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무문관

수선님 2021. 5. 23. 11:22

무문관 개요(無門關 槪要)

 

무문관은 송대 임제종 양기파의 무문혜개(無門慧開:1183-1260)선사가

고칙(古則) 중에서 48칙을 골라 본칙으로 삼고 평창과 송을 덧붙여 1228년에 편찬한 공안집이다.

선종에서는 벽암록, 종용록 과 함께 대표적인 공안집으로 (선종무문관)이라고도 한다.

 

이 48칙의 총칙중에 제1칙인 (조주무자)는 스님들이 평생을 씨름하는 화두이다.

이 책의 저자 무문선사도 월림사관(月林師觀:1143-1217)선사의

문하에서 조주의 '무'자 화두를 6년간 참구하여 대오 하였다.

 

당시 스님은 제를 알리는 북소리를 들었는데 마치 청천하늘에

천둥이 울려 퍼지는 듯 하였다고 한다.

이는 북소리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스님의 수행이 무르익어

단지 북소리와 더불어 줄탁의 기연이 열린 것이다.

 

조주에게 한 승려가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없다.'고 대답한 것이 조주의 무자화두이다.

이 무자를 뚫어야 비로소 조주와 함께하고, 역대조사를 만날 수 있다.

 

조주의 '무'는 유무를 초월하여 절대적 '무'를 가리키며,

한 생각도 한 마음도 한 물건도 용납하지 않는 경지이며,

무문관 전편에 깔려 있는 선문의 정수이다.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스님: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자환유불성야무(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 "없어 !" 무(無)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의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열반경'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마땅히 개도 불성이 있어야 하는데, 왜 없다고 했을까?

 

조주(趙州:778-897)스님은 남전(南泉)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120세까지 장수한

당말(唐末) 중국 선종의 최후의 거장으로 선문에서 널리 참구되는

 '조주무자(趙州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등

많은 공안의 창시자이다.

그는 '옛 부처님'으로 불리워서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고도 하는데,

그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 하였을까?

 

★무문혜개(無門慧開:1183-1260)선사의 말입니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꿰뚫어야 하고

묘오(妙悟)는 심로(心路.마음길)이 끊긴 곳까지 다할 필요가 있다.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하고, 심로가 끊기지 않았을 때에는

모두 다 숲속에 붙은 귀신 나부랭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조사의 관문인가?

다만 '무(無)'라는 한 글자가 선종에서 넘어가야 할 관문이다.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고 '무'를 지목하여 말한다.

이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사람은 조주스님을 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대 조사들과 더불어 손에 손잡고 함께 가며 눈썹이 맞닿아 있듯이

함께 보고 함께 듣고 하니 어찌 경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하니, 어찌 관문을 꿰뚫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마다 할 수 있겠는가?

삼백육십 뼈마디와 팔만사천 털구멍에 온몸으로 의심을 일으켜

'무'자를 참구하여 주야로 놓치지 말고 간직하라.

허무라 이해하지 말고, 유무로 이해하지도 마라.

이 공안을 간직하기를 막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입에 문 것처럼 하라.

토하고 또 토해도 나오지 않게끔 하라.

과거에 배웠던 좋지 않은 지각(知覺)을 전부 탕진해 버려

오래 오래 순숙(純熟)하여 저절로 안밖이 한 덩어리가 되어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스스로 알 뿐 말 할 수는 없다.

아주 기세가 등등한 말(馬)처럼 뛰쳐나가 천지를 놀라게 하고,

관우가 큰칼을 빼앗아서 손에 잡은 것 같이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생사의 기로에서 대자재를 얻는다.

육도 사생 중에서 삼매를 즐기니 또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지 않고 있단 말인가?

평생의 기력을 전부 다 써서 이 '무'라는 글자에 매달려 쉬지않고

열심히 노력하면, 법의 촛불이 한 점 환하게 피어 나리라."

 

★무문송

구자불성(狗子佛性) 개다불성이다

전제정령(全提正令) 완전한 지상명령

재섭유무(涉有無) 유무로 판단하면

상신실명(喪身失命) 목숨이 상실된다.

 

천년도 훨씬 지난 늙은 노인네의 헛소리에 줄줄이 코를 꿰어 끌려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님께서 무관심 하다고 발뺌하고 싶지만 수행의 길목에서 생을 연명하는 한

절대로 이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왜 그렇다고 결론 내릴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이유는 모든 선사들의 체험 때문이다.

혹시 그대는 아니라고 하여도 결국에는 가고자 하는 정점에서 이 관문이 님을 기다린다.

실유불성이라 하였다가 불성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 무슨 일일까?

어디에 불성이 없다는 말인가?

선사들의 이야기는 님들의 알음알이를 용납하지 않지만 태양처럼 분명한 사실이다.

불성이 없는 곳을 알아야 조주의 관문을 넘볼 수 있다.

과연 어디가 불성이 없는 곳일까?

'개'는 불성이 없고, '나'도 불성이 없지요.

왜일까요?

천지간에 불성이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와 나와 천지간이 사라지면 비로소 온우주가 온전히 '실유불성'이 되지요.

중생심은 오직 이유와 조건으로 인드라망을 펼칩니다.

이 인연의 그물을 벗어나는 법은 오직 그대에게서 시간의 이유와

공간의 조건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유와 조건은 곧 시공의 그물이며 그대를 옭아매는 인연의 고리이지요.

없다는 언구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수행의 길목에서 서성이는 숫한 사람들이 '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언제나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대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만상은 언제나 여여하게

실상을 드러내며 그대를 비웃을 뿐입니다.

 

 '무'자 화두를 생각하면 예전에 읽었던 이 향봉님의 '생활선'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 이것에 목 매여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티베트에서는 고산병으로 거의 죽음에 온몸을 맡기고, 겨우 살아서 무자화두에 일념 해 있을 때, 한국에서 날아온 달력에 있는 '조주의 '무'를 보고 이것을 깨치신 분이지요. 그처럼 이 조주의 '무'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분은 그 순간에 확~ 아신 것이지요. 이 모두가 단지 이것 하나구나! 그래서 이 생활하는 이 모두가 하나하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활선'을 얘기하셨지만, 산속에 있는 절에만 있는 것이 선이 아니고 생활에서 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만이 선이 아닌 것처럼, 생활선이라고 하는 자체도 뱀의 '다리'입니다.

 

'무'자 화두는 보통 사람들이 법이라는 '뭔가 있다'라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대승정종분'에 나오죠.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을 해탈시키고 보니 사실은 해탈한 중생이 없다. 자신이 완전히 해탈하면 사실 중생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저 이 하나, 모든 게 자신의 일이고,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모두가 여기에서 일어나고 여기에서 사라지고 '나'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것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라 하든, '유'라 하든, 사실은 똑같은 말입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면 아,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보다, 개에게 잘해줘야겠다, 이런 게 '망상'이고, 개에게 불성이 없다 하면, 개에게 불성이 없으니 뭐, 복날에 잡아먹어도 상관이 없겠네, 이러면 곧장, 화로에 뛰어드는 하루살이입니다.

 

개에게, 하는 이것입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하는 이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것,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누가 말하고 있습니까? 말을 따라가지 않으면 지금 말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자신이 먼저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말에 어떤 냄새가 나는 줄 알고 쫓아가지만 이것은 무 색성향미촉법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전혀 가진 게 없다면 지나가는 것이고, 가진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무리 죽은 듯이 모래처럼 보이지만 자석이 지나가면  책받침 위의 철가루처럼 알음알이가 일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습성이 바뀌어도 이것 하나를 알지 못하면 언제든지 아주 작은 모랫 속에 숨어도 염라대왕의 자석에 붙게 되는 것입니다.

 

'무'는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빈손을 보이며 없다고,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주장자를 내리치면 '이게 뭐냐?'하고 말하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사람에게는 귀와 눈을 막아서 물에 던지고, '무'하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어와 같이 즐겁게 떠드는 소리입니다. 이게 방편입니다. 개에게는 불성이 있습니까? 이것입니다. 개에는 불성이 있습니까? 개의 불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게 자신의 불성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의 어느 것이라도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무문관 제2칙) 백장야호(百丈野狐)

 

백장(百丈)이 대중들에게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틈에 끼여

열심히 듣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곤 하였다.

어느 날 대중이 모두 물려 났는데도 노인은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를 본 백장이 이상하게 느끼고 누구냐고 묻자 노인이 대답하였다.

 

노인: "나는 과거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서 살았는데

어떤 학인이 '대수행인도 인과(因果)에 떨어 집니까?'라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 지지않는다.' (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대답하여

그 과보로 오백 생을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바라오니 화상께서 한 말씀 하시어 부디 여우의 몸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요."

 

백장: "나에게 물어라."

노인: "대수행인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백장: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 (불매인과不昧因果)

 

그러자 노인이 크게 깨달고는 하직 인사를 올리며

노인: "저는 이미 여우의 탈을 벗었습니다.

뒷산 중턱에 제 시체가 있을 것이니 스님을 천도하는 방식대로 장례를 치려 주시기 바랍니다."

선사는 공양을 마치고 대중을 불려 모아 뒷산으로 가서 여우의 시신을 찾아

스님의 천도 방식대로 화장을 하고 장례를 치렸다.

 

그리고는 법당에 나와 앞의 사연을 이야기하자, 황벽이 일어나 물었다.

황벽: "노인이 잘못 대답하여 오백 생을 여우의 몸이 되었는데,

만일 잘못 대답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장: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그대에게 일려 주리라."

 

황벽은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백장의 빰을 한대 후려첬다.

그러자 백장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백장: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더니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나!"

 

*이 이야기는 종용록 8칙. 선문염송 184칙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문왈,

'불락인과'는 어째서 야호로 떨어지는 결과가 되었고

'불매인과'는 어째서 야호를 벗어나게 하였는가?

만약 이것을 한 눈에 알아 본다면 백장 앞의 노인이 오백 생을 풍류를 즐겼음을 알리라.

 

★무문송왈,

불락불매는 양채일세요,(한 주사위를 굴릴 때 나오는 숫자가 두개)

불매불락은 천착만착이다.(다 잘못 되었다.)

 

* 백장은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은 대용(大用)을 얻었다.

* 백장 회해(百丈 懷海:749-814): 당대의 스님.

백장청규를 만들어 선원 조직과 제도를 정리하고 선불교를 중국적으로 토착화 시켰다.

 

백장이 매번 법당에 올라 법회를 열 때마다 어떤 노인이 대중과 함께 설법을 듣고는 대중이 물러가면 노인 역시 따라서 물러가곤 했는데, 하루는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장이 물었다.

"앞에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노인이 말했다.

"예,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 가섭불 시대에 이 산에서 주지를 했는데, 어떤 학으로부터 '지극히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라는 질문을 받고서 저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오백 생애를 여우몸 속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스님께 청하오니, 저를 대신하여 한마디 알맞은 말씀을 하셔서, 여우몸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고는 물었다.

"지극히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백장이 말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

노인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닫고는 절을 하고 말했다.

"저는 이미 여우몸을 벗었습니다. 산 뒤쪽에 있을 것이니, 스님께서는 승려가 죽은 것처럼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장은 유나에게 일러 종을 쳐서 대중에게 식사 후에 죽은 승려를 장사 지낸다고 알리게 하였다. 대중이 서로 수근거렸다.

"모든 대중이 평안하고 열반당에도 병든 사람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런 말을 할까?"

식사가 끝난 뒤에 백장은 대중을 이끌고 산 뒤의 바위 아래에 이르러, 주장자를 가지고 한 마리 죽은 여우를 꺼내어, 승려의 예에 따라 화장을 하도록 하였다.

 

백장은 저녁에 법당에 올라 앞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황벽이 곧 물었다.

"옛사람은 한마디 알맞은 말을 잘못 대답하여 오백 생을 여우몸 속에 떨어져 있었는데, 한마디 한마디에 잘못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백장이 말했다.

"가까이 오면 말해 주겠다."

황벽은 이에 가까이 다가가서 백장을 손바닥으로 한 차례 때렸다. 백장이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오랑캐의 수염은 붉다고 들었는데, 또 여기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나."

 

 

[무문의 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어찌하여 여우몸에 떨어지고,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어찌하여 여우몸에서 벗어날까? 만약 여기에서 한 개 눈을 갖출 수 있다면, 앞선 백장이 멋들어진 오백생을 누렸음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소리]

많이 수행한 사람은

스스로 인과를 만들고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인과에 매여 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질까 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 공부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로망이 아닐까요? 지금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도를 터득해서 이 모든 인과를 벗어난 어떤 해탈한 경지에 들어가고 싶은, 어떤 목표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절들과 그리고 도인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곳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수행은 정말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일단 몸이 좋아지고 기가 세지고 눈을 터지고 마음을 읽고 원하는 대로 됩니다. 눈에 보이는, 단계가 있는 수행은 단계별로 어떤 현상들까지도 닮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 확신하고 달려듭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많은 스님들이 정진을 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이런 일침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고칙들도 만들어진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같은 병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제대로 공부하라고 하시는, 바늘 귀를 갖다 대는 것입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정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황벽 스님의 말일뿐, 그 말을 믿고 백장 스님처럼 앞으로 다가가 귀를 갖다 대서는 귀싸대기 맞습니다. 백장 스님은 다행히 한 번의 퍼포먼스로 끝났지만 제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황벽 스님의 웃음은 정말 좋아하실 만한 기분 좋은 웃음입니다.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그게 맞는 말이어서 여우의 몸을 벗어났구나! 그렇지, 법에는 인과가 없는데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인과가 있으니까, 인과의 진실, 실재를 알면 현혹되지 않으면 항상 법에 있으니까 어둡지 않은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곧장 지옥행입니다. 또, 내 같으면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또는 저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또는 정말 여우가 어떻게 스님이었는가? 그럼 수행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 백장 스님의 낚싯줄에 걸린 것입니다.

 

무한한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먹고 놀고 하던 물고기가 새로운 것을 보면 먹인가 싶어서 덥석 물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법을 보는데 많은 생각과 이해를 내세웁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런 이해와 생각을 하기 전에 미리 와서 이해를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의 '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치 '사과'라고 말을 하면 벌써 사과가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아님 신 사과를 먹었을 때를 기억해서 입에 벌써 침이 고이는 것처럼, 말에, 생각에, 모양에, 벌써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릅니다.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항상 그려진 결과만 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라도 멈출 수 없는 욕망으로 다음 그림을 생각해서 지금 그림을 못 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오직 그림의 붓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전체를 못 봅니다. 무엇 하나라도 이것이다는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놓을 줄 모릅니다. 사실 쥐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칙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또 한번 자애로운 경책의 말씀을 새기고 여러 스승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걸음에는 인과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수행한 사람이 인과에 떨어집니까? 하는 이 한 생각이 인과를 내보이고 떨어졌지만 실로 떨어진 자리는 백장과 황벽, 그리고 부처님까지 모두가 떨어진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떨어져서 인과에 어둡지 않고 어떤 사람은 여우로 살고 어떤 사람은 부처로 살고 어떤 사람은 조사 스님으로,, 이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늘 똑같은 이 하나에서 여러 개가 나왔습니다. 손오공의 마술처럼 쏙~ 하나로 들어갔다가 쏙 여러 개로, 그리고는 그 하나마저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 하나, 이뿐입니다. 오직 이 하나뿐, 다른 게 없습니다. 이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수행한 사람이 인과에 떨어지는 것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인과에 떨어질까 봐 겁을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분명하면 바로 여우 몸을 벗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벗을 수 있어요. 그게 껍데기일 뿐이라니까요. 이 세상 문제는 자신이 느끼고 만든 문제고 자신이 해결하는, 오직 자신의 일일뿐입니다. 다만 자신이 뭔지 알 수 있다면 모든 것은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이뿐입니다.

 

1. 용수, 불교를 이론적으로 완성

 

불교는 구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실존적인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것, 그래서 죽어서 천국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정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불교는 이론적으로 이미 2,000 여 년 전 완전히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의 탁월한 사상가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 250?)입니다. ‘나가(naga)’가 용(龍)이라는 뜻을, 그리고 ‘아가르주나(agarjuna)’라는 말이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흔히 용수(龍樹)라고 부르기도 하는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나가르주나는 흔히 제2의 싯다르타이자 동시에 대승불교 여덟 종파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가르주나는 튼튼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여 싯다르타가 열었던 불교 사상을 반석에 올려놓은 중요한 이론가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대승불교 전통은 이론적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나가르주나가 만들어 놓은 굳건한 대지 위에 다채롭게 피어난 꽃들이라고 할 수 있 수 있습니다. 동일한 장미 씨앗도 어느 곳에 자라는지에 따라 상이한 모습의 장미로 피어나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대승불교 종파들도 이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차이를 보였던 것입니다. 간단히 후대의 다양한 종파들은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가르주나 이후 발전한 모든 대승불교 전통이 공유하고 있던 그의 핵심 사상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나가르주나의 사상은 ‘공(空, Śūnyatā)’이라는 한 글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의 주저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나가르주나의 말대로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모든 것은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조건[緣]이 만나서 생긴 것이고, 당연히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이 헤어지면 모든 것은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겨울이 되면 유리창에는 성에꽃이 활짝 핍니다. 방 안의 습기, 그리고 당시의 온도가 결정적인 작용을 합니다. 방 내부를 떠돌던 습기가 술에 취한 아저씨의 탁한 호흡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연의 아픔 때문에 흘린 아가씨의 서러운 눈물과 흐느낌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온도라고 해도 성에꽃의 모양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습기라고 해도 온도가 달라지면 성에꽃의 모양은 달라지겠지요.


2. 상견과 단견 함께 버려야 중도

 

지금 유리창 표면에 기묘한 모양으로 활짝 피어 있는 성에꽃은 특정한 습기와 특정한 온도가 만나서 발생한 것입니다. 당연히 성에꽃 자체에는 불변하는 실체란 있을 수 없지요. 특정한 습기나 특정한 온도가 다르게 변한다면, 지금 보고 있는 성에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저 인연이 맞아서, 혹은 인연이 서로 마주쳐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인연이 다해서, 혹은 인연이 서로 헤어져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인가 생겼다고 기뻐하거나 무엇이 허무하게 사라진다고 해도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공’이라는 개념으로 나가르주나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혹은 ‘여여(如如)하게’ 보는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하다고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싯다르타처럼 나가르주나의 가르침도 ‘있는 그대로’, 혹은 ‘여여(如如)’하게 사태를 보는 데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로 표현되는 불교의 강력한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대부분이 사태를 있는 그대가 아니라 무엇인가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색안경으로 사태를 보는 생각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견(常見, śāśvata-ḍṛṣti)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 ucchesadarṣana)입니다. 상견에 따르면 이미 습기, 온도, 유리창 표면의 물성에는 성에꽃이란 결과가 이미 씨앗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단견에 따르면 성에꽃은 습기, 온도, 유리창 표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상견은 아주 강한 절대적인 인과론이고, 단견은 인과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견도 버리고 단견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싯다르타가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를 이야기했고, 나가르주나는 자신의 주저를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싯다르타나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것 아닐까요.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 사이의 사랑이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부부가 아무리 사랑을 나누어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부가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3. 인과에 대한 집착 또한 병폐

‘무문관’의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제자에게 인과를 잘못 이야기해서 여우가 되어버린 어떤 스님의 이야기입니다.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을 때, 당시 그 스님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고 대답했던 겁니다. 그 벌로 스님은 오백 번이나 여우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여우가 되어버린 스님의 잘못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상견과 단견 사이에 위태롭게 펼쳐진 중도라는 길을 걷는 데 실패했던 겁니다. 중도란 인과관계를 절대화하는 것도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중도란 느슨한 인과관계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열심히 수행했다고 해서 모두가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망성 자체도 없어지는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부처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치열한 자기 수행이라는 원인과 좋은 스승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을 겁니다. 동시에 치열한 자기 수행을 그치거나 스승과 같은 좋은 조건들이 사라진다면, 부처도 사실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마치 온도가 올라가거나 습기가 사라지게 된다면, 성에꽃도 허망하게 소멸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백장(百丈, 749~814) 스님의 가르침, 그러니까 어느 불행한 스님이 여우의 몸을 벗어나서 마침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했던 백장 스님의 가르침이 빛을 발합니다. “불매인과(不昧因果)!” 그러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과를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생각 사이에는 이처럼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전자가 싯다르타의 중도나 나가르주나의 공을 부정하고 있다면, 후자는 긍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매인과’와는 달리 ‘불락인과’라는 생각에는 인과에 대한 강한 집착이 깔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황벽(黃檗, ?~850) 스님이 인과에 아직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자, 백장 스님은 뺨을 후려갈기려고 제자를 가까이로 부릅니다.

 

(무문관 제3칙) 구지수지(俱胝竪指)

 

절강성 무주에 있는 금화산에 구지금화(俱指金華)라는 스님이 살았다.

어느 날 실제니(實際尼) 라는 비구니가

삿갓을 쓰고 찾아와서 그의 선상을 한 바퀴 돌고는 말하기를,

실제니: "한마디 하면 삿갓을 벗으리라"

구지스님이 아무 말도 못하니 비구니는 소매를 뿌리치면서 떠나려 하였다.

 

구지: "좀 쉬었다가 가시지요."

실제니: "바로 한마디 한다면 머무르겠소."

구지스님은 또 아무 말도 못했다.

비구니가 떠난 뒤에 스스로 한탄하며 수치심을 느껴 산을 떠나려는데,

그 날밤 홀연히 꿈 속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곧 육신보살이 오셔서

그대를 위해 설법해 주실 것이니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하였다.

 

며칠 뒤 청룡(靑龍)화상이 왔는데,

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넋두리처럼 지난 이야기를 하니 청룡이 말하기를,

청룡: "나에게 물어라, 내가 대답해 주리라."

구지: "바로 한마디 한다면 머무르겠소"

청룡이 아무 말없이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이에 구지가 크게 깨달았다.

그 후로 항상 누가 물으면 한 손가락만을 세우면서

"나는 청룡에게 일지두선[一指頭禪]을 받아서

평생을 쓰고도 다함이 없노라."하였다.

 

 

○수행의 끝자락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절망을,

이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 선종사에 가장 빛나는 화두로 우리 앞에 다가 왔으니,

이들의 만남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줄탁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님이시여, 지금 이 순간

그대의 손짓에서 온 우주가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함을 잊지 말기를

 

구지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오직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였다.

어느 날 선사가 행각을 나가고 없을 때 외지 사람이 동자에게 물었다.

“스승께서 어떤 법을 중요시하여 설하던가?”

 

동자 역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후에 구지선사가 이 말을 듣고 동자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물으니

동자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선사는 그 순간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가 아파 통곡하며 달아나는데 구지선사가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린 순간 구지선사가 말없이

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니 동자가 바로 깨우쳤다.

 

★무문왈: 구지와 동자의 깨달은 바가 손가락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속의 뜻을 헤아리면 천룡과 구지와 동자를 자신과 하나로 꿸 수 있을 것이다.

 

★송: 구지는 천룡노승을 얕보고 예리한 칼로 동자를 시험했으니,

거령신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들어 화산을 천만 겹으로 쪼겠도다.

 

*거령신: 황하의 물길이 동명산에 막히자 산으로 올라가

손으로 산을 밀치니 한 쪽은 손자국이 있는 화산이 되고

다른 쪽은 발자국이 있는 수양산이 되었다는 전설의 물귀신.

 

구지 화상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만 하나의 손가락을 들 뿐이었다.

뒷날 한 동자를 데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찾아온 사람이 "구지 스님은 어떤 법을 말씀하시느냐?" 하고 물었을 때에, 그 동자도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칼을 가지고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동자는 아픔을 못 이겨 울면서 도망갔는데, 구지가 다시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리자, 구지가 도리어 손가락을 세웠다. 이에 동자가 문득 깨달았다.

 

구지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대중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서 일생 동안 누리고도 다 누리지 못했다."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무문의 말]

 구지와 동자가 깨달은 곳은 손가락 위에 있지 않다. 만약 여기에서 알아볼 수 있다면, 천룡과 구지와 동자와 자기가 한 꼬치로 꿰일 것이다.

 

[군소리]

손가락을 세운다고 하여

법이 서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을 세우지 않는다고

법이 서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법이라는 것은 누구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는 항상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 손가락에 열광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 어느 곳에 완전히 있는 것입니다. 눈이 가려우면 눈을 긁습니다. 얼마나 세밀한 지, 이것은 구지의 손가락과 같습니다. 동자의 손가락도 천룡 스님의 손가락도, 그 모양을 따라가면 다르지만 손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 하나의 일, 우리의 본성, 본래면목을 나타내는 한 개의 방편입니다.

 

방편이라는 것은 알고 나면 가면처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동자의 손가락도 방편으로 질문하는 사람의 갈증에 따라 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답'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소가 뒷발질하다가 쥐를 잡듯이, 그렇게 문득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법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하는  생각 속에 꽉 막혀서 모르는 사람에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자의 손가락이든 천룡 스님의 손가락이든 구지의 손가락이든 거기에 무슨 법이 있는 게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 있는 법을 보는 것입니다.

 

늘 가지고 있는 이것, 학교 공부처럼 이해가 되고 외우고 지나온 과거를 되씹어서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원래 나 자신의 무한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동서남북이 없고 아래위가 없고 끝이 없고 깨끗하다 청정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생각으로 표현한 말일 뿐이고 지금 당장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외에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로, 눈앞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같이 있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라고 포장된 어떤 것, 그 판도라 같은 상자에 관심이 있고, 수행해야만 하는 몸에 관심이 있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회규범, 또는 도덕적 관습적인 습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가락을 올려 보십시오. 이 손가락을 올리는데 뭐가 필요하고 어떤 판도라를 기대하며 얼마큼 수행을 해야 하고 어떤 바른 규칙이 있어야 올릴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맞잖아요? 여기에 그런 것들이 뭐가 필요합니까? 노상 매일 다하고 있으면서 생각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못 보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하고 있고 밥 먹고 생각하고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 이것을 아는 것에는 손가락 하나만 올렸다 내려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쉽습니다. 어려운 것은 자신이 어렵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구지 스님이 동자의 손가락에 칼을 댄 것입니다. 법은 손가락에 있지 않아요, 늘 자신에게 이렇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임시 공휴일이라 우리 아이는 아직도 한밤중입니다. 밖은 이렇게 환해도 자고 있으면 모르는 것이지요. 자신이 눈을 뜨면 됩니다. 그러면 그때가 바로 잠 깨는 순간이지요.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지 이것은 잠들지 않습니다. 항상 깨어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에 자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다만 이것입니다. 아니, 자신에게 다 있는데 뭐가 더 가져올 게 있고 필요한 게 있습니까? 이것입니다. 손가락 올리기도 싫으면 발가락 꼼지락, 그런가 싶으면 손가락도 눈도 모두 동시에 다하고 있네요. 이것처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하나의 일, 이 일 뿐입니다.

 

1. 동자의 손가락이 잘리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구지수지(俱胝竪指)’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겁니다. 구지 스님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구지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동자에게 스님의 불법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스님을 모시고 있던 동자는 자신의 스승처럼 손가락 하나를 들었던 겁니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구지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동자를 불러 그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게 됩니다. 왜 잘랐을까요? 아마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동자는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은 사람의 흉내를 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제 분명해집니다. 구지 스님의 눈에는 동자의 행동이 본래면목을 실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구심이 들지 않으신가요. 과연 무문 스님은 ‘무문관’의 세 번째 관문을 만들면서 이 정도의 깨달음만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동자의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아직 우리가 세 번째 관문의 핵심에 이르지도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자르니, 동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동자는 고통과 당혹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님으로부터 몸을 돌려 바로 도망치려고 했던 겁니다. 바로 이 순간 구지 스님이 동자를 부릅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문을 나서려다가 동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자 구지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세웁니다. 바로 이 순간 동자는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부분이 무문 스님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세운 세 번째 관문의 핵심입니다. 동자는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보고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지 스님이 아니라, 동자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마치 자신이 구지 스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리마저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만족하지 말라는 겁니다. 철저하게 동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동자를, 그리고 그 내면의 극적인 변화를 따라가야만 합니다. 처음에 동자는 앵무새와 같았습니다. 스승이나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인 것처럼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 손가락이 잘렸을 때, 동자는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부정되는 경험을 합니다. 절망적인 경험일 겁니다. 그렇지만 뒤이어 바로 구지 스님은 동자를 불러 자신의 손가락을 세워 보입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스님의 손가락을 본 순간, 동자는 깨닫게 됩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그리고 어둠이 밝음으로 극적으로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이제야 동자는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세운 이유를, 그리고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렀던 이유를 알았던 겁니다.


2. 동일한 반복과 차이의 반복

 

진리라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만이 세 번째 관문의 취지였다면, 우리는 구지 스님이 임종할 때 남긴 마지막 말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겁니다. “나는 천룡(天龍)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서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헉! 놀라운 일 아닙니까. 구지 스님도 자신의 스승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반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거의 모든 경우에 말입니다. 심지어는 더 살아계셨다면, 계속 손가락을 들어서 중생들을 깨달음에 이끌 기세이기까지 합니다.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던 이유가 단순히 남을 흉내 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구지 스님은 왜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일까요? 손가락이 잘린 뒤 스승의 손가락을 보고서 홀연히 깨달음에 이른 동자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동자의 흉내 내기와 구지 스님의 흉내 내기를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동자의 손가락은 잘려지고 반면 구지 스님의 손가락은 무사한지가 분명해질 테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주저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에서 그는 반복(répétition)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동일자(l’identique)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차이(différence)의 반복’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모든 사람은 걷습니다. 다리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사람, 그러니까 차이가 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걷을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의 걸음은 동일한 걸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차이가 나는 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신은 신발을 보면, 사람들마다 얼마나 걸음걸이가 천차만별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밑창의 헤진 흔적이 아마 그 증거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걸음 일반, 혹은 걸음이란 동일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걷고 있다는 겁니다. 이를 토대로 우리의 관념은 사람마다 차이나는 걸음의 고유성을 제거하고 걸음이란 동일성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렇지만 누군가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순간, 우리는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될 겁니다. ‘장자(莊子)’라는 책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趙)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마저 까먹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들뢰즈가 구분한 두 가지 반복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해집니다. 다른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면,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걷는 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에 해당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흉내 내지 않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내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3. 장미 다 같다는 생각은 착각

 

‘동일자의 반복’과 ‘차이의 반복’은 다릅니다. 동자가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낸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었다면, 구지 스님이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낸 것은 ‘차이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흉내 낸 것은 흉내 아닌 흉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야 앞에서 이야기한 ‘본래면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였던 겁니다. 비록 장미로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모든 장미들은 다른 것과는 구분되는 자기만의 본래면목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이 본래면목을 실현하기 때문에 장미꽃들은 그렇게 다양한 모양과 향기로 들판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으로 장미라는 동일성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만이 장미들 각각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단지 마음의 조작일 뿐인 것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으니, 이것은 전도된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살펴보세요. 비록 동일한 사람으로 분류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본래면목, 그러니까 차이를 실현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무문관’의 세 번째 관문에는 손가락이 세 개가 등장합니다. 천룡 스님의 손가락, 구지 스님의 손가락, 그리고 동자의 손가락입니다. 겉보기에는 모두 같은, 그러니까 동일한 손가락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천룡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었고, 구지 스님도 자신의 손가락을 들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동자만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구지 스님의 손가락을 들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동자의 손가락은 그의 손가락이 아니라, 구지 스님의 손가락이었던 셈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손가락이니까, 구지 스님은 동자의 손가락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동자의 손가락을 자르면서 구지 스님은 동자에게 속으로 외쳤을 지도 모릅니다. “야 임마! 그건 나의 손가락이야! 내가 가져와야겠다! 네 것이 아니니.”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공포와 당혹감에 젖어 있는 동자를 불러 세운 구지 스님은 손가락을 세웁니다. 아마 동자의 눈에는 구지 스님의 손가락이 거대한 암벽처럼 들어왔을 겁니다. 그리고는 암벽이 갑자기 깨져 사라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아!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드는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내 손가락을 스스로 들지도 못했구나.” 그렇습니다. 마침내 동자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문관 제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혹암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서천의 달마는 왜 수염이 없는고?

"或庵曰 西天胡子 因甚無鬚? ("혹암왈 서천호자 인심무수)"

 

★무문왈: 참선은 모름지기 참된 수행이어야 하고

깨달음은 참된 깨달음이어야 된다.

그대는 달마를 한 번은 직접 친견하여야 한다.

그러나, 친견이라고 하는 순간 이미 둘로 분리되어 버린다.

(오직 그대 자신이 달마임을 알아야…)

 

★바보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달마가 수염이 없다느니…

맑은 물에 술 잔을 기울이는 꼴이다.

 

*혹암사체[或庵師體:1108-1179]-송나라때 임제종 스님. 원오극근의 법손

 

○공안을 접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왠 일일까?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니…

각종 달마도에 나오는 대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수염 투성이다.

그런데, 왜 수염이 없다 했을까?

그러나, 그대는 명심해야 한다.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중생 실유불성)

조주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달마에게도 수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달마의 수염이 보인다면 공연히 수염타령만 하지 말고

오직 그대 자신이 달마와 둘이 아님을 알 때까지

열심히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무문관 제1칙 '구자무불성'과 비교하여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무문관 1.2.3.칙과 4.5.6.칙은 그 뜻과 배열이 비슷합니다.

1칙에서 6칙까지 서로 비교하며 깊이 성찰하셔서

무문선사의 깨달음의 노래를 같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무수를 수염이 많다고 해석하여 설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수염이 많다고 해석하든

수염이 없다고 해석하든 모두가 부질없는 수염임을 알아야 하리라.

 

흑암이 말했다.

"보리달마에게는 어찌하여 수염이 없는가?"

 

[무문의 말]

 참구하려면 진실로 참구해야 하고, 깨달으려면 진실로 깨달아야 한다. 이 보리달마를 마땅히 한 번 직접 만나 보아야 하지만,

직접 만난다고 말하면 벌써 둘로 갈라졌다.

 

[군소리]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니

무슨 잠꼬대를 하는가?

달마에게 수염이 있다는 놈도

한 방 때려 잠을 깨워야 하리.

 

  

 보리달마의 초상화를 보면 수염이 북슬북슬합니다. 달마 스님의 그림을 그려서 파는 사람도 있지요. 달마 스님의 포인트는 수염입니다. 그런데 달마 스님에게 왜 수염이 없다고 할까요? 다시 말하면 분명히 내가 만 원짜리 지폐를 가지고 있는데 그건 돈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돈이 아닌 것도 맞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이해한 바로는 분명히 돈이지만, 가까운 북한이나 중국, 일본만 가더라도 그게 무슨 돈입니까? 환전하면 돈이 된다고요? 그러면 환전소가 없는 저 아프리카에 가면 그 돈은 종이 한 장 일뿐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벗어나도 말이라는 것은, 글이라는 것은 모든 게 완전하지 않습니다. 정말 완전하지 않아요. 그것은 이것, 자신 말고는 모든 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서로서로 이어져 있어서 하나를 내세우면 다른 것들이 밑받침이, 배경이 되기 때문에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1과 2의 차이, 3, 4, 5, 이런 것이지요.

 

그것처럼 달마 스님의 그림도 모르는 곳에 가면 달마 스님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고 소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너무 알아서, 아는 게 병이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건물을 사서 입주한 집에 들르게 됐는데, 어디에 뭐가 좋고, 집에는 이런 게 있어야 되고, 풍수지리, 역학, 거기에다 점집에서 하는 말까지... 아는 게 병입니다. 그런 병이 있으니까 이런 약도 있지요. 병이 없으면 약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럼 달마는 옛날의 턱수염이 북슬북슬한 스님이 아니고, 이것 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숲 속을 헤매는 사람에게 한순간에 사막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찾지 말고 진실로 스스로 혼자 있어 보십시오.

 

원래 혼자입니다. 누가 있을까요? 정말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요?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아는 제28대 보리달마 존자를 찾으면 영원히 찾지 못 합니다. 찾지 않으면 지금 있습니다. 보리달마, 여기 있습니다. 지금 보, 리, 달, 마, 스, 님, 지금 여기 있습니다.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림이 아닌 진짜 달마 스님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여기, 지금 이것이잖아요. 항상 여기에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수많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속에 빠져듭니다. 스스로가 굴레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풀려고 하지요. 아,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항상 풀고 매듭을 짓고 또 풀고 매듭을 짓고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알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지만 만약 그렇게 하더라도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새 일입니다. 그렇게 풀고 매듭을 짓는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매듭을 짓고 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명확해야 합니다. 수염이 있든 없든 그 문제가 아닙니다. 달마,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염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달'할 때 입을 열기도 전에 벌써 자신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못 보니까 둘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늘  이 하나가, 이게, 있을 뿐입니다. 이게 분명하지 못하면 또 생각으로 돌아가서 '뭐 수염이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소용이지, 수염이 있다 해도 이것이고, 수염이 없다 해도 이것이고, 수염이 있거나 없거나 해도 이것이고  다만 이것뿐이다.' 이렇게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왜 그런가? 생각하면 한 방, 아니 여러 방 맞아야 합니다. 달마, 이게 달마 스님을 얘기하지 않고, 달마 스님의 그림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달마, 이게 뭡니까? 지금 달마의 글자, 모양, 말을 따라가지 않으면 달마, 이것이 뭡니까? 오직 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이게, 이것입니다. 너무 쉽잖아요. 달마- 이것입니다. 이것!

1. 달마는 새로운 기풍 도입한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를 아시나요. 쿠바에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혁명가입니다. 냉전 시대에도 체 게바라는 영원한 혁명과 영원한 젊음의 아이콘으로 동구권이나 서구권의 대중들에게 군림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지요. 쿠바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미국에서마저도 체 게바라는 젊은이들에게 제임스 딘(James Dean, 1931~1955)에 버금가는 인기를 구가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단순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거친 이분법을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낡은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는 이미 하나의 전설이자 상징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붉은 별이 새겨진 베레모를 쓰고 있는 그의 사진은 티셔츠, 머그잔, 노트 등등에 새겨져, 아직도 우리 주변에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체 게바라를 언급하는 이유는 불교 전통에서 활발발한 기풍을 도입했던 달마, 즉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528 혹은 536) 때문입니다.


달마는 불교 전통에 새로운 기풍을 도입한 혁명가였습니다. 흔히 달마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혁명적인 선언을 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싯다르타와 그의 경전을 부정하고, 자신의 마음을 직접 자각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 어떻게 혁명적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체 게바라처럼 달마는 이제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전설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불교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달마를 소비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달마가 새겨진 티, 달마가 새겨진 도자기, 달마가 새겨진 핸드폰 고리 등등. 그 중 가장 압권은 달마가 새겨진 그림, 즉 달마도가 신비한 효험이 있는 부적처럼 사용되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수맥의 흐름을 차단하는 믿거나 말거나 한 작용도 있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달마는 싯다르타처럼 대중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겁니다.


대중들은 특정한 인물에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응결시킵니다. 이럴 때 달마와 같은 대중적 아이콘이 탄생하게 됩니다. 당연히 대중이 생각하는 달마와 실제 달마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6세기경에 쓰인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와 20세기 초 돈황에서 발견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입니다. 이 두 자료를 넘기다보면 6세기 때 달마의 모습과 그의 사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달마, 즉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달마와는 확연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낙양가람기‘에 보면 페르시아에서 온 보리달마가 영령사(永寧寺) 구층탑을 보고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넋이 빠져 염불과 합장으로 며칠을 보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당한 달마와는 너무나 다른 낯선 모습의 달마입니다. 또한 달마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는 ’이입사행론‘을 보면 달마가 불교경전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확인하게 됩니다.


2. 역사적 달마와 전설을 구분해야

 

‘이입사행론’은 깨달음에 ‘들어가는[入]’ ‘두 가지[二]’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다른 하나는 ‘행입(行入)’이지요. 이치로 들어가는 지적인 방법과 실천으로 들어가는 실천적인 방법, 이 두 가지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비록 이치로 들어가는 방법, 즉 ‘이입(理入)’에서 벽관(壁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달마는 그 사전 조건으로 경전을 통해 이치[理]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벽을 보듯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지금 달마는 ‘불립문자’와 ‘직지인심’의 가르침과는 사뭇 다른 주장, 오히려 교종(敎宗)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경전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벽관이란 참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달마의 사상은 종밀(宗密, 780~840)이나 지눌(知訥, 1158~1210)이 주장했던 선교일치(禪敎一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지적인 이해와 실천적 수행을 동시에 강조하니까 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요,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 1921~2006)과 같은 저명한 선불교 학자들도 역사적 달마와 전설적 달마를 구분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아이콘이 되어버린 달마에 대해 선사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선사들은 아이콘이 되어버린 달마를 해체하려고 했을 겁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逢佛殺佛, 逢祖殺祖)” 스스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우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운문(雲門, ?~949) 스님도 부처를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라는 폭언을 날리며 우상 파괴에 열을 올렸던 겁니다. 싯다르타마저 주인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똥 막대기 취급을 하는데, 달마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무문관(無門關)’의 네 번째 관문에서 달마가 수염을 깎이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이 네 번째 관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혹암(或庵, 1108~1179) 스님은 우리에게 뚫기 힘든 화두를 던집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


부드럽게 번역했지만, 사실 혹암 스님의 화두에 등장하는 번역어 “서쪽에서 온 달마”의 원문은 ‘서천호자(西天胡子)’입니다. 직역을 하면 ‘서쪽에서 온 오랑캐 새끼’입니다. 혹암 스님은 대놓고 달마에 덧씌워져 있는 아이콘이라는 아우라를 벗기려고 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혹암 스님에게 달마는 선종의 초조(初祖)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저 과거 서역에서 온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암은 “달마가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라고 물으며 폭풍우처럼 우리를 몰아붙입니다. 어떤 달마도를 보던지 간에 그림 속의 달마는 짙고 풍성한 수염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혹암 스님은 지금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심지어 우리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봅니다. 달마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3. 달마 흉내 말고 스스로 부처가 돼야

 

지금 혹암 스님은 맹목적인 집착을 와해시키는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식은 단순합니다. ‘A는 B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A는 B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이면 집착을 붕괴시키는 데 더 강력하게 됩니다. 마치 ‘A는 B가 아니다’는 사실이 자명한 것처럼 ‘A는 무슨 이유로 B가 아닌가?’라고 되묻는 겁니다. 그럼 상대방은 A에 대한 믿음을 유보하고, A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할 겁니다. 정말로 A가 B인지 아니면 B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니까요. “당신의 아들은 무슨 이유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가?” 아들이 당연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부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질문이지만, 부모를 이를 통해 아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할 겁니다. 혹은 “당신의 애인은 무슨 이유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가?” 항상 진실한 사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에게 정말 충격적인 질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으로 두 사람은 더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될 겁니다.


이제 네 번째 관문을 덮고 있던 안개가 조금은 걷힌 것 같네요. 수많은 달마도의 달마들은 100이면 100 모두 위엄이 넘치는 수염을 뽐내고 있습니다. 분명 달마에게는 수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혹암 스님은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무엇 때문에 수염이 없는지 물어보기까지 하니, 우리의 당혹감은 절망감에까지 이를 정도로 커져만 갑니다.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는 혹암 스님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달마도에 등장하는 달마와 실제 존재했던 달마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달마도 이외에 실제 달마를 보았던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실제 달마에게 달마도처럼 수염이 있었는지, 아니면 혹암 스님의 말처럼 수염이 없었는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얼마 있다가 정말 화가 치밀어 혹암 스님에게 되물어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스님도 달마를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고 확신하시나요?”


화가 나서 혹암 스님에게 따지는 순간, 아마 스님은 우리에게 빙그레 미소를 던지실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너는 지금까지 어떻게 달마에게 수염이 있다고 확신했던 거니?” 혹암 스님의 자비로운 미소로 우리는 달마에 대한 해묵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혹암 스님의 충격적인 질문은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달마에 대한 모든 믿음이 실제 달마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마음이 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무문관 제5칙) 향엄상수(香嚴上樹)

 

향엄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나무 위에 올라가 손으로 가지를 잡지 않고

발로도 나무를 밟지 않고서

오직 입으로만 나무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무 밑에 와서 진리를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으면 질문을 외면하는 것이 되고,

대답하면 나무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때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설사 거침없는 말솜씨라도 쓸모가 없고, 대장경을 설할 수 있어도 역시 쓸모가 없다.

이 속의 이치를 터득하면 종전에 죽었던 것을 살릴 수 있고, 종전에 살았던 것은 죽일수 있다.

그것이 아직 안 된다면 기다렸다가 미륵에게 물어 볼 일이다.

 

★향엄은 진짜 황당한 사람, 악독하기 그지없네.

납승의 입을 틀어 막고, 온 몸으로 귀신처럼 지켜 보는구나.

 

○화두가 가지는 특성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언어도단. 불립문자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정히 답변이 궁색하다면 직접 한 번 해보세요.

경험보다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요.

 

☆향엄지한[香嚴智閑:?-898]-위산영우[僞山靈祐]의 제자.

어느 날 위산은 향엄에게 "지금까지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눈과 귀로 남에게서 보고 들었거나 경전에서 읽은 것 뿐이다.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다만 '그대가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나오기 이전,

아무것도 모르고 분별하지도 못하던 때의 자신의 본성에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대해서 한마디 일러 보게나'

내가 그대의 공부를 가름하려 하노라."

이에 향엄은 여러 가지로 대답하였으나 위산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결국 위산에게 가르침을 간청하자

위산은 '나의 말은 그저 나의 견해일 뿐,

그대 스스로의 안목으로 일려야 그대의 안목이 아니겠느냐?' 하고 향엄의 청을 거절하니,

향엄이 온갖 책을 뒤졌어도 답을 구하지 못하자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이번 생에는 불법을 배우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나를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오늘 아침 위산스님에게 한 방망이 맞고나서 그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그저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중이 되리라.'

향엄이 눈물을 흘리며 위산스님을 작별하고 향엄산으로 들어가

옛 혜충국사가 주석하던 절에서 기거했다.

어느 날 도량을 청소 하다가 무심코 던진 돌이

대나무에 부딪치며 나는 소리에 깨달음을 얻고 게송을 지었다.

 

☆향엄격죽[香嚴擊竹]

한 번 던지다가 알던 것 다 잊으니 다시는 더 구할 것이 없구나.

움직이는 모습이 옛 길을 드날리니 더 이상 꺼릴 것이 없구나.

가는 곳 마다 자취가 없으니 빛과 소리 밖의 위의로다.

세상의 도통한 사람들이 최상의 근기라 말하는구나.

 

향엄은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고 위산이 있는 곳을 향하여 예배를 드렸다.

위산으로 돌아와 스승에게 인증받고 다시 게송을 지었다.

 

거년빈 미시빈 (去年貧 未是貧)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빈 시시빈 (今年貧 始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거년 무탁추지지 (去年 無卓錐之地) 작년에는 송곳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 추야무 (今年 錐也無)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더라.

 

*스승 위산에게 인가를 받은 향엄에게 사형인 앙산이

다시 깨달음을 점검하며 이것은 아직 조사의 도리를 깨친 것이 아니라

여래선이라고 평을 받아서 다시 게송을 지었다.

 

아유일기 (我有一機) 나에게 한 기틀이 있으니

순목시이 (瞬目示伊) 눈을 깜짝여 그에게 보였다가

약인불회 (若人不會) 만약에 알아채지 못한다면

별환사미 (別喚沙彌) 따로 사미를 부르리라.

 

이에 앙산이 향엄사제의 깨달음을 인가하였다.

 

 

◎해운정사 진제선사가 묘관음사에서 향곡선사에게 화두를 청하였다.

"화두를 내려주십시오.

화두를 주시면 깨칠 때까지 걸망을 지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받은 화두가 '향엄상수'인데, 이 화두를 2년이 넘게 그 어떤 일도 상관 않고

오로지 화두 참구만 일념으로 정진하여 나이 스물여덟에 화두 관문을 뚫어냈습니다.

그리하여 종전에 막혔던 법문이 열리어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게송을 하나 지어 향곡선사께 바쳤습니다.

저개주장기인회 (這箇拄杖幾人會)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제불총부식 (三世諸佛總不識)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일조주장화김룡 (一條拄杖化金龍)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응화무변임자재 (應化無邊任自在)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게송을 보시고 향곡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향곡: "용이 홀연히 금시조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진제: "몸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

향곡: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향엄 화상이 말했다.

"가령 누군가 나무에 올라가서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는 손으로도 가지를 잡지 않고 발로도 나무를 딛지 않고 있는데, 나무 아래의 어떤 사람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묻는다고 하자. 대답하지 않으면 그가 묻는 것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떻게 응대할 것인가?

 

[무문의 말]

 설사 폭포처럼 거침없는 말솜씨가 있더라도 전혀 소용없고, 팔만대장경을 설명할 수 있어도 역시 소용없다. 만약 여기에 대답할 수 있다면, 이전에 죽어 있던 것을 살리고 이전에 살아 있던 것을 죽일 것이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곧장 다음 세상을 기다려 미륵에게 물어보라.

 

[군소리]

입을 열어서 어긋나면

입을 다물어도 어긋나고

 

입을 열어서 알맞으면

입을 다물어도 알맞다.

 

 

 우리는 대부분 매달린 사람이 말을 할 것인가, 아닌가? 이런 것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이 몸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죽더라도 도를 구할 것인가?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 입장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 것인가 도를 구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 진실을 벗어난 생각 놀음으로 빠져 버립니다. 도를 구하는 사람치고, 이것을 깨친 사람치고 목숨을 버린 사람도 없고, 육체적으로 보면 차라리 깨친 사람은 더 장수할 수 있습니다. 욕망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연히 소멸되고 자연히 생깁니다. 인위적으로 죽으려고 하거나 정신적으로 더 남보다 나은 생활을 해야겠다고 꿈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편한 것입니다. 비교해보면 수영장에서 30바퀴를 목표로 세우고 아주 힘들게 바퀴 수를 헤아리면서 한 바퀴만 더, 하고 도는 사람은 목표를 이루었지만 기진맥진합니다. 그 바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도는 사람은 더 많이 돌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이 들지 않습니다. 똑같이 한 걸음씩을 걷고 있으면서도 발걸음 수를 세어서 목표를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걷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발걸음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남보다 한 걸음 더 걸은 것에 뿌듯해하고 더 나아간 듯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착각을 깨부수는 게 이런 말씀입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겨우 매달려 있는데 밑에서 "조사서래의,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걷는 이 한 걸음, 여기에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그냥 내딛는 것이고 방향이 없습니다. 위로 아래, 양옆을 보면 방향이 있지만 이것에는 방향이 없습니다. 그냥 걸을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걸을 수 있을까? 이게 생각입니다. '어떻게'라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뭔가 불만스럽고 더 나아가야 하고 더 많이 걸어야 되는 강박감, 두려움, 그런 것들이 '어떻게'라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10억 프로젝트를 가지고 열심히 앞만 보고 아껴서 절약하고 정말 눈물 나도록 아끼고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10억을 모았는데, 막상 10억을 모으니까 12억, 15억, 100억, 자꾸 목표가 생기고 더 아끼고 개미처럼 살다 보니, 어느새 투자가 실패로 끝나고 결국 하지 못한 것이 많고 소중한 것을 많이 잃었다는 어느 사업가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비록 돈이 아니더라도 우리도 깨달음을 그렇게 목표를 두고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인위적으로 하는 것은 반드시 시작과 결말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이 하나가 영원하다면 영원합니다. 영원이라는 단어도 만든 말입니다. 시간, 공간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이어진 어떤 상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를 갖다 붙인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이게 영원합니까? 정말 모든 언어는 단지 말일뿐이지, 거기에 그런 말의 의미를 따라가서 그런 것이 맞는다고 동의한다면 역시 거지입니다. 거지는 자기의 것을 보지 못하고 항상 남의 것만 탐냅니다. 잘 익은 홍시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사서래의? 이것입니다. 단지 이것입니다. 조사 스님이 서쪽에서 왜 왔을까? 이것입니다. 조사 스님이, 이것이죠. 항상 말씀드리지만 옛날 달마 스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요. 조사 스님이, 왜, 서쪽에서, 왔을까? 이것입니다. 지금 이것이지요. 말과 모양과 뜻을 빼면 이 하나가 있어서, 조사 스님이, 왜, 서쪽에서, 왔을까, 지금 이것이잖아요. 바로 이것, 그러니까 이것을 모르면 항상 스토리에 빠져버립니다. 스토리에 빠지면 망상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망상으로 가면 아, 저 사람이 말하면 떨어지고, 말하지 않으면 답을 어떻게 해야 되나? 이렇게 관망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큰 것은 큰 것대로 잡히게 그물을 치고 세밀한 것은 세밀한 대로 걸리도록 합니다.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하나를 잡으면 쭉 모든 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의 그물에 안 걸리는 방법은 그 그물을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꼼짝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이 그냥 '조사서래의?'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하면 절대 완전한 답이 없습니다. 생각이 죽어야 합니다. 생각이 죽으면 이런 스토리는 발 붙을 곳이 없습니다. 다만 이 하나가 언제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말을 하든, 언제나 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원래 첨부터 스토리가 나오기 전부터 이게 완전하게 있는 것입니다. 떨어져도 매달려 있어도 말을 해도 말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항상 이 하나가 있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이것이고 모양이면서도 모양이 아니고 생각이면서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언제나 다만 이 하나가 분명하게 있을 뿐입니다. 이 하나가 분명하면 입을 열어 말을 해도 아니면 힘이 없어서 떨어져도 아니면 조사서래의? 하고 물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떨어진다는 것은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떨어질 장소가 있지 않아요. 우리는 떨어질까 봐 겁을 내는데, 사실 떨어질 장소가, 자리가 없어요. 떨어진다는 것, 분리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생각'입니다. 이 한 생각, 이게 어디서 나옵니까? 누가 하고 있습니까? 생각은 모양 따라 의미 따라가는데, 전혀 따라가지 않는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 여기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것 바로 알면 아주 쉽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스토리를 짜는 게 더 힘들어요.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법의 힘, 이것은 힘이 들지 않아요. 힘이 들지 않습니다. 힘이 들 필요가 없습니다. 공부는 억지로 힘을 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힘이 빠지면서, 생각의 힘이 빠지면서 자꾸 편해집니다. 만약이라는, 혹시나, 이런저런 스토리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저 매 순간 일이 생깁니다. 스토리가 되지 않는 일들이, 정말 알 수 없는 일들이 그냥 일어납니다. 어디서? 지금 여기에서? 다른 곳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실재하는 여기에서 다만 이 하나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단지 이것, 이 하나의 일, 이것뿐입니다.

 

1. 제대로 말하려면 침묵해야

 

묵언수행(言修行)을 아시나요. 글자 그대로 침묵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극단적인 수행을 스님들은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말만큼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낳는 행동도 없기 때문이지요. 말은 칼보다 더 날카롭게 상대방의 가슴을 찌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말은 따뜻한 옷이나 쾌적한 집보다 더 푸근하게 상대방을 품어줄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실 말은 칼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칼에 찔리면 그 순간 너무나 커다란 고통이 찾아올 겁니다. 그렇지만 그 칼을 빼고 치유를 하면 흉터는 남겠지만 고통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반면 말은 뺄 수 없는 칼과 같습니다. 그냥 죽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에 꽂혀 있기 때문이지요. 자비의 마음을 품으려는 스님들이 말에 대해 수행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혹여 경솔한 말 한 마디가 자비는커녕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행동을 업(業, Karman)이라고 합니다. 행동은 그에 걸맞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불교의 업보(業報, karma-vipāka) 이론입니다. 타인에게 좋든 그르든 강한 결과를 남기는 업을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바로 삼업(三業, trīṇi karmāṇi)이지요.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身業)이라고 하고, 말로 짓는 업을 구업(口業)이라고 하고, 마지막으로 생각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고 부릅니다. 묵언수행은 바로 말로 나쁜 업이 아니라 좋은 업을 짓기 위한 스님들의 치열한 자기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나 스님들은 생노병사에 집착하고 번뇌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선생님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잘못 말하게 된다면, 스님을 믿고 온 사람들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만날 수도 있지요. 그러니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고 제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 잊지 마세요. 묵언수행은 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직접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묵언수행에는 한 가지 부수 효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타인을 만날 때, 말을 못하니 상대방의 말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시끄럽게 떠들거나 혹은 떠들려는 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과연 타인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이쪽의 침묵은 어쩌면 저쪽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침묵은 놀라운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침묵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잘 듣게 된다는 것이지요. 잔소리가 심한 스님이나 혹은 난해한 경전 조목을 지치지 않고 강론하는 스님보다 암자 뒤편에 홀로 외롭게 있는 석불이 더 낫지 않을까요. 자비로운 미소로 석불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으니까요. 어떤 비난도 어떤 훈계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석불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고뇌를 시원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겁니다.


2. 형이상학적 질문, 삶에 집중 방해

 

삶의 맥락을 떠난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해 침묵해야만 하고, 상대방이 들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때는 침묵해야만 합니다. 형이상학적 쟁점에 대한 침묵을 불교에서는 무기(無記, avyākrta)라고 말합니다.

 

세계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혹은 영혼과 신체는 다른가, 같은가?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해 싯다르타는 침묵했던 적이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삶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싯다르타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면, 제자들은 그런 문제를 숙고하고 토론하느라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했을 겁니다. 죽은 뒤에 영혼이 있냐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대답하는 순간, 상대방은 더 큰 문제를 고민할 겁니다. 영혼이 없다고 하면 그는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고, 영혼이 있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경시할 테니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소연할 곳이 없어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침묵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할머니가 자기 남편이 동네 다방 마담과 바람을 핀다고 스님에게 하소연하러 왔습니다. 할머니는 갑갑한 자기의 마음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스님을 찾아온 것이지, 스님에게 답을 구하려고 한 것은 아닐 겁니다. 그냥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가 측은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나 자식들 보기가 민망하기도 한데, 말할 곳이 없어 답답하여 찾아온 겁니다. 할아버지의 바람기를 응징하려고 했다면, 경찰서로 가지 왜 산사에 올라왔겠습니까. 당연히 이 경우 스님은 쓸데없이 불교 교리를 읊조려서는 안 됩니다. 그저 미소와 함께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면 됩니다. 어쩌면 산사로 가는 가파른 길을 오르며, 할머니의 마음은 이미 많이 누그러졌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사태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순간, 상대방은 더욱 더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고 애써 평정을 되찾은 마음은 요동치게 될 겁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도 침묵해야만 합니다. 침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침묵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무문관’의 다섯 번째 관문에는 높은 나무가 하나 서 있고, 거기에 젊은 스님 하나가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매달려 있습니다. 손이나 발로 나무줄기를 잡고 있지도 않으니, 마치 물고기가 낚싯대에 걸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기이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매달려 있는 나무 밑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물어봅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가 질문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고, 만일 대답한다면 나무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3. 희론에서 벗어나 진리를 바로보라

 

향엄(香嚴, ?~898) 스님은 장난꾸러기입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스님을 곤궁에 빠뜨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잠깐 향엄 스님이 던진 화두를 풀기 전에 가능한 오해 한 가지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스님이 지금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를 품고 있는 한, 우리는 ‘무문관’의 다섯 번째 관문을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사정은 그 반대입니다.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있다는 것은 그 스님이 입에만 의지하여 스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 스님은 손도 쓰지 않고 발도 쓰지 않습니다. 이제 분명해지시나요. 한 마디로 말해 스님은 구업의 화신인 셈이지요. 계속 입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그 스님이 침묵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는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남의 이야기나 남의 이론을 듣는다는 것은 그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입을 쓰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것만 같은 나무에 입으로 매달려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러니까 입에 의존하지 않는 순간, 그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보다 존경스러운 사람이 그 스님에게 대답을 요구합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반드시 대답해야만 합니다. 자, 여러분이 이 스님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선 손과 발로 나무줄기를 튼튼히 잡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조심조심 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될 겁니다. “아까 뭐라고 하셨지요.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에 대해 물으셨나요.” 이렇게 땅에 발을 디디면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자기의 입에만 의존하지 않게 될 겁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 아닌가요. 이제 자신의 입에만 의존하지 않기에 기꺼이 침묵할 수도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니까요.


‘조당집(祖堂集)’이나 ‘전등록(傳燈錄)’ 등을 보면 향엄 스님의 화두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막이 등장합니다. 향엄 스님에게 어느 상좌 스님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무 위에 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나무에 오르기 이전은 어떻습니까?” 상좌 스님의 질문에 향엄 스님은 통쾌하게 웃었다고 합니다. 상좌 스님이 화두를 꿰뚫어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땅에서는 침묵할 수도 있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입만으로 나무에만 매달리면 계속 입에 힘을 써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계속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스님이 매달려 있던 나무는 말의 나무였던 겁니다.

 

 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

 

★선문염송 제5칙, 무문관 제6칙 염화미소(拈花微笑).

세존께서 영산에서 설법하시는데 하늘에서 꽂비가 내리거늘

그 꽂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이 빙그레 웃었다.

그 때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 정법안장이 있어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을

문자로 세울 수 없어 교외에 별도로 마하가섭에게 전한다."

(오유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 부촉 마하가섭)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摩하迦葉)

 

★무문선사: 황면구담(누런얼굴의 고타마)이 마치 아무 사람도 없는 것처럼

양민을 갖다 억지로 노예로 삼고, 양의 대가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팔고 있다.

그 참 기특하긴 하지만 다만 그때 대중이 모두 미소 짓고 웃었더라면,

정법안장을 어떻게 전했을까?

또, 가섭조차 웃지 않았더라면 정법안장을 어떻게 전했을까?

또, 정법안장을 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황면노자가 속세의 보통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

반대로 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가섭에게는 그것을 허용 한단 말인가?

 

★꽃을 손에 들었을 때, 불법의 정체가 드러났다.

가섭만이 웃었으나, 인천은 어쩔 줄 몰랐다.

○정법안장(바른법의 비밀스런뜻)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하였는데,

한 사람은 꽂을 들고 한 사람은 빙그레 웃고, 이 또한 흔한 일이니 그렇다 치자.

아마 그대가 꽃을 들고 누군가를 주시 한다면 그는 분명 미소 지을 것이다.

이런 일상의 일로 그냥 넘어 갔으면 아무 일 없으련만,

하필 한 사람에게만 무엇을 전했다 하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백주대낮에 백억권속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무슨 가당찮은 말인가.

이게 이 공안을 대하는 그대들과 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선이 무었인가?

한 생각이 온 우주를 뒤덮고, 한 티끌안에 우주가 움크리고, 광활한 우주를

한 톨의 좁쌀에 비기는 그래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함유한 세계가 아닌가?

불교의 한 단면도가 선이요, 그것도 불교의 정수를 보여주는 정면도가 아닌가?

세존께서 가섭에게 무어라 하셧는가?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

(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그냥 넘어가도 좋으련만 세존의 이 말씀에 꼬투리를 잡아야겠다.

그러기에 불립문자라 하지 않았는가?

그냥 꽂을 들고 빙그레 웃고, 웃는 얼굴에 화는 못내니 정법 한덩이(떡인가?)를

가섭에게 말없이 전했으면, 그래서 쌍방이 서로 인지하는 이심전심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영산화상의 백만대중들 앞에서 대형 플렌카드를 붙이고

확성기로 광고를 하였으니 시비가 걸릴 수 밖에…

한 생각을 일으키면 그 죄가 수미산을 덮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법안장- 바른법을 눈에 감추었으니 정법의 비밀한 뜻이다.

정법에 무슨 비밀한 뜻이 있다는 말인가?

음 귀절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이 바로 비밀한 뜻이다.

 

그 첫째가 열반묘심- 열반의 묘한 마음이라.

먼저 열반이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열반은 범어 니르바나의 음역이다.

