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불이중도

수선님 2022. 5. 22. 12:17

우리는 보통 여기에 '나'가 있고, 내 바깥에 외부의 독자적인 세계, 대상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인식한다고 여기지요.

오늘 절에서 떡국을 먹었는데요, 어떤 사람은 이 떡국을 짜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은 싱겁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 싱겁다거나 짜다는 것은 떡국 속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나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내 바깥에 짜거나 싱거운 떡국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짜거나 싱겁다는 인식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인식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는 다른 떡국이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을 봅니다.

한 사람은 너무 예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너무 밉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사람에 따라, 인식에 따라, 인연 따라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쁜 여인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미운 사람으로 있지요.

이것을 인연가합으로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가 아니다, 무아다라고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있을 때만 그런 존재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 여인 뒤쪽에 있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여인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존재, 하나의 대상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사람의 의식에 따라서만 존재합니다.

이것을 십이처, 십팔계가 공하다고 합니다.

즉 나와 세상과 인식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밖에 세상이 있고,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 가지가 서로 연기적으로 인연화합할 때만 거짓으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육근, 육경, 육식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그 대상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인연이 화합되어야지만 인연따라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있는 것이어서, 이것은 저것을 근거로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십이처가 접촉할 때, 만들어진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맞다고 여기고, 진짜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자기만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짜고 싱거운 것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처럼, 사실 대상이라는 것이 내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접촉하는 인연으로 동시에 생겨납니다.

나와 대상은 동시생, 동시멸이지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런 식으로 나누어 분별할 수는 있지만, 사실 이것들은 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곧 봄이고, 봄이 곧 보이는 대상이며, 보이는 것이 곧 보는 자입니다.

이 세 가지는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나와 세상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식불교에서는 보는 쪽을 견분, 보이는 대상을 상분이라고 해서, 하나의 의식을 중생들은 보는부분(견분)과 보이는 대상(상분, 보이는 모양)으로 둘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고 설합니다.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닙니다.

내가 곧 세상이고, 보는 자가 곧 보는 것이며,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는 나와 세상이 따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꿈을 깨고 보면 꿈 속의 나와 세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부 하나의 꿈이었을 뿐임과 같습니다.

이것이 곧 그것입니다.

내가 곧 세상입니다.

보는 자가 곧 보는 것입니다.

다만 생각이 착각을 일으켜,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불이중도입니다.

둘이 아닌 존재의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