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5.만해용운 - 조선엔 만해가 있으니 청년은 만해를 배워라

수선님 2022. 8. 14. 12:20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5.만해용운

조선엔 만해가 있으니 청년은 만해를 배워라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민족의 미래를 제시했던 만해용운(卍海龍雲, 1879~1944)스님. 비록 난세에 머물렀지만 걸림 없이 살았던 대자유인이었다. 수행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고, 또한 명시(名詩)를 남긴 시인 만해스님의 삶을 비문과 각종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다.

 

 

“조선엔 만해가 있으니 청년은 만해를 배워라”

 난세에 머물며 민족 미래 개척한 ‘선구자’

 수행자 - 독립운동가 - 시인으로 맹렬 활동

 

<사진> 만해스님의 진영. 대표작 &lsquo;님의 침묵&rsquo;으로 &lsquo;찬&rsquo;을 대신하고 있다.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며 수행할 때이다. 몇몇 도반과 정진하는데, 입방 조건을 갖추지 못한 한 스님이 방부를 들이려고 했다. 정중히 거절했는데, 서운한 마음을 지닌 그 스님이 밤중에 찾아와 장검(長劍)으로 만해스님을 위협했다.

 

만해스님은 눈을 한번 크게 뜨고 바라본 후 아무 일 없다는 듯 공부에 집중했다. 오히려 만해스님의 담력에 놀라 칼을 버린 후 “당신은 과연 우리의 선생입니다”라며 사죄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주모자들을 사형(死刑) 시킬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일부 인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다. 스님은 감방에 있는 분뇨통을 던지며 꾸짖었다.

 

“비겁한 사람들아 왜 우느냐.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을 한 사람들이 맞느냐. 죽는 것이 억울하면 지금 당장 서명한 것을 취소해라.”

 

○…1925년 10월1일 당시 동아일보에는 ‘기미년 운동과 조선의 40인 - 최근 소식의 편편(片片)’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3.1 운동에 참여했던 민족대표들의 근황을 소개했는데, 만해스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3년 선고를 받으시고 출옥하신 후 아무리 세상을 두루 살폈으되 보리심(菩提心)을 아는 사람의 자취가 없음에 사바세계에 마음을 끊으시고 금년 봄엔가 산수 좋은 강원도 양양땅 설악산을 찾아갔었답니다. 신흥사 처마 밑에 채운이 얽힐 때에 삼계중생을 깨우치는 새벽종을 땡땡치는 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시겠습니까?”

 

○…만공스님과 만해스님은 의기가 투합한 ‘동지’였다.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이 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선불교를 망친 데라우치 전 총독은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만해스님은 만공스님의 높은 기상을 칭찬하며 “호령 대신 주장자로 놈들을 한 대 때리시지 왜 안 그러셨냐”고 했다. 이에 만공스님은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면 된다”며 웃었다. 졸지에 만해스님은 곰이 되고, 만공스님은 사자가 됐다. 하지만 당대 선지식으로 뜻이 통했던 두 스님의 이어진 대화는 일품이다. “어린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는 것입니다.”(만해스님) “허허, 그러면 나는 어린 사자가 되고 만해수좌는 큰 사자가 됐구려.”(만공스님) 두 스님은 호방하게 웃음을 나누었다.

 

○…한일강제합병 이후 만해스님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괴한이 쏜 총탄을 머리에 맞고 정신을 잃었다. 목숨이 경각에 놓였다. 이때 아름다운 여인이 꿈에 나타나 “꽃을 받으라. 어찌 그대로 가만히 있는가”라며 깨웠다. 정신을 차려 꿈속의 여인이 관세음보살 현신임을 알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마침 독립운동을 하던 김사용씨를 만나 총탄 제거 수술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 이때 스님은 마취를 거절하고 수술을 받아 의사가 “사람이 아니라 활불(活佛)”이라며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만해스님은 민족 지사(志士)들과 돈독한 교류가 있었다. 정인보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으니, 조선 청년은 만해를 배우라”고 했다. 박고봉(朴古峰)스님도 “한용운은 조선만이 아니라 세계의 한용운”이라고 했다. 홍명희 선생은 “(조선의)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하니, 만해 1인을 아는 것은 1만 명을 아는 것 보다 낫다”고 극찬했다.

