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 없는 세계와 맞닥뜨리다
병고(丙古) 고익진(高翊晋, 1934~1988) |
내게 찍힌 깊숙한 낙인
서울로 부산으로 쏜살같이
차들은 달리는데……
한 점 바람의 무게로
고속도로 위에 떠 있는
나는 한 마리 하얀 나비.
고익진은 1934년 김여화 보살의 4남으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55년, 그는 전남대 의대 의예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그해 가을, 고익진은 류머티스성 심내막염이라는 병으로 광주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
한 병원에서 5년간 병실 속에서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지겹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5년이라는 세월로 병이 낫는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런 막막한 절망 속에서 젊은 20대의 초반을 병실에서 어두컴컴하게 보냈던 것입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것은 주로 인생의 어두운 면들과 인생의 근원적인 무상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로서는 우리 인간들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학문, 부귀, 건강 등등의 것들이 끝내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병세가 조금 호전된 고익진은 모친이 창건한 무등산 기슭의 작은 암자 광륵사에 몸을 의탁했다. 계속되는 투병과 요양 생활에 큰 힘과 위로가 되었던 이는 손아래 아우였다. 그는 형의 일상을 정성스레 뒷바라지했고, 시내 동광사의 일요법회에 참석하여 그곳에서 들은 설법 내용을 전해주거나 불교 관련 서적을 구해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형에게 《반야심경》을 건넸고, 이로부터 고익진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고익진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오랜 병고로 인생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꼈던 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와 철학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인 것 같아 저보다도 먼저 그런 일들을 생각했던 선현들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산사에서 《반야심경》이라는 불교의 짧은 경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 있었습니다. 눈도 없고 색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분명히 눈도 있고 색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눈이 있다는 저의 세계관과 눈이 없다는 불교의 세계관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를 저에게 제시하고 있었어요. 분명히 눈이 있고 색이 있는 세계에서 저는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지낸 5년이라는 덧없는 세월 속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그런 문제는 분명히 눈이 있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없다는 《반야심경》의 교설을 처음 대했을 때 제가 받았던 충격은 정말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말을 들은 뒤로 3년간 아무것도 못 하게 되고 말았어요. 여러분들도 지금 《반야심경》을 읽는 분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반야심경》을 읽으시면서 그런 말씀에 충격을 받지 않는가가 저는 이상한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은 뒤로 3년간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문을 열려고 하다가도 멈추고서는 ‘내가 이 문을 왜 열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는 밥을 먹다가도 ‘이 밥을 먹는 자가 누굴까’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눈도 없고 색도 없는 세계에서, 먹고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3년을 보냈던 것입니다.
왜 눈이 없다는 것일까? 밤낮으로 그 이유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눈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진리라고 인정하고 제 마음을 억지로 그것에 맞추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 없는 방하착(放下着)은 위험천만한 일이고, 올바른 이유를 탐구함은 버려야 할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 마음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판단이나 확신이라는 것에도 잘못과 고집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산중생활은 기쁨과 허탈이 거듭되는 속에 덧없이 흘러갔습니다. 조그마한 경계를 얻어 기쁨에 잠기기가 무섭게 다시 쓰라린 자기 붕괴를 맛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치 첩첩산중의 등산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3년은 마침내 제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생사의 괴로움에 헤매게 되는가를 환히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시원한 마음이었습니다.
