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

나라고 할만한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 불교와 오늘날의 세계

수선님 2020. 8. 23. 11:51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1


불교는 우리 각박한 세상의 선남선녀가 실천할 수 없는 아주 지고하고 숭고한 체계라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 싶다면 절간이나 좀 한적한 곳에 은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슬픈 오해이며, 분명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데 기인한 것이다. 사람들은 소문을 듣거나 어쩌다가 읽어본 것을 가지고 그런 경솔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불교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이해치 못하여서 단지 부분적이고 편향된 시각만을 제공하는 사람이 쓴 것을 읽어 본데 따른 결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절간의 승려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거룩한 여덟 길"은 불제자가 사는 방법이며,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거나, 동굴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불교가 거룩하고 순수하다 하여도 요즘 세상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따를 수 없는 것이라면 인간 대중들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불교의 정신을 정확히 이해한다면(문자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 일반인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따르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회에서 단절되어 외딴 곳에서 산다면 불교를 받아들이기가 더 수월하고 편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식의 은둔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을 무디고 침체하게 만들어서 정신적, 지적 생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참된 출가란 육체적으로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따는 어떤 사람이 금욕적인 수행에 헌신하면서 숲 속에 살더라도 불순한 생각과 '더러움'이 가득할 수도 있으며, 다른 어떤 사람은 금욕적인 수행을 하지 않으면서 고을이나 도회지에 살더라도 순수하고 '더러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리뿟따는 이들 둘 중에 고을이나 도회지에서 순수하게 사는 사람이 숲 속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 위대하다고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생활을 떠나야 한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그것은 실천하지 않는 데 대해 생각없이 변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불교 문헌에는 평범한 보통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열반을 깨달은 남녀들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한번은 "방랑수행자" 밧차곳따(우리는 이미 "나없음"의 가름에서 그를 만났었다)가 부처에게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남녀 평신도(優婆塞와 優婆夷)가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처는 한 둘이 아니고 일이백이나 오백도 아닌  훨씬 많은 수의 평신도들이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자기 가르침을 성공적으로 따르고,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분명히 말한다.

 

어떤 이는 소음과 혼잡에서 멀리 떠나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기분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불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더 칭찬할 만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훈련을 미리 하여 충분히 성숙된 다음에는 남을 도울 양으로, 자기 마음과 성품을 향상시키려 한동안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는 유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행복과 '구원'만을 생각하며  고독하게 온 생애를 산다면 이는 분명히,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연민하며 봉사하는데 근거를 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물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보통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불교를 따를 수 있는데 왜 부처가 설립한 "승려들의 동아리"인 승가가 있는가? 승가는 자신의 정신적, 지적 발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생애를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이 있는 보통 평신도가 승려같이 자기 전 생애를 남에게 봉사하는데 바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부양 의무가 있는 가족이나 다른 어떤 속세의 구속이 없는 승려는 부처가 지도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전 생애를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해,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바쳐야될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불교사원이 정신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각주1]

 

[각주1] <역주> 이 말은 승려인 지은이가 단지 의도적으로 승가를 좋게 말하려고 함이 아님을 분명히 해 두어야 겠다. 지은이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스리랑카를 비롯한 몇몇 불교 국가에서는 승려가 사회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출가는 봉사하기 위하여'라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다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2


《시갈라-경Sigala-sutta》({善生經} 長阿含16, 中阿含135)은 부처가 평신도의 삶과 가족과 사회적 관계를 얼마나 대단히 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시갈라Sigala라는 젊은이가 선친의 유언에 복종하여, 하늘의 여섯 주요 지점에, 즉 동서남북상하에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부처는 젊은이에게 자기 가르침의 "거룩한 계율"(ariyassa vinaye;聖律)에서의 여섯 방향은 다르다고 말했다. 부처의 "거룩한 계율"에 의한 여섯 방향은 동쪽이 부모요, 남쪽이 스승이며, 서쪽이 아내와 아이들, 북쪽이 친구와 친척 그리고 이웃이며, 아래쪽이 하인과 일꾼 그리고 피고용인이고, 위쪽이 성직자이다.

