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9~12권
고승전(高僧傳) 제9권
3. 신이(神異) ①
1) 축불도징(竺佛圖澄)
축불도징은 서역(西域) 사람이며, 본래 성은 백(帛)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맑고 진실하게 배움에 힘썼다. 그리하여 경전 수백 만 글자를 외우고, 의미 또한 잘 이해하였다. 비록 이 땅의 유교와 역사책을 아직 읽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여러 학사들과 의심나고 막히는 곳을 따르고 논할 때면, 마치 증거 조각이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스스로 말하였다.
“두 번 계빈국(罽賓國)에 가서 이름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니, 서역에서는 모두 득도하였다고 말하였다.”
진(晋)의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 중국에 와서 낙양(洛陽)으로 갔다. 불법을 널리 펴는 데 뜻을 두었다. 또한 신비한 주문[神呪]도 잘 외워서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삼씨로 짠 기름[麻油]을 연지(胭脂)에 섞어 손바닥에 바르면,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손바닥에 있는 그대로 환히 드러났다.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한 것 같았다. 깨끗하게 목욕재계한 사람도 역시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말하면, 효험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낙양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유요(劉曜)의 군대가 낙양을 쳐들어왔다. 그러므로 제왕의 서울이 어지러워져서, 절을 세우려는 불도징의 뜻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가의 초야에 숨어서, 세상의 변화를 관망하였다.
당시 석륵(石勒)1)이 갈파(葛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로지 살육으로 위엄을 삼았다. 사문으로서 그에게 살해된 자도 매우 많았다. 불도징은 창생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도로써 석륵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이에 지팡이를 짚고 군문에 도달하였다.
석륵의 휘하에 있던 대장군 곽흑략(郭黑略)은 평소에 불법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불도징은 곧 곽흑략의 집에 몸을 숨겨 그곳에 머물렀다. 곽흑략이 불도징에게서 5계를 받고 제자의 예로 숭배하였다. 그 후 곽흑략은 석륵을 따라 정벌에 나섰다. 그때마다 미리 승부를 알았다. 석륵이 의아하여 물었다.
“경에게 출중한 지모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런데도 매양 행군할 때의 길흉을 아는 것은 어째서인가?”
“장군은 하늘이 내리신 우뚝 뛰어난 무예를 지닌 분으로 보이지 않는 신령이 돕니다. 도술과 지혜가 비상한 한 승려가 계십니다. 그분이 ‘장군이 중국 땅을 차지하고 싶다면 나를 스승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후해서 아뢴 말씀은 모두 그의 말입니다.”
석륵은 기뻐하였다.
“하늘이 내려주었도다.”
불도징을 불러 물었다.
“불도에는 어떤 영험(靈驗)이 있는가?”
불도징은 석륵이 깊은 이치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바로 도술로써 징험해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비록 멀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가까운 일로도 역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곧 적당한 그릇을 가져와, 물을 담고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푸른 연꽃이 피어나, 빛나는 색이 눈부시게 하였다. 석륵은 이로 말미암아 불법을 믿고 감복하였다.
불도징이 석륵에게 간언하였다.
“무릇 왕자란 덕에 의한 교화가 지경 안을 촉촉이 적셔주면, 네 가지 신령한 영물이 상서로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정치가 피폐하고 도가 사라지면, 불길한 혜성(彗星)과 발성(孛星)이 하늘에 나타납니다. 변치 않는 물상이 뚜렷이 나타나는 대로 길흉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예나 이제나 항상 하는 증거로서, 하늘이 사람에게 내리는 밝은 훈계입니다.”
석륵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마땅히 주살 당할 남은 사람 가운데, 그의 도움을 입은 사람이 열에 아홉은 되었다. 이로써 중국의 오랑캐와 중국 사람들 거의가 모두 부처님을 받들었다.
당시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서 아무도 이를 치료하지 못하였다. 불도징이 이들을 의술로 치료하여 때에 맞추어 병이 줄어들었다. 남몰래 베풀어 말없이 도움 받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석륵이 갈파에서 하북(河北)으로 돌아갔다. 방두(坊頭)를 지나가자, 방두 사람들이 밤에 병영을 기습하려 하였다. 불도징이 곽흑략에게 말하였다.
“잠시 후 도적들이 올 것이니, 공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소.”
과연 그의 말과 같았는데 대비하였으므로 패하지 않았다.
석륵이 불도징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밤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칼을 손에 잡고 앉아서 불도징에게 사람을 보내 전하게 하였다.
“밤사이 대장군의 소재를 모릅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불도징에게 가서 아직 말하기도 전에 불도징이 거꾸로 물었다.
“평안한 거처에 침범하는 적도 없다. 무엇 때문에 밤 경계를 엄중히 하는가?”
석륵은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석륵이 그 후 화가 나서 모든 도사들을 살해하고, 아울러 불도징도 괴롭히려 하였다. 불도징은 곧 피하여 곽흑략의 집에 이르러, 제자에게 말하였다.
“만약 장군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나의 소재를 묻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보고하여라.”
심부름꾼이 곧 뒤이어 이르렀으나 불도징을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서 석륵에게 보고하니, 그가 놀랐다.
“내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성인을 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불도징을 만날 생각만 하였다. 불도징은 석륵이 잘못을 뉘우쳤음을 알았다. 이튿날 새벽 찾아가니 그가 말하였다.
“어젯밤에는 어디를 갔는가?”
불도징이 말하였다.
“공에게 성난 마음이 있기에 어젯밤에는 짐짓 일부러 피했습니다. 지금은 공께서 잘못을 뉘우치므로 감히 찾아온 것입니다.”
석륵은 크게 웃었다.
“도인이 틀렸네.”
양(襄)나라 성을 둘러싼, 해자로 흘러드는 물의 근원은 성의 서북쪽 5리 되는 지점의 단환사(團丸祠) 아래에 있었다. 그 물이 갑자기 메말랐다. 석륵이 불도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물을 얻겠나?”
불도징이 말하였다.
“지금 곧 용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석륵은 자(字)가 세룡(世龍)이라서, 불도징이 자기를 조롱하는 줄 알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 용으로도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물어보았네.”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는 성심으로 한 말이지 농담이 아닙니다. 샘물의 원천에는 반드시 신룡(神龍)이 삽니다. 지금 그곳에 가서 칙명을 내리시면, 물을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제자인 법수(法首) 등 몇 사람과 함께 샘물의 상류원에 이르렀다. 그 원천의 옛 곳은 이미 오래 전에 건조하게 말라, 갈라진 것이 수레바퀴 자국 같았다. 따라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의심하며, 물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불도징은 새끼를 맨 의자[繩床]에 앉아, 안식향(安息香)을 사르고 수백 마디의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물이 솟아나 미세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때 길이가 대여섯 치 가량 되는 한 작은 용이 물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여러 도사들이 다투어 그곳에 가서 이것을 보려 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용에게는 독이 있으니, 그 옆에 가까이 가지 말아라.”
잠시 후에 물이 크게 솟아나 성의 해자가 가득 찼다.
불도징은 한가롭게 앉아 탄식하였다.
“이틀 후에는 아마도 한 소인배가 이 성 아래를 놀랍게 동요시킬 것이다.”
양나라의 설합(薛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인배이면서 교만하여 선비족(鮮卑族) 노복을 얕보고 희롱하였다. 노복이 분해서 칼을 뽑아 그 아우를 찔러 죽였다. 방으로 들어가, 그의 형을 잡고 칼로 심장을 겨누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든 집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곧 손을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설합에게 말하였다.
“나를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면, 당신의 아이를 살려주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함께 죽겠다.”
집 안팎이 깜짝 놀라, 가서 구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석륵도 스스로 그곳에 갔다. 이 광경을 보고 설합에게 말하였다.
“노복을 보내서 경의 아들을 보전하면 참으로 좋은 일이오. 이런 일이 일단 일어나면 바야흐로 훗날에 해가 될 것이니, 경은 잠시 너그러운 심정을 가지시오. 나라에는 변치 않는 법이 있소.”
그러나 설합이 사람들에게 노복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였다. 노복이 마침내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선비족의 단파(段波)가 석륵을 공격하였다. 그 무리의 기세가 매우 성하였다. 석륵은 두려워서 불도징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어제 절의 방울이 울리면서 이르기를, ‘내일 아침밥을 먹을 때면 단파를 사로잡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륵이 성에 올라 단파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앞뒤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백해져 말하였다.
“적군의 행렬이 땅을 기울게 할 정도이다. 어찌 단파를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공이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일 뿐이다.”
다시 기안(夔安)을 보내서 불도징에게 물어보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미 단파를 사로잡았소.”
당시 성의 북쪽으로 복병이 나갔다가, 우연히 단파를 만나 사로잡은 것이다. 불도징이 석륵에게 단파를 용서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라 권유하였다. 석륵이 이에 따르니, 마침내 선비족의 쓰임을 얻었다.
당시 유재(劉載)는 이미 죽었다. 유재의 사촌동생 유요(劉曜)가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연호를 광초(光初)라 칭하였다. 광초 8년에 유요는 사촌동생인 위중산왕(僞中山王) 유악(劉岳)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석륵을 공격하였다. 석륵은 석호(石虎)를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이에 항거하였다. 낙양의 서쪽에서 크게 싸웠다. 유악이 패배하여 석량오(石梁塢)만 보전하였다. 석호도 울타리를 단단히 하고 수비하였다. 불도징이 제자들과 관사(官寺)에서 중사(中寺)로 가다가, 절문을 들어서면서 탄식하였다.
“유악이 불쌍하구나.”
제자인 법조가 그 까닭을 물어보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어제 해시(亥時)에 유악은 이미 사로잡혔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광초(光初) 11년에 유요는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을 공격하였다. 석륵이 몸소 낙양으로 가서 유요에게 항거하려고 하였다. 내외의 보좌하는 관료들로서 반드시 말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륵이 불도징을 방문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탑 상륜(相輪)부의 방울이 이르기를, ‘수지(秀支)ㆍ체려강(替戾岡)ㆍ복곡(僕谷)ㆍ구독(劬禿)’이라 하니, 이는 갈족(羯族)의 말입니다. 수지는 군대라는 뜻이고, 체려강은 나간다는 뜻이고, 복곡은 유요가 오랑캐에 있을 때의 벼슬 이름이며, 구독은 사로잡는다는 뜻에 해당합니다. 이 말은 군대가 나가면, 유요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서광(徐光)이 불도징의 말을 듣고 간절하게 석륵의 출병을 권유하였다. 석륵은 마침내 맏아들 석홍(石弘)으로 하여금 남아서 불도징과 함께 양(襄)나라를 진정케 하였다. 그리고는 몸소 중군(中軍)의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낙양성으로 나아갔다.
양군이 교전하자마자 유요의 군대는 크게 허물어졌다. 유요의 말이 물 속에 빠져서, 석감(石堪)이 그를 사로잡아 석륵에게 보냈다. 불도징이 당시 어떤 물건을 손바닥에 바르고 이를 보니, 큰 무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포박당해 있고 목에 붉은 끈이 감겨 있었다. 그때 이런 일을 갖고 석홍에게 알렸다.
“그때쯤 되어서 바로 유요를 사로잡았습니다.”
유요를 평정한 후에, 석륵은 조천왕(趙天王)이라 외람되이 일컬었다.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바꾸어 황제의 일을 행하였다. 이 해는 동진(東晋) 성제(成帝)의 함화 5년(330)에 해당한다.
석륵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 불도징을 더욱 독실하게 섬겼다. 당시 석총(石葱)이 모반을 꾀하였다. 그 해 불도징이 석륵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올해에는 파[葱: 석총을 말한 것] 속에 벌레가 있어 먹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파를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륵은 지경 안에 나누어 알려서, 파를 삼가하고 먹지 말게 하였다. 8월에 이르러 과연 석총이 달아나니, 석륵은 불도징에게 더욱 존중을 더하였다. 반드시 일이 있으면, 자문 받은 후에 행하였다. 큰 스승[大和上]이라 불렀다.
석호(石虎)에게 빈(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뒤에 석륵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문득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 이미 이틀이 지났을 때, 석륵이 말하였다.
“예전에 괵(虢)나라의 태자가 죽었을 때, 편작(扁鵲)이 그를 살렸다고 짐은 들었다. 큰 스승[大和上]은 우리나라의 신인(神人)이니, 급히 찾아가서 알리는 것이 좋겠다. 반드시 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불도징이 곧 버들가지를 갖고 와서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죽은 아이가 일어났다. 얼마 후에는 예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석륵의 모든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절 안에서 길러졌다. 4월 초파일마다 석륵은 몸소 절을 찾아 불상을 씻으며, 아이들을 위하여 발원하였다.
건평(建平) 4년 4월에 하늘은 고요하여 바람이 불지 않는데, 탑 위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렸다. 불도징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방울이 알려주는 구나. ‘나라에 초상이 나며, 그 시기는 올해를 지나지 않는다’고.”
이 해 7월에 석륵이 죽고, 아들 석홍(石弘)이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도읍지를 업성(鄴城)으로 옮기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칭하였다. 석호는 마음을 기울여 불도징을 섬기기를 석륵보다도 더 존중함이 있었다. 글을 내려 전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이 나라의 큰 보배인데도, 영예로운 작위를 더하지 않았다. 높은 봉록(俸祿)도 받지 않았다. 영화와 봉록이 미치지 않으니 무엇으로 그 덕을 기리겠는가? 지금부터는 옷을 비단으로 만들어 드리고, 타실 것은 그림을 조각한 큰 가마로 마련하여 드리도록 하라.
조회(朝會)가 있는 날에 스승께서 궁전에 오르실 때, 상시(常侍) 이하 모든 사람들이 가마를 들어올리고, 태자와 여러 공자(公子)들이 양쪽을 부축해서 오르게 하라. 주도하는 사람들이 ‘큰 스승[大和上]께서 오셨다’고 외치면, 모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그 존귀하심을 나타내도록 하라.”
또한 위사공(僞司空) 이농(李農)에게 명령하였다.
“아침ㆍ저녁으로 몸소 문안을 드려라. 태자와 모든 공자들은 5일에 한 번 찾아가서, 짐의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거라.”
불도징은 당시 업성 안의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제자인 법상(法常)을 북쪽으로 보내 양(襄)나라에 이르게 하였다.
제자인 법좌(法佐)는 양나라에서 업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양기성(梁基城) 아래에서 서로 만나 함께 유숙하였다. 수레를 마주 대고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승[和尙]의 일을 언급하였다. 아침 무렵에 각기 길을 떠났다. 법좌가 업성에 이르러 절에 들어가서 불도징에게 문안을 드리니, 불도징은 웃음으로 맞이하였다.
“어젯밤에 너와 법상이 수레를 맞대고 함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더구나. 선대 사람들 말씀에, ‘공경하라고 하지 않더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마음을 고쳐먹지 말라. 삼가라고 하지 않더냐? 홀로 있어도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는 자라도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근본이다. 그것을 너는 모르느냐?”
법좌가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이에 나라 안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마다 말하였다.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스승[和上]께서 너의 마음을 아신다.”
불도징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감히 울거나, 침을 뱉거나, 똥이나 오줌을 누지 않았다.
당시 태자 석수(石邃)의 두 아들이 양나라에 살았다. 불도징이 석수에게 말하였다.
“소아미(小阿彌: 남의 아들에 대한 존칭)께서 요즘 아마도 병에 걸렸을 터이니, 가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수가 곧 심부름꾼을 보내 가보게 하였다. 과연 이미 병을 앓았다. 궁전의 대의인 은등(殷騰)과 외국의 도사들이 고칠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불도징은 제자인 법아(法雅)에게 말하였다.
“바로 성인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신다 하더라도, 이 병은 고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들 무리들이 고칠 수 있겠느냐?”
그 후 사흘 만에 과연 그 아이는 죽었다. 석수는 주색에 빠져 장차 역모를 꾀하였다. 어느 날 환관에게 말하였다.
“스승[和上]은 신통력이 있다. 어쩌면 도모하는 일이 발각될 수 있다. 내일 그가 오면, 곧 먼저 그를 제거하거라.”
불도징은 보름날이 되자 곧 궁중에 들어갔다. 석호를 뵈려 하면서, 제자인 승혜(僧慧)에게 말하였다.
“어젯밤에 천신(天神)이 나를 불러 이르기를 ‘내일 궁중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사람들 앞을 지나쳐 오지 말아라’고 하였다. 내가 만일 사람 앞을 지나쳐 오는 곳이 있거든, 네가 곧 이를 멈추게 하여라.”
불도징은 항상 궁중에 들어갈 때마다, 반드시 석수의 앞을 지나갔다. 석수는 불도징이 궁중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애타게 길목을 지키며 기다렸다.
불도징이 곧 남대(南臺)에 오르려 하자, 승혜가 옷을 잡아당겼다. 불도징이 말하였다.
“사정상 멈출 수가 없구나.”
앉았지만 편안하지가 않아 곧 일어났다. 석수가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머물지 않아서 석수가 꾀한 일은 마침내 어그러졌다.
불도징은 절에 돌아와 탄식하였다.
“태자가 난리를 꾸며 그 형세가 곧 이루어질 것이다. 말하고자 하여도 말하기 어렵고, 참으려 하여도 참기 어렵구나.”
곧 어떤 일에 인연하여 조용히 석호에게 경계하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끝내 그 뜻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 후 곽흑략이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 북쪽 산의 강(羌)족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오랑캐들이 매복시킨 복병(伏兵)들 속에 떨어졌다. 당시 불도징은 법당 위에 앉아 있고, 제자인 법상(法常)이 그의 옆에 있었다.
불도징이 참연히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였다.
“곽공이 지금 곤경에 빠졌구나.”
그리고는 소리 높이 외쳤다.
“대중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라.”
불도징도 또한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다가, 잠시 후 다시 말하였다.
“만약 동남쪽으로 나간다면 살 수 있으나, 다른 방향은 곤란하다.”
다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얼마 후 말하였다.
“탈출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곽흑략이 돌아와 스스로 설명하였다.
“강족 오랑캐의 포위망 속에 떨어졌습니다. 동남쪽을 향해서 말을 달리던 중에, 바로 장막 아래에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을 내주면서, ‘공은 이 말을 타시오. 소인이 공의 말을 타겠소. 구제될지 구제되지 못할지는 천명에 맡기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곽흑략은 그의 말을 빌려 타서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날짜와 시간을 미루어 따져보니, 바로 불도징이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던 때였다.
위대사마(僞大司馬)인 연공(燕公) 석빈(石斌)을 석호가 유주(幽州)의 목사로 임명하여 계(薊)에 주둔케 하였다. 이때 뭇 흉악한 무리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마음껏 포악한 짓을 일삼았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어제 밤에 천신(天神)이 말하기를, ‘빨리 거두어들여 말을 돌아오게 하여라. 가을이 되면 제(齊)가 아마도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호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곧 모든 곳에 명령하여 말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어떤 사람이 석호에게 거짓으로 석빈을 모함하였다. 석호는 석빈을 불러 3백 대의 채찍질을 하고, 그의 소생모인 제씨(齊氏)를 죽였다.
석호는 활을 휘어 화살을 집고서는, 스스로 석빈에게 행한 형벌이 가볍다고 생각하고, 곧 손수 5백 명을 죽이려 하였다. 불도징이 간언하였다.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며, 죽으면 다시는 살릴 수 없습니다. 예법에도 ‘친히 사람을 죽여서 은혜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천자가 손수 행하는 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석호는 이윽고 중지하였다.
그 후 진(晋)나라 군대가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지방으로 진출하니, 농북(隴北) 일대의 모든 성이 침략당하여 핍박받았다. 세 방면에서 다급함을 알려와 인정이 위태하고 어지러웠다. 이에 석호는 성을 내었다.
“나는 부처를 받들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했다. 하지만 다시 외부의 침략을 당하니, 부처에게는 신통이 없다.”
불도징이 이튿날 새벽에 일찍 궁중에 들어가니, 석호가 이 일로 불도징에게 물었다. 불도징은 이로 인하여 석호에게 간언하였다.
“왕은 전생에 큰 장사꾼이 되어, 계빈사(罽賓寺)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큰 모임에 공양을 올릴 때에 그 가운데는 60나한(羅漢)이 있었습니다. 저의 이 미미한 몸도 그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득도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공양주는 명이 다하면 아마도 닭으로 태어났다가, 그 후에는 진(晋)나라 땅의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님께서는 임금이 되었으니,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국경 지대에 군대가 침범하는 것은 나라에 보통 있는 일인데, 어떻게 삼보를 원망하고 비방할 수 있으며, 한밤중에 독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십니까?”
석호는 이에 믿고 깨달아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다.
늘상 석호가 불도징에게 물었다.
“불법이란 어떤 것인가?”
불도징이 대답하였다.
“불법이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호가 말하였다.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형벌과 죽이는 일이 아니면, 난리를 평정하여 세상을 깨끗이 할 수가 없다. 이미 계율을 어기고 살생을 하였다. 그러니 비록 다시 부처님을 섬긴다 하더라도, 어떻게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불도징이 말하였다.
“제왕이 부처님을 섬기는 일은 마땅히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마음을 수순하여 삼보를 크게 드러내어, 포학한 짓을 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흉악하고 어리석은 무뢰한(無賴漢)들은 교화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악한 일이 있으면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이고, 형벌을 내려야 할 사람만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포학하고 마음대로 날뛰는 무리를 살해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다시 재산을 기울여 불법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재앙과 화를 풀 길은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욕심을 죽이고 자비심을 일으켜 널리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옵소서. 그리하신다면, 불교는 영구히 융성해지고, 나라의 복된 운수도 바야흐로 먼 훗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석호는 비록 다 따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익된 것이 적지 않았다.
석호 아래에서 상서(尙書)로 있던, 장리(張離)와 장량(張良)은 집안의 부유함으로 부처님을 섬겨서 각기 큰 탑을 세웠다. 불도징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을 섬기는 일은 청정하고 욕심 없이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시주들은 의례적으로는 대법을 받들면서도 탐욕과 인색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사냥을 즐기기에 한도가 없고, 재물을 모아 쌓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현세에서 그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인데, 어떻게 미래의 복된 과보를 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장리와 장량 등은 모두 살육 당하고 멸족되었다. 당시에 또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정월에서 유월까지 이르렀다. 석호는 태자를 임장(臨漳)의 서부구(西釜口)로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오래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다. 석호는 불도징에게 스스로 기우제를 행하게 하였다. 곧 두 마리의 흰 용이 나타나, 제사 드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 날 사방 수천 리에 큰비가 내렸다. 그 해 농사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융맥(戎貊: 북쪽 오랑캐)의 무리들이 전에는 불법을 몰랐었다. 불도징의 신비한 영험을 듣자, 모두 멀리 불도징을 향하여 예배드렸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된 것이다.
불도징은 늘상 제자를 서역으로 보내서 향을 사오게 하였다. 제자가 길을 떠나자, 불도징이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향을 사러 간 제자가 손바닥에 보인다. 어느 곳에선가 처음으로 도적들에게 겁탈 당하여, 거의 죽으려 하는구나.”
그러고는 향을 사르고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여, 멀리 있는 그를 구제하여 보호하였다.
그 후 제자가 돌아와서 말하였다.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도적들에게 겁탈 당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문득 향냄새를 맡자, 도적들이 까닭 없이 스스로 놀라 말하기를 ‘구원병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며, 저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석호는 임장(臨漳)에서 옛 탑을 수리하였다. 승로반(承露盤)이 모자랐다. 불도징이 말하였다.
“임치성(臨淄城) 안에는 옛날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탑이 있고, 땅 속에는 승로반과 불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위에는 숲과 나무들이 무성하나, 그곳을 파면 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곧 그림을 그려 심부름꾼에게 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을 파니, 과연 승로반과 불상을 얻었다. 석호는 늘 연(燕)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불도징이 충고하여 말했다.
“연나라의 운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내 그것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석호가 여러 번 연나라를 토벌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훈계를 믿었다.
불도징의 도에 의한 교화가 행해지자, 백성들이 대부분 부처님을 받들었다. 모두 절[寺廟]을 영조하며, 서로 다투어 출가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허물과 과오가 많이 생겨났다. 석호는 글을 내려 중서성(中書省)에 물어보았다.
“부처님을 세상에서는 세존이라 부르며 국가에서는 받드는 분이다. 동네의 소인으로 벼슬과 직위가 없는 사람들도, 부처님을 섬겨도 마땅한 것인가? 또한 사문이란 모두가 마땅히 고결하고 곧고 바른 사람으로, 정진을 행한 연후에야 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사문의 수효는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는 혹 간사하고 악독한 자가 부역을 피한 경우도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러니 이를 가려내 자세히 의론하는 것이 좋겠다.”
중서저작랑(中書著作郞)인 왕도(王度)가 상주하여 아뢰었다.
“무릇 ‘왕자란 천지에 교사(郊祀)의 제사를 올리고, 모든 신을 제사로 받들어야 한다’고 제사의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 예법은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것입니다. 부처는 서역에서 태어났고, 외국의 신이라 공덕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자나 여러 귀족들이 마땅히 제사 드리며 받들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한(漢)나라의 명제(明帝)가 꿈에 부처에 감응하여 처음으로 그 도가 전해졌습니다. 오직 서역 사람에게만 도읍지에 절을 세워, 그 신을 받드는 일을 허용하였을 뿐입니다. 한나라 사람은 모두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위(魏)나라에서 그 제도를 이어받아 역시 전대의 법도를 닦아왔습니다. 지금 우리 위대한 조(趙)나라가 천명을 받아서는, 거의 옛 법도로 말미암고 있습니다.
중국과 오랑캐는 제도가 다르고, 사람과 신에 있어서도 부류가 다릅니다. 외국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고,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제사 또한 예법이 다릅니다. 중국의 의복과 제사를 뒤섞이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조나라 사람은 모두 절을 찾아가 향을 사르거나 예배드리는 일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단절시켜 전례(典禮)를 따르도록 해야만 합니다.
모든 관료와 공경대부에서부터 아래로는 많은 노예들에 이르기까지, 예에 따라 모두 금지시켜야 합니다. 이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같은 죄로 처벌하십시오. 조나라 사람으로서 사문이 된 자는 다시 4민(民)의 복장으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위중서령(僞中書令) 왕파(王波)도 왕도와 같은 내용을 상주하였다.
석호는 글을 내려 전하였다.
“왕도의 논의에 의하면, 부처는 외국의 신이라서 이 나라의 천자나 여러 귀족들이 마땅히 받들 만한 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짐은 변방에서 태어나, 분수에 넘치게 한 시기의 천운을 만나 중국 땅에 군림하였다.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제사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제사에다 마땅히 본래의 풍속을 겸하여 따라야 할 것이다. 부처는 바로 오랑캐 나라의 신이니 마땅히 받들어야 할 존재다.
무릇 제도라는 것은 윗사람으로 말미암아 행해져서 영원히 세상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그렇거늘 진실로 일에 이지러진 점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전시대의 법에 구애받겠는가? 오랑캐든 조나라 사람이든 기타 모든 만족(蠻族)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를 버리고 부처님을 섬기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도를 위하는 것을 허락하노라.”
이에 계율에 태만하던 무리들도 이로 인하여 계율 지키기에 힘썼다.
황하(黃河) 안에서는 예전에는 자라가 생겨나지 않았다. 문득 자라 한 마리를 얻어, 석호에게 바쳤다.
불도징이 이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환온(桓溫)2), 그 사람이 강물 속에 들어갈 날도 멀지 않겠구나?”
환온의 자는 원자(元子:黿)이다. 그 후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당시 위현(魏縣)에 한 떠돌이 백성이 있었다. 그의 씨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상 위현의 한 가운데서 구걸을 하고 다녔다. 삼베로 된 속옷과 무명으로 된 치마를 입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유(麻襦: 삼베 속옷)라고 불렀다. 말솜씨는 탁월하고 모습은 정신병자와 같았다.
쌀이나 곡식을 구걸해서 얻으면 먹지 않았다. 곧 큰길에 흩어두고 일컬었다.
“천마(天馬)의 먹이다.”
초흥(超興) 태수가 호적에서 빼내고 거두어, 석호에게 보내서 그를 만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나라 동쪽 2백 리에서 아무 달 아무 날에 아마도 한 비상한 사람을 보내올 것입니다. 그를 죽이지 마옵소서.”
과연 그가 말한 날짜대로 이 사람이 이르렀다. 이에 석호는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이상한 말은 없었다. 오직 이렇게만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아마도 기둥 하나짜리 궁전 아래에서 세상을 마칠 것입니다.”
석호는 이 말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그를 보내서 불도징을 찾아가게 하였다. 이때 마유가 불도징에게 말하였다.
“예전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만나고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구나. 서쪽 오랑캐가 하늘의 명[玄命]을 받았으나, 운수가 끊어지는 것은 끝내 정해진 기일이 있다. 금을 비록 떨어뜨려 땅에서 녹인다 하더라도, 변방의 황무지 사람을 따를 수는 없다. 신령한 기약[靈期]의 자국을 몰아내서 제거하니,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나타내지 말거라. 후세 자손들의 잎새가 번성하면 내세의 복도 비로소 쌓이리라. 아름다운 시기를 어디에서 기약하겠는가? 길이 이를 한탄하노라.”
불도징이 말하였다.
“하늘은 돌고 돌아 운이 다하면 운수가 나빠져서 지탱하지 못한다. 아홉 나무의 물이 어려워지면 도술로서도 안녕할 수가 없다. 어질고 밝은 이가 비록 세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기초가 반드시 무너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래도록 노닐어 염부제를 이롭게 했지만, 어지럽고도 어지러워 이런 근심만 많다. 걸어 구름을 넘나드는 집에 올라, 신령이 노니는 곳에서 만나자.”
불도징과 마유는 하루 종일 강론을 나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해득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만히 몰래 엿들은 사람이 있으나, 오직 이 몇 마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미루어 헤아려보면, 수백 년에 걸친 미래의 일을 논한 듯하다.
석호가 역마(驛馬)를 보내서 본래의 고을로 되돌려 보냈다. 이미 성밖을 벗어나자, 말을 사양하고 걸어갈 수 있다면서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방문해야 할 곳이 있소. 그렇지만 출발하기에는 아직 편안한 시간이 아니오. 합구교(合口橋)에 이르면 머무르시오. 거기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소.”
심부름꾼은 그의 말대로 말을 달려 떠났다. 미처 합구교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마유는 다리 위에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行步]를 생각해보니, 나는 것과 같은 도술이 있는 듯하였다.
∙도진(道進)
불도징에게는 도진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뛰어나, 석호의 존중을 받았다.
어느 날 이야기가 은사(隱士)의 일에 대하여 미치자, 석호는 도진에게 말하였다.
“양가(楊軻)라는 사람은 짐의 백성이다. 10여 년 동안 그를 불렀으나, 짐의 명령에 공손하지 않았다. 짐짓 몸소 그를 찾아가 보았는데도 오만하게 누워 있었다. 짐이 비록 덕이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만방에 군림하고 있다. 내가 탄 가마가 향하는 곳은 하늘이 끓고 땅도 용솟음친다. 비록 나무나 돌을 무릎 꿇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필부로서 길이 오만할 수 있는가? 예전에 태공(太公)이 제(齊)나라로 갈 때 먼저 화사(華士)를 주살하였다. 태공은 현철한 인물이니, 어찌 그가 그릇된 일을 했겠는가?”
도진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순(舜)임금은 부들 옷[蒲衣]을 입은 사람을 넉넉히 대하였고, 우(禹)임금은 백성(伯成)을 찾아갔습니다. 위문후(魏文侯)는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 위에서 인사했고, 한(漢)나라는 주당(周黨)을 찬미하였습니다. 관녕(管寧)은 조조(曺操)의 부름에 불응하였고, 황보(皇甫)씨는 진(晋)나라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두 분의 성인과 네 사람의 임금은 함께 그들의 절조를 더했습니다.
장차 탐욕하고 다투는 무리들을 무찌르고, 맑은 풍조를 우뚝하게 하고자 한다면, 폐하께서는 순(舜)ㆍ우(禹)의 덕을 따르시고, 태공의 형벌 씀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글로 쓰여집니다. 어찌 조(趙)나라의 역사에 은둔한 사람들의 전기가 없어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석호는 그의 말에 기뻐하였다. 곧 양가를 그가 머물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고, 열 집의 조세(租稅)를 그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도진이 돌아와서, 자세히 이 이야기를 불도징에게 아뢰었다. 그러니 불도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말은 착했으나, 다만 양가의 명이 매달린 곳이 있구나.”
그 후 진주(秦州)에 병란(兵亂)이 일어났다. 양가의 제자는 양가를 소에 태우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융(戎)족 군대에게 사로잡혀 모두 살해되었다.
어느 날 석호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양(羊)떼들이 물고기[魚]를 업고, 무리를 지어 동북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불도징을 방문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꿈입니다. 선비족(鮮卑族)이 중원 땅을 가질 것입니다.”
그 후 과연 모용씨(慕容氏: 5호 16국 때 燕나라를 세운 선비족)가 거기에 도읍하였다. 또 어느 날 불도징은 석호와 함께 중당(中堂)에 올랐다. 불도징이 문득 놀라서 말하였다.
“변(變)이다, 변이다. 유주(幽州)에서 화재를 만났구나.”
그리고는 이어 술을 갖다가 그쪽 방향에 뿌렸다. 오래 있다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불은 꺼졌다.”
이에 석호는 사람을 보내서 유주에 가서 증험해 보게 했더니, 그곳에서 전하였다.
“그 날 불이 사방의 문에서 일어났습니다.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소낙비를 퍼부어 불을 껐습니다. 그 비에는 또한 자못 술기운이 있었습니다.”
석호의 건무(建武) 14년(348) 7월에 이르러, 석선(石宣)과 석도(石韜)가 장차 서로 죽이기를 꾀하였다. 당시 석선은 절에 이르러 불도징과 함께 앉아 있었다. 탑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리니, 불도징이 석선에게 말하였다.
“방울소리를 이해하십니까? 방울이 호자낙도(胡子落度)라고 말합니다.”
석선의 얼굴빛이 변하여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불도징은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 늙은 오랑캐가 도를 위한다면서 산에 살지 않으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두터운 왕골방석에 앉아서 아름다운 옷을 입으니, 어찌 이것이 낙도(落度: 법도가 떨어진 것)가 아니겠습니까?”
그 후 석도가 그곳에 이르렀다. 불도징이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석도가 두려워하며 불도징에게 까닭을 물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괴이하게 공에게서 피냄새가 나기 때문에 쳐다보았을 따름이오.”
8월에 이르러 불도징은 열 사람의 제자들에게 별실에서 재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은 잠시 동각(東閣)에 들어갔다. 석호와 황후인 두(杜)씨가 안부를 물었다. 이때 불도징이 말하였다.