이렇듯 고익진과 불교와의 의미 있는 첫 만남은 《반야심경》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고익진의 구도는 공의 도리를 깨닫는 데서 머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제게는 다시 전혀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고 저의 구도 생활은 다시 계속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없다는 것만이 불교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길은 그로부터 다시 무한히 계속되고, 또 그 이전에는 기초적인 가르침들이 첩첩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뒤, 저는 좀 더 많은 경전을 대하게 되면서 그러한 한줄기 깨달음의 길을 부처님은 이미 자상하게 시설(施設)해 놓으셨으며, 아함 · 반야 · 법화의 3부경을 통해 그것이 가장 체계적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현실적 존재를 분석적으로 관찰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그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아함의 복잡한 교설은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반야경》에 이르고, 이것은 다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과 중생교화에 있다는 《법화경》의 교설에 이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고자 발심한 사람들께 기별(授記)을 주시고, 많은 부처님께 봉사한 다음 내세에 부처가 된다고 설하시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줄기 힘찬 보살의 길이 끝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저는 모든 의심을 쉬고 부처님의 끝없는 사랑에 한없이 흐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학자 고익진의 삶의 근저에는 이와 같은 구도행과 깨달음, 그리고 부처님을 향한 깊고 깊은 감사의 염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렇게 화두에 대한 통찰의 과정을 거치고 나자 오히려 저는 5년 동안 병을 참으로 잘 앓았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만일 60세나 70세가 되어서 이러한 병의 절망적인 괴로움을 받았더라면 나는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리지 않겠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21세에 이러한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28세에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은혜를 가장 크게 입은 사람이로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니 제 생활이 새로워졌습니다.
2. 초기불교 이해의 새 지평을 열다
부처님의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고익진은 원전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로써는 그 방면의 책을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지만, 서울의 외국 서점을 수소문하고, 일본에 사는 친척의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필요한 교재를 구해 보았다. 미국 예일 대학의 에저튼 교수는 고익진의 서신을 받고 자신의 저서 《불교 혼성범어 문법과 사전(Buddhist Hybrid Sanskrit Grammar and Dictionary)》을 보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익진은 난해하기로 이름난 혼성범어 문법에 대하여 에저튼 교수와 영문 편지로 토론을 나눌 정도로 범어에 달통하게 되었다.
1965년, 그의 나이 31세에 고익진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모든 불교의 기초로서 아함경을 만나고, 마침내 전 세계 불교사를 통틀어 불후의 걸작이라고 할 만한 석사학위 논문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1971)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함은 불교라는 긴 여로의 맨 처음에 밟아야 할 길인 것이다. 대 · 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은 원시불교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아함은 원시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나는 아함을 부디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승불교는 아함의 이론과 정신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 오늘날 모든 학자는 의견을 모으고 있다. 《반야심경》만 보아도 거기 나오는 5온, 12처, 18계, 12연기, 4제, 지(智), 득(得), 보살, 불(佛), 삼먁삼보리와 같은 개념은 어느 것 하나 아함에 설해지지 않았던 것이 없다. 반야개공의 제법무자성 사상은 아함에 숱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5온은 무상, 고, 무아’라는 교의의 발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법화나 화엄과 같은 높은 수준의 경전은 잘 알면서도 그러한 사상의 원천이 되고 있는 아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함을 소승 경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함은 대승의 기초경전이라고 해야 한다. 대승불교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함이요,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대승이라 할 정도이다.
고익진 이전에도 아함경으로 대표되는 초기 경전이나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나 공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초기불교의 원초성을 인식한 서양과 일본의 학자들이 다양한 저작들을 이미 선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의 뜨거운 구도심과 인간적인 모습,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또한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현대 사회의 가치에 부합하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교단의 생활상을 선양하였다. 부처님은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위대한 스승이요, 그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윤리적 지침, 일상의 지표로서 의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만동자와의 대화[十四無記]도 근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거부로 받아들여, 아함경의 교설 전반을 현실의 고(苦)를 소멸하기 위한 실천적 가르침으로 단정하였다. 부처님은 단지 기존의 온갖 관념과 주장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설파하셨으며, 해탈과 열반은 그런 집착을 완전히 떠나 마음의 평화가 영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로 여겨졌다. 그런 경향의 저변에는 부처님의 설법은 각각의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성향, 그리고 지적 능력 등을 고려한 것[對機說法]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설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이라 할지라도, 무아설이나 연기설 등의 교리를 해설한 후, 서양의 관념론이나 분석철학, 혹은 자연과학과의 유사성을 탐색하는 수준이었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는 초기불교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를 완전히 뒤엎고 있다.
