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강: 초기불교의 수행 ― 오근과 오력을 중심으로
[무엇이 다섯 가지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의 기능[信根], 정진의 기능[精進根],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삼매의 기능[定根], 통찰지의 기능[慧根]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믿음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믿음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예류자의 구성요소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정진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정진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바른 노력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마음챙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마음챙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삼매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삼매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禪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통찰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하는가? 통찰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봐야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상윳따 니까야 보아야함 경(S48:8) §§3~3)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믿음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깨달은 분[佛]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믿음의 기능이라 한다.
[여러 다른 경들에는 다음의 셋이 더 포함되어 네 가지 믿음으로 정형화되어 나타난다.
“그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그는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그는 성자들이 좋아하며 훼손되지 않았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벗어나게 하고 지자들이 찬탄하고 [성취한 것에] 들러붙지 않고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지닌다.”]
비구들이여, [198] 그러면 어떤 것이 정진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열심히 정진하며 머문다. 그는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善法]들을 구족하기 위해서 굳세고 분투하며 유익한 법들에 대한 임무를 내팽개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정진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삼매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놓아버림을 대상으로 삼아 삼매를 얻고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을 얻는다.
그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에 들어 머문다.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삼매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통찰지의 기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통찰지를 가졌다. 그는 성스럽고, 꿰뚫음을 갖추었으며,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향하는 통찰지를 구족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통찰지의 기능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상윳따 니까야 분석 경 2(S48:10) §§3~9)
“믿음의 기능은 확신을 통해서(adhimokkha-vasena) 전향(āvajjana)하여 일어난다. 정진의 기능은 분발(paggah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마음챙김의 기능은 확립(upaṭṭhān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삼매의 기능은 산란하지 않음(avikkhep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통찰지의 기능은 봄(dassana)을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기능들은 모두 열의(chanda, 즉 기능들을 일으키고자 하는(kattu-kāmatā) 유익한 열의 - SAṬ)를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나고, 마음에 잡도리함[作意, manasikāra, 즉 기능들의 힘이 미약(dubbala)할 때 이러한 전향을 생기게 하는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 - SAṬ]를 통해서 전향하여 일어난다.”(SA.īi.232)
[다섯 기지 기능과 다섯 가지 힘의 차이]
“비구들이여, 믿음의 기능이 곧 믿음의 힘이고 믿음의 힘이 곧 믿음의 기능이다. 정진의 기능이 곧 정진의 힘이고 정진의 힘이 곧 정진의 기능이다. 마음챙김의 기능이 곧 마음챙김의 힘이고 마음챙김의 힘이 곧 마음챙김의 기능이다. 삼매의 기능이 곧 삼매의 힘이고 삼매의 힘이 곧 삼매의 기능이다. 통찰지의 기능이 곧 통찰지의 힘이고 통찰지의 힘이 곧 통찰지의 기능이다.”(사께따 경(S48:43) §5)
이러한 말씀은 기능[根, indriya]들과 힘[力, bala]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기능들과 힘들은 단지 다른 두 각도에서 같은 요소들을 쳐다보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용어를 가지고만 보면 힘들은 기능들보다 더 발전된 단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경이나 주석서에서 이를 뒷받침할 출처를 찾을 수가 없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확신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adhimokkha-lakkhaṇe) 통제를 한다는 뜻에서(indaṭṭhena) ‘믿음의 기능’이라 하고, 불신(assaddhiya)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기(akampana) 때문에 ‘믿음의 힘’이라 한다. 나머지들은 각각 분발(paggaha)과 확립(upaṭṭhāna)과 산란하지 않음(avikkhepa)과 꿰뚫어 앎(pajānana)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통제를 한다는 뜻에서 ‘기능[根]’이 되고(indriya-bhāva), 각각 게으름(kosajja)과 마음챙김을 놓아버림(muṭṭha-sacca)과 산란함(vikkhepa)과 무명(avijjā)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힘[力]’이 된다고(bala-bhāva) 알아야 한다.”(SA.īi.247)
[다섯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닦음]
다섯 가지 기능을 조화롭게 닦는 것이 중요하다. 청정도론(IV.45~49)는 이렇게 말한다.
“기능(根)을 조화롭게 유지함이란 믿음 등의 기능(五根)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믿음의 기능(信根)이 강하고 나머지 기능들이 약하면 정진의 기능(精進根)이 노력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마음챙김의 기능(念根)이 확립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삼매의 기능(定根)이 산만하지 않는 역할을 할 수 없고 통찰지의 기능(慧根)이 [있는 그대로] 보는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믿음의 기능은 법의 고유성질(sabhāva, 自性)을 반조함에 의해서 조절해야 한다. 만약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것이 강해진다면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에 의해서 조절해야 한다.
만약 정진의 기능이 강하면 믿음의 기능이 확신하는 역할을 실행할 수 없고 나머지 기능들도 각자의 기능을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편안함(輕安) 등을 수행하여 그 정진의 기능을 조절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통찰지의 균등함(samatā), 삼매와 정진의 균등함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통찰지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통찰지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등함을 통해서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삼매는 게으름(kosajja)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한 자는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정진은 들뜸(uddhacā)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삼매가 정진과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정진이 삼매와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등해야 한다. 이 둘이 모두 균등하여 본삼매를 얻는다.
다시 삼매를 공부하는 자에게 강한 믿음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믿고 확신하면서 본삼매를 얻는다. 삼매(定)와 통찰지(慧) 가운데서 삼매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하나됨(ekaggatā)이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본삼매를 얻는다. 위빳사나를 공부하는 자에게 통찰지가 강한 것이 적당하다. 이와 같이 그는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특상에 대한 통찰(paṭivedha)을 얻는다. 그러나 둘이 모두 균등하여 본삼매를 얻는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과 정진과 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챙김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처리하는 대신처럼 모든 곳에서 필요하다. 그래서 말씀하였다.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서 유익하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무슨 이유인가?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보호로 나타난다. 마음챙김이 없이는 마음의 분발(paggaha)과 절제(niggaha)란 없다”라고.” (청정도론 IV.45~49)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51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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