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청화 큰스님의 원통불법의 요체-④

수선님 2020. 5. 31. 13:26

청화 큰스님의 원통불법의 요체-④

◆ 오(悟)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깨달음도 그냥 한 깨달음으로 일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천(深淺)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2지(二地)에 깨닫는 분, 3지에 깨닫는 분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물론 원리 문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약간의 그 뉘앙스(nuance)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오(悟)문제, 깨닫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 解悟...四善根位에서 如實知解를 頓悟함(似悟).......................凡夫位
|
悟 | ┌見 道...見性..........................................................菩薩初歡喜地 ┐ 聖
└ 證悟 | 修 道...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地를 次第修證함........ |
└無學道...妙學.......................................................................... ┘ 位

頓悟漸修 ┌ 解悟後 證悟를 爲한 漸修
└ 證悟(見道) 後 成佛을 爲한 漸修


저는 근본불교(根本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다른 것으로 안 봅니다.
가사, 아함경(阿含經)도 그 당시 구사종(俱舍宗)이나 경량종(經量宗)이라 하는 종파로 굳어 버릴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아함경 자체에서는 설사 말씀을 다 안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대승적인 근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더러는 소승법(小乘法)의 범주에 속하는 구사론도 말씀하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오(悟)는 심천으로 보아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로 말합니다.

해오(解悟)는 4선근위(四善根位)에서 깨닫는 깨달음인데 4선근은 주로 근본불교에 나와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도 언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일반 선종(禪宗) 계통에서는 별로 언급을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선(禪)과 교(敎)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과 마음이 둘일 수가 없듯이, 선과 교도 둘이 아니라고 보는 견지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그때그때 수기응량(隨器應量)이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지 않겠습니까.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여실지해(如實知解)를 돈오(頓悟)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해(知解)는 반야 지혜(智慧)가 아니고 그냥 범부지견(凡夫知見)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범부의 지견으로 해서 돈오함이라, 돈오라는 말을 여기에서도 씁니다. 돈오의 말도 깊고 옅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오(似悟)입니다. 즉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상사각(相似覺)이라, 각에 닮은 각인 것이지 본래 본각(本覺)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범부위(凡夫位)입니다. 성자지위가 못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겠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 원래 변치않는 본체의 자리, 인연 따라서 변하는 수연자리 또는 성상(性相)이라, 성품자리 현상자리 또는 체용(體用)이라, 본체자리 활용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상대(相對)나 절대(絶對)나 그런 것에 관해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리사무애(理事無碍)도 알고 사사무애(事事無碍)도 알고 법의 해석은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오도 역시, 그냥 경(經)만 봐서는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 선근에 달려 있겠습니다만 같은 경을 본다 하더라도 참선을 한 사람이면 해오를 빨리 얻습니다.

