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71칙 백장화상이 오봉의 안목을 점검하다
“깨달음의 세계엔 언어문자 초월해야”
{벽암록} 제71칙은 백장화상이 오봉(五峰)에게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말해보라고 한다.
백장화상이 다시 오봉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술을 막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오봉스님이 말했다. '화상도 역시 목구멍과 입을 닫도록 하세요!' 백장화상이 말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마에 손을 대고 그대를 바라보겠노라.'
擧. 百丈, 復問五峰, 倂咽喉唇吻, 作生道. 峰云, 和尙也須倂. 丈云, 無人處斫額望汝.
안목갖춘 선승은 말이 필요없어
화상 물음에 한마디로 기선 제압
본칙의 공안도 {벽암록} 제70칙과 똑같이 {전등록} 제6권 백장전에 전하고 있는데, 본칙에서는 백장화상이 제자인 오봉상관(常觀)스님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오봉스님 대한 자료는 {전등록} 제9권과 {연등회요} 제7권 균주 오봉산 상관선사전에 몇 편의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와 생몰년대는 전혀알 수가 없다. {전등록}에 어떤 사람이 오봉스님에게 '어떤 것이 오봉의 경지입니까?'라고 질문하니, 오봉스님은 '험준하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경계안의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하니, '막혔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오봉화상의 깨달음의 경지를 일체의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산이 험준하여 접근 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다. 깨달음의 경계에 사는 사람은 깨달음의 경계에 갇힌 사람이다.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해야 자유자재한 지혜작용을 무애자재하게 펼칠 수가 있는 것이다.
백장화상이 위산과 오봉, 운암에게 던진 문제는 똑같다. {벽암록} 70칙에서는 위산이 독자적인 안목으로 대답했다. 본칙에서는 백장화상이 제자인 오봉에게 '목구멍과 입술을 막고 어떻게 말하겠는가?'라고 똑같은 문제를 제시하여 오봉의 견해와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원오는 "하하하!"라고 크게 웃고, "화살이 신라로 날아갔다"고 착어했다. '이미 앞에서 그와 똑같은 문제를 위산에게 하지 않았는가? 위산의 대답으로 충분한데, 화살이 멀리 신라로 날아간 뒤에 또다시 지나간 문제를 언급해서 무엇하는가?'라고 야유를 보낸 말이다.
백장화상의 물음에 오봉스님은 '화상도 역시 목구멍과 입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즉 그러시면 묻고 있는 화상의 입도 닫고 혀도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좀 심한 말로 표현한다면 화상 자신부터 입 닫고 말씀하지 마세요! 라는 역습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화상 본인이 먼저 입을 닫고 말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공격해 온 상대를 강하게 역공(逆攻)한 말이다. 선문에는 이와 같은 역공의 지혜를 전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면, {무문관} 제5칙에 향엄화상이 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입으로 나무 가지를 물고, 손은 나무 가지를 붙잡지 않고, 발도 나무를 밟지 않고 매달려 있을 때에 나무 아래서 어떤 사람이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동쪽 중국에 온 의도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만약에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질문하는 사람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 되고, 만약에 대답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목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정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공안은 {조당집} 19권에 전하고 있는데, 그때 소(招)상좌가 향엄선사에게 '나무 위에 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나무에 오르기 이전의 일은 어떻습니까?'라고 역공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선사는 허허! 하고 웃었다고 한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인 본래로 되돌아가는 것이 근본적이고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즉 번뇌 망념의 괴로운 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병을 치유하여 본래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선의 깨달음이다.
또“어떤 사람이 선원의 어린 사미를 놀리기 위해 '이 찻잔의 차를 뚜껑을 열지 않고 그대로 마셔보게'라고 하자, 그 사미는 '찻잔의 뚜껑을 열지 않고 차를 마시겠습니다만, 차가 너무 뜨거우니 찬물을 섞어서 차를 약간 식혀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런가! 그럼 찬물을 좀 넣어 식혀주지!'하면서 찻잔의 뚜껑을 열려고 할 때 사미가 말했다. '아니 찻잔의 뚜껑을 열지 않고 찬물을 넣어 식혀 주신다면, 찻잔의 뚜껑을 열지 않고 차를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기지를 발휘하는 대화는 문제의 근본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대응 할 수 있는 것이다.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지시하는 입을 움직이지 말고 지시하라고 역습하는 지혜를 원오는 "대장의 깃발과 북을 빼앗아 버렸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기세당당하게 북을 치고 공격해오는 백장화상의 장군 깃발과 북을 오봉스님이 탈취해서 기세를 꺾어버렸다'고 착어한 것이다. 또한 "한 마디 말로 많은 이야기를 차단해 버리니 모든 일이 잠잠하게 되었다"고 착어했다. 즉 오봉스님이 백장의 물음에 '화상도 입을 닫아야 합니다'라는 한 마디는 일체의 언어 문자의 갈등을 해결하여 차별심의 세계에서 절대 깨달음의 세계인 본래로 되돌려 적정의 상태가 되었다고 오봉을 높이 평가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오봉스님의 선기를 칭찬하고 있다. "위산스님은 자기의 영역을 굳건히 지켰고, 오봉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싹뚝 끊어 버렸다. 이 본분사(일대사)의 일은 요컨대 이러한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야 그 자리에서 곧장 지혜작용을 드러낼 수가 있다. 마치 달리는 말 앞에서 승부를 겨누는 것처럼,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고, 대뜸 긴급하고 신속하고, 드높게 처리했다. 오봉의 지혜작용은 드넓으며 도도한 위산스님의 경지와는 다르다. 오봉스님이 백장화상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 자리에서 대뜸 (일체의 갈등을) 끊어버려 통쾌하고 준수하였다."
백장화상은 오봉스님의 한마디 대답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마에 손을 대고(斫額) 그대를 바라보겠노라.'라고 말했다. 작액(斫額)이란 말은 이마에 손을 대고 먼 곳을 쳐다보는 것을 말한다. 오봉의 한 마디가 너무나 멀고도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이기 때문에 손을 이마에 대고 무인(無人)의 경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무인(無人)의 경계란 고위(孤危)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인데, 백장은 오봉스님에게 그대가 말한 경지는 누가 접근 할 수 있겠는가? 그대 혼자 그러한 경지에 살 수 밖에 없기에 나도 멀리서 그대의 모습을 바라 볼 수밖에 없다고 평한 말이다. 깨달음의 뛰어난 안목은 인정하지만, 깨달음의 지혜를 차별세계에서 일체중생과 함께 나누는 자비가 부족하다고 평가한 말이다. 즉 백장은 오봉의 견해에 대하여 반은 인정하고 반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오도 "땅은 드넓은데 사람이 드무니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70칙의 게송과 똑같은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화상도 입을 닫으세요" 오봉의 대답을 제일구로 제시하여, 백장이 제시한 일체의 갈등(문제)을 차단했다. "용사진(龍蛇陳) 진법을 무찌르는 재주를 보았네." 오봉이 백장의 질문에 대응하는 자세를 읊은 것인데, 용사진은 {무비지(武備志)}와 {손자}에 언급한 것처럼, 어느 곳에서 공격해도 대응하는 지모(智謀)를 갖춘 용사의 진법이다. 오봉은 백장이 제기한 공격(문제)을 곧바로 지체없이 용사진으로 응전한 것이다.
원오는 대장군의 지모를 겸비하지 못하면 오봉과 같이 대답을 할 수 없다고 극찬하면서 "일곱 가지 무기(七事: 활, 화살, 칼, 검, 갑옷, 투구, 창)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장수"라고 착어했다. 유능한 선승이 구족해야 할 일곱 가지(七事)를 구족했다고 칭찬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광(李廣) 장군을 생각나게 하니" 오봉의 전략은 정확하게 적중한 것이 활쏘기의 명인 한나라의 장수인 이광이 백발백중 맞추는 것과 같았다. "만 리 하늘가에 독수리 한 마리 떨어졌다" 백장이 던진 문제는 멀고 먼 하늘에 독수리 한 마리를 날려보낸 것과 같은데, 이광(오봉)은 하나의 화살로 반드시 적중시켜 떨어뜨렸다.
벽암록 72칙 백장화상이 운암(雲巖)의 안목을 점검하다
선기없는 멍청한 답변에 "법손 잃었다" 탄식
독자적인 안목 전혀 못드러낸 채
위산.오봉스님 답변 모방에 그쳐
{벽암록} 제72칙은 백장화상이 운암에게 목구멍과 입을 닫고 말해보라고 한다.
백장화상이 또다시 운암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운암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백장화상이 말했다. "나의 자손을 잃어버렸군!"
擧. 百丈, 又問雲巖, 倂咽喉唇吻, 作生道. 巖云, 和尙有也未. 丈云, 喪我兒孫.
{벽암록} 제70칙에서 72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6권 백장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백장화상은 마지막으로 운암스님에게 문제를 제시하여 운암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백장의 문하에서 20년간 수행한 뒤 약산유엄선사의 법을 계승했다. 그의 전기는 {송고승전} 제11권, {조당집} 제5권, {전등록} 14권에 담주운암산 담성선전에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가 배출되어 조동종을 개창하였다.
