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거심(高擧心)---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는 마음상태 또는 남에 대해 자신을 높이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 고고(苦苦)---삼고(三苦)의 하나. 육체적 고통.---→고(苦, 빠알리어 dukkha), 삼고(三苦) 참조.
* 고골관(枯骨觀)---관법수행의 하나로서 백골관(白骨觀) 혹은 골상관(骨想觀)이라고도 한다.
오정심관(五停心觀) 중 부정관(不淨觀)과 관계가 깊다. 인간 육체의 각 부분이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관찰해
탐욕의 번뇌를 없애는 수행법이 부정관인데, 고골관이란 앙상하게 뼈만 남기고 썩어버리는
시체의 모습을 관함으로써 욕망에서 벗어나 인생무상을 터득 하고자 하는 수행 방법이다.
죽음 뒤에 남는 하얀 뼈,
즉 백골을 떠올리며 자기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으로 위빠사나와 같은 부류이다.
사념처관(四念處觀)도 위빠사나의 한 부류이다. 특히 사념처관 중에 신념처관(身念處觀)이 백골관과 가깝다.
신라 승려 자장(慈藏)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닦았다는 고골관(枯骨觀)이나 부정관(不淨觀)의 ‘관(觀)’도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는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명상법으로서,
한역에서는 ‘관(觀)’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이란 지혜로써 객관의 경계를 관찰해 비추어 본다는
뜻 으로, 가령 부정관이라 하면 인간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생각으로 관해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
→오정심관(五停心觀), 부정관(不淨觀), 사념처관(四念處觀) 참조.
* 고구(苦俱, 빠알리어 dukkha sahagata)---고구(苦俱)란 고(苦)를 생기게 하는 원인으로써 인간, 자연 현상,
이데올로기 등을 말한다. 또는 고와 더불어 일어나는(느끼게 하는) 감정을 고구(苦俱)라 한다.→사구(捨俱) 참조.
* 고구정녕(苦口丁寧)---일반에서는 잘 쓰지 않는데, 큰 스님들이 가끔 쓰는 말이다.
고구(苦口)란 입이 쓰도록(입에서 쓴 내가 나도록/입이 닳도록)이라는 뜻이고, 정녕(丁寧)은 부탁하다,
당부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구정녕(苦口丁寧)은 ‘입이 쓰도록 당부하다’가 된다.
정녕(丁寧)과 유사한 단어에는 분부(吩咐)、부촉(咐囑) 등이 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해 간언(諫言)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 정녕(丁寧)에서 정(丁)은 단단함을, 녕(寧)은 정성스러움을 뜻한다.
* 고균비구(古筠比丘)---중국 원(元)나라 몽산(蒙山)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몽산 덕이(蒙山德異, 1231~1308) 참조.
* 고금역경도기(古今譯經圖紀)---후한 명제(AD57~75) 때부터 당 태종(626~649) 때의 현장(玄奘)까지
각각 한역한 경론을 서술한 문헌으로 당 나라 때 정매(靖邁)가 편찬했다. 총 4권임.
* 고기송(孤起頌)---산스크리트어 Gatha를 한역한 말, 음역해서 게타(偈陀) 혹은 가타(伽陀)라고도 한다.
---→가타(伽陀), 게송(偈頌) 참조.
* 고달사지(高達寺址)---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래산 줄기인 우두산(일명 혜목산) 아래에 있는 사적
제382호의 거대한 절터이다. 처음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봉황암(鳳凰庵)이란 이름으로 창건돼 있다가,
고려에 들어와서 광종의 왕사인 원종(元宗;869~958) 대사가 우거한 이래 국가의 비호를 받아 거찰
고달사(高達寺)가 됐다. 남한강변의 여러 폐사지 중 원주 부론면 법천사지(法泉寺址)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절터의 하나이다.
원종 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했다.
법명은 찬유(璨幽)이고,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元宗)’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慧眞)’이라 내렸다. 그리하여 고달사는 고려 5대 사찰의 하나였다고 전하며,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 해서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과 더불어 대표적인 수행도량인 삼원(三院)의 하나로 대찰이었다.
희양원이란 지금도 건재한 경북 문경 봉암사(鳳巖寺)를 일컬었고, 도봉원이란 현재 도봉산 도봉서원 자리에 있었던 영국사(寧國寺)를 일컬었으며, 이들 세 선원(禪院)은 선풍이 뛰어나고, 선후배간의 법통계승이 명확해 광종의 특별한 관심과 칭송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달사는 그 후의 기록이 전혀 없어 그토록 융성했던 절이 언제 어떻게 폐사됐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폐사된 것으로 전해온다. 현재 남아있는 주요문화재로는 신라 말
고승 원감(圓鑑;787~869) 국사 현욱(玄昱)의 부도로 추정되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보물 제6호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 보물 제8호 석불대좌(臺座).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 등이 있다. 그러나 보물 제282호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경복궁에 옮겨져 있다가 현재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안치돼 있다.
* 고두례(叩頭禮)---머리(頭)를 조아린다(叩)는 뜻이다. 고두배(叩頭拜) 또는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한다.
아무리 무수히 절을 한다 해도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의 뜻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삼배 뿐 아니라 108배를 비롯해 모든 절의 마지막 절 끝에 머리를 땅에 다시 한 번 조아리는 것을
‘고두(叩頭)의 예’라 한다. 이는 자신의 발원(發願)을 빈다 해서 유원반배(唯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 하고픈 간절한 심정을 여기서 마치게 되는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고, 지극한 존경심에 대한
여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님께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마지막 큰 절을 완료해 몸이 오체투지의 상태가 되고, 두 손바닥이 부처님을 받들기 위해 위로 향한 자세에서
고두를 하기 위해서는 일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손바닥이 땅을 향하도록 한 다음 엎드린 자세에서
팔꿈치를 들지 말고 머리와 어깨만을 들었다가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데,
머리를 들었을 때에 시선을 그대로 땅에 두어야 한다.
머리와 어깨만을 잠깐 들었다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 단순한 동작으로 할 수도 있고,
머리와 어깨를 약간 들고 팔꿈치를 땅에서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손으로 합장자세를 취했다가 손을 풀고
다시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대는 방법도 있다.
* 고락중도(苦樂中道)---「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 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고락중도란 낙천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영원주의나 비관적이고 고행주의적인 허무주의는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견해에 속하므로 잘못된 쾌락주의나 고행주의를 버리고 연기법적인 팔정도의 길을 가는 것이 고락중도이다.
초기불교에서 연기설과 관련된 고락중도는 다른 중도사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고락중도는 일반적인 인과관계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수행적 인과관계에 관련된 특수한 속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 고려불교(전기와 후기 불교의 차이)---고려불교를 전체적으로 볼 때, 태조 당시부터 기복과 호국불교라는
특색을 가지게 된 신불사상은, 한편으로는 <고려대장경-초조대장경, 속장경, 팔만대장경>과 같은 거대한
민족문화 사업을 이룩해 놓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복적 속신적(俗信的) 저속성이 시대정신의 선도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해, 가끔 요승(妖僧)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고 불법을 흐리게 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볼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이전에는 계율종 · 법상종 · 열반종 · 법성종 · 원융종 · 선적종의
6종파(宗派-5교종과 선종)가 학종(學宗)으로 존재했는데, 이를 5교9산으로 통칭했다.
대각국사 이후에서 고려 말에 이르기 까지는 남산계율종(南山戒律宗) · 법상종(法相宗) · 중도종(中道宗) ·
화엄원융종(華嚴圓融宗) · 시흥종(始興宗)의 5교종과 조계선종(曹溪禪宗), 그리고 천태종을 합쳐서 7종파로
됐는데, 이 7종시대는 5교양종이라 통칭했다. 6종 또는 7종의 고려 전 시대를 통해 9산선문 에서는
많은 선장(禪匠)을 배출해 크게 번성했다. 특히 나말과 고려 초는 선종의 전성기라고 할 만 했다.
고려 초기 불교는 균여(均如) 대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이 성행했다. 귀족들이 지원해 개경 부근 흥왕사(興王寺)와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 현화사(玄化寺)가 세워졌고, 유식계통의 법상종(法相宗)이 융성했으나
여러 종파로 분열돼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다.
고려의 천태종은 고려 초기에 법안종(法眼宗-선종의 일파) 계통의 승려들이 대거 합류함으로써 중국과는 달리
선종에 속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천태종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조계 혜능 이래의 전통적 선종을 고수한
승려들이 자신들을 조계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12세기에 들자, 교종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의 천태종과 조계종으로 개편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등장해 분열된 불교종파 통합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흥왕사를 본찰로 해 화엄종 중심의 교종 통합 운동을 전개했으며,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에
국청사(國淸寺)를 건립하고 선종통합과 천태종을 창시함으로써 다시 불교가 융성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의천이 죽은 뒤 후대에 오면서 개경(開京) 중심의 귀족불교로 변질돼가자, 이에 대한 반발로 지눌(知訥)을 중심으로 한 선종이 교종인 천태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눌의 결사운동과 선종을 중심으로 한
통합운동으로 다시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불교계를 비판했으며,
선교일치를 완성시켰다.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선교병수(禪敎倂修) 삼문이 바로 그것이다.
지눌에 의한 조계종으로 내면적 통일은 됐지만 구산문파가 열립해 자파만 옹호함을 능사로 삼으니,
그때 보우(普愚, 1301-1382)가 구산선문의 병폐를 우려하고 피아의 우열을 없애기 위해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9산(山)을 통합하려고 했고, 그 취지를 공민왕에게 헌언(獻言)해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지눌에 의해 한국 특유의 종지가 확립돼 내면적 통일을 봤고,
공민왕 5년 보우에 의해 외면적으로 통일된 조계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 선종의 중심세력은 선문9산파 중 가지산파(迦智山派)였는데 이 파의 보우(普愚)와 혜근(慧勤)이
중국에 가서 선종인 임제종의 선법을 받고 돌아오면서 한국에서 임제종이 시작됐다.
보우는 선의 지적 이해를 철저히 배격하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보우가 불교교단을 다시 정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그리고 이후 원(元)의 간섭 시기에 이르러 불교계는 개혁의지가 퇴색하고, 사원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며, 상업에 관여하기도 해 부패가 극심해진다. 그리하여 심지어 술장사와 고리대금업 까지 하다가
결국 당대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조차 버림받게 됐다.
한편 유학에 있어서는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이 대두되고, 이를 배경으로 한 정치세력으로 신흥사대부 계층이
등장해 경제개혁을 통한 체제변혁을 추진했다. 이에 즈음한 불교는 그에 상응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부패와 정치권과의 결탁, 신돈(辛旽)의 발호 등으로 쇠퇴하게 됐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조선을 건국한 유학자들에 의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밀려나게 되고, 임제종의 법맥만이 혼수(混修)-무학(無學)-기화(己和)
등에 의해 겨우 조선에 이어졌다. ---→수선사(修禪社) 참조.
* 고법지인(苦法智忍, 산스크리트어 duḥkha-dharma-jñāna-kṣānti)---고법지인(苦法智忍)을 고법인(苦法忍)
이라고도 하는데, 욕계의 고제(苦諦)를 명료하게 주시해 그것에 대한 미혹을 끊고 확실하게 인정하는 지혜이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번뇌론과 수행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특히 견도(見道)의 증득과 관련해 사용된다.
견도(見道)는 4성제를 관찰해 견혹(見惑)을 끊는 계위로 이 이상의 계위에 이른 유정을 성자 또는 성인이라고
한다. 부파불교 수행계위인 성문의 4향 4과에서는 수다원향(須陀洹向=예류향/預流向)에 해당하고,
대승불교 유식 유가행파의 5위(五位) 수행계위 에서는 제3위인 통달위(通達位)에 해당하며,
대승불교 일반의 52위(五十二位)의 보살수행계위 에서는 초지(初地),
즉 10지(十地) 가운데 첫 번째 계위인 환희지(歡喜地)에 해당한다.
고법지인(苦法智忍=고법인/苦法忍)은 고법지(苦法智)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데, 고법인(苦法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법지(苦法智)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고지(苦智)는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를 아는
무루지를 말하는데, 고법지(苦法智)는 고지(苦智)의 일종이다.
* 고봉 경욱(高峰景煜, 1890~1961)---법명이 景煜(경욱)으로 대구 출신이다. 조선 세조시 사육신 가운데
한 분인 박팽년의 후손으로 15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했다고 한다. 1911년 경북 상주 남장사(南長寺)에 입산
이해봉 선사를 은사로 득도하고, 경욱(慶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5년 팔공산 파계사 선실에서 좌선 중 홀연히 오도 견성했다고 한다.
일제 때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왜경에게 체포된 후 마산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내원암(內院庵)을 거쳐, 예산 덕숭산 정혜사 조실을 지냈고, 마곡사 은적암, 미타사 조실 등을 거쳐
서울 수유동 화계사 조실로 계시다가 1961년 세수 72세, 법랍 61세로 열반에 들었다.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린 스님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분이 숭산 행원(崇山行願, 1927~2004년)
큰스님 인데, 이 숭산 행원 스님의 은사 스님이 바로 고봉 경욱 스님이다.
* 고봉 원묘(高峰 原妙, 1238~1295)---고봉 선사는 중국 조사선 임제종의 선맥을 이은 임제 선사의 18대
적손이자, 육조 혜능의 23대 손이다. 고봉은 1238년 중국 남송(南宋) 당시 강소성 소주부 오강현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해 사미계를 수지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세에 천태교학을 배워
법화교의(法華敎義)를 통달하고, 20세가 되자 교학의 길을 버리고 선(禪)에 들었다. 사교입선(捨敎入禪)치고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그로부터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가 3년 사한(死限)을 세우고 정진했다. 머리도 깎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으며 평상에 눕지도 않은 채, 먹고 입는 것조차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41세 때, 항주 천목산 서봉(西峰)의 사자암에 들어가 '사관(死關)'이란 간판을 걸고 15년간 마을 어귀를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자꾸만 중국 전역에 알려지고 그를 찾는 학인들이 끊이지 않아 커다란
회상을 이루게 되니 이른바 '고봉회상'이요 '서봉회상'이다. 승속을 막론하고 수계한 자가 수만 명에 달했으며,
늘 삼관(三關)을 베풀어 학인을 제접했으니, 즉 삼관 화두로 시험했다고 한다. 그 삼관은 아래 세 문구이다.
① 밝은 해가 허공에 떠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렸는가?
② 사람마다 그림자가 있어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되, 무엇 때문에 밟혀지지 않는가?
③ 온 대지가 불구덩이 이다.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겠는가?
원나라 때인 1295년 12월 1일, 향을 사르고 옷을 고요히 여미고 단정히 앉아 적멸에 드니,
세수가 57세요, 법랍이 43세였다.
고봉 선사 저서로는 <고봉묘선사어록> 1권과 <고봉화상선요> 1권이 있다. 특히 <선요(禪要)>에 나오는
법문은 주로 고봉 선사 만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선(禪)에 대한 입장이 쳬계화 되고,
깨달음이 완전히 성취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조사선의 핵심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저서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에선 조선 중기에 강원(講院)의 중등 과정인 사집과(四集科)에 편입시킨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계종 강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주석서로는 연담(蓮潭) 유일(有一)의 <선요사기(禪要私記)> 1권,
백파(白坡) 긍선(亘璇)의 <선요기(禪要記)> 1권이 있다.---→선요(禪要) 참조.
*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이란 구절이다.
옛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의연히 일원상의 진리는 두렷이 존재해 있었다는 뜻이다.
고불(古佛)은 ‘옛 부처님’이란 뜻으로, 진리를 깨치신 모든 성현들을 의미한다.
일원상(一相圓)은 곧 법신불이고 진리이며, 일원상의 진리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우주의 시작과 더불어
있었던 것이다. 옛 부처님 나기 전에도 진리는 응연하게 있었다. 즉, 진리는 성현들이 깨닫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래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진리는 불생불멸(不生不滅), 갑자기 생기지도 않고 언젠가 사라지지도
않는 영원히 존재하는 유일한 그 하나란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시대 선승 약산 유엄(藥山惟儼, 745-828) 선사의 법문 내용 중에 있는 게송인데,
<직지심경(直指心經)>에 실려 있으며, 고려시대의 선승 자각(慈覺道英, ~1312)국사가
이 게송으로 법문을 했다고도 한다.
위 구절 뒤에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이란 말이 이어지는데, 과거칠불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일원상의 진리가 두렷이 존재해 있었는데, 석가모니불도 그 뜻을 확실히 알지 못했거늘
하물며 가섭존자가 후세에 어찌 전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뜻이다.
* 고사업(故思業)과 불고사업(不故思業)---사업(思業)이란 마음속에서 짓는 업, 마음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사업(故思業)은 충분히 숙고해 결정한 후,
결정해 작위한 고의적인 업을 말한다. 불고사업(不故思業)이란 고사업과는 반대로
고의성이 없이 뜻밖에 저지르게 된 업을 말한다. 고사업에도 증장업(增長業)과 부증장업(不增長業)이 있는데,
전자는 적극적으로 강하게 지은 업이고 후자는 소극적으로 약하게 지은 업을 말한다.
* 고선사 서당화상비(高仙寺 誓幢和尙碑)---통일신라시기에 불교 교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원효(元曉, 617년-686년) 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비이다.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 참조.
* 고승전(高僧傳)---고승전이란 덕이 높은 스님의 전기를 모아 편집한 열전이다.
중국에 전하는 고승전으로는 남북조시대 남조 양(梁)나라 혜교(慧皎, 497~554)의 <고승전(高僧傳, 14권)>이
가장 오래됐다. 이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한의 명제 때인 영평(永平) 10년(67)부터 양의 천감(天監)
18년(519)까지의 453년 동안에 있었던 257명의 고승에 대한 전기와, 이름만 남은 500명의 승려를 수록했다.
내용은 역경(譯經)· 의해(義解)· 신이(神異)· 습선(習禪)· 명률(明律)· 망신(亡身)· 송경(誦經)· 흥복(興福)·
경사(經師)· 창도(唱導)의 10과(科)로 분류돼 있다.
다음으로 당(唐)나라 초기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조(祖)인 도선(道宣, 596-667)의 <속고승전(續高僧傳, 20권)>
이 있다. 이<속고승전>에서 대상이 되고 있는 범위는 양(梁)을 시작으로 당(唐) 정관(貞觀) 19년(645)까지의
144년간의 고승 전기를 편집한 열전(列傳)이다. 당초(唐初)에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당고승전(唐高僧傳)>
이라고도 한다. 거론하고 있는 승려의 총수는 340명이며, <고승전>과 마찬가지로 10과로 분류하고 있다.
도선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645년에 집필을 끝냈으며, 널리 국내외를 역방(歷訪)해 정전(正傳) 340인,
부견(附見-더하여 보탬) 160인의 전기를 기술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누락됐던
북위(北魏)의 담요전(曇曜傳)도 들어 있고, 약 40건에 달하는 645년 이후의 사실이 기재돼있어 일단 집필을
645년으로 한정했던 도선이 그 후에도 수시로 가필ㆍ정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고승의 수는
정전 495인, 부견 209인이며, 자서의 기록보다 정전 155인, 부견 49인이 증가됐는데,
이 점에서도 말년의 도선이 얼마나 진지하게 증보 가필에 힘썼는가를 알 수 있다.
송(宋)나라의 혜홍 각범(慧洪覺範, 1071~1128)은 이 <속고승전>을 평해, 도선은 율(律)에는 정통하나
문사(文詞)에는 밝지 못하며, 특히 습선편은 볼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헌은 육조시대와 당나라
초기의 중국 불교사를 아는 데는 가장 확실한 사료이며, 불법(佛法)의 전파는 오직 사람의 힘에 의한다고
역설하면서 저술한 이 문헌은 그의 수많은 저술 중에서 특히 뛰어난 것으로서,
모든 대장경에 수록돼 있고, 후대의 <송고승전(宋高僧傳)>을 낳게 하는 저본이 되기도 했다.
