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심=보편적 초월자아…현상학으로 내면 통찰
객관세계 심층마음에 의해 구성된 가유일뿐
후설 현상학은 수행없는 이성적 한계에 멈춰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태어난 석가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고, 후설(1859~1938)은 20세기 독일에서 태어나 현상학을 주창한 유대계 철학자이다. 짝을 맞춰 비교하자면 ‘석가와 후설’ 아니면 ‘불교와 현상학’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법보신문이 기획한 연재가 불교의 정신을 현대의 여러 서구사상가들과 비교하는 것이다 보니, 2500년 이상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어온 불교사상을 100년도 안 되는 후설의 사상과 비교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불교도 어느 한 경전이나 논전에 국한하지 않고, 후설사상도 전기나 후기로 제한하지 않고 논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비교는 처음부터 쉽지 않아 보인다. 종교와 철학이라는 사고영역도 서로 다르고, 동양과 서양이라는 공간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도 적지 않으며, 기원전 6세기와 기원후 20세기라는 시간적 간격도 엄청나다. 과연 무엇을 비교할 수 있을까? 또 비교의 의도, 비교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다만 불교와 후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만을 논해볼 것이다. 그건 내가 생각하기에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고 철학의 핵심이기도 한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이 맞닿는 지점이기도 한 것, 바로 인간의 마음 또는 영혼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나는 불교나 후설 현상학이 둘 다 인간 영혼 안에서 일체 우주 존재를 포괄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 따르면 마음은 일체를 포괄하는 무한의 지평이기에 그 자체 공(空)이며, 공은 단지 무(無)가 아니라 자기 자각성을 가지는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다. 서양에서는 중세 신비주의철학이나 근세 초월철학이 그러한 인간 내면의 초월성 내지 영성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그런 초월성을 체계적으로 논하여 초월적 관념론(초월적 현상학)으로 완성한 자는 바로 후설이라고 생각한다.
진지한 사상가는 탐구해야 할 문제와 물음을 외부로부터 얻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그 물음에 대한 답도 기존의 여러 학자나 학파가 제시하였던 복잡한 이론체계들을 비교 검토하는 논증적 차원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적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차원의 답을 구할 것이다. 어디론가부터 날아 와서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놓고 얼른 그것을 빼고 치유하는 대신 그 현장을 유지하면서 화살의 출처와 독의 성분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다는 석가의 독화살 비유를 그저 임시방편적인 진통제 처방 정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의식에 명증적으로 주어지는 것 너머에 대해서는 독단적인 긍정도 부정도 하지 말고 괄호치기(에포케)를 해야 한다는 후설의 판단중지를 회의주의적인 판단보류라고 곡해해서도 안될 것이다. 나는 석가의 독화살비유나 후설의 판단중지는 전통적으로 행해져왔던 문자적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아무 선입견 없이 자신의 내면을 충실히 주시 관찰함으로써 그 안에서 인생과 우주 전반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 내면을 직시함으로써 그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 의식은 늘 자아와 세계를 주관과 객관으로 이원화하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아는 세계 속 일부로서 각각 개별적 실체로 존재한다고 여기고, 세계는 자아와 무관하게 실재하는 객관적 실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사려분별을 불교는 아집과 법집의 변계소집성이라고 부르고, 후설은 이를 자연주의적 존재정립이라고 부른다.
자아와 세계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객관 세계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성에 의해 그렇게 변현되고 구성된 것이라는 것, 세계로 변현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우리의 심층마음은 우리의 표층 의식보다 더 깊고 더 크다는 것, 그 더 크고 더 깊은 심층마음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표층의식이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서로 소통하고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불교와 후설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진리가 아닐까?
불교는 마음 심층에서 개별적 자아(유근신)와 세계(기세간)로 변현하는 식을 발견하고 이를 아뢰야식이라고 부른다. 아뢰야식은 지난 업력의 종자 또는 지난 경험의 내용(정보)을 함장한 채 그 힘에 의해 자아와 세계의 구체적 모습으로 현행화하는 식이다. 아뢰야식의 그러한 변현활동을 전변이라고 한다. 우리가 주관적 자아라고 여기고 객관적 세계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드러난 결과이며, 따라서 그렇게 전변하는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 가유(假有)일 뿐이다.