 

'이런 여섯 방향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부처가 말했다. 여기서 '예배'(namasseyya)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신성한 것과 명예스럽고 존경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에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위에 언급한 이 여섯의 가족과 사회집단을 신성하여, 존경하고 예배드릴 만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부처는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해서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의무들이 시갈라에게 해 준 설법에서 설명된다.

 

첫째,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신성하다. '부모님은 브라흐마라 불리운다'(Brahmatimatapitaro)라고 부처는 말한다. 브라흐마(梵)란 용어는 인도사상에서 최상이며 가장 신성한 개념으로 정의되는데, 부처는 여기에 부모를 포함시켰다. 그래서 요즘도 훌륭한 불교 집안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매일 조석으로, 말 그대로 '예배'를 드린다. 자녀들은 "거룩한 계율"에 따라 부모에 대해 정해진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늙으면 봉양해야 한다.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집안의 전통을 계승하여야 한다. 부모님이 벌어놓은 재산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사지내야 한다. 반면에 부모에게는 자식들에 대해 정해진 의무가 있다. 자식들이 나쁜 길에 들지 않도록 한다. 유익하고 옳은 활동에 참가시켜야 한다. 훌륭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좋은 집안과 혼인을 시켜야 한다. 온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

 

둘째, 스승과 제자의 관계. 제자는 마땅히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께 복종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시중을 들어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 스승은 제자를 올바르게 훈련시키고 향상시켜야 한다. 제자를 잘 가르쳐야 한다. 제자를 자기 친구에게 소개시켜야 한다. 교육이 끝났을 때 생계대책이나 직업을 마련해주기에 힘써야 한다.

 

셋째, 부부 관계. 부부간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라고, 또 신성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거룩한 가정생활'(sadara-Brahmacariya)이라 부른다.[각주2] 여기서도 '브라흐마'라는 용어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에 대해 최고의  경의가 주어지고 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서로에게 헌신하여야 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정해진 의무가 있다. 남편은 항상 아내를 존경하여서 결코 얕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아내를 사랑해야하고 아내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아내에게 지위와 안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옷과 보석을 선물해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부처는 남편이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야 하는 선물 같은 것까지 잊지 않고 말했다. 이 사실은 보통 사람의 감정을 향한 자비로운 정이 얼마나 이해심 있고 동정적이었나를 보여준다.) 반면에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아야 한다. 손님과 방문객, 친척, 친구, 그리고 고용인들을 대접해야 한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신의를 지켜야 한다.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한다. 모든 활동에서 슬기롭고 생기가 있어야 한다.

 

[각주2] <역주>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梵行)는 원래 인도에서 전통적인 출가수행자의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렇게 부부의 삶에 대해서도 성직자와 다름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네 번째, 친구, 친척, 이웃들 간의 관계. 서로 인심이 후해야하고 자비로워야 한다. 유쾌하고 기분 좋게 말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의 복지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에게 평등한 말씨를 써야 한다.〔즉, 하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그들간에 싸움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것에 대해서 서로 도와야 한다. 다른 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 주인 또는 사용자에게는 하인이나 고용인에 대한 몇 가지 의무가 있다.  노동은 소질과 능력에 따라 할당되어야 한다. 충분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 의료보장이 되어야 한다. 특별 수당과 상여금을 인정하여야 한다. 한편 하인이나 고용인은 응당 근면해야되고 게을러서는 안 된다. 정직하고 유순하며 주인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일을 최대한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여섯째, 성직자(원문에는 사문과 바라문)와 평신도 간의 관계. 평신도는 성직자들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애정과 존경으로 돌보아야 한다. 성직자들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평신도에게 지식과 배워야할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해악을  멀리하도록 좋은 길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과 사회적 유대를 가지고 평신도로 사는 것이 "거룩한 계율"에 속해있음을 본다. 그리고 평신도의 삶도 부처가 구상한 불제자의 생활방식의 골격을 이루는 것을 본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빨리원전의 하나인《상윳따-니까야》에서는 신神(deva)들의 왕인 제석천帝釋天(Sakka)이 덕망 있게 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칭송할  만한 행위를 다하고 덕망이  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는 평신도 제자들께도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3