다음 <송고승전(宋高僧傳, 30권)>은 송(宋)나라 찬영(贊寧, 930~1001) 등이988년(송나라 단공 1)에 편집한
것으로, <속고승전>에 이어 찬집한 것으로, <삼속고승전(三續高僧傳)>이라고도 불린다.
당나라 개국부터 송나라 태평흥국 5년(980)까지 350년 동안의 고승 533인의 전기(傳記)와 아울러
130인의 부전(附傳)을 기록했다. 역시 10과로 분류 구성돼있다.
명(明)나라 때는 여성(如惺, ?-?)이 <대명고승전(大明高僧傳, 8권)>을 편찬했다. 여성(如惺)의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천태산(天台山) 자운사(慈雲寺)에서 살았다. 박학다문(博學多聞)했고, 특히 문필에 뛰어났으며,
사승전기(史乘傳記)의 학문을 몹시 좋아했다.
그리하여 2백여 명의 전기를 편집해 만력(萬曆) 45년(1617)에 간행했다.
이들은 모두 <양고승전>의 체제를 따랐는데, 합쳐서 사조고승전(四朝高僧傳) 이라고 한다.
그 외에 명(明)나라 명하(明河)의 보속고승전(補續高僧傳, 26권),
우리나라에는 고려조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2권) 등이 있다.
* 고시래(古矢來)---들놀이ㆍ산놀이ㆍ뱃놀이 갔을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먹기 전에 자리 밖으로
‘고시래’ 하고 음식을 던지는 일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 고수레ㆍ고시레ㆍ고시비ㆍ고시내 등으로도 불린다.
이는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무사히 행사를 치르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이 들어있는 동시에, 그 근처 잡귀들에게 너희들도 먹고 물러가라 하는 잡귀 추방의 주술적 의미도 포함돼 있다.
옛날 고씨(高氏) 성을 가진 어떤 지주가 있었는데 마음이 후덕해서 소작인 가정형편을 참작해 소작료를
경감해 주었으므로 그 지방 농민들이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 지방의 농민들은 물론 다른 지방
농민들까지도 음식물이 생기면 먼저 후덕한 고씨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고시례(高氏禮)’하고
음식물을 조금씩 던졌다고 하는 속설이 전하기도 한다.
* 고싱가 살라(Gosingasala) 숲---부처님 생존 당시 어느 날 고명한 직제자들이 함께 성스러운 살라(Sala)꽃이
만개한 고싱가 숲 동산에 머물렀다. 이 때 사리자(Sāriputta)가 아난다(Ananda), 레와따(Revata),
아누룻다(Annuruddha), 마하가섭Mahākāśyapa), 마하목련(Mahamoggallana) 존자에게 “고싱가의 살라 숲은
아름답습니다. 밤이면 달빛이 밝고 살라 꽃이 만개해 마치 천상의 향기가 두루 퍼져있는 것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어떤 비구가 이 고싱가 살라 숲을 더 빛나게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제자들이 각기 나름의 답을 말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부처님께 가서 누구 말이 옳은지 여쭈어 보았다. “세존이시여, 누가 가장 잘 말했습니까?”
“사리자(사리푸타)여, 그대들 모두가 다 각자의 방법에 따라 잘 말했다. 이제 어떤 비구가 고싱가 살라 숲을
빛나게 하는 지에 대한 내 말을 들어라. 여기 비구는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앉아서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한다. 그는 ‘취착이 없어져서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라고 결심한다. 이런 비구가 고싱가 살라 숲을 빛나게 한다.” 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이에 제자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부처님 말씀에 크게 기뻐했다.
이 일화는 수행자의 자세, 마음 지키기 등에 관해서 세상을 빛내는 사람은 특별한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사람보다도 일상생활의 매 순간 마음을 다해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법문이다.
이 내용은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Nikāya) <마하 고싱가경(Mahagosingasalasutta)>에 실려 있다.
* 고(苦)의 종류---고통은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12가지로 크게 분류 된다.
➀ 태어남(jāti), ➁ 늙음(jarā), ➂ 죽음(maraṇa), ➃ 슬픔(soka), ➄ 비탄(parideva), ➅ 육체적인 고통(dukkha),
➆ 정신적인 고통(domanassa), ➇ 절망(upāyāsa), ➈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➉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
⑫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ha).
* 고제(苦諦, 苦聖諦, 산스크리트어 Duhkha satya, 빠알리어 Dukkha-saccā)---사성제(四聖諦)의 하나.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고(苦)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 고(苦)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서
매우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가르침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괴로움(苦)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함으로써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고제(苦諦)에는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어야(死)하는 네 가지 괴로움이 있다.
그리고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하는 인연들(애별리고/愛別離苦),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들(원증회고/怨憎會苦),
얻으려고(갖고 싶어도)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구부득고/求不得苦),
육체의 본능(끌려 다니는 것)이 왕성해지는 것(오음성고/五陰盛苦),
이렇게 네 가지 고통, 해서 도합 8가지 괴로움을 경전에서 팔고(八苦)라고 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즐겁다고 생각 하는 것이 있으나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들이기에 항상 괴로움에
쌓여서 안정되지 않으므로 괴로움(苦)인 것이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붓다는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셨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셨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왜 괴로운가? 고(苦)에는 세 가지 성질(三性)이 있다.
① 고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괴롭다(苦苦性) - 육체적 아픔(苦)과 정신적 번민(惱)이 일어나기 때문에 괴롭다.
②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괴롭다(壞苦性) - 좋아하고 애착하는 것이 변화하기 때문에 괴롭다.
③ 행위가 업을 짓기 때문에 괴롭다(行苦性) - 행위마다 자아에 집착해서 윤회의 업을 짓기 때문에 고가 따른다.
다름은 청화(靑華) 스님의 고(苦)에 대한 법문이다.
『중생의 낙(樂)이라는 것은 사실은 흔적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한번 생각해 보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때문이다. 날 때의 고통, 살려는 고통, 늙어서 고통, 병들어 고통, 헤어지는 고통, 미운사람 만나는 고통,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이 몸뚱아리 원수가 장기(藏器)가 가득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조화로운
상태는 없는 것이다. 불교용어로 말하면 사사일협(四蛇一匧)이라 ― 넉 사(四)자. 뱀 사(蛇)자. 한 일(一)자.
상자 협(匧)자 ― 네 마리 독사가 한 상자에 모여 있는 것이 우리 몸뚱이라는 말이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란 말이다. 바람 기운. 물 기운. 불 기운 또는 땅 기운,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잠시 동안 조화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때는 없다.
음식을 더 먹으면 더 먹은 대로, 덜 먹으면 덜 먹은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이라는 것은 우리 업(業) 따라서, 업을 긁어모아서 잠시 동안 그와 같이 각 원소가 합해 있는지라
우리 몸이 완전무결할 때가 없다. 따라서 몸 자체로 봐도 이것이 모두 괴로움뿐이다.
그리고 생각은 무엇인가? 우리 범부(凡夫)의 생각은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없다. 바로 보지 못하니까
바로 생각하지도 못한다. 바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음의 안심입명(安心入命) ―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몸도 편안하지 못하고, 맘도 평안하지 못하고, 끝내는 한계상황에서 오는 여러 가지
핍박만 있다. 따라서 생각을 깊이 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생은 안락이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취생몽사(醉生夢死) 해서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보면 인생은 고(苦)뿐이다.
따라서 고를 피하기 위해, 고통을 이기기 위해 불교가 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다른 종교는
고의 원인을 확실히 모른다. 우리는 우선 '인생'이라는 것이 고다, 일체개고(一切皆苦)다, 다시 말해 인생은
고행의 바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자가 깨달아서 ― 우주를 다 통달해서 항시 불성(佛性)을 보는 경지 같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한, 우리 중생의 견해로는 아무리 따져 봐도 고(苦)뿐이다.
고를 분명히 느껴야만 참다운 수행자이다. 고를 느끼기 때문에 스님들도 출가수행자가 된 것이다.”
붓다는 <초전법륜경>에서,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성자들만이 아는 진리인 고성제(苦聖諦)이다. 비구들이여!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관해서, 나의 내면에 안목(眼目, cakkhu)이 일어나고, 통찰(洞察, ñāṇa)이 일어나고, 지혜(知慧, paññā)가 일어나고, 영지(靈知, vijja-통찰지혜)가 일어나고,
광명(光, aloka)이 일어났다.”라는 게송을 읊었다.
이 게송은 고제에 관해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고성제다’ 라는 말씀에서 ‘이것이’ 란, 태어남에서 시작해서 오취온(五取蘊)으로 끝나는 괴로움의 다양한 범주를 가리킨다. 오취온에 대해서는 대체로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러나 오취온을 스스로 경험해서
이해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이다.
앉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매순간마다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오취온이다.
성자들은 이러한 대상에서 오직 무서운 고통과 괴로움만을 보지만, 범부들은 정반대로 본다.
범부들은 이러한 대상들을 고통과 괴로움의 구현으로 보지 않고, 즐겁고 유익한 것으로 본다.
그들은 아름다운 형상을 보거나, 듣고 싶은 소리, 감미롭고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미로운 향기를 맡고, 맛난 음식을 맛보고, 즐거운 감촉을 누리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욕계(欲界)의 중생들은 감촉을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상상과 몽상에 젖는 것도 또한 즐거워한다. 몽상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면 끔찍한 일이자
커다란 손실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고 들리는 이 모든 것들은 고제인 오취온이다.
위빠사나 명상 수행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게 돼있는, 무상(無常) ‧ 고(苦) 등의 무서운 진실을
깨달음 으로써 괴로움의 진리에 눈을 뜨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위빠사나 도(道)를 충분히 닦으셨기 때문에 아라한도(阿羅漢道)의 지혜를 얻어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성스러운 지복인, 열반을 보셨다. 열반이라는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성스러운 지복을
보셨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오취온에서 오직 무서운 고통과 괴로움만이 있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안 것도 아니고, 다른 사문에게서 배운 수행법으로 안 것도 아니다.
이는 스스로 계발한 팔정도를 통해서 직관적인 지혜로서 알아낸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법인, 눈... 등이 나에게 생겼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말씀과 함께, 실로 자신은 어떠한 외부의 지도나 가르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과 직관적인 지혜로 진리를 찾아서 바르게 깨달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셨음을 선포하셨다.
실제로 그러한 공개적인 선포는 필요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간다(Nigantha)가 행하는
절식과 같은 고행이 성스럽고 거룩한 수행인 것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다섯 비구들도 초기에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붓다께서, 남으로부터 들어서가 아니고
사유와 추론을 통해서도 아니며, 스스로의 깨달음과 체험, 직관적인 지혜를 통해서 수행과 지혜를 이루었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다섯 비구들은 세존께서 진정으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셨음을
확신하게 됐다.
외부 도움 없이 직관적인 지혜를 얻는 것은 정등각자와 벽지불((辟支佛)만의 고유영역이다.
붓다 제자들은 오로지 붓다 가르침을 듣고 수행을 해서 깨달음과 지혜의 단계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원한다면 그러한 지혜를 대념처경(大念處經) 등과 같은 경전에 기술하고 있는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전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단지 괴로움과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붓다가 이렇게 선포하신 것은,
다섯 비구들로 하여금, 오취온의 자연적 성품을 보기 위해 정진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고(苦, 빠알리어 duhkha), '괴로움(빠알리어 duhkha)의 극복' 참조.
* 고존숙(古尊宿)---고(古)와 존(尊)은 모두 경어. 숙은 노숙(老宿)이란 말. 오랜 수행경력을 가진 선문(禪門)의
위대한 선승-선덕(禪德)에 대한 존칭으로서, 장로 ‧ 원로와 같은 말이다.
중국 당나라 시대에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 선사는 무심선(無心禪)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30여 년간 지주(池州) 남전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밭을 갈면서 은둔생활을 하고,
세상의 시비와 사상의 추구마저 잊어버리는 무심선(無心禪)을 터득함으로써 훗날
선승들에게 고존숙(古尊宿)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무심선(無心禪) 참조.
* 고창국(高昌國)---한 여름에도 만년설이 쌓여있는 천산산맥(天山山脈) 아래 위치한 투르판(Turfan, 高昌)은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타림분지=투루판분지)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오아시스이다.
여름 평균 기온이 50℃에 육박하고 연평균 강수량은 16mm에 불과한 무더운 열사의 나라지만 투르판은
그 옛날 비단길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5세기 말 한인(漢人)인 국씨(麴氏)가 고창국(高昌國, 499~640)을
세운 후 동ㆍ서문명의 접점으로서 번영을 구가했으며, 629년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28살의 젊은 승려
현장(玄奘, 602~664)이 한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했다.
* 고칙(古則)---선종의 공안(公案)과 같은 말이다. 고인(古人)들이 들어 보인 어구(語句)는 참선하는 이의
법칙이 되므로 고칙(古則)이라고 한다. 즉, 고칙은 옛 어른들이 남겨 놓은 법칙이란 뜻으로 규범과 모범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로부터 선가(禪家)에 전해져 내려오는 특유의 어구나 제기되는 문제를 말하므로
화두(話頭) ․ 공안(公案)을 고칙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참선하는 수행자에게 본보기가 되는 고인(古人), 곧 부처나 조사의 파격적인 문답 또는
언행(言行).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부처나 조사의 역설적인 말이나 문답을 모두 고칙이라고 한다.
공안에는 고칙공안(古則公案)과 현성공안(現成公案)이 있다. 공안을 일명 고칙(古則)이라고 하지만 고칙공안은
고래로부터 전해 오는 지난날의 옛 조사 선사들이 남긴 공안을 말하며, 현성공안은 현재 생성돼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는 입장에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공안으로 보는 것이다. →공안(公案) 참조.
* 고타마 싯다르타(산스크리트어 Gautama Siddhartha, 瞿曇 悉達多, 빠알리어 Gotama Siddhattha)
고타마는 성, 싯다르타는 이름, 사까무니(석가)는 종족의 이름, 붓다(Buddha, 佛陀)는
그가 정각을 얻어 진리를 깨달은 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붓다란 깨달은 자 혹은 깨어난 자를 의미한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세존(Bhagava)이라 불렀으며, 스스로는 여래(Tathagata)라 칭했다.---→석가모니 참조.
* 고탄(Khotan)---허텐((Ho-t'ien-호탄/Hotan)의 옛 지명---→호탄(Hotan, 和闐, 和田),
우전국(于田國, 于蚊國, 于闐國) 참조.
* 고행(苦行, 산스크리트어 tapas)---고행은 선정(禪定)과 함께 고대인도 종교가들이 행하던 보편적인
수행방법 이었다. 당시로서는 수행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라고 여겼다. 불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대단한 고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이나교 에서는 육체를 철저히 괴롭혀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 시킴으로써 영혼이 순수하게 돼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고 믿었다.
붓다도 처음 출가해서 고행외도(苦行外道) 스승인 발가바(Bhargava)에게 가서 가지가지 심각한 고행을 했다.
어찌 보면 고행은 욕심을 날려버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가장 큰 고행의 성과는 아마 육체가 깨달음에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수행자에게 명확하게 일러준다는 사실이
맞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욕망에서 벗어난다면 물질에서는 해방된 수행자라 칭송됐을 것이다.
그리고 상당한 존경과 신뢰로 새로운 신망을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당시 수행자들이 얻은 최고의 경지였다.
그래서 붓다도 마음을 제어하는 고행, 호흡을 중지하는 고행, 단식에 의한 고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뼈와 가죽만 남았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피부는 검게 말라버려 마치 해골처럼 됐다고 한다.
간다라미술 조각품에 있는 유명한 ‘붓다 고행상’은 그 당시 붓다 모습을 사실적으로 작품화한 것이다.
그런데 몸을 학대해봤자 찾아오는 것은 생명력의 소진(消盡)뿐이었다. 그때 붓다가 깨달은 것이 바로 ‘
중도(中道)의 진리’다. 즉, 몸(身) 역시 정신(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붓다는 그런 극단적인 고행이 무의미 하다고 반발을 한 것이다. 고행을 포기한다는 일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행을 통해서도 얻어지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고행으로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까지는 가능한 단계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정각에
이르려면 고행만 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붓다는 고행을 버리고, 중도를 택했다. 붓다는 고행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라 깨닫고, 이것을 버리고 고락(苦樂) 양면을 떠난 심신의 조화를 얻는 중도(中道)에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으로 알고 알려 주셨다.
정신적 쾌락이나 깨달음은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온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공연히 육체를
괴롭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육체는 더럽다’는 인식을 버릴 때 마음은 맑고 투명하게 된다.
심신 모두 기쁨과 쾌락으로 충만하게 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광명편조(光明遍照, 빛은 두루 비친다)’라는 말도
고행으로는 불가능한 경지이다. 이렇듯 붓다 고행은 구도를 위한 궁극의 길은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경험과 중도(中道)사상에 의해 규명된 것이다.
* 곰(gom)---티베트어로서 명상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명상이란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바바나(bhavana)이며, 티베트어로는 곰(gom)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특정한 습관이나 존재방식을 키우는 것과 같은 ‘개발’의 의미를
지닌다. 반면 티베트어로는 익숙함을 개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불교 전통에서 명상은 선택된
물건이나 사실, 주제, 습관, 관점, 존재방식 등을 이용해 익숙함을 개발하는 의도적인 정신활동을 의미한다.
명상으로 번역되는 티베트어 곰(gom)은 좀 더 정확한 말로 ‘친밀해지기’라는 뜻이라 한다.
명상이 단순히 나무그늘 아래 한적히 앉아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자신의 내면 관조, 현상계와 사물들을 지각하는 새로운 방식과의 친화란 말이다.
*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sunyata)---‘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라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공이란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절대적 무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는 있으되, 그것이 결정되거나
특별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허공은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고 허공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지된다.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 현장(玄奘) 법사가 처음으로 빌 공(空)자로 번역했다.
그런데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불교에 있어서 ‘공(空)’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사상(空思想)은 초기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연기설(緣起說)의 일차적 변신이요, 재해석으로서 붓다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 단언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라는 가르침이 대승에서는 공으로 발전한 것이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공은 인연(因緣)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 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무애자재(無礙自在)하는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일종의 초월의 경지이다.
「공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지 아무것도 없다거나 텅 빈 허공과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도 명쾌하게 밝히고 있듯이 공은 오온을 그 토대로 한다.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이라 했다.」- 각묵 스님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용수(龍樹, 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이다.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리의 해석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서 점차 교파가 분열되기 시작함 으로써 부파불교 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소위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교학이 등장해 번쇄한 논장이 무성하게
발전했고, 윤회에 있어서는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에 따라 불멸 후 300년경에 이르자 초기불교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었던 무아론(無我論)은 차츰 세력을
잃어가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犢子部)에선 생사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서 개아(個我, 人相,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이러한 부파불교 아비달마 교학의 잘못된 교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개조 용수(龍樹)였다.
그는 명저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통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반야경> 계통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 시켜 부파불교의 법체설이나 개아설을 뒤집었다. 용수는 법체(法體)나 개아(個我), 개체(個體), 이런 말들은 모두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브라만의 아트만(atman-我體)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공격 하면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서 자성(自性)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 - 공(空)」이라 주장했다. 곧 공이란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공(空)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법체설과 독자부의 개아설 등 유아론(有我論)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즉,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체성(體性)을 공격하기 위해 공(空)이란 말을 썼고, 체성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자아(自我, atman)’ 등과 같이 개개 인간의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공이란 말을 썼다.
용수의 공사상(空思想)을 기반으로 해 새로운 경전을 결집한 대승불교는 그 후 ‘유식(唯識)’과 ‘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경전에서 공(空)이란 참마음(眞心),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
이(理) 등의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공사상을 성립시킨 <중론(中論)>이 주로 법의 고찰을 추구한 것과 달리 유식학 등 새로운 사상들은 공사상에 입각해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규명에 중점을 두었다.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여래장사상과 마음의 현실적
기능분석에 중점을 둔 유식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여래장사상이고, 유식설이 아무리 뛰어난 논설이라고
해도, 공의 개념을 이론으로 이해하려 들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초월이고,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고 하니,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 깨달음 으로만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 혹은 중도(中道) 같은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책, 자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체계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
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공(空)’이란 주제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공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을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깨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경계이다.