니르바나는 니르(없을 無)와 바나(소리 聲)의 합성어다.

소리 없는 묘한 마음이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언어로 연결된 문장이다.

두번째가 실상무상-실상이 무상인 도리라.

실상은 무엇이며 무상은 또 무엇인가?

세번째가 미묘법문-미묘한 법의 문이라.

전혀 이해되지 않는 언어로 연결된 이 문장이 바로 정법의 비밀한 뜻이다.

비밀을 언어로 표현하였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불립문자라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였으니 더욱 어려운 이야기다.

하여튼 세존은 전했고 가섭은 받았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의 표현을 빌려야겠다.

사실 선종은 달마를 초조로 하고 달마 이후 반야공관을 근간으로 하는

대승선으로 발달 하였으며, 중국의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을 수용하였고,

그 중에서도 도가의 자연주의와 유가의 현실적 구체성을

수행체계 안에 받아 들임으로 더욱 발달하여 꽃 피웠다.

 

염화미소라는 공안도 불교의 경전에 없는 이야기로 중국에서 만들어진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라는 위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천안목'이라는 선어록에 처음 실리기 시작하였으니

그 해석도 중국적 도가식 해석이 더욱 타당하리라 본다.

외국의 전도사(기독교)들이 중국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덕경을 연구하다가

자신들의 신 여호와와 비슷한게 나와 있으니 잠시 기절초풍하여 소란을 일으켰다는 부분이다.

 

도덕경14장을 보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요,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 희요,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이 미라.

여기의 이. 희. 미(夷. 稀. 微)의 발음이 여호와와 비슷한가 보다.

그들의 신 여호와는 바람의 신이라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기절할 수 밖에…

다시 '염화미소'로 돌아가자.

세존께서 말씀하신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을

도덕경의 (이.희.미)와 비교해보자.

 

보아도 보이지 않는것이 (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바로 실상무상의 도리이리라.

들어도 들리지 않는것이 (희)라면,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바로 열반의 묘한 마음이리라.

잡아도 잡히지 않는것이 (미)라면,

잡히지 않는 것을잡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바로 미묘한 법의 문이리라.

 

자, 그대는 눈을 감고 생각해보라.

세존께서 꽃을 들고 대중들 앞에 서니

모두가 어리둥절 하는데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

이 얼마나 절대 절명의 순간인가?

온 우주가 전율하는, 처절하리 만큼 깨어 있는

각성의 소리를 가섭은 들었으리라.

이대로 진리임을, 삼라만상이 진리의 표상임을 일깨워주는

세존의 눈물겨운 몸짓을 가섭이 어찌 놓일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가섭만이 볼 수 있었으며 들을 수 있었으며

이심전심으로 움켜 안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면 픽션으로 꾸며진 이야기 일지라도,

아니 어떤 상황일지라도 개의치 마라.

그대는 진정한 세존이요,

그대 손에 든 꽂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세존께서 옛날 영취산 위의 법회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다. 그때 대중은 모두 말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존자만 소리 없이 활짝 웃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의 미묘법문을 방편의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의 말씀 밖에서 따로 전하여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무문의 말]

석가는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듯이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양가의 자녀를 노비로 만들고, 양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구나!, 제법 기특하다고 여기겠지만, 그런데 당시에 대중이 모두 웃었다면 정법안장을 어떻게 전했을까? 만일 가섭이 웃지 않았더라면, 정법안장을 또 어떻게 전했을까? 만약 정법안장에 전해 줄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석가가 세상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만약 전해 줄 것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가섭에게만 허락했는가?

 

[군소리]

세존께서 꽃을 들어서

남김없이 보여 주셨지만

가섭이 보았다고 했다면

법을 부촉받지 못했으리.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님이 역주한 이 책 '무문관'은 매 같은 공안이 어떻게 실려 있는지도 알 수 있게, 공안의 변천사를 알 수 있도록 참고해둔 게 재미있습니다. 참고로 조당집(952), 경덕전등록(1004), 천성광등록(1036), 건중정국속등록1101), 연등회요(1183), 태보등록(1204)에 똑같은 공안이 어떻게 나와 있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역시 공안은 공안입니다. 이것을 알면 한 개의 공안조차도 역시 들어갈 문이 없는 것입니다. 들어가고 나가는 것은 흔적입니다. 원래 자신은 흔적이 없습니다. 들어가고 나가고 다만 이뿐이지요.

 

우리 속담에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나쁘다'라는 말이 있는데, 오늘 읽다 보니 무문 스님이 더 밉상입니다. 어쩜 이렇게 가려운 곳을 긁어서 부스럼을 일으키실까요? 가만히 앉아 있는 남의 가려운 곳을 살살 잘 긁어서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일을 해야 밥을 잘 먹을 수 있고, 의심을 해야 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의 미묘법문을 방편의 문자를 세우지 않고 따로 전하여 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가섭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었지만 가섭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게 아닙니다. 이 실상은 누구에게나 다 있으니까 자기 것을 보면 언제나 자신이 부처고 자신이 중생이고 자신이 법이고 자신이 정법안장이고, 따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는 순간, 부처님과 꽃과 가섭은 하나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부처님은 저기 있고 꽃이라는 게 있고 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섭이라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냥 이 하나가, 이게 동시에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부처가 아니라 이것이고, 꽃도 꽃이면서 꽃이 아니고 가섭도 결국 이름뿐인 것이었습니다. 진짜 가섭은 어디 있습니까? 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가섭은 존재합니다.  이건 느낌으로 말씀드리면, 이런 말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몸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삼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지켜보는 자'라고 한다면 맞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행동과 생각 뒤에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생각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지만 항상 이게 있거든요. 단지 이것뿐입니다. 이것, 이것을 꽃을 들어 가섭에게 보였고 가섭은 자신의 꽃을 본 것입니다.

 

항상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 하나 언제나 같은 자리,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구나 이 자리에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어요. 이 눈앞을, 이 발밑을 벗어날 수 없듯이 항상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명백하게 있습니다. 이것을 깨친 사람은 보고 못 깨친 사람은 보지 못할 뿐이지, 단지 그 차이뿐인데, 그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안되는 그게, 옛날 개그맨 이휘재의 선택처럼(이쪽, 저쪽을 나눠서 한쪽을 택하는,, 이름이 뭔지 기억이 아리쏭쏭..) 확 서로 다른 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세요. 서로 다른 쪽으로 떨어지지만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잖아요. 항상 같은 사람입니다. 이쪽으로 가든 저쪽으로 가든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빼고 어떤 일이 일어날 수는 없어요.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늘 있는 이게 자신의 존재입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늘 이게 있습니다. 이게 있으니까 그대나 나나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몸의 이름이 아니라 이것이고 나는 '나'라는 이름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단지 이것뿐입니다. 이것!

1.싯다르타가 들어 올린 한송이 꽃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BC563?~483?)는 우리에게는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이름으로 더 친근합니다. 사실 석가모니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석가(Śakya)라는 부족의 성자(muni)를 뜻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싯다르타는 성스러운 사람을 의미하는 석가모니라는 명칭을 탐탁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제자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멘토로 숭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자신처럼 제자들도 그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타당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자신을 부처로 숭배하기보다는 제자들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계속 존경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학생으로 남게 되고, 부모님의 말에 계속 복종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자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맹신하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그의 가르침은 “나의 깨달음을 부정하라!”라는 역설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제자들도 자신처럼 성불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모든 맹신은 맹신의 대상이 좋든 그렇지 않든 일종의 집착일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권위에 대한 부정은 모든 종류의 집착을 끊고 자유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자신만큼 자유로워져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다리며, 싯다르타는 제자들을 가르쳤던 겁니다. 전설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주로 인도 중부 영취산(靈鷲山, Gṛdhrakutaparvata)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했다고 합니다.


‘무문관’의 여섯 번째 관문은 우리를 바로 2,500여 년 전 영취산의 설법 현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지금 영취산에서 싯다르타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제자들은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방금 스승 싯다르타가 했던 말을 메모하던가 아니면 그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로서는 너무나 못마땅한 광경이었을 겁니다. 집착을 끊어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할 제자들이 반대로 말과 글, 혹은 그 의미에 집착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펼쳐졌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싯다르타는 갑자기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려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스승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제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을 겁니다. 무엇인가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으니까요.


2. 꽃 보며 빙그레 웃은 가섭의 미소

 

당연히 제자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스승님은 왜 꽃을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 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손에 들고 있는 꽃 한 송이는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화두(話頭)로 기능했던 겁니다. 제자들 중에는 기억력과 이해력이 탁월해 동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아난(阿難, Ānanda)도 있었습니다. 25년간 싯다르타를 따랐던 탓일까요. 아난은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부릴 정도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많이 들었고 그만큼 많은 것을 암기하고 있던 제자입니다. 여기서 다문제일이란 가장 많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뒤에 싯다르타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난이 스승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정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스승이 들고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앞에서 아난마저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하려고 하는 순간, 싯다르타의 눈에는 제자 한 명이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아난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제자 가섭(迦葉, Kāśyapa)이었습니다. 평소 지적인 이해에 몰두했던 아난과 달리 가섭은 철저히 자신에 직면하는 수행으로 일찌감치 싯다르타의 눈에 들었던 제자였습니다. 아난을 ‘다문제일’로 부르는 것처럼 가섭을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서 두타(頭陀, dhūta)란 집착과 번뇌를 제거하려는 일상생활에서의 치열한 수행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쨌든 가섭의 미소를 보고서 싯다르타는 비로소 안심하게 됩니다. 어차피 유한한 생명일 수밖에 없기에 싯다르타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자신이 애써 불을 지핀 깨달음의 등불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안심입니다. 가섭이라면 자신이 떠난 뒤 뒷일을 충분히 감당할 테니까 말입니다.


‘무문관’의 여섯 번째 관문에는 싯다르타가 들고 있던 아름다운 꽃 이외에도 가섭의 환한 미소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싯다르타가 왜 꽃을 들었는지도 아직 아리송하기만 한데, 이제 가섭의 미소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미소가 깨달았다는 징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도대체 싯다르타는 가섭의 미소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어지는 싯다르타의 말을 통해 우리는 여섯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하나 얻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는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과 “실상(實相)에는 상(相)이 없다”는 미묘한 가르침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미묘한 마음이나 미묘한 가르침이나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이란 실상에는 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음일 테니까 말입니다.


3. 사람 수만큼 많은 세계 존재한다

 

“실상에는 상이 없다(實相無相)”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민한 프랑스 소설가만큼 우리의 삶과 마음을 민감하게 포착했던 작가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프루스트는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참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마다 다르다. (…) 사실은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 및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 사람들의 수만큼 세계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세계가 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쉽게 믿고 사람들에게 프루스트의 이야기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일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런 믿음은 타당한 것일까요. 혹시 집착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기 안경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안경을 쓰고 보는 세계와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보는 세계는 매우 다를 겁니다. 전자가 뚜렷하고 명료한 세계라면, 후자는 불명료하고 탁한 세계일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진짜 세계일까요. 불교 용어로 표현하자면 안경의 세계와 맨눈의 세계 중 어느 것이 실상(實相)일까요. 사람들은 쉽게 안경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고 믿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에게 맨눈의 세계는 가짜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바로 우리를 고통으로 내모는 집착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요. 안경의 세계가 진짜 세계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안경이 없으면 전전긍긍하게 되고 그만큼 안경과 안경의 세계에 집착하게 될 테니까요. 이제 “실상에는 상이 없다”는 가르침이 납득이 되시나요.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실상, 그러니까 유일한 진짜 세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까마귀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물고기에도 그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또한 눈이 좋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눈이 나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고 깨달은 사람에게도 그만의 세계가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진짜 세계, 혹은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지요. 자신이 보는 세계는 가짜이고 스승이 보는 세계가 진짜라고 믿는다면,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긍정하며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니까요. 이제야 싯다르타의 꽃과 가섭의 미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무문관 제7칙) 조주세발(趙州洗鉢)

 

★ 조주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 "제가 처음 총림에 왔으니 잘 지도해 주십시요."

조주: "죽을 아직 안 먹었느냐?"

스님: "죽은 먹었습니다."

조주: "그럼 바루나 씻어라."

스님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 무문왈: 조주 선사가 입을 열어 쓸개를 보이시고

마음속의 간(肝)까지 드러내 보이셨다.

그 스님은 선사의 참뜻을 모르고 종(鍾)을 독(甕)이라 하는구나.

 

★ 무문송

너무나 분명하여

도리어 깨닫기 어렵네.

등불이 곧 불임을 일찍 알았다면

밥은 이미 다 되었을 것을...

 

○ 밥을 하려고 불을 찾아 헤매는 그대에게 등불이

불임을 알았다면 밥은 벌써 되고도 남았다고 질타한다.

이는 진리란 밥 먹고 그릇 닦고 공양하는 일상사에

있는 것이지 달리 특이한 것이 아님을 설한다.

잘 지도해 주십시요.'하는 스님에게

'평상심이 도'라고 일깨우는 선지(禪旨)이다.

 

조주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저는 총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가리켜 주시기 바랍니다."

조주가 말했다.

"죽은 비웠느냐?"

승려가 말했다.

"먹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발우를 씻어라."

그 승려는 깨달았다.

 

  

[무문의 말]

조주는 입을 열어 말을 함에, 쓸개를 내보이고 심장과 간까지 드러냈다. 이 승려가 조주의 말씀을 듣고서 행함이 참되지 못하면, 종을 일러 항아리라고  할 것이다.

  

[군소리]

밥을 먹고 발우를 씨으니

부처가 남김없이 드러났지만,

밥과 발우에서 부처를 찾으면

일평생 찾아도 찾지 못하리.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절에서 공양을 하고 발우를 씻지 않은 스님은 없습니다. 얼마 전 모 예능 프로에서 이 경규 씨가 템플스테이하면서 손으로 단무지로 발우를 깨끗하게 씻어서는 그 물을 마시라는 말에, 눈을 질끈 감고 토하듯이 먹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물은 똑같습니다. 아마 흙탕물이라도 우리는 갈증이 심하면 마실 수 있습니다. 물에는 아무런 의미가, 생각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는 물에는, 사실 각자의 물이 다 다르지요. 생각이 담긴 물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담긴 물이기 때문에, 다른 물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 같은 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그 현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이는, 이게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자신이 받아들이는, 그런 현상이 있는 것이지. 실재는 일어나는 현상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에서도 '남'의 말이나 행동에 속이 상한 것도, 자세히 보면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지, 그런 말이나 행동에는 아무런 그런 게 없다는 말입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자기 해탈이라고 합니다. 남이 아무리 백 번 해탈했다고 해도 자신이 해탈, 자신이 이 생각 속에서 한번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생각 속에서 이해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해를 해도 '자신'이 백 퍼센트 '남'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생각으로 이해를 하면 화석처럼 굳어버립니다. 그래서 습관이 되는 것이지요. 습관이 되면 또 그렇게 별문제 없이 삽니다. 아까 이 경규 씨가 그 물을 겨우 마셨지만, 같이 일이 반복이 되면 나중에는 그냥 마십니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생각은 얼마나 변하기 쉽고 절대적이지 못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만 보더라도 생각은 수시로 변하지요.  10대, 20대, 30대, 40대,... 예전에 일어났던 어떤 큰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되고 별일도 아니게 되는 수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신의 한 생각을 믿지 마십시오. 이 생각이 자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을 못하면, 자신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그게 생각이라니까요. 처음 들어온 승려가 "잘 가르쳐 주십이오!",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한 마디 하시지요." 이게 백 퍼센트 다 자신을 드러내놓고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음 말이 어디 있습니까? 다음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 지금 '다, 음'이라고 하잖아요. 모든 게 이게 분명하면 항상 여기를 벗어나지 않아요. 자신이 눈을 감고 헤매지 않으면 자신을 벗어나는 일도 없고 항상 이게 있는 것입니다. '다음'라는 것은 생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주 스님은 바로 "발우를 씻어라!",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구하든 간에 먼저 이게 있습니다. 승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것을 본 것입니다. "죽 먹었느냐?"라고 해도 모르니까, "발우를 씻어라!" 그 승려가 '가만 아까 내가 발우를 안 씻었나?' 이러면, 대장 스님의 말씀을 따라 발우를 씻으러 총알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실 승려처럼 생각을 하고 총알 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승려는 바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주저앉았습니다. 쉴 곳을 찾은 것이지요.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고 밥그릇을 내밀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나 있던 언제나 늘 있었던 너무나 쉽고 너무나 단순한 이 자리, 이것을 깨친 것입니다. 찾은 것도 아닙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누구나 다 이 자리에 있습니다. 생각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생각 하나하나에 이게 있습니다.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인위적인 것입니다. 인위적인 것을 포기할 때 원래 있었던 자연적인 힘을 알 수 있습니다. 올여름은 정말 더웠지만 에어컨 끄고 선풍기도 끄면 더위는 없는 것입니다. 더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더위가 무엇입니까? 뜨거운 햇살에 마루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댁에는 고추가 마당에서 반짝반짝 말라 가고 있더군요. 가을이 온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고추로 하늘로 햇빛으로 논으로 얼굴로 마당으로 모두가 다만 이 하나, 이 한 개, 이것입니다.

 

‘무문관’의 일곱 번째 관문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려고 조주(趙州, 778~897)를 찾아온 어느 스님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문관’을 보면 그 스님은 조주에게 묻습니다. “저는 최근 이 사찰에 들어왔습니다. 스승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조주의 가르침과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조주록(趙州錄)’을 보면 조주에게 던지 스님의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무문관’의 일곱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데 더 분명한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 스님은 조주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봅니다.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기입니까(如何是學人自己)?” 여기서 배우는 사람, 즉 학인(學人)은 무명 스님 자신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스스로 주인에 이른 스승처럼 스스로 주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기에, 스님은 학인이라고 스스로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무명 스님의 질문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단지 한 걸음만 부족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스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自己), 그러니까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다면, 그래서 그 맨얼굴에 잃지 말고 당당하게 삶을 영위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부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에는 무명 스님의 치열한 노력이 선연하게 들어옵니다.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스님은 자신의 가면을 하나하나 벗겨갔던 겁니다. 한 장의 껍질을 벗기는 순간, 스님은 기대했을 겁니다. 이제 자신의 맨얼굴,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얼굴에 이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양파껍질 한 장을 벗기자 새로운 양파껍질을 만나는 것처럼, 가면을 벗자마자 맨얼굴이 아니라 또다른 가면에 직면했던 겁니다.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년 출생)의 ‘그 해 가을’이란 시 말미에 나오는 구절과도 같은 절망감이었을 겁니다.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무명 스님이 경험했던 자기의 맨얼굴을 찾으려는 집요한 노력과 반복되는 절망감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여러분은 자신을 이 스님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 속에 던져 넣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의 자기입니까?”라는 질문의 절실함이 우리 가슴에 들어올 테니까 말입니다. 조주의 대답이 무명 스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원의 밧줄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절실함에서만 가능할 겁니다. 자신의 맨얼굴을 찾으려고 내면을 파고드는 치열한 노력을 비웃듯이, 혹은 우리의 절실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주는 말합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무명 스님을 조주는 한 마디의 말로 바깥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스님은 맨얼굴을 찾으려는 오래된 집착에서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3.불법에 집착하는 것도 집착이다

 

조주는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무명 스님이 본래면목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미 혜능(慧能, 638~713)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모든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면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지마라. 이것은 곧 불법에 속박된 것이다.” 혜능의 에피소드와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혜능도 자유를 찾으려는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을 양파 껍질처럼 벗겨서 제거하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집착이라고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은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불법에 집착하는 것 자체도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약에 집착하면 약물중독에 빠질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냐 외면이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외부 사물이나 사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혜능뿐만 아니라 조주가 품고 있었던 속내였던 겁니다.

 

“아침 죽은 먹었는가?”라는 조주의 질문으로 무의식적이나마 무명 스님은 맨얼굴에 집착하지 않게 된 겁니다. 당연하지요. “아침 죽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어떻게 그가 자신의 맨얼굴에 집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의 뇌리에는 조주의 질문과 아침에 먹었던 죽만이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직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집착은 그대로이고 단지 집착의 대상만이 바뀐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무명 스님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마조(馬祖, 709~788)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 그는 조주가 말한 아침 죽에서 마조의 가르침을 연결했을 겁니다. 영민한 조주가 이것을 놓칠 리가 없지요. 다시 마조의 가르침에 집착하다고 느꼈을 때, 조주는 무명 스님의 새로운 집착마저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럼 발우나 씻게.” 이미 먹었기에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아침 죽이나 혹은 이미 죽은 마조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마음마저 날려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내면에 몰입하는 것도 막고, 외면에 빠져드는 것도 막으려는 것입니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집착하지 않아야 우리 마음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활발발(活潑潑)’하게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훌륭한 연주자는 관중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연주를 망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당당하게 직면할 뿐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의 스승이 젊은 제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것 아닐까요. 그녀를 스승이나 관중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아니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본래면목이란 가르침에 집착해서 내면에 침잠하는 것이나, 아니면 평상심이란 가르침에 집착하여 외부로 치닫는 것은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장애만 될 뿐입니다.

 

 

무문관8칙

★월암화상이 스님에게 물었다.

"해중이 수레 일백폭을 만들었는데,

두 바퀴와 축을 모두 빼 버리니 무엇을 밝히려 하는 것일까?"

(月庵和尙問僧 奚仲造車一百輻 拈却兩頭 去却軸 明甚邊事

 월암화상문승 해중조차일백폭 념각양두 거각축 명심마변사)

 

★무문왈(無門曰): "만약 바로 밝혀 얻으면

눈은 유성처럼 빠르고, 마음은 번개와 같으리라."

 

★송: 바퀴가 구르는 곳 달인이 오히려 헤맨다.

사유 상하 동서남북(처처에 자유자재하다.)

 

* 월암선과[月庵善果]: 무문스님의 사조[師祖]

 

○월암화상이 괜한 시비를 하였나?

아니겠지, 무문도 본바가 있어 저렇게 설명 했겠지.

수레 일백폭에 바퀴와 축을 빼 버리다니, 그럴리가 있겠는가?

해중이 만든 수레는 잘도 굴려가고 있으니 걱정 할 일은 아니고,

다만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대 스스로 가고자 한다면 수레는 절로 굴려갈 것이다.

 

○해중(奚仲)은 중국의 상고시대인 하(夏)나라 사람으로

소나 말이 끄는 수레를 처음 고안한 발명가이다.

수레만들기 1인자인 셈이다.

그런데, 해중은 괴각을 부리듯 바퀴살이 백개나 되는 훌륭한 수레를 만들면서

양쪽의 바퀴를 꿰고 있는 굴대를 빼버렸다.

수레의 가장 중심축인 굴대를 뽑아버렸으니 어쩌자는 것인가?

즉, 양쪽 바퀴를 꿰고 있는 굴대를 제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를 묻고 있다.

 

무문혜개스님은 굴대를 제거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곳에서는

뛰어난 사람도 어리둥절하게 된다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동서남북과 사유상하를 자유로이 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굴대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꿰고 있는 업보의 축(軸), 인과의 축이라고 볼 수 있다.

중생이 중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적으로는 고정관념이나 틀, 집착의 굴대이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고 오히려 괴로움의 원인이 될

그런 쓰잘 데 없는 것에 범부중생들은 목숨을 건다.

굴대를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지만

오히려 빼버리고 나면 온 천하는 자기 것이 된다.

살활자재(殺活自在)하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은 상식과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무심(無心)의 지혜작용은 굴대 빠진 수레바퀴가 자유롭게 시방세계를 구르듯

우리들을 자유자재하게 살도록 한다.

그러한 면에서 ‘제8칙의 해중조차’는 차사문의(借事問義)의 논법이 특출한 공안이다.

 

자아의식을 완전히 날려 보내고 그저 텅 비워 버리려면

사상(四相)을 수행의 금강방망이로 여지없이 깨부수어야 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차별과 분별이라는 번뇌, 망심(妄心)일 뿐이다.

망념(妄念)의 자기자신이 없어지고 나면 본래의 참된 모습인 진실의 자기가 드러난다.

전도된 생각을 초월하고 깨달음에라도 집착하지 않아야

자기 스스로가 굴대 빠진 수레가 되어 시방세계를 무애자재하게 활보할 수 있다.

정반성(定盤星)을 인정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정반성이란 천칭저울의 중앙막대기 기점에 있는 별표시(星印)를 말하는데

이것은 물건의 무게경중(輕重)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저울대의 중앙을 표시하는 것 일뿐인데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여기에 신경 쓴다.

참선에서 이 비유를 쓰는 것은 언어,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생각의 담을 허물고 인식의 카테고리를 벗길 일이다.

무심(無心)의 작용(作用), 공(空)의 실천적인 중도(中道)의 묘용(妙用)을 살려낼 때

마음의 수레는 사방천지 종횡무진할 수 있다.

대자유의 삶에는 굴대가 필요치 않다.

 

월암 화상이 어느 승려에게 물었다.

"혜중이 백 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레를 만들고서,

양쪽 바퀴도 뽑아 버리고 굴대도 떼어 버렸다. 어떤 쪽의 일을 밝힌 것인가?"

 

[무문의 말]

만약 즉시 밝힌다면 안목이 유성처럼 빠르고, 행동이 번갯불 번쩍이는 순간과 같으리라.

 

 

[군소리]

해중은 어떤 일을 밝혔는가?

찾으려 하면 벌써 망상이다.

 

눈을 뜨고서 눈을 찾으니

누구를 탓할 수 있으리오?

 

 우리는 모래에서 금을 찾듯이 찾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얻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손에 쥐어야 안심이 되는 것은 자신이 아직 부족하고 만족하지 못 해서 의지처를 찾는 것입니다. 마치 매일 먹는 밥을 쌓아두는 것처럼, 그래야 안심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습관적으로 당연하듯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손에 쥐면 손을 더 이상 못 쓰는 것처럼, 어떤 한 개라도 쥐고 있으면 더 나아가지 못 합니다. 우리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말은 쉽게 '쥐고 있는 게 없다.', '집착', '욕심', '나'가 없다고 하지만 이 말이 실재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증거입니다. '나'라는 게 있어서 항상 시비분별에 휘말리고, 비교가 되고, 대단히 괴롭습니다. 이것을 스스로를 돌이키면, 일단 마음이 불편하고 명확하지 않습니다. 깨치면 화도 안 나고 눈물도 없고 감정이 없어진다고 그런 말을 믿는 사람에게는 깨쳐도 그런 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가 옳다고 하는 '상'이 있습니다. '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온갖 방편이 나오는 것이고, 또 그 방편을 부숴 버리는 것도 있어서, 이렇게 수레를 만들고 수레를 분해하는 것이지요. 수레에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이렇게 굴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법의 바퀴라고 한다면 말이죠. 다만 우리가 그런 이름을 붙어줬을 때만 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부터 계속 구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야 어떤 이름을 붙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이름을 다르게 가진다고 해서, 제가 '신미화'에서 '김철수'로 개명한다고 해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사실 이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나와 남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김철수'라고 한다면, 자신이 살아오면서 알게 된 이름이거나 어떤 남자가 떠오릅니다. 그게 자신의 '김철수'인 것입니다. 사실 김철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모든 말과 의미에 그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앎에서 허구적인 '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게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실재하지 않죠.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자신이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도 자신이 모르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순간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어떤 일도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이라고 하기도 하고 본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름이야 뭐든 상관이 없어요.

 

그런 이름에 실재하는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 이게 실재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름을 만들어 놓고 그 이름에 의미를 붙이고 하다못해 나중에는 절하게 되고 굽신거리게 되고 희로애락을 하게 되면서 그 이름에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름 아닌 것은 없어요. 온통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또 이름을 열심히 붙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린 또 그 이름을 우리들 자손에게 꼼꼼히 가르치고 교육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도구입니다. 힘이 들고 무거운 짐들은 수레를 이용해서 옮기면 되니까, 수레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게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방법을 안 가르쳐 주고 수레만 자꾸 사다 줍니다. 이것 부서지면 저것, 저것 부서지면 더 좋은 것, 더 튼튼한 것, 영원히 부서지지 않을 어떤 수레를, 짐을 옮길 수 있는 눈에 띄는 수레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수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짐을 옮길 생각도 못하는 게 우리의 뿌리내린 관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런 수레 여러 개 만들 수 있고 수레를 만들 수 없으면 직접 옮길 수 있는 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것 더 편리한 것을 만들 수 있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법이라는 것은 자유 자재합니다. 단순하면서 정말 자유롭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하게 압니다. 생각은 생각이니까, 이 실재는 언제나 완벽하고 완전하니까 무결점이니까, 생각대로 되지 않을 뿐, 역시 자기 해야 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무사인,이라고 하면 할 일이 없어서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어떻게 보면 일어나는 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둘이 나눠지지 않아요. 따라가도 이것이고 안 따라가도 이것이고 생각을 해도 이것이고 안 해도 이것이고, 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사인이지, 뭐 화도 안 나고 감정도 안 생기고 그러면 그게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이지요. 법은 이렇게 파릇파릇 봄에 나는 새싹처럼 항상 새롭고 생명력이 넘치고 온화하고 있는 이대로, 이것입니다. 불완전함을 찾을 수가 없어요. 만족이 되고 헤매지 않고 언제나 다만 봄날입니다. 봄, 날, 이것입니다. 이뿐이지, 다른 게 없습니다. 봄, 날, 딱 이뿐입니다.

1.인간에게 불변의 자아는 없다

 

불교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오온(五蘊, pañca-skandha)이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오온은 한자 의미 그대로 ‘다섯 가지 덩어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BC563?~483?)가 우리 인간을 분석할 때 사용하였던 개념입니다. 싯다르타는 우리 인간이 다섯 가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요? 색(色, rūpa), 수(受, vedanā), 상(想, samjñā), 행(行, samskāra), 식(識, vijñāna), 바로 이 다섯 가지입니다. 여기서 색이 육체작용, 수는 감각작용, 상은 표상작용, 행은 의지작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은 판단작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싯다르타가 오온을 이야기했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에게는 고정 불변한 자아(ātman)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구성한다는 오온에는 자아가 포함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세요. 육체작용, 감각작용, 표상작용, 의지작용, 그리고 판단작용을 제외하고 불변하는 자아를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으신가요. 이렇게 오온을 제외하고 불변하는 자아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오온설을 제안했던 근본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온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항문이 막힌다거나 심장이 멈추는 등 육체작용이 그친다고 해보세요. 우리는 바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겁니다. 감각작용의 경우를 생각해볼까요. 만일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혹은 시각이 없어지는 등 감각작용이 불가능해진다면, 생명의 불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망하게 꺼지게 되겠지요. 이것은 표상작용, 의지작용, 판단작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오온 중 어느 하나가 극단적으로 사라지면,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오온 중 하나가 과거와 다르게 작동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경우라면 생명에는 별다른 지장은 없지만, 우리는 과거와 사뭇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겁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게 되어 육체작용이 과거와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이때 우리는 겉모습에서나 내면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의지의 대상이 돈이었는데 지금은 깨달음이 의지의 대상인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이때 우리는 탐욕스러운 사람에서 구도자로 변하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자아는 불변하는 것이라기보다 오온이 작동하는 방식과 강도에 따라 요동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영원불변한 아트만과 같은 자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인 셈이지요.


2. 수레 해체하면 수레 어디로 가나

 

서양 클래식 음악의 다양한 장르 중 현악사중주(string quartet)가 있습니다. 네 대의 현악기, 그러니까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가 모여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하는 것이 현악사중주이지요. ‘종달새(Letchen)’라는 이름이 붙여진 현악사중주곡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현악사중주의 연주 형식을 완성한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이 작곡한 아름다운 곡입니다.


‘종달새’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경쾌하고 익숙한 멜로디를 금방 어렵지 않게 흥얼거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하느냐에 따라 ‘종달새’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또한 동일한 현악사중주단이라고 할지라도, ‘종달새’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올라 연주자가 감기에 걸렸거나 혹은 어떤 이유로 상심하고 있다면, 동일한 현악사중주단의 연주도 그만큼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현악사중주의 비유만큼 싯다르타의 오온설을 설명하는 데 좋은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종달새’라는 곡은 우리의 일상적인 자아를, 그리고 네 대의 현악기는 오온을 상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라는 악기가 자신만의 파트를 연주하지 않는다면, ‘종달새’는 존재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네 대의 현악기가 함께 연주되지 않는다면, ‘종달새’는 존재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연주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종달새’가 영원불변한 채로 있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즉 여여(如如)하게 직시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연주도 없는데도 ‘종달새’를 떠올렸다면,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연주를 들었던 경험을 떠올리고 그것에 집착한다는 사실만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드디어 ‘무문관(無門關)’의 여덟 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 관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월암(月庵, 1079~1152) 스님입니다. 관문을 막고 서서 월암 스님은 화두 하나를 던지며 우리에게 겁을 줍니다. 물론 자신이 던진 문제를 풀지 못하면, 여덟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월암 스님은 우리를 닦달하면서 말입니다. “해중(奚仲)은 백 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레를 만들었지만, 두 바퀴를 들어내고 축을 떼어버렸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중국의 전설적인 장인 해중(奚仲)은 수레 제조의 천재였습니다. 현재 좋은 자전거도 바퀴살이 40개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퀴살이 100개나 되는 바퀴를 만들었다는 것은 해중이란 장인이 얼마나 실력이 탁월한지, 그리고 그가 만든 수레가 얼마나 고가의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도록 합니다. 그런 고가의 수레를 천연덕스럽게 해중은 해체해버린 겁니다. 도대체 해중은 무엇 때문에 수레를 해체했던 것일까요.


3. 인연 끝나면 존재는 신기루

 

해중이 수레를 해체했을 때, 그 고가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요? 바퀴에 갔을까요? 아니면 축에 갔을까요? 아니면 기독교의 천국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 갔을까요? 아무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어딘가로 갔다면, 단지 그것은 해체하기 전 고가의 수레를 탐내며 보았던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가로 팔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잔해로 변해버린 수레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낼 겁니다. 집착은 바로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해체되는 순간,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불행히도 이런 통찰은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가의 수레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부수어 버릴 것이라면, 내게 주면 얼마나 좋아.”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중이 수레를 과감하게 해체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야 월암 스님이 여덟 번째 관문을 지키면서 해중이란 장인과 관련된 화두를 던진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월암 스님은 우리들에게 무아(無我, Ana-tma)의 가르침을 깨달아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śa)’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연화합(因緣和合, sam. nives´a)’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들은 다양한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ratyaya]들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하이든의 ‘종달새’가 네 대의 현악기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현악사중주를 알았다면, 월암 스님은 이것을 비유로 채택했을 지도 모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당시로는 바랄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해중의 비유도 현악사중주에 못지않게 절묘하기만 합니다. 아니 더 탁월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가의 수레는 다양한 부속품들의 하모니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르침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가의 수레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도 동시에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가의 수레는 바퀴나 축을 포함한 다양한 부속품들이 모여서 발생한 표면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가이기 때문에, 즉 너무나 희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월암 스님이 해중이 만든 귀한 수레를 화두의 소재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고가의 수레는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러니까 자아, 생명, 건강, 사랑 등등을 상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해중의 수레나 하이든의 ‘종달새’처럼 영원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함께 하나의 하모니로 울릴 때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당연히 인연이 다 끝난다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무문관 제9칙) 대통지승(大通智勝)

 

★흥양선사에게 스님이 물었다.

스님: "대통지승불이 십겁동안 좌선을 하였는데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 성불하지 못하였다하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흥양: "그 질문 아주 정곡을 찌르고 있군."

스님: "이미 도량에 않았는데 왜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흥양: "그가 성불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흥양화상인승문興陽和尙因僧問,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십겁좌도장佛法不現前 부득성불도시여하不得成佛道是如何.

양왈陽曰, 기문심체당其問甚諦當.

승운僧云, 기시좌도장旣是坐道場 위심마부득성불도爲甚마不得成佛道.

양왈陽曰, 위이불성불爲伊不成佛]

 

★무문왈: "반야의 지혜로 아는 것은 허락하지만, 알음알이로 짐작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범부도 반야의 지혜로 알면 성인이지만, 성인도 알음알이로 짐작하면 그게 바로 범부다."

[지허노호지不許老胡會 범부약지凡夫若知 즉시성인卽是聖人 성인약회聖人若會 즉시범부卽是凡夫]

 

★몸을 잘 아는 것이 어찌 마음을 깨닫는것만 하리

마음을 깨달으면 몸에 근심이 사라지나니.

만약 몸과 마음을 모두 깨달으면

신선이 어찌 고관대작을 찾겠는가? (이미 부족함이 없다)

 

* 흥양청양[興陽淸讓]: 위앙종 스님. 앙산의 삼세법손.

* 대통지승불은 법화경[法華經]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이야기.

과거 한량없고 끝없는 불가사의 아승지겁의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출현한 나라 이름은 호성(好城)이고 겁명은 대상(大相)이었다.

이 부처님의 수명은 540만억 나유타겁이다.

처음 도량에 있으면서 마군을 물리치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10소겁 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나 불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도리천에서 대통지승불을 위해 사자좌를 보리수 아래에 폈다.

그 자리에서 10소겁동안 다시 부동자세로 앉아 선정에 든 뒤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

석가모니불은 과거 대통지승불의 16왕자 중 막내였으며,

16왕자는 모두 출가하여 성불하여 부처님이 되셨다.

따라서 대통지승불은 모든 여래의 어버이가 되는 부처님이다.

 

☆임제의 평창: "대통이란 언제 어디서나 만법은 모양과 성품이 없음을 통달하는 것을 말하고,

지승이란 언제 어디서나 의혹이 없어서 한 법도 얻을 바가 없음을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불이란 마음의 청정한 광명이 온 법계를 꿰뚫어 비추는 것을 말한다.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고,

법은 본래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무엇이 다시 나타나겠는가?

불도를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은 부처가 다시 부처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부처님은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 세간 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셨다.

 

○백. 천 문수라도 초지보살 망명을 당할 수 없음이니,

평양 감사도 지 하기 싫으면 어찌하랴!(착각이죠.)

정신 차리고. 자! 채찍을 높이 들어 소를 힘껏 내려 쳐라.

대통지승이 이미 그대에게 충족하여 온 우주가 광명이거늘 어찌 눈을 감고 찾고만 있는가?

보이거나 잡히거나 들리지 않음은 그대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요,

그대가 바로 대통지승불이기 때문이리라.

 

흥양의 양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대통지승불은 10겁 동안 도량에 앉아 있었어도 불법이 앞에 드러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룰 수 없었다고 했는데,

이러한 때에는 어떻습니까?

양화상이 말했다.

"그 질문이 아주 알맞구나."

 

승려가 말했다.

"이미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 어찌하여 불도를 이룰 수 없었습니까?"

양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부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무문의 말]

 다만 늙은 오랑캐가 깨닫는 것만 용납하고, 늙은 오랑캐가 이해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범무가 만약 깨달음면 곧 성인이요, 성인이 만약 이해해하면 곧 범부이다.

 

[군소리]

그대가 이미 부처라고 말하지 말지니

그 한마디가 그대의 성불을 막을 것이다.

주머니 속 보물이 아무리 값비싸더라도

꺼내지 않으면 풀빵 하나도 먹지 못하리.

 

 그대는 그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많은 것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름인 이름, 가족, 부모님, 친구들, 회사, 이름의 소유인 자동차, 집, 무엇이든지 이름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이름의 주인공인 자신의 것이고, 자신은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그 욕망이 끝나지 않습니다. 본래 자신의 집에 있다고 해도 자기 방에 자신의 물건을 쌓아두고 항상 훔쳐 갈까 봐 걱정하고 강도가 들어와서 상해를 입힐까 걱정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들이 없으면 마치 자신이라는 게 없는 것처럼 거기에 집착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건들이 모두 없어져도 분명히 '자신'은 있습니다. 그 물건들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이 생각, 저 생각, 이것들, 저것들이 맞다, 틀리다 하고 해도, 자신이 한번 나오면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 처음부터 자신과 상관없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자신이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뤘고 받은 보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거기에 의미를 붙이니까 다른 물건과 다른 것이지, 그런 것을 붙이지 않는다면  물건에는 '나', '너'. 그런 게 없단 말입니다. 물건 자체에는 아무 그런 게 없어요.

 

"대통지승불은 10겁 동안 도량에 앉아 있어도 불법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왜?"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지금 누가 말하고 있습니까? 매일 말 따라 가지 말고 이해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또 그렇게 생각으로 들어갑니다. '대통지승불은 그렇게 오랫동안 수행을 했는데, 왜 깨닫지 못했을까?' 지금 자신이 말하고 있지요. 자신이 이것을 모르니까 그렇게 다시 물건이 만들어지고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부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자신의 일이 됩니다. 매번 자신의 일이라는 것은 빠뜨리고, 자신의 한 생각은 못 보고, 자신의 뺀 다른 이야기를 의심하지만, 결국 자신이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니까 자꾸 세우게 됩니다. 무엇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항상  자신과 다른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문제입니다. 비록 말을 돌려서 하지만 결국 이게, 자신에게 분명하지 못하면 겉 포장은 화려하고 고상하고 있어 보이는 귀한 선물 같지만 속은 온갖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것입니다. 냄새가 납니다.

 

문어는 다리가 잡히면 다리를 자르고 달아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 밝은 선지식 앞에서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대로 탕! 죽든지,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절대 다리만 잘리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도 결국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공부하기 전에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알 수가 없어요. 지나고 나서하는 말입니다. 지나서 나서하는 말이 공안입니다. 무문관도 그렇게 탄생이 된 것입니다. 무문이라고 문이라고 없다고 분명히 명시돼 있지만, 통과하지 못하면 이미 통과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자신이 분명해야 됩니다. 왜? 이게 모두 자신의 일인 것임을, 자신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오직 이 하나의 일밖에 없음이 아주 명확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통지승불은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이 하니까,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왜? 자신이 대통지승불이 아니니까. 두 개가 있으면 갈등이 생기고 비교하고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고 힘들어지게 됩니다. 한 개이면 딱 하나뿐이면, 그런 갈등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습니다. 대, 통, 지, 승, 불, 이것입니다. 여기에 뭐 대통지승불이 있습니까? 딱 이것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풀빵이 먹고 싶네요, 팥앙금이 들어가는 달콤한 뜨끈뜨끈, 뜨거운 풀빵,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못 먹겠지요? 이것은 주머니에 돈이 항상 풍족하게 있는데도 꺼내지 못해서 못 먹는 것입니다. 구지 스님은 항상 꺼내서 쓰고 해서 다 못쓰는구나! 하셨지요. 풍족하게 있습니다. 그걸 확인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지금 이렇게!

20세기는 서양의 번안불교 시대

 

학창시절에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의 걸작 ‘몬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을 누구나 한 번은 읽어보았을 겁니다. 주인공은 에드몽 단테스라는 사람입니다. 친구들의 음모와 배신으로 죄를 뒤집어쓴 그는 마르세유 앞바다의 외로운 섬 이프섬의 감옥에 투옥됩니다. 선장이 되려는 꿈과 아름다운 약혼녀는 당연히 빼앗기고 말지요. 이곳에서 단테스는 14년 동안 억울한 수감 생활을 하게 되지만, 함께 투옥된 어느 노인에게서 몬테크리스토 섬에 묻혀있던 엄청난 보물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얻게 됩니다. 마침내 탈옥에 성공한 단테스는 보물을 찾고, 몬테크스리스토 백작으로 행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자신을 감옥에 보낸 친구들에게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게 되지요. 당시 이프섬의 감옥에서 그가 먹던 식사에는 ‘치즈’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치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치즈를 몰랐던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것은 치즈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기이하기까지 했을 프랑스의 이채로운 풍습,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이질적인 사법제도 등등. 그래서 최초의 번역 소설들은 직역 소설이 아니라 대부분 번안 소설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김내성(金來成, 1909-1957)에 의해 ‘진주탑(眞珠塔)’으로 번안되어 1947년 출간됩니다. 등장인물도 모조리 우리나라 사람들로 변했고, 장소도 생활 풍습도 모두 우리 것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치즈’도 ‘된장’으로 바뀌는 식이지요. 프랑스 문물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할 수 있지요. 동아시아에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가 수입될 때도 마찬가지 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인도의 풍습과 중국의 풍습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지요. 번안 불교의 시대는 불가피했던 겁니다. 3세기에서 5세기 사이 중국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학자들이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라고 말하는 시기가 바로 그 때입니다.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空)이라는 한자로 번역되는 순야타(Śūnyatā)를 노자와 장자의 철학용어였던 무(無)로 번역하던 시절이지요. 이런 ‘번안’의 시대는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번안 불교는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만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의 문명에 염증을 내던 서양 지성인들은 20세기 들어와 불교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불교에 관심을 가진 서양 학자들은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진 지적 배경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번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는 서양의 번안 불교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행·불행한 사람은 서로 세계가 달라

 

서양의 번안 불교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20세기 초반의 체르바스키(Fyodor Ippolitovich Stcherbatsky, 1866~1942)가 그 대표자일 겁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의 책 ‘열반의 개념(The Conception of Buddhist Nirvana)’입니다. 레닌그라드에서 1927년에 영어로 쓰인 책인데요, 불교를 칸트나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으로 번안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예를 들어 열반을 칸트의 ‘물자체’로 이해하는 식이지요. 두 번째는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칼루파하나(David Kalupahana)의 시도가 중요합니다. 스리랑카 출신 학자로서 하와이대학 명예교수로 활동한 그는 불교를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근본적 경험론으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20세기 후반기에서부터 지금까지 경향이 있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달라이라마의 왕성한 대외 활동으로 티베트불교 붐과 일정 정도 영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1995년에 출간된 헌팅턴(C. W. Hun tington)의 저작 ‘공의 공함(The Empti ness of Emptiness)’이 아마 이 세 번째 경향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은 티베트 스님과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헌팅턴이 나가르주나를 이해할 때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철학적 통찰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독일 관념론과 실용주의가 퇴조한 것은 물론 불교가 이런 지적 배경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비트겐슈타인이 불교를 이해하는 토대로 서양 지성인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청년기 사유를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넘겨보면, 우리는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태도가 강한 서양 철학 전통에서는 무척 이질적인 사유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자의 세계’와 ‘불행한 자의 세계’는 다르다는 사유 방식은 동아시아 사유 전통과 더 가깝기 때문이지요. 유학에서는 성인(聖人)이 되려고 하고, 도교에서는 진인(眞人)이나 지인(至人)이 되려고 하고, 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려고 하니까요. 사실 불교의 가르침이 뭐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겪는 고통의 상태, 깨달은 사람이 고통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 되는 과정을 다루는 사유 전통이니까요.


부처는 부처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인격의 변화라고 할 수 있고요, 혹은 경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 혹은 불행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말입니다. 서양 철학보다는 서양 종교학의 전통에서는 흔히 이런 변화를 다루는 학문을 구원론이나 해탈론이라고 번역되는 소테리올로지(soteriology)라고 부릅니다. 구원을 뜻하는 희랍어 소테리아(sōtēria)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동양에서는 보통 수양론(修養論)이라고 부르는 것이 소테리올로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상태에서 비범한 상태로 변화하기 위해 수양하는 치열한 노력을 높은 산을 등정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등산로 초입에 서서 저 멀리 정상을 보고 있는 사람과 한걸음 한걸음 올라서 정상에 이른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펼쳐지는 풍광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낼 테니 풀어보실래요.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되시나요. 화두와 같은 문제라고 당황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보세요. 당연한 말 아닌가요.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지금 정상에 있지 않다는 것, 최소한 정상보다 낮은 어떤 곳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요. “정상에 오른 사람은 정상에 오르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되시는 분이라면, 그는 벌써 ‘무문관’의 아홉 번째 관문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청양(淸讓, 814~?) 스님을 무시하고 그냥 통과해버린 겁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복기를 해볼까요. 어느 스님이 ‘법화경(法華經)’의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등장하는 부처 중 하나인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에 대해 물어보게 됩니다. 대통지승불은 “이미 그렇게나 도량에서 좌선했는데, 무엇 때문에 불도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일까요?” ‘화성유품’에 보면 대통지승불에게 불법이 현전하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왔기에 던지는 질문이지요. 분명히 부처는 부처인데 불도를 이룰 수 없다니, 기이했던 겁니다.


청양 스님은 당혹감을 가진 스님의 궁금증을 한 방에 해소해줍니다. “그것은 그가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爲伊不成佛).” 얼핏 들으면 당연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대통지승불이 불도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대통지승불이 글자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 이해하면 대통지승불이 가짜 부처라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그래서 청양 스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부처가 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일까요? 그건 이미 대통지승불은 부처였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되었는데, 그가 다시 부처가 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무문관 제10칙) 청세고빈(淸稅孤貧)

 

★조산화상에게 청세가 청하기를

청세: "이 청세가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승께서 부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요."

조산: "세사리야!"

청세: "예.”

조산: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아직 입술도 안 적셨다고 하느냐?"

 

★무문왈: 청세의 이런 몸가짐이 어떤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까?

조산은 안목이 열려 이미 깊이 살펴 보았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어디가 세사리의 술을 마신 곳인지 말해 봐라.

 

★송: 가난하기는 범단같고 기개는 항우 같다.

먹고 살 계책도 없지만 감히 부를 겨룬다.

 

* 조산본적[曺山本寂: 839-901]-동산양개선사와 함께 조동종[曺洞宗] 창설.

 

○세상 넓은 줄 모르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법이다.

청원의 백가주를 그렇게 마시고도 어디서 무엇을 마셨는지 모른다니…

어찌 세사리만 탓하겠는가?

조산이 공무에 시달려 제 본분을 잠시 잊었는가 보오.

(부디 자비를…)

 

이 공안은 청세의 고빈에 대한 조산의 질타에 있습니다.

과연 청세는 고빈하였는가?

이런 능청스런 청세에게 스승 조산은 청원의 백가주를

독 채로 마신 도둑놈으로 몰아 붙인다.

과연 청세는 어디에서 백가주를 마셨으며,

입술도 안 적셨다는 어리광은 어디 있는가?

 

조산 스님에게 청세라는 승려가 물었다.

"저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구제해 주십시오."

조산 스님이 말했다.

"청세 스님!"

"예!"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마시고도 오히려 아직 입술도 적시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무문의 말]

 청세가 기회를 잃은 것은 어떤 마음이었기 때문일까? 조산은 안목이 있어서 나타난 기회를 잘 판단하였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말해 보라, 어느 곳이 청세 스님이 술을 마신 곳인가?

 

[군소리]

 참으로 빠져나와 일 없음만 용납할 뿐,

입으로 말장난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참으로 쉬어져 참으로 일이 없다면,

또 누가 있어서 그대를 속이겠는가?

 

* 청원백가주: 청원은 청원행사를 가리킴. 백가주는 중국 전통술인 백주(빼갈)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한다. 청원백가주란 청원행사 집안의 술이란 뜻이니, 곧 청원행사 문하의 선을 가리키고, 또한 그것을 계승한 조산본적 자신의 선을 가리킨다.

 

 푼자는 "욕망이 있으면 당신은 구걸하는 거지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법화경인가 가난한 친구에게 부자인 친구가 주머니 속에 보석을 주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가난한 친구는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더라는, 부자인 친구가 "야, 내가 전에 너 주머니에 보석을 주었잖아?", 가난한 친구가 "언제?" 하고 주머니를 보는 순간, 얼굴이 변합니다. 깨침은 그와 비슷합니다. 그 보석이 비록 당장 현금이 아니고 당장 부자가 되는 게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부'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벌써 부자입니다. 그것은 평생 쓰고도 모자라지 않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그것을 보관만 하면 돈이 안되고 여전히 가난하게 사는 것이고 그것을 팔아버리면 없는 것이 될 것 같은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깨치고도 여전히 가난하게 살거나 뭘 하나라도 더 얻을 게 없나 싶어서 이리저리 헤매는 거지처럼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서, 보석은 바로 '자신'입니다.

 

모르니까, 청세 스님은 "외롭고 가난합니다. 구제해 주십시오." 이게 얼마나 스스로 하는 망상입니까? 또 깨친 이에는 얼마나 또 진실한 말입니까? 망상과 실상은 함께 있습니다. 말을 뒤집는 게 아니고. 손바닥과 손등, 이게 한 손입니다. 이거죠? 이것, "청세!" 청세 스님을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청세, 이것입니다. 청세, 이것, 이것에는 어떤 이름과 모양이 없습니다. 청세, 그래도 모르니까  청원백가주를 석 잔 마시고도 입술도 적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문 스님은 한 술 더 떠서 청세가 술을 마신 자리는 어딘가? 합니다. 술을 마신 사람은 조산 스님인지 청세 스님인지 누가 마셨습니까? 취한 사람은 조산 스님입니다. 법에 취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법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석 잔이 아니라 백 잔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법에 취한 사람을 깨친이라고 하고, '법'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처라고 합니다. 부처,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모르는데 하물며 법이라고 취할 게 있겠습니까?

 

자신이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자신이 장대 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언제나 본래 있는 자리, 역시 이것뿐입니다. 다만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뿐입니다. 언제나, 진실한 이 자리, 이것뿐입니다.           

1. 부처가 되는 수행의 길, 바라밀

 

일체의 집착과 편견을 제거하여 있는 그대로의 삶을 주인공으로 산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부처가 되는 길이 너무나 멀어서 일종의 피안으로 보일 정도일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부처가 되는 치열한 수행을 불교에서는 바라밀(波羅蜜)이라고 부릅니다. 이 한자어는 파라미타(pāramitā)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가 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글자는 파람(pāram)과 이타(itā)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파람’이 ‘저 멀리’, 혹은 ‘저 너머’라고 뜻한다면, ‘이타’는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멀고 험하게만 보이는 부처가 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서 이른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파라미타, 즉 바라밀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합니다. 보시(布施, dāna), 지계(持戒, śila), 인욕(忍辱, kṣānti), 정진(精進, vyāyāma), 선정(禪定, dhyāna), 그리고 지혜(智慧, prajn͠ā)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여섯 가지 방법, 여섯 바라밀은 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지계’, 온갖 모욕에도 원한을 품지 않으려는 ‘인욕’, 악을 제거하려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정진’, 마음을 응시하는 ‘선정’, 그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이 다섯 가지는 수행자의 치열한 자기 수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타자에게 재물이나 지혜를 나누어주는 ‘보시’는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가 무엇인가 주체의 내면과 관련되어 있다면, ‘보시’는 주체가 내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타자와 관계하는 수행법이라는 것이 눈에 띱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너무나 쉬운 길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보시’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타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스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보시’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힘든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섯 가지 바라밀 중 첫 번째 자리에 오는 것이 ‘보시’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자선 행위와도 비슷한 보시가 여섯 바라밀 중 첫 번째로 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자비(慈悲, karuna)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비는 타자에 대한 환대, 혹은 생면부지의 타자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비가 가족이나 친구나 애인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인류애적인 사랑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제대로 환대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묵은 소유에의 욕망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사랑의 논리는 소유의 논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소유에의 의지가 강할수록, 우리에게서 사랑의 힘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용수의 공은 소유의지의 해체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친구가 배가 고픕니다. 지금 내게는 빵 한 조각이 있습니다. 이 경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빵을 배고픈 친구에게 건네줄 겁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빵의 소유권을 포기한 겁니다. 만약 자기 빵을 소유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우리는 무척 괴로워할 겁니다. 빵을 준다는 것이 너무나 아깝지만, 그래도 친구의 배고픔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소유욕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랑은 타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동력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자비를 실천하는 보시를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끈덕지게 우리를 따라다니는 소유에의 욕망을 가라앉혀야만 합니다. 자, 이제야 여섯 바라밀의 논리가 눈에 들어오시나요. 여섯 바라밀 중 첫 번째 보시는 바라밀의 시작이자 동시에 완성이기도 했던 겁니다. 보시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 바라밀은 소유에의 욕망을 가라앉히려는 치열한 자기 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네요. 여섯 바라밀 중 첫 번째 보시를 시행하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처음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보시를 하다보면, 누구나 자신이 타자에게 내어주는 것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치열한 자기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는 치열한 자기 수행이 왜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치열한 자기 수행이 완성되었는지의 여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남이나 혹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주는 행위, 즉 보시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보시라는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엄청난 의지를 수반하는 수행 행위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나와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보시이기 때문이지요.


불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가는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 250?), 그러니까 용수(龍樹)일 겁니다. 그의 이론은 지금도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이란 난해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용수는 공(空, S´u-nyata-)이란 개념을 무척 강조합니다. 용수가 이렇게 공을 강조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사랑과 자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집요한 소유 의지를 해체하려는 이유에서입니다. ‘중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입니다. “자아가 없는데 어찌 자아의 소유가 있을 것인가. 자아와 자아의 소유라는 생각을 진정시키면, 우리는 ‘나’나 ‘나의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실천적으로 용수는 공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집요한 소유 의지를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물론 소유 의지를 완화, 혹은 제거하려는 이유는 자비와 사랑 때문입니다. 결국 공은 자비와 사랑에 이르도록 의도된 개념이라는 겁니다.


3. 게을러 없는 것, 무소유와 달라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이 강조했던 ‘무소유’의 정신도 바로 용수가 강조했던 공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착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을러서 집도 없고 지혜도 배우지 못한 어떤 사람이 스스로 무소유의 화신이라고 떠벌릴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가난해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법정 스님이 강조했던 무소유의 상태에 이미 이른 것 아닌가.” 분명 이 사람이 겉보기에 무소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게으른 사람은 무소유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실천, 즉 보시가 아니라면 무소유는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게으른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지혜를 나누어주어서 무소유의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애초에 자비의 마음조차 품을 수 없는 그냥 게으른 사람일 따름입니다.


무소유와 보시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무문관(無門關)’의 열 번째 관문도 통과해버린 것 같습니다.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임하는 청세(淸稅)라는 젊은 스님이 조산(曹山, 840~901) 화상에게 도전장을 던지면서, 열 번째 관문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번지게 됩니다. “저 청세(淸稅)는 고독하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는 제게 무언가를 베풀어 주십시오.” 젊은 스님의 패기가 볼 만 하지 않습니까. 자신은 이미 무소유의 경지에 올랐는데, 당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내게 무슨 가르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조산 화상은 갑자기 한 마디 말을 던집니다. “세사리(稅闍梨)!” 여기서 사리(闍梨)라는 말은 아사리(阿闍梨, ācārya)의 줄인 말로 고승(高僧)을 경칭하는 말입니다. 얼떨결에 젊은 스님은 “네!”하고 대답해버리고 맙니다. 청세 스님은 인정받고 싶었는데, 조산 스님은 쿨하게 젊은 스님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버린 겁니다. “청세 스님, 당신은 이미 고승이네요.” 바로 이 순간 청세 스님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을 겁니다. 자신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조산 화상은 그런 평범한 사람에게 보시를 행하는 깨달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처음의 패기는 간 곳이 없이 망연자실하는 젊은 스님에게 조산 화상은 마지막 결정타를 한 방 더 먹입니다. “청원의 백씨 집에서 만든 술을 세 잔이나 이미 마셨으면서도, 아직 입술도 적시지 않았다고 말할 셈인가!” 여기서 세 잔의 술이란 ‘세사리’라는 세 음절의 단어를 상징하는 겁니다. 네가 원하던 칭호를 얻었으니, 이제 된 것 아니냐는 겁니다. 너는 자비의 화신이 아니라 인정을 구걸하는 거지에 불과하다는 조산 화상의 사자후는 청세 스님을 천 길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겁니다. 게을러서 무소유에 있게 된 사람은 구걸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력해서 무소유의 상태에 이른 청세 스님도 구걸하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무문관 제11칙) 주감암주(州勘庵主)

 

★조주가 암주를 시험하다.

조주가 한 암자에 도착하여 암주에게 물었다.

조주: "누구 있소, 누구 있나?"

--- 암주가 주먹을 세웠다.

조주: "물이 얕아 배를 세울 곳이 못 되는군!" 하고는 바로 가 버렸다.

또 다른 암자에 도착하여 말했다.

조주: "누구 있나, 누구 있소?"

--- 암주가 주먹을 세웠다.

조주: "마음대로 주고 빼앗고, 마음대로 살렸다 죽였다 하는군!"

곧바로 절을 하였다.

 

★무문왈: 똑같이 주먹을 세웠는데 어째서 하나는 긍정하고 하나는 긍정하지 않았는가?

그 속 뜻을 한 마디로 내릴 수 있다면

바로 조주의 혓바닥에 뼈가 없음을 알 것이며

조주를 부축하여 세울 수 있고 넘어 뜨릴 수도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조주가 오히려 두 암주로 부터 시험당한 것을 어찌 알겠나?

만약 두 암주 사이의 우열이 있다고 해도 아직 참학의 안목이 부족하며,

없다고 해도 역시 참학의 안목이 갖추지 못하였다.

 

★송: 안목은 유성같고 기틀은 번개같다.

죽이고 살리기를 자유자재로 한다.

 

○조주의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무문의 평창에 '조주의 혓바닥에 뼈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 한마디를 직하에 알아차려야 비로소 무문선사의 그림자를 보았다 하리라.

 

○만상 송:

깊은 골 돌고 돌아 외로운 암자에서

주먹 들어 길손을 반기는 나그네여!

못다나눈 이야기가 아쉬워 돌아보며

구름처럼 흘려가다 바람결에 전한다.

 

조주가 한 암주의 처소에 이르러 물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암주는 주먹을 세웠다.

조주는 "물이 얕아 배를 댈 만한 곳이 아니군!"하고, 곧장 가 버렸다.

 

다시 한 암주의 처소에 이르러 "계십니까? 계십니까?"라고 하자,

그 암주 역시 주먹을 세웠다.

조주는 "놓을 줄도 알고 빼앗을 줄도 알며, 죽일 줄도 알고 살릴 줄도 아는구나!"라고 말하고는,

곧 절을 했다.

 

 

[무문의 말]

 주먹을 세운 것은 한가지인데, 어찌하여 한쪽은 긍정하고 한쪽은 긍정하지 않았을까?

말해 보라.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만약 여기에서 한마디 알맞은 말을 할 수 있다면, 곧 조주의 혀에는 뼈가 없어서 부축하여 일으키거나 넘어뜨림에 매우 자재함을 알게 될 것이다. 비록 그와 같지만, 조주가 도리어 두 암주에게 간파 당했으니 어찌하리오?

 

만약 두 암주에게 낫고 못함이 있다고 한다면, 아직 도를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만약 낫고 못함이 없다고 해도, 역시 아직 도를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군소리]

자기도 모르게 죽여야 참으로 죽이는 것이고

자기도 모르게 살려야 참으로 살리는 것이다.

 

일부러 죽이려 하면 자기가 먼저 죽을 것이고

일부러 살리려 하면 자기가 이미 죽은 놈이다.

 

  이 글을 읽으니까, 공안은 음주단속하는 경찰 같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음주단속할 때 술을 조금이라도 먹었으면 지레 겁이 나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거나 당황하거나 도망가거나 안 먹은척하거나 껌을 씹거나, 그래도 딱 한 가지 생각은 떠오르잖아요. '재수 없게 걸렸네' . 저의 남편은 술을 전혀 못 마시기 때문에, 남동생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음주단속을 할 때 제일 편안하게 훅~ 붑니다. 이것과 비슷합니다. 법에 밝다는 것은 자신이 미혹되지 않아서 이런저런 생각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명확합니다. 공안은 자신이 명확한가, 아닌가 이것에 초점을 둡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주 스님은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스님이니까 무조건 법이 확실한데, 첫 번째 암주와 두 번째 암주 중에 누가 더 법에 밝을까? 이게 남의 이야기이죠, 거기에다가 어떻게 똑같이 주먹을 냈는데 조주 스님은 왜 한 쪽에만 긍정을 할까? 거기에다가, 말리는 시누 같은 무문 스님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셨죠. 제가 김태완 선생님의 군소리를 싣는 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말리는 시누도 결국 한 패이기 때문에, 그 싸움에서 빠져나오라고 싣는 것입니다.