불제자가 되려고 할 때 반드시 거쳐야 될 입문의식(또는 세례)은 없다. (그러나 승가의 일원인 비구比丘가 되려면 장구한 과정의 계율 훈련과 교육을 거쳐야 한다.) 어떤 이가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 가르침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을 품게 되어 따르려  애쓴다면 그이는 불제자이다. 그렇지만 불교국가에 이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에 의한다면 일반적으로 "세 보물"(三寶)이라 부르는 부처와 가르침(法)과 동아리(僧)를 자기의 피난처로 삼아야 불제자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속가제자가 지켜야될 최소한의 윤리적 의무인 "다섯 계율"(Panca-sila;五戒)을 지킬 것을 약속한다.

 

다섯 계율은 ⑴생명을 파괴하지 말 것(不殺生), ⑵훔치지 말 것(不偸盜), ⑶간통을 범하지 말 것(不邪淫), ⑷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 ⑸취하는 음료를 마시지 말 것(不飮), 등인데, 옛 경전에서 주어진 문구대로 낭송한다. 불교의 종교적 절기의 법회에서 승려의 선창에 따라 이 구절들을 낭송한다.

 

불제자가 거행하지 않으면 않되는  외형적인 예식이나 의식은 없다. 불교는 살아가는 방법이어서 필수적인 것은  다만 "거룩한 여덟 길"에 따르는 것뿐이다. 물론 모든 불교국가에는 종교의 절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의식이 있다. 절에는 불상과 탑(stupa)이나 부도(dagabas) 그리고 보리수를 모시는 제단이 있다. 거기에 불제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꽃을 공양하며 등불을 켜고 향을 사른다.[각주3] 이것은 유신론唯神論적 종교에서 하는 기도 행위와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길을 알려준 스승을 기념하여 경의를 표하는 방법일 따름이다. 이런 전통적 행사는 필수적이진 않지만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감흥과 요구를 만족시켜주고 그 사람들이 점차 길에 들어서도록 도와주는 데에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각주3] <역주> 상좌불교 지역에서는 이러한 것만을 공양한다. 우리네 절 집안에서는 돈, 쌀, 과자, 과일 같은 것들을 바치고 있는데,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런지 .....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4


불교가 오로지 고상한 이상과 지고한 도덕적, 철학적 사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민중들의 사회적, 경제적 복지는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 안 것이다. 부처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이 있었다. 도덕적이고 정신적 원리에 기초한 순수한 삶을 살아나가지 않고서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에 무관심하고서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가 어려움을 부처는 알고 있었다.

 

불교는 물질적인 부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 즉 더 높고, 더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수단, 즉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지고한 목표를 성취키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래서 불교는 정신적 성공에 도움이 되는 어떤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요구를 인정한다. 심지어 어떤 외딴곳에서 명상에 전념하는 승려까지도 그러하다.[각주4]

 

[각주4] 승가의 일원인  불교 승려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바랄 수 없지만 공유재산(Sanghika;僧家物)을 소유하는 것은 허용된다.


부처는 삶을 사회적, 경제적 배경의 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부처는 삶을 전체적으로, 즉 모든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과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조금 밖에 알려져있지 않다. 특히 서양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룬 수 많은 설법이 고대 불경들에 흩어져있다. 그 예를 조금만 들어보기로 하자.