아니면, 최소한도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부처님 가르침인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범부는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문자로 어느 정도 알아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중생들 속성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데, 역시 범부들의 중생다운 행위에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공(空)의 또 다른 측면을 보자.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남자ㆍ여자, 착하다ㆍ악하다, 부자다ㆍ가난하다, 미남ㆍ추남,
늙은이ㆍ젊은이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그렇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분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면이 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일체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 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一貫)되게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즉, 변한다고 하면서도 그 변하는 과정에 어떤 순서[준거(準據)] 같은 것이 있다. 예컨대 봄(春) 다음에 반드시
여름(夏)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가을(秋)이 온다. 이어서 겨울(冬)이 온다. 이런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에도 일관되게 변하지 않는 ―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은 초월이기 때문이다. 색(색)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無差別),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공(空)하다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 허망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도 있다.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천지간의 만물은 모두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사물,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사물,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사물,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감별한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였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을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無)도 아니고, 제로(0)의 개념도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 없다(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에 일관(一貫)되게 들어있는 평등ㆍ무차별의 이치(理致)조차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空)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만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無)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말이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 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을 설명함에 마음에 비유해 보자. 즉,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나 실체가 없다. 그렇지만 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온갖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몸뚱이도 움직인다. 만약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면 마음이라는 말도 없어야 하며, 없다는 표현 또한 붙일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가
다시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그 원래 자리,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그 자리의 마음이 공이다.
그러니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그 빈자리에서 또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니 무(無)는 아니다. 다만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공(空)은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비어 있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無)-없다’는 주체건 자아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공이라는 것이다. 비어 있어 공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없는 듯 있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산스크리트어 ‘sunya'에 해당하는 공의 참뜻에 가까운 말이다. 허공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비어 있으나 가득 차 있다. 그 비어 있는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충만 돼 있다. 그래서 텅 빈 마음, 그곳에서 온갖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범부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은 번뇌 망상이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 수행이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고 있다.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 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공이라는 말은 무엇인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 우주가 비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은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고, 모든 형상을 포용할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고, 공 자체도 공하며, 공(空)한 그것도 공한 것을 공공(空空)
이라고 한다. 이를 필경공(畢竟空)이라고 한다. 구극의 공(空)이란 뜻이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번뇌 망상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空)을 근원으로 해 존재하는 절대진리를 말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유식학에서는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자성(自性) 혹은 불성(佛性)의 자리라고 한다.
이 우주 공간이 비어있는 것이지 무(無)의 상태는 아니다. 그리고 비어있는 것 같지만 실은 꽉 차있다.
진공묘유의 상태란 말이다. 이 우주 공간엔 의식의 파장이 꽉 차 있다. 이것을 기(氣)라 할 수도 있고,
에너지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정진하면 이 우주 공간의 파장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신통력이기도 하다.
강(江) 상류의 개천에서 산란을 한 연어가 넓은 바다에 나가 몇 년을 있다가도 회귀할 수 있는 것이라든지,
몇 백리 밖에 팔려나간 진돗개가 되돌아 집을 찾아 온다든지 하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모두 중생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부사의(不思議)한 공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무한대의 우주공간, 그 속의 지구까지 포함한 거대한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수시로 오차가 생긴다면 지구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폭발해 버릴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조화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느님 이라고 이름 하든 알라라고 이름 하든 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지구는 그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4계절이 있고, 밤낮이 연속되는 이 작용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공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로써 말씀하셨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공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초심자에게는 공(空)에 관해 말해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불법 최고 지혜인 진여지혜(眞如智慧)는 언어나 문자로 분별하고 헤아려질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한다. 즉 반야지혜를 무분별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진여(眞如)의 모양은 형용할 수도, 분별할 수도 없으므로 모든 생각과 분별을 초월한
참 지혜로서만 알 수 있다고 해서 무분별지라고 하며, 그것이 곧 공(空)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공(空)은 범부 중생이 추구하는 가치, 이치, 이념 이런 것을 초월한 경계이다.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의 논리로는 표현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알 수도 없는, 곧 부처님의 절대불변의 경지를 말한다.
진여(眞如), 불성(佛性), 자성청정(自性淸淨), 본래면목(本來面目), 무차별절대(無差別絶對)와 같은 경계는
인간(중생)의 능력으로는 닿을 수도 없는, 인간으로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이해하고 느낄 수도
없는 경계, 중생의 한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경계이다.---→진공묘유(眞空妙有) 참조.
* 공(空)② - 공(空)ㆍ연기(緣起)ㆍ무아(無我)---대승불교 철학의 핵심인 공사상은 대승에서 주장하는
반야지혜에 대한 규명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규명이다.
공사상을 체계화시킨 용수(龍樹)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지혜로운 자로서 무수한 이타행(利他行)을 행한
근본 종교체험이 공에 대한 체득(體得)이라고 확신했다. 공의 체득은 윤회로부터 해탈을 가져오고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근거인 것이다. 그리고 공의 체득이 가능한 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 삶이 연기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공이란 말은 없다는 의미이지만, 무엇인가가 있다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에게 윤회와 번뇌를 일으키는 근거로서 변하지 않는 자아(自我)나
실체(實體) 등이 본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공을 체득하는 경계는 인간의 의식상 가장 깊고
높은 차원인 승의(勝義)의 경계로서, 이 경계를 체득하면 열반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리고 공의 경계는 세속(世俗)으로서 연기의 세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연기의 세계에 의거해 공의
경계가 드러난다. 공이 연기의 세계에 의거한다는 것은 철저한 연기적 사유(思惟)를 통해야 공의 경계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연기적 사유에 의거하는 세계란 우리의 삶이 성립되는 세계이자 존재하는 세계이다.
존재하는 세계란 연기의 세계로서 존재물 상호간에 의존적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서,
항상 변화하는 무상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궁극적 실체 등에 의거하는
세계가 아닌 까닭에 절대적인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가유(假有)의 세계이다.
가유의 세계로서 연기의 세속세계를 세속유(世俗有)라고 표현한다.
이 세속유로서 가유의 세계에 대해 어떠한 집착도 가지지 않고 연기적인 의식이 깊어짐에 따라 생겨나는
세계가 승의공(勝義空)의 경계이다. 이러한 승의공의 경계를 체득해야 열반의 경지에 이르고,
이 경지에서 대승보살의 이타행과 자비행은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승의공과 세속유의 경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도(中道)의 길이며, 이 중도의 길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이와 같이 공사상의 체계는 중도의 길과 열반의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의 개념을
부정하는 철저한 무아(無我)의 정신이 담겨있다. 무아설은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로서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구분돼 논의됐다.
인간의 내면에서 의식 일체를 통괄하는 절대적인 실체로서 ‘아(我)’가 없다는 것이 인무아이다.
이 인무아 외에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로서 법(法)에 대한 고찰이 생겨나,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을 갖는 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고가 생겨났다.
용수가 강조하는 공사상의 근저에는 인무아는 물론 법의 자성을 부정하는 법무아에 대한 개념이 담겨있다.
그리고 공의 체득은 이러한 법의 자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부정의 의미가 담겨있다.
용수는 법무아를 법의 무자성(無自性)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적인 사유에 투철해 공을
체득한다는 것은 인무아와 법무아에 투철해진다는 것으로, 부처님의 근본교리인 무아설에 철저해 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공사상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와 연기에 의거해 세워졌다.
무아와 연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공의 체득이라는 승의의 경계를 통해 열반의 길로 나아간다.
이 열반의 길은 대승보살이 실천하는 진정한 이타행과 자비행의 길인 것이다.
공사상은 부처님 깨달음의 근본체계를 대승의 입장에서 조명하고 밝힌 것으로,
이 공사상의 체계는 후대 인도사상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이태승
공은 연기의 법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연기는 상호 의존성 상호 관계성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연기의 법칙성을 윤리도덕의 가치규범으로 완성된 개념이 공이다. 공은 인격의 완성이다.
나를 내 세우면 항상 상대와 갈등하고 대립한다. 나를 비우고 버려야한다. 그것이 공이다.
* 공 ‧ 가 ‧ 중(空假中)의 원리---중국 수나라시대 천태대사(天台大師, 538~597) 지의(智顗)가 세운
삼관법(三觀法)을 말한다.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空),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한다는 가(假), 여기서 가는 차별상을 말한다.
그리고 공(空)이나 가(假)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하고, 이 셋을 공ㆍ가ㆍ중 3제(三諦)라 하며, 이 진리를 관찰함을 공가중 3관(三觀)이라고 한다. 파도가 바다를 떠나서 존재하지 못하듯 공(空)ㆍ가(假)ㆍ중(中)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이것이 공ㆍ가ㆍ중의 원리이다. 가는 차별관, 공은 평등관, 중은 통일관을 말한다.
<반야경>에 공 또한 공한 것이라 가르치니, 그 공이란 무엇인가. 그 때의 공은 가 시설(假施設)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실상은 공이다. 실상은 연기하므로 고정된 실체성이 비어 있는 공이 맞지만
그 실상에 대해 잠정적으로 일시적으로 그 실상을 볼 수가 있다. 이때의 실상은 ‘가 시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실상이 공이라고 했듯이 모든 것이 공한 것인데, 그 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 걸 ‘무기공(無記空)’ 혹은 ‘공병(空病)’에 걸렸다고 한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부정의 방식이지만 ‘가 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다는 긍정이다.
그렇다면 진짜 실상은 무엇일까. 중관학파에서는 진짜 실상은 ‘중도’ 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도란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니다. 이렇게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궁극적 입장을 공(진제)이라 하고,
‘가 시설’된 방편의 입장을 가(속제)라 하며, 이 두 가지 진리를 포괄해 유무 양변을 떠난 것을 중(중도)이라 한다. 이것이 중론(中論)이라고 명명한 요인이다. 이 공ㆍ가ㆍ중(空假中)을 중관학파에서는 ‘세 가지 진리’라 해
3제라 하는데, 다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
• 공제(空諦) - 삼라만상은 공무(空無)해서 한 물건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
• 가제(假諦) - 한 물건도 실재한 것이 아니지만, 모든 현상은 뚜렷하게 있다.
• 중제(中諦) - 모든 법은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또 공이면서 유, 유이면서 공이다.
그리고 3관(觀)은,
• 공제(空諦)를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 • 가제(假諦)를 관하는 것을 가관(假觀),
• 중제(中諦)를 관하는 것을 중관(中觀)이라 한다.
대개 3제는 관(觀)할 바 이치에 대해 말하고, 3관은 관하는 지혜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유일하게 반성적 사유가 가능한 생물의 종이다. 따라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이는 불성(佛性)의 자각 곧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이기도 한다.
이러한 반성적 사유에 의해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해 보면, 그 크기가 아주 작은 양성자나
중성자에서 부터 대단히 큰 천체에 이르기까지 거기엔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직 연기(緣起)에 의해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로 존재할 뿐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한다.
그렇다고 색이 변화해 공이 되고, 공이 변화해 색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즉,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란 시간이 경과하면 색이 변해 공이 되고 공이 변해 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색이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라는 것이다. 공이란 색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
색이 있는 자리를 떠나서 따로 공이 존재하지 않고, 색 역시 공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 물리학의 상대론적 양자역학이 이해하는 진공(眞空)의 개념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완벽하게 차 있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락(Paul A M Dirac)은 진공이 실제로 텅 빈 것이 아니라 아주 약한 에너지(Zero-point energy)로 채워져 있고, 이 에너지에 의해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 한국의 연구진이 이 사실을 영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공의 자리가 바로 색의 세계이며, 색의 그 자리가 바로 공의 세계이다.
따라서 색과 공은 분리해 낼 수 있는 두 세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세계이다.
이와 같이 색은 곧 가(假)라 하고, 일체 모든 사물은 오직 무아(無我)여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空)이라고
하며, 또한 그 둘의 양변을 떠나면서 그 양변을 포용해 중(中)이라고 한다.
공ㆍ가ㆍ중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 그러므로 가라 하면 공과 중이 따라 오고,
공이라 하면 가와 중이 따라 오며, 중이라 하면 가와 공이 따라 온다.
이렇듯 공과 가와 중이 거칠 것이 없이 원융무애 하니 이를 일러 공ㆍ가ㆍ중 삼제원융(空假中三諦圓融)라 한다.
※ 가시설(假施設, prajnapti)---방편시설(方便施設-임시로 세운 이론)을 말한다.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참조.
*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개념의 특징---‘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공이란 텅 비어 있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은 절대적 무(無)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는 있으되,
그것이 결정되거나 특별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 현장(玄奘) 법사가 빌 공(空)자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AD 2세기 중관학(中觀學)을 수립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이다.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에선 윤회하는 인격 주체로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용수는 아를 비판하면서 법체니 개체니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이는 곧 「무자성(無自性) - 공」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공(空)이란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라고 하는 것들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체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대승불교의 근본교의로 현상계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생멸하는 존재이며
(연기하는 존재),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고,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했다. 따라서 공이나 중도(中道)는 연기법의 연장이다.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라는 가르침이 대승에서는 공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어렵다. 없다(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空)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만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말이다. 공은 없는 게 아고, 비어있다는 말이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즉,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 비어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공은 불이(不二) ―
이원적 대립의 극복으로 요약된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부증불감은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 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 평등(平等)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공’ 혹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할 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경험한 것,
그리고 내가 참고로 할 수 있는 사전이나 책, 자료들을 동원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예컨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적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경지이다. 지금 <공(空)>이란 제목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글도 엇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공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을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 있는 단어들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깨쳐라’고 하는 말을 자꾸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지식체계를 다 버리고,
또 다른 부처님 가르침의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우리의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없다. 우리 몸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몸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계속 변한다, 흐른다, ― 즉, 연기한다. 따라서 비실체이다. 연기하는 것의 특징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의존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이다.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공은 ‘무상, 무아, 비어 있다, 흐른다’라고 표현한다. 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은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가졌다. 비어 있는 곳을 채우기 위해 흐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높낮이가 있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빈 곳을 채운다.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우고, 채워지면 넘쳐서 다시 흐른다.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것이 공의 속성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현상적 차원에서 이렇게 실체가 없음을 이름 해 공(空)이라고 한다.
사람이나 자연, 모든 것이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찰나찰나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도 ‘영원한 나’ ‘영원한 나의 것’이 없다 - 무아(無我)라는 이 사실 ―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참다운 진리이다.
무아(無我)란 그 스스로의 자아(自我)가 없기 때문이며, 자아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하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하라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계나 자신을 대하면서 실체론적 사고를 중단할 때,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알맹이가 없구나 하고 진실하게 느낄 때, 공이 작동한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공이나 중도는 속박을 부수는 도구이며,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착하다ㆍ악하다, 부자다ㆍ빈자다, 미남 ‧ 추남, 남ㆍ녀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그렇지마는 여기엔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평등한 면이 있다.
또 일체의 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 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변한다고 하는 그 변하는 과정에는 어떤 준거(準據)의 틀, 곧 어떤 원칙이 있다.
예컨대 봄 다음에 반드시 여름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가을이 온다. 이어서 겨울이 온다. 이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를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ㆍ허망 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색(色)’이란 모양을 뜻하며, 곧 차별을 뜻한다. ‘즉(卽)’은 떨어지지 않음(不離)을
의미한다. ‘공(空)’은 평등, 즉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언하면 차별이 있는 것, 곧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를 일관해 있는 평등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곧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색)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천지간의 만물이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분별하는 장점을 갖춘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였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해 현정(顯正)하는 데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공은 가설적인 이름을 붙여 공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며,
공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밝히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반야경> ‘문승품 제18’에서 다음과 같이, 즉 “일체의 존재[法]는 공이며, 그 공도 또한 공이다.
상(常)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성품 스스로가 그러하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기[성자이(性自爾)] 때문이다. 이를 공공(空空)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공 역시 공한 것이므로 공을 집착해서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공성(空性)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분별망상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공은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 으로나
가치론적 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 무애자재(無礙自在)한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공은 집착하지 않는 것, 얽매이지 않는 것,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공이란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목탁을 보라 텅 비어 있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이다.
범종각의 범종을 보라 속이 텅 비어 일승원음(一乘圓音)의 완성된 음운(音韻)이 나는 것이다.
텅 빈 충만, 비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라 한다.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하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망념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의 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을 근원으로 해서 존재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를 말한다.
이 무한대의 우주공간, 그 속의 지구까지 포함한 거대한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수시로 오차가 생긴다면 지구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조화라고 하고, 이슬람교 에서는 알라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느님이라고 이름 하든 알라라고 이름 하든 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지구는 그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4계절이 있고,
밤낮이 연속되는 이 작용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란 말이 나온다.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제법의 본질이 곧 공상(空相)이라는 말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공 한 것이라는 말이다. 공은 본래모습이 없지만, 중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공한 모습이란 용어를 쓴 것고,
공한 모습이라서 불생불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한 모양은 바로 불생불멸을 비롯한 남 녀, 남 북, 밤 낮 등 온갖 상대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다. 공한 본질 속에는 이 모든 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표상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공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일체법이 존재하는 모양이 바로 공이기 때문에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 이면에 모든 현상은 생할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이다.
공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공에 관한 이 책 저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공이란 이런 것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 책이 없다. 이 글도 그렇지만 기껏해야 공의 특징을 나열하는 정도이다. 왜 그런가.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을 이론적으로 혹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공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만 닿은 수 있는 영역이다.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야지혜로서 공관은 용수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이제설(二諦說)의 입장에서 명확히 그 구분이 요구됐던 것이다. 이처럼 반야경계 경전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공관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으로 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 부터 전체인 자기로 변신이 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이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 중에서
우리 중생은 ‘내 것’이라 할 게 하나도 없고,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인 양 여기면서 가지고 지키려고 발버둥
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고집도 욕심도 사랑까지도
모두 탁 놓아버려야 한다. 그게 바로 공의 영역이다.
* 공겁(空劫)---우주는 일정하게 네 가지 주기를 반복하면서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 하는데,
이 우주가 성립했다가 무(無)로 돌아가는 기간을 성겁(成劫) ‧ 주겁(住劫) ‧ 괴겁(壞劫) ‧ 공겁(空劫)으로
나누어 이를 사겁(四劫)이라 한다.
각 겁(各劫)은 제가끔 20소겁(小劫)으로 이루어져 있고, 20소겁을 1중겁(中劫)이라 하고, 4중겁을 1대겁(大劫)
이라 하므로 결국 한 우주는 1대겁(大劫)을 시간단위로 해서 생성 소멸하고 있다.
그리고 1소급(小劫)의 기간은 사람의 수명이 8만 4천세부터 백 년마다 한 살씩 감소돼 10세에 이르고,
10세로부터 다시 백 년에 한 살씩 늘어나 8만 4천세가 되는 긴 기간이다.
따라서 실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긴 시간의 상징적인 개념이다.
특히 괴겁의 시대가 지나면 공겁의 시대가 오는데, 공겁은 불교 우주관을 토대로 한 공막기(空漠期)를 말한다.
이 공막기는 세계가 파괴돼 아무 것도 없는 허공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지속되는 지극히 긴 기간이다.
공겁 다음에는 다시 80겁을 주기로 성ㆍ주ㆍ괴ㆍ공이 반복돼 이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것이다.
→사겁(四劫) 참조.
* 공견(空見)---공(空)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공을 깨닫지 못하고, 머릿속 이해 수준에 머물면 자칫 허무감에
빠질 수 있다. 즉, 공의 극단에 치우쳐 허무주의에 빠진 공의 세계관 이라는 의미에서 공견이라고 부른다.
자칫 이러한 공견에 빠질 경우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돼 선악의 구분을 무시하는 폐인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공을 잘못 이해해 공(空)에 집착하다가, 공에 사로잡힌 그릇된 견해로서 근본적으로 공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이므로 공병(空病)이라 할 수 있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이런 공견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공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서(不能正觀空) 자기 스스로를 해친다(鈍根則自害).