운암스님이 처음 백장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하였다는 말은 {전등록} 14권 운암장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운암스님은 종릉 건창사람이니 속성은 왕(王)씨다. 어려서 석문사에서 출가하여 처음 백장회해선사를 친견하고 수학하였으나,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20년 동안 시자로 백장화상을 모시다가 끝내 백장화상이 열반에 들고 말았다. 그래서 약산유엄선사를 찾아가 한마디 법문에 불법을 깨닫게 되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운암스님은 백장화상의 문하에서 20년 동안 시자로 있었다. 그 뒤에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스님과 함께 약산에 이르자, 약산유엄(藥山惟嚴. 751~834)선사가 물었다. '백장선사 문하에서 무슨 일들을 했는가?' '투철하게 생사(生死)를 해탈하는 일을 했습니다.' '투철하게 벗어났는가?' '거기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20년 동안 백장의 문하에서 수행하고도 아직 번뇌(習氣)를 없애지 못했구나' 운암스님은 약산선사를 하직하고 남전선사를 찾아 갔다가 그 뒤에 다시 약산으로 돌아와 불법을 깨달았다. 옛 사람을 살펴보건대, 20년 동안 참구하고도 미숙하여 살에 달라붙고 뼈에 달라붙어 썩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운암이 거기에는 생사가 없다고 말한 곳은 어디인가? 근원적인 본래심(불심)에는 번뇌 망념(生死)의 중생심이 없다는 이론에 집착하고 있다. {조당집} 제4권 약산장에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도오선사는 운암스님이 병환으로 누워있기에 문병와서 말했다. '이 육체를 버리고 어디서 또 만나야 할까요?' 운암은 '나고 멸함도 없는(不生不滅) 곳에서 만나지요.'라고 했다. 도오선사는 말했다. '나라면 불생불멸(不生不滅) 하는 곳에서도 만나려고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해야 한다'" 이 일단의 대화에서도 운암이 정법의 바른 안목이 구족되지 못한 선승임이 드러난다. 운암이 '거기에는 생사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성(심성)은 불생불멸이라는 경전의 말씀을 잘못 알고 생멸하는 것 이외에 불생불멸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구하는 것은 중생의 생멸(생사)심인 것이다. 생멸하는 육체 외에 달리 불생불멸하는 법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법신을 영혼과 식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등록} 제10권에 장사화상은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불법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여, 종래의 중생심(識神)을 불성으로 착각하고 있다. 무량겁 이래로 생사(生死) 윤회의 근본이 되는 중생심(識神)을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신(法身)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생심(識神)을 불성으로 착각하고, 또한 불성은 생사윤회를 초월하고 상주불멸이라고 주장하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불성을 영혼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은 불법인지 외도법인지도 판단하지 못하고 혼동하고 있다. 불법을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불성과 영혼을 착각하고 외도법을 불법으로 착각하고 있다.
한국에서 선승들이 입적하면 '新圓寂…大宗師 覺靈'이라고 위패를 적어 모시고 있다. 스승을 완전한 열반에 든 원적(圓寂)이라고 하면서 윤회하는 영혼(覺靈)으로 탈락시키고 있다. 깨달은 영혼이나 못 깨달은 영혼이라는 말도 차별에 떨어진 중생심의 견해다. 입적하신 스승의 법신을 중생으로 탈락시켜 욕되게 하는 위패임을 알고 있는 수행자는 얼마나 될까? 법신을 영혼으로 착각하고 있다. 선승의 법신을 진상(眞相)이라고 하며, 법신의 모습을 진영(眞影)이라고 한다. 스승의 위패를 모시려면 각령(覺靈)이라고 하지 말고 '진위(眞位)'라고 해야 한다. 또 영가축원에 속히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을 구제해 주실 것을 축원하고 있는데 영혼으로 착각하고 있는 안목 없는 사람이다.
본칙에서 백장화상이 운암스님에게 "그대는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어떻게 말하겠는가?"라고 운암의 견해를 물었다. 그런데 운암스님은 곧장 "화상께서는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언뜻 보면 운암의 대답은 문제의 초점을 질문자에게 되돌리는 훌륭한 응답처럼 보이지만, 운암은 백장화상의 말에 사로잡혀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반문이다. 즉 자신의 안목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앞의 70.71칙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장화상의 똑같은 물음에 위산스님은 "화상께서 말씀해 보세요"라고 한 말이나, 오봉스님처럼 "화상도 입을 닫아야 합니다!"라는 대답은 백장의 언구를 초월한 독자적인 선기(禪機)를 제시했다.
운암의 대답은 위산과 오봉스님의 대답과는 전혀 다르다. 운암스님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구족되지 못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운암의 대답은 마치 칼을 잡고 고기의 살과 뼈 사이를 판단하여 쓰지 못하고 칼이 "살에 달라붙고, 뼈에 달라붙네."라고 착어한 것처럼, 백장의 물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말에 집착하여 대답한 것을 비판했다. 원오는 또 백장화상이 묻는 언어의 진흙탕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하며, "앞으로 가자니 마을도 없고, 뒤로 돌아 가자니 주막도 없다"고 평하고 있다. 불법에 대한 안목이 없기 때문에 중생심의 미로에 헤매고 있어 지혜의 눈으로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멍청한 답변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그래서 백장화상은 "나의 자손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이러한 답변은 앞으로 못 가고 뒤로도 못 간다"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70칙에서 백장이 위산에게 "나는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스럽다"라는 말의 전반을 언급하지 않고 뒷부분만을 말한 것은 운암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불법의 혜명을 계승해야할 제자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정법의 안목이 없으니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하여 중생구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게 되었음을 한탄한 말이다.
{전등록} 제6권에 백장화상이 황벽에게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감하고, 견해가 스승보다 뛰어나야 비로소 전수할 수가 있다. 그대는 스승을 초월(超師)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말이 {조당집} 7권 암두장, {임제록}등에도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당대의 선승들은 뛰어난 제자를 길러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하도록 선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화상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백장의 물음에 끄달려서 말했네. "황금빛 털 사자는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지 않네." 사자가 사냥을 할 때는 온몸을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기세를 펼치고 기회를 포착하여 순식간에 사냥을 한다. 운암 역시 황금빛 사자로서 소질은 갖추고 있지만, 수행이 원숙하지 못하여 안목이 없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자와 같은 자유자재한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삼삼오오 옛길을 가는데" 사실 운암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해서 수많은 참선 수행자들은 똑같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경전과 어록을 읽고 불조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만, 분위기만 답습할 뿐 독자적인 안목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대웅산 아래서 부질없이 손가락을 튕긴다." 운암도 백장산에서 20년 동안 백장의 지도를 받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네.
벽암록 제73칙 마조문하의 서당(西堂)과 백장(百丈)
글과 말과 모든 수단을 끊고 대답하다
{벽암록} 제73칙은 마조도일화상이 문하의 수제자인 서당과 백장의 안목을 평가하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마조화상에게 질문했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떠나서 화상께서는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마조화상은 말했다. "나는 오늘 피곤해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지장(智藏)에게 물어보게나!" 그 스님이 지장스님에게 질문하니, 지장은 말했다. "왜 마조화상께 묻지 않는가?" 스님은 "화상께서 스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지장이 말했다.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스님은 회해스님께 묻자, 회해스님은 "나는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스님이 이러한 전후 이야기를 마조화상께 말하자, 마조화상은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말했다.
擧. 僧問馬大師, 離四句絶百非, 請師直指某甲西來意. 馬師云. 我今日勞倦. 不能爲汝說, 問取智藏去. 僧問智藏. 藏云, 何不問和尙. 僧云, 和尙敎來問. 藏云, 我今日頭痛, 不能爲汝說, 問取海兄去. 僧問海兄. 海云, 我到這裏不會. 僧擧似馬大師. 馬師云, 藏頭白 海頭黑.
본칙 공안의 출처는 {조당집}14권 마조장인데, {마조어록}, {전등록}7권 서당장에도 수록하며, 조주와 앙산, 굉지 등 많은 선승들이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를 떠나서 불법의 진실을 밝히는 설법을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문관} 제5칙에 향엄화상이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발을 떼고 손을 놓고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대답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도 이 공안을 토대로 하고 있다. 또한 {무문관} 25칙에 앙산이 미륵의 처소에서 '대승의 가르침은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초월했다'라고 설한 법문도 마찬가지이다. {능가경}제2권에 '자각한 성지(聖智)의 경계에 일체법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낸 것인데, 유무(有無) 등의 사구(四句)를 여의고 자공상(自共相)을 여읜 것이다'라고 설한다. {대승현론} 제1권에 ‘진리(眞諦)는 사구(四句)를 끊고 백비(百非)를 여읜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절대의 진리는 일체의 언설과 개념을 초월한 입장을 말하며, 진리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불립문자의 의미이다.
설하지 않는 것이 참된 설법…
마조화상, 뛰어난 두 제자에 탄복
사구(四句) 백비(百非)란 불법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체의 논의와 언어 문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사구(四句)란 일(一), 이(異), 유(有), 무(無)라는 근본 사구(四句)로 일체의 모든 사물과 존재의 이론을 세워서 논리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이 근본 사구를 세밀하게 구분하고 분별하면 백비(百非)가 되는데, 동일한 것(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異)이 있고, 있다(有)고 말하지만, 없다(無)고 말하면 없는 것이다. 즉 어떤 사물이라도 동일한 것이지만 다름(異別)이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견해가 있다. 이 네 가지의 입장(四句)에 또 각각 사구(四句)가 있기 때문에 16이라는 숫자가 된다. 다시 그 16에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배치하면 48비(非)가 되고, 거기에 이전에 이미 일어난 일(已起)과 일어나지 않은 일(未起)은 합치면 96비(非)가 되며, 여기에 일(一), 이(異), 유(有), 무(無)의 근본 사구(四句)를 합치면 100비(非)가 된다. 이렇게 백비(百非)라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지만 무수한 부정으로 연장되는 논리로서 결국 일(一), 이(異), 유(有), 무(無)의 사구(四句)에 귀결되는 것이다.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는 원래 고대 인도의 외도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형식적인 이론을 초월하여 중도(中道) 실상(實相)의 가르침을 세운 것이다. 용수의 {중론(中論)}에서 제시한 '팔부중도(八不中道)'와 대비하여 이해해야 한다.
