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열네 가지 번뇌의 상세한 해설

수선님 2019. 12. 15. 13:02

열네 가지 번뇌의 상세한 해설


수행(修行)의 목적은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煩惱)를 없애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이다. 번뇌를 없애려면 번뇌를 잘 알아야 할 뿐 아니라,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因)과 조건(緣)을 잘 알아야 한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는 번뇌를 무명(無明), 갈애(愛), 취착(取)으로 설명했으나 여기서는 남방 테라와다(上座部) 아비담마의 분류에 따라 14가지 번뇌를 상세히 설명한다.


이 14가지 번뇌에 대해서는 외워야 하고, 그 뜻을 잘 알아야 한다. 번뇌를 모르는데 어떻게 번뇌를 벗어나겠는가? 병법서에 ‘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평소에 이 번뇌들이 생기는 것을 잘 알아차려, 번뇌가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번뇌가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생기는지 잘 탐구하고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그 원인과 조건을 제거하여 다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른 수행이다.


어두운 번뇌(暗) : 무명, 사견, 의심, 혼침 (4)
어지러운 번뇌(亂) : 들뜸, 후회 (2)
더러운 번뇌(穢) : 탐욕, 자만, 성냄, 게으름, 질투, 인색, 무참, 무괴 (8)


(1) 무명(無明)


무명(無明)은 법(法)을 모르는 무지(無知)로서 캄캄한 어둠(黑暗)이다. 12연기에서 설명했듯이 삼십법(三十法)을 여실히 꿰뚫어 무간등(無間等)으로 모르면 무명이다. 이 삼십법(三十法)을 간략하게 분류하면 4가지로 볼 수 있다.


가. 일체법무지(一切法無知)


일체법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꿰뚫어 알지 못한다.


나. 연기법무지(緣起法無知)


번뇌와 업과 업의 과보를 꿰뚫어 알지 못한다.


다. 사성제무지(四聖諦無知)


고(苦).집(集).멸(滅).도(道)를 꿰뚫어 알지 못한다.


라. 불법승무지(佛法僧無知)


불, 법, 승, 계, 선정, 지혜, 해탈, 해탈지견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명(明)의 지혜로서 무명(無明)을 대치(對治)한다.



(2) 사견(邪見)


사견(邪見)은 그릇된 견해다. 무명이 캄캄하고 어두워 전혀 모르는 것이라면 사견은 그릇되게 아는 것이다. 예컨대, 윤회가 무엇인지 해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면 무명이다. 그런데 윤회와 해탈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방법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진다면 사견이다. 예컨대 계(戒)를 지켜서 해탈할 수 있다고 믿으면 계금취(戒禁取)로서 그릇된 견해인 사견에 속하는 것이다.


사견(邪見)에는 다섯 가지(五見)가 있다.


가. 유신견(有身見)


유신견(有身見)이란 몸이 있다는 견해 즉, 오온(五蘊)을 ‘나(我)’ 또는 ‘내 것(我所)’으로 보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각각 4가지씩 총20가지가 있다.


① 몸(色)은 ‘나(我)’다.

몸 자체를 ‘나’로 본다.


② 몸(色)은 ‘나(我)’와 다르다.

느낌(受), 생각(想), 행위(行), 알음알이(識)중에 하나를 ‘나’로 본다. 예컨대 느낌을 ‘나’로 보고 몸은 느낌(나)과 다르다고 본다.


③ 몸(色)안에 ‘나(我)’가 있다.

느낌(受), 생각(想), 행위(行), 알음알이(識)중에 하나를 ‘나’로 본다. 예컨대 느낌을 ‘나’로 보고 몸 안에 느낌(나)이 있다고 본다.


④ ‘나(我)’안에 몸(色)이 있다.

느낌(受), 생각(想), 행위(行), 알음알이(識)중에 하나를 ‘나’로 본다. 예컨대 느낌을 ‘나’로 보고 느낌(나) 안에 몸이 있다고 본다.