주문을 잘못 외거나(如不善呪術) 독사를 잘못 잡는 것처럼(不善捉毒蛇).”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설익은 무당이 주문을 잘못 욀 경우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화를 부를 수도
있다. 또 독사를 잡을 때 물리지 않기 위해서 머리가 움직이지 않게 목을 꽉 쥐어야 한다.
실수로 다른 곳을 잡을 경우 오히려 독사에게 물린다. 공의 진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올바로 이해할 경우에는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어 주고 삶과 죽음의 고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기사회생의 명약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잘못 이해할 경우 독약이 돼 우리 몸과 마음을 해칠 수가 있다.
이와 비슷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날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초라한 행색으로 밥이나 한술 얻어 먹으려고 어느 사찰을 방문했는데,
그 절의 주지가 돈 있어 뵈는 신도는 극진이 접대하면서 행색이 초라한 자기는 박대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지에게 따졌다고 한다. 분별하지 말라는 절간에서 사람을 이렇게 차별해서 되느냐고,
그러자 주지 왈, “대접을 하는 게 안하는 것이요, 안하는 게 하는 것이올시다.”라고
어쭙잖게 공의 도리를 써 먹은 것이다.
그러자 박문수가 주지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도록 갈겨주면서,
“이놈아 그러면 때리는 게 안 때리는 거고, 안 때리는 게 때리는 거다.” 라고 하면서 혼쭐을 냈단다.
이처럼 깊은 의미를 품은 공의 도리가 깊은 이치를 모르는 자에겐 한갓 말장난의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
기초가 부실하고 수행력이 없이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해 내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만큼 공의 도리는 어려운 것이다.
<중론(中論)> 제13 관행품(觀行品)에서 용수는 진제적(眞諦的) 조망을 속제적(俗諦的) 규범으로 착각하는
공견(공의 세계관)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세계관[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大聖說空法),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爲離諸見故).
그러나 만일 공을 다시 자신의 세계관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若復見有空),
어떤 부처님도 그런 자를 구제하지 못하신다(諸佛所不化).”
공(空)이란 마치 빨랫비누와 같다. 얼룩진 옷에 묻은 때를 빨 때 비누를 이용해 때를 지운다.
그러나 때가 지워졌다고 해서 빨래가 끝난 것이 아니다. 때를 지우기 위해 사용했던 비눗기를 말끔히 헹구어
내야 한다. 공의 가르침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망상분별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언어와 분별로 이루어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마치 뗏목과 같은 것이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경고하고 논증하기 위해 공의 가르침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경고와 논증은 공의 가르침 그 자체에
대해서도 적용돼야 한다. 공의 가르침 역시 언어와 분별에 의해 표출된 것이기에 또 다른 뗏목일 뿐이다. 그
래서 용수(龍樹)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공의 가르침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다음과 같이 드러냈다.
“만일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若有不空法), 공한 것이 있으리라(則應有空法).
그러나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實無不空法), 어떻게 공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何得有空法).”
모든 것이 공하다는 말은 공하지 않은 것은 전혀 없다는 말과 그 의미가 같다.
그런데 공한 것이 있으려면 공하지 않은 것이 있어야 한다. 마치 긴 것이 있으려면 길지 않은 것,
즉 짧은 것이 있어야 하고, 호랑이라는 생각이 존재하려면 호랑이 아닌 것이 존재해야 하듯이… .
그런데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공하지 않은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기에 공이라는 말이 무의미 해지고 만다.
모든 것에 공하다고 말할 필요도 없어진다. 모든 것은 공할 것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공의 의미이다.
공이라는 말에 의해 모든 것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분별을 세척해 주지만,
공 역시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공병(空病) 참조.
* 공공(空空)---<반야경(般若經)>에 나오는 십팔공(十八空)의 하나로서,
공(空)에 대한 분별이나 집착이 끊어진 상태이며, 공도 또한 공함을 말한다.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리 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공의 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하여 현정(顯正)하는데 있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가지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반야경>에서 설한 18공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우선 사물을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간의 육근(六根)이 공하다(內空).
-다음으로는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이 공하다(外空).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空空)을 설한다. 이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그리고 그것에 의지한 아(我)와
아소(我所) 모두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한 것인데, 그 공(空) 또한 공(空)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공은 마치 비누와 같아서 공이라는 비누로 분별이라는 때를 빨았으면 그 공의 비눗기도 다시 헹궈내야
한다[공공]. 공의 가치가 남아 있으면 가치판단이 상실된 악취공(惡趣空)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망상분별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반야경> 문승품 제18에는 “일체의 존재[法]는 공이며, 그 공도 또한 공이다. 상(常)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성품 스스로가 그러하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기[성자이(性自爾)] 때문이다. 이를 공공이라 부른다.”라고 했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 공공적적(空空寂寂)---불변하는 고유한 실체가 없는 상태를 말하며, 줄여서 공적(空寂)이라 한다.
공적(空寂)하다에서 ‘공(空)’은 이차별(離差別), 곧 차별을 떠남을 뜻하고, ‘적(寂)’은 이변화(離變化),
곧 변화를 떠남을 말한다. 그러니까 공적(空寂)이라는 말은 차별을 떠나고 변화를 떠나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의 도(道), 곧 진여(眞如)를 말한다.
그리고「성(性)과 상(相)이 공적(空寂)하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성(性)이란 불변의 본체를 말하는데 비해,
상(相)이란 변화하고 차별로 나타난 현상계 모습을 말한다. 따라서 공적이린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 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평등하고 변하지 않는 상주불변체를 확고하게 포착하는 것을 이른 바 불교 신앙의 이상(理想)으로
‘성(性)과 상(相)이 공적(空寂)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공공적적해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했다. 즉,
• 우주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비어 있어 불변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텅 비어 매우 고요하다는 말이다.
• 번뇌나 집착이 없이 무아무심(無我無心)이라는 뜻이다.
즉, 우주에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것도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화(淸華) 스님은 우주에 형상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모두 그 실체가
공무(空無)해 아무것도 분별할 것이 없으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여의어라 하셨다. 그것이 곧 공공적적(空空寂寂)
이다. 그러니 이 몸은 공적(空寂)해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한 것도 없다.
이번 생에 잠시 인연 따라 나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인연 따라 갈 뿐인 것이다.---→공적(空寂) 참조.
* 공(空)과 무(無)---공(空)과 무(無)는 다르다. 중생들은 견해에 집착하고,
그 견해의 가장 큰 두 줄기는 있다(有)와 없다(無)이다.
중생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은 있다(有)와 없다(無) 이 두 가지에 박혀 있다.
깨달음이 곧 공(空)이다. 공(空)이 곧 깨달음의 근본 핵심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공(空)을 들으면
공(空)을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여긴다. 깨달음이 전혀 없어 공(空)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다. 공이 곧 지혜이며, 해탈의 뿌리이다.
이것은 대승, 소승, 금강승 모두에게 공통사항이다. 공(空)이 아니면 해탈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승경전에서도 나와 있다시피, 삼해탈문이 바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無作)이다.
해탈할 수 있는 문(門)이 바로 삼해탈문이고, 그 세 가지가 바로 공ㆍ무상ㆍ무원이다. 공ㆍ무상ㆍ무원은 다
같은 뜻이다. 공하기에 모습이 없고, 공하기에 바람(작위)이 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부처님의 자비로써 중생의 성향에 따라 문을 세 개 열어놓으신 것일 뿐이다.
왜 공(空)인가? 바로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겨 났으므로 거기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서 공이다.
왜 무상(無相)인가? 비어 있으니 거기엔 그 어떠한 모양(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무원(無願=無作)인가? 비어 모습이 없는데 뭘 짓거나 뭘 바란다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은 결국 다 같은 뜻이다. 단 하나를 세 가지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해탈의 문은 공(空)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공(空)은 비었다는 의미고, 무(無)는 없다는 뜻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 몸이 무(無)일까. 몸은 없지 않다. 몸은 아주 없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몸이 항상 영원한가. 영원히 있는가(有). 중생들은 영원하다고 여긴다.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몸에 집착한다. 몸이 영원하지 않다고 확실히 안다면, 몸에 집착할 수가 없다.
몸은 변한다. 몸은 항상 변해간다. 그래서 몸이 병들고, 늙어간다. 몸과 마음이 변해가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어리석은 중생이다. 몸은 아주 없는 무(無)가 아니다. 그렇다고 영원한 실체가 있는(有)도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진리를 몰라서 항상 유무(有無), 이 두 가지 견해에 매달려 있다. 몸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실체가 있어서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몸의 존재방식은? 바로 공(空)이다.
몸은 공(空)한 것이다. 이게 진실이다. 몸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몸은 공한 것이다.
몸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몸은 허깨비와 같다.
그래서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했다.
이 몸은 꿈ㆍ허깨비ㆍ거품ㆍ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꿈ㆍ허깨비ㆍ거품ㆍ그림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이게 바로 공의 뜻이다. 이와 같이 몸의 존재방식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바로 공한 것이다. 이렇게 공과 무는 완전히 다르다.
유는 상주론(常住論), 무는 단멸론(斷滅論), 공은 중도(中道)이다. 중도란 유무 양쪽에 치우치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중도의 뜻은 그 어떤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겨우 유무 양쪽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견해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 공(空)과 연기(緣起)---‘공(空)’은 인연(因緣)을 말한다. 인연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공은 실체가 없다. 공 현상은 공이다. 인연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공은 곧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공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은 인연이라는 말이다.
왜 인연은 실체가 없는가? 돌을 조각해서 사람 모습을 만들면 돌이 사람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석수가 사람으로 다듬었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은
의지해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인연 연(緣)자 일어날 기(起)자이다.
연(緣)은 의지한다는 뜻으로 석수에 의지해서 돌이 사람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지해서 조성된 것이고,
석수가 없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우리말 <춘향전> 가사에 미륵님이 살찌는 것은 석수쟁이 솜씨에 매였다
이런 말이 있다. 돌이 미륵이 되는데 돌미륵도 그냥 미륵이 되는 게 아니라 석수쟁이가 다듬는 대로 되는 것이다. 그게 연기라는 말이다. 이 ‘연기’를 여러 다른 분야에 적용해도 다 들어맞게 돼 있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에 의지해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아들딸이 없으면 어머니가 될 수 없다.
마누라는 남편 때문에 마누라가 되는 것이고, 남편은 아내 때문에 남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의지해서 된다.
그래서 의지해서 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현상관이고 세계관이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저것이 있고 저것으로 말미암아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것의 실체가
아니고, 저것은 저것의 실체가 아니다. 이게 공(空)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죽음을 떠나서 삶의 실체가 없고 삶을 떠나서 죽음의 실체가 없다. 그러니까 실체가 없고 공이다.
이 말을 어려운 말을 써서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 실체가 자성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 무자성의 내용이 연기이다. 그리고 무자성은 바로
공이다. 따라서 이 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남을 말한다. 인연법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 이니까 현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色)은 현상인데, 색은 말하자면 석수를 잘 만나면 예쁜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고약한 석수를 만나면
고약한 모양으로 다듬어지며, 석수 나름으로 모양이 된다. 돌은 아무 힘이 없다. 그래서 공이다.
또 다리 놓는 사람 만나면 돌이 다리가 된다. 다리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석수의 노력을 통해서
다리가 된다.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나무가 기둥이 되는 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목수에 의해서 기둥이 된다.
돌이나 나무(色)는 인연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될 수 없다. 그래서 공이라는 것이다.
공은 연기의 법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연기는 상호의존성 상호관계성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상호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연기의 법칙성을 윤리도덕의 가치규범으로 완성된 개념이 공이다. 공은 인격의 완성이다.
나를 내 세우면 항상 상대와 갈등하고 대립한다. 나를 비우고 버려야한다. 그것이 공이다.
같은 밀가루인데 빵도 되고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고 범벅도 된다. 이게 전부 인연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을 무자성이라 하는 것이다. 곧 스스로의 본성이 없고 인연에 의지해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불교에서 "실체가 없다"고 하는 설명이 공(空)에 관해 행해지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부파 불교인들이
이 ‘실체’라는 개념을 중요시해서 이 실체라는 것에 어떤 의미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실체라는 사고를 부정하고 파괴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실체화하는 것을
타파하는 도구로 순야(Sunya-공)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실천적인 면에서 말하면 실체라는 사고는 실천의 경우에는
"사로잡힘(집착)"이라는 것이 된다. 실체라는 것은 사로잡힘 으로써 개물(個物)로부터 추상돼 성립된다.
예컨대 시계라는 것은 시각을 표현한다는 개념을 추구해 나감으로써 개개의 시계로부터 시계의 실체가 탄생한다. 그래서 공(空)이란 것을 실천적인 의미로 보면 사로잡힘을 없애는,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공을 설명하는데 실체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실천적인
표현이다. 부파불교시대의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실체를 생각하고 또는 실천에서도 어떤 제약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자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그것을 배척하며 나아가서는 부처님의 원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슬로건 으로서 대승불교의, 그리고 <반야경>의 공이 설해지고 주장됐다.
<반야경>을 보면 거기에 많이 나오는 공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혀 돼있지 않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음(無執着)이라는 표현, 이것은 간단한 듯하나 막상
그것을 실천하려면 매우 어렵다.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그 일에 열중하면 그것은 거꾸로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전혀 설명할 수 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경>은 거듭 거듭 공(空)이라는 것으로도 부족해
다시 한 번 공이라고 말하고 마침내 "공은 역시 공이다"라고 말한다.
"사로잡히지 않는다" 또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어떠한 형태로 논리적으로 또 실천과 결부시켜
훌륭하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는 초기 <반야경> 시기에는 적지 않는 무리가 따랐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가르주나(용수)라는 뛰어난 학자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공(空)의 논리는 마침내 용수라는 사람에 의해서 우수한 이론으로 성립됐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라는 책에서 공(空)의 이론을 "연기"라는 것을 도입해 설명했다.
연기(緣起)는 불교의 중심사상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라든가 이것이 이유이고 이것이 귀결이라든가,
그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초기불교에서는 연기가 논해졌다. 또한 인연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라는 것을 포함한 개념 으로서의 연기(緣起)는 초기불교 시대를 지나 점점 발전돼 왔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어머니이며, 딸이며, 아내이다, 그밖에도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서 있다. 즉, 넓게는 국민이고 유권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한 한 여자를 하나의 고정된 존재로서 볼 수는 없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했다.
그러함으로써 어떤 고정된 견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런 용수의 학설에 따라 앞에서 말한 "논리적으로 실체를 부정한다"는 것과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 두 가지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중론>은 대승불교에서
지극히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전부 450송의 시로 돼있고, 그것이 27장으로 나누어 있다.…
<중론>은 공을 연기설로 설명했고, 그때까지 <반야경>을 설했던 사람들은 이로 인해 공(空)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공(空)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됐다.」 - 실론섬
* 공(空)과 제로(0)---불교에서는 이 유(有)와 무(無) 이외에 또 하나의 사고방식을 만들고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것이 공(空 = 0. Sunya)이다. 예를들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수학적으로 말해
숫자의 가장 기초 단위는 1이라는 숫자이다. 여기에 대응되는 것은 마이너스 1이라는 숫자이다.
즉, 마이너스 1이 있고 그리고 마이너스 2라는 식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수는 1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0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십이라고 할 때는 1 다음에 0을 쓴다.
백일 때는 1 다음에 0을 두 개 붙여 100이라고 쓴다. 그 뒤 101, 102로 써 나간다.
이것은 희랍이나 로마에서 백이라고 할 때 C 를 쓰고 II 를 쓰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이다.
인도에서는 백이라든가 C 라든가 하는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1과 0이라는 문자를 나란히 놓고 한마디로 자리에 따라 수를 포현해 가면서 101, 102… 또는 그 이상의
어떤 큰 수도 모두 그것만으로 처리할 수 있게 돼 있다. 여기에는 인도에서 발견한 0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숫자의 자리 잡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로(0)란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의 중강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 0에 대응하는 숫자는 없다.
1에는 반드시 마이너스 1이라는 식의 대응하는 것이 있는데 0에는 플러스 0도 마이너스 0도 없다.
이 0 이라는 숫자는 인도인이 발견하고 아라비아인이 인도로부터 배워서 유럽에 전했다.
그런데 이 0이야말로 <반야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야(sunya), 즉 공이다.
‘순야’라는 말 자체가 숫자의 0을 뜻한다. 0이라는 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숫자이다.
우리가 흔히들 102라고 할 때 십 자리를 차지하는 수는 없으므로 0을 쓴다. 그런데 없다고 해서 떼어 버리면
12가 된다. 전혀 다른 수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도무지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 0이라는 숫자이다.
이처럼 0은 실은 없지만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실물에 상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는데도 그것을 제거할 수가 없다. 이른바 아무것에도 대응하지 않고 또한 실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것이 0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이 범어에서 말하는 순야(Sunya)라는 것이다. - 실론섬
* 공관(空觀)---공관이란 모든 존재는 그 자체의 본성이 없고[자성(自性)이 없고], 고정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진리를 관상(觀想)하는 수행법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천태종 입장에서는 관법(觀法)의 내용을 공ㆍ가ㆍ중(空假中) 삼종으로 나누는데, 이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 하고,
그 중 하나가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이라고 하며, 바로 공관을 말한다.
우주 사이에 벌려있는 수많은 현상은 모두 인연소생(因緣所生-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기 함)에 따라 생긴 것으로, 그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공적무상(空寂無相)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현상계의 일체법은 다 실체가 없는 공이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물든 우리들의 번뇌 또한
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라고 관해 마음의 본바탕인 불성(佛性)을 깨닫고자 함을 말한다.
→공 ‧ 가 ‧ 중(空假中)의 원리, 일심삼관법(一心三觀法),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 참조.
* 공교(空敎)---불교철학의 발전단계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을 삼시교판설(三時敎判說)이라 한다.
이 분류는 붓다 교설 중에서 유식학이 최상 법문임을 증명하기 위해 인도 유식학파의 계현(戒賢, Silabhadra)
논사가 정립한 이론으로서 제1시 유교(有敎), 제2시 공교(空敎), 제3시 중도교(中道敎, 唯識敎) 순서로
불법이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 제1시교---처음 초기로 제1시교 법문을 유교(有敎)라 한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모두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두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범안(凡眼) 차원에서 알기 쉽게 하는 법문이 유교(有敎)이다.
• 제2시교---보다 높은 차원으로서 ‘일체가 다 공(空)이다.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망령된 것이고 일체가 공이요
무상이다’ 이러한 높은 차원에서 모두를 다 부정하는 단계, 이것이 공교(空敎)이다.
<반야경> ‧ <금강경> 등의 사상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 제3시교---제3시교는 바로 중도교(中道敎)이다. 제1시교와 같이 너와 나의 실재를 고집하는 편견과
제2시교에서 말하는 바, 일체만법이 무상하다고 하는 공(空)의 한 면만을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부정해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은 유(有)의 개념과 공(空)의 개념을 초극한 중도의 묘한 이치,
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불성(佛性) 경계를 말씀하신 가르침이다.
공의 참뜻을 중도(中道)라 해 그 중도를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제3시의 중도교(中道敎)는 유(有)와 공(空)을
동시에 드러내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해심밀경> ‧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 공능(功能, 산스크리트어 samartha)---작용(作用), 기능(機能), 능력. 잠재력 수련법의 효능 즉 효과,
어떤 법(法) 즉 존재가 지니고 있는,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승불교의 유식 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근(根) · 경(境) · 식(識)의 3사(三事)가 화합(和合)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들 3사의 각각이 모두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는 공능(功能)
즉 작용(作用)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이 가진 이러한 공능 즉 작용에 의거해 3사화합의 상태로부터
마음작용이 생겨나는 것을 변이(變異)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의 공능(功能)을 화가에 비유해,
우주일체 만물만상이 오직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하셨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경우 아무렇게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인생철학과 사상을 담은 마음의 표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한 마음을 담은 그림이기에 세상을 변화시키고, 자기 자신의 온갖 능력을 계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담은 공능을 한 물건이라고도 하고, 진아(眞我)라고도 하며,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며, 이것을 달리 마음이라고도 한다.---→공용(功用) 참조.
