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대승불교사상과 사회참여 一考/박경준

수선님 2020. 3. 22. 11:57

불교학연구 제24호

대승불교사상과 사회참여 一考

박경준/동국대학교


Ⅰ. 머리말

Ⅱ. 깨달음의 사회화

Ⅲ. 대승불교의 기본 성격

1. 대승불교의 흥기 배경

2. 대승의 기본 성격

Ⅳ. 사회참여의 대승사상적 근거

1. 眞俗不二: 生死卽涅槃

2. 化現

3. 열반경의 業說과 사회윤리

Ⅴ. 대승보살의 사회참여

1. 보살의 길

2. 오늘의 위기와 사회참여

 

Ⅵ. 맺음말


[요약문]

대승불교는 불교 본연의 종교적 생명력을 회복하여 사회대중과

소통하며, 그들을 고통과 미혹에서 구제하려는 적극적 실천불교 내

지 참여불교의 성격을 지닌다. 대승불교는 무엇보다도 생사와 열반

을 분별하지 않고 眞諦와 俗諦를 원융하게 보아, 현실세계를 인정

하고 따뜻하게 포용한다. 또한 대승불교의 化現(incarnation) 사상

에 따르면, 여러 붓다와 보살들은 이미 깨달았지만 중생을 구제하

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하여 이 세상에 화현한다. 따라

서 이 화현 사상을 통해 볼 때 불보살에게 깨달음을 향한 개인적 수

행은 곧 중생구제의 실현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眞俗不二와 化現思

想은 대승불교의 사회참여 내지 사회적 실천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

또한『大般涅槃經』의 한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들의 苦와 樂은 자신

들이 지은 전생의 근본업 때문만이 아니라 四大, 時節, 土地, 人民 등

네 가지(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가르침은 일종의 사회윤리를 강

조하는 것으로 우리는 공동의 행위와 노력을 통해 사회적· 자연적

고통과 재난을 극복해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대승불교의 적

극적이고도 구체적인 실천의 이념은 6바라밀의 실천덕목은 물론 아

미타불의 48원, 약사여래의 12대원, 보현보살의 10대원, 승만부인의

10대원 등에 두루 나타난다. 대승의 보살은 수도생활과 일상생활을

분리시켜 보지 않는다. 보살은 현실을 떠나지 않고 현실의 한복판에

서 대승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오늘의 불교인은 이러한 대승의

자비정신을 통해 인류가 당면한 양극화와 생태환경 등의 심각한 위

기를 극복하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가야 한다.


Ⅰ. 머리말


종교는 흔히 ‘산 종교’와 ‘죽은 종교’로 이분된다. 박물관 안에 박제

화되어 있거나 경전 속에 갇혀 있는 종교가 죽은 종교라면, 동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종교는 산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산 종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

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 대

표적인 예가 부파불교시대의 불교라 할 수 있다. 부파불교 시대는

아함의 체계화가 이루어져 불교 교리가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면에 당시의 불교는 대중과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하고 타성과 안

일에 빠지면서 산 종교의 기능을 상실했다. 대승불교는 이를 극복하

기 위해 출현한 것이다.


최근 불교계 일각에서는 ‘新大乘’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불교가 사찰 안에 혹은 불교 안에 갇혀서 산 종

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 인류는 참으로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최근 유행하는 신

종 플루를 비롯한, 암, 에이즈 등의 각종 질병,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국가 및 개인 간의 빈부격차, 탐욕을 바탕으로 하는 카지노 자본주

의로 인한 경제적 불안,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 등, 그 위협의 범위는 넓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깨달음의

사회화’ 또는 ‘불교의 사회화’ 담론은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깨달음의 사회화에 관한 논의는 지난 1996년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주최로 열린「깨달음의 사회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제목의 세

미나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이 세미나에서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宋月珠 스님의 기념법어와 함께 박선영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제’에 대한 기조발제가 있었다. 그리고 네

주제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제1주제「교리사상적 측면」은 박경

준, 제2주제「사회과학적 측면」은 유승무, 제3주제「복지정책적 측

면」은 황진수, 제4주제「실천운동적 측면」은 연기영이 각각 발표

하였다.1)

1) 한국교수불자연합회 편, 「깨달음의 사회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한국교수불자연합회

제6회 한·일불교학술대회 자료집, 1996) 참조.


 

또한 지난 2002년에는 비슷한 주제의 연구 성과물인『실천불교

의 이념과 역사』라는 제목의 단행본이 출간되었다.「‘실천불교전국

승가회-불교포럼’ 공동연구프로젝트 논문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1부 실천불교의 이념, 제2부 역사 속의 실천불교, 제3부 실

천불교운동의 전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에는「초기불교의 사

회적 실천운동」(조준호),「 대승불교의 실천 이념」(정승석)의 논문

이 실려 있고, 제2부에는「 선불교의 실천적 이념」(변희욱),「 중국불

교의 실천 이념」(김종욱),「 고대 한국 불교의 실천 이념」(박태원),

「고려 불교인들의 현실 참여」(고영섭),「 조선불교의 사회사상」(박

해당),「 한국근대불교 속의 실천불교」(김경집),「 현대 한국의 실천

불교: 운동과 이념」(조성렬) 등의 논문이, 제3부에는「 실천불교의

전망과 과제」(박경준)가 실려 있다.2)

2) 조준호 외,『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서울: 행원, 2002) 참조.


이 외에도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 관련한 단위 논문들이 발표되기

도 하였다. 하지만 ‘기획 특집’의 성격을 갖는 연구는 이번이 세 번째

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에 의

거하면서, 특히 사회참여의 대승사상적 근거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한다.