 

《디가-니까야》의 《짝까밧띠시하나다-경Cakkavattisihanada-sutta》({轉輪聖王修行經}長阿含6)은 가난(daliddiya;貧窮)이 도둑질, 거짓말, 폭력, 증오, 잔학, 등등의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옛날 왕들은 오늘날의 정부들과 같이 범죄를 형벌로 진압하려고 애썼다. 같은 니까야의 《꾸타단따-경Kutadanta-sutta》({究羅檀頭經}長阿含23)은 이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설명한다. 이 방법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부처는 범죄를 뿌리뽑기 위해선 민중의 경제적 형편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농업을 위해선 농부와 경작자에게 종자와 다른 시설들이 제공되어야 한다. 무역업자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자본이 제공되어야 한다. 노동자에겐 충분한 임금이 지급되어야 한다. 이렇게 민중에게 충분한 수입을 벌어들이기 위한 기회가 제공된다면 만족하게 될 것이며, 불안감이나 고민을 갖지 않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국가는 평화로워져서 범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는 경제적 형편을 개선시켜주는 것이 평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했다. 이것이  욕망과 집착으로 재산을 긁어모으는 것을 용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부처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반대된다. 뿐만 아니라, 생계를  벌어들이는 것은 무엇이라도 허용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무기의 생산과 판매같이 부처가 사악한 생계수단이라고 비난한 돈벌이도 있다.

 

한번은 디가자누Dighajanu라는 사람이 부처를 찾아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희는 처자식과 더불어 가정생활을 꾸려 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저희들의 행복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교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는 그에게 세속적 삶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간에 기술이 좋아야하고, 유능해야하며, 열심히 일해야하고, 활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utthana-sampada;努力具足). 둘째, 이마에 땀을 흘리고 정당하게 번 수입을 지켜야 한다(arakkha-sampada;守護具足).(이는 재산을 도둑등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개념들은 시대적 배경과 대조하여 고려되어야 한다.)[각주5] 셋째, 믿음직하고, 학식이 있으며, 덕망이 있고, 도량이 넓으며, 지적인 친구, 해악에서 떠난 바른길에 들도록 도와줄 친구, 그런 훌륭한 친구가 있어야 한다(kalyana-mitta;善友). 넷째, 수입을 알맞게 나누어서 너무 많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적지도 않게끔 써야 한다. 즉, 게걸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아도 않되지만 사치스럽게 살아도 안 된다. 다시 말해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samajivikata;等命).

 

[각주5] <역주> 당시는 격동기였고 제정일치의 신분 질서가 붕괴되는 혼란기였다. 특히,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뿌라나 까사빠Purana Kassapa는 '어떤 일을 하던지 또는 시키던지, ..... 생명을 해치더라도,  도둑질을 하더라도, 타인의 집에 침입하더라도, ..... 강도질을 하더라도, ..... 타인의  처와 통하더라도,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런 짓을 해도 악을 행한 것이 되지 않는다. 설령, 날이 선 무기를 갖고서 이 세상의 생물을 모두 하나의 고기더미나 고기덩이로 만들어도 이것으로 인하여 악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또한 악의 과보果報가 오는 것도 아니다.'[D. II, pp.17~18,  中村元, 《佛敎의 本質》, 19~20 쪽에서 인용]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내세來世에서 평신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네 가지 미덕을 설한다. ⑴"믿음"(Saddha;信):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가치들에 대해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 한다. ⑵"계율"(Sila;戒): 생명을 파괴하고 해를 입히는 것을 금해야  한다. 훔치고 사기치는 것, 간통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그리고 취하는 음료를 금해야 한다. ⑶"베품"(Caga;捨): 자기 재산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버리고 자비와 너그러움을 길러야 한다. ⑷"지혜"(Panna;慧): 괴로움을 완전히 파괴하고 열반을 실현토록 이끌어주는 지혜를 개발하여야 한다.

 