* 공덕(功德, 산스크리트 구나/guna)---공양하는 덕, 불교에서 장차 좋은 과보를 얻기 위해 쌓는 선행을 말한다. 즉, 훌륭한 결과를 초래하는 공능(功能, 能力)이 선행을 통한 덕(德)으로서 구비돼 있음을 말한다.
복덕(福德)과 비슷한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공덕이라 하면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보시가 중요한 공덕이기는 하나,
행한 행위의 결과에 집착을 하면 오히려 선업이 아니라 악업이 될 수도 있다. 업(業)이든 복(福)이든
‘짓는 행위’는 공덕이 아니다. 공덕을 쌓고자 의도한 행위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덕을 쌓고자 한다면 겸손과 하심으로 남을 공경하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깨끗한 보시여야 한다.
그리고 베풀기에 앞서 자기 자신 안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하심과 겸손으로 일관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공덕은 능력을 말하고 복은 베품을 말한다. 그러니 공덕과 베품은 항상 다 필요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공덕이란 방편이다. 공덕이란 선행으로 쌓는 것인데, 이것의 근본은 자비심과 보리심이다.
선행의 근본이 바로 자비심인 것이다. 공덕이란 이러한 자비심이 바탕이 된 행위로 축적돼야 한다.
공덕을 쌓기 위해 자비심을 갖고 선행도 같이 병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공덕을 한마디로 말하면,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라 했다.
“성품을 보는 것이 공(功)이요, 평등은 이것이 덕(德)이니 생각 생각이 막힘없어 항상 본성의
진실묘용(眞實妙用)을 보는 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니라.”라 했다.
그리하여 달마(達磨) 대사가 처음 양무제(梁武帝)를 만났을 때 무제가 묻기를 ‘짐이 일생동안 절을 많이 짓고,
스님을 공양하고, 널리 보시를 하고, 재(齋)를 베풀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달마 대사의 말이 “실로 공덕이 없음이라.” 했다는데, 그 이치가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에,
육조 대사께서 말씀 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느니라.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하고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푸니, 이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라. 이런 복이 공덕이 될 수는 없느니라.
공덕은 법신 중에 있는 것이요, 복을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절을 크게 짖고 보시를 하거나 재(齎) 올리는 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지 공덕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공덕은 법신 중에 있는 것이고,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덕이 법신 중에 있다는 말은
공덕은 진리 자체에 있다는 말이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공덕이라는 뜻이다.
진리는 깨닫지 않고 물질적인 보시만 해서는 아무 공덕이 없다는 뜻이다.
* 공덕림(功德林)---범어 dhyana 음을 따 선나(禪那)라고 하며 줄여서 선(禪)이라 하는데,
뜻으로 번역하면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 기악(棄惡), 공덕림(功德林), 정(定)이라 번역한다.
이와 같이 ‘공덕림’은 선나(禪那) 또는 선(禪)을 뜻하는 말로서, 선을 이르는 별칭이다. 선근 공덕을 많이 쌓는
일이 마치 무성한 수풀과 같다는 의미이다. 수풀이 무성하면 많은 짐승ㆍ새ㆍ벌레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덕을 많이 쌓으면 그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의미를 더 확대해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공덕(功德)이란 자기나 남이나 누구나 간에
유익되게 하는 것이고, 총림에서 ‘총(叢)’은 ‘떨기 총’으로,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뜻이다.
공덕이 하나 둘이 아니라 마치 숲 모양으로 한도 끝도 없이 많은 것이 공덕총림이다.
그러데 그것이 선(禪)으로 말미암아 온갖 공덕이 축적된다고 해서 공덕총림 이라고 하므로 선찰(禪刹)을
또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공덕총림(功德叢林)이란 모두 선정의 뜻풀이라 하겠다.
즉, 선정(禪定)을 잘 실행함으로써 공덕을 쌓는 결과가 된다는 선정의 효과를 표시하는 말이므로,
선(禪) 또는 선정(禪定)을 대신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화엄경>는 공덕림(功德林)보살이라는 이름의 보살이 등장한다.
물론 실존 인물은 아니고 상상의 보살이다.
<화엄경> ‘야마천궁 보살설게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야마천궁에 결가부좌하고 앉으신 부처님의 주위에 여러 세계로부터 열 분의 부처님과 열 분의 보살이
모여들어 각각 결가부좌하고 앉았다. 그 열 분의 부처님 이름에는 상주안(常住眼). 무량안(無量眼) …
등과 같이 모두 '안(眼)'자가 붙어 있으며, 열 분의 보살 이름에는 공덕림(功德林). 혜림(慧林) …
등과 같이 모두 '림(林)'자가 붙어 있었다. 보살의 이름에 '림'자가 붙은 이유는 법계의 수행을 행하고
법계의 덕을 완성하는 것을 나타내어 그 덕이 높고 넓음을 나무에 비유해 '림'이라고 했다.”
* 공덕행(功德行)의 토대---공덕행의 토대는 경에서 보시로 이루어진 공덕행, 지계로 이루어진 공덕행,
수행으로 이루어진 공덕행을 말하는데, 이를 좀 더 세분하면 다음의 10가지를 든다.
① 보시(布施, dāna), ② 지계(持戒, sīla), ③ 수행(修行, bhāvanā), ④ 공경(恭敬, acāyana), ⑤ 봉사(奉仕),
⑥ 회향(廻向, pattidāna), ⑦ 더불어 기뻐 함(隨喜), ⑧ 법을 가르침(說法), ⑨ 법을 들음(聞法),
⑩ 자기 견해를 바로잡음.
* 공륜(空輪)---사륜의 맨 아래 허공을 말함.---→사륜(四輪) 참조.
* 공무(空無)---모든 사물은 낱낱의 자성이 없음을 말한다. 즉,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본성이 없음을 말한다.
형상 있는 일체의 사물은 개개의 자성(自性), 곧 실체가 없으므로 공무(空無)라 하며, 만물은 모두 인연의
소생으로서 그 본성은 실유(實有)의 것이 아니므로 공(空)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선(禪)에서 말하는 공무(空無)는 보다 더 절실하다. 선종(禪宗)에서는 낙공(落空),
즉 허무주의에 떨어짐을 공무라 지칭하는데, 요즘 말로는 ‘모든 것이 다 쓸데없다.’는 식의 생각을 공무라 한다.
나아가서 외도의 허무단멸론(虛無斷滅論)을 공무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란, 아무 것도 없는 공무(空無)나 허무(虛無)가 아니다.
따라서 공(空)과 공무(空無)는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공(空)은 진리이지만 공무(空無)는 번뇌의 일종이다.
그래서 단견(斷見)에 빠진 외도를 공무외도(空無外道)라 하며, 혼(魂)만 흩어지지 않았을 뿐
영락없는 죽은 사람을 말한다. 깜깜하고 아득해 아무런 느낌이나 인식이 없다.
이는 마치 자기 귀를 틀어막고 남도 못 듣겠거니 하는 부질없이 자기를 속이는 어리석은 자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겁(劫-칼파/Kalpa)은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져 지속되고 파괴돼 공무(空無)가 되는
시간을 말하며,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불가에서 이르기를 무릇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화합해 모인 것은 이별을 거쳐,
괴멸돼 마침내 공무(空無)에 이른다는 대자연의 이치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들 삶에서 만약 결과가 목적이라면, 배설을 위해 밥을 먹고, 어른이 되기 위해 성장하고,
인생의 목적은 죽음이고, 생명의 결과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空無)라는 어처구니없는 궤변이 나온다.
웃고 울고 즐기고 부대끼고 배우고 학습하는 과정이 인생이고, 만나고 좋아하고 싸우고 정들고 때론
헤어지기도 하는 과정이 사랑이다. 인간의 삶은 죽기 전까지 매순간 순간이 다 의미가 있다.
그게 인간이 인간 존재 자체로 존엄한 이유다.
* 공무변처(空無邊處, akasanancayatana)---사무색처(四無色處)의 하나. 무색계(無色界)의 제1천(天)으로
물질적 요소를 초월한 정신적 요소만을 갖춘 이들이 산다. 물질인 이 육신을 싫어하고,
끝이 없는 허공의 자재(自在)함을 기뻐하며, 공이 가없다는 이치를 아는 경지를 공무변처라 한다.
또한 허공은 끝이 없다는 이치를 체득해서 태어나는 곳이다.
akasa(허공)+ananca(끝없음)+ayatana(장소)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여기서 ‘무변(無邊)’은 가없는,
혹은 한없는 그러한 의미이고, ‘처(處)’는 처지, 경지, 곳이란 말이다. 따라서 허공은 무한하다고 체득한 경지,
그런 이들이 사는 곳이란 말이다.
그런데 「불교는 초기 근본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 이렇게 발전하면서 엉뚱한 이론을 만들어 혼란을
주는 면이 없지 않다. 이런 불합리한 논설은 폐기해야 하는데, 그 폐기해야 할 교설의 하나가 바로
사무색처(四無色處)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공무변처(空無邊處), 다음에 나오는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따위의
이론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도 있다. →사무색처(四無色處) 참조.
*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사무색정(四無色定)의 하나. 선정에는 그 정신통일 상태의 높낮이에 따라
초선(初禪) ․ 제이선(第二禪) ․ 제삼선(第三禪) ․ 제사선(第四禪)의 네 선정이 있고,
또 그 위의 탁월한 선정으로서 무색계선정인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따위가 있다.
이와 같이 공무변처정은 무색계선정 중 첫 번째 선정으로서 물질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사실을 깨달음 으로써 물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경지이다. 공무변처정은 외부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끝없는 공간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가없는 허공을 생각에 떠올리면서 염(念)하는 정신통일.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에 들어가기 위해 닦고 익히는
선정을 일컫는다. 물질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물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경지이다.---사무색정(四無色定),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 참조.
* 공ㆍ무상ㆍ무작(空無相無作)---공ㆍ무상ㆍ무원(無願)이라고도 하는데, 실체가 없음, 차별상이 없음,
욕구가 없음을 말한다. 이 셋은 3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도 하며,
해탈의 방법이 되는 3가지 선정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空)이란 일체의 것이 다 평등이라는 뜻이다. 얼굴이 각기 달라도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하다.
지혜가 있건 없건 인간은 인간으로서 평등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공(空)이다.
무상(無相)이란 일체의 사물을 평등하다고 보고 차별하지 않는 태도이다. 상(相)은 차별상(差別相)이다.
그런가 하면, 하고도 했다는 상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고도 줬다는 생색을 내지 않음이다.
무작(無作)이란 함이 없는 것이다. 무위(無爲)의 경지이다. 일부러 짓는 것이 없는 것으로,
공(空) 하니까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원(無願)은 원하거나 구하는 생각을 버림을 말한다. 무상이기에 구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공ㆍ무상ㆍ무작(空無相無作)의 삶이란 탐ㆍ진ㆍ치 삼독에서 멀어지는 생활을 하며, 인연으로 생하고 멸하는
이치를 알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며, 어느 곳에 있든지 지금 행하는 이 일이 나의 마지막 일이다고
생각하며 자타(自他)를 구별하지 않고 여한이 없이 사는 것으로 이것이 진실한 도의 길이다.
공(空)은 모든 사물이 평등하다는 것이고, 무상(無相)은 모든 사물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고, 무작(無作)은
원하거나 구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이렇게 세 단계의 삼해탈로 마음을 다스리면 소승교로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일체중생 구제론, 즉 대승의 <법화경> 관점에서 살펴보면, 사람마다 각각 다른 처지, 다른 지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각자에 알맞은 도(道)와 교를 주어 필경에는 일불승으로 인도해야 한다.
모두 행복하게 해주리라, 모두 부처님 경지에 도달하게 해주리라 하는 목표를 세워 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불승까지 도달하기에는 각자가 처해 있는 곳이 각각 다르니까, 모두 같은 방법으로는 일불승에
이르게 할 수 없으므로 사람에 따라 차별의 교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등 위에 입각해서 차별을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은 상대에 따라 각각 알맞도록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설하셨다.
변변찮은 사람에게는 변변찮은 사람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교를 설하시고, 고상한 사람에게는 고상한 사람이 감탄하도록 교를 설하셨다. 그렇다고 특별히 작위(作爲)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극히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작ㆍ무위의 경지에서 그렇게 이루어져야 심해탈이 될 수 있다.
* 공무아(空無我)---공이 곧 무아이고, 무아가 곧 공이라는 말이다. 초기불교에서 중요시 되던 삼법인 가운데
‘무아(無我)’라 한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므로 무아는 곧 공과 다름이 없다.
대승불교나 근본불교의 공통된 주요사상 가운데 하나가 이 무아사상과 공사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란, 근본불교나 대승불교는 물론 심지어 선종에 이르기까지 색의 자성(自性)이
공하다는 색성공(色性空)을 말한다. 색 그대로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색의 자성이 공하므로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해 생한다. 만약 색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연기가
성립할 수 없다. 연기가 성립되는 것은 반드시 자성공(自性空)이 근본이 돼야 한다.
색은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색은 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공무아라 했다.
<반야심경> 첫머리에 오온이 개공(皆空)이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요, 제법이 공상이기 때문에 불생불멸
이라고 했다. 색은 곧 법인데, 색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곧 공이고 실체가 없는 공이 곧 색이다.
이것은 공이 그대로 색이며 색이 그대로 공이라는 것이다. 색즉공, 공무아를 말하고 있다.
세존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이니라. 수(受)는 무아이니라.
상(想)은 무아이니라. 행(行)은 무아이니라. 식(識)은 무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까닭에 소유한 색의
과거. 미래. 현재. 안. 밖. 거침. 미세. 열등. 수승. 멈. 가까움. 등 이것은 나의 것(我所)이 아니며
나의 주체(我體)가 아니라고,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봐야 할 것이니라.”
- <남전대 제14 상응부경전> 여기서 색은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색은 공이라고는 뜻이다.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인정되는 초기경전에서 공무아(空無我)를 분명히 말씀하셨고,
따라서 공이 곧 무아이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은 이미 물이 아니고
물은 이미 얼음이 아니다. 에너지가 물질로 전환하고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하면, 에너지는 이미 물질이 아니고
물질은 이미 에너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전제한 우리 중생이 보는 관점이다.
중도의 관점에서 보면 얼음 그대로가 물이며 물 그대로가 얼음이고, 물질 그대로가 에너지이며
에너지 그대로가 물질이다. 그래서 색즉공(色卽空)인 것이고, 공무아인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전제로 해서 보는 우리 중생의 관점으로,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든가,
공이기 때문에 무아라든가 하는 이해로서는 절대로 공무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못된다.
체(體)가 곧 용(用)으로서 공이 곧 무아이다. 이것이 중도이다. 만약에 우리가 시간을 전제로 해서 부처님 말씀을 설명하게 되면 과학에도 미치지 못하는 견해가 되고 만다. 깨달음은 차치하고 이론만이라도,
이 위대한 구경의 진리를 과학의 발아래에다가 내 팽개쳐서는 안 된다. -<백일법문>
* 공문(空門)---공문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1) 불교 자체를 공문이라 한다.
불교 근본사상이 공(空)에 두고 있으므로 불문(佛門)을 공문(空門)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은 마음의 문제다.
마음은 공적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공문(空門)이라 한다. 그러니 공문은 곧 불문으로서,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 째 관문이 공문인 것이다. 그래서 사찰에서는 기둥을 일렬로 세우고 문짝을
달지 않은 일주문(一柱門)을 가장 앞쪽에 세운다. 문짝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일주문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죄 많은 사람, 깨끗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다 들어올 수 있고,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이 일주문이요 공문이다.
(2) 제법이 공(空)임을 사무쳐 아는 것을 공문이라 한다.
삼법인(三法印)이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세 가지 진리, 제행무상(諸行無常)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따라서 삼법인을 여실히 안다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성스러운 진리를 통해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된다. 그런데 해탈을 얻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는
문이 세 가지가 있다. 이를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 한다.
첫째가 공문(空門)이다. 일체법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고 인연이 화합해 생겨나는 것임을 여실히 관하고
통달하면 자재(自在)함을 얻는다고 했다. 제법이 무아(無我)이며 공(空)임을 사무쳐 아는 것이다.
둘째는 무상문(無相門)이다. 일체법이 공(空)임을 통달하고,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차별상(差別相)이 없음을 여실히 관해 통달하면 차별상을 여의고 자재함을 얻게 된다.
셋째는 무원문(無願門)이다. 일체법이 공(空)이요 무상(無相)임을 여실히 안다면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
바란다는 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므로 무엇을 구할 때 얻어지지 않으면 고(苦)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제법의 실상을 안다면 무엇을 바라는 욕망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원하고 구할 대상이 없는 것이므로
생사윤회의 동력이 되는 업(業)을 짓지 않으므로 업으로 인한 고통이 생기지 않게 되므로 자재함을 얻는다.
이렇게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 등의 삼삼매(三三昧)에 의해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므로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 하고, 그 첫째가 공문이다.
(3) 사문(四門)의 하나가 공문이고, 사구(四句)의 하나가 공문이다.
천태종에서는 진성(眞性)의 이(理)에 증득해 들어가는 문으로서 존재의 양상을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즉, 교법을 유와 공으로 분별해 제1이 유문(有門), 제2가 공문(空門), 제3이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
제4가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 이렇게 4문으로 나눈다. 여기서 유(有)는 있다, 무(無)는 없다,
역유역무(亦有亦無)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비유비무(非有非無)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
이런 논리구조이다. 모든 존재를 이 네 가지 논리형식으로 고찰하는 방법을 사문(四門)이라 한다.
이는 유(有)에 집착함을 다스리기 위해 온갖 사물을 실체와 자성(自性)이 없다고 말한 공리(空理)의 법문이다.
따라서 원교(圓敎)의 중심사상을 유(有) · 공(空) · 역공역유(亦空亦有) ·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원교란 중도(中道)를 바르게 나타낸 것으로 양변을 다 차단함이다. 유ㆍ무(有無)도 차단하고,
고ㆍ락(苦樂)도 차단하며, 선과 악, 생사와 열반, 마구니와 부처 등 상대적인 것은 모두 차단해버린다.
상대적인 어느 한 쪽을 집착하게 되면 변견으로서 불법이 아니고 중도도 아니다.
이와 같이 원교는 중도를 표방한 것인데, 양변을 떠난 동시에 양변에 원융해 공(空)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이러한 원교의 중도관에 따르면 십법계의 중생을 보되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물속의 달과 같아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밝은 거울 속의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분명히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며, 물속에 달이 비치어 달이 물속에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달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幻)인 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기도 한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 하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다.「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 할 뿐이다.」라고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된다.
•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제1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
• 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제2구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제3구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제4구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한다.
나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사람이 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다.
즉,「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게 더 있다. 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난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사구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백까지만이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해 어떠한 존재나 이론,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百非)라 한 것이지, 사구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래서 사구백비라 한다.
사구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백비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있다.
• 처음에 있다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제1비(第一非)가 되고,
•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제2비(第二非)이다.
•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제3비(第三非)가 되고,
•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은 제4비(第四非)가 된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은 모르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제5비(第五非)가 또 나오게 된다,
이렇게 정반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니 비(非)자를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면 부정이 된다. 이렇게 비자를 계속 붙여서 사고ㆍ관념을 초월하자는
궁극적인 듯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다.
* 공반야(共般若)---<대지도론>에서는 2종 반야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공반야(共般若)로서 공(共)은
공동의 뜻이다. 이 공반야는 성문(聲聞)ㆍ연각(緣覺)ㆍ보살(菩薩)의 삼승(三乘)을 위해 공통으로 설한 반야법문
으로 〈반야경〉등 여러 대승경전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불공반야(不共般若)로서 불공(不共)은 공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불공반야는 보살 전문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는 보살만을 위해 말한 것으로 성문ㆍ연각에는
공통하지 않은 반야의 법문이다. 이는〈화엄경>에서 말한 것들로서
〈화엄경>은 부처님 지혜를 끝까지 다해 말한 것이어서 2승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공이라고 한다.