“겨드랑이 밑에 도적이 있으니, 열흘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불도각(佛圖閣)에서부터 서쪽까지, 이 법전에서 동쪽까지 유혈사태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하여 동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두황후가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노망이 나셨나? 어디에 도적이 있다는 것인가?”
불도징은 곧 말을 바꾸었다.
“6정(情)으로 받은 것이 모두 다 도적입니다. 늙으면 저절로 노망이 들겠지만, 다만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미해지지 않게 하고자 할 뿐입니다.”
곧 빗댄 말로 바꾸어 다시는 드러내서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이틀이 지나자, 과연 석선이 사람을 파견하여 절 안에서 석도를 살해하였다. 이어 석호가 초상에 임하는 기회를 틈타서 대역(大逆)을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이에 앞선 불도징의 훈계 때문에 면할 수 있었다.
석선은 일이 발각되어 수감 당하였다. 불도징이 석호에게 간하였다.
“기왕 이 사람도 폐하의 아들입니다. 어떻게 거듭 화를 만들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노여운 마음을 참고 자비를 더하신다면, 그는 아직도 60여 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주살하고자 하신다면, 혜성(彗星)이 내려와 업궁사(鄴宮寺)를 쓸어낼 때 해야만 합니다.”
석호는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쇠사슬로 석선의 턱을 뚫어 끌고 가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더구나 그의 관속 3백여 명을 거두어, 모두 말이 모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장하(漳河)에 던졌다.
불도징은 곧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별실에서 재 올리기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한 필의 요괴한 말이 나타났다. 갈기와 꼬리에 모두 불에 탄 형상이 있었다. 이 말이 중양문(中陽門)으로 들어와서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갔다. 동쪽으로 머리는 동궁(東宮)을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동북쪽으로 달아나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불도징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재앙이 미치겠구나.”
그 해 11월이 되자, 석호는 뭇 신하들에게 태무전전(太武前殿)에서 크게 향응을 베풀었다. 불도징은 읊조렸다.
“궁전이여, 궁전이여. 가시가 숲을 이루네. 장차 사람들의 옷을 허물겠구나.”
석호는 궁전의 돌 밑을 파서 보게 하니, 돋아나는 가시나무가 있었다. 불도징은 절에 돌아와서 불상을 보면서 말하였다.
“장엄할 수 없는 것이 슬프고 한이 됩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일컬었다.
“3년 더 살 수 있을까?”
스스로 말하였다.
“안 돼, 안 돼.”
또 말하였다.
“2년, 1년, 백 일, 한 달, ……”
스스로 대답하였다.
“안 돼.”
곧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 길로 방으로 돌아가 제자인 법조(法祚)에게 말하였다.
“무신년(348)에 화란의 조짐이 싹트고, 기유년(349)에 석씨가 멸망할 것이다. 나는 그 난리가 미치기 전에 앞서, 죽음의 길을 따르려 한다.”
곧 사람을 보내서 석호에게 이별의 말을 전하였다.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옮겨지는 법이라, 목숨은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빈도의 허깨비와 불꽃같은 몸에 죽음의 기약이 이미 이르렀습니다. 이미 은혜를 입은 것이 남다르게 무거웠던 까닭에, 거꾸로 우러러 이 일을 알려드립니다.”
석호는 한탄하더니 말하였다.
“스승[和上]에게 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건만, 문득 그렇게 임종을 알립니까.”
곧 몸소 궁전을 나와 절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달랬다.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태어나서 죽음에 들어가는 것은 변치 않는 도리입니다. 명의 길고 짧음은 분수대로 정해져 있으므로, 사람이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는 행실이 온전한 것을 존중합니다. 덕은 게으름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진실로 일과 지조에 이지러진 것이 없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명을 어겨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의 뜻에 미진한 것이 있다면, 국가가 마음으로 불교의 진리를 존속시켜서 불법을 받드는 데 인색함이 없이 하며, 절[寺廟]을 흥기시켜서 높고 뚜렷하게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공덕을 칭송한다면, 마땅히 아름다운 복을 향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를 펴는 것이 맹렬하고, 도에 지나친 형벌[淫刑]이 가혹하게 넘치며, 뚜렷이 성전의 말씀을 어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법의 훈계에 등을 돌려서 스스로 징계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복된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을 바꾸어 아래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다면, 나라의 운수가 연장되고 도인과 속인이 기뻐하며 의지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목숨이 끝나는 지경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여한[遺恨]이 없겠습니다.”
석호는 비통해 하여 오열을 터트렸다. 불도징이 반드시 갈 것임을 알고는, 곧 그를 위하여 땅속을 뚫어 분묘를 영조하였다.
12월 8일에 이르러 업궁사(鄴宮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 해는 진(晋) 목제(穆帝)의 영화(永和) 4년(348)이다. 그때 나이는 117세이다. 선비와 서민들이 슬퍼하여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니,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였다. 이어 임장(臨漳)의 서쪽 시맥(柴陌)에 묻었다. 곧 석호가 만든 무덤이다.
갑자기 양독(梁犢)이 난을 일으켰다. 다음해에 석호가 죽었다. 염민(冉閔)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석씨 종족을 모두 다 죽였다.
염민의 어릴 때 자(字)가 극노(棘奴)였다. 앞서 불도징이 이른바 “가시가 숲을 이룬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불도징의 왼편 젖무덤 옆에 둘레가 네다섯 치 가량 되는 구멍 하나가 있었다. 그것이 배 안까지 관통하였다. 때로는 창자를 뱃속에서 꺼내거나, 혹은 솜으로 구멍을 막기도 하였다. 밤에 책을 읽고자 하여 곧 솜을 뽑으면,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또한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곧 물가로 가서 창자를 꺼내어 씻고, 다시 안에 넣었다.
불도징은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모와 자태가 청아하였다. 오묘하게 깊은 경전을 해득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속의 논리에도 뛰어났다. 강설하는 날에는 오직 종문의 취지를 표방하고, 시작과 끝의 말을 밝게 깨닫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또한 자비로움으로 창생을 적셔, 위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건져 구제하였다.
흉악하고 강포한 두 석씨[石勒ㆍ石虎]의 정도에 비켜선 학살과 해침이, 만약 불도징과 날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 참상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백성들은 이익을 힘입었지만, 그것이 날마다 작용하는데도 몰랐을 뿐이다.
불조(佛調)ㆍ수보리(須菩提) 등 수십 명의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천축국의 강거(康居)에서 나와서, 수만 리 길을 멀다 않고, 발로 고비 사막을 건너 불도징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번면(樊沔:樊川과 沔水)의 석도안(釋道安), 중산(中山)의 축법아(竺法雅)도 나란히 함곡관과 황하를 넘어 불도징의 강설을 들었다. 모두 정밀한 교리에 오묘하게 뛰어나, 그윽하고도 미묘한 진리를 헤아려 닦았다.
불도징은 스스로 말하였다.
“내가 태어난 곳은 업성(鄴城)과의 거리가 9만여 리나 된다. 집을 버리고 도문에 들어온 지는 109년이나 되었다. 술은 이빨의 문턱을 넘지 않았고,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았다. 계율이 아닌 것은 하지 않았고, 욕망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다.”
수업 받고 따라 노니는 이들이 항상 수백 명이었다. 전후해서 문도의 수효만도 거의 1만 명이었다. 거쳐간 주(州)ㆍ군(郡)에 절을 세운 것만도 893곳에 이르렀다. 그러니 불법을 널리 펴는 성대함에서 그보다 앞설 사람은 없었다.
과거 석호가 불도징의 시신을 염하면서, 살아 있을 때의 지팡이와 발우를 관 속에 넣었다. 그 후 염민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고, 관을 열어보았다. 오직 발우와 지팡이만 있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불도징이 죽던 달, 그가 고비 사막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석호는 불도징이 죽지 않았다고 의심했으므로, 관을 열어보니 시신이 없었다.
그 후 모용준(慕容俊)이 업성에 도읍을 정하고, 석호(石虎)의 궁전에서 거처하였다. 늘 꿈에 호랑이가 그의 팔뚝을 무는 것을 꾸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석호의 귀신이 재앙을 내려서 그런 것이다.’
곧 석호의 시체를 찾았다. 동명관(東明館)에서 이를 파내었다. 당시 시신은 강시(殭屍: 미이라)가 되어 허물어지지 않았다. 모용준은 그 시신을 발로 밟고 욕을 하였다.
“죽은 것이 어찌 감히 살아 있는 천자를 무섭게 하는가? 네가 궁전을 지어 완성시켰지만, 너의 자식의 도모하는 대상이 되었거늘, 하물며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가?”
매질을 하여 훼손시키고 욕을 하면서, 장하(漳河)에 던져버렸다. 시체는 다리기둥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秦)나라의 장군인 왕맹(王猛)이 곧 이를 거두어 장례 지냈다. 마유(麻襦)의 이른바 ‘기둥 하나짜리 궁전’이 이것이다.
그 후 부견(符堅)이 업성을 정벌하자, 모용준의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부견 군대의 대장인 곽신호(郭神虎)에게 사로잡혔다. 실로 이는 모용준이 먼저 꿈에 본 일의 영험인 것이다. (곽신호의 끝 이름이 호랑이 ‘虎’이다.)
전융(田融)의 『조기(趙記)』에 일컬었다.
“불도징이 죽기 몇 해 전에 스스로 무덤을 영조하였다.”
불도징은 이미 반드시 무덤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시신도 그 속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리 무덤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전융이 잘못 알고 썼을 것이다.
불도징은 혹 불도등(佛圖磴)이라고도 하고, 혹 불도등(佛圖橙)이라고도 하며, 또 혹 불도징(佛圖澄)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범어에서 취한 발음이 같지 않아서일 따름이다.
2) 단도개(單道開)
단도개의 성은 맹(孟)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숨어살 마음을 품었다. 경전 40만여 글자를 외우며, 곡식을 끊고 잣 열매를 먹고살았다. 잣 열매를 얻기 어려우면 다시 송진을 먹었다. 나중에는 미세한 돌가루를 복용하였다. 한 번에 몇 매(枚)씩 삼키기를 며칠에 한 번 하였다. 혹 어떤 때는 일정 분량의 생강과 후추를 먹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7년 동안 계속하니, 그 이후로는 추위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몸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낮이나 밤이나 눕지 않았다. 동학(同學) 열 사람과 함께 이러한 것을 먹고 복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자,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물러나서, 오직 도개만이 뜻을 온전히 하였다.
부릉(阜陵) 태수가 말을 보내서 도개를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러자 도개는 걸어가도 된다 하여 사양하였다. 3백 리 길을 말 탄 사람보다 하루 일찍 이르렀다.
산의 나무 신[樹神]이 간혹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 그를 시험하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석호의 건무(建武) 12년(346)에 서평(西平)에서 올 때는, 하루에 7백 리를 걸어서 남안(南安)에 이르렀다. 한 동자(童子)를 제도하여 사미(沙彌)로 삼았다.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그가 교법을 품수 받자, 걸음이 도개에 미칠 수 있었다.
당시 태사(太史)가 석호에게 상주하였다.
“선인의 별자리[仙人星]가 보였으니, 아마도 덕이 높은 선비가 경내로 들어올 것입니다.”
석호는 두루 주(州)ㆍ군(郡)에 명령하였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으면, 상계(上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그해 겨울 11월에 진주(秦州) 자사가 표를 올려 도개를 보냈다.
처음에 업성(鄴城) 서쪽의 법림사(法綝祠)에 머물렀다. 그 후 임장(臨漳)의 소덕사(昭德寺)로 자리를 옮겼다. 방안에 높이 8척 내지 9척 가량의 이중 다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왕골로 엮어 선실(禪室)을 만들었다. 광주리 열 섬들이 크기만 하여, 항상 그 안에서 좌선하였다.
석호가 공급하는 물자는 매우 후하였다. 도개는 모두 이것으로 보시를 베풀었다.
당시 신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나 도개는 도무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게송을 설하였다.
모든 고통 받는 사람이 가여워서
출가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려 했소.
이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학문에 밝아야 하니
학문이 밝으면 악을 끊을 수 있다오.
산이 멀어 양식 구하기 어려워
단식하는 계책을 만들었을 뿐
신선의 짝이 되려는 것이 아니니
전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소.
도개는 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당시 진공(秦公)이었던 석도(石韜)가 도개를 찾아가 눈병을 치료하였다. 약을 넣으니, 조금 아파서 석도는 매우 두려워하였다. 결국은 그 효과를 얻었다. 불도징(佛圖澄)이 말하였다.
“이 도사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비추어 본다. 만약 떠난다면 아마도 큰 재앙이 있으리라.”
석호의 태녕(太寧) 원년(359)에 이르자, 도개는 제자와 더불어 남쪽 허창(許昌)으로 건너갔다. 석호의 아들과 조카들이 서로 살상을 자행하여 업도(鄴都)가 크게 어지러웠다.
진(晋)의 승평(昇平) 3년(359)에 다시 건업으로 왔다가 갑자기 남해(南海)로 갔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홀로 띳집에서 거처하였다. 쓸쓸히 세상 밖에서 살다가, 백여 세에 이르러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제자에게 명령하여 시신을 동굴 속에 버려 두게 하였다. 제자가 곧 시신을 석실로 옮겼다.
강홍(康泓)은 예전에 북간(北間)에서 머물 때, ‘도개가 예전에 산중에 있을 때는 늘 신선과 왕래가 있음’을 도개의 제자가 서술하는 것을 들었다. 이에 멀리서도 마음속으로 공경하고 고개 숙였다. 후에 남해에 신역을 살러 와서는 친히 만나자, 바로 옆에서 우러르고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 두루 지극하였다. 이에 그를 위하여 전기를 쓰고 찬양의 글을 지었다.
쓸쓸하구나, 이 어른이여.
바람 나부끼듯 번뇌를 끊어
밖으로는 소승을 본받으나
안으로는 몸의 공함을 트이셨네.
현묘한 모습이 휘황하게 빛나니
높은 선비들이 여기에 찾아들었네.
연한 풀뿌리 자시며
바위와 나루터를 떠도셨도다.
진(晋)의 흥녕(興寧) 원년(363)에 진군(陳郡)의 원굉(袁宏)이 남해의 태수가 되었다. 아우인 영숙(穎叔)과 사문 지법방(支法防)과 함께 나부산에 올랐다. 석실 입구에 이르러 도개의 해골과 향화ㆍ질그릇 등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보았다. 이에 원굉이 말하였다.
“법사의 일과 행실은 일반 무리와 달랐으니, 바로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나셨구나.”
곧 찬탄의 글을 지었다.
기이함을 부르신 빼어난 님이여,
외롭지 않은 덕을 세우셨어라.
멀고 먼 그윽한 님이여,
바위를 바라보던 화락한 님이여,
살랑 살랑이던 신령한 신선들
여기서 노닐고 모였어라.
남긴 신발 숲에 있으니
천 년에 한 사람 그 뒤이을는지.
그 후 사문 승경(僧景)과 도점(道漸)이 함께 나부산에 오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3) 축불조(竺佛調)
축불조는 씨족이 확실하지 않다. 혹 천축국 사람이라고도 한다. 불도징(佛圖澄)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상산사(常山寺)에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그는 일이 순박한 것을 숭상하여, 말을 수식해서 표현하지 않았다. 당시 모두가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상산(常山)에 법을 받드는 두 형제가 있었다. 절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형수의 병이 위독하자, 절 옆으로 모시고 와서 의약과 가까이하게 하였다. 형이 불조를 받들어 스승으로 삼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항상 절 안에 있으면서, 묻고 자문 받으며 도를 행하였다. 어느 날 불조가 문득 아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가 자세히 형수의 괴로워하는 바와 아울러 형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불조가 말하였다.
“병자는 조금 좋아졌고, 자네의 형은 평상시와 같네.”
불조가 떠난 뒤에 아우도 역시 말을 채찍질해서 그의 뒤를 따라 절로 갔다. 불조가 아침에 자기 집에 온 일을 언급하자, 형은 놀라며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아침에 한 번도 절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분의 얼굴을 보았단 말이냐?”
형제가 다투다가 이를 불조에게 물어보았다. 불조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형제는 함께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불조는 간혹 홀로 산에 들어가, 1년이나 반년을 지내곤 하였다. 언제나 마른 밥 몇 되를 갖고 갔다. 돌아올 때는 항상 남은 밥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불조를 따라 산길을 수십 리 걸어갔다. 날은 저물고 큰 눈이 내렸다. 불조가 바위에 있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유숙하였다. 호랑이가 돌아와서는 굴 앞에 함께 누웠다. 불조가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거처를 빼앗았다. 부끄럽지만 어쩌겠느냐?”
호랑이는 곧 귀를 늘어뜨리며 산을 내려갔다. 따라간 사람은 놀랍고 두려웠다. 불조가 후에 스스로 죽을 날을 잡아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왔다. 불조는 모두에게 말하였다.
“천지는 장구하지만, 그래도 붕괴될 때가 있다. 하물며 사람이 어찌 영구히 존재하기를 구하겠느냐? 만약 3업의 때[三垢]를 완전히 씻어내고 청정한 진여[眞淨]에 전념할 수 있다면, 형체의 작용은 비록 어긋나더라도, 반드시 진리와 들어맞을 것이다.”
대중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말기를 굳게 요청하니, 불조는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그것을 요청한다고 되겠느냐?”
곧 방으로 돌아가서 단정하게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 문득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불조의 속가제자[白衣弟子] 여덟 사람이 서산(西山)에 들어갔다. 나무를 베다가, 문득 보니 불조가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의복은 선명하고 자태와 거동이 화창하며 즐거운 모습이었다. 모두가 놀라 기뻐하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셨습니까?”
불조가 말하였다.
“나는 항상 살아 있다.”
아는 친구들의 안부를 자세히 물어보고, 한참 후에 떠나갔다. 여덟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법을 함께 받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 함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어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옷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어떤 기록에 전해진다.
“이 축불조가 『법경경(法鏡經)』과 『십혜(十慧)』 등을 번역해 출간하였다.”
그러나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을 고찰해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한(漢)나라 영제(靈帝)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사문 엄불조(嚴佛調)가 안현도위(安玄都尉)와 함께 『법경경』과 『십혜』 등을 번역해서 출간하였다는 말이 「역경전(譯經傳)」에 실려 있다.”
이 이야기 속의 불조는 곧 동진(東晋) 시대의 사람인데, 당시 사람들이 이름자가 같은 것을 보고 동일인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니 이는 잘못이다.
4) 기역(耆域)
기역은 천축국 사람이다. 중국과 오랑캐 나라를 두루 떠돌아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신기(神奇)하였다. 천성이 풍속을 소홀히 여겼다. 자취와 행방이 일정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추측할 수 없었다. 천축국을 떠나서부터 부남(扶南)에 이르기까지 여러 바닷가를 지났다. 이어 교주(交州)와 광주(廣州)에 이르기까지 두루 신령하고 기이한 일이 있었다.
이미 양양에 도달하자, 배를 타고 양자강을 넘고자 하였다. 뱃사공이 그를 보니, 인도 사문이고 의복이 낡아 누추하였다. 그러므로 가볍게 여겨 태워주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북쪽 둑에 도달해보니, 기역도 역시 이미 강을 건너와 있었다. 앞서서 걸어갈 때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역이 손으로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 호랑이는 길에서 내려가 그곳을 떠났다. 양쪽 강둑에서 이를 본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무리를 이루었다.
진(晋)의 혜제(惠帝, 290~306) 말기에 낙양(洛陽)에 이르니, 모든 도인들이 절을 하였다. 기역은 편안히 꿇어앉아, 얼굴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때로는 혹 사람들에게 전생의 몸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지법연(支法淵)은 소[牛]로 살다가 이승에 온 사람이라 하였다. 축법흥(竺法興)은 사람 가운데 살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온 사람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대중 승려들의 의복이 화려한 것을 꾸짖으며, 본래의 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낙양의 궁성을 보고 말하였다.
“도리천(忉利天)의 궁성과 비슷한데, 다만 자연과 사람이 한 일이 같지 않을 뿐이다.”
기역이 사문 기사밀(耆闍蜜)에게 말하였다.
“이 궁성을 지은 목수는 도리천에서 온 사람이다. 그런데 궁성이 낙성되자, 곧 천상 세계로 돌아갔다. 집의 용마루 기와 밑은 아마도 1천5백 개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당시 모두가 말하였다.
“예전에 이 궁성을 지은 장인(匠人)은 참으로 그릇을 만들어 기와 밑에 붙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궁전이 낙성된 후 바로 살해당하였다.”
당시 형양(衡陽)태수인 남양(南陽)의 등영문(滕永文)이 낙양에 있었다. 그러면서 만수사(滿水寺)에 몸을 의지하여 머물다가 병을 얻었다. 한 해가 지나도 낫지 않았다. 두 다리가 굽고 휘어져, 일어나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기역이 그곳에 가서 그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병을 낫게 하고 싶은가요?”
그러고는 맑은 물 한 잔과 버들가지 하나를 갖고 왔다. 곧 버들가지로 물을 뿌리고, 손을 들어올려, 등영문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반복하였다. 이어 손으로 등영문의 두 무릎을 끌어당겨 일어서게 하였다. 그러자 곧 일어나서 걷는 것이 옛날과 같았다.
이 절 안에 수십 그루의 사유수(思惟樹) 나무가 있었지만, 모두 말라죽었다. 기역이 등영문에게 물었다.
“이 나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나요?”
등영문이 대답하였다.
“여러 해 되었소.”
기역은 곧 나무를 향해 주문을 외웠다. 앞서 등영문을 향해서 외운 주문의 방법과 같았다. 곧 나무에 싹이 돋아나고, 성긴 가지를 부추겨 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예전에 한참 더위가 기승부릴 때에, 어떤 사람이 오래된 체증[病癥]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기역은 물을 받아내는 그릇을 병자의 배 위에 올려놓고, 흰 천으로 배를 덮었다. 수천 마디의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곧 고약한 냄새가 풍겨나며, 온 집안에 깊이 배어들었다.
이때 병든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살아났다.”
기역이 사람을 시켜 천을 걷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그릇 속에 진흙 앙금 같은 것이 몇 되나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병자는 마침내 살아났다.
낙양에 전쟁으로 난리가 일어나자, 낙양을 떠나 천축국으로 돌아갔다.
낙양의 사문 축법행(竺法行)은 뛰어난 분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악령(樂令)과 견주었다.
그가 기역에게 요청하였다.
“상인(上人)께서는 이미 득도하신 스님이시니, 한마디 말씀을 남기시어 영원한 훈계로 삼게 해주소서.”
기역이 말하였다.
“두루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대중들이 모이자 기역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말하였다.
“입을 지키고 몸과 생각을 거두며, 삼가 여러 악한 일을 범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닦고 행하라. 이와 같이 하면 세상에서 득도하느니라.”
말을 마치자 곧 선정의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법행이 거듭 요청하였다.
“상인께서는 우리가 듣지 못한 법문을 내려주시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게송의 뜻은 여덟 살 난 동자라도 이미 암송하니, 득도하신 분께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역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덟 살에 비록 외웠다 하더라도, 백 살이 되어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를 외운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八歲雖誦百歲不行訟之何益] 사람들은 모두 득도한 사람을 공경할 줄은 알면서도, 이를 행하면 자신도 득도한다는 것을 모른다. 나의 말은 비록 적으나 행하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많도다.”
이에 작별하여 떠났다. 이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각 기역을 점심 식사에 초청하였다. 기역은 이들 모두에게 가겠다고 허락하였다. 이튿날 아침 5백 집에 모두 한 사람의 기역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자기에게만 홀로 방문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뒤에 서로 물어보고는 비로소 분신(分身)이 내려온 것임을 알았다.
길을 떠나자 여러 도인들이 송별하여 하남성에 이르렀다. 기역이 천천히 걸어가도 뒤따라오는 사람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자 기역은 곧 지팡이로 땅에 금을 긋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헤어집시다.”
그 날 장안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기역이 그곳 절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 장사꾼 호습등(胡濕登)은 곧 이날 날이 저물 무렵에 기역을 고비 사막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계산해보니 이미 9천여 리나 걸은 것이다. 그가 서역으로 돌아간 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모른다.
주석
1 유요(劉曜)를 죽이고 후조(後趙)의 제왕이 되었다.
2 동진(東晋)의 정치가. 대사마(大司馬)로서 황제(皇帝) 혁(奕)을 폐위시키고 간문제(簡文帝, 371~372)를 옹립하고 찬탈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고승전』 9권(ABC, K1074 v32, p.851c01-p.859a01)
고승전(高僧傳) 제10권
3. 신이 ②
1) 건타륵(犍陀勒)
건타륵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낙양(洛陽)에 온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대중들은 비록 그의 지조 있는 풍모를 공경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의 경지를 헤아리지는 못하였다. 훗날 대중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낙양의 동남쪽에 반치산(槃鵄山)이 있습니다. 그 산에는 예전의 절터가 있어 기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 함께 수축하여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중들은 아직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시험 삼아 뒤쫓아가서 조사해 보았다. 산에 들어가 한 곳에 이르니, 사면이 평탄하였다. 건타륵은 이를 보여주었다.
“이곳이 곧 절터입니다.”
곧 그곳을 파보니, 과연 절의 기초석[石基]이 발견되었다. 다음에 강당과 승방이 있던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말대로 모두 증명되었다. 대중들은 모두 경탄하면서, 이내 함께 수축하여 절을 세웠다. 건타륵을 절의 주지로 모셨다.
절은 낙양성에서 1백여 리 거리에 있다. 그는 이른 아침마다 낙양에 이르렀다. 여러 절을 다니다가, 해가 저물면 기름을 한 발우 구걸하여, 절로 돌아가 등불을 밝혔다. 이것으로 일과를 삼아 한 번도 어기거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걸음을 잘 걷는 어떤 사람이 건타륵을 따르며, 그의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자 하였다. 달리고 치달리면서 땀을 흘렸으나, 고생만 하고 미치지 못하였다. 건타륵은 그에게 가사 끝자락을 잡고 따라오게 하였다. 오직 매운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는 피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잠깐 사이에 절에 이르렀다. 건타륵이 후에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2) 가라갈(訶羅竭)
가라갈은 본래 번양(樊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2백만 글자의 경전을 외웠다. 성품이 텅 비어 그윽하고, 계율과 절조를 지켰다. 거동이 착하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두타행(頭陀行)을 많이 하여 홀로 산과 들에서 잠잤다.
진(晋) 무제(武帝)의 태강(太康) 9년(288)에 잠시 낙양에 이르렀다. 당시 낙양에는 돌림병이 매우 유행하여 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가라갈은 이들을 위하여 주문을 외워 치료하였다. 열 사람 가운데 여덟, 아홉 사람을 고쳤다.
진(晋) 혜제(惠帝)의 원강(元康) 원년(291)에 이르러, 곧 서쪽으로 들어갔다. 누지산(婁至山)의 석실 안에 머물면서 좌선(坐禪)에 몰두하였다. 이 석실은 물과 거리가 매우 멀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시냇물을 끌어대고자 하였다. 가라갈은 말하였다.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곧 스스로 일어서서, 왼발로 석실의 서쪽 석벽을 밟아 눌렀다. 그러자 벽이 손가락 길이만큼 무너져 내렸다. 발을 들어내자 물이 그 속에서 나왔다. 맑고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깨끗하였다. 일년 내내 끊어지지 않았다. 와서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멎고, 질병이 제거되었다.
원강 8년(298)에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서쪽 나라의 법에 의하여 화장하였다. 여러 날 불이 타올랐건만, 시신은 아직도 불길 속에 앉아 있었다. 길이 재가 되지 않기에, 이에 다시 석실 안으로 옮겼다.
∙축정(竺定)
후에 서역 사람인 축정은 자(字)가 안세(安世)였다. 동진(東晋)의 함화(咸和) 연간(326~334)에 그 나라로 가서 직접 보았다. 근엄하고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는 이미 그가 죽은 뒤,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축정은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이 사실을 도인과 속인들에게 전하였다.
3) 축법혜(竺法慧)
법혜는 본래 관중(關中) 사람이다.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숭고산(嵩高山)에 들어가 부도밀(浮圖密)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진(晋) 강제(康帝)의 건원(建元) 원년(343)에 양양(襄陽)에 이르렀다. 양숙자사(羊叔子寺)에 머물면서, 따로 공양을 받지 않았다.
걸식할 때마다 새끼로 맨 걸상을 갖고 다니면서, 마음가는 대로 한적하고 넓은 길에서 이를 펼치고 앉았다. 때로 혹 비를 만나면 기름을 먹인 배자[油帔]로 자신을 덮었다. 비가 그치면 오직 새끼로 맨 걸상만이 보이고, 법혜가 있는 곳은 알 수 없었다. 묻고 찾는 와중에, 법혜는 이미 승상에 앉아 있었다.
늘 제자인 법조(法照)에게 말하였다.
“너는 과거 시절에 닭의 다리를 부러뜨린 일이 있다. 그에 대한 재앙이 곧 이르리라.”
갑자기 법조는 어떤 사람에게 발길로 차여서, 마침내 영구히 다리를 못 썼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신야(新野)에 한 늙은이가 있다. 막 숨이 넘어가려 하여, 내가 그를 제도하고자 한다.”
곧 밭두렁 사이를 걸어갔다. 과연 한 늙은이가 소를 끌어 밭을 가는 것이 보였다. 법혜가 그 늙은이에게 소를 달라고 구걸하였다. 늙은이가 주지 않자, 법혜는 앞으로 나아가 소의 고삐를 잡았다. 이에 늙은이는 그의 범상치 않음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소를 시주하였다. 법혜는 소를 끌고 와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그런 후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는, 다시 되돌아와서 소를 늙은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안 되어 노인은 죽었다.
그 후 정서장군(征西將軍) 유치공(庾稚恭)이 양양에 주둔하였다. 그는 본래 법을 받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다 법혜에게 비상한 자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몹시 질투하였다. 법혜는 미리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전생의 빚을 갚을 자가 곧 이곳에 이를 것이다. 그대들에게 권유하고 경계하노니, 정성껏 복과 선행을 닦도록 하라.”
이틀 뒤에 과연 그를 붙잡아 처형하였다. 그때 나이는 58세이다. 죽음에 즈음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은 후 사흘이 지나면,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질 것이다.”
그 날이 되자 과연 한 길 가까이 성문이 잠길 정도로 홍수가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주민들이 많았다.
∙범재(范材)
당시 범재가 있었다. 파서(巴西) 낭중(閬中)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사문이 되어 하동(河東)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쳤다. 맨발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낡은 옷 한 벌만으로 지냈다. 말하는 것이때로는 제법 영험이 있었다. 후에 마침내 도에서 물러나서, 세속에 물들어 장릉(張陵)1)의 가르침을 익혔다고 한다.
4) 안혜칙(安慧則)
안혜칙은 성씨와 족속이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늘 하는 성격이 없었고, 탁월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또한 바른 글씨[正書]를 쓰는 데 솜씨가 있고 이야기를 잘하였다.
진(晋)의 영가(永嘉) 연간(307~313)에 천하에 돌림병이 유행하였다. 그러자 주야로 정성껏 기도하였다. 천신(天神)에게 약을 내려서 만민을 치유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어느 날 절문을 나서다가 항아리처럼 생긴 두 개의 돌을 보았다. 기이한 물건이라 의아해하여 집어서 이를 보았다. 과연 신비한 물이 그 안에 있었다. 음복한 병자들이 모두들 치유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낙양의 대시사(大市寺)에 머물렀다. 손수 가는 글씨로 노란 비단에『대품경(大品經)』 한 부를 베껴 썼다. 그것을 합쳐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글자는 작은 콩알과 같았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모두 10여 본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본을 여남(汝南)의 주중지(周仲智)의 처인 호모(胡母)씨에게 주어 공양하게 하였다.
호모씨는 양자강을 넘어올 때 경을 갖고 따라왔다. 그 후 재화로 불길이 번져감에 따라, 창졸간에 경을 취할 여가가 없었다. 슬피 울면서 오뇌에 싸여 있었다. 불길이 잡힌 후에 잿더미 속에서 이를 발견하였다. 첫머리 축(軸)부터 모습에 하나도 훼손된 것이 없었다. 이때 이를 보고 들은 사람들은 삿됨을 돌려서 믿음을 고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경은 지금 서울의 간정사(簡靖寺)의 수니(首尼)의 처소에 있다.
∙강혜지(康慧持)
당시 낙양에는 또 강혜지가 있었다. 그도 신이하게 영적으로 통한 사람이라 한다.
5) 섭공(涉公)
섭공은 서역 사람이다. 텅 비어 기를 마시고, 오곡을 먹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5백 리를 갈 수 있고, 미래의 일을 손바닥 가리키듯 영험 있게 예언하였다.
부견(符堅)의 건원(建元) 12년(376)에 장안에 이르렀다. 비밀주문을 외워 신룡(神龍)을 내려오게 할 수 있었다. 가뭄이 들 때마다 부견이 항상 그를 초청하여, 용이 내려오는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그러면 갑자기 용이 발우 속으로 내려왔고, 하늘에서는 곧 큰 비가 쏟아졌다. 부견과 뭇 신하들이 직접 발우를 들여다보고, 모두 그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이에 부견은 그를 받들어 나라의 신(神)으로 삼았다. 선비와 서민들도 모두 엎드려 그의 발에 예를 올렸다. 이때부터 다시는 심한 가뭄으로 인한 근심이 없었다.
건원 16년(380) 12월에 이르러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부견은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죽은 후 7일이 되어, 부견이 그의 신이(神異)함 때문에 시험 삼아 관을 열어 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염할 때 덮은 것[殮被]만이 남아 있었다.
건원 17년(381)에 이르자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6월까지 이르렀다. 부견은 반찬을 줄이고 현판을 거둬들여 조화로운 기운을 맞아들였다. 그러자 7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부견이 중서령(中書令) 주융(朱肜)에게 말하였다.
“섭공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짐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늘에 대하여 마음을 태웠겠느냐? 그 분은 큰 성인이시다.”
주융이 말하였다.
“그 술법은 그윽하고 아득하여, 실로 예전에 없었던 기이한 술법이었습니다.”
6) 석담곽(釋曇霍)
담곽이 어디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하였다. 항상 무덤 사이나 나무 밑에 거처하면서, 오로지 신력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당시 하서(河西)의 선비족(鮮卑族)인 투발리록고(偸髮利鹿孤)가 악한 마음을 품고, 서평(西平)에 자리 잡고서 스스로 왕이라 자칭하였다. 그리고는 연호를 건화(建和)라 하였다.
건화 2년(401) 11월에 담곽은 하남(河南)으로부터 서평에 이르렀다. 지팡이 하나를 짚었다. 사람들을 그 앞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지혜의 눈을 지닌 지팡이다. 이것을 받들면 득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옷과 물건을 보냈다. 그러면 받아서는 땅에 팽개치거나 혹 강물 속에 버렸다. 얼마 후에 옷 등은 저절로 본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조금도 더러워진 곳이 없었다.
