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연구 32집]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 고찰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이필원/청주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선행 연구 검토
2. 운문 경전에 나타난 사무량심
3. 산문 경전에 나타난 사무량심
4. 해탈도로서의 사무량심
Ⅲ. 맺음말
요약문
불교에는 많은 종류의 수행법이 존재한다. 그 수행법의 일차적인 목적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diṭṭhe vā dhamme)’에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입장에서 사무량심을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주지하듯이 사무량심은 사범주라고도 한다. 즉 사후에 브라흐만과 함께 머물게 하는 수행법이란 의미이다. 즉 주안점이 현재가 아닌 사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사범주 혹은 사무량심은 경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고, 그 예도 풍부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으로서의 사범주 혹은 사무량심의 용례는 배제하였다. 사무량심이 수행법의 한 종류라고 하는 한, 그것의 본래적 목적은 단순히 범천에 태어나는데 있는 것으로 보기에는 불교의 목적-붇다는 어디까지나 해탈에 그 초점을 두었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후에 대한 내용이 비불교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본래 목적이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좋은 가문에 태어나는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해탈의 성취방법으로서의 사무량심과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서의 사무량심/사범주 가운데, 전자가 후자보다 본래적 의미였음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초기경전 가운데, 운문경전과 산문경전 속에 설해져 있는 사무량심의 용례 가운데, 번뇌의 소멸을 통한 해탈의 추구, 혹은 사선과 같은 분명한 선정의 방법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지 조사, 검토하였다. |
1. 들어가는 말
불교의 기본 전제가 ‘지금 여기(diṭṭhe vā dhamme)’, 즉 현재라는 시점에서 고통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행법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행법에는 불교사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발달과정이 숨어 있을 것이다.
과연 고따마 붇다가 실수했던 수행법은 무엇일까. 현재를 사는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어찌 보면 진부한 물음일 수도 있다. 이 물음은 현재 우리들이 불교의 온전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혹은 전하고 있다고 하는 경전(suttas)을 얼마만큼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른바 초기경전군인 아함과 나까야에 기술된 내용은 모두 불설인가 아니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서 개변 혹은 창작된 것인가라는 문제제기가 그것이다.1)
1)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최근 국내에서 의미있는 논의가 있었다. 권오민
(2009) 교수가 ‘불설과 비불설’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를 계기로 법보
신문을 통해 불설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지면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
데 이 주제는 권오민 교수의 논문이 처음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조성택(2009) 교수의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에서도 유사한 내
용이 언급되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최근의 연구물 가운데 Alexander Wynne(2004)와
並川孝儀(2005) 등의 논문이 있다.
이것은 수행론을 검토함에 있어서도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수행론의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문헌상으로 -초기불교의 경우- 아함과 니까야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2) 그렇기 때문에 아함과 니까야에 기술되어 있는 수행론이라고 해서 문자 그대로 붇다가 수행했던, 혹은 붇다 재세 시에 교단 내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중에는 후대에 체계화가 이루어진 것이나, 받아들여진 것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본 논문은 주제와 관련하여 논서와 주석서는 참조하지 않는다. 논서와 주
석서는 불교가 이미 확고하게 정착한 이후의 문헌이며, 따라서 정치한 교
리적 발달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사무량심 혹은 사범주라고도 하는 수행법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수행법은 일단 사범주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라문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이라기보다는 불교외적인 수행법으로서, 어느 때 어떤 이유에서 불교 수행법으로 정착했다고 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혹은 이 수행법은 단지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 널리 이해되고 있다.3)
3) 이와 관련해서 K.R. Norman(1995 : 114)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brahma-vihāra는 본래 바라문의 전문용어였다고 생각되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브라흐만에 머물다. 혹은 범천과 함께 머물다’란 의미가 되는데,
산스끄리뜨의 용례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이 언어는 brahma-sahavyatā를
획득하기 위한 바른 길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았던 젊은 바라문들을 상대로
했던 (붇다의) 설법 중에서, 그 본래의 의미가 전해진 듯 하다. 문맥에서는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의미하는 듯한데, 붇다는 가벼운 농담 가운데, 범천과
합일된 상태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고, 범주(梵住, brahma-vihāra)라고 하
는 사무량심을 행하는 자는 범천계에 범천으로서 재생한다고 설명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기존의 이해를 바탕으로, 사무량심이 갖는 수행론으로서의 위상이 과연 범천에 태어나는 정도의 수행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정당한지, 아니면 다른 수행법-정려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과 마찬가지로 번뇌의 소멸을 통한 해탈을 야기하는 수행법으로 이해되는 것이 정당한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무량심에 관한 선학들의 견해를 고찰하고, 그 중에서 이 수행을 해탈도의 성격으로 파악한 설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니까야를 통해 검증해보고,4) 그를 통해 사무량의 해탈도로서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재가자들이 사후 하늘나라(梵天)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 설한 사무량심 혹은 사범주의 내용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한다.
