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7. 서응동호
이슬 같은 인생 어서 바삐 무상 깨치시라
석전.금파.진응스님 문하서 공부한 강백
조선불교 수호.근대 한국불교 ‘초석’ 놓아
석전(石顚).금파(錦坡).진응(震應) 스님 등 대강백 문하에서 교학을 연찬하고 평생 후학 양성을 위해 정진했던 서응동호(瑞應東濠,1876~1950)스님. 조선불교와 계율 수호를 위해 1941년 3월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증명법사로 참석하는 등 근대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선지식이다. 손상좌인 수진스님(부산 해인정사 주지.전 해인사 강주) 증언과 서응스님의 자필 문집을 중심으로 행장을 살펴보았다.
○ … 10대 중반에 불연(佛緣)을 맺은 스님은 10년 가까이 고성 옥천사, 함양 벽송사, 산청 대원사, 함양 영원사, 남원 천은사 강원에서 내외전을 익혔다. 통사(通史)와 고문진보(古文眞寶) 등 한학 외전을 비롯해 <화엄경> <기신론> <원각경> 등 경학을 깊이 공부했다.
지필(紙筆)이 귀했던 시절, 더구나 시골 절에서 종이와 먹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은 힘들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彭�. 떡갈나무 잎을 종이로, 물을 먹물로 삼아 글을 익혔다. 잎사귀가 넓은 떡갈나무 잎에 먹 대신 물을 찍은 붓으로 글을 썼다. 물을 머금지 못하고 뱉어내는 떡갈나무 잎은 스님에게는 너무 소중한 도반이었다. 이마저 전념할 수는 없었다. 대중 소임을 봐야 했기 때문.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는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경전을 외웠다.
○… 서응스님의 상좌인 문성스님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스님이 피를 쏟은 <능엄경>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어디 갔는지 없어졌다.” 서응스님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 했는지 알 수 있는 또 다른 증거이다. 음식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영양 상태가 좋을리 없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공부하니 코피 쏟는 일이 잦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능엄경> 곳곳에 스님의 혈흔이 남겨졌던 것이다. 경학 연찬에 몰두했던 스님은 어느 날 엄청난 양의 코피를 쏟고 쓰러진 뒤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이때부터 무소부지(無所不知)의 경계에 들었다고 한다. ‘지식의 세계’가 아닌 ‘지혜의 세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 … 스님은 염불수행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옥천사 청련암에 머물며 만일계(萬日契)를 만들었다. 스님의 자필 문집에는 만일계를 결성한 뜻이 실려 있다. ‘만일계원 모집문’으로 ‘화주 채서응당은 고백하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요즘 표현으로 옮겨 요약했다. “우리 인생이 이 고세상(苦世上)에 살다 필경 이 몸이 죽은 후에 괴로운 세상에 다시 나지 말고, 저 즐겁고 좋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뜻으로 30여 년간 장원(長遠)한 시간에 1만일을 한정하고, 염불하여 법사스님 모셔놓고 날마다 네 번씩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게 하오. 깨닫는 해마다 춘추(春秋) 두 번씩 아미타불님 전에 크게 불공을 잡수시고 … ”
○… 일본 제국주의는 1911년 사찰령을 공포했다. 31본산을 정해 조선 사찰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다. 당시 옥천사 주지였던 서응스님은 총독부가 옥천사를 본산으로 지정하려는 것을 막았다. 경성에서 열린 주지회의에 참석했지만 본산 지정을 ‘극구 사양’하여 왜색불교에 동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 서응스님은 <화엄경>의 진수가 담긴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을 즐겨 암송했다. 손에는 언제나 108 염주가 들려 있었다. 스님은 보현행원품을 염송하는 뜻을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수행자는 자기 수도를 통해 보현행자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도(道)를 닦으면 뭐하냐. 보현행자의 십원(十願)이 불가능하면 소용없다. 조선불교도 보현행자가 나와야 희망이 있다.” 강원에서 학인을 지도할 때도 하루에 최소한 4시간은 참선에 집중하며 선교(禪敎)가 둘이 아님을 몸소 실천했다.
○ … 스님의 자필 문집에는 무상한 삶에 집착하지 말고 정진할 것을 당부하는 글이 실려 있다. 직접 지은 무상가(無常歌)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여보시오. 동포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인생이 초로(草露)같고 … 어서 바삐 무상(無常)을 깨치시고. 어서 염불 속히 하여 사바세계 고(苦)세상을 헌신 같이 보고, 구품연대 저 극락을 어서 빨리 갑시다. … 풀끝에 이슬 보오, 해 솟으면 없어지고, 춘삼월 저 꽃 보소, 불우 심일 못다 가서 낙화(洛花)되어 떨어지오. … 이 말하는 이 사람도 어제 같이 청년인데, 오늘 벌써 백발이네.”