Ⅱ. 깨달음의 사회화


깨달음이란 일반적으로 한자어 ‘菩提’ (Bodhi)에 대한 우리말인데

보리는 본래 阿耨多羅三藐三菩提(Anuttarasamyaksaṃbodhi)의 약

어로서 그 의미는 ‘無上正等正覺’(舊譯은 無上正徧智)이다. 무상정

등정각이란 글자 그대로 ‘최상의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는 의미

로서, 다시 말하자면 ‘완전한 깨달음’ 또는 ‘궁극적 인식의 완성’이라

 

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일반적 의미의 깨

달음이 아닌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깨달음이다.


龍樹(Nāgārjuna)에 의하면 오직 佛陀 한 사람의 지혜만을 ‘아뇩다

라삼먁삼보리’라고 할 수 있으며 聲聞과 緣覺 같은 사람들의 지혜

를 깨달음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다고 한다.3) 이러한 용수의 입장은 불

교적 깨달음의 핵심인 12연기에 대한 釋尊의 입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3) 龍樹,『大智度論』(『大正藏』25, 656b), “二無學人 不得一切智正遍知諸法故 不得名阿

耨多羅三藐三菩提 唯佛一人智慧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석존은 한 때 제자 阿難으로부터 “如來와 여러 비구들이 연기법이

甚深하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에는 그렇게 깊은 뜻이 없

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아난아,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12

연기는 그 의미가 매우 甚深하여 일반인들이 명확하게 알 수가 없느

니라”라고 가르친다.4) 또한『長阿含』의「大緣方便經」에서도 석존은

“아난아, 이 12연기는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연기법을 깨닫

지 못한 사람들이 그 뜻을 사량하고 관찰하고 분별하려 하면 모두가

곧 荒迷해져버릴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5) 그러므로 ‘깨달음’은 언

어를 통한 정의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훗날 禪家에

서는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주장하게 되었을 것

이다.

4)『大正藏』2, 797c.

 

5)『大正藏』1, 60b.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불교적 깨달음과는 판이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객관적 세계는 무한하고 무수한 측면들이 무수히 상호연관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객관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즉 객관적 진리의 파악도 또한 무한한 과정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을 인식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만스러운 독단이다.

불교의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깨달았다고 해서 곧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역시 완성을 향해 가는 단계적 변증법적 과정

인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하나의 진리에 대한 결과이자 무수한 진

리에 대한 과정인 것이다."6)

6) 여익구,「 민중불교 구현을 위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 실천불교』제4집(일월서각,

 

1987), p. 6.


여기에서는 깨달음이 변증법적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다. 깨달음

이란 과정상의 한 단계적이고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세계가 무한한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므로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무한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객관세

계란 아마도 역사적 객관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깨달음은 역사적 객관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의미

한다고 여겨진다.7)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살핀 석존과 용수

의 입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석존과 용수에 있어서의

깨달음은 한마디로 佛果 또는 菩提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7) 박경준,「 민중불교이념의 비판적 고찰」,『 동국대학교연구논집』 제18집(동국대학교대

 

학원, 1988), pp. 10~11.


따라서 이번 기획 특집의 대주제인 ‘깨달음의 사회화’는 말 그대

 

로 풀이한다면 ‘보리과 또는 불과, 다시 말해 깨달음 그 자체를 사회

화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 그 자체를 사회화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의미가 모호하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에게 원래

주어진「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사회참여」라는 제목을 부득이「대승

불교사상과 사회참여 一考」로 바꾸었다. 방대한 대승불교의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한 고찰과 분석 작업에 비중을 두다 보면 ‘사회 참여’ 문

제와 관련한 논의가 소홀해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깨달음의 사회화’란 말이 학술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

은 아니다. 예컨대 ‘신(God)은 곧 사회(society)’라고 주장하는, 그

리하여 종교를 사회의 부산물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 사회학자들에

게 ‘깨달음의 사회화’는 흥미있는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깨달음

을 사회의 종속변수로 보고 ‘사회화 현상으로서의 깨달음’에 대해 분

석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기획은 이러한 사회

과학적 접근을 의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번 기획

특집의 대주제인 ‘깨달음의 사회화’는 아마도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첫째, ‘개인의 깨달음을 개인에 한정시키지 말고 사회구성원 전체

가 공유하도록 함’의 의미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下化衆生,

覺他[利他], 전법교화, 포교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깨

달음을 개인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타

인과 더불어 추구하는 것이다.8) 여기에서는 개인적 깨달음과 중생교

화를 시간적 선후관계로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셋째,

‘깨달음을 사회에 적용함’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회적 고

통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無明[구조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제

도 따위]을 깨달아 밝히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실천이다. 이것은 정

의사회 및 복지사회 구현을 지향하는 ‘불교의 사회참여 또는 사회적

실천’이다. 불교의 요익중생, 성취중생, 중생회향 등의 용어 속에는

이러한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는 주로 이러한 세 가지 의미에 유념하면서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해 가고자 한다.

8) 정승석,「대승불교의 실천 이념」, 조준호 외,『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서울: 행원,

2002), p. 77.