어떤 때는 부처가 돈을 저축하고 쓰는데 대해 세부적으로 가르친 일까지 있었다. 예를 들면 시갈라라는 젊은이에게 말할 때 수입의 사분의 일은 일상의 지출로, 반은 사업에 투자하고, 사분의 일은 어떤 위기에 대비하여 남겨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번은 부처가, 대 부호이며 가장 헌신적인 평신도 제자의 한 사람이며, 유명한 사밧티(舍衛城)의  기원정사를 설립해준 아나타삔디까에게 평범하게 가정생활을 하는 재가자에겐 네 가지 행복이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행복은 경제적 안정, 또는 충분한 재산을 정당하고 올바른 수단으로 벌어서 향유하는 것이다(atthi-sukha). 두 번째 행복은 재산을 너그럽게 자신과 가족과 친구와 친척 그리고 바른 일에 쓰는 일이다(bhoga-sukha). 세 번째 행복은 빚이 없는 것(anana-sukha), 네 번째 행복은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간에 해악을 저지르지 않고 오점없이 순수한 삶을 사는 것이다(anavajja-sukha). 여기서 이들 중에 세 가지가 경제에 대한 것임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부처는 경제적, 물질적, 행복은 더러움이 없고 훌륭한 생활에서 나오는 정신적 행복의 '16분의 1의 값어치도 없다'라고 그 부호에게 상기시킨 것에 주목해야 한다.

 

위에 주어진 몇 가지 예에서 부처는 경제적 부를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오로지 물질적이기만 해서 정신적, 도덕적 근본이 결여된 것이라면 진정하고 진실된 발전이라 인정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물질적 발전을 고취시키면서도 사회가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만족되기 위한 윤리적 정신적 성격의 발전을 언제나 대단히 강조해 왔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5


부처는 정치에 대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아주 정확하였다.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만 불교가 비폭력과 평화를 보편적 메시지로 옹호하고 전파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폭력도, 어떤 종류의 생명의 파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이다. 불교에 의하면 '정당한 전쟁'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그것은 증오, 잔학성,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변명하려 돈 찍듯 찍어내어 두루 유통시킨 거짓된 용어일 뿐이다. 누가 정당하고 부당한 것을 결정한단 말인가? 힘세고 승리한 쪽이 '정당'하고 약하고 패한 쪽이 '부당'할 따름이다. 우리의 전쟁은 항상 '정당'하고 너희의 전쟁은 언제나 '부당'하다. 불교는 이런 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는 비폭력과 평화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장에 가서 개인적으로 중재하여 전쟁을 막기도 하였다. 로히니Rohini강의 용수用水 문제로 공격태세를 취했던, 사꺄(釋迦)족과 꼴리야Koliya족 간의 분쟁의 경우에 그러하였다. 그리고 한번은 아자따삿뚜Ajatasattu(阿 世)왕이 밧지Vajjis족의 왕국을 침공하는 것을 말로써 막았었다.

 

부처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부당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민중들은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고문 받고, 학대당하였다.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잔인한 형벌로 괴롭혔다. 부처는 이 비인간적인 것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부처가 훌륭한 정부라는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음을 《법구경》의 주석서(Dhammapadatthakatha)에 기록하고 있다.


그의 견해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과 대비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부처는 정부의 우두머리, 즉 왕과 각료들 그리고 관리들이 부패하고 공정치 않으면 온 나라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고, 불행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한 나라가 행복하려면 올바른 정부를 가져야 한다. 이런 형태의 올바른 정부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는 부처가《자따까Jataka》(本生經)의  "왕의 열  가지 의무"(dasa-raja-dhamma;十王法)라는 가르침에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옛날의 '왕王'(Raja)이란 용어는 오늘날 '정부'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왕의 열 가지 의무"는 오늘날에 국가의 우두머리, 즉 각료들과 정치 지도자들, 입법부와 행정부의 공무원 등등같이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왕의 열 가지 의무"의 첫째는 후하게 아량을 베푸는 자선(dana;布施)이다. 통치자는 부와 재산에 열망을 품거나 집착하여서는 않되며, 민중의 복지를 위해 분배하여야 한다.

 

둘째: 지고한 도덕적 성품(sila;持戒). 왕은 생명을 파괴한다던가, 속이거나, 훔치거나, 남을 착취하거나, 간통을 범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취하는 음료를 마신다던가 하는 짓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왕이 최소한 평신도의 "다섯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하는 것이다(pariccaga;永捨). 왕은 백성이 좋아하는 것에 모든 개인적 안락과 명예와 명성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넷째: 정직과 성실(ajjava;正直).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나 편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의도가 솔직해야하며 대중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친절과 온화함(maddava;柔和). 왕은 다정다감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

 

여섯째: 생활습관에 있어서  엄격하기(tapa;苦行). 소박한 생활을 하여야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탐닉하지 말아야 한다. 왕은 자기 억제를 해야 한다.