* 공병(空病)---공병이란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공(空)의 이치에만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빠져드는 그릇된 견해이다.
그리하여 공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무(空無)하다는 뜻이나,
허무주의로 잘못 해석해 불교의 본뜻에 맞지 않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하는 공병이다.
처음 공 이론이 성립되고, 그 후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이런 공의 교리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공견(空見)에
빠지게 됐다. 이를테면 모든 것은 공이다 해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이것을 공견(空見) 혹은 공병(空病)이라고 하는데, 공사상(空思想)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 무(絶對無-단멸공)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스스로의 자아(自我)가 없어서
무아(無我)라고 하고, 자아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무자성인 공(空)이라고 한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은 원시불교의 연기관(緣起觀)과 부파불교의 공관(空觀)을 총합해 일체제법이
공이라고 했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을 설했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해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 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이러한 교설은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모든 인연에 따라 생겨지는 현상을 공이라 하고,
또한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하고, 또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칭한다.
일찍이 하나의 현상도 인연에 따르지 않고 생한 것은 없으니, 이런 고로 일체 현상은 공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무(絶對無-단멸공)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 박영동 →공(空), 공견(空見), 악취공(惡取空) 참조.
* 공부(工夫)와 공부(功夫)---둘의 뜻은 같다. 학문을 배워 익히는 일을 가리킨다.
• 공부(工夫)는 불교에서 말하는 주공부(做工夫)에서 유래한 말이다.
‘주공부’란 불도(佛道)를 열심히 닦는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부(工夫)는 참선(參禪)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참선에 진력하는 것을 "공부한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불가에선 참선하는 것을 공부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 공부(工夫)에 관한 기록은 선어록(禪語錄)에
많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부는 간절하게 해야 하며 공부할 땐 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며, 공부할 땐 오로지 앉으나 서나 의심하던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부하다 죽어라”라고 하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왔다.
이 말이 훗날 바뀌어 학문을 배워 익히는 일을 가리키게도 됐다.
• 공부선(功夫)---공(功)들여 정성을 다한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리하여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이란
말이 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선사께서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래 부처인
진심(眞心)을 올바로 드러낼 수 있도록 참선하는 방법을 집대성해 열 가지로 구성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가했다.
그리고 열 가지 무심공부를 자기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익혀갈 것을 당부했는데,
이를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이라 했다.
그리고 공부선(功夫選)이란 말도 있다. ‘공부선’은 고려 말 공민왕이 마음먹고 불교계를 개혁하려고
실시한 승과(僧科)였다. 그 규모가 불교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행사로서,
이때 나옹(懶翁, 1320년∼1376년) 화상이 이를 주관했다.
이와 같이 둘 다 불교에서 유래된 말인데, 오늘날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할 때는,
공부(工夫)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 공부선(功夫選)---공부선은 공민왕이 마음먹고 불교계를 개혁하려고 실시한 승과(僧科)였다.
그 규모가 불교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행사로서, 이때 나옹(懶翁, 1320년∼1376년) 화상이
이를 주관하게 되면서 나옹은 이후 실질적인 고려불교의 1인자 역할을 구축하게 됐다.
그리고 이때 공부선의 판단기준으로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을 만들었으나,
공부선의 자리에서는 시간문제가 있어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작성된 공부십절목은 나옹의 선사상이 가장 체계적으로 온축돼 있는 자료라고 한다.
공부십절목 이라는 명칭은 몽산(蒙山)의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과 유사하지만, 구조적 으로는 차제론(次第論)
으로 돼 있기 때문에 양자는 전혀 다른 관점에 의한 독창적인 것이다. 공부십절목은… 선수행의 문제제기와 성숙, 그리고 이의 완성 으로서의 돈오(頓悟), 끝으로 깨달음 이후의 작용에 관한 것이다.
나옹은 공부십절목을 단순히 혼자서 창안한 것이 아니라, 선문(禪門)의 전설(前說)과 당시의 일반론에 근거해서 만들었다. 그럼에도 공부십절목이 주목될 수 있는 것은, 나옹이 당시의 선불교에 안주하지 않고 개혁을 통해서
선의 정신을 새롭게 창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즉 공부십절목에는 중국의 선불교를 넘어서려는,
고려 선불교의 정신이 온축돼 있다. - 염중섭
나옹 선사의 공부십절목 요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세상 사람들은 색을 보되 그 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소리를 듣되 그 소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색과 소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② 이미 성색(聲色)을 초월했다면 반드시 올바른 공부가 필요하니, 어떻게 그 바른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
③ 이미 공부를 시작했으면 그 공부를 익혀야 하는데 공부가 익은 때는 어떤가.
④ 공부가 익었으면 나아가 콧구멍(鼻軫-본래면목)을 타파해야 할 것이니,
콧구멍(본래면목)을 타파했을 때는 어떠한가.
⑤ 콧구멍을 타파하면 냉냉담담하고, 전혀 재미가 없고 기력도 없으며, 의식이 닿지 않고 마음이 활동하지 않으며 또 그때에는 환신(幻身-허깨비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 줄을 모른다 했으니, 이것이 어떤 경계인가.
⑥ 공부가 지극해지면 동정 (動靜)에 틈이 없고 자고 깸이 한결같아서, 한 생각도 잃 지 아니하여,
마치 개가 기름이 끓는 솥을 보고 핥으려 해도 핥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 같나니,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⑦ 갑자기 120근 되는 짐을 내려놓는 것처럼 졸지에 꺾이고 갑자기 끊어진 때에 이르러서,
그때는 어떠 한 것이 그대의 자성 (自性) 인가.
⑧ 이미 자성을 깨쳤으면 자성의 본래 작용은 인연을 따라 맞게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본래의 작용과 인연에 응용하는 것인가.
⑨ 이미 자성의 작용을 알았으면 생사를 초탈해야 하는 것이니, 죽을 때 어떻게 초탈할 것인가.
⑩ 이미 생사를 해탈했다면 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4대(四大)는 각각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 선사가 제시한 열 가지 공부 방법을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이라 한다.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래 부처인 진심(眞心)을 올바로 드러낼 수
있도록 지눌은 중국 및 우리나라 조사(祖師)들이 언급했던 참선하는 방법을 집대성해 열 가지로 구성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가했다. 그는 열 가지 무심공부를 순서에 따라서 차례대로 닦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한 가지만을 택해서 공부를 성취하면 그릇된 마음이 사라지고 진심이 드러나는 것이므로,
자기 근기(根機)와 버릇에 맞추어서 익혀갈 것을 당부했다. 10절목의 뜻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각찰(覺察) ― 깨달아 살핀다는 글자의 뜻과는 달리, 생각을 하지 않는 공부이다.
수도자가 처음에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다가 망념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이번에는 망념을
없앴다는 생각, 깨달았다는 생각이 남게 되는데, 그것마저도 없애는 공부를 각찰이라고 한다.
즉,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수도자의 경우 화두만을 생각하고, 망념이 일어날 때는 곧 각찰해서
화두로 돌아가게 하는 수행법이다.
② 휴헐(休歇) ― 쉬고 쉬는 공부방법이다. 악은 물론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선에도 집착하지 않는 공부이다. 즉, 선악 등 모든 이원화된 생각을 쉴 때 진심이 드러나는 것이므로
‘바보같이, 말뚝처럼’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마음 쉬는 공부를 강조했다.
③ 민심존경(泯心存境) ― 마음속의 망상을 없애고 경계를 두는 공부로서,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다. 마음속의 망심이 모두 사라지면 대상의 경계가 있다고 해도
장애가 될 수 없다. 신라 원효(元曉) 대사는 이러한 공부를 여실수행(如實修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④ 민경존심(泯境存心) ―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는 공부이다. 모든 대상세계가 헛된 것이라고 보고 대상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진심만이 온전하게 남아서 드러나게 된다고 했다.
⑤ 민심민경(泯心泯境) ―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는 공부이다. 먼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의 모든 것이 헛됨을 알아서 경계를 없애고, 다음에 주관적인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없앤다.
⑥ 존심존경(存心存境) ― 마음도 두고 대상도 두는 공부방법이다. 공부를 할 때 마음이 있을 자리에 가 있고,
경계가 경계의 본자리에 머물러서 각각이 있을 자리에 분명히 있으면, 마음과 경계가 서로 맞서게 되더라도
마음은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경계가 마음을 사로 잡으려고 하지 않으며, 서로가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시비비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망년된 생각이 나지 않아서 진심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⑦ 내외전체(內外全體) ― 안과 밖이 모두 체(體)라고 보는 공부방법이다. 공부를 할 때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내신외기(內身外器) 등 모든 것이 진심의 체라고 생각하는 것,
즉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는 공부이다.
⑧ 내외전용(內外全用) ― 안과 밖이 모두 진심의 작용이라고 보는 공부이다. 말하고, 밥 먹고, 옷 입는,
모든 행위는 진심에 근거해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몸을 떠나서 따로 진심의 작용이나
도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⑨ 즉체즉용(卽體卽用) ― 체가 곧 용이요, 용이 곧 체임을 깨닫는 공부이다. 공부를 할 때 고요한 진심의 체를
바탕으로 해서 밝게 보는 작용을 잃지 않는 것이다. 즉, 마음을 고요히 했을 때 밝게 보는 작용이 나오고,
밝게 보는 가운데 역시 고요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고 그렇게 되게 하는 공부이다.
⑩ 투출체용(透出體用) ― 체와 용을 함께 표출시키는 공부로서, 안과 밖,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 등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하나의 큰 해탈문(解脫門)으로 만들어서
털끝만큼의 빈틈도 없이 온몸을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지눌은 이 열 가지 공부방법이 모두 무심공부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인위적으로 애씀이 없이 이루어지는 자연공부(自然功夫)ㆍ무공지공(無功之功)이 돼야 한다고 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런데 고려 후기의 선승인 나옹 혜근(懶翁慧根, 1320-1376) 선사가 제시한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도 있다.
→공부선(功夫選) 참조.
* 공불이색(空不異色)---공(空)은 형상이 없다. 색(色)은 형상이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형상 없는 공(空)이 형상 있는 색(色)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색은 유형이지만 그것이 무상한 것이다. 항상 변해가기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다. 색은 법(사물)에 해당하므로 무아,
즉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실체가 없는 색이므로 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므로
공과 색은 다르지 않다. 즉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말이다.
색이 비록 형상 있이 있다고 하지만 무상하므로 결국 영원히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두 다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색불이공이다. 그러나 형상이 없어졌다가도 다시 또 형상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공불이색이다. 그래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 되는 것이다. 공(空)은 형상 없는 본래자리, 색(色)은 형상 있는 현실세계를 말한다. 우주 만유는 불생불멸의 진리 따라 형상 있는 것은 형상 없는 것으로 바뀌고,
형상 없는 것은 다시 형상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색을 보고 공이 될 것을 알고, 공을 보고 다시 색이 될 것임을 아는 것이 곧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마음공부이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원리가 지금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등가원리가 이를 말하고 있다.
→‘불생불멸과 중도(性徹 스님 법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조.
* 공삼매(空三昧, 산스크리트어 śūnyatā-samādhi)---공삼마지(空三摩地)라고도 한다.
불교 용어로서의 한자어 공(空)에는 허공 · 공간을 의미하는 공(空, 산스크리트어 ākāśa)이 있는데, 지(地, prthivī) 수(水, ap) ․ 화(火, tejas) ․ 풍(風, vāyu) ․ 공(空, ākāśa) ․ 식(識, vijñśna)의 6대에서의 공이 이 경우이다.
또 어떤 것의 실제 내용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공하다고 할 때의 공함[空, śūnyatā]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일체개공 에서의 공이 이 경우이다. 공삼매(空三昧)에서의 공은 후자의 경우이다.
모든 현상은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관조하는 삼매를 말한다.
즉, 공삼매는 일체 모든 현상[일체제법]이 다 공함(śūnyat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 즉 '일체가 다 고(苦)'라고 하는 진리의 네 가지 모습[행상(行相)]
가운데에서 공, 무아 두 가지 모습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삼매이다.
이 삼매를 통해 모든 현상이 인연으로 일어나며, 나와 나의 것 둘이 모두 공함을 본다.
즉, 중도를 깨달아 이사무애(理事無碍)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함이 공삼매이다.
공(空)삼매, 무상(無相)삼매, 무원(無願)삼매를 삼삼매(三三昧)라 하는데, 중도를 깨달아 오로지 반야만이 뚜렷한 지혜가 무상삼매이며, 중도를 깨달아 이미 만족해 더 구할 것이 없음이 무원삼매이다. →삼삼매(三三昧) 참조.
* 공상(空相, śūnyatā-lakṣaṇa)---제법개공(諸法皆空)의 모양, 공한 모습을 말한다.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긴 것으로 그 자성(自性)이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상(空相)이라 한다.
* 공상(共相, 빠알리어 sāmañña-lakkhaṇa)---공상이란 다른 것과 공통되는 일반적인 성질을 말한다.
여러 가지 것에 공통한 모양, 이를테면 낱낱 물건의 자체는 자상(自相, paccatta-lakkhana=sabhava-lakkhana)
이고, 꽃이 푸르고, 과일이 푸르고, 옷 빛깔이 푸르고 한 것은 자타가 공통하게 알고 있는 푸른빛 이므로 공상이다. 가을의 산이 빨갛고 불이 빨갛고 옷이 빨갛다고 할 때의 공통의 빨강을 가리켜 공상 (共相)이라고 하고,
파랑 혹은 노랑 등과 구별되는 빨강 그 자체를 가리켜 자상(自相) 또는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소나무와 장미꽃은 각각 자상을 지녔지만 다 같이 식물이란 점에서 공상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불공상(不共相)이란 다른 것과 공통되지 않는, 자기에게만 속한 모양을 말한다. 이에 반해 공상(共相)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함께 받아쓰는 과보인 세간(器世間), 즉 산하대지 등 현상계가 변해 흘러가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불공상이란 타자가 따로 없는 자기이고, 천상천하에 자기뿐인 상인 것이다.
따라서 법은 자상과 공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인 특징인 공상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특징인 자상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으로, 개별적 특징을 자상으로 번역했다.
이 자상과 공상은 법(dhamma)을 파악하고 구명하고 이해하고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아비담마와 중관(中觀)과 유식(唯識)과 여래장(如來藏) 계열의 모든 논서에 적용돼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상과 공상에 대한 이해 없이 불교교학을 논할 수가 없다. - 각묵 스님
* 공성(空性, 산스크리트어 sunyata)---공(空)의 상태를 말한다. 비어 있고,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을 공성(空性)
이라고 한다. 즉, 공성이란 변화의 이유를 말하고, 무상(無常), 연기(緣起), 모든 존재의 참 모습, 중(中)의 실천
[중도(中道)]이다. 또한 공성은 진여실상(眞如實相), 불성(佛性) 등 여러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무릇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성이다. 본래부터 굳어있고 고정된 것이라면 어떤
것도 새로 만들어질 수 없다. 공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마음을 내어 해탈도, 성불도 가능하고, 공성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려우나 내일의 희망이 있다. 색(色)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空)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그리고 공성은 호(好)ㆍ불호(不好)에 관계없이 만법(萬法)에 평등하다. 마치 텅 빈 거울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그대로 비춰주는 것과 같다. 이러하므로 마음공부 자체가 곧 수행이며,
마음공부의 목표는 마음의 본질인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다.
<법화경> 이전엔 자비와 공성이 차원이 다른 것으로 생각했다. 자비는 주로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행위의 덕목인데 비해, 공성은 일상의 사고방식 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초월적 경지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자비와 공성을 함께 구현해야 할 사명으로 천명하고,
인내는 자비와 공성을 구현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 했다.
공성이란 분별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떨쳐 버렸을 때 만나는
우리 삶의 본디 모습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말한다. 때문에 공성이란 삶의 밑바탕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드러난 삶 그대로 공(空)인 연기관계를 말한다.
* 공성(空性)에 대한 바른 이해---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비로소 지혜가 완성되는 기초를 갖게 된다. 그래서 공성을 이해해야 보리심이 나오고,
자비심이 나오며, 육바라밀을 행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물질과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의식[色受想行識]으로 구성됐다고 생각한 내가 사실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임을 알게 될 때 깨달음의 길을 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의 세계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현 위치와 실상을 제대로 알 때 바로 여기가 가길 원한
그 곳이다. 자신의 인지의 틀에 대해 들여다보는 반성적 사유 과정을 통해 세계에 대한
나의 이해가 잘 못됐음을, 무명(無明)이었음을 알고 공부를 시작해야한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읽어내려면 “결정된 것은 없으며 존재는 행위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공”에 대한
바른 이해의 전제가 필요하다. 공성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 풀리지 않는다.
늘 우리가 들어내고 있는 유(有)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존재로 당연히 생멸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존재란 취해서 발생된 것일 뿐, 모든 것은 공성을 특징으로 한다. 즉, 꽃은 단지 피니까 꽃이며
더러움과 깨끗함도 때가 묻으니 더러울 뿐, 본래 더러운 것은 아니다.
결과는 "행위"에 의존해 나타나며 이것이 세계이다. 삶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선택되며,
미리 결정된 것은 없다. 공성의 관점에서, 어떠한 삶에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
불성(佛性)이란 누구든 자신의 선택에 따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음을 뜻한다. 바른 견해를 통한 정진 결과,
피안에 도달했다면 이에 이르게 한 지혜의 뗏목에서도 내려야한다. 그는 이미 삶의 전도된 생각이나
어떠한 두려움으로 부터도 멀리 떠나 있다. - 근본불교연구회
* 공시교(空始敎)---당나라시대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은 불교의 가르침을 소승교(小乘敎) ․
대승시교(大乘始敎) ․ 대승종교(大乘終敎) ․ 돈교(頓敎) ․ 원교(圓敎) 등의 5교(五敎)로 분류했다.
그 중 대승시교란 소승으로서 처음 대승에 들어온 이들의 얕은 교법, 즉 대승불교 가운데 초보적인 단계라는
의미에서 시교(始敎)라 한 것이며, 여기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의 둘이 있고,
상시교는 유식학, 공시교는 중관론을 말한다.
상시교는 유식학과 이에 관련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 <해심밀경> ․ <유식론> 등을 말하고,
공시교는 공(空)사상을 설한 <반야경> ․ <중론> ․ <백론> ․ <십이문론> 등 일체의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곧 현상작용의 면에서 모든 사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식설을 상시교라 하고,
모든 사상은 다 공이라는 진리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사상(반야경ㆍ삼론종 등)을 공시교라 했다.
그러니 상시교는 유식학에 해당하고, 공시교는 중관론에 해당한다.
* 공실도인(空室道人, ?~1124)---중국 송나라 때 임제종 양기파의 효영 중온(曉塋仲溫) 스님이 1155년경 지은
<나호야록(羅湖野綠)>에 나오는 비구니 이름이다.
공실도인은 명문 범(范)씨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고요히 참선하는 것을 즐겼다. 젊은 날, 하루는 소양 운암사의 황룡 사심(黃龍死心, 1044~1115) 선사를
찾아뵈었는데, 한마디 말끝에 요체를 깨닫고 게송을 지어 사심 선사를 찬탄했다.
“소양의 사심 선사 신령한 근원 매우 깊어 귀로는 색을 보고 눈으로 소리 듣는다.
범인은 명철하고 성인은 혼매하며 뒤로는 부귀하나 앞으로 가난하여 중생에 이익 되고 만물을 제도하니
쇠를 녹여 황금을 만드는데 단청의 겉모양은 옛 것도, 지금 것도 아니로다.”
이에 사심 선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죽은 마음(死心)’은 참이 아닌데 어디에다 찬양하는가. 죽은 마음을 찬양한다면, 죽은 마음이란 형상이 없다.