Ⅲ. 대승불교의 기본 성격


1. 대승불교의 흥기 배경

불교사에 일대 획을 그은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된 데는 외부

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있었다고 본다. 먼저 외적 요인에 대해 간

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인 마우리아(Maurya 孔雀)왕조가

멸망하자 인도는 여러 작은 국가들로 사분오열되면서 전쟁이 그

칠 날이 없었다. 더욱이 서북쪽으로부터는 그리이스인, 스키타이인

(Turki, Śaka), 파르티아 인등의 이민족이 끊임없이 침입해 들어

왔다. 그리하여 중인도 국가들은 약화되고 결국은 북방의 쿠샤나

(Kuṣāna, 月支 또는 月氏)족의 침공을 받아 북반인도를 내주어야

 

했다. 또한 한 때는 남방의 안드라(Andhra, 案達羅)왕조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던 바,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인도인들은 정신적으

로 불안하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종교

에 대한 대중적 갈망은 바로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축적되었다.9)

9) 中村 元,「大乘佛敎興起時代のインドの社會構成」,『印度學佛敎學硏究』통권 제7호,

pp. 97~107 참조.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 불교 승가는 분열을 거듭하여 18부파 내지

20부파로 갈라졌으며, 이런 과정에서 승가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을『大般涅槃經』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내가 열반한 뒤 혼탁하고 악한 세상에, 국토는 荒亂하고 서로 침략하여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일 때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리라. 이런 무리들은 계행을 지키고 위의를 갖춘 청정한 비구들

이 법을 수호하는 것을 보면 쫓아내고 해치거나 죽이거나 하리라.10)

10)『大正藏』12, 624a.


이 기록은 당시 출가자들 사이에 사이비 승려들이 많았음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사이비승들은 경전을 배우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다. 입은 옷은 단정하지 못하고 소와 양을 기르며 탐욕

과 질투가 가득하고 ‘여래께서 우리들이 고기 먹는 것을 허락하였다’

고 거짓말하면서 서로 다투기를 일삼았다.11) 이런 가운데 불교승가

는 이른바 ‘정법 쇠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11) 위의 책, 626b.


 

그러나 당시의 출가자 모두가 假名僧이나 파계승은 아니었다. 쿠

샤나 왕조의 카니시카 왕의 불교보호 정책에 힘입어 진지하게 수행

과 연구에 전념한 출가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45년간

에 걸쳐 對機說法의 방식으로 설해전 붓다의 방대한 敎法에 대해 설

명과 해석을 가하고, 그것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하여 불교의 학문적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른바 아비달마 불교는 그들의 성실한 학문적 노력의 산물이었

으며 이로 인해 三藏의 성립도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부파불

교인들은 일반 대중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너무 번쇄한 이론 작업

에만 매달렸다. 그리하여 일부는 권위주의에 빠져 불교를 사원과 출

가자의 전유물로 만들어가고 있었으며, 일부는 경전 언어의 참다운

정신을 잃어버리고 타율적 형식주의와 현학적 아비달마에 빠져 자

기완성과 세간 구제의 책무를 저버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부파불교

[아비달마불교]는 종교적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대승불교 운동

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범하였다.12)

12) 박경준,「 대승경전관 정립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 제21집(한국불교학회,

 

1996), p. 172.


2. 대승의 기본 성격

大乘(Mahā-yāna: great vehicle)은 말 그대로 ‘큰 운송수단’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큰 수레’ 또는 ‘큰 배’의 의미로서, 자신만이 아니

라 여러 사람을 고통과 죽음의 此岸에서 안락과 생명의 彼岸으로 함

 

께 실어나르는 큰 가르침 [교리, 사상, 이념]이다. 小乘(Hīna-yāna,

작은 운송수단)이 개인적인 깨달음을 위한 자기 수행에 주력하는 반

면, 대승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으면서도 남을 구제하는데 더 주력

한다. 그러므로 대승은 ‘自利利他’ 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강조

한다. 이것은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일과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동시에 함께

병행한다는 의미다. 이 두 가지를 동전의 양면처럼 간주하여 조금도

차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나를 제도하지 않더라도 남을 먼저 제

도한다(自未得度 先度他)’는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른바 대승의

대승다운 소이가 있다.


이러한 대승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오랜시간에 걸쳐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 열반부, 밀교부 등의 수많은 대승경전이 성립되고, 대중적 종

교심리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佛·菩薩과 경전 숭배, 다라니, 佛像과

佛塔신앙 등이 일반화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특징은 다음 여섯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본다.

약간은 도식적인 면이 있지만 소승불교와 대비되는 대승불교의 특징

을 드러내기 위해 일반적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첫째, 대승은 菩薩乘이다. 일반적으로 소승은 聲聞乘이며 아라한을

궁극적 목표로 하지만, 아라한은 출가승려에게만 제한적으로 가능한

목표이다. 그러나 보살승은 成佛을 궁극적 목표로 하며 이 목표는 출

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열려 있다.


 

둘째, 대승은 자율적 願行思想이다. 소승이 업보윤회의 고통에서 벗

어나고자 하는 소극적인 타율적 해탈사상이라 한다면 대승은 성불과

중생구제를 위해 스스로 惡趣에 나아가는 적극적인 자율적 원행사상

이다.


셋째, 대승은 利他主義이다. 소승이 자신만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

고 노력하는 自利主義라면 대승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여 사회 전체

를 정화하고 향상시키고자 하는 이타주의이다.


넷째, 대승은 空思想을 기초로 한다. 소승이 ‘三世實有 法體恒有’

등의 사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經典의 言句에 갇혀 사물에 집착하

는 有의 태도를 보이는데 반해, 대승은 반야바라밀의 空無所得行을

지향하는 空의 태도를 견지한다.


다섯째, 대승은 실천지향적이다. 소승이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경

향이 많고 실천과 무관한 현학적 사변으로 흐르는 경향이 짙은데 반

해 대승은 실천 신앙을 중시한다. 이론은 반드시 실천의 기초가 되

는 것이어야 하며 空理를 배격한다.


여섯째, 대승은 일반적 재가불교라 할 수 있다. 소승이 전문적 출

가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소승적·세속적 입장을 취함에 반해 대승은

대중적·재가적임에도 그 경지는 第一義的이다.13)

13) 木村泰賢,『 大乘佛敎思想論』(東京: 大法輪閣, 1982), pp. 86~91.