①은 몸을 ‘나(我)’로 보는 것이고, ②③④는 몸을 ‘내 것(我所)’으로 보는 것이다.

⑤ 느낌(受)은 ‘나’다.
⑥ 느낌(受)은 ‘나’와 다르다.
⑦ 느낌(受) 안에 ‘나’가 있다.
⑧ ‘나’ 안에 느낌(受)이 있다.


⑥⑦⑧은 몸(色), 생각(想), 행위(行), 알음알이(識)중에 하나를 ‘나’로 보고 느낌을 ‘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즐겁다’. ‘나는 괴롭다’는 등의 생각이 유신견이다.


⑨ 생각(想)은 ‘나’다.
⑩ 생각(想)은 ‘나’와 다르다.
⑪ 생각(想) 안에 ‘나’가 있다.
⑫ ‘나’ 안에 생각(想)이 있다.


⑩⑪⑫는 몸(色), 느낌(受), 행위(行), 알음알이(識)중에 하나를 ‘나’로 보고 생각을 ‘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과거의 나가 있다’. ‘미래의 나가 있다’는 등의 생각이 유신견이다.


⑬ 행위(行)는 ‘나’다.
⑭ 행위(行)는 ‘나’와 다르다.
⑮ 행위(行)안에 ‘나’가 있다.
⑯ ‘나’ 안에 행위(行)가 있다.


⑭⑮⑯은 몸(色), 느낌(受), 생각(想), 알음알이(識)중에 하나를 ‘나’로 보고 행위를 ‘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나는 의도한다.’ ‘나는 욕심낸다.’ ‘나는 성낸다.’ ‘나는 부끄럽다.’ ... 등의 생각이 유신견이다.


⑰ 알음알이(識)는 ‘나’다.
⑱ 알음알이(識)는 ‘나’와 다르다.
⑲ 알음알이(識) 안에 ‘나’가 있다.
⑳ ‘나’ 안에 알음알이(識)가 있다.


⑱⑲⑳은 몸(色), 느낌(受), 생각(想), 행위(行)중에 하나를 ‘나’로 보고 알음알이를 ‘내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는 안다.’ ‘나는 본다.’ ‘나는 듣는다.’ ‘나는 느낀다.’는 등의 생각이 유신견이다. 이 모든 유신견이 그릇된 견해인 사견(邪見)이다.



나. 변견(邊見)


변견(邊見)은 유신견으로 인하여 사후의 존재를 헤아려 양변(兩邊)을 집착하는 두 가지 견해다.


① 상견(常見)


사후(死後)에 ‘나’는 천상에 올라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는 사견이다. 이것은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이다. 느낌, 생각, 행위, 알음알이의 정신을 ‘나’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무아법(無我法)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이 있다는 견해는 사견이다.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실체인 ‘나’가 없기 때문이다.


② 단견(斷見)


살았을 때는 ‘나’가 있으나 사후(死後)에 ‘나’는 아주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견이다. 이것은 유물론(唯物論)이다. 몸을 ‘나’로 보기 때문에 죽고 나면 몸이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살아있는 ‘나’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본다. 부처님의 무아법(無我法)에서는 본래부터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실체인 ‘나’가 없으니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다.


다. 사견(邪見)


생사윤회(生死輪廻)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도리를 믿지 않는 사견이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선업도 없고 악업도 없으며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 일도 없다고 한다. 선행을 하여 즐거움을 받는 선인낙과(善因樂果)와 악행을 저질러 괴로움을 받는 악인고과(惡因苦果)의 도리를 믿지 않고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견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용수보살은 후생과 윤회를 믿지 않는 견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만약 몸이 멸하므로 완전히 사라진다면 어찌 중생이 전생에 익힌 기쁨과 근심과 공포 등이 있겠는가? 갓난아이가 혹은 울고 혹은 웃는 것은 전생에 익힌 근심과 기쁨이 있기 때문이니, 어른이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히 근심과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송아지가 태어나 바로 젖을 찾을 줄 아는 것이나, 돼지나 양의 무리가 암수가 짝짓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자식이 부모와 같지 않아 외모가 좋고 추함과 가난하고 부유함과 총명하고 우둔함이 각각 같지 않으니, 만약 전생의 인연이 없다면 부모와 자식이 다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지가지 인연으로 후생이 있다는 것을 안다.


