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량심(四無量心)에 대한 니까야의 설명
심해탈과 혜해탈
니까야는 해탈(解脫, vimutti, vimokha, vimokkha)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러한 분류 중에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로 분류하는 분류가 있습니다. 해탈을 그와 같이 분류하는 이유는, 원시불교에서의 해탈이란 ‘일종의 심적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혜해탈(paññāvimutti)이란 ‘반야(慧)를 갖추어서 생겨난 심(이 심은 새로운 심적상태를 의미한다고 봄)이 번뇌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시불교 최고 수준의 반야는 사성제이므로 ‘사성제를 깨달아 성취된 해탈’이라고도 볼 수 있고, 원시불교만의 독특한 해탈입니다.
그러나 심해탈(cetovimutti)은 ‘원시불교만의 독특한 해탈’이 아닙니다. 석존 당시의 인도 요가수행자들 사이에서 ‘흔히 성취되었던 해탈’이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혜해탈도 ‘일종의 심해탈’입니다. 다만, 심해탈은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다양하여 모든 심해탈을 ‘아라한의 해탈(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상태의 해탈, 無學의 해탈)’로 볼 수는 없기에 혜해탈을 별도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심해탈에 속하는 것 중에 무량심해탈(無量心解脫, appamāṇā cetovimutti)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 무량심해탈이 ‘사무량심’과 관련이 깊은 해탈입니다.
무량심해탈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범주(四梵住)로 사방(四方)을 가득채운 상태의 심(心)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탐진치(貪瞋癡)는 마음의 넓이와 깊이에 한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한 탐진치를 극복함으로써, 한계를 벗어난 ‘한계가 없는 마음’에 의하여 벗어남을 성취하는 해탈이 무량심해탈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도량이) 좁아지는 것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에서’ 좁아지는 것입니다. 108번뇌도 ‘3世의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듯이, ‘12처가 제공하는 상(相, nimitta)에 매몰된 마음(心)’[=識]은 좁은 마음입니다. 아래의 경문을 참조하십시오.
비구들이여, 불수호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眼(~意)으로 色(~法)을 보고서(~분별하고서) ‘사랑스런 色(~法)’에 몰입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色(~法)’을 혐오하며, 신(身)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도량이 좁게 산다면(viharati parittacetaso), 그는 이미 일어난 악하고 不善한 法이 남김없이 사라지는 心解脫과 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SN. vol.4. p.198]
비구들이여, 수호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眼(~意)으로 色(~法)을 보고서(~분별하고서) ‘사랑스런 色(~法)’에 몰입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은 色(~法)’을 혐오하지 않으며, 신(身)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고 무량한 마음으로 산다면(viharati appamāṇacetaso), 그는 이미 일어난 악하고 不善한 法이 남김없이 사라지는 心解脫과 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안다.[SN. vol.4. p.199]
우뻬카(upekhā, 평정, 捨)
‘사선-사무량심-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는 ‘11가지의 불사의 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무량심은 ‘사선과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 사이에 위치하므로, 당연히 ‘사선과 공무변처 ․ 식무변처 ․ 무소유처’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무량심과 사선과의 관계’는 제사선(第四禪)에서 성취되는 우뻬카(upekhā, 평정, 捨)에 이어지는 사무량심입니다. 팔정도와 칠각지와 사무량심 등은 공통적으로 그 마지막이 ‘우뻬카(upekhā, 평정, 捨)의 성취’로 끝납니다. 그 ‘우뻬카(upekhā, 평정, 捨)가 확고하게 확립된 자’가 바로 아라한입니다. 그와 같은 우뻬카(upekhā, 평정, 捨)는 12처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다음의 경문을 참조하십시오.
眼(~意)으로 色(~法)을 보고서(~분별하고서) 기쁨(somanassa, 즐거움)을 주는 色(~法)을 경험하고, 슬픔(domanassa, 불쾌, 근심)을 주는 色(~法)을 경험하고, 평정(upekhā)을 주는 色(~法)을 경험한다.