바람과 같이 빠르게 걸었다. 힘있는 사람이 뒤쫓아가도, 항상 고단하기만 하고 미치지는 못하였다.
어떤 사람의 생사와 부귀함과 천해짐을 말하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그의 지팡이를 숨겨놓으면, 담곽은 잠시 눈을 감아 그 자리에서 그것이 있는 곳을 알았다. 모두가 그의 신이함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의 경지를 추측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투발리록고의 아우 중에 누단(耨檀)이 있었다. 거기(車騎)장군에 임명되었다. 그 권력이 나라를 기울어뜨릴 만하였다. 천성적으로 시기심이 많아, 도적질하고 남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담곽은 늘 누단에게 말하였다.
“마땅히 선한 업을 닦아, 도를 행하여 후세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누단이 말하였다.
“나는 선대 이래로 천지와 명산대천을 공경하고 섬겨왔다. 이제 하루아침에 부처를 받든다면, 선인들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 그대가 만약 7일 동안 먹지 않아도 얼굴빛이 여느 때와 같을 수 있다면, 이는 불도의 신명(神明)함 때문이니, 나도 마땅히 이를 받들겠다.”
곧 사람을 시켜 보이지 않게 7일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담곽은 배고프고 목마른 기색이 없었다. 누단은 사문 지행(智行)을 시켜, 몰래 떡을 지니고 가서 담곽에게 주게 하였다. 담곽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누구를 속였던가? 나라의 임금을 속이라는 것이냐?”
누단은 이를 깊이 기특하게 생각하여, 두텁게 우러러 공경하기를 더하였다. 이로 인하여 믿음을 돌이키고, 살생을 절제하며 자비심을 일으켰다. 나라 안 사람들이 이렇게 그의 도움을 입자, 모두가 그를 큰 스승님[大師]이라 불렀다. 거리나 마을에 출입할 때면 백성들이 모두 영접하여 그에게 예를 올렸다.
누단에게 딸이 있었다. 병이 매우 위독하여 담곽을 초청하여, 목숨을 구해 달라 하였다. 담곽이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습니다. 성인도 바꿀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를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누단이 굳게 요청하였다. 그때 궁전의 뒷문이 닫혀 있었다. 담곽이 말하였다.
“급히 뒷문을 여십시오. 때맞추어 열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누단이 명하여 이를 열게 하였다. 그러나 미치지 못하여 죽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3년(407)에 누단이 발발(勃勃)에게 격파되었다. 서량(西凉) 땅에 전쟁으로 인한 난리가 일어나자,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다.
7) 사종(史宗)
사종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항상 삼베옷을 입었고, 혹 이를 겹쳐서 납의(納衣)로 삼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그를 마의도사(麻衣道士)라 불렀다.
몸에 부스럼이 많았고, 성격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항상 광릉(廣陵)의 백토(白土) 광산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노래를 부르고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스스로 흐뭇하고 화창하게 생각하였다. 품삯을 받으면 받는 대로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깃들고 쉬는 것은 정해진 장소가 없었다. 어느 때에는 숨었다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시 고평(高平)의 단기(檀祇)가 강도(江都)의 수령이 되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불러 응대하니, 기연에 민첩하여 구애되고 막히는 것이 없었다. 학문에 널리 통달하여, 예전 일을 상고하였다. 또한 변설이 깊은 선비였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욕심 있으면 부족한 것이 괴로우나
욕심 없으면 근심 또한 없어라.
아직 맑게 마음 비운 것이 아니라서
새끼 띠 두르고 검은 갖옷 입었네.
한 세상 떠돌며 흐르기를
매어 두지 않은 배와 같이 하라.
번뇌 다할 때를 맞아
산 구릉에 깃들이리라.
단기는 비상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면서, 무명 서른 필을 보냈다. 사종은 이를 모두 걸인들에게 주었다.
후에 성명을 알지 못하는 어떤 한 도인이 있었다. 항상 지팡이 하나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에 해염령(海鹽令)을 찾아와 말하였다.
“며칠 동안 길을 가고자 하여, 잠깐 사람 하나를 쓸까 합니다. 줄 수 있습니까?”
해염령이 마음대로 취해 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거위와 오리를 지키는 어린아이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복장이 남루한 아이를 골라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산 위에 이르니, 그곳에는 집이 있었다. 집 안에는 세 사람의 도인이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 함께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점심 때가 되자 시장해져 도인은 어린아이를 위하여 주인에게 나아가 먹을 것을 빌었다. 작은 사발에 음식을 얻어 왔다. 모양이 익힌 쑥과 같았다. 이것을 먹으니, 배고픈 것이 멎었다. 어둠이 서리자 도인은 그곳을 떠나 돌아가려고 하였다. 집 안 사람의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사종이 있는 곳을 아는가? 그의 유배생활은 언제쯤이나 끝나는가?”
그러자 도인이 말하였다.
“서주(徐州) 강북의 광릉 백토 광산에 있으며, 그의 유배기간을 헤아려보니 모두 마쳤습니다.”
집 안의 사람은 곧 편지를 썼다.
“부탁하노니 그대가 전해주게나.”
도인은 편지를 어린아이에게 부탁하였다. 새벽 무렵에 곧 현(縣)에 이르러 해염령과 만나서 말하였다.
“며칠 이곳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러자 현령은 매우 좋다고 하면서 물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도인이 대답하였다.
“책과 소(疏)뿐입니다.”
도인은 꼭 관청 일을 보는 청사에서 잠을 잤다. 상자와 지팡이는 침상머리에 붙여 두고 지녔다. 현령이때를 노려, 사람을 시켜 이것을 훔쳐서 보고자 하였다. 도인은 미리 그것을 알고 해가 저물자마자, 상자와 지팡이를 높이 매달아놓고 바로 그 아래에 누웠다. 그러므로 영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후 현령 곁을 떠나면서 말하였다.
“제가 잠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항상 남의 물건을 훔치려 하므로, 바로 그것 때문에 곧 떠나는 것입니다.”
현령은 앞서 따라갔던 어린아이를 불렀다. 그간에 경유한 곳을 물어보니, 어린아이가 말하였다.
“도인은 나에게 지팡이를 잡게 하고 바람처럼 떠나자, 혹 발 밑에 파도와 물결소리가 들려왔을 뿐입니다.”
아울러 산 속의 사람이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자신의 옷 허리띠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현령은 그 편지를 열게 하여 이를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 편지를 베껴 써서 취하고, 본래의 편지는 봉하여 사람을 시켜 어린아이를 전송하였다. 백토 광산에 이르러, 사종에게 편지를 보내주게 하였다. 사종은 편지를 열어보고 크게 놀랐다.
“네가 어떻게 봉래(蓬萊) 도인의 편지를 얻었느냐?”
그 후 사종은 남쪽 오(吳)나라 회계(會稽) 지방을 노닐었다. 어느 날 어량(漁梁)을 지나다가, 고기잡이들이 마구잡이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다. 사종이 곧 상류(上流)에서 목욕을 하니, 고기 떼가 모두 흩어졌다. 몰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 후 상우(上虞)의 용산(龍山) 대사(大寺)에서 쉬었다. 『장자』와 『노자』이야기를 잘하고,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탐구하여 밝혔다. 그러면서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기에, 세상에서는 그를 알지 못했다.
회계의 사소(謝邵)ㆍ위매지(魏邁之)ㆍ위방지(魏放之) 등은 모두 그의 돈독한 논리가 깊고 넓다 하여,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하였다.
그 후 함께 머물던 사문이, 사종이 밤에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못 봉래의 일을 말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사종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도연명(陶淵明)의 기록에 “백토 광산에서 세 사람의 색다른 법사를 만났다”고 하였는데, 그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어떤 장사꾼이 바다를 건너 가다가, 외따로 떨어진 섬 위에서 한 사문을 만났다. 편지를 맡기면서 사종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편지를 배 안에 두었다. 동료가 그 편지를 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편지가 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배가 백토 광산에 이르자 편지가 날아서 사종에게로 나아가니, 사종이 갖고 떠났다.”
8) 배도(杯度)
배도는 성명을 알지 못한다. 항상 나무 술잔을 타고 강물을 건너 다녔으므로[木杯度水], 이로 인하여 배도라 일컬었다. 처음 나타난 곳은 기주(冀州)였다. 세밀한 행은 닦지 않았다. 그러나 신비한 힘이 탁월하여, 세상에서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느 날 북방에서 한 집에 기숙하였다. 그 집에는 한 구의 금불상이 있었다. 배도가 훔쳐서 떠나자, 집주인이 알아차리고 뒤쫓았다. 배도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말을 달려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맹진강[孟津河]에 이르렀다. 나무 술잔을 물 위에 띄우고, 여기에 올라 타 강을 건너갔다. 바람과 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볍고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았다. 이윽고 둑을 건너서 서울에 도달하였다. 겉보기에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 정도였다. 새끼로 띠를 두르고, 남루한 차림으로서 겨우 몸을 가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말도 또한 들쭉날쭉하며, 기쁨과 노여움이 고르지 않았다.
때로는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그 속에서 목욕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신발을 신고 침상에 오르기도 하며, 때로는 맨발로 걸어서 저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오직 꼴망태 하나만을 멜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잠시 연현사(延賢寺)의 법의(法意) 도인의 거처를 찾아가니, 법의는 특별한 방을 주어 접대하였다.
그 후 연보강(延步江)을 건너고자 하여 강가에서 배를 찾았다. 그러나 사공은 배도를 실어줄 수 없다고 알려왔다. 다시 발을 술잔 속에 포개서 사방을 돌아보며 시를 읊조렸다. 그러자 술잔이 저절로 흘러가, 곧바로 강을 건너 북쪽 둑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광릉(廣陵)을 향하여 갔다.
마을의 이(李)씨 집안에서 행하는 팔관재(八關齋)를 만났다. 전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곧바로 재당(齋堂)에 들어가 앉으면서, 꼴망태는 뜰 가운데 놓아두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누추하므로,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씨는 꼴망태가 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담장 밑으로 옮겨 놓으려고 하였다. 몇 사람을 시켜 들어올리려 하였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배도는 식사를 마치고, 이를 집어 들고 떠나면서 웃으며 말하였다.
“사천왕(四天王)이니라. 이가야!.”
이때 심부름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가 망태 속을 엿보았더니, 네 명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모두 키가 몇 치 가량 되었다. 얼굴 생김이 단정하고, 옷이 선명하고 깨끗하였다. 이에 뒤쫓아가며 찾았으나,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사흘이 지나서, 서쪽 경계의 몽롱(蒙籠)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씨는 꿇어 엎드려 절하였다. 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공양드렸으나, 배도는 재계를 지키는 데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었다. 심지어 매운 생선회에 이르기까지 먹어, 속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바치는 것이 있으면,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였다.
패국(沛國)의 유흥백(劉興伯)이 연주(袞州) 자사가 되어, 사신을 보내 맞아들였다. 망태를 걸머지고 왔다. 유흥백이 사람들에게 들어올려 보라 했다. 그러나 10여 명이 이겨내지 못하였다. 유흥백이 직접 망태 속을 보니, 오직 다 떨어진 납의 한 벌과 나무 술잔 하나만이 보였다.
그 후 이씨 집으로 돌아와 다시 30여 일을 있었다. 날이 맑은 어느 날 새벽 문득 말하였다.
“가사 한 벌을 얻고 싶은데, 점심때까지 마련해 놓게.”
곧 일을 시작하였으나, 점심때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배도가 말하였다.
“잠시 나갔다가 오겠네.”
집을 나가 날이 어둡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온 경내에 이상한 향기가 감돌아 깔려 있었다. 이를 의아해하며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곳곳으로 배도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북쪽 바위 밑에서 다 떨어진 가사를 땅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죽은 것을 발견하였다. 머리의 앞부분과 다리의 뒤편에는 모두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은 극히 선명하고 향기로웠다. 하루 저녁이 지나자 시들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함께 시신을 장례 치렀다.
며칠이 지났다. 어떤 사람이 북쪽에서 이곳에 와서 말하였다.
“배도가 망태를 지고, 팽성(彭城)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곧 함께 관을 열어보니, 오직 미투리 신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팽성에 이른 다음 속인인 황흔(黃欣)이란 사람을 만났다. 황흔은 깊이 불법을 믿었다. 배도를 만나자 예배드리고 초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몹시 가난하여 다만 보리밥만이 있을 뿐이었다. 배도는 이를 달게 먹고, 느긋해하였다. 반년을 그 집에 머무르다가, 어느 날 문득 황흔에게 말하였다.
“꼴망태 서른여섯 장을 찾았으면 좋겠네. 내가 꼭 써야 하겠다.”
황흔이 대답하였다.
“이곳에 바로 열 장 가량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서 살 수가 없으니, 아마도 다 마련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배도가 말하였다.
“자네는 다만 집안을 조사해서 찾아 보라. 아마도 있을 것이야.”
황흔이 곧 샅샅이 찾아보니, 과연 서른여섯 장을 얻었다. 이것을 뜰 가운데 줄지어 놓았다. 비록 그 수는 갖췄지만, 역시 대부분이 찢어지고 떨어졌다. 황흔이 물건을 차례로 자세히 볼 즈음, 모두가 이미 새 것으로 완전했다. 배도는 이것을 밀봉하고, 이어 황흔에게 봉한 것을 열게 하였다. 곧 돈과 비단이 모두 그 속에 가득하였다. 거의 백만 냥쯤 되었다. 알 만한 이들은 이것을 배도의 분신이 다른 땅에서 얻은 선물과 보시를 회향하여서, 황흔에게 보시한 것이라 말하였다. 황흔은 이것을 받아 모두 공덕을 위하여 썼다.
1년 가량 지나, 배도는 이 집을 떠났다. 황흔이 양식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튿날 아침 양식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만 보이고, 배도의 소재는 알지 못하였다.
한 달 가량 지나서, 다시 그는 서울에 이르렀다. 당시 조구(潮溝)의 주문수(朱文殊)는 어려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배도는 자주 그 집에 찾아왔다. 주문수가 배도에게 말하였다.
“제자가 만약 죽어서 고통에 빠지거든, 원컨대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죽어서 좋은 곳에 있게 된다면, 불법을 같이 닦는 벗[法侶]이 되기를 원합니다.”
배도가 대답하지 않자, 주문수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불법에서 묵연히 말이 없는 것은 이미 허락한 것입니다.”
그 후 동쪽 지방을 노닐어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길에서 낚시꾼을 만났다. 그에게 나아가 물고기를 구걸하였다. 그러니 낚시꾼이 썩은 물고기 한 마리를 보시하였다. 배도가 손으로 반복해서 그것을 갖고 놀다가 도로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물고기는 헤엄치며 떠나갔다.
또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을 만났다. 다시 그에게도 물고기를 구걸하였다. 투망꾼[網師]은 성을 내고, 욕을 하며 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두 개의 돌멩이를 주워서 물 속에 던졌다. 그러니 갑자기 두 마리의 물소가 나타나 그의 그물 속에서 싸웠다. 그물이 찢어지고 망가지자, 물소도 보이지 않았고, 배도도 이미 사라졌다.
걸어 송강(松江)에 이르렀다. 곧 물 위에 삿갓을 뒤집어놓고[仰蓋], 올라타서 강둑으로 건너갔다. 도중에 회계(會稽)의 섬현(剡縣)을 지나서 천태산에 올라갔다. 몇 달이 지나서야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승가타(僧佉吒)라는 외국 도인이 서울 아랫녘의 장간사(長干寺)에 머물렀다. 객승인 승오(僧悟)가 거타와 같은 방에 묵었다. 어느 날 창문 틈으로 엿보았다. 가타가 사찰을 취하여 이를 받쳐들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내려오려 하였다. 승오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깊이 공경하고 우러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 또 성이 장(張)씨이며, 이름은 노(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으면서도, 항상 스스로 살이 찌는 것을 흐뭇해하였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단벌의 무명옷만을 입었다. 승가타가 길을 가다가 장노를 만나자, 기뻐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저는 동쪽에서 채돈(蔡扽)을 보았고, 남쪽에서는 마생(馬生)에게 안부를 물었으며, 북쪽에서는 왕년(王年)을 만났습니다. 이제 배도를 찾아가려 합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노는 곧 회화나무[槐樹]를 제목으로 노래를 지었다.
어둡디 어두운 큰 우주 안에
빛 비춤 실로 뚜렷이 나타나건만
무슨 일이 그대 혼미케 하여
멋대로 재앙을 부르시는가?
즐거운 곳 찾는 이 없고
주머니 뒤집듯 변하는 인정의 쓰디쓴 길에
소나무 잣나무의 지조 없다면
무엇으로 바람서리 이겨내리오.
한가로이 붉은 노을 밖에 깃들어
길이 파란 하늘 벗어나 노래 불러라.
맑디맑은 영혼 무색계 밖에서
인연 있는 고을을 만나리.
빛나는 세월 한후(漢后)를 돕고
아름다운 시대 은왕(殷王)을 도운
구방에 자취를 감추었던
그대와 나는 두 신선 아니랴.
세속을 떠도는 그대 만남에
보는 족족 시리고 상한 일일세.
간략히 품은 생각 노래했으나
어찌 삼가는 글 다했다 하리.
승가타가 말하였다.
“이전에 선생님을 뵈었을 적에는, 선의 사유가 그윽이 높아 한 번 앉으면 백 년을 앉으셨습니다. 큰 자비로움이 제 마음에 배어드니, 마음을 텅 비워 마른 해골을 생각하겠습니다.”
역시 같은 제목의 게송을 지었다.
흐르고 흐르는 세상사
손해와 이익도 넘쳐나
정신에 먼지 끼려 하고
멋대로 흐뭇하고 기쁜 마음 생기네.
오직 우리 밝은 님만은
깊은 깨달음과 선견지명 있어
형상을 뜬 거품으로 생각하고
그림자를 빠른 번개처럼 보네.
번번이 화려한 소리를 넘어뜨리고
문장과 언변 멸시하고 추하게 보며
색을 보고 공함을 깨달아
중생을 어루만지며 변화함을 가슴 아파 하네.
분분한 일 버리고 유(有)를 끊으며
습기는 자르고 연모도 없애
푸른 가지 구비진 그늘에서
깨끗한 띠풀로 자리 삼았네.
밭두둑에 의지하며 마즙을 마시고
절벽을 이웃하여 흘러드는 물 마시네.
지혜와 선정으로 헤아려 비추어 보아
미묘한 진여로 권속을 삼네.
자비심 증장하여
깊이 생각함에 게으름 없어라.
말을 마치자 각기 떠났다. 그 후의 세월 속에서 다시는 이 두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전하는 사람이 말한다.
“승오를 데리고 함께 남악(南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노와 배도가 서로 만났다. 그들이 나눈 말은 매우 많았으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배도는 여전히 도읍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떠돌아다녀서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초청하면, 혹 가기도 하고 혹 가지 않기도 하였다.
이때 남주(南州)에 진(陳)씨 일가가 있었다. 자못 의식이 넉넉한 집안이었다. 배도가 그 집에 가자 매우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서울의 아랫녘에 또 한 사람의 배도가 있다고 하였지만, 진씨 집의 부자 다섯 사람은 모두 믿지 않았다. 짐짓 서울의 아랫녘으로 내려가 그를 보았다. 과연 그의 집에 있는 배도와 형체나 모습이 같았다.
진씨는 그를 위하여, 한 홉의 꿀에 잰 생강과 작은 장도칼ㆍ훈륙향(熏陸香)ㆍ수건 등을 마련하였다. 배도는 곧 꿀에 잰 생강을 다 먹어 치우고, 나머지 물건은 그대로 무릎 앞에 두었다. 그들 부자 다섯 사람은 혹 그가 그의 집에 있는 배도가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곧 두 아우는 그곳에 남아 머물면서 지켜보게 하였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의 배도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무릎 앞에도 역시 향과 작은 칼 등이 있었다. 다만 꿀에 잰 생강을 먹지 않은 것만이 다를 따름이었다. 이어 그는 진씨에게 말하였다.
“칼이 무디니, 갈아놓는 것이 좋겠소.”
두 아우가 도읍지에서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곳의 배도는 이미 영취사(靈鷲寺)로 떠났습니다.”
그의 집에 있던 배도가 문득 두 폭의 노란 종이를 구하여 글을 썼다. 쓰는 것이 문자는 아니었다. 두 폭의 종이를 합쳐보니, 그 뒤쪽도 같았다. 진씨가 물었다.
“상인(上人)께서는 무슨 문권(文券)을 만드십니까?”
배도가 대답하지 않아, 끝내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오군(吳郡)의 백성으로 주영기(朱靈期)란 사람이 고려(高驪)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바람을 만나 배가 표류하였다.
9일이 지나서야 한 섬에 이르렀다. 그 섬에는 산이 있었다. 매우 높고 큰산이었다. 산에 들어가 땔감을 채집하다가, 사람 다니는 길을 발견하였다. 주영기는 곧 몇 사람을 시켜 길을 따라가 구걸하게 하였다. 10리 남짓 가니, 경쇠소리가 들려오고 향을 사르는 냄새가 났다.
이에 그들이 함께 부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한 절이 나타났다. 매우 빛나고 화려하여 대부분 7보(寶)로 장엄되어 있었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돌로 만든 사람으로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조금 걷자니 창도(唱導)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돌아가 다시 보았으나 여전히 그들은 돌로 만든 사람이었다. 이에 주영기 등은 서로 생각하였다.
‘이 분들은 성승(聖僧)이며, 우리들은 죄인이어서 만나볼 수 없는 분들이다.’
그래서 함께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고, 다시 가서 보았다. 그랬더니 진인(眞人)이 나타나 주영기 등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여 놓았다. 음식은 채소였으나, 향과 맛이 세속의 음식과 같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는, 함께 머리를 조아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속히 고향에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그 중 한 승려가 말하였다.
“여기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0여 만 리나 됩니다. 그렇지만 지극한 마음만 있다면, 속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어 주영기에게 물었다.
“배도도인을 아십니까?”
“매우 잘 압니다.”
그러자 북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바랑이 있고 석장과 발우가 걸려 있었다. 그 승려가 말하였다.
“이것이 배도의 물건입니다. 이제 그대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발우를 그에게 전해주십시오.”
아울러 편지를 써서 함 속에 넣었다. 따로 푸른 대나무 지팡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뱃전 앞 물 속에 던져 놓고, 뱃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십시오. 힘들이지 않고도 반드시 속히 고향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헤어졌다. 한 사미를 시켜 산문까지 전송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 길로 7리를 가면 곧 배 있는 곳에 이를 것입니다. 먼저 온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7리 가량을 가자 배 있는 곳에 닿았다. 곧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하였다. 오직 배가 산꼭대기 나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서 석두회(石頭淮)에 이르러 머물렀다. 또한 다시는 대나무 지팡이가 있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회수(淮水)로 들어가서 주작문(朱雀門)에 이르렀다. 곧 그곳에서 배도를 만났다. 그는 큰 배의 난간에 올라타고, 지팡이로 뱃전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말아, 말아, 어째서 가지 않니.”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주영기 등이 배 멀리에서 그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배도는 곧 스스로 배에서 내려왔다. 편지와 발우를 취하여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무도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배도는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를 돌아오게 하려는구나.”
발우를 집어 구름 속으로 던졌다가, 도로 이를 거두어들이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 발우를 보지 못한 지가 4천 년이나 되었군.”
배도는 연현사(延賢寺) 법의(法意)의 처소에 있을 때가 많았다. 당시 세상에서는 이 발우가 기이한 물건이라 하여, 다투어 찾아가서 이를 구경하였다. 일설에는 말한다.
“주영기의 배가 표류하다가 한 궁벽한 산에 이르렀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상수 제자로서 예전에 스승의 발우를 지닌 채 치성사(治城寺)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그대에게 부탁하여 발우를 스승님께 돌려드립니다. 다만 한 사람이 이 발우를 뱃전에서 받쳐 들고, 한 사람은 배의 키를 바로잡기만 하면, 저절로 편안히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영기가 가르치는 대로 하니, 과연 온전하게 건너올 수 있었다.”
당시 남주의 배도는, 배의 난간에 올라탔던 그 날, 일찍 집을 나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진씨가 이튿날 아침에 보니 문짝[門扇] 위에, 푸른 글씨로 여섯 자가 씌어 있었다.
‘복과 덕의 출입구이니, 신령한 분께서 내려오시네[福德門靈人降].’
글자는 서툴렀으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집에 있던 배도는 마침내 자취가 끊어졌다.
그리고 서울의 배도는 여전히 산과 고을을 오갔다. 그는 신비한 주문을 많이 행하였다.
당시 유상(庾常)의 노비가 물건을 훔치고, 주인을 배반하였다. 사방으로 추적하였으나, 사로잡지 못하였다. 마침내 배도에게 물었더니, 배도가 말하였다.
“이미 죽어서 금성(金城)의 강변, 빈 무덤 속에 있다.”
가서 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공녕자(孔寧子)가 당시 황문시랑(黃門侍郞:宦官)으로 있었다. 관청에서 설사병을 앓다가, 심부름꾼을 보내서 배도를 초청하였다. 배도는 주문 외우기를 마치고 말하였다.
“고치기 어렵습니다. 귀신 넷이 보입니다. 모두 다치거나 절단되었군요.”
공녕자가 울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손은(孫恩)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집이 군인들에게 파괴당하고, 양친과 숙부가 모두 참혹한 고통을 당했다네.”
공녕자가 과연 죽었다.
또 제해(齊諧)의 처 호모(胡母)씨가 병이 들었다. 갖가지 치료를 해도 고치지 못하였다. 그 후 승려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였다. 재를 올리는 자리에는 승총(僧聰)도인이란 사람이 있어, 주인에게 권하여 배도를 초청하였다. 배도가 그곳에 이르러, 한 번 주문을 외우자 병자가 즉각 나았다. 제해가 엎드려 섬기면서 스승으로 모셨다. 배도를 위하여 그의 전기를 만들었다. 그 전기에 나오는 신이(神異)한 일은 대략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원가(元嘉) 3년(426) 9월에 이르러, 제해의 집을 떠나 서울로 들어갔다. 1만 냥의 돈과 물건을 남기며, 제해에게 맡겨서 재(齋)를 열라고 시켰다. 이에 작별하고 떠났다. 길을 가다가 적산호(赤山湖)에 이르자, 이질(痢疾)을 앓아 죽었다. 제해가 곧 재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와서, 건업(建業)의 복주산(覆舟山)에 묻었다.
원가 4년(427)에 이르러 오흥(吳興)에 소신(邵信)이란 사람이 있었다. 불법을 매우 받드는 사람이었다. 상한병(傷寒病)에 걸렸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간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슬피 울면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나타나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제자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라. 스승께서 곧 오셔서 보실 것이다.”
그가 대답하였다.
“이미 죽었거늘, 어떻게 올 수 있습니까?”
배도 도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오는 것에 다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곧 옷의 허리띠 머리에서 한 홉 가량의 가루를 꺼내, 그에게 주어 복용하게 하였다. 곧 병에 차도가 있었다.
또 두승애(杜僧哀)란 사람이 남강(南岡) 아랫녘에 살았다. 그는 예전에 배도 앞에 엎드려 섬긴 일이 있었다. 아이의 병이 매우 위독하였다. 그러자 곧 배도에게 신비한 주문을 익히는 일을 터득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한탄하였다. 다음날 문득 배도가 오는 것이 보였다. 말도 보통 때와 같았다. 그가 주문을 외우니, 아이의 병이 곧 나았다.
원가 5년(428) 3월 8일에 이르자, 배도는 다시 제해의 집으로 왔다. 여도혜(呂道慧)ㆍ제자 달지(怛之)ㆍ두천기(杜天期)ㆍ수구희(水丘熙) 등도 모두 함께 보았다. 크게 놀라 곧 일어나서 예배를 드렸다. 배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올해는 아마도 큰 흉년이 들 것이야. 정성되게 복업을 닦아야 하네. 법의(法意)도인은 매우 덕이 있는 승려이지. 그를 찾아가 옛 절을 수리하여 세워서, 재앙과 화를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잠깐 사이에 위에서 한 승려가 배도를 불렀다. 배도는 곧 그곳을 떠나면서 말하였다.
“빈도는 곧 교주(交州)ㆍ광주(廣州) 사이로 향할 것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네.”
제해 등은 정중하게 절하며 그를 전송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자취는 끊어졌다. 요즘에 이르러서도 때로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그 일은 정확한 일이 아닌 까닭에, 전할 만한 것이 아니다.
9) 석담시(釋曇始)
담시는 관중(關中) 사람이다. 출가한 이래로 많은 기이한 자취를 남겼다.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경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갔다. 교화를 베풀면서, 뚜렷하게 3승을 전수하여 계에 귀의하는 길을 세웠다. 무릇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도를 듣게 된 시초이다.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왔다. 조정의 세 대신을 깨우쳐서 이끌었다.
담시의 발은 얼굴보다 더 희다. 비록 맨발로 진흙탕 물을 건너가더라도, 전혀 흙물이 발에 달라붙거나 물에 젖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발이 흰 스승[白足和上]이라 부른다.
당시 장안에 왕호(王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삼촌이 죽은 지 몇 해 후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 돌아왔다. 왕호를 데리고 두루 지옥을 유람하면서, 여러 가지 과보를 보여주었다. 왕호가 지옥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 삼촌이 왕호에게 말하였다.
“이미 인과를 알았을 것이니, 다만 백족화상의 암자에서 섬기고 받들어야 한다.”
왕호는 두루 많은 승려들을 찾아갔다. 오로지 담시만이 발이 얼굴보다 더 흰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그를 섬겼다.
진(晋)나라 말기에 삭방의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발흥하였다. 관중 땅을 파괴하고 휘저어,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당시 담시도 역시 살해될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칼로 그를 상하게 할 수 없었다. 혁련발발이 감탄하여 두루 사문들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산속 못가에 깊이 은둔하여 두타행을 닦았다.
그 후 척발도(拓跋燾)가 다시 장안을 차지하여, 관중과 낙양에 위세를 떨쳤다. 당시 박릉후(博陵侯) 최호(崔皓)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그가 나라의 재상이라는 벼슬자리를 잡자, 척발도가 믿고 기대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寇)씨2)와 더불어 척발도를 설득하였다. 불교는 이로움이란 없고, 백성들의 이익을 손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폐지하기를 권고하였다.
척발도는 그의 말에 미혹되어, 태평(太平) 7년(446)에 마침내 불교를 훼멸(毁滅)시켰다. 그리고 군병을 곳곳에 파견하여, 절집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통치권 안의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모두 도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가운데 도망가고 숨은 사람은 모두 군사를 내어 뒤쫓아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잡으면 반드시 목을 자르는 참형에 처하였다.
온 경내에 다시는 사문이 없었다. 담시는 오직 그윽이 깊은 곳에서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므로 군병들이 이를 수 없는 곳에 있었다.
태평 연간(440~451) 말기에 이르러, 담시는 척발도의 죽을 날이 곧 미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정월 초하루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담당 관리가 상주하였다.
“한 도인이 있는데, 발이 얼굴보다도 더 흰 사람으로, 문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척발도가 영을 내렸다. 군법에 의하여, 여러 번 칼로 담시의 목을 베게 하였으나 상하지 않았다. 급히 이 사실을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는 크게 노하여, 스스로 차던 검(劒)으로 담시의 몸을 베었다. 그러나 몸에 다른 이상이 없었다. 오직 검이 닿은 곳에, 천의 실과 같은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척발도의 궁전, 북원(北園)의 우리 속에서 호랑이를 길렀다. 척발도는 명령하여 담시를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 호랑이들이 모두 숨고 엎드려, 끝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천사(天師:寇謙之)를 호랑이 우리에 가까이 가게 하였다. 호랑이는 곧 표효하며 으르렁거렸다.
척발도는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가 존귀하고도 높아, 황로(黃老:道敎)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곧 담시를 초청하여 궁전에 오르게 하고,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쳤다. 담시가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인과를 밝게 말하였다. 그러자 척발도는 대단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마침내 문둥병에 감염되었다. 최호와 구씨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자신의 허물이 그들 두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여겼다. 이에 두 사람의 집안을 모두 다 주살하고, 그들의 문중 족속도 다 쓸어버렸다. 나라 안에 선포하여, 다시 정교를 부흥하게 하였다. 갑자기 척발도가 죽자, 그의 손자인 척발준(拓跋濬)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비로소 크게 불법을 홍교하여 그 성대함이 지금까지 이른다. 담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10) 석법랑(釋法朗)
법랑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을 잘 잡고 정진하고 고행하여,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험이 많았다. 빛을 감추고 덕을 쌓아,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이른 단계를 추측하지 못하였다.
법랑의 스승인 석법진(釋法進)도 행이 높은 사문이었다. 어느 날 법진이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있었다. 문득 법랑이 나타나 그의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왔는가?”
“문의 자물쇠 구멍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먼 곳의 승려들과 함께 왔습니다. 해가 곧 점심때가 되려 합니다. 원컨대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법진은 곧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였다. 오직 숟가락과 발우의 소리만 들릴 뿐, 끝까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산(廬山)의 혜원이 가사 한 벌을 법진에게 보냈었다. 법진은 곧 이것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법랑이 말하였다.
“여러 승려들은 이미 떠났습니다. 다른 날 아마도 이것을 취할 것입니다.”
그 후 부뚜막을 맡은 사람[執爨者]이 법진에게 나아가 옷을 취하려 하였다. 법진은 곧 가사를 그에게 주었다. 늘 부뚜막을 맡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모두가 자기들은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로소 이것은 앞서 온 성인께서 방편으로 자취를 나타내어 취한 것임을 알았다.
북위(北魏)의 군대가 불법을 훼멸하기에 이르렀다. 법랑은 서쪽 구자국(龜玆國)으로 갔다. 구자국의 왕은 자기 나라 대선사 결약(結約)에게 말하였다.
“만약 득도한 사람이 이르면, 곧 나를 위하여 말해 달라. 마땅히 공양을 드려야 한다.”
법랑이 그곳에 이르자, 곧 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은 성인에 대한 예우로 접대하였다. 그 후 그는 구자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을 불태우던 날, 두 눈썹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 대중들이 있기 드문 일이라고 찬탄하며,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서역 사람이 북쪽 나라에 와서, 자세히 이 일을 전하였다.