또한 죽어서 가는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후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으니, 사람 몸 가운데 유독 눈으로만 보아 아는 것이 아니다. 육근에서 모두 아는 것이니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을 느끼거나, 법을 헤아려서 안다.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볼 수도 없는데 어찌 알겠는가?


생사의 법은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으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요, 천안(天眼)으로만 능히 분명히 본다. 마치 사람이 한 방에서 나와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아서 이 몸을 버리고 후생의 몸을 받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육안으로 볼 수 있다면 어찌 애써 수행하여 천안을 구하겠는가? 그렇다면 천안과 육안과 범부와 성인이 차별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음에 오고 가는 것은 없으나 번뇌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오온의 몸이 상속하여 다시 새로운 오온의 몸이 생겨나나니, 뜻을 일으켜 업을 지으면 이 인연으로 다시 태어나서 후생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마치 겨울철의 나무와 같아서 비록 아직 꽃과 잎과 과일이 없지만 시절인연과 만나면 곧 순서대로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현생에 숙명을 아는 사람이 있으니, 마치 사람이 길을 걷다가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가 깨고 나면 지나온 길을 모두 기억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일체의 성인과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에서 모두 후세를 말하고 있다.


또한 금생에서도 마음에서 불선법(不善法)이 발동하여 지나치게 되면, 예컨대 성냄과 질투와 의심과 후회 등으로 마음을 괴롭히면, 몸이 마르고 초췌하며 안색이 기쁘지 않은 것이다. 마음으로 짓는 악하고 불선한 법의 피해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몸과 입으로 악업을 짓는 것이겠는가! 만약 마음에서 선법(善法)이 생긴다면 마음이 청정하고 여실한 지혜를 얻어 마음이 기쁘고 몸은 가볍고 유연하며 안색은 밝고 깨끗한 것이다.


이런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이 있으므로 선과 불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확실히 선과 불선이 있으므로 반드시 후세가 있을 것임을 안다. 단지 중생들이 육안으로 보지 못하고 지혜가 엷기 때문에 삿된 의심을 내어 비록 복을 짓더라도 적고 엷은(淺薄) 것이다. 마치 의사가 왕의 병을 치료할 때 성의를 다하지 않았는데 왕이 그를 위하여 은밀히 집을 지어주었다. 나중에 의사가 돌아가 집을 보고 나서 더 노력하고 힘을 다하여 왕을 치료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육안의 무거운 죄로 유추하는 지혜가 엷고 또 천안이 없으며, 스스로 지혜가 없으므로 또한 성인의 말씀을 믿지 않아서 ‘어찌 후세가 있겠는가’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성인은 현재에도 있는 사실 그대로 설하여 믿을 수 있는 고로 후세의 일을 설하여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밤에 험한 길을 갈 때에 앞장서 인도하는 사람이 손을 내밀어 잡아주면 믿을 수 있으므로 곧 따라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스스로 유추하는 지혜와 성인의 말씀으로 확실히 후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견취(見取)


위의 유신견 변견 사견은 저열(低劣)한 것인데 이것을 뛰어난 견해(殊勝)라고 고집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옳고 진실하고 최고이고 뛰어난 법이고 나머지는 그르다.’ ‘내 견해만이 옳고 진실하고 최고이고 뛰어난 법이고 남의 견해는 그르다’고 고집한다.


마. 계금취(戒禁取)


계(戒)를 지켜 해탈할 수 있다고 믿거나, 계(戒)를 지켜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집착하는 사견이다. 즉, 대범천이 조물주라고 생각하여(非因計因) 항하강에 목욕하거나 고행하는 것을 참된 도라고 생각하는 것(非道計道)이다.