즉 스님은 마조화상에게 입으로 일체의 언어 문자로 펼치는 논의를 벗어나 달마조사가 중국으로 온 뜻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 문제는 {종경록} 97권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남악회양과 탄연(坦然)선사가 처음 숭산 혜안국사를 참문하고 질문한 말이 최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혜안국사는 '어째서 자기 자신의 의지를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지를 질문해서 무엇 하려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마조어록}에도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마조는 '지금 그대 자신의 의지는 어떠한가?'라고 반문한다. 선불교에서는 남의 의지를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질문의 핵심은 달마가 전한 불법의 근본핵심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본칙에서 마조화상은 '나는 오늘 피곤해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지장(智藏)에게 물어보게나!'라고 말했다. 원오는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는 노출되었다"고 착어한 것처럼, 마조의 대답에 사구백비를 초월한 서래의(西來意)를 제시하고 있는데, 안목이 없는 스님은 자신의 불심에서 체득하지 못하고 또 밖을 향해 불법을 구하려고 지장스님에게 질문했다. 지장은 말했다. '왜 마조화상께 묻지 않는가?' 지장은 마조문하의 수제자이기에 서당(西堂)이라고 부른다. 원오는 지장의 이 한마디가 숲에서 호랑이가 뛰어나온 것이라고 평하며 지장이 몸을 바꾼(轉身) 지혜작용의 날카로움을 칭찬하고 있다. 스님은 정직하게 '화상께서 스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 지장은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말했다. 마조는 피곤하니 지장에게, 지장은 머리가 아프니 회해에게 묻도록 한다. 스님은 백장회해께 묻자, 회해스님은 '나는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인사말로 대답했다. 백장이 말한 '불회(不會)'라는 한마디는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은 대답이다. 원오는 "쓸데없는 말하지 않고, 천고 만고에 깜깜하게 되었네"라고 하여 백장의 불회(不會)는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깜깜한 절대평등의 세계라고 착어했다.
{금강경}에 설한 것처럼, '설하지 않은 것이 참된 설법'인 것처럼, 사구 백비를 초월한 설법은 질문한 조사서래의를 언어 문자를 초월하여 제시한 것이다. 스님이 지장은 두통을, 백장은 불회(不會)라고 말한 전후의 이야기를 마조화상께 말하자, 마조화상은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평했다. 마조화상이 두 제자의 견해에 대한 평가를 희고 검은 색깔, 우열과 철저와 불철저의 차별적인 사고로 접근하면 마조를 비롯하여 모두를 중생으로 타락시킨다. 백로는 희고, 까마귀는 검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은 것처럼, 희고, 검은 색은 조작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다. 모든 자연의 존재가 모두 독자적인 본성(법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절대적인 경지이다. 마조화상은 서당과 백장이 각자 절대적인 본래심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안목과 방편지혜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한 말이다. 자기 본래 절대의 세계가 일체의 사구백비를 초월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고. 마조화상이 서당과 백장의 견해를 평가한 말을 그대로 읊고 있다. 원오는 "반은 닫치고(合) 반은 열렸다(開)"고 착어한 것처럼, 이 말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구백비를 초월한 입장에 있다. 서당과 백장도 마찬가지다. '눈 밝은 납승도 이 말의 참뜻을 알 길이 없네.'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수행자는 "30년 더 수행하라"고 원오는 착어했다. '망아지(馬駒:마조)가 천하 사람을 짓밟으니,' 마조화상이 말한 '서당의 머리는 희고, 백장의 머리는 검다'라는 이 말이 천하의 수행자들을 일시에 짓밟아 죽였다라고 칭찬했다. "임제는 날강도가 아니었구나." 설봉이 임제를 날강도라고 평했는데, 임제의 지혜작용보다 더 훌륭한 마조대사라고 칭찬한 말이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고, 천상 인간에 오직 나만이 안다."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맛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벽암록 74칙 금우화상의 밥통
음식 공덕 찬탄위해 밥통들고 춤추는 선승
{벽암록} 제74칙은 금우화상이 밥통을 치며 춤추고 웃는 기행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금우화상은 언제나 점심 공양시간이 되면 몸소 밥통을 들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보살들이여! 공양하러 오시오." 설두스님이 말했다. "비록 이와 같이 하였지만 금우화상은 호의로 한 것이 아니다." 어떤 스님이 장경스님에게 질문했다. " '옛 사람이 보살들이여! 공양하러 오시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장경스님이 말했다. '마치 점심 공양을 받고 축하하고 찬양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네."
擧. 金牛和尙每至齋時, 自將飯桶, 於僧堂前作舞, 呵呵大笑云, 菩薩子喫飯來. 雪竇云, 雖然如此, 金牛不是好心. 僧問長慶, 古人道, 菩薩子喫飯來, 意旨如何. 慶云. 大似因齋慶讚.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15권, {전등록} 제8권 금우화상전에 전하고 있으며, {종문통요집} 3권, {연등회요} 5권, {오등회원} 3권 등에도 수록하고 있다. 금우화상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데,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상산정석지(常山貞石志)} 13권에 수록한 '진정부정림통법대사탑명(眞定府定林通法大師塔銘)'에 의하면 당 현종의 개원(開元)시대에 입적한 금우화상의 탑에 대한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임제가 금우화상을 참문하여 선문답을 나눈 일단을 전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금우화상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선사가 수행자들 위해 공양 준비
불보살에 정성 지극한 예찬의식
{전등록}제8권에는 "금우화상은 공양주가 되어 대중들을 공양했는데, 언제나 점심공양 시간이 되면 밥통을 메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보살들이여 공양하시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매일 이와 같이 하였다."고 전한다. {무문관} 13칙에 덕산의 문하에서 설봉이 대중의 식사를 준비하는 공양주로서 수행한 이야기처럼, 그는 평생 공양주로서 대중을 공양하기 위해 주걱을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재식(齋食)은 점심공양시간(午飯時)을 말하는데, 불교의 교단에서는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일체의 애욕과 애착을 끊는 두타행을 하는 것이 수행생활이 기본이다. 아침(朝)은 제천(諸天)의 선신(善神)이 식사하는 시간이고, 낮(午)은 삼세의 제불이 식사하는 시간이기에 불법의 수행하는 사람은 제불의 식사시간에 맞추어 정오를 넘기지 않는 공양시간(齋時:오전 11시경)으로 정한 것이다. {유교경}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대들 비구들은 모든 음식을 받아먹을 때에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좋은 음식이나, 나쁜 음식이나 늘리거나 줄이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약간의 음식으로 몸을 유지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없애도록 하라. 마치 벌이 꽃에서 단 꿀만을 채취하고 꽃과 향기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라." 이것이 출가승이 식사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또 {사십이장경}에도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문이 되어 도법(道法)을 배우는 사람은 세상의 재산을 버리고 걸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루 한 끼의 식사(日中一食)로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쉬고(樹下一宿) 이틀을 같은 곳에서 묵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중국선원에서는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공양(齋食)이 정식이다. 교단의 규칙으로 저녁을 먹으면 안 되지만, 노동을 하는 선원에서는 옛날에는 돌을 불로 데워서 보자기에 싸서 배를 따뜻하게 하여 배고픔을 치유한다는 고사에 의거하여 저녁식사를 약석(藥石)이라고 하였다.
평창에도 "금우화상은 언제나 점심 공양시간이 되면 몸소 밥통을 들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껄껄 웃으며 '보살들이여! 공양시간요. 공양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20년 동안 이렇게 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진주 금우산에서 선문을 개창하여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금우화상이 매일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문하의 수행자들을 위해서 직접 점심공양을 준비한 밥통을 들고 좌선하는 승당 앞에 밥통을 직접 갖다놓고서 식사를 하도록 하고 있다. 우두법융선사가 대중들을 위해 쌀을 짊어지고 운반하고, 장작을 준비하고 물을 나르는 선원의 잡무를 실행한 선승들은 많지만, 대중의 식사를 직접 준비하여 공양한 선승은 없다. 그런데 금우화상은 밥통을 운반해 놓고 춤을 추면서 껄껄 웃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정상적인 선승의 행동과는 전연 다른 약간 미친 듯한 풍광승(風狂僧)의 모습이다. 원오는 '수시'에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신통 유희(遊戱)"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금우화상의 행동은 방거사가 말한 그대로 불심의 지혜작용인 신용묘용이며 유희삼매의 삶인 것이다. 금우화상이 '보살들이여! 공양하시요!'라고 말하고 제시한 밥은 보통 선원에서 식사하는 공양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원오의 수시에 "언구 속에 비로(毘盧)의 심인(心印)을 인출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금우화상은 수행자들이 불법을 깨닫고 보살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 노파심이며, 보살의 아들인 수행자, 즉 불보살에게 올리는 공양(香飯)인 것이다. 춤추며 웃는 금우화상의 모습은 불보살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올리는 예찬의 의식인 것이다.
설두스님은 "비록 이와 같이 하였지만 금우화상은 호의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즉 금우화상이 대중들에게 밥을 지어 공양한 것은 보살행을 하기 위한 목적의식의 마음으로 실행한 것이 아니다. 금우화상의 의미심장한 교화 수단을 일반적인 생각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주고 있다. 원오는 "적은 적을 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설두는 금우화상의 수단을 잘 파악하고 있다. 금우화상이 보살들에게 공양한 밥(香飯)을 중생심으로 먹지 말고, 법신(비로)의 심인을 체득한 지혜로 먹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봉의존이 "밥통 옆에 앉아서 배고프다고 고함치고, 강가에서 목마르다고 울부짖는 놈이 있다."라고 말하자, 제자인 현사가 더욱 철저한 입장으로 "밥통 속에 앉아서 배고프다고 울부짖고, 물속에서 목마르다고 우는 놈이 있다."라고 주장한 말이 있는 것처럼, 선원의 수행자는 매일 세끼의 식사를 받아먹고 있지만 중생심으로 배만 채우며 먹는 음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스님이 이 이야기를 장경스님에게 제시하면서 " '옛 사람이 보살들이여! 공양하러 오시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장경스님은 '마치 점심 공양을 받고 축하하고 찬양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네.'라고 말했다. 선원의 식사작법에는 심경(心經)과 십불명(十佛名)과 오관게(五觀偈)를 외우고 엄숙하게 공양을 받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금우화상은 춤과 웃음으로 무심의 경지에서 실행한 것이다.