∙지정(智整)
당시 양주(凉州)에 또 사문 지정이 있었다. 역시 마음이 곧고 굳었다. 기이한 행이 있어서 요주(么主) 양난당(楊難當)이 섬겼다. 그 후 그는 한협산(寒峽山)의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11) 소석(邵碩)
소석의 본래 성은 소(邵)씨고 이름은 석(碩)이며, 시강(始康) 사람이다. 일정한 장소에 거처하지 않았다. 황홀하여 미친 사람과 같았다. 사람이 입이 크고, 눈썹과 눈이 추하고 못났다. 어린아이들이 좋아라 따라다니면서 그를 희롱하였다.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 사람들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불법을 좋아하여, 부처님의 형상을 볼 때마다 예배하고 찬탄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소석에게는 본래 아들 셋, 딸 둘이 있었다. 큰아들 혜생(惠生)도 출가하였다. 소석은 전송(前宋) 초기에 역시 출가하여 도에 들어, 자칭 석공(碩公)이라 하였다. 드나들고 오고 감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익부(益部)의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녔다.
만중(蠻中) 땅에 가자 모두 일에 인연하여 우스갯소리를 하며, 착한 일을 권유하여 화합시켰다. 사람들 집에 이르러, 맨땅에서 잠자면 집에 반드시 죽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을 찾아가, 가는 돗자리[細席]를 구걸하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예언이라 여겼다.
4월 초파일이 되었다. 그러자 성도(成都)에서 불상을 모시고 걸어가는 행사를 하였다. 소석은 대중 가운데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사자의 모습을 지어보였다. 그 날 비현(郫縣)에서도 소석이 사자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을 보았다고들 하였다. 그러니 곧 그것이 그의 분신(分身)임을 깨달았다.
자사(刺史) 소혜개(蕭惠開)와 유맹명(劉孟明) 등이 모두 고개 숙여 그를 섬겼다. 유맹명은 남자 옷을 두 첩에게 입히고 소석을 시험하였다.
“이 두 사람을 공급하여 그대의 측근으로 두고 싶은데 괜찮겠나?”
소석은 사람됨이 운자(韻字)를 달아 말하기를 좋아했다. 곧 유맹명에게 말하였다.
“차라리 스스로 술을 구걸하여 술독에 잠겨 술을 마실지언정[지연-漬嚥], 기둥서방이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칠 수는 없습니다[잔연-殘年].”
그 후 어느 날 아침 문득 베로 만든 모자를 쓰고, 유맹명을 찾아갔다. 잠깐 뒤에 유맹명이 죽었다.
이에 앞서 유맹명 휘하에서 장사(長史) 벼슬에 있는 심중옥(沈仲玉)이 죄인을 매질하고, 곤장을 때리는 격식을 고쳤다. 그리고는 일상적인 규정보다 엄중하게 하였다. 소석이 심중옥에게 말하였다.
“천지가 시끄러워질 일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매질하는 격식을 없앤다면, 자사가 될 것입니다.”
심중옥이 그 말을 믿고 격식을 제거하였다. 유맹명이 죽자, 과연 심중옥이 그 고을의 일을 맡아 행하였다.
전송(前宋)의 원휘(元徽) 1년(473) 9월 1일 민산(岷山)의 통운사(通雲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죽음에 즈음하여 도인 법진(法進)에게 말하였다.
“나의 해골을 맨땅에 버리되, 서둘러 신발을 단단히 발에 신겨 두어라.”
얼마 지나서 유언대로 시신을 절 뒤에 버렸다. 이틀이 지나자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비현(郫縣)에서 와서, 법진을 방문하여 말하였다.
“어제 석공이 저자 가운데서 한쪽 발에만 신발을 신은 것을 보았습니다. 장난말로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제대로 하지 못하여, 나의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네’라고 하였습니다.”
법진이 놀라서 사미에게 따져 물으니, 사미가 대답하였다.
“근간 시신을 낼 때 무섭고 두려워서, 오른발 한쪽 신발은 제대로 신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자취의 괴이함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었다. 그 후 마침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 포로가 되어 형주(荊州)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맡아 하는 일이 빈틈없고 부지런하였다. 그러기에 주인이 몹시 그를 사랑하였다. 나이 열여덟 살에 출가하는 것을 들어주어, 강릉(江陵)의 비파사(琵琶寺)에 머물렀다. 풍모가 평범하고 내세울 것이 없어 자못 모두 그를 가벼이 여겼다.
당시 사미로서, 대중 승려들이 줄지어 앉으면, 곧 물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다. 혜안이 항상 빈 병을 손에 잡고, 윗자리부터 아랫자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물은 항상 마르지 않았다. 당시 모두가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구족계를 받자 조금씩 신령한 자취가 나타났다. 한번은 그믐날 저녁에 동학인 혜제(慧濟)와 함께 법당에 올라가 포살(布薩)을 하였다. 법당 문이 채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혜안은 곧 혜제의 손을 잡아 벽 틈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도 그렇게 하였다. 혜제는 매우 놀라고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후 혜제와 더불어 탑 아래에 앉아서는, 문득 혜제에게 말하였다.
“나는 먼 길을 떠나니,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겠네.”
잠깐 사이 문득 보니, 천인(天人)의 악기 연주 소리와 향기로운 꽃이 공중에 가득히 깔렸다. 혜제는 오직 놀라고 두렵기만 하여 끝내 말할 수가 없었다. 혜안은 다시 말하였다.
“나의 전후의 일들일랑 삼가하여 함부로 발설하지 말게. 말하면 반드시 허물이 있을 것이야. 오직 서남쪽에 속인 한 사람이 있네. 이 사람은 새로 발심한 보살이니, 그에게는 자세히 말하여도 되네.”
이에 헤어져 떠났다. 곧 장사꾼의 행렬에 섞여 상천(湘川)으로 들어가다가, 도중에 이질(痢疾)병을 앓아 매우 위독하였다. 그는 배의 주인에게 말하였다.
“나의 명이 다 되었소. 다만 들어내서 강둑 가에 놓아두시오. 관이나 나무는 필요 없소. 숨이 끊어진 후에는 곧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할 터이니.”
장사꾼은 그의 말대로 들어내서, 강둑 옆에 눕혀 놓았다. 밤에 불꽃이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괴이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가서 살펴보니, 이미 숨이 끊어졌다.
장사꾼들이 길을 떠나 상동(湘東)에 이르렀다. 혜안도 이미 먼저 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했다.
혜제가 그 후 척기사(陟屺寺)에 이르렀다. 은사(隱士)인 유규(劉虯)를 찾아가, 자세히 그 일을 말하였다. 그러니 유규는 곧 일어나 멀리 그(혜안)에게 예배드리며, 혜제에게 말하였다.
“이는 득도한 분으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든 분이십니다.”
∙승람(僧覽)ㆍ법위(法衛)
당시 촉중(蜀中)에도 또 승람과 법위가 모두 기이한 자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역시 성과(聖果)를 얻지 않았나 생각하였다.
13) 석법궤(釋法匱)
법궤의 본래 성은 완(阮)씨이며, 오흥(吳興) 어잠(於潛)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서울 지원사(枳園寺) 법해(法楷)의 제자가 되었다. 법해는 본래 배움에 힘쓴 이로 특히 경전과 역사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낭야(瑯琊)의 왕환(王奐)과 왕숙(王肅)이 나란히 함께 스승으로 섬겼다.
법궤는 성품이 공손하고 말이 적고 순박하였다. 스스로를 지키며, 세상 사람들의 일에 넘나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법화경』 한 부를 외웠다.
절의 상좌인 진승(塵勝) 법사가 늙고 병이 들었다. 그러나 법궤는 그를 따라 의지하여 매우 지극하게 보살피고 간호하였다. 진승 법사가 죽자 장례를 법답게 치렀다. 재(齋)를 할 때마다 대가를 얻은 것을 모아, 전단(旃檀)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이 조성되자 스스로 큰 모임을 마련하였다.
그의 본집은 서울의 대시(大市)에 임시로 붙어살았다. 이 날 아침에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고, 다시 지원사로 돌아왔다. 그 후 세 곳을 다시 조사해보니, 법궤가 와서 점심을 먹는 것을 모두 보았다고 한다. 실로 동시에 세 곳을 찾아간 것이다.
그 날 늦게 방으로 돌아와 누워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매우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두 손가락을 굽혔다. 대중들은 모두 그가 2과(果:斯陀含果)를 터득했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는 아직도 사미로 있었다.
신령한 자취가 특별하고 기이해, 마침내 이를 무제(武帝)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황제께서 친히 납시어, 그를 위하여 승려들을 모아 공양을 마련하였다. 문혜왕(文惠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방에 이르렀다. 이마가 닿게 예를 올리고, 그를 위하여 장례와 염을 경영하여 관리하였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찾아와 선물과 보시가 겹겹이 쌓였다. 여기서 얻은 공양물로 지원사에 탑을 세웠다. 이 해는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14) 석승혜(釋僧慧)
승혜의 성은 유(劉)씨이며,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형주(荊州)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남양(南陽)의 규(虯)가 척기사(陟屺寺)를 세워 초청해서, 거기에 거처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본 것이 이미 5, 60년이 지났는데도, 끝내 늙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가볍고 빠르며, 대단히 위엄 있는 거동을 하였다. 병든 사람의 집에 이르러, 그가 노여워하는 이는 반드시 죽었다. 그리고 그가 기뻐하는 이는 반드시 나았다. 당시 사람들 모두 이것을 예언으로 여겼다. 그가 아직 서로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라도, 모두 자신의 친근함을 다하여 사느냐, 죽느냐를 드러내었다.
어느 날 승혜는 강변에 이르렀다. 나루터의 관리에게 건너가기를 청하였다. 관리를 재촉하였으나, 배가 작아 미처 그를 건네주지 못하였다. 잠깐 사이에 승혜가 이미 건너편 둑에 있는 것이 보였다. 양쪽 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신이(神異)함에 감탄하였다.
중산(中山)의 견염(甄恬)과 남평(南平)의 차담(車曇)이 같은 날 승혜를 초청하였다. 승혜는 두 사람의 집으로 다 갔다. 후에 두 집에서 조사해서 따져보고, 비로소 그것이 분신임을 알았다.
제(齊)의 영명 연간(483~493)에 문혜왕(文慧王)이 요청하여 서울로 내려갔다. 가다가 보지(保誌)를 방문했다. 보지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붉은 용의 새끼로다[赤龍子].”
다른 말은 없었다. 승혜는 그 후 형주로 돌아왔다.
우연히 진서 장사(鎭西長史) 유경유(劉景蕤)를 만났다. 문득 슬피 통곡하면서 그의 집에 투숙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유경유가 자사(刺史)에게 살해당하였다. 후에 상주성(湘州城)의 남쪽에 이르러 문득 말하였다.
“땅 속에 비석이 있다.”
여러 사람이 시험 삼아 파보니, 과연 두 장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승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영원(永元) 연간(499~500)에 강릉에서 죽었다고 한다.
∙혜원(慧遠)
당시 강릉에 있는 장사사(長沙寺)의 혜원은 본래 사문 혜인(慧印)의 종이다. 혜인이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출가시켰다. 이어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수행하였다. 몇 해를 부지런히 고행하였다. 마침내 신이한 능력을 가져 분신하여, 초청하는 집에 갈 수도 있었다. 또한 미리 흥망을 점치기도 했다.
15) 석혜통(釋慧通)
혜통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수춘(壽春)에 있었다. 의복이 추레하고, 자는 곳도 일정한 곳이 없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실 것이라면 마시고 먹을 것이라면 먹어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늘 자기가 정나라의 산기장군[鄭散騎]이라고 하였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여 자못 그때마다 영험이 있었다.
강릉의 변두리에 사는 승귀(僧歸)라는 자가 수춘을 떠돌며 장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곧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길에서 혜통을 만났는데, 이름을 부르면서 물건을 맡기려고 하였다. 승귀는 이때 자신이 지는 짐도 무거운 까닭에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마침내 억지로 짐 위에 얹어놓았다. 그런데도 조금도 무거운 줄 몰랐다. 몇 리쯤 가다가 곧 헤어져 떠나면서, 승귀에게 말하였다.
“나의 누님이 강릉에 계시오. 비구니로서 이름은 혜서(惠緖)이며, 삼층사(三層寺)에 머물러 있소이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소식을 알려줄 수 있다면, 곧 찾아간다고 말해주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문득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짐 위에 얹은 것을 돌아보니, 맡겼던 물건 역시 없었다. 승귀는 강릉에 돌아와 곧 혜서를 찾을 수 있었다. 자세히 그 내용을 말해 주었지만, 혜서에게는 그런 아우가 없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스스로 수춘을 왕래하면서 그를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 후 혜통이 스스로 강릉으로 갔으나, 혜서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방안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자세히 물어보고는, 잠깐 동안 강릉에 머물렀다.
길을 가다가 무덤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씨족과 사망한 연ㆍ월ㆍ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를 전하여서 물어 보면, 모두가 그의 말과 같았다. 때로는 먼 옛날의 겁탈하고 훔친 일을 지적하여, 그의 죄상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뭇 도적들이 멀리서 혜통을 보기만 하면, 곧 샛길로 피해 달아났다.
또 강진(江津)으로 가다가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문득 지팡이로 그를 때리며 말하였다.
“빨리 말을 달려 돌아가, 너의 집이 어찌 되었는지 보아라.”
이 사람이 집에 이르러 보니, 과연 화재가 번져 집과 재물이 다 타버렸다. 제(齊)의 영원(永元) 초년(499)에 문득 서로 아는 임양(任漾)이란 사람을 찾아가 술을 구하며, 매우 다급하게 말하였다.
“지금 곧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네. 여러 아는 분들에게 이별을 알리시게. 모두들 정성껏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네.”
술을 다 마시고, 담장 가에 이르러 땅에 누웠다. 살펴보니 이미 죽었다.
수십 일이 지나서, 다시 어떤 사람이 저자 가운데에서 그를 만났다. 뒤따라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후에 사라졌다.
16) 석보지(釋保誌)
보지의 본래 성은 주(朱)씨이며, 금성(金城)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서울의 도림사(道林寺)에 머물렀다. 사문 승검(僧儉)에게 사사하였다. 그를 스승[和上]으로 모시며, 선업(禪業)을 닦고 익혔다.
전송(前宋)의 태시(太始) 연간(465~471) 초기에 이르자, 문득 괴벽스럽고 기이해졌다. 거처하고 머무는 것에 일정한 곳이 없었다. 또한 먹고 마시는 것에도 일정한 때가 없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치나 자라나고, 마을의 거리를 늘 맨발로 걸어 다녔다. 지팡이 하나를 손에 잡았다. 그 꼭대기에는 수염을 자르는 칼과 거울을 걸어 놓았다. 때로는 한두 필의 비단을 걸어 놓기도 하였다.
제(齊)의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조금씩 기이한 자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며칠씩 음식을 먹지 않고도 얼굴에 배고픈 기색이 없었다. 또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 처음에는 깨닫기 어려운 것 같았지만 후에는 모두 효험이 나타났다. 때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말이 예언하는 기별과 같았다. 서울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함께 그를 섬겼다.
제(齊)의 무제(武帝)는 그가 대중을 미혹시킨다 생각하여 수감하여, 건강(建康)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보니, 그가 저자 가운데로 들어갔다. 돌아와 감옥 안을 조사해 보았다. 보지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보지는 감옥의 관리에게 말하였다.
“문 밖에 두 개의 가마에서 음식을 갖고 오리라. 금 발우에 밥을 담았을 것이니, 네가 그것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이윽고 제(齊)의 문혜(文慧)태자와 경릉왕(竟陵王) 소량(蕭良)이 나란히 음식을 보지에게 보내왔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건강(建康)의 수령인 여문현(呂文顯)이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무제는 곧 그를 맞아들여 뒤채[後堂]에 머물게 하였다.
같은 시각에 병제(屛除)의 안에서 연회(宴會)를 거행하게 하였다. 보지 또한 대중을 따라나갔다.
얼마 뒤 경양산(景陽山) 위에, 또 한 사람의 보지가 일곱 승려들과 함께 있었다. 이에 황제는 노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자 있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궁궐 문을 지키는 관리가 상계하여 말하였다.
“보지는 오래 전에 성(省)에 나가 있었으며, 지금 막 먹물을 몸에 바릅니다.”
당시 승정(僧正) 법헌(法獻)이 옷 한 벌을 보지에게 보내주고자 하였다. 심부름꾼을 용광사(龍光寺)와 계빈사(罽賓寺) 두 절에 보내서 그를 찾았다. 그랬더니 모두 말하였다.
“어제 이곳에서 묵고는 아침에 떠났소.”
다시 그가 늘 찾아가는 여후백(厲侯伯)의 집에 이르러 그를 찾았다. 여후백이 말하였다.
“보지는 어제 여기에서 도를 수행하다가, 아침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법헌에게 알리니, 비로소 분신이 세 곳에서 묵었음을 알았다.
엄동에도 늘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걸어 다녔다. 사문 보량(寶亮)이 납의(衲衣)를 주고자 하였다. 채 말도 하기 전에, 보지가 문득 와서 납의를 끌어넣고 떠났다.
또한 때때로 사람들을 찾아가 살아 있는 물고기의 회를 구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찾아 마련해주면, 배부르게 먹고서야 떠났다. 문득 그릇 안을 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살아서 놀았다.
그 후 보지는 무제에게 신통력을 빌려주어, 고제(高帝)를 땅 아래에서 만나게 하였다. 저승에서 고제는 항상 송곳으로 찔리고 칼로 목 잘리는 고통을 받았다. 무제는 이때부터 길이 송곳과 칼을 폐하였다.
제의 위위(衛尉) 호해(胡諧)가 병을 앓았다. 보지를 초청하였다. 보지는 소(疏)에 주석을 달다가 말하였다.
“내일은 굽히겠소[明屈].”
다음날이 되어도 끝내 가지 않았다. 이 날 호해가 죽어 시신을 싣고 집에 돌아오니, 보지는 말하였다.
“명굴(明屈)이란 내일[明日]이면 시신이 나간다[屍出]는 뜻이라오.”
제의 태위(太尉)이며 사마벼슬에 있던 은제지(殷齊之)가 진현달(陳顯達)을 따라 강주(江州)에 주둔하였다. 보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니, 보지는 종이에 나무 한 그루를 그려 주었다. 그런데 그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었다. 이어 말하였다.
“급할 때는 이 나무에 오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후 진현달이 반역을 일으켜 강주의 주둔지에 은제지를 남겼다. 진현달이 패배함에 이르러 은제지도 반역자로 몰려 여산(廬山)에 들어갔다. 추격하는 기병이 곧 그에게 이르렀다. 은제지가 보니 숲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었다. 보지가 그려준 그림과 같았다. 이에 깨닫고 나무에 올라갔더니, 까마귀는 끝까지 날아가지 않았다. 추격하던 사람들이 까마귀를 보고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되돌아가서 마침내 화를 면하였다.
제의 둔기장군(屯騎將軍) 상언(桑偃)이 반역을 꾀하려 하여 보지를 찾아갔다. 보지는 멀리서 그를 보고는 달아나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대성(臺城)을 포위해서 반역하고자 하지만, 머리가 쪼개지고 배가 갈라질 것이오.”
열흘이 되지 않아서 사실이 발각되었다. 상언은 반역자로 몰려 주방(朱方)으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사로잡혔다. 과연 머리가 쪼개지고 배가 갈라졌다.
양(梁)나라 때 파양(鄱陽)의 충렬왕이 어느 날 보지에게 예를 굽혀, 집의 모임에 오게 했다. 그를 만나자 문득 매우 다급하게 곤장을 찾았다. 얻고 나서는 그것을 문 위에 놓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충렬왕은 곧 외지로 나가서 형주자사(荊州刺史:荊은 곤장)가 되었다. 그의 미리 비추어보는 밝음으로서 이와 같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지는 대부분 흥황사(興皇寺)와 정명사 두 절을 오갔다. 금상폐하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더욱 높은 예우를 받았다.
이에 앞서 제나라 때는 보지의 출입을 금지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금상폐하가 즉위하자, 곧 조서를 내려 말씀하셨다.
“보지의 자취는 티끌세상의 더러움에 구속받으나, 그 정신은 어둡고 고요한 세계에서 노닌다. 물과 불도 태우거나 적실 수 없고, 뱀과 호랑이도 덮쳐 두렵게 할 수 없다. 불교의 이치로 말한다면 성문(聲聞) 이상의 경지에 있다. 숨겨둔 경륜으로 이야기한다면 은둔한 신선보다 높은 경지에 있다. 어찌 속가 선비의 보통 심정으로 헛되이 구속하고 제재할 수 있는가? 어찌 비루하고 편협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지금부터 행도하고 내왕하는 일은 뜻에 따라 출입하게 하고, 다시는 금지시키지 말도록 하라.”
보지는 이때부터 궁중에도 자주 출입하였다.
천감(天監) 5년(506) 겨울에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두루 갖추어 지냈다. 그러나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보지가 문득 황제에게 상계하였다.
“저의 병이 낫지 않아, 관에 나아가 치료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상계하지 않으면, 백관(百官)이 아마도 매질과 곤장을 맞을 것입니다. 원컨대 화광전(華光殿)에서 『승만경』을 강의하여, 비를 청하게 하소서.”
주상은 곧 사문 법운(法雲)을 시켜 『승만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밤에 곧 큰 눈이 내렸다. 이에 보지는 또 말하였다.
“한 쟁반의 물을 가져다, 그 위에 칼을 얹어 놓으소서.”
갑자기 비가 크게 내려,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모두 만족하였다.
어느 날 주상께서 보지에게 물었다.
“제자는 번뇌와 헷갈림을 아직 제거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열둘[十二]로 다스려야 합니다.”
알 만한 이들이 ‘12인연이 헷갈림을 다스리는 약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또 열둘이란 말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그 뜻은 글자를 쓸 때의 시절과 시각 가운데 있습니다.”
알 만한 이들이 ‘글 서(書)’ 자의 획수 가운데 있는 12를 말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물었다.
“제자는 어느 때면 고요한 마음으로 닦고 익힐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안락금(安樂禁)입니다.”
알 만한 이들이 ‘금(禁)’이란 것은 멈춘다[止]는 뜻이니, 안락정토에 이르면 마침내 멈추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법운이 화림사(華林寺)에서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가사흑풍(假使黑風)’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보지가 문득 물었다.
“바람이 있는가, 없는가?”
법운이 대답하였다.
“세간의 이치[世諦]로 보자면 짐짓 있다고 하겠지만, 최상의 진리[第一義]로 따지자면 없는 것입니다.”
보지는 세 번 네 번 주고받다가, 이내 웃으며 말하였다.
“만약 이 가유(假有)의 경지를 체득한 경지에서 본다면, 이것은 또한 해득할 수도 없거니와 해득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의 말뜻이 깊이 숨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진어로(陳御虜)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온 집안이 보지를 섬기기를 매우 도탑게 하였다. 어느 날 보지는 그를 위하여 진실한 형상을 나타냈다. 그런데 빛나는 모습[光相]이 보살상과 같았다. 보지의 이름이 알려지고 기적을 나타낸 지 40여 년 동안에, 공손히 섬긴 선비와 여자들의 수는 이루 다 일컬을 수 없다.
천감 13년(514) 겨울에 이르러 대(臺)의 뒤채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떠나려 한다.”
열흘이 되지 않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형체와 모습은 밝고 기쁜 모습이었다.
죽음에 즈음하여 촛불 하나를 불태워서, 후원 전각에 있던 사인(舍人) 오경(吳慶)에게 넘겨주었다. 오경이 곧 나라에 상계하여 알렸다. 주상은 탄식하였다.
“대사께서는 더 이상 머무시지 않을 것이다. 촛불이라는 것은 훗날의 일을 나에게 부탁하시는 뜻일 것이다.”
그러고는 후하게 장례 전송하기를 더하여, 종산(鍾山)의 독룡(獨龍) 언덕에 묻었다. 이어 묘소에 개선정사(開善精舍)를 세웠다. 육수(陸倕)에게 명령하여 무덤 안에 기리는 글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왕균(王筠)이 비문을 절문에 새겼다. 그 돌아가실 때의 형상[遺像]을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곳곳에 그것이 남아 있다.
처음 보지가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는 나이가 5, 60세 가량이었다. 세상을 마칠 때에도 역시 늙지 않아,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나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서첩도(徐捷道)라는 사람이 서울의 구일대(九日臺) 북쪽에서 살았다.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보지의 처삼촌으로 보지보다 나이가 네 살 적다. 그러므로 보지가 죽을 때의 나이를 따져보면 97세일 것이다.”
∙도향(道香)ㆍ승랑(僧朗)
당시 양(梁)나라 초기에 촉중(蜀中)에는 또한 도향ㆍ승랑이 있었다. 그들 역시 모두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論】신묘한 도의 조화[神道之爲化也]란 뽐내고 강한 것을 억누르고, 모멸하고 오만한 것을 꺾으며, 흉악하고 날카로운 것을 분질러서, 티끌세상의 어지러움을 푸는 데 있다.3)
수레바퀴를 날려 보물을 실어 가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착한 믿음을 지닌 자들도 귀의하여 엎드리게 한다. 험한 절벽에서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힘이 넘치는 사람들도 숨어 엎드리게 한다. 마땅히 알라. 지극한 다스림은 작위적이지 않은 무심함으로서,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조화시키는 데 있음을.
진(晋)나라 혜제(惠帝)가 정사를 제대로 베풀지 못하면서부터 회제(懷帝)가 서울을 옮겼고, 중국은 오랑캐가 짓밟으며 뭇 갈족(羯族)이 어지럽게 교차하였다. 사마연(司馬淵)과 사마요(司馬曜)는 앞에서 포악하게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는 뒤에서 흉악한 마음을 숨겨왔다. 고을과 나라가 나누어지고 무너져, 백성들은 죽거나 하얀 재를 뒤집어썼다.
불도징(佛圖澄)은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 가엾고, 형벌과 살해가 아직 끝나지 않는 것이 가슴 아파, 마침내 신의 조화를 갈파(葛陂)에서 나타내었다. 까마득한 미래의 예언을 양양(襄陽)과 업도(鄴都)에서 드러내었다. 비밀스런 주문의 힘에 기대어 곧 다하려는 운명을 구제하고, 향기로운 기운에 의지해 위태함을 만난 이를 건져내었다. 방울을 올려다보거나 손바닥에 비추어보아, 앉은 자리에서 길흉을 정하여, 끝내 두 석(石)씨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다. 황량한 오랑캐의 자식으로 왔지만, 창생들을 윤택하게 함에서는 참으로 더 비교할 것이 없다.
그 후 불조(佛調)와 기역(耆域)과 섭공(涉公)과 배도(杯度) 등은 혹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며, 머리를 숙여서, 헷갈린 속인들과 함께 하였다. 때로는 신기한 일을 뚜렷이 나타내거나, 먼 훗날의 징조를 예언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묘지에 묻힌 후에 관 안이 텅 빈 일도 있었다. 신령한 자취는 괴상하고 기이하여, 그 연유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의 법칙이 같지 않고, 취하고 버리는 것 또한 달랐을 따름이다.
심지어 유안(劉安)4)ㆍ이탈(李脫)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역사에서는 그들을 모반(謀叛)하고 질서를 어지럽힌, 요망하고 방탕한 인물이라 하였다. 신선의 기록에는 그들을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구름 위를 날아다닌 인물이라 하였다. 무릇 진리의 세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와 합치하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방편이란 영구불변한 진리에는 반대되더라도, 도와 합치하는 것이자 쓰임을 이롭게 하여 일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 시대의 전기들에 기록된 것만으로는 그 상세한 내용을 끝까지 규명할 길이 없다. 혹 법신(法身)으로 말미암아 감응한 경우도 있고, 혹 은둔한 신선의 드높이 빼어난 경지인 경우도 있다. 다만 한 가지라도 남까지 아우른다면 충분한 것이다.
혜칙(慧則)은 향기로운 항아리에 감응하여 고질병을 고치고, 사종(史宗)은 어량(漁梁)을 지나면서 곧 물 속에 노닐던 물고기의 목숨을 구하였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칼날 아래에서도 몸이 상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다. 보지(保誌)가 분신으로 집집마다의 욕구를 원만히 충족시켜, 황제가 이것으로 믿음을 더하게 된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광명이 비록 조화를 이루지만 그 바탕이 더럽혀지지 않고, 먼지와 비록 함께 하더라도 그 참다움은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선대의 글과 기록[文紀]이 모두 불가의 기록[宗錄]에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방술과 작은 재주[方伎]를 자랑하여 그것에 도취된 사람들이라면, 이는 좌도(左道:道敎)로 시대를 어지럽히거나, 신비한 약에 인연하여 높이 하늘을 날거나, 향기로운 지초[芳芝:靈芝]에 기대서 오래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릇 닭이 구름 속에서 울고, 개가 하늘 위에서 짖으며, 뱀과 고니가 죽지 않고, 거북과 신령이 천 년을 산다고 해서, 일찍이 이것을 신이한 일이라 하였던가?
찬(贊)하노라.
땅은 물의 도움 받아 못이 되고
쇠는 불로 말미암아 달구어지듯
힘 센 이 따라 교화하여
일시나마 위엄과 권세 드러내었지.
양양 땅 비추신 불도징(佛図澄)
불법의 시내로 인도하신 단도개(單道開)
이 두 분의 은혜로움으로
저 사방 끝까지 평안하였네.
만약 이에 힘입지 않았더라면
백성들 목숨 어찌 보전했겠나.
주석
1 장릉은 장도릉(張道陵)의 본래 이름이다. 장도릉은 도교의 한 파인 부록파(符籙派)의 창시자로서, 한(漢)나라 환제(桓帝) 때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5경(經)에 통달하고, 만년에는 계명산(鷄鳴山)에 입산하여 장생(長生)의 도를 닦았다. 그의 도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쌀 닷 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오두미교(五斗米敎)라고 부른다. 그는 부적과 정화수로 병을 고쳤다. 병자에게 부적과 정화수를 마시게 하거나, 병자의 이름을 적어 3관(官)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 후 그의 아들 장형(張衡)과 손자 장로(張魯)가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장도릉을 천사(天師)로 추대해서 이 호칭을 자손대대로 세습했다. 훗날 장각(張角)은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황건당(黃巾黨)이라 불렸다.
2 천사 구씨는 도교 부록파(符籙派)의 공고한 기초를 세운 구겸지(寇謙之)를 가리킨다. 숭산(崇山)에서 10년간 수도하고, 자신은 일찍이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친히 하사한 천사(天師)의 직위와 『운중수송신과계(雲中首誦新科誡)』 12권을 하사받았다고 속여, 장씨(張氏)들의 천사직위를 탈취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선인(仙人) 성공흥(成公興)을 만났다고 말했으며, 이보문(李普文)으로부터 『도록진경(圖錄眞經)』 60권을 받아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에게 진상했다. 재상인 최호(最浩)는 그것을 깊이 믿고 천사도량(天師道場)을 건립해 120명의 도사를 모아 매일 기도를 했다. 구겸지는 자신이 직접 태무제에게 부록(符籙)을 주었는데, 이것이 크게 유행하자 자신은 이 부록으로 귀신을 부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3 그러므로 존재는 앞서다가 뒤따르기도 하고, 움츠리다가 으쓱거리기도 하며, 굳세다가 비실거리기도 하고, 꺾이다가 꺾어버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심하거나 사치하거나 큰 것은 버린다. (『노자』 29장)
4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아들인 유안(劉安, B.C.179~122)을 말한다. 곧 한(漢)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의 손자이다. 유안은 날 때부터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할머니도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고, 그 자신도 나중에 모반을 꾀하다가 자살했다. 유안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비파 타기를 좋아하고 문재(文才)를 타고났다. 수렵이나 승마와 같은 무협적인 것을 싫어했다. 남에게 음덕(陰德)을 베풀고 백성들을 잘 어루만져 명성을 천하에 떨치려 하였다. 다만 아버지 유장이 죽은 데 대하여 원망을 품고, 기회가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유안은 『회남자(淮南子)』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회남자』는 형이상학적인 도(道)를 말하여 세속을 초월한 관념적 경지를 강조한 도가의 저작물이자, 도가 외에도 유가나 법가 등의 제가(諸家)의 설을 총망라한 잡가(雜家)의 저작물이기도 하다. 유안은 빈객과 방술지사(方術之士) 수천 명을 동원하여 이 책을 지었다. 이 책은 한나라 건국 70년 무렵의 한나라에 존재한 모든 방면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서이다. 동시에 그 이전과 이후의 사상계를 가르는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을 예고한 책이기도 하다.
『고승전』 10권(ABC, K1074 v32, p.859b01-p.868b01)
고승전(高僧傳) 제11권
4. 습선(習禪)
1) 축승현(竺僧顯)
승현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그는 올곧은 고행으로 계율과 절조를 훌륭히 지켰다. 푸성귀만을 먹으면서 경을 외우고, 선(禪)을 일삼아 힘썼다. 항상 산림에 혼자 거처하였다. 그리고 인간 세계 밖에서 두타행을 닦았다. 혹 때로는 며칠씩 선정(禪定)에 들었어도, 또한 주린 기색이 없었다.
당시 유요(劉曜)가 서경(西京:長安)을 침략하여 쓸어버렸다. 조정과 재야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졌다. 승현은 진(晋)의 태흥(太興) 연간(318~321) 말기에 남쪽 강남에 머물렀다. 다시 이름난 산들을 다니면서, 자신이 항상 닦던 선의 일을 닦았다.
그 후 병이 들어 오래도록 위중하였다. 마침내 서방 세계에 생각을 두고, 마음으로 간절히 희구하였다. 그러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참 모습을 나투어 빛을 비추었다. 그의 몸의 고통 받던 곳이 모두 나았다. 이 날 저녁 일어나 목욕을 하였다. 함께 머물던 이들과 시병하는 이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해주었다. 아울러 인과에 관한 훈계를 하였다. 매우 정밀하게 분석한 말이었다.
이튿날 맑은 새벽에 편안히 앉아서 돌아가셨다. 방안에 특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10여 일이 지나서야 멎었다.
2) 백승광(帛僧光)
백승광은 혹 담광(曇光)이라고도 하였다.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禪)을 익혔다. 진(晋)의 영화(永和) 연간(345~356) 초기에 강동 지방에 노닐어, 섬주(剡州)의 석성산(石城山)에 머물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 산 속에는 예전부터 맹수로 인한 재난과 산신의 횡포가 심해,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승광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람을 고용하여 풀을 베어 길을 열고,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걸어 몇 리를 들어가니, 갑자기 크게 비바람이 치면서 호랑이 떼가 포효하고 울부짖었다. 승광은 산 남쪽에 한 석실(石室)을 발견하고는 그 속에 머물러 합장하고, 선(禪)에 안주하여 정신을 깃들이는 처소로 삼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비가 멎었다. 마을로 내려가 음식을 구걸하고, 저녁에는 다시 굴 속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혹 호랑이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혹 뱀의 몸이 되기도 하면서, 다투어 찾아와 승광을 위협하였다. 승광은 한결같이 모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시 사흘이 지나자 또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저는 자리를 옮겨 장안현(章安縣)의 한석산(寒石山)으로 가서 머물고, 이 석실을 드려 봉양합니다.”