고익진은 부처님 깨달음이 설법의 포기를 생각할 정도로 심심미묘한 것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부처님의 교설 방법을 수의성(隨宜性), 일미성(一味性), 합의성(合義性), 점교성(漸敎性), 자증성(自證性), 선설성(善說性)으로 정리하고, 그중 특히 ‘점교성’에 주목한다.
부처님은 “나의 법률(法律)은 점차례작(漸次第作)하여 성취에 이른다.”고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신다. 또 사리불은 부처님의 수승한 깨달음을 찬탄한 뒤 부처님의 교설이 “점점 깊어지고 점점 고상해지며 점점 승묘해진다.”고 탄복하고 있다. 아함의 모든 법문이 다 평등한 일미의 것이요, 각각 독립적이고 최상의 것이라면, 이 ‘점차례작’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의 끝에 고익진은 아함의 복잡다단한 교설들 사이에 존재하는 놀랄 정도로 정연한 의미연관의 체계, 즉 순서를 밝혀낸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현존하는 아함경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상당한 착간이 가해졌고, 부파 전승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교설로부터 보다 심오한 내용으로’ 그 순서를 잡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마다 기초적인 것과 심오한 것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해서는 객관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신의 작업 과정을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다.
“부처님은 제자들과 바둑 한판을 두고 가셨어. 나는 남겨진 바둑판을 보고 ‘이 중에서 처음 놓인 바둑알은 과연 무엇일까’ 찾고, 그리고는 다음번에 놓인 바둑알을 찾고, 그렇게 하여 바둑판 전체를 복기한 것과 같아.”
고익진이 아함 교설의 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착안한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5온이 6 · 6법에 의해 설명되어 있다면, 6 · 6법은 5온보다 먼저 설해진 법임에 틀림없다. 설명이란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6 · 6법은 이미 알고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이미 설해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함의 밀의설(密意說)은 그 교설이 설해진 순서에 중요한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익진은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에서 아함의 교설이 12처설-6 · 6법설-5온설-12연기설의 체계로 구성되었음을 극명했다.
고익진의 주장이 불러온 파장은 컸다. 5온 · 12처 · 18계의 순서로 3과설(三科說)을 주장하고, 12연기를 3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풀이하며, 4성제를 정점으로 아함경의 교설을 조직한 《구사론》은 물론, 당시 일본이나 서양 불교학자들의 학견과도 판이하였기 때문이다. 논문 원안 여러 곳에 표기된 지도교수의 의문이나 반론이 당시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예증한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는 아함 교설의 철학적 체계성을 부정하거나 그런 부분에 거의 관심이 없던 불교인들에게 길이 울리는 경종이었고, 아함경에 대한 이해와 초기불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 논문의 백미는 12연기설(十二緣起說)을 아함의 구경(究竟)이요, 완성이라고 확립한 것이다. 12연기 이전의 모든 교설은 그를 설하기 위한 또는 그에 유도하기 위한 예비적 방편 시설이었으며 논리적 전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아함경 전체를 일관하여 12연기는 보리수 아래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서술되고 있다. 어찌 보면 고익진의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새롭다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12연기는, 그것이 무불(無佛) 시대 벽지불의 깨달음이라는 인식과, 4성제에 12연기를 포함시키고 있는 《구사론》의 입장, 심지어는 후대에 정리된 교설이라는 주장 등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 논문으로 인하여 12연기는 비로소 본연의 위상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는 내용 전체가 신선하고도 탁월한 시각과 깊은 통찰, 치밀한 논증으로 가득 차 있다. 그중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 논문의 업적을 필자의 관점에서 몇 가지 추려본다.