설두스님이 게송으로 읊었다. "흰 구름 그림자 속에서 껄껄대고 웃네." 금우화상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무심의 지혜작용을 펼친 것을 읊고 있다. 백운(白雲)은 중생심의 세속에서 높이 초월한 경지에 있는 것이며, 그 곳에 멈추어 정지하고 있다면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다. 껄껄대고 웃고 춤추는 금우화상은 무심의 경지에서 펼친 지혜작용이다. "두 손으로 가져다가 그대에게 전해 준다." 금우화상이 승당 앞에 밥통을 들고 와서 '보살의 아들아! 밥 먹어라!'고 말한 것을 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대(他)'는 옛날 금우화상의 승당 수행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모든 승당 수행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가 이 말을 거듭 게송으로 읊고 있는 것은 심안으로 잘 살펴 자각하도록 한 것이다. 보살의 아들은 누구를 말한 것인가? 밥통은 무엇인가? 밥을 먹어라! 말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문제를 파악해야 금위화상의 광기(狂氣) 어린 이 공안의 의미를 체득 할 수 있는 것이다. "황금빛 사자 새끼라면, 삼천리 밖에서도 문제의 당체를 알아 차렸을 것이다." 불법을 체득한 선승이라면, 장경의 말처럼, 언어 문자로 제시한 난제의 공안이라도 당체인 진실을 곧바로 체득 할 수가 있다.
벽암록 75칙 오구화상이 정주화상의 선법을 묻다
수행자 근기 간파한 방망이 서문답 한판
{벽암록} 제75칙은 오구화상이 정주(烏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스님에게 정주(定州)화상의 불법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나눈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뒤에 오구화상을 참문하자, 오구화상이 물었다. "정주화상의 선법은 이곳의 선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다르지 않습니다." 오구화상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다시 거기로 가라!"하면서 주장자로 곧장 후려쳤다. 스님은 말했다. "방망이에 눈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후려치면 안 됩니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오늘은 한 사람(一箇)을 친다"하면서 또 세 번이나 후려쳤다. 스님은 곧장 승당 밖으로 나갔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구나!" 스님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를 화상이 쥐고 있는데, 어떡합니까?" 오구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빌려주겠다." 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오구화상의 주장자를 빼앗아 세 차례나 치니, 오구화상이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야, 억울한 방망이!" 스님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맞습니까?" 오구화상이 말했다.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놈이군!" 스님은 곧 예배를 올렸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화상! 이렇게 하는 것이야!"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나갔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니, 이렇게 할 수 있다니."
擧. 僧從定州和尙會裏, 來到烏臼, 烏臼問, 定州法道何似這裏.僧云, 不別. 臼云, 若不別更轉彼中去, 便打. 僧云, 棒頭有眼, 不得草草打人. 臼云, 今日打著一箇也. 又打三下. 僧便出去. 臼云, 屆棒元來有人喫在. 僧轉身云, 爭奈杓柄, 在和尙手裏. 臼云, 汝若要山僧回與汝. 僧近前奪臼手中棒, 打臼三下. 臼云, 屈棒屈棒. 僧云, 有人喫在. 臼云, 草草打著箇漢. 僧便禮拜. 臼云, 和尙. 恁去也. 僧大笑而出. 臼云, 消得恁, 消得恁.
용맹스레 쳐들어온 납자 안목에
오구화상 즐거워 방망이 후려쳐
본칙의 공안은 {종문통요집} 제5권, {오등회원} 제3권의 오구화상장에 전하고 있다. 오구화상은 마조선사의 선법을 이은 제자로 {전등록} 제8권에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본 공안은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어떤 스님이 오구화상을 참문하여 나눈 대화이다. 정주화상은 북종선 보적(普寂)선사의 법을 이은 석장(石藏)선사인데, 그에 대한 행적도 전하지 않는다.
오구화상은 그 스님에게 "그대는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했다고 했는데, 정주화상의 선법(法道)과 이곳(這裏) 나의 선법과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 정주화상은 북종선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이고, 나(오구)는 남종선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인데, 그대는 어떠한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는가? 원오도 '견해가 깊고 얕은지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오구화상은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해 보기 위한 상투적인 물음인 것이다. 그 스님은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라고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고, 본래 고정된 한 법도 없는 공(空)이며, 무법(無法)인데, 정주화상의 선법과 오구화상의 선법이 다르다고 한다면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중생이며,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 안목 없는 선승이다. 그 스님은 오구화상이 던진 물음의 본의를 파악하고 민첩하게 한마디로 다름없다고 말한 점으로 볼 때 과연 정법의 안목을 갖춘 수행자이다. 석두의 {참동계}에도 "사람의 근기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지만, 불도는 남북의 조사가 없다"라고 읊고 있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오구화상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다시 거기로 가라!"하면서 주장자로 곧장 후려쳤다. 정주화상의 선법과 나의 선법이 다르지 않다면 무엇 하러 이곳에 왔는가? 속히 본래 있던 그곳(彼中)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면서 곧장 주장자로 때렸다. 원오도 "올바른 법령을 시행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스님은 그냥 물러서지 않고 "방망이에 눈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후려치면 안 됩니다"라고 대꾸했다. 방망이에 눈이 있다는 말은 안목없는 놈은 때려야 하지만, 안목있는 납승을 함부로 때려서는 안 된다는 비판의 말이다.
"방망이를 사용할 줄 아는 안목이 있는 선승이라면 어떻게 안목있는 납승에게 방망이를 함부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습니까?"라고 날카롭게 꼬집는 말이다. 원오는 "정말 작가라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사자 새끼로다"라고 이 스님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오구화상은 "오늘은 한 사람(一箇)을 친다" 하면서 또 세 번이나 후려쳤다. 한 사람은 도안의 고사에 의거한 말로 한 사람의 성자(一箇聖者)를 말하는데, 오구화상은 오늘 비로소 정법의 안목을 갖춘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너무나 즐겁고 기뻐서 주장자를 멋지게 후려 칠 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거듭 세 번이나 신나게 때리고 있다. 통쾌하고 유쾌한 오구화상의 만족한 지혜작용의 방망이이다. 그 스님은 곧장 승당 밖으로 나갔다. 오구화상의 묘용인 방망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오구화상이 그 스님에게 "억울한 방망이(屈棒)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屈棒)는 스님이 오구화상이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비판한 말에 대한 조소(嘲笑)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방망이)를 화상이 쥐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지요" 오구화상은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빌려주겠다"라고 말하자, 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오구화상의 주장자를 빼앗아 세 차례나 쳤다. 오구화상은 "억울한 방망이(屈棒)야, 억울한 방망이!"라 말했다. 이 말은 방망이에 눈이 없군! 마주잡이로 방망이를 휘두르는가? 라고 반문하는 의미이다.
오구화상과 스님의 선문답은 주객 상호이며, 빈주(賓主)가 뒤바뀌는 지혜의 묘용을 자유롭게 펼치고 있다. 스님은 오구화상에게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맞습니까?"라고 묻자, 오구화상은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놈이군!"이라고 하면서 앞에 스님이 한 말로 대꾸했다. 스님은 곧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구화상은 말했다. "그렇지, 이렇게 하는 것이야!"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원오는 "작가 선객이 본래 있었다. 사나운 호랑이라야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훌륭한 수행자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오구화상도 "이렇게 훌륭한 지혜를 펼칠 수가 있다니, 이렇게 할 수 있다니(消得)"라고 감탄의 한마디를 남긴 것이다. 소득(消得)은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무애자재하게 지혜작용을 펼치고 있는 수행자를 훌륭하다고 극히 칭찬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부르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 '평창'에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뱀을 잡는 사람이 피리를 불어 뱀을 불러모으기는 쉬워도 모인 뱀을 필요한 만큼 잡고 돌려보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잘못 취급 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다. 오구화상이 안목을 갖춘 스님을 점검하는 모습을 비유하여 읊고 있다. "서로 주고받은 기봉을 자세히 보라!" 오구화상과 스님이 나눈 선기작용은 주객이 서로 바뀌고, 빈주가 뒤바뀌며, 주고 뺏음이 자유자재하게, 준엄한 지혜를 주고받고 있다.
원오도 "일출일입(一出一入), 두 사람이 모두 작가로다. 하나의 주장자를 두 사람이 서로 붙잡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견고한 겁석(劫石)도 오히려 부서지네' 오구화상과 스님이 나눈 절대적인 선기작용은 견고한 무한의 시간을 요구하는 겁석도 일시에 파괴되고 만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지의 선기작용을 펼친 것이다. '푸른 바다 깊은 물도 디디자마자 곧 마른다' 또한 무량한 대해(大海)의 바다도 한 순간에 메마르게 하는 기운이었다.
벽암록 76칙 단하화상이 어디서 왔는가 묻다
“안목없는 수행자가 밥만 축냈구나” 비꼬아
{벽암록} 제76칙은 단하천연화상이 찾아온 한 스님에게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단하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산 밑에서 왔습니다." 단화화상이 말했다. "밥은 먹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밥은 먹었습니다." 단화화상이 말했다. "그대에게 밥을 먹도록 한 사람은 안목을 갖추었는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장경선사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밥을 먹도록 한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을까?" 보복선사가 말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 눈먼 놈이다." 장경선사가 말했다. "본분의 선기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보복선사가 말했다. "나를 눈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擧. 丹霞, 問僧, 甚處來. 僧云, 山下來. 霞云, 喫飯了也未. 僧云, 喫飯了. 霞云, 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 僧無語.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 福云, 施者受者二俱漢.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 福云, 道我得.
"안목 있다" "없다" 팽팽한 논란
보복. 장경선사도 분별심 드러내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4권과 {전등록} 14권 단하천연장에 전하고 있으며, 장경과 보복의 문답도 수록하고 있지만, 약간의 문구와 내용이 다르다. 단하천연(丹霞天然 : 738~824)화상은 석두희천의 선법을 이었고, 등주 단하산에서 행화를 펼친 선승이다. 행각하다가 추운 날 혜림사에서 목불을 쪼개어 태워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조당집}에 의하면 단하화상은 어릴 때 유교와 묵자(墨子)를 공부하였고, 9경(經)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평창'에도 {전등록}에 의거하여 단하화상의 전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출가하기 전에 {벽암록} 42칙에 등장한 방거사와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가 행각하는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강서 마조선사의 선불장(選佛場)을 참문하여 마조의 안내로 석두선사와의 인연을 맺었다.