허공을 찬양한다면, 허공은 자취가 없다. 형상과 자취가 없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말을 할 수 있다면 친히 사심(死心)을 보리라.” 이에 공실도인이 응대했다.
“죽은 마음은 참이 아니요, 참은 죽은 마음이 아닙니다. 허공이란 형상이 없고 묘유(妙有)는 형체가 없습니다.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면 친히 사심을 볼 수 있겠지요.” 이에 선사는 미소를 지었다. 선문답의 차원이 매우 높다.
영원(靈源惟淸:?∼1115) 선사가 그녀에게 공실도인(空室道人)이라는 법호를 지어주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그녀가 금릉에서 살 때(1111~1117년), 원오(圓悟克勤, 1063~1135) 선사는 장산사의 주지로 있었고
불안(佛眼淸遠, 1067~1120) 선사도 그곳에 있었다. 거기서 기연이 맞아 두 선사가 칭찬했지만, 그녀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았다. 도(道)의 운치는 매우 담담했으나 바른 견해를 드러낼 때는 치밀하고 엄격했다.
그녀의 게송 중에 <법계관(法界觀)>을 읽고 쓴 구절이 있다.
“사물과 나는 원래 둘이 아니니 삼라만상이 거울에 비친 상처럼 똑 같구나.
밝고 밝아 주체와 상대를 초월하고 분명하고 분명해 진공(眞空)을 깨쳤네.
한 몸에 많은 법을 지님은 제석천의 법 그물에 얽힌 듯한데,
겹겹이 쌓인 끝없는 뜻은 움직임과 고요함에 모두 통하는구나.”
또한 그녀는 보령사에서 목욕탕을 마련하고 문 위에 글을 지어 붙였다.
“한 물건도 없는데 무엇을 씻는단 말인가.
티끌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오묘한 이 하나를 말해내야 모두가 목욕할 수 있으리라.
옛 신령스런 이는 등을 문지를 줄만 아는데,
보살은 언제 마음 밝힌 적 있었던고.
‘때 묻지 않은 곳(離垢地)’을 깨닫고자 하면 온몸에서 흠뻑 땀을 빼야 하리라.
물은 때물 과 때를 한꺼번에 없앤다 해도 여기에 이르러 또 한 번 씻어야 하리라.”
뒷날 고소산 서축원(西竺院)에서 삭발을 하고 비구니가 돼 승려 생활에 전념했으며,
1124년 가부좌한 채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 효영 스님은 그녀를 이렇게 평했다.
“공실도인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부귀에 얽매이지 않았고,
미련 없이 월상녀(月上女: 유마거사의 딸)를 뒤따라 ‘위없는 깨달음(無上菩提)’으로 달려 나갔다.
또한 비구니로서 철마(鐵磨 : 위산 선사와 선문답했던 유철마 비구니) 스님과 쌍벽을 이루었다."
* 공심(空心)---자기고집에 집착하지 않는 텅 빈 마음. 아무런 욕심도 없고, 사량 계교 번뇌 망상도 없이 순수하고 청정한 본래마음을 말한다. 물 흐르고 바람 불듯 자연과 하나 된 마음이다. 이와 같이 공심은 천지자연의
운행과 같다. 공심은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그저 노력한 만큼, 정성들인 만큼 자연스럽게 되는 마음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가 모두 공하다[一切皆空]고 말씀하셨다. 지ㆍ수ㆍ화ㆍ풍 사대(四大),
색ㆍ수ㆍ상ㆍ행ㆍ식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만법이 모두 공하다. 우리의 육체 또한 공하고,
각 사람 사람이 모두 공하므로, 현재 이 자리의 모든 것이 공하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바로 그러한 자리에 있을 때, 산하대지 일체가 모두 공심이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반야 지혜로써 살아가고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육체와 온 우주 또한 그와 같이 관찰해 고정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며, 이것이 바로 공심(空心)이고 불심(佛心)이다.
* 공안(公案)---공안은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약칭으로서, 공안(公案)의 사전적 의미는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서라는 뜻이며, 공정해서 범치 못할 법령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법과 사회적 규범이 명확하게
자리 잡지 않았던 고대에는 관청의 문서 자체가 공정한 법령이어서 이에 따라 시비를 판단하는
표준규범이며 법이었다. 그런 관공서의 문서를 가리키는 말이 공안이다.
이것이 선가(禪家)에 받아 들여져서 선가에서 사용하는 특유의 용어로서 참선 수행자가 궁구하는
문제를 말하게 됐다. 즉, 선종에서 조사(祖師)가 깨달은 기연(機緣)이나 학인을 인도하던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
공부하는 규범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공문서란 뜻에서 유래된 이 공안은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규범성과 판단의 준칙이 되는 핵심적인 명제를 의미하게 됐다.
선(禪)을 시작하는 제자들의 정진을 돕기 위해 스승이 과제로 제기하는 파격적인 선문답(禪問答)으로서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인데, 주로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다. 한국불교의 참선수행도
공안참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정도로 공안은 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공안을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화두와 공안은 약간 다르다. 화두는 공안보다 좀 더 간결하고 핵심적이다.
즉, 공안은 선문답 전체를 가리키지만 화두는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한 구(句)를 뜻한다.
결국 공안은 간화선(看話禪) 또는 공안선(公案禪)의 수행에서 화두(話頭)로 사용하는, 뛰어난 선(禪)
수행자의 깨달음이나 인연 또는 언행으로서,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참선하는 수행자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기되는 부처나 조사의 파격적인 언행(言行)으로서,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부처나 조사의 역설적인 말이나 문답을 말한다.
공안에는 고칙공안(古則公案)과 현성공안(現成公案)이 있다. 공안을 일명 고칙(古則)이라고 하지만
고칙공안은 고래로부터 전해 오는 지난날의 옛 조사 선사들이 남긴 공안을 말하며, 현성공안은 현재 생성돼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는 입장에서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 공안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곧 진리 그 자체이므로 그것을 참선하는 수행자에게 제시된 과제로 한 것을 말한다. 꼭 ‘무(無)’자나 ‘이 뭣고’만이 화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른 마음에서 보면 우주만유가 다
화두라는 것이다. →화두(話頭),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 현성공안(現成公案) 참조.
* 공안(公案)과 화두(話頭)의 차이---간화선에 있어서 그 핵심인 공안(公案)과 화두(話頭)를 두고 그동안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 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엄격히 다르다. 본래 공안이란 관공서의
문서를 가리켜 부르는 말로서, 위반해서는 안 되는 공정한 법령을 말했으며,
그 법령에 따라 시비를 판단하는 표준이 됐다. 이후 이러한 공안의 의미가 선종에 채용돼 깨달음의 정도를
판정하는 규범의 뜻으로 쓰였다. 공안은 중국에서 선종이 성립된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전등록(傳燈錄)>에 수록된 1,700 공안은 이후로 선종의 가풍을 주도하는 핵심이 되기도 했다.
공안은 당대에 옛 선사들이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흔히 사용했던 선문답(禪問答)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사건
사례에 불과하지만, 화두는 공안 가운데 핵심이 되는 언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것으로 비록 공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현재 시점에서 나에게 적용되는 공부법인 것이다.
즉, 공안집(公案集)에 수록된 공안들은 과거사건으로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저기에 놓인 것’이지만
화두는 내게 직접적으로 대답을 요청하는 절박한 실존적 과제이다.
화두(話頭)란 참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함에 있어서 스승이 제자에게 제시되는
문제(주제)를 일컫는다. 즉,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나 핵심 주제이다. 그리하여 화두를 통해 ― 화두를 들고 수행자가 큰 의심을 일으키고[참구(參究)],
스스로 그 의심삼매에 들어 무심의 경계에 든 후, 홀연히 무엇을 보거나,
혹은 무엇을 듣는 찰나에 화두를 타파(打破-깨달음)하게 되는데, 그런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간화선을 확립시킨 중국 남송(南宋) 시대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화두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지,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삿된 마귀다.”라고 할 정도로 화두와 공안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한번 화두와 공안(公案)의 개념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예를 들어 조주(趙州779-897)의 무자(無字)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에 조주가 답했다. 없다.”라는 대화가 있다.
위에서 어떤 스님이 묻고 조주가 대답한 대화 전체는 공안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대답인 ‘없다[無]’는
화두이다. 그래서 화두는 질문이든 대답이든 공안에 포함된 핵심 어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공안과 화두를 혼용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화두를 의미한다. →화두(話頭) 참조.
* 공안집(公案集)---공안을 모은 저서를 말하며, 유명한 공안집으로는 중국 측에는 <벽암록(碧巖錄)>,
<종용록(從容錄)>, <무문관(無門關)>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것으로는 <선문염송(禪門拈頌)>이 있다. 선문염송은 고려시대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의 제2조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선사가 1226년(고종 13년)에 편찬 간행한 선문공안집(禪門公案集)이다.
* 공양(供養, 산스크리트어 pujana)---공양은 보통 음식ㆍ의복 등을 삼보(三寶)에게 공급해 자양(資養)한다는
뜻을 지닌다. 불공(佛供)을 ‘붓다 뿌자(Buddha-puja)’라 한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을 말한다.
마성 스님의 글에 따르면 공양이 다음과 같이 정리 된다. 공양이란,
첫째,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이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우리나라 에서도 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공양이라 한다. 그런 공양개념을 빼면 세 가지이다.
첫번째 의미는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이다. 이는 남방 테라바다 불교와 의미가 다르다.
한국불교 에서는 육법공양이라 해 향·등·차·과일·꽃·쌀 이렇게 여섯 가지를 부처님 전에 올리는 것을 말하지만,
남방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단지 향과 꽃을 올릴 뿐이다. 특히 꽃의 경우 핀 꽃을 꺾어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꽃을 주어서 바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의 불상 앞을 보면 매우 소박하다.
공양의 두 번째 의미는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의 뜻이다. 테라바다 불교의 경우 오로지 부처님 한분만을 믿기 때문에 불공의 의미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경과 찬탄, 칭송, 예배가 될 수밖에 있다.
그리고 세 번 째 공양의 의미는 봉사이다. 이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가 진정한 공양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불 ․ 법 ․ 승 삼보에 대한 공양이다.
이런 공양에는 기대하고 바라는 기도가 있을 수 없다.
공양은 불 ‧ 법 ‧ 승 삼보나 사자(死者)의 영혼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로서,
원래는 주로 신체적 행위를 말해 왔는데, 나중에는 정신적, 물질적인 것까지를 포함하게 됐다.
즉, 독경과 예불을 함으로써 숭경(崇敬)의 뜻을 나타내는 공경공양의 정신적 태도 외에 시주(施主)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됐다. 불교경전에 나오는 공양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이종공양(二種供養) ― 향화ㆍ음식 등 재물(財物)을 공양하는 이(利)공양과
교설(敎說)과 같이 수행해 중생에 이익을 주는 법(法)공양.
② 삼종공양 ― 향화ㆍ음식을 바치는 이공양, 찬탄 공경하는 경(敬)공양, 불법을 받아서 수행하는 행(行)공양.
③ 사사공양(四事供養) ― 음식ㆍ의복ㆍ와구(臥具)ㆍ탕약공양.
④ 오공양(五供養) ― 등(燈), 다(茶), 화(花), 병(騈:떡), 과(果)를 차례로 부처님 전에 올린다.
이는 밀교의 공양방식으로서, 이와 관련해서 오공양작법무(五供養作法舞)라 해서 나비춤 형태의
춤사위가 펼쳐지기도 한다. 즉, 오공양(五供養)은 몸으로 다섯 가지를 부처님께 공양하는 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춤 혹은 불교 무용을 작법(作法)이라고 하며, 불교의식(영산재, 수륙재 등)에 등장하는 행사 중에
하나이다. 이때 사용되는 음악을 범패(梵唄)라고 한다.
이러한 불교 무용(작법)에는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이 있다. 바라춤은 양손에 큰 바라를 들고 추는 춤이고,
법고춤은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법고를 치면서 하는 작법이다. 그 외에 육종공양, 십종공양 등도 있다.
* 공양구(供養具)---공양구는 불ㆍ보살 전에 공양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법구(法具)와 스님에게 올리는
반승(飯僧) 행사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이는 매우 중요한 불교용품 으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공양구로는 촛대, 향로, 다기, 화병(꽃병), 정병(물병), 발우 등이 있다.
* 공양주(供養主)---공사(供司) 혹은 반두(飯頭)라고도 한다. 원래는 절에서 음식을 짓는 소임을 맡은 행자나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식사를 준비하는 여자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보편화돼 있다.
또 공양주는 삼보에 재물을 시주하는 불자 또는 시주하기를 권하거나 공양을 받는 이를 이르기도 한다.
그러다가보니 "공양한다"란 용어도 음식을 드는 것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렇게 쓰이게 된 어원이 음식 준비하는 공양주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 공업(共業)---부파불교시대 <구사론>에서부터 공업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받는 업을
별업(別業)이라 하고, 집단으로 받아내는 업을 공업(共業)이라 한다. 즉, 사회구성원 들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이라 하는데, 사회분위기 라든가 어떤 집단의 독특한 문화유형이나 그 집단의 통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컨대, 이민자 집단을 차별하고 괴롭힌다 든지, 외국인 노동자를 혹사하는 인종차별 따위가 대표적 공업이다.
그리고 사주팔자는 별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헌데 같은 사주를 가진 자라도 아프리카 에서 태어난 사람과
부유한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공업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사주가 같다 하더라도
성취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대개 같은 지역 같은 시기에 태어나면 공업에 휘말리기 쉽다. 우리 민족이 겪은 6ㆍ25 세대가 그렇다.
또 별업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이 있다. 자기가 저지른 과보가 자기에게 돌아간다는
말이다. 헌데 장마 때 한강에 흙탕물이 내려가고, 온갖 쓰레기가 쓸려 내려간다고 할 때,
이것은 어느 개인이 저질은 것이 아니라 사회공동의 책임, 곧 공업이다.
공업에 관한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도 나온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생 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쓰게 된다.” 여기서 ‘이런 것’이란 삼천대천 세계가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공업에 대해 법정 스님은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 공업(功業)---공업이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향해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가서 의미 있는 결과를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공업을 이루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향해 꾸준히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이란 몸이 수고를 하지 않으면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큰 공업(功業)을 이루려면 기본이 30년이다. 반평생이 걸린다.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각자 나름대로 반드시
공업을 달성하는 법이니 이를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공업(功業)은
착실 절묘하다고 설파했다. 노력과 정성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공(功)이 높음은 뜻 때문이요, 업(業)이 넓음은 부지런함 때문이니, 공력을 들임이 없는 공(無功之功)은
과실을 얻기 힘들지마는 공력을 들이는 공(有功之功)은 덧없지 않아서 훌륭한 공업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공업(功業)의 용례를 보자,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왕(王)’이란 칭호가 자신의 공업(功業)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왕’은 자신에게 정복된 지배자들 이었으므로, 그런 왕을 정복한 자신은 왕과 구별되는
특별한 칭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자신의 칭호를 ‘황제(皇帝)’라 하고,
자신이 첫 황제라 해서 시황제(始皇帝)라 했던 것이다.
* 공왕(空王)---부처님의 다른 명호. 부처님 법(法)을 공법(空法)이라 하고, 불타를 공왕(空王)이라 하는데,
모든 잘못된 집착을 여의고, 열반에 들어가는 요문(要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 공용(功用)---불교 용어에는 유달리 ‘공(功)’자가 들어간 말이 많다. 공덕(功德), 공능(功能), 공용(功用),
공효(功效) … 그런데 이들 공(功)자가 들어간 말들이 많지만 대개 그 뜻이나 쓰임이 명확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공용’만은 의미와 쓰임이 다양해서 잘 살펴봐야 한다.
공용(功用)이란 말의 쓰임은 일반적으로 기능, 효능, 용도, 작용, 효험, 공덕, 애써 노력함,
공 들인 보람, 의식적인 노력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공용(功用)이란 공부의 작용을 말한다.
수행승이 힘써 경전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는 일들을 공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용은 인식주관의 작용, 분별하고 차별하는 의식작용, 분별과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으로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 즉, 신(身)ㆍ구(口)ㆍ의(意) 3업(三業)의 작용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공용(功用) 또는 공용행(功用行)은 모든 동작과 말 그리고 생각 등으로 짓는 것을 더욱 노력해
행한다는 뜻도 있다. 정행(正行)에 대한 준비수행으로서, 이렇게 해 얻어지는 것을 가행득(加行得)이라 한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수행에 노력하는 것, 혹은 수행한 효과를 말한다.
수행으로 마음의 힘을 얻으면 반드시 현실적으로 공용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음에 불교에서 ‘공용(功用)’이란 말이 쓰이는 용례를 보자.
• 수도하는 사람은 이런 말(글) 저런 말(글)을 듣고 사량 분별로써 이리 저리 맞추고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공용(功用)이 없어야 한다. 화두가 적적(寂寂)한 중에 성성(惺惺)하고 성성한 중에 적적해서
성성불매(惺惺不昧)로, 가거나 오거나 앉으나 누우나 한결같고, 오매(寤寐)에도 한결 같아서
이렇게 일주일만 연속되면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는 동시에 문득 자기의 본래 면목을 깨닫게 된다.
• 적정(寂靜)은 마음(6식 또는 8식)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하여 무공용(無功用) - 공용(功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즉 힘써 노력함[功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언제나 사(捨-평등함)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 공용(功用) 또는 공용행(功用行)은 의식적인 노력을 뜻한다. 유식 유가행파의 수행론에 따르면,
보살이 공관(空觀)을 닦음에 있어서 초지(初地)에서 제7지(地)까지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공관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제7지 까지를 유공용지(有功用地) 또는 간단히 공용(功用)이라 한다.
반면, 제8지(地)부터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관(空觀)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이유로 제8지 이상을 무공용지(無功用地) 또는 간단히 무공용(無功用)이라 한다.
공용(功用)은 유위법(有爲法)이고, 무공용(無功用)은 분별이나 사량심이나 조작이나 작위나 유위심이
없다는 말이다. 사량계교나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진리의 작용을 말한다.
• <화엄경> ‘현수품[賢首品)’은 문수보살의 요청으로 현수보살이 장장 357개의 게송을 통해 믿음에 대한 공덕을 찬탄하는 품이다. 이 품은 본문 없이 전부 게송으로 돼 있어서 더욱 신심이 솟아나는 아름다운 품이다.
3보를 믿는 방법,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의 공덕과 처음 발심할 때의 공덕,
이어서 갖가지 광명과 삼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서 드는 생각
하나는 하루 속히 내 희망이 저절로, 인연 따라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는 생각에 맥이 풀리기도 한다.
이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우리들 인생을 공용(功用)이라 한다면,
무엇을 하든 저절로 잘 이루어지는 멋진 삶을 무공용(無功用)이라 부른다.
중생은 공용이고 불보살은 무공용이다. 무공용의 물 흐르듯 저절로 이루어지는 부처님의 일들도 예전에 공용의 수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공덕이 돼 무공용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공용의 마음이 불자의 기본자세인 셈이다.
• <화엄경> ‘현수품(賢首品)’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혹 어떤 찰토(刹土-國土)에 부처님이 안 계시거든 거기에 정각(正覺)을 이루어 나타내 보이며,
혹 어떤 국토에 법을 알지 못하거든 거기서는 묘한 법을 연설 하시니라. 분별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어
‘한 생각’ 동안에 시방에 두루 하되 달빛 그림자 두루 하지 않음이 없음과 같이
한량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나니라.”
• 공능(功能), 공용(功用), 공덕(功德)의 비교
• 공능(功能) ; 공(功)의 힘, 보람, 공용(功用)과 능력(能力)이란 뜻으로, 공을 들인 보람을 나타내는 능력,
또는 결과를 일으킬만한 법의 힘 또는 능력을 말한다.