Ⅳ. 사회참여의 대승사상적 근거


1. 眞俗不二: 生死卽涅槃

대승불교의 ‘사회 참여’ 또는 ‘사회적 실천’의 사상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眞俗不二’의 사상, 특히 ‘生死卽涅槃’의 사상

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세계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삼계[欲界]이며, 육도[人間]

이다. 삼계와 육도는 윤회의 세계, 生死의 세계이며 한마디로 생사윤

회의 세계이다. 불교에서는 이 생사윤회의 세계를 고통의 세계로 보

아 그로부터 벗어나기[해탈]를 가르친다.


그런데 왜 生死의 세계는 고통의 세계일까. 우리는 누군가가 이 세상

에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꼭 축하할

일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탄)생이 있으면 반드시 사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生은 이미 死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죽음이 이미 삶 속에 침투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不生을 지향한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不死’

를 지향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不生’은 ‘不死’의 조건일 뿐이기 때문

이다. 초기 경전에서 종종 발견되는 ‘나의 生은 이미 다했다’ ‘나는 다시

後有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14)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러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영원한 생을[不死] 위해 유한한 생을 부정해야

[不生]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며, 바로 이 점 때문에 불교는 허무

주의 또는 염세주의로 곡해되기도 한다.

14)『長阿含經』권22(『大正藏』1, 149c).


 

그렇다면 生死를 초월해 있는 열반은 어떤 세계일까. 우리는 흔히 ‘열반

에 든다[入涅槃]’는 표현 때문에 열반을 공간개념의 세계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들어감’이 있으면 ‘나옴’이 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열반

의 세계에 태어난다면 열반의 세계에서 죽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열반

은 또 하나의 天上세계가 되어 生死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생사가 있으면 이미 열반이 아니다. 따라서 열반은 공간 개

념의 세계로 보면 안 된다. 그렇다고 열반은 죽음도 아니고 絶對無

도 아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이 五分法身의 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고 설하며, 대승경전에서는 열반에 常, 樂, 我, 淨의 네 가지 공덕[四

德]이 있다고 설한다. 열반을 죽음이나 無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

은 아마도 無餘涅槃의 개념15)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法相宗에서는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열반을 네 가지16)로 정리하면서 ‘無住處

涅槃’의 개념을 도입했다고 생각된다. 무주처란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열반은 생사를 떠나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열반은 바로 생사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5) 무여열반은 흔히 灰身滅智라고 정의되듯이 몸도 사라지고 정신작용도 사라진 완전한

열반.

 

16) 四種涅槃: 本來自性淸淨열반, 有餘依열반, 無餘依열반, 無住處열반.


요컨대 대승불교에서는 생사와 열반을 별개의 세계로 보지 않

는다. 생사와 열반은 원융무애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용수

(Nāgārjuna)는, “열반과 세간[윤회] 사이에는 털끝만큼의 차별도 없

다”17)고 설하며 ‘生死卽涅槃’을 주장한다.

17)『 大正藏』30, 36a.


또한 義湘은 法性偈에서 ‘생사와 열반은 서로 共和한다(生死涅槃

相共和)’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을 좋아

 

하지도 않는 것이 대승의 정신이다. 大悲로 인해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중생을 교화하며, 大智에 의거해 생사에 머무르지 않고

迷界를 여의는 것이다.


문제는 분별과 집착이다. 대승불교를 이끈 般若經이 空의 기치를

내건 것은 무엇보다도 초월적 열반에 대한 집착을 끊기 위한 것이었

다. 초월적 열반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생사의 현실에 대해서는 소

극적이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

로 空의 실천자라고 할 수 있는 보살은 현실에서 6바라밀 등을 능동적

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삶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선재동자는 심지어 창녀까지도 선지식으로 존경하며 求法

의 길을 걷는다. 틱낫한 스님은 “정토는 바로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얻을 수 없다(The Pure Land is now or never)”고 역설한다. 또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기탄잘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 찬송과 노래와 기도 따윈 그만 두시지요! 문들이 모두 닫힌 이 사원

의 쓸쓸하고도 어두운 구석에서 당신은 누구를 예배하는 것입니까? 눈

을 뜨고 보십시오, 신은 당신 앞에 없다는 것을! 그분은 농부가 팍팍한

땅을 갈고 있는 곳과 길 닦는 이가 돌을 깨고 있는 곳에 계십니다. 볕이

들거나 소나기가 퍼붓거나 그분은 그들과 더불어 계십니다…"(이하 생

략)18)

18) R. 타고르, 박희진 역,『기탄잘리』(서울: 홍성사, 1983), p. 26.


 

현실의 사회는 버리고 떠나야 할 세계가 아니다. 그저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나와 무관한 세계가 아니다. 다니엘 데포

『 로빈슨 크루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설사 이곳을 버

리고 떠나 다른 어떤 곳에 이른다 하여도 그곳 역시 사회이기는 마찬

가지다. 우리의 삶은 이미 사회(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사회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인 완성도 이루어지

기 어렵다.19) 여기서 말하는 개인 완성은 깨달음의 완성만을 의미하

지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완성을 의미한다. 적어도 대승

은 깨달음의 완성이 아닌 삶의 완성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석가

세존도 35세에 大覺을 성취하고 곧바로 열반에 들지 않았다. 붓다로

서 45년 동안의 전법도생의 삶을 통해 80세에 삶의 완성을 이룩하셨

던 것이다.