그 후로는 나무 베고 나물 캐러 오는 길이 통하였다. 도인과 속인들이 종사로 섬겼다. 선을 좋아하여 찾아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석실 옆에 띠풀로 집을 세웠다. 그것이 점차로 절을 이루어, 은악사(隱岳寺)라 이름하였다.
승광은 선정에 들 때마다, 곧 7일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산에서 거처하기 53년, 나이 110세가 된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옷으로 머리를 덮고 편안히 앉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대중 승려들은 모두 보통 때와 같이 선정에 든 것이라 생각하였다. 7일이 지난 후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곧 함께 가서 보았다. 얼굴빛은 여느 때와 같으나, 오직 코만 숨기운이 없었다. 정신이 떠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해골이 썩지 않았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2년(455)에 곽홍(郭鴻)이 섬주 태수에 임명되었다. 이 산에 와서 예배를 올리고, 시험 삼아 뜻한 대로 짐짓 가슴을 헤쳐 보았다. 그랬더니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면서 의복이 삭아 흩어지고, 오직 백골만이 남았다. 곽홍은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렵게 여겼다. 백골을 석실에서 거두어, 벽돌을 바깥에 쌓아 흙을 발랐다. 그러고는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지금까지도 아직 남아 있다.
3) 축담유(竺曇猷)
담유는 혹 법유(法猷)라고도 하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고행하여 선정을 익혔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섬주(剡州)의 석성산에 머물렀다. 음식을 구걸하고 좌선을 하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남을 해치는 술법을 행하는 어떤 집에 이르러 음식을 구걸하였다. 담유의 축원하는 주문이 끝나자, 문득 지네가 밥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담유는 유쾌하게 먹고, 별 탈이 없었다.
후에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선을 하였다.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왜 경을 듣지 않느냐?”
이윽고 호랑이 무리가 모두 떠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굵은 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길이가 10여 아름이나 되는 것들이 빙빙 돌면서 오갔다. 머리를 치켜들고 담유를 향하다가,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떠났다.
그 후 어느 날 산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담유를 찾아왔다.
“법사의 위엄과 덕이 이미 무겁습니다. 이 산에 오셔서 머무시니, 제자는 문득 이 석실을 드려 봉양하겠습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산을 찾아온 것은 서로 만날 수 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오. 왜 함께 머물지 않으시오?”
산신이 말하였다.
“제자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하 권속들이 아직 법화에 젖지 못하여, 갑자기 제지하는 말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 곳의 사람이 오가면, 혹 서로 침범하고 부딪칩니다. 사람과 신의 길은 다르기도 하여, 그런 까닭에 떠날 따름입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본래 어떤 신이오?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을 터인데, 어디로 옮겨가려 하시오?”
산신이 말하였다.
“제자는 하(夏)임금의 아들로서, 이 산에 자리 잡은 지 2천여 년입니다. 한석산은 집안의 외삼촌께서 다스리는 산이니, 그곳에 가서 머물 것입니다.”
곧 산 음지쪽의 산신묘로 돌아갔다. 헤어짐에 즈음하여 손을 잡고는, 담유에게 향 세 상자를 주었다.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구름을 뛰어넘어 떠나갔다.
산에는 외로운 바위가 구름에 닿을 만큼 빼어나게 홀로 서 있었다. 담유는 돌을 치고 사다리를 만들어 그 바위에 올라가 좌선하였다. 그러면서 대나무를 이어 물을 옮겨, 일상생활에 공급하였다. 선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 10여 명이 있었다. 왕희지(王羲之)가 소문을 듣고 짐짓 찾아가, 봉우리를 우러르며 높이 인사하여 경의를 다하고 돌아갔다.
적성암(赤城巖)은 천태산의 폭포와 영계(靈溪) 사명산(四明山)과 나란히 서로 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은 까마득한 절벽과 드높은 산마루가 하늘을 끊는다.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그 위에는 아름다운 정사(精舍)가 있어 득도한 이가 산다. 비록 돌다리가 개울에 걸쳐 있지만, 바위가 가로막아 사람의 접근을 끊는다. 또한 이끼가 푸르고 매끄러워,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이른 사람은 없다.”
담유는 걸어 다리가 있는 곳에 이르자,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대의 정성이 도타운 것은 알지만, 아직은 득도하지 못하였으니 물러가라. 10년 후가 되면 스스로 이곳에 오리라.”
담유는 마음으로 한탄하여, 그 날 저녁 그 산 속에서 잠잤다. 밤에 주위를 돌며 보살을 창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수염과 눈썹이 하얀 사람이 나타났다. 담유가 가려는 곳을 물었다. 담유가 자세히 대답하니, 그 노인이 말하였다.
“그대는 생사를 윤회하는 몸인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이곳 산신인 까닭에 알려줄 따름이다.”
담유는 마침내 그곳에서 물러났다. 길을 가다 한 석실을 지나갔다. 점심때가 지나 그곳에서 쉬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깔리면서, 석실 안이 온통 울렸다. 그러나 담유는 정신과 안색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홑옷을 입고 머리싸개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곳은 제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어제는 나가서 집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시끄러운 움직임이 이르렀으니, 크게 깊이 부끄럽습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만약 이것이 그대의 집이라면, 청컨대 되돌려 드리지요.”
신이 말하였다.
“저는 주거지를 이미 옮겼으니, 청컨대 머물러 사시기 바랍니다.”
담유는 얼마 동안 머물렀다. 담유는 늘 돌다리를 건너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후에 여러 날 정결하게 재계를 다한 다음 다시 그곳에 가고자 하였다. 가서 보니, 가로막은 바위가 환하게 열려 있었다. 다리를 건너서 조금 갔다. 정사(精舍)와 신이한 승려가 보이는 것이 과연 종전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리하여 함께 향을 사르고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신승이 그에게 말하였다.
“물러가게. 10년 후면 저절로 이곳에 올 것이야. 지금은 아직 머물 수 없네.”
이에 돌아왔다. 돌아보니 가로막은 바위가 다시 처음과 같이 합쳐졌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요사스런 별이 나타났다. 황제는 널리 나라 안의 모든 덕 있는 사문들에게, 재를 올리고 참회하여, 재앙을 물리치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담유가 곧 정성으로 기도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감응이 일어났다. 6일째 되는 날 아침에, 푸른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나타나 지나간 일을 뉘우쳤다.
“잘못하여 법사를 고단하게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요사스런 별이 물러갔다.
또 다른 설에서는 말한다.
“별을 물리친 것은 백승광(帛僧光)이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담유는 태원 연간(376~396) 말기에 산의 석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으나, 몸이 온통 녹색이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말기에 은둔한 선비 신세표(神世標)가 이 산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갔다. 짐짓 담유의 시신을 보았는데 썩지 않았다. 그 후 그곳에 가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구름과 안개에 헷갈려서 엿볼 수가 없었다.
∙혜개(慧開)ㆍ혜진(慧眞)
당시 또 혜개ㆍ혜진 등도 선(禪)의 일을 닦기를 잘하였다. 여요(餘姚)의 영비산(靈祕山)에 들어가, 각기 방장(方丈)과 선 수행하는 감실을 조성하였다.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다.
4) 석혜외(釋慧嵬)
혜외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렀다.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하였다. 대부분 산골짜기에 깃들어 머물면서, 선정(禪定)의 일을 닦았다. 어느 머리 없는 귀신이 찾아왔다. 그러나 혜외는 정신과 안색을 바꾸지 않고, 곧 귀신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미 머리가 없으니, 곧 두통을 앓을 근심도 없겠구나.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귀신이 곧 모습을 숨겼다. 다시 배가 없는 귀신이 되어 찾아왔다. 다만 손과 발만이 있었다. 혜외는 또 말하였다.
“너는 이미 배가 없으니, 곧 오장육부의 근심도 없겠구나.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잠시 후 다시 다른 형상이 되어 찾아왔다. 그러나 혜외가 모두 형상에 따라 말하여, 모두 이를 쫓아냈다.
그 후 어느 때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내리는데, 어떤 여자가 기숙할 곳을 찾았다. 모습과 얼굴이 단정하고 의복도 선명하였다. 자태가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하였다. 자칭 하늘에서 온 여인네[天女]라 말하였다.
“상인께서 덕이 있기에, 하늘이 나를 보내어 서로 위로하여 달래게 하였습니다.”
욕망을 자극하는 말로 꾀어내 권유하여 그의 뜻을 흔들었다. 그러나 혜외의 지조는 곧고 확고하여, 하나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곧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내 마음은 불 꺼진 재[灰]와 같다. 가죽주머니[革囊]로 시험해 보고자 하지 말아라.”
여자는 마침내 구름을 뚫고 떠나면서 되돌아보며 찬탄하였다.
“바닷물은 마를 수 있고 수미산도 기울 수 있으나, 저 상인(上人)의 지조는 굳고도 곧구나.”
그 후 진(晋)의 융안(隆安) 3년(399)에 법현(法顯)과 함께 서역에서 노닐었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5) 석현호(釋賢護)
현호의 성은 손(孫)씨이며, 양주(凉州) 사람이다. 중국에 와서 광한(廣漢)의 염흥사(閻興寺)에 머물렀다. 항상 선정을 익히는 것을 일삼았다. 또한 계율의 행실도 훌륭하여 실오라기만큼도 범하는 일이 없었다.
진(晋)의 융안(隆安) 5년(401)에 죽었다. 죽음에 즈음하여 입에서 오색의 광명이 나와 절 안을 가득히 비추었다. 유언을 남겨 몸을 불사르게 하였다. 제자가 이를 행하였다. 이윽고 사지의 관절이 다 불탔고, 오직 손가락 하나만은 불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것을 탑 밑에 묻었다.
6) 지담란(支曇蘭)
지담란은 청주(靑州) 사람이다. 푸성귀를 먹고 선을 즐기며, 30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진의 태원 연간(376~396)에 섬주(剡州)에 노닐다가, 그 후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에서 쉬었다. 한 곳의 자연 풍광이 깨끗하고 탁 틔어 넓은 것을 보고 그곳에 머물렀다.
며칠이 지나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신체가 길고 컸으며, 여러 번 꾸짖어 담란을 떠나게끔 하려 하였다. 또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짐승들이 나타나 자주 담란을 위협하였다. 담란이 느긋하게 편안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주기왕(珠欺王)이 저의 외삼촌입니다. 이제 위경산(韋卿山)으로 가서 그곳에 자리 잡을 터이니, 이곳을 바쳐 봉양합니다.”
3년이 지나서 문득 수레와 말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따라온 사람이 봉우리에 가득하였다. 이윽고 두건을 쓴 사람이 주기왕이라 하면서, 이름을 밝힌 다음 앞으로 나왔다. 따라온 처자와 남녀 등 23인도 모두 모습과 얼굴이 단정하여, 세속 사람을 넘는 풍모가 있었다. 이들은 담란의 처소에 이르러, 요즘 날씨에 지내기가 어떤가 안부를 물었다. 인사를 마치자 담란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낙안현(樂安縣)의 위경산에 삽니다. 오래도록 풍문으로만 듣고 감복하였습니다. 이제야 가족들과 함께 우러러 투신하오니, 귀의하는 계를 받고자 합니다.”
담란이 곧 계를 내려주었다. 법을 받은 다음 돈 1만 냥과 꿀 두 단지를 선물하고, 하직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문득 피리소리가 울리고 나팔소리가 나면서, 메아리쳐 산골짜기가 진동하였다. 이것은 담란과 같이 선을 닦는 무리 10여 명도 함께 보고 들은 일이다.
진(晋)의 원희(元熙) 연간(419~420)에 산에서 죽었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7) 석법서(釋法緖)
법서의 성은 혼(混)씨이며, 고창(高昌) 사람이다. 덕스런 행실이 맑고 부지런하였다.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을 닦았다. 후에 촉(蜀)나라에 들어가, 유사총(劉師塚) 사이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두타행을 하였다. 호랑이와 외뿔소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1)
『법화경』ㆍ『유마경』ㆍ『금광명경』을 외웠다. 항상 석실 안에 거처하면서, 선을 닦기도 하다가 독송하기도 하였다. 무더위가 극심할 때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7일 동안 냄새도 나지 않았고, 시신의 왼편에서는 향기가 감돌았다. 열흘이 지난 뒤에야 멎었다. 저녁마다 시신에서 방광하며 몇 리까지 밝게 비추어, 마을 사람들이 곧 시신 위에 무덤 탑을 세웠다.
8) 석현고(釋玄高)
현고의 성은 위(魏)씨이고, 본명은 영육(靈育)이다. 풍익(馮翊)의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머니 구(寇)씨는 본래 외도를 믿었다. 위씨 가문에 시집와서 처음 딸 하나를 낳았다. 곧 현고의 큰 누님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곧 부처님을 믿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기원하면서, 가문에 다른 견해가 없이 불법을 받들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어머니는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3년(401)에 꿈속에서, 인도 승려가 꽃을 뿌려 방에 가득한 것을 보고 깨어났다. 곧 임신하여 홍시 4년(402) 2월 8일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문득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더욱이 광명이 벽을 비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멎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영육(靈育)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존중하여 다시 세고(世高)라 일컬었다.
나이 열두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어떤 서생(書生)이 현고의 집에 잠시 와서 잠자고는 말하였다.
“중상산(中常山)에 들어가 숨어살고자 한다.”
부모는 곧 현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 날 저녁 마을사람들이 함께 이들을 전송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와서, 현고의 안부를 물었다. 부모가 말하였다.
“어제 다들 같이 전송해 놓고, 지금 와서 다시 찾는가?”
마을 사람들이 말하였다.
“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이미 전송했다는 말인가?”
부모는 비로소 어제 맞이하고 보낸 사람이 신이한 분임을 깨달았다. 현고는 처음 산에 이르자 곧 출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산승(山僧)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법을 깨달을[得度] 수 없다.”
이에 현고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에게 입도(入道)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앞서 세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세속에 등을 돌리고 세상과 어긋나자, 이름을 현고라고 고쳤다.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지라, 배움에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자 이미 산승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이후로는 오로지 선정과 계율에 정진하였다. 관중에 부타발타(浮馱跋陀) 선사(禪師)가 석양사(石羊寺)에 있으면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고가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긴 지 열흘 사이에, 선법에 미묘하게 뛰어났다. 부타발타가 감탄하였다.
“훌륭하구나! 불자여. 너의 깊은 깨달음이 이와 같구나.”
이에 얼굴을 낮추고 겸손히 양보하여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 현고는 곧 지팡이를 짚고, 서진(西秦)으로 갔다. 맥적산(麥積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이 산에는 백여 명의 학인이 있었다. 그의 교리의 가르침을 숭배하고, 그에게서 선의 도를 품수 받았다.
당시 장안에 사문 석담홍(釋曇弘)이 있었다. 진(秦)나라의 고승으로서 이 산에 은거하면서, 현고와 서로 만나 같은 선의 일을 닦으며 우의 좋게 지냈다. 당시 걸불치반(乞佛熾槃)은 농서(隴西)를 점령하였다. 서쪽으로는 양(凉)나라와 접하였다. 외국 선사 담무비(曇無毘)가 그 나라로 들어왔다. 문도를 거느리고 무리를 이루어 선의 도를 가르쳤다. 삼매를 바르게 닦아, 이미 깊고도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우(隴右)의 승려들 가운데 그에게 품수 받아 계승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에 현고는 곧 자기가 대중을 거느리고, 담무비로부터 법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열흘이 안 되어, 담무비가 도리어 그러한 뜻을 현고에게 아뢰었다.
당시 하남(河南)에 두 사람의 승려가 있었다. 비록 형상은 사문이었으나, 권세가 거짓 재상[僞相]과 짝하여 감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계율과 어긋나서 자못 학승들을 꺼려하였다. 담무비가 이미 서쪽 사이국(舍夷國)으로 돌아갔다. 두 승려는 곧 하남 왕세자 사마만(司馬曼)에게 현고를 헐뜯는 말을 꾸며 말하였다.
“대중을 모아 축적하여 모으니, 장차 나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사마만은 그 헐뜯는 말을 믿고 곧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현고를 하북(河北)의 임양(林楊) 당산(堂山)으로 내쫓았다. 그 산의 나이든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뭇 신선들이 이곳을 집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때 현고의 제자들 3백 명이 산의 집에 가서 살았다. 마음이 태연자약하고, 선정과 지혜가 더욱 새로워졌다. 충정과 정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응하여, 신령한 이적이 많았다. 경쇠는 치지 않아도 울리며, 향기도 저절로 풍겨났다. 또한 아라한과 신선들도 이따금 찾아와 노닐었다. 맹수도 길들인 듯 복종하며, 벌레와 독물의 피해도 없었다.
현고의 학도 가운데는 6문(門:六根)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현소(玄紹)는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배움은 모든 선(禪)을 궁구하였다. 신통력이 자유자재하였다. 손가락에서 물이 나와, 그것으로 현고가 씻고 양치질하도록 바쳤다. 그 물의 향기롭고 청정함이 보통 물보다 두 배나 달랐다. 또 늘 세간의 것이 아닌 향과 꽃을 얻어서 삼보에 바쳤다. 신령하고 기이함이 현소와 같은 이가 열한 명이었다. 현소는 후에 당술산(堂術山)에 들어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났다.
예전에 장안의 담홍(曇弘) 법사가 좌천되었다. 민촉(岷蜀:泗川省)에 유배당하자, 도가 성도(成都)를 흠뻑 적셨다. 하남왕(河南王)이 그의 높은 명성에 기대고자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였다. 담홍은 이미 현고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다. 맹세코 그의 청백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곧 산골짜기에 놓인 구름다리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명을 따랐다. 그리하여 하남에 도달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를 마치고는, 곧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는 이미 깊이 비추어보고 멀리 아시는 터에, 어찌하여 헐뜯는 말을 믿고 어진 이를 버리셨습니까? 빈도가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를 아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과 태자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곧 사신을 보내 현고를 찾아갔다. 자세를 낮추어 공손하게 사과하고, 현고에게 고을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현고는 이미 널리 중생들을 구제할 마음을 품었다. 그런 까닭에 분한 생각을 잊고 명에 따라 하남으로 가기로 하였다. 처음 산을 나오려 하였다. 그러자 산중의 초목들이 꺾이고 부러지며, 바위가 무너져 길을 막았다. 현고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는 맹세코 도를 넓히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거늘 어찌 한 곳에만 매일 수 있겠는가?”
곧 바람이 멎고 길이 열렸다. 차츰차츰 나아가 나라에 이르렀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길 가까이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하였다. 안팎이 공경하고 받들어, 그를 높여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하남에서 교화를 마치자, 양(凉)나라로 나아가 노닐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깊이 공경하여 섬겼다. 영준한 손님들의 집회에서 현고의 뛰어난 해설을 펼치게 하였다.
당시 서해의 번승인(樊僧印)도 현고에게서 수학하였다. 뜻이 좁고 도량이 편벽하여,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문득 자신이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터득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선의 관문을 완전히 다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에 현고는 비밀히 신통력으로써 선정에 든 승인(僧印)으로 하여금, 두루 시방 끝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문이 같지 않은 것을 보게 하였다. 승인은 한 철 하안거 내내 그가 본 바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영영 다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선정의 물에는 바닥이 없음을 알았다. 크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당시 북위(北魏)의 오랑캐 척발도(拓跋燾)가 평성(平城)을 점거하였다. 그 군대가 양(凉)나라 경계를 침범하였다. 척발도의 외삼촌인 양평왕 두초(杜超)가 현고에게 같이, 거짓 나라의 서울로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평성에 도달하자, 현고는 크게 선에 의한 교화를 펼쳤다.
위태자(僞太子)인 척발황(拓跋晃)은 현고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한때 거짓 무고를 받아, 그의 부친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이에 현고에게 말하였다.
“공연히 무고를 겪는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현고는 금광명재(金光明齋)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7일 동안 간절히 참회하였다.
곧 척발도의 꿈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나타났다. 모두 검을 손에 잡고 매서운 위엄으로 물었다.
“너는 무슨 까닭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태자를 멋대로 의심하느냐?”
척발도는 놀라 꿈에서 깨어나, 크게 뭇 신하들을 모아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태자에게 허물이 없음은 참으로 황제의 영령들이 내려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척발도는 다시는 태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현고의 정성스런 감응에 힘입은 것이다.
척발도는 이로 인하여 글을 내렸다.
“짐은 조종의 거듭 빛나는 계통을 이어, 큰 기반을 열어 널리 만대에 융성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공(武功)에는 비록 밝으나, 문교(文敎)에는 아직 유창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것은 태평한 정치를 높이는 조건이 아니다. 지금 국내는 편안하고 백성들은 부유하며 창성하니, 마땅히 제도를 정해서 만세의 법으로 삼아야 한다.
무릇 음양에는 가고 옴이 있고, 사계절도 돌아가는 순서가 있다. 그러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현인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의 안전에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피로한 몸을 쉬게 하여, 장구한 계책을 굳히는 것이 고금의 바뀌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다. 짐과 여러 공신들은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해 왔다. 이제는 벼슬길에서 은퇴하여 집으로 물러나, 얼굴을 화락하게 하고 작위를 높이며,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기르면서 도를 논하여 꾀를 진술할 뿐, 다시 담당관리로서의 고통스럽고 힘든 직무를 친히 맡을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천하의 정사를 대신 다스리고 문무백관을 모두 통솔하게 한다. 다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서 여러 자리를 갖추고, 사람을 가려 뽑아 임무를 수여하여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고 들일 사람은 들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두렵다[後生可畏]’고 하셨다. 미래가 지금만 같지 못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이에 조정의 관료와 백성들은 태자에게 모두 신(臣)이라 칭하였다. 태자에게 올리는 글은 황제에게 올리는 표(表)와 같이 하였다. 다만 흰 종이를 사용해서 구별하였다.
당시 최호(崔皓)와 구천사(寇天師)가 이전부터 척발도에게서 총애를 얻었다. 척발황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날이면, 그들의 위세의 칼자루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거짓으로 무고하였다.
“태자가 전에 사실은 모반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현고의 도술과 인연을 맺은 까닭에, 돌아가신 황제폐하를 꿈에 내려오게 하였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여론과 일의 자취가 차차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만약 죽여서 제거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척발도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발끈하여 크게 노하였다. 곧 칙명으로 현고를 수감하게 하였다. 현고는 이에 앞서 어느 날 비밀히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이 아마도 쇠할 것이다. 나와 혜숭(慧崇)이 맨 먼저 그 화를 당할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듣고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혜숭(慧崇)
당시 양주(凉州) 사문 석혜숭(釋慧崇)은 위위(僞魏:北魏)의 상서(尙書)인 한만덕(韓萬德)의 문사(門師)이다. 이미 현고 다음으로 덕이 높았다. 그도 역시 의심과 저지를 받았다.
북위의 태평(太平) 5년(444) 9월에 현고와 혜숭은 함께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그 달 15일에 화를 입어, 평성의 동쪽 한 귀퉁이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43세이다. 이 해는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21년(444)이다.
그 날 저녁이 되도록 문도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 날 밤 3경(更)에 문득 광명이 나타났다. 현고가 앞서 머물던 곳의 탑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다시 선을 닦던 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광명 속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갔다.”
제자들은 비로소 이미 돌아가셨음을 알고, 끊어지는 아픔으로 슬피 통곡하였다. 이윽고 시신을 성 남쪽 넓은 들에서 맞이하여 목욕시켰다. 아울러 혜숭의 시신도 따로 다른 곳에 수습하였다. 이에 온 도읍의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서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제자 현창(玄暢)은 당시 운중(雲中)에 있었다. 북위의 도읍에서 6백 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이어 6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에 서울에 이르렀다. 스승이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비통하여 숨이 막혔다. 이어 동학들과 함께 울면서 말하였다.
“불법은 이제 멸하였다. 자못 부흥되겠는가? 만일 다시 부흥될 수 있다면, 스승님[和上]께서 일어나 앉으시기를 청해보자. 스승님의 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이를 비추어보실 것이다.”
말이 끝나자 현고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빛에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온몸에서 땀이 나왔다. 그 땀은 매우 향기로웠다.
잠시 후 그는 일어나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교화는 인연을 따라 성하거나 쇠한다. 인연의 성쇠는 자취가 남으나, 진리는 깊고도 고요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너희들이 머지않아 다시 나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오직 현창(玄暢)만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죽은 후에 불법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니, 잘 스스로 마음을 닦아 중도에 후회함이 없게 하라.”
말을 끝마치자 곧 누워 숨이 끊어졌다. 이튿날 관을 옮겨 화장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제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무덤을 만들어 곧 묻었다. 도인과 속인들은 슬프고 애통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가슴 에며 바라보았다.
사문 법달(法達)은 위국(僞國)의 승정(僧正)으로 있으면서 현고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미처 수업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갑자기 현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울면서 말하였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젠 다시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여러 날이 되도록 음식을 먹지 않고, 항상 현고의 이름을 불렀다.
“현고 상인은 성인이시라 자유자재하실 터인데, 왜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그 소리에 응하여 현고가 허공을 날아서 그곳에 이르는 것이 보였다. 법달은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며, 애절하게 구호하여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때 현고가 말하였다.
“그대는 업보가 무거워 구해주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지금 이후라도 대승의 경전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참회하면, 업보를 가볍게 받을 수 있으리라.”
법달이 말하였다.
“만약 고통스런 업보를 받게 된다면, 어여삐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현고가 말하였다.
“일체 중생을 잊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 홀로 그대에게만 그러겠는가?”
법달이 다시 말하였다.
“법사와 혜숭은 모두 어디에 태어나셨습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는 악한 세상에 태어나 중생들을 구하여 보호하기를 원하여, 이미 염부제주에 환생하였다. 혜숭은 늘상 안양정토를 기원하여 이미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
다시 법달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법사께서는 이미 어느 경지에 도달하셨는지요?”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제자들이 저절로 그것을 아느니라.”
말을 마치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법달이 몰래 현고의 제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러자 모두가 말하였다.
“그 분은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보살[得忍菩薩]입니다.”
∙담요(曇曜)
북위(北魏)의 태평(太平) 7년(446)에 이르자, 척발도는 과연 불법을 훼멸하였다. 모두가 현고의 말과 같았다. 당시 하서국(河西國)의 저거무건(沮渠茂虔) 치하에 사문 담요가 있었다. 역시 선 수행의 일로 칭송을 받았다. 위태부(僞太傅) 장담(張潭)이 그에게 엎드려 스승의 예로 모셨다.
9) 석승주(釋僧周)
승주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굳세며, 기이한 뜻과 절개가 있었다. 빚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아무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숭고산(嵩高山)에서 두타행과 좌선을 하였다. 북위(北魏)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려 하자, 승주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큰 어려움이 닥쳐올 것이다.”
곧 권속 수십 명과 함께 한산(寒山)으로 들어갔다. 이 산은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4백 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계곡이 험하게 막아 군병이 이를 수 없는 곳이기에, 마침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윽고 북위 오랑캐는 멋대로 횡포를 부려, 장안에 머물던 승려들은 모두 죽었다. 그 후 곧이어 참회하여 최씨(崔氏:崔皓)를 죽이고, 다시 불법을 일으켰다.
영창왕(永昌王)이 장안을 다스렸다. 이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사찰을 수리하고 건립하려 사문들을 찾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한산에 한 승려가 있는데, 덕스런 일에서 비범합니다.”
왕은 곧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주는 자신은 늙고 병들었다 하여 거절하였다. 제자인 승량(僧亮)에게 명에 응하여 산에서 나가도록 하였다.
그 후 승주는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알렸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 날 저녁 불길이 새끼로 맨 걸상 뒤에서 솟아 몸을 태우는 것이 보였다. 사흘이 지나자 비로소 불길이 다하였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나 방은 불타지 않았다. 제자들이 남은 재를 거두어 흙벽돌 탑을 세웠다.
∙승량(僧亮)
제자 승량은 성이 이(李)씨이며, 장안 사람이다. 승주에게서 수업하였다. 처음 영창왕이 승려를 구해 초청하였을 때 아무도 감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불법이 처음 부흥되었다고는 하나, 예기치 못할 불상사가 있을까 의심하였다. 승량이 말하였다.
“불법의 운수[像運]가 사람에게 깃대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만약 주살되어 목이 잘리는 일을 당한다면, 나 자신이 그것을 당하겠다. 그러나 만약 온전할 수 있다면, 도를 다시 떨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승주의 권고도 있어, 이에 사신을 따라 장안에 이르렀다. 아직 장안에 채 이르지 않았을 무렵, 왕과 백성들은 거리와 마을을 쓸고 물 뿌리며, 집집이 잇대어 기다리며 영접하였다. 왕이 친히 자신을 굽혀 맞으니, 발이 서로 닿을 정도로 몰려나와 공경을 다하였다.
승량은 그들을 위하여 화와 복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과를 가르쳐 보였다. 말은 간단하나 이치는 궁극으로 나아갔다. 온화하면서도 간절하여, 듣는 사람이 슬픔과 기쁨으로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옛 절을 수리하고 복구하였다. 그리하여 사문들을 초청해서 맞아들이니, 관중(關中)에서 불법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승량의 힘이다.
10) 석혜통(釋慧通)
혜통은 관중(關中) 사람이다. 어릴 때 장안의 태후사(太后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주문을 지니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외웠다. 처음 양주(凉州)의 혜소(慧詔) 선사를 좇아 선의 일을 전수받았다. 불법의 문에서 관하여 닦기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바가 많았다.
항상 마음으로 안양정토를 기원하며, 정신은 그 국토에 깃들고자 하였다. 작은 병이 생기자, 선정(禪定)에 든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모습이 매우 깔끔하고 엄숙하였다. 그가 혜통에게 말하였다.
“좋은 때가 이르렀다.”
잠시 후에 아미타불이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밝게 빛났다. 혜통은 선정에서 깨어나, 동학들에게 본 것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말을 마치자 곧 세상을 떠났다.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감돌다가, 사흘이 지나서야 멎었다. 이때 나이는 59세이다.
11) 석정도(釋淨度)
정도는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 새끼 밴 사슴을 쏘았다. 그러자 어미 사슴이 낙태(落胎)하고는 아픔을 참으며, 죽은 새끼에게 다가가 혀로 핥아주었다. 이것을 보고 정도는 마음속으로 깨달았다. 즉시 활을 부러뜨리고 화살을 꺾고는, 출가하여 푸성귀만을 먹었다.
30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웠다. 항상 홀로 산과 늪에 거처하며, 좌선을 익히고 경을 외웠다. 만약 고을에 재(齋)모임이 있으면, 곧 몸소 아홉 개의 등에 불을 켜고, 날이 새도록 깔끔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써 공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향탕(香湯)을 마련하라.”
목욕을 한 다음 수천 장구의 설법을 하였다. 삶과 죽음의 인과를 훈계하고, 말을 마치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퉁소와 북이 울리고 향 연기가 허공으로부터 그곳에 이르렀다. 같은 때에 권속 수십 명이 모두 함께 듣고 본 일이다.
12) 석승종(釋僧從)
승종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타고난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였다. 시풍(始豊)의 폭포산(瀑布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배움이 불교 안팎의 경전을 겸비하고, 5문(門)을 정밀하게 닦았다. 오곡을 먹지 않고 오직 대추와 밤만을 먹었다. 나이가 거의 백 세가 되어서도, 기력은 아름답고 강하여 예송(禮誦)을 그치지 않았다.
은둔하는 선비 저백옥(褚伯玉)과 은둔하는 숲 속의 사귐을 맺었다. 늘 도를 논하고 교리를 설하였다. 문득 연이어 이틀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13) 석법성(釋法成)
법성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배움이 경전과 율장에 뛰어났다. 오곡을 먹지 않고, 오직 송진만을 먹으면서 바위동굴에 은거하였다. 선(禪)을 익히는 것을 임무로 일삼았다.
전송(前宋)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동해왕 유회소(劉懷素)가 외지로 나와 파서(巴西) 지방을 지켰다.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맞이하여, 부성(涪城)에서 만났다. 하안거(夏安居) 동안 율장을 강의하고, 일을 마치자 하직하여 돌아왔다. 그러고는 광한(廣漢)에 머물면서 다시 선법(禪法)을 널리 펼쳤다.
작은 병이 생기자 곧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 법성은 항상 『보적경(寶積經)』을 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힘으로 이를 외웠다. 반 권까지는 외울 수 있었으나, 기운이 모자라 감당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이를 읽게 하여, 한 차례 두루 끝나자마자 합장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병하던 10여 명이 모두 공중에 감색 말이, 금으로 된 관을 등에 싣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14) 석혜람(釋慧覽)
혜람의 성은 성(成)씨며, 주천(酒泉) 사람이다. 어릴 때 현고(玄高)와 더불어 고요하게 관하는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혜람은 일찍이 서역에 노닐었다. 부처님의 발우를 머리 위에 받들었다. 이어 계빈국(罽賓國)에서 달마(達摩) 비구로부터 선의 요체를 물어 전수 받았다. 달마는 일찍이 선정에 들었다가, 도솔천에 가서 미륵불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일이 있었다.
후에 그 계법을 혜람에게 전수하였다. 혜람은 돌아오다 우전국(于塡國)에 이르렀다. 다시 그 계법을 그곳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수하였다. 그 후 곧 돌아오다가, 도중에 하남(河南) 땅을 경유하였다. 하남의 토곡혼(吐谷渾)의 모연(慕延)과 세자 경(瓊) 등이 혜람의 덕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에 공경하여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재물의 도움을 주어, 촉(蜀)에 좌군사(左軍寺)를 세우게 하였다. 혜람은 곧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 천궁사(天宮寺)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초청하여 서울로 내려와,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중흥사(中興寺)를 세우자, 다시 칙명을 내려 그곳에 옮겨 살았다. 이에 서울의 선을 닦는 승려들이 모두 그의 발꿈치를 따라 수업하였다.
오흥의 심연(沈演)과 평창(平昌)의 맹의(孟顗)도 모두 도덕을 흠모하였다. 그를 위하여 절에 선실을 조성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5) 석법기(釋法期)
법기의 성은 향(向)씨며, 촉군(蜀郡) 비현(陴縣) 사람이다. 일찍 양친을 잃고,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열네 살 때 출가하여 지맹(智猛)에게서 선의 일을 물어 전수 받았다. 영기사(靈期寺)의 법림(法林)과 함께 관(觀)을 익혔다. 지맹이 익숙히 아는 것은 모두 증득(證得)하였다.
그 후 현창(玄暢)을 만나 다시 그를 따라 공부해 나아갔다. 그러다가 현창이 강릉(江陵)으로 내려가자, 그도 따라갔다. 십주관문(十住觀門) 가운데서 그가 터득한 것은 이미 9관문이었다. 그리고 오직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만을 아직 다 익히지 못하였다. 현창이 감탄하였다.
