개념의 일치성을 추구하고 다듬어야만 한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러한 정법에 기초하여 비불교적 요소를 타파하여야 참다운 중생사회구제의 원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기리고 그 정신과 사상을 올바르게 전개시키는 것이 대승의 진의라면 이분법적 대·소승의 발상을 폐기하고 무량한 삶의 가치를 구현시키는 정진에 매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시대는 점차로 정화되어 진정으로 깨인 자들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보수는 진보로, 진보는 보수로 서로 서로가 앞발과 뒷발이 발맞추어 나아가야 하듯, 다가오는 흐름을 막을 길은 없을 것이다. 다만 각기 서로가 한발씩만을 붙들고 있다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대승적이든 소승적이든 고착되어 더 나아갈 희망의 탑은 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점점 멀어져 갈 것이다.
사부대중의 위상정립과 미래의 불교를 위해서는 기복적이고 수구적이고 부정적이고 근시안적인 길에서, 봉사와 동고동락과 동체대비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넓은 안목으로의 발상의 전환이 요망되어진다. 한국불교가 직면한 시대적 중대성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기복보다는 수복· 작복의 길로 유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을 존숭하고 사부대중의 근본불교를 숭모하는 까닭에 오늘날의 시대적 문제들을 진단해보고 거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해본 것임을 밝혀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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