Aṭṭhārasamanopavicāro ayaṃ, bhikkhu, puriso ti iti kho pan' etaṃ vuttaṃ. Kiñ c' etaṃ paṭicca vuttaṃ? : Cakkhunā rūpaṃ disvā somanassaṭṭhāniyaṃ rūpaṃ upavicarati, domanassaṭṭhāniyaṃ rūpaṃ upavicarati, upekkhaṭṭhāniyaṃ rūpaṃ upavicarati, sotena saddaṃ sutvā …(pe)…, ghānena gandhaṃ ghāyitvā …(pe)…, jivhāya rasaṃ sāyitvā …(pe)…, kāyena phoṭṭhabbaṃ phusitvā …(pe)…, manasā dhammaṃ viññāya somanassaṭṭhāniyaṃ dhammaṃ upavicarati, domanassaṭṭhāniyaṃ dhammaṃ upavicarati, upekkhaṭṭhāniyaṃ dhammaṃ upavicarati; iti cha somanassūpavicārā, cha domanassūpavicārā, cha upekkhūpavicārā. Aṭṭhārasamanopavicāro ayaṃ, bhikkhu, puriso ti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 etaṃ paṭicca vuttaṃ.[MN. vol.3. pp.239~240.]
위 경문에서와 같이 12처에서 평정(upekhā)을 경험하지 못하고, 즉 12처에서 사무량심을 닦지 못하는 이유는 수행자가 까마(kāmā, 욕락)라고 부르는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까마(kāmā, 慾, 욕락, 전오근과 전오경에 대한 오욕락 등과 같은 감각적 쾌락)와 까마산냐(kamasaññā, 慾想)는 악마의 왕국, 악마의 대경(對境, 위사야) 악마의 먹이, 악마의 고짜라(고유한 對境, 行境)다. 그것들 때문에 욕심, 화냄, 자만과 같은 惡하고 불선한 상태가 생겨나고 성스런 제자들에게 장애를 만든다. … 그것을 버림으로써 나의 心은 무량하고 무한하게 개발될 것이다.[MN. vol.2. p.262]
까마(kāmā, 욕락)는 오개(五蓋)의 첫 번째 장애(혹은 덮개)이듯이, 사선이나 사무량심을 닦고자할 때에는 가장 먼저 버려야할 ‘악마의 덧’입니다. 그리고 까마산냐(kamasaññā, 慾想)란 ‘까마(kāmā, 욕락, 감각적 쾌락)와 함께하는 앎의 일종’입니다. 그러한 산냐는 쌍요자나(결박)입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수행
‘니미따(相, nimitta)와 산냐(想, saññā)의 차이점이 사선과 사무색의 차이점’입니다. 사선과 사무색의 중간에 위치한 사무량(四無量)은 사범주(四梵住)를 까시나(kasiṇa, 遍滿, 가득 참)로 이용하는 ‘상(想, saññā) 수행’에 가깝습니다. 四梵住(cattāro brahmavihārā)는 ‘①慈(mettā), ②悲(karuṇā), ③喜(muditā), ④捨(upekkhā)’의 넷을 말하는 것으로써, 慈(mettā)는 악의, 悲(karuṇā)는 잔인함, 喜(muditā)는 따분함, 捨(upekkhā, 평정)는 까마(kāmā, 慾樂)에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사무량심이라는 ‘불사의 문’에서, 즉 까마(kāmā, 慾樂)를 버리고 어느 정도의 ‘捨(upekkhā, 평정)무량심’을 닦으면 그러한 수행을 기반으로 ‘두 가지 방향의 진로’가 기다립니다.
첫째는, 당연히 해탈의 방향으로써, ‘捨(upekkhā, 평정)무량심’을 확고하게 하여 두 번 다시 까마(kāmā, 慾樂)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부동심해탈[=아라한의 해탈]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면 당연히 혜해탈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불사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을 해결해야한다는 말입니다.
바후나여, 여래는 열 가지 法들로부터 벗어나고(nissaṭo) 풀려나고(visaṃyutto) 해탈하여(vippamutto), 無量心(vimariyādīkatena cetasā)으로 머문다. 무엇이 열 인가? ‘色 ․ 受 ․ 想 ․ 行 ․ 識’과 ‘生 ․ 老 ․ 死, 苦 ․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고 해탈하여 無量心으로 머문다.
