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대사회적 기능
종교의 기능은 크게 본래적 기능과 수단적 기능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의 본래적 기능이란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을 말한다. 이를테면 자기종교의 교리나 신앙을 통한 정신적 위안, 긴장 해소, 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 등이다. 종교는 본래 성스러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향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종교의 수단적 기능이란 종교의 본래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말한다. 이를테면 종교의 제의(祭儀)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제의는 예배, 기도, 노래, 춤, 강설 등 다양한 행위로 나타난다. 특히 그 중에서 종교는 사회적 기제(機制)를 통한 표상으로 표출된다. 종교는 언제나 집단을 형성하여 움직인다. 그 때문에 때로는 종교권력과 국가권력 간에 대립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종교가 지나치게 정치와 현실문제에 집단적으로 간여함으로써 ‘종교의 현실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종교의 현실참여를 일방적으로 ‘좋은 현상이다’ 혹은 ‘나쁜 현상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교의 현실참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종교가 사회정의와 약자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불의와 정치권력의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민중의 아픔에 동조하느냐 아니면 정치권력과 결탁하느냐에 따라서 종교의 현실참여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했던 3·1 독립운동이라든지 7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주로 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같은 종교인이면서도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기독교계의 경우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주선했던 성직자들도 있었다. 불교계에서도 호국불교라는 미명아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법회나 관주도형 데모에 앞장섰던 사례들도 있었다. 이러한 집회들은 반불교적·반민주적 집단행동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당시 불교지도자들은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했다. 그로 말미암아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로부터 불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보수적인 단체에서는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친북좌파라고 매도한다. 반대로 진보적인 단체에서는 그들을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몫이다. 다만 불교도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다.
종교도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에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종교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대사회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의 옴진리교와 같이 종교 자체가 사회악의 주범이거나 사회적 기능과 역행한다면 그러한 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종교가 새로 탄생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종교도 수없이 많다. 그것은 그 종교가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것도 바로 이 사회적 기능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에도 불교가 사회적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인도에서처럼 도태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마디로 종교의 생명은 대사회적 기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전통 종교가 수행해 왔던 위안 기능이나 긴장 해소 등을 ‘대체종교’ 혹은 ‘대용종교’에게 넘겨주고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의 세속화 상업화에 식상하여 종교로부터 떠나고 있다. 현대문명의 주제로 떠오른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종교마저도 상업주의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상징이나 제도는 그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종교의 본래적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사회적 기능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종교의 교리나 사상 체계보다도 오히려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종교에서 사회봉사를 통해 그들의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사회적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면 그러한 종교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교세도 점차 확장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불교도의 가장 큰 결점은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기 수행을 통한 해탈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향으로 불교도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불교도들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둘로 구분하거나 그 선후를 상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한다. 바른 지혜를 갖추면 자비로울 수밖에 없다.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 혹은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수행에 해당되고, 자비는 교화에 해당된다. 수행과 교화를 구분하거나 그 선후의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수행이 곧 교화이고, 교화가 곧 수행이다. 그리고 생활을 떠난 수행이 따로 있고, 수행을 떠난 생활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떠나서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다.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말 속에 불교의 사회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붓다는 ‘전도선언(傳道宣言)’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고 했다. 이 전도선언 속에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불교도들은 지금보다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출가자가 직접 정치나 사회문제에 간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출가자의 지나친 정치참여는 출가자의 본분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름지기 출가자는 불교적 관점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사회 구성원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것으로써도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성 스님 / 동국대 강사,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강 믿음과 수행의 종교 (0) | 2022.04.10 |
---|---|
빠알리어 경전의 조직 - 나누는 법 - 마성스님 (0) | 2021.03.14 |
마하트마 간디의 불교 이해 / 마성스님 (0) | 2020.11.08 |
[마성 스님] ■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 (0) | 2020.09.20 |
전도선언의 현대적 의의 (0) | 2020.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