단하화상이 어떤 스님이 참문하러 왔기에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인사말로 물었다. '어디서'라는 질문에는 수행자가 온 장소와 본래면목의 출처에 대한 두 가지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방심하면 차별심에 떨어지고 만다. 즉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하기 위해 가볍게 던지는 문제인 것이다. 스님은 "산 밑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강서나 호남이나 약산이나 백장이나 특정한 장소나 선원을 말하지 않고, 산 밑에서 산위에 있는 선사를 참문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원오는 "수행자가 산 아래서 왔다는 이 말은 약간의 선기작용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한마디 말로서는 안목을 갖춘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착어했다. 그래서 단하화상은 "그대가 산 밑에서 왔다고 했는데, 배가 고프겠구나, 밥은 먹었는가?"라고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에는 불법을 깨달은 선열식(禪悅食)으로 배를 가득 채웠는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지혜가 있는가? 원오도 "두 번째 발 씻은 더러운 물을 뿌렸다"고 착어했다. 그 스님은 "예! 밥은 먹었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깨달음을 체득하여 일대사의 불법공부를 끝내고 마쳤습니다. 불법수행에 졸업이 있을까? 깨달음이 졸업인가?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데, 얻은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중생이다.
{반야심경}에 '지혜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왜냐하면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말이나 깨달음의 세계는 무소득, 무소유의 경지이며 본래무일물의 경지라는 불법의 진실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법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망념의 환상에 빠진 한 소식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화화상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밥을 먹도록 공양한 사람도 있구나. 그는 눈이 제대로 박힌 인간인가?"라고 날카롭게 비꼬며 반문하였다. '너 같이 멍청하고 안목없는 수행자에게 선법을 지도하고 깨달음이라는 식사를 제공한 놈 역시 정법의 안목이 있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눈먼 인간이 아니냐'라고 조소한 말이다. 그 스님은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단하화상이 던진 세 번째 화살(말)은 스님의 심장에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상이 본칙 공안의 제 일단이다. 약 100년 후 설봉문하의 장경혜릉과 보복종전선사가 이 문제의 공안을 제시한 대화를 설두는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장경선사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에게 공양한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을까?" 수행승에게 공양하는 것은 삼보의 은혜와 사회의 은혜를 갚는 의미이며,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훌륭한 공덕의 일인데, 왜 단하화상은 안목없는 놈이라고 하며, 안목없는 놈이 안목 없는 놈에게 공양했다고 하는가? 그대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면서 동문인 보복선사의 견해를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자 보복선사는 "공양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두 사람 모두 눈먼 놈"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은 공양을 베푸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공양물도 모두 청정하여 주객도 없고 안목있고, 없는 차별의 눈도 없다. 보복은 불법의 근본(第一義)은 공양하는자나 받는자나 보은의 자격이 있고 없음에 대한 이원(二元) 대립의 차별심도 없다고 한 말이다.
원오도 "이 한마디로 전부 다 끝냈다"고 한칼에 일체의 차별을 차단한 것이라고 착어했다. 장경선사는 "본분의 선기(禪機)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즉 이 말은 나는 보은이나 안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불심의 지혜작용을 펼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나를 눈먼 놈이라 할 수 있는가? 단하화상이 스님에게 한 말을 빌려서 자기의 식견을 제시하고 아울러 보복의 안목을 점검하는 말이다. 원오는 "무슨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가"라고 착어한 것처럼, 장경은 무분별하게 까닭모를 소리를 하고 있다. 장경 자신이 아직 철저하지 못한 경지를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보복선사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는 나를 눈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힐문하고 있다. 즉 나는 선기를 다하거나 다하지 않거나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눈먼 놈이 아니다 라고 혼자 과시하면서 '나보고 눈먼 놈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풀 속에 있다"며 분별의 중생심에 떨어져 있다고 착어하며,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산승이 그러한 경우라면, (장경이)'본분의 선기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할 때, 그에게 '눈먼 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애석하다. 당시 보복스님이 나처럼, "이 눈먼 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설두화상의 허다한 잔소리를 모면할 수 있었을텐데.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기를 다했다면 장님이 되지 않았을 텐데' 장경과 보복의 대화를 하나의 게송으로 읊었는데,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온전한 경지를 들러내지 못하고 "단지 절반을 말했을 뿐"이라고 착어했다. "소를 끌고 와서 풀을 먹이네" 이것은 {대지도론}과 {중경찬잡비유경(衆經撰雜譬喩經)}에 죽은 소에게 풀을 먹이려는 동자의 이야기에 의거한 말이다. 단하화상이 스님에게 공양한 사람이 안목이 있는가? 밥을 받아먹은 자는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게송으로, 이것은 마치 죽은 소에게 풀을 먹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읊은 것이다. '서천 28대 조사. 동토의 모든 조사의 보배 그릇(寶器)을 가져와 허물을 이루었네' 조사의 보배 그릇은 조사의 심인(心印)으로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한 불심의 지혜 그릇이다. 이 보배그릇을 활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사람 모두 안목이 없는 눈 먼 사람은 큰 죄인이 된다. 단하산의 스님은 물론, 장경과 보복도 허물을 면할 수가 없다. 장경과 보복이 보배의 그릇을 상처 낸 허물은 '허물이 깊어 찾을 곳이 없다' '천상 인간, (삼계 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다함께 허물에 침몰되었다'
벽암록 77칙 운문화상의 호떡
깨달음의 정법 불립문자 일깨워
{벽암록} 제77칙은 운문화상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질문하자 호떡이라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호떡이다."
擧. 僧問雲門, 如何是超佛越祖之談. 門云, .
분별심 가진 선객 입 틀어막은 "호떡설법"
관념 언어에 끄달리는 중생에게
본칙의 공안은 지극히 간단한 선문답인데, {운문록} 상권에는 운문문언(864~949)화상이 상당법문하는 가운데 나눈 대화로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마디의 말을 겨우 들면 모든 천차만별의 발자국(궤적)이 같아지며, 미진(微塵)을 모두 다 포괄한다 해도 그것은 교화 방편문으로 하는 말이다. 만약 이러할 때 납승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조사(祖師)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가지고 사량분별(商量)한다면 조계의 일로(一路)에 빠지게 되리라. 누군가 (조사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극복한) 경지에서 말할 사람이 있는가? 말할 수 있으면 나와라"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엇이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 운문선사는 말했다. "호떡()이다"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운문선사가 말했다. "분명히 무슨 관계가 있다" 선사는 또 말했다. "그대는 알았다고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조사의 의지를 말하면 그것을 듣고는 곧장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을 물을 것이다. 우선 무엇을 부처라고 하며, 무엇을 조사라고 하기에 나아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을 말하고 있는가?"
{조당집} 11권 운문장에는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라는 똑같은 질문에 "포주(蒲州)에는 마황(麻黃)이 익주(益州)에는 부자(附子)가 나지"라고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대답하고 있다. 또 {운문록} 상권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들이 주장자를 걸머지고 나는 참선하여 도를 배운다고 하며,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도리를 찾는다. 내 먼저 그대에게 묻노라. 하루 종일 행주좌와하고 똥오줌 싸는 일과 거름 구덩이의 벌레에서 양고기 파는 탁자에 이르기까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할만한 도리가 있는가? 말할 수 있으면 나오라! 없다면 내 앞에서 거리적거리지 말라."
{운문록}과 {조당집} 운문장에는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에 대한 법문이 몇 차례 등장한다. 즉 "어떤 스님이 목주화상에게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목주화상은 곧장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이것을 주장자라고 하는데, 그대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답이 없었다.
목주화상은 다시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그대에게 묻노라' 그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목주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이라고 제시하면서, 또 질문자에게 그 질문을 되돌리고 있다. 선문답에서 대답은 질문에 있다는 말이 있다. 운문은 상당법문에서 조사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가지고 사량분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운문의 설법은 학인들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한 방편이다.
도대체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 말이란 무엇인가? {임제록}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있고, 선어록에는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하고' '부처를 훼손하고, 조사를 훼손한다'는 말도 보인다. 그러면 부처나 조사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나 조사란 무엇인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부처인가?
부처나 조사란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이름이며 가상으로 표현한 형상인 것이다.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다는 것은 형체나 모양이 있는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부처나 조사에 대한 권위의식이나 어떤 고정관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망념의 중생심을 텅 비워버리고 본래의 불심(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즉 부처나 조사에 대한 고정된 상상의 이미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들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하여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의 실천으로 무한한 자기 향상을 이루는 깨달음의 실천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나 조사라는 이름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모습)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나 조사에 대한 명상(名相)과 고정관념의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본래심의 지혜로운 선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조당집} 4권에 단하천연선사가 행각하다 추운 날 혜림사에서 법당의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도 형상의 불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행동이다. 당시 원주는 단하선사를 욕하다가 눈썹이 빠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불상을 부처로 착각하고 있다. 참된 부처(眞佛)는 어디에 있는가?
선에서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면서 많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마음이 곧 부처'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으면 외도'라고 많이 주장하고 있지만 많은 수행자가 마음 밖에서 찾고 있고, {금강경}에서도 모양과 형색, 소리를 통해서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고 주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수행자가 착각하여 모양과 형상을 통해서 부처를 친견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미묘한 법문을 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자, 운문화상은 "호떡"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어록을 비롯해서 선승들의 선문답에 호떡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조정사원} 1권에는 참기름으로 구운 일종의 중국 만두라고도 한다. 그런데 운문화상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을 '호떡'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등록} 12권에 "진조(陳操)상서가 스님들께 공양하고, 호떡을 하나 집어들고 스님에게 물었다. '강서나 호남에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상서는 아까 무엇을 먹었지요?' 진상서가 말했다. '종을 치니 메아리가 울린다'" 여기 진조상서가 호떡을 들고 제시한 것은 본래면목의 유무(有無)를 점검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스님이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먹었는가?’라고 하며 본래면목의 작용을 제시했기 때문에 진조상서가 칭찬한 것이다. 운문화상이 호떡이라고 대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한다는 것은 부처나 조사의 이름과 형상에 미혹하는 중생심에서 불심인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호떡이라고 대답한 말에 대하여 '혀가 입천장에 딱 붙었다'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입을 다물고 좌선하는 모습이며, 말 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한 입에 가득 찬 호떡을 먹으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는가?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진정한 법문이 말로서 가능할까?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言詮不及) 불립문자의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부처나 조사라는 망념을 초월한 경지이다.
