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실 때 느낌과 지각이 소멸되는 단계까지 가셨다가 다시 4단계로 내려오셔서 열반에 드셨습니다.(DN16) 4선정후에도 신통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dry insight" 으로 얻는 지혜말고) 왜 그 이상의 선정단계까지 수행하라고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셨을까요?(예를 들어 AN 9:41) 全知한 붓다가 아니라 삼독에서 자유로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만이라면 4선정이상의 8선정/9단계등의 선정체험이 굳이 필요 한것인가요? 선정에 대해서 말로 표현하는것이 불가하고 이해할라고도 하지말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걸로 기억합니다만, 선정의 내용이 아닌 단계의 문제이기에 교수님께 질문 드립니다.
…Then the Venerable Ananda said to the Venerable Anuruddha: ‘Venerable Anuruddha, the Lord has passed away.’ ‘No, friend Ananda, the Lord has not passed away, he has attained the Cessation of Feeling and Perception.’
6.9 Then the Lord, leaving the attainment of the Cessation of Feeling and Perception, entered the Sphere of Neither-Perception-Nor-Non-Perception, from that he entered the Sphere of No-Thingness, the Sphere of Infinite Consciousness, the Sphere of Infinite Space. From the Sphere of Infinite Space he entered the fourth jhana, from there the third, the second and the first jhana. Leaving the first jhana, he entered the second, the third, the fourth jhana. And, leaving the fourth jhana, the Lord finally passed away.
(DN 16, Walshe역 pg.271)
…So long, Ananda, as I did not attain and emerge from these nine attainments of progressive dwellings in direct order and reverse order, I did not claim to have awakened to the unsurpassed perfect enlightenment in this world with its devas, Mara, and Brahma, in this population with its ascetics and brahmins, its devas and humans. But when I attained and emerged from these nine attainments of progressive dwellings in direct order and reverse order, then I claimed to have awakened to the unsurpassed perfect enlightenment in this world with… its devas and humans. The knowledge and vision arose in me: ‘Unshakable is my liberation of mind; this is my last birth; now there is no more renewed existence.
(AN 9:41, Bhikkhu Bodhi역 pg.1318)
답변입니다. 질문의 양이 많기에 문장을 몇 개로 잘라서 인용하면서 답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실 때 느낌과 지각이 소멸되는 단계까지 가셨다가 다시 4단계로 내려오셔서 열반에 드셨습니다.(DN16)
본 문답을 읽으시는 다른 회원 분들께도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일단 질문에 실린 위의 문장을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질문에서 말씀하신 '느낌과 지각이 소멸되는 단계'를 한자로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멸진정(滅盡定)이라고 번역합니다(상수멸정이 열반은 아닙니다). 또 '4단계'는 색계(色界)의 제4선입니다. 질문 아래에 인용하신 장부 니까야(DN 16, Walshe역 pg.271)의 영어 번역문에 기술되어 있듯이, 아난 존자께서 아나율 존자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 같다."고 말하니까, 아나율 존자께서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열반하기 전에 먼저 상수멸정(또는 상수멸삼매)에 들어가셨다가, 비상비비상삼매 → 무소유삼매 → 식무변삼매 → 공무변삼매 → (색계) 제4선 → 제3선 → 제2선 → 초선 → 제2선 → 제3선 → 제4선의 순서로 선정 체험을 하시다가 마지막의 제4선에서 열반하셨다고 대답합니다. 색계의 4선과 무색계의 4정, 그리고 상수멸정을 합하여 9차제정(九次第定)이라고 부릅니다. '9단계의 선정'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께서 완전히 열반에 드시기 전에, 당신께서 젊은 시절에 닦았던 추억의 선정 경지를 한 번 모두 둘러보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장례풍습에서, 돌아가신 분의 관을 들고서 그 분이 사시던 곳을 찾아가 돌아나오는 행사를 하는 것과 유사한 과정으로 짐작됩니다.
4선정후에도 신통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dry insight" 으로 얻는 지혜말고)
이 질문에서 "4선정후에도 신통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이라고 쓰셨는데, '4선정후'가 무슨 의미인지요? '4선정 이상의 무색계삼매'인가요, 아니면 '4선정을 체득한 이후'를 의미하는가요? 질문이 모호하긴 하지만, 아마 '제4선의 경지에서도 지혜와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면"이라는 의미로 쓰신 것 같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4선에서 세 가지 신통력(三明 -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이 열리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위와 같이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도 제4선에서 얻으시고, 돌아가실 때도 제4선의 경지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왜 그 이상의 선정단계까지 수행하라고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셨을까요?(예를 들어 AN 9:41)
질문의 아래에 인용하신 증지부 니까야 소속 불전(AN 9:41)의 영어 번역문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하신 말씀을, 행간의 의미를 살려서 우리말로 대충 풀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난다야, 내가 9차제정의 각 단계를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획득했다가 벗어나지 않았더라면, 온갖 신들과 마왕과 .. 바라문과 고행자와 ...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무상정등정각을 깨달았다고 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9차제정의 각 단계를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획득했다가 벗어났을 때에, 온갖 신들과 마왕과 .. 바라문과 고행자와 ...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무상정등정각을 깨달았다고 외쳤다.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지혜와 통찰이 일어났다. "내 마음의 해탈은 확고하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삶이다. 이제 (나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다."
