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구사론

구사론

수선님 2021. 2. 28. 11:18

소승서 대승 전향 세친이 주역한

제자들 체계적 토론 해석 논문집

北傳 漢譯논장들 아함으로 성립

 

논장(論藏)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본래의 범어 이름으로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이라 불렀다. 아비달마를 번역하면 ‘법에 대하여’ 라는 뜻을 가진 대법(對法)이라 한다. 경장과 율장은 부처님의 교설과 훈계에서 시작된 부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가리키는 반면, 논장은 부처님의 말씀과 훈계에 대하여 제자들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토론하여 논의하고 해석한 논문집이라 할 수 있다. 아비달마의 기원이 토론하고 논의한 점 등에서 보면 부처님 재세 시부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아비달마는 부파불교 시대의 여러 부파 안에서 활발히 연구된 교의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한 것을 말한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 불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비달마는 주로 <아함경>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아함경>은 불교 경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경으로 한역에서는 <장아함> <중아함> <증일아함> <잡아함>의 4아함이 있다. 남전(南傳)의 5니까야와 같은 내용이다. 이 아함을 바탕으로 성립된 북전(北傳) 한역의 논장은 설일체유부에서 나온 논장들이다. 기원 전후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남전의 <법집론>과 <분별론>에 상응하는 <집이문족론(集二門足論)>과 <법온족론(法蘊足論)> 등이 초기 논장에 해당된다. 그러나 5세기 무렵 <구사론(俱舍論)>이 나오고부터 교리적 이론이 체계화 되고 불교사상을 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서술하게 되었다.

<구사론>은 세친(世親, Vasubandhu)이 지은 것으로, 카니쉬카 왕의 명에 의하여 500 아라한이 지었다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의 내용을 위주로 법구(法救)의 <잡아비담심론>의 체계를 본 따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구사론> 본 이름 역시 <아비달마구사론>이다.

<구사론>이 나오고 아비달마 체계가 이의 없이 완성된 것처럼 보였으나 의외의 논쟁이 또 일어났다. 그것은 중현(衆賢, Sanghabhadra) 논사(論師)가 구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또 다른 논서를 짓고부터다. 중현은 <비바사론>을 깊이 연구한 뒤에 <구사론>을 지은 세친의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사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논을 지어 처음에는 이름을 <구사박론(俱舍雹論)>이라 하였다. 이 <구사론>을 반박하는 <구사박론>을 쓰기 위해 <구사론>을 12년간 연구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후대에 <구사론>을 공부하려면 12년을 해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

중현은 세친을 만나 논쟁을 벌이려고 시도했지만 세친이 그를 만나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중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죽기 얼마 건 임종을 앞두고 있던 중현이 세친에게 편지를 써 보내 사죄를 청하며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구사박론>을 보존하여 줄 것을 세친에게 청했다. 세친이 그의 청을 받아들여 <구사박론>을 보관하면서 책의 이름을 <순정리론(順正理論)>으로 바꾸었다. 처음 중현은 세친이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왜곡하고 경량부의 교의를 도입했다고 하여 자신은 설일체유부의 정통교의를 내세우기 위하여 세친을 비판했던 것이다.

세친은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지금의 페샤와르, Peshawar) 출신으로 4~5세기경에 활동한 학승이었다. 소승의 한 부파였던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유부의 교의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처음에는 소승의 교의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대승을 비방하다가 나중에 형인 무착(無着, Asangha)의 권유에 따라 대승으로 전향했다. 그 후 <십지경론>을 저술하고 형 무착이 지은 <섭대승론>을 해석한 <대승론석>을 저술하였다. 그는 소승과 대승에 모두 500부씩의 논서를 지었다 해서 1000부 논사라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형 무착 그리고 동생 사자각(師子覺)의 삼형제가 모두 불교사에 이름을 남겼다.

[불교신문 2889호/2013년 2월 13일자]

 

 

 

 

 

 

 

 

[출처] 구사론|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