정견(正見)으로 이 다섯 가지의 사견(五見)을 대치(對治)한다.


(3) 의심(疑)


의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의 진리를 듣고도 확신하지 않는 것(於諦猶豫)이다. 무아(無我)를 배웠음에도 과거의 ‘나’를 헤아리고, 현재의 ‘나’를 헤아리며, 미래의 ‘나’를 헤아린다. 이것이 삼세(三世)에 대한 의심이다.


의심은 주저하고 망설이며 두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하고 결단하지 못한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저렇게 해야 하는가? 결단을 못 내린다. 의심하므로 한 길(道)로 결정하지 못하여 정진하지 못한다. 설사 나아갔더라도 의심하여 다시 물러나고 만다.


부처님(佛)을 의심하고 법(法)을 의심하며 승가(僧)를 의심하고 계(戒)를 의심한다. 이 네 가지에 대해 무너지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가지는 것을 사불괴정(四不壞淨)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가지 중 하나만이라도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네 가지 믿음이 모두 확고하면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이룬다고 증명하셨다.


믿음(信)을 닦아 의심(疑)을 대치(對治)한다.


(4) 혼침(昏沈)


혼침(昏沈)은 어둡고(暗冥) 흐린(混濁)한 마음이다. 혼침이 깊어지면 수면이 된다. 몸이 무겁고 나른하다. 꾸벅 꾸벅 존다. 마음이 나약해지고 수행하려는 의욕이 감소한다. 게으름이 동반된다. 혼침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게 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수면(睡眠)은 복(福)도 이익(利)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초저녁(初夜)과 새벽(後夜)에는 자지 말고 정진하라고 가르치셨다.


다음 게송은 숲속에서 저녁에 잠을 자는 비구에게 천신이 경책(警策)하는 게송이다. 비구는 이 게송을 듣고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比丘汝起起,  何以著睡眠?
睡眠有何利?  病時何不眠?
利刺刺身時,  云何得睡眠?
汝本捨非家,  出家之所欲。
當如本所欲,  日夜求增進,
莫得墮睡眠,  令心不自在
無常不恒欲,  迷醉於愚夫,
餘人悉被縛,  汝今已解脫。
正信而出家,  何以著睡眠?
已調伏貪欲,  其心得解脫。
具足勝妙智,  出家何故眠,
勤精進正受,  常修堅固力。
專求般涅槃,  云何而睡眠?
起明斷無明,  滅盡諸有漏。
調彼後邊身,  云何著睡眠?


비구여! 일어나라. 어째서 잠에 집착하는가?
수면이 무슨 이익이 있는가? 병들었을 때는 어째서 자지 않는가?
날카로운 가시가 몸을 찌르고 있는데, 어떻게 잘 수 있는가?
네가 본래 집을 버리고 나와, 출가한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마땅히 본래 바라던 대로, 낮이건 밤이건 정진을 더하라.
잠에 떨어져서 마음이 자재하지 못하도록 하지 말라.
무상한 감각적 욕망이 어리석은 자를 미혹하고 취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묶여 있지만, 너는 지금 벗어났다.
바른 믿음으로 출가하였는데, 어찌 잠에 집착하는가?
이미 탐욕을 항복받았다면 그 마음은 해탈하였으니,
뛰어나고 묘한 지혜를 갖추어야 하거늘, 출가해서 어찌 자는가?
부지런히 정진하여 선정을 닦아라. 항상 견고한 힘을 닦아라.
오로지 전념하여 열반을 구하여야 하거늘, 어찌 자는가?
지혜를 일으켜 무명을 끊어서, 모든 번뇌를 없애 다하도록 해라.

최후의 몸을 이루어야 하거늘, 어찌 잠에 집착하는가?


☞ 날카로운 가시는 무상(無常),고(苦)가 가시와 같다는 뜻. ☜


광명상(光明想)을 닦아 혼침(惛沈)을 대치(對治)한다.