 

어쨌든 무문 스님은 원래 공안의 의미를 잘 살려서 거미줄을 몇 개씩 쳐 놓고 기다립니다. 약간 흔들리면 거미가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거미줄로 먹이를 낚아서 확 감아버려서 꼼짝 못하게 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거미줄을 쳐도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자신의 안목이지요. "계십니까?" 이것입니다. 이게 어디에 있습니까? "계십니까?" 지금 여기 이것뿐입니다. 이것을 알면 조주 스님의 속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계십니까?"  우리는 듣고도 주먹을 쥐거나, 뛰어나와 인사를 하거나, 아니면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옷차림, 자세 등등 여러 가지로 답을 찾고 있습니다. 답은 "계십니까?"에서 못 찾으면, 놓을 줄도 알고 빼앗을 줄도 알고 죽고 살릴 줄 알아도, 절을 하며 수긍을 해도 역시 모르는 것입니다. "계십니까?"했는데 두 암자 모두 아무도 없어도 조주 스님은 암자에 편하게 머물 수 있습니다. 생각이 두더지처럼 튀고 나오고 들어가도 단지 이것이 분명하면 땅으로 숨는 일조차도 이 손가락 하나를 벗어나지 못 합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오늘 아침을 드셨습니까? 드시기 전에 꼭 일을 하십시오. 점심을 드시기 전에 꼭 일을 하십시오. 이 밥 한 끼, 제대로 먹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치지 못하면, 또 이게 명확하지 못하면 한 끼마다, 한 숟가락마다 목이 막혀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생애, 그런 것은 불확실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게 분명한 지금, 이 공부를 할 때입니다.

1. 불교·기독교는 동서양 사유 대표

 

사람이 사는 일에 어떻게 동양과 서양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지만 동양과 서양은 다르기는 다릅니다. 상이한 언어와 생활환경, 그리고 오랜 전통은 많은 차이점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일한 꽃이라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과 색, 그리고 향내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흔히 동양이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라면 서양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인상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서양의 사유 전통도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특성이 있는 것처럼 동양의 사유 전통도 서양에 못지않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만 하더라도 인명(因明, hetu-vidyā)이라는 논리학의 전통이 있습니다. 인명이라는 말은 ‘이유나 근거[因]’를 ‘해명한다[明]’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물론 서양 논리학과는 디테일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불교의 인명학은 동양의 사유에서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가 가능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유나 근거를 따지면서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숙고한다는 것은 논리학적 사유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이 구별되는 가장 극적인 지점은 어디일까요. 이런 의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 사유와 기독교 사유의 차이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두 전통이 각각 상이한 사유 형식을 대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전통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전혀 다른, 때로는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해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생전에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원죄를 갖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겨진 일은 자신의 삶을 검열하며 사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인간은 항상 절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전전긍긍하며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죄를 심판하는 것은 피고인 자신이 아니라 재판관인 것처럼,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절대자이기 때문이지요. 절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 혹은 절대자의 인정을 받으려 갈망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인간의 내면을 규정하는 핵심입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나 그의 추종자 호네트(Axel Honneth, 1949출생)는 ‘인정(Anerkennung)’의 논리를 통해 기독교적 인간을 세속화시킵니다. “나는 당연히 인정 행위 속에서 존재하며, 더 이상 매개 없는 현존재가 아니다.” ‘예나 시대의 실재철학(Jenaer Realphilosophie)’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헤겔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 아닌 무엇인가의 인정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적 인간이 신이 자신을 인정할 때에만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다면, 헤겔이나 호네트의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인정할 때에만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이 타인으로 바뀌었을 뿐, 인정의 논리에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요.


2. 인정 주체 따라 불교 기독교 구별

 

헤겔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매개 없는 현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매개(mediation)라는 말은 사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사다리를 통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매개이지요. 눈치가 빠르신 분은 여기서 매개가 절대자나 타인, 아니면 그들의 인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하긴 일상적인 경험을 되돌아보면 헤겔의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혹은 학교에서 상장을 받거나 혹은 회사에서 표상을 받았을 때, 우리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흡족함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인간은 무엇인가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요. 인정을 받을 때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헤겔이나 호네트의 말이 옳다면, 불행히도 인정이 철회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못생겼다고 누군가 손가락질하거나 아니면 무능력하다고 누군가 비하한다면, 존재 이유가 사라진 우리는 자살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국 속뜻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논리는 인정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92년 출간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호네트의 저서 제목, ‘인정투쟁(Kampf un Anerkennung)’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정을 두고 벌이는 인간의 투쟁을 당연하다는 듯이 붙여진 제목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인정을 받을 때에야 상관이 없지만, 인정을 받지 못할 때는 자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지를 함축하니까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자살과도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당한 산과 같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순간,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수동적인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칭찬을 들으면 사는 맛이 나고, 비난을 들으면 죽을 것만 같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사유를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사유로부터 구별하도록 만드는 대목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기독교, 혹은 헤겔과 호네트와는 달리 불교는 “인간은 매개 없이도 당당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쳤던 싯다르타나 매일 아침마다 스스로를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렀던 서암(瑞巖) 스님이 이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3.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돼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11번째 관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이 관문에는 조주(趙州, 778~897) 스님이 우리에게 당혹감을 던지며 깨달음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습니다. 11번째 관문에는 조주 이외에 무명의 스님 두 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주가 첫 번째 스님의 암자를 찾았을 때, 그 스님은 주먹을 들어 조주에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먹을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먹감자’입니다. 타인을 비하할 때 동서양 구별 없이 쓰는 일종의 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름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던 조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암자에서 수행하고 있던 무명 스님이 주먹감자를 날렸으니,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조주도 그 스님을 바로 비하했던 겁니다.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 한 마디로 말해 자신처럼 큰 사람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타인이 가하는 모욕에도 당당한 조주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조주의 당당함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아쉬운 점이 흰 눈발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선연하기만 합니다. 조주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을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 통쾌한 복수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 나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아차!’하는 순간, 조주는 인정의 욕망에 떨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서경(書經)’에도 나오지 않던가요.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망념을 이기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조주는 깨달은 사람답게 금방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두 번째 무명 스님을 만날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두 번째 스님도 조주에게 첫 번째 스님과 미리 짠 것처럼 ‘주먹감자’를 날립니다. 이미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조주입니다. 두 번째 스님의 모욕에 맞서 조주는 상대방보다 크다는 허영을 부리기보다 상대방이 정말로 자신보다 크다고 긍정해버리고 맙니다.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 한 마디로 말해 상대방 스님이 자유자재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주는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주인공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타인에게 모욕당했을 때의 불쾌감이 없다면, 이것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집니다.

 

 

(무문관 제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서암선사가 날마다 자문자답하기를:

서암: "주인공아 !"

서암: "예."

서암: "정신차려, 깨어 있는가?"

서암: "예."

서암: "어느 날 어느 때도 남에게 속지마라."

서암: "예, 예."

 

★무문왈: 서암노인이 스스로 사고 팔면서 장난치듯 귀신놀이를 자꾸 하는구먼!

왜 그런 짓을 하는가?

하나는 부르고 하나는 대답하고, 하나는 정신차려 하고 하나는 사람들에게 속지마라고 한다.

이 말을 긍정하여 전처럼 부른다면 옳지 않고 흉내 내도 모두 야호의 견해다.

 

★송: 도를 배우는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전부터 알고 있는 관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량겁 이래 생사의 근본인 무상한 자아를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의 자기라고 부르는구나.

 

學道之人不識眞(학도지인불식진)

只爲從前認識神(지위종전인식신)

無量劫來生死本(무량겁래생사본)

癡人喚作本來人(치인환작본래인)

-(장사경잠[長沙景岑]의 게송을 빌려 씀)-

 

*서암사언[瑞巖師彦: 850-910]-암두선사의 제자.

 

☆현사 사비[玄沙 師備]스님에게 한 중이 찾아왔다. [선문염송:988칙]

현사: "어디서 왔는가?"

스님: "서암[瑞巖]에서 왔습니다."

현사: "서암은 어떤 말을 하던가?"

스님: "늘 스스로 부르고 대답하기를 '주인공아' '네'

'정신차려라' '네' '다음에는 남에게 속지 마라' '네' 라고 합니다."

현사: "괴상하구나, 정혼[精魂]을 놀리는 짓이로다.

그런데 그대는 왜 떠났는가?"

스님: "서암이 천화[遷化]하였습니다."

현사: "지금도 부르면 대꾸를 하던가?"

스님이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제 그대가 대답 할 차례입니다.

지금도 부르면 대꾸를 하던가요?

 

○우리들 마음속에 서로 상대되는 두 사람이 있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좌선[坐禪]이라고 합니다.

'坐'자는 땅 위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는 뜻이다.

두 마리 진흙소[선문염송 295칙]편에서 설명 되었지만,

그래도 생사의 고리를 잡고 있는한 매 순간

자신을 채찍질하는 정진[精進]의 자세야 말로 수행의 기본이다.

 

서암언 화상은 매일 스스로 "주인공아!"하고  부르고,

다시 스스로 "예!"라고 대답하고는,

이어서 "깨어 있어라!". "예!".

"훗날 남에게 속지 마라!".

"예!, 예!"라고 말하곤 하였다.

 

[무문의 말]

 서암 늙은이는 스스로 팔고 스스로 사면서, 여러 가지 귀신의 얼굴을 만들어 내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하나는 부르는 자이고, 하나는 응답하는 자이고, 하나는 깨어 있는 자이고, 하나는 남들의 속임을 받지 않는 자이다.

이전과 같다고 한다면, 도리어 옳지 않다.

만약 그를 본받는다면, 모두가 여우의 견해이다.

 

 

[군소리]

남에게 속지 않는 것은 쉬우나

자기에게 속지 않는 것은 어렵다.

어떻게 해야 자기에게 속지 않을까?

몸과 마음에 자기가 없어야 하리.

 

 속지 말라고 하는 것은, 깨어 있어라는 말고 같은 말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알았다고 '이것뿐이다, 이것뿐이다.', '이것도 이것이고, 저것도 이것이고, 오로지 이것뿐인데..', '지금, 이 자리, 여기에만 있자!'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것'이라는 어떤 것에 매여있고 의지해 있고 다른 말로 하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할 게 없다고 해도 역시 우리가 깨친, 우리가 얻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법이라는 게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정말 잘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탁마보다는 공부가 익어가면? 이것도 표현이지요. 그런저런 견해가 마치 구름이 번지듯이 없어집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숨을 쉬듯이, 이렇게 숨을 쉬니까 '아직 내가 살아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주장할 게 뭐 있습니까? 다 숨 쉬고 살고 있는데... 자연스럽지만 내세울 것은 없지만 명확한 것입니다. 표현을 들자면 그렇게 주장을 안 해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니까 두렵고 불안한 것이지, 아는 것에는 불안함이 없습니다. 또 이것을 '무지'라고 해서 몰라야 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공'이다는 표현도 쓰는데, 몰라서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살아있는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게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모르는 게 뭐 있습니까? 정보? 지식?, 분명 그런 것들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많이 안다고 해서 척척박사? 계속 찾아다니면서 공부해야 되고 앎은 끝이 없습니다.

 

왜? 그런 것들은 일시적입니다. 겨우 400년 전의 한국을 비교하더라도 그때의 지식은 지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남들보다 우위에 서는 것도 아니고, 정보를 먼저 알아서 더 잘 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몸을 튼튼하게 해서 오래 살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 공부하고 싶습니까? 여기에 인연이 된 사람은 분명히 이렇게 사는 게 다는 아닌 것이 있음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뭔가 열심히 하면 미래를 보장받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그런 물질적인 것들이 채워짐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만족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욕망에 야망에 휩쓸려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거기다가 이 욕망은 다시 한번 다른 일에 도전하라고 부추깁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사기꾼처럼 자꾸 속삭입니다. 쉬고 싶습니다.

 

정말 쉬어야 합니다. 그게 정말 아닌 것을 알면 단호하게 접고, 자신이 만든 가정, 물론 책임지고 살아야 합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깨친 사람은 더 가정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기준이 없는 가정입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이라는 게 기준이지요. 행복하려고 노력 안해도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행복이라는 기준이 없으니까, 하여튼 노력할 게 없습니다. 그런 노력이라는 의미를 쫓아가지 않는다면, 이 공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생각'입니다. 아직 공부할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제일 1순위에 두십시오. 자신의 목숨과 더 소중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1순위 아닙니까? 원래 우리는 제일 1순위에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순위가 없다면 위도 없고 아래도 없이 모두 1순위입니다. 1,2순위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눠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게, 이것뿐입니다. 이것! 이것,  커피가 다 식었네요, 이것, 지금 이것입니다.

1. 깨달음은 주인으로 사는 것

 

‘화엄경(華嚴經)’이란 불교 경전이 있습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깨달음을 찾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던 경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경전의 내용이 아니라, 경전의 제목입니다. 대승불교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화엄세계라고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뷔하(Gan.d.avyu-ha)라는 단어를 의역한 말입니다. 여기서 간다뷔하라는 말은 온갖 가지가지의 꽃들을 의미하는 ‘간다(Gan. d. a)와 화려한 수식을 의미하는 ‘뷔하(vyu- h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간다’는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그리고 ‘뷔하’가 장관을 의미하는 ‘엄(嚴)’으로 번역되면서, 화엄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결국 화엄이란 말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대승불교가 꿈꾸었던 화엄세계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는지요.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의 가능성과 삶을 긍정하며 만개하는 세계, 바로 그것이 대승불교가 꿈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에서의 자비란 바로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향이 옅다고 나쁜 꽃이고, 색이 탁하다고 무가치한 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 각각은 모두 자기만의 자태와 향취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주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노예는 붉은 장미꽃이 가치가 있다고 해서 꽃잎을 장미 모양으로 그리고 색깔을 붉게 만들려는 개나리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장미꽃에 근접하게 자신을 모양을 꾸민다고 할지라도, 개나리로서는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입니까. 자신의 잠재성을 부정하고 성장한다는 것, 혹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애절한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정해왔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 아닐까? 깨달음의 희열이 별것이겠습니까?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열반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서암 사언(瑞巖師彦) 스님이 왜 아침마다 자신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렀는지 말입니다. 단순한 주인이 아니라 존칭어인 공(公)을 붙여서 부를 정도로 서암 스님은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라 바로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조언을 해도, 그 말에 따라 사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사람에 대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2. 사다리는 올랐으면 버려야

 

싯다르타(Gautama Siddha- rtha, BC563?-483?)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은 몹시도 슬퍼했고 합니다. 하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반응입니다. 스승이 없어지니 자신의 갈 길이 막막하다고 느꼈을 테니까요. 이런 제자들에게 싯다르타는 마지막 사자후를 남깁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개나리는 개나리로 만개하고,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로 만개하고, 장미는 장미로 만개할 뿐입니다. 그러니 히아신스가 장미를, 장미가 개나리를, 개나리가 히아신스를 모방할 일이 아니지요. 물론 아직 자기만의 꽃을 피우지 못한 제자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자신의 이상형으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다는 선언은 싯다르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직 자신이 존귀하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들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 새끼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모르니, 멋진 오리가 되려고 욕망할 수밖에요. 이럴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절절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에도 그대로 울려 퍼졌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바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입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기대거나 모방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서양에서 신이란 존재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모방과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모방의 대상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자신만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과연 신만이 모방의 대상일까요? “누구도 모방하지 말라”는 차라투스트라 본인이나 그의 가르침도 바로 모방의 대상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자신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깨달은 차라투스트라도 “나를 부정하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던 겁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제자들 각각도 자기만이 존귀함을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유명한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3. 주인공이 될 때 사랑도 가능

 

그렇다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으로 산다고 해서 마치 독재자나 잔혹한 자본가, 혹은 권위적인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노예처럼 부린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단지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주인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입니다.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분명해지는 일이니까요. 타인이 밥을 차려주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또 타인이 운전을 해주어야 길을 떠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법입니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그렇다면 이토록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타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인가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기의 모습보다는 분명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더 사랑스러울 테니까요.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법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성숙한 어른이지만 매사에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마마보이는 여성들에게 강한 호감을 줍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마마보이가 교제하는 여성의 속내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얼굴 표정이나 말투만 접해도 금방 그녀의 속내를 쉽게 헤아릴 겁니다. 이미 그는 어머니라는 여자의 눈치를 보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속내를 자기만큼 잘 헤아리는 남성을 어느 여자가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랑에 빠지겠지요.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여성은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만이 두 사람의 일을 결정해야 하는데, 자꾸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테니까 말입니다.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남자친구는 당혹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나를 좀 이해해줘.” 그렇지만 분명하지 않나요. 남자친구가 이해해달다는 것은 사실 자기 어머니의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 여자가 마마보이는 서운하기까지 할 겁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여자 친구의 잘못인가요. 남의 집에 얹혀사는 사람은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주인의 눈치를 보는 집에서 얼마나 친구가 불편해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머니로부터 독립된 성숙한 남성이 될 때까지 마마보이는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무문관 제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

 

★덕산이 하루는 발우를 들고 당으로 내려갔다.

설봉이 이를 보고 물었다.

설봉: "이 노스님이 종도 치지 않고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는가?"

덕산이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설봉이 이것을 암두에게 말하였다.

암두: "훌륭하신 덕산도 말후구를 모르는구먼!"

덕산이 이 말을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려놓고 물었다.

덕산: "자네가 이 노승을 긍정하지 않는가?"

암두가 까닭을 말씀 드리니 덕산이 이내 그만 두었다.

 

다음 날 덕산이 법상에 오르셨는데 과연 보통 때와 달랐다.

암두가 법문하는 승당 앞에서 일부러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암두: "기쁘다, 노스님이 말후구를 알았다.

이후 천하의 누구도 그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무문왈: 만약 이것이 말후구라면 암두 덕산 모두 아직 꿈속에서도 보지 못했다.

알고보면 이들은 한 무대의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다.

 

★송: 최초구를 깨달으면 바로 말후구를 알리라.

말후니 최초니 한다면 한 구도 모르는 것이다.

 

○덕산은 최고의 선사이며 설봉의 스승인데 어찌하여

설봉의 한 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방장으로 돌아 갔는가?

여기에 혹시 다른 뜻이 있는가?

 

덕산은 과연 말후구를 몰랐을까?

(암두는 왜 스승에게 그렇게 말했을까?)

암두는 덕산에게 은밀히 무슨 말을 하였을까?

 

덕산은 비로소 말후구를 알았다는 암두의 수기를 받았으니,

암두가 덕산보다 뛰어난 조사인가?

 

○이 공안은 뜻이 심오하고, 독이 비상과 같으므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신명을 상실하는 일이 없어야 하리라.

님이시여! 그대 진정 말후구는 무엇입니까?

 

덕산이 하루는 발우를 들고 방에서 나오다가 설봉을 만났는데, 설봉이 물었다.

"이 노인네가 종도 아직 울리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가지고 어디로 가시는가요?"

이에 덕산은 곧 방장으로 되돌아갔다. 설봉이 이 일을 암두에게 말하자, 암두가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덕산도 아직 마지막 한마디 말을 모르는구나."

 

덕산이 그 말을 듣고 시자를 시켜 암두를 불러오게 하여 말했다.

"네가 나를 긍정하지 않느냐?"

암두가 그 뜻을 남몰래 일깨워 주자, 덕산은 이에 그만두었다.

 

다음 날 법좌에 오르니

과연 평소와는 같지 않았다.

암두는 승당앞에 이르러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노인네가 마지막 한마디 말을 알았구나. 이후에 천하의 사람들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무문의 말]

 만약 마지막 한마디 말이라면 암두도 덕산도 모두 꿈에서 보지 못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대위의 꼭두각시들과 꼭같다.

 

[군소리]

마지막 한마디 비밀스러운 말을

모든 사람들이 찾으려 고생하지만,

눈앞에 두고도 다시 찾으려 하니

스스로 숨기고 스스로 찾는구나.

 

 대부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읽으면 '도대체 암두가 귓속말을 한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말후구가 뭘까 궁금합니다. 저도 예전에 읽었을 때 많이 궁금했던 것이고, 정말 무엇을 말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여기 1칙에서 12칙까지 모두 모르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 하나가 내용만 달리해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연예인이 주인공으로 여러 드라마에 나오는데, 드라마 내용상 역할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지만 역시 그 한 연예인이지, 다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왕으로 나오지만 그 연예인이고, 회사원이지만 그 연예인이고, 상인으로, 사기꾼으로, 경찰로, 범인으로, 아버지로, 어떤 역할로 나오든 그 연예인 한 사람이지, 역할이 진짜 그 연예인은 아니잖아요. 재미있는 것은 제가 드라마를 잘 안 봐서 그런지 어떨 때 보면 특히 여자 연예인은 정말 비슷비슷합니다. 내가 누구다 하면 백발백중 틀립니다.

 

남자 연예인도 갈수록 비슷해져서 내가 누구다 하면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본 드라마는 10년 전의 드라마 속의 주인공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내가 아는 범위, 지식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 지식 안에서만 비교 분석할 수 있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지식, 정보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까? 있는 사실이 하나의 정보로 자신에게 저장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송이의 장미를 보면, 보는 순간 우리는 각자 다르게 생각합니다. 보는 순간 머릿속에 저장된 많은 경험 중에서 장미와 연관된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게 더 이상 실재적인 장미를 못 보게 되는 것처럼, 암두의 말후구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 귓속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분명한가? 입니다.

 

처음 '조주의 강아지'부터 딱 이 하나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변합니다. 그 변화무쌍한 이야기 중에 항상 이 하나가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란 말입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 스토리에 빠지더라도 자신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 전이나 말이 진행되는 순간이나, 말이 끝난 후에나 시작하지 않고 끝나지 않은 이게, 이게 한결같이 오직 이 하나가 있습니다. 말이 끝난 뒤에 한 마디 말이란 찾으면 없고 찾지 않으면 이렇게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기도 전에 닫히고 말을 끝나기 전에 열립니다. 왜? 말과 상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밭의 잡초는 조금만 틈이 있으면 위로 뻗어 올라옵니다. 자신이 유익한 곡식이 되고자 한다면 잡초를 뽑아버려야 되겠지만 자신이 잡초로 살고 싶다면 곡식이 되는 농작물을 뽑아야 되겠지요. 자신은 생각입니다. 자신을 함 찾아보세요. 자신이 무엇입니까? 그런 생각들이 없다면 단지 잡초일 뿐이고 농작물이뿐입니다. 무한한 자유, 자신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어디에 자신이 없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이게 있을 뿐입니다.

이 하나는

항상 자신이 분명한가? 이것뿐입니다.

만약 이 한마디 말을 안다면

알아서 오백년 여우 노인이 되는 것이고,

모른다면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도

음주단속경찰에게 자꾸 안 마셨다고 우기는 꼴이니

곧장 철장신세입니다.

 

1. 불교자비는 방편으로 드러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불교는 자비(慈悲, maitri-karuṇa)를 슬로건으로 합니다. 보통 자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우정을 뜻하는 마이트리(maitri)라는 말과 연민을 뜻하는 카루나(karuṇa)로 구성된 합성어가 바로 자비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이트리, 즉 우정 혹은 동료애라는 의미 아닐까요. 자비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수직성보다는 동등한 두 사람이라는 수평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비록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도 우리와 동등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지금 누군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이번에는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행할 때 우리는 어떤 우월감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비에서 중요한 것은 마이트리의 정신이기 때문이지요.


불교에서 자비의 정신이 어디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까요. 아마 방편(方便, Upāya)이란 개념에서 일 겁니다. 불행히도 방편이란 개념은 지금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급한 불을 끄는 식으로 일을 할 때 우리는 임시방편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렇지만 불교에서 방편은 전혀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바로 방편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편은 획일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눈높이 가르침인 셈이지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면, 남자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과 여자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교수와 초등학생은 다릅니다. 당연히 두 사람에게는 적용되는 가르침의 방법은 달라야만 합니다.


방편은 눈높이의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겁니다. 타자를 제대로 읽으려는 감수성도 없으면서, 어떻게 타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최소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을 겁니다. 하나는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이르러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타자, 즉 제자의 수준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원효가 말한 것처럼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현하고 있는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지요.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이로움을 실천했기에 ‘자리’이고, 자신이 이른 깨달음에 타인도 이르게끔 돕는다는 점에서 ‘이타’인 셈이지요. 그래서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돕는 노련한 산악 가이드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 같네요.


2. 불교는 내적 위계만을 인정한다

 

능숙한 산악 가이드는 이미 정상에 올랐던 적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고, 동시에 자신이 정상으로 이끌려고 하는 사람의 정신과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가이드하고 있는 사람이 의지가 빈약하다면, 그는 거짓말조차 기꺼이 할 수도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에 이르려면 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그는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능숙한 가이드는 말합니다. “30분 정도만 더 오르면 정상입니다.” 이게 바로 방편입니다. 그나저나 ‘무문관(無門關)’의 열세 번째 관문은 야단법석입니다. 덕산(德山, 780~865) 스님이 식사 때도 아닌데 발우를 들고 공양간에 가려고 하지를 않나, 그것을 본 제자 설봉(雪峰, 822~908) 스님은 스승을 타박하지를 않나, 또 다른 제자 암두(巖頭, 828~887) 스님은 스승 덕산 스님의 경지를 평가하지를 않나, 정말 아래 위가 붕괴되어 버린 형국이 열세 번째 관문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스승과 제자라는 위계 구조를 강조하는 다른 사유전통에서는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는 풍경일 겁니다. 이렇게 스승을 무시하는 제자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내적인 권위만을 강조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일 겁니다. 임제의 말대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야”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불교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덕산은 분명 스스로 주인공으로 서는 데 성공한 스님입니다. 주인공의 삶은 다른 일체의 것들을 조연으로 보는 삶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려야 밥을 먹겠습니까.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쉴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배가 고파서 덕산은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향했던 겁니다.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방장실을 차지하고 있는 큰 스님이라는 허울 정도는 가볍게 훌훌 벗어던진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제자 설봉 스님의 이야기에 덕산이 방장실로 돌아간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공양간에 아직 식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스승의 경지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봉 스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이 마치 노망이 든 노인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봉 스님이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사제 암두 스님에게 토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형의 고민을 듣자마자 암두 스님은 탄식합니다. “위대한 덕산 스님이 아직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末後句]’을 알지 못하는구나!” 설봉과 암두, 두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들은 덕산은 암두를 방장실로 불러들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자유로운 경지를 몰라주는 제자들에게 무척이나 속이 상했나 봅니다.


3. 선가에서 말후구는 이타행

 

암두 스님이 들어오자 덕산은 서운한 낯빛으로 물어봅니다. “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암두 스님은 스승의 귀에 무엇인가를 비밀스럽게 속삭입니다. 아마도 설봉 스님에게 이야기했던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 즉 말후구(末後句)였을 겁니다. 덕산 스님은 제자 암두 스님에게서 제대로 한 방 먹은 겁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했던가요. 이처럼 때로는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기도 하는 법입니다. 어쨌든 놀랍게도 그 다음 날 덕산 스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던 자연스러움 대신에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제자들을 압도하는 위엄이 법당을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이 모습을 본 암두 스님은 박장대소할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이제 노스님이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암두라는 제자가 스승 덕산의 귀에 속삭였던 ‘말후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영위하는 데 성공했던 덕산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할 수만 있다면, 이미 우리는 왁자지껄한 열세 번째 관문도 통과했을 겁니다. 말후구, 그것은 바로 ‘이타(利他)’의 길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덕산 스님은 마침내 자리(自利)에 성공했지만, 이타(利他)의 경지에는 나가지 못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덕산 스님은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하는 스승의 길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겁니다. 스스로 깨달음에 이른 것에 순간적으로 취했던 탓일까요. 바로 이 점을 암두 스님은 지적했던 겁니다. “스님! 혼자서 자유를 만끽하시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사찰 안의 제자들은 어찌 하시려고 그러시나요.”


‘말후(末後)’라는 표현에서 말(末)은 ‘끝’이나 ‘정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산으로 따지면 정상에 오른 겁니다. 그렇지만 자신만 정상에 올라서야 되겠습니까. 삶의 정상에 오르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제자들과 중생들을 정상에 오르도록 도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그에게 남겨진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정상[末]에 오른 다음[後], 그는 타인을 정상에 이끄는 자비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말후구’, 그것은 바로 방편입니다. 제자들이 깨우침에 이를 때까지 덕산 스님은 법당에서 위엄을 갖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반드시 넘어야만 스스로 주인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은산철벽이 되어야만 합니다.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어느날 남전[南泉] 회상에 양당의 스님들이 고양이 새끼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를 본 남전화상이 고양이 새끼를 번쩍 집어 들고는 이르기를

"누구든지 한마디 한다면 이놈을 살려 주겠다.

그렇지 못하면 단칼에 베어 버리겠다."

그리고는 누구 하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고양이를 두 동강으로 베어 버렸다.

마침 그날 외출하였던 조주가 밤늦게 돌아오자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

듣고 있던 조주가 아무 말 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남전이 말하기를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것을..."

 

★무문왈: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인 뜻은 무엇인지 말해봐라.

만약 한마디 할 수 있다면 남전의 영이

쓸데없는 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위험해!!

 

★송: 조주가 있었더라면 명령을 거꾸로 받아들였겠지.

칼을 빼앗으니 도리어 남전이 생명을 구걸했으리...

 

*[벽암록 63칙. 종용록 9칙. 선문염송 207칙]

☆설봉이 이 이야기를 들어서 덕산선사에게 물었다.

설봉: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벤 뜻이 무엇입니까?"

덕산은 설봉을 밀어내며 때리니 설봉이 달아났다.

이에 덕산이 다시 설봉을 불러 세우고

덕산: "알겠는가?"

설봉: "모르겠습니다."

덕산: "내가 그대를 위해 그토록 애썼는데 그대는 모르는구나!"

덕산선사가 암두에게 말했다.

덕산: "알겠는가?"

암두: "모르겠습니다."

덕산: "모르는 것을 잘 지니는 것이 좋겠다."

암두: "이미 모르거늘 잘 지닐 것이 무엇입니까?"

덕산: "그대는 마치 무쇠 말뚝 같구나!"

 

☆어느 외도가 손에 참새 새끼 한 마리를 쥐고 와서 부처님께 물었다.

외도: "내가 이 참새를 죽이리까, 살리리까?"

세존: 문턱에 걸터서서 "내가 나가려 하는가, 들어가려 하는가?"

이에 외도가 입을 다물고 물려났다.

 

○누구 고양이 새끼를 살려 줄 분을 기다립니다.

사례로 짚신은 드리리다.

'친절한 금자씨'가 한 마디 하네요. "니나 잘 사세요."

 

○모르는 것을 잘 지니라는 덕산의 말씀이 친절합니다.

무릇 수행은 솔직함을 떠나서는 한 법도 얻을 바가 없습니다.

진솔과 겸손(하심)은 수행의 최고 안내자입니다.

남전 스님은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자, 고양이를 들어 올려 말했다.

"대중이여, 말하면 살려 줄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베어버리겠다."

대중이 대답을 하지 않자, 남전은 마침내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조주가 외출했다 돌아오자, 남전은 낮의 일을 조주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다.

남전이 말했다.

"자네가 있었으면 고양이를 구했을 텐데."

 

[무문의 말]

 자, 말해보라.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인 뜻이 무엇인가? 만약 여기에서 한 마디 알맞은 말을 할 수 있다면, 곧 남전의 명령이 헛되지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리라.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위험하다.

 

[군소리]

남전ㄴ이 고양이 때문에 망령이 들어

훔친 적도 없는 돈을 내놓으라고 하네.

애처로운 스승을 보다 못한 조주가

한바탕 연극을 벌여 한통속이 되는구나.

  

 깨달음을 얻고자 공부하러 온 스님들이 고양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역주한 글을 읽어보면 '남전의 제일좌가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데, 이웃한 선상의 다리를 고양이가 물어뜯는 바람에 서로 언쟁이 일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남전 스님이 보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말하면 살려 줄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베어버리겠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매일 하던 것을 왜 못합니까? 남전 스님이 말하기 전까지도 잘해놓고 왜 말을 못합니까? 왜? 법이라는 어떤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못 움직이고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내가 생각하는 법과 어긋나는 게 아닐까? 불쌍한 고양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고양이는 죽습니다. 고양이를 죽여야겠다고 하면 나서지 못 합니다. 고양이의 목숨은 남전 스님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쥐고 보여주지 않으니까, 남전 스님이 친히 피를 묻혀 법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법 공부로 비유를 들면 고양이를 생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말로는 항상 이렇게 죽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합니다. 지금 비록 고양이는 죽었지만 이것은 펄펄 살아있습니다. 내가 몰라서 못 구한 고양이를 볼 것이 아니라, 지금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펄펄 살아서 숨 쉬는 이것, 이것, 이것! 이것은 남전 스님에게 더 많은 것도 아니고 고양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스님들에게 더 적은 것도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단지 이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 차이입니다. 그것은 항상 누구에게 있습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명백하면 남전 스님의 말도 조주 스님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남전 스님이 낮에 한 일을 조주 스님에게 얘기한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넌지시 법을 묻는 것이지요? 고양이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조주 스님은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습니다. 하하, 아무리 남전 스님이 풍파를 일으켜서 잠을 재우더라도 결국 법이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공안 속에는 항상 서슬 퍼런 칼이 숨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베일 수 있습니다. 항상 이것, 이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이것만 궁금해야 합니다. 진실은 숨겨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좁은 '상'으로 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양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한번 조복이 돼야 합니다. 그런 체험이, 체험이라는 말이 이상하면 생각 속에서 한번 나와야, 꿈속에서 꿈을 깨야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에는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것도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하나, 이것입니다.

1.고양이 생사를 제자들에 맡기다

 

깨달았다는 스님이 고양이를 단칼에 잘라버린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비를 표방하는 스님이 거침없이 저지른 이런 잔혹한 행위를 보고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일반 신도들도 지키고 있는 불살생(不殺生)의 계율,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남전(南泉, 748~834) 스님은 아주 헌신 버리듯이 버린 것이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스님은 무슨 이유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일까요. 자신이 제자들로 품고 있던 수행승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당에 거주하던 수행승과 서당에 거주하던 수행승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다투면서 일이 벌어집니다. ‘무문관’에서는 자세한 내막이 나오지 않지만, 다행히도 ‘조당집(祖堂集) 덕산(德山)’장에는 그 전모를 짐작할 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사건을 재구성해보도록 하지요.


동당이든 서당이든 어느 한쪽 수행승들이 기르고 있던 고양이가 반대쪽 수행승의 실수로 다리가 부러졌나 봅니다. 문제는 동당과 서당에 속해 있던 수행승들은 평소에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쪽은 우리 대신 우리가 아끼던 고양이에게 위해를 가한 것 아니냐고 분노했고, 다른 한쪽은 실수로 그런 것을 가지고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고 화를 내는 형국이었을 겁니다. 상호간의 오해와 불신 속에서 수행승들은 자신의 본분을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게 됩니다.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염원은 봄눈 녹듯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승려의 행색은 하고 있지만, 이제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은 저잣거리의 무지렁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스승으로서 남전 스님이 이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나중에 엄청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순간 스님은 시퍼런 칼을 들고 다리가 부러진 불쌍한 고양이를 잡아들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남전 스님이 잡은 것은 고양이이라기보다는 고양이를 통해 드러난 수행승들의 온갖 의심과 집착이었던 겁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지니(Genie) 라는 괴물이 마술램프에 들어가는 순간처럼, 지금 수행승들의 온갖 잡념들이 지금 고양이에 집중되어 있으니까요. 지니가 마술램프에 들어간 순간, 마술램프의 구멍을 막고 램프를 잡으면 우리는 지니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양이를 잡으면서 남전 스님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의 집착하는 마음들은 한 손 안에 꽉 움켜진 셈입니다. 불쌍한 고양이에게 칼을 겨누면서 스님은 고양이의 생사를 제자들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2. 신발을 머리에 얹고 나가다

 

아무런 말도 없었고, 고양이는 두 동강 납니다. 깨달음의 말,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양이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수행승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마 머리에 떠오르는 말은 모조리 고양이와 그의 생사와 관련된 것이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수행승들에게 집착을 끊으라는 가르침으로 남전 스님은 고양이를 자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에 대한 수행승들의 집착이 끊어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오히려 다리를 다친 데다 이번에는 목숨까지 잃게 된 고양이에 대한 집착과 회한이 더 크게 일어났을 겁니다. 자신들을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남전 스님이 야멸차고 잔인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양이에게 제자들의 집착이 쏠리자마자, 그것을 계기로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려던 남전 스님은 참담했을 겁니다. 수행승들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고, 불쌍한 고양이의 시신만 남겨졌을 테니까 말입니다.


남전 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온 조주(趙州, 778~897)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한 것도 이런 씁쓰레함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러자 남전 스님은 고양이의 죽음이 더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고양이가 생사의 기로에 있었을 때 조주 스님이 있었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불쌍한 고양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전 스님은 조주 스님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린” 조주의 행동은 깨닫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우리 눈에는 조주 스님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조주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자는 머리에 얹고 신발을 발에 신는 것을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규칙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신발을 머리에 얹거나 아니면 모자를 발에 신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습득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반면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조주는 신발과 모자와 관련된 기존의 통념, 혹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경쾌하게 부정해버립니다. 이런 부정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맹목적으로 답습되는 통념과 양식에서 자유롭다는 것,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남전 스님이 조주가 깨달았다고 확신했던 이유는 그가 조주의 행동에서 그 자유로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3.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 사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은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과 ‘반성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모자는 머리에 그리고 신발은 발에 신어야 한다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기존의 규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판단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적 판단력이 규칙을 따르는 생각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을 창조하는 생각이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규정적 판단력이 지배되는 사람은 기존 규칙을 따르는 충실한 노예, 혹은 기존 규칙에 집착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반성적 판단력을 수행하는 사람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는 주인, 혹은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야 죽어가는 고양이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던 수행승들과 고양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방 바깥으로 나간 조주 스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명해집니다. 수행승들이 규정적 판단력에 지배되고 있었다면, 바로 조주 스님은 반성적 판단력을 상징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지지 않으신가요.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라는 남전 스님의 사자후를 들었을 때, 과연 조주 스님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선불교에 대해 나름 아시는 분이라면 화두를 풀었던 역대 선사들의 대답을 흉내 내어 그럴 듯한 말을 지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그럴 듯한 대답은 사실 여러분이 지금 규정적 판단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다시 말해 과거에 어디서 배운 것을 약간 변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요.


남전 스님마저도 조주가 어떻게 말할지 예측할 수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것이 남전 스님이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입니다. 이미 조주는 자유롭게 규칙을 창조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어떤 말을 할지, 혹은 그가 어떤 행동을 했을지, 남전 스님도 예측할 수 없고 우리도 예측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남전 스님이 조주가 어떻게 할지 예측했고 그것이 적중했다면, 이것은 조주가 자신의 스승도 예측할 수 있었던 규칙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 아닐까요.

 

(무문관 제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동산이 운문선사를 찾아 뵈니, 운문이 물었다.

운문: "어디에서 왔는가?"

동산: "사도에서 왔습니다."

운문: "여름은 어디서 지냈는가?"

동산: "네. 호남 보자사에서 지냈습니다."

운문: "언제 그 곳을 떠나왔는가?"

동산: "팔월 이십오일 떠나왔습니다."

운문: "네게 삼돈(三頓) 방을 때려야 되는데 용서해 준다."

이튿날 동산이 운문 선사를 찾아가

동산: "어제 스님께서 삼돈방을 때려야 된다 하셨는데

허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운문: "이 밥통아, 강서니 호남이니 그렇게 돌아 다녔냐?"

이에 동산이 이때 크게 깨달았다.

 

★무문왈: 당시 운문이 바로 본분의 양식으로 동산에게

살 길을 열어 주었다면 집안이 적요하지 않았을것이다.

밤새도록 시비의 바다에 헤매이게 하고는 날이 밝자

다시 그에게 설파해 주자 동산이 즉시 깨달았지만 뭔가 성급한 것이 아닌가?

여러분께 묻노니 동산이 삼돈방을 맞아야 하는가, 맞지 않아야 하는가?

만약 맞아야 한다면 산천초목이 다 맞아야 하고,

만약 안 맞아야 한다면 운문이 헛소리를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안다면 동산과 더불어 호흡하리라.

 

★송: 사자가 새끼를 가르치는 비결일세

앞으로 던졌는데 어느새 돌아 왔네.

무단히 다시 설하니 과녘에 꼽혔다.

앞 화살 스치더니 뒷 화살은 명중이네.

 

*동산수초[洞山守初:910-990]: 운문문언의 법사.

18칙의 '마삼근'[麻三斤]으로 유명한 공안.

*삼돈봉[三頓棒]: 60대. 일돈봉이 20대.

 

○동산이 정말 맞을 짓을 하였는가?

어디가 맞을 짓인지 님께서 일려 보세요.

맞을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운문은 왜 삼돈방을 운운하였는가?

님들의 혜안을 기대합니다.

동산은 풍류에 빠져 세월을 잊었는데, 애닯다 운문의 노파심이 갈 길을 막는구나!

길은 동서남북 북남서동으로 돌아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잊은 듯 흘려간다.

 

동산수초가 찾아왔을 때 운문문언이 물었다.

"최근에 어디를 떠나왔는가?"

"사도에서 왔습니다."

"여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호남의 보자사에 있었습니다."

"언제 거기를 떠났는가?"

"8월25일에 떠났습니다."

"너를 세 방망이 때릴 것을 용서해 준다."

 

동산은 다음 날 다시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어제 스님께서 방망이 세 대를 용서해 준다고 하셨는데, 허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밥통아! 강서와 호남으로 곧장 그렇게 다니거라."

동산은 여기서 크게 깨달았다.

 

 

[무문의 말]

 운문은 그때 곧바로 본분의 먹이를 주어 동산에게 따로 한 가닥 살아갈 길이 있게 함으로써 가문이 쓸쓸하지 않게 되었다. 하룻밤 시비의 바다 속에 넘어져 있다가 날이 밝자마자 다시 찾아오니, 다시 그에게 자세히 가르쳐서 동산이 즉시 깨닫도록 하였으니, 조급한 성격은 아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노니, 동산이 세 방망이를 맞아야 한느가? 맞지 말아야 하는가?

만약 맞아야 한다고 말하면, 초목과 수풀이 모두 방망을 맛을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맞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 운문이 다시 헛소리를 한 것이다.

여기에서 밝힐 수 있으면, 비로소 동산과 더불어 같은 입으로 숨을 쉴 것이다.

 

[군소리]

 운문의 호통에 문득 정신 차린 동산이

다시 강서로 호남으로 싸돌아 다녔으나,

이제는 가는 곳마다 운문과 함께 다니니

다시는 밥통이라 꾸지람 듣지 않았다네.

 

 

 우리가 남들에게 질문을 할 때에는 듣고 싶은 답이 있어서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이 질문은 운문 스님이 듣고 싶은 답이 있는 것입니다. 운문 스님이 듣고 싶은 '답'은 동산 스님의 '답'이 아니죠. 자꾸 다른 말을 하니까, 우리도 그렇잖아요. 친구에게 점심같이 먹으려고 점심 먹었나 "이렇게 물었는데, "나는 아침에 고기를 많이 먹었어." 이렇게 답하면, "아니, 점심을 먹었느냐고?" 다시 묻죠. 그러면 상대방이 또 " 일이 많아 시간이 없어"이렇게 말하면 짜증이 나서 그 친구에게 "야, 점심을 먹을 거냐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잖아요. 사실 친구는 답을 다 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이지요. 친구 입장에서는 '왜 화를 내는 거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 친구가 속말을 안 하면 좀 서먹해지겠지요.

 

동산 스님이 그런 것입니다. '아니, 내가 정확하게 꼬박꼬박 답변을 드렸는데, 왜 방망이를 때릴 것을 면해준다고 하셨지?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이렇게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밤새 잠을 설치며 생각을 하고, 아침에 가서 여쭤봅니다. "어제 제가 맞을 짓이 한 게 뭡니까?", 이렇게 모르면 참지 말고 이해하지 말고 그대로 단도직입으로 물어야 합니다. "야, 이 밥통아!" 이럴 때, 선지식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말 혼자서, 자신은 알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 혼자서 안 사람도 봤었지만, 그 세밀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을 '밥통'이라고 했는가?? "그렇게 언제까지 돌아만 다닐래?" 정말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마조 스님이 백장 스님과 산책하다가 저 멀리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을 것을 보고, "기러기가 어디로 날아갔느냐?" 백장 스님에게 물었는데 "저 멀리 산 너머로 날아갔습니다." 답하자마자 바로 마조 스님이 바로 백장의 코를 잡아 비 뜰었지요. "아야!" 이때 백장 스님은 깨달았습니다.  "한 번만 더 날아갔다고 해봐라!"

 

항상 지금, 이 자리, 여기를 벗어나지 않으면, 사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운문의 방망이를 빼앗아 다시 운문 스님의 방망이를 면해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임제 스님과 황벽 스님의 울력 이야기도 떠오르는군요. 모든 것은 자신에게 명확해야 합니다. 어제는 어떤 강의를 들었는데, 자신이 확실하지 않으니까 사기꾼에게 넘어간다고 그런 욕심 때문에 솔깃해서 자기 돈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 돈까지 다 갖다 준다고 하는데, 이 공부도 비슷합니다. 자신이 명확하지 않으면 여기저기 모든 곳에 흔적을 남깁니다. 흔적이 왜 필요합니까? 이 모든 게 자신의 일인데, 아주 쬐그만 흔적이라도 남기면 꼭 쫓아옵니다. 누가? 저승사자가 그 냄새를 맡고 옵니다. 흔적을 없애려면 항상 자신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동산도  똑바른 대답을 하고 '밥통'이라는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사람은 이 '밥통아! ' 이게 한 개의 일대사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선지식이 중요합니다. 저도 그렇게 인연이 됐고, 같이 있으니 얼마나 행운입니까? 바다에서 파도를 잡기는 힘들지만 안 잡으면 파도와 함께 노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이것뿐입니다.

1. 깨달음 전하는 것이 선불교 정신

 

전등사(傳燈寺)라는 사찰도 있고, ‘전등록(傳燈錄)’이란 책도 유명합니다. ‘전등’이란 말처럼 선불교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개념도 없을 겁니다. ‘전등’은 ‘전달한다’는 의미를 가진 전(傳)이라는 글자와 ‘등불’을 뜻하는 등(燈)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나 문자가 아니라 깨달은 마음을 전달해주는 것이 선불교의 정신입니다. 결국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전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켜지지 않은 등잔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외부의 힘으로 인위적으로 이루지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제자가 스스로 깨달음의 등불을 발화시키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뿐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제자의 마음속에도 자신과 타인을 모두 비추는 환한 등불이 켜지게 될 겁니다. 아마 마음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바로 이 순간만큼 아름다운 순간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등불을 켠 것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거나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늦게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만큼 미리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선각자(先覺者)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무척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어느 선사(禪師)를 이해하기 위해 학자들이 그가 어느 스승 밑에서 공부했는지 확인해보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을 편찬했던 무문 스님은 그럼 어떤 계보에 속하는 스님일까요.


무문 스님의 스승, 그 스승의 스승, 또 그 스승의 스승, 이런 식으로 쭉 따라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선불교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임제(臨濟, ?~867) 스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문 스님은 임제의 정신을 잇고 있는 선사였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무문관’의 48개 관문에는 임제 스님을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흔적도 없다는 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무문 스님은 위대한 스승 임제를 부정했던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무문관’을 읽다보면 사정은 그 반대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임제가 너무나 위대했기에 무문 스님은 ‘무문관’이 만들어 놓은 48개의 관문 중 어느 하나를 지키는 역할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의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닭을 잡는 데 소를 잡는 칼을 쓸 수 있겠습니까(割鷄焉用牛刀)?”


2. 해탈은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사자처럼 단호하고 맹렬했던 임제 스님의 정신은 지금도 ‘임제어록(臨濟語錄)’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제의 속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그의 사자후 아닐까 싶습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여덟 글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임제의 도전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도 말했던 겁니다. 부처나 조사를 염두에 두고 그들을 존경하고 있다면 혹은 부모나 친척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잊지 못한다면, 수행자는 아직 성불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부모나 친척이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과거라면, 부처나 조사는 그에게 있어 미래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수행자는 미래에 부처나 조사가 되려는 사람이자 동시에 출가하기 전 과거에는 누군가의 아들이나 조카였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미래를 끊고 과거를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임제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미래와 과거를 끊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요. 당연히 그것은 현재라는 시제일 겁니다. 이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고 말한 임제 스님의 속내가 분명해지지 않나요.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서 있는 곳마다 참되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주인이 되면 자신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것과 허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출발했던 곳과 도달해야 할 곳, 과거와 미래를 모두 끊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를 영위하는 주인이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무문관’의 15번째 관문에서 운문(雲門, 864~949) 스님이 동산(洞山, 910~990) 스님에게 몽둥이질을 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어느 곳에서나 삶의 주인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 해탈이고 성불입니다. 그런데 동산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겁니다. 그러니 불호령을 내릴 수밖에요.


3. 제대로 된 삶은 목적에 집착 안해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여행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금방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 도중에서도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을 겁니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리고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야만 하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여행 도중에서 만나게 되는 코를 유혹하는 수많은 꽃들, 뺨을 애무하는 바람들, 실개천의 속삭임들, 지나가는 마을에 열리는 로맨틱한 축제조차도 그는 향유할 수도 없을 겁니다. 아니 그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런 사건과 사물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목적지에 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에게 있어 여행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출발지와 도착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장자(莊子, BC369~BC289?)의 ‘소요유(逍遙遊)’와 같은 진짜 여행은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여행입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고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면 과감하게 떠납니다. 간혹 아름다운 새를 쫓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도 일쑤입니다. 그는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매번 출발지와 목적지를 만드는 주인이기 때문이지요.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라면 ‘유물론 철학자의 초상(Portrait du philosophe matérialiste)’에서 이런 사람을 ‘유물론 철학자’라고 불렀을 겁니다. “그는 아주 늙었을 수도 있고, 아주 젊었을 수도 있다. 핵심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언제나 그는 미국 서부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달리는 기차를 탄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기원), 어디로 가는지(목적) 전혀 모르면서.”

 

인간의 삶은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우리는 기원과 목적,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참될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만나는 것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 품어줄 수 있을 겁니다.

 

 

1. 화두, 주인으로 살아야 풀 수 있어

 

선불교의 매력은 화두(話頭)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화두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가리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모든 풀기 어려운 문제, 그러니까 수학적 문제, 물리학적 문제, 혹은 경제적 문제 등이 모두 화두는 아닙니다. 왜냐고요. 화두는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은 풀 수가 없고,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성공한 사람만이 풀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화두는 깨달음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화두를 깨치면, 깨달은 사람, 즉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머무는 것이지요. 그러니 스님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화두를 보면 그것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겁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화두를 넘기만 한다면, 싯다르타와 같은 반열에 올라 대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하니, 누가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김성동(金聖東, 1947년 출생)이 1979년에 출간한 소설 ‘만다라(曼陀羅)’를 아시나요. 1980년에 임권택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하여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법운이 품고 있던 화두도 덩달아 유명해졌지요. 한 때 승려였던 법운은 과거 큰스님에게 화두를 하나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파계는 했지만 법운은 그 화두를 가슴에 품고 언제가 풀릴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두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새 새끼를 유리병 안에 집어넣어 키웁니다. 당연히 새는 자라지만 더 이상 유리병 바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미 덩치가 너무 커져서, 어릴 때 들어왔던 그 유리병 주둥이로는 나갈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유리병도 깨지 않고 새도 죽이지 않고, 새를 유리병에서 꺼내 훨훨 날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큰스님이 법운에게 던진 화두는 분명하게 풀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 한 마리가 유리병에서 벗어나 훨훨 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화두를 못 풀고 있지만, 마침내 법운은 풀어낸 것입니다. 그러니 새를 자유롭게 날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큰스님은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법운이 화두를 풀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를 말입니다. 아무리 영민한 아이라고 하더라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묘사하고 있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모범생답게 괴테와 그의 소설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너무 어리니까요. 더 성장하여 사랑의 희열과 고뇌를 온몸으로 느낀 다음에야, 그 아이는 괴테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2. 성숙한 이에게 화두는 자명

 

“사랑하면 함께 있으면 되고, 함께 있는 것이 불가능하면 헤어지면 되지. 왜 베르테르는 자살을 했을까?” 이것이 아마 초등학생이 괴테의 작품을 읽은 첫 소감일 겁니다. 아이에게 베르테르의 자살은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을 겁니다. “사랑은 행복한 경험일 텐데, 왜 인간을 자살로 이끄는가?” 일종의 화두인 셈이지요. 잊지 마세요. 화두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역설로 보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전혀 역설이 아니라 자명한 이야기입니다. 고전은 어리숙한 인간에게는 난해해보이지만, 성숙한 인간에게는 자명한 이야기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위대한 고전이 그런 것처럼 선불교의 화두도 우리의 성장을 기다리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성장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방향으로의 성장, 일반인에서 부처가 되는 방향으로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자,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열다섯 번째 관문에 우리의 성장을 기다리는 어떤 화두가 있는지 살펴볼까요.

 

어느 스님이 묻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동산(洞山, 910~990) 스님은 너무나도 쿨하게 이야기합니다. “마 삼근이다!” 이제 동산의 제자 스님에게도 평생 가슴에 품고서 풀어야 할 화두가 하나 새겨진 겁니다. “마 삼근!” 정말 풀기가 만만치 않은 화두입니다. 이건 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정말 제대로 된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화두에도 수준 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승의 수준 때문에 벌어진 일일 겁니다. 어떤 화두는 500미터 정도 되는 산과 같고, 다른 화두는 8000미터 높이의 산과도 같기 때문이지요. 500미터를 넘은 사람은 300미터나 400미터 산은 가볍게 넘을 수 있지만, 1000미터 이상 되는 산은 언감생심일 겁니다. 반대로 8000미터 높이의 산을 오른 사람에게 5000미터 되는 산은 정말 얼마나 쉽겠습니까. “마 삼근!” 8000미터 급의 화두입니다. 등산로 자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이 열다섯 번째 관문 주변에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여전히 많기만 합니다. 그 가운데 나름 설득력이 있는 소리도 두 가지 정도 섞여 있었습니다. 동산 스님이 당시 마(麻)를 다듬고 있어서 그렇게 말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지금 마에 가 있었기에 “마 삼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산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마에 가 있는 것으로 부처를 설명하려고 하였다면 동산은 구태여 ‘삼근’이란 단위를 붙일 이유가 없을 겁니다. 또 당시 당나라 때는 ‘마 삼근’으로 가사 한 벌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 삼근’이란 바로 승복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마 삼근’은 승복의 환유(metonym)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산 스님의 “마 삼근”이란 이야기는 “승복을 입고 있는 바로 네가 부처가 아니냐!”는 의미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승복을 가리키려고 구태여 그 재료 ‘마 삼근’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승복이 이불보 될 수 있어야 자유

 

‘마 삼근’이란 것이 승복 한 벌을 만드는 원료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삼근의 마가 있어야 그것을 짜서 승복을 하나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삼근의 마로 반드시 승복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삼근의 마로는 다른 옷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스님이 스님으로 머물러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제자가 제자로 머물러서는 선생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승복이 승복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다른 옷이 될 수도 없을 겁니다. 질문 하나 드려 볼까요. 승복으로 다른 옷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우선 승복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실타래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어렸을 적 뜨개질이 보편적이었을 때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자라면 항상 이런 식으로 새 옷을 다시 짜곤 했었습니다. 아이가 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다시 풀어서 다시 짜야 했던 겁니다. ‘마 삼근’ 화두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등장하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이란 유명한 에피소드입니다. ‘단하가 부처를 태웠다’는 뜻입니다.


추운 겨울 대웅전에 방치된 단하(丹霞, 739~824) 스님이 추위를 쫓기 위해 목불을 쪼개서 모닥불을 만들었습니다. 추우니까 불을 쬐어 몸을 녹이려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단하의 행동은 보통 스님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경천동지할 만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연히 절을 지키던 다른 스님이 깜짝 놀라서 어떻게 스님이 부처를 태울 수 있느냐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러자 단하 스님은 너무나도 쿨하게 말합니다. “목불에 사리가 있는지 보려고요.” 당연히 노발대발하던 스님은 말합니다. “나무에 어떻게 사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 스님은 깨달았던 겁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목불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말입니다. 나무토막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불이 될 수도 있고, 땔나무도 될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밥그릇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보세요. 사찰에 땔나무가 떨어졌다면, 그곳을 지키던 스님은 얼어 죽어야 할까요. 아니면 목불을 땔나무로 써야 할까요. 목불을 지키느라 얼어 죽은 스님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목불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땔나무로 삼아 몸을 녹인 스님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목불이 땔나무라고 보아야 하는 것처럼 승복도 ‘마 삼근’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승복을 승복으로 유지하는 것이 집착이라고 한다면, 승복을 기꺼이 풀어내어 ‘마 삼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집착에서 벗어남, 즉 해탈일 테니까 말입니다. 승복은 오직 승복으로만 기능할 뿐이지만, 삼근의 마는 승복도 될 수 있고, 다른 옷도 될 수 있고, 심지어 이불보도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이고 해탈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마 삼근과 같은 사람입니다.

 

 

 

(무문관 제16칙) 종성칠조(鐘聲七條)

 

★ 운문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세계가 이렇게 광활한데 어찌하여 종소리를 듣고 칠조가사를 걸치는가?"

 

★무문왈: 무릇 참선을 하고 도를 배우는 사람은 소리를 따르고 색을 쫓는 것을 삼가야 한다.

설사 소리를 들어 도를 깨치고 색을 보아 마음을 밝히는 것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승가에서는 소리를 타고 색에 덮여 물건 물건마다 밝고 곳곳마다 묘한 것을 알지 못한다.

비록 그러해도 소리가 귀에 오는지 귀가 소리에 가는지를 일려봐라.

소리와 고요를 다 잊은 다음에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만약 귀로 들으려고 하면 알기 어려울 것이고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분명하게 될 것이다.

 

★송: 깨달으면 한 집안 일이요 깨닫지 못하면 천차만별.

깨닫지 못하면 한 집안 일이요 깨달으면 천차만별.

 

○운문의 송에서 앞의 두 구는 아직 깨닫기 전의 말이고,

뒤의 두 구는 깨닫고 난 뒤의 말이다.

어째서 깨닫기 전과 후의 안목이 다른가?

그대의 안목으로 일려 보세요.

과연 온 우주가 한 집안 일인지, 천차만별인지?

그대는 깨달음을 꿈에라도 보기는 하였는가? (ㅎㅎㅎ…스스로 알 일이로다.)

 

○수행의 길목에 서면 눈으로 소리를 듣고, 귀로 사물을 보는 것이 다반사다.

님이시여, 무엇을 일려 눈으로 듣는다 하고 귀로 본다고 하는가?

 

운문이 말했다.

"세계가 이렇게 드넓은데, 무슨 까닭에 종소리에 칠조가사를 입느냐?"

 

칠조가사: '울다라승'이라 하며, 상착의라 번역함. 직사각형의 베 조각들을 세로로 나란히 꿰맨 것을 1조(條)로 하여, 7조를 가로로 나란히 꿰맨 옷. 사찰의 스님들이 예불이나 행사 시 입는 옷.

 

 

[무문의 말]

요컨대 선을 행하고 도를 배움에는 소리를 따르고 색깔을 좇는 것을 절대 삼가야 한다.

비록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깔을 보고 마음을 밝히더라도 역시 평범할 뿐, 납승의 집안이라면 소리를 올라타고 색깔을 뒤덥고서 하나하나에서 밝고 하는 일마다에서  묘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한번 말해보라.

소리가 귓가로 오는  것인가? 귀가 소리 곁으로 가는 것인가?

설사 소리와 고요함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라도 , 여기에 이르러 어떻게 말하겠는가?

만약 귀로 듣는다면 알기 어렵고,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가까우리라.

 

 

[군소리]

부처님은 모든 곳에 나타나 있지만

예불을 올리면 도리어 뵐 수 없고,

부처님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불을 올리면 뚜렷이 뵐 수 있다.

 

 저도 아침 7시에 알람이 울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납니다. 왜냐면 아이들 아침을 챙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7시에서 8시 사이에 우리 집 남자들이 교차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먹을 것을 차례대로 챙기고 치우고 헐레벌떡합니다. 스님들은 새벽 종소리에 예불을 드리려고 입는 것이겠지요. 똑같습니다. 단지 이 하나뿐, 뭐가 틀립니까? 아침 준비하려고 일어나는 것이나 새벽 예불을 드리려고 일어나는 것이나, 그런 분별을 하지 않으면 똑같은 이 하나가 있을 뿐이지요.

 

아무리 깨쳐도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아닐 수가 없어요. 드러난 이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활을 다하면서도 거기에 끼여 들 '나'라는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가, 일어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칠조 가사를 입는 게 누구입니까? 이 세계가 드넓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똑같은 이 하나는 칠조 가사를 입어도 칠조 가사에 몸을 숨기지 못하고, 드넓은 세계에 던져도 숨을 곳이 없는 곳입니다. 숨을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이것, 이뿐인데, 지금 여기 확실하게, 지금 뚜렷하게 이렇게 있는데, 제발 공이다, 색이다, 이런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이 다 말일뿐이고 글일 뿐이지요. 공이다, 색이다 하는 이것은 절대 공이지 않고 색이지 않습니다. 색이라고 하면 이게 자신의 손등이고 공이다 하면 자신의 손바닥이고, 이것, 이것 하나,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고 지금 '공이다, 색이다'하는 이것, 이놈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전혀 공이다 색이다 구분하지 않아요. 구분은 누가 합니까? 자신이 분별하고 있잖아요.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이해한 문자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남의 말일뿐, 어떻게 그렇게 남의 말을 잘 믿습니까? 자신이 한번 확인해야 됩니다. 한번 깨치고 그 깨달음의 동굴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칠조가사를 입고 부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1.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인문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벤야민의 탁월함은 그의 영향력만을 살펴보아도 분명해집니다. 처음 우리는 그를 미학자라고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이라는 논문으로 매체 미학이란 새로운 연구 분야를 만들었으니까요. 카메라, 영화, 그리고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스마트폰 등 매체가 변하면, 예술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체 미학은 매체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예술의 성격을 다루는 연구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그는 가장 탁월한 사회철학자 혹은 정치철학자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없다면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년 출생)과 같은 우리 시대 탁월한 정치철학자도 나올 수 없었을 정도니까요.

 

‘무문관’에 마련된 48개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갑자기 벤야민을 꺼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벤야민의 주저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 때문입니다.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망치가 머리를 강타하는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누구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꿈꿉니다. 현재 자신이나 사회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을 보수적(conservative)이라고 부르지요. 반면 개인의 삶이든 사회이든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미래에의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보적(progressive)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지금 벤야민은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라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1보를 걷지 않으면 2보도 3보도 n+1보도 우리는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1보를 걷지 않고서 꿈꾸는 2보도 3보도 그리고 n+1보도 단지 백일몽에 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말해 2보보다는 3보를, 3보다는 4보를, 아니 100보를 꿈꾸는 순간, 우리는 1보 내딛는 것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경험했던 적이 있을 겁니다. 자그마치 교과서 100쪽이나 벼락치기를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첫 페이지부터 천천히 공부하면 될 것을, 우리는 자꾸 30쪽을 넘기고 50쪽을 넘겨보고, 98쪽을 넘겨봅니다. 이러다가 무의미한 시간만 흘러가고 공부는 되지 않는 경험을 해보았을 겁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우리는 후회하게 됩니다. 그냥 첫 쪽부터 한 장 한 장 넘겼다면, 그래도 50쪽이나 60쪽 정도까지는 공부를 했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인 셈이지요.