말하자면 호떡을 먹은 일이 부처나 조사라는 분별의식과 고정관념도 없이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본래면목의 삶인 것이다. 조주화상이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한 말도 마찬가지로 일체의 차별심을 초월하고 차를 마시는 불심(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을 자각하도록 하는 일상생활의 법문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초월한 말을 묻는 선객이 매우 많다" 부처와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법을 묻는 수행자는 많다. "틈새가 여기저기 터진 것을 보았느냐?"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벌써 완전무결한 불심을 언어 문자의 차별로 상처투성인 중생심으로 만들었네. "호떡으로 털어 막았는데도 아직도 긍정치 못하네"
운문은 질문한 스님의 분별심 구멍에다 호떡으로 틀어막았는데, 아직도 깨달음이나 현상에 집착하여 불법의 근본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도 천하의 모든 수행자들이 착각하고 있다" 운문이 스님을 위해 호떡으로 정법의 안목을 바꾼 방편법문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읊었다.
벽암록 78칙 16명의 보살이 목욕하며 깨닫다
"空한 물로 空한 몸을 씻는 것도 공(空)한 일…"
{벽암록} 제78칙은 {수능엄경}에 나오는 고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참구하게 하고 있다.
옛날에 16명의 보살이 있었는데, 스님들을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인연(본질)을 깨달았다. 여러 선덕들이여! 저네들이 미묘한 감촉 또렷이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擧. 古有十六開士, 於浴僧時, 隨例入浴, 忽悟水因. 諸禪德, 作生會, 他道妙觸宣明. 成佛子住, 也須七穿八穴始得.
나와 물이 하나인 '수아일체(水我一體)'
목욕통해 진리 깨달은 '독각(獨覺)'
본칙은 {수능엄경}제5권 다음의 일단에 의거한 것이다. 발타바라(跋陀婆羅)와 그 도반 16보살[開士]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말했다. “저희들은 처음 위음왕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스님들이 목욕할 때 차례차례로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원인(水因)을 깨닫고 보니, 때(번뇌)를 씻음도 아니오, 몸(體)을 씻음도 아니며, 중간에서 안연하게 무소유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익힌 숙습(宿習)이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금시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無學)을 체득하게 되었으며, 피불(彼佛)이 나를 발타바라라고 이름하니 미묘한 촉감(觸)이 선명(宣明)하여 불자의 보살지위(佛子住)를 이루었습니다. 부처님이 원통(圓通)을 질문하시니 제가 증득한 바는 촉인(觸因)이 으뜸이 되겠습니다.”
설두는 {설두송고} 83칙에 이 일단을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16보살(開士)은 발타바라와 같이 수행하는 일행이다. 개사(開士)는 보살의 번역어로 불법의 원만한 깨달음을 자리이타의 보살행으로 실행하는 수행자이며, 대사(大士)라고도 한다. {경음소(經音疏)}에 "개(開)는 통달(達)이며, 밝힘(明)이며, 아는 것(解)이다. 사(士)는 사부(士夫)이다. 경전 가운데 보살이라고 부르며, 개사(開士)라고 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대보적경(大寶積經)}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에는 "16명의 재가 보살이 있으니 발타바라를 상수(上首)로 한다."는 일절이 있고, {대지도론}에도 "선수(善守,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은 모두 재가의 보살이다. 발타바라 거사는 바로 왕사성의 옛 사람"이라는 일절이 보이는데, 유마거사와 같이 재가의 보살로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원오도 '평창'에 능엄회상에서 발타바라보살이 16명의 보살과 함께 청정한 수행으로 각기 원통법문의 원인(因)을 말했다. "이것은 25원통 가운데 하나이다. 16명의 보살이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수인삼매(水因三昧)를 깨치고 말했다. '육진(六塵)도 씻지 않았고, 몸도 씻지 않았다.'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늘 편안하며, 얻어 가진 것도 없이(無所有) 천만 가지 그 무엇도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참다운 반야이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사이비 반야이다."
수인삼매(水因三昧)는 {수능엄경}에서 말하는 25가지 깨달음(圓通) 가운데 하나인데,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이 수인삼매를 깨달았다는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칙에서는 수인(水因)을 깨닫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수인(水因)이란 물의 본질이나 실체, 혹은 물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 독자적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 혹은 불가득(不可得)이며 본래 공(空)한 인연으로 잠시 결합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16보살은 목욕하는 동기에서 이러한 수인(水因)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욕실에서 조용히 몸을 씻는 도중에 물을 아무리 사용해도 물은 그대로 흘러내리며, 어떠한 그릇에도 담기며, 어떤 형체와 독자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법에서 설하는 무자성(無自性)과 물질이 본래 공한 색죽시공(色卽是空)의 경지를 체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에 제로라는 숫자를 아무리 첨가해도 제로인 것처럼, 본래 공한 물로 공한 신체와 때를 씻는다는 사실 또한 본래 공한 경지인 것이다.
즉, 아상과 인상, 주관과 객관이라는 상대적인 분별심과 자아의식도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본래 공(空)한 물을 사용하여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지금 여기 자신이 물을 가지고 몸을 씻는 목욕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관적인 자기와 객관적인 대상인 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一如)가 된 수아일체(水我一體)이며, 만물일체(萬物一體), 혹은 만법일여(萬法一如)의 경지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이란 번뇌 망심의 분별심이 없이 젓가락(色)으로 무심(空)한 경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며, 공즉시색이란 젓가락을 가지고 식사한다는 의식(분별심)도 없이(空) 무심하게 젓가락과 숟가락 등의 도구(色)를 사용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식사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여러 선덕들이여! 어떻게 그들 16보살이 체득한 미묘한 감촉으로 또렷이 깨닫고 광명으로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체득해야 할 것인가?"라고 {수능엄경}에서 발타바라가 깨닫게 된 인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미묘(妙)함은 불가사의한 경지를 말하며, 감촉(觸)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촉(觸)으로 신체의 감각을 통해서 외부 경계를 받아들이면서 차갑고 부드럽고 느끼는 지각을 말한다. 16보살은 본래 공하여 무상(無相)한 물을 사용하여 무상의 신체에 목욕하는 촉감을 통해서 본래 공함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을 묘촉(妙觸)이라고 한 것이다.
물이 신체에 닿는 촉감의 묘오(妙悟)가 확실하고 선명하게 자각된 지혜작용을 선명(宣明)이라고 말한다. 세존이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은 시각(視覺)과 향엄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청각(聽覺), 그리고 16보살이 목욕하면서 물이 몸에 닿는 인연으로 깨달은 촉각(觸覺) 등이 있는 것처럼, 수행자의 매일 매사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각, 청각, 촉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인연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불자주(佛子住)'란 불자로서 불생불멸인 진여법성을 깨닫고 열반적정의 등각의 지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를 체득한 것을 말한다.
설두는 또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16보살이 묘촉(妙觸)의 체험으로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묘오(妙悟)를 체득했다고 했는데, 선의 수행으로 볼 때 목욕하는 인연으로 수인(水因)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피곤하면 잠잘 때나 지금 여기의 당처에서 불자의 지위(깨달음)에 이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혜작용이 살황자재(殺活自在)의 기용인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종횡으로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면 16보살이 깨달음을 체득한 묘촉선명(妙觸宣明)의 경지를 단적으로 파악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보살의 깨달음은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생사대사의 일대사를 마친 납승은 한사람이라도 좋다." 16명의 보살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선승이라도 출현한다면 충분하다. 사실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인물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긴 좌선상위에 다리 펴고 누웠네." {전등록} 15권 협산선회의 말로 일대사를 마친 한 사람은 {증도가}에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처럼, 부처나 깨달음을 구하는 일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한 생활을 한다. "꿈속에서 원통을 깨달았다 말하나," 16보살이 수인(水因)으로 원통을 깨달았다고 하나 꿈속의 잠꼬대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미혹함의 꿈이나 깨달음이라는 꿈도 깨고나면 모두 텅 빈 空인 것이다. "향수로 씻었다고 해도 얼굴에 침을 뱉으리." 향수로 목욕을 해도 즉 깨달음이라는 냄새(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얼굴에 침을 뱉는 것, 도리어 더러움이 되고 만다.
벽암록 78칙 16명의 보살이 목욕하며 깨닫다.
"空한 물로 空한 몸을 씻는 것도 공(空)한 일…"
{벽암록} 제78칙은 {수능엄경}에 나오는 고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참구하게 하고 있다.
옛날에 16명의 보살이 있었는데, 스님들을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인연(본질)을 깨달았다. 여러 선덕들이여! 저네들이 미묘한 감촉 또렷이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擧. 古有十六開士, 於浴僧時, 隨例入浴, 忽悟水因. 諸禪德, 作生會, 他道妙觸宣明. 成佛子住, 也須七穿八穴始得.
나와 물이 하나인 '수아일체(水我一體)'
목욕통해 진리 깨달은 '독각(觸覺)'
본칙은 {수능엄경}제5권 다음의 일단에 의거한 것이다. 발타바라(跋陀婆羅)와 그 도반 16보살[開士]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말했다. “저희들은 처음 위음왕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스님들이 목욕할 때 차례차례로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원인(水因)을 깨닫고 보니, 때(번뇌)를 씻음도 아니오, 몸(體)을 씻음도 아니며, 중간에서 안연하게 무소유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익힌 숙습(宿習)이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금시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無學)을 체득하게 되었으며, 피불(彼佛)이 나를 발타바라라고 이름하니 미묘한 촉감(觸)이 선명(宣明)하여 불자의 보살지위(佛子住)를 이루었습니다. 부처님이 원통(圓通)을 질문하시니 제가 증득한 바는 촉인(觸因)이 으뜸이 되겠습니다.”