경을 많이 봤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선정(禪定)에 들어 있지 못한 분들은 해오를 못합니다. 해오를 했을 때는 어느 경전을 보든지 문자만 좀 알면 '아 그렇구나'하고 짐작이 되어 교상(敎相)면에서는 걸림이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단계가 이른바 해오 입니다.
그리고 증오(證悟)는 체험적으로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해서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견도할 때, 선종(禪宗)식으로 말하면 갓 견성할 때에, 초견성이라고도 합니다.
초견성이란 말도 선가(禪家)에서도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가 견도의 자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견성과 견도가 절대로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견성은 조사 것이니까 더 높고 견도는 불경 말씀이니까 낮다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도했다고 구경지(究竟地)까지 다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수도(修道)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도는 바로 견성이고, 보살 십지(十地)로 말하면 보살 초환희지(初歡喜地)입니다. 보살 초환희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환희심도 여러 가지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오욕락(五欲樂)에 대해서 너무나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만, 출가사문은 이 환희심에 대해서 깊게 음미를 해야 합니다. 오욕락은 참다운 환희심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 중생을 바로 보면 일체개고(一切皆苦)라, 삼계개고(三界皆苦)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바로 고해 아닙니까, 바로 못 보는데서, 중생 경계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뚱이를 훑어보거나 환경을 보나 또는 사람을 사귀어 보나 그런 자리에서 정말로 환희로움, 불멸(不滅)한, 멸치 않는 기쁨을 못 느낍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배신도 있고, 그렇게 좋아해서 만난 분도 서로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몸 밖에나 안에나 좋은 것이 어디가 있습니까?
삼십육물(三十六物)이라, 침, 오줌, 똥, 눈꼽 등 더러운 것이 뭉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을 보더라도 욕계의 범주내에서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초환희지도 다른 말로 하면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범부 이생(異生)을 떠나서, 결국은 욕계를 떠남으로 해서 참답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초환희지까지 갈 때에도, 초환희지가 미처 못되어도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을 알아들음으로 해서 기쁨을 느끼고 또는 참선을 함으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경안(輕安)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닦으면 응당 필연적으로 경안이라, 꼭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계행도 바르고 자기 몸도 깨끗하고 여법(如法)한 법을 가지고 공부할 때는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열락(禪悅樂)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더 증장되어서 정작, 욕계 번뇌를 떠나고 자기의 본 성품을 깨달아 오직 일미평등한 진여의 자리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환희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도인들이나 환희지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사무쳐 가누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詞迦葉 Mahakasyapa)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초지에서 2지에 올라가고 3지, 4지, 5지, 6지, 7지, 8지, 9지, 10지를 거쳐서 결국은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우리 세존같이 환희지를 성취하시자 마자 그냥 불지로 마구 구경성취를 하신 분도 계신 것이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분도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비약적으로 뛰어넘는 것은 돈초(頓超)라고 하고 또는 2지 3지를 뛰어넘는 것은 간초(間超)라고 합니다. 보통 근기는 2지 3지 그와 같이 순서있게 올라 가겠지요. 그러나 게으름 부리면은 초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더 못 가고 말아 버립니다.
이런 데서, 자비심이 많은 도인과 지혜가 더 수승한 도인의 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지증(智增)보살이라, 지헤가 더 수승한 보살들은 '본래 중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공부, 선정을 닦는데만 주력을 다하고 또 자비심이 많은 분들은 선인후기(先人後己)라, 남을 먼저 앞세우고 자기가 뒤에 갑니다. '본래가 둘이 아닌 것인데 중생들이 법을 몰라서 고생하는 것이니까 꼭 중생들을 안락세계(安樂世界)로, 안양세계(安養世界)로 인도해야겠구나' 하고 초환희지만 성취해도 더 안 가버립니다. 이분들은 비증(悲增)보살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마땅히 금생에 꼭 환희지를 성취하여야겠지요. 그리고는 자기 자비심을 점검하여서 환희지에 머물러도 도인이고 2,3지에 올라가도 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견성하고 구경성취한 묘각(妙覺) 자리는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 무학도(無學道)라 합니다. 이렇게, 같은 깨달음도 해오와 증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제가 그 암증선(暗證禪), 암중모색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견성오도(見性悟道)라든가 견성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선정에 들어서 초환희지까지, 견성까지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굉장히 기쁜 것을 많이 느낍니다. 자기 몸도 그냥 텅 비어 버려서 자기 몸이 어디에 있는가 느낄 수도 없고, 몸이 공중에 들떠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안 느끼고, 더러는 훤히 밝은 광명이 빛나고,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계가 다 견성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해오만 되어도 '아 그렇구나, 모든 것은 본래가 둘이 아니구나' 하여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기분이 참 쾌적해서 비할 수 없는 느낌을 갖는 분들은 '내가 지금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깨달았다는 만심(慢心) 때문에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버리는 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증상만(增上慢)입니다.
이런 것을 점검할 때는 '과연 저 사람한테 욕심이 다 떠났는가, 저 사람한테 진심(瞋心)이 조금도 안 보이는가, 칼을 가지고 저 사람의 목을 애매하니 찌른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가 없을 것인가' 이렇게 점검해 볼 때는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됐다고 할 때는 대망어(大妄語)죄에 해당합니다. 승려 자격을 박탈 당하는 것입니다. 비증(非證)을 증(證)으로 하고 못 깨달음(未悟)를 깨달았다(悟) 할 때는 4바라이죄(四波羅夷罪)라, 바로 승려 자격을 빼앗기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나 남이나 암중모색하는 것을 깊이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漸修)가 분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보살 초지(初地)에서 견도하고,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을 위해서 또 점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해오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하고, 또한 증오한 뒤에도, 증오 자체가 세존같이 정각(正覺) 자리를 다 원만하게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마땅히 성불(成佛)을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한 다음에 점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에 한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증오한 다음에 닦는 법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점차, 고하 또는 계급, 차별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무념수(無念修),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합니다.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 오염하면 참다운 선(禪)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은 꼭 무염오수행을 해야 합니다.