 

2. 매너리즘은 조건반사적인 삶

 

 

벤야민의 통찰은 우리를 서늘하게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걸음을 내딛지 않고 논의되는 2보나 3보는 단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한 걸음을 걷지 않으면서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2보나 3보는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덧없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2보나 3보, 혹은 n+1보만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1보 내딛기가 무섭거나 1보 내딛는 것을 회피하려는 무의식 때문은 아닐까요. 공부를 하려고 하지만 성적이 잘 나지 않는 학생들이 종종 상급학교로 진학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운문(雲門, 864~949) 스님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를 음미할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춘 것 같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가사(袈裟, kaṣāya)는 승복을 입은 뒤 겉에 걸치는 일종의 망토와 같은 겁니다. 보통 가사는 오조 가사, 칠조 가사, 구조 가사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한 삼의(三衣)란 바로 이 세 가지 가사를 말합니다. 오조니 칠조니 구조니 할 때 조(條)라는 글자는 가사에 붙인 직사각형 베 조각의 수를 가리키는 단위입니다. 그러니까 칠조가사는 가사 위에 일곱 개의 베 조각을 덧대서 기운 가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불이나 혹은 공식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입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스님들이 칠조 가사를 포함한 가사를 걸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공식적인 행사에 정장을 갖추어 입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공식적 행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스님들은 누구나 가사를 걸칩니다. 여기서 무엇인가 찜찜한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일체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겠다는 투철한 소망을 품고 있는 스님들이 종이 울리면 자동적으로 가사를 걸치고 공식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니까요.

 

운문 스님의 사자후는 선방(禪房)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매너리즘을 질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는 이렇게 넓고 그만큼 가야할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데, 너희들은 어떻게 선방에 틀어박혀 이다지도 매너리즘에 빠져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고도 너희가 주인의 삶을 살려는 소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정도의 가르침이라면 ‘무문관’의 16번째 관문은 너무나 쉽지 않은가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으신가요. 다른 모든 관문이 얼마나 통과하기 어려웠는지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이처럼 넓다(世界恁廣闊)”는 운문의 이야기를 쉽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유인이 살아가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일몽의 세계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1보도 내딛지 않는 사람이 꿈꾸고 있는 2보, 3보, 그리고 n+1보의 걸음처럼 말입니다.

 

3. 당당한 한걸음이 주인의 삶

 

 

설악산에 오르는 비유를 들어볼까요. 1708m 대청봉(大靑峰)을 정상으로 하는 웅장한 산 설악산에 오르는 등산로는 무한히 많습니다. 오색약수터로 올라도 되고, 천불동 계곡을 아니면 가야동 계곡을 따라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개척되지 않은 수많은 등산로도 이론적으로 가능하지요. 등산 지도를 보거나 혹은 직접 속초나 인제로 가서 설악산을 올려보면, 정말로 대청봉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고 많아서 우리가 자유롭게 고르면 될 것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마십시오. 다양한 등산로 중 어느 길이 좋을까를 자유롭게 생각하는 순간, 사실 우리는 대청봉에 이르는 1보를 내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오색약수터에서 출발하는 길을 잡았다면, 우리는 천불동 계곡에서 출발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대로 오색약수터를 박차고 1보를 내딛는 순간, 우리의 뇌리에는 수많은 등산로가 봄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야 천불동 계곡으로도 오색약수터 길로도 가야동 계곡으로도 설악산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색약수터 길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몸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천불동 계곡 길도 가야동 계곡 길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오색약수터에서 정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으면서도 가지 않는 다른 방향을 떠올리며 번뇌하고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으로 걸어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오색약수터 길로 출발했는데, 마음은 다른 등산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집착 아닌가요. 이런 집착 때문에 우리는 오색약수터 길에 들어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어느 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칠조의 가사를 입은 스님이어도 되고, 아니면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어도 되고, 집안일 돌보는 전업주부여도 좋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이 한 걸음 내딛은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제대로 이어간다면, 우리는 정상에 혹은 주인의 삶에 이르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덤으로 1500미터 이상 되는 높은 산에 올라가는 방법을 하나 가르쳐드릴까요. 대개 5시간 이상 걸리는 힘든 산행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선 자신이 한 걸음을 내던진 그 등산로를 긍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어떤 길이든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등산로로 갔으면 좋았겠다”라는 후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후회가 항상 우리를 더 지치게 하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몇 번이나 산에 올라가는 것이 힘들 때가 올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듯이 호흡이 가쁘거나 다리가 뻣뻣해져 쥐가 나기도 합니다. 이때 저 멀리 도달해야 할 정상을 보는 것은 자제해야만 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 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은 우리를 더 쉽게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무문관 제17칙) 국사삼환(國師三喚)

 

★국사가 시자를 세번 부르니 시자가 세번 대답했다.

이에 국사가 말했다.

“내가 너를 저버렸는가 했더니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

 

★국사가 세 번 부르니, 혀가 땅에 떨어졌다.

시자가 세 번 대답하니 화광을 뿜어 냈다.

국사가 연로하고 외로워 소 머리를 잡고 풀을 먹이려 하였으나

시자 수긍하지 않으니 배부른 사람은 좋은 음식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해 보라. 어디가 저 시자가 저버린 곳인가?

나라가 깨끗하면 인재를 귀히 여기고, 집안이 부유하면 아이가 교만해진다.

 

★구멍 없는 쇠칼을 사람에게 메게하니 자손까지 누가되어 한가하지 못하네.

문호를 지키고 이어 나가려면 다시 맨발로 칼산에 올라야 하나니…

 

○여기 나오는 국사는 육조의 제자 남양 혜충국사이다.

그의 제자 탐원과의 이야기다.

과연 시자가 국사를 저버린 곳이 어디인가?

혹시 이 대답을 못한다면 님께서도 국사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저버리는 일이니 삼가 부복하여 정중히 들으세요.

님의 은혜가 한량없으니 부디 저버리지 마시기를…

 

국사가 시자를 세 번 부르자 시자가 세 번 응답했는데, 국사가 말했다.

"내가 너를 저버린다 여겼는데, 알고 보니 도리어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

  

[무문의 말]

 국사가  세 번 불러서 망상을 피웠는데, 시자는 세 번 답함으로써 장단을 맞추었다.  국사가 나이 들어 자신감이 없어졌는지, 소머리를 눌러 억지로 풀을 먹이려 하는 구나. 시자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사람이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네.

말해 보라, 어디가 시자가 국사를 저버린 곳인가?

나라가 안정되어 있으면 재주 있는 사람이 등용되고, 집안에 돈이 많으면 어린아이도 함부로 설친다.

 

  

[군소리]

국사의 허물은 자기 주머니의 물건을

시자에게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것이고,

시자의 허물은 본 적도 없는 물건을

자기도 모르게 척척 내놓는 것이다.

 

 

 무문, 문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동서남북 여러 개의 문을 닫고 엽니다. 이쪽 문을 열면 저쪽에 문이 있고 저쪽 문을 열면 또 다른 쪽에 문이 있고, '문'이라는 것은 뭔가 있을 듯한, 보지 못한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지금 자신이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항상 불안하고 두렵고 불만족하고 뭔가 편치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저 북쪽의 올라가기 힘든 꼭대기에 있는 산사에도 가보고 남쪽의 저 깊은 바닷속에도 가보고 동쪽의 아침에 좋아하고 서쪽의 지는 해를 보고 슬퍼합니다. 이 공간을 문을 만들어 나누지 않으면, 사실 어떻게 나눌 수 있습니까? 아파트 내의 방, 벽을 없애면 한 공간이죠, 더 크게 가볼까요, 대구,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을 나눈 것을 없애면 우리는 모두 한 공간에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한 공간에 있는 것입니다. 문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덮어 쓸래야 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래면목은 허물이 없습니다. 죄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떤 나쁜 일을 해도 어떤 좋은 일을 해도 비록 상과 벌은 있지만, 그런 것은 인과에 얽힌 몸이 받는 것이고, 원래의 자신은 아무런 받을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오죠, 앙굴리라마의 스승의 말을 듣고 99명을 죽이고, 마지막 한 명, 부처님을 죽이려다가 득도한 이야기. 99명을 죽여서 득도한 것 아닙니다. 원래 자신을 아는 데는 0.1초의 차이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무명의 눈꺼풀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이, 자신이라는 게 없어집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완벽함, 완전함을 봅니다. 이전에는 내가 보는, 나의 관점으로 보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다면, 이제는 좋다 나쁘다고 분별하는 그런 게 없이 있는 그대로가 그대로일 뿐입니다.

 

자신이 분명하면 국사도 시자도 아무런 허물이 없지요. 원래 없습니다. 국사와 시자로 나눈다는 자체가 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문을 만들기 전의 일입니다. 묻든 대답하든, 바로 이것입니다. 한 공간에,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공간을 나누겠지요. 그런 자신의 관점을 없애면 바로 이것입니다. "시자야~" "예", "시자야~" "예", "시자야~" "예", 이뿐이죠. 꽃봉오리는 시간이 돼야 피어나고 향기는 담을 수 없습니다. 저희 집고양이 '깜'은 끈을 매달아 이러 저리 왔다 갔다 하는 공을, 움직이기 않고  눈동자만 굴리다가 별안간 공을 한 번에 잽싸게 잡습니다. 왔다 갔다 세월아 네월아 저울질만 하다가는 끝내 문만 열다가 결국 저승사자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저울을 부숴버리십시오. 그러면 "시자야~" 이것입니다. "예"이것이지요.  얼마나 쉽습니까? 누구나 자신의 호주머니에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그것만 확실히 안다면 꺼내어 보여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저희 집 아이가 3살 때, 모처럼 두 살된 동생을 업고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먹고 그 놀이터에서 놀았는데, 동생 분유를 먹이는 사이에,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맥도널드 앞은 바로 사거리였는데,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어느 쪽으로 갔을까 당황을 했고 온갖 상상이 나를 두렵게 만들고, 동생을 맡기고 이리저리 뛰는 나는 온몸에 땀이 나고 20분이 지났을 때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40분이 돼서는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도 안 나오고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이때까지 모든 불안하고 두려웠던 생각은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왜? 아이를 찾은 게 확실하니까, 다른 사람은 그 아이가 우리 아이인지도 모릅니다. 나만 확실하면 됩니다. 내가 확실하면 두 번 다시 속을 일이 없습니다.

아직도 미아 된 아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인연으로든 아이는 그 아이의 인연대로 갑니다. 우리가 원했던 원치 않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아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문이 없다고, 나와 똑같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태어나기 전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부모도 없고 자신도 없습니다. 다만 이 하나의 일입니다. 이 하나뿐, 죄책감 그런 것 가지지 마십시오. 죄의 허물은 자신이라는 생각에만 있는 것입니다. 똑, 똑, 똑, 이뿐, 언제나 이뿐입니다.

 

 

(무문관 제18칙) 동산삼근(洞山三斤)

 

★동산 수초선사에게 한 중이 물었다.

스님: "무엇이 부처입니까?" [여하시불 如何是佛]

동산: "마삼근"[麻三斤]

 

★동산 노인께서 방합선을 얻어서 입을 여니 간장(肝臟)을 다 드러내셨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어느 곳에서 동산 선사를 볼 것인가?

말해 보아라.

 

★불쑥 마삼근이라니 말도 뜻도 친절하네.

시비를 말하는 자는 시비에 떨어진 사람.

 

☆頌:'벽암록' 설두의 송.

금까마귀 옥토끼가 날고 치닫는다 (⇒해와 달을 노래하여 찰라의 시간을…)

슬쩍 건드리니 본색이 연연하다.

누가 감히 동산에게 부처를 묻는가?

절름발이 자라와 눈먼 거북은 허공으로 사라지고(⇒모든 망상을 잠재우고)

꽂과 비단이 온전히 아름답다.(⇒부처의 실상이 드려나니)

남쪽의 대숲과 북녘의 숲속이여!(⇒진여자성 청정법신)

장경과 육긍의 지나간 이야기들

도를 아는 이들이야 웃고 울지는 않는다네.(⇔대부합소불합곡 大夫合笑不合哭)

 

*남전이 천화하자 육긍대부가 관 앞에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주변에서 꾸짖자 갑자기 꺼이꺼이 소리내어 울었다.

나중에 장경 대안이 이소식을 듣고 '대부합소불합곡 大夫合笑不合哭'이라 하였다.

 

*무문왈:"동산노인은 이렇게 방합선을 얻어서 입을 열자마자

그 속을 다 드려내 놓고 말았다.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어디서 동산을 볼 것인가? 말해 봐라."

(방합선[蚌蛤禪]: 조개가 입을 벌리면 그 속이 다 보인다는 뜻에서)

 

*무문송:'마삼근'이라는 말

말도 쉽지만 뜻은 더욱 친절하다.

여기에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국 시비에 떨어질 사람이다.

 

*동산 수초[洞山守初:910-990]-운문종 시조 운문선사의 제자.

 

*위의18칙과 21칙 운문시궐[雲門屎궐]:'무엇이 부처입니까?""마른 똥막대기.",

37칙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如何是祖師西來意""庭前柏樹子"은 유사한 내용입니다.

나를 온전히 없애고 드려나는 그대로 직관하면…

 

○아마도 동산에게 다른 말을 걸었어도 같은 대답을 하였을 것이다.

"선사님, 차나 한 잔 하시지요"

"마삼근."

 

그렇다면, 동산은 어디서 볼 것인가?

뜰앞의 전나무 긴 그림자 드리우고…

 

동산수초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삼이 서 근이다."

 

 

[무문의 말]

 동산 노인은 약간의 방합선을 공부했으니, 껍질을 양쪽으로 열자마자 내장을 다 드러내 보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말해 보라.

어디에서 동산을 보는가?

 

방합선: 방합 조개가 껍질을 열어 내장을 다 보여 주듯이, 종지를 숨김없이 모두 보여 주는 선이라는 말.

 

 

[군소리]

부처가 무엇인가 삼 서 근

숨김없이 다 드러내었지만,

수많은 선량한 남너들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는구나.

 

보지 않고 보아야

또렷이 보일 것이고

 

생각하지 않고 알아야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것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말을 따라 가지 않으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에게 자기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이 없고 누구나 다 똑같이 모두 이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도 '말'일 뿐이지요. '무엇이 부처입니까?' '커피', 지금 뜨거운 이 커피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질문하는 사람이 부처를 절에 모시고 있는 불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맞는다고 하는 것, 안다고 하는 것, 혹은 모른다고 하는 것, '모른다'라는 것을 '안다'는 것에 빗대서 '모른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개념입니다. 마치 매일 아침밥을 먹는 사람이 밥을 안 먹는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삼 서 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 막대기, 부처는 어디 감춰둔 것이 아니고 고상한 것도 아니고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따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분별하지 않는다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입니다. 눈앞이라고 해서 우리는 보는 눈앞이라고 생각하면 또 따라가는 것입니다. 방편으로 눈앞을 못 벗어난다고 하지만 눈이 없는 사람은 그럼 없느냐? 그런 색성향미촉법을 벗어난 것입니다. 삼 서 근, 삼이 서근이 왜 부처지? 이렇게 생각하면 벌써 명왕성까지 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은 항상 돌아다닙니다. 짝을 찾아다닙니다. 생각은 홀로 설 수가 없습니다.

 

방편은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방편은 방편일 뿐, 거기에 법은 없는 것입니다. 단지 그 방편으로 인해 자신에게 칼을 겨눌 수 있습니다. 이제껏 자신이라고 여겨왔던, 이제껏 새끼줄을 진짜 뱀으로 착각했던, 이제껏 몸의 그림자만 보고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두에 칼을 겨누는 것입니다. 마치 거대한 풍선이 한 침의 바늘로 빵 터져버리듯이, 그런 것입니다. 이 조그만 바늘 침이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몸집을 가진 거물 같은 생각을 이길 수 있을까? 할 수 있습니다. 바늘이 그런 도구가 되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찾고 몸으로 수행하고 어떤 것에 의지해서 계속하는 동안에는 바늘은 너무도 작아서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포기했을 때 더 이상은 할 것도 없고 더 이상은 생각도 아니고 자포자기했을 때, 바깥으로의 돌아다님, 구하는 것, 찾는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찌를 바늘이 보입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삼 서 근, 부처가 무엇입니까? 커피, 부처가 무엇입니까? 휴대폰, 삼서근을 찾고, 커피의 역사를 찾고, 휴대폰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삼서근은 삼서근을 말하지 않으면서 삼서근, 바로 탁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뿐, 이렇게 해도 이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삼서근을 말하면서도 삼서근을 말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이것도 방편의 하나일 뿐입니다. 언제나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무문관 제19칙) 평상시도(平常是道)

 

★남전에게 조주가 물었다.

조주: "어떤 것이 이 도입니까?"

남전: "평상심이 이 도이니라"

조주: "닦아 나아갈 방향이 있습니까?"

남전: "향하고자 하면 곧 어긋나느니라."

조주: "닦아 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남전: "도는 지(知)에도 속하지 않고 부지(不知)에도 속하지 않는다.

지는 망각이며 부지는 무기이니라.

의심할 바 없는 도를 정말로 통달하는 것은 태허같고

확연히 탁 트이어 어찌 억지로 시비를 할 수 있겠는가?"

 

★무문왈: 남전은 조주의 물음을 받고 바로 와해되어 녹아 내려서 흩어져 버렸다.

조주는 설사 깨달았다고 하여도 아마 삼십년은 더 참선을 해야 비로소 깨달게 될 것이다.

 

★봄에는 백화가 피어나고 가을에는 달빛이 밝도다.

여름에는 바람이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쌓인다.

쓸모 없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좋은 시절이다.

 

○평상심이 도라고 한다면, 일반인은 어떻게 하면 평상심이 도인줄 알 수 있겠는가?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일어나는 일체의 마음을 관찰하여

오염되지 않는 청정심을 유지하면 그것이 곧 평상심이 도임을 깨달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의 목숨은 얼마 사이에 있느냐?'

'숨 한번 쉬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렇다. 너가 도를 아는구나.'

이렇듯 도는 일상의 삶 속에서 찾아야 되리라.

 

◎평상심이 도라는 말은 마조선사의 상당법어이다.

이는 남전을 통하여 충실히 계승 발전되고

그의 제자 장사경잠과 조주종심에 의해 보편화된다.

 

학인: "평상심이 무엇입니까?"

장사: "졸리면 잠을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학인: "그 뜻을 좀 더 가르쳐 주십시요."

장사: "더우면 부채질하고 추우면 화롯불을 쬔다."

 

남전에게 조주가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이 말했다.

"평소의 마음이 도이다."

조주가 물었다.

"향하여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남전이 말했다.

"헤아려 향하면 어긋난다."

조주가 말했다.

"헤아리지 않으면, 어떻게 도인 줄 알겠습니까?"

남전이 말했다.

"도는 아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안다고 하는 것은 망령된 깨달음이요,

 모른다는 것은 깜깜하게 어두운 것이다. 만약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도에 통달한다면, 마치 허공과 같이 텅비고

탁 트일 것이니, 어떻게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겠느냐?"

조주는 이 말을 듣자마자 문득 깨달았다.

 

 

 

[무문의 말]

 남전은 조주의 질문을 받고서 (생각이) 다 사라지게 되어 (법을)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다만 조주의 질문에 따라 조주의 막힌 곳을 뚫어 줄 뿐이었다.) 조주는 비록 깨닫기는 하였지만, 다시 30년을 공부해야만 하였다.

 

 

[군소리]

 평소의 마음이 도인데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물 속에서 물을 찾고

자기의 머리를 찾기 때문이지.

 

평소의 마음이 도인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마음도 모르고 도도 모르고

어떻게도 할 수 없어야 하리라.

 

  

 요즘 햇살이 아주 좋습니다. 책 속에서 무엇을 찾겠습니까? 책 속에는 없는 것이지요. 이 햇살, 이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지금,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비추고 있지요. 이런 말하면 그런 것을 비추는 어떤 'x'라고 하는 존재를  떠올릴 수가 있는데, 맘대로 하십시오. 정말 맘대로 생각하는 게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온갖 것 마음대로 생각하는 게 우리의 마음이지요. 단지,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음을 알면 됩니다. 이상하게도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런 실체가 있다고 확고히 믿습니다. 그것을 주객전도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육감만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육감은 많이 속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봤는데, 진행자가 "여기 동영상에 나오는 사람이 공을 몇 번 치는지 보세요." 이렇게 해서 동영상을 보고 공을 치는 횟수만 헤아리는데, 횟수는 맞추었는데, 문제는 "고릴라를 봤습니까?"였어요. 사실 저는 전혀 보지 못했는데, 80명 중에 본 사람이 1/2를 넘었지요.

 

그처럼, 우리는 자신이 관심이 있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육감이 정확하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사실 로봇이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계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수술도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하지요. 우리가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적외선, 그밖에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지식이, 옳다 그르다고 분별하는 자신의 생각, 관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이게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원래 자신은 이 몸이 아닌데, 이 몸에 색을 입히고 생각의 장식을 해서 '나'라는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나'와 연결된 것은 모두 '남'이 되는 것이고 둘 사이에는 밀당이 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햇살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이렇게 있는 거잖아요. "햇살아, 내가 널 너무 좋아하니까 나한테만 줘~" "과일이 익어야 되니까 비는 오지 말고 계속 너만 있어라."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햇살이 그냥 있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도, 자성도 그냥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관점대로 생각대로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니까 존재하는 것이지, 그 모양을 존재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이 햇살이 모두를 다 비춰서 나타나는 것처럼, 햇살에는 아무런 생각도 존재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조주가  '평상심이 도다'하는 말씀을 듣고 문득 깨달았어요. 그래서 남전 스님에게 묻습니다. " 아, 원래 있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여기에 더 확실하게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남전 스님이 답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따지고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에는 주먹 쥔 손을 푸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있을 듯한 그런 주먹 쥔 손, 그 손을 탈탈 터는 것입니다. 가을에 콩 타작하듯이 탈탈탈~ 이것입니다. 이것!

 

 

무문관 제20칙 대역량인(大力量人)

 

★송원화상이 말했다.

"큰 역량있는 사람이 왜 발을 들어 일어서지 못하는가?"

[대력양인(大力量人), 인심대각불기(因甚擡脚不起)]

또 말했다.

"말한다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개구불재설두상(開口不在舌頭上)]

 

★무문왈: 송원선사가 배를 뒤집어 내장을 보였는데 아쉽게도 사람들이 받아 들이지 못한다.

비록 바로 받아 들인다 할지라도 무문이 있는 곳에서는 매서운 방망이를 맞아야 좋을 거야.

왜냐하면, 진금을 알려거든 불 속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송: 다리를 쳐들고 넓은 바다를 밟아 뒤집고

머리를 숙여 사선천을 다 볼지라도

한개의 어지러운 육신은 둘 곳이 없으니

...................................................

(청하건대 한 구절를 채워다오)

(⇒비로봉을 넘어가는 바람결에 실어두라.)

 

*송원 숭악[松源崇岳:1140-1202]: 밀암[密庵]의 제자. 무문과 동 시대 사람.

 

◎송원의 삼전어: 위의 이전어와 "눈밝은 사람이 왜 발아래 붉은 실을 끊지 못하는가?"

[명안납승인(明眼衲僧因) 심마각하홍사선부단(甚脚下紅絲線不斷)]

 

○이제 그대의 수행을 점검하여야 한다.

무릇 수행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데,

자신 보다 뛰어난 스승은 없으니 스스로 송원의 삼전어를 묻고 대답해 보세요.

큰 역량있는 사람이 왜 발을 들어 일어서지 못하는가?

(⇒한 붉은 수레바퀴 멈춘적이 있었던가?)

말한다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서 말하는가?

(⇒지금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영겁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이 증거하리라.)

눈밝은 사람이 왜 발아래 붉은 실을 끊지 못하는가?

(⇒원래 무실이니 끊을 일은 아니고, 다만 열매가 익으니 홍사선은 저절로 시들리라.)

자신의 대답을 스스로 만족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자유인이거나 사기꾼 둘 중 하나다.

삼전어를 내릴 때 촌각이라도 머뭇거린다면 다시금 자신을 돌아 보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위 무문의 게송 마지막 구절을 채워 보세요.

아마도 님의 여생의 친절한 안내자가 될 것 입니다.

만약 님께서 채운 귀절이 님의 여생에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면

님이 거짓을 고했거나 아직 갈 길을 잃고 헤매는 미혹한 중생임이 틀림없습니다.

 

송원숭악이 말했다.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무엇 때문에 발을 들지 못하는가?"

다시 말했다.

"말할 때에는 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문의 말]

 송원은 마음 속의 말을 다 털어놓았다고 할 만하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설사 즉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찾아와 아프게 한 대 맞기에 딱 알맞다.

무슨 까닭인가?

진금을 알아보려면 불 속에 넣어 보라.

 

 

[군소리]

둘 곳이 없으면 들고 있어야 하지만

누가 그대에게 들고 있으라 했는가?

포승줄도 없는데 스스로 묶여 있으니

스스로 풀지 않으면 누가 풀 수 있으랴?

 

[무문의 송]

다리 들어 향수해를 밟아 뒤집고

머리 숙여 사선천을 내려다보아도,

이 한 개의 몸뚱이를 둘 곳이 없으니

(청컨대 나머지 한 구절을 이어 주게)

 

* 향수해: 수미산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큰 바다.

  사선천: 사선정을 닦아서 태어나는 색계의 네 하늘. 수미산 위에 있는 욕계육천을 지나 그 위의 하늘에 있는 색계십팔천임.

 

 

오늘은 향수해에 비 오고

내일은 사선천이 9월 25일이다.

들고 있지 않으면 

때릴 곳도 없네

누가 있어 그대를 밝힐 것인가?

스스로 명확하게 밝혀야

두 번 속지 않으리.

1. 美醜는 해골물에 있지 않다

 

초기에 서양학자들은 불교 사상을 절대적 관념론(absolute idealism)이라고 규정하곤 했습니다. 절대적 관념론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적인 관념, 그러니까 절대적인 하나의 정신이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절대적인 관념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가 바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입니다. 그는 세계가 절대적인 정신, 그러니까 가이스트(Geist)가 펼쳐진 결과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서양 사유 전통 속에서 성장한 서양학자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자마자, 헤겔을 연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一切]이 단지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은 정말 절대적 관념론일까요.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 겁니다.


불교의 사상이 절대적 관념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연수(延壽, 904~975)가 편집한 ‘종경록(宗鏡錄)’이란 책에 등장하는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 스님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기억나시는지요. 바로 해골 물 이야기입니다. 당나라로 불교를 공부하러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지자, 두 스님은 황폐한 무덤에서 잠을 청하게 됩니다. 잠을 청하다가 원효는 너무나도 커다란 갈증을 느끼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어느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더랍니다. 갈증이 심해서 물은 스님의 입에 너무나 달게만 느껴졌지요. 아침이 되자, 속이 토하고 싶을 정도로 불편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밤 자신이 먹었던 물이 해골이 담겨져 있던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여기서 원효는 크게 깨달아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부처님께서 ‘모든 세상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三界唯心]’ ‘모든 대상들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萬法唯識]’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아름답고 추하다는 가치평가, 그러니까 달콤한 물이라는 가치평가와 더러운 물이라는 가치평가만이 우리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결코 우리 마음이 해골이나 그 안에 담긴 물마저 만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불교 사상은 절대적 관념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겁니다. 동일한 물임에도 우리는 이러저러하게 마음을 지어내서 일희일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바로 ‘삼계유심’이나 ‘만법유식’, 혹은 ‘일체유심조’라고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단지 우리 마음이 내린 가치평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널뛰기를 하고 있었을 뿐, 원효도 그대로고 의상도 그대로고 무덤도 해골도 그리고 물도 그대로 아닌가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여여(如如) 혹은 타타타(tathatā)라고 부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요.


2. 깨달음이란 왜곡되지 않은 마음

 

그렇습니다. 불교는 절대적 관념론이라기보다는 미국 현대철학자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가 표방했던 ‘근본적인 경험론(radical empiric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정신이나 이데아, 혹은 영원불변하는 자아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상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경험에 입각해서 설명하자는 것, 이것이 바로 근본적 경험론이니까요. 싯다르타 이래 불교의 핵심 가르침으로 자리 잡은 무아(無我, anātman)이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수행은 우리의 마음과 경험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가치평가를 낳는 우리 마음을 경험의 지평에서 바로잡으려고 노력합니다. 희론(戱論, prapanca)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논의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원효의 깨달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해골 물은 있는 그대로 있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함부로 “그 물은 매우 달았다”든가, 아니면 “그 물은 더러워서 역겨워”라는 가치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최소한 세 가지 마음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매우 단 물이군”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두 번째는 “더러워서 역겨운 물이네”라고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에게 일희일비를 제공하는 가치평가는 모두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야”라고 깨달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되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마음은 모두 우리가 가진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원효도 일심(一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깨달은 마음이나 미혹된 마음은 모두 우리가 가진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날 뿐이라는 것이지요.


선불교에서 화두(話頭)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미혹되어 있는지, 아니면 깨달은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깨달은 마음을 무엇인가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마음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은 마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왜곡하지 않고 보는 마음, 다시 말해 희론이나 가치평가에 물들지 않는 근본적인 경험을 직시하는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스무 번째 관문에서 송원 숭악(松源 崇岳, 1132-1202)은 두 가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며, “너희들은 있는 그대로의 근본적인 경험을 직시하고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먼저 두 번째 것을 살펴보지요.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開口不在舌頭上).” 당혹스러운 화두입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혀를 움직이는 것이고, 따라서 혀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말을 할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본다면, 우리의 당혹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겁니다.


3. 다리는 불편할 때 인식된다

말을 하면 혀가 움직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우리는 혀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평상시 혀를 의식하지 않고 우리는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혀를 의식한다면, 이것은 말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을 제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혀의 운동을 의식하지 않고, 반대로 말이 잘못 나왔거나 나온 말이 씹히면 우리는 혀를 의식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혀를 움직여야 말할 수 있다는 이론에 너무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말한다는 경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경험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는 송원 스님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끼게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송원은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우리의 경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말을 할 때 우리는 혀끝을 의식하지는 않는 생생한 경험 말입니다.


이제 송원 스님의 첫 번째 화두도 쉽게 이해가 되시는지요.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공을 찬다고 해보세요. 제대로 찬다면, 우리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헛발질을 한다거나 혹은 차고 난 뒤 발이 아프다면, 우리는 자기의 다리를 의식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다리가 아플 때나 불편할 때에만 우리는 다리를 의식하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노력을 의식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리를 의식하는 순간, 우리는 힘이 센 사람일 수 없습니다. 다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힘이 센 사람, 그러니까 대역량인(大力量人)은 그냥 다리를 들고 무엇인가를 세차게 걷어찹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문 스님도 송원의 화두에 다음과 같은 시를 붙였던 겁니다. “다리를 번쩍 들어 향수해(香水海)를 걷어차서 뒤집어 버린다.” 향수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를 요강을 차서 뒤집어버리듯이 뒤집어버리는 대역량인의 기백이 후련하기까지 합니다.


진정으로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인가를 세게 차서 뒤집어 버릴 뿐입니다. 그래서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법입니다. 당연히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이지요. 반대로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리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사람, 그러니까 힘이 약한 사람일 겁니다. 아직도 송원의 첫 번째 화두가 이해하기 힘든 딜레마로 보이시나요.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거뜬히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요.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린다는 의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무엇인가를 걷어찰 수 있다는 것이고, 혀끝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는 제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무문관 제21칙) 운문시궐(雲門屎궐)

 

★운문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 "무엇이 부처입니까?"[여하시불(如何是佛)]

운문: "마른 똥막대기."[乾屎(건시궐)] *木+:막대기 궐

 

★무문왈: 운문이 가세가 가난하여 끼니도 얻어 먹지 못하고,

일이 바빠 글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똥막대기를 가지고 선문을 지탱하려 하는구먼!

불법의 흥망성쇠를 가히 알 만하다.

 

★송: 번개불이 뻔쩍부싯돌이 반짝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지나 버린다.

 

○운문은 운문종의 개조이며 달마 이후 선종의 최고선사이다.

그는 어찌하여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였을까?

운문의 최악의 설법(?)은 선문염송 제2칙이며 님들이 잘 알고 있는 '주행칠보'

즉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한 선사의 평창이다.

 

⇒'내가 그 때 이 꼴을 보았더라면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서

굶주린 개에게 던져 주어 배불리 먹이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였을 것이다.'

핏덩이 싯타르타(세존)에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운문은 벽암록 6칙에 '날마다 좋은날'이라고 대중에게 평상심을 여실히 설하였지만,

우리네 삶은 언제나 마른 똥막대기 마냥 눈 앞에서 우리를 겨냥하고 있으니,

오호라! 오늘도 마른 똥막대기로 삼천대천의 삼세제불과 보살, 신장들에게 공양을 올리오니

님들의 덕화가 사해에 충만하여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옵소셔!

 

운문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똥 닦는 막대기다."

 

 

[무문의 말]

 운문은 집이 가난해서 소박한 음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일이 바빠 글을 휘갈겨 쓸 틈도 없다고 할 만하다.

걸핏하면 똥 닦는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문호도 떠받치니, 불법의 흥망성쇠를 알 만하구나.

 

[무문의 송]

번개가 번쩍이고

불꽃이 튄다.

눈을 깜빡이면

이미 놓쳤다.

 

[군소리]

번갯불도 허깨비고 부싯돌도 허깨비니

본래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데,

아무리 재빠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본래 다만 바로 이렇게 분명한 것을!

 

 똥 막대기, 이것은 조주의 '무'자 화두와 같이 막강한 것입니다. 화두는 생각을 일어나지 않게, 아는 것에서 탈피하는 것입니다. 뭔가 알듯 말듯한데 그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똥 막대기' 이 단순한 말에 찾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 '똥 막대기'를 분석해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시대적 배경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캔다든지, 역시 부처가 아닌 게 없으니까 '똥 막대기'도 이것이지, 늘 있는 이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다시 '똥 막대기'를 금덩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칙이 공부하는데 깔끔해서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친절하게 말해달라고 하지만 친절하면 더욱더 미궁 속으로 들어갑니다. 친절할수록 같이 흙덩이에서 뒹굴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누가 죽었다'하면, 특히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더 별일도 아니겠지만, 어쩌다 그 살아온 구구절절 스토리를 들으면, 특히 고생을 많이 했거나 남을 많이 도와줬거나 그런 이런저런 스토리를 들으면 자신의 일도 아닌데 눈물도 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렇게 빠져든 것에서 나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죽었다 하면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벌써 늦었습니다. 바로 알기 전에 벌써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꿈속에서 아무리 좋은 꿈 나쁜 꿈 무서운 꿈을 꾸지만 그게 꿈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순간적이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똥 닦는 막대기다."

 

임제 스님도 항상 직접적이고 순간적이셨지요. 부처가 무엇이냐? 언뜻 생각으로 돌아갈까 봐, 말을 하려고 입만 오므려도, 눈만 깜빡거려도, 바로 멱살을 잡습니다. "이게 뭐냐?"그래도 모르면 "내가 무슨 쓸데없는 일을, 밥이나 먹자!" 모르면 모르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자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말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자신의 내면이 달라집니다. 저는 집에서나 회사에서는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친정에서는 셋째 딸이고, 시댁에서는 맏며느리고, 집에서는 엄마이고,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친구들에게는 그냥 친구고, 직장에서는 사원이고, 아파트에서는 그냥 아줌마이지요.

 

딱 하나 다른 것은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지도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고, 기분이 나빠서 화를 내지만 화를 잡지도 않고, 기분이 좋아서 웃지만 그것도 순간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아서 불안한 게 아니라, 나고 사라지는 것들에서 나만이 홀로  영원함을 알아서 편안합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내야 하는 그런 세상의 잣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 그 하나하나가 오직 이뿐인 것입니다. 그런 일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자성은 딱 하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성(自性) 이지요. 언제나 이게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모두에게, 이렇게, 분명하게, 그런데 이상하게도 못 보니까, 자꾸 말을 따라서 보여주고 싶은 '상'을 찾으니까, "똥 막대기'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너무 늦었으니 그만 잡시다. 이것입니다. 이것! 이것은 어디에 갈 수도 없고 떨어질 수도 없어요. 다만 이것, 이것뿐입니다.

1. 불교, 神 숭배 초월종교와 달라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종교로 기독교와 불교를 언급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교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는 평가입니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신과 같은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초월종교와 함께 분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내재종교입니다. 초월(transcendence)이 우리의 삶과 세계를 넘어서는 곳을 지향한다면, 내재(immanence)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계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내재종교에 따르면 이 세계 자체가 극락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겁니다. 당연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입장, 이것이 내재종교가 초월종교와 다른 지점입니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에서 인간이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불교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신이나 예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사후에 심판을 거쳐야 간신히 허락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사정은 다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현재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가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돌아보세요. 사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보고 스님들이 간곡히 기원하던 말이 무엇이었던가요. “성불하세요!” ‘성불(成佛)’! 그렇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 주인공처럼 당당한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부처니까 말입니다. 집착으로 고통과 불만족에 시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집착을 끊은 부처로서 살 수도 있는 겁니다.


초월종교에서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신이 완전, 행복, 전지전능, 순수, 고귀함, 권력 등등의 가치를 상징한다면, 인간은 불완전, 불행, 무지, 무능, 타락, 저열함, 무능 등을 상징하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신에게 모든 것을 의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나약하고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으니까 신에게 의지한 채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불교도 초월종교가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108배를 바친다거나 불상에 기원하는 경배 행위를 불교에서도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불상으로 상징된 수많은 부처들은 나와 다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지 않다면, 그런 경배 행위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불교가 기독교와 함께 우리 사회를 양분하는 초월종교라는 오해가 발생한 것입니다.


2. 불교의 경배행위는 일종의 방편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 삶의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 우리는 속으로 다짐합니다. 언젠가 나도 저분처럼 스스로 삶을 냉철하게 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상에게 예배하는 행위는 이런 의미가 아니면 어떤 가치도 없는 행위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그러니까 자신이 부처가 될 때까지 부처가 되었던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에 가면 싯다르타 이외에 너무나 많은 불상이 있습니다. 그 불상들은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미륵(彌勒)이란 부처도 사실 치열한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 인도 사람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너무 존경이 커서 그런지, 혹은 스스로 너무나 보잘 것 없다고 좌절해서 그런지, 일반 불교 신도들은 미륵을 마치 신처럼 생각하고 의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불교 신도들은 불상에 대한 경배 행위를 통해 기독교도가 그렇듯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합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부처에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당당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부처가 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감당하기 힘들다면, 그나마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불교에서의 경배 행위는 일종의 방편(方便, upa-ya)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반대로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발원한 스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당당히 나아가려는” 치열한 구도 정신을 버리고 과거의 부처에 의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제야 ‘무문관(無門關)’의 21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를 모두 갖춘 것 같습니다.


부처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운문(雲門, ?~949) 스님의 대답은 차라리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마른 똥 막대기(乾屎)!” 부처가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추한 ‘마른 똥 막대기’라니, 운문 스님은 지금 미친 것일까요. 바로 이 대목이 여러분이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성스러운 부처에 모욕을 가하는 운문 스님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운문 스님은 사찰에 모신 황금불상, 그러니까 도금한 불상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황금만큼 똥색이 나는 것도 없으니까요. 아마 제자는 위엄이 넘치며 심지어 화려하기까지 한 황금불상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자신도 저런 부처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나 봅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깨달았던 사람이 높아 보이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자신이 낮아 보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 너무나 먼 일로 보여서 절망하게 됩니다. “마른 똥 막대기!” 지금 운문 스님은 제자의 숭배대상을 똥통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숭배하는 것이 없을 때에만, 제자는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3. 다른 것 숭배하면 주연 아닌 조연

 

운문의 우상파괴는 과거의 부처들을 숭배하느라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제자를 깨우려는 사자후였던 셈입니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고 발원한 놈이 다른 놈을 흉내 낸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 운문의 제자는 주인공, 그러니까 주연의 자리를 버리고 조연을 선택하려고 했던 겁니다. 다른 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조연의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그만큼 깨달음과 해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깨달음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아는 것이고, 해탈은 조연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운문 스님은 지금 자신의 제자가 초월종교와 내재종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겁니다. 평범한 불교 신도가 되는 속박의 길과 스스로 부처가 되는 해탈의 길, 그 갈림길 사이에 제자는 서 있었던 겁니다.


“마른 똥 막대기!”라는 호통으로 운문 스님은 평범한 신도가 되는 길, 그러니까 초월종교로 가는 길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운문이 얼마나 그의 제자를 사랑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이제 제자에게는 스스로 부처가 되는 해탈의 길, 즉 내재종교로의 길만이 남겨진 셈입니다. 이처럼 초월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내재종교입니다. 초월종교는 인간을 조연으로 만들지만, 내재종교는 인간을 주연으로 긍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과연 불교만의 생각일까요. 위대한 정치철학자 바쿠닌(Mikhail Bakounin, 1814~1876)도 자신의 주저 ‘신과 국가(Dieu et l’E´tat)’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으니까요.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이성과 정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인간들을 명실상부한 노예 상태로 이끈다.” 아마 바쿠닌이었다면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보고 “녹슨 쇳덩어리”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숭배 대상이 파괴되어야,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녹슨 쇳덩어리”라고 바쿠닌이 외쳤다면, 교회나 성당에서는 난리가 날 것입니다. 바쿠닌은 이단이나 사탄의 취급을 받고 화형에 처해질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이를 수 없는 절대적인 초월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는 운문 스님이 파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무리 초월종교의 색채를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내재종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21번째 관문을 지나다보니 젊은 시절 어느 사찰에서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당시 패기만만했던 저는 어느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무문관 제22칙) 가섭찰간(迦葉刹竿)

 

★아난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가섭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아난: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한 것 외에 따로 무엇을 전하셨습니까?"

가섭: "아난아!"

아난: "예"

가섭: "저 문 앞의 찰간을 넘어 뜨리라."

 

★무문왈: 여기서 적절한 한 마디를 할 수 있으면 저 영산회상의 법회가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엄연함을 볼 것이나, 아직 그렇지 않으면

비바시불 때 부터 마음을 열어 지금까지 하여도 묘법의 경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송: 물음과 답변이 어떻게 다를까?

몇 사람이나 이 문제에 사무쳤을까?

형이 부르고 아우가 답하니 집안의 수치로다.

음양에 속하지 않은 특별한 봄이라니

 

○가섭과 아난은 세존의 제자들이지만 가섭은 법을 이어받았고,

아난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세존의 제자들 중에 가장 총명하고 가까이서 시중들었던 아난존자께서

가섭과의 이 아름다운 만남이 없었다면 세존의 법은 이어졌을까?

아난은 가섭의 정성어린 설법에 문앞의 찰간을 넘어 뜨리고

가섭의 법통을 이어 받았으니 세존에서 가섭,

가섭에서 아난으로 조사의 대를 이었다.

 

찰간은 절 앞의 깃발 세우는 대나무 장대를 말합니다.

님께서도 찰간을 꺽어 보십시요.

세상이 훤히 보인다고 생각하는 대낮이,

어쩌면 햇빛에 가려서 진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님께서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그것이

사실은 진실을 가리는 환상일수도 있습니다.

 

가섭에게 아난이 물었다.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것 이외에 따로 어떤 물건을 전하셨습니까?"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아!"

"예."

"문 앞의 찰간을 넘어뜨려라!"

 

*찰간: 절의 당탑 앞에 세워 두는 긴 장대로, 그 위에 보주(寶珠)가 붙어 있다. 사원에서 설법이 있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세우는 깃발을 건 장대이다.

 

 

[무문의 말]

 만약 여기에서 한마디 알맞은 말을 뚜렷이 할 수 있다면, 곧 영취산의 법회가 아직 끝나지 않고 엄숙하게 열리고 있음을 볼 것이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비바시불이 일찍이 (불법에) 마음을 쏟았으나 지금까지도 묘법을 얻지 못한 것이다.

 

[무문의 송]

물음이 어떠하건 답은 뚜렷한데

몇 사람이나 여기에서 안목이 생길까?

형이 부르고 동생이 대답하여 집안의 허물을 드러내니

사계절에 속하지 않는 특별한 봄인가 보다.

 

[군소리]

형이 부르니 동생이 답했는데

부처님이 전한 법이 어디 있는가?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리고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은 잊어라.

 

사계절에 속하지 않는 봄, 우린 이런 말을 들으면, '아, 봄이라는 것은 사계에 들어가는데 그런 봄이라는 게 있는가 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 법을 깨달으면 그런 특별한 봄이 있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난도 그렇게, (손가락을 다쳐서 오타가 많이 나네요. 엄지 칼에 베여서 다섯 발 꿰맸어요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거미줄입니다. 미세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약간의 진동이라도 있으면 바로 거미가 휙~ 감아버리죠.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중을 20년 들고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에도 옆에 있었고, 그런데 가섭에게 법이 부촉이 되었습니다. 아난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경전이 모두 아난의 기억 구술(부처님의 말씀) 편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난이 도대체 아는 것은 다 알고 있는데(사실 이해가 안 되면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이라는 금란가사가 아니거든요. 그럼 뭘까? 궁금한 것입니다. "금란가사 외에 또 무엇을 전수받았는지 알려주십시오." 때가 된 것입니다. 부처님 옆에서 20년 동안 설법을 들으면서도 몰랐는데, 이제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는 법이 없었단 말입니다. 진심으로 몰라야 됩니다. 무슨 말인지는 다 알겠는데 정말 이 하나를 모르겠다고, 그러면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를 모르는데 둘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의 결집에 아난은 법을 몰라서 참석하지도 못 했습니다. 의분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분심이 일어났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을 거의 다 기억하는 아난이 가섭에게 찾아갔습니다.

 

"금란가사 외에 또 어떤 것을 전수받았습니까?"  그 '때'를 알아차린 가섭이 "아난아!", "예" "저 문 앞의 찰간을 넘어뜨려라!" 여기서 아난이 깨쳐서 경전 편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해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이 살아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도, 경전을 책처럼 읽으면 일단 이해하기 힘들어서 어렵고, 그 어려운 것을 한문을 번역한 음을 따라서 외우는 것을 보면 지금도 아난과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진짜 법을 알려면 그런 것을 관둬야 합니다. 제일 먼저 이것을, 원래 있는 것, 자신의 본모습, 본래면목을 봐야 합니다. 하나하나에 자신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상이 있건 없건, 느끼던 안 느끼던, 생각을 하든 안하든, 언제나 이렇게 있습니다. 깨친 이후에는 뭘하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부자와 가난한 자, 고통을 받는 자와 주는 자, 어떤 옷을 입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나눠지고 분별되고 높낮이가 있지만 옷을 벗으면 다른 게 없는 것처럼, 그 옷이 주는 페르소나, 그런 게 없습니다. 언제나 천상 천하에 오직 하나, 이것뿐 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은 몸이 아닙니다. 몸은 우리가 아는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갑니다. 연극에 맞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연극은 배우가 하는 것이고 자신은 배우가 아닙니다. 비록 무대에서는 죽었지만 실제 자신은 죽지 않음을 어디에다가 증명하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게, 이게, 이 법, 이것을 알고자 공부하는 것이지, 세상의 잣대로, 경험치로, 선입견으로 하는 그런 공부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이라고 하는 그 절대부정할 수없는 그 한 생각으로의 탈출입니다. 그만큼 공부는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이것을 깨쳐도 꾸준히 해서 안심입명, 맡기십시오. 자신이 해야 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혀, 그렇다고 손이 베여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꼭 쥐고 있으란 것은 아닙니다. 병원 가서 꿰매야 합니다. 항상 '도'아니면 '모'로 가는 생각, 생각이 앞장을 서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도' 됐다고 합니다. 전도는 착각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 해서 그런 거지, 원래가 다 있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찰간대를 꺾어 버리고 들어오십시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뿐!

 

(무문관 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

 

★육조가 혜명 상좌에게 쫓겨 대유령에 이르자 혜명이 뒤쫓아와

육조가 이를 보고 바로 의발을 바위 위에 던지고 말하였다.

 

육조: "이 의발은 믿음을 표시하는 것인데 힘으로 빼앗아도 되겠는가?

그대에게 맡기니 가지고 가시요."

혜명 상좌가 들려고 하였으나 태산처럼 움직이지 아니하니 놀라서 부들부들 떨었다.

 

혜명: "나는 법을 구하려고 온 것이지 의발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니

원하건대 행자여 내게 법을 열어 주십시요."

 

육조: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 때에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 면목인가?"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

 

혜명은 즉시 크게 깨닫고는 전신에 땀을 쏟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를 하며 물었다.

혜명: "위의 비밀한 말씀은 비밀한 뜻 외에 다른 뜻이 있습니까?"

 

육조: "내가 지금 그대에게 설한 것은 비밀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자기 자신의 면목을 돌이켜 보았다면 비밀은 도리어 그대에게 있는 것이다."

 

혜명: "제가 황매산의 오조 밑에서 대중과 함께 있었으나

사실은 자기 본래면목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 들어야 할 곳을 지시 받으니

사람이 물을 마시고 나서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행자께서는 바로 저의 스승이십니다."

 

육조: "그대가 진정 이렇다면 나와 그대는 황매산의 오조를 같이

스승으로 섬길지니 스스로 잘 지키기 바랍니다."

 

★무문왈: 육조의 이 일은 도망가다 급하게 나온 노파심이 절절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여지(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서 입에 넣어 주어서 다만 삼키게 한 것이다.

 

★송: 묘사 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칭찬도 못 미치니 그 마음 쉬게나.

본래면목은 감출 수가 없으니

세계가 무너져도 그것은 남으리라.

 

○무엇을 일려 본래면목이라 할까?

선악이나 시비, 오호, 성속의 분별을 떠나서,

부모에게 몸을 받고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이를 수 있다면 세상의 스승이 되련만, 어찌 수고를 아끼겠는가?

궁금한 분은 지금 즉시 부모미생전으로 돌아가라.

본래면목이 그대의 생사를 거두리라.

혜명이 전생의 공덕으로 육조를 만나고 본래면목을 찾았다.

하지만, 원래 낮 두꺼운 싸움꾼이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깨비 가면을 눌려 쓰고 본래면목이라 허세를 떤다.

님이시여, 과연 어디가 혜명이 도깨비 가면을 눌려쓴 허세인가?

직하에 알아차린다면 님의 본래면목은 감출곳이 없으리라.

육조는 명 상좌가 대유령까지 쫓아온 것을 보고는 곧 의발을 바위 위에 던지고 말했다.

"이 옷은 믿음을 표시하는 것이니, 힘으로 다툴 수 있겠습니까? 당신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명 상좌가 그것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산처럼 움직이지 않자, 머뭇거리고 두려워 떨면서 말했다.

"저는 법을 구하러 온 것이지, 옷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행자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육조가 말했다.

"선도 생각하지 마시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러한 때에 무엇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

명 상좌는 즉각 크게 깨닫고서, 온몸에 땀을 흘리고 눈물을 쏟으며 절을 하고는 물었다.

"이와 같은 비밀한 말과 뜻 이외에 또 다른 뜻이 있습니까?"

육조가 말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말한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당신이 자신의 본래면목을 돌이켜 본다면, 비밀은 오히려 당신 자신에게 있습니다."

 

명 상좌가 말했다.

"제가 비록 황매에서 대중을 따랐으나 아직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 들어갈 곳을 가르쳐 주시니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차고 따스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행자께서 저의 스승이십니다."

육조가 말했다.

"당신이 그와 같다면, 나와 당신은 함께 황매를 스승으로 모신 것입니다. 스스로 잘 보호하여 지니시기 바랍니다."

 

 

[무문의 말]

육조는 급한 일이 생긴 집안에서 염려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할머니와 같다고 하겠다. 비유하면, 새로 딴 과일을 껍질도 벗기고 씨를 빼서 그대 입안에 넣어 주고는, 다만 그대가 한입에 삼키기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군소리]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과일의 알맹이를 입에 넣어 주는 게 아니라,

강철로 만든 과일을 통째로 입에 넣어 주어

곧장 씹어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삼키는 것은 이해입니다. 생각입니다. 생각은 음식이 입에 있을 때 느끼는 것들입니다. 입에 있을 때만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을 느끼는 것이지, 목으로 넘어가면 맛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생각이 있을 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은 그런 게 없거든요. 음식에 맛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먹으니까 맛이 있는 것이잖아요. 똑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에 따라서 모두 맛이 달라집니다. 법도 비슷합니다. 이 법이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것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생각에 닿는 순간, 아까 모든 맛을 느끼는 것처럼 이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프죠,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쁘죠,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화내죠, 슬픈 일이 생기면 울죠, 그건 저절로 다 되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것은 어느 한 것을 집착하기 때문에 감정 소통이 안되니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혈류가 막히면 병이 생기는 것처럼, 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살면 되는데, '인간'이기 때문에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왜? 분별하는, 어떤 형태를 가졌든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더 나은, 좀 더 남들보다 위에, 좀 더 존경받는 위치에 있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과 연결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 발 밑에서 저 우주까지, 이 세상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어!' 그렇게 많은 이유를 내세우겠지만, 원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뭔가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의심 자체가 공부의 시작입니다. 그냥 인간사 사는 대로 살지, 돈 벌기도 힘든데 뭐 복잡게..그러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아무도 욕할 사람이 없습니다. 차라리 사회생활에서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태어나고 죽습니다.

 

죽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살기 위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공부에 관심을 가지거나 공부하는 사람은 후자입니다. 이 모든 꿈에서, 이 모든 굴레에서, 이 모든 생각에서 한번, 탁! 깨어나는 자, 그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깨울 수도 있고 재울 수도 있습니다. 왜? 자면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흔들어 깨워야 하고, 계속 잠만 자는 사람은 깨워야 자신처럼 계속 잠자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 또 깨어보니 잠을 다시 못 자는 사람에게는 또 재워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정해진 게 있는 게 있으면 병이 됩니다. 깬 사람은 더 이상 쥐고 있는 게 없습니다. 원래가 '공'이니까, 모든 것들이 다만 자신이 없는 자신 안에서 다 일어나는 일이니까, 한 집안의 일일뿐인 것입니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고 이럴 때 명상좌의 본래면목은 뭔가? 명상좌에게 묻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강철로 된 과일이든, 똥 냄새나는 과일이든, 넘어가지 않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줄에 매달린 강아지가 고기 음식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줄이 짧아서 음식에 닿을까 말까 합니다. 어쨌든 먹어야 배가 부릅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기회는 항상 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뛰어온 명상좌에게,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항상 열려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뿐, 이것뿐입니다.

 


1. 허영은 삶 긍정 못할 때 생겨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하지 못하는 순간, 인간은 외적인 무엇인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권력과 지위를 추구하는 것도, 엄청난 부를 욕망하는 것도, 그리고 학위를 취득하려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허영(虛榮)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주목받고 싶은 애절함일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과정이라면, 수행자는 당연히 허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권력, 지위, 부, 그리고 학위 등에 연연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찰이나 승가 조직에서도 허영을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허영에 빠져 있는 스님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사는 모양새는 사찰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1,400여 년 전 중국 황매산(黃梅山)에서도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났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치열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선종 내부에서 말입니다. 선종의 5조였던 홍인(弘忍, 601~674)이 달마(達磨)에서 시작된 깨달음의 등을 전하려고 할 때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 맙니다. 깨달음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를 홍인은 오랫동안 수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신수(神秀, ?~706)가 아니라 일자무식의 혜능(慧能, 638~713)에게 준 것입니다. 귀족 출신이었던 신수는 지성과 세련됨, 그리고 수제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따르던 스님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신수가 홍인 스님을 이어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이 되는 날, 그들의 지위와 신분도 그에 따라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권력 구조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홍인 스님은 황매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땔나무나 나르고 있던 중국 남부 시골출신 혜능을 6조로 승인해버린 겁니다. 아마 대부분의 스님들은 “홍인 스님이 노망이 들었다”고 혀를 끌끌 찼을 겁니다. 이들 중 가장 분노한 것은 출가하기 전에 장군으로 있었던 혜명(慧明)이란 스님이었습니다. 뛰어난 신체를 갖춘 혜명이 신수의 지지자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달아나는 혜능을 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중국 남부에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관문 대유령(大庾嶺)에서 혜명은 혜능을 따라잡는 데 성공합니다. 기력이 딸려서인지 혜능도 더 이상 도망가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2. 선악은 연극배우 가면 같은 것

 

바로 이 순간 위기를 모면하려는 혜능의 기지가 번쩍입니다. 혜능은 홍인에게서 받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올려놓습니다. 어차피 혜명이 찾고자 하는 것은 6조의 징표인 가사와 발우일 테니까 말입니다. 혜명은 혜능을 버려두고 가사와 발우를 집어 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가사와 발우는 천근의 무게를 가진 듯 들레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혜명은 황당한 상황에 당혹감과 아울러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홍인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다고 해도, 자신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스스로 6조라는 권력을 포기하고 혜명은 혜능에게 가르침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혜능은 혜명에게 화두 하나를 던집니다. 그것이 바로 ‘무문관(無門關)’의 23번째 관문에서 우리가 뚫어야 할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그런지 혜능의 화두는 다른 화두들과는 달리 직설적이고 분명합니다.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 여기서 선종에서 유명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 그러니까 ‘원래 맨얼굴’이 바로 그것입니다. 맨얼굴이란 개념은 가면, 그러니까 ‘페르소나(persona)’란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 연극배우들이 연기할 때 사용하던 가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면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맨얼굴을 생각할 수도 혹은 이야기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혜능은 혜명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너의 맨얼굴을 직시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혜능은 별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 선종 특유의 가르침,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직지인심’은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는 뜻이고, ‘견성성불’은 ‘자신의 불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불성이란 어떤 페르소나도 착용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불성도 자신의 마음도 모두 ‘본래면목’, 즉 맨얼굴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맨얼굴을 가리키거나 본다는 것은 페르소나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거나 ‘자신의 본성을 본다’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직지(直指)’나 ‘견(見)’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두 말은 자신의 마음이나 불성을 가리고 있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제거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삶의 주인공 될 때 부처도 가능

 

앞에서 혜능의 화두가 다른 선사들과 달리 직설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그것은 그가 바로 부처가 되기 위해 우리가 제거해야할 페르소나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페르소나는 바로 선악이란 관념에 다름 아니었던 겁니다. ‘무문관’의 23번째 관문의 이름이 ‘불사선악(不思善惡)’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선악을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은 바로 페르소나를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잠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라는 철학자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도 선악 관념이 페르소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지요.


“선과 악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주저 중 하나인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니체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과 악’과 ‘좋음과 나쁨’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핵심은 ‘선과 악’의 기준과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가되지만, ‘좋음과 나쁨’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외적인 권위에는 종교적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을 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선악이란 관념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기원을 두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고 적응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임에도 어른이라는 이유로 공손하게 혹은 존경한다는 듯이 인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두터운 페르소나를 하나 쓰는 셈이지요. 물론 이런 페르소나를 쓰는 것은 그것을 쓰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페르소나를 쓰는 사람은 삶의 당당한 주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권위나 가치평가를 내면화한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문관 제24칙) 이각어언(離却語言)

 

★풍혈 화상에게 스님이 물었다.

스님: "말이나 침묵으로 이[離]와 미[微]에 드나들면서, 어떻게 해야 진리를 범하지 않고 통할 수 있습니까?"

[원래 여하시인경구불탈(如何是人境俱不奪): 무엇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풍혈: "강남의 삼월을 오래도록 기억하지, 자고새 우는 곳에 백화가 향기로웠네."

 

* 풍혈 연소[風穴延沼:896-973]: 여주 남원 혜옹의 제자.

* 승조[僧肇:374-414]스님의 '보장론' 중의 두 번째 품으로 이미체정품에 나오는 구절.

 

기입리(其入離) 기출미(其出微): 그 들어갈 때는 이 나올 때는 미.

가위본정체가자리미야(可謂本淨體可自離微也): 본정의 체는 스스로 이와 미를 한다.

거입고명리(據入故名離) 약용고명미(約用故名微): 들어 가니 이요, 쓰여지니 미다.

혼이위일(混而爲一) 무리무미(無離無微): 혼연히 하나가 되면, 이도 없고 미도 없다.

체리불가염(體離不可染) 무염고무정(無染故無淨): 체는 이로 물들 수 없고, 물들지 않으니 청정하지도 않다.

체미불가유(體微不可有) 무유고무의(無有故無依): 체는 미로 있을 수 없고, 있지 않으니 의지할게 없다.

시이용이비유(是以用而非有) 적이비무(寂而非無): 쓰여도 있는 것은 아니고, 고요해도 없는 것이 아니다.

비무고비단(非無故非斷) 비유고비상(非有故非常): 없지 않으니 끊을 수 없고, 있지 않으니 영원함도 아니다.

 

★무문왈: 풍혈의 기지가 번개불과 같아서 꺼리낌없이 행했으나

어찌 앞에 앉은 이의 혓바닥을 끊지 못했을까?

만약 이 점에 관해서 본 바가 있어 정곡을 찌를 수 있다면 스스로 나아갈 길이 있으리라.

언어 삼매를 떠나서 한 마디 해봐라.

 

★송: 풍골의 구를 드러내지 않고(격조 높은 어구) 말하기 전에 먼저 보였네.

입을 열어 지껄이는 것은 그대를 대망조 들게 하리라.

 

○스님의 질문 '어묵섭이미(語默涉離微) 여하통불범(如何通不犯)'은

말을 해도 진리를 범하고 안해도 범하니 어찌하면 좋으냐는 질문이다.

과연 당돌한 스님의 질문이다.

만약 그대가 질문의 언구에 매이지 않는다면 직하에 풍혈의 가풍을 볼 수 있겠으나,

언구에 매이여 범, 불범의 경계를 논한다면 이십년은 족히 참선을 해야 풍혈을 볼 수 있으리라.

 

협산선사가 자신의 경계를 묻는, '무엇이 협산의 경계입니까?'라는 물음에

 '원포자귀청장후(猿抱子歸靑장後) 조함화락벽암전(鳥含花落碧巖前):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절벽을 돌아가고 새들은 꽃을 물고 푸른 바위로 날아든다.' 라고 대답하였는데,

훗날 법안종의 법안 문익은 이 게송을 협산의 경치를 읊은 경계라는 생각을 이십년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스스로 불립문자하여 언구에 매이지 않아야 하고,

나의 주관과 일체의 경계의 객관을 초월하여 자재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작가라 하겠다.

 

풍혈 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말과 침묵은 들어가고 나옴에 관계하니, 어떻게 통해야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풍혈이 말했다.

"강남의 3월을 항상 생각하는데, 자고 지저귀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롭다."

 

자고: 꿩과에 소속된 메추라기 비슷하게 생긴 새. 봄에 날씨가 따뜻하면 나타나 운다.

 

 

[무문의 말]

풍혈의 솜씨는 번개 같이 재빨라서 길을 찾으면 곧장 가니, 어찌 앞 사람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지 못하랴?

만약 여기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모든 속박에서 빠져나올 길이 저절로 있을 것이다. 이제 언어의 세계를 떠나서 한마디 말해 보라."

 

 

[군소리]

묻는 자는 중생 노릇을 하고

답하는 자는 부처 노릇을 하여

한바탕 멋진 장면을 연출하였으나

비웃는 눈길의 구경꾼도 있느니라.