4)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T.Vetter(1988)의 글과 藤田宏達(1972)의
논문에 의한 것이다. 이들은 사무량심이 적어도 어느 시기까지는 해탈도로
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나까무라 하지메,
미즈노코겐 등도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들 선학들의 견해가 타당한지를 니까야와 아함을 중심으로 검증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 논문은 Suttanipāta(이하 Sn.)의 Mettā-sutta(143∽152G)와 73G를 검토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기존의 연구 검토 5)
5) 사무량심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필자가 찾아
본 논문으로는 최기표(1999)의 ‘四無量心의 수행체계’가 유일하며, 간
단하게나마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는 조준호(2000 : 331-332) ‘초기불
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의 기술뿐이다. 최기표의 경우 사무량심을 천
태의 교설에 입각하여 논술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아함의 내용에 한 장
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입장은 사무량심은 수행론이기는 하지만 어디
까지나 세간선이자 범부선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조준호의 경우는
사선 가운데나 또는 사선 전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방편적이며 보
조적인 수행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필자가 밝히고자 하는 사무량 수행
의 위상에 대한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에 대한 논의는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는 외국 학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
지임을 밝혀둔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콘제(1986)의 ‘慈・悲・喜・捨에
관하여’가 있다. 이 논문 역시 사무량심은 불교의 핵심적인 수행이 아닌
종속적인 수행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인도의 다른 종교전통에서
유래한 수행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K.R. Norman(1995)의 견해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만의 논문에 대해서는 각주 3)을 참조하라.
우선 본 연구주제에 관한 선학들의 연구를 주요 학자를 중심으로 개괄 내지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의 연구는 본고를 서술하는데 있어 중요한 해석학적,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무량심을 선정적인 특징을 갖는 수행법으로서, 즉 해탈도의 특징을 갖는 점을 지적한 학자로는 T. Vetter가 있다. 그는 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m(1988)란 책에서 Chapter 7을 사무량심에 할당하고 있다. 사무량심이 주류적 수행법의 위치에서 밀려났다고 하는 견해를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me cetovimutti(나의 심해탈 ; 내 마음의 해탈)란 붇다가 처음 정각을 성취했을 때 표현했던 ‘나의 심해탈은 부동이다’와 비교하면서 사무량심이 본래는 해탈을 성취케 하는 주요한 수행법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다.
中村元 ?原始仏教の思想?上(1970 : 286ff)은 사무량심이 단순히 범천에 태어나는 수행법으로 인식되게 된 과정에 대해서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사무량의 ‘자비’가 붇다의 ‘대비(mahākaruṇā)’와 구별되면서 사무량심의 위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brāhma vihāra가 본래는 ‘숭고한 경지’를 가리키는 복합어였지만, 후대에 brāhma는 ‘청정한/숭고한’이란 형용사가 아닌 ‘독립명사’로 간주되어 ‘범천’으로 해석되게 되면서 사무량심이 사범주라고 하는 낮은 단계의 의미를 갖는 덕목으로 간주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brāhma vihāra를 통해 사무량심의 위상 변화를 지적한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이 부분은 본문에서 고찰될 것이다.
水野弘元 ?仏教教理研究?(1997 : 52)은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사범주)는 四禪에 관련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자비희는 앞의 3선에 속하고, 捨무량은 제 4선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울러 범부가 닦는 사무량을 유루로, 성자가 닦는 사무량심을 무루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무량심의 각 支가 왜 사선에 배대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또한 범부의 사무량을 유루로 성자의 사무량을 무루라고 한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청정도론」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6)
6) 金亨俊(1999 : 508) 참조.