今頓見者 已是多生漸熏而發現也 檀經云 法無頓漸 頓漸在機者 誠哉此理
-都序-

다음은 도서(都序)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문득 깨달은 자는 이미 다생겁래에 점차로 닦아옴이 있어서 금생에 발현(發現)하는 것이라,' 지금 돈오를 했다 하더라도 금방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차 닦아온 공덕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선근이 깊으면 영운(靈雲: 800년대  위<水+爲>山의 弟子) 대사같이 복숭아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는 동산(洞山 807-869)스님같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깨닫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다 과거에 닦아나온 과보인 것입니다.
'단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본래 돈과 점이 없으나 돈점은 그 근기에 있다는 이 이치가 진실로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시길 바랍니다.





◆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기독교 신학(神學)도 역시 중세기에는 이른바 번쇄철학(煩鎖哲學)이라, 번쇄하게 흘러갔습니다. 사실 깨달음이란 것은 이렇게 복잡할 것도 아닌 것이고, 문자나 또는 우리의 지혜 이른바, 분별시비하는 알음알이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한 체계를 세울려고 하면 아주 무미건조하고 난해하게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도 역시 수법행(隨法行)이라 하여 하나의 고정적인 법에 따라서 하는 방식도 있고 또는 수신행(隨信行)이라 하여 믿음 따라서 하는 수행 방법도 있습니다. 믿음 따라서 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참 간단명료합니다. 그러나 따지기 좋아하고 또는 이론적인 체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음 따라서 하는 것이 별로 신(信)이 안 갑니다.
우리 인간성 자체가 심리학(心理學)적으로 지(知) 정(情) 의(意) 3요소가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너무 지적(知的)으로 치우치면 정적(情的)인 면이 소외를 받는 것이고 또 정적인 면에 치우치면 지적인 면이 그만치 미흡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서 정혜균등(定慧均等)으로 공부를 해나가도록 합시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순선시대(純禪時代)에 역점을 두고서 자료도 추렸습니다. 순선시대에 의빙(依憑)하여 공부하는 것이, 현대적인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있어서, 보다 올바른 판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삼매의 이름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달마 스님으로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의 순선시대에 일관되게 말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달마 스님의 이입사행(二入四行)외에 다른 법문은 지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가사, 관심론(觀心論)같은 것도 그 전에는 달마 관심론이라고 배웠습니다만 근래에 돈황(敦煌 Tunhuang)문서가 발굴된 뒤부터는 신수(神秀) 대사의 저작이라는 고증(考證)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증 자체가 다시 또 번복될는지 모르니까 아주 확정적인 것은 아니겠지요. 하여튼 무슨 사건이든 몇 십년만 지나도 바꿔지기도 하는데 하물며, 벌써 천년 세월이 경과할 때는 여러 가지로 오류도 많이 생기고 와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스
님의 법문을 말할 때는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가 이입사행을 꼭 들고 있습니다.

또는 4조 도신(道信 580-651)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 있습니다. 아주 고구정녕(苦口<口+丁><口+寧>)하니, '어떻게 참선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도 세밀히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여기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고 또는 5조 홍인(弘忍 602-675)스님의 수심요론(修心要論)에도 마찬가지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조 스님도 돈오돈수만 말씀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는 그렇지 않습니다. 6조 스님 단경의 부촉품(付囑品)에, 부촉품은 어떤 경전이나 후인들한테 부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포괄된 대의를 싣는 것인데, 여기에도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있습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는 간단하게 말하면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똑같은 뜻입니다. 일상삼매는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定)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6조 스님의 단경 법문을 보겠습니다.

一相三昧와 一行三昧
師復曰 汝等 若欲成就種智 須達一相三昧一行三昧 若於一切處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不念利益成壤等事 安閑恬靜 虛融澹泊 此名一相三昧 若於一切處 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成淨土 此名一行三昧 若人具二三昧 如地有種 含藏長養 成熟其實 一相一行 亦復如是 我今說法 猶如時雨 普潤大地 汝等佛性 譬諸種子 遇玆첩洽 悉得發生 承吾旨者 決獲菩提 依吾行者 定證妙果 聽吾偈曰 心地含諸種 普雨悉皆萌 頓悟花情已 菩提果自性 -壇經 第十付囑流通
(사부왈 여등 약욕성취종지 수달일상삼매일행삼매 약어일체처이불주상 어피상중 불생증애 역무취사 불념리익성양등사 안한념정 허융담박 차명일상삼매 약어일체처 행주좌와 순일직심 부동도장 진성정토 차명일행삼매 약인구이삼매 여지유종 함장장양 성숙기실 일상일행 역부여시 아금설법 유여시우 보윤대지 여등불성 비제종자 우자첩흡 실득발생 승오지자 결획보제 의오행자 정증묘과 청오게왈 심지함제종 보우실개맹 돈오화정이 보제과자성 -단경 제십부촉유통)