 

  

 온갖 꽃이 향기롭지만 정신이 한 곳에 팔려 있는 사람에게는 향기를 맡지 못 합니다. 등산을 하게 되면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는데, 그렇게 음악을 듣고 가는 사람은 바람 소리와 향기, 발자국 소리, 새소리 등등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그것은 노래에 심취해 있기도 하지만 자신이 또 흥얼흥얼 거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음악을 딱 끄면 그제야 느낍니다.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어서 낙엽이 떨어지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숨소리마저도, 보이는 것도 틀립니다. 원래 없었던 게 아니잖아요. 원래 있었는데 자신이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못 본 것입니다.

 

그 음악처럼, 우리는 수시로 비교되고 이해와 득실을 따지는 그런 욕망에 휩싸여서, 아니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니까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포장하기 쉽고 모르니까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하고 모르니까 자꾸 확실한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은 그런 것입니다. 이 법 공부도 세속 공부처럼 자꾸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더 많이 공부해야 된다, 더 망상을 쳐부숴야 된다, 욕심을 버려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된다, 싸워도 싸움이 되지 않는다, 화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 모르니까 그런 것들이 또 공부라고 부랴부랴 힘들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새의 노래가 마치 입안에서 나오는 것처럼 입을 분석하고 나누고 그처럼 또 연습하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모양을 따라 쫓아가는 것입니다.

 

힘이 듭니다.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면 하다가 지치게 됩니다. 지치게 되면 다시 표시도 없이 세속적으로 빠지게 됩니다. 눈앞의 사탕수수가 더 실제적으로 보이게 되고 거기에 의지하게 됩니다.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물건을 잃어버리듯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잊어버리고 다시 걸인 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을 알면 걸인 행세를 해도 아주 당당하죠,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는 것이니까 즐겁게 기꺼이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을 모르면 항상 남의 돈에 의지를 하게 됩니다. 그게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말과 침묵은 들어가고 나옴에 관계하니, 어떻게 통해야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말과 침묵이 들어가고 나온다, 이게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면 있고 말 안 하면 없다, 그래서 말을 하니까 이게 드러나고 말을 안 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이게 새소리가 입안에 있으니까 강제로 입을 열거나 닫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생각이고 망상인지는 스스로의 안목만큼 알 수 있습니다. 비둘기의 목숨이나 우리 인간의 목숨이나 한치의 크고 작음도 없이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기에서 분별하지 않으면, 생각의 기준이 없으면 어느 게 크고 어느 게 작고 어느 게 귀하고 어느 게 천합니까? 나눌 수 없고 분리될 수 없어요. 단 하나, 이뿐입니다.

 

새는 저절로 울고 꽃은 저절로 핍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저절로 자라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고 잎이 떨어지듯이 인간이라는 이 목숨이 다하면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사람은, 우리의 몸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소망인 불로장생, 엄청난 노력을 한 중국의 진시황제,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어떤 노력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생각을 의지하고 무엇을 하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과 같이 갑니다. 생기자 죽는 태아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기도 있고, 무수한, 어떤 인연을 거치든 태어난 것은 죽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삶이라는 배를 타고 욕망이라는 노를 저어 죽음으로 가더라도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의지하지 않아서 두렵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원래 자신의 본성, 본래면목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욕망의 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노를 놓았는데 망망대해에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또 찾는 거지요. 노를 놓으면, 생각에서 한번 벗어나면, 이제껏은 생각이 앞잡이 역할을 다해왔는데, 이제 바다가 길을 열어줍니다. 어디를 가든 어느 곳이든, 바다 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원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하면 할 게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런 음악에 심취하지 않으면 원래 정해져 있지 않은 새소리, 바람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발자국 소리, 다람쥐도 보이고 도토리도 보이고, 원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풍혈 스님이 "강남의 3월을 항상 생각하는데, 자고 지저귀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롭다." 이것, 이것을 알면 됩니다. 이것이라고 명시해야 할, 보여야 할 것은 없지만 항상 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1. 깨달은 사람의 말은 시가 된다

 

오도송(悟道頌)을 아시나요. 깨달음에 이른 순간, 위대한 선사들이 남기는 시(詩)를 말합니다. 논리적인 분이라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종이 깨달음의 순간을 언어로 포착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경전만이 아니라 시도 분명 문자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오도송도 결국은 불립문자가 아니라 ‘입문자(立文字)’, 즉 문자를 세운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반론은 오도송과 같은 ‘시’가 가진 특이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시는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모두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요. 김수영의 시는 한용운의 시와 다르고, 한용운의 시는 기형도의 시와 다른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깨달음과 시는 묘하게 공명하게 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곧 부처가 되었다는 것, 결국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영위하게 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에 이른 순간,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른 순간, 선사들이 남긴 말은 글자 그대로 바로 ‘시’가 될 수밖에 없지요.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은 바로 ‘시’이니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깨달음에 이르렀으니 멋지게 오도송을 남겨야 한다고 해서 오도송이란 시가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진정한 자기가 되었으니까,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주인공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니까, 깨달음에 이른 사람의 말은 그리고 문자는 바로 ‘시’가 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오도송을 한 번 읽어볼까요.

 

남아 대장부는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어야 하는데(男兒到處是故鄕),
아직도 몇 사람은 오래도록 손님의 시름 속에 머물러 있네(幾人長在客愁中).
단말마의 할(喝)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온 세상을 열어젖히니(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날아다니는구나(雪裏桃花片片飛).

 

1917년 12월 3일 밤 10시 설악산 오세암에서 한용운에게 일어났던 깨달음입니다. 한용운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오세암에서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 행과 두 번째 행에는 참선하고 있을 때의 한용운의 내면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 행을 통해 우리는 한용운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진실되다”, 그러니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표방했던 임제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두 번째 행에서 드러납니다. 임제처럼 주인이 되려고 했지만 당시 한용운 아직도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손님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심지어 아직도 몇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향수까지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한용운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겁니다.

 

2. 말을 해도 문제 침묵해도 문제

 

주인이 되려고 참선에 들기는 했지만, 한용운은 주인은커녕 오히려 상념에 빠지면서 몇몇 그리운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고적한 설악산 한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던 오세암에는 예상치 못한 단말마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무엇인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건 동산 스님의 몽둥이찜질이나 임제 스님의 사자후와 같은 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모든 상념을 끊고 오세암의 주인, 즉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한용운은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에 이른 겁니다. 깨달음의 순간과 그 풍경을 노래하는 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을 보세요. 물론 12월이니 복숭아꽃이 필 리 만무합니다. 복숭아꽃은 춘삼월에 피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한용운이 보고 있던 휘날리는 복숭아꽃은 달빛을 머금고 있는 눈송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춘삼월을 물들이는 복숭아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상념을 자아냈던 몇몇 사람들이 그의 뇌리에서 완전히 떠나고 있는 내면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회로가 길기도 했습니다. 그건 이번에 우리가 통과해야만 하는 ‘무문관(無門關)’의 스물네 번째 관문이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난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이제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이 스물네 번째 관문은 타인의 문자에 빠져 있던 제자가 풍혈(風穴, 896~973) 화상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됩니다. “말과 침묵은 각각 ‘이(離)’와 ‘미(微)’를 침해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와 미에 통하여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과 침묵은 각각 이와 미를 침해한다(語默涉離微)’라는 명제는 제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승조(僧肇, 384~414)의 이야기입니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승조는 부처의 마음을 이(離)와 미(微)라는 두 개념으로 설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개념은 깨달음에 이른 마음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조는 이(離)를 무상(無相)으로, 미(微)를 ‘상즉무상(相卽無相)’이라고 정의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고개가 갸우뚱거리실 겁니다.


물을 비유로 들면 승조의 생각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그릇에도 담기지 않는 물은 어떤 모양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無相, animit ta)’입니다. 원래 상(相, nimitta)이란 말은 모양이나 형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무상이란 특정한 모양이나 형태가 없다는 의미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부처의 자유로운 마음은 규정하는 개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승조는 부처의 마음을 ‘이(離)’라고 규정했던 겁니다. ‘이(離)’는 ‘떠났다’, 혹은 ‘벗어났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모양이 없는 물도 특정 그릇에 담기면 그릇 모양에 따라 모양이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경우라고 해도 특정 그릇에 담긴 물의 모양이나 형태는 물 자체의 모양이나 형태는 아니지요. 원래 물에는 모양이나 형태가 없으니까요. 승조가 ‘상즉무상(相卽無相)’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릇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물에는 모양이 없다는 겁니다. 승조가 ‘미(微)’라고 이 상태를 규정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미(微)’은 ‘숨겨 있다’, 혹은 ‘은미하다’는 뜻이니까요.


3. 꽃을 만나면 그저 꽃에 담길 뿐

 

물은 그 자체로는 모든 형태에서 ‘벗어나[離]’ 있지만, 특정 그릇을 만나면 그 자유스러운 성질을 ‘숨길[微]’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스스로 자유롭지만 중생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 맞는 눈높이 교육을 실천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제 풍혈 화상의 제자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공감이 가시나요. “말과 침묵은 각각 ‘이(離)’와 ‘미(微)’를 침해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와 미에 통하여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타자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물이 특정 그릇에 담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무상(無相)으로 정의되는 ‘이(離)’의 마음 상태를 침해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침묵한다는 것은 물이 특정 그릇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침묵은 타인에게 맞는 눈높이 가르침, 즉 ‘미(微)’의 마음 상태를 침해한다는 겁니다. 이제 제자의 속앓이가 분명해지셨나요. 말을 해도 문제고 침묵해도 문제라면, 타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승조의 이론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다 제자는 난관에 봉착한 겁니다.


바로 이 순간 풍혈 화상은 뜬금없이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읊조립니다. “오랫동안 강남 춘삼월의 일을 추억하였네. 자고새가 우는 그곳에 수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 향기로웠네.” 풍혈 화상은 지금 남의 문자에 집착하는 주석가나 이론가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면목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을 갖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시인은 꽃을 보면 꽃에 마음을 가득 담고, 노을을 보면 노을에 마음을 가득 담습니다. 꽃이나 노을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승조가 말한 것처럼 ‘상즉무상(相卽無相)’의 마음이지요. 비록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시인의 마음은 자유롭기만 합니다. 꽃을 만나니 꽃에 담기고 노을을 만나니 노을에 담길 뿐입니다. 세모 그릇에 담기면 세모가 되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는 자유로운 물처럼 말입니다. 이제 풍혈 화상이 두보의 시를 뜬금없이 제자에게 던진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지금 풍혈 화상은 우리에게 침묵이니 말이니 하면서 문자의 손님이 되지 말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토로하는 문자의 주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과 부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사합니다.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시인이라면, 자신의 본래면목으로 말을 하는 것이 부처니까요.


물론 모든 시인이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는 반드시 시인이라는 단서는 하나 달아야 할 것 같네요. 어쨌든 이제 ‘불립문자’라는 선불교의 슬로건도 단순히 언어와 문자를 부정했다는 식으로 오해하지는 마세요. ‘불립문자’라는 말에 들어있는 문자란 타인의 문자를 상징하는 겁니다. 스승의 말을 읊조리면 스승이 될 수 없고, 부모의 말을 답습하면 아이 수준을 벗어날 수 없고, 부처를 흉내 내면 부처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불립문자’는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리지 말라는 명령이었던 셈입니다.

 

(무문관 제25칙) 삼좌설법(三座說法)

 

★앙산 화상이 꿈에 미륵불이 있는 곳에 가서 세 번째 좌석에 앉았는데,

한 존자가 백추를 치면서 말했다.

존자: "오늘은 세 번째 좌석에 앉은 이의 설법이 있겠습니다."

앙산이 곧 일어나 백추를 치며 말했다.

앙산: "마하연의 법은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었으니 똑똑히 들으시요."

 

*앙산 혜적[仰山慧寂:814-890]: 위산과 함께 '위앙종' 의 개조.

*사구백비: 불법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체의 논의와 언어 문자를 총칭하는 말.

*사구: 일[一],이[異],유[有],무[無]

*백비: 기본 사구에 각각 사구가 있고[4×4=16],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을 곱하고[16×3=48],

이기와 미기를 곱하면[48×2=96],

여기에 최초 사구를 더하면 100 비.

*마하연의 법: 대승법.

 

★무문왈: 말해 봐라, 이게 설법인가, 아닌가?

입을 열면 곧 잃고 닫고 있으면 죽은 것이다.

입을 열지도 닫지도 않아도 십만 팔천리나 먼 거리에 있다.

 

★송: 백일 청천에 몽중 설몽이라

날조된 괴상한 짓 대중을 속여 헷갈리게 하구나.

 

○앙산의 꿈이 과연 신몽입니다.

무문을 헷갈리게 하고, 이렇게 다시 현몽하여

님들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앙산은 어째서 마륵불이 설법하는 도솔천에서 서열 삼위에 앉았을까요?

과연 앙산의 법력이 서열 삼위의 경지에 있는 것입니까?

과연 님이라면 몇위에 앉았을까요?

앙산은 '마하연의 법은 사구백비를 여의었으니 똑똑히 들어라.'고 하였는데,

님들은 앙산의 법문을 듣기나 하였습니까?

오늘 앙산을 대신하여 설법을 마치겠습니다.

'삼세제불과 보살 신장들을 관중으로 모셔놓고

억조창생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불법을 공연하는구나.

삼세제불과 보살 신장들은 잘 관람하시고,

억조창생들은 각자의 공연에 충실하세요.'

이것이 진정한 마하연의 법입니다.

 

 양산 화상은 꿈속에서 미륵이 계신 곳에 가서 세 번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어떤 존자가 백추하고서 말했다.

"오늘은 세 번째 자리에 앉은 분이 법을 말하겠습니다."

앙산이 이에 일어나 백추하고 말했다.

"대승의 법은 사구를 떠나고 백비를 끊습니다. 잘 들으시오! 잘 들으시오!"

 

 

백추: [조정사원]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세존의 율의에 의하면 설법을 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대중에게 알리는 말을 하여 대중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만드는 법을 행하였다. 오늘날 선종에서는 법을 아는 존숙에게 그 소임을 맡겨서, 장로가 법좌에 앉자마자 말하기를 "교회에 모인 여러 스님네들이여, 마땅히 제일의제를 보아야 합니다."라고 한다.  법회에서의 문답이 끝나면 소임을 맡은 존숙은 다시 알려서 말하기를 "법왕의 법을 잘 보십시오. 법왕의 법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대체로 앞선 분들의 참된 규범이니, 모두 부처님의 뜻을 잃지 않고 있다.

 

 

[무문의 말]

묻는다.

이것은 법을 말한 것인가? 법을 말하지 않은 것인가?

입을 열면 바로 잃고, 입을 닫아도 역시 잃는다.

입을 열지도 닫지도 않으면, 십만 팔천 리나 어긋났다.

 

 

[군소리]

꿈속에서 걸림 없이 법을 말하니

꿈속의 사람이 전부 꿈을 깨어나네.

깨어 있는 이가 도리어 꿈속에 있으니

꿈속에서 다시 꿈 이야기를 하는구나.

 

 

 밤에 자면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집니다. 만약 깨지 않고 계속 잔다면 밤인지 아침인 줄 모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자신이 한번 깨치지 못하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릅니다. 꿈속에서도 생생하니까 그게 꿈인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똑같이 생시에서도 비록 생생하지만 이게 꿈인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느냐 안 뜨느냐 이것에 따라 꿈과 꿈 아님이 나눠지는 것처럼, 그제야 밤과 낮이 드디어 구별이 되는 것처럼 모든 게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것'을 한번 깨치느냐, 안 깨치느냐에 따라 분별되지 않는, 오직 이 하나에 있느냐 아니면 무수한 둘로 나눠진 분별되는 세상에 사느냐 이렇게 나눠집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문제이고 남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본래면목입니다.

 

입을 열면 바로 잃고 입을 닫아도 역시 잃는다, 그러면 원래부터 잃을 게 없는 것입니다.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도 30방 나가도 30방, 어떻게 하겠느냐? 원래부터 맞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입이나 동그라미는 방편입니다. 방편은 이것에 근접하게 이끌도록 하는 말이고 표현입니다. 이것을 깨치게 될 때에는 그런 말들은 한순간에 싹 사라집니다. 그런 모든 의문에 대한 그런 생각들이 일시에 싹~ 어디에 가버렸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차츰 시간이 지나면 또 개미처럼 무엇인가 찾으러 다니는 것을 봅니다. 무엇을 가져오든 또 가져온 것을 버리든 항상 쌓고 부수는 모래성 같은 일을 계속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느 개미는 부처이고 또 다른 개미는 중생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미들이 죽으면 부처와 중생은 있을까요? 부처와 중생은 관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관념들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큰 복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곧장 부처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고, 또 곧장 중생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어찌 되었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모두 부처의 자식입니다. 단지 자신이 부처의 자식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 차이일 뿐입니다. 그것을 앞전에 다이아몬드 얘기에 빗대면 자기 주머니 속에 있는 줄 아느냐, 모르냐에 따라 평생 거지처럼 사느냐 아니면 부자처럼 사느냐 이것이죠.

 

우리가 물질적으로 얘기해서 방편으로 다이아몬드라고도 얘기하지만, 법으로 얘기하자면 부서지지 않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해서 이것을 다이아몬드에 비유합니다. 금강경, 이 금강이 다이아몬드인 것입니다. 변함이 없고 아주 단단해서 절대 부서지지 않습니다. 이 법이 그렇습니다. 부서지지 않는다고 해서 어디 한번 세게 때려보자, 그런 게 아니라 법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만큼 이 영원한 진리는 우리 생각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복덕이 있습니다. 사구와 백비를 끊지만 생각을 못 해서 바보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듣습니까? 그래서 잘 들으시오, 잘 들으시오! 뭐로 듣습니까? 귀로? 그럼 꿈속에서 들을 때에는 뭐로 듣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이것입니다, 이것! 단지 이뿐입니다.

 

 

1.선종은 대승불교 전통의 적장자

 

많은 학자들은 선종이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 사상이 동아시아, 특히 중국화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 학자들은 이미 선종은 불교의 외양만 갖고 있는 노장(老莊)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선종은 이단 불교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입장이 옳은지 한 번 생각해볼까요. 불교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팔정도(八正道, āryāṣṭāṅgomārgḥ)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싯다르타가 제안했던 여덟 가지 방법입니다. 불교학자들은 팔정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불교를 근본불교(fundamental Buddhism)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선종은 근본불교이기보다는 지엽적인 불교, 혹은 이단적인 불교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선종을 상징하는 선사들의 행동거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제자의 손가락을 자르고, 심지어는 고양이를 칼로 죽입니다. 올바른 행동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부처를 똥막대기라고 부르면서 거친 말과 역설적인 표현을 즐기는 것 같으니, 올바른 사유나 올바른 말에도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는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도 역설하기도 하니, 이것은 올바른 집중과 올바른 참선마저도 패키지로 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팔정도의 가치를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선사들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와 같은 사람으로 보였을 겁니다. 아무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도덕경(道德經)’ 1장을 보면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지금 통용되는 도가 영구불변한 도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장자(莊子)’에도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도는 걸어 다녀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어느 것이든 현재 눈앞에 존재하는 길, 혹은 방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장 사상의 정신이지요. 그런데 선사들도 거침없이 싯다르타의 도, 즉 팔정도를 짓밟아버립니다.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싯다르타가 제안했던 도가 영구불변한 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선종의 언행에서 근본불교가 아니라 자꾸 노장 사상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선종은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있는 노장 사상일까요.


2.소승은 싯다르타 말을 신성시

 

선사들의 정신을 담고 있는 다양한 선어록(禪語錄)을 살펴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선종은 대승불교 전통의 적장자였기에 싯다르타의 팔정도마저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말입니다. 불교 철학사에 따르면 싯다르타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만들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의 다음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딜레마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경전에 기록된 싯다르타의 말 자체를 신성시하는 경향이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시기가 소승불교의 시대입니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150?~250?)로 대표되는 대승불교가 출현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팔정도만이 아닙니다. 경전에 기록된 모든 언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아이러니한 기풍이 불교 내부에 팽배했던 겁니다.

 

집착이란 질병을 고치려고 싯다르타가 고안한 약이 남용되는 사태가 발생한 셈입니다. 이렇게 정리해도 좋을 것 같네요. 집착을 고치기 위해 싯다르타는 다양한 약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먼 제자들은 싯다르타의 약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심지어는 습관적으로 먹기 시작했던 겁니다. 한 마디로 약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두통이 있을 때 두통약을 먹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두통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두통약을 먹는 것은 더 심각한 사태 아닌가요. 두통에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두통약에 중독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가르주나가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라는 싯다르타의 개념을 자신의 슬로건으로 삼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병이 있을 때에만 약은 적절하게, 그러니까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가르주나의 주저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 은 제목이 나타내는 것처럼 ‘중도’에 입각하여 모든 개념적 집착을 치료하려는 이론서, 혹은 일종의 약물중독 치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책이 단순히 불교 전통을 넘어서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마저 인류 최고의 이론서라고 극찬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0세기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서양 지성인들이 고민하게 된 언어나 개념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나가르주나는 이미 충분히 숙고했고, 심지어는 앞으로 서양 철학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마저 미리 정리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로서는 경악할 일이었지요. 어쨌든 ‘무문관’의 25번째 관문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힘든 길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선종은 승복을 입은 노장 사상이 아니라, 나가르주나로부터 시작된 대승불교의 정점에 서 있는 전통이었던 겁니다. 사실 선종의 슬로건 ‘불립문자(不立文字)’도 언어나 문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나가르주나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지요.


3.언어가 집착을 낳는다

 

꿈이나마 미륵부처의 처소에서 이루어진 앙산(仰山, 815~891) 스님의 설법만큼 분명한 증거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앙산도 말하지 않던가요. “대승의 불법은 네 구절을 떠나서(離四句) 백 가지의 잘못을 끊는다(絶百非).” 여기서 ‘네 구절’, 즉 ‘사구(四句)’란 집착을 발생시키는 언어가 가진 네 가지 언어형식을 가리키는 나가르주나의 전문 용어입니다. ‘같음[一]’, ‘다름[異]’, ‘있음[有]’, 그리고 ‘없음[無]’이라는 이름으로 네 가지 언어형식은 불립니다.

 

그렇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같음’과 ‘다름’이라는 두 가지 언어형식입니다. ‘있음’의 언어형식과 ‘없음’의 언어형식은 모두 ‘같음’과 ‘다름’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인도철학이나 소승불교 전통에서는‘같음’의 언어형식을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satkāryavāda)에, 그리고 ‘다름’의 언어형식을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 asatkāryavāda)에 연결됩니다. 인중유과론이 원인 속에 이미 결과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라면, 인중무과론은 원인 속에는 어떤 결과도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린다”는 말을 생각해볼까요. 인중유과론으로 읽으면 ‘내리다’는 사태는 ‘비’라는 사태가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비’와 ‘내린다’라는 두 가지 사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중무과론으로 읽으면 ‘내린다’는 것은 ‘비’라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겁니다. 이 경우 ‘비’와 ‘내린다’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비가 내린다면, 인중유과론으로 읽은 비는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비는 내리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반대로 진짜로 비가 내린다면, 인중무과론으로 읽은 비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이 경우 비는 내리는 것과 무관하기 때문에 비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하시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이렇게 네 가지 근본적인 언어 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리는 비일 수도 있고, 내리지 않는 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있는 비일 수도 있고, 없는 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언어에 깊게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비에 집착하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요.


‘같음’, ‘다름’, ‘있음’, ‘없음’이란 근본적인 언어형식 각각이 다시 이 네 가지 언어형식과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4×4=16이 되지요. 이어서 과거, 미래, 현재라는 세 시제가 가능하니까 16×3=48이 됩니다. 여기에 다시 미래 완료와 과거 완료라는 두 가지 시제도 가능하기에, 48×2=96이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에 원형이 되는 네 가지 언어형식을 합하면 마침내 100가지 가능한 언어형식들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집착으로 몰고 가는 구체적인 언어형식들은 100가지인 셈입니다. 이제 “네 구절을 떠나서 백 가지의 잘못을 끊는다”는 앙산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무문관 제26칙) 이승권렴(二僧卷簾)

 

★청량 대법안 선사에게 어느 스님이 점심 공양전에 올라와

참문하니 법안이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 때 두 스님이 동시에 발을 말아 올렸습니다.

법안이 말했다.

"하나는 얻고 하나는 잃었다."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 법안종의 개조.

 

★무문왈: 자, 말해 봐라. 누가 얻고 누가 잃었는가?

만약 이에 대하여 일척안을 가질 수 있다면 곧 청량 국사의 허물을 알리라.

비록 그렇다고 하여도 득실을 헤아리는 것은 절실히 삼가야 하는 것이다.

 

★송: 발을 말아 올리니 밝고 밝은 태공이다.

태공도 아직 내 종지에는 맞지 않아 어찌 태공마저 버리지 않았는가?

꼼꼼 촘촘하여 바람마저 막혔도다.

 

○두 사람이 발을 말아 올렸다는데 과연 두 사람은 누구인가?

시비나 득실을 논하기 전에 먼저 두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하리라.

그대 안목을 가졌다면 친히 두 사람을 볼 수 있으리니,

말해보라! 두 사람은 누구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두 사람과 그들을 헤아리는 법안, 그리고 시비와 득실을 논하고 있으니…

무문은 어찌하여 태공(太空)을 아직 자신의 종지(宗志)에 맞지 않다고 하였을까?

과연 님들의 종지는 무엇이며 태공을 자신의 종지로 삼고 있지 않나 돌아 볼 일이로다.

세존께서 무념(無念)을 종으로 무주(無住)를 본으로

무상(無相)을 체로 하였으니 후생이 삼가 받들어 본받아야 하리라.

 

청량대법안에게 승려들이 공양 전에 설법을 들으러 왔기에 법안은 손으로 발을 가리켰다. 그때 두 승려가 함께 가서 발을 말아 올렸는데, 법안이 말했다.

"한 사람은 얻었고, 한 사람은 잃었다."

 

 

[무문의 말]

묻는다.

누가 얻었고, 누가 잃었는가?

만약 여기에서 바른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바로 청량국사가 실패한 곳을 알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결코 얻고 잃음 속에서 헤아리지는 말아야 한다.

 

 

[군소리]

자기의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웠으니

국사는 매우 악독한 사람 같으나,

그 난국에서 살아 나오기만 하면

국사의 큰 은혜를 비로소 알 것이다.

 

 승려가 알아들었다면 바로 '발'을 던지고 나갔을까요? 법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 본래면목, 자성, 불성이라는 것은 내세우지 않아도 누구나 다 가지고 있고 똑같이 평등하게 있습니다. 법이 분명하다고 해서 곳간의 곡식처럼 법이 엄청 많으냐? 전혀 그런 것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가져도 꼭 자기 몸만큼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난 법이라는 게 정말 싫어, 저 멀리 도망간다고 해도 꼭 그 몸만큼 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법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딱 그만큼 적지도 많지도 넘치지도 않습니다. 너무도 딱 맞아서 못 보는 것일까요? 법으로 보느냐 아니면 이 '상'으로 보느냐? 딱 종이 한 장도 안되는 미세한 차이, 그래서 법을 '상'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하는 게 '상'이냐? 아니죠. 말을 안 해도 역시 '상'입니다. 조용히 있고 싶다고 산속에 들어가면, 말을 안 한다고 묵언수행을 하면 법만 보이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경험해봐서 알겠지만 조용할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고 묵언수행을 하면 속으로 더 말을 많이 합니다. 그것은 이게, 법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산속에서든 복잡한 도시에서든 묵언수행을 하든 절 수행을 하든, 기도를 하든, 조금의 차이도 없이 똑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은 모든 모양 속에 모양 그대로 모양 없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깨쳐서 이게 법이다, 아니다, 이건 망상이다, 이건 실상이다, 이렇게 따지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옛날 스님들 말씀에 의하면 중생의 굴에서 부처의 굴로 간다고 하잖아요. 부처란 굴에는 항상 부처만 있어야 됩니다. 중생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는 것은 모두 중생이거든요.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마음을 비워서 선정에 들고 그렇게 해서 부처의 굴에 들어간다면 굶어죽기 딱입니다. 굶어죽으려고 부처 되는 게 아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다른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이상적인 세상에 살려고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은 어디에 발을 두고 있습니까? 그게 모두 생각일 뿐이지요.

 

생각을 생각으로써 이 자리를 가리킨다는 게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 선사들은 좀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많이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말을 쇳가루에 자석을 갖다 대듯이 순간적으로 싹 딸려오는 것이고 그런 믿음이 없다면 그냥 계속 이해되는 말들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잘못된 버릇은 이해를 하면 100% 완전하게 씹을 사이도 없이 똥 싸듯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봐도 역시 똥밖에 보이지 않는데 거기다가 또 자신의 똥을 찾는 게, 그게 바로 머리로 이해한 것의 증거입니다. 절대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 것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굳었고 사진 속의 그림일 뿐입니다.

 

이것을 깨쳤다고 항상 법, 법,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지는 공부한 사람은 알 것입니다. 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은 눈이 많은 것을 봤고 발이 얼마나 걸었고 위가 배고프다고 해서 점심을 먹었고 몸이 피곤해서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 몇 번을 가고 등등 그런 것들을 일일이 계획을 세워서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그냥 생각 없이 다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생각 없이 하는 게 제일 편합니다. 생각은 불편합니다. 한 발, 두 발 세는 것처럼 그것 셀 필요가 뭐 있습니까? 필요할 때는 또 자신의 지식과 알맞게 생각합니다.

 

법안 스님도 승려가 오면 꼭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건 죽은 말입니다. 죽은 말은 산 자가 듣고 살아있는 말은 죽은 자가 듣습니다. '한 사람은 얻었고 한 사람은 잃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엥, 똑같이 발을 말아올렸는데 누가 깨쳤지?'이렇게 생각하면 죽은 말을 들은 살아있는 자이고, 그 순간에 깨친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스스로 씨를 뿌리고 스스로 거두는 자에게는 허물이 없습니다. 허물이 없으므로 허물을 뒤집어쓰고 오물에 빠져도 수확이 있음을 진정 기뻐합니다. 진정 그 은혜를 아는 자만이 갚을 수 없는 그 은혜를 내줄 수 있습니다.

[무문의 송] 말아 올리니 허공에 또렷이 밝지만 허공도 도리어 우리 종지에는 알맞지 않다. 어찌 허공에서 모두 내려놓고 딱 들어맞아 바람 한 점 통할 틈도 없음만 하겠는가? 이 말을 또 긍정한다면 바람 한 점도 안 통하는 쫄쫄 굶는 부처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항상 칼날은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칼에 베여도 늘 이것뿐이면 언젠가는 칼을 가지고 맘껏 휘둘러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것뿐이지, 다른 게 없습니다. 

1.‘타타타’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

‘타타타(tathatā)!’ 대중가요의 제목으로도 쓰일 정도로 유명한 불교 개념이지요. 한자로는 ‘진여(眞如)’나 여여(如如)라고도 번역되는 타타타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열반이나 깨달음이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얻게 되는 순간, 우리는 바로 부처가 되는 거니까요. 이건 거꾸로 말해 평범한 우리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무엇인가 왜곡을 가해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번데기 아시나요. 6~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간식이 아마 번데기였을 겁니다. 그러나 최근 젊은이들 중 번데기는 아마 혐오식품 중 하나일 겁니다. 어린 시절 번데기 대신 피자나 햄버거 등을 먹었던 세대들이니까요. 사실 외국인들은 우리가 번데기를 먹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번데기는 바퀴벌레와 별반 다름없는 벌레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4,50대에게 번데기는 군침이 도는 간식일 겁니다. 눈앞에 번데기가 있다면, 그들은 그것을 먹고 싶어 안달을 할 겁니다. 그들은 번데기가 고소하고 구수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겁니다. 이론적으로 말해 바로 이 순간 주체(subject, 自)와 대상(object, 他)의 이분법이 작동하게 됩니다. 자신들은 번데기를 먹고 싶은 주체이고, 번데기는 먹음직스러운 대상으로 드러날 테니까요. 그렇지만 돌아보면 4,50대들이 번데기를 먹고 싶은 주체가 된 것도 그리고 번데기가 먹음직스러운 객관적인 대상으로 보였던 것도 그들의 오랜 습관 때문일 겁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번데기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겁니다. 물론 2,30대 젊은이들이 번데기를 혐오식품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 메커니즘일 겁니다. 벌레에 대한 해묵은 편견과 습관으로 번데기를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상태에 있지 않고 최소 세 가지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객 관계에 사로잡힌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번데기는 맛있는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좋아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반대로 번데기는 혐오스러운 대상이고 자신은 번데기를 싫어하는 주체라고 믿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들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가 먹음직스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할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는 있지만, 그들은 현실에서 여전히 번데기를 좋아하거나 혐오하리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신의 과거 습관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마음 상태를 가진 사람입니다. 번데기를 기호 식품으로도 혐오 식품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깨달은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2.‘알라야’는 일종의 습관, 기억의식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150?~250?)와 함께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탄탄히 마련한 사람으로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320?~400?)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나가르주나의 불교를 ‘무종(無宗)’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은 공(空, Śūnyatā) 하다는 그의 주장 때문일 겁니다. 실체가 없다고 하니까 ‘무종’이라고 나가르주나를 규정한 셈이지요. 반면 바수반두의 불교를 ‘유종(有宗)’이라고 규정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 의식의 표상들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어쨌든 의식은 존재한다고 긍정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수반두, 즉 세친 보살의 불교 사상을 ‘유식불교(唯識佛敎)’라고 규정하기도 하는 겁니다. “단지 의식일 뿐임을 주장하는 불교”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를 대립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해를 낳게 됩니다. 나가르주나와 바수반두는 서로의 이론적 한계를 보충하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모든 것을 실체로 보는 사람이 모든 것을 공으로 볼 때,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막연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해야 평범한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깨달음의 길을 구체적으로 마련하려고 했던 바수반두의 속앓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속앓이는 그의 작품 ‘삼성론(Trisvabhāva-nirdeśa, 三性論)’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바수반두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그리고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이 바로 그것입니다. 번데기를 보고 먹고 싶어서 입맛을 다시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변계소집성’이고, 번데기가 먹고 싶어 입맛을 다시지만 동시에 그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 상태가 ‘의타기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거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서 번데기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상태가 바로 ‘원성실성’입니다.


바수반두의 유식불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개념이 바로 ‘알라야 의식(ālaya-vijn͠āna, 阿賴耶識)’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알라야 의식은 일종의 습관, 즉 기억 의식을 말합니다. 흔히 불교에서는 생선 가게를 들리는 것으로 알라야 의식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생선 가게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생선 가게의 비린내가 옷에 배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생선 비린내가 몸에 배듯이 우리 마음에 저장된다는 겁니다. ‘알라야’라는 산스크리트어가 ‘저장하다’나 ‘모으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지요. 어쨌든 번데기를 보고서 갑자기 먹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도 바로 이 알라야 의식 때문이었던 셈입니다. 이제 알라야 의식과 마음의 세 상태를 연결시켜볼까요. 변계소집성에서 우리는 작동하는 알라야 의식을 의식하지 못했다면, 의타기성에서는 우리는 작동하는 알라야 의식을 의식하게 됩니다. 반면 원성실성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라야 의식을 끊는 데 성공한 겁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이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부처가 된 것입니다.


3. 법당 드리운 발은 알라야 의식 상징

이제 분명해지셨나요. 공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 그것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자 동시에 알라야 의식을 끊고 세상을 본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주체와 대상을 나눈 것도 알라야 의식이었고, 당연히 주체가 대상을 집착하도록 하는 것도 알라야 의식이었던 겁니다. 간단히 말해 과거의 습관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알라야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알라야 의식은 일종의 선글라스와 같은 것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물의 색깔을 왜곡시켜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스물여섯 번째 관문에서 대법안(大法眼) 화상, 즉 법안(法眼, 885~958) 화상은 이 알라야 의식을 ‘발[簾]’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서구화된 주거 공간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 많이 사용했던 것이 ‘발’입니다. 더운 여름에 사용하는 일종의 블라인드라고 할 수 있지요. 바깥의 시선을 피할 수 있으니 옷을 벗고 있을 수 있어 좋고,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니 좋고, 어쨌든 일석이조가 따로 없을 겁니다.


점심공양에 앞서 모든 제자들이 법당에 들어왔을 때 법안 화상은 그들에게 또 가르침을 내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법안 화상은 조용히 축 내려져 있던 발을 가리켰던 겁니다. 아마도 날씨가 흐려져 법당이 어두워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바로 그 순간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일어나 발을 걷어 올리려고 했나 봅니다. 발이 컸던지 아니면 스승 앞에서 조용히 발을 걷으려고 두 사람의 제자가 달려들었을 겁니다. 그러자 법안 화상은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 도대체 어느 스님이 옳고 어느 스님이 그르다는 것일까요.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발을 통해 내다본 세상과 발을 걷고 내다본 세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어느 순간에 내려진 발을 통해 바라본 세상이라면, 이것은 알라야 의식에 매개되어 바라본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발을 걷고 내다본 세상은 알라야 의식을 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제 “한 사람은 옳지만, 다른 한 사람은 틀렸다”는 법안 화상의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두 스님 중 누가 옳았던 것일까요. 발의 왼쪽을 걷었던 스님이 옳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오른쪽을 걷었던 스님이 옳았던 것일까요. 발을 걷는 순간에 참여해보세요. 아마 일망무제의 푸른 허공이 여러분의 시야에 펼쳐질 겁니다.

 

(무문관 제27칙) 불시심불(不是心佛)

 

★남전화상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스님: "사람들을 위해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

남전: "있다."

스님: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않은 법입니까?"

남전: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니라."

 

★무문왈: 남전이 이 질문을 받고 바로 집안의 재물을 다 탕진하여 낭패를 당했다.

 

★송:정중함이 그대의 덕을 손상하니 무언이 참 공덕이구나!

푸른 바다가 변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대에게 통하지 않으리.

 

○아직도 설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며 선문의 정곡을 찌르는 안목이다.

님이시여! 과연 님께서는 아직 밝히지 못한 진리가 있습니까?

있다면 아직 학인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초생이요,

없다면 자신조차 찾지 못한 몽중서생이로다.

 

말해 보세요,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않은 법입니까?"

어설프게 남전의 흉내를 내어 집안의 재물을

다 탕진하고 낭패를 당하지는 마십시요.

무문이 상전벽해가 되어도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남전을 긍전한 말인가요?

 

아니면 남전의 허물을 부정한 말입니까?

님들의 혜안으로 공안을 관하여 한 점 티끌도 용납하지 않아야 하리라.

한 티끌도 통하지 않는것이 바로 바다가

만물을 받아들이는 해불양수(海不讓水)의 대기대용입니다.

 

남전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

남전이 말했다.

"있다."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법입니까?"

남전이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무문의 말]

남전은 이 하나의 질문을 받고서 집안의 가재도구를 빠짐없이 헤아리게 되었으니, 시끄럽기 짝이 없구나.

 

 

[군소리]

부처와 조사가 아무리 말하려 해도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부처 조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빠짐없이 다 드러나있는데도 못 보는 것은 자신의 눈이 감겨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코끼리의 다리만 붙잡고 그게 코끼리인 줄만 아는 사람에게 코끼리 코는 코끼리가 아닌 것처럼, 자신이 한번 코끼리를 직접 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보이고 느껴지고 만지고 있는 것, 이것만이 있을 뿐이다하는 사람은 항상 코끼리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지고 느끼고 실제 보여야 하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만지고 느끼고 보이는 게 없다면 실제 그것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알 수 있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의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이 어디에 있을까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듣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이게 있는 것입니다. 이게 있으니까 다른 것들이 존재합니다. 이게 없으면 다른 것들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생각은 또 이렇게 저절로 굴러갑니다.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게 없느냐?" 이렇게 물으면 몽둥이로 바로 딱! 맞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것은 뭐냐? 노래 가사처럼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모르면 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딱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이 하나일 뿐, 비록 세속적 잣대를 세우고 분별하고 분리하고 한쪽으로 몰아넣지만 결국 몸이라는 것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세속적 잣대로 '나'를 세우지 않으면 원래 있던 그대로 전혀 변함이 없이 오직 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원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태어난 적도 없고 당연히 태어나지 않았으니 죽지도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몸이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몸의 안위를 걱정하고 슬퍼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태어났고 인연에 따라 늙고, 나무에 빗대면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씨앗을 틔우고 잎이 올라오고 나무가 되는 것처럼, 아무리 튼튼한 나무도 널빤지로 쓰이거나 언젠가는 고사합니다.  이 몸, 우주, 모든 게 다 자연의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법칙이 전혀 먹히지 않은 게 있습니다. 이것은 이 법칙을 벗어나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밥그릇을 가져오는데, 딱 그 그릇만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알맞게 밥을 담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릇은 작고 크고 깊고 얇고 넓고 좁고 아주 다양하지만 이것은 전혀 모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 알맞게 퍼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라고 하는 이 몸으로 태어났다고 말을 하지만 이 몸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은 무엇입니까? 이게 알려줄 수 없는, 보여줄 수 없는 이것입니다. 부처님도 이게 있으니까 이렇게 있고 하느님도 이게 있으니까 있습니다. 항상 제일 먼저 이게 있다니까요, 이게 있으니까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마음이고, 이게 부처고, 이게 본래 한물건입니다. 이것, 이것, 이것뿐입니다.

 

(무문관 제28칙) 구향용담(久響龍潭)

 

★용담에게 덕산이 가르침을 청하여 듣다가 밤이 깊어졌다.

용담이 말했다.

용담: "밤이 깊었는데 그대는 어찌 물려가지 않는가?"

---덕산이 인사를 드리고 발을 올려 나갔다가 바깥이 캄캄한 것을 보고 말했다.

덕산: "바깥이 캄캄합니다."

용담이 지촉에 불을 켜서 주었다가 덕산이 받으려 하자 용담이 훅 불어 꺼버렸다.

이에 덕산이 홀연히 깨닫고 절하였다.

용담: "그대는 어떤 도리를 보았는가?"

덕산: "저는 오늘 이후부터 천하 노화상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그 다음날 용담이 법상에 올라 말했다.

용담: "여기 한 녀석이 있는데 이빨은 검수지옥의 칼과 같고, 입은 피를 머금었다.

방망이로 한 대 맞아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언젠가는 외로운 산 정상에서 나의 도를 간직하고 세울 것이다."

 

덕산은 금강경소초를 가지고 법당앞에서 불을 붙이며 말했다.

덕산: "모든 심오한 말을 할지라도 허공에 솜털 하나와 같고,

세상의 중추적 기틀을 다 알아도 깊은 골짜기에 물 한 방울 떨어 뜨린 것과 같다."

그리고는 소초를 불살라 버리고 절을 하고 떠났다.

 

★무문왈: 덕산이 깨닫기 전에는 마음이 분개하고 말로 어쩌지 못하여

의기 양양하게 남방으로 와서 교외별전의 가르침을 쓸어 버리겠다고 하였다.

예주에 도착하여 점심을 사려고 하니 노파가 물었다.

노파: "대덕의 궤짝 속에 무슨 책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 "금강경소초요."

노파: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이라고 말하는데,

대덕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합니까?"

덕산은 이 물음에 바로 입이 막혀 버렸다.

비록 노파의 말에 반쯤 죽었지만 긍정하지않고

근처에 어떤 큰 스님이 있느냐고 노파에게 물었다.

노파: "오리밖에 용담화상이 있소."

그래서 용담에 도착하여 완전히 당하니 앞 뒷 말이 도무지 맞지 않았다.

용담은 어린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

추한 불씨를 보고 황망히 더러운 물을 확 부어불을 꺼 버렸다.

냉정하게 돌이켜 보면 한바탕 웃음거리다.

 

★송: 이름을 듣는 것이 얼굴을 보는 것만 못하고

얼굴을 보니 이름을 듣는 것만 못하다.

비록 콕구멍을 얻어 숨은 쉬었으나 눈이 멀어 어찌할꼬?

 

○용담이 지촉의 불을 훅 불어 끄자 덕산이 깨달았다고 하는데,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덕산이 이후부터 고덕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과연 님들도 긍정합니까?

덕산이 모든 세상의 심오한 말과 이론들을

허공에 날리는 솜털과 깊은 계곡의 물 한 방울에 비유하며

자신이 소지한 금강경소초를 불살랐으니, 님들이 본받을 일은 아니로다.

용담의 자비심이 너무 오래 고여서 흐르지 않았으니,

물은 냄새를 풍기고 용은 병이 깊어 후사를 걱정할 지경이다.

과연 무문의 안목이 살.활을 자재하는 선기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냉정히 돌이켜 보면 한바탕 웃음거리이리라.

 

용담에게 덕산이 거듭 가르침을 청하다가 밤이 깊었는데 용담이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그대는 그만 내려가는 것이 어떤가?"

덕산이 드디어 인사를 드리고 발을 걷어 올리고 나갔는데,

밖이 칠흙같이 어두운 것을 보고는 되돌아와 말했다.

"밖이 컴컴합니다."

용담이 이에 초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건네주었다. 덕산이 막 받으려고 하는데,

용담은 갑자기 촛불을 입으로 불어서 꺼 버렸다.

덕산은 여기에서 문득 느낀 바가 있었다.

 

덕산이 곧 절을 올리자, 용담이 물었다.

"그대는 어떤 도리를 보았는가?"

덕산이 말했다.

"저는 오늘 이후로는 천하 노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날 용담이 법당에 올라 말하였다.

"이 속에 한 사나이가 있는데, 이빨은 맹수의 날카롭고 빽빽한 이빨 같고, 입은 맹수의 시뻘겋게 딱 벌린 아가리 같으며,

한 방망이 때려도 돌아보지 않는다. 뒷날 외로운 봉우리의 꼭대기에서 우리의 도를 세울 것이다."

덕산은 마침내 법당 앞에서 소초를 가져다 놓고 횃불 하나를 들고서 말했다.

"온갖 현묘한 말솜씨를 다 동원하더라도 털끝 하나를 커다란 허공에 두는 것과 같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물 한 방울을 골짜기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곧장 소초를 불태우고는  작별의 절을 하였다.

 

소초(疏抄): 소는 주에 다시 붙인 주석, 초는 베겨 쓴 원고 혹은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 베껴 쓴 요약문 

 

[무문의 송]

 명성을 듣는 것보다 직접 만나는 게 더 나을 때가 있고,

직접 만나는 것보다 명성을 듣는 게 나을 때가 있다.

비록 코는 구해낼 수 있었으나

눈을 멀게 하였으니 어찌하리오?

 

[군소리]

비록 견성하여 해탈했더라도

해탈했다고 생각하면 안 되니,

해탈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망상에 사로잡혀 얽매인다.

 

 덕산 스님은 중국 당나라 때 스님으로 금강경을 잘 외우고 이해를 해서 '금강경 소초'를 만들고, 속세의 성이 '주 씨'였는데  별명도 '주금강'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히 금강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지요. 그런데 남방불교에서 '마음이 부처다' '불립문자'하고 교보다는 선을 중요시하니까, 덕산 스님은 남방불교의 그 헛짓을 쳐부수려고 '금강경 소초'를 짊어지고, 남방에서 유명하신 용담 스님을 찾아갑니다. 가다가 노파를 만나 떡도 못 먹은 얘기는 뒤로하고, 물어서 찾아간 용담 스님 앞에서 덕산 스님은 밤늦도록 얘기를 합니다. 드디어 용담 스님은 '밤이 깊었으니 그만 내려가 쉬는 게 어떤가?"해서 덕산 스님이 댓돌에 신발을 찾으려니까 너무 어두워서 초를 받아 찾으려는데, 초를 받자마자 용담 스님이 훅~불어서 꺼버렸습니다. 덕산 스님이 그때 깨쳤습니다.

 

멀리서 오다가 배고파 죽겠는데 떡 파는 노파가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고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십니까?" 点心, 중국어로 점심이 dianxin이니까, 얼마나 절묘한 질문입니까? 실은 여기서 덕산 스님은 말문이 막혀서, '주금강'이라고 금강경 소초까지 만들었는데, 금강경 질문에 답을 못 해서 떡도 못 먹고 용담 스님을 찾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덕산 스님은 뭔가 궁금증이 생겼을 겁니다. 아니면 분심이라고, 왜? 금강경을 그렇게 외울 만큼 잘 아는데, 그것도 길에서 떡파는 노파의 질문에 답을 못했으니 스스로 자존심에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스러울까요? 이렇게 머리로 이해를 하고 열심히 수행을 하는 것은 모양만 바뀌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치 구멍 뚫을 송곳이 필요한데 일자 드라이버로 뚫을 수 없는 것처럼, 모양은 그 모양에 맞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양에 절대 속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디든지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송곳이 필요하면 송곳, 일자형 나사드라이버가 필요하면 일자형 나사드라이버, 모양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모든 모양을 다 만들 수 있고 모든 모양에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 형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머문다는 것은 생각입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한, 그렇게 머물 수는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굳게 믿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자신을 유한적인 생명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는, 누구도 태어난 것도 모르고 죽는 것도 모릅니다. 태어날 때도 태어난 줄 모르고 태어났고 죽는 것도 자신이 직접 죽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은 여기 덕산 스님이 금강경을 그렇게 외우고 익혀서 모르는 것이 없지만 노파의 질문에 한 마디도 못하게 된 것이, 야밤에 촛불이 꺼짐으로 이게 드러난 것입니다. 사실 촛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뭐가 있습니까? 이제껏 촛불로 인해 세상이 밝았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뭡니까? 비록 깜깜하지만 이보다 더 깜깜할 수 없이 밝은 게 있잖아요. 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을 덕산 스님이 드디어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같습니다. 변한 것은 없어요. 지금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똑같이 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가 없고 나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 똑같은 이 자리,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추구하는, 맞다고 생각하는 뭔가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에 의해서 나눠지고 분별되고 그 모양 그대로 존재하게 됩니다. 믿는 만큼 그 모양은 더 단단해지고 신령스러워져서 스스로가 넘지 못할 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결국 자신의 생각일 뿐이고, 다만 이것입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 이뿐입니다.

1. 덕산 스님, 남쪽으로 향하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통한 지적인 이해를 표방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이 슬로건만큼 선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자신의 삶을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말이나 글에 얽매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일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이나 글, 즉 문자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불립문자’라는 선언으로 선사들은 영원한 침묵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사들이 부정하려고 했던 문자는 자신의 문자가 아니라 타인의 문자일 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타인의 말이나 글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노예의 삶이지 주인의 삶일 수는 없으니까요.


‘무문관(無門關)’의 28번째 관문이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관문에 등장하는 덕산(德山, 782-865) 스님은 ‘불립문자’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덕산은 용담(龍潭) 스님을 만나 타인의 문자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진짜 중요한 대목은 용담 스님을 만나기 전에 이루어졌던 덕산 스님과 어느 노파의 만남 아니었을까요.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덕산 스님과 관련된 전체 에피소드에는 노파와의 만남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문관’을 편찬했던 무문 스님도 그 만남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어서인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주석에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용담 스님을 만나러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 덕산 스님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중국에서 일어나 융성하고 있던 새로운 불교의 흐름, 그러니까 선종 때문이었습니다. 남중국의 선사들이 여러 부처님들의 말과 글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경전의 내용 이외에 별도의 가르침이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산은 화가 난 것입니다. 경전을 무시하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부수고 싶었던 겁니다. 남중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덕산 스님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자신의 품에는,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는 다이아몬드처럼 날카롭고 견고한 무기, 그러니까 모든 희론(戱論)을 논박할 수 있는 ‘금강경(金剛經)’이란 경전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2. 꺼진 등불 속에서 깨달음을 얻다

 

불행히도 중국 예주(澧州)로 내려가던 중 어느 노파를 만나면서 덕산 스님의 자신감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길가에서 어느 노파가 간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허기가 느껴진 덕산은 노파에게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노파는 덕산에게 지나가는 듯이 물었습니다. “스님! 수레 속에는 어떤 책이 있나요?” “‘금강경’의 주석서입니다.” 그러자 노파가 다시 물었습니다. “‘금강경’에는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려고 하십니까?” 덕산 스님은 노파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당혹감과 낭패감 때문이지, 덕산 스님은 서둘러 말꼬리를 돌리게 됩니다. “이 근처에 어떤 선사가 계십니까?” 노파는 오리쯤 떨어진 곳에 용담 스님이 있다고 대답해주게 됩니다.


이렇게 무엇인가에 쫓기 듯 경황없이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을 찾아 가게 된 겁니다. ‘금강경’을 달달 외웠을 정도로 덕산 스님은 경전 내용에 정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해는 단지 지적인 것에 그쳤을 뿐 자신의 삶에 조금도 적용할 수 없었던 겁니다. 어디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노파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했을까요. 노파는 덕산 스님에게 심각한 화두를 하나 던진 것입니다. 용담 스님과 만나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마 덕산 스님의 뇌리에는 노파와의 만남이 지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덧 해가 지게 됩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용담 스님의 방을 나왔을 때, 바깥이 너무나 캄캄해서 덕산 스님은 등불을 부탁하게 됩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은 등불을 켜서 덕산 스님에게 건네줍니다. 캄캄한 주변이 순식간에 환하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용담 스님은 덕산 스님에게 건네주었던 등불을 불어 꺼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꺼진 등불을 허무하게 든 채 다시 암흑 속에 던져진 덕산 스님은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등불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등불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그 등불이 바로 용담 스님이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서 깨달았던 사람들의 가르침, 그러니까 ‘금강경’과 같은 경전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용담 스님이 등불을 훅 불어 끄자마자 덕산은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요. 덕산의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등불이 켜지고 꺼지는 사태에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등불이 켜지면 등불로 환한 부분과 등불이 미치지 않아 어두운 부분이 구별되어 나타나지만, 반면 등불이 꺼지는 순간 그런 구분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3. 금강경 태우고 스스로 길을 가다

 

마침내 용담 스님을 통해 덕산은 자신이 왜 노파에게 쩔쩔맸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금강경’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덕산은 노파의 질문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금강경’에 입각해서 바라보고 생각했기 때문에 덕산은 ‘금강경’이란 등불이 비추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노파의 질문은 ‘금강경’의 맹점을 지적했던 겁니다. 사실 등불이란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요. 밝기의 정도나 비추는 방향에 따라 등불들에는 비출 수 있는 부분과 그럴 수 없는 부분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등불이 비추는 특정한 부분에 연연해서 등불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하곤 합니다. 이제야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용담 스님은 노파의 질문에 덕산이 쩔쩔맸던 이유를 가르쳐주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전들은 각각 자기만의 고유한 한계를 갖고 있는 등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전들에는 자신이 비출 수 있는 측면과 그럴 수 없는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내적 체험(L'expérience intérieure)’에서 ‘비지(非知, nonsavoir)’에 대한 체험을 강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기존의 지식이 설명하지 못하는 맹점과도 같은 영역, 그러니까 등불이 비출 수 없는 영역이 바로 ‘비지’의 영역입니다. 이제 ‘무문관’의 28번째 관문이 명료해지지 않았나요. 점심을 팔던 노파가 덕산 스님을 비지의 영역으로 이끌었다면, 등불을 끄면서 용담 스님은 경전에 대한 맹신이 비지의 영역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사실 ‘금강경’에 대한 맹신이 없었다면 덕산 스님이 ‘금강경’으로 해명되지 않는 비지의 영역과 마주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이런 비지의 영역과 마주쳐서 이곳을 통과하려면, 더 이상 덕산 스님은 ‘금강경’이란 경전에 의지할 수도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비지의 영역은 ‘금강경’의 외부에 있는 것이니까요. 이제 오직 자신만의 마음에 의지한 채 사자처럼 홀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덕산 스님이 보물처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금강경’의 주석서를 태우고, 심지어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용담 스님마저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떠났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문관 제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육조가 보니 두 스님이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논쟁 하기를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며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소리를 하며 다투었다.

이에 육조가 말했다.

육조: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두 스님이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무문왈: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무엇이 육조의 견해인가?

만약 이에 대하여 바로본 바가 있다면,

바야흐로 두 스님은 쇠를 샀는데 금이었음을 알리라.

육조가 참지 못하고 한 바탕 실수를 하였군.

 

★송: 바람과 깃발과 마음의 움직임을 한 장으로 싸 잡아 지나가면

다만 입을 열 줄 알았으나 말 실수하는 줄 모르고 있네.

 

○이 공안을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알아 들었다면 그대는 불상에 금칠을 하라고 하는데

똥칠을 하고는 냄새도 못 맞고 흐뭇해 하는 꼴이다.

마음이란 우주만물을 모두 만들어 내나니(一切唯心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고 부정할 일은 아니다.

또한 마음은 가고 옴이 없나니 움직인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위의 공안을 어떻게 직관할 것이며,

육조의 의중은 어떻게 투관할 것인가?

다만 바람과 깃발에 끄달리는 그대의 경계를 삼가할 일이로다.

바람은 바람이리요, 깃발은 깃발이리니

바람결에 펄럭이는 깃발이 그대의 잠든 무명을 깨우내리라.

 

*선문염송 91칙: 비풍비령[非風非鈴].

승가난제(중희)가 바람결에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동자에게 물었다.

중희: "바람이 울리는가, 방울이 울리는가?"

동자: "바람도 방울도 아닌 내 마음이 울림니다."

중희: "바람도 방울도 아니라면 어느것이 마음인가?"

동자: "모두가 고요하기 때문이요, 삼매는 아닙니다."

중희: "옳은 말이다. 나의 법을 이어 받을 이가 네가 아니면 누가 있겠느냐?"

 

*승가난제[僧伽難提]: 부처님의 제17세 법손 되는 조사. 중희[衆喜]라고 함.

 

바람이 절의 깃발을 날리는데 두 승려가 서로 논쟁하기를,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라 하고,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 하며 옥신각신하고, 이치에 맞지 않기에, 육조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두 승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문의 말]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조사를 보겠는가? 만약 여기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면, 두 승려는 쇳덩이를 샀는데 알고 보니 금덩이를 얻은 횡재를 하였고, 조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물을 한바탕 드러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군소리]

바람은 휘휘 시원하게 불고

깃발은 펄럭펄럭 춤추는데,

마음이란 물건이 어디에 있다고

움직인다는 헛소리를 하는가?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이와 같습니다. 깃발이 움직이느냐, 바람이 움직이느냐 이런 이분법에 빠져서 진작 이렇게 알고 있는 이것은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번뇌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생각의 틈에 빠지는 순간, 두 갈래, 세 갈래의 길에서 항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뿐입니다. 앞뒤, 전후, 원인과 결과, 과거 현재 미래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엊그제 옛날에 살던 동네에 병원에 갔는데, 나오다가 보니까 커피전문점이 생긴 것입니다. 비도 오고 따뜻한 커피 한잔하러 들어갔는데, 커피를 볶고 있더군요. 이름있는 커피점도 아닌데 커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지는 커피를 마시면서 알았죠. 하여튼 그 커피 한 모금했을 때, 그런 기분입니다. 아, 맛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 법이 그렇습니다.

 

바람이 깃발을 움직이게 하든, 깃발이 움직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전에 이게 있으니까 바람이, 깃발이 움직인다, 이렇게 알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금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금은, 그냥 금일뿐, 금을 지워버리면 안과 밖이 없는 거잖아요. 원래 없는 것을 우리는 자꾸 있어 보이게 만들어서 스스로 번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게 생각의 놀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자연의 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스스로 맞다 틀리다 하지 않으면 그냥 자연의 법칙대로 사는 것이고, 이게 절대 맞다 하고 붙들면 그렇게 힘들게 사는 것입니다. 틀리다 맞다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관념이지요. 이 세상이 모두 관념 놀이입니다. 관념에는 실재가 없어요. 그래서 꿈에 비교를 많이 하는데, 역시 꿈을 깨지 못한 사람은 이것도 역시 꿈일 뿐입니다.

 

법에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공부를 하는 과정은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까 맞다 틀리다 하는 관념을 얼마나 버리는가, 그것입니다. 버린다는 표현도 안 맞는데,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법이 이런 것이고, 이렇게 해야 되고,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고, 이게 공부가 잘 되는 것이고 저것은 안 된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추구하는 마음이 있을 동안에, 그런 것을 공부의 차이라고 하지, 법에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깃발이 움직인다, 바람이 움직인다, 이런 두 갈래 갈림길에 들어서지 않으려면 '깃발'하는 이게 분명하고, 움직인다, 이게 다입니다. 뒷말은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들어보니까 한바탕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쇳덩어리인지, 금덩어리인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조사 스님도 부처님도 모릅니다.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금덩어리를 보면 온갖 금뿐이고 쇳덩어리를 보면 온갖 쇳덩어리일 뿐, 금덩어리, 쇳덩어리 전혀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없게 됩니다. 다만 이뿐입니다. 이게 얼마나 편합니까? 이게 부처님의 은덕이고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다만 이것, 이뿐이지, 여기에는 아무런 생각도 단서도 어떤 분별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본래가 완전하게 구분할 수없는 이 하나, 이것뿐입니다.

 

1. 고착된 마음의 활동성 일깨우다


남중국의 법성사(法性寺)라는 사찰을 아시는지요. 달마(達磨)로 시작되어 다섯 번째 홍인(弘忍, 601-674)에 이른 선종의 법맥이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 땅 속에 묻혀 있던 수맥이 땅 위로 솟구치듯이 바로 이곳 법성사에서 선종의 법맥이 다시 용솟음친 것입니다. 사라진 육조(六祖), 그러니까 여섯 번째 큰스님 혜능(慧能, 638~713)이 화려하게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15년 전 북중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않은 남중국 촌놈 출신 혜능(慧能)이 홍인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건은 당시 선종 내부에서는 커다란 센세이션과 함께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어디서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무리는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부반응이 가라앉는 데 자그마치 15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선종을 이끌어야 할 커다란 책무를 지고 있는 혜능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미혹됨을 방기하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인종(印宗) 법사가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고 있던 법성사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육조의 신분을 감춘 혜능도 끼어들어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사찰에 몰아친 강한 바람으로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맞서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역습을 가했습니다. 물론 상식적인 생각, 아니 정확히 말해 서양의 과학적 훈련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바람이 움직인다는 스님 쪽에 설 것입니다. 그렇지만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스님은 바보였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깃발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바람이 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던 스님의 속내였을 테니까요.


두 스님의 논쟁으로 ‘열반경’ 강의는 잠시 멈추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의에 참여했던 수행자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갑론을박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날카로운 칼날에 조용히 잘리는 비단의 미세한 소리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새어나옵니다. 그 작은 소리는 칠판을 긁는 소리처럼 논쟁을 주도했던 두 스님뿐만 아니라 논쟁에 참여했던 모든 수행자들을 침묵시키고 말았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행자들 속에 숨어 있던 혜능이 드디어 등장하며 모든 논쟁을 종식시켜버린 겁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갔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인다거나 혹은 깃발이 움직인다는 논쟁 자체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2. 세계는 마음 밖에 존재 안해


현상학(phenomenology)의 창시자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우리 마음이 가진 특성은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y)에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에 쏠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향성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후설은 말했던 겁니다. “지향성이 없이는 객관과 세계는 우리에 대해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가 객관이나 세계를 우리 마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에마(noema)’라고 정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노에마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마음, 혹은 정신인 누스(nous)가 지향하고 있는 대상을 의미하니까요. 그러니 만일 법성사 집회에 참여했다면, 후설은 혜능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기존의 서양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신이 새롭게 해명한 지향성 개념을 혜능이 한 마디로 멋지게 표현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무문관(無門關)’의 편찬자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는 법성사의 에피소드에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스승 혜능의 말마저도 거부하는 무문 스님의 기개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후설도 당혹감을 느꼈을 겁니다. 지금 무문 스님은 마음이 가진 지향성이란 특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가 후설의 현상학이 가진 한계이자, 동시에 선종의 통찰력이 서양정신을 뛰어넘는 대목이 아닐까요. 다행히도 후설은 안심해도 됩니다. 지금 무문 스님이 지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 경우 마음이란 우리의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마음, 그러니까 노에마로서의 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이 아파”라고 말했을 때 ‘아픈 마음’은 이미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마음이라기보다 마음이 지향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외부에도 쏠리지만 동시에 내부에도 쏠릴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화되어 실체화된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활동, 혹은 쏠림이란 활동이 바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장면에만 고착될 때나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할 때, 마음은 ‘활발발(活潑潑)’한 활동성이 잦아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혜능이나 무문이 걱정했던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고착되어 있을 때 혜능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활동성을 깨우려는 것이지요. 혜능의 말을 듣고 이제 바람이나 깃발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마음이 고착되어 있을 때 무문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깃발과 바람 대신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마음의 활동성을 다시 깨우려는 것입니다.