(5) 들뜸(掉擧)


들뜸(掉擧)은 마음이 망상(妄想)으로 어지럽고 헐떡이는 상태이다. 몸의 신경은 흥분상태에 있으며, 심장은 두근두근하고 호흡은 거칠다. 들뜸은 선정을 닦는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된다. 마음이 고요해야만 법(法)의 실상을 여실히 알고 보는 지혜(如實知見)가 개발되는데 들뜸으로 인해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는다.


들뜸으로 인해 마음은 밖으로 여기저기 쏘다닌다. 과거의 감각적 욕망을 기억하기도 하고 미래의 장밋빛 꿈을 꾸기도 하고, 현재는 여섯 경계를 보고 듣고 반연(攀緣)하여 욕망과 바람을 일으킨다. 이 마음을 마음 챙김의 대상(念處)에 묶어야 한다. 마치 원숭이를 단단한 말뚝에 묶듯이.


마음의 하나됨(定)을 닦아 들뜸(掉擧)을 대치(對治)한다.


(6) 후회(後悔)


후회는 마음을 불편하고 동요하게 만든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후회가 생기며, 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후회가 생긴다. 예컨대, 계(戒)를 지키지 않으면 후회한다. 후회하면 기분이 우울하고 즐겁지 않으며 수행할 의욕이 감퇴하고 물러난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꾹 참고 하지 말아야 하며, 해야 할 일은 용감하고 굳센 의지로 해야 하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으면 만족하게 되며, 만족하면 기쁨이 일어난다. 기쁘면 몸이 가볍고 편안하다. 편안하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청정한 계행(戒)을 지켜 후회(後悔)를 대치(對治)한다.


(7) 탐욕(貪)


탐욕(貪. 渴愛)은 중생을 생사윤회에 빠뜨리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 탐욕을 없애지 않고서는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다. 탐욕을 벗어나는 이욕(離欲)은 아함경이나 니까야 초기경전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수많은 경에서 부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이욕(離欲)이 곧 열반(涅槃)이라 설하셨고, 이욕(離欲)이 곧 심해탈(心解脫. 마음의 해탈)이라고 말씀하셨다.


해탈에는 3가지가 있으니, 사마타로 탐욕과 번뇌를 다스리고 마음을 청정히 하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위빠사나로 번뇌의 뿌리를 제거하는 지혜의 해탈(慧解脫)이 있고, 양자를 모두 갖춘 양면해탈(俱解脫)이 있다. 번뇌를 다스리는 이욕공부는 초기경전에 구체적으로 자세히 나와 있고, 대승경전에서는 소상히 설하고 있지 않다. 대승은 이미 초기수행법에 숙달한 수행자들을 위해서 설해진 경전이기 때문이다.


이욕(離欲)은 첫째, 계(戒)를 청정히 지켜야 하며,


둘째, 육근(六根)을 단속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가운데 모양을 취하지 않는(不取相) 즉, 경계(境界)를 반연(攀緣)하지 않고 분별(分別)하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한다.


셋째, 거친 번뇌(麤煩惱)를 다스리는 대치공부(對治工夫)를 해야 한다. 즉, 탐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으로 다스리고, 성냄이 많으면 자비관(慈悲觀)을 해야 하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관(因緣觀)을 해서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의심을 제거해야 한다. 또 생각이 많은 사람은 수식관(數息觀 아나파나사띠)을 해서 망상을 다스린다.


넷째, 마음 챙겨 번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관법(觀法)수행을 통해서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 여기서는 본수행인 위빠사나 이전에 다섯 가지 장애에 국한(局限)된 위빠사나 수행이다.