첫째, 12처설(十二處說)의 재발견이다. 고익진은 부처님이 제일 먼저 설한 교설로 12처설을 꼽았다. 중생들에게 가장 이해되기 쉽다는 이유에서이다. 상당수의 불교 강좌에서 12처설이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작금의 현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고익진은 12처설을 고찰하며 몸[眼耳鼻舌身]과 마음[意]의 성격 및 관계, 그리고 인간과 객관 대상의 상호 작용을 밝히고, 12처설이 업설의 이론적 기반임을 설명해 나갔다. 논문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고익진은 12처설이 인간의 주체성을 천명한, 인류 종교사상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커다란 의의를 지닌 교설이라고 단언했다.
둘째, 3세윤회설(三世輪廻說)의 규명이다.
지금도 많은 학자나 ‘합리적임’을 자처하는 불교인들은 아함경에 나타난 윤회설을 ‘대중 교화를 위해 불교 안에 채택한 통속적 종교 관념’으로 치부한다.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아설과도 배치된다는 까닭이다. 그래서 윤회설의 실제 의미를 현실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심리적 변화의 상징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고익진은 12처설에 입각하여 3세윤회설의 성립 과정을 구명(究明)한 후, 그것이 불설(佛說)임을 천명하고 있다.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12처설과 현실에서 관찰되는 엄연한 인과업보의 현상을 바탕으로 불교의 윤회설이 진리임을 확언한 것이다. 실로 ‘이러한 방식,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윤회설을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논리는 정치(精緻)하다. 이는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여 상상한 윤회 관념이나 영원한 존재인 아트만을 설정하여 성립한 우파니샤드의 윤회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1990) 《한국고대불교사상사》(1989) |
셋째, 6 · 6법설(六六法說)의 부각이다.
6 · 6법은 고익진 이전에는 묻혀 있다시피 한 교설이었다. 종래의 불교학에서 6 · 6법을 독립적인 법문으로 취급한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주의마저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익진은, 6 · 6법이 5온설과 12연기설에 인도하는 교량적인 법문으로서 그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으며, 독자적으로도 훌륭한 교리 조직을 이루고 있음을 강조했다.
고익진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6 · 6법의 교설을 7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거기에 나타난 술어들의 의미와 전후 관련성을 세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중 친인소연(親因疎緣) 관념에 대한 반성과 18계(十八界)에 ‘진여법계’로서의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 부분은 특별한 관심을 요한다.
넷째, 색(色)에 대한 이해의 심화이다.
색은 흔히 물질로 이해되고, 번역된다. 그러나 고익진은, 5온연기(五蘊緣起)의 첫 지분으로서의 ‘색’은 단순한 물질이라기보다는 일진무변(一眞無邊)의 실상계인 6계(六界)를 미혹한 무명(無明) · 망심(妄心)이라는 것이다. 5온 법문에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색을 떠나라.” “색을 멸하라.”는 말씀들이 쉽게 납득된다. 물론 12처에서의 색과는 달리, 5온의 색에 대하여는 그것을 물질로만 보지 않는 견해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물질적인 것 또는 ‘육체에 대한 집착’ 이상의 이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과 비교할 때 고익진의 주장은 더없이 깊고 구체적이다.
다섯째, 명(明)의 구상성(具象性) 설파이다.
무명(無明)은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으로서 교리상의 비중이 무척 큰 술어이다. 무명은 ‘진리에 대한 무지’로 풀이되며, 추상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기에 때로 ‘치암(癡暗)’ 혹은 ‘사견(邪見)’과 혼용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명(明, vijjā)’ 또한 지식이나 지혜, 깨달음을 의미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명’이라는 술어 자체가 어떤 실제적인 모습을 가리키고 있음, 즉 구상성을 지닌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명’ 그 자체에 대한 탐색이나 연구가 거의 행해진 적이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고익진은 범어 문법상의 기능과 용례를 근거로 ‘명’에 ‘실재하는 것’ ‘발견된 것’이란 구상적 의미를 함께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는 ‘명’이, 무명연기(無明緣起) 즉 12연기의 성립 근거로서, ‘모든 연기생법(緣起生法)이 공(空)한’ 청정 · 무위 · 평등 · 상적(常寂) 등으로 묘사될 수 있는 단일구조적인 진여실상이라고 강변했다.