질문에서 "그 이상의 선정단계까지 수행하라고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셨"다고 쓰시면서, 위의 경문을 그 예로 제시하셨는데, 위의 경문을 읽어보니 이는 제4선 이상의 선정단계까지 수행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성도 전에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에 9차정을 모두 획득하였는데 그 가운데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면 무상정등각을 깨닫지 못했을 것인데, 9차제정을 획득하긴 했지만 거기에서 벗어난 다음에 비로소 무상정등정각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마 '워니'님께서는 "So long, Ananda, as I did not attain and emerge from these nine attainments of progressive dwellings"라는 문장에 "9차제정을 모두 획득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 수행론 전체를 염두에 두면서 이 문장을 검토해 보면, "내가 9차제정을 획득했을 때, 그 가운데 어떤 정(定)이든 그곳에 안주하여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 성도 전에 9차제정 가운데 무소유처정을 알라라 깔라마에게 배웠지만, 그런 삼매는 번뇌를 누를 뿐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아시고 버리십니다. 이어서 비상비비상처정을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배워서 단박에 그 경지를 체득했지만 이 역시 번뇌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버리십니다. 그 후 다섯 비구들과 고행을 하시다가, 고행도 버린 후 보리수 아래 앉아서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십니다. 위에 인용하신 AN 9:41, Bhikkhu Bodhi역 pg.1318 경문은, 부처님께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종합하여 말씀하신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내 마음의 해탈은 확고하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삶이다. 이제 (나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다."는 아라한이 될 때 노래하는 4구게인 "나의 삶은 이미 다 소진되었다.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고, 할 일을 다 했으니, 내생의 삶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안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와 유사한 해탈지견(깨달았다는 자각)의 선언입니다.
全知한 붓다가 아니라 삼독에서 자유로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만이라면 4선정이상의 8선정/9단계등의 선정체험이 굳이 필요 한것인가요?
바로 앞의 문장에서 설명했듯이, '워니'님께서 근거로 제시한 경문은 "8선정/9선정 등 제4선 이상의 선정체험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색계 4선과 4무색정과 상수멸정'의 9차제정 가운데 그 어떤 선정의 경지에도 안주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9차제정을 모두 닦아보신 후, 제4선에 깨달음을 얻으셨지만, 불전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불교의 무루지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은 초선의 '①미지정, ②근본정, ③중간정, ④제2선의 근본정, ⑤제3선의 근본정, ⑥제4선의 근본정, ⑦공무변처정의 근본정, ⑧식무변처정의 근본정, ⑨무소유처정의 근본정'의 아홉 곳입니다. 아래에 불교 수행론과 삼계를 대비시킨 표를 소개합니다. (강의를 위해서 <아비달마구사론>에 근거하여 제작한 겁니다.)
이 표에서 왼쪽 위에 붉은 글씨로 무루지라고 적혀 있는 칸 아래의 표에서 동그라미(○) 표시를 해 놓은 경지가 무루지가 발생하는 곳입니다. 질문에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만이라면 4선정이상의 8선정/9단계등의 선정체험이 굳이 필요 한것인가요?"라고 쓰셨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제4선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대승 아라한이 되셨지만, 위의 표에서 보듯이 색계 초선의 미지정(未至定)의 경지만 되어도 사성제를 통찰하여 무루지가 발생하여 번뇌를 모두 제거한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초선의 미지정'이란 초선의 근본정에는 아직 도달하지(至) 않은(未) 선정을 의미합니다. 풀어서 말한다면 욕계의 번뇌인 동물적 욕망이나 분노 등은 완전히 제거했지만, 심사희락(尋伺喜樂)이 있는 경지인 초선이 되기 직전의 경지를 말합니다. 대상에 집중해서(尋) 분석적으로 통찰(伺)할 수 있으며 마음에 기쁨(喜)이 가득하고 몸이 안락(樂)한 경지가 심사희락지(尋伺喜樂地)인 '초선'의 경지인데, 위의 표 좌측 위의 낙수(樂受), 희수(喜受) 항목에서 보듯이 '미지정'에서는 아직 마음의 기쁨과 몸의 안락은 없지만, 음욕이나 식욕과 같은 욕계의 동물적 욕망과 거칠은 분노심 등을 벗어났기에 잡념 없이 집중해서 분석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미지정 이상 수행을 해도 되지만, 에너지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티벳불교 겔룩의 종장 쫑카빠 스님께서는 <보리도차제론>의 상사도 가운데 지관(止觀)의 수행에서, 중관학의 가르침에 대해 분석적으로 통찰(觀)하기 이전에 닦아야 할 지(止)의 수행으로 초선 미지정을 제시하십니다.