가. 지계청정(持戒淸淨)
나. 육근조복(六根調伏)
다. 대치공부(對治工夫)
라. 장애제거(障礙除去)


이 네 가지 공부를 최소한 3년 정도 충분한 시간동안 단련하고 숙달해야 한다. 번뇌와 장애가 충분히 가라앉고 나면 그 때 본수행인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육년 동안 고행하며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는 이욕수행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욕(離欲)을 철저히 수행했으므로 보리수 아래에서 바로 사선정(四禪定)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날 밤에 숙명명(宿命明)과 천안명(天眼明)이 열리고 다음날 새벽에 번뇌가 다하여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으셨다.


기초수행이 충분히 되지 않은 수행자들이 곧바로 사마타나 위빠사나를 수행한다면 수행에 진보가 없거나, 설사 요행히 선정을 얻거나 지혜가 개발되더라도 조금만 수행을 멈추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물러나게 된다. 수행센터나 선원에서 수행할 때는 지혜가 개발되었다가도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곧바로 퇴보한다. 기초가 약하기 때문이다.


이욕행(離欲行)을 닦아 탐욕(貪)을 대치(對治)한다.


(8) 성냄(瞋)


성냄은 불만족하고 근심하고 우울하며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거나, 남을 해치고자 하고, 남을 떨어뜨리고자 하고, 분노하고 적의(敵意)를 갖는 것이다.


성냄은 탐욕의 다른 모습이다. 성냄 뒤에는 탐욕이 있다. 바라고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바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나타나거나,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불만족하고 괴로워지고 성냄이 생기는 것이다. 바램과 탐욕이 없다면 성낼 일도 없는 것이다.


성냄은 괴로운 느낌에서 생긴다. 성냄은 스스로 지은 공덕을 파괴한다. 성냄은 독(毒)이다. 자주 성내는 사람은 몸이 많이 아프다. 몸속에서 해로운 독(毒)을 자주 일으키기 때문이다.


자애(慈)를 닦아 성냄(瞋)을 대치(對治)한다.


(9) 자만(慢)


자만(慢)은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더러움이다. 항상 우쭐하여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라는 말을 많이 하며, 남으로부터 칭찬받고자 하고, 공경 받고자 한다.


일곱 가지 자만(七慢)이 있다.


① 만(慢) :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비해 자기가 낫다고 자만하고, 자기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와 같다고 자만한다.


② 과만(過慢) :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 자기와 같다고 자만하고, 자기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자만한다.


③ 만과만(慢過慢) :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 자기보다 못하다고 자만한다.


④ 아만(我慢) : 오온을 ‘나’, ‘내 것’으로 보고 자신의 몸이나 가문이나 명예, 학식, 공덕 등을 뽐내며 자만한다.


⑤ 증상만(增上慢) : 뛰어난 법 즉, 선정이나 지혜나 사사문과(四沙門果) 등의 법을 사실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얻었다고 자만한다.


⑥ 비만(卑慢) :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인데도 자기가 조금 못하다고 하면서 자만한다.


⑦ 사만(邪慢) : 믿음(信), 보시(布施), 지계(持戒), 다문(多聞), 지혜(智慧)등 여러 공덕이 없으면서도 공덕이 있다고 자만한다.


자만을 없애려면 무상(無常)을 관찰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무상하여 순간순간 변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무엇을 내세워 자랑할 것인가? 무상(無常)을 깨달으면 무아(無我)를 알게 되고 무아를 알면 자만이 없어진다.


하심공경(下心恭敬)을 닦아 자만(慢)을 대치(對治)한다.


(10) 게으름(懈怠)


게으름은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악(惡)을 끊고자 노력하지 않고, 선(善)을 닦고자 노력하지 않아 방일(放逸)한 것이다. 몸과 말을 절제하지 않고 함부로 놀고 행동하는 방종(放縱)이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므로 나중에는 후회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나약하니 드러누워 혼침과 수면을 즐긴다. 복(福)도 이익(利)도 없다. 무명(無明)의 어두움과 어리석음을 키운다. 악업(惡業)은 점점 늘어나고, 선업(善業)은 점점 줄어든다. 결국 축생(畜生)이나 지옥(地獄)으로 나아가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사견(邪見)이 확고한 상태로 죽으면 반드시 지옥이나 축생 두 곳 중에 가서 태어난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축생은 어리석음이 많은 중생들이 가는 곳이요, 지옥은 성인을 비방한 중죄와 대망어(大妄語)와 중생을 많이 해친 죄업이 무거운 중생들이 가는 곳이다.