19) Nandasena Ratnapala, Buddhist Sociology (Delhi: Sri Satguru Publications, 1993),

 

p. 30. 라트나팔라는 ‘사회화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이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대승의 사회 참여는 이처럼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지 않

고 眞諦와 俗諦를 원융하게 보아, 현실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와 남’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구별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2. 化現

대승불교의 ‘사회 참여’를 담보해 낼 수 있는 두 번째 사상적 근거

는 化現 思想이라 할 수 있다. 化現(incarnation)은 應化 또는 應現

이라고도 하며,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화

현사상은 근본적으로 法身의 개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석존은 時空을 초월한 영원한 보편적 진리, 즉 法(dharma)을 깨달

음으로써 佛陀가 되었다. 그러므로 法이 없다면 붓다도 없으며, 따

라서 붓다의 본질은 ‘법(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석존이 제

자들에게 남긴 “내가 설한 法과 律이야말로 내가 入滅한 후, 그대

들의 스승이다”라는 가르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줄 안

다. 이 ‘永遠不滅의 보편적 법 그 자체’는 실재하는 몸이라는 생각

에서 ‘法身(dharma-kāya)’이라는 관념이 생기고, 반면에 80평생

을 살다간 역사적인 석존의 몸은 ‘色身(rūpa-kāya)’ 또는 ‘生身’

이라고 불리었다. 이러한 二身說의 佛身觀은 훗날 法·報·化 三身

說의 佛身觀으로 발전한다.20)

20) 平川彰 외 편,『講座·大乘佛敎』1(東京: 春秋社, 1981), p. 160.


 

이러한 法身思想에 의거하여『八千頌般若經』은 “(法을 밝힌: 필자

첨언)반야바라밀이야말로 부처의 본질이며 마치 어머니와 같이 과

거·현재·미래의 부처를 낳는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이야말로 佛塔이

나 佛舍利보다 더욱 尊崇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하며 마침내

“반야바라밀은 바로 여래의 법신이다”라고 가르친다.『법화경』에

서는 이러한 법신의 관념이 조금은 인격적 성격을 띠면서 ‘久遠實

成’의 부처님, 즉 ‘久遠佛’의 불타관으로 전개된다. 이 구원불은

「如來壽量品」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아주 먼 옛날부터 성

불해 있는 부처이다. 그리고 법신불 사상은『화엄경』에서 ‘비로

자나불’ 사상으로 정립된다.21)

21) 위의 책, pp. 162~164 참조.


그런데『 法華經』에 바로 화현 사상이 나타난다.


사리불아, 여래가 말하는 법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여래

는 무수한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 법을 설하기 때문이

다.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는 이해할 수 없고 여래끼리만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모든 여래는 오직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기 때문

이다…(중략)…모든 여래는 중생으로 하여금 佛知見을 열어[開] 청정케

하려고 세상에 출현하며,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여주려고[示]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을 깨닫게 하려고 [悟] 출현하며, 중생으로 하여

금 佛知見道에 들어가게 하려고[入] 세상에 출현하기 때문이다.22)

22)『 法華經「』方便品」『( 大正藏』9, 7a).


여래는 久遠劫 전에 이미 성불하였지만 오직 중생들에게 佛知見

을 開示悟入하게 하려는 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化現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석존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無上正覺을 이루는 것

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석존은 구원겁 전에 이미

깨달은 존재이므로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화현사상을 통해 볼 때 석존에게 있어 깨달음을 향한 개인적 수행

은 곧 중생구제의 실천과 마찬가지다. 중생구제의 실천은 결국 ‘사회

참여’와 연결된다는 관점에서 필자는 化現思想을 대승불교 사회 참

여의 사상적 근거로 해석한 것이다.


이 화현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역시 33身[응신] 또는 32應[응신]사

 

상이다.『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중생

을 제도하기 위해 佛身, 長者身, 比丘身, 婦女身, 童女身 등 33가지 몸

[應化身]으로 화현하며,『首楞嚴經』권6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중

생을 제도하기 위해 32가지 몸으로 화현한다는 것이다. 33신과 32응의

내용은 대부분이 일치한다.


이 관세음보살의 화현사상은 自利보다는 利他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利他의 이념은 자기완성보다는 세계 완성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 역시 결국 사회 참여와 연관된다.

이러한 이유로 화현사상은 ‘사회 참여’ 또는 ‘사회적 실천’의 대승불교사

상적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열반경』의 業說과 사회윤리

사회적 실천 또는 사회참여에 있어 ‘사회윤리’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윤리와 달리 사회윤리는 사회문제의 원인과 처방을

개인의 양심과 의식에서 찾지 않고, 사회구조나 제도 및 정책에서 찾으

려 하며, 사회구조나 질서·체계의 도덕성을 따진다. 그런데『대승열반

경』가운데는 ‘사회윤리’사상과 상통하는 가르침이 발견되어 매우 흥미

롭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의 ‘행과 불행’[운명]은 신의 뜻이나 숙명

또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의 업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업설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 간다는 自業自得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불교 업설은 대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고 수용되며 불교인

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선업을 행하고 선근공덕을 쌓는 일에 노력한다.

하지만 부파불교시대의 共業思想 등을 통해 생각해 보면 불교는 ‘공동의

노력’도 중요시한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통해 올 것’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 역시 공동의 노력 또는 사회적

차원의 실천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일까.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大般涅槃經』「 교진여품」의 다음

가르침에서 찾아낼 수 있다.


일체 중생이 현재에 四大와 時節과 土地와 人民들로 인하여 고통과 안

락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체 중생이 모두 과거의 本業만을 인하

여 고통과 안락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느니라.23)

23)『 大正藏』12, 851b.


이 내용 속에는 업설에 대한 발상의 일대 전환이 표명되어 있다.

사람들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자신들이 과거에 지은 근본적인

업[本業]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변수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

다는 것이다. 그 다른 변수로 대승열반경은 4대, 시절, 토지, 인민의

네 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이들 네 가지 사항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24)

24) 박경준,「 佛敎 共業說의 사회학적 함의」,『 佛敎學報』 제52집(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

 

구원, 2009), pp. 161~162 참조.