 

3. 지적 이해와 체현은 엄청난 간극


주변의 어른들은 말하곤 합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우리는 머리가 아닌 삶에서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이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살아서 팔딱거리며 움직이는 작용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면, 그래서 오매불망 콩밭에만 있다며, 마음은 다른 것을 지향할 여지가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볼까요. 재산이어도 좋고 아니면 가족이어도 좋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라졌을 때, 그러니까 재산을 잃거나 아니면 가족 중 한 명이 비운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그 잃어버린 재산이나 이제 볼 수 없는 그 사람에 마음이 쏠리게 됩니다. 쏠리다 못해 이제는 그것들에 마음이 완전히 아교처럼 붙어버립니다. 혹은 그것들이 마음에 접착제처럼 붙어버렸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바로 이것이 ‘집착’ 아닌가요.


잃어버린 재산이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집착할 때, 우리에게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둘 여지가 없게 됩니다. 하늘에 흰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아름다운 선율도,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심지어 내 앞에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말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혹은 지나친 경쟁 논리에 치어 생명을 끊으려고 하는 귀한 자식들의 고뇌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얼음처럼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도약하는 것과 같은 ‘활발발’의 역동성을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살아서 펄떡이는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생길 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일단 무엇인가에 애정과 관심이 가려면,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쏠려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굳어 있는 마음으로 자비를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혜능이 왜 육조라는 감당하기 힘든 스승의 자리에 올랐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홍인이 일자무식으로 알려진 혜능에게 자신의 의발을 물려주면서 그의 깨달음을 인정한 이유도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는지요. 혜능은 그 앞의 조사들과 그 후에 도래할 조사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역동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혜능의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을 몸소 체현하고 산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등산지도로 설악산을 눈으로 더듬어 가는 것과 몸소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설악산을 한발한발 걷는 것 사이의 차이일 겁니다.

 

(무문관 제30칙)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조에게 대매가 물었다.

대매: "무엇이 부처입니까?" 여하시불[如何是佛]

마조: "마음이 곧 부처다." 즉심즉불[卽心卽佛]

 

*대매법상[大梅法常:752-839]

 

★무문왈: 만약 이 말을 곧바로 알아 듣는다면,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밥을 먹고 부처의 말을 하고 부처의 행동을 하리니 그가 곧 부처이다.

비록 그렇다 해도 대매는 여러 사람을 이끌어 저울 눈금을 잘못 읽게 하였다.

'부처'라는 글자를 말하고 삼일간이나 입을 씻어야 하는 줄 어찌 모르는가?

만약에 그대가 '즉심시불'이란 말을 들었다면 귀를 막고 도망가야 하리라.

 

★송: 푸른 하늘 밝은 태양 아래서 무엇을 찾으려 하지 마라.

다시 무엇이냐고 묻는가? 장물을 안고 결백을 외치구나.

 

☆대매는 '마음이 곧 부처'에 깨달음을 얻고

대매산에 들어가 수행하니 마조가 사람을 보내어 시험했다.

스님: "화상은 무엇을 들었기에 이 산중에 은거 하십니까?"

대매: "마조가 '즉심시불' 이라 하여 나는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스님: "요즘은 '즉심시불'이 아니라 '비심비불'이라고 하십니다."

대매: "마조 노장이 사람을 헷갈리게 해도 유분수지,

'비심비불'은 노장에게 맡기고 나는 오로지 '즉심시불'이다."

스님이 이 사실을 마조에게 알리니 크게 기뻐하면서

대중에게 "대매산의 매실이 잘 익었구나,

가서 마음대로 따 먹어라." 하시고 대매를 인가했다.

 

○'즉심시불'을 잘못 알아듣고 '짚시시불'

즉 '짚신이 부처다.'로 알아듣고 의문에 빠져 깨달음을 얻은

금강산 호랑이 도인 석두선사가 그립습니다.

마조의 '즉심시불'을 이어받은 대매법상은 천룡에게 법을 전하고

천룡은 구지에게 전하여 '일지두선'을 세상에 드려 내었으니

그 법맥을 헤아려 선사들의 종적을 찾는것이 공안을 탐구하는 좋은 방편이다.

무문이 이 말을 곧바로 알아 들을 수 있다면 부처의 옷과 밥과 말과 행동으로

부처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대매를 긍정하지 않고

후손을 잘못 인도하는 눈먼 당나귀 꼴이라고 하였을까?

 

이 공안을 투철하고자 한다면 석두선사의 짚신끈이 떨어져 나간 도리를 관해야 하리라.

만상의 인연으로부터 펼쳐진 천라지망을 끊고

모든 이유와 조건을 벗어난 대자유를 얻어야 비로소 '즉심시불'의 경지가 되리라.

그러나, 무문의 말처럼 부처라는 말에도 귀를 막고

입을 씻어야 하며, 팔만사천 방편에 도망을 가야 한다면

그대는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옛 선비의 꼴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그렇다면 '즉심시불'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는 정답을 거부하는 그대의 문제이리니

삼가 그 마음을 부처가 되도록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마조에게 대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무문의 말]

 만약 즉시 깨달을 수 있다면,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밥을 먹고 부처의 말을 하고 부처의 행동을 할 것이니, 곧 부처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대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저울의 기준 눈금을 잘못 읽었으니, 부처라는 글자를 말하기만 해도 3일이나 입을 닦았다는 말을 어찌 말겠는가?

만약 한 사람 참된 대장부라면,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귀를 막고 곧장 달아날 것이다.

 

 

[군소리]

부처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속이지 마라.

마음이 곧 부처라니

꿈속에서 꿈을 말하네.

 

 

 누가 뭐래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이것, 이것입니다. 이것이 뭘까? 하고 찾으면 '이것이다!'하고 내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에 가면 불상이 부처가 아닌 줄 알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고 절하는 것처럼, 이것이라고 하는 순간,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어떤 것이 달라붙게 됩니다. 선생님이 설법을 하실 때 이것, 이것, 바로 이것입니다, 하실 때, 선생님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해도, 이것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 것이다하고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우리는 찾는 일에는 도사고, 또 확실하게 잡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꿈을 꾸면 물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꿈을 꾸겠지만 꿈속의 일들이 결국, 깨어보면 모두 자신인 것처럼, 그렇죠? 다른 사람이 꾼 꿈이 아니라 자신이 꾼 꿈이니까, 결국 자신에게 있는 일이고, 그 모든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결국 그 하나하나의 일들이 모두 바로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하나의 배고픈 말을 먹이 있는 대로 끄는 방편일 뿐이고, 결국 찾는 것은 자신이 찾아야 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다'이렇게 마조 스님께 들으면서 대매 스님은 바로 깨쳤습니다. 그래서 마조 스님을 떠나서 30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마조 스님은 사람을 보내어 대매 스님에게 시험을 겁니다. 심부름하는 승려가 대매 스님에게 가서 "마조 스님에게서 무슨 뜻을 얻었습니까?" 대해 스님이 말했죠, "이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그 승려가 "요즘 마조 스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대매는 "이 노인네가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기가 끝날 날이 없구나, 당신은 마음대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하라. 나는 다만 이 마음이 부처일 뿐이다." 그 승려가 돌아와서 마조 스님에게 그대로 말하니, 마조 스님이 "매실이 익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찾아야, 자신이 직접 맛을 봐야, 이런 맛 저런 맛에 휘둘리지 않고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맛을 지킬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직접 보든지, 그렇게 해도 모릅니다. 옆에서 항상 얘기해주고 도와주고 하던 의지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그 죽은 사람을 좋아해서 업고 지고 가겠습니까? 이것을 알지 못하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방하착, 이렇게 말해도 빈손으로 온 손님이 내려놓는 게 뭔지 모릅니다. 욕심, 부귀영화, 건강, 장생,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다 내려놓아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등하게, 똑같이, 누구나 이 자리에 있습니다.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놓을 곳이 없고 들고 있고 싶어도 들고 있을 손이 없으면서, 딱 하나, 이게 있습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비가 자주 오네요, 이것이고 이제 추워지겠습니다, 이것이죠.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1. 마음이 지어내는 유령 ‘자아’

 

무아(無我, anātman)! 아마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 무아라는 두 글자로 요약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 대한 집착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불만족의 기원이니까 말입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늙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확인하면 누구나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마음에 담아두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텅 비어 있는 통장 잔고를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울해집니다. 그득했을 때의 통장 잔고에 집착하고 있으니까요.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 그러니까 가장 행복할 때의 자신의 모습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대한 현자들이 인간을 허영덩어리라고 지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불행하고 우울할 때의 모습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없을 테니까요.

 

허영이든 무엇이든 진정한 자기 모습이 있다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항상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고통과 불만족은 외부의 불청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불러내는 유령과도 같은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이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도 바로 이런 우리 마음의 메커니즘을 폭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과는 무관하게 우리 마음이 지어내는 가장 큰 유령은 바로 ‘자아’, 혹은 ‘나’라는 관념입니다. 문제는 이 ‘나’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강한 자의식이야말로 우리에게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불만족을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를 가르치면서 자의식이란 불꽃을 가라앉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해탈이란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닌가요. 해탈이란 자아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해묵은 자의식을 버려서 마침내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상태니까 말입니다.

 

무아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anātman)이란 글자를 들여다보세요. 이 글자에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안(an), 그리고 불변하는 자아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트만을 단순한 자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변하지 않는 불변하는 자아, 나아가 이 세상을 떠나 육신이 썩어 없어져도 소멸하지 않는 불변하는 자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살았던 당시 인도 브라만 사상가들의 생각이었지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변하는 영혼과 비슷한 것이 바로 아트만인 셈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중 최고의 집착이 바로 이런 종교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기보다는 부정하기 급급할 테니까,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변하는 자아나 그것을 만들었다는 신에 몰입하느라, 친구와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애정도 주지 않는 광신도를 생각해보세요.

 

2. 사르트르, ‘진여마음’을 말하다

 

 

자아를 만들어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고, 동시에 집착을 끊는 것도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우리 마음에는 생멸(生滅)의 측면과 아울러 진여(眞如)의 측면도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에 마음이 희노애락(喜怒哀樂)으로 널뛰기하는 것이 생멸의 마음이라면, 집착을 끊어서 마음이 고요한 물처럼 안정된 것이 바로 진여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결국 생멸의 마음이 자의식이 지배하는 마음이라면, 진여의 마음은 자의식을 극복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문관(無門關)’의 30번째 관문에서 대매(大梅, 752~839) 스님과 마조(馬祖, 709?~788) 스님 사이의 선문답도 바로 마음의 이런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매 스님이 부처, 그러니까 진여의 마음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마조 스님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卽心是佛)”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잠깐 사족 하나를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즉심시불(卽心是佛)’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번역됩니다. ‘즉(卽)’이란 글자를 ‘곧’이나 ‘바로’를 의미하는 부사로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법적으로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즉심시불’이 아니라 ‘심즉시불(心卽是佛)’이 되어야 합니다. 부사는 술어 앞에 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문법적으로 ‘즉심(卽心)’이란 구절을 술어와 목적어의 관계로 독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겁니다. 즉위(卽位)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즉위는 군주의 자리[位]에 ‘이른다’, 혹은 ‘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즉위’처럼 ‘즉심’도 ‘마음에 이른다’나 ‘마음에 오른다’는 의미로 독해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렇다면 ‘즉심시불’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이다’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이르면 부처이다’라고 번역하면, 30번째 관문의 취지가 더 명료해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통과 불만족을 낳는 자의식의 이면에는 그것을 극복한 깨달은 자의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교만의 통찰이 아닙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도 자의식의 이면에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의식, 그러니까 자의식보다는 더 심층적인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말입니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무반성적인 의식(conscience non réflexive)’이라고 부릅니다. 무반성적이라고 해서 멍청한 정신 상태나 흐리멍텅한 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의식이 없는 마음, 그러니까 ‘나’라는 집착이 없는 마음, 그래서 모든 것에 열려 있고 깨어 있는 마음이 바로 무반성적인 마음이니까요. 흥미로운 일 아닌가요. 사르트르라는 철학자가 고요하고 잔잔하기에 모든 것을 비추고 있는 호수와 같은 마음, 즉 진여의 마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3. 할과 방은 자의식 부수는 수단

 

 

사르트르의 이야기가 조금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그의 책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ence de l’Ego)’을 조금 넘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반성적인 의식에는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 내가 시내전차를 잡으려고 따라갈 때, 내가 시간을 볼 때, 내가 그림을 응시하는 데 몰두할 때,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림을 응시할 때, 우리 마음은 깨어있습니다. 이럴 때 만일 자의식이 있다면, 다시 말해 자신과 관련된 다른 일을 생각하거나 그것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그림에 마음을 둘 수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나’라는 의식, 즉 자의식이 작동한다면, 무반성적인 의식은 은폐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제 무반성적인 의식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 의식은 결코 흐리멍텅한 의식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무반성적 의식은 삶의 세계에 열려서 활발발(活潑潑)하게 작동하고 있는 마음을 가리키니까 말입니다.

 

사르트르의 도움으로 우리는 자의식이 탄생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반성적 의식이 자신을 의식하는 반성적인 의식이 될 때, 바로 이 순간이 ‘나’라는 관념이 출현하게 됩니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자의식의 지배를 받는 순간, 우리에게 무반성적 의식은 은폐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여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비의 마음이 출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마음이 타인을 품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자기만 아끼는 사람이 타인을 돌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덕산방(德山棒)’이니 ‘임제할(臨濟喝)’과 같은 충격 요법이 있었던 겁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덕산(德山, 782~865) 스님이 ‘몽둥이[棒]’를, 그리고 임제(臨濟, ?~867) 스님이 ‘고함소리[喝]’를 사용했던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무엇 때문에 덕산과 임제는 이런 파격을 행했던 것일까요. 제자가 자의식이 강할 때,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내면에 빠져 있을 때, 두 스님은 갑자기 몽둥이를 내려치거나 아니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마음을 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갑작스런 외부의 충격은 일순간이나마 자의식의 활동을 완화시키거나 중지시키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무반성적인 의식, 그러니까 활발발한 마음이 다시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무반성적인 의식 상태에서 자의식은 사라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무아’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해탈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자의식을 떠나서 마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나 자신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세계에 열려 있는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라!’ 이것이 바로 무아와 해탈을 꿈꾸는 모든 수행자들의 실천적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성불하라는 말은 자리이타의 정신

 

“성불하세요!” 다시 생활 전선으로 되돌아가는 우리를 보고 산사의 젊은 스님은 간곡하게 합장을 합니다. 짧은 산사의 생활이었지만, 부처님께 천배도 받쳤고 스님들에게 좋은 법문을 많이 들어 뿌듯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지쳤던 몸과 마음이 모두 되살아나는 느낌이니까요. 산사를 빠져나오며 잠시 웃음이 얼굴에 번져 오릅니다. 우리를 배웅했던 그 스님은 자신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나 있을까요. “성불하세요!” 정말로 그 스님은 우리가 부처가 되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정말로 부처가 된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 스님을 만날 일도 당연히 그의 법문을 들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미 부처가 되었는데, 산행이 목적이 아니라면 산사에 들려 대웅전의 석가모니에게 절을 할리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성불하세요!”라는 인사말에는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마지막 인사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젊은 스님에게 농을 던져볼 수 있다는 겁니다. “스님, 이제 제가 더 보고 싶지 않나요? 저 성불하지 않고, 다시 스님을 보러올 거예요.”


물론 상대방에게 성불하라는 말은 단순한 레토릭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자리이타의 정신이니까요.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러니까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겁니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지요.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산사에서 치열한 자기 수행으로 우리는 부처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현실성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조건이 좋은 산사가 부처가 되는 데는 더 유리할 겁니다. 갑을 관계로 복잡하게 연루되어 있는 팍팍한 경제생활에서 커다란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아이들의 육아와 교육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고, 산업자본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오염된 물과 공기, 그리고 음식을 꺼려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산사가 아닌 세속에서 웬만한 스님보다 더 주인으로 당당한 삶을 사는 데 성공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부처가 되려는 오매불망의 일념이 없다면, 번잡한 세속의 일에도 불구하고 부처가 되는 결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쩌면 산사에서보다 더 끈기 있게 노력해야만 할 겁니다. 끈기! 끈기는 근기(根機, indriy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이런 의견에 반대입니다.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anātman)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 어떻게 선천적인 능력,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변하는 능력을 긍정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면 근기가 탁월하다고, 그러니까 상근기(上根機)라고 이야기해야합니다. 반면 끈덕지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하근기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2. 일상에서 성불한 사람이 최상근기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겁니다. 근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근기여서 부처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상근기인 겁니다. 그러니까 산사에는 상근기가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산사라는 좋은 조건 때문에 부처가 되려는 열망이 쉽게 식지 않아서 사람들이 끈덕지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반면 일상생활에서 하근기가 많은 것은 치열한 수행을 방해하는 너무나 복잡한 조건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다잡으려면 거래처 사람이 전화를 하고, 애인이 찾아와서 울고, 아이들이 휴가를 가자고 조르니, 어떻게 끈기 있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거사(居士, Kulapati)라는 말이 있지요.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중국 당제국 때 활동했던 이통현(李通玄, 635~730)이란 거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이란 방대한 저작을 남길 정도로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했던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스님들도 함부로 다루기 힘든 재야의 고수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 조계종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마저 그의 책을 요약해서 정리한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를 지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통현만 상근기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책도 짓지 않고 어떤 스님과도 논쟁을 하지 않는 진정한 재야의 고수는 도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과 논쟁에는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거나 논쟁에서 이기려는 허영과 자만이 깔려 있는 법이니까요.


사실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명성은 덧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겁니다. 그런 명성에 연연하는 순간, 우리 삶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명성이 되니까요. 더군다나 선불교의 정신은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아닙니까. 문자가 자신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하도록 할 수는 없으니,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통현과 같은 거사를 넘어서는 진정한 고수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정말 스님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겁니다. 산사에서 치열하게 노력해도 되지 못한 부처의 경지에 오른 세속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서른한 번째 관문을 긴장으로 몰고 가는 어느 주막의 노파(老婆)가 바로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속에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내는 부처가 되었다면, 스님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못 수행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동요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3. 조주 스님의 노인 간파는 궁색

 

부처가 되려고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778~897)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오대산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한 참을 왔으나 오대산이 나오지 않자, 스님은 당혹했나 봅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지요. 다행히 어느 주막에 이르게 되고, 스님은 그곳 노파에게 길을 물어보게 됩니다. 그러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驀直去)”라고 일러 줍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스님이 그녀의 말대로 가던 길을 가려고 한두 걸음 떼었을 때, 노파는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작은 소리였지만, 그 스님에게는 경천동지할 뇌성처럼 들렸나 봅니다. 어쩌면 스님은 임제(臨濟, ?~867)의 가르침을 떠올렸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입니다. 산사에 들어가면 주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사실 그 사람에게 진정한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노파는 스님을 조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가라는 지시대로 가는 스님이라면, 조주를 만나도 결코 주인이 되지 못하리라는 탄식일 수도 있지요. 조주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조주가 자신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아마 오대산에 이르러서도 스님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겁니다. 조주가 그런 내색을 모를 리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문하의 제자들도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을 겁니다. 당당히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자신들이 부처되기 놀이를 하고 있다는 불안감이었을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위대한 선생이란 명성을 날리고 있던 조주도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진정한 재야의 고수, 제자니 선생이니 산사니 주막이니 가리지 않고 주인으로 살고 있는 진정한 부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조주는 몸소 움직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 내가 가서 너희들을 위해 그 노파의 경지를 헤아려보도록 하마!”
다음 날 몸소 조주는 노파가 있다고 하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오대산을 처음 찾아가는 스님처럼 그곳으로 가는 길을 물어봅니다. 그러자 노파는 “똑바로 가세요”라고 일러줍니다. 노파의 말대로 한두 걸음 발을 떼자, 그녀는 또 말합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그렇습니다. 노파는 조주를 찾아가려는 어느 스님한테나 똑같이 대응했던 겁니다.

 

조주가 너무나 유명하여 그에게서 배우려는 스님들이 많이 주막을 지나갔나 봅니다. 어쨌든 조주는 안심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동요하던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오대산의 노파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제 완전히 간파했다.” 그렇지만 적진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려는 스파이처럼 움직이는 조주의 행동에 궁색한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요.

 

 

(무문관 제31칙) 조주감파(趙州勘婆)

 

★한 스님이 노파에게 물었다.

스님: "오대산 가는 길이 어디 입니까?"

노파: "곧장 가시오."

---스님이 몇 발짝 가는데 노파가 말했다.

노파: "좋은 스님이 또 저렇게 가는구나."

후에 이런 일에 대하여 조주에게 이야기하니, 조주가 말했다.

조주: "내가 그대들을 위해 노파를 감정하고 올 테니 기다리게."

다음 날 스님과 똑같이 물으니 노파 역시 똑같이 대답하였다.

조주가 돌아와서 대중에게 말했다.

조주: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오대산 노파의 감정을 마쳤노라."

 

★무문왈: 노파는 막사에 앉아서 작전을 짤 줄만 알았지 도둑이 든 줄 모르는구나,

조주 노인이 진영을 숨어들어 요새를 칠 줄만 알았지 대인의 품격이 없구나.

점검해 보니 둘 다 허물이 있다.

"자! 말해 봐라. 조주가 노파를 감파한 곳이 어디인가?"

 

★송: 물음이 같으니 답도 역시 비슷하구나!(노파)

밥 속에 모래가 있고 진흙 속에 가시가 있네.(조주)

 

○재주에 집착하면 오히려 재앙을 만들 수 있다.

눈 밝은 자 눈병 나기 쉽고, 귀 밝은 자 귓병을 조심하라.

한 마음 돌리면 초록은 어느 듯 낙엽으로 날리는데

바람결에 실어보낸 마음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사 덧 없으니 쉬어감이 어떠하오.

 

○내 그대를 위해 노파를 감정하리라.

--조주의 이 말이 가능하기는 한가?

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만약 가능하다면 내 그대들을 위해 온 우주를 감정하여 직하에 보여주리라.

가능하지 않다면 조주는 왜 노파의 감정을 마쳤다고 하였을까?

조주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 차린다면 그대는 이미 자유인이다.

그러나, 한 순간도 머뭇거린다면 그대는 촌놈임에 틀림없다.

어떤 승려가 노파에게 물었다.

"오대산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노파가 말했다.

"곧장 가시오."

승려가 막 서너 걸음 걸어가자 노파가 말했다.

"훌륭한 스님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뒤에 어떤 승려가 조주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조주가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그 노파의 속임수를 밝혀 내겠다."

 

다음 날 곧 가서 역시 그렇게 물으니,

노파도 그렇게 대답하였다. 조주가 돌아와서 대중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오대산 노파의 속임수를 밝혀 내었다."

 

 

[무문의 말]

 노파는 싸움터에 나아가지 않고 막사 속에 앉아서 작전 짤 줄만 알다가, 도리어 적에게 속아서 한 방 먹은 줄은 알지 못했다. 조주 노인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습격하여 요새를 빼앗는 계략은 잘 썼지만, 또한 대장부의 모습은 없었다. 이처럼 점검해 보면 두 사람 모두에게 허물이 있다. 그러나 말해 보라.

조주가 노파의 속임수를 밝혀  낸 곳은 어디인가?

 

[군소리]

노파는 나그네를 속였다고 즐거워하고

조주는 노파를 몰래 점검했다고 큰소리치지만,

나그네는 속은 적 없고 노파는 점검 받지 않았으니

노파와 조주는 제꾀에 제가 넘어갔을 뿐이로다.

 

 아무리 유명한 조주 스님일지라도 이것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쓴 무문혜개 스님은 항상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무엇을 내보이는 것 같은데 항상 싹~ 거두어들이는 것이지요. 잘 보지 못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선사는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다른 길이란 것은 바른 공부에 집중을 안 하고 자꾸 다른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을 말하죠.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말처럼, 풀을 좋아하는 소가 논두렁 길을 가는데, 지천으로 피어있는 풀을 보고 이리저리 뛰어날뛰지 않도록 고삐를 이리저리 채어 당기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 지속적으로 몰아치거나 보여줄 뿐이지, 이것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일, 자신이 해야 하는, 자신이 직접 밝혀야 온 세상이 이 한 개의 불빛으로 다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좀 더 신중하고 이해하고 정말 맞는 말을 하면 모두가 머리를 끄덕이지만, 특히 이런 말을 들으면 '왜, 곧장 가라고 해서 갔는데 승려는 노파를 간파하지 못하고 똑같이 한 조주 스님은 간파를 하였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이 이 무문관 책을 집을 때부터 그물에 걸리는 것입니다. 여름에 파리가 많은 곳에 놓아둔 파리 찐득이처럼, 떡 붙는 것입니다. 안 붙는 방법은 책의 내용을 풀이해서 이해를 하거나, 아예 안 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무문관의 강점이 찐득이처럼 착 자신도 모르게 달라붙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처럼 죽거나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노파는 길을 물어서 가르쳐 주었을 뿐이고 승려는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노파가 "또 저렇게 가는구나!" 그 한 마디에 승려들이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저 노파가 법을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그것을 파악하기 힘드니까 웅성웅성, 그래서 조주 스님이 나섰습니다. 한마디로 간파했다고 했지만, 뭘 간파했을까요? 비록 승려들의 말은 잠재울 수 있지만 생각을 깰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툭하면 어디 가서 이 사람의 법이 더 확실한지, 아니면 저 사람이 더 법이 분명한 지,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잣대를 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체험하고 안목이 생겨야 법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전까지는 겨우 알고 있는 지식의 잣대, 남의 말일뿐인 것입니다. 남의 말은 아무리 좋고 번듯해 보여도 실제 필요할 때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됩니다. 자신의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배고플 때 사 먹을 수 있고, 은행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한들, 내 계좌에 돈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분명하면 노파가 저쪽으로 가라 해서 가든, 이쪽으로 가든, 또 저렇게 간다고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제가 일본에 배낭여행 갔을 때 7개 노선이 지나가는 지하철에서 출구를 몰라서 헤맬 때, 이쪽으로 가라 해서 100M 가면, 다시 저쪽으로 200M 가라 하고, 아, 정말 1시간 헤맸는데, 알고 보니 출구는 무조건 위로 간다고 생각해서 한참을 밖으로 나가는 행선지를 보고 헤맸는데, 지하철 옆에 밑으로 두 번 내려가서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이던 군요. 그러니까 자신이 헷갈리고 모를 때에만, 자신의 법이 분명하지 못하고 아직도 뭔가를 찾고 갈구하고 있을 동안에만 그렇게 헤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항상 중심입니다. 내가 중심인데 어느 쪽으로든 다 길이 열려 있습니다. 어떤 길을 가도 길이 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자신이잖아요. 이게 있으니까 길이 있는 것이고 걸을 수 있는 것이지, 지금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손을 흔들어보세요, 이것입니다. 원래 이것, 이것뿐입니다.

 

손을 이쪽 저쪽 흔드는 게 노파의 길 안내이고, 조주 스님의 간파입니다. 이것, 이쪽저쪽 흔드리지만 가지 않은 게 있잖아요. 손을 이쪽저쪽으로 흔들지만, 이쪽저쪽이라는 것은 손을 경계에 두고 말하는 것이지, 그런 경계는 항상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손이 없다면 이쪽저쪽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흔드는 이뿐, 이것뿐입니다. 흔들든 흔들지 않든 이쪽이라 하든 저쪽이라 하든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이런저런 생각의 경계가, 허망한 '상'일 뿐임을 알면 더 이상 경계는 없는 것입니다. 저의 조카가 장가를 갑니다. 큰언니는 예단과 결혼 준비 때문에 정말 미쳐버리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잘해주려고 하면 상처를 받고 안 해주려니 체면이 안 써고, 마음은 갈수록 작아져서 손톱만큼 좁아지게 됩니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속상한 일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상'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한번 빠지면 미로처럼 헤어 나올 수없고 끝없이 이 문을 열면 좋았다가 저 문을 열면 슬프고, 그런데 이 공부를 하면 미로 속에 있어도 미로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 이것뿐입니다. 언제나 다만 이것, 이것을 알면 그런 생각의 '상'속에 자신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상'의 실체를 보면 모두 자신이 꾸는 꿈처럼,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 이것뿐입니다.

 

무문관 제32칙/외도문불(外道問佛)

외도(外道)가 세존(世尊)에게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세존은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자리에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커다란 자비를 내려주셔서, 미혹의 구름에서 저를 꺼내 깨닫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예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아난(阿難)이 곧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감탄하고 떠난 것입니까?” 그러자 세존은 말했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삶의 차원에서 매순간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만일 두 가지의 문제가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차원이 아니라 머리로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두 가지 문제가 모두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은 두 가지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신세입니다.

한 쪽 길로 가려고 해도 더 깊이 더 멀리 가지 못하고 곧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서 다른 쪽 길로 갈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그 갈림길 주변부에 머물다 지쳐가게 될 겁니다.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제대로 삶을 영위하지는 못하는 셈입니다.

제대로 길을 걸으려면, 그는 갈림길 중 어느 한 가지 길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인연과 항상 마주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두 번째 관문에서 어느 외도(外道) 한 사람이 당당히 서 있습니다. 외도란 불교 이외의 사상이나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싯다르타를 지적으로 이기기 위해 찾아온 외도가 어떻게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싯다르타의 말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물어보았던 겁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한 마디로 외도는 싯다르타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뻐기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지적인 오만에 가득 차 있는 외도의 도전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싯다르타는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지적인 구분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것이고, 동시에 외도의 지적인 의문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겁니다.

지적인 오만에 빠진 사람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준다는 것은 마치 타오른 모닥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지적인 오만에 빠지지 말고 삶을 주인으로 살아라!”라고 말해도, 외도는 오만, 주인, 삶 등의 개념을 가지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요. 최소한 기름은 붓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행스럽게도 외도는 그로 하여금 지적인 집착과 허영에서 빠져 나오도록 싯다르타가 침묵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싯다르타의 자비에 예를 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싯다르타의 말대로 이 외도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근기는 갖추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쨌든 싯다르타의 침묵은 알음알이에 빠지지 말고 삶을 주인으로 살아내라는 자비로운 명령이었던 셈입니다.

무문 스님이 이 대목을 놓칠 리가 없지요. 서른두 번째 관문을 마무리하면서 무문은 이야기합니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不涉階梯, 懸崖撤手)”고 말입니다. 

계단이나 사다리에 의존해 절벽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설 수가 없을 겁니다. 계단이나 사다리가 우리의 당당한 삶을 막고 있었던 셈입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어느 순간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스스로! 계단과 사다리로 상징되는 일체의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온뭄으로 깨닫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일 수도 없는 법이니까요. 깨달음은 스스로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32칙 외도가 부처님께 묻다.(外道問佛)


세존(世尊)에게 어떤 외도(外道)가 물었다.
"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외도가 찬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셔서 제 어리석음의 구름을 열고서 저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절을 하고서 물러갔다.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다.
"외도는 무슨 깨달음이 있었기에 찬탄하고 물러갔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마치 좋은 말이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


*세존 = 부처
*외도 = 부처(불교)를 믿지 않는 모든 종교

흔히 외도라하면 이단, 사이비로 매도하며 배척하지만, 나와 다르다하여 그것이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마음 공부는 열려있는 사고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는 종교를 가지는 것보다 자기에 대한 깊은 사유, 관찰, 탐구로 한걸음씩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리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신은 만든 것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신과 교리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습니다. 고정된 진리, 깨달음도 없고(무상) 고정된 나도 없습니다.(무아)
깨달음은 어떠한 경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것에 문제와 의문을 느낌, 자기만의 해답을 얻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이가 깨달은 사람입니다.

 

 

세존에게 어떤 외도가 물었다."말 있음도 묻지 않고, 말 없음도 묻지 않겠습니다."세존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외도가 찬탄하며 말했다."세존께서는 대자대비하셔서 제 어리석음의 구름을 열고서 저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해 주셨습니다."그리고 곧 절을 하고서 물러갔다. 아난이 부처님께 물었다."외도는 무슨 깨달음이 있었기에 찬탄하고 물러갔습니까?"세존께서 말씀하셨다."마치 좋은 말이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    [무문의 말] 아난은 곧 부처님의 제자인데도 여전히 외도의 견해만도 못하구나!말해보라.외도와 불제자는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나?  [군소리}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라면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자기의 참 얼굴을 바로 보고자 하는가?있음은 있음이고 없음은 없음이다.  우리는 법이라는 것, 깨달음이 부처님이나 선지식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야말로 그게 생각입니다. 깨칠때에는 자신의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법이 명확하고 모든 의문이 한순간에 싹~ 가시고 이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니라 이게, 선지식이 아니라 이게, 말이 아니라 이게, 손이 아니라 이게, 거울이 아니라 이게, 천정이 아니라 이게, 모든 게 이것뿐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법을 물으려 유명한 스님을 찾아갔는데, 하필이면 그 선지식은 강 건너에 있었습니다. 이쪽에 있는 학인이 "불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는데, 그 스님은 부채를 한번 움직였는데, 학인은 바로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인연인 것입니다. 일대사인연, 이렇게 딱, 깨치는 순간이 언제 올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도둑이 담 넘어 들어오듯이, 도둑이 언제 들어올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시절이 돼야 과일이 익는 것처럼, 그렇게 저절로 딱 맞아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렇게 멀리서 찾아왔고 이리저리 헤매고 찾아다녔는데, 알고 보니 늘 같이 있었던 거라, 늘 항상 아니라고 던져두었던 모든 것들이 모두 이것인 것입니다. 망상이면 망상이라고 맨날 없애려고 노력했던 것이, 또 실상이면 실상이라고 머무르고 싶었던, 가지고 싶고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 모두 한결 같이 이 하나, 이것인 것입니다. 늘 언제나 생각하고 행동했던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이 이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모두 법인 것입니다. 법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들이 들어가고 깨달음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게 완전하고 공이라고 해도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일 뿐, 단지 이름일 뿐, 모두가 다만 이 하나의 일입니다. 단지 이뿐이면 말 있음이라고 해도 이뿐이고 말이 없음도 이뿐이고, 말이 있어도 말이 없어도 물어도 묻지 않아도, 어쨌거나 그런 것에, 말에 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입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속 어디에 말이 숨어있습니까? 말이라는 것은 생각이고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머리는 우리가 지내온 모든 것들의 저장소입니다. 우리가 밝혀야 하는 것은 뇌의 비밀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 자신의 본래면목을 밝혀야 합니다. 아니,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글을 읽고 보는데, 이게 뭔지 이것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수시로 변하는 생각에, 마음에, 늘 기쁨과 고통을 받는데, 도대체 누가 받는지, 받는 사람은 누구인지, 이 육체가 받습니까? 그럼 죽은 사람도 고통을 받습니까? 아니면 그런 생각들이 받습니까? 그런 생각들이 없다면, 기쁨과 고통은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부처님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하나를 밝히고 2500년을 이어왔습니다. 사실 2500년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서 세운 숫자입니다. 2500년이라는 것도 기록된 것이지요. 그런 것은 모래와 같습니다. 실제 모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세고 있는 이게 더 한량이 없는 것이지요. 사람이 태어난 이래 모든 고통을 벗어나고자, 이 하나를 직지 해왔고 단지 이 하나뿐임을, 우리는 모두 부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번뇌를 보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통과 행복, 윤회, 업, 죽음, 사후 모든 게 모두 우리가 만든 세상인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것에 자신이 속는 것입니다. 무한하고 깊이를 잴 수 없으면서 또 안 들어 간 곳이 없습니다. 넓은 하늘에도 티끌 하나에도 조금의 다름없이 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무문관 33칙/비심비불(非心非佛)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마조에게 묻자, 마조가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다섯 번째 조사인 홍인 스님에게는 걸출한 두 명의 제자가 있는데, 신수와 혜능이 바로 그들입니다.

선불교의 역사에는 신수는 북종선(北宗禪)을, 혜능은 남종선(南宗禪)을 상징합니다.

북종선은 장안(長安)과 낙양이라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남종선은 강호(江湖) 즉 강서(江西)와 호남(湖南)이라는 시골을 중심으로 본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선불교의 역사에서 처음에는 북종선이 주도적인 입장이었으나 권력의 불교 탄압으로 권력의 사정권에 있던 북종선은 거의 와해 되어 버렸고,

반면에 지리적으로 권력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웠던 남종선은 자신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남종선은 강서를 대표했던 마조(馬祖) 스님이고, 호남을 대표했던 석두(石頭) 스님으로, 두 스님이 없었다면 혜능이 시작했다고 하는 남종선이 선불교의 주류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마조와 남악 선사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악이 마조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그러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부처가 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남악은 벽돌 한 개를 가져와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풍경에 마조는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당황스런 얼굴로 마조는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록(馬祖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남종선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마조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길을 민중에게도 열어 놓았던 것처럼,

선종은 마조를 통해 치열한 참선으로 축소되었던 부처가 되는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젖힌 것입니다.

평상(平常)이라는 말은 '일상생활' 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중요한 단어입니다.

'평(平)' 이라는 글자는 저울이 균형을 잡는 순간, 물의 표면이 동요되지 않고 잔잔한 순간을 묘사하는 개념입니다.

'상(常)'은 항상(恒常) 즉 '지속'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마조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무문의 말]

 만약 여기에서 깨닫는다면, 배우는 일을 끝마칠 것이다.

 

[무문의 송]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보여 주어야 하지만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바치지 마라.

사람을 만나거든 우선 3할만 말해야지

한 개 마음을 다 베풀어서는 안 된다.

 

[군소리]

 열 가운데 셋만 말하라니

무슨 망상이 이리 심한가?

언제나 열을 모두 말하지만

듣는 놈이 제멋대로 듣는 게지.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밥 안 먹는다고, 특히 유치원 갈 때 유치원 버스 올 때 다 되었는데, TV 만화 보면서 입에 밥을 넣고 안 씹고 있으면, 밥숟가락 들고 시계 한 번 쳐다보고 땀이 납니다. 하여간 아이는 배가 안 고픈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밥을 안 먹고 가보니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배가 고프구나 하고 느낄 때, 그게 반복이 되면 자연히 아침에 밥을 찾아 먹게 됩니다.  이것, 이 법이라는 것도 약간 비슷합니다. 자신이 진실로 배가 고픈 것을 알아야 밥을 먹을 자세가 돼 있는 것입니다. 매일 여기저기에서 먹을 것이 많고 배도 안 고픈데 아무리 좋은 음식을 준들 그것은 많고 많은 음식 중의 하나일 뿐, 보기 좋고 먹음직스럽고 향기까지 달콤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은 모양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배고픈 사람은 모양을 보지 않고 그냥 덥석 먹습니다. 그게 유효기간이 지났거나 남이 먹다가 남은 음식이든, 얼마나 맛있게 먹습니까?

 

예전에 어떤 도반은 한라산을 등반할 때, 한라산에도 휴게소가 있는 줄 알고 가벼운 물만 챙겼다가 꼭대기까지 힘들게 올라가도 먹을 것은 하나도 없고 전날도 못 먹은 터라, 먹을 것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머니에 돈은 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먹을 것을 펴놓은 사람에게 염치없이 좀 달라고 했지만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하고 주지 않았대요. 저도 올라가 봤지만 얼마나 멉니까? 내려가면 밥을 배부르게 먹어야지, 어질어질 겨우 다 내려와서 밥을 두 공기 주문했는데, 막상 한 숟가락을 넘기는데 밥이 안 넘어가서 겨우 물 말아서 두 숟가락 먹고 주인에게 감사의 큰 인사를 하고 나왔다는, 그 도반은 많은 돈이 있어도 필요 없고 밥 한 그릇이 절실했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많이 깨쳤다고 합니다. 매일 밥을 먹는 사람은 매일 밥을 먹어도 중요한 줄 모릅니다. 좀 더 다른 음식, 색다른 음식, 먹어보지 못한 것에 관심이 더 많은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정말 배가 고파야 합니다. 머리에 땀이 나고 어질어질하고 모든 신경이 먹는 음식에만 가있고 그래야 진짜 음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온갖 것에 가려진 진짜 음식, 그렇게 해야 배부르게 먹고 다시는 음식을 찾지 않습니다. 언제나 음식이 넘쳐 납니다. 평생 먹어도 다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배고픈 사람에게, 정말 먹이를 찾아헤매는, 진실로 물 한 방울이 그리운 사람에게, 물 한 방울, 밥 한 숟가락을 달라는 사람에게 줘야지 됩니다. 법을 안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여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생구제? 자비?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안타깝게 보는 자신이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것도 자신의 문제 아닙니까? 자신이 맞는다고 하는 법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이는 것이지, 모든 일 하나하나가 이것, 자신의 밖에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일 뿐이고 자신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열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까? 그렇게 나누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 이게 종교가 만든 뿌리 깊은 관념입니다.

 

이런 신적인 존재도 자신이 없다면 없는 것입니다. 죽음도 자신이 없다면 없는 것이고, 결국 누가 만드느냐?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생각이 있기 전에, 한 생각이 탄생해서 세상을 만들기 전에 이미 원래 있었던 것이고 지금도 이렇게 있고, 늘 지금 여기, 있는 바로 이것입니다. 한 생각이 있기 전에, 당신이 '신'이라는 단어를 알면서 드디어 신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몸이 '나'다' 하는 생각도 나오고, 그 이후에는 그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있는 이 실재를 못 보게 됩니다. 모양을 보면 모양에 따라가고 생각을 하면 생각에 따라가도록 그렇게 맞춰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한 생각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으로 살아도 역시 이 하나로 사는 것이지, 이것을 못 볼 뿐입니다. 따로 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이 하나, 이것, 이 일입니다. 이것을 알면 10개를 주든 3개를 주든 1개를 주든 결국 주고받는 일이 없습니다. 흥정할 주고받을 게 없습니다. 딱, 딱, 떨어져서 손에 남는 게 없습니다. 다만 이 하나, 이뿐이지, 모든 게 이 하나, 이 일입니다.

1. 강호(江湖)는 남종선의 본거지

 

중국 역사를 보면, 아니 허름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더라도 빈번히 등장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강호(江湖)”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아직도 나이든 저자들의 서문에는 “강호제현(江湖諸賢)에게 질정(叱正)을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강호의 여러 현명한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꾸짖어 바로 잡아주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강호’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중국 불교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강호라는 말은 강서(江西)와 호남(湖南)을 줄인 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다섯 번째 조사인 홍인(弘忍, 601~674) 스님에게는 걸출한 두 명의 제자가 있었지요. 신수(神秀, ?~706)와 혜능(慧能, 638~713)이 바로 그들입니다. 선불교의 역사에서 신수가 북종선(北宗禪)을, 그리고 혜능은 남종선(南宗禪)을 상징합니다.

 

바로 강서와 호남, 그러니까 강호라는 시골이 바로 남종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북종선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이란 대도시를 본거지로 두고 있었습니다. 강서를 대표했던 스님이 바로 마조(馬祖, 709~788)이고, 호남을 대표했던 스님이 석두(石頭, 700~790)였습니다. 두 스님이 없었다면, 혜능이 시작했다고 하는 남종선이 번창해서 뒤에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선불교의 주류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석두도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마조입니다. 그 유명한 백장(百丈, 749~814)도, 임제(臨濟, ?~867)도, 조주(趙州, 778~897)도, 그리고 ‘무문관’을 편찬했던 무문(無門, 1183~1260)마저도 모두 마조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조의 어떤 면이 남종선이라는 도도한 강물을 만들게 되었던 것일까요.

 

마조의 개성을 이해하려면, 그가 자신의 스승 남악(南岳, 677~744)에게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남악 스님은 바로 6조 혜능의 직제자이지요. 마조와 남악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옵니다. 어느 날 남악이 물었다고 합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도모하는가?” 그러자 마조가 말했습니다. “부처가 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남악은 벽돌 한 개를 가져와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이한 풍경에 마조는 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당황스런 얼굴로 마조는 물었다고 합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의 이야기를 담은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실려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남종선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마조의 깨달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 벽돌은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다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일 뿐이고, 나는 나일뿐입니다. 왜 나를 갈고 다듬어서 싯다르타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할까요. 물론 이것은 되려고 해도 될 수도 없는 일일 겁니다. 더군다나 이런 노력이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요. 벽돌은 있는 그대로 벽돌일 뿐이고, 거울은 있는 그대로 거울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일체의 가치 평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고요. 벽돌이 거울이 되지 못했다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거울은 벽돌과 달리 귀하다고 해서 뻐기는 상황, 그러니까 가치 평가가 탄생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해묵은 집착에 빠지기 때문이지요. 더 좋다는 것을 추구하고 더 나쁘다는 것을 피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외적 가치의 노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체 가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요. 이럴 때 우리는 세상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남악은 마조에게 “좌선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생 남의 꽁무니만 쫓아다녀서야 어떻게 자신의 의지대로 한 걸음이라도 걸어보는 경험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란 무엇인가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집착은 무엇인가에 집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집착할 때 우리의 마음은 활발발하게 생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아교처럼 굳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주인공으로서의 삶, 다시 말해 부처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가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처가 되려고 집착하는 것, 나아가 부처가 되려는 방법으로 좌선에 몰입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부처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될 수 없다는 징표라고 할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조어록’을 보면 마조는 자신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명료화합니다. “무릇 불법을 구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 바깥에는 별도로 부처가 있지도 않고, 부처 바깥에는 별도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문관(無門關)’의 33번째 관문은 “마음 바깥에는 별도로 부처가 있지도 않고, 부처 바깥에는 별도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마조의 가르침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조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스승의 가르침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나 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아마 ‘너의 마음에서 부처를 찾아라!’는 스승의 말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조의 대답은 제자의 기대를 좌절시키고 맙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또 일이 벌어진 겁니다. 마음과 부처를 자꾸 외부에서 구하려는 제자가 등장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마조의 가르침은 “무릇 불법을 구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사자후에 담겨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것도 구하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떤 집착도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더 막연하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3. 평상시의 마음이 부처되는 길

 

동안거(冬安居)니 하안거(夏安居)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근기가 탁월한 스님들이 부처가 되려는 염을 세우고 치열하게 참선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동안거는 겨울에 뜨거운 땀이 솟구치도록 만드는 열기를 자랑하고, 하안거는 여름에 뜨거운 태양마저 얼려버릴 냉기가 고요한 사찰 마당을 휘감는 것입니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데, 겨울의 추위나 여름의 더위쯤 대수이겠습니까. 너무나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이지요. 그런데 지금 마조의 스승 남악은 이런 노력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될 수 있다면 참선해서 부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조롱과 함께 말입니다. 마조가 반문했던 것처럼 벽돌을 아무리 정성스레 치열하게 다듬는다고 해도 거울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좌선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삶의 당당한 주인공, 혹은 활발발한 마음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마조를 상징하는 명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교종이 자랑하는 불경에 대한 지적인 이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종 전통에서 강조하는 좌선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그저 평상시의 마음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민중에게도 열어놓았던 것처럼, 선종은 마조를 통해 몇 명 근기가 탁월한 스님들의 치열한 참선으로 축소되었던 부처가 되는 길을 진짜로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젖힌 것입니다. 이제 부처는 선방(禪房)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생활 도처에서, 예를 들어 6조 혜능이 몸소 보여주었던 것처럼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운수반시(運水搬柴)의 과정에서,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평상(平常)이란 말은 ‘일상생활’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중요한 단어입니다. ‘평’이라는 글자는 저울이 균형을 잡고있는 순간, 혹은 물의 표면이 동요되지 않고 잔잔한 순간을 묘사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평’이라는 글자는 흔들리는 저울이나 요동치는 물과는 대조적인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누구나 일희일비하는 분주한 일상생활에서 이런 고요하고 안정적인 마음 상태를 작으나마 갖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어느 한 순간에는 싯다르타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마음 상태가 지속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우리들과 깨달음에 이른 부처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평상’이란 단어의 두 번째 글자 ‘상(常)’이 우리의 눈에 강하게 들어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릅니다. ‘상’은 ‘항상(恒常)’이란 말이나 아니면 ‘상례(常例)’라는 말에서처럼 ‘지속’을 의미하는 말이니까요.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를 때도, 제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할 때도,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도, 어느 경우나 ‘평’의 마음이 지속될 때 마침내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의 마음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마조가 말했을 때, 진정으로 공부해야 할 곳은 바로 ‘상’이라는 한 글자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 제34칙/지불시도(智不是道)

남전(南泉) 화상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앎은 도가 아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종이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만큼 엘리트 중심적인 경향을 보였다면, 선종은 시골에 기반을 두고 펼쳐져 민중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양대 슬로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가리킨다는 것”, 그것은 외부 경전에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마음에 둔다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성을 본다면 부처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찾느라고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갇힐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즉 자신의 고민거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는 친구나 가족들의 고뇌에 그만큼 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요. 그렇습니다. 지나친 내성은 자비(慈悲)라는 불교의 핵심 정신을 어기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느라 우리는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내성을 통해 수행자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맨얼굴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삶을 살아낼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네 번째 관문에서 남전(南泉, 748~834) 화상이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心不是佛), 앎은 도가 아니다(智不是道).”

아마도 제자들이 자신의 본래 마음을 터득했다고, 혹은 자신이 마침내 자기의 불성을 잡았다고 확신했을 때, 남전 화상은 충격적인 가르침을 내립니다. “너희가 붙잡았다고 자신하는 마음이 정말 부처의 마음인가? 너희가 지금 알았다고 자신하는 것이 정말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인가?”

간신히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왔는데, 다시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형국입니다.

제자들이 진짜로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허위를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가짜 부처에 머무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행자로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희망적인 일이니까요.

임제(臨濟, ?~867)의 말처럼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어야(隨處作主)”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 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10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1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이란 선종의 가르침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본래 마음, 혹은 자신의 불성을 제대로 보았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홀로 있을 때에는 진정한 삶의 주인, 즉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10,000명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부처라고 믿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부처가 되었다는 오만에 빠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법입니다.

남전 스님이 서른네 번째 관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말했던 겁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心不是佛)”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에 성공했다고 떠들어도 타인과 만났을 때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그가 터득했다고 하는 마음이나 불성은 모두 가짜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이 부처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반면 홀로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부처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잡은 것이고 불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과 실제 부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남전 스님은 사족 하나를 더 붙였던 겁니다. “앎은 도가 아니다(智不是道)”라고 말입니다.

이제 가슴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겁니다. 앎이 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부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남전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다."

 

 

[무문의 말]

남전은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고 하겠으니,

냄새나는 입을 열자마자 집안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는구나.

 

 

[군소리]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마조가 싸지른 똥 무더기를

남전이 애써 치우기는 했으나

더러운 냄새는 치우지 못했네.

 

  요즘은 '정보의 시대'라는 말도 구석기시대 같은 말입니다.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우리는 정보의 물결에 싸여 있습니다. 지금 같은 공간에서 미국에 있는 이웃님과의 얘기를 하는 것도 정말, 글로벌 시대에 있고 무엇을 추구하든 이제는 앉아서 전 세계의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의학의 발달로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고, 우리는 건강을 위해 이리저리 정보를 캐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 티브이에서 해독주스가 몸에 좋다면 그 종목의 야채가 많이 팔리고, 유리그릇이 물을 끓이는데 좋다고 하면 유리 냄비가 불티나게 팔리고, 건강식품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한 스님이 마음을 비우라고 하면, 역시 훌륭하신 스님이구나!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을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 좋다는 운동, 음식, 생각들이 모두에게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실험과 확률로 일반적이라고 하지만 개개인의 환경에 처해진 몸 상태와 백 퍼센트 맞지 않는 것처럼, 자신에게 안목이 없으면 어느 스님이 진실을 말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진짜 꽃처럼 생기 있고 예뻐서 손을 댔는데 가짜 꽃, 조화인 줄 그제야 아는 것처럼 이리저리 헤매게 됩니다.

 

 

남전 스님이 말을 한 것은 '마음이 부처가 아니고 지혜는 도가 아니다.' 이 말이 아닙니다. 남전 스님이 말한 것은, 이것입니다. 뒷말은 뭐라고 하시든 상관이 없습니다. 남전 스님이 말한 것은? 벌써 말을 다 했습니다. 남전 스님이 말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들었습니까? 이것입니다. 언제나 말과 상관이 없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방편입니다. 틀리고 맞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방편을 계기로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 저쪽으로는 절벽이라서 도저히 생각으로 갈 수 없는데, 그쪽으로 나도 모르게 밀려가는 것입니다. 도저히 생각으로 갈 수 없는 길을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옮기게 되는 게 방편의 역할입니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순간, 마음이고 부처고 지혜고 똥이고 냄새고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나면 모두 이 법을 가리키는 말이지, 다른 말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이 생각으로 이게 맞다, 틀리다 하지 않으면 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확실하게, 정말 생각으로 이해하지 말고 오직 이게 분명하다면 모든 말과 행동, 감정에 전혀 거침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게 아니라, 갖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라, 꼭 해야 될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머리 쓰는 일이 없이 여기서 저절로 일어납니다. 모든 일들이 원인과 결과 없이, 원인과 결과는 '나'라는 게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나'라는 상이 자꾸 떨어지고 없어지면 그냥 일어나는 일, 이대로가 다만 법일 뿐이고, 이게 본래 자신, 이게 이름을 붙이면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게 있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라는 것은 항상 이것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계를 만들고 구분 짓지 않는다면 이곳, 저곳이 아니라 바로 모두 이 자리, 떨어질 수 없는 이 자리, 이것, 이것뿐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와중에도 이렇게 아르바이트 가야 될 시간을 맞춘다는 게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이뿐입니다. 건강하십시오, 이것입니다.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주말 잘 보내세요. 이뿐입니다.

1. 선종은 이론 대신 치열한 수행 강조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종이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만큼 엘리트 중심적인 경향을 보였다면, 선종은 시골에 기반을 두고 펼쳐져 민중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릅니다. 교종이 경전과 이론을 강조했다면, 선종은 마음과 치열한 수행을 강조했으니까요. 그래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양대 슬로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직접 가리킨다는 것”, 그것은 외부 경전에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마음에 둔다는 뜻입니다. 또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불성을 본다면 부처가 된다”는 슬로건의 의미이지요. 이제 과감히 경전을 집어던지고 자기 마음에 집중하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커다란 문제, 즉 내성(內省, introspection)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 대한 지나친 응시는 우리를 유아론(solipsism)에 빠지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에서 불성을 찾느라고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갇힐 우려가 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면이란 거대한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내성은 자신의 본래 마음을 찾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내면세계 속에서 지나치게 방황하느라 우리는 외부 세계를 쉽게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고민거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는 친구나 가족들의 고뇌에 그만큼 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요. 그렇습니다. 지나친 내성은 자비(慈悲)라는 불교의 핵심 정신을 어기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느라 우리는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자비의 정신과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수많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내성을 통해 수행자는 자기의 본래면목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맨얼굴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삶을 살아낼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떤 수행자가 자신의 맨얼굴, 혹은 불성을 찾았다고 확신한다고 해봅시다. 그렇지만 과연 그는 정말 자신의 본래 마음을 찾은 것일까요, 정말 자신의 불성을 찾은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당한 주인으로서의 삶은 세계 속에서 확증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깨달은 것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겁니다.


2.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란 정신분석가도 자신의 저서 ‘정신분석의 다른 측면(L'envers de la psychanalyse)’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는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지금 라캉은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주장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라캉은 우리는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생각 속에 있는 나’는 ‘실제 나’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라캉의 말이 어렵다면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을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아무리 자신을 이렇게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차가운 겨울 얇은 옷을 입고 온 애인에게 기꺼이 옷을 벗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그녀에게 이야기합니다. “자기야, 오늘 너무 추워 보이니,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내가 데려다 줄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나요. 사랑한다면 어떤 조건에서든 함께 있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고, 동시에 함께 있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당연히 그녀의 추위를 막아주려고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거나 아니면 함께 추위를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그녀를 일찍 집에 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녀와 함께 있으려는 절실한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이제 라캉의 말이 납득이 되시나요. ‘존재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살아가는 나’와 ‘생각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참선과 같은 치열한 내성을 거쳤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불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 불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네 번째 관문에서 남전(南泉, 748~834) 화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하시나요. “마음은 부처가 아니고(心不是佛), 앎은 도가 아니다(智不是道).” 아마도 그의 제자들은 ‘직지인심’이나 ‘견성성불’을 슬로건으로 치열하게 수행했나 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선종에 속하는 수행자들로서 그들이 어떻게 교종 스님들처럼 경전을 읽으며 그 의미를 지적으로 탐구하는 수행법을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참선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오만에 빠졌나봅니다. 드디어 그들은 자신이 자신의 본래 마음을 터득했다고, 혹은 자신이 마침내 자기의 불성을 잡았다고 확신했으니까요. 바로 이 순간 남전 화상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가르침을 내리게 된 겁니다. “너희가 붙잡았다고 자신하는 마음이 정말 부처의 마음인가? 너희가 지금 알았다고 자신하는 것이 정말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인가?” 간신히 낭떠러지를 기어올라 왔는데, 다시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형국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진짜로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허위를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가짜 부처에 머무는 것보다는 차라리 수행자로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희망적인 일이니까요.

 

3.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돼야 부처

 

치열한 참선 끝에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기에 이른 어느 수행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승방에서 그는 자신이 이제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에 희미한 미소를 띨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홀로 있을 때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타인들과 만났을 때 벌어지니까요. 갑자기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을 만났을 수도 있고, 참선을 하고 있는 데 어린아이가 뒤통수를 때릴 수도 있고, 수행자를 유혹하는 매력적인 여인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설법을 해달라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올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세상에 숨어사는 거사(居士)들로부터 듣도 보지도 못한 난해한 화두가 하나 날아올 수도 있지요.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인으로 우뚝 서 있을 수 있을 때에만, 그 수행자는 자신이 실제로 부처라고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요.

 

임제(臨濟, ?~867)의 말처럼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되어야(隨處作主)” 부처입니다. 홀로 있을 때는 주인으로 살 수 있지만 타인과 만났을 때 바로 그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고, 10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이고, 1만 명과 함께 있을 때도 주인일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이란 선종의 가르침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본래 마음, 혹은 자신의 불성을 제대로 보았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홀로 있을 때에는 진정한 삶의 주인, 즉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10,000명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에게 휘둘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부처라고 믿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부처가 되었다는 오만에 빠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신이 부처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법입니다. 남전 스님이 서른네 번째 관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말했던 겁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다(心不是佛)”라고 말입니다. 남전 스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무리 스스로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에 성공했다고 떠들어도 타인과 만났을 때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그가 터득했다고 하는 마음이나 불성은 모두 가짜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이 부처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반면 홀로 있을 때나 여럿이 있을 때나 부처로서 당당히 살아가는 데 성공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잡은 것이고 불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 제 35칙 천녀이혼

 

:오조 법연이 어느 승려에게 물었다.

"천녀는 혼이 나갔다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진짜냐? 가짜냐?

모든 스토리는 망상이다.

처음 이야기가 허구이면 그 뒤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이다.

사실은 모든 사람이 봤을때 똑같아야 한다.

자기의 망상과 이야기 속에 사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왜냐 사실과 싸우기 때문에 사실은 이길수 없다.

 

-초창기(인간들은 신을 믿음)

원시시대:토테미즘,애니미즘,샤머니즘

다신교:힘센신

일신교:하나님,알라 등

 

-현대(신 → 인간 중심)

유교,도교 등: 도가 중요함

포스트 모더니즘: 이성보다 감정이 중요

현재: 자기가 느끼는 생각,느낌,감정이 중요

 

이처럼 나의 삶의 의미는 나에게 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가?

자기안에서 그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위의 단계중 나는 어느 단계에 있는가?

자기문제는 자기가 해결한다.

이야기의 허구성에 놀아나지마라.

깨어있는 의식으로 반응하라.

그러면 현순간은 온전함이다.

 

오조법연이 어느 승려에게 물었다.

"천녀는 혼이 나갔다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무문의 말]

 만약 여기에서 진짜를 깨달을 수 있다면, 곧 몸에서 나가고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 것과 같음을 알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절대로 함부로 쫓아다니지 마라.

 문득 육체가 한번 흩어지면, 마치 끓는 물에 떨어진 게처럼 팔다리를 바둥거릴 것이니,

그때에는 말해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라.

 

[무문의 송]

구름과 달은 하나인데

계곡과 산은 각기 다르다네.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하나인가, 둘인가?

 

[군소리]

진짜와 가짜를 따지지 말고

품속에 있을 때에 사랑해라.

하나인지 둘인지 따지다가는

좋은 세월 헛되이 지나간다.

 

 

*천녀이야기

 

중국 형양 땅에 장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예쁜 딸 천녀(倩女)가 살고 있었는데, 장감은 농담으로 가끔 외조카인 왕주에게 천녀를 데려가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지방의 고관이 그녀의 미모에 반했다. 장감은 전날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천녀를 그 고관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왕주를 연모하던 천녀는 깊은 상심에 빠지게 되었다. 왕주 또한 그 운명을 한탄하면서 모든 것을 잊으려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왕주가 배를 타고 막 떠나려고 하는데 저 편 언덕에서 "오라버니!"하고 부르는 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멀고 먼 촉나라로 도망가서 행복하게 살았다. 아이도 둘이나 낳고 5년 동안 행복하게 꿈같은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천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오면서 생긴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늦게나마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결혼을 허락받으려고 다시 고향을 찾았다. 집 근처의 나루터에 도착한 왕주는 쳔녀를 배에 남겨 두고 혼자 장감의 집을 방문했다. 왕주는 장감에게 지금까지 촉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 장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감은 말했다.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린가? 내 딸은 지금 저 규방에서 오랫동안 병으로 앓아 누웠는데." 이 말을 듣고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왕주였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 천녀는 저와 함께 살다가 지금 나루터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감의 가족들은 규방에서 앓고 있는 천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또 한편 장감은 천녀가 타고 있다는 배에 사람을 보냈다. 배에서 내려 수레를 타고 온 천녀가 집 안에 들어서고, 규방의 병석에서 털고 일어난 또 다른 천녀가 마당에서 서로 마주치는 순간, 둘은 거짓말같이 하나로 합쳤다.