‘명’을 단일구조적인 진여실상이라고 규정한 고익진은, ‘하나에 대하여 깨달은 자’라는 뜻의 벽지불(pacceka-buddha, sk. pratyeka-buddha)을 그러한 ‘명’에 이른 상태로 보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 외적 존재, 혹은 별도의 길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간주되어 온 벽지불을, 아라한과(阿羅漢果)에서 연속하여 한 단계 더 깊은 깨달음에 나아간 불교 내적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는 불교에 익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차분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 곤란한 내용이 태반이다. 이는 고익진의 아함 교설에 대한 안목이 획기적인 점에도 기인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설 자체가 ‘심심미묘한’ 깨달음에의 길을 가리키고 있는 데 말미암는다. 교설의 숨겨진 의미를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내게끔[自證] 하려고 ‘골똘히 생각하라[專精思惟]’ ‘그 뜻을 관찰하라[觀察其義]’시던 부처님의 당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익진은 불교학과에 들어가기 이전, 이미 ‘눈 없는’ 세계인 반야의 깨달음을 성취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불교학을 공부하며 접하게 된 아함경에서, 고익진은 자신의 깨달음의 과정을 본 것이 아닐까? “아함을 거치지 않고 대승의 진정한 뜻을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반드시 아함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논리적 과정은 거쳐야 한다.”는 그의 말이 필자의 짐작을 뒷받침한다.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의 탄생 이면에는 고익진 본인이 직접 경험한 구도의 과정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3. 한국불교 사상사 정립에 진력하다
고익진에게는 세 가지의 원이 있었다. 모든 불자가 공유할 수 있는 깨달음을 위한 성전의 편찬, 100명의 아라한 배출, 그리고 한국불교 사상사의 정립이다.
“내가 인도에 태어났으면 인도불교 사상사를,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미국불교 사상사를 정립하려고 했겠지.”
학자로서의 고익진은 한국불교 사상사의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불교 사상사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40편을 훨씬 웃도는 논문들이 그런 사실을 웅변한다. 그중에서 박사학위 논문 《한국 고대 불교사상사》는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가장 돋보이는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
논문 벽두에서 고익진은 사상이 순수한 종교적 진리나 철학적 사유와 구별되며, 시대가 처한 당면 과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코자 나타난 관념 체계라 정의했다. 그래서 사상에 대한 사적(史的) 연구는 자연스럽게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연구 대상이 되는 시대에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다음 단계는 그런 시대적 문제에 대해 당시의 사상가들이 어떤 해결의 노력을 베풀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고익진 교수 필동 자택에서. 왼쪽부터 필자, 고익진 박사, 최봉수 박사(1986년). |
고익진은 한국 고대불교를 크게 4기로 구분했다.
① 불교 초전기(初傳期) [三國鼎立期]
② 대승교학 발달기 [三國戰爭期]
③ 화엄사상 융성기 [新羅中代]
④ 선(禪) 전래기 [新羅下代]
그리고 그런 4기는 시대마다 새로운 불교사상이 등장하여 그 시대가 처한 사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초전기 불교의 중심 교리는 ‘미륵-윤왕(輪王)’ 사상을 주축으로 하는 업설(業說)이었으며, 이는 왕권에 맞선 귀족 세력의 무교적(巫敎的) 사상 기반을 해소하기에 적합하므로 왕실에 의해 환영받았다는 것이 고익진의 주장이다. 동시에 승려들 또한 제사 · 점복 · 주술 등과 같은 무속적 신앙의례를 팔관(八關) · 점찰(占察) · 신인(神印) 등으로 섭화하여 불교의 토착화에 힘쓰고 있음을 논하고 있다. 제석천을 통한 전통적 ‘하늘임’ 관념의 수용, 천강왕(天降王)을 극복하는 전륜왕(轉輪王)의 표방, 땅에 대한 신앙을 대체한 불연국토(佛緣國土) 사상 등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상술했다.