• 공용(功用) ; 공들임, 하는 일, 수행한 효과, 작용 등을 말하는데,
신ㆍ구ㆍ의(身口意)로 짓는 모든 동작과 말과 생각 등을 말한다.
• 공덕(功德) ; 쌓은 덕, 좋은 덕, 복덕을 말한다.---→공능(功能, 산스크리트어 samartha) 참조.
* 공(空)의 종류---크게는 18공(十八空)까지 나누어진다. 18공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제3권 및
<대집경(大集經)> 제54권에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1) 내공(內空), 2) 외공(外空), 3) 내외공(內外空), 4) 공공(空空), 5) 대공(大空), 6) 제일의공(第一義空),
7) 유위공(有爲空), 8) 무위공(無爲空), 9) 필경공(畢竟空), 10) 무시공(無始空), 11) 산공(散空), 12) 성공(性空),
13) 자상공(自相空), 14) 제법공(諸法空), 15) 불가득공(不可得空), 16) 무법공(無法空), 17) 유법공(有法空),
18)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등으로 나눈다.
* 공이불공(空而不空)---<휴휴암좌선문〉에 나오는 말로서,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가득 차서 없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진리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과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조화에 따라 무궁무진한 조화가 나타나
천차만별의 현실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유이비유(有而非有)와 상대되는 말이다.
* 공작명왕(孔雀明王, 산스크리트어 Mahamayun-vidyarajni)---밀교의 독특한 명왕 중 하나이다.
‘명(明)’은 진언, 다라니를 가리키고, 명왕(明王)은 주문(呪文)을 관할하는 왕자(王者)로서 지혜의 작용에 의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불(方便佛)이다. 명왕은 교화하거나 구제하기 어려운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여래나 보살이 무서운 형상으로 변신해 나타난 화신이다.
명왕은 밀교가 성립하면서 등장했고, 5세기경 공작명왕이 최초로 등장했다.
공작명왕은 독초나 해충, 독사를 잡아먹는 공작을 신격화한 것으로 모든 중생의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해
안락함을 주는 명왕이다. 원래 명왕은 분노형으로 표현하지만 공작명왕 형상은 분노형이 아니고
자비로운 보살형으로 공작을 타고 있다.---→명왕(明王) 참조.
* 공작명왕경(孔雀明王經, Mahanayuri-Vidyarajni)---<불모대금요 공작명왕경(佛母大金耀孔雀明王經)>의
약칭으로 밀교경전인데, 당나라 시대에 인도 출신 승려 불공금강(不空金剛)이 한역했다.
경전에는 뱀에 대한 공작의 적개심이 담겨 있다. 예로부터 전래돼 온 <자타카(Jataka, 本生譚)>에는
금색공작의 호신주(護身呪)가 독사를 비롯한 갖가지 재앙을 제거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 밀교적인 요소가 더해져 완성된 것이 <공작명왕경>이다.
※ 호신주(護身呪)---빠알리어로 ‘빠릿따(paritta)’라 한다. 호신주를 외면 자신의 안녕을 지켜 주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사고와 불행으로 부터 자신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신성한 문구(주문)이다.
공작새가 공작명왕으로 불교에 등장하는데 아열대 지방인 인도엔 독사가 많으므로 독사 잡아먹는 공작새가
모토다. 불모대 공작명왕보살 이라고도 한다. 기원이 오랜 밀교인 잡밀(雜密)에서 말하는 불존(佛尊)이다.
명왕이지만 분노형은 아니다. 공작명왕 대다라니를 수지독송하면 독사 맹독이나 재앙, 질병을 쫓아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전한다. 한 스님이 나무를 하다 뱀에게 엄지발가락을 물려 고통 받고 있을 때
부처님이 ‘불모공작명왕 대다라니’ 설법을 했다고 한다. 다라니가 독은 물론 모든 병을 낫게 했단다.
한국불교 대표 밀교종단 진각종은 매년 부처님 오신날 제등행렬에 불 뿜는 공작 등으로 장식한다.
* 공적(空寂)---공공적적(空空寂寂)의 준말.---→공공적적(空空寂寂) 참조.
* 공적영지(空寂靈知)---불교적 진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진공묘유(眞空妙有)와 함께 불교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텅 비우고 알아차릴 때 지혜가 드러난다. 텅 비움은 공적(空寂)이요
알아차림은 영지(靈知)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밝게 알게 된다 -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신령스런 깨달음 그것을 곧 영지라고 표현하고, 텅 비우고 알아차리는 것은 곧 지혜요 전지전능(全知全能)이다.
이와 같이 ‘공적(空寂)’은 텅 비어서 고요한 상태를 묘사한 말인데, 적적(寂寂)ㆍ적정(寂靜)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지(靈知)’는 문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지혜 광명을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공적영지(空寂靈知)란 텅 비고 고요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밝고 신령스럽게 나타나는
지혜의 작용을 말한다. 이는 진리의 본체를 설명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육조단경>에서는 정혜일치(定慧一體)라고 정리했다. 고요함은 정(定)이고 신령스럽게 아는 앎은 혜(慧)이다.
그런데 교학(敎學)에서 말하는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선종(禪宗)에서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하고,
원효 대사는 성자신해(性自神解-성품이 스스로 신비롭게 풀리다)라 했으며,
<단경>에서는 정혜일체(定慧一體) 또는 무념(無念)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
(普照國師知訥, 1158∼1210)은 그의 저서 <수심결(修心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므로 번뇌 망상도 본래 고요하고 티끌 세상도 본래 비었다.
모든 법이 다 비어 고요한 곳[空寂]에서는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어둡지 않다.
그러므로 텅 비어 고요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히 서로 전수한 법인(法印)이다.
이 마음만 깨달으면 참으로 단계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삼계를 뛰어넘고
본집에 돌아가 단박 의심을 끊는다. 그리하여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은 모든 개별적 사물이나 개체의식의 경계가 사라진 곳을 뜻한다.
모든 개체의 경계를 넘어선 무한과 공이 그것이다. 불교는 이 공이 추상적인 빈 공간이어서,
순수 질료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령한 앎인 영지(靈知)가 빛나고 있다는 것,
그 점에서 마음 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공(空)은 영지(靈知)의 마음이다.
이처럼 무한의 공이 ‘스스로를 신령스럽게 아는 것’을 원효는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하고,
지눌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했다. 그러니 공적영지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이 싹트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공적(空寂)과 영지(靈知)에, 어느 쪽 하나라도 결하면 온전하다 할 수 없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귄다. 망울 튼 버들가지는 싱그럽고 시냇물은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간다.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들은 봄나물을 뜯고 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런 광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빈 마음으로 보라는 말이다.
물이 있으면 물을 보고 꽃이 있으면 꽃을 본다는 것. 이게 바로 공적영지(空寂靈知)이다.
텅 비어 고요하되 신령스러운 앎의 이 자리가 본심(本心)의 자리인 참 마음,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 공종(空宗)---→상종(相宗)ㆍ공종(空宗)ㆍ성종(性宗) 참조.
* 공중무색(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현상계의 본질의 차원인 공(空)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느니라.”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는 물질적 존재인 색(色)이 없다는 것이다. 공 가운데 색의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색이 없다는 것은 색이 아주 없다는 말이 아니라 색은 인연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모든 법이 공(空)하므로 공(空)한 가운데 색(色)을 찾으려 하나 얻을 수 없고 색(色)이 없으니 찾아봐도
찾을 수 없으니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의식의 작용도 없다는 말이다.
생명에는, 광물과 같은 부동의 생명도 있다면, 식물과 같은 정태의 생명도 있고, 동물과 같이 이동하는 생명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체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정 한 것이다. 즉, 물질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불안정한 것이다. 이것에 비해서, 공(空)의 세계, 실재계는, 의식계이기 때문에,
매우 정묘한 심적인 세계이다. 공의 세계, 즉 영혼, 의식의 중심, 마음의 세계는,
육체의 오관(五觀)을 통해서 본 현상계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영원불변의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일시적 가합에 의한 '현상'으로
바라본다. 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아닌 '현상'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모든 존재가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기적 존재란 외부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스스로' 독립한 존재가 아닌 수많은 외부의
인(因)과 연(緣)에 의해 상호의존(상의성) 돼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수많은 인과 연은 서로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서로 조건 지워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수많은
인과 연 중에서 단 하나라도 영원 불변하지 않다면 그 모두가 영원 불변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모든 존재가 연기적 존재라면 그들의 속성은 반드시 '공'하게 된다. 즉, 작용(현상)은 있지만 실체는 없다. '공'한데, 즉 실체가 없는 현상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무슨 생(生)이 있고 멸(滅)이 있고, 더럽고 깨끗함이 있겠는가.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이 문장 이후부터 본격적인 ‘무(無)’의 행렬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없다, 없다’고 하며 계속되는 부정의 연속은 사실 <아함경>에서 붓다가 설한 교리체계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일으키는 이런 의문에 대해 붓다는 5온과 12처라고 설했다.
5온(五蘊)은 불교의 인간관이며, 12처(十二處)는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12연기는 고통[苦]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이며, 사성제(四聖諦)는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붓다가 설한 내용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이 모두를 ‘없다[無]’고 부정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핵심교리를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모두 부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이러한 부정은 소승불교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승의 공사상(空思想)이라는 큰 진리 속에 모두를 부정함 으로써
그 핵심교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계승하고 확대 발전 시키고자 한 것이다.
‘없다’고 하는 무(無)의 나열법으로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정말 필요한 것만 남기기 위해서이다.
아함부 경전에서 붓다는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했다면,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는 부정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
진짜 있는 것은 공(空)뿐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다.
‘공중무색’에 담겨있는 두 갈래의 의미를 잘 이해 해야한다. 공(空)은 색(色)의 본질이고 색은 공이 인연 따라
그 자리에 특정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의 세계, 무의 세계는 본질의 차원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인 것이다. 시간적으로 영원할 뿐 아니라 더럽혀질 수도 늘고 줄 수도 없는 청정무구한
부처님 성품자리이다. 그에 비해 색은 찰나적으로 머물다 갈 것이므로 공의 존재성에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태양빛 앞에서 반딧불은 빛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리고 본질의 껍데기인 겉모습은 그 순간 그 상황에 가장 맞는 모습을 띠지만,
그것이 본질의 영원한 껍데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색은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공에는 정해진 색이 없고 정해진 모습이 없다 [空中無定色]’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컵에 물을 떠 놓았을 때는 물이 그 컵의 모양을 띠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 컵의 모양이 그 물의 정해진 모양은 절대 아니다.
그 순간의 상황에 맞는 어떤 모양 이라도 다 드러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모양이 정해진 모습 이라고
생각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중무색 이후를 이해하는 두 가지 큰 줄기이다. - 능인신문에서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이라는 문장에서 불교의 인식세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공 가운데 색의 실체는 없으며, 수상행식도 안비설신의도 색성향미촉법도 눈앞의 세계 내지는
의식의 세계도 실체는 없다.”는 말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색수상행식과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과
안계와 의식계 모두는 공하기 때문에 모두가 실체가 없다는 얘기다.
불교의 세계관은 5온, 12처, 18계로 표현되는데 이 모두가 공해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5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하며, 이는 사람의 구성 요소라는 얘기다. 헌데 5온은 단순히 사람의 구성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색(色)은 물질이요, 수(受)는 감정이고, 상(想)은 개념작용, 행(行)은 수와 상을 제외한 여러 형성작용이고,
식이란 의식작용을 말하는데, 이 다섯 가지로 이 세계가 구성돼 있다. 잘 생각해보면,
이 다섯 가지 말고 더 예를 들어 보려면 마땅한 예를 찾을 수 없다.
한번 따져 보자. 우선 이 세계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면, 무생물은 오온의 색수상행식 중 색(물질)이다.
그럼 생물, 예를 들어 사람을 생각해보면, 사람은 물질과 비물질로 구성돼 있다.
사람을 구성하는 비물질은 여러 정신작용이다. 그 여러 정신작용 중에서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작용,
산이요 바다요 강물이요 하는 개념화 작용,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행동의 작용,
대한민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됐다고 생각하는 의식작용, 이와 같이 물질인 색과 여러 정신 작용인
수, 상, 행, 식의 오온으로 사람, 그리고 이 세계는 구성돼 있다.
그리고 12처와 18계는 불교의 인식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여준다.
인식의 객체가 없으면 인식의 주체도 없다. 인식의 주체가 없으면 인식의 객체도 없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식세계다. 12처에 6식을 더한 것이 18계다. 즉, 불교의 세계가 된다. 12처는 6내처(6근)과
6외처(6경)을 말한다. 6근은 인식의 주체가 인식의 객체를 인식하는데 필요한 기관(장소)를 뜻한다.
6근은 6경과 일대일로 대응되는데, 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 이런 식으로 대응된다.
그리고 물질의 감지는 눈에서, 소리의 감지는 귀에서, 맛의 감지는 혀에서, 접촉의 감지는 몸에서,
세상의 감지는 의에서… 이런 식이다.
그런데 과연 물질을 감지하는데 눈이 필요하지만 그것에 대한 의식작용이 눈에서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한다고 할 때, 달에 대한 색깔과 모양을 망원경이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6경을 감지하는 데는 6근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의식하는 데는 각각의 의식 장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6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6경과 6근의 조건으로부터 생겨난 이유다.
따라서 이 세계는 오온으로 구성돼 있고, 6경과 6근과 6식의 일대일 대응으로 작동된다. 그런데 오온과 18계
(6경+6근+6식)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작용은 있다. 따라서 오온과 18계는 공하며 그들 모두의 실체는 없다.
결국 오온(색수상행식), 십이처(육근+육경), 십팔계(육근+육경+육식), 모두가 공하다는 말이다.
* 공즉시색(空卽是色)---<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이 나온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이다.
물질(색)이 알고 보면 공이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이 곧 물질(색)이라는 말로서 물질과 비어 있는
공의 세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다. 색과 공이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다.
색과 공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고, 하늘은 텅 빈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해와 달과 구름이 있어 이 모두가 한 덩어리로 얽혀 있다. 마찬가지로 공과 색도 한 덩어리란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형상 없는 것이 되고(색즉시공),
형상 없는 것은 다시 형상 있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공즉시색)는 말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의 이치를 깨치면 형상 있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공즉시색의 이치를 깨치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지 않아서 현실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임을
알게 된다. 현실세계가 무질서한 것 같지만 모두가 상의상관 관계 속에 나름대로 질서를 지니고 있기에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모습이다.
상대적인 현실을 버리고 곧바로 절대적인 공(空)만 쫓으면 환상 속에 빠지기 쉬우므로 현실을
굳건히 한 상태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찾으라 ― 단계를 밟아서 차근차근 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절대의 바탕인 공을 깨달으면 상대적인 이 세상이 가(假, 거짓)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다음 다시 이 상대적인 세상마저도 공과 분리가 되지 않고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리하여 색은 공을 통해서 완전함을 얻고, 공은 색을 통해서 아름답게 피어나게 된다.
그리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세상만물이 비어있지만, 즉 절대적 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상대적 으로는
다양한 모양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절대적 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모양(색)은 엄연히 존재하며
자아에게는 분명한 현실임을 강조한다. 현실에서 출발해 현실을 바탕으로 사물의 공성 ―
혹은 절대바탕인 공을 깨달으라는 의미로 본다. 일체중생이나 우주 만물이 모두 인연화합으로 생긴 일시적
존재이기는 하나, 인연의 상속(相續)에 의해서 공(空) 자체 그대로가 색(色)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색물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원리가
지금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즉,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이를 말하고 있다.
→ ‘불생불멸과 중도(性徹 스님 법문)’,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참조.
* 공포경(恐怖經)---초기경전인 <잡아함경 845경>으로 윤회문제에 대해 설하고 있다. 그리고 <공포경>이란
이름은 중생들이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음은 <공포경>의 일부이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로서 다섯 가지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고, 세 가지 일을 결정해 의혹이 생기지 않으며,
성현의 바른 도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면, 그런 거룩한 제자들은 스스로 수기해 “지옥ㆍ축생ㆍ아귀 등
나쁜 세계가 이미 다하고, 수다원(須陀洹)이 돼, 나쁜 세계의 법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르게 삼보리(三菩提)로 향해, 일곱 번 천상과 인간 세계를 오가며 태어났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완전하게 벗어나리라.”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는 것인가?
혹 살생(殺生)을 하면 그 죄의 인연으로 원한과 두려움이 생기지만, 만일 그가 살생을 여의면 저 살생한 죄로
인한 원한과 그 인연으로 생겨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다. 만일 도둑질ㆍ삿된 음행ㆍ거짓말ㆍ술 마신 죄가
있으면 원한과 그 인연으로 두려움이 생기지만, 만일 그가 도둑질ㆍ삿된 음행ㆍ거짓말ㆍ술 마신 죄로 생기는
원한을 여의면, 그 인연으로 생기는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이것을 죄로 인한 원한과 그 인연으로 생기는 두려움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 일을 결정하면 의혹이 생기지 않는 것인가?
부처님에 대해 결정해 의혹을 여의고, 법과 승가에 대해 결정해 의혹을 여의는 것이다.
이것을 세 가지 법을 결정하면 의혹을 여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이 거룩한 도(道)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인가?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임을 사실 그대로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라고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거룩한 도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만일 이 다섯 가지 죄로 인한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고, 세 가지 법을 결정해 의혹을 여의며,
거룩한 도(道)를 사실 그대로 알고 보면, 이러한 거룩한 제자는 스스로 수기해 “나는 지옥의 고통이 다하고,
축생ㆍ아귀 등 나쁜 세계에 태어남이 다했으며, 수다원이 돼 나쁜 세계의 법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르게 삼보리로 나아가 일곱 번 천상과 인간 세계를 오가며 태어났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완전하게 벗어나리라”고 말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두려움과 원한을 없어지게 하고[오계(五戒)를 확실히 지키고],
세 가지 일을 결정해 의혹이 생기지 않으며[불ㆍ법ㆍ승 삼보(三寶)를 의심하지 않으며],
성현의 바른 도[사성제(四聖諦)]를 사실 그대로 통달하면, 윤회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했다.
* 공한처(空閑處, 산스크리트어 araṇya/阿蘭若)---세상과 동떨어져 시끄러운 소음으로부터 떠난 조용한 곳,
한적한 삼림 속, 마을에서 떨어져 수행자들이 머물기에 적합한 빈터를 말한다.
결국 암자를 지을 만한 터와 같은 곳이다. 이를 아란야(阿蘭若) 혹은 원리처(遠離處)라 번역하기도 하고,
아란야(阿蘭若)를 줄여서 난야(蘭若)라고도 한다.
* 공혜(空慧)---좋은 의미로는, 공(空)의 이치를 관하는 지혜를 말한다. 예컨대,
<금강경>은 대승과 소승이 대립하기 이전에 형성됐는데, ‘공혜(空慧)’를 근본으로 삼고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의 이치를 요점으로 해서 성립된 경전이다.
그러나 알아서 쓸데없는 지혜를 공혜(空慧)라고도 한다. 이럴 경우, 완전히 잘못된 지혜를 일컫는다.
공의 이치에 들어가려 하다가 공과는 거리가 먼 공혜에 빠지고 만다. 이것이 공부하는데 가장 큰 병통이다.
* 공화(空華)---공화(空花), 환화(幻華)라고도 하는데, 번뇌로 생기는 온갖 망상을 공화라 한다.
본래 실체가 없는 현상세계를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
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마치 꽃이 퍼져있는 것처럼 허상이 난무하는 것과 같이 잘못 보는 일, 혹은 사람이 어떤 딱딱한 물건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을 때 눈앞에 순간적으로 번쩍 하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공꽃을 비유하는 말이다. 즉, 눈병 든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눈병이 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존재의 실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환각으로 보고 있는 그 무엇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화는 실재가 아니고 거짓이라는 말. 인간세상의 부귀영화 희로애락도 다 몽환공화 같은 것이므로
거기에 속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지혜가 어두운 사람은 몽환공화를 실재로 잘못 알아서
그것을 붙잡으려고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허공 꽃(幻華)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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