첫째는 四大이다. 四大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큰 요소로

 

서 地·水·火·風을 가리킨다. 땅·물·불·바람은 각각 독자적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어우러져 나타나

는 기후 풍토 등의 자연 환경은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진, 홍수, 화재, 태풍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아열대 기후라든가

온대 기후라든가 다양한 기후 조건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가를 생각해 보자. 열반경은 이러한 자연 현상을

도덕적 인과 법칙의 범주와 구분하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시절이다. 통일신라시대 신라인의 삶과 조선시대 조선인의

삶, 그리고 21세기 한국인의 삶을 생각해 보자. 전쟁 시기의 삶과

평화 시기의 삶을 비교해 보자. 시대에 따라 삶의 방식이 우리의 운

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시대상

황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인과응보의 진리만을 집착한다면 그것은

결코 온당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는 토지이다. 여기서 토지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지역 또는 국토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곡식을 창출해 내

는 토지이다. 한대지방과 열대지방의 차이는 크고, 같은 지역이라

도 척박한 땅과 비옥한 땅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척박한 땅에

서는 아무리 노력하여 농사를 짓더라도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없는

반면, 비옥한 땅에서는 조금만 노력해도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

을 것이다. 이것을 도덕적 선악의 행위 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는 인민이다. 여기서 인민은 단순히 사람들 개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 집단으로서의 사회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법, 도덕, 관습이며 제도요 체제다. 법과 관습과 제도에 따라

선악의 개념이 달라지기도 한다. 잘못된 법과 제도, 관습과 체제에

의해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25)

25) 위의 논문, p. 162.


열반경이 성립될 무렵의 인도 사회는 전쟁 등으로 매우 참담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불교 승단 내부도 소승과 대승의 극심한 대립으로

어지러웠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업설만으로는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석

하기 어렵고 위기 상황을 극복해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업설에 대

한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었을 것이다.26) 어쨌든, 이러한 변수들에 대

해서는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조적 노력을 중시하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체

념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일도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노

력하여 피뢰침을 개발함으로써 벼락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처

럼, 인류가 함께 노력하면 가뭄, 홍수, 지진 등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도 있을 것이다.

26) 위의 논문, p. 161.


또한 ‘사회윤리’에 바탕한 우리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 그 해결이

어렵게만 생각되는 전쟁, 범죄 등을 비롯한 갖가지 사회문제도 극복

해 갈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

다. 대승열반경은 바로 ‘사회윤리’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사회 참여’

와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교진여품」 중의 한 가르침

 

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Ⅴ. 대승보살의 사회참여


1. 보살의 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바라밀은 보살의 기본적인

실천 덕목이다. 8정도에서는 正見이 맨 앞에 위치하는데 반해 6바라

밀에서는 보시가 맨 앞에 위치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

아가 대승불교의 적극적·구체적 실천의 정신은 여러 佛菩薩의 서

원에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아미타불의 48願,27) 약사여래

의 12大願,28) 보현보살의 10대원,29) 승만부인의 10대서원30) 등이

명하다. 이러한 발원에 의거하여 보살은 하화중생과 요익중생을 위

해 끝없이 노력한다. 보살의 길인 自利利他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이

암시하듯, 원래 自覺覺他의 의미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이 확장

된다. 보살은 미혹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 본래의 사명

다. 하지만 중생의 현실적 아픔과 괴로움도 위무하고 해결해 주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승만부인의 열 가지 서원 가운데 여섯째는 “제

자신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지 않고 가난하고 외로운 중생들을 구

제하기 위해서만 모으겠습니다”라는 내용이고, 여덟째는 “외로워 의

지할 데가 없거나 구금을 당했거나 병을 앓거나 여러 가지 고난을 만

난 중생들을 보게 되면, 그들을 도와 편안하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

나게 한 다음에야 떠나겠습니다”라는 내용이다. 또한 약사여래의 12

대원 중에는, 신체장애자를 돕겠다는 ‘諸根具足願’, 배고픈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겠다는 ‘飽食安樂願’, 춥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옷을

제공하겠다는 ‘美衣滿足願’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구체

적인 보살행은 역사 속 불교인들의 행적 속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

다. 예컨대『 高僧傳』권12의「 釋曇稱傳」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가 눈에 띈다.

27)『佛說大阿彌陀經』권1(『大正藏』12, 328c~330b).

28)『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권1(『大正藏』14, 405ab).

29)『大方廣佛華嚴經』권40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原品」(『大正藏』10, 844b).

 

30)『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권1(『大正藏』12, 217b~218a).


담칭은 河北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성품이 어질고 자애로워 곤

충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다. 晋나라 말엽에 彭城에 이르렀을 때,

80세의 노부부가 궁핍하고 초췌한 것을 보았다. 담칭은 곧 계율을

버리고 그 노부부의 노복이 되어 그들을 위해 여러 해를 일하였다.

하지만 안으로는 도덕을 닦는 데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이를 지켜

본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어느 해 두 노인이 죽자, 담칭은 품을

팔아 얻은 삯을 모두 두 노인의 복을 짓는 데 썼다. 그것으로 스스로

속죄하고자 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 다시 道門에 들어가고자 하였

다.31)

31)『 高僧傳』권12『( 大正藏』50, 404a).


同 문헌에 의하면, 담칭은 팽성의 한 마을에서 사람들이 호랑이에

게 잡혀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자진하여 희생양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고 탑을 세웠는데, 그 후로는 놀랍게

도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32)

32) 같은 책.