 

 

 둘은 역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진짜와 가짜로 나뉘면 영원히 진짜와 가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나눠지고 비교되고 분별되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 이렇게 구분을 하지만 주체가 없는 객체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주'라는 것도 생각입니다. 그럼 생각이 아닌 것은 뭐냐? 우리가 지금 컴퓨터, 커피, 볼펜, 휴대폰, 책, 포스트지, 계속 이야기합니다. 요즘은 아이가 늦게 들어오니까 잠이 부족입니다, 비둘기 소리가 들립니다. 계속 이야기합니다. 날씨가 쌀쌀합니다. 계속 이야기합니다. 배가 부릅니다, 눈이 조금 따갑습니다. 이렇게 계속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나 컴퓨터라는 모양, 커피라는 생각을 빼면, 지금 뭐가 계속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까? 뭐가 있으니까 계속 이야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와 말들은, 사물은 지나가지만 시작과 끝이 있지만, 지금 있는 이것은 지나갈 수도 없고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이것입니다, 이것, 그런 모양과 의미, 생각을 다 빼버리면 뭔가 동일한 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생각은 그런 것이 없다면 또 다른 것을 내놓겠지만, 지금 그런 것들의 모양을 빼면 지금 뭐가 있습니까? 똑, 똑, 똑, 이것입니다. 당신도 없고 나도 없는 딱 이 자리, 이것, 이것뿐입니다. 이것을 알면 더 이상 여러 말들은, 여러 의식들은, 여러 행동들은 모두 여기서 나옵니다. 어떤 진실한 자리에서 모양들이 만들어져 나와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이 진리, 이 법에는 그런 생각들이 전혀 없습니다. 모양을 만들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있는 이대로가, 사물 하나하나가 단지 법일 뿐인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를 한다면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라는 게 분명 생사 고통과 함께 하는데 어떻게 법이고 그게 진리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법, 이것을 한번 체험해야 합니다. 도저히 생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아픈 천녀와 잘 살고 있었던 천녀가  딱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아프게 살 동안은 모릅니다, 또 잘 살고 있을 동안에도 모릅니다. 아파도 이 하나고 잘 살아도 이 하나뿐입니다. 세속의 잣대로 보자면 좋고 나쁜 게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나'라는 것이 생기고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 때뿐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파도와 같습니다. 분리된 파도와 같습니다. 어지러운 파도와 같습니다. 자신이 '나'라는 것이 없다면 파도는 그냥 바닷물일 뿐입니다. 결코 바다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하나뿐, 그러면 어느 게 진짜 천녀입니까? 다만 이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라도 이게 아닌 게 없습니다. 아무리 기가 막힌 이야기라도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아무리 멋진 말이라도 정말 무릎을 치는 한 마디라도 전혀 다른 게 없습니다. 오로지 이 하나뿐, 이게, 그래서 이게 분명해야 된다고 하는데, 진짜 분명한 것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뿐입니다. 이것!

1.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삶 피폐케 해

 

보험회사가 지금처럼 유행했던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정부마저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언제든지 암에 걸릴 수 있으니 미리 치료비를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니냐고, 혹은 자식들이 봉양하기 어려운 경제 현실에 맞추어 외로운 노년을 품위 있게 보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심지어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식들의 경제적 부담을 미리 덜어주기 위하여 장례비용을 미리 마련해주는 것이 자식들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 아니냐고, 온갖 이유를 들어 보험회사는 우리의 미래에 장밋빛이 아니라 잿빛 색깔을 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쓴다고 해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공포감을 주입하여 사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험회사 등에 돈을 갈취 당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건강에 좋은 의식주를 확보하고, 그 돈으로 가족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닐까요. 이럴 때 나이가 들어서 우리는 더 건강할 것이고, 남은 가족들에게서 보살핌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대비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미래를 생각하니까요. 그렇지만 미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내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면, 우리는 오늘을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공포 때문에 지금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할 것이고, 지금 앞에서 고민을 토로하는 아이의 목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할 테니까요. 오늘 이렇게 내일을 생각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어떻게 삶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렇게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람에게 걱정하던 내일이 와도 막상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내일이 왔을 때 그 날은 또 새로운 오늘이 될 것이고, 그렇게 새롭게 시작된 오늘에도 그 사람은 여전히 다시 또 다른 내일을 염려하고 두려워할 테니까 말입니다.


집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삶을 주인으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집착만큼 우리 삶에 치명적인 집착이 또 있을까요. 미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 사정은 좀 낫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비록 집착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염려나 공포가 모두 자기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그렇게도 걱정했던 내일의 일에 막상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내세, 즉 사후 세계를 통해 미래의 공포를 조장하는 초월종교의 협박과 사기만큼은 극복하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죽어봐야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초월종교는 보험회사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험회사가 약속한 것처럼 보장을 해주는지는 살아있을 때 확인 가능하지만, 초월종교의 약속은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거의 완전 범죄라고 할 수 있지요.


2. 사후 협박이 보험사기보다 악질

 

보험회사는 미래에 펼쳐질 불의의 사고나 노후의 삶이 현재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마찬가지로 초월종교는 현재의 삶보다는 죽은 다음에 가야하는 사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현재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보험회사와 초월종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때 불교도 초월종교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화엄사(華嚴寺)나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는 명부전(冥府殿)이라는 전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시왕탱(十王幀)이라는 탱화(幀畵)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아직도 주눅 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후세계의 심판을 관장하는 열 명의 군주들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 유명한 염라대왕(閻羅大王)도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지요. 날씨라도 흐리거나 아니면 해가 지면 그 아우라는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물론 도교(道敎)에서 유래한 민속신앙 탓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지만, 사찰에 사후세계와 심판을 긍정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싯다르타가 말한 '무아(anātman)’, 즉 “불변하는 자아란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초월종교 브라만교가 사후세계로 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브라만교는 아트만(atman)이란 우리의 자아는 현세나 내세에나 똑같이 불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브라만교도들은 짧은 현세의 삶보다는 사후세계에 더 집착하게 되었지요. 그들에게 현세의 삶은 단지 사후세계, 나아가 다시 태어날 윤회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사후세계니 윤회니 하는 모든 초월종교의 논의들은 불변하는 자아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뒤의 자아가 현실 세계의 자아와 다르다면, 어떻게 초월적인 신이 우리 인간을 심판하거나 평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에서 이야기하는 아트만 같은 불변하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겁니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옳다면 브라만교나 기독교는 토대에서부터 균열이 생겨 무너지게 됩니다. 하물며 명부전에서 묘사한 7개의 지옥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은 사후에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혹은 정신과 육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중아함경(中阿含經, Madhyamāgama)’에 실려 있는 ‘다제경(帝經)’을 보면, 싯다르타는 장작불의 비유로 우리의 의문에 답을 줍니다.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 지어진다. 불이 장작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장작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나무 조각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그 때는 섶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쇠똥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쇠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왕겨로 인해서 타게 되면 왕겨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쓰레기로 인해서 타게 되면 쓰레기불이라고 불린다.” 연료가 없다면 불도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싯다르타가 말한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겁니다. 장작이 다 소진되면, 장작불도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육체가 소진되면, 우리의 정신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3. 연료 의존하지 않는 불이란 없다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다섯 번째 관문에서 오조(五祖) 화상은 어느 스님에게 몸과 마음, 혹은 육체와 정신과 관련된 심각한 화두를 하나 던집니다. 참고로 여기 등장하는 오조 화상은 육조 혜능의 스승인 오조 홍인(弘忍, 601~674)이 아닙니다. 홍인이 활동했던 황매산(黃梅山)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법연(法然, ?~1104)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조 홍인이 활동한 뒤 황매산은 그를 기려 오조산(五祖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고, 법연은 관례대로 오조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오조 화상은 당(唐)나라 때 진현우(陳玄祐)가 지었다고 하는 괴담소설 ‘이혼기(離魂記)’의 내용을 언급합니다. 이 소설은 왕주(王宙)와 천녀(女)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둘 사이가 맺어질 수 없자, 천녀의 혼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 나와 왕주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살게 됩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자신의 집에 앓아누워 있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왕주를 다시 만나게 된 천녀의 가족들과 왕주는 자초지종을 알고 경악하게 됩니다. 왕주가 천녀, 정확히 천녀의 혼을 데리고 그녀의 집에 들어오자, 그녀의 혼은 집에 있던 몸과 결합하게 됩니다. 해피엔딩인 셈이지요.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제로 지금 오조 화상은 난해한 질문을 제자에게 던지고 있는 겁니다. “천녀(女)가 자신의 혼과 분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다시 말해 왕주와 함께 있던 천녀의 혼, 그리고 집에 앓아누워 있던 천녀의 몸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고민이 많이 되시나요. ‘천녀의 혼이 진짜일까? 천녀의 몸이 진짜일까? 둘 다 진짜일까? 아니면 둘 다 가짜일까?’ 이런 의문에 빠졌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오조 화상의 희롱에 걸려 들어버린 겁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뭐 중요합니까?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처럼 불교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모닥불에 관한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세요. 장작불이 있습니다. 장작을 떠나서는 불이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장작을 떠난 불 자체, 즉 어느 연료에도 의존하지 않는 불 자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겁니다.


오조 화상이 살았던 시대에도 지금처럼 살기가 팍팍했나 봅니다. 사람들이 자꾸 불변하는 정신, 즉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살기가 힘들면 초월적인 세계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디서나 확인되는 현상이지요. 아마 오조 화상의 제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도 불변하는 영혼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제자만 그럴까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오조 화상은 허구적인 초월세계를 꿈꾸느라 현실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옥이나 천당이 내일이나 노후의 세계로 바뀌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현재를 주인으로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무문관 제36친/노봉달도(路逢達道)

오조(五祖) 법연(法然) 화상이 말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 혹은 부처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어떤 것에도 쫄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과는 달리 손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에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래면목에 따라 살기 힘들 겁니다. 주인이 원하는 가면을 쓰면서 살아갈 테니까 말입니다.

주인이 사람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타인이나 권력, 혹은 자본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는 결코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실하지는 않을 겁니다. 깨달음에 이른 선사(禪師)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든 당당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일체의 것들을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당당함! 이것은 불교 전통에서만 강조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은 디오게네스(Diogenēs of Sinope, BC 400?~BC 323)에게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통 속에 살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 대왕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었을 겁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디오게네스에게 대응했을까요.

자! 여러분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면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당당히 말했던 디오게네스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말해보세요!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이야기는 ‘무문관(無門關)’의 서른여섯 번째 관문을 제대로 통과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들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면 디오게네스와 같이 당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했겠는가?”

그렇지만 법연 스님은 더 친절하게 묻습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여기서 ‘도에 이른 사람’은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부처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와 관계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화두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두는 깨닫지 않은 사람에게는 딜레마나 역설로 보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전혀 모순이 없는 명료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깨달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시금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법연 스님의 화두를 처음 보았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법연 스님의 화두에 한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법연 스님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사람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이나 침묵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어쨌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깨닫지 못한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는 말과 침묵을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인가 대답을 원한다면, 그에게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인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반면 타인의 무시에서 불행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인정과 무시의 가장 큰 수단은 법연 스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바로 말과 침묵 아닐까요.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친절히 대답하는 것만큼 가장 극적인 인정 행위도 없을 것이고, 반대로 이 경우 침묵은 상대방에 대한 가장 치욕적인 무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일일이 말대꾸하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침묵하는 것이 아마 상대방을 인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인은 사실 타인의 평판일 테니까 말입니다.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제 대답을 찾으셨나요.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당당히 영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판, 그러니까 타인의 말이나 침묵으로도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말과 침묵은 타인을 나의 뜻대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어떤 수단으로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글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사람인 셈이지요. 언어로 그 사람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은 깨끗하게 끊어진 것이니까요.

“말과 침묵으로도 깨달은 사람과 관계할 수 없다면, 이제 그와 어떻게 관계해야 할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과 침묵으로도 깨달은 사람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 자신도 이미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무문 스님은 “턱을 잡고 맞바로 면상에 주먹을 날려야 한다(攔腮劈面拳)”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물론 깨달은 사람에게 자신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방법일 겁니다.

임제 스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는 임제(臨濟)의 가르침이나, 혹은 “부처는 마른 똥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운문(雲門)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니까요.

“너도 깨달은 사람이니 나도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당당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면상에 주먹을 제대로 한 방 맞은 상대방은 이런 주먹질에 겁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주먹질에 얼얼해진 얼굴을 감싸며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불(成佛)하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로서는 자신 앞에서 당당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알렉산더 대왕은 제국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눈치를 살피는 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도 자신의 집에 기숙하는 손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베풀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앞에서 전혀 쫄지 않았습니다.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말하면서 디오게네스는 자신도 당당한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디오게네스를 감옥에 가둘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디오게네스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실토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돌아보면 알렉산더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했던 지역에서만 주인 노릇을 하였지만,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었던” 임제처럼 디오게네스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오조가 말했다.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응대하지 못하고 침묵으로도 응대하지 못한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응대해야 하겠는가?"

 

[무문의 말]

만약 여기서 분명하게 응대할 수 있다면, 당연히 경사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역시 모든 곳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무문의 송]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뺨을 주먹으로 후려갈려서

즉시 통해야 곧장 깨닫는다.

 

[군소리]

길에서 도인을 만나거든

어떻게 할까 고민 말고

할 말 있으면 말하고

할 말 없으면 지나가라.

 

 도인이 도인을 알기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지나가면서? 눈빛으로? 아우라로? 아님 명성으로? 우리는 명성으로 판단을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 시인 까비르는 '물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 어디로 가는가?' 해서 저에게도 큰 감동을 준 시인입니다. 까비르가  '무'를 체험하고 '이슬방울이 대양 속으로 사라졌노라." 아름다운 시를 썼어요. 까비르는 더욱더 대양을 자각하고 이슬방울에 대해서는 잊게 되었는데, 죽을 때 말을 합니다. 아들인 까말을 불러서 "나는 초월의 시각에 있다. 이슬방울이 대양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양이 이슬방울로 사라졌다로 고쳐다오!" 이때 까말이 말합니다. " 나도 항상 그 구절이 의심스러웠다. 무 자체가 된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틀린 것이다, 이제 아버지는 죽기 직전에 그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전체와 하나가 된 것이 나는 기쁠 따름이다."

 

까말은 아버지 까비르보다 더 법이 확실한 사람이지만 그의 명성은 별로 없습니다. 까말을 추종하는 세력을 세우지도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빛을 보고 도움도 얻었지만 어떤 교리, 계명, 계율도 주지 않았지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보니 무심선원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달라져서 찾아가지 않아도 인터넷 매체로 동영상 법문도 듣고 cd도 살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선원도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역시 법만 보지 다른 것은 두지 않습니다. 명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게 저절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만들기도 쉽지만 만든 것은 부러지거나 닳아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인연은 시작과 끝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저절로라는 말은 끊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필요하면 딱 나타나거나 손에 쥐여주는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도인을 만나면 따로따로 가 아니라 하나로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 좋은 것이지요. 자신의 소리를 알아듣는 자,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가야금을 잘 치는 백아는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종자기의 죽음으로 가야금 줄을 끊었다고 합니다. 한방 때려서 알든, 지나치든, 말하든, 악수하든, 자신이 분명해야 알 수 있습니다. 항상 자신이 분명해야 법이 상대방으로 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법이 분명한지 아닌지 스스로 이게 분명하면 상대방이 도인인지 아닌지 분명히 간파할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의 문제입니다. 무엇으로 응대하겠는가? 이게 분명하면 무엇이라고 할 것도 없고 응대할 것도 없지만 다 줄 수 있고 하나도 숨김없이 다 내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를 쥐면 아홉 개를 주고, 아홉 개를 쥐면 하나를 주고, 하나도 쥐지 않으면 손에 쥐여주고, 열 개를 다 쥐면 몽땅 뺐습니다. 염라대왕은 그것만 봅니다. 이것 딱 하나만 보여주면 염라대왕도 두 손 두발 다 들고 무릎을 꿇습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 이것뿐입니다.

1.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 혹은 부처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어떤 것에도 쫄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과는 달리 손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에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래면목에 따라 살기 힘들 겁니다. 주인이 원하는 가면을 쓰면서 살아갈 테니까 말입니다. 주인이 사람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타인이나 권력, 혹은 자본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는 결코 그런 것 때문에 자신의 본래면목을 상실하지는 않을 겁니다. 깨달음에 이른 선사(禪師)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든 당당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신을 제외한 일체의 것들을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당당함! 이것은 불교 전통에서만 강조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양의 경우에서도 주인으로서의 당당함을 강조했던 오래된 전통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특히 서양 고대철학 전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철학자는 아마 디오게네스(Diogenēs of Sinope, BC 400?~BC 323)만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은 디오게네스에게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통 속에 살고 있던 디오게네스는 귀찮은 듯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 대왕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었을 겁니다. 결코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당당한 사람, 심지어 자신을 태양을 가리는 나뭇가지나 솜털구름정도로 가볍게 보는 사람을 만났으니까 말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디오게네스에게 대응했을까요.


고대 그리스의 전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ēs Laertios)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삶과 견해(Lives and Opinions of Eminent Philosophers)’는 디오게네스의 삶과 사유를 알려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의 말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무례한 디오게네스를 감옥에 넣거나 혹은 죽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디오게네스를 해치기는커녕 알렉산더 대왕은 그를 존경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디오게네스를 만나고 난 뒤 알렉산더는 측근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나는 알렉산더가 되지 않았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자! 여러분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면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당당히 말했던 디오게네스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말해보세요!


2. 깨달은 이에게 화두는 명료하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무문관(無門關)’의 서른여섯 번째 관문을 제대로 통과하기 위해서입니다. 황매산(黃梅山)이라고도 불리던 오조산(五祖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오조(五祖)라고 불렸던 법연(法然, ?~1104) 스님은 서른여섯 번째 관문에 똬리를 틀고 앉아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알렉산더 대왕이었다면 디오게네스와 같이 당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했겠는가?” 그렇지만 법연 스님은 더 친절하게 묻습니다. “길에서 도(道)에 이른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 자, 말해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대응하겠는가!” 여기서 ‘도에 이른 사람’은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부처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와 관계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화두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두는 깨닫지 않은 사람에게는 딜레마나 역설로 보이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전혀 모순이 없는 명료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깨달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시금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법연 스님의 화두를 처음 보았을 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법연 스님의 화두에 한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겁니다.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법연 스님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사람을 만나면 말이나 침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가르침일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이나 침묵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어쨌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깨닫지 못한 사람을 상대할 때, 우리는 말과 침묵을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인가 대답을 원한다면, 그에게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인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반면 타인의 무시에서 불행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인정과 무시의 가장 큰 수단은 법연 스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바로 말과 침묵 아닐까요.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았을 때 친절히 대답하는 것만큼 가장 극적인 인정 행위도 없을 것이고, 반대로 이 경우 침묵은 상대방에 대한 가장 치욕적인 무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일일이 말대꾸하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침묵하는 것이 아마 상대방을 인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인은 사실 타인의 평판일 테니까 말입니다.


3.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야

 

“왜 부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제 대답을 찾으셨나요.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당당히 영위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판, 그러니까 타인의 말이나 침묵으로도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말과 침묵은 타인을 나의 뜻대로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어떤 수단으로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글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사람인 셈이지요. 언어로 그 사람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은 깨끗하게 끊어진 것이니까요. 드디어 이제 법연 스님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90% 정도 풀린 셈입니다. “말과 침묵으로도 깨달은 사람과 관계할 수 없다면, 이제 그와 어떻게 관계해야 할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과 침묵으로도 깨달은 사람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 자신도 이미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무문관’의 서른여섯 번째 화두를 마무리하면서 무문 스님은 “턱을 잡고 맞바로 면상에 주먹을 날려야 한다(攔腮劈面拳)”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물론 깨달은 사람에게 자신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방법일 겁니다. 임제 스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는 임제(臨濟, ?~867)의 가르침이나, 혹은 “부처는 마른 똥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운문(雲門, ?~949)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 셈이니까요. “너도 깨달은 사람이니 나도 깨달은 사람이다”라는 당당함이 있어야만 가능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면상에 주먹을 제대로 한 방 맞은 상대방은 이런 주먹질에 겁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주먹질에 얼얼해진 얼굴을 감싸며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불(成佛)하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로서는 자신 앞에서 당당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사례로 돌아가 볼까요. 알렉산더 대왕은 제국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눈치를 살피는 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도 자신의 집에 기숙하는 손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 은혜를 베풀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앞에서 전혀 쫄지 않았습니다. “태양을 가리니 비켜주시오!”라고 말하면서 디오게네스는 자신도 당당한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디오게네스를 감옥에 가둘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디오게네스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실토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돌아보면 알렉산더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바로 디오게네스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문관 제37칙

 

조주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뜰 앞의 측백나무다."

 

 

[무문의 말]

 만약 조주가 대답한 곳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면, 앞에는 석가가 없고 뒤에는 미륵이 없을 것이다.

 

 

[군소리]

뜰 앞의 측백나무는

사물인가 마음인가?

사물도 마음도 아니고

뜰 앞의 측백나무일 뿐!

 

 조주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무엇이 깨달음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진리입니까?, 무엇이 마음입니까?,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무엇, 하는 이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로 있지 않습니다. 자꾸 따로 있다고 믿으니까 무엇, 무엇, 어떤 것일까 하고 자꾸 밖으로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고 내 얼굴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얼굴을 한 대 때려요? "아야!" "그게 네 얼굴이다." 이렇게요? 때리고 맞는 것만 생각하면 법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순간에 자신의 얼굴을 알면 되는 것이지요. 원래 자신의 얼굴이 있어서 보고 먹고 세수하고 그랬잖아요. 방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때릴 때 어떻게 때려야, 얼마만큼 아프게, 어떤 방향으로 어느 곳을 때렸을 때 더 많이 깨침을 얻었을까? 우습지만, 요즘 말로는 웃프다고 합니다만, 그런 것을 실험을 해서 확률을 내놓은 게 몇 년 전부터 대세인 '심리상담'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회가 인터넷 속도만큼이나 너무 빠르게 변해가니까 그 속도를 정신이 못 맞춰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한 평 정도의 방에 겨우 누워서 창문도 없이, 노트북과 책상의자 놓는 자리에 침대를 끼워서 겨우 몸만 눕도록, 샤워하려면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세면대와 샤워기만 있는 아주 좁은 공간에서, 월세 5만 원만 더 주면 창문이 조금 있는 방으로 이사를 갈 수 있지만 돈을 아끼려면 그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 환경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더 안 좋은 환경의 고시원이 등장하더군요. 그런 사람들의 행동 경향이 짜증이 많이 나고 신경질적이고 답답하다고 합니다. 이 청년들은 이제는 하나의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됩니다. 누가 이렇게 키웠을까요? 왜 서울에서만 그렇게 좁게 살아야 됩니까?

 

이것을 공부의 얘기로 돌리자면 우리의 생각들이 그렇게 자꾸 좁게, 칸을 나누고, 더 힘들게, 더 구석으로 밀어서 몸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예전에 많았습니다. '힘들게 돈을 모아서 나중에 행복하게 살려고 보니 아이들도 커 버렸고 부인은 병에 걸려 죽었고 자신은 나이가 많아서 돌아다니기도 힘들고 그런데도 지금도 역시 돈을 아끼고 돈을 어떻게 써야 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같이 여행도 다니고 즐겁게 지냈더라면, 이제 가자고 해도 아이들이 바빠서 안 온다.'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나눠서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에는 열심히 일만 해야 되고, 솔직히 미래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살 더 많은 것? 한 살 더 많은 것은 지나온 한 살 더 적은 것이 있을 때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살 더 적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한 살 더 많은 것은? 지금, 적다, 많다 하는 이것입니다. 단지 이 순간, 이뿐입니다.

​몸을 보면 주름이 생기거나 몸이 둔해지는 것으로 비교를 할 수 있지만 한 살 더 많다고 적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몸은, 육체는 우리가 빵 반죽을 만들듯이, 그냥 생긴 것입니다. 물과 소금과 밀가루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 가지 빵을 굽고 만들다 보니까 빵들이 밀가루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다른 빵보다 자신이 맛있어 보이고 더 좋게 보여서 뽑혀주길 바라는 진열된 빵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밀가루 일 때 자신이 무슨 빵으로 만들어질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빵으로 될지, 아니면 밖으로 튀어 바닥에 떨어질지, 아니면 반죽 막대기에 붙어서 씻겨나갈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빵이 되었습니다. 원인과 결과, 그런 것을 빵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빵 부처가 자신이 빵이 아니고 밀가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러고보니 모든 게 밀가루였어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이렇게 생긴 것도 밀가루고, 저렇게 생긴 것도 밀가루고, 아, 내가 그렇게 부러워했던 케이크도 밀가루고, 모두가 밀가루였구나!

 

승려가 "나는 빵입니다. 그런데 정말 밀가루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밀가루가 될 수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네가 밀가루다!" 이게 바로 "뜰 앞의 측백나무!" 이것입니다. 여기는 안 나오지만 승려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저 측백나무가 법입니까?" 조주 스님이 "나는 측백나무가 법이라고 하지 않았다." 승려가 또 묻죠. "그럼 무엇입니까?" "뜰 앞의 측백나무." 단지 이뿐입니다, 이것, 이것!

1. 알라야 의식은 과거의 기록

 

히말라야(Himalaya)를 아시나요. 에베레스트를 정점으로 해서 8,000 미터가 넘는 수많은 고봉들을 품고 있는 장대한 산맥입니다. 만년설을 가득 품고 있는 장관을 보다보면, 정말 철학자 칸트가 말한 숭고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경험하게 됩니다. 거대한 폭포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변에서 느끼는 압도감이 바로 숭고(das Erhabene)의 느낌이지요. 히말라야라는 단어는 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안겨줄 겁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생각해보면, 히말라야는 힘(him)이라는 어근과 알라야(ālaya)라는 어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힘이 눈[雪]을 의미한다면, 알라야는 저장[藏]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중국 승려들은 히말라야산맥을 한자로 설장산(雪藏山)이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눈을 가득 저장하고 있는 산, 즉 만년설을 가득 품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지요.


중관불교(中觀佛敎)와 함께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던 불교 전통을 아시나요. 바로 유식불교(唯識佛敎)입니다. 이 유식불교에서 ‘알라야’라는 개념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유식불교는 인간의 가장 심층에 있는 의식을 바로 ‘알라야 의식(ālaya-vijñāna)’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의 가장 심층부에는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이 일종의 무의식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겁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볼까요. 고기를 구워 먹는 음식집에 들려 식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냄새가 옷에 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면 짙은 향수를 뿌린 여성과 밀폐된 공간에서 환담을 나누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옷에 배어 낭패를 보는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그 삶의 흔적은 몸에 밴 냄새처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것이 알라야 의식입니다.


유식불교에서 알라야 의식을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심층 의식이 ‘나라는 집착’, 그러니까 아집(我執, ātma-graha)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렇지 않나요. 보통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불행한 사고로 손을 잃은 사람이나, 혹은 정치적 사건으로 권력을 잃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손이 있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혹은 권좌에 있었을 때 존경받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알라야 의식이 작동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은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세상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당연히 그는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에 ‘있는 그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겁니다. 유식불교가 알라야 의식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우리는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 주어진 삶을 주인으로서 당당히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2. 과거 기억과 단절해야 해탈

 

유식불교에서는 말합니다. 과거와 단절해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직 그 순간 해탈이란 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무문관’의 37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대충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37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스님은 바로 조주(趙州, 778~897)입니다. 제자 한 명이 스승 조주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여기서 달마(達磨)는 중국에 선종(禪宗)의 기풍을 가져와서 첫 번째 조사로 추앙되는 남인도 출신의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528 혹은 536)를 가리킵니다. 조주 스님의 제자는 얼마나 야심만만합니까.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면, 이미 스스로 조사가 된 것이니까요. 한 번에 깨달음에 얻겠다는 조바심도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조주 스님은 너무나 쿨하게 말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무문관’의 능숙한 가이드인 무문 스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화두를 마무리합니다. 그렇지만 ‘조주록(趙州錄)’을 보면 조주 스님과 그의 제자 사이에는 대화가 더 이어집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어쩌면 무문이 생략한 부분이 더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제자는 말합니다. “화상께서는 경(境)으로 보여주지 마십시오.” 그러자 조주 스님은 말합니다. “나는 경(境)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스승으로부터 다짐을 받자 제자는 이제 제대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다시 물어봅니다.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주 스님은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어떻습니까. 느낌이 조금 다르지요. 무문이 생략한 대화에서 핵심은 아마 ‘경(境)’이라는 개념에 있을 겁니다. 경은 인식 대상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비사야(viṣaya)의 번역어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지점은 바로 이 ‘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제자가 잣나무를 자신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뜰 앞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로 이해하고 있지만, 스승에게는 잣나무는 자신의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조주 스님에게 있어 잣나무는 후설의 용어를 빌리자면 노에마(noema)였던 것입니다. 사실 잣나무가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은 마음의 활발발(活潑潑)한 작용, 그러니까 노에시스(noesis)가 작동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하면서 조주 스님은 살아있는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노에마를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노에시스를 암시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3. ‘지금 바로 여기’가 깨달음

 

더 숙고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뜰 앞에 펼쳐져 있는 잣나무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제 읽던 경전의 내용이나 아침에 제자와 나누었던 대화에 마음이 가 있었다면, 조주 스님의 눈에 잣나무들이 들어왔을 리 없을 겁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 조주 스님의 마음은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은 마음, 즉 자유로운 마음 아닌가요. 불행히도 제자의 눈에는 여전히 잣나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만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의 스승이 선불교 특유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대화법을 사용한다고 짜증까지 내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200여 년 전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은 자꾸 “뜰 앞의 잣나무!”만을 외치고 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무문관’의 37번째 관문이 생각보다 난해하지는 않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조주 스님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면, 제자의 마음은 200여 년 전 달마 대사에게로 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여여(如如)하게 사태를 보세요. 달마 대사는 단지 제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아닌가요. 물론 제자가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려고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안다면, 자신도 달마처럼 혹은 스승 조주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자는 지금 자신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알라야의식을 끊어내기는커녕 그것을 강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스님이 되기 전, 아니면 스님이 된 후에, 책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달마 이야기가 어느 사이엔가 그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기억, 즉 알라야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알라야의식은 끊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과거나 기억에 매몰되어 있는 마음을 극복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있는 마음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혹은 달마 대사의 가르침이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운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제2의 싯다르타나 제2의 달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무문관) 제38칙 소가 창문을 통과하다

 

오조가 말했다.

"비유하면 마치 물소가 격자창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데,

뿔과 네 발굽은 모두 지나갔는데, 어째서 꼬리는 지나가지 못했는가?

 

 

[무문의 말]

 만약 이 말 속의 망상을 바른 안목으로 바라보고 한마디 알맞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위로는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삼계에 보탬이 될 것이다.

만약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꼬리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무문의 송]

창문을 통과하면 구덩이에 떨어지고

되돌아가면 도리어 부서질 것이다.

이 조그만 꼬리란 놈이

실로 매우 기괴하구나!

 

[군소리]

지나간 것을 의심치 말고

못 지나간 걸 고민치 마라.

소가 지나가듯 못 지나가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머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다란 뿔까지 나갔는데 꼬리가 못 나가다니, 이것은 법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법을 얘기할 때에는 물소도 있고 격자창도 있고 통과하는 것을 그림을 그리듯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꼬리가 다 빠져나가느냐 안 나가느냐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입장에 있다면, 깔끔하게 빠져나가든, 아니면 끼여 있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얘기하면,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이지요. 쏙 빠져서 공에 머무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생각에 걸려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공부인이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항상 자유롭고 법뿐이지만 결국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법과 이 현상계는 따로 있질 않습니다. 법만 추구해서 꼭 이 현실의 번뇌를 빠져나가야 법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또 현실에 매여서 둘도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실은 법이라고 할 게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 이것, 법, 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법이라고 따로 지칭할 것은 없습니다. 법이라고 하면 하나가 되고 이법이라고 하면 둘이 되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단정을 짓지 않으면 그렇게 관념을 취하지 않으면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 이게 오로지 색이라 하고 공이라고 하다가 색이 바로 공이라 하고 공이 바로 색이라고, 말합니다. 이리저리 휘몰아치지만 사실 오직 이 하나를 보여주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법이라고 하면 '색'할 때 벌써 공이 뒷받침해주고 '공'할 때 색이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색과 공을 나누지만 이것은 색으로 공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색이라고 하고 공이라고 하고, 이렇게 물소가 왜 꼬리만 못 빠져나갔지? 그렇게 이해하고 나누고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는 그 습관, 순간적으로 생각으로 돌아가버리는 그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이게 더 중요합니다. 물소가 왜 꼬리가 못 빠져나갔지? 이게 지금 누가 말하고 있습니까? 생각을 못하게 끔, 생각이 갈 곳이 없도록, 물소가 긴 뿔과 큰 몸통도 다 빠져나왔는데 왜 꼬리가 못 빠져나오는 걸까? 다 생각을 하고 말하고 있는데, 그만 생각에 빠져 버렸습니다. 지금 이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다가 잎이 말라서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습니다. 은행나무에게는 스토리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은행나무가 생각합니까?, 아니죠? 지금 뭐가 있습니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다가 잎이 말라서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습니다. 이것이잖아요. 왜 물소가 긴 뿔과 큰 몸통도 다 빠져나왔는데 꼬리가 나가지 못하지? 이것입니다. 늘 우리는 이 자리에,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 말을 따라가지 않으면 늘 이렇게 있습니다. 따라가도 이 자리, 이뿐이지, 늘 이것, 똑, 똑, 똑, 이것뿐입니다. 뭐든지 여기서 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다합니다.

 

전혀 손을 댈 일은 없습니다. 손을 댄다면 손을 대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게 불성이고, 본성이기 때문에 어떠한 생각이 붙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인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꼬리가 걸리게 됩니다. 어딘가 불편하고 불완전합니다. 항상 뭔가 갈구하는 게 있게 되고 그러면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법은 자유롭습니다. 전혀 그런 욕망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욕망이 생기고 인과가 되더라도 자신이 물소가 아니라면 어떤 문제도 발생되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이 분명해야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이라고 할게 있는지, 스스로가 분명해야지 꼬리가 걸리더라도 뺄 수 있고 돌아가더라도 전혀 부서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이뿐입니다. 정말 이뿐, 이것뿐입니다. 이것!

 

 (무문관) 제39칙 운문의 말에 말려듦

운문문언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밝은 빛이 고요히 온 세상을 비추니......"

한 구절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운문이 갑자기 말했다.

"그것은 장졸수재의 말이 아닌가?"

승려가 말했다.

"맞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말 속에 말려들었구나!"

 

후에 황룡사심이 이 이야기를 들어 말했다.

"말해 보라, 어디가 이 승려가 말 속에 말려든 곳인가?"

 

 

장졸수재(張拙秀才): 처음에는 선월 선사의 지도 하에 있다가 석상경제 선사를 찾아뵈었다. 그때 석상 선사가 묻기를 "그대의 성은 무엇인가?"라고 하자, "성은 장(張)이고 이르은 졸(拙)입니다." 이에 석상 선사가 "교묘함(巧)을 찾아도 얻을 수 없는데 졸렬함(拙)이 어떻게 왔는가?"라고 말하자 깨달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밝은 빛이 고요히 온 세상을 비추니/ 범부, 성인, 일체중생이 모두 나일세./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 전체가 드러나니/육근이 조금만 움직여도 구름에 가려지네/번뇌를 끊으려 하면 거듭 병이 더해지고/ 진여에 나아감도 또한 삿된 것일세/ 세상의 인연 따라 막힘이 없으면/ 열반과 생사도 허공의 꽃이로다."

 

 

 

[무문의 말]

 만약 여기서 운문의 활용함이 홀로 우뚝함을 볼 줄 알고, 이 승려가 어째서 말에 말려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될 만하다.

 

[무문의 송]

급류에 낚시를 드리우니

미끼를 탐내는 놈이 덥석 무네.

입을 열자마자

목숨을 잃어버린다.

 

[군소리]

말에 말려들면 눈뜨고 꿈꾸는 거고

말려들지 않으면 꿈 깨는 꿈이다.

말해도 말이 없고 말없이 말을 해야

비로소 꿈속에서 깨어 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수단'입니다. 도구라는 말도 하는데, 한번 쓰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에 대한 의미는, 생각은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 사람이 한국에 와서 이집트 말로 심한 욕을 하더라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있거나 아니면 외국 사람을 만나서 욕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모릅니다. 그럼 욕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욕에는 어떤 욕이 있을 수가 없어요. 어디에? 그 말을 듣고 의미를 알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 이야기로 하자면 아무리 운문 스님이나 승려든 누구에게 법이 맞고 틀리는 게 아니라, 지금 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요. 이런 글을 읽고, 아, 역시 운문 스님이 승려의 허물을 찾아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승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구나! 또 운문 스님이 허물을 드러냈는데 어디에 허물이 있는가?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을 따라가면 분명 승려가 말을 따라간 것 같은데, 실은 운문 스님이 말을 따라갔거든요. 그래서 법을 세우는 순간, 똥오줌을 짊어지고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 갈래를 두고 이야기하면 누구 옳고 그르고 가 있지만 사실 그 둘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지금 여기 있잖아요. 누가? 이게, 이게 있으니까 이렇게 나누고 분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운문과 승려를 다 치워버리면 누가 있느냐? 아무도,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니죠, 있잖아요. 이게 늘 또렷하게, 분명하게, 이렇게 있잖아요. 자신이 분명하면 무슨 말을 해도 법은 운문이나 승려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있습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면 똥오줌을 같이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분 못 합니다. 말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말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과 생각을 무시하고 없는 것으로 최면을 건다고 한들, 없어집니까? 아닙니다. 말과 생각은 바로 자신이 있어서 있는 것인데, 결국 그런 것들과 싸운다는 것은 스스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습니다. 자기 눈에만 보이는 귀신과 싸우는 것처럼 결국 혼자 스스로 하다가 지칩니다. 그런 게 아니고 말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것, 말을 하기 전에, 말을 하는 지금, 또는 말을 한 후에도 여전히 있는 이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 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귤을 보지만 사실 귤보다 먼저 이게 있으니까 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귤을  보고 있는데 귤을 치우면 이게 없어지는 것입니까? 아니죠? 귤을 치우든 귤이 있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지금 뭔가 있잖아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관법, 관하는 이것인가? 하고 또 생각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아는 게 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안다'는 것은 얼마나 모르는 것인지, 예를 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며느리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그런 시어머니도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참 못된 며느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자신의 배경지식에 맞춰서 얘기를 듣고 그게 실재적인 모습으로 인지합니다. 이해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아주 육감적인 것들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이지, 그런 것들은 관습적이고 사회적인 약속된 법이고, 쉽게 말하면 40년 지기 친구도 정말 모릅니다.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친구일 뿐이지, 그 친구의 진짜 모습은 모르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는 말과 생각을 따라서 안다고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귤은 귤이다"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귤이 바로 법이다."라고 말하면 관심을 가집니다. 그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여기에는 안다 모른다 하는 게 없지만 낚시라도 드리워야 한 마리라도 걸려 오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잡는 낚시, 그게 운문의 낚시고, 찌가 흔들려서 얼른 당겼는데 벌써 고기는 사라졌습니다. 한가한 강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분명 찌가 흔들리니 오늘도 운문 스님의 낚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눈먼 고기처럼 정말 배가 고파서 그냥 덥석! 물어야 됩니다. 그래야 장졸수재의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깨달음 모범답안 장졸의 오도송

 

깨달음을 얻으려면 사찰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스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처가 되어서 주인공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으니까요. 승적에 이름을 올려야 부처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것보다 더 큰 집착과 편견도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불교는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기독교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도나 관습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인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노예의 삶일 뿐이기에, 불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스님이 되어서 삶을 단순화할 수만 있다면, 깨달음에 이를 가능성이 더 많이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하다면, 진득하게 앉아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스님이 된다는 것은 요리 자격증을 취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지 않나요.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도 요리를 잘 못할 수도 있고, 자격증이 없어도 요리를 훌륭하게 잘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일까요. 선불교의 역사를 보면 굳이 머리를 깍지 않아도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가끔 등장합니다. 중국 당나라 시절에 활동했던 이통현(李通玄, 635~730)이란 사람을 아시나요. 스님은 아니지만 스님들로부터 깨달은 사람으로 깊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의 책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은 우리나라의 의천(義天, 1055~1101)이나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칠 정도였습니다. ‘무문관’의 서른아홉 번째 관문에서 우리는 이통현 이외에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장졸(張拙)이란 사람입니다.


생몰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장졸은 중국의 석상(石霜, 807~888) 스님을 만나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략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살았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과거에 급제해서인지 그에게 수재(秀才)라는 호칭이 붙어 있습니다. 당나라 시절에 수재라는 호칭은 아직 벼슬을 부여받지 못해서 시험합격자의 신분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여했다고 합니다. 기다리던 벼슬이 내려지지 않아서였을까요. 장졸은 석상 스님을 만나게 되고, 이 만남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당연히 깨달음의 노래, 즉 오도송(悟道頌)이 빠질 수가 없지요. 과거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글재주에 능했던 장졸의 오도송은 그 후 스님들에게 하나의 모범 답안처럼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2. 깨달음 대신 남의 말에 떨어지다

 

서른아홉 번째 관문을 들여다보면 어느 스님이 장졸의 오도송을 암송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스님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장졸의 오도송을 읽어주며 스승이었던 운문(雲門, 864~949) 스님에게 자신의 경지를 은근히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장졸의 오도송 정도는 가볍게 간파하고 있는 지적 수준을 자랑하려는 의도에서일 겁니다. 첫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운문 스님은 제자에게 지금 읊고 있는 오도송은 장졸이 지은 것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제자는 오도송을 암송하기는 멈추고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바로 이 순간 운문 스님은 “말에 떨어졌다”고 사자후를 토합니다. 이 사제지간의 대화에서 황룡 사심(黃龍死心, 1043~1114) 스님은 화두 하나를 끌어냅니다. “어디가 그 스님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우선 ‘오등회원(五燈會元)’에 기록되어 있는 장졸의 오도송을 한 번 음미해보도록 할까요.

 

광명이 고요히 모든 세계에 두루 비추니(光明寂照河沙)
범부든 성인이든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두 나의 가족이네(凡聖含靈共我家)
어떤 잡념도 일어나지 않아야 온전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만(一念不生全體現)
감각의 작용들이 일어나자마자 온전한 모습은 구름에 가려버리네(六根動被雲遮)
번뇌를 끊으려는 것은 번뇌의 병만을 증가시키고(斷除煩惱重增病)
진여에 나아가려는 것도 또한 바르지 못한 일이네(趣向眞如亦是邪)
세상의 인연에 따라 어떤 장애도 없다면(隨順世緣無碍)
열반과 생사도 모두 헛된 꽃과 같을 뿐이네(涅槃生死是空華)

 

밝은 달빛을 깨달음의 마음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에게는 과거 시험에 급제할 만한 글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멋진 오도송입니다. 그렇습니다. 번뇌를 끊으려고 하는 것도, 그리고 진여에 나아가려는 것도 집착일 뿐입니다. 당연히 열반과 생사도, 그리고 열반을 꿈꾸는 마음과 생사에 휘둘리는 마음도 모두 잡념일 수밖에 없지요. 물론 집착과 잡념을 제거하는 방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에 마음이 활발발(活潑潑)하게 열려있다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티끌처럼 작은 잡념이 아니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너른 마음이 될 테니까요. 달빛에 매료된 마음에 어떻게 생사와 열반이란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있겠습니까. 놀라운 일 아닌가요. 스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장졸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고 임제 스님이 말했던 해탈의 경지를 멋지게 체인한 것입니다.


3. 앵무새처럼 오도송 읊조리다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려는 스님들이 장졸의 명쾌한 오도송을 지나칠 수 있었겠습니까. 대부분 깨달은 스님들의 난해한 오도송보다 장졸의 그것은 더 이해하기 쉬우니까 말입니다. 당연히 운문 스님의 제자도 장졸의 오도송을 읽고 또 읽어 이제는 줄줄 암송할 정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짧은 문답으로 운문 스님은 제자가 “말에 떨어졌다”고 진단합니다. ‘화타(話墮)!’ 어려운 말은 아니지요. 제자가 암송하는 장졸의 오도송은 단지 말뿐이라는 지적이니까요. 한 마디로 말해 제자는 장졸과 같은 깨달음도 없으면서 앵무새처럼 오도송을 읊조리고 있다는 겁니다. 현대 영국의 철학자 라일(Gilbert Ryle, 1900~1976)도 자신의 논문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Knowing how and knowing that)’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당 상황에 대한 지적인 명제들을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요리하거나 운전할 줄 모를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줄 아는 실천적 앎과 단지 이론적으로만 아는 이론적 앎을 명확히 구분한 이야기입니다.


라일의 지적은 매우 예리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의 작동 메커니즘과 운전하는 방법을 아무리 잘 명쾌하고 쉽게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가 진짜로 자동차를 잘 수리하고 잘 운전할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니까요. 당연한 일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습니다. 이제 사심 스님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를 음미해볼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운문 스님은 어느 대목에서 제자가 단지 이론적 앎만 가지고 있는지 간파했던 것일까요? 바로 운문이 “이것은 장졸수재(張拙秀才)의 말 아닌가!”라고 말하자 제자가 “그렇다”고 대답한 대목입니다. 어디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기 위해 비유 하나를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상대방이 “그건 너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썼던 말 아니니?”라고 반문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그래. 어떻게 알았니?” 이것은 어쨌든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사랑 고백이 단지 말뿐이라는 것을 토로한 셈이니까 말입니다.


“사랑해”라는 표현은 과거 모든 연인들이 써왔다고 해서 피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정말로 절절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사랑해”라는 표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과거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했고 또 이야기할 “사랑해”라는 말은 사람들의 수만큼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요. 바로 이것입니다. 어쨌든 운문 스님의 제자는 “그렇다”고 대답해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만약에 그가 진실로 깨달았다면 말입니다. 그렇기에 운문은 제자가 “말에 떨어졌다”고, 다시 말해 깨달음에 대한 지적인 이해만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던 겁니다. 만일 제자가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깨달았다면, 그는 자신의 오도송을 읊어도 되고 장졸의 오도송을 읊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무문관’의 편집자 무문 스님을 포함한 수많은 스님들이 과거 선사들의 오도송을 은근히 갖다 쓰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무문관) 제40칙 물병을 넘어뜨리다

위산은 처음에 백장의 회상에서 전좌를 맡고 있었다.  백장이 장차 대위산의 주지를 선발하려고 수좌와 함께 위산을 불러 놓고서 대중에게 말했다.

 "격식을 벗어난 사람이 갈 수 있다."

 

백장이 드디어 물병을 집어 땅 위에 놓고는 물었다.

"물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자네는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수좌가 이에 말했다.

"나무 막대기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백장이 이번에는 위산에게 물었다. 그러자 위산은 물병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는 나가 버렸다. 백장이 웃으며 말했다.

"제일좌가 산자(山子)에게 졌구나."

그리하여 위산에게 명하여 개산(開山)하게 하였다.

 

 

제일좌: 수좌

산자(山子): 위산영우의 호(號)로 보인다.

개산(開山): 절을 창건함, 또는 창건한 승려. 예전에는 산골을 개척하여 집을 지었으므로 개산이라 하였으나, 후세에는 한 종파의 창설자도 개조(開祖) 또는 개산이라 함.

 

[무문의 말]

 위산이 한때 용기를 내었지만, 백장이 만든 함정에서 빠져나가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리오? 자세히 살펴보면, 무거운 일은 하면서도 가벼운 일은 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인가?

머리의 두건을 벗고서 쇠칼을 짊어졌네.

 

 

[무문의 송]

 조리와 나무국자를 내버려두고

즉시 한 번 돌파하여 시끄러운 말을 끊었네.

백장의 겹겹 관문도 가로막지 못하니

발끝에서 뛰쳐나오는 부처가 삼대 같구나.

 

 

삼대: 마(麻), 즉 삼대는 빽빽하게 솟아나기 때문에 빽빽하고 많다는 뜻.

 

[군소리]

물병을 바로 찰 것이 아니라

물병으로 수좌의 입을 때리고,

백장 앞에 뒤집어엎어 놓았어야

수좌와 백장을 모두 응징했을 텐데.

 

 

 법은 즉심,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났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자신의 두 발이 땅을 짚고 있는 것처럼 항상 지금 여기, 바로 있는데 생각은 천리만리 가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영화에 빠지고, 외국에 나가면 관광에 빠지고, 사랑을 하면 사랑에 빠지고,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다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발은 빠지지 않잖아요. 발만 그렇습니까? 손도, 눈도, 코도, 가슴도, 다리도, 팔도, 전혀 빠지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을 뿐이에요. 손이 자기가 미국 가고 싶다고 손만 갈 수 있나요? 눈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할 수 있나요? 그것은 팔도 다리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가 따라갑니까? 생각이죠. 이 생각이라는 것은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서 외국을 여행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영화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줄거리를 따라갑니다. 사랑을 하면 오직 그 대상에만 집중을 합니다. 보는 것, 들었는 것이 합쳐서 딱 맞게 비슷한 단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렇게 한 것의 결과가 더 실제적으로 보이고 더 객관적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객관이라는 것은 말이 객관이지, 객관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관 없는 객관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코끼리를 생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코끼리를 캄캄한 곳에 두고는, '이 동물은 코끼리입니다. 여러분은 들어가서 만지고 생각해서 코끼리는 어떤 동물인지 알아보십시오."  보이지 않으니까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단단한 기둥 같다고 하고 코를 만진 사람은 물렁하고 긴 통 같다고 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평평하고 넓다고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가늘고 긴 회초리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어느 일부분만 보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은 그 장면을 찰칵찰칵 찍어서 스토리를 엮는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그 스토리를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자신이 만져보고 느끼고 보고 다한 것이든요. 그렇게 서로 자기 것이 맞는다고 다투는 게 생각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항상 이분법, 나눠집니다. 나눠질 수밖에 없어요. 나눠지지 않으면 분별이 안 되니까요. 생각은 실재 있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분별된 것들의 비교에 더 집중됩니다. 여기 백장 스님이 물병을 내놓았어요. 아까 코끼리를 처음 만진 사람처럼 물병으로 보이는 것인데, 물병이라고 하지 말라고 전제조건을 걸었습니다. 여기에 수좌는 걸리고, 위산은 걷어차 버렸습니다. 법은 조건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법을 보기 위해 조건을 건 것이지, 사실 한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을 시험한 것입니다. 절의 주지라는 직책은 식은 밥을 먹으면서 공부하는 승려들에게 떠신 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늘 뜨근뜨근한 밥을 먹어야, 식은 밥만 먹는 승려들에게 뜨신 밥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춥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떠신 밥과 국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것 한 그릇 먹으면 온 피가 새로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 법 공부가 그렇습니다. 죽은 피를 돌게 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도 있지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짊어지고 간다고, 이 법을 모르면 죽은 것입니다.

 

실감이 안됩니다. 뭐를 실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감정, 느낌, 생각, 그런 것들은 수시로 바뀌는데 정말 무엇을 실감할 수 있습니까? 실감?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 행복? 불행? 건강? 돈? 권력? 어떤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행복이라고 했던 것도 한순간이고, 불행도 영원하지 않고, 건강도 한순간이고, 돈은 말할 필요도 없어요. 돈을 평생 가질 수 있습니까? 권력, 권력도 변하는 것이고 올라가면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변하지 않는 것은 뭡니까? 변하지 않고 지겹지 않고 항상 있는 것, 늘 있는 것, 이것입니다. 이게 있으니까 희로애락을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그렇게 물들지 않습니다. 희에는 희가 없고 노에는 노가 없고 애에는 애가 없고 락에는 락이 없어요. 어디에 있습니까? 희로애락, 이것입니다. 지금 희로애락, 이것이지, 더 이상은 전혀 없어요.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조금의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희로애락, 이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확실하게 실감돼야 합니다. 오직 이것뿐이다, 이것이 뭘까? 백장 스님이 지금 당신의 코앞에 물병을 놓습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1. 불교, 권위주의 극복한 인문정신

선사들은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스스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은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깨달음에 이른 선사들은 항상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고 네 자신을 따르라고 사자후를 토하기 때문이지요. 보통 다른 종교나 사상의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과 교시를 내립니다. “내가 각고의 노력으로 이런 경지에 올랐으니, 너희들도 나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면 내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와라!” 사제 관계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스승이 갔던 길이나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길은 나의 길이다. 그러니 너도 너의 길을 만들어라!” 이것이 바로 불교 스타일입니다. 하긴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 ‘화엄(華嚴) 세계’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요.


모든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 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 세계입니다. 선종의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학파들, 그리고 동일한 학파에 속해도 선사들마다 강한 개성이 풍기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자신이 싯다르타도 아니고 혜능도 아니고 마조도 아니니, 주인공으로서의 삶은 당연히 다양한 색깔의 개성을 뿜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불교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선종의 역사는 자기가 속한 학파를 극복하는 역사, 혹은 스승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독화(singularization)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에 이른 순간일 테니까 말입니다. 혜능 이후 남종선(南宗禪)이 다양한 스타일을 갖춘 종파들, 즉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분화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 위앙종(潙仰宗), 임제종(臨濟宗), 그리고 조동종(曹洞宗)이 바로 오가(五家)이고, 가장 번성했던 임제종의 두 파 황룡파(黃龍波)와 양기파(楊岐波)를 합쳐서 칠종(七宗)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선종이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하나의 학파가 될 때까지, 더 나누어져야만 합니다. 아예 종파니 심지어는 불교라는 카테고리가 무의미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오직 이럴 때에만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싯다르타의 마지막 유언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자임할 수 있을 겁니다. 스승에게 의지하지 말고 네 힘으로 서라! 스승의 말을 반복하지 말고 네 말을 하라! 한 마디로 스승을 통쾌하게 짓밟고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나 사상이 범접하기 힘든 불교만의 정신이자 스타일입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우리는 전체주의나 권위주의를 극복하려는 인문주의적 정신의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는 겁니다.


2. 백장 스님, 두 제자를 시험하다

 

일체의 권위주의를 부정하려는 정신, 그것은 일체의 권위에 당당하게 맞서는 주인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무문관(無門關)’의 40번째 관문에서 스승이 놓은 물병을 과감하게 차버리는 위산(潙山, 771~863) 스님의 통쾌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곡절이 있었던 걸까요. ‘전등록(傳燈錄)’과 ‘오등회원(五燈會元)’을 보면 일의 자초지종이 자세히 나옵니다. 그러니까 위산의 스승 백장(百丈, 720~814) 스님은 대위산의 주인 노릇을 할 스님을 천거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당연히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제자를 보내면 됩니다. 백장에게도 상좌(上座) 스님이 한 명 있었습니다. 제일좌(第一座)라고 불리는 상좌는 수제자를 가리킵니다. 가장 오랫동안 스승을 모시고 있었기에 경험이나 관록면에서 가장 앞서는 제자인 셈이지요. 

문제는 백장이 보기에 아직도 상좌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아직 제자들을 이끌 만한 역량이 없다고 판단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백장은 상좌를 대위산의 주인으로 임명하는 데 주저했던 겁니다. 어떻게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만드는 스승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실연을 제대로 겪은 사람만이 타인의 실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혹은 부모를 먼저 여읜 사람만이 상을 당한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백장의 눈에는 상좌보다 늦게 자신의 문하에 들어와서 부엌일을 맡고 있는 위산 스님이 들어왔습니다. 비록 사찰에서의 위상은 상좌보다 떨어지지만 위산이라면 충분히 대위산의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 이것이 바로 백장의 판단이었던 겁니다.


당연히 상좌 스님은 스승 백장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백장은 두 사람을 나머지 제자들 앞에서 시험했던 겁니다. 백장의 시험과 그 결과는 ‘무문관(無門關)’의 40번째 관문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백장은 바닥에 물병을 놓고 상좌 스님과 위산 스님에게 물어봅니다. “물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너희 둘은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순서상 상좌 스님이 먼저 대답합니다. “나무토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상좌로서 관록이 묻어나는 대답입니다. 일단 ‘물병’을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상좌의 대답은 “물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스승 백장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나무토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으니,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라는 백장의 요구에 나름대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상좌 스님은 대답하고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겁니다.


3. 물병 차버린 위산, 깨달음의 표현

 

상좌 스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아마 위산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을 “역시! 상좌 스님이다”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런 안심은 얼마 가지 않아 여지없이 좌절되고 맙니다. 동일한 질문을 위산 스님에게 하자, 위산 스님은 물병을 발로 걷어차고 자리를 떠버립니다. 스승 백장, 사형이었던 상좌 스님, 그리고 수많은 동료들은 순간 멘붕이 찾아왔을 겁니다. 엄숙한 시험의 장소를 발길질 한 번으로 조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도, 사형도, 그리고 동료도 안중에 없는 오만불손한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때 백장만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어디에서 백장은 위산 스님이 깨달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자 생각해보세요. 학생은 시험을 보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스승이 원하는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학생이니까요. 반면 우리는 졸업을 했다면 시험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상좌 스님은 충실하게 시험을 치렀고 그 결과 모범 답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위산 스님은 시험 자체를 거부합니다. 위산 스님이 물병을 걷어차고 자리를 떠버린 것은 자신은 더 이상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자신은 당신에게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하긴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에게 누군가 초등학교 중간시험 문제지를 주면 그는 당연히 그 문제지를 박박 찢어버릴 겁니다. 당연히 찢어야지요. 만일 문제지가 주어졌다고 정답을 찾으려고 고심한다면,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 아닐까요. 물론 장난으로 문제지를 풀 수도 있지만, 그것은 글자 그대로 진지한 시험이 아니라 장난일 뿐일 겁니다.


시험을 볼 필요가 없다면 이미 졸업을 한 것입니다. 이미 학생도 아닌 것입니다. 이제 백장 문하를 떠나도 된다는 겁니다. 졸업한 학생이 취업을 하든 무엇을 하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아닐까요. 반대로 모범 답안을 마련한 상좌 스님을 대위산 주인으로 보냈다고 해보세요. 상좌 스님은 위기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이 모범 답안인지 확인하러 계속 스승 백장을 찾아올 겁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한 사찰의 주지로, 여러 스님들을 주인으로 이끌 스승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무문관)제41칙 달마, 마음을 편하게 하다

 

달마가 벽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데, 이조가 눈 속에 서서 팔을 끊고 말했다.

"저의 마음이 아직 편안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가 말했다.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너를 위해 편안하게 해 주겠다."

이조가 말했다.

"마음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무문의 말]

이빨 빠진 늙은 오랑캐가 십만 리를 항해하여 일부러 왔으니, 바람 없는 곳에서 물결을 일으킨다고 할 만하다.

마지막에 제자 한 사람을 얻었으나, 도리어 육근을 갖추지 못했다.

쯧쯧!

문자도 읽지 못하는 무식한 놈이로다!

 

[무문의 송]

서쪽에서 와서 곧바로 가리켜

부촉하는 바람에 일이 벌어졌으니,

총림을 소란하게 한 것은

원래 당신이로구나!

 

[군소리]

아픈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

과연 마음이 편안해질까?

있다 없다는 분별을 벗어나야

편안한 마음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뭡니까? 마음, 지금 마, 음 하는 이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마음, 이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듣고 배운 '마음'으로 쏙 들어가 버립니다. 제가 보기에는 심리학, 철학, 우주과학, 인문학, 모두가 이 마음 하나를 밝히려고 나온 학문입니다. 자기를 뺀 보이는 대상을 기준으로 하니까 얼마나 많은 이론들을 세우고 세분화하고 실험을 하고 분류를 하고 계속 '마음'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싶어서, 정의가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그것은 학문입니다. 이것과는 전혀 다른 공부입니다. 이 마음 하는 이것은 바로 이것뿐입니다. 마, 음, 지금 당장 이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리듯이 지금 이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표현을 하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제가 그렇습니다. 가끔 비유를 들어서 얘기하지만 자꾸 쉬운 비유, 비슷한 비유를 찾다 보면 법을 설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죽어버려요. '상'을 가져다 놓고 있니 없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그런 식으로 망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조 혜가 스님은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40이  넘어서야 달마 스님을 만났습니다. 면벽을 하고 있던 달마는 처음부터 선뜻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눈이 쌓인 마당에서 혜가 스님이 팔을 끊어 믿음을 보여준 후에 받아 주었습니다. "그래, 무엇을 찾느냐?" "스님께서 이 '마음'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혜가는 알고 싶은 마음은 사무쳤는데, 결국 알 수 없으니까 달마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 마음이라는 게 뭡니까? 잠시도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아, 나는 정말 마음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싶어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달마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를 편안하게 해 주겠다." 그 말을 듣고 혜가는 며칠 동안 마음을 찾아보았습니다. 하루 이틀 삼일, 아무리 찾아도 마음이라고 할 게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공부하면서 이 생각을 어디서 잡을 수 있는지, 한번 곰곰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마음이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항상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가 또 좋게 만들었다가 하는데, 그 마음이라는 게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을 찾아 보십시오. 마음 하는 이뿐이지, 마음이라는 어떤 상자에 들어가 있는 것을 찾으면 마음을 못 보는 것입니다. 지금 마, 음, 이뿐입니다. 그래서 혜가 스님은 다시 달마 스님에게 갔습니다. "마음을 못 찾겠습니다." 그러니까 달마 스님이 "그럼 내가 너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여기서 혜가 스님은 깨쳤습니다. 달마 스님의 뒤를 이어 이조 스님이 된 것입니다. 혜가 스님은 삼조 승찬 스님에게도 비슷한 방편을 썼는데, 누구나 자신의 기질대로 방편을 쓸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 방편이 되지 않고 이게 분명하면 눈은 항상 맞게 돼 있습니다. 눈이 맞는다는 말을 쓰니까, 눈이 맞아야 됩니다. 눈이 맞아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천안, 천 개의 눈, 천 개보다 더 많은 눈이 24시간 자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눈이 맞으면 자신이 원래 눈을 한 번도 감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뿐이지, 법을 공부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 현명한 사람이 되겠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겠다, 남을 지도하는 사람이 되겠다, 그런 것은 전혀 이 공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자신을 알면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하는 이런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런 불안함 두려움이 점차 사라집니다.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이 공부를 '칼날 위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 법 공부가 더 밝고 더 단단해질수록 그만큼 생각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말을 하자면 생각들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어져 나타나는 그림인데, 그 연결고리를 딱! 끊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힘을 못 씁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이 이게 분명해야 됩니다. 단지 이뿐입니다. 마, 음! 이뿐이지, 다른 게 전혀 없습니다. 언제든지 항상 이뿐입니다. 이것, 이게 다입니다. 혜가 스님처럼 진지하게 한번 찾아보십시오. 이게, 이게, 다만 이게 있을 뿐입니다.

1. 폭설 속 젊은이 왼팔을 자르다


12월9일 낙양(洛陽) 근처 소림사(少林寺)의 풍경은 계속 내리는 눈으로 흐릿하기만 합니다. 폭설입니다. 어찌나 눈이 장하게 내리는지, 밤에도 어둡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흩날리는 눈 속에서 어느 사나이가 법당을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법당 안에는 어느 스님 한 분이 벽을 마주보며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눈 속에 우뚝 서 있는 젊은이와 그를 등지고 참선하고 있는 스님 사이에는 묘한 긴장마저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그 젊은이는 반겨주지도 않는 경내에 그렇게 고독하게 서 있었던 것일까요. 자비를 품고 있는 스님은 무슨 이유에서 그 젊은이에게는 일체의 마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러는 사이 12월9일의 밤은 깊어만 가고 어느 사이엔가 다음 날 새벽 무렵이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계속 내린 눈은 어느 새 젊은이의 무릎 근처까지 차올랐습니다.