 

일곱째: 증오, 악의, 적의로부터 벗어나기(akkodha;無忿). 왕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여덟째: 비폭력(avihimsa;不害). 이것은  왕이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 그리고 폭력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피하고 막아서 평화를 증진하기에 노력해야함을 의미한다.

 

아홉째: 인내, 견딤, 포용력, 이해심(khanti;忍慾). 왕은 역경과 어려움 그리고 모욕을, 성품을 상하지 말고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열째:〔백성의 뜻에〕반하지 않는 것, 가로막지 않는 것(avirodha;不相違). 그것은 말하자면 백성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되며, 백성의 복지에 도움이 되는 어떤 행위라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왕은 백성과 화합하여서 다스려야 한다.

 

어떤 나라가 그런 성품을 타고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진다면 그 나라가 행복해질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유토피아만은 아니었다. 과거에 이런 생각을 토대로 왕국을 세운 인도의 아쇼카Asoka같은 왕들이 있었다.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6


세계는 오늘날 지속적인 공포와 의혹 그리고  긴장 속에 살고 있다. 과학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을 지닌 무기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 새로운 죽음의 도구를 휘둘러대면서 엄청난 힘으로 다른 여러 나라에게 협박을 가하고 도전하고 있다. 세상의 다른 나라보다 더 큰 파괴와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떠벌리고 있다.

 

세계는 인간성을 깡그리 파괴시킨 가운데, 서로 박살내기에 불과한 이 미친 길을 가고 있다. 이제 그 방향으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인류 전체를 멸망시키는 지점에 서있다.

 

인류는 자기네가 지어낸 처지에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찾으려고 몇 가지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부처가 전해준 것,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즉, 비폭력과 평화,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과 이해, 진실과 지혜,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경, 이기심과 증오와 폭력에서 벗어나라는 그의 메시지이다.

 

부처는 말했다. '증오에 의해서는 증오가 가라앉지 않는다. 그것은 친절하여서 가라앉는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  '친절하여서 노여움을 이겨야 한다. 착하여서 못됨을, 자비로써 이기심을, 그리고 진실 되어서 거짓을 이겨야 한다.'

 

이웃을 정복하고 짓밟으려 갈망하는 한,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부처가 말했듯이, '승리자는 미움을 길러내고, 패배자는 비참속에 빠진다. 승리와 패배, 모두를 포기하는 이는 행복하고 평화롭다.'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유일한 정복은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백만 명을 정복한 이 보다도, 오직 한 사람 자기를 정복한 이가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다.'

 

당신은 이들이 모두 아름답고 고상하고 숭고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증오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서로 죽이는 것이 현실적인가? 정글 속에 야수같이 그치지 않는 두려움과 의심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편안한 것인가? 증오가 증오에 의해서 진정되는 일이 있었던가? 해악으로 해악을 이긴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개인적인 경우일지라도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진정되고, 착하여서 못됨을 이긴 예가 있다. 당신은 이것이 개인적인 경우에는 사실이고 현실인지 몰라도 국가적인 일, 국제적인 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대중들은 최면술에 결려있다. '국가적'이니 '국제화'니 '국가'니하는 정치적, 선전적 용어에  심리적으로 혼란되고, 눈멀었으며, 속고 있다. 한 나라가 개인들의 거대한 모임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나라나 국가가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개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 나라나 국가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나라나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증오가 사랑과 친절로 누그러질 수 있다면 한 나라나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분명히 실현될 수 있다. 한 개인의 경우에서도 증오를 친절로 대하려면 도덕적 힘에 있어서 엄청난 용기와 대담성 그리고 믿음과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국제적인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욱 그러해야되지 않겠는가? 당신이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옳다.  분명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노력해야만 한다. 당신은 그것이 위험한 시도라고 말할지 모르나 분명히 그것이 핵전쟁을 시도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그런 위대한 통치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 되며, 오늘날에 생각할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안팎으로 다스리는 데에 이 비폭력과 평화와 사랑의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용기와 신념과 선견을 가졌었다. 그가 바로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라 불려지는 인도의 위대한 불교황제 아쇼카(기원전 3세기)이다.