 

具足戒를 파해가면서까지 곤궁에 처한 노부부를 위해 일하고, 다

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호랑이의 먹이가 된 담칭의 행위는

보살행의 한 전형으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톨스토이의 작품『두 노인』속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앙심 깊은 두 노인, 예핌과 예리세이는 어느 날 성지순례의 길을

떠난다. 도중에 어느 마을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극

심한 기아와 질병과 추위로 고통받고 있었다. 예리세이는 차마 그

을 외면할 수 없어서, 예핌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고는, 자신은 자신

의 노자(路資)를 털어 마을 사람들을 돌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많

이 나아졌지만 예리세이는 이제 노자가 없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되

돌아갔다. 예핌은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마을에

들르게 되었는데, 건강해진 마을 사람들이 예리세이의 얘기를 하면

서 그를 성인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고, ‘나는 껍데기가 성지를 다녀

왔고 예리세이는 알맹이가 다녀왔다’고 탄식한다.


구족계를 포기하고 곤궁한 노부부를 위해 일한 담칭과 성지순례를

포기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운 예리세이는 확실히 닮은꼴이다.

예리세이의 행동 역시 불교적으로 보면 자비로운 보살행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보살의 거룩한 자비행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대승 특유의

시각과 사유방식, 그리고 결연한 의지와 誓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다. 예를 들어『梵網經』에서는 모든 중생들이 다 부모로 간주된다:

“모든 남자는 다 나의 아버지이고 모든 여자는 다 나의 어머니이니,

내가 태어날 적마다 그들을 의지하여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六道의 중생들이 다 나의 부모이니라.”『維摩經』에서는 이른바

‘同體大悲’의 사상이 발견된다: “내 병은 無明으로부터 애착이 일어

생겼고, 일체 중생이 앓으므로 나도 앓고 있습니다. 만약 중생의 병

이 없어지면 나의 병도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地藏經』에서

는 지장보살의 굳건한 서원과 만나게 된다: “제가 미래제가 다하도

록 헤아릴 수 없는 겁에 저 六道의 罪苦衆生을 위하여서 널리 방편을

베풀어 다 해탈하게 한 후에야, 제가 비로소 佛道를 이루오리다.” 다

시 말해서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까지도 모두 구제한 후에라야 스스

로 성불하겠노라고 서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眞俗不二 사상에 기초하여 修道생활과 일상

생활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法華經』은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직업과 산업이 곧 佛法이다”33)라고 설한

다. 다시 말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공무를 보는 것 등등의

모든 일이 佛道를 닦는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大乘的인

사유방식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維摩經』에서 더욱

철저하고 극적으로 나타난다. 유마거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대자본

가 또는 대재벌과 같은 대부호다. 유마의 집에는 네 개의 큰 창고[大

藏]가 있는데 거기에는 갖가지 보배가 가득 쌓여 있다고 한다.34) 따

라서 어떻게 보면 유마는 욕망과 가깝고 道와는 거리가 먼, 가장 세

속적인 인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유마는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들보다도 오히려 法力이 높다. 제자들이 모두 문병 가기

를 꺼려할 정도다. 이 역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그

 

것은 결국 불교는 현실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의 한복판에서 그

이상과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 내지 사회참여를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대자비가 자리

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33)『 法華經「』法師功德品」『( 大正藏』9, 50a), “資生業等皆順正法.”

 

34)『 維摩經「』觀衆生品」『( 大正藏』14, 548b).


더욱이 龍樹(Nāgārjuna)는 『寶行王正論(Ratnāvalī』을 지어 세속의

왕이 진정한 보살행을 통해 현실세계에서 이상국가를 실현해 나갈

政道를 밝히고 있어 이채롭다. 그는 여기에서 치안과 사법·정책, 공공

복지와 재해 구호 정책, 교육과 종교 정책 등에 관한 체계적이고 합리

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35) 대승불교의 대사상가이고 이론가인

용수가 이러한 세속적 ‘政治論’을 저술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眞俗

이 不二임을 웅변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이념은『華嚴經』의 다음 가르침에 농축되어 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주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리켜 주며,

어두운 밤에는 등불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재물을 얻게 합니다…(중략)

…모두 다 회향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처음 예배 공양함으로부터 중

생의 뜻에 수순하기까지, 그 모든 공덕을 온 법계 허공계에 있는 일체 중생

에게 돌려보내,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합니다.

나쁜 짓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길의 문은 닫아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어 보입니다. 중생

들이 쌓아온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

보를 내가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다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 없이

훌륭한 보리를 성취하도록 힘씁니다. 보살은 이같이 회향합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이 회향은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36)

36)『 華嚴經「』普賢行願品」『( 大正藏』10, 44b).


대승불교는 이렇게 불교 본연의 종교적 생명력을 회복하여 사회

대중과 소통하며, 그들을 고통과 미혹에서 구제하려는 적극적 실천

불교 내지 참여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2. 오늘의 위기와 사회참여

대승불교는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실천지향적이고 참여지향적이

다. 따라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경전 밖으

로 이끌어내어 현실 가운데서 숨 쉬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의

세계에서 영적으로 성숙한 불교인은 단지 거기에 멈추지 말고, 투철

한 사회의식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자각해야 한다.37) 오늘의 세계에

서 인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두 가지를 꼽는다면 첫째는 양극

화 또는 빈부격차의 문제요, 둘째는 생태환경 파괴 또는 기후변화의

 

문제일 것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지구촌

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세계 약 60억

인구 가운데 절반인 약 30억 명은 겨우 생존할 정도로 근근이 살아

가며, 그중 10억 정도는 잔인하고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며 수명도 짧

다고 밝힌다. 나머지 반인 30억 인구 중 20억 정도도 연간 5천 달러

이하의 수입으로 재산을 늘려가지도 못하고 저축도 못하며 살아간

다. 나머지 10억은 대충 살 만큼의 생활 임금을 벌면서 그런대로 살

아가는데, 그래도 그들은 소수가 누리는 수준의 안락한 삶을 꿈꿀 수

는 있다. 그러나 최상위에 있는 350명의 부와 수입은 놀랍기만 하다.