요컨대 9차제정을 모두 닦지 않고, 초선 미지정의 단계만 되어도 무루지가 발생하여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고, 집, 멸, 도의 사성제가 불교를 받치는 네 기둥인데, 도성제인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으로 재정리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 가운데 '정견과 정사유'는 혜학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학, '정념과 정정'은 정학 그리고 '정정진'은 삼학 모두에 해당합니다. (정정진을 정학으로 분류하는 경문도 있긴 합니다.) 음욕과 식욕, 분노와 같은 동물성에서 벗어나서(계학), 마음을 한 곳에 모아서(정학), 무루의 지혜를 체득하면(혜학) 수행자의 마음이 점차 정화되다가 아라한의 지위에 오릅니다.
질문에서 거론하신 색계의 4선, 4무색정, 멸진정의 9차제정은 모두 삼학 가운데 정(定)일 뿐입니다. 그리고 질문에서 인용하신 AN 9:41, Bhikkhu Bodhi역 pg.1318 경문에는 이런 정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경문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 9차제정을 획득했다가 벗어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 보다 더 위의 것이 없는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계, 정, 혜 삼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혜학의 체득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바로 불교에서만 가르치는 궁극적 지혜입니다. 즉, 무루지(無漏智)입니다.
이렇게 선정의 토대 위에서 무루의 지혜가 열려야 비로소 불교적 깨달음을 체득합니다. 따라서 계, 정, 혜 삼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혜학입니다. 그런데 계를 지키고, 가부좌 틀고 앉아서 삼매에 들어가, 반야의 지혜가 열리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순간적으로 계정혜 삼학이 완성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위 돈오돈수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초기불전에 등장하는 바히야(Bāhiya)라는 분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바히야(Bāhiya)가 돌아가다가 소의 뿔에 받혀서 사망합니다. 그 때 제자가 바히야가 어디에 태어날 것인지 부처님께 여쭈니까, 부처님께서는 바히야가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났기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고 답하십니다. 즉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돈오돈수 하신 겁니다. 부처님 법문을 들은 즉시 견도(見道)와 수도(修道)가 함께 일어난 겁니다. 말하자면 인지(認知)정화와 함께 감성정화도 완전히 끝낸 겁니다. 9차제정을 단계적으로 닦지 않아도 이렇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짐작컨대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바히야가 적어도. 골똘하게 가르침에 집중하는 '초선 미지정'의 상태였을 것 같습니다. 초선 미지정이라고 전문용어를 쓰니까, 무슨 대단한 수행 같아 보이지만, 다른 게 아니라, 동물적 욕망 없이 골똘하게 사유하는 게 초선 미지정입니다.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이 끌어오르는 사춘기 고등학교 시절에도, 수학 문제 풀 때에는 이성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골똘하게 생각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맑은 집중의 상태가 초선 미지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굳이 가부좌 틀고 앉아서 호흡을 보면서 수행하지 않아도, 종교적 의문이 너무나 절실하여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하다가 무루지가 발생하면(見道) 수다원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성자도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바히야처럼 아라한도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혹시 아라한까지 되었다면 그의 감성에 음욕, 식욕, 재물욕, 명예욕 같은 동물적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분노심도 완전히 사라져야 합니다. 생각만 깨진 게(견도) 아니라, 이기적인 마음도 완전히 사라져서 자비심이 철철 넘쳐야 합니다.
지금까지 불교의 전문용어를 사용하면서 도식적으로 복잡다단하게 설명했지만, 바히야의 예에서 보듯이 종교적 의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골똘하게 그 답을 추구하던 사람이라면 가부좌 틀고 앉아서 호흡을 관찰할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의 동기입니다. 내가 죽는 순간 온 우주가 무너진다는 기가 막힌 공포감이 절실할 경우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 종일 골똘하게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경우 무루지가 발생하여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참고로 질문하면서 인용하신 영문번역의 앞뒤가 모두 실린 사이트를 찾아서 링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문답을 읽으시는 다른 분들께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합니다.)
(DN 16, Walshe역 pg.271)
부처님의 열반 직전의 모습을 묘사한 경전으로 전문을 링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http://dhamma-reflection.blogspot.com/2006/05/parinibbana-of-lord-buddha.html
(AN 9:41, Bhikkhu Bodhi역 pg.1318)
니까야의 증지부 소속 불전 가운데 숫자 9와 관계된 경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문을 링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https://tipitaka.fandom.com/wiki/AN9.The_Book_of_Nines-v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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