○…서응스님은
석전 박한영(1870~1948) 스님과는 스승과 제자였지만, 나이가 6살 밖에 차이 나지 않아 평생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서응스님이 구암사 강주를 지내고, 1941년 유교법회에 참석한 사실도 두 스님의 인연을 보여준다.
1939년 삼각산 개운사에 개설된 대환계단(大環戒壇)의 전계아사리를 석전스님, 동호스님은 갈마아사리를 맡기도 했다. 이때 교수아사리는 일우진룡스님, 존증아사리는 한암중원스님과 만암종헌스님이 맡는 등 당대 고승이 한자리에 모였다.
○… 1950년 상좌인 문성스님이 옥천사 주지로 있었다. 문성스님은 당시 청련암에 계신 서응스님을 옥천사 큰절로 모셨다. 노환(老患)으로 몸이 불편한 은사를 주지실에 모시고, 당신은 옆방에서 지냈다. 효심(孝心)이 깊었던 문성스님은 지성으로 간병했다. 예전에는 대중이 모여 발우공양을 하더라도, 산중 어른 스님을 일일이 찾아 뵙고 문안 인사를 올리는 예법이 있었다. 문성스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다.
그러던 8월21일. 이날도 새벽 예불을 모신 후 스승 방을 찾았다. 문 밖에서 “스님, 스님”이라고 불렀지만 방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불러도 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응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고개를 숙인채 원적에 들어 있었다. 좌탈입망(座脫入忘)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다. 평생 후학을 지도하며 강(講)을 했던 서응스님은 임종게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보여주었다.
부산=이성수 기자
■ 스님이 남긴 글 ■
○… 서응스님은 한시로 지은 300여편의 글을 담은 문집을 남겼다.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담은 문집에는 조선불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글도 실려있다. 이 가운데 ‘탄조선불교(嘆朝鮮佛敎)’와 ‘승려단체력(僧侶團體力)이란 글을 전 해인사 강주 수진스님의 도움을 받아 소개한다.
嘆朝鮮佛敎(탄조선불교)
嗚如之何如之何(오여지하여지하)
將來佛法如之何(장래불법여지하)
僧侶七千皆變俗(승려칠천개변속)
遁還天理莫奈何(둔환천리막나하)
오,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
장래의 불법을 어찌하오리까. /
(조선의) 승려 7천명은 모두 속인처럼 변했으니 /
돌아가는 대자연의 섭리를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僧侶團體力(승려단체력)
吾家生活一端和(오가생활일단화) 意見不同萬事差(의견불동만사차)
叢林制度爲公共(총림제도위공공) 超提規正不許私(초제규정불허사)
海成自體憑多水(해성자체빙다수) 蓬直因緣倚衆麻(봉직인연의중마)
蜂合團成威力(봉채합단성위력) 獨求名利女獨蝸(독구명리여독와)
절집 생활은 일단 화합이니 / 의견이 같지 아니하여 만사가 차이가 나거든 /
총림의 제도로 공의를 삼고 / 규정을 뛰어 넘은 사사로운 의견은 적용하지 않는다 /
바다가 바다를 이루는 자체는 수많은 물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
쑥이 곧게 자라는 인연은 수 많은 삼을 의지하기 때문이니 /
벌과 전갈이 합세하여 단체를 이루면 위력을 발휘하고 /
홀로 명예와 이익을 구하면 저 홀로된 달팽이와 같으리라.
■ 행장 ■
8대 강원 강주로 후학 양성
문성 - 수진스님 법맥 계승
서응스님은 1876년 2월13일(음) 경남 고성군 개천면 원동리에서 태어났다. 원동리는 옥천사 인근 마을로 스님이 옥천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속성은 채씨(蔡氏)였다. 양친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서응스님이 어느 시기에 출가했는지 정확한 명문은 없다. 단지 1892년 12월 옥천사에서 용명(龍溟)스님에게 통사를 수학하고, 1894년 영해(影海)스님에게 고문진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0대 중반에 출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옥천사 영해스님에게 사집과(四集科)를 수료한 것이 1895년 12월로 이때 스님의 세수는 19세였다. 이같은 기록으로 볼때 20세가 되기 이전에 출가사문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외전과 기초 교학을 익힌 스님은 이후 제봉.석전.금파.진응 스님 등 대강백 문하에서 <능엄경> <화엄경> <기신론> <반야경> <화엄경> 등을 두루 익혔다.
이후 스님은 함양 영원사(1902), 순창 구암사(1904), 고성 옥천사(1905),양산 통도사(1909, 1920), 합천 해인사(1915), 김천 청암사(1916), 동래 범어사(1925), 철원 심원사(1939) 강원 강주를 지냈다.
서응스님 상좌는 조계종 초대 감찰원장을 지낸 문성(汶星)스님이 있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남고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이해도(李海道) 선생이 있다. 서응스님이 남긴 문집 등 유품은 문성스님 상좌인 수진스님이 보관하고 있다.
서응스님은 1950년 8월21일(음) 고성 옥천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4세였다.
[출처 : 불교신문 2429호/ 2008년 5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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