 

○…“이놈아 잘 들어라. 세상에 났으면 사람 노릇 제대로 해야 한다. 사람의 도(道)는 정의와 양심이다.” 조선청년을 학병(學兵)으로 강제동원하려고 혈안이 됐던 총독부가 조선인 고위 관료를 보내 지지연설을 해달라고 회유하자 만해스님은 벼락같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너희 같은 놈들은 조금만 이익이 있으면 양심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짐승 같은 짓을 하지만 나는 죽어도 못한다. 돌아가 총독 놈에게 나를 잡아다 죽이자고 해라.” 만해스님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 조선인 고위관료는 “노약자이며 병이 있어 출입도 못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만해스님은 <불교(佛敎)> 발행인겸 사장을 지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 원고 집필은 물론 잡지 발송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아무 일도 없으면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워 그것을 꼬아 노끈을 만들었다.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에서 일 할 때도 마찬가지. 이 같은 스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신간회 운동도 참선식(參禪式)으로 한다”며 놀랐다. 또한 스님은 ‘소화 몇 년’이라고 쓰인 공문과 봉투를 모두 모아 불태운 후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하니 가슴이 시원하다”고 했다.

 

○…만해스님은 “왜놈들을 보기 싫다”며 북향(北向)으로 지은 심우장(尋牛莊)에 머물렀다. 당시 심우장 모습은 김관호 선생이 쓴 ‘심우장 견문기’에는 잘 묘사되어 있다. “선생의 신옥은 송림(松林)에 숨은 산방인데 매우 한적하고 생활은 청빈했다. 정원에는 많은 화초를 재배하여 완상(玩賞)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수식한 향목(香木) 1주(珠)는 금일까지 생장하니 기적이다. 문비(門扉, 문짝)에는 심우장이란 전패(篆牌)를 붙였는데, 오세창 옹의 글씨이고 서재에는 이당 김은호씨 작(作) 포대화상 화폭과 일주 김진우씨 작의 죽화폭(竹畵幅)과 우당 유창환씨와 석정 안종원씨의 각액자(各額子) 화폭(畵幅)이 걸려 있었고 장서(藏書)는 중국판 불경 등 합수(合數) 백권(百券)정도였다. 선생의 일과는 참선, 간경, 집필로 가위(可謂,한마디로 하면) 한중망(閑中忙)이었다.”

 

○…스님은 민초(民草)들에게는 한 없이 자애로웠다. 심우장에는 항일운동에서 남녀 간의 애정문제까지 대소사를 상의하려고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스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어떤 길을 가야할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어느 날 강제 징용된 외아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 어떤 부인이 찾아왔다. 이에 스님은 “오늘부터 마음을 안정하고 모든 힘을 다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면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모자가 찾아와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심우장에 머물던 만해스님은 생활이 너무 궁핍해 몸이 허약해졌지만 병원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스님은 1944년 6월29일(음력 5월9일) 열반에 들었다. 지인들은 혹시 회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4일 간이나 그대로 모셨다. 체온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얼굴도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마치 잠자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결국 4일 만에 김병로 선생이 조문을 왔다가 “무더운 날씨에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된다”며 여러 사람과 상의 한 후 장례를 치렀다. 다비를 했는데 신기하게도 치아는 타지 않았다. 스님 법체는 망우리 묘역에 안장했다. 당시 가난한 만해스님의 장례는 지인 150여명의 도움과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이 낸 거액의 부조로 치를 수 있었다.

 

 

■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행장 ■

 

만해스님은 1879년 7월20일(음) 충청도 홍주목 주북면 옥동(지금의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한응준 선생과 모친 창성 방씨의 둘째 아들로 속명은 은 유천(裕天), 자(字)는 정옥(貞玉)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8세에는 향숙(鄕塾)에서 숙사(塾師)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19세기말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고 출가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4세되던 해에 설악산 백담사 주지 연곡(蓮谷)스님을 은사로 사문이 됐다. 이때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이후 건봉사 만화(萬化)스님 법을 이어 법호를 용운(龍雲), 아호(雅號)를 만해(卍海)라고 했다.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
수행과 독립운동 병행

 
백담사와 오세암 등에서 스님은 불교경전과 외전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연곡스님이 전해 준 <음빙실문집>과 <영환지략>은 큰 영향을 끼쳤다. 스님은 경성 청진동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해 인재를 양성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불교를 구하기 위해 영호(暎湖).진응(震應).금봉(錦鋒)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 운동을 전개했다. 그뒤 만주를 돌아본 후 다시 백담사에 머물게 된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며 ‘신불교운동’을 제창했다. 이후 경성에서 <유심>을 창간했고, 1919년 3.1 독립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1926년 근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스님은 1944년 6월29일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66세, 법납 40세. 만해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정인보 선생은 “풍난화(風蘭花) 매운 향기 당신에게 비할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라는 애도시를 지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 등이 만해스님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471호/ 2008년 10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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