“나는 서쪽 고비 사막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유주(幽州)사막을 밟았다. 동쪽으로는 우혈(禹穴:會稽山)을 찾으며, 남쪽으로는 형산(衡山)과 나부산(羅浮山)을 다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오직 여기 자네 한 사람만이 특히 선과의 연분이 있구나.”
그 후 장사사(長沙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2세이다. 신비스런 광명이 시신을 비추고, 몸은 더욱 향기롭고 깨끗하였다.
∙석도과(釋道果)
당시 또 용화사(龍華寺)에 소속된 석도과도 역시 선의 일로 드러났다.
16) 석도법(釋道法)
도법의 성은 조(曺)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도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선의 일에만 정진하였다. 때로는 신비한 주문도 행하였다. 그 후 노닐다가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왕휴지(王休之)와 비갱지(費鏗之)의 초청으로, 흥락사(興樂寺)와 향적사(香積寺) 두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대중을 가르치는 데 법이 있었다. 항상 음식을 구걸하여, 따로 초청하는 일이나 승려들의 음식을 받지 않았다. 걸식해서 얻은 음식은 그 몫을 줄여서,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하였다. 저녁마다 옷을 벗고 알몸으로 앉아서, 모기의 먹이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계속하다가 후에 선정에 들었다. 미륵불이 재(齋)모임 가운데서 방광하여, 3도(途)의 과보를 비추어주는 것을 보았다. 이에 깊이 자신을 도탑게 힘써서, 항상 앉아 있고 눕지 않았다.
원휘(元徽) 2년(474)에 선정에 든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새끼로 맨 걸상에 편안하게 앉아, 기뻐하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하였다.
17) 석보항(釋普恒)
보항의 성은 곽(郭)씨며, 촉군(蜀郡)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아이때 늘 햇빛 속에서 성스런 승려가 공중에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집안사람들을 향해 이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 후 간절하게 출가하기를 구하여, 성도 치하의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방에 홀로 머물고 권속을 세우지 않았다. 고요함을 익히며 선을 일삼았다. 선정에 들고 나오며 머무는 일을 훌륭히 하여, 촉의 도(韜) 율사와 뜻을 같이하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였다.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면, 광명이 눈썹에서 곧바로 내려가 금강제(金剛際)에 이른다. 화광 가운데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는데, 전생의 업보도 자못 밝게 알게 된다.”
전송의 승명(昇明) 3년(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8세이다.
그가 아직 죽기 전에 문득 친지들과 이별을 고하였다. 말을 마치고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어, 당시 사람들은 농담이라 생각하였다. 세상을 마치는 날에는 미미하게 병든 모습이 있었다. 오직 속가의 한 노복만이 이를 보았다. 이튿날 아침 편안하게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노복은 이를 알지 못하고 억지로 이를 눕히려 하였다. 그러나 시신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와서 보고 그대로 앉히게 하였다. 손에는 세 손가락을 굽혔고, 나머지는 모두 펴 있었다. 대중 승려들이 시험 삼아 이를 잡아당겼다. 역시 손 따라서 곧 펴졌다. 그러나 곧 다시 구부러졌다. 살아 있을 때는 몸이 검었는데, 죽고 나서는 오히려 몸이 깨끗하고 희어졌다.
이에 득도한 사람의 법에 근거하여 시신을 화장하였다. 섶을 쌓고 처음 불길이 타오르자, 곧 오색의 연기가 일어났다. 특이한 향기가 자욱하게 감돌았다. 이에 고을의 장군인 왕현재(王玄載)가 그를 위하여 찬탄의 글을 지었다.
큰 깨달음은 아득히 형상이 없고
높은 응험은 잊어 텅 비움을 귀히 여기네.
한결같은 생각으로 도량에서 만났던들
헛되이 만 겁의 긴 세월 보냈을까.
신심은 동쪽 나라에 생각을 비워서
성인을 만나 서쪽 나라에 그림자 꾸미노라.
미묘한 다다름은 삼계를 맑게 하고
정신은 4선(禪)의 경지를 전하였다.
속물이야 짐짓 들쑥날쑥 하지만
참된 본성이야 진리라 항상 빛나도다.
빛을 숨겨 뜬 세상에 깃드셨으나
남긴 공덕 바야흐로 먼 곳까지 교화하노라.
18) 석법오(釋法晤)
법오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집안은 농사와 양잠을 일삼았다.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루 모두 성장하였다. 법오는 나이 50세에 상처를 하였다. 온 집안이 울적하였다. 도를 사모하여 부자 일곱 사람이 모두 함께 출가하였다.
남쪽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다가 번산(樊山)의 양지바른 곳을 보았다. 그윽이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하였다. 이곳은 본래 은둔하는 선비인 곽장상(郭長翔)이 머물던 곳이었다. 이에 이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갖다.
당시 무창(武昌) 태수 진유(陳留)의 완회(阮晦)가 소문을 듣고 기특하게 여겼다. 길을 내고 산을 열어, 승방과 선실을 세웠다.
법오는 멥쌀을 먹지 않고, 항상 보리밥으로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따름이었다. 『대품경』ㆍ『소품경』ㆍ『법화경』을 외웠다. 항상 하루 여섯 때마다 도를 수행하였다. 산과 못에서 산림에서 두타행을 할 때는, 호랑이와 외뿔소도 피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무 밑에서 좌선하면서, 혹 하루가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기도 하였다.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에 산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도제(道濟)
그 후 사문 도제가 그의 높은 업을 이어갔다. 지금 무창에서는 그가 머물던 곳을 두타사(頭陀寺)라 한다.
19) 석승심(釋僧審)
승심의 성은 왕(王)씨며, 태원(太原)의 기현(祁縣) 사람이다. 진(晋)의 표기장군(驃騎將軍) 왕침(王沈)의 후예인데, 할아버지 대에 초군(譙郡)에 임시 머물렀다.
승심은 어려서 출가하여 수춘(壽春)의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법화경』과 『수능엄경』을 외웠다. 늘 말하였다.
“선이 아니면 지혜롭지 못하다.”
오로지 뜻을 선에 두었다. 담마밀다(曇摩蜜多)가 서울의 도의 왕이라는 말을 들었다. 곧 옷을 털고 강을 건넜다.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묻고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심오한 이치를 곡진하게 터득하였다.
어느 때인가 도둑 떼들이 산에 들어왔다. 그러나 승심은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적들이 마침내 옷을 벗어 그에게 시주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불법의 가르침을 설하여, 도적 떼들을 도왔다. 도적들이 부끄러워하고 땀을 흘리며, 예를 올리고 떠났다.
영취사(靈鷲寺)의 혜고(慧高)도 그를 따라 선의 일을 전수받았다. 승심에게 절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따로 선방을 세웠다. 청하(淸河)의 장진후(張振後)도 그를 초청하여 서현사(栖玄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문혜왕(文惠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공경을 더하여 그를 섬겼다. 부담(傅琰)과 소적부(蕭赤斧)도 모두 경계의 가르침을 자문 받았다. 왕경칙(王敬則)이 선방에 들어가서 승심을 찾았다. 이에 선정에 든 것을 바로 보고 손가락을 튀기면서 밖으로 나와 말하였다.
“성스러운 도인[聖道人]이시다.”
그러고는 곧 쌀 1천 섬을 바치고, 삼귀(三歸)의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영명(永明)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승겸(僧謙)ㆍ초지(超志)ㆍ법달(法達)ㆍ혜승(慧勝)
승겸ㆍ초지ㆍ법달ㆍ혜승도 모두 선을 일삼았다. 역시 각기 기이한 자취가 있었다.
20) 석담초(釋曇超)
담초의 성은 장(張)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키가 8척이고 얼굴과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베옷을 입었다. 하루에 점심 한 끼만을 먹을 따름이었다. 처음 상도(上都)의 용화사(龍華寺)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원가(元嘉) 연간(424~453) 말기에 남쪽 시흥(始興)에 노닐었다. 두루 산수를 구경하며, 홀로 나무 밑에서 잠잤다. 호랑이와 외뿔소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서울로 돌아왔다. 북제(北齊)의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칙명을 받고 요동(遼東)에 가서 선의 도를 도와 널리 폈다. 그곳에 머무는 2년 동안에 크게 불법의 교화를 행하였다. 건원(建元) 연간(479~482) 말기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갑자기 또 전당(錢塘)의 영원산(靈苑山)으로 갔다. 선정에 들 때마다 여러 날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때 문득 바람과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홀(笏)을 손에 잡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자기는 엄진동(嚴鎭東)이라고 밝히면서, 성명을 통하였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모습이 매우 단정하며 호위하는 사람이 이어졌다. 깃발이 펄럭였다.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절하며 존경을 표하고, 자칭 제자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제자는 7리 밖에 거주하며, 두루 이 땅을 맡고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짐짓 찾아와 예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가 말하였다.
“부양현(富陽縣) 사람들이 일부러 겨울에 산자락 밑을 파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땅의 용집을 침범하였기 때문에, 용들이 분개하여 3백 일 동안 비를 내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1백여 일이 지나, 우물과 못이 고갈되어 밭에 씨 뿌리는 일이 영 어렵습니다. 법사께서는 이미 도덕이 신과 통한 분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몸을 굽혀 앞으로 나가신다면, 반드시 감응이 일어나 창생들을 윤택하게 하여, 그 공덕에 귀의할 것입니다.”
담초가 말하였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시주의 힘인데, 빈도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제자가 맡은 것은 다만 구름을 일으킬 수만 있지,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청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를 허락하니 신은 문득 떠나갔다. 이에 담초는 곧 남쪽으로 갔다. 닷새가 지나 적정산(赤亭山)에 이르렀다. 멀리 용을 위하여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고 설법하였다.
밤이 되자 뭇 용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화하여 담초를 찾아와서 예배를 올렸다. 이에 담초가 다시 설법하였다. 그러자 용들은 삼귀(三歸)의 계를 내려달라고 빌면서, 자신들은 용이라고 말하였다. 담초는 그들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니, 그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그 날 밤 또 담초의 꿈에 용이 나타났다.
“본래 분노로 인하여 맹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법사께서 착함으로 이끄시니, 감히 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내일 해질 무렵이면 곧 비가 내릴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담초는 곧 임천사(臨泉寺)로 갔다. 사람을 보내 현령(縣令)에게 알려서, 강 가운데에 배를 마련하였다. 그곳에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현령은 곧 승려들을 초청하고, 배를 바위 머리에 띄웠다. 그런 후에 경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읽는 것이 막 끝나자마자, 드디어 큰비가 내렸다.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모두 만족하였다. 그 해에는 풍년 농사를 수확할 수 있었다.
담초는 영명 10년(49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21) 석혜명(釋慧明)
혜명의 성은 강(康)씨며, 강거(康居) 사람이다. 조부의 대에 동오(東吳)로 피난하였다. 혜명은 어릴 때 출가하여 장안(章安) 동사(東寺)에 머물렀다.
제(齊)의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사문들과 함께 적성산(赤城山)에 올라 석실을 보았다. 담유(曇猷)의 시신이 아직 썩지 않았다. 선실은 황폐하여 드높은 발자취를 이어가지 않는 것을 보았다. 곧 사람을 고용하여 나무를 자르고, 길을 열어 다시 법당과 선실을 세웠다. 와불(臥佛)과 담유의 상(像)을 만들었다. 이에 마음을 선과 독송에 두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른 고목나무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후에 선정 중에 한 여신(女神)이 나타났다. 자칭 여노(呂姥)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항상 보호하고 지켜주겠습니다.”
혹 때로는 흰 원숭이ㆍ흰 사슴ㆍ흰 뱀ㆍ흰 호랑이 등이 섬돌 앞에서 노는 일도 있었다. 길들인 듯 엎드려서 굴러다니며, 사람을 두렵게 하지 않았다.
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이 소식을 들었다. 공경하여 고개 숙여 자주 세 명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중하고 돈독하게 초청하여, 마침내 잠시 서울로 나가 왕의 집에 이르렀다. 문선왕이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잠시 그곳에 있다가 하직하고 산으로 돌아왔다.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머물지 않았다. 문선왕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출발할 때 보내 주었다.
건무(建武) 연간(494~497)에 산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論】‘선(禪)’이란 만물을 미묘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인연하지 않는 법이란 없고, 살피지 못하는 경계란 없다. 그러나 법에 인연하고 경계를 살피자면, 오직 고요함으로써만 밝힐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못에 물결이 멎으면, 물고기와 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마음의 물이 이미 맑아지면, 뚫어지게 비추어서 숨겨지는 것이란 없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고, 고요한 것은 시끄러운 것의 임금이 된다. 그런 까닭에 가벼운 것은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근본을 삼고, 시끄러운 것은 반드시 고요한 것으로 터전을 삼는다.”2)
『대지론(大智論)』에서는 말한다.
“비유하면 약을 복용해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집안 일을 쉬다가 기력이 평상시처럼 건강해지면, 다시 돌아와 집안 일을 닦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정(禪定)의 힘으로 지혜라는 약을 복용해서 그 힘을 얻으면, 다시 돌아와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4평등심(平等心)ㆍ6신통력(神通力)도 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며, 8제(除)ㆍ10입(入)도 선정의 힘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의 작용이란 크나큰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이 동방으로 옮겨온 이래로 선의 도도 역시 전수되었다. 이에 앞서 안세고(安世高)ㆍ법호(法護)선사가 선경(禪經)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승광(僧光)과 담유(曇猷) 등도 모두 가르침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아 끝내 거룩한 일을 이룩하였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기쁨과 즐거움을 넘어설 수 있고, 밖으로는 요사함과 상서로움을 꺾을 수 있어서, 겹겹의 암벽에서 귀신과 도깨비를 쫓아내고, 절벽 바위에서 신이한 승려를 만난 것이다.
사문 지암(智巖)에 이르러서는 몸소 서역 땅을 밟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초청하여, 다시 선의 일을 동쪽 땅에 전하였다. 현고(玄高)과 현소(玄紹) 등도 모두 친히 선 수행시 지켜야 할 법칙을 전수받아, 숨을 들이쉬고 내쉼에서 수(數)와 수(隨)3)를 다하였다. 정신을 보내고 되돌아옴에서 환(還)과 정(淨)을 다하였다. 그 후에 승주(僧周)ㆍ정도(淨度)ㆍ법기(法期)ㆍ혜명(慧明) 등도 기러기가 날 듯이 나란하여 버금갔다.
그러나 선의 작용이 뚜렷해지는 것은 신통력에 속해 있다. 그런 까닭에 삼천대천세계를 털구멍 속에 집 짓게 하고, 사해를 묶어 한 방울의 소락(穌酪)으로 할 수 있으며, 석벽을 통과하더라도 막히는 것이 없으니, 대중이 높이 떠받들면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릇 아득히 먼 세속의 도나 용렬하기 만한 선술(仙術)에 이르러서는, 고작 파도를 멈추게 하고 비를 그치게 하며, 주문(呪文)의 불로 나라를 불태우게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바로 현고(玄高)가 저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일어나고, 도법(道法)이 앉아서 돌아가신 것과 비교한다면, 어찌 기이하다고 하겠는가?
가령 울두람불(鬱頭藍弗)이 마침내 짐승들 때문에 골탕 먹었고, 독각선인(獨角仙人)이 끝내 선타(扇陀) 여인 때문에 어지러워진 것과 같은 것은, 모두가 마음의 도는 비록 거두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편견과 서로 상응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이는 반딧불이나 부싯돌의 불을 해나 달에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찍이 이것에 짝할 수 있겠는가?
이에 찬하노라.
선은 아득하고 고요하며
삼매의 못은 깊고도 깊도다.
생각을 거두는 방법을 빌려야
비로소 두루 그윽한 곳을 찾으리.
악을 물리친 다섯 분
숲에 깃든 아홉 분
번뇌의 산과 바다를 마르고 녹이며
모으고 흩으며 올라가고 가라앉혔네.
이야말로 덕의 넉넉함이로다.
어찌 마음에 힘쓰지 않을손가.
5. 명률(明律)
1) 석혜유(釋慧猷)
혜유는 강남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강릉(江陵)의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으면서 지조를 실천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곧고 방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율행에만 정진하였다.
당시 서쪽나라의 율사 비마라차(卑摩羅叉)가 강릉에 와서 크게 율장을 널리 폈다. 혜유는 그를 따라 수업하면서, 생각을 깊이 하여 그때마다 쌓았다. 마침내 『십송률(十誦律)』을 크게 밝혀 강설을 이어갔다. 그러자 섬서(陝西)의 율사들은 그를 종사로 삼았다. 그 후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십송의소(十誦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2) 석승업(釋僧業)
승업의 성은 왕(王)씨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 널리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후에 장안에 노닐며 구마라집(鳩摩羅什)으로부터 수업하였다.
그 후 새로 번역한 『십송률』을 보았다. 마침내 이 책을 오로지 공부하였다. 하늘이 내린 뛰어남으로 심오한 경지를 훤하게 다 깨달았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후세의 우바리(優波離)로다.”
관중 지방이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만나 서울로 피하였다. 오(吳)나라의 장소(張邵)는 그의 곧고 검소함에 고개 숙여 곧 초청하였다. 고소(姑蘇)로 돌아가서, 그를 위하여 한거사(閑居寺)를 지었다. 지세가 맑고 넓으며 큰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승업은 이곳에서 종사의 자리에 앉아 교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면서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3오(吳)의 학사들이 바퀴살 모여들듯 몰려들었다. 어깨에 어깨를 이었다.
또한 그는 강의하는 여가에 틈만 나면 선문(禪門)에 뜻을 두었다. 한 번 단정하게 앉을 때마다, 기이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히 감돌았다. 승업의 가까이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그 향기를 맡아, 그 신이함을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는 아직 『십송률』이 출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곧 먼저 계본(戒本)을 번역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대부(大部)를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계본과 『대부』가 그 뜻에서는 같지만, 말의 표현에 있어서는 혹 다른 것이 있었다. 이에 승업은 이를 개정하여, 한결같이 『대부』에 근거하게 하였다. 지금도 전송되어 두 책이 나란히 행한다.
승업은 원가(元嘉) 18년(441)에 오중(吳中)에서 죽었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혜광(慧光)
승업의 제자인 혜광이 승업의 도풍과 법규를 이어받아, 역시 자주 강설을 담당하였다.
3) 석혜순(釋慧詢)
혜순의 성은 조(趙)씨며, 조군(趙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고 고행하였다. 장안을 노닐며 지나다가, 구마라집에게 수업하여 경론을 정밀하게 연찬하였다. 특히 『십송률』과 『승기율(僧祇律)』을 잘하였다. 곧 다시 조장(條章)을 만드니, 그 논리가 오랜 옛날까지 꿰뚫었다.
전송의 영초(永初) 연간(420~422)에 돌아왔다. 광릉(廣陵)에 머물면서 계율의 자리[律席]를 크게 열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울에 이르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그 절의 승려인 혜관(慧觀)도 『십송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는 혜순의 덕이 여러 사람의 모범이 된다 하여, 곧 다시 다른 절에서도 위덕을 떨치게 하였다.
이에 자리를 옮겨 장락사(長樂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2년(458)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4세이다.
4) 석승거(釋僧璩)
승거의 성은 주(朱)씨며, 오(吳)나라 사람이다. 출가하여 승업의 제자가 되었다. 많은 경전을 모두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더욱이 『십송률』에 밝았다. 아울러 역사와 문헌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자못 문장도 지을 줄 알았다.
처음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그에 대한 풍문을 듣고 흠모하였다. 칙명을 내려 서울로 나와, 승정(僧正)이 되어 대중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당시 사문 승정(僧定)이 자칭 불환과(不還果:阿那含果)를 터득했다고 하였다. 승거는 승려들을 모아 상세하고 단호하게, 그로 하여금 신족통(神足通)을 나타내게 하였다. 승정이 말하였다.
“혹 계율을 범할까 두려워,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승거는 율문을 고찰해보았다. 네 가지 인연이 있으면 신족통을 나타낼 수 있었다. 네 가지 인연이란 첫째는 의혹의 그물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삿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이며, 셋째는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 넷째는 공덕을 이루는 것이다.
승정은 이미 헛된 거짓말이 폭로되자, 곧 날이 밝는 대로 쫓겨났다. 승거는 곧 『계중론(誡衆論)』을 지어서, 찾아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보였다.
승거는 이미 배움이 불교 안팎의 경전을 겸하였다. 또한 율행에 하자가 없었기에, 도인과 속인들이 귀의하여 수레 자국이 서로서로 이어졌다.
전송(前宋)의 소제(少帝:劉又符)도 그를 따라 5계를 받았다. 예장왕(豫章王)의 아들 유자상(劉子尙)도 불법의 벗이 되었다. 원찬(袁粲)과 장부(張敷)도 한 번 만나자, 일산을 기울여 이야기 할 만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장엄사(莊嚴寺)로 옮겨 머물다가, 주석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58세이다. 『승만경』의 글 뜻을 서술하였다. 아울러 『승니요사(僧尼要事)』 두 권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행한다.
∙도표(道表)
당시 또 도표율사가 있었다. 사람됨이 진솔하고 높은 행실이 있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진희왕(晋熙王) 유섭(劉燮)에게 명령하여, 계를 청하여 좇게 하였다.
5) 석도엄(釋道儼)
도엄은 옹립(雍立) 소황(小黃)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비니(毘尼)에 뛰어나 4부(部)의 율전을 정밀히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뭇 대가의 주의와 주장을 융합하였다.
또한 율부가 동방으로 전해오면서 범어와 한문의 음이 달랐다. 그러므로 글이 자못 음에 좌우되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묻고 찾으려 해도 어찌 할 바를 모를까 걱정하였다. 곧 글 뜻의 결론을 모아, 『결정사부비니론(決正四部毘尼論)』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팽성(彭城)에 노닐며 율장을 널리 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혜요(慧曜)
당시 서현사(栖玄寺)의 혜요도 역시 『십송률』에 뛰어났다.
6) 석승은(釋僧隱)
승은의 성은 이(李)씨며,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믿음이 올곧았다. 승은은 여덟 살 때 출가하였다. 곧 긴 시간 동안 행하는 재(齋)도 올릴 수 있었다. 열두 살에 이르러 푸성귀를 먹었다. 구족계를 받자 지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굳었다.
항상 마음을 계율의 뜨락에 노닐었다. 또한 『십송률』에 미묘하게 뛰어나고, 『법화경』과 『유마경』을 외웠다.
서량주(西凉州)에서 현고(玄高) 법사가 선과 지혜를 아울러 드높인다는 말을 들었다. 곧 책 보따리를 지고 그를 따랐다. 이에 배움은 선의 관문을 다하고, 계율의 요체를 깊이 해득하였다.
현고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서쪽 파촉(巴蜀) 땅에 노닐었다. 오로지 불교를 널리 펴는 일을 맡았다. 얼마 후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 비파사(琵琶寺)에 머물면서 혜철(慧徹)에게서 공부하였다. 혜철은 명성이 당시에 드높고, 도를 세상 밖에서 떨쳤다.
승은은 도를 갈고 추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루 경과 율을 궁구하였다. 선과 지혜의 바람으로 형(荊)과 초(楚) 지방을 덮었다. 고을의 장군인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祐)와 장사(長史) 장대(張岱)도 나란히 계법을 묻고 받았다. 후에 자사(刺史)인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과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도 모두 가마를 선방으로 몰고 왔다. 이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하였다.
그 후 병으로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자에게 물었다.
“점심때가 되었느냐?”
“이미 점심때입니다.”
그러자 물을 찾아 입을 헹구었다. 얼굴 모습을 느긋한 채로 문득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성구(成具)
당시 강릉의 상명사(上明寺) 성구율사도 『십송률』ㆍ『잡심론』ㆍ『아비담』 등에 뛰어났다.
7) 석도방(釋道房)
도방의 성은 장(張)씨며, 광한(廣漢)의 오성(五城) 사람이다. 도의 행실이 맑고 곧았다. 어려서부터 율학에 뛰어났다. 광한의 장락사(長樂寺)에 머물렀다.
예불하여 향을 사를 때마다, 향의 연기가 곧바로 불상의 정수리로 올라갔다. 또 부지런히 문인들을 가르쳐, 악을 고쳐 선을 행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120세이다.
8) 석도영(釋道營)
도영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처음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선을 익혔다. 만년에 혜관(慧觀)과 혜순(慧詢) 두 율사로부터 비니(毘尼)를 묻고 전수받았다. 특히 『승기율』 1부에 뛰어났다.
『법화경』ㆍ『금광명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하게 절조를 지켰다. 장엄사(莊嚴寺)의 도혜(道慧)와 치성사(治城寺)의 지수(智秀)도 모두 그의 모범적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았다.
장영(張永)이 초청하여 오군(吳郡)으로 돌아갔다. 채흥종(蔡興宗)이 다시 맞아들여 상우(上虞)에 머물렀다. 그 후 장영이 서울의 누호원(婁胡苑)에 한심사(閑心寺)를 세웠다. 다시 초청하여, 돌아가 머물면서 강석을 자주 이어갔다. 그러자 배우는 무리들이 매우 성하였다.
승명(昇明) 2년(478)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혜우(慧祐)
당시에 혜우는 본래 단도(丹徒) 사람이었다. 나이 30세에 출가하였다. 몸을 굳은 절개로 힘써서, 정밀하게 계율의 가르침을 찾았다.
북제의 초기(479~480)에 동산(東山)에 들어가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를 강의하였다. 제의 경릉왕(竟陵王)의 소자량(蕭子良)이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였다. 이에 서울로 나와 한심사(閑心寺)에 머물렀다.
9) 석지도(釋志道)
지도의 성은 임(任)씨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신중하였다. 열일곱 살에 출가하여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하고 욕심이 적었다. 여섯 가지 필수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울러 비축하는 물건이 없었다. 배움이 삼장에 뛰어났다. 더욱이 율품을 잘 하였다. 하상지(何尙之)가 덕을 흠모하여 예를 갖춰 초청하였다. 자신이 지은 법륜사(法輪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앞서 북위(北魏)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나 후에 세자가 황제가 되어 다시 불교를 일으켰다. 계를 내려주는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지도는 이미 불법의 홍통을 서원하였다. 그래서 어려움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마침내 함께 약속한 10여 명과 길을 떠나 호뇌(虎牢)에 이르렀다.
낙양ㆍ진주(秦州)ㆍ옹주(雍州)ㆍ회주(淮州)ㆍ예주(豫州) 등 다섯 고을의 도사를 인수사(引水寺)에 불러모았다. 율을 강의하고 계를 밝혀 다시 법을 받도록 펼쳤다. 거짓 나라[僞國:北魏]에서 승려의 계율이 온전할 수 있던 것은 지도의 힘 덕분이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왕환(王奐)이 상주(湘州)로 나가 주둔하자, 손잡고 더불어 노닐었다.
영명(永明) 2년(484) 상주 땅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초도(超度)
당시 서울 와관사(瓦官寺)의 초도도 『십송률』과 『사분율(四分律)』에 뛰어났다. 『율례(律例)』 일곱 권을 지었다고 한다.
10) 석법영(釋法穎)
법영의 성은 삭(索)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열세 살에 출가하여, 법향(法香)의 제자가 되었다. 양주(凉州)의 공부사(公府寺)에 머물렀다. 동학인 법력(法力)과 더불어 모두 율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영은 스승에게 배운 이후, 배움을 두 번 청하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기억하였다. 율부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론도 널리 섭렵하였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내려가 신정사(新亭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절을 고쳐 수리하였다. 법영은 학업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남까지 밝게 함을 겸했다. 그러므로 칙명을 내려 도읍의 승정(僧正)으로 삼았다. 후에 직책을 내놓고 다보사(多寶寺)로 돌아왔다. 한적한 방에서 항상 선정을 익히고, 때로 계율의 법석도 열었다.
북제의 고조(高祖)황제가 즉위하였다. 다시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일마다 내리는 공양물이 보통 규정된 것의 갑절이나 되었다.
법영은 들어온 보시물로 경전과 불상 및 약장(藥藏)을 만들어 장간사(長干寺)를 채웠다.
북제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십송계본(十誦戒本)』과 『갈마(羯磨)』를 지었다.
∙혜문(慧文)
당시 천보사(天寶寺)의 혜문율사도 여러 부(部)의 율법에 뛰어났다. 낭야(瑯琊)의 왕환(王奐)이 섬기는 바가 되었다고 한다.
11) 석법림(釋法琳)
법림의 성은 악(樂)씨며, 진원(晋原)의 임공(臨邛)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촉군(蜀郡)의 배사(裵寺)에 머물렀다. 오로지 계품을 좋아하여, 『십송률』로 마음을 갈았다. 항상 촉 땅에는 좋은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불현듯 승은(僧隱)이 촉에 이르자, 법림은 곧 송곳으로 찌르며 자기를 이겨내기를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승은이 섬서(陝西)로 돌아갔다. 다시 몇 해 동안 그를 따르며 공부하였다. 모든 부의 율장을 마음 속 깊이 훤하게 다하였다.
그 후 촉으로 돌아와서 영건사(靈建寺)에 머물렀다. 그러자 익주(益州) 고을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종사로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항상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늘 『무량수경』 및 『관음경(觀音經)』을 독송할 때마다, 문득 한 사문이 나타났다.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컸다. 항상 법림 앞에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년(495)에 이르러 병으로 누웠는데 낫지 않았다. 생각을 서방정토에 쏟아 쉬지 않고 예참하였다. 모든 현인과 성인이 다 눈앞에 모이는 것이 보였다. 곧 제자들을 향해서 그가 본 것을 말하였다.
“죽은 후에는 몸을 불사르라.”
말을 마치자 합장한 채로 세상을 마쳤다. 곧 신번로(新繁路) 입구에 나무를 쌓아 시신을 태웠다. 그러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러, 사흘 후에야 다하였다. 유골을 거두어 곧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12) 석지칭(釋智稱)
지칭의 성은 배(裵)씨이고, 본래 하동(河東)의 문희(聞憙) 사람이다. 위(魏)의 기주(冀州)자사 배휘(裵徽)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대에 난을 피해서 경구(京口)에 임시 머물렀다.
지칭은 어릴 때부터 강개(慷慨)하여, 자못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열일곱 살 때 왕현모(王玄謨)와 신탄(申坦)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험윤(獫狁)을 토벌하였다. 매양 전투가 벌어져 칼에 피가 묻을 때마다, 마음에 측은한 생각을 품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 아픔을 자기 몸의 아픔보다 더 깊이 느꼈다. 이에 문득 탄식하였다.
“남을 해쳐서 자신을 구제함은 어진 사람의 뜻이 아니다.”
일이 안정되자 갑옷을 벗었다. 우연히 『서응경(瑞應經)』을 읽고는 곧 깊이 느끼고 깨달았다.
‘사람의 백 년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며, 나라와 성(城)이 중한 것이 아니로구나.’
곧 남간사(南澗寺) 선방에 있는 승종(僧宗)에게 투신하여, 5계 받기를 청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한때 익주(益州)의 앙(仰)선사가 서울로 내려온 것을 맞이하여 공양한 적이 있다. 지칭은 곧 뜻을 모아 그에게 귀의하였다. 앙선사도 도탑게 그를 상대하고 대접하였다. 앙선사가 문강(汶江)으로 돌아가자, 그를 따라 노닐며 거슬러 올라갔다. 촉(蜀)의 배사(裵寺)에서 출가하고, 앙선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나이는 36세이다.
오로지 율부에 정진하여 『십송률』을 크게 밝혔다. 또한 『소품경』 1부를 외웠다. 그 후 동쪽 강릉으로 내려가, 은(隱)ㆍ구(具) 두 스승으로부터 다시 선과 율을 전수받았다.
의가(義嘉)가 난리를 일으킨 때를 만나, 곧 자리를 옮겨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흥황사(興皇寺)에서 율을 강의하는 법영(法穎)을 만났다. 지칭은 겉에 나타나지 않거나,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것에 대해, 의견을 물어 결정 할 때면, 말하는 것마다 중심을 찔렀다. 그러니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림사(定林寺)의 법헌(法獻)과는 강석에서 서로 만났다. 법헌은 그의 문답이 맑고 깊이 있음을 들었다. 곧 손잡고 산사에 머물렀다. 이에 『소품경』을 복습하여 외우고, 율을 닦아 구축하였다.
그 후 여항(餘杭) 보안사(寶安寺)의 석승지(釋僧志)가 초청하였다. 그러자 지칭은 고향으로 돌아와 『십송률』 강석을 열었다. 운서사(雲栖寺)에서 다시 허리를 굽혀, 사주(寺主)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지칭은 마침내 그 소임을 받아들였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의 기준들을 들어올려 법으로 내보였다.
얼마 후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왕이 보홍사(普弘寺)로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수백 명의 승려가 모두들 책을 잡고서 뜻을 이어받았다.
지칭은 집을 떠나 도에 들어와서는, 번다하게 쌓이는 일을 버리려 애썼다. 항상 경조사(慶弔事)와의 인연을 끊고서 인간관계를 두절하였다. 집안 어른들의 흉한 부고[凶故]가 있을 때마다, 계율을 지키고 슬픔을 절제하였다. 오직 도 닦기를 더욱 부지런히 힘썼다. 그로써 일년 상[朞功之制]을 마쳤다.
주방(朱方)의 사문 혜시(慧始)가 지칭을 초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강설하였다. 그러니 친척과 마을의 옛 친구들이 모두 와서 문안하였다. 모두에게 정중하게 훈육하여, 효도와 자애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별에 즈음하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안락사(安樂寺)에서 쉬었다.
항상 법륜을 굴려서, 율장의 대본을 30여 차례 두루 강의하였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십송의기(十誦義記)』 여덟 권을 지었다. 세상에 성행한다. 그의 제자 승변(僧辯) 등이 안락사에 비를 세웠다.
∙총(聰)ㆍ초(超)
지칭의 제자 가운데, 총ㆍ초 두 사람이 가장 율장에 뛰어나, 문도들이 손을 모아 읍하였다.
13) 석승우(釋僧祐)
승우의 본래 성은 유(兪)씨며, 그의 선조는 팽성(彭城)의 하비(下邳) 사람이다. 그런데 부친의 대에 건업(建業)에 거주하였다.
승우의 나이가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건초사(建初寺)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는 펄쩍 뛰면서, 도를 즐거워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의 뜻을 가엽게 생각하여, 잠시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승범(僧範) 도인을 스승으로 섬겼다.
나이 열네 살 때 집안사람들이 비밀리에 혼인처를 구했다. 승우가 이를 알고 피해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법달(法達) 법사에게 몸을 맡겼다. 법달도 계율과 덕이 정밀하고 엄숙하여 법문의 기둥이 된 이로, 승우는 스승으로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나이가 차서 구족계를 받자, 잡은 지조가 굳고 밝았다.