10) Bronkhorst(1993 : 124)는 Khaggavisāṇa sutta는 의심의 여지없이 고층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Culla Niddesa에 이 경전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 경전이 일부 학자들은 석존 이전의 문헌일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그는 분명히 석존 이후의 문헌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
Sn.54cd의 내용을 들고 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책 p.125를 참조하라.
11) 여기에서 sati란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경우의 싸띠는 위빠사나 수행체계의
싸띠가 아닌, 자애 수행을 의미하는 것, 즉 선정 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I.B. Honor(1979 : 198)는 ‘비록 아라한의 특성 중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사범주의 자애mettā는 친밀함, 우호와 같은 덕을 심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역시 Sn.의 내용을 통해 자애라는 것이 해탈자liberator에게
발견되는 특징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후대의 아라한들의 경우에는
자애의 덕은 나타나지 않고 다만 보살bodhisattva의 덕으로 간주된다는
맥락에서 자애를 잠시 언급하고 있다.
13) 中村元(1970 : 305)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慈’가 예부터
‘숭고한 경지’(brahma vihāra 梵住, 梵堂)라고 불렸기 때문에, 나중에 앞에서
든 네 가지가 또 사범주로 정리된 것이다. 또 ‘慈’가 ‘무량’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 네 가지도 ‘사무량’ 또는 ‘사무량심’으로 정리되기에 이르
렀다.” MN. III(pp.81-82)에서는 14종의 수행법을 열거하면서, 사념처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은 하나의 수행체계로 분류하면서, 사무
량심의 경우는 그것을 단일한 수행체계가 아닌, 지분 각각을 수행법으로 제시
하고 있다. 즉 mettābhāvana, karuṇābhāvanā, muditābhāvanā, upekhāvhāvanā로
각기 달리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네 가지가 연관되어 있는 수행법
으로 인지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을 하나의 수행체계로 정리할
만한 용어 - 즉 사무량심이 되었든 사범주가 되었든 - 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14) 전재성(2005 : 98)은 이것을 “해탈로 이끄는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
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주석서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주석서가 제작된 시기에도 여전히 사무량심은 해탈도로서 인식되고 있었
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5) K.R. Norman(1984)은 “not clashing with all the world”(세상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16) 中村元(1970 : 303)은 “… ‘해탈’은 궁극의 목적으로 생각되어 나중에는
제외되고, 나머지 네 개만이 정리되어 설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해탈과 나머지 네 가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필자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가능한 주
석서의 해석을 참조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전재성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주석서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5세기 무렵의 상
좌부의 이해이며, 아비담마의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桜部建(1975 : 27)은 네 항목을 해탈로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 어떤 설명도 없다.
17) Nārada(1978 : 283)는 이것을 ‘열반’으로 해설하고 있다. Sn.1065~1066G
에는 santa/santi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여기에서 santa(적정)는 있는 그대로
알고 바르게 자각하고 실천함으로써(diṭṭhe dhamme anītihaṃ yaṃ viditvā sato
caraṃ) 세상에 대한 집착을 극복한 상태를 말한다.
18) 中村元(1984 : 140)은 ‘清らかな安住の境地(청정한 안주의 경지)’라고 번역
하고 있다. 사실 649G에 나오는 brahmavihāra는 앞서 Sn.151게송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왜 이렇게 번역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내용상 이 게
송은 레와따Revata장로가 자신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수행에 대한 내용을 노
래하고 있는 것이기에, 죽은 뒤에 갈 수 있는 범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Sn. 151G와 비교해 볼 때, brahmaṃ vihāraṃ이
brahmavihāraṃ이란 복합어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해
석은 K.R. Norman(1984)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Sn. 151G를 보라.