정진(精進)을 닦아 게으름(懈怠)을 대치(對治)한다.


(11) 질투(嫉)


질투(嫉)는 남이 가진 재산, 명예, 외모, 학식, 공덕 등을 못 견디는 것이다. 항상 자신이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를 바라고 남이 자기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싫어한다. 남이 재산이 불어나거나 명예가 높아지거나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못 견딘다. 그래서 남이 가진 재산이 없어지게 하려고, 줄어들게 하려고 기도(企圖)하고, 남의 명예를 떨어뜨리고자 기도하며, 남의 외모를 애써 폄하하며, 남의 학식과 공덕을 헐뜯고 비방하려고 기도한다.


부처님께서는 탐욕과 질투로 인하여 몽둥이질과 칼부림과 투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질투를 없애려면 따라 기뻐함(隨喜)을 닦아야 한다. 남이 재물을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 일이 잘 풀리거나 좋은 혼사가 있거나 할 때 따라 기뻐하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진리로 볼 때 나와 남이 차별이 없고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 기뻐함(隨喜)을 닦아 질투(嫉妬)를 대치(對治)한다.


(12) 인색(慳貪)


인색(慳貪)은 자기 것을 아끼고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다. 거지가 와서 구걸할 때 욕하고 쫓아내거나 탁발승이 와서 탁발할 때 베풀지 않는 것이다. 곤경에 빠진 친척이나 친지가 와서 도움을 청할 때 자신이 베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본체하고 베풀지 않는 것이다.


남이 자기가 가진 것과 같은 것을 가지는 것을 못 견디는 시기심(猜忌心)도 인색이다. 자기가 가진 자동차, 옷, 신발, 가방 등의 물건과 같은 것을 남이 가진 것을 보았을 때 견디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인색함은 사후(死後) 아귀취(餓鬼趣)에 떨어지는 악법(業法)이다. 남에게 베풀지 않았으므로 배고프고 추운 귀신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설사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이 되며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남이 욕하고 쫓아내거나 거절하거나 못 본체하는 것이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요,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스스로 과보를 받는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이다.


보시(布施)를 닦아 인색(慳貪)을 대치(對治)한다.


(13) 무참(無慚)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공덕을 존중하지 않고, 공덕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이 없다(無恭敬). 또한 자신을 돌아보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한다. 이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축생과도 같은 것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명백히 알지 못하며, 완고하고 오만하여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착각하고 고집하여 다른 사람과 화합할 줄 모르니 주위 사람들이 점차 떠나간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더라도 이미 때는 늦었다.


부끄러움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反省)을 자주 해야 하며, 겸손한 자세로 현명한 사람들을 공경하고, 자주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敬聽)해야 한다.


제부끄러움(慚)을 닦아 무참(無慚)을 대치(對治)한다.


(14) 무괴(無愧)


자신의 잘못에 대한 남의 비난과 꾸지람(詰責)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죄의식이 없고 선과 악을 판단할 지혜가 없다. 죄를 짓고서도 성인들과 현명한 사람들의 힐책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없다.


남부끄러움(愧)을 닦아 무괴(無愧)를 대치(對治)한다.


범부들은 자기 스스로 착하게 살고 옳바르게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번뇌에 대해 배워 잘 알게 되고, 마음 챙겨 자기 마음속에서 번뇌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 비로소 마음속에 번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심수행자는 ‘내 마음속에 이렇게 나쁜 생각과 번뇌가 많았구나.’하고 놀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더 많은 번뇌를 보게 되고, 번뇌의 활동이 더 치성(熾盛)해진다. 그래서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아질수록 마가 치성하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