 

처음에는 자기 할아버지(챤드라굽따Chandragupta)와 아버지(빈두사라Bindusara)를 본받아 인도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깔링가Kalinga에 쳐들어가서 정복하고 깔링가를 복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불제자
가 되었을 때, 부처의 가르침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바위에 새겨둔 그의 유명한 칙령중의 하나(현재 '비문칙령 13장'(Rock Edict XIII)이라고 부른다)를 오늘날에도 읽어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황제는 깔링가의 정복을 언급하며 자기의 '뉘우침'을  공표하고, 그 학살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럽기 그지없는지'를 말하였다. 그는 다시는 절대로 어떤 정복을 위해서도 칼을 뽑지 않겠으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폭력을 버리고, 자기를 제어하며, 청정함을 닦고, 온화하기를' 바랐다. 이는 물론 "신들의 은총이 나린 이"(즉, 아쇼카)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정복이라고 여겨진다. 즉, 경건을 통해 정복한 것(dhamma-vijaya;法勝)이다. 그는 전쟁을 자기 스스로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손들이 새로운 정복을 성취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건을 통해 정복하는 그런 정복만을 생각해야될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유익한 것이다'라고 자기 희망을 표현하였다.

 

이는 인류역사상 권력의 최 전성기에 있는 승리한 정복자가 여전히 영토의 정복을 계속할 수 있는힘을 보유하였으면서도 전쟁과 폭력을 포기하고 평화와 비폭력으로 돌아선 유일한 예이다.

 

여기에 오늘날의 세계를 위한 교훈이 있다. 한 제국의 통치자가 전쟁과 폭력을 공식적으로  등지고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어떤 이웃의 왕이 아쇼카의 경건함을 군사 공격을 하는데 유리점으로 삼았다던가, 그의 일생 동안 제국 안에서 어떤 반란이나 모반 사건이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그 어느 것도 없다. 오히려 온 나라가 평화로웠고, 제국 밖의 다른 나라들도 그의 온화한 지도력을 받아들인 것 같다.
 
힘의 균형이나 핵 억제력의 협박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기의 힘은 공포를 낳을 수 있을 뿐이고 평화를 낳지 못한다. 공포를 통해서는 진정한 평화, 계속되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공포를 통해서는 오직 증오와 악의와 적개심만이 올 수 밖에 없다. 그 당시만은 억누를 수 있지만 폭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사나와지게 된다. 진실되고  진정한 평화는 자비롭고(metta;慈), 우호적이며, 공포와 위험에서 벗어난 분위기에서만이 득세할 뿐이다.

 

불교는 파괴적인 권력 투쟁이 포기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정복과 패배를 떠나 고요함과 평화가 득세하는 사회, 죄 없는 사람이 박해받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는 사회, 군사전쟁이나 경제전쟁으로 백만 인을 정복한 사람보다 자기자신을 정복한  이를 더 존경하는 사회, 친절하여서 증오가 정복되며, 유익한 것으로 해로운 것을 정복하는 사회, 적의, 시기심, 악의, 그리고 탐욕이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 사회, 자비가 행위의 추진력인 사회, 미물까지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공정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사랑으로 다루어지는 사회, 물질적으로 만족을 누리는 가운데 평화롭고 조화를 이룬 삶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하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목표인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회가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나라고 할만한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 불교와 오늘날의 세계

여덟째 가름 : 부처님이 가르친 것과 오늘날의 세계 -- 1 불교는 우리 각박한 세상의 선남선녀가 실천할 수 없는 아주 지고하고 숭고한 체계라서, 진정한 불제자가 되고 싶다면 절간이나 좀 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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