후설은 의식 내면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지향적 활동성을 발견하고 이를 구성이라고 부른다. 객관 세계 및 생활 세계를 구성하는 심층의 자아는 세계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물리·심리적 개별 자아가 아니라 그보다 더 심층에서 활동하는 상호주관성의 자아, 초월적 자아이다. 세계는 초월적 자아의 지향작용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 초월자아의 상호주관성을 떠나 따로 있지 않는 현상일 뿐이다.
나는 불교나 후설이 세계를 가유나 현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생명은 시공간 안에 가시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현상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신비한 생명력의 자기표현이다. 우리는 인연이나 시공간적 조건에 따라, 연기법칙이나 물리·심리적 법칙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전개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렇게 드러난 모습은 곧 인연 따라 사그라질 가상의 꽃일 뿐이다. 그렇게 가유이고 현상일 뿐이다.
세계가 마음이 그린 가상이고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은 그렇게 말하는 순간의 마음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일체 존재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아는 텅 빈 마음, 어떤 인연에도 매이지 않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걸림 없는 마음, 그 자유의 마음이 되기 위한 것이다. 불교는 그 마음을 아공·법공의 깨달음 속에 드러나는 진여심이라고 부르고, 후설은 그 마음을 물리·심리적인 사적 자아와 구분되는 보편적인 초월자아라고 부른다. 진여심이나 초월자아는 모든 개별 생명체 안에 내재된 보편적 하나이며 상호 소통적 전체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일즉다 다즉일’의 진리가 성립한다.
인간 마음의 활동성과 세계의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한, 나는 불교와 후설이 이상과 같이 유사한 통찰을 제시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종교가 되고 후설 현상학은 철학에 머무르는 것은 현상학에서는 그 통찰이 이성적 사유에 의한 해오(解悟)에 머무른데 반해, 불교는 그러한 통찰이 담고 있는 이성적 사유수준을 넘어 초이성적 차원의 증오(證悟)와 성불(成佛)을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여심이나 보편적 초월자아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스스로 그 본성을 깨닫고 실현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이다. 불교는 인간 심성과 우주 본질에 대한 이론적 고찰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 닦는 수행을 통해 영적 차원의 심안이 열려 사려분별과 생사번뇌를 영원히 넘어서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또한 이점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이기도 하다고 본다. 동양에서의 철학은 불교든 유교든 도교든 인간과 우주의 실상에 관한 이론적 논의는 언제나 직관하는 자의 심성을 맑고 순수하게 하여 그 영적 수준을 높이는 실천 수행론(공부론)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존재론은 곧 존재의 실상에 눈뜨게 하는 수행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론이 곧 실천이고, 철학이 곧 종교이다. 이에 반해 서양철학에서는 인식론이나 존재론 심지어 윤리학까지도 수행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학문은 이론을 실천과 분리시키면서 객관주의와 과학주의를 표방하고, 그럴수록 인간과 세계는 영적 깊이를 상실한 피상적 사물로만 등장할 뿐이다. 그러기에 서양에서는 주관과 객관,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매개해주고 이성에서 영성으로의 도약을 뒷받침하는 종교가 따로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 등장한 후설 현상학이기에 비록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스스로 이성의 한계 안에 멈춰 서며 그것으로써 철학의 경계를 삼은 것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현상학은 이성의 한계까지만 나아간 철학이고, 불교는 철학을 영성으로까지 확장시킨 종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과 세계 존재에 대한 불교와 후설의 공통적 통찰 안에서 나는 인간 심성의 보편성을 발견한다. 동양의 석가가 깨달은 통찰이 서양의 후설에서 유사한 통찰로 다시 일깨워지기까지 동서의 공간적 거리만큼이나 긴 2500년이라는 긴 시간적 거리가 요구되었지만, 시공은 어차피 현상이고 가상이 아니던가? 그 가상 너머에 내재된 인간 심성은 다시 2500년이 지나도 결국 또 유사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인간 마음의 현상초월성, 자유와 해탈의 정신, 상호주관성과 자비의 정신, 이런 것들이 없이는 우리가 숨 쉬고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불교를 현대 서구사상가들과 비교하는 것이 단지 불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서구적 세계관에 따라, 특히 현대의 과학적 유물론에 따라 읽어내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불교의 현대성과 과학성을 드러내려는데 급급하여 불교의 심오한 깊이와 종교성을 망각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나는 현대를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고찰함으로써 현대의 우리가 무엇을 잊고 사는지, 어떤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사는지, 그 점에 눈뜨게 되기를 희망해본다.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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