육조단경의 제 10 부촉품인 부촉유통분에, 6조께서 다시 또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종지(種智)를 성취할려고 하면,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달(達)할지니라' 종지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말합니다. 부처님 지혜는 근본지 (根本智)와 후득지 (後得智)가 있는데, 근본지는 견성할 때에 일체존재의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후득지란 근본지를 성취한 뒤에 종종 차별의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종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체종지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모든 종종의 반야 지혜를 얻을려고 하면 마땅히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달(達)할지니라'고 6조 스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결론장에다가 부촉하신 뜻을 이 한 구절로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일체처에 처하더라도 상에 머물지 않고, 현상적인 여러 가지 상황, 상중(相中)에 있다 하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신심명(信心銘)에도 있는 법문 아닙니까마는 원체 법이란 평등하고 조금도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인데, 괜히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번뇌가 생기고 오염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취하고 버리지 말 것이며, 이익이 있다든가 이익이 없다든가 또는 성취가 된다든가 허물어진다든가 하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고 안온한 것과,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 조금도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주 깨끗하게 밝아지는 경계가 일상삼매라' 고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상(相)을 물론 내지 않아야 하겠지마는 현실적인 생활에서 상을 또 안 낼 수가 없겠지요. 설사 우리가 상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좋다 궂다든가 취사(取捨)라든가 또는 성취한다든가 실패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두지 말고서 항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제법이 공한 자리, 반야 지혜를 여의지 않고서 담박하고 안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일상삼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일상삼매는 한 말로 말씀드리면 천지 우주가 오직 조금도 차이 없는 하나의 진리 자리가 이른바 일상삼매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일상삼매가 못됩니다. 모든 존재를 진여불성 하나의 자리로, 만법을 귀일 (歸一)을 시켜버려야 이른바 일상삼매가 됩니다.
'또한 만약 일체처에, 다니나 머무르나 또는 앉으나 누우나 간에 순일직심(純一直心)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면 진실로 정토(淨土)를 이루니라,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말한다.'
순일직심은 일상삼매를 확신하는 순수한 하나의 곧은 마음이요, 도량이라 할 때는 근본적인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순일한 직심이 근본적인 체를, 도량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로 정토를 이루니 이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를 닦아서 .행주좌와에서 본체를 안 여읠 때는 현실 그대로 정토를 성취한다는 말이요 이것이 바로 일행삼매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갖추는 것은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리면 대지가 종자를 머금어서 오랫동안 잘 기르고 익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일상삼매나 일행삼매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불종자(佛種子)를 마음밭에다 심어 놓고 오랫동안 가꾸고 거두어서 상도 안 내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일상삼매의 자리를 안 여읜다면, 종자가 땅에 떨어져서 잘 관리하면 열매를 맺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우리 마음 자리에다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두고서 오랫동안 닦아나갈 때는 일체종지를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설법하는 것은 마치 때에 알맞게 비가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의 불성도 비유하면 종자가 비를 만나 충분히 습기나 윤택을 받고 모두 다 싹이 나오듯이 내가 말한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뜻을 받드는 자는 결정코 진여보리(眞如菩提)를 성취하고, 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자는 진실로 부처님의 묘한 과보를 성취한다 ' 그리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 심지함제종(心地含諸種)하니, 마음밭에 모든 종자를 머금어서, 보우실개맹(普雨悉皆萌)이라. 두루 비에 적셔 빠짐없이 싹을 낸다. 돈오화정이(頓悟花情已)하니,문득 이런 뜻을 깨달아서 들뜬 범부의 망정이 이미 다하면, 보리과자성(菩提果自成)이라, 보리 열매가 저절로 성취가 된다'하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문헌적으로 돈오점수와 관계된 것에 관해서 인용을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것이 정곡을 찌른 합당한 결어(結語)가 못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 재량하시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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