대승교학 발달기에는 학파와 관계없이 대 · 소승 경론 전반에 걸친 폭넓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언급하며, 특히 승랑과 원측이 중국 불교에 끼친 영향을 제고하였다.
화엄사상 융성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확립한 시기이다. 고익진은 이때 원효와 의상에 의해 전개된 원융무애하고 상입상즉(相入相卽)한 화엄의 세계관이 시대가 요청하는 공존공화(共存共和)의 통일 질서에 부응한다는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실천적인 서민불교를 지향한 점도 주목되고 있다.
고익진은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가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원효 때문이다. 고익진은 ‘화쟁’이란 명칭으로 굳어진 원효 사상의 동기를 중관(中觀) · 유식(唯識)의 회통으로 파악하고, 그 이론의 내적 구조를 면밀히 살펴 ‘진속원융무애관(眞俗圓融無碍觀)’이라 명명한 것이다. 원효 사상에 대한 고익진의 해석은 원효 이해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된다.
신라 하대의 선 사상은 화엄으로 대표되는 전통 교학이 ‘훈고학적이고 사제적(司祭的)인’ 불교로 전락하여 있었을 때 그것을 부정하고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살리고자 도입된 것이며, 선승(禪僧)과 위정자의 상호 협력을 통해 신라 사회에 급속도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은 화엄교학을 완전히 타파하지 못하여 ‘선교병립(禪敎竝立)’의 양상을 띠게 되고, 이후 한국불교는 끊임없이 선 · 교의 균형과 조화를 모색하는 역사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불교에 대해서도 고익진은 앞서 자신이 말한 사상사 연구의 두 단계, 즉 사회적 배경을 전제로 그 시대의 불교 사상을 조망하는 과정을, 증거 자료에 충실히 의거하여 빈틈없는 논리로 진행한다.
그리하여, 지눌의 정혜결사는 12세기 내우외환의 상황을 맞아 민족의 자주적인 의지력을 이끌고 교단을 쇄신하려는 강력한 선 부흥 운동이며, 요세(了世)의 백련결사는 정혜결사의 이념이 죄악 중생들에게는 너무나 고원함을 의식하여 참회와 정토행을 내세우며 일어난 천태종 중흥 운동임을 밝히고 있다. 도선의 비보사탑설, 대장경의 조판, 일연의 삼국유사 저술, 태고의 한양천도설 등도 불교와 국가적 상황의 관계 속에서 그 의의를 해명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를 살피면서 고익진은 억불이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불법의 유지와 사회참여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에 집중한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나 자연과학의 성세 앞에서 그 사회적 생명력이 약화된 불교를 다시금 흥륭코자 하는 본인의 비원(悲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사(結社) 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익진은 한국불교 사상사를 서술함에서 교리의 본질적 의미와 사회적 성격을 함께 고려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안목이 불교를 국가나 왕권에 예속된 이데올로기로 보는 기존 사학계의 흐름을 넘어서는 이유이다.
1980년, 고익진은 그의 최대 업적으로 거론되는 ‘한국불교전서’의 편찬을 총괄 지휘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한국불교 연구의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도 한국불교 문헌의 총람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영태 교수와 더불어 1976년에 발간한 《한국불교 찬술문헌 목록》은 그 사전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의천의 속장경 간행 이래 최대의 불사로 일컬어지는 ‘한국불교전서’는, 한국불교사 위에 나타난 문헌적 성과의 집대성이다. 1979년 제1책의 발간으로부터 2004년, 보유편 4책을 포함한 총 14책이 완간된 한국불교전서는 이제 한국불교 연구의 절대적 표준이 되어 있으며 한국학 연구의 철학적 기반을 이룬다. 특히 ‘시대순 저자별’ 원칙에 입각한 문헌 수록은 종파적 대립을 지양해 온 한국불교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으며, 한국불교 사상사를 원전적으로 구성시켜 주는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
고익진에게 한국불교 사상사의 정립과 ‘한국불교전서’의 편찬은 별개의 과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익진은 본서 전 10책의 마지막 권 발간을 1년여 앞두고 타계했다.