처음 사문 법영(法穎)에게서 수업하였다. 법영은 한 시대의 이름난 이로 율학(律學)의 종사였다. 이에 승우는 생각을 다하여 뚫고 구하며, 새벽에서 밤까지 게으름이 없었다. 마침내 율부에 크게 정밀하게 뛰어나, 선배들을 더욱 힘쓰게 하였다. 북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늘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듣는 대중들이 항상 7,8백 명이었다.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시험 삼아 오부대중을 고르고, 아울러 『십송률』 강의를 베풀어, 다시 계를 받는 법을 폈다. 여기서 얻은 보시로 정림사(定林寺)와 건초사(建初寺)를 경영하여, 여러 사찰을 수선하였다. 아울러 차별을 두지 않는 큰 모임[無遮大集]과 사신재(捨身齋) 등을 세웠다.
경장(經藏)을 조성하자, 두루마리 책들을 찾아 비교하였다. 무릇 절을 널리 열고, 진리와 말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그의 힘이다.
승우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교묘한 데가 있었다. 능히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장인들이 와서 표준치[標準]에 근거해서 비교해 보면, 한 자 한 치도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광택사(光宅寺)와 섭산사(攝山寺)의 큰 불상과 섬현(剡縣)의 석불상 등은 모두 승우를 초청하여, 그의 의례 법칙에 기준하여 계획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예우하였다. 모든 승려의 일에 관한 큰 의문은, 모두 칙명으로 그를 찾아가 심의하여 결정토록 하였다. 나이가 들어 노쇠하고 다리에 병이 생기자, 칙명으로 가마를 타고 내전에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였다. 여섯 후궁에게도 계를 받게 하니, 그가 조정에서 존중받음이 이와 같았다.
개선사(開善寺)의 지장(智藏)과 법음사(法音寺)의 혜곽(慧廓)도 모두 그의 소박한 덕을 숭배하여, 초청하여 스승의 예로 섬겼다. 양의 임천왕(臨川王) 소굉(蕭宏)과 남평왕(南平王) 소위(蘇偉), 의동(儀同) 진군(陳郡)의 원앙(袁昻), 영강(永康) 정공주(定公主), 귀빈(貴嬪) 정씨(丁氏) 등도 모두 그 모범적인 계율을 숭배하여, 제자로서 예를 다하였다. 무릇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1만 1천여 명이었다.
천감(天監) 17년(518) 5월 26일에 건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그리하여 개선로(開善路)의 서쪽 정림사의 옛 묘지에 묻혔다. 제자 정도(正度)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동완(東莞)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처음 승우가 경장을 모았다. 그것이 이룩되자, 사람을 시켜 그 가운데서 중요한 일들을 뽑았다. 이에 「삼장기(三藏記)」ㆍ「법원기(法苑記)」ㆍ「세계기(世界記)」ㆍ『석가보(釋迦譜)』 및 『홍명집(弘明集)』 등으로 엮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論】예의란 성실함과 믿음이 엷어진 데서 나오고,4) 계율도 그릇됨을 막으려 하는 데서부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범하는 연유에 따라서 편목(篇目)을 만들었다. 쌍수(雙樹)에서 호흡이 끝날 때까지가 부처님 생존시의 일대기이다. 금하(金河)에서 그림자가 멸한 이래, 가섭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계율을 잘 지킨 존자인 우바리(優波離) 비구에게 명하여, 율장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이에 우바리 비구는 손에 상아(象牙) 부채를 잡고, 입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기를 80번 되풀이하여, 그 글이 마침내 끝났다. 이에 이를 나뭇잎에 써서 『팔십송률(八十誦律)』이라 이름하였다.
이후로 가섭ㆍ아난ㆍ말전지(末田地)ㆍ사나바사(舍那波斯)ㆍ우바굴다(優波掘多), 이 다섯 분의 아라한이 차례로 불법을 주지하였다. 우바굴다의 시대에 이르러, 아육왕(阿育王)이 파타리불다성(波吒梨弗多城)에 있었다.
지난 옛날에 부처님과 만난 인연으로, 드디어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나 시기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가혹하고 포학한 정치를 하며, 경서를 불태우고 여러 득도한 사람을 해쳤다.
그 후 마음을 바꾸어 불도에 귀의하고,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여 멀리 아라한을 모아 다시 삼장을 결집하였다. 이때에는 서로 보고 들은 것에 집착하였다. 각기 스승의 설을 인용하여 의지한 근거가 같지 않아, 마침내 5부의 경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제약하는 가볍고 무거움이때때로 혹 같지 않다. 허락하고 차단하며 폐하고 건립하는 면에서도 작은 차이가 없지 않다. 이는 모두 부처님께서 지난 옛날에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응하셨음에서 연유한다.
혹 사람에 따라, 혹 근기에 따라, 혹 시절에 따라, 혹 나라에 따라 이곳에서는 허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지방에서는 제지하시고, 혹 이쪽 사람에게는 제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셨다.
다섯 분의 승려가 비록 다 같이 부처님의 율을 취하였지만, 각기 한 귀퉁이만을 근거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족계마다, 때로 가볍고 무거움이 죄목을 다룸에 있어서, 넉넉하거나 낮추거나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에 근거하여 수학하면 모두 득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인연의 중첩함을 꿈꾸신 일이 있었다. 이미 경과 율이 5부로 나뉠 것임을 예언하였다.
『대집경(大集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죽은 뒤 남겨진 법이 나뉘어져 5부가 될 것이다. 교리 이해가 거꾸로 뒤집혀지고, 법장이 숨겨 가려진 것을 담무국다(曇無鞠多)라 하리라.”
곧 담무덕(曇無德)이 그것이다.
“외도의 책을 읽어 암기하고, 삼세를 있다고 받아들이며, 문답에 뛰어나며, 일체 중생이 모두 계를 받을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을 살바야제바(薩婆若帝婆)라 하리라.”
곧 살바다(薩婆多)가 그것이다.
“나는 없다고 설하며 모든 번뇌를 얽어매는 것을 가섭비(迦葉毘)라 하고, 나는 있다고 말하면서 공(空)을 설하지 않는 것을 바차부라(婆蹉富羅)라 하며, 넓고 해박하게 두루 5부를 열람하는 것을 마하승기(摩訶僧祇)라 하리라. 선남자야, 이와 같은 5부가 비록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여러 부처님의 법계 및 대열반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니라.”
또한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열반에 든 후 백 년이 되면 아마도 두 부(部)가 일어나리라. 첫 번째는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이다. 대중부(大衆部)라고도 하며,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같이 모여 율장을 내놓을 것이다. 이로부터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7부가 생겨날 것이다. 두 번째는 체비리부(体毘履部)이다. 순전히 불도의 수행을 마친 승려들이 함께 모여 율법을 내놓을 것이다. 이 부로부터는 다시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11부가 생겨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경의 게송에서 칭송한다.
18부와 그 근원이 되는 두 부는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오리라.
옳지도 않지만 그르지도 않아서
나는 미래에 일어나리라 말하노라.
또한 주장하는 견해가 같지 않아, 전하는 가운데 역시 18부가 있는데, 언어 표현에서 조금 다르다. 그런 까닭에 5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4부가 생겨났고, 미사색부(彌沙塞部)에서 1부가 생겨났으며, 가섭비부(迦葉毘部)에서 2부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2백 년 안에 생긴 것이다. 승기부(僧祇部)에서 생긴 6부는, 흐르는 물 같이 끊임없이 전한 4백 년 동안, 담무덕부(曇無德部)에게서 생겨난 율장이다.
경전 가운데 혹 다만 다섯 승려만을 말하는 것은 그 우두머리를 들어 말한 것이다. 혹 때로는 18이나 20의 율부를 말하는 것은 다른 논리를 통틀어 줄지어 말한 것이다.
불교가 동방에 전해지면서 5부의 율장도 모두 건너왔다. 처음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워내자, 구마라집이 이를 번역해서 한문으로 바꾸었다. 다 끝내지 못하고 불야다라가 죽었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다시 나머지를 외워내서,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모두 끝냈다.
담무덕부(曇無德部)는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것으로, 곧 『사분율』이 그것이다. 마하승기부와 미사색부는 모두 법현(法顯)이 범본을 얻은 것이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승기율』을 번역해 냈으며, 불타집(佛馱什)이 번역해 낸 미사색본은 곧 『오분율』이다.
가섭비부(迦葉毘部)에 대해서는 혹 말한다.
“이미 범본이 건너왔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번역하지는 못하였다.”
거기에 실려 있는 선견(善見)ㆍ마득륵가(摩得勒伽)ㆍ계인연(戒因緣) 등도 역시 율에 속한 갈래이다.
이처럼 모든 율부가 다 전래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십송률』 한 본이 동쪽 중국에서는 가장 성행하였다.
예전에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는 본래 서역 나라의 으뜸가는 종사였다. 관중 땅에 들어와 형주와 섬서로 갔다. 그곳에서 모두 『십송률』을 베풀어 유통시켰음이 송(宋)나라의 역사에 나타나 있다. 담유(曇猷)가 친히 소리와 뜻을 이어받고, 승업(僧業)이 발꿈치를 이어 넓게 교화하였다.
승거(僧璩)ㆍ도엄(道儼)ㆍ승은(僧隱)ㆍ도영(道榮) 등은 모두 담유ㆍ승업의 뒤를 그대로 이어받아, 줄지어 송나라를 장식하였다. 글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정도이므로, 그렇게 깊이 있게 뚫고 연마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지칭(智稱) 율사는 깊이 생각하기를 다하여, 펼쳐서 해석한 것마다 모두 문호를 개척하여 다시 과목(科目)을 세웠다. 북제(北齊)와 양(梁)시대에, 천명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명세(命世)’라 불렸다. 그에게서 배운 무리들이 기록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상한다.
무릇 지혜는 선정에 힘입고, 선정은 지계에 힘입는다. 그런 까닭에 계ㆍ정ㆍ혜는 불교의 교리를 크게 분류한 것이자 차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도문에 들어서면, 곧 계율로 근본을 삼고, 속가에 살면 예의를 우선으로 삼음을.
『예기(禮記)』에 이른다.
“도덕ㆍ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룩되지 않으며, 교훈으로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예가 아니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한다.
“계는 평탄한 땅이라 하겠다. 모든 거룩함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삼세의 불도도 계에 의지하여 비로소 머문다.”
그런 까닭에 율에서 해석하는 다섯 가지 법은, 제어함을 먼저 알게 한다. 물적현상 위에 있는 모양[三相]을 풀 베듯 해야 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에야 선정과 지혜의 법문을,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수학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잘못에 집착하는 무리들은 서로 다른 논의들을 일으킨다.
율에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계율이 모든 것을 지휘하며, 논리를 따지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구족계의 제목이나 이름 정도만 얄팍하게 알면, 이내 말한다.
“해득함이 우바리 비구의 경지에 미친다.”
고작 물을 걸러내고 물주머니를 뒤집을 줄만 알아도 이미 일컫는다.
“행이 아라한과 나란하다. 오직 나만이 승려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눈으로 불법을 보아 상상으로만 이른다.”
이는 자신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으로, 공덕을 쌓더라도 허물을 속죄할 수 없다.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과 자기가 높다는 긍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무릇 이러한 것을 일컫는다.
한편 논리를 따지는 데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율부는 하나의 치우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를 따지는 것은 사방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 따르기를 등지고, 5음(陰)과 12입(入)만을 오로지 중히 여긴다. 뜻에만 맞으면, 곧 행하여 한 번도 구애받는 일이 없다.
그들은 말한다.
“지옥도 지혜로운 사람을 불사르지 못하고, 끓는 가마솥도 반야를 삶지는 못한다.”
이것은 모두 행동을 단속하는 자루를 잃어서, 도로 자신을 상하는 것이다.“쥐를 점쳐 양(羊)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찬하노라.
소반과 사발에 마련한 경계나
안석과 지팡이에 베푼 새김글이나
만약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으리요.
누더기 옷 깁고 입으면
구족계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입과 생각을 다물고 지키면서
마음과 몸을 마른 고목나무처럼 하라.
기쁨과 슬픔이 거울의 양면이라면
들뜸과 근심은 병의 앞뒤라네.
주석
1 듣건대, “삶을 잘 기르는 이는 육지에서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더라도, 외뿔소가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찍을 곳이 없고, 무기가 그 칼날을 들이밀 곳이 없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노자』 50장)
2 『노자(老子)』 26장.
3 육묘법문(六妙法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식선(數息禪)의 수(數)ㆍ수(隨)ㆍ지(止)ㆍ관(觀)ㆍ환(還)ㆍ정(淨)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다.
4 저 예의바름이라는 것은 성실과 믿음의 얄팍한 상태이자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처음이며, 미리부터 아는 것은 도의 꽃이자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도타운데 머물러서 얄팍함에 뜻을 두지 않고, 열매에 머물러서 꽃에 뜻을 두지 않는다. (『노자』 38장)
『고승전』 11권(ABC, K1074 v32, p.869a01-p.880c01)
고승전(高僧傳) 제12권
6. 망신(亡身)
1) 석승군(釋僧群)
승군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맑고 깨끗하여 가난함으로 절개를 지키고, 푸성귀를 먹으며 경을 외웠다. 후에 나강현(羅江縣)의 곽산(霍山)에 자리 잡아, 띳집을 얽어 살았다. 이 산은 바다 가운데 외롭게 서있다. 정상에는 발우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지름이 몇 길 가량 되었으며, 고인 물의 깊이가 6, 7척이나 되었다. 고을의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뭇 신선이 살던 곳으로, 신선들은 물만 먹고도 주리지 않았기에 곡식을 끊었다”고 한다.
그 후 진수(晋守)의 태수(太守) 도기(陶夔)가 그 소문을 듣고 물을 찾았다. 승군이 물을 도기에게 보냈으나, 산만 벗어나면 곧 구린 냄새가 났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서너 번 거듭하자, 도기는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 이 날 날씨는 매우 맑게 개였다. 산에 이르자 비바람이 치면서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며칠을 그곳에 머물렀으나, 끝내 그곳에 이를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마침내 탄식하였다.
“속세 안의 범부라서, 마침내 현인과 성인들께서 막으시는구나.”
개탄하고 한탄하면서 돌아갔다.
승군의 초막집은 발우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과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었다. 항상 외나무로 다리를 삼고, 이 다리를 따라 물을 퍼왔다.
그 후 문득 날개가 부러진 오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날개를 펴며 다리를 가로막고, 주둥이로 나아가 승군을 쪼았다. 승군은 지팡이를 들어올려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오리가 손상을 입을까 두려웠다. 이로 인하여 암자로 되돌아와서 물을 끊고 마시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140세이다. 임종 때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이가 어렸을 때, 오리의 날개를 꺾은 일이 있다. 이것이 현세의 과보로서 증명하는구나.”
2) 석담칭(釋曇稱)
담칭은 하북(河北)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사랑이 넘쳐 은혜를 베풂이 곤충까지 미쳤다.
진(晋)의 말기에 팽성(彭城)에 이르렀다. 80세 가량의 노인 부부가 궁핍하고 쇠약한 것을 보았다. 곧 계율을 버리고 그들의 노복(奴僕)이 되어 여러 해를 일하였다. 안으로는 도덕을 닦아, 한 번도 버린 일이 없었다. 그러자 이에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 후 두 노인이 죽자, 품을 팔아 얻은 삯을 모두 두 노인의 복을 짓는 데 썼다. 그것으로 스스로 속죄하는 일에 견주었다. 장례를 마친 뒤, 다시 도문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법을 수행할 때에 필요한 물건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전송(前宋)의 초기에 팽성의 가산(駕山) 아래에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해를 입는 사람이 하루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이에 담칭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호랑이가 만약 나를 잡아먹는다면, 재앙은 당장 해소될 것이오.”
마을 사람들이 간절하게 충고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곧 그날 밤에 혼자 풀 속에 앉아 있으면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의 이 몸으로 너의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채우거라. 네가 지금부터 원한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이 멎는다면, 미래세계에는 아마도 위없는 승려들의 식사를 얻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생각이 바른 것을 알았다. 각기 울면서 절하고 돌아갔다.
그 날 밤 4경(更)에 이르러, 호랑이가 담칭을 잡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남산에 이르러 보니, 몸은 다 먹어치우고 오직 머리만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장례를 치르고 탑을 세웠다. 그 후로는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멎었다.
3) 석법진(釋法進)
법진은 혹 도진(道進), 혹 법영(法迎)이라고도 한다. 성은 당(唐)씨이며 양주(凉州) 장액(張掖)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고행을 정밀히 하였다. 독송을 익히면서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덕이 있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존중하였다. 저거몽손이 죽고 나서, 아들인 저거경환(沮渠景環)이 호(胡) 오랑캐에게 격파당하자, 법진에게 물었다.
“지금 방향을 바꿔 고창(高昌)을 침략하려 한다. 이길 수 있겠는가?”
법진이 말하였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다만 굶주리는 재난이 있을까 근심입니다.”
군병을 돌려 곧 평정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저거경환이 죽었다. 아우인 저거주(沮渠周)가 뒤를 이어 제왕이 되었다. 이 해 흉년이 들어 죽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저거주는 이미 법진을 섬겼다.
법진은 여러 번 저거주에게 구걸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였다. 나라에 비축한 식량이 조금씩 고갈되었다. 그러자 법진은 더 이상 나라에 구걸하지 않았다.
곧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다. 칼과 소금을 가지고, 깊고도 궁벽한 굴속의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다. 차례로 그들에게 삼귀의의 계를 내려주었다. 곧 옷과 발우를 나무에 걸어 놓고, 굶주린 사람들의 앞에 몸을 던지며 말하였다.
“그대들에게 보시하니 함께 먹으시오.”
여러 사람들은 비록 굶주려 고단하였지만, 아직도 의리로 보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법진은 곧 스스로 살을 잘라, 소금을 쳐서 이를 먹게 하였다. 그러자 두 넓적다리의 살이 다 없어졌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려 더 이상은 스스로 잘라낼 수 없었다. 이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나의 가죽과 살을 취하면, 아직도 며칠은 견딜 것이오. 만약 왕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곧 나를 데리고 갈 것이니, 오직 취할 수 있을 때 이를 갈무리하시오.”
굶주린 사람들은 슬피 울면서 취할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제자들이 찾아오고, 왕이 보낸 사람이 다시 와 보았다. 온 나라 사람이 달려와, 소리 높이 울부짖음이 서로 이어졌다. 곧 가마에 태워 궁전으로 돌아왔다.
저거주는 칙명으로 삼백 섬의 보리를 굶주린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따로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였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법진의 숨이 끊어졌다. 성 북쪽으로 나가서 다비하였다. 그러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렀고 7일이 지나서야 멎었다. 시신과 뼈는 모두 다 타버렸지만, 오직 혀만은 타지 않았다. 이에 곧 그 자리에 삼층탑을 세우고, 오른편에 비를 세웠다.
∙승준(僧遵)
법진의 제자인 승준은 성이 조(趙)씨로 고창 사람이다. 『십송률』에 뛰어나고 푸성귀를 먹으며, 행실이 절도가 있었다. 『법화경』ㆍ『승만경』ㆍ『금강경』ㆍ『반야경』을 외웠다. 또한 제자들을 열심히 격려하고 항상 참회를 일삼았다.
4) 석승부(釋僧富)
승부의 성은 산(山)씨이며, 고양(高陽) 사람이다. 그의 부친 산패(山覇)는 남전(藍田)의 수령이었다.
승부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나 배움을 돈독히 익혀 싫어함이 없었다. 땔감을 모아, 그것을 촛불로 삼아 비추어서 책을 읽었다.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경전과 역사를 두루 다 읽었다. 자태와 얼굴이 아름다웠고 담론에 뛰어났다.
그 후 위진(僞秦) 위장군(衛將軍)인 양옹(楊邕)을 만나자, 그가 승부의 옷과 식량을 도와주었다. 습착치(習鑿齒)와 손잡고, 함께 배움에 뜻을 두었다.
그 후 도안(道安)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강의를 들었다. 마침내 도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에 머리를 깎고, 도안에게 의지하여 수업하였다. 도안이 죽은 후에는 위군(魏郡)의 정위사(廷尉寺)로 돌아왔다. 휘장을 내리고 생각에 잠겨 속세의 일을 끊었다.
당시 마을에는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들이 있었다. 한 어린아이를 약탈하여, 그 심장과 간을 취해 정신의 긴장을 풀고자 하였다. 승부는 길거리를 이리저리 거닐다가 우연히 강도들을 만났다. 자세히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이내 옷을 벗고 자기와 어린아이를 바꾸자고 하였다. 그러나 강도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승부가 말하였다.
“어른의 오장도 역시 쓸 수 있는가?”
강도들은 승부가 자기 몸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거짓말로 말하였다.
“좋다.”
이에 승부는 생각하였다.
‘나의 허깨비나 불꽃같은 몸은 언젠가는 한 번 죽음을 만날 터이다. 죽음으로 사람을 구제한다면,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으리라.’
곧 스스로 강도들의 칼을 취하여, 가슴에서 배꼽까지 내려 그었다. 강도들은 다시 서로 허물하고 책망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곧 어린아이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길거리에서 당시 길 가던 한 사람이 승부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았다. 곧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승부는 비록 갑자기 숨이 답답한 상태였으나, 아직도 입으로 말은 할 수는 있었다. 곧 자세히 사건에 대해 대답해주었다. 이 사람은 슬퍼하고 애도하며 상심하였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바늘을 갖고 왔다. 그의 뱃가죽을 꿰매 주고, 효험 있는 약을 발라 주었다. 가마에 태워 절로 돌아가 쉬게 하였다. 얼마 후 상처가 나았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5) 석법우(釋法羽)
법우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혜시(慧始)의 제자가 되었다. 혜시는 행실이 바로 서고, 고행을 정밀히 하여 두타행을 닦은 이였다. 법우는 마음을 삼가는 데 용맹하여, 깊이 그 도에 통달하였다. 항상 약왕(藥王)보살의 자취를 우러러 본받아, 몸을 불태워 공양하고자 하였다.
당시 위진(僞晋)의 왕인 요서(姚緖)가 포판(蒲坂)에 주둔하였다. 법우는 이 일을 요서에게 아뢰니, 요서가 말하였다.
“도에 들어가는 길은 방법이 많은데, 하필 왜 몸을 불태우는가? 감히 굳게 어길 수는 없지만, 세 번 더 생각하기를 바란다.”
법우는 맹서한 뜻이 이미 무거웠으므로, 곧 향유를 마시고 베로 몸을 둘둘 말았다. 「사신품(捨身品)」을 외우기를 마치자, 불로 스스로를 태웠다. 도인과 속인들이 바라보면서, 슬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나이는 45세이다.
6) 석혜소(釋慧紹)
혜소의 씨족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때 어머니가 물고기나 고기를 먹이면 곧 토해냈다. 그러나 채소를 먹이면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곧 푸성귀를 먹었다. 여덟 살에 이르러 출가하여, 승요(僧要)의 제자가 되었다. 부지런히 정진하며 늠름하게 힘써서, 고행으로 절개를 드러내었다.
그 후 승요를 따라 임천(臨川)의 초제사(招提寺)에 머물렀다. 마침내 몰래 몸을 불태울 뜻이 있었다. 그래서 항시적으로 사람을 고용하여, 장작을 쪼개서 동산(東山)의 석실에 몇 길의 높이로 쌓아 놓았다. 중앙에 감실을 하나 열어 놓아 자기 몸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곧 절로 돌아와 승요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승요가 간곡하게 충고하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
분신하는 날에 이르자, 동산에서 대중들의 팔관재(八關齋)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알고 지낸 이들에게 고별인사를 하였다. 그 날 온 경내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수레와 말 탄 사람도 많았다. 또한 금은보화를 갖고 온 사람도 이루 다 일컬을 수 없었다.
초저녁에 부처님 주위를 돌면서 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승소는 스스로 향을 나누어 주었다. 나누어 주기를 마치자, 촛불을 손에 잡고 섶에 불을 붙이고는, 그 가운데 들어가 앉았다. 『약왕경(藥王經)』「본사품(本事品)」을 외웠다.
대중들은 승소가 보이지 않자, 그가 이미 떠난 것을 깨달았다. 예배도 끝나지 않았지만, 모두 장작을 쌓은 곳에 모여들었다. 장작더미에서 크게 슬퍼하는데, 송경하는 소리가 아직 멎지 않았다. 불길이 이마 있는 곳에 이르자, ‘일심(一心)’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말이 끝나자, 갑자기 송경소리가 끊어졌다.
대중들은 모두 한 말 가웃한 크기의 큰 별 하나가, 곧바로 연기 속을 내려왔다가 돌연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이를 본 사람은 모두 천궁(天宮)에서 승소를 영접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장작더미도 마침내 타버렸다.
승소는 임종 때 동학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몸을 불사른 곳에 아마도 오동나무가 돋아날 것이니, 삼가하여 베지 말게나.”
그 후 사흘이 지나자, 과연 오동나무가 돋아났다.
승소가 몸을 불사른 것은 원가(元嘉) 28년(451)의 일이다. 그때 나이는 28세이다.
∙승요(僧要)
승소의 스승인 승요도 맑고 삼가하여, 아름다운 덕이 있었다. 나이 160세에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7) 석승유(釋僧瑜)
승유의 성은 주(周)씨이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스무 살의 나이로 출가하여 소박하게 일삼고 순수하였다.
원가(元嘉) 15년(438)에 동학인 담온(曇溫)ㆍ혜광(慧光) 등과 더불어, 여산(廬山)의 남령(南嶺)에 함께 정사를 세웠다. 초은사(招隱寺)라 이름 지었다. 승유는 항상 생각하였다.
‘허물을 삼도(三途)에 맺는 것은 사람의 정(情)과 형체 때문이다. 정이 장차 다하면, 형체도 역시 마땅히 소진할 것이다. 약왕보살의 발자취를 어찌 홀로 멀다고 말하겠는가?’
이에 여러 번 자신의 맹서를 발원하다가, 비로소 몸을 불태울 결심을 하였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2년(455) 6월 3일에 섶을 모아 감실을 만들었다. 아울러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대중들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이날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섞이면서, 빈틈없이 비가 쏟아졌다.
이에 승유는 곧 서원하였다.
“만약 나의 뜻하는 일을 밝힐 수 있다면, 아마 하늘도 맑게 밝아질 것이다. 만약 감응이 없다면, 마땅히 큰비가 쏟아질 것이다. 이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신의 감응이 어둡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리라.”
말이 끝나자 구름 낀 날씨가 밝게 개였다.
초저녁이 되자 대소변을 끝내고, 장작더미 감실 속에 들어가 합장하고 편안히 앉았다. 「약왕품」을 외웠다. 화염이 교차하여 몸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합장한 자세는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도인과 속인들로서 아는 사람들이 달려와 산에 가득하였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면서 인연 맺기를 원하였다. 그때 모두가 자줏빛 기운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랜 후에야 그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이는 44세이다.
그 후 14일이 지나서 승유의 방 한가운데에서 쌍 오동이 돋아났다. 뿌리와 가지가 풍성하고 무성하였다. 크고 가는 모습이 비슷하여, 땅을 꿰뚫고 곧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마침내 서로 이어진 나무 결[連樹理]을 이루었다. 알 만한 이들은 생각하였다.
‘이것은 사라보수(娑羅寶樹)가 열반의 세계를 밝힌 것처럼, 승유도 거의 이에 거의 가까우므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난 것이리라.’
이로 인하여 그를 쌍동사문(雙桐沙門)이라 불렀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평남장사(平南長史)로 있었다. 친히 그 일을 목도하고, 자세히 그를 위해 전기와 찬(贊)을 지었다.
찬하노라.
멀고 먼 그윽한 기연이며
아득한 지극의 도리로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에 드는 것을
누가 묘한 보배라 하였던가.
예전 약왕보살께서
남다른 교화 절륜하다고
지난날 그 말 들었는데
지금 이 사람을 보았어라.
영명하고 영명하신 님이여,
지혜와 선정으로 마음 굳혀
신령이 응결된 자줏빛 기운에다
그 자취 한 쌍의 나무로 드러내셨네.
그 덕 좋아할 만하고
그 지조 귀중하도다.
이 글 지어서
그 모습 어렴풋이 기리노라.
8) 석혜익(釋慧益)
혜익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서울로 나와 죽림사(竹林寺)에서 쉬었다.
그는 부지런히 고행하여 정진하면서, 서원하여 몸을 불사르고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혹 비방하기도 하고, 혹 찬양하기도 하였다. 대명(大明) 4년(460)에 이르러 비로소 곡식을 물리치고, 오직 삼과 보리[麻麥]만을 먹었다. 그러다가 대명 6년(462)에 이르자 다시 삼과 보리도 끊었다. 다만 소유(蘇油)만을 먹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소유마저도 끊고, 오직 향환(香丸)만을 복용하였다. 그 결과 비록 몸은 약하고 쇠잔해도, 마음은 경계하여 올곧았다.
효무(孝武)황제는 깊이 경이로움을 더하여 정성스런 문안을 드렸다. 태재(太宰)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을 파견하여 절을 찾아가 혜익에게 충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혜익이 맹서한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대명 7년(463) 4월 8일에 이르자, 곧 불태우는 곳으로 나아갔다. 종산(鍾山)의 남쪽에 가마솥을 설치하여 기름을 마련하였다. 그 날 아침 소가 모는 수레를 사람으로 하여금 끌게 하여, 절에서 산으로 갔다. 제왕은 억조 백성들이 기대는 존재며, 또한 삼보가 기탁하는 바라 하여, 곧 자기 힘으로 궁성에 들어가 운룡문(雲龍門)에 이르렀다. 그러나 걸어서 내려갈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아뢰었다.
“혜익 도인이 지금 몸을 버리려고, 문에 이르러 고별을 아룁니다. 깊이 불법으로 우러러 누를 끼쳤습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달라져, 곧 몸소 운룡문으로 나갔다. 혜익은 황제를 만나자 거듭 불법을 부탁하고, 이에 그곳을 떠났다. 황제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어 여러 왕비와 도인ㆍ속인ㆍ선비ㆍ서민들이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옷을 던지고 보배를 버리는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가마솥에 들어가 한 작은 상에 기대었다. 옷가지로 스스로 몸을 감고, 머리에는 하나의 긴 모자를 쓰고는 기름을 쏟아 부었다. 곧 나아가 불을 붙이려 하였다.
황제는 태재(太宰)를 시켜 가마솥 있는 곳에 이르러, 요청하고 타일렀다.
“도행의 방법은 많은데, 하필이면 목숨을 버리는가? 원컨대 세 번 생각하여, 다시 다른 길로 나아갔으면 다행이겠다.”
혜익의 슬기로운 지조는 확연하여,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었다. 곧 대답하였다.
“이 미미한 몸, 천한 목숨이, 어찌 위에 계신 천자의 마음에 남을 만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성상의 자애로움이 망극하오이다. 원컨대 스무 사람을 제도하여 출가시켜 주십시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허가하였다. 이에 혜익은 곧 손수 촛불을 손에 잡고, 모자를 태웠다. 모자가 타오르자 곧 촛불을 버리고, 합장하여 「약왕품」을 외웠다. 불길이 눈썹에 이르기까지, 외우는 소리가 분명하다가, 눈에 미치자 마침내 희미해졌다.
귀족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애처롭고 안타까워하는 메아리 소리가 그윽한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두가 손가락을 튀기며, 부처님을 부르고 슬퍼하였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불길은 이튿날 아침에 이르러 마침내 다하였다. 황제는 그때 공중에서 피리와 나팔소리가 들리며, 기이한 향기가 물씬 풍겨 나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해가 다하도록 그곳에 있다가, 비로소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 꿈에 혜익이 석장을 흔들며 황제 앞에 이르렀다. 다시 불법을 부탁하였다.
이튿날 황제는 그를 위하여 모임을 마련하였다. 사람들을 제도하며, 재주(齋主)에게 창백(唱白)하게 하여, 나타난 조짐과 상서로움을 자세히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러고는 몸을 불사른 곳을 약왕사(藥王寺)라 일컬었다. 이는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견준 이름이다.
9) 석승경(釋僧慶)
승경의 성은 진(陳)씨이며, 파서(巴西) 안한(安漢)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오두미도(五斗米道: 도교의 일파)를 섬겼다. 승경은 홀로 깨우쳐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의흥사(義興寺)에 머물면서 청정한 행실을 맑게 닦았다. 원을 세워 부처님을 만나기를 구하였다. 먼저 세 개의 손가락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몸을 불사르기를 맹세하였다. 점차로 곡식을 끊고, 오직 향유(香油)만을 복용하였다.
대명 3년(459) 2월 8일에 이르러, 촉성(蜀城)의 무담사(武擔寺) 서쪽에서, 그가 조성한 유마거사의 상 앞에서 몸을 살라 공양하였다.
자사(刺史) 장열(張悅)이 몸소 나가 그곳에 임하여 그 광경을 보았다. 도인ㆍ속인ㆍ나그네ㆍ거주민 등 구경하는 사람으로 고을이 기울어질 지경이었다. 가던 구름도 뭉쳐, 괴로운 비가 슬피 떨어졌다. 갑자기 날이 개고 밝게 열려, 하늘색이 투명하고 청정해졌다. 그러더니 용과 같은 물체 하나가 나타나, 장작더미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나이는 23세이다.
천수(天水) 태수 배방명(裵方明)이 그를 위하여 재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10) 석법광(釋法光)
법광은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스물아홉 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하였다. 고행으로 두타행을 닦아 솜옷을 입지 않았다. 오곡을 끊고 오직 솔잎만을 먹었다.
그 후 맹세하여 몸을 불사르기에 뜻을 두었다. 곧 송진을 복용하고 기름을 마시면서, 반년을 보냈다.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5년(487) 10월 20일에 이르러, 농서의 기성사(記城寺) 안에서 땔감을 모아놓았다. 이에 곧 몸을 태움으로써, 앞서 뜻한 것을 만족시켰다. 불길이 눈에 이르도록 외우는 소리가 또렷또렷 하다가, 코에 이르자 가물가물거리더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41세이다.
∙법존(法存)
영명 연간(483~493) 말기에 시풍현(始豊縣)의 비구 법존도 몸을 불살라 공양하였다. 군수(郡守) 소면(蕭緬)이 사문 혜심을 파견하여, 그를 위하여 재탑[灰塔]을 세웠다.
11) 석담홍(釋曇弘)
담홍은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율 있는 행실을 닦아, 오로지 율부에 정진하였다.
전송(前宋)의 영초(永初) 연간(420~422) 남쪽 번우(番禺)에 노닐다가, 대사(臺寺)에 머물렀다. 만년에 다시 교지(交趾)의 선산사(仙山寺)로 가서 『무량수경』 및 『관음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마음에 서원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희구하였다.
효건(孝建) 2년(455)에 산 위에 섶을 모아놓고, 비밀히 장작더미 속에 가서 스스로를 불태웠다. 제자들이 뒤쫓아가서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반신은 이미 문드러졌다. 한 달이 지나자 조금 차도가 생겼다.