그들의 수입 총액은 세계 인구의 45%의 부를 합한 것보다 많기 때문

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3명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은 48여

개의 가난한 나라들의 총생산량보다 많을 정도라고 한다.38)

38) 위의 책, p. 166.


몇 년 전 유엔무역개발회의(운크타드)는 최저개발국에 대한 조사를

벌여 ‘빈곤의 덫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세계 49개 최저개발국 국민의 80% 이상이 하루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생활하며, 특히 아프리카 최저개발국에서는 국민의

65%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우려되는 사실은 이들 나라에서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연명

하는 사람의 숫자가 지난 30년 동안 1억 3800만 명에서 3억 700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2015년에는 4억2천만 명에 이를 것이

라는 예상도 나왔다.


 

또한 생태 환경의 위기도 심각하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는 특

정 지역이나 국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이며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생존과도 직결된 심각한 문제이다.

지난 2000년, 한 팀의 미국과학자들은 광활한 그린랜드(Greenland)

빙하가 녹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1년에 약 510억㎦

가 물로 녹고 있는데, 이는 나일강의 연간 流量에 육박하며, 관찰된

연간 해수면 상승의 7%에 해당된다.『 Science』지의 한 논문은 만약

그린랜드 빙하 전체가 녹는다면, 해수면이 7m정도 상승할 것이라고

보고한다. 또한 히말라야 빙하로부터 남극에 이르기까지 지구상 거

의 모든 곳에서 얼음이 녹아 없어지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매년 수십억 톤의 화석 연료 연소로 말미암은 지구온도 상승에 의한

것이다. 만약 화석연료의 연소가 21세기 내내 지금의 수준 또는 더

높은 수준으로 지속된다면, 실제로 모든 생태계는 해수면 상승, 극심

한 폭풍우, 극도의 가뭄으로 인해 큰 위험에 처할 것이다.39)

39) 레스터 브라운 外저·오수길 外역『, 지구환경보고서-2001』(서울: 도요새, 2001), p. 17.


또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로 수십억 년 간의 지구적 진화의 산물인

생명체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지구상의 생물종은 현재까지 약 175

만종이 발견되었고 밝혀지지 않은 것들까지 포함시키면 1300만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생물종은 정상적인 속도에 비해 50~100

배 정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며 현재 34,000여 식물종과 5,200여 동

물종 그리고 전 세계 조류의 1/8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더욱이

생물종의 보고인 지구 원시림의 45%와 산호초의 10%가 파괴되고

 

있다고 한다.40)

40) 김종욱,『 불교생태철학』(서울: 동국대출판부, 2004), pp. 12~13.


이 외에도 우리나라는 아직 분단의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으며 최근

에는 주로 동남아 지역의 여성들이 우리나라의 농촌 총각들과 결혼

하면서 다문화 가정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여기서는 깊이 있게 논

의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들 개개인

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적·국가적 차원의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

다는 점만은 지적해 두고 싶다. 국제적 연대도 필요함은 두말할 나

위가 없다. 우리 불교계에도 불교환경연대라든지 지구촌공생회,

로터스월드 등의 단체가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불교인들의 사회의

식은 아직 저조하고 조직화도 되어 있지 않다. 기복불교에 젖어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지난 2008년 8월 27일 시청앞 광장에서 열

린 범불교도대회는 불교인들에게 사회 참여를 위한 학습의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양극화 문제나 생태환경 문제 등에 대

한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대승의 참다운 보살은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同體大悲의

마음으로 그것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실펴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는 불교 본연의 종교적 생명력을

회복하여 사회대중과 소통하며, 그들을 고통과 미혹에서 구제하려는

적극적 실천불교 내지 참여불교의 성격을 지닌다. 대승불교는 무엇보

다도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지 않고 眞諦와 俗諦를 원융하게 보아,

현실세계를 인정하고 따뜻하게 포용한다. 또한 대승불교의 化現

(incarnation) 사상에 따르면, 여러 붓다와 보살들은 이미 깨달

았지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하여 이 세

상에 화현한다. 따라서 이 화현 사상을 통해 볼 때 불보살에게 있어

깨달음을 향한 개인적 수행은 곧 중생구제의 실현과 마찬가지다. 이

러한 眞俗不二와 化現思想은 대승불교의 사회참여 내지 사회적 실

천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 또한『 大般涅槃經』의 한 가르침에 따르

면, 사람들의 苦와 樂은 자신들이 지은 전생의 근본업 때문만이 아니

라 四大, 時節, 土地, 人民 등 네 가지(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가

르침은 일종의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우리는 공동의 행위와

노력을 통해 사회적· 자연적 고통과 재난을 극복해 가야 한다는 것

을 말해 준다.


이제 불교는 이러한 대승정신으로 절망과 고통에 내몰리고 소외

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고통과 갈등을 확대 재

생산하는 현대 정치·사회·경제의 여러 구조적 모순을 변화시켜가

기 위한 실천적 지혜를 탐색하고 공동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히도, 국내외의 불교계에는 인간의 삶과 사

회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리

하여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와 歐美의 여러 나라에서는 ‘참여불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고, 대만과 중국에서는 ‘人間佛敎’가 대세를 이루

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민중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다양

한 불교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대승의 정신은 이러

 

한 불교의 새로운 흐름에 끝없이 샘솟는 원천으로 기능할 것이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334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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