Dasahi kho Bāhuna dhammehi Tathāgato nissaṭo visaṃyutto vippamutto vimariyādīkatena cetasā viharati. Katamehi dasahi? Rūpena kho Bāhuna Tathāgato nissaṭo visaṃyutto vippamutto vimariyādīkatena cetasā viharati. Vedanāya kho Bāhuna …(pe)…. Saññāya kho Bāhuna …(pe)…. Saṅkhārehi kho Bāhuna …(pe)…. Viññāṇena kho Bāhuna …(pe)…. Jātiyā kho Bāhuna …(pe)…. Jarāya kho Bāhuna …(pe)…. Maraṇena kho Bāhuna …(pe)…. Dukkhehi kho Bāhuna …(pe)…. Kilesehi kho Bāhuna tathāgato nissaṭṭho visaṃyutto vippamutto vimariyādīkatena cetasā viharati.[AN. vol.5. p.152.]
위 경문은, 오온과 12연기와 관련되는 ‘生 ․ 老 ․ 死, 苦 ․ 번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언급에서 ‘번뇌’라는 것이 언급됨을 유의하십시오. ‘번뇌’는 무명과 호연연기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진멸지(漏盡滅智, 번뇌를 소멸시키는 지혜, =사성제)’가 당연히 있어야 가능한 것이겠지요.
사무량심(=불사의 문)을 닦았는데도 아라한이 되는데 실패하는 것은, 불사의 문을 열어 제치는데[백척간두에서 진일보] 실패하였기 때문이고, 쌍요자나(결박)를 제거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고, 반야를 소홀히 하여 ‘누진멸지(漏盡滅智, 번뇌를 소멸시키는 지혜, =사성제)’를 얻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관련경문은 [MN. vol.1. p.281]의 『출라 앗사뿌라 경(Cūla-Assapura-sutta)』입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본은 맛찌마 니까야 제2권 205페이지에 『앗싸뿌라 설법의 작은 경』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사무색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일부 학자 분들은 “사무색이 불교 고유의 수행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옳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원시불교가 수용한 수행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원시불교는 ‘오직 사무색 뿐’이었던 요가수행계에 ‘사선-사무량심-사무색-상수멸’이라는 수행들을 추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추가에서, 사무량심은 ‘사선과 사무색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합니다.
사무량심과 관련되는 ‘무량심해탈(無量心解脫, appamāṇa cetovimutti)’과 사무색과 관련되는 ‘무변심해탈(無邊心解脫, mahaggatā cetovimutti)’에서, 무량심해탈은 처음부터 자비희사라는 까시나(kasiṇa, 편만, 가득 참, =명상대상)를 ‘채움’에 방점이 찍혀있고 무변심해탈은 ‘확장’에 방점이 찍혀있는 수행입니다. 관련경문은 [MN. vol.3. p.144]의 『아누룻다 경(Anuruddha-sutta)』입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본은 맛찌마 니까야 제2권 130페이지에 『아누룻다의 경』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무량심의 의미
탐진치의 제거와 관련된 수행에서, 탐과 치에 대해서는 많은 경설이 있지만, 의외로 진(성냄)에 대해서는 경문이 적은 것으로 알고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만나는 빈도가 많은 것은 ‘의외로 진(성냄)’인데도 말입니다. 원시불교에서는 ‘사무량심의 첫 번째 무량심인 자무량심과 관련된 자심해탈(mettācetovimutti)’이 바로 진(성냄)에 관련된 수행입니다.
Tassa mettaṃ cetovimuttiṃ yoniso manasikaroto anuppanno c'eva doso n'uppajjati, uppanno ca doso pahiyyatī ti.[AN. vol.1. p.201]
자심해탈(慈心解脫, mettācetovimutti)을 ‘올바르게 작의(作意, manasikāra)하면’ 그에게 아직 생겨나지 않은 진(瞋, dosa, 성냄)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진(瞋)은 사라진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명상과 관련하여 사무량심을 닦는 명상이 가장 올바른 명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량심 자체는 보살의 마음이지만, 평정(捨, upekkhā)을 얻어 거기에서 ‘취착의 대상(우빠디)에 대하여 위빠사나를 하게 되면’ 아라한으로도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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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무량심(四無量心)에 대한 니까야의 설명 |작성자 까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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