그 후 가까운 마을에서 모임을 마련하여, 온 절의 승려가 모두 그곳을 찾아갔다. 담홍은 이 날 다시 골짜기에 들어가 몸을 불태웠다. 마을 사람들이 뒤쫓아가서 찾아보니, 목숨이 이미 끊어졌다. 이에 땔감을 더하여 불길을 지피니, 이튿날에야 불길이 다하였다.
그 날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보았다.
‘담홍의 몸이 황금빛을 내면서 금빛 나는 한 마리 사슴을 타고 서쪽으로 매우 빠르게 가는 것을.’
안부를 여쭐 겨를도 없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비로소 그의 신이함을 깨달았다. 함께 재와 뼈를 거두어서 탑을 세웠다.
【論】무릇 형상이 있는 존재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몸이며, 감정이 있는 존재가 보배로 삼는 것은 목숨이다. 그런 까닭에 기름기를 먹고, 피를 마시고,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는 것은, 느긋하고 기쁜 마음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삽주[朮:蒼朮]를 먹고, 단사[丹]를 머금어 생명을 지키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오래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지어 털 하나를 꺾어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아껴서 하지 않는다거나, 한 끼의 밥을 거두어서 남은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하여도 아까워 주지 않거나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이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 가운데는 나름대로 굉장한 지식과 달관한 견해를 지닌 사람이 있어서, 자기 몸을 버려 다른 사람을 아름답게 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삼계가 긴 어둠 속의 세계임을 체득하고, 사생(四生)이 꿈과 허깨비의 경계임을 깨달아서, 정신을 나는 짐승보다 더 한가로이 하고, 겉 몸뚱이를 알곡을 담는 단지보다 더 단단히 한, 사람들이다.
그런 까닭에 정수리를 쓰다듬어 발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몸에 개의한 일이 없고, 나라와 성과 처자까지도 지푸라기와 같이 버린다. 지금 여기서 논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이다.
승군(僧群)의 마음은 한 마리의 오리를 위하여, 물 마시기를 끊고 그것으로써 몸을 버렸다. 승부(僧富)는 오직 한 아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배를 갈라 아이의 목숨을 보전하였다. 법진(法進)은 살을 도려내어, 사람들에게 먹였다. 담칭(曇稱)은 스스로 호랑이 먹이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가 나와 함께 남을 아울러 구제하는 길[兼濟之道]을 숭상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중생들을 이롭게 한 이들이다.
예전에 임금의 아들이 몸을 던져 호랑이 먹이가 된 공덕은, 9겁(劫)의 세월 동안 쌓은 공덕을 넘어선 것이다. 살갗을 도려내서 새와 바꾼 것은, 삼천세계를 진동시킬 만큼 놀라운 일이다. 생각건대 무릇 이런 사람은, 참으로 인품이 보통보다 아주 높이 뛰어나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법우(法羽)에서 담홍(曇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몸을 불살라 재가 되게 함으로써, 보배와 같이 사랑하던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혹 심정으로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기도한 사람도 있고,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서원한 사람도 있다. 그런 까닭에 한 쌍의 오동나무가 방 한가운데서 표출하기도 하고, 한 도관(道館)이 저절로 공중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니 아름답고 빛나게 상서로움과 부합한 일이, 시대와 더불어 간간이 나온다고 하겠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은 같지 않아, 허용하고 차단하는 것 역시 다르다. 만약 큰 방편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시절에 알맞게 행동한다면, 그 이익은 1만 가지 실마리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가르침으로 제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말한다.
“하나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태우는 것이 나라와 성으로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
출가한 모든 승려가 이와 같이 한다면 본래 위엄 서린 거동으로써 중생들을 섭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잔혹하게 몸뚱어리를 허물거나, 복전(福田)의 모습을 파괴하는 것을 헤아려서 이야기한다면, 얻음도 있고 잃음도 있다. 얻음은 몸을 잊은 것에 있다. 잃음은 계를 어긴 것에 있다.
그런 까닭에 용수(龍樹)보살은 말한다.
“새로 수행하는 보살은 일시에 모든 것을 두루 다 행할 수 없다. 혹 보시는 만족시켜도, 효도에는 어긋난다. 예를 들면 임금의 아들이 호랑이에게 몸을 던진 경우가 그것이다. 혹 지혜는 만족시켜도 자비와는 어긋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을 단속하기 위해 단식하는 등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행이 아직 완전히 아름답지 못하여, 차고 기우는 것이 없지 않음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몸에는 8만 벌레가 사람과 더불어 같이 숨쉰다. 사람의 목숨이 다하면, 벌레들도 함께 저 세상으로 간다.”
그런 까닭에 아라한이 죽은 후에, 부처님께서는 몸을 불사르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몸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불태우면, 혹 벌레의 목숨도 잃게 된다.
이를 설명하는 사람은 혹 말한다.
“아라한조차 불빛[火光]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무엇이 이상하리요?”
여기서 불빛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 것은, 먼저 이미 목숨을 버렸으나, 신통한 지혜의 힘을 써서 나중에 곧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바탕이 보살인 사람도, 역시 아직 과보로 얻는 몸을 면하지 못한다. 혹 때로는 몸을 불더미 속에 던지기도 하고, 혹 때로는 몸을 쪼개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벌레를 죽일 수 있다는 논리는, 그 마지막까지 소상하게 밝힐 줄을 알아야 한다.
무릇 3독(毒)과 4전도(顚倒)는 생사윤회의 뿌리를 심는 것이다. 7각지(覺支)와 8정도(正道)는 실로 열반의 요체로 가는 길이다. 어찌 반드시 몸과 뼈를 불에 사르고 구운 다음에야, 고난에서 벗어나리요?
만약 그의 위계가 인위(忍位)를 터득한 이웃에 자리하여, 세상의 자취를 굽어 살펴 범부와 같이한다면, 혹 때로는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의 논란이 미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만약 범부의 무리가 비추어보고 살핀 것이 넓지 않아, 마침내 수명이 다하도록 도를 행할 줄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몸과 목숨을 버리겠는가? 혹 한 때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나, 혹 이름을 만대에 유포시키기 위하다가도, 막상 불에 다다라 장작더미에 자리 잡으면, 후회와 무서움이 교차하여 파고든다. 하지만 드러내서 말한 것이 이미 널리 퍼져, 그 지조를 잃는 것이 치욕스러워진다. 이에 애써 일삼으려다, 헛되이 일만 가지 고통에 걸려드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말한 바를 그르치는 것이다.
찬하노라.
만약 사람 뜻이 우뚝하다면
쇠나 돌도 뛰어난 것 아니니
이 소중한 몸 불태워서
저 보배성 태어나길 기원한다네.
향기 높은 오동나무 울창하고
자줏빛 도관 가볍게 공중에 뜨며
치솟은 연기 아롱지게 빛나니
상서로움을 토하고 길조를 머금네.
천추에 아름다움 숭상하여
만대에 그 향기를 전하리라.
7. 송경(誦經)
1) 석담수(釋曇邃)
담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출가하여 하음(河陰)의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정법화경(正法華經)』을 항상 하루에 한 차례 두루 외웠다. 또한 경의 취지에 정밀하게 통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도 하였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문을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법사를 초청하여, 90일 동안 설법하고자 합니다.”
담수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굳게 청하여 마침내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자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잠이 깰 무렵이 되자, 이미 그의 몸은 백마 제방[白馬塢]의 신사(神祠) 속에서, 한 제자와 함께 있었다.
그때부터 날마다 몰래 다녔으므로,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 후 그 절의 승려가 신사 앞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두 개의 높은 자리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담수는 북쪽에 있고, 제자는 남쪽에 있으며, 마치 강설하는 소리가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함께 이 사실을 전하였다. 모두가 신비하고 기이한 일이라 말하였다. 하안거(夏安居)를 끝나자, 신(神)이 흰 말 한 필과 흰 양 다섯 마리와 명주 90필을 보시하였다. 주문을 외워 발원하기를 마치자, 여기에서 각기 소식이 끊어졌다. 그 후 담수가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2) 석법상(釋法相)
법상의 성은 양(梁)씨이며, 어디 사람인지는 헤아릴 길이 없다. 늘 산에 살면서 고행하여 정진하였다. 경전 십여 만 글자를 외웠다. 새와 짐승들이 그의 좌우에 모여들어 모두가 길들여서, 마치 집에서 키우는 짐승과 같았다.
태산사(泰山祠)에 큰 돌 상자가 있었다. 그 속에 재물과 보배가 저장되어 있었다. 법상이 언젠가 산길을 가다, 사당 옆에서 잤다. 문득 한 사람이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고 무인의 관을 썼다. 법상에게 돌 상자를 열게 하고는, 말이 끊어지자 보이지 않았다. 그 상자의 돌 뚜껑은 무게가 30만 근이 넘었다. 법상이 한 번 손으로 들어올리자, 바람에 나부끼듯 뚜껑이 들어올려졌다. 이에 그 속의 재물을 취하여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그 후 강남으로 건너가 월성사(越城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문득 마음대로 방탕하게 노닐고, 배우와 같이 우스갯짓[滑稽]을 하였다. 혹 때로는 벌거벗어 조정의 귀족들을 업신여겼다.
진(晋)의 진북장군(鎭北將軍) 사마염(司馬恬)이 그의 절제 없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불러서 짐독(鴆毒)을 먹였다. 거푸 세 종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신과 기운이 맑고 평정하며 깨끗하게 어지러움이 없어, 사마염이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진의 원흥(元興) 연간(402~404) 말기에 이르러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축담개(竺曇蓋)ㆍ축승법(竺僧法)
당시 또 축담개와 축승법이 모두 고행으로 신의 감응에 뛰어났다. 담개는 신령한 주문으로 비를 청할 수 있었다. 양주자사(楊州刺史) 사마원현(司馬元顯)의 공경하는 바가 되었다. 승법도 신령한 주문에 빼어났다. 진(晋)의 승상이며 회계왕인 사마도자(司馬道子)가 그를 위하여 치성사(治城寺)를 세웠다.
3) 축법순(竺法純)
법순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출가하여 산음(山陰)의 현의사(顯義寺)에 머물렀다. 고행하고 덕이 있었다. 옛 『유마경』을 잘 독송하였다.
진(晋)의 원흥 연간(402~404)에 절의 상란(上蘭)을 위하여 물가의 옛 집을 팔고 돌아오다가, 해가 저물 무렵 호수 가운데에서 바람을 만났다. 배가 작아 법순이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 기대며, 쉬지 않고 입으로 외웠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배가 한 척 흘러왔다. 그 배에 올라타서 재난을 면하였다. 배가 둑에 이르러 배를 살펴보았으나, 주인은 없었다. 잠시 후 배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도인과 속인이 모두 그 신령한 감응에 감탄하였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4) 석승생(釋僧生)
승생의 성은 원(袁)씨이며, 촉군(蜀郡) 비현(郫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고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성도(成都)의 송풍(宋豊) 등이 초청하여 삼현사(三賢寺)의 주지로 삼았다.
『법화경』을 외우고, 선정(禪定)을 익혔다. 항상 산 속에서 경을 외우면, 호랑이가 와서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외우기를 마치면 곧 떠났다.
후에 시를 읊조릴 때마다, 곧 좌우에 네 사람이 나타나 모시고 호위하였다. 나이는 비록 노쇠하지만, 부지런히 발돋움하여 더욱 힘썼다.
그 후 미미한 병에 걸렸다. 그러자 곧 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떠날 것이다. 죽은 뒤에는 몸을 불사르도록 하라.”
제자들이 그의 명대로 따랐다.
5) 석법종(釋法宗)
법종은 임해(臨海)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어느 때 섬현(剡縣)에서 사냥을 하다가, 새끼 밴 사슴을 쏘아 사슴이 낙태(落胎)하였다. 어미 사슴은 화살에 맞았으면서도, 오히려 땅에 앉아 죽은 새끼를 핥아주었다.
이에 법종은 곧 뉘우치고 깨달았다. 생명을 아끼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인식이 있는 동물이면 다 같이 갖는 자연적인 천성임을 알았다. 이에 활을 부수고 화살을 꺾고는, 출가하여 도를 일삼았다. 항상 걸식으로 스스로 살아가며, 하루 한 끼 식사법을 받아들였다. 푸성귀와 고행으로 항상 예참하며, 앞서 지은 죄를 참회하였다.
『법화경』ㆍ『유마경』을 외워서 항상 높은 대(臺)에 올라가 그것을 읊조렸다. 그러자 그 메아리 소리가 사방 먼 곳까지 들렸다. 선비와 서민들로서, 그에게서 계를 받아 귀의한 사람이 3천여 명이었다. 마침내 머물던 곳을 개척하여 정사(精舍)로 만들었다. 외우는 경을 제목으로 삼아, 이곳을 법화대(法華臺)라고 불렀다. 법종이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6) 석도경(釋道冏)
도경의 성은 마(馬)씨이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도의(道懿)의 제자가 되었다. 도의가 병들자, 어느 날 도경 등 네 사람의 제자를 파견하였다. 하남(河南)의 곽산(霍山)에 가서 종유석(鍾乳石)을 채취해 오게 하였다. 종유석이 있는 굴속에 들어가 몇 리를 갔다. 그러면서 나무에 걸터앉고 물을 건너다가, 세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횃불마저도 다 타버렸다. 도경은 구제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평소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오직 지성으로 이 일에 기대면서 또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다. 얼마 후 반딧불 같은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이를 뒤쫓아가도 미치지 못하다가, 마침내 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더욱 정진하여 선업(禪業)을 닦아서, 절도 있는 행실이 날로 새로워졌다. 자주 여러 번 보현재(普賢齋)를 마련하였다. 모두 상서로운 응험이 있었다. 혹 인도 승려가 나타나 방에 들어와 앉은 경우도 있고, 혹 말을 탄 사람이 찾아온 경우도 있었다. 모두 미처 안부도 나누기 전에, 문득 보이지 않았다.
그 후 동학 네 사람과 함께 남쪽 상경(上京)에 노닐며 풍속과 교화를 구경하였다. 밤에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넜다. 도중에 얼음이 갈라져 세 사람은 모두 빠져 죽었다. 도경은 또다시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였다. 그러자 마치 다리 아래에 어떤 물건이 있어서, 스스로 부추기는 것 같았다. 다시 붉은 광명이 나타나 눈앞에 어른거려, 그 빛을 의지해 강둑에 이르렀다. 도읍에 도달한 뒤, 남간사(南澗寺)에 머물면서 항상 반주삼매(般舟三昧)에 드는 것을 일삼았다.
어느 날 한밤중에 선정에 들었다. 문득 네 사람이 수레를 몰고 방에 이르렀다. 도경을 불러 수레에 올라타게 하였다. 도경은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자기 몸이 고을 뒤의 침교(沈橋)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길가 오랑캐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시중드는 자들이 수백 명이었다.
도경을 보고 놀라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좌선하는 사람이로다.”
이어 좌우에게 말하였다.
“조금 전에 말한 것은 다만 계신 곳을 알려 주었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문득 법사를 번거롭게 하였는가?”
곧 예배를 하고 손을 잡고 헤어졌다. 사람을 시켜 도경을 전송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문을 두드리다가 한참만에 비로소 문이 열려 절 안에 들어갔다. 방을 보니 아직도 닫혀 있었다. 대중들은 아무도 그 연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임천(臨川)의 강왕(康王) 유의경(劉義慶)이 그와 손잡고 광릉(廣陵)으로 갔다.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7) 석혜경(釋慧慶)
혜경은 광릉(廣陵) 사람인데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렀다. 배움이 경전과 율장에 뛰어났다. 몸가짐이 맑고 깨끗하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법화경』ㆍ『십지론』ㆍ『사익경』ㆍ『유마경』을 외워, 밤마다 읊조렸다. 항상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며, 찬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소뢰(小雷)에서 풍파를 만나 배가 곧 전복하려 하였다. 혜경은 오직 쉬지 않고 송경을 하였다. 그러자 배가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어떤 사람이 끌어주는 듯하여 순식간에 건너편 강둑에 이르렀다.
이에 더욱 부지런히 독실하게 수행에 힘썼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 말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2세이다.
8) 석보명(釋普明)
보명의 성은 장(張)씨이며, 임치(臨淄)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품성이 맑고 순하며, 예참과 독송을 일삼았다. 『법화경』과 『유마경』 두 경전을 외웠다. 외울 때가 되면 별도의 옷과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여, 한 번도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았다.
매양 외워서 「권발품(勸發品)」에 이르면, 곧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타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또 『유마경』을 외울 때에도, 공중에서 노래하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구제하려는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고을 사람 가운데 왕도진(王道眞)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처가 병이 생겨 보명에게 와서 주문을 외워주기를 요청하였다. 보명이 문에 들어서자, 부인은 곧 가슴이 막혀 기절하였다. 갑자기 몇 자쯤 되는, 너구리 같이 생긴 어떤 물체가 나타나 개구멍으로 도망갔다. 이로 인하여 부인의 병도 나았다.
어느 날 보명이 수방사(水傍祠)에 갔다. 그러니 무당들이 ‘신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모두 달아났다.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9) 석법장(釋法莊)
법장의 성은 신(申)씨이며, 회남(淮南)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여산(廬山) 혜원(慧遠)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고행하는 절개로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 관중(關中)을 노닐며 승예(僧叡)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초기에 서울로 나와서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솔직하고 소박하였다. 오직 하루에 점심 한 끼만을 먹을 따름이었다.
『대열반경』ㆍ『법화경』ㆍ『유마경』을 외워, 첫새벽마다 이를 읊조렸다. 옆방에서 듣기에, 항상 그의 문 앞에서 마치 병장기를 든 사람들이 호위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는 사실 천신들이 와서 들은 것이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10) 석혜과(釋慧果)
혜과는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스스로 일삼았다. 전송의 초기에 서울에 노닐다가,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화경』ㆍ『십지경』을 독송하였다. 어느 날 그는 뒷간에서 한 작은 귀신을 만났다. 귀신이 혜과에게 공경을 표시하였다.
“예전에 대중 승려의 유나(維那)로 있었습니다. 법답지 못한 사소한 일을 저질러, 똥을 먹는 귀신[噉糞鬼中]으로 떨어졌습니다. 법사님은 평소 덕이 높으며 밝고 또한 자비심이 많으시니, 원컨대 도와주셔서 이곳에서 건져내 구제하여 주십시오.”
또한 말하였다.
“예전에 돈 3천 냥을 감나무 밑 둥지에 묻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취하시어 복전으로 삼아주시기 원합니다.”
혜과는 곧 대중들에게 알려 감나무 밑을 파보니, 과연 3천 냥의 돈을 발견하였다. 이것으로 『법화경』 한 부를 조성하고, 아울러 법회를 마련하였다.
그 후 꿈에 이 귀신이 나타났다.
“이미 몸을 바꾸어 태어났으며, 옛날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혜과는 전송의 태시(太始) 6년(47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11) 석법공(釋法恭)
법공의 성은 관(關)씨이며, 옹주(雍州)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강릉의 안양사(安養寺)에 머물렀다. 후에 서울로 나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고행이 다른 이들과 달랐다. 거친 베옷을 입고, 콩과 보리만 먹었다. 그러면서 30여 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밤에 그것을 읊조릴 때마다, 특이한 향기와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 법공의 방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가 함께 이 향기를 맡았다. 또한 낡은 누더기 옷에 벼룩과 이를 모아 가지고, 항상 그것을 몸에 걸쳐 스스로 그 먹이가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ㆍ문제(文帝)ㆍ명제(明帝) 등 세 사람의 황제와 형양(衡陽)의 문왕 유의계(劉義季) 등이 모두 그의 덕과 소박함을 숭상하였다.
신도들로부터 얻은 보시를 항상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 번도 개인적으로 비축하지 않았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서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승공(僧恭)
당시 오의사(烏衣寺)에 또 승공이 있었다. 덕스런 일이 높고 밝아, 절의 모든 직분을 총괄하여 맡았다. 또한 쌀밥을 먹지 않고, 오직 콩과 보리만을 먹었다.
12) 석승부(釋僧覆)
승부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하인(下人)에게서 양육되었다. 일곱 살 때 출가하여 담량(曇亮)의 제자가 되었다.
배움이 모든 경전에 뛰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주문을 외워 지녔다. 『대품경』과 『법화경』을 외웠다.
전송의 명제는 그를 그릇감이라 하여, 깊이 존중을 더하였다. 칙명으로 팽성사(彭城寺)의 주지가 되었다. 대중을 거느리는 데 공로가 있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 말기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6세이다.
13) 석혜진(釋慧進)
혜진의 성은 요(姚)씨이며, 오흥(吳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용맹하여, 천성대로 호협하게 놀았다. 그러다가 나이 40세에 문득 슬기로운 마음이 저절로 열려, 드디어 속가를 떠났다. 서울의 고좌사(高座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한 옷을 입었다. 맹세코 『법화경』을 외우기로 하고, 마음을 써서 노고를 다하였다. 그러나 책만 손에 잡으면 곧 병이 생겼다.
이에 발원하기를 『법화경』 백 부를 조성함으로써, 전생의 장애를 참회하기를 빌었다. 처음으로 모아 얻은 돈이 1,600냥이었다. 이때 강도들이 찾아와 혜진에게 물었다.
“가진 물건이 있느냐?”
혜진은 대답하였다.
“오직 경을 만들 돈만이 부처님을 모신 곳에 있습니다.”
강도들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면서 떠났다. 이에 신도들의 보시를 모아서, 경을 이룰 수 있어 백 부를 가득 채웠다.
경이 완성된 후에는 병도 조금 차도가 생겼다. 『법화경』 한 부를 모두 외워 통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으로 원하던 일이 채워지자, 굳센 지조는 더욱 단단해졌다. 항상 모든 복업을 회향시켜,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죽기 직전에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너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반드시 서방 정토에 태어나리라.”
북제의 영명(永明) 3년(485)에 이르러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승념(僧念)
당시 서울 용화사(龍華寺)의 승념은 『법화경』과 『금광명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세상을 피해 살았다.
14) 석홍명(釋弘明)
홍명의 본래 성은 영(嬴)씨이며,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마음이 바르고 굳세며, 계를 지킴에 절조가 있었다. 산음의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렀다. 『법화경』을 외우고 선정(禪定)을 익혔다. 부지런히 정진하며 육시예참(六時禮懺)을 그치지 않자, 아침마다 물병이 저절로 가득했다. 이는 실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그를 위하여 심부름을 한 것이다.
어느 날 홍명이 운문사에서 좌선하였다. 그런데 호랑이가 홍명의 방안에 들어와 상 앞에 엎드렸다. 홍명이 단정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오래 오래 있다가 떠나갔다.
또 어느 때는 작은 아이 하나가 와서 홍명의 송경하는 소리를 들었다. 홍명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는 답하였다.
“예전에 이 절의 사미였습니다. 휘장 밑에 숨겨둔 음식을 먹고, 지금은 뒷간 속[圊中]에 떨어져 있습니다. 상인(上人)의 도업을 듣고 짐짓 찾아와 송경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원컨대 방편을 써서, 저를 도와 이 허물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홍명이 곧 법을 설하여 불법에 들도록 하였다. 받아들여 해득한 후 비로소 사라졌다.
그 후 영흥(永興)의 석모암(石姥巖)에서 입정(入定)하였다. 다시 그곳 산의 요정[山精]이 찾아와 홍명을 괴롭혔다. 홍명이 이를 붙잡아서, 허리에 찬 새끼줄에 붙들어 매었다. 그러자 귀신은 겸손하게 사과하며 풀어주기를 구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감히 이곳에 오지 않겠습니다.”
놓아주자 이에 귀신은 자취를 끊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군수인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그의 진실하고 소박함을 존중하여, 산에서 나오기를 요청하였다. 그를 맞이하여 도수정사(道樹精舍)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였다. 그 후 제양강(濟陽江)의 영흥(永興) 고을에 소현사(昭玄寺)를 세웠다. 다시 홍명을 초청하여 그곳에 가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말기에 도리(陶里)의 동(董)씨가, 또한 홍명을 위하여 마을에 백림사(栢林寺)를 세웠다. 홍명을 청하여 돌아와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선(禪)과 계율로 가르치고 도우니, 제자들이 줄을 이었다.
북제의 영명(永明) 4년(486)에 백림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4세이다.
15) 석혜예(釋慧豫)
혜예는 황룡(黃龍) 사람이다. 서울에 와서 노닐다가,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힘써서, 두루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다. 담론을 잘하며 법다운 풍모가 아름다웠다.
매양 어떤 인물의 착하거나 악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곧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 때로는 다른 말로 중간에 중지시켰다. 물병과 옷으로 단출하고 소박하게 지내며, 하루 점심 한 끼로써 스스로 식사를 끝냈다. 부지런한 정진으로 절조를 드러내고, 고난 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열반경』과 『법화경』과 『십지경』을 외웠다. 또한 선업을 익혀, 다섯 종문의 선법[五門禪]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어느 날 잠을 잘 때에, 세 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모두가 의관이 선명하고 정결하였다. 꽃가마를 함께 받쳐 들었다. 혜예가 물었다.
“누구를 찾습니까?”
대답하였다.
“법사께서 곧 죽게 되었기에, 짐짓 찾아와 받들어 맞이하는 것입니다.”
혜예가 말하였다.
“작은 일들을 아직 마치지 못하였으니, 1년만 목숨을 더 늘릴 수 없습니까?”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다음해에 이르러, 만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북제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그때 나이는 57세이다.
∙법음(法音)
혜예와 같은 절에 법보가 있었다. 그도 역시 평소 송경을 행하였다.
16) 석도숭(釋道嵩)
도숭의 성은 하(夏)씨이며, 고밀(高密) 사람이다. 나이 열 살 때 출가하였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은밀하게 마음 씀씀이가 있었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율학을 좋아하고, 30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아래 윗사람과 교류하면서, 한 번도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천성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이로운 공양을 얻는 대로 모두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물병과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울러 지닌 물건이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서울에 와서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고요히 한적한 방을 지키며, 끊임없이 예참과 독송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하여 설법하여 가르치고 장려함으로써, 식사 대접을 대신하였다. 그에게 계를 받기를 청한 사람은 매우 많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49세이다.
17) 석초변(釋超辯)
초변의 성은 장(張)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깨달음이 홀로 일어났다.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이 깊고 침착하였다.
『법화경』ㆍ『금강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하(西河)에서 넘어왔다. 도중에 파초(巴楚)를 경유하여, 건업(建業)에 도달하였다. 얼마 후 동쪽 오(吳)ㆍ월(越)로 가서 산수를 구경하였다. 산음(山陰)의 성방사(城傍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런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한적하게 살면서 소박함을 기르고, 산문에서 목숨을 다하기로 하였다. 『법화경』을 하루에 한 차례로 한정하여 두루 외웠다. 마음이 민첩하니 입도 따라가서, 항상 남은 힘이 있었다. 천 불에 예배드리기를, 모두 150만 번의 절을 올렸다. 산문 밖에 나가지 않기를 30여 년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북제의 영명(永明) 10년(492)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절 남쪽에서 장례를 치뤘다. 사문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소에 비를 만들었다. 동현(東莧)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법명(法明)ㆍ승지(僧志)ㆍ법정(法定)
당시 또 영근사(靈根寺)의 법명, 기원사(祇洹寺)의 승지, 익주(益州)의 법정 등이 있었다. 모두 십여 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을 하였다. 지극한 덕이 있었다.
18) 석법혜(釋法慧)
법혜의 본래 성은 하후(夏候)씨이다. 어려서부터 지닌 지조가 고행에 정밀하고, 율행이 얼음처럼 엄숙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 말기에 동쪽 우혈(禹穴:會稽山)에 노닐었다. 그러다가 천주산사(天柱山寺)에 은거하였다.
『법화경』 한 부를 외우면서,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었다. 뜻이 인간세계 밖에 깊이 젖어들어 누각 위에 자리 잡고, 30여 년을 내려오지 않았다. 왕후들이 가마를 타고 와도, 오직 방에 예배만 드리고 돌아갔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만은 믿음과 이해력이 아울러 깊다 하여, 특별히 더불어 만났다.
당시 그의 덕을 사모하여 예배드리기를 희구하는 사람들은, 혹 주옹의 소개를 받아 때로 한 번 만나는 사람도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년(495)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담유(曇遊)
당시 약야(若耶) 현류산(懸溜山)의 담유도 푸성귀를 먹으며 송경하였다. 고행의 절개를 일삼았다.
19) 석승후(釋僧候)
승후의 성은 공(龔)씨이며,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나이 열여덟 살 때 곧 푸성귀를 먹으며, 예참을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사방을 떠돌며, 교화를 관찰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서울에 와서 머물렀다. 항상 『법화경』ㆍ『유마경』ㆍ『금광명경』을 이틀에 한 차례씩 두루 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60여 년간 계속하였다.
소혜개(蕭惠開)가 촉(蜀)으로 들어가면서 초청하였다. 그러자 함께 그곳에 노닐었다. 그 후 소혜개가 유의가(劉義嘉)와 함께 협동하여, 죄를 지어 궁궐로 돌아왔다. 승후도 곧 서울로 돌아왔다.
후강(後岡)에 돌집을 짓고, 안선(安禪)하는 장소로 삼았다. 사미 때부터 목숨을 버릴 때까지, 생선ㆍ고기ㆍ마늘ㆍ매운 것은 한 번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발그림자가 조금만 기울어져도, 식사도 거른 채 지나갔다[午後不食].
북제의 영명(永明) 2년(484)에 약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점심때가 되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곧 물을 찾아 입을 헹구고는, 합장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9세이다.
∙혜온(慧溫)
당시 보홍사(普弘寺)의 혜온도 『법화경』ㆍ『유마경』ㆍ『수능엄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으로, 나란히 높은 절개가 있었다.
20) 석혜미(釋慧彌)
혜미의 성은 양(楊)씨이며, 홍농(弘農)의 화음(華陰) 사람이다. 한(漢)나라 때 태위(太尉) 벼슬을 한 양진(楊震)의 후예이다. 나이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후에 집착과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遠離]을 수행하기로 뜻을 세웠다.
곧 장안의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다. 바위 계곡이 지극히 험하여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였다. 혜미는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나운 호랑이나 억센 외뿔소가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대품경』을 외우고, 정밀하게 삼매를 닦았다.
이에 띳풀을 베어내 집을 지어, 정신이 깃들 곳으로 삼았다. 때가 되면, 발우를 지니고 마을에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좌선과 독송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8년을 계속하였다.
그 후 강남지방에 불법이 성한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곧 서울로 와 풍습과 교화를 관찰하였다.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예전처럼 과업을 익혔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겸양하였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계율의 모범됨이 정밀하고 밝았다. 권장하고 교화함에 고된 것을 잊으며, 현명한 이에게 묻고, 착한 이를 찾기를 항상 모자라는 듯하였다. 무릇 산을 찾아와 예배하는 도인과 속인들에게 모두 그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그러면서 타일러 이끌음으로써 좋은 음식 대접을 대신하였다.
이에 출가할 때부터 늙어 노쇠해지기에 이르기까지, 마늘ㆍ술ㆍ생선ㆍ고기 등은 하나같이 모두 길이 끊었다. 한 발자국도 문 밖을 출입하지 않기를 30여 년 동안 하였다. 새벽부터 밤에 이르기까지 선정(禪定)을 익히면서, 항상 『반야경』을 외웠다. 그러면서 육시예참에는 반드시 대중 앞에 섰다.
양(梁)의 천감(天監) 17년(518) 윤달 8월 15일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절 남쪽에 장례하고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법선(法仙)
당시 정림사의 법선도 송경하며 질박하게 수행하였다. 후에 오군(吳郡)으로 돌아가 승정(僧正)이 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21) 석도림(釋道琳)
도림은 본래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열반경』과 『법화경』에 뛰어나며 『유마경』을 외웠다. 오국(吳國)의 장서(張緖)가 예를 갖추어 그를 섬겼다. 그 후 부양현(富陽縣)의 천림사(泉林寺)에 자리 잡았다. 이 절에는 항상 귀신과 괴물이 들끓었다. 그러나 도림이 자리 잡자 모두 사라졌다.
도림의 제자 혜소(慧韶)가 집에 눌려[爲屋所壓], 머리가 어깨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도림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청하였다. 그러자 밤에 두 사람의 인도 도인(道人)이 혜소에게 나타나서, 그의 머리를 뽑아주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평상시대로 회복되었다.
도림은 이에 성승재(聖僧齋)를 마련하고, 새 비단을 상 위에 깔았다. 재가 끝나서 보니, 비단 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모두 석 자 남짓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그 징험 있는 감응[徵感]에 탄복하였다. 이때부터 부양(富陽) 사람들은 집집마다 성승(聖僧)의 자리를 마련하고 밥을 공양하였다.
양(梁)나라 초엽에 도림은 그곳에서 나왔다. 제희사(齊熙寺)에 머물다가, 천감(天監) 18년(51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論】경전을 소리 높여 읽는 이익은 크다. 그러나 그 공을 이룬 사람은 드물다. 이는 자못 훌륭한 법인 다라니는 얻기 어려우며, 마음이 흐려지기는 쉽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오직 한 구절 하나의 게송을 다시 외운다 하더라도, 역시 성인께서 아름답다고 칭송하신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담수(曇邃)는 바위 제방[石塢]에서 신에 통하고, 승생(僧生)은 공중에서 호위하는 감응이 있으며, 도경(道冏)은 위태한 지경에 임하여 구제될 수 있었다. 혜경(慧慶)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몸을 보전함을 힘입었다.
이는 모두 참된 덕이 안에서 충만하였기 때문에, 외부에서 징험 있는 감응이 열린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보현보살이 방으로 내려오시고 사천왕이 자리를 호위한다”고 한 것이, 어찌 허튼 소리이겠는가?
만약 얼음이 언 추운 날의 고요한 밤이나 밝은 달이 뜬 긴긴 밤에, 홀로 한적한 방에 머무르며, 경전을 소리 높여 읽으면서 토하는 소리가 밝고 글자가 분명하다면, 이는 유령(幽靈)이 기뻐서 뛰게 할 만 하고 정신이 시원하게 트여 기쁘게 할 만하다. 이른바 ‘노래로 법다운 말씀을 읊조려서 이것으로 음악을 삼는다’는 것이다.
찬하노라.
법신은 이미 멀어졌고
기탁한 것은 말씀뿐이라
반복하여 나직이 읊조리니
혜택이나 이익 생각하기 어렵구나.
삼업에 게으르지 말고
육시에 정진함이 있어야
변화로 나타난 이가 곧 호위하고
변화로 나타난 대중이 줄지어 오누나.
이것이 진실한 공덕이니
무엇을 이와 비교하겠나.
『고승전』 12권(ABC, K1074 v32, p.881a01-p.888b01)
고승전1~4, 5~8, 9~12, 13~14, 한글대장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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