4. 일불승의 보살도를 천명하다
깨달음보다도 가치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깨달음을 구하는 생활보다도 가치 있는 삶을 알지 못하노라.
고익진은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당면 과제를 사상적인 이념의 정립이라고 보았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종교사상이다. 종교 사상에 입각해서 종교 행동이 있게 되고, 종교 행동에 의해서 종교 경험이 있게 되며, 그 위에 종교 집단이 형성된다. 종교에 두루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종교 사상이다. 따라서 사상적인 방침이 결정되지 않은 채 승려 교육이나 포교 현대화, 종단 문제 등을 논한다는 것은 근본을 망각하고 지엽을 좇는 것과 같다.
고익진은 기존의 선과 교학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이념으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지적한 후, 경전에 의지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전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경전을 아함경과 《반야경》 《법화경》으로 지목했다. 고익진은 그 세 가지 경전을 ‘근본 3부경’이라 불렀고, 거기에 설시된 교설들을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누어 ‘6대 법문(六大法門)’이라고 이름하였다. 업설-6 · 6법설-5온 4제설-12연기설(이상 아함경)-6바라밀다설(반야경)-1불승설(법화경)이 그것이다. 불교에 수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그들 모두는 이 여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익진은 근본 3부경, 즉 6대 법문 사이에 발견되는 불가분의 연관성을 그의 저술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 연후, 성불과 중생 교화가 불교의 궁극 목적이라고 선언하는 《법화경》의 1불승설(一佛乘說)을 현대 한국불교의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창했다. 또한 환희지(歡喜地)로부터 법운지에 이르는 《화엄경》의 보살 10지(十地)를 1불승설에 입각하여 새로 조직한 보살도로 정의했다. 10지의 행법이 아함경, 《반야경》 《법화경》의 교리들을 순차적으로 배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익진은 ‘1불승의 보살도’를 제시하는 근본 성전을 편찬하여 수행과 전법에 매진함을 한국불교의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못박았다.
1불승의 보살도로 한국불교 현대화의 이념을 삼는다면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교리적 병폐도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고익진은 전망하였다. 오랜 세월 대립해 온 선과 교는 말할 것도 없고, 염불과 송주(誦呪), 심지어 아함의 교리까지 다 같은 보살의 행법으로 수용되어 모든 불자가 함께 보살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981년, 고익진은 자신의 생각을 담은 《한역 불교 근본경전》을 발간하였고, 이를 교재로 ‘1불승의 보살도’를 수습(修習) · 실천하는 모임인 ‘일승보살회(一乘菩薩會)’를 창립했다. ‘생활인의 불교’를 표방한 일승보살회가 추구한 삶의 자세는 고익진이 지은 두 편의 게송에 잘 드러나 있다.
한 길을 걸어가는 보살이여
항상 고요한 마음에 머물러
검소한 생활과 봉사에 힘쓰라
그 마음이 미묘하게 움직여 주리라.
오늘도 무사히 하루 일을 마쳤으니
이제는 걸림 없는 자유로운 시간이라
조용히 선정에 들어 밤 깊은 줄 몰라라.
일승보살회는 고익진 생전에 다섯 개의 모임(1반~5반)을 이루었고, 100명을 훨씬 웃도는 인원이 법회에 동참하였다. 그 주축은 불교를 전공하는 청년들이었지만 대다수가 직장 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이었고, 학자와 스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설법의 내용은 당연히 6대 법문이었다. 고익진은 엄격하고도 세심하게 6대 법문의 법상(法相)을 기초부터 강의하였고, 제자들은 스승이 던진 질문을 참구하였다.