법당 안의 스님은 마침내 젊은이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벽을 향하던 몸을 돌려 경내에 바위처럼 눈을 맞고 서 있는 젊은이를 향하게 되었으니까요. “지금 그대는 눈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가?” 젊은이는 자신을 자유로운 사람으로 이끌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매몰차게 그를 대합니다. 자유를 얻는다는 것,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칼을 뽑아들고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서 스님에게 바칩니다. 눈밭에 흩날리는 핏자국처럼 깨달음을 얻으려는 젊은이의 의지는 그만큼 애절하고 절실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스님은 그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정도의 의지만 있다면 깨달음에 이르려는 노력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지요. 선불교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마침내 선종의 초조(初祖)와 이조(二祖)가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짐작이 가시나요. 법당 안에서 벽을 향해 참선하고 있던 스님이 바로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깨달음을 전하려고 했던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528)이고, 불퇴전의 기상으로 눈을 맞고 서 있던 젊은이가 신광(神光, 487~593)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로 받아들이자마자, 달마는 신광에게 혜가(慧可)라는 이름을 내립니다. 충분히 깨달음, 즉 ‘지혜[慧]’를 얻을 수 있다고 달마가 ‘인정하고[可]’ 있다는 것을 표현한 법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달마와 혜가! 그렇습니다. 선불교의 오래된 전통, 그러니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표현되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은 바로 달마와 혜가라는 두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기원은 항상 두 번째나 세 번째에 온다는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말처럼 혜가가 없었다면 달마도 결코 선종 초조의 지위를 얻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긴 제자가 있어야 스승도 있을 수 있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왕이 있어야 누군가는 태조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2. 선종은 깨달음 촉발하는 과정

 

선종의 역사는 글이 글을 낳는 과정이 아니라 깨달음이 깨달음을 촉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등불이 다른 등불이 켜지도록 만드는 전등(傳燈)의 아름다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은 스승은 강제로 깨닫지 않은 제자를 깨달음에 이끌 수는 없습니다. 제자 스스로 깨닫도록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깨달음은 스승의 말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선종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가르치기는 하지만 가르치는 것이 없으니 스승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배운 것이 없으니 제자라고 하기도 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아이러니한 사제 관계에서 마침내 제자는 스승과는 다른 스타일의 깨달음, 그러니까 자신만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달마와 혜가 사이에 일어났던 드라마틱한 일화는 지금도 ‘전등록(傳燈錄)’ ‘보리달마전(菩提達磨傳)’으로 전해져서 1500 여 년 전 소림사 경내의 새하얀 눈밭에 흩뿌려진 선홍빛 핏자국을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합니다. 달마와 혜가 사이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던 사자전승의 논리는 그 후 깨달은 사람과 깨달으려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홍인(弘忍 601~674)과 혜능(慧能, 638~713), 황벽(黃檗, ?~850)과 임제(臨濟, ?~867) 사이에도 여전히 달마와 혜가 사이의 핏빛 긴장이 흐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무문관(無門關)’의 41번째 관문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관문은 달마와 혜가 사이의 선문답을 통해 가장 소박하고 원형적인 형태로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제자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혜가는 스승 달마에게 자신의 속앓이를 털어놓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스승이니까 그리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니 그가 깨달은 것을 조금만 일러주면, 자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질문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혜가는 자신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스승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잘못된 속앓이이자 해서는 안 될 요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그는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미 제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달마는 실망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혜가를 이끌려고 합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마는 말합니다. “괴로워하는 네 마음을 가지고 와라. 그러면 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겠다.”


3. 고통 응시한 혜가의 용기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제 마음만 가지고 오면, 스승은 깨끗하게 자신이 마음이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은 잠시뿐이었고 혜가는 다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혜가는 자신의 마음을 응시했던 것입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마음을 찾으려는 혜가가 되어보셔야 합니다. 고통스런 마음을 응시하는 혜가의 용기를 가슴에 아로새겨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읍니다!”라는 혜가의 말이 표면적으로는 절망에 빠진 절규로 들리지만, 사실 고통에서 벗어난 희열의 표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빛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아포리즘 모음집에서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말입니다.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나 스승에게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아마 불행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불행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불행에 거리를 두게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아름다운 꽃을 그리려면 그 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자신을 이야기하는 나는 순간적이나마 불행한 자신이 아니게 됩니다. 물론 이야기가 그치자마자 다시 불행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적어도 불행한 자신의 모습에 거리를 두고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은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혜가가 고통스런 마음을 찾으려고 했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순간 그의 마음은 더 이상 고통스런 마음이 아닐 테고, 당연히 그의 마음도 고통에서 벗어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혜가의 말은 기묘한 데가 있습니다. 고통스런 마음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찾으려는 마음 자체는 결코 고통스러운 마음이 아닙니다. 고통스런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초월하게 되니까요. 혜가가 고통스런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제42칙 여자가 선정에서 나오다

예전에 문수가 여러 부처님들이 모인 곳에 이르자, 그때 여러 부처님들은 각자의 본래 처소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오직 한 여인만이 저 부처님의 가까이에 앉아서 삼매에 들어 있기에 문수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저 여인은 부처님 가까이 앉을 수가 있는데, 저는 그러지 못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 여인을 깨워 삼매에서 일어나게 하여, 그대 스스로 물어보아라."

 

문수가 여인 주위를 세 번 돌고는 손가락을 한 번 퉁기고, 나아가 범천에 까지 밀고 올라가 그의 신통력을 다 부려 보았으나

삼매에서 나오게 할 수 없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설사 백 명 천 명의 문수라도 이 여인을 선정에서 나오게 할 수 엇을 것이다. 아래쪽으로 십이억 항하사 국토을 지나면 망명보살이 있는데, 그가 이 여인을 선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사이에 망명보살이 땅에서 솟아나 세존께 절을 하였다. 세존께서 망명에게 명하니, 망명보살이 여인 앞에 가서 손가락을 한 번 퉁기자, 여인이 이에 선정에서 나왔다.

 

 

[무문의 말]

 석가 늙은이가 이 한 바탕 잡극을 연출하였으니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말해 보라. 문수는 일곱 부처의 스승인데 어찌하여 여인을 선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였으며, 망명은 초지의 보살인데도 무슨 까닭에 도리어 나오게 할 수 있었는가?

만약 여기에서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다면, 분별망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곧 부처님의 선정이다.

 

 

[군소리]

문수는 나오게 하지 못했고

망명은 단번에 나오게 하였다.

무슨 까닭에 그렇게 되었는가?

그대가 헤아려 찾기 때문이지.

 

 

 무명, 선정에 들어가는 것도, 이 세속에서 생활하는 것도 이것을 모르면 똑같은 것입니다. 무지해서 눈에 보이는 어떤 것 하나를 쥐면 그게 아는 것인 줄 알고 또 다른 것을 찾아갑니다. 겉으로 읽으면 문수보살은 성문이라서 못 깨우고 망명 보살이 깨운 것 같지만, 그게 바로 분별하는 생각입니다. 법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선정에 든 여인이 손가락 퉁기는 소리에 깬 것입니다. 법은 똑같습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문수에게 법이 덜 밝고 망명이 법이 더 밝아서 깨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삼매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깬 것입니다. 문수보살처럼 신통력을 다 부려도 못 깨어나게 한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못 깨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아는데 여러 가지 신통력을 부리거나 기적을 행사하거나 좌선을 하거나 어떤 수행을 해서 마음을 버리거나, 경전을 공부하거나, 생각을 없애거나 등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그 어떠한 노력도 자신을 못 깨치게 합니다. 노력이라는 것은 어떻게 할 방법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비록 여인은 선정에서 못 나오고 있지만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실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각으로 온갖 것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선정에 들어가 아무것도 못 느끼고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나, 꿈속에서 이리저리 바쁜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자신을 모르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침의 기연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어떤 행동, 생각에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게 생각이지요. 1분, 10분, 1시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깨침의 체험 이야기, 그런 이야기도 그런 게 있었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야 됩니다. 나도 그런 일이 꼭 그처럼 있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상'이 돼서 그것만 기다리게 됩니다. 정말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르잖아요? 아무리 맞는 말이고 믿고 싶은데 실감이 안되니까 답답하고 눈물도 나서 짜증도 나게 됩니다. 그렇게 이게 뭘까? 하다가 아까 여인이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깼듯이, 어디서 언제 툭, 깨어날지 모릅니다. 문수보살, 망명 보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새벽 일찍 산에 올라가던 사람이, 동네 앞을 지나가다 그 집에서 늦잠자는 아이를 깨운다고 "야, 잠 깨라!" 그 소리 듣고 탁, 이것을 알았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또 조사선에 나오는 영운 스님은 복숭아꽃 보고 깨치기도 했지요.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로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늘 자신의 주먹에 있습니다. 펼치면 보이는 것은 없지만 가득 있습니다. 주먹을 쥐면 전혀 샐 틈도 없이 꽉~ 쥐고 있습니다. 이것, 이것뿐입니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고 넘치지도 않게 누구나 모두에게 골고루 똑같이 평등하게, 진짜 평등합니다. 세간의 조건으로 보니까 불평등하지, 정말 평등하게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늘 이 하나, 이것뿐입니다. 여기에 어떤 것을 가져와 보십시오. 이것 아닌 게 없습니다. 생각은 말은 계속하고 쓰고 남기고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는 흔적이 없습니다. 보려고 하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있잖아요. 이게 있으니까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게 뭡니까? ㅇ, ㅣ, ㄱ,ㅔ, ㅁ,ㅜ,ㅓ,ㅂ,ㄴ,ㅣ,ㄲ,ㅏ,? 이것입니다. 말이 되기 전에 생각도 하기 전에 미리 와 있고 이렇게 보이고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단지 이뿐, 이것입니다. 이것, 이것이라고 잡고 거기에 존재하려고 하면 힘이 들고 부딪히게 됩니다.

 

내 이름은 신미화, 신미화라고 일일이 말을 안 해도 아는 것처럼, 생각이 사실 그렇게 일일이 하는 것마다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안 하잖아요. 어떻게 '나는 ㅇㅇㅇ이다.'하고 다닙니까? 자신이 이름이 '신미화'이구나 하고 한번만 알면 되지. 단지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이고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자신이 없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 생각들은 그렇게 합니다. 왜냐고요?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나요 배는 바다로 갑니다. 이것은 배가 산으로 갑니다. 전혀 아무것도 못하게, 배의 역할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배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망상이 잘 돌아서 살 구멍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지, 언제나 이것뿐이지, 다른 게, 다른 것을 함 찾아보십시오. 언제나 생각은 늘 다른 것을 찾지만 지금 눈앞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무문관)제43칙 수산의 죽비

수산성념 화상이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는 말했다.

"여러분이 만약 죽비라고 부른다면 법에 저촉되는 것이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에 위배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말해 보라. 무엇이라 부르겠느냐?"

 

[무문의 말]

 죽비라고 부르면 법에 저촉되고 북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사물에 위배되니,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얼른 말해라! 얼른 말해라!

 

[무문의 송]

죽비를 들어서

죽이고 살리는 명령을 행하는데,

위배와 저촉이 오락가락하니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비는구나!

 

[군소리]

죽비라고 해서도 안 되고

죽비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럼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딱!(죽비로 때림)

 

 

 죽비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어쨌든 대나무가 자신이 대나무인 것을 모르는 것처럼 죽비도 처음부터 죽비였던 것은 아니지요. 한문에도 부수가  '手' 들어가 있으면 손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竹'도 대나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게 유추하도록 만든 게 글자인 것입니다. '죽비'라는 단어는 그렇게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법은 그런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죽비라는 단어를 빼고 죽비라는 모양을 빼고 그럼 " (죽비를 세우면서) 이것이 뭡니까?" 죽비를 보라는 것은 아닙니다. 죽비를 보면 당연히 '죽비'입니다. 우리는 당연하게 너무도 당연하게 모양을 보고 그 모양에 의지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양이 없으면 자신도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눈이 모든 사물을 다 보는데, 그 사물이 실재 존재하는 것처럼, 실은 눈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눈에는 관심이 없어요. 보이는 사물에 더 많이 욕심을 내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져도 아무리 많은 선업을 가져도 티끌만큼도 눈에 넣을 수 없습니다. 눈에는 쪼금만 보이지 않는 티끌도 들어가면 눈이 따가워요. 눈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눈은 눈 그 자체지, 어떻게 더 많이 보려고 눈동자를 키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영 못 볼 수도 있습니다. 죽비를 죽비라고 부르지 말고 죽비를 죽비라고 불러도 안되고, 죽비라는 기준이 있으면 항상 양쪽으로 갈리게 됩니다.

 

기준이 없으면, 기준은 우리가 생각으로 만든 것이잖아요. 세상의 기준, 정말 어림 반 푼어치도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지요. 기준이 어떻게 생길 수 있습니까? 그냥 일부 확률을 낸 것이지, 사람의 마음, 행동 방향은 어떻게 보면 자꾸 그런 기준에 의해서 관습이 되고 결국 습이 되는 것이지요. 나라마다 그 문화와 언어가 다른 것만 봐도 절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죽비에서 한번 벗어나야 됩니다. 죽비이면서도 죽비가 아닌 이것을 한번 탁! 이게 한번 와 닿아야, 이런 말 저런 말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말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멋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유롭다고 무조건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말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이 법을 체험하고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세워두고 거기에 자신의 가정과 사회적인 일어나는 일들이 빗대어, 법이 여여한지 확인하는, 춘성 스님이 젊은 아가씨를 두고 내 큰 것이 어찌 네 속에 들어가겠느냐?라고 하신 것처럼, 사물의 크기를 보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세속적인 것을 어찌 법과 비교를 할 수 있습니까? 법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죽비라고 할 것도 없는데, 어디에서 법을 찾고 죽비를 찾습니까? 자신이 정말 '자신'이라고 할 게 없으면 어떤 것이 '세속'이고 '법'이고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공부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신의 티끌을 자신이 보기가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입니다. 그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나인 줄 아는 것입니다. 허공에 수천수만 개의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지, 개구리의 눈으로는 비록 꽃을 좋아하고 잎을 여유작작 놀고 있어도 파리를 보면 순간적으로 날름 잡아먹습니다. 허공의 눈에는 아무런 견해가 없습니다. 아무런 견해가 없으니까 모든 견해를 다 낼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는 꽃이지만 늘 생생하게 향기를 온 세상에 풍기고 있습니다. 다만 이 뿐, 이것, 이것뿐입니다. 아침부터 내도록 말린 무청을 왔다 갔다 하며 삶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빨래도 삶고, 방학이라 자는 아이들 밥 준비도, 바쁘면서도 조용한 아침이 더없이 좋군요. 있지도 않는 무거운 마음을 들고 다닐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출근 준비해야 됩니다

1. 이중구속은 선불교 이해에 도움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 1980)과 그의 주저 ‘마음의 생태학(Steps to an Ecology of Mind)’은 우리의 마음이나 선불교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전개했던 ‘이중 구속(the double bind)’이라는 이론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내 말을 듣지 마라!” 아이는 당혹스러울 겁니다.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인지, 듣지 않아야 하는 것인지 헛갈리기 때문이지요. 만일 앞으로 어머니가 하는 말을 일체 따르지 않는다면, 아이는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는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 됩니다. 당연히 아이는 헛갈릴 수밖에 없지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어머니의 말을 어긴 것이 되고, 어머니의 말을 어기면 어머니의 말을 듣는 꼴이 되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중 구속의 상황입니다.


베이트슨은 이중 구속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정신 분열증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어겨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면, 정신이 분열될 수밖에요. 그렇지만 사실 이중 구속 이론은 베이트슨만이 이야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서양 철학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을 아실 겁니다. 어떤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도 바로 거짓말쟁이로 유명한 크레타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참이라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셈입니다. 지금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반대로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거짓이라면 그는 참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경우 그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다시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헛갈리기만 합니다.


20세기 서양의 지성인들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풀기 위해서, 아니 정확히 말해 ‘역설’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도 그렇고 수학자 괴델(Kurt Gödel, 1906 ~1978)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들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없애는 데 성공했던 것일까요.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만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언어와 논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크레타 사람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지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주장을 어느 크레타 사람이 말하는 순간, 역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역설로 보이는 이유는 그 크레타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대부분의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이야기했다면, 역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자신은 거짓말쟁이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2. 언어 집중하면 모순에 빠져

 

러셀이나 괴델은 모두 ‘모든’이라는 말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역설은 불가피한 것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친구한테 배신을 당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지요. 지금까지 한 번도 본인은 자신의 친구들을 배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분노와 비탄은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그는 절규합니다. “모든 인간은 배신자야!” 과연 여기서 ‘모든 인간’은 절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가 만날 미지의 모든 친구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모든’이란 지금 자신을 배신한 그 친구에게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제 신뢰할 만한 친구가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는 ‘모든’이라는 말을 썼던 겁니다. 배신감을 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일종의 과장법인 셈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역설은 언어를 엄격하고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사용하려는 집착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베이트슨이 말한 이중 구속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집착했을 때, 아이는 이중 구속에 빠지고 심하면 정신 분열증에 걸리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정말 아이가 자신의 말을 듣지 말기를 원해서였을까요. 물론 아닐 겁니다. 아이가 자신의 말을 너무나 듣지 않아 화가 나서 했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듣지 마라”는 어머니의 말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이거나 아니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니!” 바로 이것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가령 옛날 어른들도 예쁜 손주를 보고 “밉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말에 집착했다면, 손주는 할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을 아껴주어야 하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자신을 밉다고 했으니까 말입니다.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43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수산(首山, 926~993) 스님을 만날 든든한 채비가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이 43번째 관문에서 수산 스님은 제자들을 ‘이중 구속’의 함정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죽비를 들고서 죽비라고 말해서도 안 되고, 죽비라고 말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물어봅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죽비를 가리키며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작은 죽비 하나가 제자들에게는 넘을 수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견고하고 높아만 보였을 겁니다. 제자들은 정신 분열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마 온몸을 땀으로 적시고 있었을 겁니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화두, 역설에 지나지 않는 화두를 던지면서 스승이 자신들을 괴롭히니 말입니다. 아마 제자들의 뇌리에는 “죽비, 죽비, 죽비”라는 글자가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3. 유머, 집착없는 가벼운 마음

 

제자들은 스승 수산 스님이 막고 있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문은 수산 스님이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막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논리적이었던 겁니다. 논리적으로 죽비는 죽비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전자는 참이고 후자는 거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추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은 죽비라고 말해서도 안 되고, 다른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비’라는 말과 그와 관련된 논리적 추론에 집착한다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을 겁니다. 마치 ‘모든’이란 말에 집착했던 러셀이나 괴델, 혹은 ‘내 말을 듣지 말라!’는 말에 집착했던 아이처럼 말입니다. 간단한 화두로 제자들을 이중 구속에 빠뜨린 수산 스님의 능력은 탁월한 데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수산 스님은 제자들이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마음 상태에 있는지 보여주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베이트슨의 주저 ‘마음의 생태학’을 다시 넘겨볼까요. 베이트슨은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어느 날 어떤 직장인이 근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직장의 다른 동료가 집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가볍게 그에게 묻는다. ‘어, 거기에 어떻게 갔니?’ 그러자 그 직장인은 대답했다. ‘자동차로.’ 그는 글자 뜻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웃음이 터져 나올 만한 재미있는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서 우리의 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거기에 어떻게 갔니?’라는 동료의 질문에 사례의 주인공이 ‘자동차로’ 갔다고 말하는 대목일 겁니다. 주인공은 동료가 질문한 말을 표현한 그대로 집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라는 말을 집에 돌아간 방법으로 들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요. 주인공의 동료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도대체 일은 하지 않고 왜 집에 갔니?”라는 물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만일 이것을 죽비라고 부른다면 이름에 집착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겠는가!” 수천수만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죽비에 집착하지 않고서 대답했다면 어떤 말이라도 정답일 테니까 말입니다. 아마 방귀를 우렁차게 내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대답에는 웃음기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갔니?”라는 질문에 “자동차로”라고 대답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터뜨렸던 것과 같은 웃음 말입니다.

 

(무문관) 제44칙 파초의 주장자

파초혜청 화상이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가 주장자를 가지고 있으면 내가 그대에게 주장자를 줄 것이고, 그대가 주장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내가 그대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무문의 말]

 다리 끊어진 물을 이것에 의지하여 건너, 달도 없는 캄캄한 마을로 이것과 함께 돌아온다."

만약 이것을 주장자라고 부른다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들어가리라.

 

[군소리]

옷 입은 사람에게 또 옷을 입히고

헐벗은 사람에게서 옷을 벗겨라.

파초는 잘 속였다고 좋아하겠지만

비웃는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하리.

 

 두만강 물을 판 봉이 김선달, 누구의 주인도 아닌 두만강 물을  팔았지요. 두만강 물은 그렇게 판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누구 개인의 물도 아닙니다. 그것처럼 주장자는 물그릇처럼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주거니 받거니 줬다가 뺐었다가 샀다가 팔 수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하늘도, 구름도, 허공, 땅도, 바다도, 구름도, 태양도, 산도, 나무도, 공기도 모두 그렇습니다. 원래 나눌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나눈 것입니다. 그런 나뉨이 없다면 원래 따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입니다. 지금도 하나입니다. 단지 우리 생각 속에서 나눠져 보이는 것이지요. 바다의 물이 증발해서 하늘로 올라가서 비가 되고 땅으로 떨어져 산과 나무도 살고 다시 그 물이 바다고 들어가고, 어느 것 하나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의 몸도 그렇게 탄생되었지요. 바다에서 태양열에 수증기가 돼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몸도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어느 순간에 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벌레도 똑같습니다. 똑같이 알을 낳거나 새끼를 낳거나 그 생명의 신비를 보자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지만, 사실 이것을 알면 이것만큼 신기한 것은 없습니다. 이 모든 생명체와 생명체 아닌 것, 금강경에 보면 태생, 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 모든 것에 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해탈 시켰다고 하지만 결국 해탈한 중생이 없다고 나옵니다. 그렇게 몸이 태어나고 '나'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지배라는 표현보다 더 알맞은 표현이 생각이 안 납니다. 지배는 아래로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합니다. 생각의 지배는 오랫동안 이어온  교육입니다. '나'라는 것에서 나온 '너'와 '나', 그것과 이것을 구분하기 위한 '지식'입니다. 분명히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제는 모처럼 산에 올라갔는데, 황매산 모산재를 올라갔었지요. 정상 옆에는 바위 끝에 동그란 바위가 놓여 있는데, 곧 떨어질 듯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절벽으로 한 걸음만 다가가도, 보이는 높이에 압도돼서 떨립니다. 그러나 바위는 그렇지가 않지요. 그 차이는 뭘까요? 생각입니다. 바위에게 생각이 있다면 그 절벽 낭떠러지 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엄청 쓰겠지만 바위는 그런 게 없습니다.

 

이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우리의 몸을 구속하느냐면, 잠깐만 불행한 생각만 해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도, 몸이 경직되고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모두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은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지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함에 따로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처럼 그처럼 변화됩니다.  이것은 그런 것과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생각을 하면 생각 그대로, 행동을 하면 행동 그대로 단지 그뿐이지만 변화지 않습니다. 언제나 항상 지금 이대로입니다. 비록 몸이 태어났지만 이것은 태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퍼도 퍼도 끝내 마르지 않은 물, 이 물맛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풍족하고 충만하고 모자라지 않고 넘치지 않고, 여기 어디에 주장자가 붙을 수 있습니까?

1. 주장자는 깨달음을 상징

 

주장자(拄杖子)를 아시나요. 큰 스님들이 길을 걸을 때나 설법을 할 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자는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이나 불성(佛性),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장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깨달았다는 것을 뜻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무문관’의 44번째 이야기에서 파초(芭蕉) 스님이 대중들에게 던진 화두는 단순히 주장자라는 사물을 넘어서는 무거운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주장자가 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리 깨달음의 의미가 크다고 하더라도, 주장자라는 단순한 사물 이야기로도 충분히 이 화두가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문관’에 등장하는 48개의 화두들을 우리는 읽을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요. 다 깨닫자는 이야기라면, 48개 화두 전부를 읽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파초 스님이 던진 화두는 정말 화두의 품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이야기이니까요. 하긴 언어의 길이 끊어진 그곳, 바로 거기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먼저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는 말부터 생각해보지요. 사실 주장자가 있는 사람에게 주장자를 준다는 것부터 황당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파초 스님은 제자들에게 주장자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생각해보지요. 만약 제자들이 주장자를 받는다고 해보세요. 이것은 그들에게 주장자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주장자가 있는데, 또 받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결국 주장자를 주겠다는 파초 스님의 속내는 제자들에게 “지금 너희들에게는 주장자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스님은 속세 사람들을 만날 때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는 척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풍자한 것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까 파초 스님은 조롱한 겁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된 깨달음을 비판했던 스님의 첫 번째 화두보다 더 어려운 것이 두 번째 화두일 겁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주장자가 없는데, 어떻게 뺏을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과연 정말로 주장자는 없는 것일까요. 진짜 물질적으로 주장자는 없는지도 모릅니다. “주장자는 없다”는 생각 속에 이미 주장자는 엄연히 있는 것 아닐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파초 스님은 이렇게 제자들이 집착하고 있는 주장자를 빼앗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장자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그러니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장자는 오매불망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갈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엇인가에 강하게 집착한다면, 역설적으로 깨달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제자들의 오만함을 통렬하게 조롱한 뒤에, 파초 스님은 주장자라는 관념 자체를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2. ‘깨달음’ 집착 놓아야 성불

 

주장자가 없다는 생각, 그리고 부처라는 생각마저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파초 스님의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성불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주장자를 갖겠다는 생각만큼 스님들에게 끊기 어려운 생각도 없을 겁니다. 이런 생각이 없다면 스님들은 스님이 될 필요도, 그리고 파초 스님과 같은 큰 스님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파초 스님은 그마저 내려놓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파초 스님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는 현대 프랑스철학자 베르그손(Henri Bergson, 1859-1941)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주저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ice)’에서 그는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없다는 생각이 있다는 생각보다 무엇인가 하나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여기 어떤 방이 있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있다고 해보세요. 제 앞 책상 위에 볼펜이 한 자루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제 주머니에 감춥니다. 그렇다면 책상 위에 볼펜은 이제 없겠지요. 여러분들은 이 광경을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께 책상을 가리켜며 물어보겠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제 볼펜은 책상 위에서 없어졌으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아무런 문제도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방에 있지 않았던 어떤 사람을 제가 방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까처럼 책상을 가리키며 물어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방금 들어온 그 사람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아마 그는 “책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그는 볼펜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볼펜이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책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제야 베르그손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볼펜이 없다”는 생각에는 ‘볼펜’이란 생각과 함께 ‘없다’라는 생각이 같이 있었던 겁니다. 베르그손이 “‘없다’고 생각된 대상의 관념 속에는, 같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의 관념보다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없다는 생각, 그러니까 무(無)라는 생각은 항상 우리의 마음에서만 가능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것이 지금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만, 우리는 ‘그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새로 방에 들어온 사람은 책상 위를 가리키는 제 손가락을 보고 말했던 겁니다. “책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볼펜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없다는 생각이 더 큰 집착

 

“지갑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직장에서 해고되었어.” 등등. 우리는 매번 없음에 직면하며 당혹감과 비통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지갑이 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을, 그리고 살아계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집착의 기원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없어진 것이 너무나 소중한 것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일 겁니다. 없다는 느낌은 그만큼 그것이 있었을 때 느꼈던 행복을 안타깝게도 더 부각시켜주는 법이니까. 그래서일까요. 건강을 잃어버린 사람은 건강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안타깝게 그리워합니다. 부모를 여읜 사람은 자신에게 호통을 쳤던 부모님이 밉기는커녕 다시 볼 수 없어 괴로울 겁니다. 애인과 이별한 사람은 알콩달콩 애인과 밀어를 나누던 때의 모습이 떠올라 홀로 눈물짓게 될 겁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렇게 이제 없어진 것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현재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 살도록 만든다는 점 아닐까요.


이미 없어진 것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없고 당연히 우리에게 미래도 열릴 수 없는 법입니다. 잊어버린 지갑에 연연할 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이별한 애인을 가슴에 두고 있을 때, 새롭게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애인이 눈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를 잊지 몰할 때, 탐스럽게 피어난 아름다운 들꽃의 향내가 코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안다고 해도 집착에서 벗어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노력할 겁니다. “잊어야지, 이미 지갑은 내 수중을 떠났으니까.” “잊어야지,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니까.” “잊어야지, 이미 직장은 없어졌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없어진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없어졌어. 그러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없어진 것을 각인시키는 기묘한 작용을 하는 법입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이제야 제자들에 대한 파초 스님의 하염없는 자비심이 보이십니까. 깨달은 자, 그러니까 부처를 꿈꾸는 마음이 강하게 되면,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절망이 다시 부처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게 될 겁니다. 돈이나 권력과도 같은 세속적인 것이든, 아니면 부처나 불성과 같은 탈속적인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집착은 깨달은 자가 가지는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니까요. 또한 이렇게 부처에 집착하는 스님에게 상처받고 비참한 중생들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무문관) 제45칙 그는 누구인가

동산의 법연 노스님이 말했다.

"석가와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이다. 말해 보라. 그는 누구인가?"

 

 

 

[무문의 말]

 만약 그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마치 번화한 거리에서 자기 친아버지를 마주친 것과 같아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아버지가 맞는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없으리라.

 

[무문의 송]

남의 활은 당기지 말고

남의 말도 타지 말고,

남의 잘못은 말하지 말고

남의 일은 알려고 하지 마라.

 

[군소리]

석가와 미륵을

하인으로 부리는

그는 누구인가?

이미 어긋났다.

 

 

 하하, 우리 집 청소는 매일 나 혼자만 하는데, 난 한 번도 노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의 노예는 있었지요. 생각의 노예, 이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고,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라고 해도 이렇게 편하지 않고 저렇게 하라고 해도 저렇게 만족이 안되더군요. 그러니 항상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석가와 미륵은 생각의 노예들입니다. 당신은 석가를 직접 봤습니까? 미륵보살을 직접 봤습니까? 직접 봐야 그들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확인하지 못하면  있지도 않은 것을 어찌 풀어줄 수 있습니까?

 

남의 말은 절대 자신의 말이 될 수 없습니다. 한라산에 직접 올라봐야, 한라산 가봤다고 하지, 안 가보고 한라산에 나는 여러 가지 식물, 산세, 거리, 날씨 등등 상세하게 알고 있어도 한라산 모르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지식으로 한정된 '가상의 한라산'이 있을 뿐이지요. 항상 제일의, '나는 누구인가?' 이게 첫 번째 질문이자 끝내 마지막 답인 것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이 하나가 밝게 활활 타고 있습니다. 이 불은 자신도 석가도 미륵도 누구도 껄 수 없습니다.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세속적으로는 한 해가 저물지만, 우리는 진짜 가지 않고 오지 않고 향상일로에 있습니다.

1. 부처 숭배는 일종의 방편

 

철학자의 눈에 불교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습니다. 제도라는 측면에서 불교는 신을 숭배하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나 미륵 등 부처들이나 그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불교는 일체의 초월적인 권위를 근본적으로 해체하여 인간에게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부여했던 가장 혁명적인 사유 형식이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러니, 아니 모순을 확인해보려면 가까운 사찰에 한 번 들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공손하게 108배를 올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이웃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분명 이것은 초월자에게 자신의 절절한 소망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반면 이렇게 간절한 기도 행위를 마친 분들이 사찰을 떠나려고 할 때, 스님들은 합장하며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보살님! 성불(成佛)하세요.” 정말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부처를 마치 신이기라도 하듯 숭배한다는 것과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불교의 핵심은 치열한 노력으로 스스로 부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처를 숭배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면 불교는 기독교와 구조적으로 구별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 숭배는 잘해야 일종의 방편(方便, upa- ya)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부처를 숭배함으로써 스스로 부처가 되기에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나마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근기(根機, indriya)라는 개념이 불교에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기’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끈기가 없다’거나 ‘끈기가 있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끈기’라는 말은 바로 ‘근기’에서 유래된 것이지요.


보통 상근기(上根機)니 하근기(下根機)라는 말을 불교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하근기는 주어진 선천적인 한계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와 관련된 해묵은 논쟁이 대승불교 전통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일천제’는 ‘성불할 수 있는 역량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상근기가 귀족이나 적어도 평민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하근기는 일자무식의 천민 계층을 가리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하근기인 일반 민중들에게는 절망스런 선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문자가 권력 발생의 기원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는 1955년에 출간된 자신의 주저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문자야말로 계급과 권력이 발생하는 기원이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문자가 출현하면서 문자를 독해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않는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화된다는 것입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오래된 위계적 분업 체계가 발생한 것도 사실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의 부모들은 지금도 자신의 아이들을 더 많이 가르치려고 혈안이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역설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통찰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문자를 강조하는 순간, 상근기와 하근기의 구분은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면 문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순간, 상근기와 하근기 사이의 간극은 좁아들게 됩니다. 사실 문자로 이루어진 이론을 강조하는 순간, 하근기, 즉 민중은 절망에 빠지게 될 겁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불교가 자비라는 이념을 표방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선종(禪宗) 전통이 가진 사상사적 중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선종은 절망에 빠진 민중 계층에 대한 자비에서 출현한 것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선종의 슬로건이 중요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문자와 언어, 그러니까 지적 이론의 가치를 억누르지 않고, 어떻게 하근기, 즉 민중들에게 성불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불립문자라는 깃발 아래 선종은 하근기나 일천제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일자무식의 혜능(慧能, 638-713)이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 그러니까 육조(六祖)가 되었다는 전설은 이런 선종의 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지요.


문자와 이론을 강조한 만큼, 교종은 귀족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문자를 강조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자에 대한 집착이 성불의 가장 큰 장애라고 기염을 토했던 만큼, 선종은 민중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교종의 대표적인 스님들은 대개가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신라시대의 의상(義相, 625~702) 스님이나 고려시대의 의천(義天, 1055~1101) 스님은 모두 왕족이었습니다. 어려서 좋은 환경 속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았기에 그들은 불교 경전을 읽고 이해하는 데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교종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문자와 이론을 강조하는 순간, 교종 내부에서는 구조적인 위계질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부처-경전-경전독해자’라는 위계질서입니다. 물론 여기서 경전독해자의 내부에서도 작은 위계질서, 그러니까 ‘경전에 능통한 사람’과 ‘경전에 무지한 사람’이란 위계질서가 생길 겁니다.


3. 선종은 성불의 새로운 패러다임

‘불립문자’를 외치는 순간, 선종은 성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수행 방법입니다. ‘문자’에서 ‘마음’으로 패러다임을 이동한 선종(禪宗)의 독특한 전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교종 내부에 잠복해 있던 위계질서, 그러니까 ‘부처-경전-경전해독자’라는 위계질서를 전복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운문(雲門, ?~949) 스님은 교종에 속한 스님들이 들었다면 경천동지할 사자후를 토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른 똥 막대기(乾屎橛)!” 부처의 말인 경전이 부정되려면, 부처를 가만히 두어야 되겠습니까. 쓰레기통에 후련하게 던져 넣어야지요. 그래야 살아있는 우리의 마음 하나하나가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법연(法演, ?~1104)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 굳건히 지키고 있는 ‘무문관(無門關)’의 45번째 관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주장자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법연 스님은 우리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석가(釋迦)도 미륵(彌勒)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잘 알다시피 석가는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BC563?~483?)를, 미륵은 싯다르타의 사유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불교 이론가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를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뿐만 아니라 미륵도 부처로 추앙되는 사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미륵은 싯다르타보다 더 종교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극락정토가 이루어지면, 인간세계에 다시 내려온다고 믿어졌던 부처였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불교 신자들은 삶이 고단해지면 ‘미륵불’을 울부짖으며 불렀던 겁니다. 지상에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오기를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싯다르타와 미륵이 그만큼 중요하니, 그들의 남긴 경전과 논서는 또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그들의 글은 깨달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열쇠로 생각되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석가모니나 미륵, 혹은 그들이 남긴 글에 의존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법연 스님의 화두가 풀리시나요. “석가모니나 미륵의 노예가 될 것인가, 그들의 주인이 될 것인가?” “그들에게 소원을 기구하는 서글픈 하근기로 살 것인가? 누구에게도 원하는 것이 없는 당당한 상근기로 살 것인가?” 석가모니나 미륵이 우리의 노예가 되는 순간이 바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처가 되는 찬란한 순간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미륵이 우리에게 절을 하는 광경을 떠올려보십시오.

 

1. 문수는 지혜, 보현은 실천을 상징

 

서울을 북쪽으로 에워싸고 있는 북한산은 700~800미터 급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거느린 장대한 산입니다. 도처에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아찔한 암릉들이 도처에 숨어 있어서 해발고도보다는 훨씬 더 고산의 풍모를 자랑하는 산이지요. 아마 서울과 같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곁에 이만한 수준의 산이 있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산이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그리고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의 오악(五嶽)에 당당히 속하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과거에 북한산은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렸습니다. 북한산 동쪽 방향에 주봉인 백운대(白雲臺, 836.5m)가 있습니다. 이 백운대를 포함해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봉우리, 그러니까 인수봉(仁壽峰, 810.5m)과 만경대(萬鏡臺, 787.0m)가 이루는 형세가 세 뿔처럼 보였기에 삼각산이라고 불렸던 거지요.


북한산의 명성을 직접 확인하려고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은 대부분 백운대를 중심으로 산행을 진행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이걸로 북한산을 경험했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와 쌍벽을 이루는 봉우리 군이 북한산에는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북한산 서쪽에는 문수봉(文殊峰, 716m)과 보현봉(普賢峰, 700m)을 정점으로 하는 웅장한 봉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산은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망경대로 이루어지는 동쪽 봉우리 군과 문수봉과 보현봉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봉우리 군으로 양분된다고 봅니다. 북한산의 서쪽 봉우리 군의 정점인 문수봉과 보현봉을 제대로 보려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나 인왕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동쪽 북한산에 있는 봉우리의 이름들이 유교(儒敎)나 도교(道敎)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용어들과 관련이 있다면, 서쪽 북한산 봉우리의 이름은 불교(佛敎)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란 말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문수(文殊, Man͠juśrī)가 불교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유명하다면, 보현(普賢, Samantabhadra)는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입니다. 문수와 보현은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중요한 보살들입니다. 소승불교가 아라한(阿羅漢, arhat)을 강조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을 강조합니다. 아라한이나 보살은 모두 깨달음을 지향하지만, 아라한과 달리 보살은 중생을 미혹에서 인도하는 역할도 수행합니다.


2. 보살은 대승의 인격적 이상이다

 

아라한이 스스로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리(自利)에만 치중한다면,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깨달음에도 힘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불교 학자들은 아라한이 소승불교의 이상적 인격이었다면, 보살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이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이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성격이 명확해지지 않나요. 문수보살의 이타행이 지적인 가르침에 중심이 있었다면, 보현보살의 이타행은 묵묵한 실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석가모니에게서 직접 배웠던 아난(阿難, Ānanda)과 비슷하다면, 보현보살은 가섭(迦葉, Kāśyapa)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난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적인 제자였다면, 가섭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릴 정도로 실천적인 제자였으니까 말입니다.


선종(禪宗)은 깨달음을 지적으로만 모색했던 교종(敎宗)을 비판하는 전통입니다. 말로 깨달음을 읊조리는 것과 실제로 깨닫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무문관(無門關)’에 등장하는 48가지 화두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난이나 문수보살이 폄하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문관’의 마흔두 번째 관문에서 그렇게도 현명하다는 문수가 제대로 선정(禪定)에 든 여인네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하는 촌극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실 마흔두 번째 관문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는 이미 ‘대지도론(大智度論, Mahāprajnāp͠āramiātśāstra)’에도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종 이전의 경전에 등장한 것을 선사(禪師)들이 하나의 화두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이 문수보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이해의 상징이었던 문수보살이 제대로 선정에 드는 여자만도 못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선사들이 놓칠 리 있었겠습니까. 선종의 정신은 지적인 이해와 논리적인 담론보다는 치열한 자기 수행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마흔두 번째 관문을 가로막고 있는 문수보살 이야기를 통과해보도록 하지요. 수많은 부처들이 석가모니의 처소에 모여들었나 봅니다. 이미 스스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임하던 문수보살도 회동에 참여합니다. 회동이 끝난 뒤 여러 부처들은 모두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만이 참선을 하다 삼매의 경지에 들어 석가모니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삼매(三昧, samādhi)는 참선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합니다. 일체의 잡념과 상념이 없기에, 삼매는 당연히 무아의 경지를 스스로 체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순간 여인은 부처가 된 것이나 진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부처들이 다 떠나갔는데도 삼매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또 석가모니 옆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선정에 들었다는 것도 이 여인이 이미 자신의 삶에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분별적 지성 극복이 불립문자 정신

 

그렇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도 의식하지 않는 진정한 주인의 경지,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경지, 그러니까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처소에 들린 문수의 눈은 그저 여인은 보잘 것 없는 여인네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문수는 투덜거립니다. 지혜롭다고 자임하는 자신은 한 번도 그렇게 가까이 석가모니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볼멘소리로 문수는 불평을 토로했던 겁니다. “어찌해서 저 여인은 부처님 자리에 가까이 할 수가 있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까?” 문수의 어리석은 투정에 웃음이 나지 않으시나요. 사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석가모니 근처에 앉고 싶었던 것은 문수 자신이니까요. 반면 여인은 석가모니 근처에 있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삼매에 들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수가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석가모니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터인데, 문수에게 석가모니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이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문수의 투덜거림은 자신이 그 여인보다 경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누설하고 있었던 겁니다. 문수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미 그녀는 문수가 어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석가모니는 문수에게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이게 됩니다. 문수보다 지위가 한 참이나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망명(罔明) 보살을 불러 여인을 삼매에서 깨어나도록 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불요집경’에는 망명이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망명은 선사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보살인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 마흔두 번째 관문의 묘미가 있는 겁니다.


문수라는 한자를 보세요. ‘무늬[文]가 뛰어나다[殊]’는 뜻, 그러니까 세계를 분별하는 지성이 발달했다는 뜻으로 교종의 이론적 경향을 상징합니다. 반면 망명이란 글자는 ‘밝음[明]이 없다[罔]’는 뜻으로, 분별적 지성을 극복했다는 선종의 불립문자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마흔두 번째 관문의 화두를 만든 선사는 매우 영민했던 것 같습니다. 문수와 망명이란 글자를 통해 선종이 추구하는 정신을 멋지게 형상화했으니까 말입니다. 문수와 망명으로 상징되는 대립은 사실 전체 화두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문수가 의지했던 범천(梵天, Brahmadeva),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믿어졌던 범천은 ‘맑은 하늘’, 그러니까 모든 것에 통용되는 투명한 지성을 상징했던 겁니다.

 

(무문관) 제46칙 장대 끝에서 나아감

 

석상 화상이 말했다.

"백 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내딛는가?"

다시 옛 스님이 말했다.

"백 척 장대 끝에 앉은 사람은 비록 도에는 들어왔으나 아직 참되지는 않는다. 

백 척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내디뎌야 온 우주에 온몸을 드러내리라."

 

 

 

[무문의 말]

한 걸음 내디뎌 몸을 뒤집을 수 있다면, 다시 어느 곳을 꺼려해서 스스로 최고라고 자부하지 못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말해 보라!

백 척 장대 끝에서 어떻게 한 걸음을 내딛는가?

 

 

[무문의 송]

정수리 위의 눈을 감아 버려서

저울의 눈금을 잘못 읽는다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더라도

한 소경이 뭇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다.

 

 

[군소리]

백 척 장대 위에서

한 걸음 내디디면

어디를 가더라도

장대 위에 있으리.

 

 

 우리가 생각으로 하면 1척이 30센티미터쯤 되니까, 3000센티, 약 3km 정도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은 빨리 계산하고 이해하고 싹 돌아갑니다. 이것을 어찌 안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저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재빨리 싹 이해합니다. 요즘은 또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되니까 장대에 오르기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큰 의심을 내고 꼭 기필코 깨치고 말리라, 법을 깨쳐서 쭉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길이 보입니다. 힘들지만 편안하게 왔는데, 장대 끝에 도달했습니다. 이게 다인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네, 그런데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밑을 보면 특히 저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고 뒤로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게 인연입니다. 때가 되면 저절로 그런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 힘은 이제껏 법만을 의지해 왔는데, 그 법조차도 결국 자신의 장식일 뿐입니다. 무한한 바다에 오직 등대가 있어서 온 세상을 비추는 줄 알았는데, 열심히 와서 보니 등대는 없고 자신이 바로 빛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빛으로 온갖 것을 다 비추고 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지나온 한 걸음 한 걸음이 결국 다시 이 자리로, 원점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원점에 있는데,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울의 방향대로 움직입니다. 아무리 다양한 무게를 지니더라도 저울은 항상 원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원점에 있는 저울은 고장 난 것이지요. 못 씁니다. 자신이 고장 난 것도 모릅니다. 법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항상 움직이고 생생하고 가볍고 비록 생각을 따라가더라도 항상 원위치, 자신의 생각만큼 무게를 누르더라도 손을 때면 항상 원위치, 이것입니다.

 

손을 때야 됩니다. 의지할 게 없어야 됩니다. 원래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그게 자유로운 것이지요. 아무리 법이 좋다고 한들, 아무리 어떤 기분 감정이 좋다고 하든, 아무리 어떤 수행이 나에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고 뭔가 한 단계 올라가는 도력을 준다고 한들, 그런 행위적이고 의식적인 것들은 모두 그런 것을 할 때뿐입니다. 그것은 해변가에서 모래성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생각과 행위를 할 때에만 즐거움과 편안함, 실력이 있는 것이지, 자신은 그런 바다의 천 배, 금강경에 나오잖아요.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의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보다 더 많은 복덕이 있다고, 자신을 이 한정된 몸에 규정을 짓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생각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비로소 모든 만물이 자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이 뭔지는 모르지만 손을 대는 것 하나마다 이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따로 있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 하나마다 이게 있습니다. 움직이는 하나마다 오직 이것입니다. 쳐다보는 벽, 컴퓨터, 나무, 창문, 모두 이것일 뿐입니다. 제일 처음 법을 체험할 때와 똑같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로지 이 하나의 법이 있을 뿐인데,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다시 집으로 온 것입니다. 깨고 보니 원래 우리 집인데,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집이 물건이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 눈이 달라져 있습니다. 확실히 내 집이구나!  다만 이뿐입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나는 나의 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정적이지 않고 무한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나의 집, 그게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방을 찾는다는 것, 우리는 모두 딱, 이 자리에 있습니다.

 

백척간두에서 뛰어내리거나, 집안에서 집을 찾는 것이나, 자신의 머리를 찾는 일이나, 거울 속에서 자신을 찾는 일이나, 모두 똑같은 이 하나의 일입니다. 무엇을 의지해 있다면, 또 어떤 것을 찾고 있다면, 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혹시 더 나은 어떤 것을 욕망하고 있다면, 결국 이 하나를  보물처럼 따로 떼어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보물인데, 떼어낼 필요도 없고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내던질 필요도 없고 오로지 이 하나, 이게 분명하면, 손에 쥐지 않아도 모든 게 싹 들어옵니다. 단지, 이뿐입니다. 이것, 정말 쉽습니다. 장대에서 뛰어내리기, 끝내 쥐고 있는 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뛰어내리면 진짜 허공이 숨을 쉽니다. 이제껏 자신이 숨을 쉬었는데 허공이 숨을 쉬게 해줍니다. 이게 모든 것을 살리고 피가 돌고 저절로, 오로지 이 하나뿐입니다. 오직 이 하나!

 

(무문관) 제47칙 도솔의 세 관문

도솔종열화상은 세 개의 관문을 만들어 배우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번뇌망상을 헤치고 불법을 찾음은 다만 본성을 보기 위함인데, 지금 스님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면 비로소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는데,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벗어나는가?

삶과 죽음을 벗어났다면 곧 갈 곳을 아는데, 육체가 흩어지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

 

 

 

[무문의 말]

 만약 세 가지 질문에 알맞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곧장 곳곳에서 주인이 되고 인연을 만나면 근본이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조리가 잘 되지 않은 거친 음식은 쉽사리 배가 부르니, 오래오래 잘 씹어 먹어야 배고픔을 면하리라.

 

[군소리]

본성은 어디에 있나?

오늘은 춥구나.

죽음을 어떻게 벗어나나?

오늘은 춥구나.

벗어나 어디로 가나?

오늘은 춥구나.

 

 우리가 궁금해하는 게 죽음이고, 그 이후는 어떻게 될까? 이것이지요. 희망이라는 것은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헤쳐나갈 수 있는 꿈을 주는 것처럼, 사후의 세계가 나에게 편함과 이상적인 유토피아 세계, 천국, 천당, 극락세계, 하늘나라 등등 그런 곳에서 살게 해준다? 그게 종교의 굴레입니다. 불안함이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운 세계, 죽으면,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거나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남습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습니다. 기억 속에 존재했던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또 기억을 간직했던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의 죽음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요? 자신이라는 게 사라지는 것, 잊혀지는 것, 없어지는 것, 맞죠? 이 육체가 '자신'이라고 믿고 의지해온 사람은 늙어서 병들고 죽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더 이상 육체에 의지 못하니까 어떻게 그런 이상적 세계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분명 우리는 이 육체가 태어나면서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살아있는 동물들은 다 그렇습니다. 똑같은데 유독 인간만이 죽음을 슬퍼합니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난다는 생각, 사랑하는 가족과 돈, 명예, 아름다웠던 날들,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죽음을 슬퍼합니다. 아니, 그 모든 것들이 허망한 것을 알기 때문에 좀더 진실하게 살지 못 했던 후회감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은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은 정말 진실하게 있는 것입니까? 죽음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는 매 순간 이 생각에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 때문에 진실을 왜곡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진실하다도 믿기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가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슬프게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용기 있게 하거나 그렇게 만드는 이 생각의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이게 공부의 시작이지요. 일단 생각들은 수시로 상황에 맞춰서 변합니다. 상황이라는 것은 자신이라는 이 육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자기중심적이지요. 생각이라는 것은 객관적일 수가 없습니다. 객관적, 주관적이라고 하든 모두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만약 어떤 생각을 하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이라고 자신에게 지금 당장 반문을 해보면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뭔지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육체는 눈에 보이는데, 자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몸에? 그럼 몸 어디에 있습니까? 심장에, 머리에, 눈에, 손에, 발에, 팔에, 오장에, 마음에, 어디를 찾아봐도 자신이라고 할 것은 없는데, 분명 자신은 몸에 있다고 합니다.

 

분명 생각도 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다하는데, 자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은 무엇입니까? 자신이라고 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 생각, 자신이라고 하는 이것은 이 육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면, 반드시 '나'의 선호도에 따라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거나 나의 의도에 따라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겠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이 육체가 태어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자신이라는 것, 없었습니다. 태어나기 전이나, 태어난 후에나, 죽은 후에나 여전히 변함없이 딱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생각을 하기 전의 일이고 생각을 하면서도 모르는 일이며, 죽은 후에도 여전히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면 아까 말도 안 되는 정해진 운명 이야기처럼, 만들어진 사후의 세계, 종교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한 개라도 자신을 벗어나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모두가 단 이 하나의 이 일, 이것이 분명하다면 세 가지 관문은 삼 천 가지가 되더라도 단 하나의 관문이 있을 뿐입니다. 이 관문, 이게 자신의 실체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모습, 원래 있었던 것, 지금도 있는 것,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없이 있는 것, 딱 한 번만 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실 문은 없는 것입니다. 들어오고 보니 누구도 나가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만 이 하나의 일, 이뿐입니다. 이것입니다. 영원히 배고픔을 면하고 풍족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실재, 지금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곳에 있다면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지금 이게 분명해야지, 또 다른 곳이 있다면 그것은 나눠지는 것입니다. 항상 불이, 이 하나의, 이 한 개의 진실, 이것이 지금 또렷하고 분명해야 됩니다.

 

(무문관) 제48칙 건봉의 외길

건봉 화상에게 어떤 승려가 물었다.

"'온 우주의 부처님들이 한 길로 열반문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 그 길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건봉이 주장자를 집어 들어 한 획을 긋고 말했다.

"여기에 있다!"

 

뒷날 그 승려가 운문에게 다시 가르침을 청했는데,

운문은 부채를 집어 들고 말했다.

"부채가 폴짝 뛰어 삼십삼천으로 올라가 제석천의 코를 쥐어박고, 동해의 잉어를 한 방 때리니

비가 물동이를 쏟아붓듯이 내린다."

 

[무문의 말]

한 사람은 깊고 깊은 바다 밑에서 키로 흙을 까불어 먼지를 일으켰고,

한 사람은 높고 높은 꼭대기에서 흰 파도를 일으켜 하늘에 넘치게 하였다.

 

함정에 몰아넣어 꼼짝 못하게 하기도 하고 자유롭게 놓아주기도 하면서,

각자 한 손을 내밀어 종승을 부축해 세웠지만,

 

흡사 곱사등이 두 사람이 딱 마주친 것과 같으니,

세상에는 분명 꼿꼿이 선 멀쩡한 사람은 없는가 보다.

바른 눈으로 살펴보면, 두 노인이 모두 아직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

 

 

[무문의 송]

아직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미 도달하였고

아직 혀를 움직이기도 전에 벌써 다 말했다.

설령 한 수  한 수에서 기선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다시 위로 향하는 한 개 구멍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군소리]

열반으로 가는 하나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찾으면 없고 찾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에 이르면 모두들 꼼짝달싹도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문득 해결될 날이 있으리.

 

 

 법을 얘기한다는 자체가, 법을 보여준다고 하는 행위가, 어떤 말이, 생각이, 이 모두가 먼지를 일으키고 파도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런 어떤 모양에 따라가지 않는다면 먼지도 흙이고 파도도 역시 바닷물인 것입니다. 다른 게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이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온 우주의 부처님들이 한 길로 열반문에 들어간다, 이게 바로 한 길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마치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종이 한 장 안에 다 있는 것이지요. 그런 것처럼 어떤 길이든 이 안으로 다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늘 이 자리, 이것입니다. 항상 지금 있는 이것뿐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 게임을 많이 하는데, 역시 열심히 해서 레벨을 올려도, 손가락은 항상 폰 화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터치하듯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자리가 어디냐? 이렇게 물으면 어디라고 표시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누구도 이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라고 하는 정해진 곳이 있지 않고 이것이라는 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옛말에 어떤 사람이 뱃전에서 칼을 떨어뜨렸는데 바빠서 작은 칼로 뱃전에 떨어뜨린 곳을 표시해두곤 목적지에 다다랐는데, 다시 그 칼을 찾으려고 하니 어딘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행동이, 생각이 그렇습니다. 뱃전에다 표시를 해놓는 것,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라, 생각으로 이해하지 마라, 이렇게 말해도 모릅니다. 깨치고 나서야, 그 말이 방편인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이 껌을 씹다가 떨어뜨려서 밟다가 다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일을 합니다.

 

부처님도 선지식도 다만 자신이 공부해온 경험대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것을 알고 말하지만 결국은 '이것'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오직 진리는 이 하나, 이것뿐임을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봐도 이 진리는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건봉이 주장자를 들고 한 획을 쭉 그었을 때, 그때 바로 보면 됩니다. 이게 바로 모든 부처님이 들어가는 열반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 하니라, 그냥 눈앞에 획 그을 때, 이것입니다. 운문이 부채를 집어 들 때, 이것입니다. 부채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누가 듣고 있습니까?

 

항상 지금입니다, 지금 누가 살아있고 지금 누가 있고 지금 누가 생각하고 지금 누가 말하고 지금 누가 옛이야기를 하면 누가 지금 읽고 있습니까? 자신, 이 자신은 무엇입니까? 자신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입니다. 모든 생각이 없다면 자신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 생각이 없다면 자신은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든 안 하든 분명 무언가 있습니다. 생각을 하면 하는 대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하는 대로, 반야심경에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이렇게 나옵니다. 무의식계도 역시 '식'입니다. 생각을 안 한다는 자체도 역시 '식'일 뿐입니다. 다만 '식'일 뿐이지만 역시 "'식'일 뿐이다."하는 이것은 결코 '식'이 될 수 없습니다.

 

말을 하면 곱사등이 될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곱사등이더라도 자신은 곱사등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선지식뿐만 아니라 누구든 곱사등은 없습니다. 법은 오직 이 하나뿐, 여기에는 언어나, 모양이나, 색수상행식, 어떤 것을 나누고 비교할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누구에게나 골고루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왜? 그런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한결같이 이대로 딱 알맞게 있습니다. 똑같이, 그래서 위아래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입니다. 이것을 보라고 조사 스님이나 선지식이 늘 두드리고 때리고 거꾸로 세우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순간적으로 생각으로 돌아갈 '그 찰나'를 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식의 '자비'입니다. 진심으로 생각의 잣대,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형식을 따라가지 않으면 반드시 볼 날이 옵니다. 왜? 한쪽으로 빠져서 이것을 못 볼 뿐이지, 누구나 다 모두가 이 문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문관, 문이 없는 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쓸데없는 책이라고 보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각양각색입니다. 자신의 안목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읽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그려진 광고판을 보면, 그 그려진 사람이나 동물의 눈이 쳐다보면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살아있는 눈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제껏 만들어진, 교육된, 정해진 삶, 원하는 삶에 대한, 자유에 대한 그런 열망을 가진 눈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런 만들어진 티끌을 버린 자연의 눈, 원래 있었던 눈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 눈은 이 우주의 눈과 똑같습니다. 한시도 잠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한 몸이고 하나였고 지금도 역시 이것뿐입니다.

1. 스피노자 범신론 불교와 일맥상통

 

스피노자(Spinoza, 1633~1677)라는 철학자를 아시나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철학자로 범신론(pan theism)을 주장한 철학자로 유명하지요. 범신론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pan)’이 ‘신(theos)’이라고 주장합니다. 서양 정신을 지배했던 기독교에 따르면 신은 세계만물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옳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신보다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지요. 신은 만드는 자이고, 인간 등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니까요. 인간을 폄하하는 기독교적 사유를 붕괴시키기 위해, 다시 말해 인간의 능동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범신론을 주장한 겁니다. 스피노자나 기독교 전통 모두에서 신은 능동적인 생산자를 의미하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이 신이라는 주장은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논의일 수 있습니다.


집착과 번뇌에 사로잡힌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부처가 된다는 불교 전통이 스피노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불교 전통도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능동성과 생산성을 부여하니까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실체(substance)’와 ‘양태(mode)’라는 스피노자의 개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간단한 비유로 이 개념들을 설명해보도록 할까요. 물이 가장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은 자연계에서 세 가지 상태로 있을 수 있습니다. 0℃ 아래에서는 얼음이란 고체로 있고요, 0℃에서 100℃ 사이에서는 물이라는 액체로 있습니다, 100℃ 이상에서는 수증기라는 기체로 존재하지요. 여기서 그러니까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라는 세 가지 상태가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반면 고체, 액체, 그리고 기체라는 상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H₂O가 바로 ‘실체’에 해당합니다.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었거나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고 해서, H₂O라는 실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H₂O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물이거나 얼음이거나 아니면 반드시 수증기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내 눈 앞에 물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H₂O이고, 얼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H₂O이고, 수증기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H₂O라는 겁니다. 이제 실체와 양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해지셨나요. H₂O가 얼음, 물, 혹은 수증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는 다양한 양태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체와 양태는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른 겁니다. 동양 전통에서는 이것을 ‘이이일(二而一), 일이이(一而二)’라고 표현하지요. 아마 중국 최대의 형이상학자 주희였다면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를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이라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서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섞여 있지도 않다’는 것이지요.


2. 실체, 현상 떠나 존재 할 수 없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Mahāyāna-śraddhotpāda-sāstra)’이란 책은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인도보다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불교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불교 이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선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2세기 경 인도 중부에서 활동했던 이론가 마명(馬鳴, Aśvaghoṣa)이 지었다고 알려진 책인데요, 지금은 한문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원효(元曉, 617~686) 스님 때문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책이지요.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는 지금까지 나온 주석서들 중 14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승기신론’의 어느 측면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던 선불교의 선사(禪師)들마저 매료시켰던 것일까요. 하나의 마음에는 두 가지 양태가 가능하다는 발상이었습니다.


‘대승기신론’은 시작부터 하나의 마음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합니다. 한 번 직접 읽어볼까요. “일심(一心)이란 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문(門)’이라는 말은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양태’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승기신론’은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이라는 ‘실체’에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는 겁니다.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이 바로 그것이지요. 있는 그대로 자신과 세계를 보는 부처의 마음이 진여의 마음이라면, 집착 때문에 자신과 세계를 왜곡하여 항상 일희일비하는 일반인의 마음이 바로 생멸의 마음입니다.


부처의 마음이나 일반인의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란 실체의 두 가지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다시 H₂O를 비유로 들어볼까요. 당연히 물을 얻으려고 얼음을 없애서는 안 됩니다. 얼음이 없어지는 순간, H₂O도 사라질 테니까요. H₂O가 사라진다면, 우리가 아무리 물을 얻으려고 해도 물을 얻을 수가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부처의 마음을 얻으려고 일반인의 마음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인의 마음을 제거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도 사라질 겁니다. 마음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부처의 마음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왜 선사들이 ‘대승기신론’을 좋아했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나 ‘직지인심(直指人心)’에는 하나의 마음, 그로부터 파생되는 부처의 마음과 일반인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불립문자를 이야기해도 제자를 가르치거나 중생들을 이끌려면, 언어적 표현은 방편으로 불가피한 법입니다. 비로 이것이 선사들이 ‘대승기신론’에 열광했던 이유였던 겁니다.


3. 생멸의 마음은 황당무계한 상상

 

‘대승기신론’이라는 무기를 몸에 숨기고 있다면, ‘무문관’의 48번째 관문을 지키고 있는 건봉(乾峰) 스님이나 운문(雲門, 864~949) 스님을 전혀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봉 스님은 생몰년대가 확실치는 않지만 운문 스님과 거의 동시대 사람이라고 합니다. 불행히도 건봉 스님과 운문 스님을 우리보다 먼저 만난 어느 무명 스님은 별다른 무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치열하게 노력했던 그 스님은 ‘수능엄경(首楞嚴經, Śurāṅgamasamadhi-sūtra)’에 등장하는 한 구절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부처들은 하나의 길로 열반문에 이른다(十方薄伽梵, 一路涅槃門)”는 구절입니다. 무명 스님은 ‘하나의 길’을 알고 싶은 겁니다. 그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자신도 열반에 이를 수 있으니까요. 마치 가고 싶은 곳에 이를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명 스님의 절절한 질문에 건봉 스님은 허공에 주장자로 한 획을 긋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있다.” 여기서 사실 무명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주장자로 허공에 새겨진 한 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아니 사실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순간 무명 스님의 마음은 공중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주장자에 마음이 쏠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건봉 스님은 무명 스님의 마음을 끌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우렁찬 고함보다 더 커다란 울림을 가진 침묵의 사자후를 던지고 있는 겁니다. “네가 찾는 하나의 길이란, 바로 네 마음이다. 지금 공중의 한 획을 보고 있는 마음, 그 활발발(活潑潑)하게 살아있는 마음! 알겠느냐! 이 멍청아!” 그렇습니다. 지금 건봉 스님은 무명 스님이 가지고 있는 마음 중 부처의 마음을 바로 보여주고 있었던 겁니다. 진여의 마음을요.


불행히도 여기서 무명 스님은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격입니다. ‘수능엄경’의 구절도 난해하기만 한데, 이제 더 난해한 가르침도 받았으니까요. 도대체 공중에 주장자로 그어진 그 한 획은 무슨 뜻일까. 건봉 스님의 제스처를 이해하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을 때, 다행히 운문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연히 건봉 스님의 한 획의 의미를 물어보았겠지요. 그러자 운문 스님은 이번에는 주장자가 아니라 부채를 들고 이야기합니다. “이 부채가 뛰어올라 33천(天)에까지 올라가 제석천(帝釋天)의 콧구멍을 찌르고, 동해의 잉어를 한 방 먹이면 물동이가 기울어지는 것처럼 비가 엄청나게 올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일입니다.

 

 

 

 

 

 

 

 

 

 

무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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