설두는 {설두송고} 83칙에 이 일단을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16보살(開士)은 발타바라와 같이 수행하는 일행이다. 개사(開士)는 보살의 번역어로 불법의 원만한 깨달음을 자리이타의 보살행으로 실행하는 수행자이며, 대사(大士)라고도 한다. {경음소(經音疏)}에 "개(開)는 통달(達)이며, 밝힘(明)이며, 아는 것(解)이다. 사(士)는 사부(士夫)이다. 경전 가운데 보살이라고 부르며, 개사(開士)라고 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대보적경(大寶積經)}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에는 "16명의 재가 보살이 있으니 발타바라를 상수(上首)로 한다."는 일절이 있고, {대지도론}에도 "선수(善守,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은 모두 재가의 보살이다. 발타바라 거사는 바로 왕사성의 옛 사람"이라는 일절이 보이는데, 유마거사와 같이 재가의 보살로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원오도 '평창'에 능엄회상에서 발타바라보살이 16명의 보살과 함께 청정한 수행으로 각기 원통법문의 원인(因)을 말했다. "이것은 25원통 가운데 하나이다. 16명의 보살이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수인삼매(水因三昧)를 깨치고 말했다. '육진(六塵)도 씻지 않았고, 몸도 씻지 않았다.'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늘 편안하며, 얻어 가진 것도 없이(無所有) 천만 가지 그 무엇도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참다운 반야이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사이비 반야이다."
수인삼매(水因三昧)는 {수능엄경}에서 말하는 25가지 깨달음(圓通) 가운데 하나인데,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이 수인삼매를 깨달았다는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칙에서는 수인(水因)을 깨닫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수인(水因)이란 물의 본질이나 실체, 혹은 물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 독자적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 혹은 불가득(不可得)이며 본래 공(空)한 인연으로 잠시 결합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16보살은 목욕하는 동기에서 이러한 수인(水因)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욕실에서 조용히 몸을 씻는 도중에 물을 아무리 사용해도 물은 그대로 흘러내리며, 어떠한 그릇에도 담기며, 어떤 형체와 독자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법에서 설하는 무자성(無自性)과 물질이 본래 공한 색죽시공(色卽是空)의 경지를 체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에 제로라는 숫자를 아무리 첨가해도 제로인 것처럼, 본래 공한 물로 공한 신체와 때를 씻는다는 사실 또한 본래 공한 경지인 것이다.
즉, 아상과 인상, 주관과 객관이라는 상대적인 분별심과 자아의식도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본래 공(空)한 물을 사용하여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지금 여기 자신이 물을 가지고 몸을 씻는 목욕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관적인 자기와 객관적인 대상인 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一如)가 된 수아일체(水我一體)이며, 만물일체(萬物一體), 혹은 만법일여(萬法一如)의 경지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이란 번뇌 망심의 분별심이 없이 젓가락(色)으로 무심(空)한 경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며, 공즉시색이란 젓가락을 가지고 식사한다는 의식(분별심)도 없이(空) 무심하게 젓가락과 숟가락 등의 도구(色)를 사용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식사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여러 선덕들이여! 어떻게 그들 16보살이 체득한 미묘한 감촉으로 또렷이 깨닫고 광명으로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체득해야 할 것인가?"라고 {수능엄경}에서 발타바라가 깨닫게 된 인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미묘(妙)함은 불가사의한 경지를 말하며, 감촉(觸)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촉(觸)으로 신체의 감각을 통해서 외부 경계를 받아들이면서 차갑고 부드럽고 느끼는 지각을 말한다. 16보살은 본래 공하여 무상(無相)한 물을 사용하여 무상의 신체에 목욕하는 촉감을 통해서 본래 공함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을 묘촉(妙觸)이라고 한 것이다.
물이 신체에 닿는 촉감의 묘오(妙悟)가 확실하고 선명하게 자각된 지혜작용을 선명(宣明)이라고 말한다. 세존이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은 시각(視覺)과 향엄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청각(聽覺), 그리고 16보살이 목욕하면서 물이 몸에 닿는 인연으로 깨달은 촉각(觸覺) 등이 있는 것처럼, 수행자의 매일 매사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각, 청각, 촉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인연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불자주(佛子住)'란 불자로서 불생불멸인 진여법성을 깨닫고 열반적정의 등각의 지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를 체득한 것을 말한다.
설두는 또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16보살이 묘촉(妙觸)의 체험으로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묘오(妙悟)를 체득했다고 했는데, 선의 수행으로 볼 때 목욕하는 인연으로 수인(水因)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피곤하면 잠잘 때나 지금 여기의 당처에서 불자의 지위(깨달음)에 이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혜작용이 살황자재(殺活自在)의 기용인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종횡으로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면 16보살이 깨달음을 체득한 묘촉선명(妙觸宣明)의 경지를 단적으로 파악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보살의 깨달음은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생사대사의 일대사를 마친 납승은 한사람이라도 좋다." 16명의 보살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선승이라도 출현한다면 충분하다. 사실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인물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긴 좌선상위에 다리 펴고 누웠네." {전등록} 15권 협산선회의 말로 일대사를 마친 한 사람은 {증도가}에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처럼, 부처나 깨달음을 구하는 일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한 생활을 한다. "꿈속에서 원통을 깨달았다 말하나," 16보살이 수인(水因)으로 원통을 깨달았다고 하나 꿈속의 잠꼬대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미혹함의 꿈이나 깨달음이라는 꿈도 깨고나면 모두 텅 빈 空인 것이다. "향수로 씻었다고 해도 얼굴에 침을 뱉으리." 향수로 목욕을 해도 즉 깨달음이라는 냄새(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얼굴에 침을 뱉는 것, 도리어 더러움이 되고 만다.
벽암록 79칙 투자화상과 부처의 소리
“차별심에 빠진 졸승이 평등심 논하다니”
{벽암록} 79칙은 투자산에서 활약한 대동(大同)화상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그렇지." 그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주전자에 물이 끓는 소리와 같은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투자화상이 곧장 후려쳤다. 그 스님은 또다시 질문했다. "난폭한 말이나 부드러운 말이 모두 불법의 근본진리로 귀결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그렇지." 스님이 말했다. "화상을 말뚝에 메여있는 당나귀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투자화상이 곧장 후려쳤다.
擧. 僧問投子, 一切聲是佛聲是否. 投子云, 是. 僧云, 和尙莫沸碗鳴聲. 投子便打. 又問, 言及細語皆歸第一義. 是否. 投子云, 是. 僧云, 喚和尙作一頭驢得. 投子便打.
본칙의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연등회요} 제21권, {오등회원} 제5권 투자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투자화상은 {벽암록} 제41칙 본칙에 조주선사와의 대화에도 등장한 바가 있는데, 단하천연-취미무학(翠微無學)선사의 법은 잇고 서주(舒州) 투자산에서 교화를 펼친 대동(大同, 819~914)선사이다.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제15권에 전하고 있다.
원오스님은 '평창'에서 "투자화상은 소박하고 진실하면서도 많은 사람 가운데서 뛰어난 변재를 발휘했다. 흔히 질문하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하면 곧바로 그의 속을 들여다보아 괜한 힘을 들이지 않고 그의 혀를 꽉 틀어막아 꼼짝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장량(張良)이 천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서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과 같았다"고 평하는 것처럼, 한나라의 명장 장량에 비교하고 있다.
본칙의 대화도 어떤 운수행각하는 스님이 투자화상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운문선사도 "일체의 소리는 부처의 소리이며, 일체의 모습은 부처의 모습"이라고 항상 설법했다. 소동파가 읊은 "개울물 흐르는 소리는 곧 부처님의 설법소리이고, 산이 솟아 있는 모양 그대로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라는 게송이나, {인천안목}에 "소나무에 부는 바람소리 반야를 설하고, 지저귀는 새소리는 진여를 드러낸다"고 읊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일체 모든 소리가 부처의 청정법신이며 설법소리이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설법소리, 즉 여래의 법음(法音)이라는 주장은 {법화경}, {수능엄경} 등 여러 경전에서 많이 주장하고 있다.
{관무량수경}에 새들과 나무들이 모두 묘법을 설하고 있으며, {아미타경}에도 아미타불의 국토에는 일체의 모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나, 산들바람이 나무를 흔들며 나는 바람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법음으로 장엄된 국토라고 설한다. 특히 향엄선사는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고, 부(孚) 상좌(上座)는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닫게 된 인연을 전한다. 현사는 상당법문을 할 때, 제비가 조잘대는 소리를 듣고 "깊은 반야의 실상을 설하고 훌륭한 법문의 요지를 설한다"라고 설법했다.
그래서 무량종수는 {일용청규}에 "종소리를 듣고 번뇌가 끊어지며, 지혜가 증장하고 깨달음을 이루며, 지옥을 벗어나 삼계를 초월하고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원합니다"라는 게송으로 요약하여 일체 부처의 소리(法音)를 듣고 깨달음을 이루도록 발원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法音)'라는 질문은 {열반경} 제20권 범행품의 게송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투자화상은 "그렇지"라고 긍정하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화상께서는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서 뜨거운 김이 밖으로 힘차게 새면서 나는 '뿌! 뿌!' 라는 소리가 어찌 부처의 설법소리라고 하십니까? 너무 지나친 엉터리 말씀은 삼가하십시오"라고 비판하는 어조로 말했다. 돈비완명성(沸碗鳴聲)을 방귀뀌는 소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다.
{벽암록} 25칙에 '열완명성(熱鳴聲)'과 같은 말로, {오조법연선사어록}에도 "임제의 고함(喝)은 마치 주전자에 물이 끓는 소리"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자 투자화상은 주장자로 곧장 그 스님을 후려쳤다. 원오는 "잘 쳤다. 그런 놈은 놓아주면 안 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이 부처의 소리라는 절대평등의 한쪽 면에 집착되어 평등이 곧 차별이며,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전체를 보는 안목 없는 놈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법음 아닌 것이 없는데, 부처의 소리에 집착하고 있다. 주전자의 물끓는 소리나 고양이나 개가 짖는 소리 일체의 차별세계의 모든 존재의 소리가 그대로 부처의 법음이라는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고, 차별과 평등을 구분하는 상대적인 견해에 떨어졌기 때문에 후려친 것이다.