“공부할 때는 절대로 생각을 비약하면 안 돼. 깨달음의 세계에 논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은 아주 틀린 거야, 그건. 너무나도 논리가 명백한 세계예요. 그렇기 때문에 깨칠 수가 있는 것이야.”
“이 짧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도 닦는 길밖에 없어. 아무것도 없어. 돈 벌어 봐야 쓸데없고 명예를 얻어 봐야 쓸데없어. 생사에 자재하는 길밖에 없어. 3세에 영원하게 전개되는 보살의 길밖에 없는 기야. 다른 건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어. 한 생 안 태어난 셈 치고 도 닦아야 하는 기야. 도 닦는 동안 밥 벌어먹기 위해서 직장에 가고 돈 벌고 사는 기야. 그래서 자기가 깨달았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깨닫게끔 해 줘야 돼. 그게 보살이야.”
법회를 파하고 어둠이 내려와도, 고익진의 필동 자택에는 스승과 제자들이 나누는 진지하고도 정겨운 음성들이 두런두런 흘러다니곤 하였다.
일승보살회는 정기법회 이외에도 ‘근본 3부경 독송 결사’ ‘영문 니까야 읽기’ 등을 소모임으로 진행하였고, 친목을 위한 산행이나 야유회도 가졌다. 그중에서도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 시작된 ‘좌선법회’는 법상의 이해 수준이 서로 다른 법우들이 한데 모여 좌선하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깊고 진솔한 대화로 이어진 소중한 자리였다. 고익진이 거기에 함께 하였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를 22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생활해야 돼. 2시간은 오로지 좌선을 위해 처음부터 비워둬야 하는 기야.”
한편,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승보살회의 ‘예참법회(禮懺法會)’는 불교의 부흥을 간절히 바랐던 고익진의 염원을 엿보게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천오백 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를 봐.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뒤덮여. 마치 기독교 국가 같아. 같이 웃고 떠들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이런 현실을 불자들은 깊이 참회해야 해. 그러니까 매년 12월 25일엔 예참법회를 해.”
그의 글 〈불교와 기독교〉 〈종교 간의 대립과 불교의 관용〉에 언표된 것처럼, 고익진에게 기독교는 공존과 화합의 대상이자 포용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기독교와 비교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단초를 얻기도 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인간을 대신하여 죄 사함을 받은 자’라고 하잖아요? 그럼 우리에게 부처님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를 대신하여 종교적 방황을 다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고익진은 ‘부처님의 법’이 오래도록 널리 이 땅에 울려 퍼지기를 희구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항상 부처님의 말씀에 비추었고,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았다. 불법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고익진의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일승보살회에 흥불구세복전(興佛救世福田)을 마련하고, 불자라면 모두가 청전법륜(請轉法輪), 상수불학(常隨佛學)의 보현행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법노(法奴)’라 칭했던 사실이 그런 마음을 명증한다.
고익진은 ‘아함에서 대승까지, 산스크리트어 · 팔리어 원전에서 한국불교전서까지, 철학적 연구에서 역사적 연구까지를 온전히 하나로 아우른 유일한 불교학자’로 평해진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치열한 구도자요, 평생토록 병고(病苦)로써 보살의 길에 정진한 신실한 불자였다. 그리고 몽매했던 나를 정법의 길에 세워 주신, 나의 스승님이다.
병고(丙古) 고익진. 그의 삶을 관통하는 보람과 의미는 직접 지은 〈생활인의 불교도량 발원문〉의 마지막 문장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당신의 바른 법이 다시 이 땅에서 한 떨기 하얀 연꽃처럼 피어나게 하옵소서. 나무 서가무니불 ■
유동호 / 학교법인 광동학원 수석교법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대한불교약사회 지도법사, 대한불교조계종 전국교법사단 단장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반야십지설의 구조 연구〉 〈전법의 해에 따른 신행체계화 방안〉 등과 저서로 《불보살의 본원》 《수레를 돌려라》가 있다. 생활인의 불교도량 ‘한길법당’을 설립하여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