19) MN. I, 7번 경(pp.36-40)이다. 이에 상응하는 한역 경전은 중아함경 93번
경인 水淨梵志經이다. 水淨梵志經은 MN의 기술과 거의 동일하지만, 내용
상 삼귀의 부분이 없고, 마지막에 해탈과 해탈지를 획득한다고 하는 내용
도 없다. 또한 水淨梵志經에서는 마음의 더러움心穢을 21가지로 제시하며,
이러한 마음의 더러움이 없으면, 천상天上에 태어난다(T1, 575b14)고 기
술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사무량을 잘 닦는 것善修이야 말로 마음
을 닦는 것(是謂, 洗浴內心 ; 非浴外身. 575c16)이라고 한다. 따라서 MN의
Vs와 중아함경의 水淨梵志經에서 사무량에 대한 위상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주지하듯이 MN는 상좌부 소전이고, 중아함경은 설일체유부 소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두 경전의 기술 내용만을 가지고 두 부파의 사무량심에
대한 이해를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니까야에서도 사무량을 해탈
과 연결짓지 않고 있는 기술이 여기저기 산재(예를 들면, MN.II, p.82 ; AN.III,
p.225등)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MN의 Vs는 이미 사무량심의 전형적인 기술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신층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
리는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에서 MN의 Vs를 굳이 선택한
이유는 일단 사무량을 번뇌와 해탈이란 구도 속에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것은 적어도 신층의 단계에서도 사무량심을 해탈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 DN.III, Udumbarikasīhanādasutta(pp.49-50)에는 오개pañca nīvaraṇa를
버리고서 마음의 수번뇌cetaso upakkilesa를 지혜로서paññāya 약하게 할 때
dubbalī-karaṇe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을 수반한 마음에 머물게 된다고 기술
되어 있다. 내용상 Vatthūpamasutta의 출발점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2) 전재성(2002: 177)은 “그가 어느 정도”라고 번역하고 있다. 각주 134에서는
그 근거를 주석서에서 찾고 있다. 필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까지”라고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뒤에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닦음으로써 나머지 마음의
더러움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해탈에 이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경전
의 앞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마음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알고 나서viditvā’ 그것
들을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기
마음에 대한 일상적인 관찰로만으로 어느 정도 제거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
로 이해된다. 그리고 남아 있는 마음의 더러움은 보다 깊은 선정의 단계에서
제거되는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통해 제거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23) CPD, attahveda, s.v. “the joy caused by understanding or comprehension
of the truth.”
24) 여기서 ‘ñāṇa’는 ‘해탈지解脫智’로 번역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해탈했음을
아는 지혜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장아함경?(T1, 12a23-24) 등과 같은 한역
경전에서는 ‘已得解脫, 生解脫智, 生死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受後有.’라고
번역하고 있다.
25) 숫자는 필자가 임의로 붙여놓은 것이며 원문은 너무 길어 생략한다.
26) 전재성(2007 : 271)은 “나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을”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대림스님(2007 : 278)은 “나는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로 번역
하고 있다. 이에 반해 T.Vetter는 me를 소유격으로 보고 me cetovimutti는
‘나의 심해탈’이라고 하는 하나의 관용적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다.
28) 사무량심을 심해탈로 기술하고 있는 경전은 이외에도, AN. I, p.4 ;
DN.III, p.248 ; SN. V, pp.118-121등이 있다.
29) T.Vetter(1988 : 26)는 “이 느낌은 삼매와 동일시되고 계속적으로 정려
dhyāna의 단계에 공통하는 마음의 단계, 즉 심사, 숙고, 기쁨, 행복, 그
리고 평정과 함께 닦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30) 이것은 Sn.의 Dvayatānupassanāsutta의 내용과 동일하다.
31) SN. V : 131 mettā bhikkhave bhāvitā bahulīkatā dvinnam phalānam
aññataram phalam pāṭikaṅkhaṃ diṭṭheva dhamme aññā sati vā upādesese
anāgāmitā. 필자가 본 PTS본 1976년판에는 ‘Mettā bhikkhave bhāvitā.’만이
나온다. 이것은 앞의 백골관(aṭṭhikasaññā)의 내용과 동일하기 때문에 생략한
것으로, 필자가 각주에 인용한 경문은 나머지 부분을 앞의 내용으로 채워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완벽한 앎, 즉 aññā는 아라한을 의미한다.32) 물론 SN. V. Bojjhaṅga-Saṃyuttam에는 백골관, 시체관상, 수식관 등의 수행으로도 동일한 과보를 얻을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 방법으로는 칠각지의 수행에 입각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필자는 이 경전을 통해 불교의 모든 수행법은 기본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애수행 및 연민, 기쁨, 평정의 수행 역시 지금 여기에서의 해탈이 수행의 기본적 맥락이 아닌가 생각한다.