그 스님은 또다시 "난폭한 말과 부드러운 말이 모두 불법의 근본진리로 귀결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말은 {열반경} 범행품의 "모든 부처님은 항상 부드러운 말씀이나, 중생을 위하여 거친 말씀도 하신다. 거친 말씀과 부드러운 말씀이 모두 불법의 근본(第一義)으로 귀결된다"라는 게송이다. 즉 아무리 난폭하고 나쁜 말을 하거나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거나 모두 한결같이 불법의 진리에 계합된 설법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연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사람의 소리나 짐승의 소리나 무생물의 소리나 모두 부처의 법음이기 때문에 불법의 근본을 설하는 중도(中道) 제일의제(第一義諦) 라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기에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투자화상은 "그렇지"라고 전적으로 긍정하는 대답을 했다. 그 스님은 "일체의 모든 것을 불법의 근본으로 말한다면 화상을 선지식이라고 부르는 대신 말뚝에 메여있는 한 마리의 당나귀라고 불러도 좋습니까?"라고 말했다.
원오는 "송곳 끝이 날카로운 것만 보았을 뿐, 끝이 네모난 것은 보지 못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나쁜 시각에서 평등(第一義諦)의 한쪽 면을 보고, 차별이 평등인 사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놈이라고 비평한 것이다. 원오는 피를 입에 머금어 남에게 뿌리려다 자기 입이 먼저 더럽혀 졌다라고 평하는 것처럼, 절대 진리라는 평등 한쪽에 치우친 편견에 떨어졌기 때문에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안목이 없는 졸승이다 보니 남을 공격하면서도 도리어 자신이 중생심에 떨어진 피해를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치 {사십이장경} 8장에 "나쁜 사람이 현자(賢者)를 해치는 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은 것과 같다. 침은 하늘에 도달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얼굴에 떨어지게 된다.… 현자를 비방하지 말라. 그 재앙은 자기를 멸망시킨다"라는 말과 같다. 안목 없는 엉터리 수행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 그래서 투자화상은 주장자로 후려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투자화상이여!, 투자화상이여!" 투자화상의 대기 대용을 경의심으로 찬탄하며, "선기로 펼친 지혜작용은 막힘이 없네." 마치 수레바퀴라 종횡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이. '한 번 휘둘러 둘을 얻고,' 스님의 질문에 두 번이나 "그렇지"라는 한마디를 먹이를 던져, 두 번이나 스님의 방망이로 휘둘러 공덕을 펼친(得) 투자화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저기도 이와 같고, 여기도 이와 같네." 두 번의 질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처음은 긍정(放)하고, 뒤에서는 거두(收)는 방편을 사용했다. "가련하다. 험난한 파도를 타고 넘나드는 무수한 사람들이 결국 파도에 밀려 떨어져 죽는 구나." 투자화상의 높고 험준한 선풍은 천하에 알려져, 많은 수행자가 구경하러 몰려오지만,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투자의 지혜풍랑에 밀려 비명의 최후를 맞이했다.
"홀연히 되살아나면, 백 천의 많은 강물이 콸 콸 콸 거꾸로 흐르게 되리라." 아상과 인상, 고정관념과 편견을 텅 비우고 지혜의 안목을 갖춘다면, 일체의 만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사람이 되리라.
벽암록 80칙 조주화상과 어린애의 육식
"어린애 육식은 흐르는 물처럼 머뭄이 없어"
{벽암록} 제80칙은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갓 태어난 어린애도 육식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갓 태어난 어린애도 안, 이, 비, 설, 신, 의, 육식을 갖추고 있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치는 것과 같다." 그 스님은 다시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쏜살같이 급히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한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擧, 僧問趙州, 初生孩子, 還具六識也無. 趙州云, 急水上打毬子. 僧復問投子, 急水上打毬子, 意旨如何.
본칙의 공안은 {조주록} 중권에 수록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벽암록}에 자주 등장한 당대의 유명한 조주종심(778~897)선사이다. 어느 날 조주화상을 참문하러 온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갓 태어난 어린애도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안식(眼識)과 귀로 소리를 인식하는 이식(耳識), 혀로 맛을 인식하는 설식(舌識), 몸으로 촉감을 인식하는 신식(身識), 의지로 사물을 인식하는 의식(意識)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갓 태어난 어린애도 인간이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이 구족한 것이고, 육근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육근의 외부대상인 여섯 가지 경계(六境), 즉 눈으로 사물의 모양(色)을 보고 다양한 사물의 모양과 색깔을 인식하며, 귀로 소리를 듣고 소리의 내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코로 냄새를 맡고 향기를 인식하며, 혀로 음식의 짜고 신맛 등을 인식하며, 몸의 감촉을 받아서 부드럽고 딱딱한 느낌 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활동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을 받아들여 눈, 귀 코, 혀와 몸의 다섯 가지 인식의 문을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이 전오식(前五識)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온 것을 모두 받아 들여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제6식인 의식(意識)인데, 느낌이 좋고 나쁘고, 얼굴모양이 예쁘고 밉고, 깨끗하고 더럽다는 여러 가지 현상(法)을 인식하게 된다.
질문한 스님은 갓 태어난 어린애도 사물의 좋고 나쁨을 인식하는 제6식인 의식(意識)을 갖추고 있는지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육조혜능이 대유령 고개에서 혜명상좌에게 최초로 설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선과 악을 모두 함께 생각하지 말라.'고 법문하면서 많은 선승들이 일체의 선과 악은 물론 사량 분별을 절단하고 무심의 경지가 되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심(無心)이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텅 비워버리고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의 청정한 마음인데, 이러한 무심의 경지를 어린애의 마음과 같이 순수하게 하라는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불교 교학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주화상에게 '갓 태어난 애도 육식을 갖추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6식을 갖추고 있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육진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길고 짧음, 옳고 그름, 이득이 되는지 손실이 되는지 전혀 모른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갓 태어난 어린애처럼, 영예, 오욕, 공명, 거름과 수순(逆情順境)이 동요시키려고 해도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 눈으로 모양(色)을 봐도 장님처럼, 귀로 소리를 들어도 귀머거리처럼, 마음이 수미산과 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경전에서 문수동자나 선재동자를 비롯하여 {십우도}에서 소를 찾는 구법자를 동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어린애의 천진성과 순수성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한 경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석실선도(石室善道)선사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그대들은 들어보지 못했는가? 어린애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일찍이 나는 부처의 가르침을 안다고 말하더냐? 이 때는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점점 크면서 갖가지 지식과 이해를 배워서, '나는 불법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객진 번뇌인줄 모른 것이다. 16관행(觀行) 가운데 어린애의 무심한 행동(兒行)을 으뜸으로 여긴다. 어린애가 울 때는 우는 그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분별과 취사선택의 마음을 여읜 것에 비유한다. 그러므로 어린애를 찬탄하여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애를 도(道)라고 한다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 스님의 질문은 갓난애가 6식을 갖추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던져서 조주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만약 '있다'라고 대답하면 왜 어린애는 좋고 나쁨 등에 대한 분별과 판단이 없는가? 라고 힐문할 것이고, '없다'라고 대답하면, 왜 울고 웃고 하는가? 반문하려고 할 것이다. 조주화상은 '쏜살같이 급히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치는 것과 같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어린애가 육식을 갖추고 있다는 말도 아니고,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원오가 '지났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눈 깜박 하는 사이에 있다 없다라는 분별심을 초월하고 자취나 흔적도 없이 지나갔다. {능엄경}의 말에 '급류의 물을 바라보면, 편안하고 고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급히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이 끊어짐이 없이 흐르면서 흐르는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만법이 모두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어린애의 마음도 물이 흐르는 것처럼, 단지 시절인연에 따라 여여하게 흐를 뿐이다. 그 스님은 조주화상의 이 말에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투자화상을 찾아가 질문했다. "조주화상이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투자화상은 "한 생각, 한 생각이 한 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과 똑같은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인데, 일념 일념이 서로 이어져 상속(念念相續)하면서 일체의 차별경계에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고 흐르고 있는 무심의 입장을 말한다. 원오도 '어린애의 육식이란 인위적인 꾸밈(功用)이 없지만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인위적인 꾸밈(功用) 없는 어린애의 6식에 대해서 질문하니,' 스님은 6정(六情)의 망념이 작용하지 않는 무공용처(無功用處)를 질문한 것인데, 6식의 인위적인 분별의식이 없는 육식의 인식 작용 그대로가 무공용인 것이며, 분별의식이 없이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는 것이다. 원오는 무공용의 모습을 거울이 무심하게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착어하고 있다. '두 작가가 모두 질문자의 핵심을 파악해 버렸네' 조주와 투자화상 이 두 작가는 갓난애의 육식에 관한 견해를 질문한 핵심을 곧바로 파악했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흐르는 급류에 공을 친다고 했고, 투자화상은 한 생각 한 생각 머무름이 없다고 대답하여 갓난애의 육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한 것이다. '아득한 급류에서 공을 치니' 이 말은 조주화상의 대답을 게송으로 읊은 것인데, 망망(茫茫)은 끝이 없이 아득하여 광대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아득하고 급히 흐르는 급류의 물줄기에 공을 치는 무심(無功用)의 일구를 던진 것이다. 또한 급히 흐르는 물줄기는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으며 그냥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급류에서 공을 친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이렇게 대답한 조주화상이나 설두화상의 견해도 다시 한번 점검해 봐야 한다고 원오는 비판하고 있다. '행방(落處)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그 누가 알랴!' 투자화상은 한 생각 한 생각 머무름이 없이 흐른다고 했는데, 그 한 생각 한 생각이란 어떤 것이며,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머무르지 않는가? 그 행방(落處)을 추궁하면 누구라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알았다고 해서 불법의 진의를 체득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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