32) Sn.의 Dvayatānupassanāsutta를 참조하라. 아울러 Jan T. Ergardt(1977 : 13)은
‘Aññaṃ vyākaroti는 아라한과(arahantship)를 드러내거나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33) 이러한 수행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비단 이 경만이 아니다. 이에 대
해서는 藤田宏達(1972 : note64)가 자세히 전거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
르면, “유부계열의 아함에서는 사선→사무량→사무색정이라는 계열을
설하고, 사무량을 수행항목 속에 넣고 있다.『중아함경』권47, 권48(대
정장 1권, 720상, 730중),『잡아함경』814경, 815경, 964경, 1042경,
1142경(대정장 2권, 209상중하, 247중, 273상, 302상) 등”에 동일한
수행구조가 설해지고 있다고 한다.
比丘! 當學如是所依. 住止令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何者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謂比丘離欲, 離惡不善之法. 至得第四禪成就遊. 是謂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復次, 何者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 謂比丘心與慈俱, 遍滿一方成就遊. 如是二三四方, 四維上下, 普周一切. 心與慈俱, 無結・無怨・無恚・無諍, 極廣甚大, 無量善修, 遍滿一切世間成就遊. 如是悲・喜心與捨俱, 無結・無怨・無恚・無諍, 極廣甚大, 無量善修, 遍滿一切世間成就遊. 是謂魔王・魔王眷屬所不至處.(T1, 720a07~18)
35) MN I, Mahāsaccaksutta(p.246)에 붇다와 악기베사나 사이의 대화에서,
붇다가 기존의 수행법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어렸을 때
경험했던 초선의 경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관
련해서는 Bronkhorst(1993 : 24)와 히라까와 아끼라(이호근 역, 1994 :
44-46), 水野弘元(1997 : 51) 등을 참조하라. 아울러 붇다의 반열반을
기술하는 내용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붇다는 이른바 9차
제정의 선정의 단계에서 색계 4선, 즉 사선의 4번째 선정 단계에서
반열반을 이룬다.(DN. II, p.156 ;『장아함경』T1, p.26c7)
36) Dhp.386G에서도 선정자(jhāyin)는 “[번뇌의] 티끌을 떠난 자(virajaṃ)이고
해야 할 바를 행한 자(katakiccaṃ)이며, 번뇌가 없는 자(anāsavaṃ)”로 기술
되어 있다.
37) SN. II, pp.210-211.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이 외에도 MN. I,
pp.21-22 ; SN. IV, pp.263-264 등에도 나온다. 빨리어 원문은 생략한다.
38) DN. I, p.73에는 오개(pañca nīvaraṇa)가 제거될 때, 기쁨(pāmujjaṃ)이
생겨나고, 몸이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갖춘 자는(sukhino) 마음을 취한
다(cittaṃ samādhiyati)고 하면서, 그 뒤에 초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이
때 마음(citta)는 선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MN. I, pp.308-
309에는 삼독(rāga, dosa, moha)에 사로잡히지 않아 각각에서 생겨나는
고통과 근심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기술 다음에 초선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 Martin Stuart-Fox(1989 : 81), 田中教照(1993 : 249)를 참조하라. 초선
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 즉 오개를 제거하는 방법
에 대해서는 Akira Fujimoto(2006)의 ‘How to Enter the First Jhāna’(JIBS,
Vol.54, No.3)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SN. V, Āvaraṇanīvaraṇasutta에는
오개가 마음을 오염시키고, 지혜를 약화시키는 원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오개를 없애는 방법으로 칠각지(satta bojjhaṅgā)를 말한다.
39) MN. I, pp.294-295 참조.
40) 각주 22) 와 金亨俊(1999 : 509) 참조. 한편 안옥선(2002 : 253)은 자비의
실천은 탐욕, 성냄/미워함,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과 직접적 비례관
계에 있다고 한다. 본문에서 고찰했듯이, 사무량이 해탈도로서의 위상을
갖는다면 이것은 당연히 삼독심의 제거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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